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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1차 임시전국대의원대회에서 윤석산 신임교령 선출제 41차 임시전국대의원 대회에서 신임 교령으로 선출된 윤석산 당선자는 교령으로 뽑아준 대의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지난 5월 9일 오후 1시 중앙대교당에서 재적 대의원 169명 중 139명이 참석하여 성원되었고 김성환 연원회장이 임시의장, 선우철수 종의원의장이 임시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원선출은 무기명, 무입후보, 비밀투표를 통해 교령을 선출하였다. 교령 등 신임 집행부의 임기는 2025년 3월까지 박상종 전 교령의 잔여임기이다. 교령 선출에는 129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1차 투표(윤석산 68표, 박차귀 50표, 이영노 9표, 김점례 1표, 주선원 1표) 후 박차귀 후보, 이영노 후보 등이 사퇴하여 윤석산 후보가 새로운 교령으로 당선되었다. 윤석산 교령당선자는 이범창 대의원을 종무원장으로 지명하여 대회에서 인준받았다. 이어, “용시용활의 정신으로 스승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읽고 알 수 있게 정리하여 올바르게 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세상에 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습니다. 실천과제로써 현기사와 천도교연구소의 기능을 활성화하고 수도원과 교구를 적극 지원하며 연원회의 교화기능과 연구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숙의하여 실질적인 교화 정신교육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한울님의 무극대도가 스승님에 의해 밝혀진지 165년, 우리 후학들은 스승님들께서 밝혀놓으신 무극대도의 진리를 세상에 펴고 실천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천도교가 이 세상에 존립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스승님의 가르침인 한울님의 무극대도가 펼쳐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을 기울입시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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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동학어린이날 행사 동심꽃 한마당세계 최초의 어린이날은 1922년 5월 1일 소파 방정환을 중심으로 하여 천도교청년회에서 시작했다.2024년 지난 5월 1일, 오후4시부터 7시까지 그 첫 번째 어린이날의 의미를 새기며 용담정과 동학교육수련원에서 어린이와 다시어린이(어른)가 함께 <동심꽃 한마당>으로 동심을 회복하는 새날을 열었다. (사)경주동학역사문화사업회가 중심이 되어 방정환배움공동체, 한살림경주, 동학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세 단체가 공동주관하였다. 먼저 용담정에서 어린이와 다시어린이가 5월의 초록 용담정 숲을 산책하며 ‘방정환’,‘동심꽃’,‘어린이’로 삼행시를 쓰고, 나무방울에 서로의 얼굴을 그리고, 어린이 말꽃을 표현하며 달달콩을 먹고, 맑은물에 마음을 담은 뒤 마주 보고 큰절을 하였다.동학교육수련관으로 내려와서 체험놀이와 공연관람을 하였는데, 경주동학역사문화사업회에서는 자연물과 구슬로 마음팔찌 만들기, 방정환배움공동체에서는 풀과 나뭇가지 등 자연물 붓으로 자유롭게 그림그리기, 한살림경주에서는 샌드위치 만들기와 어린이 홍삼액을 제공하였다. 공연은 방정환선생의 동화 중 ‘4월 그믐날 밤’과 ‘시골쥐의 서울구경’을 은행나무어린이도관 선생님들이 빛그림으로 귀맛나게 보여주었다.‘우창수와 개똥이들’은 참가자들의 마음을 열어주는 노래로 참가자들이 감동하고 공감하는 무대를 펼쳐주었습니다. 공연 마지막에는 참가자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행사를 주최한 관계자는 “동심꽃 한마당을 응원하며 정성 보태주신 천도교 경주교구와 교인들, 용담교구와 교인들, 부산남부교구, (사)경주동학역사문화사업회 이사님들, 어린이홍삼을 제공해준 가림다마을영농조합(도상록)에 고맙절 올립니다. 경주와 인근지역에서 참여해준 시민들께도 고맙습니다. 경주동학역사문화사업회는 방정환배움공공체, 한살림경주와 함께 동심꽃이 활짝 피어나는 세상을 소망하며 <동심꽃 한마당>을 펼쳐 나아가겠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사진 및 자료제공 : 최경미_경주동학역사문화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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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한울학교, 어린이와 함께수원교구 어린이 지도교사(초등 및 유치원 교사)들이 유소년과 학생들을 위해 운영해오던 경기한울학교가 개최된다. 이번에는 천도교대학생단에서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서울, 경기 인근 교구의 어린 한울님들을 위해 마련된 이번 행사는 5월 18일부터 19일까지 1박 2일에 걸쳐 진행되며, 아이스 브레이킹을 시작으로 자연과 교감하는 숲 체험, 자연과 함께하는 미술놀이, 몸으로 놀아요, 보물 찾아 삼만리, 우리끼리 시일식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서울, 경기 인근 교구의 도가에서 많은 관심과 참여가 기대된다. 웹포스터에 안내된 연락처로 이름/나이/교구/거주지역/보호자 번호를 문자 메시지로 신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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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을 향해 새로운 문을 연 사람, ‘한울사람 손병희’ 공연의암 손병희 성사가 태어나 자란 충북 청주에서 선생의 삶을 그린 음악극 '한울사람 손병희'가 제작되어 무대에 올랐다. 종교지도자, 독립운동가, 교육가 등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다 순국한 의암 손병희 성사의 일대기가 음악극으로 재현되었으며 청소년부터 어른까지 전세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였다.특히 올해는 의암 성사가 일제강점기에 국권회복을 위해 민족대연합을 통해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서 3·1혁명을 주도해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지 105주년을 맞아 그 의미가 더 크다. 이번 공연은 의암 선생의 일대기를 단순히 나열하지 않고 의암 선생이 걸어온 길, 사람 사는 세상의 닫힌 문을 열려 했던 100년 전 사람들의 극진한 삶을 표현하는 음악극이다. 이번 공연은 3.1운동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 '의암 손병희'를 넘어 동학혁명의 지도자로서 전봉준과 형제의 연을 맺고 동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갔던 인물로서, 그보다 앞서서는 신분의 벽을 넘어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소년 '응구'의 꿈을 그리고 있어 더 의미가 있다. 의암 성사가 꿈꾸던 세상,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한울사람 손병희’ 출연진은 신태희(손병희 역), 이상범(최시형 외), 홍정연(주옥경 외), 장재영(이용구 외), 진향래(조화정 외), 이예은(삼식이 외), 진성호(이등박문 외), 최은성(손응구 외), 한명일(전봉준 외) 등이다. 작품의 각색 및 연출 겸 전봉준 역할을 맡았던 온몸 주식회사 한명일 대표는 이 작품에 대해 '100년 전 이 땅을 다녀간 사람들의 정성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작품을 소개한다. 한명일 대표에 따르면 이 작품은 파란만장한 의암 성사의 일대기를 단순히 나열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사람 사는 세상의 닫힌 문을 열려고 했던 사람들, 그 중심에 서 있던 의암 성사의 삶을 담아내고 싶었다고. 심수영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기억하자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새 세상의 문을 열고자 했던 갑오년의 그 날과 기미년의 그 날을 산 사람들을.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들은 실패한 것이 아니리라."라고 밝혔다. 음악극 '한울사람 손병희' 무엇을 담아냈나 소년 손응구의 문-1861년 청주 금암리에서 태어난 손응구는 귀천빈부 적서노주의 차별, 그 벽들이 사라지는 세상을 꿈꿨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동학이었다. 동학은 응구에게 새 세상으로 가는 문이었다. 청년 손병희의 문-해월 최시형 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새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1894년 갑오년 녹두장군 전봉준과 의형제를 맺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로서 나아가지만 전국의 수많은 동학군들은 녹두꽃으로 스러진다. 이상한 나라, 이상헌의 문-'이상한 나라'를 떠나 다른 '이상한 나라'로 건너간 손병희 성사는 '이상헌'으로 불린다. 갑오년의 동지들, 의로운 맹세를 가슴에 품는다. 3.1만세운동, 의암의 문-1906년 일본에서 돌아온 의암 성사는 교단을 정비하고 천도교로 개칭한다. 천도교는 학교를 세우고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여성운동과 어린이운동을 펼친다. 새로운 독립의 문을 열기 위해 마침내 그날, 기미년 3월 1일이 온다. 의암 성사가 태어나 자란 청주에서 의암 손병희를 만나다 이 작품은 청주시,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의 주최로 무대에 올랐다. 청주민예총과 '온몸'에서 주관하였다. 청주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열린 이 공연에는 음악, 미술, 영상 다양한 장르와의 콜라보레이션이 돋보인다. 지역에서 이러한 대작이 무대에 오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이 지역의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기반으로 제작되는 것은 어쩌면 책무처럼 지역 예술가들에게 주어지기도 했다. 왜 의암인가, 왜 동학인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6인이 이 지역 출신이라는 점에서 충북 지역은 3.1운동과 관계가 깊다. 그보다 앞서 1893년 대규모 집회와 동학혁명의 사실상 마지막 대규모 전투라고 할 수 있는 `북실 전투지`이며 동학교단의 중심지였던 보은 장내리는 대도소가 있던 지역이기도 하다. 해월 최시형 신사는 1892년 12월 6일 보은 장내리에 교조신원운동에 필요한 지휘본부인 도소(都所)를 설치했다. 이 때부터 갑오년 내내 장내리 도소는 동학교단의 본부로 활용되는 동시에 혁명운동의 저수지 역할을 했다. ‘메이드인 청주’ - 한울사람 손병희 문화도시 청주를 대표할 문화예술 콘텐츠를 발굴하는 ‘메이드인 청주’는 청주의 기억과 기억을 소재로 문화도시 청주만의 대표 문화 콘텐츠를 발굴·제작하기 위해 기획한 지원사업으로 음악극 '한울사람 손병희'는 지속·집중육성 분야의 선정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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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경기한울학교수원교구 어린이 지도교사(초등 및 유치원 교사)들이 유소년과 학생들을 위해 운영해오던 경기한울학교가 개최된다. 이번에는 천도교대학생단에서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서울, 경기 인근 교구의 어린 한울님들을 위해 마련된 이번 행사는 5월 18일부터 19일까지 1박 2일에 걸쳐 진행되며, 아이스 브레이킹을 시작으로 자연과 교감하는 숲 체험, 자연과 함께하는 미술놀이, 몸으로 놀아요, 보물 찾아 삼만리, 우리끼리 시일식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서울, 경기 인근 교구의 도가에서 많은 관심과 참여가 기대된다. 웹포스터에 안내된 연락처로 이름/나이/교구/거주지역/보호자 번호를 문자 메시지로 신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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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3회 어린이날 행사,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천도교중앙총부는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올해로 103번째 어린이날 행사를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라는 슬로건으로 개최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는 매년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주최해왔으며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 슬로건으로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개최하는 어린이날 행사이다. 1922년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을 만들고 어린이 운동을 주도했던 천도교에서 103회째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어린이들을 위해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를 성대하게 열었으며, 오전 11시부터 진행된 어린이날 시일식에는 특별히 어린이가 직접 집례와 경전봉독을 맡아 진행하였으며 이재선 천도교청년회장의 설교, 주용덕 교령대행의 축사가 이어졌다. 집례를 맡은 정연서 어린이는 “할머니를 따라 이곳에 와봤는데 직접 집례를 해보니까 재미있고 또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여기 천도교중앙대교당 너무 멋져요. 