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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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갖추어야 할 천도교 박물관지난 겨울에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그동안 일본과 동남아 등지는 몇 차례 다녀왔지만 유럽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동해의 해돋이를 보면서 지내던 일상에서 벗어나 포르투갈의 ‘카보 다 로카(Cabo da Roca)’에서 대서양의 노을을 보며 느꼈던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기 위해 몸을 실었던 범선도 보았고, 그 유명하다던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도 눈에 담고 왔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유럽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나라와 도시의 상징이었다. 유럽은 로마 시대 이후 가톨릭의 지배가 이어졌기 때문에 방문한 도시의 중심부에는 사람을 압도할 위용을 자랑하는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비야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 등 유럽을 대표하는 스페인의 성당은 유럽을 가히 ‘신국(神國)’이라고 불릴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밖에도 대항해 시대를 열어 유럽의 변방이었던 포르투갈을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이끌었던 리스본의 ‘발견기념비’ 등의 상징물들도 인상적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레알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과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Thyssen Bornemisza)’이었다. 스페인의 국립 미술관인 프라도 미술관은 15세기 이후 스페인 왕실에서 수집한 미술 작품이 전시하는 유럽의 대표적인 미술관의 하나로 스페인의 3대 화가인 엘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와 피가소 등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 3천 점 이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는 독일 귀족 티센 가문이 수집한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작품 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이 위에 언급한 스페인 작가 중심이라면, 티센 미술관은 마네, 모네 등 유럽 전역 작가의 작품과 현대 작가의 작품까지 볼 수 있었다. 두 미술관에서 학창 시절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도 여럿 만났다. 다음에는 넉넉한 기간 동안 마드리드의 미술관만을 보기 위해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시와 나라를 대표하는 미술관을 관람하기 위해 까다로운 입장 절차에도 끊임없이 입장하는 관람객의 모습을 보면서 유럽 문화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천도교로 눈을 돌려보면 어떠한가? 세상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천도교의 상징은 있는가? 경주의 용담정이 동학의 창도지로서 상징적인 장소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용담을 찾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천도교를 각인할만한 매력적인 상징을 마주하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서울의 중앙대교당과 봉황각도 천도교의 상징적 기념물이지만 용담과 마찬가지로 미흡한 부분이 있다. 이들 장소가 상징으로서 미흡한 이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학의 창도부터 현대의 천도교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와 기념물을 일목요연하게 알려주는 박물관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온전한 박물관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천도교가 후천 오만 년을 이끌어갈 진리라고 이야기한들 귀를 기울여줄 사람은 없다. 천도교단이 세상 사람들에게 후천의 새 진리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한탄하지만 말고 세상 사람들에게 천도교가 후천의 진리라고 알려줄 수 있는 상징과 해설이 필요한 이유이다. 용담정 아래 들어선 동학기념관 전시물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소리치지 말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전시된 영부가 동학 교단의 그것이 아니라고 떠들지만 말고, 제대로 된 박물관을 만들어 천도교의 역사와 전통을 잘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단의 박물관에서 동학의 역사와 유물을 분명히 알리면 다른 곳에서는 이를 보고 천도교를 제대로 알리게 되는 것이다. 박물관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시기가 늦은 감이 있다. 올해는 수운대신사 탄신 200주년이다. 대신사 탄신 100주년에는 ‘출세백년기념관’을 만들어 세상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을 제공했다. 탄신 150주년을 맞아서는 용담정을 성역화했다. 올해 탄신 200주년을 맞아 천도교단은 행사를 위한 행사보다 내실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 천도교 신앙을 회복하고, 대신사의 사적지를 정리하고, 경전의 해석을 현대화해 미래 세대에게 천도교를 알릴 수 있는 등이 요구된다. 그 가운데 꼭 필요한 것이 정리된 천도교의 역사와 문화를 세상에 알려주는 박물관의 설립이다. 글.덕암 성강현(흥신포 직접도훈, 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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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산 아래 타오르는 독립정신, 청주 삼일공원청주 삼일공원에는 충북 출신 민족대표들의 동상이 줄지어 있다. 