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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갖추어야 할 천도교 박물관지난 겨울에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그동안 일본과 동남아 등지는 몇 차례 다녀왔지만 유럽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동해의 해돋이를 보면서 지내던 일상에서 벗어나 포르투갈의 ‘카보 다 로카(Cabo da Roca)’에서 대서양의 노을을 보며 느꼈던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기 위해 몸을 실었던 범선도 보았고, 그 유명하다던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도 눈에 담고 왔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유럽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나라와 도시의 상징이었다. 유럽은 로마 시대 이후 가톨릭의 지배가 이어졌기 때문에 방문한 도시의 중심부에는 사람을 압도할 위용을 자랑하는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비야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 등 유럽을 대표하는 스페인의 성당은 유럽을 가히 ‘신국(神國)’이라고 불릴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밖에도 대항해 시대를 열어 유럽의 변방이었던 포르투갈을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이끌었던 리스본의 ‘발견기념비’ 등의 상징물들도 인상적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레알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과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Thyssen Bornemisza)’이었다. 스페인의 국립 미술관인 프라도 미술관은 15세기 이후 스페인 왕실에서 수집한 미술 작품이 전시하는 유럽의 대표적인 미술관의 하나로 스페인의 3대 화가인 엘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와 피가소 등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 3천 점 이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는 독일 귀족 티센 가문이 수집한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작품 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이 위에 언급한 스페인 작가 중심이라면, 티센 미술관은 마네, 모네 등 유럽 전역 작가의 작품과 현대 작가의 작품까지 볼 수 있었다. 두 미술관에서 학창 시절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도 여럿 만났다. 다음에는 넉넉한 기간 동안 마드리드의 미술관만을 보기 위해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시와 나라를 대표하는 미술관을 관람하기 위해 까다로운 입장 절차에도 끊임없이 입장하는 관람객의 모습을 보면서 유럽 문화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천도교로 눈을 돌려보면 어떠한가? 세상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천도교의 상징은 있는가? 경주의 용담정이 동학의 창도지로서 상징적인 장소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용담을 찾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천도교를 각인할만한 매력적인 상징을 마주하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서울의 중앙대교당과 봉황각도 천도교의 상징적 기념물이지만 용담과 마찬가지로 미흡한 부분이 있다. 이들 장소가 상징으로서 미흡한 이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학의 창도부터 현대의 천도교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와 기념물을 일목요연하게 알려주는 박물관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온전한 박물관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천도교가 후천 오만 년을 이끌어갈 진리라고 이야기한들 귀를 기울여줄 사람은 없다. 천도교단이 세상 사람들에게 후천의 새 진리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한탄하지만 말고 세상 사람들에게 천도교가 후천의 진리라고 알려줄 수 있는 상징과 해설이 필요한 이유이다. 용담정 아래 들어선 동학기념관 전시물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소리치지 말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전시된 영부가 동학 교단의 그것이 아니라고 떠들지만 말고, 제대로 된 박물관을 만들어 천도교의 역사와 전통을 잘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단의 박물관에서 동학의 역사와 유물을 분명히 알리면 다른 곳에서는 이를 보고 천도교를 제대로 알리게 되는 것이다. 박물관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시기가 늦은 감이 있다. 올해는 수운대신사 탄신 200주년이다. 대신사 탄신 100주년에는 ‘출세백년기념관’을 만들어 세상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을 제공했다. 탄신 150주년을 맞아서는 용담정을 성역화했다. 올해 탄신 200주년을 맞아 천도교단은 행사를 위한 행사보다 내실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 천도교 신앙을 회복하고, 대신사의 사적지를 정리하고, 경전의 해석을 현대화해 미래 세대에게 천도교를 알릴 수 있는 등이 요구된다. 그 가운데 꼭 필요한 것이 정리된 천도교의 역사와 문화를 세상에 알려주는 박물관의 설립이다. 글.덕암 성강현(흥신포 직접도훈, 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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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성사 순도·순국 102주기 묘소 참례식 봉행천도교중앙총부는 5월 19일(일) 오전 11시 서울 우이동 봉황각 의암성사 묘소에서 의암 손병희 성사 순도·순국 102주기 묘소 참례식을 봉행하였다. 참례식은 이미애 교화관장의 집례로 청수봉전, 심고, 주문3회 병송, 헌화, 심고(폐식) 순으로 진행되었다. 헌화는 윤석산 천도교 교령, 사단법인 33인 유족회 정유헌 회장, 나영의 고문 등 임원, 김성환 천도교 연원회의장, 진강현 서울북부 보훈지청장, 윤은석 강북구청 복지국장, 김재옥 수원상공회의소 회장 등 내빈, 천도교 기관 단체장, 이범창 천도교 종무원장 순으로 하였다. 식후 윤석산 천도교 교령은 “의암 손병희 성사는 천도교의 창시자인 최제우 대신사의 창도 목적인 보국안민을 실천하시다 순도하신 것이다. 성사께서 주도하신 3·1독립운동은 바로 보국안민의 실천이었다. 그러므로 의암성사께서는 나라를 되찾기 위한 순국이면서 천도교의 이념을 실천하시다 순도하신 것이 맞다. 오늘날 천도교의 사정이 어려워졌지만 의암 성사를 본받아 용시용활(用時用活)을 하면 잘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통암 서종환 의창수도원장이 의암성사 약력과 봉황각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였다. 이날 윤석렬 대통령, 황우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순희 강북구청장, 황정희 강북문화원장, 정유헌 (사)민족대표33인유족회 회장, 김재옥 수원상공회의소 회장이 화환을 보내왔다. 의암성사는 포덕 2년(1861) 4월 8일 청주에서 태어나 포덕 23년에 입도하였다. 성사는 해월신사의 명을 받아 교조 신원운동을 전개했고 광화문복합상소(1893)에도 참여했다. 동학혁명(1894) 때에는 북접 통령으로 이인전투, 우금티전투, 태인 성황산전투, 보은전투 등을 치루며 척왜 구국전선에 나섰다. 이후 포덕 38년(1897) 12월 24일 해월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았으며, 포덕 42년(1901)국제정세를 살피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체류 중 박인호·홍병기를 불러 민회를 설립케 지시하고 갑진개혁운동을 주도하였다. 포덕 46년(1905) 12월 1일 신문광고를 통해 “교당을 자유롭게 짓겠다(종교집회를 자유롭게 하겠다).”라고 천하에 크게 밝히고 이듬해 9월 일본 어용단체 일진회에 합류되어 친일행위를 하는 이용구 등 59명을 출교처분하여 친일행위자와 천도교를 엄격히 분리하였다. 포덕 53년(1912) 서울 우이동에 봉황각을 건립하여 3년 동안 483명의 교역자를 독공수련을 통해 독립운동 지도자로 양성하여 포덕 60년(1919)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성사는 3·1독립운동 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포덕 61년(1920) 10월 22일 병보석 되었으나 회복하시지 못하고 병상에 계시다가 포덕 63년(1922) 5월 19일 환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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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노동자학습협회 동학혁명기념관 방문지난 5월 16일 오전 10시, 일본 도쿄노동자학습협회(대표 다카바다케) 임원들이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을 방문했다. 도쿄노동자학습협회 임원들은 이윤영 기념관장 안내에 따라 일본어번역 전시관설명판을 꼼꼼히 읽으면서 질의응답 등 통역사를 통해 학습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윤영 관장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해설 및 강의를 3단계로 나눠 설명하였다. 1단계는 동학 제1세 교조 수운 최제우,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3세 교조 의암 손병희, 4세 대도주 춘암 박인호 선생 등의 동학사상인 시천주(侍天主)·인내천(人乃天)·사인여천(事人如天) 등에 대해 쉬운 풀이로 설명하였다. 2단계는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장군을 중심으로 기포한 1차 동학농민혁명 즉 반봉건 민주시대를 열었던 역사적인 설명을하였다. 3단계는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반외세 동학 의병전쟁인 항일독립전쟁에 대해 설명하였다. 갑오년 동학의병전쟁과 기미년 3.1독립혁명에 대해 설명하면서 역사의 변천 과정인 동학과 천도교에 대해서 말하였다. 이윤영 관장은 “동학은 1860년 제1세 교조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도하였으며, 제3세 교조 의암 손병희 선생에 의해 동학이 천도교로 세상에 크게 선포되었다.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는 위대하고 장대하나 그 대표적인 역사에 있어, 동학 명칭 시대에는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고, 천도교 명칭 시대에는 3.1독립혁명을 일으켰다.”고 힘주어 말했다. 특히 도쿄노동자학습협회 임원들에게 강조한 것은 경복궁 점령사건에서 비롯된 2차 동학농민혁명 즉 항일독립전쟁에 대해서다. 1894년 6월 21일(양7.23) 새벽 0시 30분 오토리 케이스케 일본공사가 본국의 계획대로 용산에 불법으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에게 명령을 전달함으로써 경복궁 점령작전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서울을 포위하고 경복궁을 침범하여 조선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고종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여 조선군 무장을 해제, 이후 친일 내각을 출범시켰다. 일본군 조선궁궐 침범의 사실을 접한 전봉준과 김개남 장군은 8월 15일 남원에서 동학의병, 항일전쟁에 합의 기포했으며, 본격적인 2차 기포는 9월초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의병군이 삼례에서 봉기하였다. 또한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에 의한 9월 18일 전국적인 동학의병군 청산 총기포령이 내려졌다. 이에 의암 손병희 통령과 전봉준 대장의 양호의병창의연합군을 논산에서 결성하고 10월 21일 공주로 진격, 이인·효포 전투에서 승전하였으나 결국 11월 11일 우금티 전투 등에서 크게 패한 뒤 수만 명의 동학의병이 일본군특수부대 독립후비보병19대대와 친일관군에게 전국에서 학살당했다. 일본 도쿄노동자학습협회 임원들은 동학에 대해, 이러한 사실을 처음 듣는다고 고백하였다. 대한민국 국가보훈부에서 아직도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이 미뤄지고 있다는 말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놀라움을 표현했다. 이윤영 관장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동학농민혁명유족회·대한민국 국회 여야 의원들 일부에서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서훈을 촉구하고 있으며, 국회입법을 통해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전쟁이 독립전쟁으로서 정당한 평가와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구호선창과 재창을 제안하였다. 도쿄노동자학습협회 임원들은 모두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라.”를 세 번 외쳤다. 이어 다카바다케 대표 등 도쿄노동자학습협회 임원들에게 동학과 천도교 일본어번역책자를 기증하였으며, 이들은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며 많은 일본인들에게 동학의 진실을 알리겠다.’고 하면서 동학혁명기념관 방문을 마무리하였다. (사진 및 기사 제공 : 동학혁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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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여성 100년, 전국여성 교리강습회 15강(202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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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4년 11월 19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불연기연' 자연선택인가 한울의 설계인가 (정암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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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교구 여성회 제78주년 창립기념식 및 어버이날 잔치 행사개최부산시교구 여성회(회장: 진일당 강선순)는 포덕165년 5월 5일 첫 시일을 맞이하여 성화실에서 시일식을 마친 뒤 이어 기념식 및 2부행사로 어버이잔치를 개최했다. 기념식은 1부 진선당 박옥자 총무의 집례로 개식 선언- 청수 봉전 - 심고 -주문 3회 병송 -사계명 낭독: (화순당 박덕순) -연혁보고: (일심당 박시애) - 역대회장 및 활동보고는 영상으로 방영 -기념사: 진일당 강선순 여성회장 -격려사 : 정신당 박차귀 교구장- 천덕송 봉창: 동학의 딸 - 폐식심고로 봉행하였다. 