방정환선생님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선생님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아저씨 같아요. 친구들 만나서 같이 체험놀이 하니까 너무 신나요”라고 소감을 말했다. 주용덕 교령대행은 축사를 통해 “어린이날은 어린이의 존엄성과 지위 향상을 위해 제정됐습니다. 어린이라는 단어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처음 사용했으며, 어린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우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922년, 천도교소년회에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한 후 1923년 5월 1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첫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1975년에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습니다.”라고 밝히며 어린이날을 축하했다. 이재선 천도교청년회장은 설교를 통해 “어린이날은 미래의 주인이 온전한 한울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이들이 함께 기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존대하고 한울님처럼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린이날 기념식에는 조이결, 장채원 어린이가 ‘어린이선언문’을 낭독하였다. 2부 축하공연은 김교영 어린이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역사어린이합창단, 역사청소년합창단의 연합공연으로 ‘형제별, ’잘 가거라 열 다섯 살아‘ ’늙은 잠자리‘, ’눈오는 새벽‘, ’산길‘, ’귀뚜라미‘ 등 방정환 선생의 동시에 곡을 붙인 동요들과 함께 했다. 이어 윤석중 작사, 윤극영 작곡의 ’어린이날 노래‘ 등을 불러 어린이날의 의미를 더했다. 역사어린이청소년합창단은 역사음악연구소 산하의 합창단이며 2003년에 창단되어 활동하고 있다. 어린이날을 맞아 40여 명의 역사어린이청소년합창단이 공연에 함께하였으며, 박용진 역사음악연구소장은 “의미있는 행사에 어린이들과 공연을 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방정환 선생님의 노랫말에 곡을 붙여 함께하게 되어 어린이들도 참 신나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2부 사회를 맡은 김교영 어린이는 "작년에 이곳에서 믿음상을 받았어요. 오늘 2부 사회자로 이자리에 서게 되어 기쁩니다. 어린이날은 늘 신나는 날인데 오늘은 사회자의 역할도 하게 되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행사에는 천도교대학생단 및 봉사자들도 함께했다. 인형만들기, 팔찌염주만들기, 모형 대교당 만들기, 비누방울놀이 등의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어린시절부터 부모님을 따라 천도교대교당에 왔던 박대현 동덕은 어린이날 봉사활동을 함께하며 “어릴 때는 많은 어린이들이 이 행사에 참여했는데 어른이 되어 함께하고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청년이 되어 이 자리에 왔는데 동생들에게 더 많은 걸 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린이날은 일제하에서 소년운동을 벌이던 ‘천도교소년회’를 중심으로 제정이 이뤄졌다. 방정환 선생은 천도교 3세 교조 의암 손병희 성사의 사위로 독립운동가이자 ‘어린이’ 잡지를 창간한 아동문학가로 어린이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한편 제2회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는 103년 전 어린이날을 만들고 102년전 첫 어린이날 행사를 개최했던 역사와 천도교 교리에 따라 사회적 실천으로서 행한 어린이운동을 계승해가고 있다. 아래는 주용덕 교령대행의 축사 전문이다. 모시고 공경합니다. 오늘은 미래 사회의 주역인 어린이들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103회째 맞는 어린이날 이자, ‘제2회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 기념행사가 열리는 날입니다. 어린이날을 맞은 전국의 천도교 어린이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비가 와서 마음이 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어린이들이 즐겁고 행복한 날이 되어야 합니다. 맑고 고운 눈빛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우리 어린 한울님…! 오늘, 자유롭게 꿈을 펼칠 수 있는 행복한 시간 보내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날은 어린이의 존엄성과 지위 향상을 위해 제정됐습니다. 어린이라는 단어는 아동 문학가이신 소파 방정환 선생이 처음 사용했으며, 어린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우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922년, 천도교 소년회에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한 후 1923년 5월 1일 천도교 교당에서 첫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1975년에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어린이날을 제정하게 된 배경은 해월 최시형 신사께서 “어린아이를 때리지 말라.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라.”라고 한 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어린이 헌장에도 “어린이는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 나갈 새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날은 모든 국민과 부모들이 언제나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어린이가 행복하고 즐겁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은 우리의 희망이요, 미래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오늘 하루 마음껏 즐기며, 꿈과 희망이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심고 합니다. 다시 한번 어린이날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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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종교협의회 동학혁명기념관 방문5월 1일(수)~5월 3일(금) 사단법인 민족종교협의회가 2박 3일간 전북지역 성지순례를 하였다. 이번 성지순례는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한재우 사무총장이 인솔하였으며, 이재선 천도교청년회장이 전반적인 답사를 진행을 하였다. 또한 천도교에서는 박차귀 민족종교여성회장(천도교부산시교구장), 박징재 천도교여성회장, 고윤옥 천도교여성회부회장 등 천도교여성회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장인갑 천도교부산대동교구장, 이길호 천도교전주교구장(기념관, 전주교구 동참) 등 많은 천도교 교역자들이 참여했다. 동학·천도교 관련 답사는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천도교직접도훈, 세계종교평화협의회 천도교대표이사)이 해설을 하였다. 이번 성지순례는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120여명이 전북특별자치도 내 민족종교 성지순례를 하였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5월 1일에는 전북 남원 갱정유도회본부와 만인의총, 그리고 교룡산성 내 천도교 성지 은적암을 답사했다. 2일에는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천도교전주교구를 중심으로 동학·천도교 유적지 풍남문과 전라감영 선화당, 그리고 경기전 등을 답사하였다. 또 증산도 덕진도장과 원평 증산법종교를 방문하였다. 3일에는 익산 원불교중앙총부 방문을 끝으로 전북지역 성지순례를 마감했다. 이번 <2024 민족종교 성지순례>는 지난 4월 13(토)~4월 14일(일) 이틀간 사단법인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전북 전주, 남원, 익산, 김제 일대에서 2024 제1차 마음 쉼 힐링캠프 즉 성지순례 사전답사에 이어 제 2차 성지순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은 전주권 풍남문, 전라감영, 전주한옥마을, 동학혁명기념관 등 동학·천도교 관련 유적지 탐방에서 자세한 해설을 하였다. 이윤영 관장은 해설을 통해 "전주 풍남문은 당시 호남제일성으로서 동학농민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때 서문과 함께 이곳 남문을 통하여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장군 등이 무혈입성 즉 피 흘리지 않고 함락한 역사적인 건물이자 장소입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전주성을 모두 헐었는데 유일하게 풍남문만 남았고, 전주성을 헐은 돌로 전동성당을 건축할 때 일제에 의하여 성당 밑에 깔아 동학정신을 짓밟게 하였다는 즉 민족정신을 짓밟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전라감영 선화당은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전봉준 동학군 총대장과 김학진 전라감사와의 회담에서 전라도 일대에 동학집강소 설치와 폐정개혁안 실현을 담판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와 동아시아 최초로 사람이 하늘인 민주자치시대를 연 유서 깊은 곳입니다. 이곳에 「동학농민혁명과 선화당」이란 특별한 안내판 있는데,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의 주선으로 2022년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94년 동학혁명1백주년을 기념하여 천도교에서 정부지원금과 천도교인 성금으로 기공하였으며, 완공은 1995년 5월 31일 동학혁명군 전주성 점령일을 기해 개관식을 하였습니다. 동학혁명기념관 전시관은 동학사상부터 동학농민혁명 전체 과정은 물론 3.1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의병운동, 출판문화운동, 여성운동, 어린이운동 등 우리나라 근대사 1백년의 역사가 전시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윤영 관장은 동학혁명기념관 내 전시관 해설 및 강의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전반적인 설명과 대신사 수운 최제우, 해월신사 최시형, 의암성사 손병희, 춘암상사 박인호 선생으로 이어지는 동학사상과 천도교 핵심 교리인 侍天主(시천주) 人乃天(인내천) 事人如天(사인여천) 物物天事事天(물물천사사천) 등을 쉽게 풀어 설명했다. 또한 소파 방정환 선생이 천도교 제3세교주 손병희 선생의 사위로서 “어린이도 한울님과 같은 존엄한 존재이니, 한울님 모시듯 하라.”는 제2세교주 해월신사의 말씀에 근원하여 우리나라 어린이날이 탄생되었다고 말하였다. 이어 “동학농민혁명의 현대적 계승은 평화적 남북통일이며, 천도교의 교리 중에 자연만물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한울님과 한 동포라는 생명사상에 의해 지구촌의 기후문제를 해결하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전쟁은 일제의 침략에 맞선 항일운동이자 독립운동이었으므로, 동학의병군은 독립유공자 자격이 있을뿐더러 반드시 서훈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행사 주최인 사단법인 한국민족종교협의회는 현재 천도교, 원불교, 수운교, 선교유지재단, 갱정유도, 태극도, 증산도, 대순진리회, 증산법종교, 순천도, 청우일신회, 경천신명회 등 12개 종단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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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구 창립 43년, 다음 세대들이 교구의 미래를 이어갈 수 있도록한강교구(교구장 주용수)은 지난 4월 28일 교구창립 43주년을 맞이하여 30여명의 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기념식을 가졌다. 한강교구는 지난 포덕 122년(1981) 5월 10일 교호수 58호 교인수 81명으로 시작하여, 90년대에는 교호수 223호 교인 350명으로 성장하며 교인들이 교단내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고, 포덕 148년(2007년) 3월 17일 현 교당으로 이전한 후 6년 뒤에는 교구의 오랜 숙원이었던 현 교당을 매입하여 교인들의 수도와 포덕교화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주용수 교구장은 기념사에서 교구창립 이래 몇 차례의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여러 동덕님들의 관심과 노력, 헌신이 있었기에 자체 교당을 확보하면서 교구를 굳건하게 유지하여 올 수 있었다면서, 다시 한번 마음가짐을 가다듬고 다음 세대들이 교구의 미래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함께 지혜를 모으고 정성을 다하자고 하였다. 한편 이번 창립43주년 기념식은 주영준 경리부장이 집례를 맡았으며, 5월에 예정된 많은 행사들로 인해 당초 창립일인 5월 10일보다 앞당겨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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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선포일 기준 어린이날 103회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천도교중앙총부(이하 천도교)는 5월 5일(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어린이날 행사인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를 개최한다. 올해는 천도교소년회가 어린이인권선언을 한지 101년째 되는 해다. 