그 모습이 흡사 ‘어벤져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후에 변절한 것으로 밝혀진 정춘수의 동상은 공원 건립 16년만인 1996년 철거돼, 현재 그 자리에는 횃불을 움켜쥔 두 손이 다른 5인과 함께 우뚝 서 있다. (3.1운동 당시 어두운 밤 횃불만세운동을 벌였던 충북의 선열들을 기리기 위함이다.) 우암산 기슭 우회 도로변에 위치한 삼일공원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직접 공원에 서서 민족대표들의 얼굴과 마주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3.1 혁명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여섯 명이 충북 출신이라는 놀라운 사실과 함께 이를 기리고 위업을 계승하기 위해 공원을 건립하였다. 의암 손병희, 우당 권동진, 청암 권병덕, 동오 신홍식, 은재 신석구, 청오 정춘수(변절) 6인이 이곳에 우뚝 서 있다. 청주시는 삼일공원을 올해 1월 ‘청주미래유산’으로 선정하였다.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 이후 국권을 피탈당한 식민지에서 1919년 3월 1일 민족은 일본의 지배에 항거해 분연히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한민국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알린 3.1만세의 외침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1920년, 3월 1일을 '독립선언일'로 지정하였으며 현재에 이르러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삼일절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충북 지역에 현존하는 대표적인 현충시설로 알려져 있는 삼일공원은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이다. 청주미래유산은 향토유적과 등록 문화재를 제외하고 다수 시민이 체험하거나 기억하는 사건, 인물 또는 이야기가 담긴 유, 무형의 근현대 유산을 의미한다. 이곳 삼일공원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추모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평소에는 시민의 발길이 뜸하다. 충북도는 삼일공원을 역사적 공원이자 명소로 조성하기 위해 지난 2022년 삼일공원에 독립운동가 동상 10기를 추가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했으나, 동상 형상 제작과정에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같은 해 9월 사업을 중단했다. 본지에서 취재한 삼일공원에 세워진 충북 출신 민족대표 5인 동상의 비문을 살펴본 바, 오류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권동진 선생 동상의 비문에 따르면, 선생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의암 선생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한 후 천도교를 지도하여 도사가 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본지 취재 결과 권동진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 관련자로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의암 손병희 성사를 만나 동학에 입교하였다. 삼일공원의 정비 사업이 진행된다면 이 또한 새롭게 바로잡아 제작되기를 기대한다.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1혁명 당시 민족의 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한 인물들이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등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며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였다. 이로 인해 다수의 민족대표들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의암 손병희 성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1922년 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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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울산여시바윗골에 새바람이 필요하다울산 중구 여시바윗골에 위치한 수운최제우유허지는 민족사상의 구심점인 동학의 모태지역으로서 울산광역시 문화재 기념물 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운대신사께서 주유팔로 후에 경주 용담에 들어 앉아 사색에 몰두하였으나 인간의 존엄성을 발휘해 주는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하던 중에 1854년 가을 경주에서 울산 여시바윗골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하시었다. 초가 3칸을 짓고 집 앞의 6두락 논(현재 동학관의 위치)을 사서 농사도 짓고 수련을 하시던 중 1855년 봄날 을묘천서를 받으신 곳이다. 울산여시바윗골을 처음 찾아 낸 분은 야뢰 이돈화 선생과 묵암 신용구 선생인데 1928년 1월 울산종리원에 순회를 왔다가 이곳을 답사하였다. 이후 1977년 표영삼선생께서도 이곳을 답사하고 신인간 성지 순례 편에 <을묘천서를 받았던 곳> 여시바윗골을 소개하였다. 포덕 139년(1998년)에 유허비가 건립되고 포덕140년(1999년)에 유허비각이 준공되었다. 포덕144년(2003년)에 울산대학교 강영환교수팀에 의하여 “수운최제우 초가∙초당 복원을 위한 학술용역 조사보고서”가 완성되고, 포덕 145년(2004년)에 초가∙초당(초가살림채 13평, 초당 8평 규모)이 복원되어 유허지의 모습이 제대로 갖추어 졌다. 시민들이나 방문객들이 쉴 수 있는 최제우유허지생활공원이 유허지내에 2015년에 조성되고 회화나무(최제우나무)가 공원 내에 있어 이곳 유허지를 지키고 있다. 울산수운최제우유허지보존회(회장 최현만)의 노력으로 동학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동학관(연면적 428m2)이 준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학관 건립비용 전액(23억원)을 울산시로부터 지원 받아 1층 규모로 건립되었다. 현재 이곳 유허지의 관리는 울산 중구청에서 하며, 동학관 관리는 기간제 근로자 2명이 교대로 화수목과 금토일에 유허지 전체를 관리하고 있다. 입구 안내데스크에는 공공근로자 1명이 있다. 