이어 2부 축하공연에는 임원들의 큰절 올리기, 어버이은혜 노래 (하모니카연주: 성지당 허봉이, 수연당 공인자) - 독창: 정암 김길철 선도사(청산에 살리라, 보고 싶은 얼굴) 독창 : 신지당 김막례(법문) 제창: 70세 이상 남성(포덕행진곡, 고향의봄), 제창: 70세이상 여성회원(아리랑, 홀로아리랑)으로 많은 교인들에게 큰 박수를 받으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행사를 마치고 단체사진 촬영 및, 70세이상 어르신께 선물증정의 시간으로 즐거운행사를 마무리하였다. 한편 부산시교구 여성회는 포덕88년 5월8일에 창립하여 올해로 창립78주년을 맞이하였다. 초대 여성회 회장은 심신당 주영 회장이며, 부산시교구 창설자이시며 초대 교구장인 박찬표 교구장의 내수도이다. 현재까지 역대 17대의 여성회장이 배출되어 오랜 세월 동안 부산시교구의 주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부산시교구, 이어 천도교의 자랑이며 자부심과 자긍심을 널리 펼쳐 스승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노력하고 있다. 부산시교구 정신당 박차귀 교구장은 "역사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을 명심하면서 교인들의 화목에 앞장서며 말없이 실천하는 여성회 임원들과 회원들에게 무한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재 천도교 여성회에서 가장 많은 회원수를 확보하고 있으며, 시일마다 점심 제공 및 교단 각종 행사에도 솔선수범으로 앞장서고 있는 모범 여성회이기도 하다. 한편 부산시교구는 여성회 창립 78주년 창립기념식 및 어버이날 행사를 마치고 5월 10일에는 부산시교구 교인들과 함께 부산종교인평화회의 대표들을 초청하여 연극 <사람, 한울이 되다>를 관람하는 등 교구활성화 및 교인친화적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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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에게 듣다(1)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님을 만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를 거쳐 우리 역사가 흘러온 절망과 희망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 시절을 건너 온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야말로 한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구십 살이 넘은 생을 넘나드는 기억들을 풀어내며 선생의 생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선생의 말씀 속에 선생이 경험한 모든 것을 표현할 때 ‘감사한 마음’이었다. 주어진 삶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느껴졌다. 소개 부탁드립니다. 성함과 언제, 어디서 태어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이창번이라고 합니다. 1934년 1월 17일생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90세가 되는 거예요. 참 안 믿겨져요. 평안남도 성천군 대구면 원평에서 태어났어요. 완전히 시골이에요.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장남이고 남동생이 3명이 있었어요. 아버님께서는 해방 후에 천도교 활동을 하시고 증조할아버지가 왜정 때부터 천도교를 하셨어요. 어릴 때 기억에 남는 일 있으세요? 어릴 때의 기억이, 겨울철에는 갓을 쓴 할아버지들이 매일 찾아오고 그래요. 요새는 집에 손님이 오시면 커피 대접을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추운 데 오시느라 고생하셨다고 활활 타는 화롯불을 내왔는데, 그게 대접이 됐어요. 그 화롯불을 들고 증조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는 게 저의 일이었어요. 그 방에 들어가면 갓을 쓴 그 할아버지들이 한 서너 명 앉아 있거든요. 그걸 갖다 놓으면 증조할아버지가, “그래, 이 어른이 이런 분들인데 인사드려라.” 하시며 인사를 시키셨거든요. 그럼 그냥 시키는 대로 엎드려서 절을 하잖아요. 근데 그때 놀라운 것은, 그 할아버지들이 앉아서 절을 안 받아요. 같이 일어나서 똑같이 나에게 절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왜 그렇게 우습던지 그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나한테 절을 하더라고. 아마도 그 당시 천도교인들의 모습이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어린애도 역시 한울님을 모신 존재로 그렇게 인정을 하는 거예요. 방에서 나와서는 동생하고 막 그 얘기를 하면서 웃던 생각이 나요. 증조할아버님께서 천도교를 하셨고 대를 이어 교인으로 살아오셨군요. 당시의 신앙생활에 대해 좀 들으신 이야기 있으세요? 내 증조할아버지의 함자는 이병근.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저는 늘 증조할아버지하고 잠자리도 같이 했고, 식사도 같이 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증조할머니는 할아버님께서 천도교 하신 것에 대해 상당히 못마땅했던 것 같아요. 증조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다니면서 늘 얘기하셨는데, “저 밭이 옛날에 우리 밭이었는데 네 할아비가 저거 팔아먹었다고”, “저 산도 우리 산이었는데 네 할아버지가 팔았다고.” 3.1운동 때 논밭 팔아서 전부 교회에 바쳤다는 것 같아요. 그걸 할머니는 그게 아주 못마땅하게 말씀하셨는데, 나보고도 절대 천도교는 해선 안 된다, 이런 뜻으로 말씀하셨어요. 근데 해방이 되고 나니까 아버지가 완전히 천도교에 몰두를 하기 시작을 해서 청우당 당위원장까지 하게 되니까 할머니가 그때는 그냥 완전히 손을 들고 말았죠. 평안남도 쪽에 동학이 들어오게 된 시기는 동학혁명 이후였는데, 동학혁명이 끝나고 난 다음에 그쪽에서 학살들이 심하니까 그때 피난 오다시피 올라왔는데, 3.1운동 때는 제일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했거든요. 틀림없이 할아버지가 어떤 직책을 맡았던 것만은 틀림없어요. 동네 인근 할아버지들이 찾아오는 걸 보면 뭔가 어떤 직책을 맡으셨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몰랐어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건 할아버지 책상 위에 <창건사>, <창건록>이라는 책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노상 그걸 뒤져보았거든요. 그때가 해방 이전이니까 40년대 초였을 거예요. 왜정시대 때의 기억은 거의 없지만요. 어릴 때의 가정에서의 살림살이는 어떠셨어요? 사는 것은 그때 그렇게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굶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땅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집에 땅이 있어서 (농작물)들어오는 게 있었고 산도 또 있었어요. 그 산에 밤나무가 많았던 기억이 나요. 생활하는 데 그렇게 어려운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왜정 때도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서기로 있었어요. 배급을 타고 그러니까 배를 곯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해방이 되고 나니까 북한에는 청우당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먼저 입당을 해서 활동을 하고 그러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께 일을 도맡기는 거예요. 그때는 천도교가 아니었고 먼저 청우당에 들어가는 거예요. 48년도쯤 되니까 교회에서 시일을 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전까지는 그런 것을 전혀 몰랐어요. 시일 보는 것도 모르고 청수 모시는 것도 몰랐고요. 그때 아버지가 청우당 면당 위원장을 할 때인데 47년도에 여기 남한에서는 동학혁명을 삼월 이십칠일 날 기념식을 했는데 북한에서는 일월 일일날 했어요. 그때 면에서 동학혁명 기념식을 국민학교 교정에서 했는데 한 300명 모이더라고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기념식을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 천도교의 교세가 더 확장되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때 해방되고 난 다음에 그 천도교가 다시 일어나게 된 동기는 결국 동학혁명한 게 있잖아요. 갑오년 동학혁명이요. 많은 사람들이 동학혁명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농민들이 반상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서 일어난 동학, 그리고 3.1운동, 이러한 국군운동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3.1운동을 천도교가 주도했다는 건 공산당도 다 아니까. 그 시절에 어떤 기관이 그런 걸 한 데가 있었겠어요. 노동당도 김일성이가 뭐 만주에서 빨치산 운동했다고 하지만은 그거는 별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그런 작용을 한 거예요. 천도교는 농민을 위한 정당이고 바로 구국의, 나라를 구하려고 했던 정당이라는 게 나타나니까 그게 선전이 된 거예요. 그때도 민주당은 있었어요. 조선민주당이 있었는데, 거기는 선전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근데 우리 천도교는 그게 아마 강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천도교에는 그때 문화운동-어린이 운동 등 천도교 청년당 조직의 당 활동을 해본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 사람들은 당에 가서 당 조직을 어떻게 만들고, 선전을 어떻게 했는지를 전부 체험했던 분들이기 때문에 공산당도 오히려 처음에 시작할 때 회의를 진행할 줄 몰라서 천도교 와서 배워갈 정도였어요. 회의 진행을 누가 해봤나요? 당시에 천도교인들은 다 지식인들이었잖아. 그리고 그때 당시에 또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천도교 활동을 하면서 그리고 이후에도 다 연결이 돼 있어요.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었으니까 활동할 수가 있어요. 노동당에 들어간 사람들은요, 농촌에서도 제일 불쌍하게 살던 사람들, 학대받고 살던 사람들이 노동당에 들기는 했지만 아무 지식이 없는 거예요. 동학혁명 기념식 때는 청우당 대표, 노동당 대표, 민주당 대표가 나와서 연설을 하는데, 천도교 대표는 그때 막 책상을 치면서 하는데, 노동당 대표는 연설문을 써 가지고 나와서 낭독을 하는데 뜨물뜨물해요. 지식이 없었으니까. 그때 그랬어요. 그러니까 청우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거예요. 해방이 되고 나서는 식민지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청우당에 가입을 했고, 청우당에서 뭔가 기대를 했겠죠. 민족 의지를 좀 불태우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1948년에 천도교 교인이 170만 명 정도가 됐던 거예요. 그러다가 1950년도 되니까 270만으로 늘어나요.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거죠. 그때 청우당의 기록을 보면 3.1운동 재현하는 것, 그리고 재현 운동으로 크게 활동을 하면서, 1948년 유엔총회서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을 실시해서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결의를 했거든요. 그래서 유엔 감시단이 나와서 선거를 하게 했는데 북한은 거절한 거예요. 감시단이 남한은 들어왔는데 북한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죠. 그렇게 되니까 할 수 없이 유엔에서 다시 결의를 하기를, 유엔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 먼저 한다, 그렇게 그해 5월 10일인가 선거를 하거든요. 그때 대한민국 정부가 8월 15일날 수립이 돼요. 북한도 곧 따로 선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민공화국을 새로 세우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걸 만들기 전에 남한의 최린 선생을 비롯한 천도교가 그 당시에 분열이 돼. 통일이 안 되면 이게 100년이 갈는지, 200년이 갈는지 모른다 이거야. 신라 백제가 통일할 때까지 천 년이 걸렸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런 문제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든 단독정부 수립은 안 되고 통일 정부 세워야 한다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3.1재현운동이에요. 그래서 그때 남한의 최린 선생 등이 북한에다가 지령을 보내 가지고 3월 1일날 남북한이 다시 한번 일어나자, 3.1운동을 다시 한번 일으키자 하는 재현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남한은 일어나질 않았어요. 북한만 가서 일을 하려고 여기에서 그때 오근 선생 선생 부인이 그 유은덕 여사인데 그분이 밀사로 올라가고 또 한 분, 박현화라는 분을 밀사로 보낸 거예요. 북한에서 온 분인데 그런데 박현화 이분은 지령문을 가지고서 평양까지 도착해서 전달을 하고 무사히 내려왔는데 오근 선생 부인, 유은덕 여사는 가다가 경비한테 발견이 되니까 도망을 치다가 그때 눈이 왔는데 신발 벗은 채로 도망을 치고 하룻밤을 그냥 굴속에 숨어 있다가 동상에 걸린 거예요. 그래서 평양을 가지 못하고 황해 도당위원장이 그때 김용환이라고 하는 분이 도당위원장인데 이분이 황해도 인민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었어요. 천도교 도당 위원장이면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는데 유은덕 여사의 남편이랑 같이 청년당 활동할 때 같이 활동했던 분이거든요. 그 집으로 찾아간 거예요. 그 평양으로 못 가고 그러고서 그때 평양 보낼 때 지령이, 이거는 김일대 선생 그러니까 평안남도 도당위원장 김일대 선생 외에는 절대로 이걸 전달하면 안 된다. 밝히면 안 된다. 해서 몸에 감추고 있으면서 그 안에서 얘기를 못한 거예요. 김용환 씨한테도 도당 위원장한테도 얘기를 못하고 아버님이 불편하다고 그래서 내 한 번 병문안 왔다가 이렇게 됐다고 그렇게만 속이고 있는데 근데 이제 이쪽에서 그 박현화 씨가 갔으니까 북한 천도교에서는 다 알았어요. 그 내용을. 그러면서 또 한 분이 올 거라고 했는데 오질 않거든요. 도당, 군당, 중앙당 회의에 갔는데 김용환 씨가 회의에 가서 이 사람(박현화씨) 고향이 평안북도 구성인가 그랬거든요. 구성 사람을 만나니까 당신 고향 사람 누가 우리 집에 와 있다고 그때 얘기가 그러니까 아, 유은덕 여사가 거기에 와 있구나. 그래서 그분이 돈을 가지고 내려가 가지고 밀사 지령을 다 갖고 있으니까 빨리 이제 남한으로 내려가라. 여기 있지 말고 내려가라고. 그때 공산당에서는 그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미행을 한 거예요. 그리로 가는 걸 알고 그 사람이 떠나자마자 체포를 해버렸어요. 그래서 이분은 그때 돌아가셨어요. 사형당해서. 그렇게 된 게 3.1재현운동이에요. 그때 천도교인 1만 8천 명이 구속됐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선생님 개인사를 좀 여쭤보면 언제 남쪽으로 내려오세요? 1950년 이제 6.25가 일어났죠. 그해 7월 8일날 나는 그때 양덕고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북한에서는 4월에 개학이 아니라 9월에 개학을 해요. 그래서 그때 8월 달이니까, 한참 졸업시험을 칠 때였어요. 시험을 치르는 동안에 어느 학교에서 인민군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학생증을 안 주니까 집에 갈 수가 없는 거예요. 북한에서는 공민증이 신분증인데 그때 우리는 학생증을 가지고 있었고 가는 데마다 검문소가 있어서 그것 없이는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시험 치고서 빨리 가려고 했는데 시험 치다 말고 갑자기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치더니 강당으로 가래요. 