천도교소년회는 1922년 세계 최초로 ‘어린이 날’을 만들고, 이듬해인 1923년에는 세계 최초로 ‘어린이 인권 선언’을 주도했다. 천도교소년회는 1921년 5월 1일 어린이의 인격옹호, 정서 함양, 건전한 사회성 함양을 목적으로 소춘 김기전, 소파 방정환, 현파 박래홍 등의 천도교 청년들이 중심이 돼 만든 천도교청년회 산하단체다. 당초 천도교는 어린이들을 위한 소년부를 설치했었는데, 소년부의 부원이 늘어나자 천도교소년회가 조직됐다. 그동안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들을 위한 운동회와 동화회, 토론회, 등산회 전람회 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왔다. 창립 1주년을 맞은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정하고 어린이를 위한 행사를 개최했다. 첫 어린이날 행사는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기념식, 선전지 배포, 시가행진, 축하회로 진행됐으며 이는 이후 어린이날 행사의 기본틀이 됐다. 또한 어린이를 위해 잡지 ‘어린이’도 창간했다. 동화와 동시, 민담, 소설, 생활 상식, 특집 기사, 퀴즈 등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많아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1925년경에는 3만부의 판매 부수를 자랑할 정도였다. 잡지 ‘어린이’는 일제 강점기 최장수 어린이 잡지로 어린이운동을 대중화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특히 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4월 17일 불교소년회, 조선소년군 등 소년운동단체와 연대하기 위해 조선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고 같은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다시 정했다. 그리고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거행된 어린이날 기념식에서 ‘어린이인권선언’의 효시라 할 ‘소년운동 선언문’이 발표됐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이 같은 인식은 천도교의 종지인 ‘시천주’와 ‘개벽’ 사상에서 비롯됐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라는 시천주 사상은 시대를 앞서는 근대적 만민평등사상이기에 조선의 신분제를 부정하고, 남녀차별에 반대하며, 세상을 개벽하고자 했다. 이것이 억압하는 이들에 맞서 동학혁명을 일으키고, 3.1혁명을 일으킨 원동력이 됐으며, 천도교는 믿기만 하는 종교가 아니라 행하는 종교인 만큼 1920년대에 농민, 노동, 학생, 상민, 청년, 소년, 여성의 7개 부문에서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올해는 어린이날 102주년, 어린이인권선언 101주년이 되는 해다. 이번 어린이날 축하행사인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는 소파 방정환 선생과 천도교소년회 활동가들의 어린이인권선언에 깃든 만민평등과 인권존중의 의미를 널리 알리고,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5월 5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오전 10시부터 진행된다. 이날 행사는 어린이날 기념식과 특별체험부스를 운영하며 어린이날 선물을 증정한다. 천도교중앙총부는 “1920년대 천도교가 소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전국적인 어린이 운동을 전개해 나간 것처럼 어린이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해왔다.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 행사를 앞두고 기념식과 다양하고 재미있는 체험부스에 많은 어린이들이 참여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소년운동 선언문 1.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예우를 허라게 하라. 2.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3.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할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한편, 어린이날 다음 날인 5월 6일 오후 2시부터는 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하고 투데이스타, 한국음반산업협회, 엔터원에서 후원하는 <방정환동요제>가 중앙대교당에서 개최된다. 올해 시범적으로 개최되는 방정환동요제는 동요보다 트롯에 물들어가는 어린 동심을 회복하는 여정의 시작이며, 향후 교단 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확대 개편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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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1922년 5월 1일, 최초의 어린이날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첫 어린이날 행사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크게 열었다. 이에 1년 앞서 어린이날이 제정된 1922년 5월 1일을 기억하자. 102주년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과거의 오늘,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린이날을 선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919년 3·1혁명 당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받고 1주일만에 석방된 방정환 선생은 1920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동경 도요대학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한 선생은 어린이들의 인권신장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다.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한 선생은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한다. 소춘 김기전 선생은 1921년 4월부터 천도교 청년회 소년부를 특설해 5월에는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총재를 역임하며 박내홍, 방정환 등과 함께 어린이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22년 어린이날 제정, 세계 최초의 어린이헌장인 '소년운동의 기초사항'을 선포하였다. 옛 기사로 보는 오늘 1922년 5월 1일, 첫 어린이날이 제정된 날이다. 이날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의 날' 취지와 선전문, 거리 행렬과 자동차 선전대, 저녁의 축하기념식과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1921년 5월 1일 창립된 천도교소년회 1주년을 기념해 1922년 5월 1일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였다. 천도교 청년들은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라'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를 잘 키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는 「십년 후 조선을 려慮하라」, 「조선 초유의 소년일」, 「가로로 취지 선전」, 「조선에서 처음 듣는 어린이의 날」 등의 기사와 선전지를 소개하였다. 십년 후 조선을 여하라 십년 후 조선을 여하라 조선 소년 운동의 시작으로 금일 천도교 소년회의 활동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 과거와 현재는 소용이 없고 그들에게는 오직 장래가 있을 뿐이다. 더욱이 조선사람은 과거와 현재에 무엇을 가졌는가. 설령 지난 일과 당장 눈앞의 일이 화려하다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으리오. 우리는 다만 내일과 내년의 화려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따라서 새로운 살림을 부르짖는 우리 사회도 장래를 위하여 사는 것이오, 장래가 곧 우리가 춤출 때라는 것은 누구나 바라고 믿는 바이다. 한 나라 한 사회나 한 집안의 장래를 맡은 사람은 누구인가. 곧 그 집안이나 그 사회나 그 나라의 아들과 손자일 것이다. 장래에 희망을 두고 어린이에게 장래를 맡기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어찌 어린이의 일을 등한시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살림을 부르짖는 우리 사회에서는 과연 아들과 손자를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옛날 일은 지나간 일이라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수년 동안 우리의 학부형은 그 자손을 위하여 이전에는 없던 애를 써왔다. 다시 말하면 그 자제를 가르치기에 열심히 하며 여러 가지로 자손을 인도하는 데 노력한 것은 근래의 교육열과 향학열이 증명하는 바다. 이는 실로 경하할 만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학부형 가운데에는 배우고자 하는 자식을 막아서 한강에 빠져 죽게 만드는 완고한 일이 없지 않다. 이러한 일을 볼 때 뜻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한숨을 쉬지 않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오. 이에 자극을 받은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를 위한 부모의 도움이 더욱 두터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을 기회로 삼아 ‘어린이의 날’이라고 이름하고 “항상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쓴 네 가지의 인쇄물을 시내에 배포하며 소년회원이 거리마다 늘어서서 취지를 선전했다. 이러한 일은 조선 소년 운동의 처음이라 할 수 있으며, 다른 사회에서도 많이 응원하여 “조선사람의 10년 후의 일”을 위하여 노력하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1일, 「10년 후 조선을 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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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1922년 5월 1일, 최초의 어린이날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첫 어린이날 행사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크게 열었다. 이에 1년 앞서 어린이날이 제정된 1922년 5월 1일을 기억하자. 102주년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과거의 오늘,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린이날을 선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919년 3·1혁명 당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받고 1주일만에 석방된 방정환 선생은 1920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동경 도요대학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한 선생은 어린이들의 인권신장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다.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한 선생은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한다. 소춘 김기전 선생은 1921년 4월부터 천도교 청년회 소년부를 특설해 5월에는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총재를 역임하며 박내홍, 방정환 등과 함께 어린이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22년 어린이날 제정, 세계 최초의 어린이헌장인 '소년운동의 기초사항'을 선포하였다. 옛 기사로 보는 오늘 1922년 5월 1일, 첫 어린이날이 제정된 날이다. 이날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의 날' 취지와 선전문, 거리 행렬과 자동차 선전대, 저녁의 축하기념식과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1921년 5월 1일 창립된 천도교소년회 1주년을 기념해 1922년 5월 1일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였다. 천도교 청년들은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라'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를 잘 키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는 「십년 후 조선을 려慮하라」, 「조선 초유의 소년일」, 「가로로 취지 선전」, 「조선에서 처음 듣는 어린이의 날」 등의 기사와 선전지를 소개하였다. 십년 후 조선을 여하라 십년 후 조선을 여하라 조선 소년 운동의 시작으로 금일 천도교 소년회의 활동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 과거와 현재는 소용이 없고 그들에게는 오직 장래가 있을 뿐이다. 더욱이 조선사람은 과거와 현재에 무엇을 가졌는가. 설령 지난 일과 당장 눈앞의 일이 화려하다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으리오. 우리는 다만 내일과 내년의 화려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따라서 새로운 살림을 부르짖는 우리 사회도 장래를 위하여 사는 것이오, 장래가 곧 우리가 춤출 때라는 것은 누구나 바라고 믿는 바이다. 한 나라 한 사회나 한 집안의 장래를 맡은 사람은 누구인가. 