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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에게 듣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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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에게 듣다(2)

절망 속에서 희망을 품고 달려온 천도교

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님을 만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를 거쳐 우리 역사가 흘러온 절망과 희망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 시절을 건너 온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야말로 한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구십 살이 넘은 생을 넘나드는 기억들을 풀어내며 선생의 생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선생의 말씀 속에 선생이 경험한 모든 것을 표현할 때 ‘감사한 마음’이었다. 주어진 삶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느껴졌다.  


이창번02.png

(지난 호에 이어)

 

수용소 안에서의 종교생활은 어땠나요?

그 안에서는 글자를 읽을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러니 성경을 읽었죠. 읽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때 성경을, 아마 기독교 신자들보다 내가 더 많이 읽었을 거예요. 

 

당시 수용소에 있던 분들하고 천도교인이라는 걸 서로 알게 됐을 때 어떠셨어요?

무척 반갑죠. 91수용소에 있을 때는 완전히 우익이 장악하고 있을 때니까 내놓고 얘기를 할 수가 있을 때예요. 그래서 2대대 경비대에 가서 안에 시일을 봤거든요. 황승훈 씨 이분이 경전을 암기한 걸 적었어요. 적으면서, 이게 아니야, 이 글자야, 이 글자야 서로 이러면서 경전을 만들었어요. 그거 가지고서 시일을 보았다니까요.

그때 나 있던 수용소에서는 그렇게 완전히 시일식을 했어요. 시일을 보는데 천덕송은 그때 김영찬 씨라고 하는 분이 아주 잘 가르쳤어요. 

그분이 천덕송을 가르치고, 저는 북한에 있을 때도 천덕송을 불러왔기 때문에 수용소에서도 천덕송을 아주 그때 잘 불렀어요. 판문점에 올라가 가지고 거기서도 천덕송 부르고 천덕송 대회도 하고 그랬어요. 거기서. 시일식의 식순은 북한이나 여기나 똑같아요.


당시에 포로수용소에서는 얼마나 계셨죠?

저는 거의 3년 동안 수용소에 있었어요. 투쟁이 너무 심하니까 분리 심사를 하는데, 그때 나오는 방송이 앞으로 며칠 후에 하는 심사는 여러분이 일생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결심을 해야 된다. 이 결심을 한 번 하게 되면 다시 옮길 수가 없다. 신중히 생각해라. 그런 방송이 나왔어요. 

그러고 나서 한 줄로 쭉 들어가서 심사관 앞에 가면, 북으로 갈 거냐 남의 잔류할 거냐, 이걸 묻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방송에서, 혹시 북으로 안 가고 남에 남겠다고 해도 정부에서는 여러분의 장래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거예요. 

알아서 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돌아가길 바라는 것처럼 이렇게 방송을 했다고요.

그래서 북으로 갈 거냐, 남으로 갈 거냐, 남으로 가면 이쪽, 저쪽 방으로 들어가면 북으로. 딱 갈라놓는 거예요. 북으로 갈 사람들을 따로 모아가지고 수용소에다 잡아놓고 남에 남겠다는 사람은 여기에 남고.

분리 심사 후 북으로 송환을 거부한 사람 3만 5천 명 정도가 북으로 안 가겠다고 그러고, 북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9만 명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여기에 남겠다는 사람이 반공 때문에 남겠다고 그런 것도 아니고 북으로 가는 사람들이 친공 때문에 간 게 아니에요.

그때 누구나가 생각하기를 통일은 앞으로 2~3년 안에 될 거다. 또 하나는 북한이 그 당시만 하더라도 집단 농장이 안 됐어요. 왜정 때와 똑같았어요. 모든 게 다 국유화됐다고 그러지만 내 집에 살고 있었고 내 땅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거 생각을 한 거예요. 북한도 지금처럼 집단 농장이 되고 그런 식이 된다면 누가 북으로 가요, 아무도 안 가요. 

2~3년만 있으면 통일될 거다. 이런 생각을 하고 분류가 된 거예요. 그래서 북한에 간 사람들은 사실은 그것 때문에 갔지요.


선생님은 어떻게 여기에 남게 되셨어요?

여기(남한에) 나와서 제 고향 사람 한 분 집에 내가 그 집 아들로 입양이 돼서 호적을 만들었어요. 대한민국에서 석방되어 나와서 장교로 있을 때, 그때 호적을 만들었어요. 

그 고향 분이 아버지하고 친구고 같은 성주 이 씨예요. 촌수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이분도 분류 심사할 때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하시더라고요. 집에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고 처자식이 있었는데, 내가 안 가면 부모님은 어떻게 모시고 자식은 어디 갈 거냐고요.