거기서 바로 군대로 가게 된 거예요. 학생들 전체가 다 간 거예요. 2학년, 3학년생들이. 1학년은 아니고. 그때 나는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집에 연락도 못하고, 그날 제가 시험 칠 때 가지고 있던 책갈피에다가 편지를 쓴 거예요. 동생과 아버지한테 편지를 써 가지고 책갈피에 넣고 평양으로 간다니까,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책갈피에 넣어 가지고 보따리에 책을 이만큼 싸가지고서 새벽에 우리 부락 앞을 지났는데 그 물길로 돼 있는 길에다가 책을 확 던지고 갔어요. 후에 월남한 사람한테 들으니까 그 책이 우리 집에 도착이 됐다고 그러더라고요. 편지를 동생들이랑 봤다고요. 그렇게 해서 내가 평양에 갔어요. 그럼 그때 바로 군에 입대를 하신 건가요? 바로 그 다음 날 원산으로 들어가서는 행군을 해서 삼척까지 내려갔습니다. 거기에서 입대를 했어요. 정식 부대에 9451육전대라고 하는 해병대예요. 거기서 입대를 해가지고 있다가 며칠 안 있어서 바로 또 올라와 가지고 원산 원부대가 거기에 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해병대예요. 거기 도착을 해서 한 10여 일 동안 있다가 바로 서울 쪽으로 나오기 시작을 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쭉 나오다가 낙동강 쪽에서 저지를 당하니까 인민군이 내려가다가 거기서 이제 왜관 있는 데서 혈전이 붙으니까 낙동강 도하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해병대니까 해병대 1개 대대를 그리로 보냈는데 내가 거기에 끼어 들어갔어요. 들어가서 생전 처음 전쟁이라는 걸 하게 되었습니다. 17살, 18살 때예요. 최전방에 가니까 인민군은 벌써 낙동강을 건너갔더라고 그리고 3일 후에 반격을 하고 쫓겨오기 시작하는데 우리 진지에 떨어지는 포탄 파편을 맞은 거예요. 저도 파편 맞아가지고 허벅지 다리에 피가 그냥 흐르는데.. 그래서 광주로 호송되어 간 거예요. 광주로 가니까 우리 원부대가 광주에 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약이 없는 거예요. 호송되는 것도 엠뷸런스를 타고 후송을 하는 게 아니라, 밤에 이쪽 부락에서 저쪽 부락으로 연결을 하고 그런 식으로 이동을 하는 거예요. 한 3~4일인가 지나고 나서야 광주에 도착했는데 바로 우리 부대가 있더라고요. 여단 사령부에 가서는 후퇴하기 시작했어요. 인천 상륙하는 바람에. 그때가 50년도 9월 달이에요. 그리고 내가 포로된 게 10월 8일날이니까 석 달 동안 인민군 생활을 한 거죠. 인민군 생활은 어땠어요? 그리고 어떻게 포로가 되셨나요? 인민군 생활은 그렇게 어렵진 않았어요. 그때 당시에는 한창 승리해서 내려갈 때니까 훈련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서 소총알 세 발 쏴보고 전방에 투입이 되니 잘 싸우지 못해요. 후퇴하다가 바로 귀순해버리고 말았어요. 부대에서 이탈해서 귀순해 나와서는 포로가 돼서 부산으로 갔죠. 포로 수용소로 간다는 건 몰랐어요. 포로수용소라는 그 말 자체도 몰랐어요. 그저 귀순하게 되면 그냥 끝난 줄 알았어요. 총만 뺏고 그냥 보내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수용소 생활을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이후로 시작된 수용소 생활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거기 가니까 낙동강에서부터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인천 상륙 후 포위되어 포로들이 무더기로 들어오는 거예요. 수용소도 미처 짓지 못한 상황이었고요. 처음에는 포로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모르고 수용소를 만들어 놨는데 감당을 못한 정도로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을 하는 거야 포로들이. 그러니까 그 옆에도 수용소를 만들고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거제도에다가 만들기 시작했어요. 너무 많이 모이니까. 그때 거의 7~8만 명 정도가 포로가 되어 들어왔으니까. 거제수용소는 골짜기예요. 제법 넓은. 60수용소 70수용소, 80수용소, 90수용소 이렇게 4개 수용소가 있었어요. 그리고 수용소마다 91, 92, 93, 94, 95 이렇게 나오거든요. 나는 78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70수용소 중 78번수용소에 들어갔는데 여기 들어가니까 완전히 빨갱이 수용소지. 인민군들이 있는. 처음에 들어가서 제가 놀란 게. 들어가니까 밖으로 북한에 민주 선전실에 들어간 것처럼 김일성 초상화를 연필로 그려서 붙여놓고 그런 상태예요. 거기 있다 죽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여기는 안 되겠다 해서 그때 기독교인들이 선교사들한테 탈출한다고 약속을 했던 모양이에요. 이 사람들 탈출할 때 같이 탈출한 거예요. 탈출해 가지고 갔는데 91수용소로 배치가 됐어요. 거기서 그 이동찬 선생을 그때 만나게 된 거예요. 감찰대 부대장을 했는데 거기에 가니까 빨갱이 수용소에서 온 놈들이라고, 여름철 8월 달인데 옷을 그냥 팬티까지 싹 벗겨요. 홀랑 벗겨가지고 조사를 하는데. 무슨 지령문 가지고 온 게 있나 그거 본다고요. 한 사람씩 감찰대에 끌고 들어가서 심사를 받는데 북한에서 심사를 한다는 건 고향이라든가 입대는 언제 했느냐, 어디에서 귀순했냐 뭐 이런 것들이에요. 북한에서 무슨 당에 들었냐고 물어서 천도교 청우당에 있었다고 그 얘기했더니 감찰대 부대장 그 양반 이동찬 씨가 뒤에 있다가, “너 천도교했어?” 묻더라고. “예, 천도교 했습니다.” 그랬더니 물어보는 게, 1세 교조가 누구야? 이거 물어봐 수운대신사입니다. 말했지. 2세 교조는 누구야? 또 물어봐. 해월신사입니다. 라고 또 답했지. 3세까지 물어보더라고. 의암성사라고 했더니 “아. 이 새끼 진짜 하나 왔네” 그러더라고. 참 드라마틱한 순간이네요. 선생님이 천도교인이라는 걸 밝히고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인데, 이후엔 수용소 생활이 어땠습니까? 난 그때부터 심사는 안 받았어요. 천도교인이라니까 봐주기 시작을 해서, ‘쇼리’라고 해요. 당번병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땐 식사가 좀 적어가지고 배가 고팠거든. 한창 먹을 때니까 배가 고파. 그런데 감찰대에 있으니까 마음대로 먹는 거예요. 내가 가서 밥을 타오는 당번병 노릇을 하고 그랬으니까. 그때 2대대 경비대는 모두 천도교인들만 모인 거예요. 계시던 분 중에는 연대통역관으로 있던 사람이 안명록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미군 사령관 통역을 하고 있으니까 그분이 지금 살아계세요. 그래서 당산교구에서 나하고 같이 활동하고 그랬던 분이에요. 그때 계셨던 수용소가 어디었는지, 또 그 안에서의 일들 기억하세요? 65수용소에 있다가 78수용소 2대대에 갔다가 다시 그다음에 91 수용소로 가서 감찰대로 떨어진 거예요. 감찰대가 당번병으로요. 그때 2대대가 천도교인들만 모여 있었기 때문에 시일이면 시일식을 보러 그리로 갔어요. 그때 경비대장으로 있던 분이 이창근 씨라고 하는 분이 여기에 나와서 시흥교구장을 했어요. 석방돼서 나와서 시흥교구장을 했는데 거기에 이제 김월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영복 교령님이 교령할 때 감찰 상임감사로 계셨고요. 그다음에 그 황승훈 씨라고 하는 분이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데 이분도 역시 천도교 경전을 거의 외웠던 분이에요. 선생님, 그러면 그 수용소 안에서는 천도교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됐어요? 본인이 천도교인이라고 이렇게 밝히고 밝혀지고 알려지는 계기가 있었나요? 빨갱이 수용소에서는 거의 몰라요. 그때는 자기 신분을 절대 밝히지 않았어요. 내가 그때 신분이 노출될 것 같아서 그 기독교인들 탈출하는데 같이 끼어서 나온 거예요. 북한에서 천도교를 했다는 게 알려지면 박해를 받을 것 같았거든요. 거기서는 밝힐 수가 없었어요. 나하고 같이 자는 사람은 내가 천도교인이라는 걸 알았어요. 같이 자면서 그 양반이 천주교 신자가 됐는데 그분이 자꾸 천주교로 오라고 그러는 바람에 내가 그때 난 천도교에 있다고 그 얘기를 했지요. 나도 그 천주교회 신앙하는데엘 몇 번 나가봤어요. 그때 수용소에는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가지고 성경을 수없이 뿌렸어요. 그때 마가복음, 누가복음 이런 것들을 단행본으로 찍어 가지고 그걸 돌리고 그랬거든요. (계속) 인터뷰영상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UMIi5P5Dfq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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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산 아래 타오르는 독립정신, 청주 삼일공원청주 삼일공원에는 충북 출신 민족대표들의 동상이 줄지어 있다. 그 모습이 흡사 ‘어벤져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후에 변절한 것으로 밝혀진 정춘수의 동상은 공원 건립 16년만인 1996년 철거돼, 현재 그 자리에는 횃불을 움켜쥔 두 손이 다른 5인과 함께 우뚝 서 있다. (3.1운동 당시 어두운 밤 횃불만세운동을 벌였던 충북의 선열들을 기리기 위함이다.) 우암산 기슭 우회 도로변에 위치한 삼일공원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직접 공원에 서서 민족대표들의 얼굴과 마주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3.1 혁명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여섯 명이 충북 출신이라는 놀라운 사실과 함께 이를 기리고 위업을 계승하기 위해 공원을 건립하였다. 의암 손병희, 우당 권동진, 청암 권병덕, 동오 신홍식, 은재 신석구, 청오 정춘수(변절) 6인이 이곳에 우뚝 서 있다. 청주시는 삼일공원을 올해 1월 ‘청주미래유산’으로 선정하였다.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 이후 국권을 피탈당한 식민지에서 1919년 3월 1일 민족은 일본의 지배에 항거해 분연히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한민국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알린 3.1만세의 외침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1920년, 3월 1일을 '독립선언일'로 지정하였으며 현재에 이르러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삼일절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충북 지역에 현존하는 대표적인 현충시설로 알려져 있는 삼일공원은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이다. 청주미래유산은 향토유적과 등록 문화재를 제외하고 다수 시민이 체험하거나 기억하는 사건, 인물 또는 이야기가 담긴 유, 무형의 근현대 유산을 의미한다. 이곳 삼일공원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추모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평소에는 시민의 발길이 뜸하다. 충북도는 삼일공원을 역사적 공원이자 명소로 조성하기 위해 지난 2022년 삼일공원에 독립운동가 동상 10기를 추가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했으나, 동상 형상 제작과정에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같은 해 9월 사업을 중단했다. 본지에서 취재한 삼일공원에 세워진 충북 출신 민족대표 5인 동상의 비문을 살펴본 바, 오류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권동진 선생 동상의 비문에 따르면, 선생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의암 선생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한 후 천도교를 지도하여 도사가 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본지 취재 결과 권동진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 관련자로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의암 손병희 성사를 만나 동학에 입교하였다. 삼일공원의 정비 사업이 진행된다면 이 또한 새롭게 바로잡아 제작되기를 기대한다.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1혁명 당시 민족의 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한 인물들이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등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며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였다. 이로 인해 다수의 민족대표들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의암 손병희 성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1922년 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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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으로 만난 동학 '사람, 한울이 되다'(부제 :동학, 이장태 장군)극단 창은 지난 10~12일 부산예술대 내 원곡예술관에서 특별기획 공연 ‘사람, 한울이 되다’(부제:동학, 이장태 장군)를 무대에 올렸다. 이 공연은 동학혁명 130주년 및 수운 최제우 탄신 200주년을 기념하여 김동련 작가의 소설 ‘동학’을 희곡으로, 백정 출신 이장태 장군과 민중을 이야기한다. 백정인 이장태(만덕)는 이혼한 양반댁 여인을 아내로 맞이 하면서 ‘동학’ 즉 조선의 백성은 사람이 하늘인 세상, 자주와 평등 대한 갈망으로 동학혁명을 일으켰듯 사회의 주류인 양반 세력과 나아가 일본에 대항하여 신분과 관계없이 억압받던 이들에게 새 희망을 주고자 봉기를 일으킨다. 이장태는 평등이라는 말에 매력을 느껴 ‘동학’에 가입하여 장사인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는 인물을 그린다. 이 작품은 허구를 포함하여 극을 구성하였고 대체적으로 역사에 맞게 진행하려고 노력하였다. 극을 진행하는데 있어 대사 속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필요한 언어들을 삭제하고 배우들의 몸짓이나 행동(전투 장면 등)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 단순한 동작이나 행동들을 극장 공간의 크기에 맞춘 연기를 연출하고 각 인물들 간의 관계성에 따른 반응, 움직을 보여주어 관객들에게 더 많은 볼거리 제공하였다. 극단 ‘창’은 역사를 토대로 내일의 희망을 찾기 위해 이 공연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공연은 부산광역시, 부산문화재단의 후원, 전국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연대, 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부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천도교경상도연원회, 부산예술대학교 등의 특별후원으로 제작하였다. 5월 10일부터 13일까지 5회에 걸쳐 공연하였으며 관련단체 및 후원단체에서 적극적으로 관람하여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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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깃발을 올린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 산청 기념비 앞에서포덕164(2024)년 5월 11일 오전11시 경남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앞에서 천도교인, 유족, 기관장, 동학관련단체, 지역농민회, 지역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30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을 봉행하였다. 