곧 그 집안이나 그 사회나 그 나라의 아들과 손자일 것이다. 장래에 희망을 두고 어린이에게 장래를 맡기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어찌 어린이의 일을 등한시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살림을 부르짖는 우리 사회에서는 과연 아들과 손자를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옛날 일은 지나간 일이라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수년 동안 우리의 학부형은 그 자손을 위하여 이전에는 없던 애를 써왔다. 다시 말하면 그 자제를 가르치기에 열심히 하며 여러 가지로 자손을 인도하는 데 노력한 것은 근래의 교육열과 향학열이 증명하는 바다. 이는 실로 경하할 만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학부형 가운데에는 배우고자 하는 자식을 막아서 한강에 빠져 죽게 만드는 완고한 일이 없지 않다. 이러한 일을 볼 때 뜻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한숨을 쉬지 않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오. 이에 자극을 받은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를 위한 부모의 도움이 더욱 두터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을 기회로 삼아 ‘어린이의 날’이라고 이름하고 “항상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쓴 네 가지의 인쇄물을 시내에 배포하며 소년회원이 거리마다 늘어서서 취지를 선전했다. 이러한 일은 조선 소년 운동의 처음이라 할 수 있으며, 다른 사회에서도 많이 응원하여 “조선사람의 10년 후의 일”을 위하여 노력하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1일, 「10년 후 조선을 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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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생명관: 대생명(大生命) (2)(지난 호에 이어) III 해월이 ‘갓난아기의 마음(赤子之心)’이라고 한 이 마음이 바로 내 안으로 두번째 내려온 ‘신령(神靈)’이다. 외유기화에 의하여 마련된 유기체적 몸에 신령이 내려온 것이 바로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본래 영이라 할 수 있다. 즉, 마음이란 내 몸에 내려온 신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월은 ‘심령(心靈)’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으며 의암은 ‘성령(性靈)’이라는 표현을 애용하였다.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 영은 오직 하나의 영일 뿐이다. ‘신령’, ‘심령’, ‘성령’으로 표현되는 영성은 근대철학에서는 종교영역에서나 다루는 낯선 개념이었다.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현대문명에서 영(靈)은 더욱 생경한 개념일 수 있다. 시대정신에 투철한 현대인을 위하여 영성이 무엇인지 조금 풀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천도교에는 영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개념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풀어서 이해해 보자. “천령(天靈)이 강림하였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가?”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수운은 “무왕불복의 이치를 받은 것”이라고 대답하게 된다. 무왕불복은 수운의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역학(易學)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다”고 해석되는데 이에 대한 적지 않은 기존 논의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거울의 비유로 대신하고자 한다. 신령이란 그 앞에 오는 것을 하나도 예외없이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는 것이다. 이 영성의 거울은 어디 특별히 머무는 곳이 없다(無所住). 특정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곳이나 있지만 상주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역설적 표현으로 들리는 것은 성령 자체의 특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수운은 도는 ‘보려하나 볼 수 없고 들으려 하나 들을 수 없다(視之不見 廳之不聞)’고 하였고, 의암도 성심본체는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고, 물으려 해도 물을 곳이 없고, 잡으려 해도 잡을 곳이 없다’고 표현하였다. 해월은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않는데 이르러야 가히 도를 이루었다 할 것이요(視之不見 聽之不聞 可謂成道也)”라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을 근거로 하여 ‘무극대도’, ‘천도’, ‘성심본체’, ‘영성’은 세상과 사물과 인간을 떠난 초월성으로 이해되지만 ‘적자지심’으로 불리우는 ‘본래의 나’의 마음으로 내려와 임재(臨在)한다. 그러므로 해월은 “한울은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 안에 계신다”고 하였으며, 의암은 성령은 “전부 세간과 합치된 것이요, 세간에 나타난 것(全然合世間的出世間的)”이라고 표현하였다. 수운 또한 ‘여세동귀(與世同歸)’라는 표현으로 천도와 천운은 세상과 더불어 함께 함을 강조하였다. ‘중첩’으로 번역되는 양자역학의 Superposition 개념은 양자뿐만 아니라 영성을 묘사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즉 영성은 특정 위상(位相)을 넘어서지만 세상과 만물 그리고 사람을 떠나지 않고 그 한가운데 중첩되어 있으면서도 보려하나 보이지 아니하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도 없는 무형계라 할 수 있다. 도가의 무(無)나 허(虛), 불가의 공(空) 개념들도 세상과 만물 그리고 사람을 떠난 초월적 절대영역이 따로 있지 아니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나 오히려 니힐리즘처럼 오해되곤 한다. 영성은 ‘새는 하늘을 날지만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도인은 강을 건너지만 물에 젖지 아니한다’라는 비유로 묘사되기도 한다. 천도교사에는 수운이 억수로 오는 빗속에 부친 성묘를 다녀왔지만 갓과 도포가 젖지 아니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해월은 ‘땅을 어머님 살처럼 공경하게 되면 빗속에 진흙길을 걸어도 버선이 더럽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금강경]의 “응무소주생기심(應無所住生其心)”은 부처의 마음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소명해주는 유명한 구절이다. 비어 없는 이 경지에 응하여 마음을 쓰는 것이 바로 부처의 집착없는 마음 씀씀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중생은 비고, 고요하고, 없는 마음에 조응(照應)하여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 물욕, 감정, 집착, 편협함에 사로잡힌 마음을 쓰는 것이 차이점이다. 의암은 [후경2]에서 나의 성품과 나의 마음을 묘사하는 가운데서 ‘항상 머물러 있는 곳도 없다(常無住處)’는 표현을 하였다. 위상과 시간에 매이지 않으므로 해탈의 마음이 되고 자유로운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의암은 [무체법경]에서 “한울님이 반드시 바르게 보이고 바르게 듣는다(天必正示正聞)”고 하였다. 바르게 보인다는 것은 거울처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바르게 듣는다는 것은 ‘한울님은 높으시나 낮은 소리도 다 듣는다는 천고청비(天高廳卑)’의 뜻이라 하겠다. 보이지도 않는 빈 거울이지만 그 앞에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정확하게 비추어주는 성령을 이렇게 말하였다. 의암은 ‘정시정문’을 누구나 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다. “마음이 흰 것을 구하고자 하면 흰 것으로 보이고, 붉은 것을 구하면 붉은 것으로 보이고, 푸른 것을 구하면 푸른 것으로 보이고, 노란 것을 구하면 노란 것으로 보이고, 검은 것을 구하면 검은 것으로 보이느니라.” 그러므로 아득한 고대로부터 성령을 거울에 비유하였다. 성령은 구하는 그대로 주기 때문에 ‘말없고 소리없는 한울님이 가장 무섭다’고 해월은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성령은 특별히 머무는 곳이 없이 어떻게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며 분명하게 들려주는 것일까? 우주를 ‘혼원일기’로 생각하면 자명해진다. 해월은 동양의 전통에서 말하는 ‘귀신, 기운, 음양, 조화는 오직 하나의 기운(一氣)일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우주는 한 기운의 소사요, 한 신의 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만유는 오직 하나의 신, 하나의 기운, 하나의 이치로 꿰뚫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주가 하나의 기운, 하나의 이치, 하나의 몸이므로 어떤 것이 가면 반드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 가더라도 되돌아올 수 없다. 길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되돌아 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는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로 통하기 때문에 생각이든 기운이든 행동이든 일단 촉발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 상대성 우주론이라면 증대되거나 감소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상대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몸과 마음에게는 모든 것들이 상대적일 뿐이다. 중첩과 얽힘이 양자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인 것처럼 정시정문도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개념일 뿐이다. 우주가 하나라는 것은 영의 세계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신령(神靈)은 오직 하나(唯一無二)이기에 신령이 곧 내 마음의 영이자 내 성품의 영이다. 타자성과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性靈)’과 ‘심령(心靈)’은 ‘성령(聖靈)’과 다르다. 성령(聖靈)은 개별적 존재이지만 천도교에서 말하는 신령, 심령, 성령은 오직 유일무이하다. 다시 말하자면 한울님의 성령과 수운의 성령, 해월의 성령, 의암의 성령, 역대 조상들의 성령, 인류전체의 성령이 나의 성령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논의는 [성령출세설]에서 아주 상세하게 개진되어 있다. 의암은 “대신사는 이미 성령으로 출세하셨으니 일체의 물건마다 마음마다 다 이 성령의 출세한 표현이 아님이 없는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만유와 만인을 오직 하나의 성령이 관통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나의 본래의 마음을 신령(神靈)의 강림, 제2의 강령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강령이 되지 않은 마음에게는 심령이나 성령(性靈)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첫 호흡을 할 때 예외없이 신령(神靈)이 내려와 내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심령(心靈)이 자신 안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심령을 믿지 아니하고 키우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심령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해월은 “오직 한울을 양(養)한 사람에게 한울이 있고, 양치 않는 사람에게는 한울이 없다”고 하였다. 수도를 하여 한울님을 키우는 제3의 강령인 ‘각지불이(各知不移)’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이 가장 순수한 영을 타고났지만 우주간의 모든 생명체도 모두 다 이 ‘무량광대’하고 ‘청정무구’한 신령계로부터 마음을 받았다. 수운이 [불연기연]에서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갓난아기가 어머니를 알아보는데 어찌된 일인지, 가난해도 돌아오는 제비는 주인을 알아보아서 그렇게 하는지, 부모를 되먹이는 까마귀가 효도를 알아서 그러한 것인가를 묻고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수운은 [불연기연]의 마지막 구절에서 “조물자에 붙여보면 그렇고 그렇고 그러한 이치”라고 대답하고 있다. 조물자가 곧 성령임을 이해하면 이러한 질문들에 쉽게 답할 수 있다. 갓난아기가 되었던, 제비가 되었던, 아니면 까마귀가 되었던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성령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다면 갓난아기가 방금까지 한 몸이었던 어머니를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제비가 자기 집을 찾는 일도 당연한 일이며, 까마귀가 어미를 먹이는 것도 다 큰 자기가(새끼) 쇠약해진 자기를(어미) 먹이는 것이므로 그렇고 그렇고 그러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신령을 잊거나 잃어버렸다면 이와 같은 앎은 있을 수 없다. 