그런데 내가 말렸어. 가지 말자고. 이제 뭐 2, 3년 있으면 통일될 테니까 가서 고생할 필요가 뭐 있냐고, 그냥 있자고. 그래서 내가 그분을 부모처럼 모신 거예요. 여기서 내가 그분의 아들로 내가 입적을 해가지고서 그렇게.

고민을 하면서도 이제 2~3년이면 통일되겠지 하고서 남았던 사람이 있는 것처럼 또 북에 가는 사람도 그랬어요. 가족들을 생각해서 한 2~3년만 참으면 어떻게든 통일될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분리 심사할 때 사실상 북으로 간 사람들 있는데 다 불행하게 됐죠.

북에 갔던 사람들은 전부 아오지 탄광으로 가고 그때 그랬어요.


그리고 이후엔 어떻게 되었나요?

우리는 부산 가야 수용소로 왔습니다. 거제도에서 부산 가야 수용소로 왔어요. 그땐 완전히 반공포로 출신이죠. 가야의 수용소가 a, b, c, d, e, f, g, h까지 있었어요. 그 수용소가 a 수용소 b 수용소 이렇게 해서 h 수용소까지 있었는데 b 수용소가 천도교인만이 모인 수용소였어요. 

한 수용소가 한 1300여 명씩이나 됐어요. 천도교인만이 모여 있는 곳이 있었지만. 다른 곳에도 천도교인이 있었어요. 나는 그때 H수용소에 있었어요. 반공 프로들이 여러 수용소에서 분리 심사를 해서 오니까 어떤 데서는 91 수용소에도 들어오고 그랬는데, 혼합이 돼 들어올 때 천도교인들은 H 수용소에 있었는데 지금 당산교구에 있는 안명록 씨라고 그분이 나랑 같이 H수용소에 있다가 온 분이죠.

거기에서 그때 하야리아 부대라고 하는 미군 부대가 있었어요. 거기에 식당 요원을 뽑는데 이 양반이 통역관이니까 같이 나가게 됐는데 그때 미군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니까 신체 검사가 보통 심한 게 아니에요. 몇 번을 가서 검사를 받고 합격이 돼야만 그 식당에 갔어요. 

그 쪽에 큰 미군부대가 있어요. 미국에서 오는 모든 장병들이 거기에 왔다가 전방에 나가고, 제대해서 나가는 사람들도 거기 왔다가 다시 본국으로 가는 큰 수용소인데 거기에 식당이 여러 개가 있었어요.


그럼 수용소의 포로들이 인근 부대에서 일을 했다는 말씀이신거죠? 

네. 미군 식당이 있었는데 우리가 간 데가 장교식당이에요. 소위에서부터 중령까지만 식사하는 데예요. 그리고 거기에 장군 식당은 대령에서부터 장군들만 식당하는 데가 따로 있었는데, 내가 그 식당에 가서 일을 하게끔 됐어요. 원래는 일반 민간인을 채용해서 쓰다가 그 사람들은 월급을 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포로를 쓰게 되면 그게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미군들이 일반 민간인들 다 내보내고 포로들, 반공포로에서 골라서 데려왔어요. 저도 그때 안명록 씨하고 같이 거기로 나갔어요. 가서 제가 배치된 곳이 창고였어요. 식품이 꽉 찬 창고를 내가 지키는 일을 맡았어요.


반공포로 석방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6월 18일날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시킬 때, 내가 있던 곳은 미군 부대니까 여기는 건드리지 못한 거예요. 우리는 전혀 몰랐어요. 포로들이 석방된 걸. 6월 18일 아침이 기억이 나네요. 내가 매일 아침에 커피를 가져다 줬던 장교가 와 있더군요. 또 커피 가져오라고 그럴 것 같아서 미리 가서 커피 두 잔을 가지고 가서, 그 사람 앞에다 놓고 나도 한잔 마시려고 그랬는데, 나를 딱 쳐다보더니 "너 왜 여기 있냐" 이거야. 난 그 무슨 소리인지 몰랐어요. 왜 도망치지 않고 여기 있냐 이 소리예요.

다 도망쳤다는 거예요. 난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몰랐어요. 어떻게 수용소 안에서 전체가 다 도망을 칠 수가 있냐, 그걸 모르고 있는데 이 사람이 다 나갔다는 거예요.

그때 밖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신문을 가져 왔는데 딱 보니까, ‘포로 전원 석방’이라고 나온 거예요. 우리가 여기에 멀쩡하게 지금 있는데 전원 석방이라고 나온 거야.

아이고, 눈이 캄캄해지는 거예요. 야 이게 우리만 떨어졌구나, 우리만 탈출을 못했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던 거죠. 

그래서 그 신문을 여러 사람한테,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화장실에다 그 신문을 놓고는 교대로 들어가서 그걸 보고 오라고 했어요. 그때부터는 일을 못하는 거예요. 다들 들떠가지고서.