기념식은 경남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주최하고, 산청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가 주관하며, 산청군, 산청군의회, 천도교중앙총부, 천도교경상도연원회, 산청양수발전소가 후원하였다. 기념식에 앞서 하동 고성산 전투에서 패퇴한 170여 동학농민혁명군은 지리산을 넘어 산청군 시천면 중태리 마을로 피신하였으나 일본군의 추격으로 전원 피살되어 중태리 가장골 일대에 암매장된 유적지에서 산청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하재호 회장과 임원진, 마을이장, 주민이 참석한 가운데 정의적 진주시교구장(경남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의 집례로 추모식을 봉행하였다. 본 행사인 기념식 집례는 천도교 사천교구 계암 하재식 동덕이 맡아 진행하였다. 식전행사로 한국문화예술원 우정숙 사무총장이 시 「빛이 된 사람 해월 최시형」(신채원 작) 낭송이 있었다. 배경음악과 함께 낭송된 시는 경축 기념식을 여는 심금을 울리는 태동이었다. 시암 정의적 경남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으로부터 내빈소개가 있었다. 산청군 외 기관장과 동학관련단체로 경상남도 도의회 신종철 운영위원장, 산청군의회 최호림 총무위원장, 김재명 시천면장, 권순혁 산청군문화체육과장, 성연석 전 경남도의원, 박정일 남대리이장, 남상용 내대리이장, 손경모 중태리 이장, 문일동 산청문화원 부원장, 이주태 산청양수발전소과장, 서봉석 산청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부회장, 동학농민혁명기념 사업단체로 이 용 부산대표, 김환용 남해대표, 정성환 하동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소개하고, 이어서 천도교 기관장 및 지도자 소개가 있었다. 정덕재 감사원장, 신명식 유지재단이사장, 정의맹 남정포도정, 최봉수 순원포도정, 원로이신 하암 김덕칠선도사, 원암 백복기선도사, 참석교구장 소개를 끝으로 참석한 내빈소개를 모두 마쳤다. 본 행사 기념식은 먼저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천도교 의절인 청수봉전을 부산시교구 성지당 허봉이 동덕이 청수봉전가 음악에 맞추어 엄숙히 봉전하였다. 시작심고, 주문3회 병송은 음향에 맞추어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이어, 서봉석 산청동학농민혁명기념 사업회 부회장의 동학혁명 폐정개혁 12개조 낭독, 하재호 산청동학농민기념사업회 회장의 기념사가 있었다. 하재호 회장은 산청군과 의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으로 오늘 기념식과 지난해 동학농민혁명군 산청지역 유해 발굴사업이 순조롭게 완료되어 유적지 조성사업을 추진하는데 감사드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130년 전 이곳 영남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보국안민”, “제폭구민” 혁명의 깃발을 올린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이 아직까지 사회적, 국민적 관심이 부족한 것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느끼며, 선열들의 정신이 후세에 전달되도록 정성을 다하겠다고 피력하였다. 또한 천도교중앙총부를 대표하여 율암 신명식 천도교유지재단 이사장의 축사가 있었다. 신명식 이사장은 축사에서, 우리 근대사에 있어 자주적 근대화와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동학혁명의 봉화가 타오른 지 130주년이 되는 기념일을 맞이하여 동학혁명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밑거름과 후일 천도교의 현도와 3.1독립 운동의 근간이 되었고 전국적으로 동학혁명과 관련 있는 각종 기념물이 설치되고 지역마다 동학의 역사적 재조명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므로 천도교의 역할이 중요한 시기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청수모심과 주문 등 동학혁명군이 신념으로 용기를 내어 나아갈 힘이었고, 생명이자 피로써 청수모심과 주문수련을 하셨던 선열들의 마음을 지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였다. 기념탑 건립부터 기념식지원 등 산청지역 동학혁명군유해발굴사업에 아낌없는 관심과 지원을 해주신 산청군 이승화 군수님과 의회에 감사를 드리고, 아울려 기념 사업회 하재호 회장님과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경상남도의회 신종철 운영위원장의 축사와 시천면 김재명 면장의 축사가 있었다. 이어서 음향반주에 맞추어 동학혁명기념가를 천도교부산연합합창단의 선창으로 합창하였으며, 계암 하재식 집례의 심고문 발성으로 기념식을 마치는 다함께 심고를 한 후 기념식 본 행사를 마쳤다. 식후 문화행사로는 천도교 부산연합합창단의 우렁차고 경쾌한 합창공연과 함께 산청 출신 대중가수 하지하씨의 공연과 함께 마지막으로 민중가수 ‘맥박’팀의 공연을 끝으로 제130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을 모두 마쳤다. (사진 및 기사제공 : 천도교진주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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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1922년 5월 1일, 최초의 어린이날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첫 어린이날 행사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크게 열었다. 이에 1년 앞서 어린이날이 제정된 1922년 5월 1일을 기억하자. 102주년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과거의 오늘,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린이날을 선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919년 3·1혁명 당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받고 1주일만에 석방된 방정환 선생은 1920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동경 도요대학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한 선생은 어린이들의 인권신장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다.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한 선생은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한다. 소춘 김기전 선생은 1921년 4월부터 천도교 청년회 소년부를 특설해 5월에는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총재를 역임하며 박내홍, 방정환 등과 함께 어린이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22년 어린이날 제정, 세계 최초의 어린이헌장인 '소년운동의 기초사항'을 선포하였다. 옛 기사로 보는 오늘 1922년 5월 1일, 첫 어린이날이 제정된 날이다. 이날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의 날' 취지와 선전문, 거리 행렬과 자동차 선전대, 저녁의 축하기념식과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1921년 5월 1일 창립된 천도교소년회 1주년을 기념해 1922년 5월 1일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였다. 천도교 청년들은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라'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를 잘 키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는 「십년 후 조선을 려慮하라」, 「조선 초유의 소년일」, 「가로로 취지 선전」, 「조선에서 처음 듣는 어린이의 날」 등의 기사와 선전지를 소개하였다. 십년 후 조선을 여하라 십년 후 조선을 여하라 조선 소년 운동의 시작으로 금일 천도교 소년회의 활동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 과거와 현재는 소용이 없고 그들에게는 오직 장래가 있을 뿐이다. 더욱이 조선사람은 과거와 현재에 무엇을 가졌는가. 설령 지난 일과 당장 눈앞의 일이 화려하다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으리오. 우리는 다만 내일과 내년의 화려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따라서 새로운 살림을 부르짖는 우리 사회도 장래를 위하여 사는 것이오, 장래가 곧 우리가 춤출 때라는 것은 누구나 바라고 믿는 바이다. 한 나라 한 사회나 한 집안의 장래를 맡은 사람은 누구인가. 곧 그 집안이나 그 사회나 그 나라의 아들과 손자일 것이다. 장래에 희망을 두고 어린이에게 장래를 맡기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어찌 어린이의 일을 등한시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살림을 부르짖는 우리 사회에서는 과연 아들과 손자를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옛날 일은 지나간 일이라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수년 동안 우리의 학부형은 그 자손을 위하여 이전에는 없던 애를 써왔다. 다시 말하면 그 자제를 가르치기에 열심히 하며 여러 가지로 자손을 인도하는 데 노력한 것은 근래의 교육열과 향학열이 증명하는 바다. 이는 실로 경하할 만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학부형 가운데에는 배우고자 하는 자식을 막아서 한강에 빠져 죽게 만드는 완고한 일이 없지 않다. 이러한 일을 볼 때 뜻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한숨을 쉬지 않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오. 이에 자극을 받은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를 위한 부모의 도움이 더욱 두터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을 기회로 삼아 ‘어린이의 날’이라고 이름하고 “항상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쓴 네 가지의 인쇄물을 시내에 배포하며 소년회원이 거리마다 늘어서서 취지를 선전했다. 이러한 일은 조선 소년 운동의 처음이라 할 수 있으며, 다른 사회에서도 많이 응원하여 “조선사람의 10년 후의 일”을 위하여 노력하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1일, 「10년 후 조선을 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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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생명관: 대생명(大生命) (2)(지난 호에 이어) III 해월이 ‘갓난아기의 마음(赤子之心)’이라고 한 이 마음이 바로 내 안으로 두번째 내려온 ‘신령(神靈)’이다. 외유기화에 의하여 마련된 유기체적 몸에 신령이 내려온 것이 바로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본래 영이라 할 수 있다. 즉, 마음이란 내 몸에 내려온 신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월은 ‘심령(心靈)’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으며 의암은 ‘성령(性靈)’이라는 표현을 애용하였다.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 영은 오직 하나의 영일 뿐이다. ‘신령’, ‘심령’, ‘성령’으로 표현되는 영성은 근대철학에서는 종교영역에서나 다루는 낯선 개념이었다.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현대문명에서 영(靈)은 더욱 생경한 개념일 수 있다. 시대정신에 투철한 현대인을 위하여 영성이 무엇인지 조금 풀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천도교에는 영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개념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풀어서 이해해 보자. “천령(天靈)이 강림하였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가?”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수운은 “무왕불복의 이치를 받은 것”이라고 대답하게 된다. 무왕불복은 수운의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역학(易學)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다”고 해석되는데 이에 대한 적지 않은 기존 논의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거울의 비유로 대신하고자 한다. 신령이란 그 앞에 오는 것을 하나도 예외없이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는 것이다. 이 영성의 거울은 어디 특별히 머무는 곳이 없다(無所住). 특정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곳이나 있지만 상주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역설적 표현으로 들리는 것은 성령 자체의 특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수운은 도는 ‘보려하나 볼 수 없고 들으려 하나 들을 수 없다(視之不見 廳之不聞)’고 하였고, 의암도 성심본체는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고, 물으려 해도 물을 곳이 없고, 잡으려 해도 잡을 곳이 없다’고 표현하였다. 해월은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않는데 이르러야 가히 도를 이루었다 할 것이요(視之不見 聽之不聞 可謂成道也)”라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을 근거로 하여 ‘무극대도’, ‘천도’, ‘성심본체’, ‘영성’은 세상과 사물과 인간을 떠난 초월성으로 이해되지만 ‘적자지심’으로 불리우는 ‘본래의 나’의 마음으로 내려와 임재(臨在)한다. 그러므로 해월은 “한울은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 안에 계신다”고 하였으며, 의암은 성령은 “전부 세간과 합치된 것이요, 세간에 나타난 것(全然合世間的出世間的)”이라고 표현하였다. 수운 또한 ‘여세동귀(與世同歸)’라는 표현으로 천도와 천운은 세상과 더불어 함께 함을 강조하였다. ‘중첩’으로 번역되는 양자역학의 Superposition 개념은 양자뿐만 아니라 영성을 묘사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즉 영성은 특정 위상(位相)을 넘어서지만 세상과 만물 그리고 사람을 떠나지 않고 그 한가운데 중첩되어 있으면서도 보려하나 보이지 아니하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도 없는 무형계라 할 수 있다. 도가의 무(無)나 허(虛), 불가의 공(空) 개념들도 세상과 만물 그리고 사람을 떠난 초월적 절대영역이 따로 있지 아니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나 오히려 니힐리즘처럼 오해되곤 한다. 영성은 ‘새는 하늘을 날지만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도인은 강을 건너지만 물에 젖지 아니한다’라는 비유로 묘사되기도 한다. 천도교사에는 수운이 억수로 오는 빗속에 부친 성묘를 다녀왔지만 갓과 도포가 젖지 아니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해월은 ‘땅을 어머님 살처럼 공경하게 되면 빗속에 진흙길을 걸어도 버선이 더럽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금강경]의 “응무소주생기심(應無所住生其心)”은 부처의 마음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소명해주는 유명한 구절이다. 