성령이 아직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하나의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자기가 자기를 아는 일에 불과하므로 그렇고 그렇게 알 수 있고 할 수 있게 된다. IV 외유기화라는 제1강령을 통하여 생명체는 우주의 한 기운에 접하여 잉태하여 유기체를 이루고 내유신령이라는 제2강령을 통하여 생명체는 청정무구한 성령의 마음을 온전하게 받는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태어날 때부터 우주기운에 통한 존재이므로 그 우주적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무량광대’하고 ‘청정무구’한 오직 하나의 영성을 자기 마음으로 받았으므로 이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본래의 길이다. 우주적 혼원일기와 본래청정의 영성을 회복하는 길이기에 수운은 ‘천도’라 하였고 내 마음을 통하여 회복하기에 ‘심학(心學)’이라 하였다. 이 본래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는 다음을 기약한다. (끝) *본 글은 2023년 5월 12일/대화아카데미 바람과물연구소, 생명애콜로키움 [종교와 생태문제] 에서 발표하였으며 저자(오문환)의 허락을 받아 게재되었음을 밝힙니다. 글_오문환(정치학박사, 선도사, 영등포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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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생명관: 대생명(大生命) (1)Ⅰ 「동학의 생명평화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2004년에 논의한 적이 있기에 논의범위를 좀 더 종교철학적으로 심화시키고자 한다. 수운 최제우는 한울님과의 대화에서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을 받아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았다고 한다. 주문은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21자인데 그 가운데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해월의 해석을 중심으로 천도교의 생명관을 논하고자 한다. 수운은 모실시(侍)를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로 풀이하였고 해월은 다음처럼 구체화하였다. “안에 신령이 있다는 것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갓난아기의 마음이요, 밖에 기화가 있다는 것은 포태할 때에 이치와 기운이 바탕에 응하여 체를 이룬 것이니라. 그러므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과 「지기금지 원위대강」이라 한 것이 이것이니라.” (“經曰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內有神靈者 落地初赤子之心也 外有氣化者 胞胎時 理氣應質而成體也 故「外有接靈之氣內有降話之敎」「至氣今至願爲大降」是也,” 해월, [영부주문]) 이를 근거로 천도교는 생명체는 두 번의 강령으로 잉태되고 마음을 받아 태어나고 주문수행에 의하여 세 번째 강령으로 영성을 자각하게 된다고 본다. 첫째 강령인 ‘외유기화’에 의하여 포태되고, 둘째 강령인 ‘내유신령’으로 갓난아기가 처음으로 호흡할 때 영이 ‘적자지심’으로 내려온다. 셋째 강령인 ‘각지불이’는 주문수련으로 내 몸과 마음이 영성을 깨달아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난다. 이 세 번의 강령이 이루어지게 되면 사람은 비로소 천주를 자신 안에 온전하게 모신 ‘시천주’ 인간이 된다. 이렇게 한울님을 모신 사람을 천도교에서는 신선(神仙), 신인간(新人間), 신인(神人)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과정으로 대생명이 된다. 이 글은 첫 번째 강령인 ‘외유기화’와 두 번째 강령인 ‘내유신령’을 통하여 천도교의 생명관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생명의 포태가 영(靈)의 강림(降臨)으로 이루어진다는 해월의 설명은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이해되는 의학과는 다른 설명방식이다. 이기(理氣)와 기운(氣運)이 바탕이 되는 질료(質)를 만나서 포태가 된다는 종교철학적 설명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생명의 탄생은 천리(天理)와 천기(天氣)라는 우주적 기운과의 관계맺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점만 분명히 하면 될 듯하다. ‘외유기화’는 ‘외유접령지기(外有接靈之氣)’로도 표현되는데 밖으로 영에 접하는 기운이 있다는 뜻이다. ‘밖에 있다(外有)’는 표현 때문에 영(靈) 또는 지기(至氣)가 마치 시공간적 타자로 보이지만 영과 지기에 열려(開闢) 우주기운이 곧 나의 기운으로 되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지기(至氣)’ 또는 ‘혼원일기(混元一氣)’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음양오행과 같은 기운과 달리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과 접함으로써 생명이 잉태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수운은 ‘음양합덕으로 수백천만물이 화해난다’고도 하지만 ‘외유기화’는 한울님의 기운이 유기적 생명체로 나타나는 것을 서술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생명체의 잉태는 다 한울님 기운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수운의 [불연기연]에 나타나는 우주만유의 알 수 없는 불연에 대한 대답도 외유기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 더 나아가 자연사물까지 모두 다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과 하나로 통해져 잉태되었다는 실상을 통찰한다면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우주생명의 신묘함을 그렇고 그렇게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불연기연]은 황하수가 어찌 성인의 탄생을 알아서 천년에 한번 물이 맑아질 수 있는지 묻고 있다. 그렇지만 황하수도 하나의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의 산물이고 성인의 마음의 탄생도 똑같은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의 소산이라면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즉, 성인의 청정무구한 마음기운도 황하수의 진흙탕 물도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으로 통해져 있으므로 두 기운이 통하여 같아져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량수의 생명체들은 오직 하나의 기운에서 태어났음을 알게 되면 해월의 표현대로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한 동포이고(人吾同胞) 만물과 내가 또한 한 동포(物吾同胞)’라는 점도 스스로 자명해진다. 천리와 천기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초월적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몸과 내 마음에 내려와 있다고 본다면 왜 해월이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시행하였는지도 쉽게 이해된다. 신위(神位)를 마주보는 벽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여 설치하는 이유는 천지정신과 천지기운이 모두 내게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혼원일기, 우주정신, 신령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영의 강림(降臨)이라고 표현하지만 초월적 영이 내려온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잉태 순간에 지극한 한울님 기운과 접하여 자신 안에 모시게 된 것이다. 신위를 자신을 향하여 돌릴 수 있는 것은 물론 한울님 모심을(侍天主) 스스로 깨달은 사람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의암 손병희는 [성령출세설]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신사께서 사람이 곧 한울인 심법을 받으시고 향아설위의 제법을 정하시니 이것은 우주의 정신이 곧 억조의 정신인 것을 표명하심과 아울러, 다시 억조의 정신이 곧 내 한 개체의 정신인 것을 밝게 정하신 것이니라.” 조금 넓혀 표현하자면 개체정신이 곧 우주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 정신은 나의 정신이면서 동시에 ‘천만년 전 사람이나 천만년 후 사람의 정신과 같은 정신’이라고도 말한다. 한울님의 정신기운이 잉태의 순간에 영으로 이미 내 안에 모셔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근본적 동일성령이 천차만별의 인과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생명위기를 실감하는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생명의 우주적 연계성 또는 인드라망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의식이 열렸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천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가야할 길이 아직 멀다. 생명의 그물망을 느껴보고자 한다면 해월의 언행보다 더 좋은 전범(典範)은 없어 보인다. 해월은 베짜는 며느리를 보고 한울님이 베를 짠다고 하였으며,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때리지 말라고 하였으며, 동식물도 다 아끼고 사랑하라고 하였으며, 새소리도 한울님의 소리이며, 나뭇가지도 함부로 꺽지 말라고 하였으며, 어린아이가 나막신을 끌고 가니 가슴에 통증을 느꼈으며, 땅을 어머님 살처럼 여겨 침을 뱉거나 물을 멀리 뿌리지 말라고 하였다. 세상으로 눈을 잠시라도 돌려 보면 현대문명이 어느 곳을 향하여 전력질주하는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방향전환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점을 동학·천도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월은 “궁을이 문명을 돌이킨다(弓乙回文明)”라고 하였다. 궁을은 수운이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영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영부는 말 그대로 신령(神靈)에 그대로 부합하는 형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운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종이 위에 뚜렷한 형상을 그려내어 불에 타서 먹어보니 온갖 질병이 나았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주었더니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도덕을 따르는 사람은 매번 적중하였다고 하였다. 즉 받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해월은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영에 부합하는 마음이라고 하여 “영부심(靈符心)”이라고 하였다. 즉, 병을 치유하는 것은 천령에 부합하는 마음인 것이다. 이 마음이 문명을 대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에 부합하는 마음을 얻는 마음공부가 된다. 놀라운 점은 사람은 태어날 때 이 궁을마음을 타고났다는 사실이다. (계속) *본 글은 2023년 5월 12일/대화아카데미 바람과물연구소, 생명애콜로키움 [종교와 생태문제] 에서 발표하였으며 저자(오문환)의 허락을 받아 게재되었음을 밝힙니다. 글_오문환(정치학박사, 선도사, 영등포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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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일이다105년 전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역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함성소리는 매해 3월이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고동치게 한다. 3.1만세운동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평화로운 항거였으며 3.1정신은 이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루는 근간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3월이면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공적에 비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이 있다. 바로 3.1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하고 자금을 준비하였던 의암 손병희선생이다. 천도교 제3세교조인 의암 손병희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우리나라가 강제로 강탈당하게 되자 10년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해 나가게 된다. 우이동에 땅을 구입해 수련도장인 봉황각을 짓고 전국에 있는 유능한 지도자들을 모아서 독립의지를 확고하게 심어주기 위하여 심신훈련을 하게 한다. 3년에 걸쳐 7차례 483명이 봉황각 연성수련을 통해서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3.1운동때 전국 각 지역에서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지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부구총회를 통하여 결의하고 교호당 10원이상씩 건축성금을 내도록 하였다. 