어디 가야 하나, 우리도 뛰어야 하나. 

양놈들이 눈치를 채고 조금 있으니까 무장한 군인들이 확 오더니 그때는 경비 두 명이 따라와 가지고 전부 태워가지고 다시 그 수용소한데다 잡아놓은 거예요. 

그날 밤에 한잠도 못 자고 지금도 철조망을 뚫고 나가야 하나,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탈출은 못 했어요. 

다음 날 되니까 장갑차가 오더니 무장 군인들이 15명 정도 와가지고 다 태우는 거예요. 문 딱 잠그고서 가는데 우리는 북송하는 줄 알았어. 그랬더니 가야 수용소, 우리가 있던 수용소에다 잡아넣는 거예요. 그런데 a 수용소 b 수용소였는데 거기 가니까 미국 탱크가 정문 앞에다가 또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군이 석방을 시켰으니까 탱크들이 와서 지키고 있어요. 우리가(식당에서 일하던 사람들) 그때 한 30여 명 됐어요. 도망치다가 다시 붙잡혀 들어온 사람들 한 60명하고 합류가 된 거예요. 거기다 잡아놨는데 그때부터는 진짜 그 밥이라는 게 먹히질 않는 거예요.

거기서 한 일주일 정도 있다가 갑자기 밤중에 그냥 자는데 그때는 뭐 불침번이고 뭐고 없었을 때예요.

그냥 자고 자는데 밤중인데 막 불을 켜더니 깨우더라고요. 다 배낭 지고서 소지품 가지고 나오라는 거예요. 틀림없이 북송하는 줄 알았어. 절망감이 오면서 어떻게 할 생각이 안 드는 거야.


그래서 어디로 가신 건가요?

어디로 가나, 가만히 보고 있는데 열차를 태우게 되면 북으로 가는 건데... 여수면 역을 지나가더라고요. 수용소에 갔더니 거기도 석방 안 된 사람이 우리 말고 더 있었어요. 한 2천여 명이 거기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9월 달에 판문점 갈 때까지 6월달서부터니까 그 한 서너 달 거기에 있었죠. 

그때도 고통스러웠어. 진짜. 거기 있을 때 한국군이 우리 붙잡지 않는다는 거야. 

그때는 탈출하게 되면 경찰들도 붙잡아서 미군에게다 갖다 놓는데 이제는 대통령이 석방시켜 주니까 이제 우리 나가면 이제 환영하거든 서로 탈출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철조망이 이렇게 이중 철조망으로 쳐졌는데 땅굴 파기 시작했던 거예요. 또 거기서 그런데 적발이 돼 가지고 탈출을 못 했어요.

그러다 결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헌병사령관을 보내가지고 수용소 안에 방송으로 이번에 석방 못 됐지만 여러분들은 판문점에 갔다가 1월달이면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참아달라. 우리 대한민국이 절대적으로 책임지겠다. 그걸 하는 게 그때부터 안심이 된 거예요.

그래서 그러고 나서 그때부터는 우리도 이제 땅굴 팔 생각 안 하고 이제 석 달만 지나면 이제 우리 석방될 테니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미군하고도 협조가 돼가지고서 미군들도 우리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거예요.

프랭카트 만들겠다고 하니 천을 가져다 주고 그래가지고 그때 판문점 갈 때는 궁을기를 만들어 가지고 간 거예요.

태극기하고 궁을기 그 당시에 마음대로 만들 수가 있었으니까 나도 그때 궁을기 만드는 방법을 배웠어. 


그럼 그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셨어요?

중립지대로 가서는 마음대로 했어요. 그때는 작업도 없이 수용소에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그때는 천막 하나를 쳐놓고 교회를 만들었는데, 노상 교회에 가서 살았어. 밥 먹고 가면 교회 가서 천덕송 부르고 그때 경전의 일부가 들어왔던 적이 있었어요. 경전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어. 신인철학도 내가 그때 처음 봤어요. 그때 중립지대는 미군은 완전히 손 떼고 인도군이 우리 경비를 했어요. 인도군의 감시하에 경비를 하고 병원 수용소에는 한국 간호원들이 들어와 있었어요. 병원 수용소에서 서로 연락을 하는 거예요. 중앙정보부하고 우리하고의 모든 연락을 간호원들이 했어요. 그래서 그때 각 수용소 간에 연락할 게 있으면 병원으로 입원을 시키는 거예요. 

내가 여기에 도서관장으로 오면서, 처음 들어와가지고 그 기록을 찾아보니까, 반공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명부가 있더라고요. 나도 그게 있는 줄은 몰랐어. 거기 보니까 내 이름이 나와. 천도교인 그 이름이. 



(다음 호에 계속)

 

인터뷰영상 바로가기==>http:// https://www.youtube.com/watch?v=UMIi5P5Dfq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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