비어 없는 이 경지에 응하여 마음을 쓰는 것이 바로 부처의 집착없는 마음 씀씀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중생은 비고, 고요하고, 없는 마음에 조응(照應)하여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 물욕, 감정, 집착, 편협함에 사로잡힌 마음을 쓰는 것이 차이점이다. 의암은 [후경2]에서 나의 성품과 나의 마음을 묘사하는 가운데서 ‘항상 머물러 있는 곳도 없다(常無住處)’는 표현을 하였다. 위상과 시간에 매이지 않으므로 해탈의 마음이 되고 자유로운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의암은 [무체법경]에서 “한울님이 반드시 바르게 보이고 바르게 듣는다(天必正示正聞)”고 하였다. 바르게 보인다는 것은 거울처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바르게 듣는다는 것은 ‘한울님은 높으시나 낮은 소리도 다 듣는다는 천고청비(天高廳卑)’의 뜻이라 하겠다. 보이지도 않는 빈 거울이지만 그 앞에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정확하게 비추어주는 성령을 이렇게 말하였다. 의암은 ‘정시정문’을 누구나 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다. “마음이 흰 것을 구하고자 하면 흰 것으로 보이고, 붉은 것을 구하면 붉은 것으로 보이고, 푸른 것을 구하면 푸른 것으로 보이고, 노란 것을 구하면 노란 것으로 보이고, 검은 것을 구하면 검은 것으로 보이느니라.” 그러므로 아득한 고대로부터 성령을 거울에 비유하였다. 성령은 구하는 그대로 주기 때문에 ‘말없고 소리없는 한울님이 가장 무섭다’고 해월은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성령은 특별히 머무는 곳이 없이 어떻게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며 분명하게 들려주는 것일까? 우주를 ‘혼원일기’로 생각하면 자명해진다. 해월은 동양의 전통에서 말하는 ‘귀신, 기운, 음양, 조화는 오직 하나의 기운(一氣)일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우주는 한 기운의 소사요, 한 신의 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만유는 오직 하나의 신, 하나의 기운, 하나의 이치로 꿰뚫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주가 하나의 기운, 하나의 이치, 하나의 몸이므로 어떤 것이 가면 반드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 가더라도 되돌아올 수 없다. 길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되돌아 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는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로 통하기 때문에 생각이든 기운이든 행동이든 일단 촉발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 상대성 우주론이라면 증대되거나 감소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상대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몸과 마음에게는 모든 것들이 상대적일 뿐이다. 중첩과 얽힘이 양자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인 것처럼 정시정문도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개념일 뿐이다. 우주가 하나라는 것은 영의 세계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신령(神靈)은 오직 하나(唯一無二)이기에 신령이 곧 내 마음의 영이자 내 성품의 영이다. 타자성과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性靈)’과 ‘심령(心靈)’은 ‘성령(聖靈)’과 다르다. 성령(聖靈)은 개별적 존재이지만 천도교에서 말하는 신령, 심령, 성령은 오직 유일무이하다. 다시 말하자면 한울님의 성령과 수운의 성령, 해월의 성령, 의암의 성령, 역대 조상들의 성령, 인류전체의 성령이 나의 성령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논의는 [성령출세설]에서 아주 상세하게 개진되어 있다. 의암은 “대신사는 이미 성령으로 출세하셨으니 일체의 물건마다 마음마다 다 이 성령의 출세한 표현이 아님이 없는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만유와 만인을 오직 하나의 성령이 관통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나의 본래의 마음을 신령(神靈)의 강림, 제2의 강령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강령이 되지 않은 마음에게는 심령이나 성령(性靈)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첫 호흡을 할 때 예외없이 신령(神靈)이 내려와 내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심령(心靈)이 자신 안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심령을 믿지 아니하고 키우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심령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해월은 “오직 한울을 양(養)한 사람에게 한울이 있고, 양치 않는 사람에게는 한울이 없다”고 하였다. 수도를 하여 한울님을 키우는 제3의 강령인 ‘각지불이(各知不移)’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이 가장 순수한 영을 타고났지만 우주간의 모든 생명체도 모두 다 이 ‘무량광대’하고 ‘청정무구’한 신령계로부터 마음을 받았다. 수운이 [불연기연]에서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갓난아기가 어머니를 알아보는데 어찌된 일인지, 가난해도 돌아오는 제비는 주인을 알아보아서 그렇게 하는지, 부모를 되먹이는 까마귀가 효도를 알아서 그러한 것인가를 묻고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수운은 [불연기연]의 마지막 구절에서 “조물자에 붙여보면 그렇고 그렇고 그러한 이치”라고 대답하고 있다. 조물자가 곧 성령임을 이해하면 이러한 질문들에 쉽게 답할 수 있다. 갓난아기가 되었던, 제비가 되었던, 아니면 까마귀가 되었던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성령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다면 갓난아기가 방금까지 한 몸이었던 어머니를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제비가 자기 집을 찾는 일도 당연한 일이며, 까마귀가 어미를 먹이는 것도 다 큰 자기가(새끼) 쇠약해진 자기를(어미) 먹이는 것이므로 그렇고 그렇고 그러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신령을 잊거나 잃어버렸다면 이와 같은 앎은 있을 수 없다. 성령이 아직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하나의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자기가 자기를 아는 일에 불과하므로 그렇고 그렇게 알 수 있고 할 수 있게 된다. IV 외유기화라는 제1강령을 통하여 생명체는 우주의 한 기운에 접하여 잉태하여 유기체를 이루고 내유신령이라는 제2강령을 통하여 생명체는 청정무구한 성령의 마음을 온전하게 받는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태어날 때부터 우주기운에 통한 존재이므로 그 우주적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무량광대’하고 ‘청정무구’한 오직 하나의 영성을 자기 마음으로 받았으므로 이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본래의 길이다. 우주적 혼원일기와 본래청정의 영성을 회복하는 길이기에 수운은 ‘천도’라 하였고 내 마음을 통하여 회복하기에 ‘심학(心學)’이라 하였다. 이 본래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는 다음을 기약한다. (끝) *본 글은 2023년 5월 12일/대화아카데미 바람과물연구소, 생명애콜로키움 [종교와 생태문제] 에서 발표하였으며 저자(오문환)의 허락을 받아 게재되었음을 밝힙니다. 글_오문환(정치학박사, 선도사, 영등포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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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생명관: 대생명(大生命) (1)Ⅰ 「동학의 생명평화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2004년에 논의한 적이 있기에 논의범위를 좀 더 종교철학적으로 심화시키고자 한다. 수운 최제우는 한울님과의 대화에서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을 받아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았다고 한다. 주문은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21자인데 그 가운데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해월의 해석을 중심으로 천도교의 생명관을 논하고자 한다. 수운은 모실시(侍)를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로 풀이하였고 해월은 다음처럼 구체화하였다. “안에 신령이 있다는 것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갓난아기의 마음이요, 밖에 기화가 있다는 것은 포태할 때에 이치와 기운이 바탕에 응하여 체를 이룬 것이니라. 그러므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과 「지기금지 원위대강」이라 한 것이 이것이니라.” (“經曰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內有神靈者 落地初赤子之心也 外有氣化者 胞胎時 理氣應質而成體也 故「外有接靈之氣內有降話之敎」「至氣今至願爲大降」是也,” 해월, [영부주문]) 이를 근거로 천도교는 생명체는 두 번의 강령으로 잉태되고 마음을 받아 태어나고 주문수행에 의하여 세 번째 강령으로 영성을 자각하게 된다고 본다. 첫째 강령인 ‘외유기화’에 의하여 포태되고, 둘째 강령인 ‘내유신령’으로 갓난아기가 처음으로 호흡할 때 영이 ‘적자지심’으로 내려온다. 셋째 강령인 ‘각지불이’는 주문수련으로 내 몸과 마음이 영성을 깨달아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난다. 이 세 번의 강령이 이루어지게 되면 사람은 비로소 천주를 자신 안에 온전하게 모신 ‘시천주’ 인간이 된다. 이렇게 한울님을 모신 사람을 천도교에서는 신선(神仙), 신인간(新人間), 신인(神人)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과정으로 대생명이 된다. 이 글은 첫 번째 강령인 ‘외유기화’와 두 번째 강령인 ‘내유신령’을 통하여 천도교의 생명관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생명의 포태가 영(靈)의 강림(降臨)으로 이루어진다는 해월의 설명은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이해되는 의학과는 다른 설명방식이다. 이기(理氣)와 기운(氣運)이 바탕이 되는 질료(質)를 만나서 포태가 된다는 종교철학적 설명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생명의 탄생은 천리(天理)와 천기(天氣)라는 우주적 기운과의 관계맺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점만 분명히 하면 될 듯하다. ‘외유기화’는 ‘외유접령지기(外有接靈之氣)’로도 표현되는데 밖으로 영에 접하는 기운이 있다는 뜻이다. ‘밖에 있다(外有)’는 표현 때문에 영(靈) 또는 지기(至氣)가 마치 시공간적 타자로 보이지만 영과 지기에 열려(開闢) 우주기운이 곧 나의 기운으로 되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지기(至氣)’ 또는 ‘혼원일기(混元一氣)’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음양오행과 같은 기운과 달리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과 접함으로써 생명이 잉태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수운은 ‘음양합덕으로 수백천만물이 화해난다’고도 하지만 ‘외유기화’는 한울님의 기운이 유기적 생명체로 나타나는 것을 서술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생명체의 잉태는 다 한울님 기운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수운의 [불연기연]에 나타나는 우주만유의 알 수 없는 불연에 대한 대답도 외유기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 더 나아가 자연사물까지 모두 다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과 하나로 통해져 잉태되었다는 실상을 통찰한다면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우주생명의 신묘함을 그렇고 그렇게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불연기연]은 황하수가 어찌 성인의 탄생을 알아서 천년에 한번 물이 맑아질 수 있는지 묻고 있다. 그렇지만 황하수도 하나의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의 산물이고 성인의 마음의 탄생도 똑같은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의 소산이라면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즉, 성인의 청정무구한 마음기운도 황하수의 진흙탕 물도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으로 통해져 있으므로 두 기운이 통하여 같아져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량수의 생명체들은 오직 하나의 기운에서 태어났음을 알게 되면 해월의 표현대로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한 동포이고(人吾同胞) 만물과 내가 또한 한 동포(物吾同胞)’라는 점도 스스로 자명해진다. 천리와 천기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초월적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몸과 내 마음에 내려와 있다고 본다면 왜 해월이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시행하였는지도 쉽게 이해된다. 신위(神位)를 마주보는 벽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여 설치하는 이유는 천지정신과 천지기운이 모두 내게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혼원일기, 우주정신, 신령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영의 강림(降臨)이라고 표현하지만 초월적 영이 내려온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잉태 순간에 지극한 한울님 기운과 접하여 자신 안에 모시게 된 것이다. 신위를 자신을 향하여 돌릴 수 있는 것은 물론 한울님 모심을(侍天主) 스스로 깨달은 사람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의암 손병희는 [성령출세설]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신사께서 사람이 곧 한울인 심법을 받으시고 향아설위의 제법을 정하시니 이것은 우주의 정신이 곧 억조의 정신인 것을 표명하심과 아울러, 다시 억조의 정신이 곧 내 한 개체의 정신인 것을 밝게 정하신 것이니라.” 조금 넓혀 표현하자면 개체정신이 곧 우주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 정신은 나의 정신이면서 동시에 ‘천만년 전 사람이나 천만년 후 사람의 정신과 같은 정신’이라고도 말한다. 