이 자금은 후에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리고 당시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가 적자경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끝까지 폐쇄하지 않고 훗날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전국 37개 대교구로 하여금 등사기를 1대씩 구입하도록 하여 훗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의암 손병희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한 49일 특별기도를 지시하였다. “먼저 보국안민(독립)이 된 다음에야 광제창생 포덕천하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 등 아홉 곳에 대표 기도처를 정하고 각 기도처마다 4명씩 대표를 파견하여 기도식을 지도하게 하면서 3.1독립운동을 위한 전국 교단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그리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와 대연합으로 33인 민족대표를 결성하기에 이르른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전국 조직망을 정비하고 독립자금까지 전담하는 등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지도해 나갔지만 매년 3.1절이 되면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은 미미하게 들리는 듯 마는 듯하다. 또한 천도교의 3.1운동에 대한 역할 또한 알려지기도 전에 잊혀져 가기만 한다.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해야만 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역사는 사라지고 심지어 왜곡되기까지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의 잘못이며 이대로 가다가는 사라지고 왜곡될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세상이 떠들썩 하도록 매해 기억하고 기록하고 또 기념해야 할 것이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는 방법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자. 독일을 예로 들어보자. 독일은 틀에 박힌 상징과 형식이 아닌, 권위적이지도 않고 위압적이지도 않은 형식으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참회하며 가장 예술적으로 역사를 작품속에 표현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살아있는 곳으로 피터 아이젠먼의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1998~2005)는 홀로코스트(Holocaust)로 희생된 600만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고 있다. 다음은 나치의 분서사건 60주년을 즈음하여 독일 베벨광장에 세워진 미하 울만의 「도서관」이라는 작품을 보자. 베벨광장 중심부에 가로120센티미터, 세로120센티미터 크기의 정사각형 투명유리창이 있고 그 지하에 텅빈 직방체 공간이 있다. 이스라엘 예술가 미하 울만의 「도서관」작품이다. 책들의 화형식이 있었던 그 장소의 지하에 설치된 경고의 기념조형물이다. 이처럼 그들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방법으로 문화예술 공간을 이용하고 있다. 문화예술공간은 시민들의 삶속에 스며들고 있으며 그들은 생활속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보고 느끼면서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의암 손병희선생님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_숙현당 정정숙(근현대사미술관 담다 관장, 천도교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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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반역사적인 ‘이승만 띄우기’ 시도요즘 독재자와 학살자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이승만 대통령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을 자주 접하게 된다. 뜬금없이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여 독재자를 기리겠다고 한다거나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뒤짚으려고 한다.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기술한 우리나라 헌법전문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런 준동에 분노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현재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권 말살과 부정부패를 저질러 4.19혁명으로 쫒겨난 그의 말로를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판에, 독재자 이승만을 두고 다시 논쟁하는 자체가 소모적이다. 이승만의 악행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8ㆍ15해방 이후에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어 독재정치를 하면서 학살한 무고한 양민들이 100만명 이상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이승만을 국가보훈부가 지난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고, 국방부는 그를 혜안을 지닌 지도자로 미화하는 교재를 발간하기도 했다. ‘홍범도 지우기’로 국민의 공분을 산 집권 세력이 ‘이승만 국부 만들기’로 이념전쟁에 불을 붙이고 있는 형국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후 북한·중국·러시아가 공산화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했다”고 그를 칭송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농지개혁·교육개혁·정치개혁이란 3개 개혁으로 대한민국의 토대를 닦았다.”며 이승만을 한껏 찬양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격동의 해방 공간에서 그가 내린 선택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강변한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용하고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역사적 사실도 그들의 눈에는 크게 문제가 될 게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편다. 진실을 덮고 거짓을 호도하려는 영화 한 편에 부화뇌동하는 것이 2024년 대한민국의 현주소인 것만 같아 정말 씁쓸하다. 정권은 유한하고 역사의 흐름은 도도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이런 시도가 성공하겠는가. 말 그대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으로 국회에 상정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하고자 하는 법률안이 아직도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을미의병 참여자에 대해서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145명을 서훈하면서도, 전봉준·최시형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승만 띄우기’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를 거스르는 세력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역사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독재자 이승만을 구국의 민족지도자로 받들려는 기도를 절대 묵과할 수 없다. 국민 공감대도 없이 진행되는 시대착오적 ‘이승만 띄우기’는 성공할 수도 없고 결국 이념전쟁으로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것으로 끝날 것이 뻔하다. ‘이승만 국부 만들기’에 주력해온 뉴라이트 역사관에 따른 반역사적인 악행을 당장 멈추기를 요구한다. 글_윤여진(시인,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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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다올해는 3.1운동 105주년이다. 모든 언론이 3·1운동 105주년이라고 쓰고 있다. 오랫동안 사용해 화석화된 잘못된 용어이다. 105년 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 인근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했고 일경에 체포되어 갔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경성 거리의 민중들을 바라보며 끌려가던 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동학혁명이 좌절된 후 혁명의 최후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고 1900년대 초의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언론과 교육, 출판 운동 등으로 민도를 높이는 개혁을 전개하다가 1913년부터 전국의 천도교 교역자 483명을 차례로 불러 특별 연성 수련을 실시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장차 국가를 위해서 쓰일 인재를 미리 양성해 놓고자 한 지도자의 혜안이었다. 세계 제1차 대전이 종결되고 민족자결의 운동이 세계적으로 유행되자 의암은 우리의 독립을 위한 시점에 이르렀음을 직감했다. 드디어 1919년 천도교는 전체 인구 1,800만 명에 300만 명의 신도 수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단이 되었다. 천도교는 일제의 압제에 대항할 충분한 인원과 조직 그리고 자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학도들만이 참여했던 동학혁명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절감했던 손병희는 거대한 민족운동을 천도교만의 단독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3.1의거는 제2의 동학혁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국외에서의 독립선언과 의문스러운 고종황제의 죽음으로 민중의 분노가 치솟자 손병희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비밀리에 각계의 지도층에게 함께 할 것을 제의했지만 대부분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를 무시하며 함께 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개신교의 이승훈 선생과 길선주 목사 등은 이미 개신교의 독단으로 독립청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종단이 비밀리에 접촉했고 함께 독립선언을 하기로 합의했다. 다른 교단과 함께한다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시절임을 고려할 때 이들 종단 지도자들의 결단은 돋보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불교계의 큰 스님인 용성 스님과 만해가 함께 하니 비로소 종교연합으로 민족대표를 꾸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독립선언에 동참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들 지도자들의 위대한 희생과 헌신적 정신이 바로 3.1의거의 출발점이었고, 그들의 고뇌 어린 결단이 있었기에 3.1의거는 추진될 수 있었다. 의거의 중심인 천도교는 과거 실패했던 동학혁명을 다시 일으킨다는 자세로 준비했다. 손병희는 최남선을 시켜 작성된 독립선언서를 자체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에게 비밀리에 인쇄할 것을 지시했다. 인쇄 중 종로경찰서의 악질 조선인 순사에게 발각되기도 하고, 완성된 선언서를 옮기는 과정에 파출소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는 등 곡절 끝에 3만 5천 장의 선언서를 종교 조직을 이용해 전국에 퍼트리는 데 성공하였다. 만세 시위는 당일 오후 2시 경성 등 전국 6개 도시를 시작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당황한 일본은 민족대표들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하고 전국의 시위에는 강력한 무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밟으면 밟을수록 일어서는 우리 민족이었다. 특히 경기도의 시위가 가장 격렬했다. 수원 화성 지역은 장날마다 시위가 일어났으며 제암리와 고주리의 학살은 대표적인 피해 사건이 되었다. 3월부터 3달 동안에만 시위에 나선 이가 전국적으로 210만 명에 이르고 체포·투옥된 수도 4만6,948명, 부상자 5만 명 이상이었으며 사망자도 7,500명이 넘었다. 그런데 운동이란다. ‘쓰리 포인트 원 스포츠’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하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된단 말인가? 3·1운동이란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가. 해방 이후 헌법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의 헌법전문 초안에도 분명 3·1혁명이었다. 그러나 국회로 넘어가 심의 중에 바꾸었는데 일설에는 대통령에 유력한 이승만의 온화한(?) 이미지와 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아첨꾼들이 권했고 이승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헌법전문에 운동으로 수록되었다고 한다. 