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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영웅 최진립 장군

기사입력 2023.08.1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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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립 장군 묘소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글을 남겼다.


    “우리 선조 험천 땅에 공덕비를 높이 세워 만고유전 하여보세. 송백 같은 이내 절개 금석으로 세울 줄을 세상 사람 뉘가 알꼬.”, “선조의 충의와 절개는 용산에 남아 있네. 해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우리 임금님 성덕을 다시 돌아보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언급한 ‘선조’는 잠와 최진립 장군으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7대조이다. ‘용산’은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있는 용산서원을 말한다. 

    유림에서는 최진립 장군의 충절과 학문을 기려 용산서원을 창건하여 공을 제향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숙종 37년에 임금이 친히 ‘숭렬사우崇烈祠宇’로 글을 내린 사액 사당이다. 당시 무신으로 사액 사당을 받은 이는 이순신과 김시민 장군뿐일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용산서원 입구에 공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1568~1636) 장군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최진립 장군은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의 17세 후손이며 사성공 최예의 6세 후손이다. 1568년 경주 현곡면 하구리 구미산 아래에서 참판공 최신보와 평해황씨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나 자랐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4월 21일 경주성이 함락됐다. 당시 25세였던 장군은 아우 최계종, 당숙 최신린, 최봉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5월 27일 김호, 손엽, 권사악, 이눌 등의 의병장들과 힘을 합해 계연(김유신 장군 묘 아래 경주 서천 일원)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6월 2일에는 언양에서 경주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김기 의병장과 함께 열박재(충의당과 울주군 두서면의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7월 27일에는 경주 손엽, 권복시, 권사민 의병장들과 함께 영천성 수복 전투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 100여 명을 이끌고 울산 서생포에 주둔 중인 적을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장군은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2등을 받았고, 훈련부정, 도총도부사, 마량진 첨사, 경원 부사 등을 역임했다.

    1636년 12월 13일,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군대는 며칠 지나지도 않은 12월 16일에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까지 포위했다. 최진립 장군은 69세라는 많은 나이에도 군사를 일으켜 남한산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가 전장으로 달려가기 직전, 충청감사 정세규가 ‘늙어 전장에 나가기 마땅치 않다’고 만류했지만 최진립 장군은 “내가 늙어 싸워서 이길 수 없더라도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는 있다”고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1637년 1월 2일, 청나라 장수 양고리(楊古利·양굴리)가 이끄는 적과 대치했다. 열세인 상황에서 최진립, 나성 현감 김홍익, 남포 현감 이경징, 금정 찰방 이상재 등은 포기하지 않았다. 훈련이 부족하고 전투력이 미약한 소수 부대지만 잘 통솔하여 적과 대등하게 싸웠고, 하루종일 10여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아군은 탄약과 화살이 바닥나고 군사도 이미 반이나 잃었다. 최진립 장군은 공주영장으로 군사를 이끌고 용인 험천 전투에 참여하여 용전하다가 장렬히 순절했다. 다음 해에 시체를 수습했는데 ‘그 모양이 살아 있는 듯하고 화살과 총알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름을 떨쳤던 장수 중 1636년 병자호란 때까지 생존한 이는 거의 없었다. 일본군 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이 당시 63세의 고령으로 병자호란에 참전한 사실이 두드러지는 정도다. 그런 만큼 불과 25세의 나이로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했던 최진립 장군의 69세 병자호란 참전과 순절은 특별한 이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진립 장군 묘소는 나라에서 내린 명당 터에 장지를 마련하여 장례를 치르고,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청백리에 녹선하였다. 고향 내남면 이조리에 정려비각을 세워 충절을 만대에 전하도록 하였다. 최진립 장군 묘소 뒤편에는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던 셋째아들 현감공 최동량의 묘소가 있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실천하며,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고, 해방 후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경주 최부자의 현조이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99호인 충의당은 경주 최씨 종가로 최진립 장군이 살았던 집이다. 본래 당호는 흠흠당欽欽堂이었는데, 1760년 무렵 건물을 고쳐 지으면서 집 이름을 충의당으로 바꾸었다. 충의당 일대는 ‘충의 공원’으로 조성하였고, 장군의 기마동상과 유물관인 충의관이 건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취재진이 충의당 종택을 방문한 날 종손을 만나 집안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에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와 한씨 사모님 이야기도 있었다. 사당인 충렬사와 닫혀있던 최진립 장군 위패도 열어서 보여주셨다. 사당 들어가는 입구에 200년 된 매실나무가 세월의 인고를 견디며 잘 자라고 있다. 기나긴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고 꽃 활짝 피는 날 다시 방문하고 싶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탄신하신 비슷한 시기에 심어졌으리라 여겨진다.

     

    동학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는 마지막 경주 최부자인 최준을 나이로는 22살이나 많았지만 늘 존중했다고 한다. 최준에게 수시로 “동학은 경주 최씨와 최부자 가문의 가르침”이라며 예우했다. 경주 최씨, 그중 최진립 장군으로 시작되는 가계도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런 표현을 했을 것이다.

     

    최진립 장군 묘소 아래 사패지賜牌地에 울산과학기술원(UNIST)이 건립되니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동학을 창명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최진립 장군의 7세손이니 공의 위대한 정신은 자손 대대로 이어졌다.

     

    글 조성갑

    사진 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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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립 장군 충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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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서원 내 숭렬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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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서원 안내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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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서원 입구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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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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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립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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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립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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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립장군 정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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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립장군 묘소 입구

     

    (탐방 팁)

    용산서원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59

    충의당과 충의공원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충의당길 15

    최진립 장군 정려비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513-1

    최진립 장군 묘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 산 157 (울산과학기술원 교수아파트 입구)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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