초당 초가와 동학관 관리 면적이 넓어 잡초 제거 및 청소에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평일 방문객은 평균 10명 내외이며 주말에는 30명 정도 온다고 관리인이 알려주었다. 동학관내부에 수정 또는 보완해야 할 사항들이 많이 있다. 외국인을 위한 국영문 브로슈어 제작 및 동학과 삼일운동을 연결하는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동경대전 시문 중에서 중국어 간자체로 되어 있는 한자는 우리한자로 변경되어야 하고 동경대전을 소개하는 모니터가 정상적으로 동작이 잘 안 되고 있다. 어린이들이 배우고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콘텐츠 개발, 교육 및 홍보프로그램 개발 역시 필요하다. 동학관 내부에 25명 정도의 중 회의실이 빔프로젝트와 함께 구비되어 있어 동학관련 세미나들을 개최할 수 있다. 더 많은 방문객들을 유치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요구되며 교인 및 중앙총부의 관심 역시 필요하다. 수운선생님의 탄신 200주년이 되는 오늘날 향후 200년 후에는 천도교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성을 드리고 또 정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교단도 점차적으로 발전하고 울산동학관도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할 것이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고 실행에 옮기자. 여시바윗골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이 곳 유허지가 언젠가는 세상을 향해 큰 가르침을 줄 것으로 기대해 본다. 글, 울산교구 이암 정의필(칼럼니스트,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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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동학·천도교, 사월이라 초오일의 천일기념일을 아십니까?용 담 가 (龍潭歌) 『··천은(天恩)이 망극(罔極)하여 경신사월(庚申四月) 초오일(初五日)에 글로어찌 기록(記錄)하며 말로어찌 성언할까 만고(萬古)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 여몽여각(如夢如覺) 득도(得道)로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은 경전 곳곳에 4월 5일 득도의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지난 4월 5일은 포덕 165주년 천일기념(天日記念日)일이었습니다. 천도교의 많은 기념일 가운데 최대경축일이 천일기념일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동학 즉 천도교를 창도한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현재 국민들은 천일기념일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천도교에 대해서도 아는 분들이 적습니다. 지난 근현대사 1백여 년간에 천도교는 우리나라 역사를 이끌어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역사를 거론하자면 동학혁명과 3.1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은 물론 어린이운동, 청년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통일운동 등을 줄기차게 열어왔었습니다. 또한 개벽, 어린이, 농민, 신여성, 신인간, 만세보, 조선독립신문 등 문화출판운동도 선두에서 이끌어갔습니다. 오늘날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 동덕여자대학교(동덕여자의숙) 등 전국에 수십 개의 초중등학교를 운영한 역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교세는 약화 되었고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졌는지 반성과 대안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천일기념일의 어제와 오늘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지난 4월 5일 천도교중앙총부에서 전국의 천도교 교구로 보낸 천일기념일 홍보 현수막 시안을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경축 천일기념일_포덕 165년 4월 5일 11시〉 천일기념일(天日記念日)_포덕 1년(1860년) 4월 5일은 대신사(수운 최제우)께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인 천도를 받아 천도교를 창명한 날이다. 천도교에서는 이날을 ‘천일기념일’로 정하고 기념식을 봉행한다.』 천도교중앙총부에서 나름대로 국민여러분께 천도교와 천일기념일을 알리고 홍보하는데 그 노력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종단과 비교해서 무엇이 부족하고 더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내용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불교의 최대경축일은 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 즉 석가모니 부처님 탄신기념일(아기부처 오신 날)입니다. 기독교의 최대경축일은 양력 12월 25일 ‘성탄절’ 즉 예수님 탄신기념일(아기예수 오신 날)입니다. 하나 더 추가하면 천도교와 가깝다는 원불교입니다. 원불교의 최대경축일은 양력 4월 28일, ‘대각개교절’ 즉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께서 크게 진리를 깨달은 날입니다. 최근에는 대각개교절을 ‘원불교 열린 날’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이웃종단의 최대경축일을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천도교와 무엇이 다른 것인지 비교해보았으면 합니다. 천일기념일(天日記念日)에서 天日(천일)을 직역하면 ‘하늘 날’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천일기념일은 ‘천도교 열린 날, 또는 한울님의 날’이 됩니다. 오늘날 천일기념일을 보다 알기 쉽고 대중적인 홍보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천일기념일이 과연 무슨 뜻이 자리하고 있는지 그 역사와 사상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동양고대전설, 삼황오제(三皇五帝)에 나오는 삼황 즉 天皇(천황), 地皇(지황), 人皇(인황)을 먼저 살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천도교에서 승통기념일을 삼황三皇(천황씨 수운 대신사_천일기념일, 지황씨 해월신사_지일기념일, 인황씨 의암성사_인일기념일, 또 춘암상사_도일기념일)에서 그 첫 번째 ‘천황씨’에 천일기념일 제정 배경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일기념일에 대한 처음 기록은 해월신사 최시형에 의해, 포덕 13년(1872년) 영월 직동 박용걸 집에서 4월 5일 대신사 득도를 기념하여 향례(享禮)를 행하였다고, 천도교회사 등에 전해옵니다. 