이승만도 일제강점기 시절 내내 사용하던 3·1혁명을 버린 것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3.1운동이 아닌 3·1혁명, 3·1대혁명이라고 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과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에도 명백히 3·1혁명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지난 3·1혁명 100주년 당시 정명(正名) 운동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명 되지 못하고 있다. 제국의 신민이 아닌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된다고 선언한 것은 분명 혁명이었는데. 이제 우리부터라도 제대로 된 명칭을 사용하자. 3.1혁명이라고.◎ 글 임형진(년암, 동서울교구,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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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 년 전 천도교인처럼지금부터 백 년 전인 1923년 8월 10일 지금의 천도교중앙총부 전신인 천도교중앙종리원의 직원회에서는 중대한 결정 하나를 내렸다. 그것은 천도교 교조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대신사출세백년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을 조직한 결정이었다.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대신사는 1824년 10월 28일 태어났다. 1924년이 수운대신사가 탄신한지 꼭 백 년을 맞는 뜻깊은 해로 이를 교단적 차원에서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기념사업회는 5일 후인 8월 15일 결성되었고, 위원장은 춘암상사가 맡았다. 기념사업회는 기념사업의 방향을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정했다. 하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장래를 서로 전망하고, 다른 하나는 수운대신사를 본받고 법으로 삼아 천도교인을 독려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는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 기념이 단순히 후천의 성인인 수운대신사가 탄생한 사실을 축하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24년을 사는 천도교인들이 수운대신사와 같은 사람으로 거듭나 수운대신사가 목적한 바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다지자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줄이면 과거를 기념하여 현재를 고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기념사업을 하자는 방향이었다. 사업의 방향에 맞춰 기념사업은 크게 세 가지로 준비하였다. 첫째는 과거를 기념하는 행사로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잇는 특별기도 봉행이었다.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은 포덕과 광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뜻을 계승하기 위해 천도교인 전체가 참여하는 특별기도를 하기로 했다. 천도교단에서는 교회나 국가의 큰 일이 있을 때 전 교인들이 일정 기간의 특별기도를 봉행해 정신 통일과 행동 통일을 추구했다. 대표적인 특별기도가 3·1운동 직전의 49일 특별기도였다. 기념사업회는 특별기도 기간을 수운대신사가 탄생한 달인 1924년 10월 1일부터 10월 21일까지의 21일간으로 정했다. 수운대신사가 태어난 달에 전 교인들이 몸과 마음을 일치해 포덕천하와 광제창생의 대원을 실현하는 천도교인으로 무장할 것을 기원하기로 했다. 기도 시간은 낮 12시로 정했다. 기도 시간을 하루의 중심인 낮 12시로 정한 것은 수운대신사의 득도가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는 의미를 담았다. 기도의 방식은 봉청수(지금의 청수봉전), 묵념기도(지금의 심고), 본주문 105회 묵송, 묵념기도의 순서로 했다. 특별기도를 통해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둘째는 현재의 천도교를 담는 행사로 1924년을 사는 천도교인의 활동을 보여주는 기념행사였다. 기념행사는 이틀에 걸처 진행되었다. 10월 27일 저녁 7시부터 중앙대교당에서 당대 천도교를 대표하는 연사인 이돈화, 이종린, 방정환 세 사람이 수운대신사 탄신의 의미를 돌아보는 강연회를 열었다. 탄신일인 10월 28일에는 11시 반부터 새로 지어진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에서 탄신 백주년 기념식을 열어 수운대신사 창도 정신을 기렸다. 이어서 청년당 대회를 열어 추모사 낭독과 대신사와 청년당에 관한 연설, 선언문 낭독 등을 진행하였다. 청년당 대회 폐회 후에는 여흥이 진행되었는데 동덕여학교 학생의 축하 공연, 김문필 일행의 기마술과 무도, 청년당의 가장행렬과 광대 줄타기, 경성악대의 주악 등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기념행사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는데 저녁 7시부터 청년당, 내수단(여성회), 학생회, 소년회 등 7개 부문 단체에서 준비한 공연이 밤 12시까지 진행되었다. 기념관 뜰에는 전등을 달고 만국기를 내걸어 화려하게 장식해 기념행사 분위기를 높였으며, 기념관 안에는 7개 부문단체에서 만든 각종 모형물이 찿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전국에서 4천 명이 참여해 일대의 교통이 혼잡할 정도였다. 셋째, 미래를 준비하는 사업으로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의 건립이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수운대신사 탄신 백주년이라는 뜻깊은 해를 맞아 천도교인 만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사업으로 기념관을 건립해 일반에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독실 교인 3만 5천 집을 선정하여 이들이 1원씩 성금을 낸 3만 5천 원으로 대공회장을 건립하기로 했다. 기념관은 6월 25일 착공해서 탄신일인 10월 28일 기념식을 겸해 낙성식을 가졌다. 총공사비는 약 5만 원이었다고 알려졌다. 기념관은 앞은 2층, 뒤는 1층으로 연건평 160평으로 1천 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대공회장이었다. 이 기념관에 대해 “기념관의 넓이는 9칸이요. 길이는 12칸인데, 동 기념관은 일반 집회에 제공할 터이요, 활동사진(영화), 강연, 연극 등 어떠한 것을 사용하더라도 편리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데, 조선인의 손으로도 집회 장소를 건축한 것은 이곳이 효시라 할 수 있다.”라고 당시 언론에서 기념관 건립의 의미를 설명했다. 수운대신사의 정신을 담은 기념관은 서울에서 제일 큰 공연장으로 시민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민족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념관을 우리의 힘으로 만든 것은 수운대신사의 창도의 정신을 세상에 펴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업이었다. 이처럼 백 년 전 천도교인은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후천의 성인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열과 성을 다해서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성과를 내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고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전 천도교인들이 단결해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 년이 갖는 의미를 새기고 이를 세상에 전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교인들이 특성을 모아 국내 최고의 대공연장을 건축해 세상을 위해 내어놓았다. 이 소식에 민족 구성원들은 가슴이 들떴다. 백 년 전 천도교는 민족의 한 가운데에서 희망이 되었다. 이제 다시 백 년이 지났다. 올해가 수운대신사 탄신 2백주년이다. 천도교에서 대신사 탄신 2백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번에는 어떤 기념물이 만들어져 수운대신사의 탄신의 의미를 새기고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백 년 전 우려했던 것처럼 그냥 행사를 위한 행사, 해마다 지내는 제사와 같은 무의미한 행사를 준비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다못해 천도교박물관을 건립해 세상 사람들에게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알리는 공간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한다. 백 년전 천도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그때와 같이 세상의 희망으로 천도교가 우뚝서기를 기대한다. 글, 덕암 성강현(흥신포 직접도훈, 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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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되는대로 살아야지 뭘 어떡해?“티브이 없었으면 어떡할 뻔하셨어요?” 라고 내가 묻자 준비한 것처럼 촌각의 틈도 없이 돌아온 대답이었다. “되는대로 살아야지 뭘 어떡해?”. 마을(노인)회관에 옹기종기 앉아서 티브이만 보고 있는 어르신들. 거의 혼자 사시는 분들이라 체온도 그립고 난방비도 겁나니 노쇠한 몸 하나 의지하기엔 마을회관이 좋다. 종일 티브이 장면을 따라가며 얘기 보따리를 끌렀다 싸맸다 하시는 노인들. 그러다 심드렁해지면 묵은 기억 들추다가 말다툼도 벌이지만 다시 티브이 따라 깔깔 웃는다. ‘되는대로 산다’라는 말은 주어진 조건에 저항하지 않고 뭐든 수용한다는 말이다. 《놓아버림》의 데이비드 호킨스나 《당신이 플라시보다》의 조 디스펜자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이는 어르신들의 몸에 밴 삶의 지혜다. 일단 수용한 다음에 한발 더 나아갈지 여부를 궁리하는 생활 태도. 한울 모심의 태도다. 티브이 없어도 얼마든지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잘 보내실 어르신들이다. 하지만 마을회관에 모이긴 해도 늘 벽에 기댄 등은 더 구부정해지고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는지라 약을 한 주먹씩 먹는다. 움직이지 않으니 식욕도 별로 없어서 면사무소에서 나온 쌀과 부식은 옆방에 쌓여있다. 옛날과 달리 요즘 먹거리가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 맛을 내느라 섞어 놓은 첨가물들이 얼마나 몸을 망치는지 모른다. 멸치와 쥐포조차 인공조미료가 듬뿍 스며있다는 내 말에 깜짝 놀란다. 특별한 날에 즐겨 드시는 회도 모두 양식한 것이고 정전이 되면 물고기가 폐사하는 게 강제로 산소를 공급하다가 전기가 끊기니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하니 입을 쩍 벌린다. 작년부터 어쩌다 내가 공식 노인이 되었고, 올해 처음으로 노인 일자리 가서 목격한 우리 마을 노인들 모습이었다. 좋은 먹거리가 뭔지를 말하기보다 믹스커피 통 옆에 아몬드와 쌍화탕 분말 차를 한 통씩 사 놓았더니 잘 드신다. 이 역시 가공식품이지만 자연 식재료는 노인들 일거리라 어쩔 수 없기도 하다. 내가 시간 나는 두 번째 날과 세 번째 날은 건강 체조를 해 봤다. 손뼉치기와 발끝 부딪치기. 팔을 뻗어서 가 닿는 곳 모두를 토닥토닥 두드리기. 손 비비기와 얼굴 비비기를 앉은 채로 했다.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해서다. 서로 왼손으로 악수하게 해서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팔과 왼 어깨를 골고루 두드려주는 놀이도 했다. 목덜미와 등짝까지 두드리다 보면 자연스레 포옹을 하게 된다. 순간순간 깔깔 웃는다. 쇠똥 구르는 것만 봐도 웃어댄다는 소녀들처럼.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내 스마트폰으로 모바일 핫스팟을 설정하고 에이치디엠아이(HDMI) 케이블을 티브이에 연결해서 유튜브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비록 오래된 프로지만 웃음보따리인 에스비에스(SBS)의 《고향에서 온 편지》도 보고 보건복지부에서 만든 치매예방 영상도 봤다.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은 발 마사지였다. 발바닥과 발등의 혈 자리 이미지를 칼라로 인쇄하여 나눠 준 다음에 반사구니 서혜부니 하는 원리를 쉽게 설명하고서 내가 쓰던 호호바 오일과 코코넛 오일에 오렌지 에센셜 오일이나 라벤더 오일을 브랜딩 해서 발라 드렸다. 증상에 따른 혈자리를 누르게 하다가 그냥 막 “되는대로 눌러도 된다”라고 말씀드렸다. 나도 노인들과 노는 이 놀이를 되는대로 계속할 생각이다. “되는대로”. 글, 목암 전희식('밥은 하늘입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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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SG 경영의 근본이 천도교에 있다최근 사회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의 시작은 1970년대 UN에서 논의된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에서 시작되었는데 UNSDGs에 의하면 인류의 보편문제와 지구 환경문제 및 경제 사회문제를 2030년 까지 17가지 주목표와 169가지 세부 목표를 정해 국제적 공동 목표를 세웠다. 