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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 『동아일보』 1920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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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 『동아일보』 1920년 4월 2일

교도는 다시(更)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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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0년 4월 2일자

 

 

 

“천도교주가 한번 독립선언서를 세상에 뿌린 후로 별별 가지 파란이 뒤를 이어 일어나 일시는 자못 위태한 지경에 이르겠다는 소문까지 들리던 천도교중앙총부에서 돌아오는 초닷샛날 아침부터 성대한 천일기념 예식을 집행할 터이므로 각 지방에서 이 예식에 참례코자 올라오는 교도가 자못 연락 부절된다는데, 보실보실 내리는 봄비에 몸 적시며 송현동에 있는 중앙총부 방문한즉 마침 가옥을 수리하노라 벽들이 2층 주위에는 높이 비계를 매고 푸른 옷을 입은 5, 6인이 꿈틀거리고 있더라. 2층으로 올라가 감옥에 가지 아니한 사람으로는 그 교의 최고 간부 중에 첫째인 현기관장 오상준 씨에게 천도교의 근황을 물었더니, 씨는 자못 감개무량한 낯으로 서서히 입을 열며 세상에서는 손병희 씨가 우리 교회의 두목이니까 손병희 씨의 모든 행동을 우리의 교 본지에서 나오기만한 줄로 오해하여 요전 만세사건만 하여도 독립선언은 결코 천도교 주인 손병희가 한 것이 아니라 손병희 개인으로 한 것이거늘, 일부 세상에서는 천도교 전체를 독립당으로 보는 것은 좀 모호한 일이라 하겠으며, 만세를 부르던 한참 통에는 과연 전도 모든 교구가 한 가지 소란하기는 하였었으나 얼마 아니하여 안온하게 된 것은 다툴 수 없는 사실인 것이며, 손병희 씨가 감옥에 들어간 후로는 천도교 교세가 미미하게 쇠약하여졌다고 말하는 어느 일본 신문도 보았으나 사실 통계로 보면 작년보다 교도가 훨씬 많아진 것을 보면 천도교가 결코 쇠약해 가지 않는 것은 명확한 일이라 할 것이라. 잠깐 가까운 실예를 들어 말하더라도 지난 정월 보름날부터 각 지방에 있는 청년 교도들을 소집하여 교리연구회(敎理硏究會)를 약 60일 동안이나 열었는데 강습생이 거의 250인에 이르는 큰 성황이었으며, 전에 성실치 못하던 교도들도 요사이는 어찌된 일인지 하루 두 숟갈의 성미(誠米)는 자기는 굶어도 받치겠다 장담한다는 각 지방 교구장의 기쁜 보고가 자주 들리는 바이며, 해마다 기념제 때이면 적어도 2천 명씩은 지방 교도가 상경하였는데 금년에도 인수가 늘면 늘었지 줄 이유는 없을 터이며, 여러 가지 형편상 재미없는 일이 많을까 싶어 금년에는 특히 아무쪼록 각 굑구에서 몇몇 사람씩만 의논하여 올라오도록 주의를 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벌써 상경한 이가 수백 인에 달한 모양이며, 작년 10월부터 기공한 교동 새 교당은 약 2백 평가량에 벽돌 2층으로 예산 15만 원이었으나 그동안 물가가 심히 고등하였졌으므로 다소간 예산에 증가가 있을 줄로 생각하노라. 이상은 천도교회의 최근 상황을 대강 말한 것이어니와 대개 이제까지 위험케 여기던 천도교회는 알고 보면 뜻밖에 청정한 처지에 있으며, 세상에서 위태해 보던 천도교회의 지반은 새교당의 낙성함을 따라 만세영겁에 흔들지 않고 기초를 튼튼히 세울 것은 의심치 못할 사실인가 하노라.

 

※※※※※

위의 기사는 1920년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에서 천도교의 동향을 취재한 것이다. 이는 『동아일보』의 최대 관심은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자는 3·1운동 후 처음으로 맞는 천일기념일을 앞두고 송현동에 있는 2층 양옥의 천도교중앙총부를 취재하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의하면, 3·1운동 직후 지방에서는 천도교를 배척하거나 탈교하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매일신보』의 기사는 천도교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도록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져 있었다. 그렇지만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천도교는 흔들림 없이 여전히 한국사회의 중심에서 그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3·1운동은 교단 전체가 참여한 것이 아니라 의암성사가 개인적 차원에서 주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일제는 천도교를 유사종교로 취급하여 강력하게 감시와 탄압을 하는 상황에서 교단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천도교는 교단적 차원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음을 많은 연구와 자료로서 확인된다는 점에서 부득이한 것이었다. 

둘째는 교인이 증가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일반사회에서는 3·1운동을 천도교가 주도하고 많은 교인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천도교는 ‘독립당’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천도교가 크게 쇠미해졌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지만 천도교는 1919년 9월 2일 조직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는 60일 동안 개최한 교리연구회에 전국에서 250여 명이 참여하여 성황리에 마쳤을 뿐만 아니라 지방교구에서는 자신은 굶더라도 성미는 반드시 납부하겠다는 교인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4월 5일 천일기념일에 지방 교인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해마다 각종 기념일에는 2천여 명의 교인들이 참여하였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셋째는 새 교당 즉 중앙대교당을 건립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원래는 1919년 초에 중앙대교당을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3·1운동의 여파로 인해 연기되었다가 1919년 10월에 기공식을 가졌다. 새로 건립되는 중앙대교당은 2층 양옥으로 약 2백 평 규모이고 예산은 15만 원이었지만 물가의 오름에 따라 추가될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 기사는 결론적으로 천도교는 과격하거나 위험하지 않으며 청정한 상황이며, 위태하지 않고 새 교당을 낙성하면 만세영겁의 흔들리지 않는 교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에는 당시 2층 양옥의 중앙총부 건물과 근무하는 임직원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해설 : 희암 성주현(신인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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