한울님의 정신기운이 잉태의 순간에 영으로 이미 내 안에 모셔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근본적 동일성령이 천차만별의 인과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생명위기를 실감하는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생명의 우주적 연계성 또는 인드라망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의식이 열렸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천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가야할 길이 아직 멀다. 생명의 그물망을 느껴보고자 한다면 해월의 언행보다 더 좋은 전범(典範)은 없어 보인다. 해월은 베짜는 며느리를 보고 한울님이 베를 짠다고 하였으며,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때리지 말라고 하였으며, 동식물도 다 아끼고 사랑하라고 하였으며, 새소리도 한울님의 소리이며, 나뭇가지도 함부로 꺽지 말라고 하였으며, 어린아이가 나막신을 끌고 가니 가슴에 통증을 느꼈으며, 땅을 어머님 살처럼 여겨 침을 뱉거나 물을 멀리 뿌리지 말라고 하였다. 세상으로 눈을 잠시라도 돌려 보면 현대문명이 어느 곳을 향하여 전력질주하는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방향전환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점을 동학·천도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월은 “궁을이 문명을 돌이킨다(弓乙回文明)”라고 하였다. 궁을은 수운이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영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영부는 말 그대로 신령(神靈)에 그대로 부합하는 형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운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종이 위에 뚜렷한 형상을 그려내어 불에 타서 먹어보니 온갖 질병이 나았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주었더니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도덕을 따르는 사람은 매번 적중하였다고 하였다. 즉 받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해월은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영에 부합하는 마음이라고 하여 “영부심(靈符心)”이라고 하였다. 즉, 병을 치유하는 것은 천령에 부합하는 마음인 것이다. 이 마음이 문명을 대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에 부합하는 마음을 얻는 마음공부가 된다. 놀라운 점은 사람은 태어날 때 이 궁을마음을 타고났다는 사실이다. (계속) *본 글은 2023년 5월 12일/대화아카데미 바람과물연구소, 생명애콜로키움 [종교와 생태문제] 에서 발표하였으며 저자(오문환)의 허락을 받아 게재되었음을 밝힙니다. 글_오문환(정치학박사, 선도사, 영등포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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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일이다105년 전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역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함성소리는 매해 3월이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고동치게 한다. 3.1만세운동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평화로운 항거였으며 3.1정신은 이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루는 근간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3월이면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공적에 비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이 있다. 바로 3.1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하고 자금을 준비하였던 의암 손병희선생이다. 천도교 제3세교조인 의암 손병희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우리나라가 강제로 강탈당하게 되자 10년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해 나가게 된다. 우이동에 땅을 구입해 수련도장인 봉황각을 짓고 전국에 있는 유능한 지도자들을 모아서 독립의지를 확고하게 심어주기 위하여 심신훈련을 하게 한다. 3년에 걸쳐 7차례 483명이 봉황각 연성수련을 통해서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3.1운동때 전국 각 지역에서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지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부구총회를 통하여 결의하고 교호당 10원이상씩 건축성금을 내도록 하였다. 이 자금은 후에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리고 당시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가 적자경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끝까지 폐쇄하지 않고 훗날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전국 37개 대교구로 하여금 등사기를 1대씩 구입하도록 하여 훗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의암 손병희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한 49일 특별기도를 지시하였다. “먼저 보국안민(독립)이 된 다음에야 광제창생 포덕천하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 등 아홉 곳에 대표 기도처를 정하고 각 기도처마다 4명씩 대표를 파견하여 기도식을 지도하게 하면서 3.1독립운동을 위한 전국 교단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그리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와 대연합으로 33인 민족대표를 결성하기에 이르른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전국 조직망을 정비하고 독립자금까지 전담하는 등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지도해 나갔지만 매년 3.1절이 되면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은 미미하게 들리는 듯 마는 듯하다. 또한 천도교의 3.1운동에 대한 역할 또한 알려지기도 전에 잊혀져 가기만 한다.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해야만 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역사는 사라지고 심지어 왜곡되기까지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의 잘못이며 이대로 가다가는 사라지고 왜곡될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세상이 떠들썩 하도록 매해 기억하고 기록하고 또 기념해야 할 것이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는 방법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자. 독일을 예로 들어보자. 독일은 틀에 박힌 상징과 형식이 아닌, 권위적이지도 않고 위압적이지도 않은 형식으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참회하며 가장 예술적으로 역사를 작품속에 표현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살아있는 곳으로 피터 아이젠먼의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1998~2005)는 홀로코스트(Holocaust)로 희생된 600만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고 있다. 다음은 나치의 분서사건 60주년을 즈음하여 독일 베벨광장에 세워진 미하 울만의 「도서관」이라는 작품을 보자. 베벨광장 중심부에 가로120센티미터, 세로120센티미터 크기의 정사각형 투명유리창이 있고 그 지하에 텅빈 직방체 공간이 있다. 이스라엘 예술가 미하 울만의 「도서관」작품이다. 책들의 화형식이 있었던 그 장소의 지하에 설치된 경고의 기념조형물이다. 이처럼 그들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방법으로 문화예술 공간을 이용하고 있다. 문화예술공간은 시민들의 삶속에 스며들고 있으며 그들은 생활속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보고 느끼면서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의암 손병희선생님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_숙현당 정정숙(근현대사미술관 담다 관장, 천도교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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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반역사적인 ‘이승만 띄우기’ 시도요즘 독재자와 학살자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이승만 대통령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을 자주 접하게 된다. 뜬금없이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여 독재자를 기리겠다고 한다거나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뒤짚으려고 한다.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기술한 우리나라 헌법전문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런 준동에 분노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현재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권 말살과 부정부패를 저질러 4.19혁명으로 쫒겨난 그의 말로를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판에, 독재자 이승만을 두고 다시 논쟁하는 자체가 소모적이다. 이승만의 악행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8ㆍ15해방 이후에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어 독재정치를 하면서 학살한 무고한 양민들이 100만명 이상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이승만을 국가보훈부가 지난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고, 국방부는 그를 혜안을 지닌 지도자로 미화하는 교재를 발간하기도 했다. ‘홍범도 지우기’로 국민의 공분을 산 집권 세력이 ‘이승만 국부 만들기’로 이념전쟁에 불을 붙이고 있는 형국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후 북한·중국·러시아가 공산화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했다”고 그를 칭송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농지개혁·교육개혁·정치개혁이란 3개 개혁으로 대한민국의 토대를 닦았다.”며 이승만을 한껏 찬양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격동의 해방 공간에서 그가 내린 선택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강변한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용하고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역사적 사실도 그들의 눈에는 크게 문제가 될 게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편다. 진실을 덮고 거짓을 호도하려는 영화 한 편에 부화뇌동하는 것이 2024년 대한민국의 현주소인 것만 같아 정말 씁쓸하다. 정권은 유한하고 역사의 흐름은 도도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이런 시도가 성공하겠는가. 말 그대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으로 국회에 상정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하고자 하는 법률안이 아직도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을미의병 참여자에 대해서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145명을 서훈하면서도, 전봉준·최시형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승만 띄우기’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를 거스르는 세력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역사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독재자 이승만을 구국의 민족지도자로 받들려는 기도를 절대 묵과할 수 없다. 국민 공감대도 없이 진행되는 시대착오적 ‘이승만 띄우기’는 성공할 수도 없고 결국 이념전쟁으로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것으로 끝날 것이 뻔하다. ‘이승만 국부 만들기’에 주력해온 뉴라이트 역사관에 따른 반역사적인 악행을 당장 멈추기를 요구한다. 글_윤여진(시인,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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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다올해는 3.1운동 105주년이다. 모든 언론이 3·1운동 105주년이라고 쓰고 있다. 오랫동안 사용해 화석화된 잘못된 용어이다. 105년 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 인근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했고 일경에 체포되어 갔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경성 거리의 민중들을 바라보며 끌려가던 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동학혁명이 좌절된 후 혁명의 최후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고 1900년대 초의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언론과 교육, 출판 운동 등으로 민도를 높이는 개혁을 전개하다가 1913년부터 전국의 천도교 교역자 483명을 차례로 불러 특별 연성 수련을 실시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장차 국가를 위해서 쓰일 인재를 미리 양성해 놓고자 한 지도자의 혜안이었다. 세계 제1차 대전이 종결되고 민족자결의 운동이 세계적으로 유행되자 의암은 우리의 독립을 위한 시점에 이르렀음을 직감했다. 드디어 1919년 천도교는 전체 인구 1,800만 명에 300만 명의 신도 수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단이 되었다. 