우리나라 역시 이 분야에 큰 관심과 함께 향후 계획 및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기업은 가격이 싸고 품질이 좋은 생산품을 만들어 이익을 많이 내면 되었지만 향후는 생산품을 만드는 과정과 더불어 비재무적인 요소(환경(E), 사회(S), 지배구조(G))까지도 평가를 하여 투자자들이 투자를 결정할 때 고려하도록 하였다. ESG 경영 평가단은 사용하는 제품이 원자재의 생산부터 건전하고 합법적인 과정을 거쳤는지를 확인하고 평가를 한다. 이것은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에 전 분야에도 이러한 개념이 바탕이 되어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종교계에서도 이러한 ESG 경영이론을 도입하는 것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천도교에서는 ESG와 관련된 내용들이 이미 경전 속에 많이 들어 있다. 환경(Environmental)은 기후 변화 및 탄소 배출, 에너지 사용, 수질, 폐기물, 토양 오염, 소음, 진동, 환경 친화 등의 환경 측면에서 위험 사고를 바탕으로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환경 활동이며, 해월신사님의 생태 존중 말씀은 탄소제로시대에 새겨야 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땅을 어머니 살처럼 여기면 온갖 만물이 그 위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Social)는 노동, 인권, 안전, 보건, 성 평등, 지역사회 기여 등의 사회적 책임 활동이며, 천도교의 시천주 진리로서 인내천 세상이 된다면 사회적 책임 활동에 앞장 설 수 있다.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종교인들의 노력이 필요하며, 특히 천도교는 다른 어느 종단보다 인권을 존중한다. 마음속으로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니 그 이상 소중한 인권과 사회적 책임활동이 어디 있겠는가. 지배구조(Governance)는 기업의 투명성, 윤리적 경영, 이사회의 역할과 책임을 다함으로서 기업의 장기적 이익과 지속 가능한 경영 활동인데, 천도교의 임사실천십개조를 보면 ‘윤리를 밝히라’ 그리고 ‘일에 임하여 지극히 공정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지배구조의 바탕이 되는 말씀이다. 윤리를 바로 세워 책재원수가 되지 않도록 건실한 천도교의 지배구조가 필요하다. 침체된 교단에 새로운 기운이 필요하다. 천도교도 높은 도덕성과 함께 훌륭한 경영마인드를 갖춘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전 세계 선진국들은 지금 ESG의 경영전략에 올인하고 있다. 2050년 탄소제로 사회구현을 목표로 세계적인 기업들이 앞장서서 이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천도교단에서도 급변하는 ESG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교단차원의 ESG위원회가 구성되고 전문가들이 모여서 교단 발전을 의논하였으면 한다. 향후 기후 변화는 이대로 가면 지구의 큰 이변으로 삶, 즉 생존 자체를 위협당할 수 있다. 온 세계가 함께 기후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사회적 가치 창출과 투명한 윤리 경영에 노력해야 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온실가스 즉 탄소배출이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었다. 우리나라는 이 문제에 지속가능한 해법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겨 가고 있다. 종교계 역시 탄소 제로 사회 구현에 기여하고 동참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더욱이 천도교가 앞장서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ESG 경영의 확대 측면에서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 간의 상호 작용으로 지속가능한 개발과 환경보호 및 사회적 공헌 등으로 종합적 삶의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글, 울산교구 이암 정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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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수운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개벽을 생각해본다올해 갑진년(포덕165, 2024년)은 대신사 수운 최제우 탄신 200주년(이하,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이다. 다시 말해 100년에 한 번 돌아오는 기념비적인 해이다. 또한 동학혁명 130주년, 갑진개화혁신운동 120주년, 천도교여성회 창립 100주년으로서 천도교단에는 경사가 겹치는 해이기도 하다. 먼저 본 글에서는 대신사 탄신 2백주년에 초점을 맞춰 논하고자 한다.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부터 준비해야 하며, 어떤 기념비적 사업을 진행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국내는 물론 대신사 탄신에 대한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연구 및 국제학술대회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기념사업과 계승사업을 통해 동학·천도교의 3대 목적인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지(之) 대도(大道)의 실천사업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다는 희망에서이다. 그런데 글을 쓴다는 것이 원고의 한계도 있고 해서 여기서는 대신사 탄신에 대한 의미와 우리의 자세를 중점적으로 거론하고자 한다. 1. 대신사의 탄생은 개벽을 잉태하고 있었다. 천도교(동학) 제1세 교조 수운 대신사(이하, 대신사)께서는 1824년 10월 28일(음력)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315번지에서 태어났다. 본향은 경주, 아명(兒名)은 복술(福述)이며, 본래 이름은 제선(濟宣), 자(字)는 도언(道彦)이었다. 후일 구도 과정에서 이름은 제우(濟愚)로 자는 성묵(性默)으로 바꾸었고, 호는 수운(水雲)으로 했다. 대신사는 신라 말기의 석학 고운 최치원의 25세손이며, 정무공 잠와 최진립 장군이 7대조이시다. 그리고 대신사 아버지는 근암 최옥(이하, 근암공)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근암공은 벼슬을 하지 않은 산림처사로써, 성리학을 심화 발전시킨 영남 유학의 거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학설의 한 갈래를 계승한 선비로서 경상도 일대에 그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이러한 근암공의 학문과 덕망을 온전히 계승한 사람이 바로 근암공 아들 대신사이시다. 그런데 문제는 대신사 어머님 한씨(韓氏)께서 재가녀(再嫁女) 신분이었다는 것이 대신사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조선은 성종 때에 왕조의 근본을 이루는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면서 예전(禮典)에 밝히기를, 재가녀 자손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재가녀 자손을 마치 서자(庶子)와 같이 신분차별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분차별이 없었다면 대신사께서는 아마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적당한 벼슬을 하였거나, 아니면 근암공 아버지처럼 사림처사로서 서당 훈장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당시 시대의 불평등한 현실 속에, 대신사는 당시 학문을 모두 통달한 선비였지만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하며 큰 방황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하여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봇짐장사부터 시작하여, 세상을 크게 변혁시키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입산수도는 물론 조선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인심풍속을 살피곤 하였다. 다시 말해 대신사의 득도(得道) 즉 동학창도는 대신사 아버님이자 스승님이신 근암공의 영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근암공의 셋째 부인이 되신 대신사의 어버님 한씨부인의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출발한다. 한씨부인은 한 번 결혼했다 남편과 사별한 청상과부의 신분으로 근암공 셋째 부인이 되신 것이다. 이처럼 대신사께서 신분에 대한 고민과 방황 그리고 사회상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등 당시 불평등했던 시대상황은 바로 동학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시천주(侍天主)·인즉천(人卽天)·사인여천(事人如天) 진리를 깨달아 실천하는데 원인 제공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대신사의 탄생은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잉태(孕胎)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범인(凡人)이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천도(天道)이다. 일찍이 민족시인 신동엽은 대서사시 「금강」에서 대신사님을 석가, 예수님과 더불어 세계적인 성인으로 조명한 바 있다. 국내외에서도 유명한 철학자 김용옥과 시인 김지하도 강연과 저술을 통해 대신사를 공자와 예수에 버금가는 위대한 성자라고 하였다. 또한, 동방사상 및 동학사상에 조예가 탁월했던 범부 김정설은, “최제우는 천계를 받아, 흩어져 무질서한 천년의 적막을 깨트리고 역사적 대강령을 이루었다. 동시에 신도성시 정신의 기적적 부활이며, 국풍재생의 경이로운 사태로서 어마어마한 역사적 대사건이었다.”고 강조하여, 수운 선생의 득도와 동학 창도는 시대의 혁명을 넘어 새로 운 개벽의 세상을 열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대신사의 일생과 동학·천도교의 역사를 접하고 지극정성으로 수도(修道)를 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범인(凡人)이 성인(聖人)이 되고, 소인(小人)이 대인(大人)이 될 수 있다.’는 교훈과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대신사께서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진인(眞人)이자 신인(神人)의 경지에 오른 대성인(大聖人)이 되신 분이다. 대신사님의 제자들은 대신사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대신사님을 닮아가고 대신사님처럼 되는 것이 제자들의 도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 대신사님처럼 실천하는 것이 곧 동학도유(東學道儒)이고, 천도교인(天道敎人)이자 무극대도인(無極大道人)이 되는 것이다. 3. 천도교(동학)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자.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을 맞이하여 수운 최제우 스승님의 탄생의 의미를 짚어보고 또한 우리의 자세도 점검해보자. 대신사 탄신은 바로 동학(천도교) 창도로 이어지고, 동학창도는 바로 대신사 순도(殉道, 순교)로 이어진다. 대신사 순도는 바로 1871년 대신사 순도 7주기에 영해교조신원운동으로 이어지고, 영해신원운동은 1892~1893년 공주, 삼례, 광화문, 보은, 원평 교조신원운동으로 이어진다. 또한 교조신원운동은 1894년 1차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지고,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전쟁은 일제강점기 의병운동으로 계승된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은 3.1독립혁명으로 계승되고, 해방 후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으로 계승되었다. 동학·천도교 정신은 남북평화통일 달성이라는 또 다른 시대적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하며, 지구환경과 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급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이러한 막중한 임무와 시기에 우리 천도교단이 정신 차리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이다. 현재 우리 교세가 대신사 순도 때와 같은 숫자이다. 교인수가 한때는 3백만 명을 웃돌았으나, 현재는 현저한 수준으로 추락하였다. 이러한 쇠운을 극복하고 성운을 맞이하려면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겠으나, 우선 천도교인들의 각자위심(各自爲心)을 퇴출하고 동귀일체(同歸一體)를 지향하는 것으로 기본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스승님과 선열님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못다 이루신 꿈을 우리가 이루기 위해서 다시개벽의 새로운 세상을 향해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야 할 것이다. 끝으로,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을 맞이하여 천도교(동학)의 새로운 문화를 하나 창출했으면 한다. 바로 대신사 출생지(出生址)에서 순도지(殉道址)까지 성지순례를 매년 정례화 하였으면 한다. ‘대신사, 탄신지에서 순도지까지의 성지순례’는 대신사 탄신일(10.28), 대신사 순도일(3.10), 대신사 득도일(4.5, 천일기념일) 중에서 가장 적합한 날을 선택하여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성지순례는 신앙심 고취는 물론 대중적인 문화창달 즉 포덕천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끝) 글 이윤영 (천도교 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