또 포덕 17년(1876년) 4월 5일 단양 자택에서 득도향례를 지내는 등 이후 해월신사께서 대신사 득도기념향례를 지속적으로 행하였습니다. 특히 1898년 원주 원진여, 원덕여의 집에서 마지막 피체되시기 전 4월 5일 향례를 지낸 것으로 전해옵니다. 천일기념일을 천도교에서 공식적으로 제정한 것은 포덕 47년(1906년) 4월 5일이었으며, 포덕 47년 4월 24일 종령으로 반포하였습니다. 의암성사 손병희 선생께서 동학을 천도교로 세상에 크게 선포(대고천하大告天下)한 뒤에 대신사 득도일인 4월 5일을 천일기념일이라 명칭하고 기념식을 거행하였던 것입니다. 《국문은 한글, 국교는 천도교라 할 수 있습니다.》 국민여러분께 천도교가 어떤 종교인지 한글과 비교해서 어린이와 청소년의 눈높이로 질의응답으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1. 묻기를: 우리나라 글(國文국문)이 무엇입니까? 답하기를: 한글입니다. 그럼 우리나라 종교(國敎국교)가 무엇입니까? 답: 천도교입니다. 2. 묻기를: 한글 즉 훈민정음을 창제한 분은 누구입니까? 답하기를: 이름은 이도(李祹)요, ‘세종대왕’이라 합니다. 동학 즉 천도교를 창도한 분은 누구입니까? 답: 이름은 최제우(崔濟愚)요, ‘수운 대신사’라 합니다. 3: 묻기를: 한글을 요약해서 설명해 주세요? 답하기를: 조선전기 제4대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하여 반포한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입니다. 천도교를 요약해서 설명해 주세요? 답: 1860년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창도하였습니다. 천도교라는 이름은 1905년 제3세 교조 의암성사 손병희 선생께서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한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이며, 또한 세계적인 종교입니다. 4. 묻기를: 천도교의 신앙과 사상은 무엇입니까? 답하기를: 천도교 제1세 교조 수운 대신사 최제우 선생의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신앙입니다. 제제2세 교조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의 ‘사람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윤리입니다. 제3세 교조 의암성사 손병희 선생의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입니다. 또한 제4세 대도주 춘암상사 박인호 선생의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는 말씀도 실천하고 있습니다. 5. 묻기를: 우리나라 글이 한글이라는 것은 어린이들도 다 아는데, 우리나라 종교가 천도교라는 것은 대부분 모르는 것에 대한 설명을 해주세요? 답하기를: 우리의 한글이 우리나라 글이듯이, 우리나라 최초의 종교는 천도교입니다.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 장군은 보국안민과 척왜창의 주창으로 일본을 물리치자는 최초의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순국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은 동학혁명 당시 동학 접주로 활략한 역사가 있습니다. 또한 천도교에서 소파 방정환 선생을 중심으로 5월 5일을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을 제정하였으며(처음 어린이날 제정은 1922년 5월 1일), 또 ‘어린이’라는 아동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소파 선생은 천도교 3세 교조 의암 손병희 선생 사위이며, 천도교 청년회 지도자였습니다. ‘어린이’라는 말과 글도 천도교에서 창제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 한글은 국문(國文)이요, 우리나라 국교(國敎)는 천도교라는 것입니다. 6. 묻기를: 한글날이 국경일이듯이 천일기념일도 국경일로 제정되어야 하겠네요? 답하기를: 천도교는 동학혁명과 3·1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어린이운동은 물론 일제로부터 해방 후 남북분단에 반대하는 통일운동에 앞장선 종단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계승··’이라고 하였습니다. 천도교 제3세 교조 의암 손병희 선생이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이며, 3·1독립운동을 영도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러한 헌법 전문을 비롯한 동학·천도교의 역사와 사상 등을 살펴보면 분명 천도교는 대한민국 국교(國敎)는 물론 천일기념일의 국경일(국가가 지정한 공휴일)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종교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7. 묻기를: 우리나라 헌법에 정교분리의 원칙과 종교신앙의 자유, 즉 국교를 둘 수 없습니다? 답하기를: 물론 헌법에 정교분리의 원칙에 국교가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교는 분명 천도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자면 북한(북조선)의 천도교 교세가 다른 종단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것도 참고해야 합니다. 문제는 천도교단이 어떻게 과거 우리나라 최대의 종단이요, 최고의 역사를 창조한 종단처럼 다시 소생하느냐의 숙제를 남기고 저의 글을 마무리합니다. 글 이윤영 (천도교 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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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일이다105년 전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역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함성소리는 매해 3월이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고동치게 한다. 3.1만세운동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평화로운 항거였으며 3.1정신은 이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루는 근간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3월이면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공적에 비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이 있다. 