천도교는 일제의 압제에 대항할 충분한 인원과 조직 그리고 자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학도들만이 참여했던 동학혁명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절감했던 손병희는 거대한 민족운동을 천도교만의 단독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3.1의거는 제2의 동학혁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국외에서의 독립선언과 의문스러운 고종황제의 죽음으로 민중의 분노가 치솟자 손병희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비밀리에 각계의 지도층에게 함께 할 것을 제의했지만 대부분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를 무시하며 함께 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개신교의 이승훈 선생과 길선주 목사 등은 이미 개신교의 독단으로 독립청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종단이 비밀리에 접촉했고 함께 독립선언을 하기로 합의했다. 다른 교단과 함께한다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시절임을 고려할 때 이들 종단 지도자들의 결단은 돋보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불교계의 큰 스님인 용성 스님과 만해가 함께 하니 비로소 종교연합으로 민족대표를 꾸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독립선언에 동참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들 지도자들의 위대한 희생과 헌신적 정신이 바로 3.1의거의 출발점이었고, 그들의 고뇌 어린 결단이 있었기에 3.1의거는 추진될 수 있었다. 의거의 중심인 천도교는 과거 실패했던 동학혁명을 다시 일으킨다는 자세로 준비했다. 손병희는 최남선을 시켜 작성된 독립선언서를 자체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에게 비밀리에 인쇄할 것을 지시했다. 인쇄 중 종로경찰서의 악질 조선인 순사에게 발각되기도 하고, 완성된 선언서를 옮기는 과정에 파출소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는 등 곡절 끝에 3만 5천 장의 선언서를 종교 조직을 이용해 전국에 퍼트리는 데 성공하였다. 만세 시위는 당일 오후 2시 경성 등 전국 6개 도시를 시작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당황한 일본은 민족대표들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하고 전국의 시위에는 강력한 무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밟으면 밟을수록 일어서는 우리 민족이었다. 특히 경기도의 시위가 가장 격렬했다. 수원 화성 지역은 장날마다 시위가 일어났으며 제암리와 고주리의 학살은 대표적인 피해 사건이 되었다. 3월부터 3달 동안에만 시위에 나선 이가 전국적으로 210만 명에 이르고 체포·투옥된 수도 4만6,948명, 부상자 5만 명 이상이었으며 사망자도 7,500명이 넘었다. 그런데 운동이란다. ‘쓰리 포인트 원 스포츠’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하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된단 말인가? 3·1운동이란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가. 해방 이후 헌법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의 헌법전문 초안에도 분명 3·1혁명이었다. 그러나 국회로 넘어가 심의 중에 바꾸었는데 일설에는 대통령에 유력한 이승만의 온화한(?) 이미지와 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아첨꾼들이 권했고 이승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헌법전문에 운동으로 수록되었다고 한다. 이승만도 일제강점기 시절 내내 사용하던 3·1혁명을 버린 것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3.1운동이 아닌 3·1혁명, 3·1대혁명이라고 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과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에도 명백히 3·1혁명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지난 3·1혁명 100주년 당시 정명(正名) 운동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명 되지 못하고 있다. 제국의 신민이 아닌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된다고 선언한 것은 분명 혁명이었는데. 이제 우리부터라도 제대로 된 명칭을 사용하자. 3.1혁명이라고.◎ 글 임형진(년암, 동서울교구,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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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 년 전 천도교인처럼지금부터 백 년 전인 1923년 8월 10일 지금의 천도교중앙총부 전신인 천도교중앙종리원의 직원회에서는 중대한 결정 하나를 내렸다. 그것은 천도교 교조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대신사출세백년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을 조직한 결정이었다.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대신사는 1824년 10월 28일 태어났다. 1924년이 수운대신사가 탄신한지 꼭 백 년을 맞는 뜻깊은 해로 이를 교단적 차원에서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기념사업회는 5일 후인 8월 15일 결성되었고, 위원장은 춘암상사가 맡았다. 기념사업회는 기념사업의 방향을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정했다. 하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장래를 서로 전망하고, 다른 하나는 수운대신사를 본받고 법으로 삼아 천도교인을 독려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는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 기념이 단순히 후천의 성인인 수운대신사가 탄생한 사실을 축하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24년을 사는 천도교인들이 수운대신사와 같은 사람으로 거듭나 수운대신사가 목적한 바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다지자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줄이면 과거를 기념하여 현재를 고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기념사업을 하자는 방향이었다. 사업의 방향에 맞춰 기념사업은 크게 세 가지로 준비하였다. 첫째는 과거를 기념하는 행사로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잇는 특별기도 봉행이었다.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은 포덕과 광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뜻을 계승하기 위해 천도교인 전체가 참여하는 특별기도를 하기로 했다. 천도교단에서는 교회나 국가의 큰 일이 있을 때 전 교인들이 일정 기간의 특별기도를 봉행해 정신 통일과 행동 통일을 추구했다. 대표적인 특별기도가 3·1운동 직전의 49일 특별기도였다. 기념사업회는 특별기도 기간을 수운대신사가 탄생한 달인 1924년 10월 1일부터 10월 21일까지의 21일간으로 정했다. 수운대신사가 태어난 달에 전 교인들이 몸과 마음을 일치해 포덕천하와 광제창생의 대원을 실현하는 천도교인으로 무장할 것을 기원하기로 했다. 기도 시간은 낮 12시로 정했다. 기도 시간을 하루의 중심인 낮 12시로 정한 것은 수운대신사의 득도가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는 의미를 담았다. 기도의 방식은 봉청수(지금의 청수봉전), 묵념기도(지금의 심고), 본주문 105회 묵송, 묵념기도의 순서로 했다. 특별기도를 통해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둘째는 현재의 천도교를 담는 행사로 1924년을 사는 천도교인의 활동을 보여주는 기념행사였다. 기념행사는 이틀에 걸처 진행되었다. 10월 27일 저녁 7시부터 중앙대교당에서 당대 천도교를 대표하는 연사인 이돈화, 이종린, 방정환 세 사람이 수운대신사 탄신의 의미를 돌아보는 강연회를 열었다. 탄신일인 10월 28일에는 11시 반부터 새로 지어진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에서 탄신 백주년 기념식을 열어 수운대신사 창도 정신을 기렸다. 이어서 청년당 대회를 열어 추모사 낭독과 대신사와 청년당에 관한 연설, 선언문 낭독 등을 진행하였다. 청년당 대회 폐회 후에는 여흥이 진행되었는데 동덕여학교 학생의 축하 공연, 김문필 일행의 기마술과 무도, 청년당의 가장행렬과 광대 줄타기, 경성악대의 주악 등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기념행사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는데 저녁 7시부터 청년당, 내수단(여성회), 학생회, 소년회 등 7개 부문 단체에서 준비한 공연이 밤 12시까지 진행되었다. 기념관 뜰에는 전등을 달고 만국기를 내걸어 화려하게 장식해 기념행사 분위기를 높였으며, 기념관 안에는 7개 부문단체에서 만든 각종 모형물이 찿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전국에서 4천 명이 참여해 일대의 교통이 혼잡할 정도였다. 셋째, 미래를 준비하는 사업으로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의 건립이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수운대신사 탄신 백주년이라는 뜻깊은 해를 맞아 천도교인 만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사업으로 기념관을 건립해 일반에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독실 교인 3만 5천 집을 선정하여 이들이 1원씩 성금을 낸 3만 5천 원으로 대공회장을 건립하기로 했다. 기념관은 6월 25일 착공해서 탄신일인 10월 28일 기념식을 겸해 낙성식을 가졌다. 총공사비는 약 5만 원이었다고 알려졌다. 기념관은 앞은 2층, 뒤는 1층으로 연건평 160평으로 1천 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대공회장이었다. 이 기념관에 대해 “기념관의 넓이는 9칸이요. 길이는 12칸인데, 동 기념관은 일반 집회에 제공할 터이요, 활동사진(영화), 강연, 연극 등 어떠한 것을 사용하더라도 편리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데, 조선인의 손으로도 집회 장소를 건축한 것은 이곳이 효시라 할 수 있다.”라고 당시 언론에서 기념관 건립의 의미를 설명했다. 수운대신사의 정신을 담은 기념관은 서울에서 제일 큰 공연장으로 시민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민족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념관을 우리의 힘으로 만든 것은 수운대신사의 창도의 정신을 세상에 펴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업이었다. 이처럼 백 년 전 천도교인은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후천의 성인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열과 성을 다해서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성과를 내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고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전 천도교인들이 단결해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 년이 갖는 의미를 새기고 이를 세상에 전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교인들이 특성을 모아 국내 최고의 대공연장을 건축해 세상을 위해 내어놓았다. 이 소식에 민족 구성원들은 가슴이 들떴다. 백 년 전 천도교는 민족의 한 가운데에서 희망이 되었다. 이제 다시 백 년이 지났다. 올해가 수운대신사 탄신 2백주년이다. 천도교에서 대신사 탄신 2백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번에는 어떤 기념물이 만들어져 수운대신사의 탄신의 의미를 새기고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백 년 전 우려했던 것처럼 그냥 행사를 위한 행사, 해마다 지내는 제사와 같은 무의미한 행사를 준비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다못해 천도교박물관을 건립해 세상 사람들에게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알리는 공간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한다. 백 년전 천도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그때와 같이 세상의 희망으로 천도교가 우뚝서기를 기대한다. 글, 덕암 성강현(흥신포 직접도훈, 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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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되는대로 살아야지 뭘 어떡해?“티브이 없었으면 어떡할 뻔하셨어요?” 라고 내가 묻자 준비한 것처럼 촌각의 틈도 없이 돌아온 대답이었다. “되는대로 살아야지 뭘 어떡해?”. 마을(노인)회관에 옹기종기 앉아서 티브이만 보고 있는 어르신들. 거의 혼자 사시는 분들이라 체온도 그립고 난방비도 겁나니 노쇠한 몸 하나 의지하기엔 마을회관이 좋다. 종일 티브이 장면을 따라가며 얘기 보따리를 끌렀다 싸맸다 하시는 노인들. 그러다 심드렁해지면 묵은 기억 들추다가 말다툼도 벌이지만 다시 티브이 따라 깔깔 웃는다. ‘되는대로 산다’라는 말은 주어진 조건에 저항하지 않고 뭐든 수용한다는 말이다. 《놓아버림》의 데이비드 호킨스나 《당신이 플라시보다》의 조 디스펜자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이는 어르신들의 몸에 밴 삶의 지혜다. 일단 수용한 다음에 한발 더 나아갈지 여부를 궁리하는 생활 태도. 한울 모심의 태도다. 티브이 없어도 얼마든지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잘 보내실 어르신들이다. 하지만 마을회관에 모이긴 해도 늘 벽에 기댄 등은 더 구부정해지고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는지라 약을 한 주먹씩 먹는다. 움직이지 않으니 식욕도 별로 없어서 면사무소에서 나온 쌀과 부식은 옆방에 쌓여있다. 옛날과 달리 요즘 먹거리가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 맛을 내느라 섞어 놓은 첨가물들이 얼마나 몸을 망치는지 모른다. 멸치와 쥐포조차 인공조미료가 듬뿍 스며있다는 내 말에 깜짝 놀란다. 특별한 날에 즐겨 드시는 회도 모두 양식한 것이고 정전이 되면 물고기가 폐사하는 게 강제로 산소를 공급하다가 전기가 끊기니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하니 입을 쩍 벌린다. 작년부터 어쩌다 내가 공식 노인이 되었고, 올해 처음으로 노인 일자리 가서 목격한 우리 마을 노인들 모습이었다. 좋은 먹거리가 뭔지를 말하기보다 믹스커피 통 옆에 아몬드와 쌍화탕 분말 차를 한 통씩 사 놓았더니 잘 드신다. 이 역시 가공식품이지만 자연 식재료는 노인들 일거리라 어쩔 수 없기도 하다. 내가 시간 나는 두 번째 날과 세 번째 날은 건강 체조를 해 봤다. 손뼉치기와 발끝 부딪치기. 팔을 뻗어서 가 닿는 곳 모두를 토닥토닥 두드리기. 손 비비기와 얼굴 비비기를 앉은 채로 했다.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해서다. 서로 왼손으로 악수하게 해서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팔과 왼 어깨를 골고루 두드려주는 놀이도 했다. 목덜미와 등짝까지 두드리다 보면 자연스레 포옹을 하게 된다. 순간순간 깔깔 웃는다. 쇠똥 구르는 것만 봐도 웃어댄다는 소녀들처럼.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내 스마트폰으로 모바일 핫스팟을 설정하고 에이치디엠아이(HDMI) 케이블을 티브이에 연결해서 유튜브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비록 오래된 프로지만 웃음보따리인 에스비에스(SBS)의 《고향에서 온 편지》도 보고 보건복지부에서 만든 치매예방 영상도 봤다.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은 발 마사지였다. 발바닥과 발등의 혈 자리 이미지를 칼라로 인쇄하여 나눠 준 다음에 반사구니 서혜부니 하는 원리를 쉽게 설명하고서 내가 쓰던 호호바 오일과 코코넛 오일에 오렌지 에센셜 오일이나 라벤더 오일을 브랜딩 해서 발라 드렸다. 증상에 따른 혈자리를 누르게 하다가 그냥 막 “되는대로 눌러도 된다”라고 말씀드렸다. 나도 노인들과 노는 이 놀이를 되는대로 계속할 생각이다. “되는대로”. 글, 목암 전희식('밥은 하늘입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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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SG 경영의 근본이 천도교에 있다최근 사회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의 시작은 1970년대 UN에서 논의된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에서 시작되었는데 UNSDGs에 의하면 인류의 보편문제와 지구 환경문제 및 경제 사회문제를 2030년 까지 17가지 주목표와 169가지 세부 목표를 정해 국제적 공동 목표를 세웠다. 우리나라 역시 이 분야에 큰 관심과 함께 향후 계획 및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기업은 가격이 싸고 품질이 좋은 생산품을 만들어 이익을 많이 내면 되었지만 향후는 생산품을 만드는 과정과 더불어 비재무적인 요소(환경(E), 사회(S), 지배구조(G))까지도 평가를 하여 투자자들이 투자를 결정할 때 고려하도록 하였다. ESG 경영 평가단은 사용하는 제품이 원자재의 생산부터 건전하고 합법적인 과정을 거쳤는지를 확인하고 평가를 한다. 이것은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에 전 분야에도 이러한 개념이 바탕이 되어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종교계에서도 이러한 ESG 경영이론을 도입하는 것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천도교에서는 ESG와 관련된 내용들이 이미 경전 속에 많이 들어 있다. 환경(Environmental)은 기후 변화 및 탄소 배출, 에너지 사용, 수질, 폐기물, 토양 오염, 소음, 진동, 환경 친화 등의 환경 측면에서 위험 사고를 바탕으로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환경 활동이며, 해월신사님의 생태 존중 말씀은 탄소제로시대에 새겨야 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땅을 어머니 살처럼 여기면 온갖 만물이 그 위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Social)는 노동, 인권, 안전, 보건, 성 평등, 지역사회 기여 등의 사회적 책임 활동이며, 천도교의 시천주 진리로서 인내천 세상이 된다면 사회적 책임 활동에 앞장 설 수 있다.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종교인들의 노력이 필요하며, 특히 천도교는 다른 어느 종단보다 인권을 존중한다. 마음속으로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니 그 이상 소중한 인권과 사회적 책임활동이 어디 있겠는가. 지배구조(Governance)는 기업의 투명성, 윤리적 경영, 이사회의 역할과 책임을 다함으로서 기업의 장기적 이익과 지속 가능한 경영 활동인데, 천도교의 임사실천십개조를 보면 ‘윤리를 밝히라’ 그리고 ‘일에 임하여 지극히 공정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지배구조의 바탕이 되는 말씀이다. 윤리를 바로 세워 책재원수가 되지 않도록 건실한 천도교의 지배구조가 필요하다. 침체된 교단에 새로운 기운이 필요하다. 천도교도 높은 도덕성과 함께 훌륭한 경영마인드를 갖춘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전 세계 선진국들은 지금 ESG의 경영전략에 올인하고 있다. 2050년 탄소제로 사회구현을 목표로 세계적인 기업들이 앞장서서 이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천도교단에서도 급변하는 ESG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교단차원의 ESG위원회가 구성되고 전문가들이 모여서 교단 발전을 의논하였으면 한다. 향후 기후 변화는 이대로 가면 지구의 큰 이변으로 삶, 즉 생존 자체를 위협당할 수 있다. 온 세계가 함께 기후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사회적 가치 창출과 투명한 윤리 경영에 노력해야 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온실가스 즉 탄소배출이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었다. 우리나라는 이 문제에 지속가능한 해법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겨 가고 있다. 종교계 역시 탄소 제로 사회 구현에 기여하고 동참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더욱이 천도교가 앞장서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ESG 경영의 확대 측면에서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 간의 상호 작용으로 지속가능한 개발과 환경보호 및 사회적 공헌 등으로 종합적 삶의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글, 울산교구 이암 정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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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수운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개벽을 생각해본다올해 갑진년(포덕165, 2024년)은 대신사 수운 최제우 탄신 200주년(이하,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이다. 다시 말해 100년에 한 번 돌아오는 기념비적인 해이다. 또한 동학혁명 130주년, 갑진개화혁신운동 120주년, 천도교여성회 창립 100주년으로서 천도교단에는 경사가 겹치는 해이기도 하다. 먼저 본 글에서는 대신사 탄신 2백주년에 초점을 맞춰 논하고자 한다.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부터 준비해야 하며, 어떤 기념비적 사업을 진행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국내는 물론 대신사 탄신에 대한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연구 및 국제학술대회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기념사업과 계승사업을 통해 동학·천도교의 3대 목적인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지(之) 대도(大道)의 실천사업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다는 희망에서이다. 그런데 글을 쓴다는 것이 원고의 한계도 있고 해서 여기서는 대신사 탄신에 대한 의미와 우리의 자세를 중점적으로 거론하고자 한다. 1. 대신사의 탄생은 개벽을 잉태하고 있었다. 천도교(동학) 제1세 교조 수운 대신사(이하, 대신사)께서는 1824년 10월 28일(음력)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315번지에서 태어났다. 본향은 경주, 아명(兒名)은 복술(福述)이며, 본래 이름은 제선(濟宣), 자(字)는 도언(道彦)이었다. 후일 구도 과정에서 이름은 제우(濟愚)로 자는 성묵(性默)으로 바꾸었고, 호는 수운(水雲)으로 했다. 대신사는 신라 말기의 석학 고운 최치원의 25세손이며, 정무공 잠와 최진립 장군이 7대조이시다. 그리고 대신사 아버지는 근암 최옥(이하, 근암공)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근암공은 벼슬을 하지 않은 산림처사로써, 성리학을 심화 발전시킨 영남 유학의 거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학설의 한 갈래를 계승한 선비로서 경상도 일대에 그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이러한 근암공의 학문과 덕망을 온전히 계승한 사람이 바로 근암공 아들 대신사이시다. 그런데 문제는 대신사 어머님 한씨(韓氏)께서 재가녀(再嫁女) 신분이었다는 것이 대신사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조선은 성종 때에 왕조의 근본을 이루는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면서 예전(禮典)에 밝히기를, 재가녀 자손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재가녀 자손을 마치 서자(庶子)와 같이 신분차별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분차별이 없었다면 대신사께서는 아마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적당한 벼슬을 하였거나, 아니면 근암공 아버지처럼 사림처사로서 서당 훈장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당시 시대의 불평등한 현실 속에, 대신사는 당시 학문을 모두 통달한 선비였지만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하며 큰 방황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하여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봇짐장사부터 시작하여, 세상을 크게 변혁시키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입산수도는 물론 조선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인심풍속을 살피곤 하였다. 다시 말해 대신사의 득도(得道) 즉 동학창도는 대신사 아버님이자 스승님이신 근암공의 영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근암공의 셋째 부인이 되신 대신사의 어버님 한씨부인의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출발한다. 한씨부인은 한 번 결혼했다 남편과 사별한 청상과부의 신분으로 근암공 셋째 부인이 되신 것이다. 이처럼 대신사께서 신분에 대한 고민과 방황 그리고 사회상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등 당시 불평등했던 시대상황은 바로 동학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시천주(侍天主)·인즉천(人卽天)·사인여천(事人如天) 진리를 깨달아 실천하는데 원인 제공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대신사의 탄생은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잉태(孕胎)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범인(凡人)이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천도(天道)이다. 일찍이 민족시인 신동엽은 대서사시 「금강」에서 대신사님을 석가, 예수님과 더불어 세계적인 성인으로 조명한 바 있다. 국내외에서도 유명한 철학자 김용옥과 시인 김지하도 강연과 저술을 통해 대신사를 공자와 예수에 버금가는 위대한 성자라고 하였다. 또한, 동방사상 및 동학사상에 조예가 탁월했던 범부 김정설은, “최제우는 천계를 받아, 흩어져 무질서한 천년의 적막을 깨트리고 역사적 대강령을 이루었다. 동시에 신도성시 정신의 기적적 부활이며, 국풍재생의 경이로운 사태로서 어마어마한 역사적 대사건이었다.”고 강조하여, 수운 선생의 득도와 동학 창도는 시대의 혁명을 넘어 새로 운 개벽의 세상을 열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대신사의 일생과 동학·천도교의 역사를 접하고 지극정성으로 수도(修道)를 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범인(凡人)이 성인(聖人)이 되고, 소인(小人)이 대인(大人)이 될 수 있다.’는 교훈과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대신사께서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진인(眞人)이자 신인(神人)의 경지에 오른 대성인(大聖人)이 되신 분이다. 대신사님의 제자들은 대신사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대신사님을 닮아가고 대신사님처럼 되는 것이 제자들의 도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 대신사님처럼 실천하는 것이 곧 동학도유(東學道儒)이고, 천도교인(天道敎人)이자 무극대도인(無極大道人)이 되는 것이다. 3. 천도교(동학)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자.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을 맞이하여 수운 최제우 스승님의 탄생의 의미를 짚어보고 또한 우리의 자세도 점검해보자. 대신사 탄신은 바로 동학(천도교) 창도로 이어지고, 동학창도는 바로 대신사 순도(殉道, 순교)로 이어진다. 대신사 순도는 바로 1871년 대신사 순도 7주기에 영해교조신원운동으로 이어지고, 영해신원운동은 1892~1893년 공주, 삼례, 광화문, 보은, 원평 교조신원운동으로 이어진다. 또한 교조신원운동은 1894년 1차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지고,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전쟁은 일제강점기 의병운동으로 계승된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은 3.1독립혁명으로 계승되고, 해방 후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으로 계승되었다. 동학·천도교 정신은 남북평화통일 달성이라는 또 다른 시대적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하며, 지구환경과 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급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이러한 막중한 임무와 시기에 우리 천도교단이 정신 차리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이다. 현재 우리 교세가 대신사 순도 때와 같은 숫자이다. 교인수가 한때는 3백만 명을 웃돌았으나, 현재는 현저한 수준으로 추락하였다. 이러한 쇠운을 극복하고 성운을 맞이하려면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겠으나, 우선 천도교인들의 각자위심(各自爲心)을 퇴출하고 동귀일체(同歸一體)를 지향하는 것으로 기본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스승님과 선열님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못다 이루신 꿈을 우리가 이루기 위해서 다시개벽의 새로운 세상을 향해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야 할 것이다. 끝으로,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을 맞이하여 천도교(동학)의 새로운 문화를 하나 창출했으면 한다. 바로 대신사 출생지(出生址)에서 순도지(殉道址)까지 성지순례를 매년 정례화 하였으면 한다. ‘대신사, 탄신지에서 순도지까지의 성지순례’는 대신사 탄신일(10.28), 대신사 순도일(3.10), 대신사 득도일(4.5, 천일기념일) 중에서 가장 적합한 날을 선택하여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성지순례는 신앙심 고취는 물론 대중적인 문화창달 즉 포덕천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끝) 글 이윤영 (천도교 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