바로 3.1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하고 자금을 준비하였던 의암 손병희선생이다. 천도교 제3세교조인 의암 손병희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우리나라가 강제로 강탈당하게 되자 10년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해 나가게 된다. 우이동에 땅을 구입해 수련도장인 봉황각을 짓고 전국에 있는 유능한 지도자들을 모아서 독립의지를 확고하게 심어주기 위하여 심신훈련을 하게 한다. 3년에 걸쳐 7차례 483명이 봉황각 연성수련을 통해서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3.1운동때 전국 각 지역에서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지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부구총회를 통하여 결의하고 교호당 10원이상씩 건축성금을 내도록 하였다. 이 자금은 후에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리고 당시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가 적자경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끝까지 폐쇄하지 않고 훗날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전국 37개 대교구로 하여금 등사기를 1대씩 구입하도록 하여 훗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의암 손병희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한 49일 특별기도를 지시하였다. “먼저 보국안민(독립)이 된 다음에야 광제창생 포덕천하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 등 아홉 곳에 대표 기도처를 정하고 각 기도처마다 4명씩 대표를 파견하여 기도식을 지도하게 하면서 3.1독립운동을 위한 전국 교단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그리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와 대연합으로 33인 민족대표를 결성하기에 이르른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전국 조직망을 정비하고 독립자금까지 전담하는 등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지도해 나갔지만 매년 3.1절이 되면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은 미미하게 들리는 듯 마는 듯하다. 또한 천도교의 3.1운동에 대한 역할 또한 알려지기도 전에 잊혀져 가기만 한다.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해야만 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역사는 사라지고 심지어 왜곡되기까지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의 잘못이며 이대로 가다가는 사라지고 왜곡될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세상이 떠들썩 하도록 매해 기억하고 기록하고 또 기념해야 할 것이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는 방법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자. 독일을 예로 들어보자. 독일은 틀에 박힌 상징과 형식이 아닌, 권위적이지도 않고 위압적이지도 않은 형식으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참회하며 가장 예술적으로 역사를 작품속에 표현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살아있는 곳으로 피터 아이젠먼의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1998~2005)는 홀로코스트(Holocaust)로 희생된 600만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고 있다. 다음은 나치의 분서사건 60주년을 즈음하여 독일 베벨광장에 세워진 미하 울만의 「도서관」이라는 작품을 보자. 베벨광장 중심부에 가로120센티미터, 세로120센티미터 크기의 정사각형 투명유리창이 있고 그 지하에 텅빈 직방체 공간이 있다. 이스라엘 예술가 미하 울만의 「도서관」작품이다. 책들의 화형식이 있었던 그 장소의 지하에 설치된 경고의 기념조형물이다. 이처럼 그들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방법으로 문화예술 공간을 이용하고 있다. 문화예술공간은 시민들의 삶속에 스며들고 있으며 그들은 생활속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보고 느끼면서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의암 손병희선생님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_숙현당 정정숙(근현대사미술관 담다 관장, 천도교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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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반역사적인 ‘이승만 띄우기’ 시도요즘 독재자와 학살자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이승만 대통령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을 자주 접하게 된다. 뜬금없이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여 독재자를 기리겠다고 한다거나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뒤짚으려고 한다.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기술한 우리나라 헌법전문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런 준동에 분노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현재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권 말살과 부정부패를 저질러 4.19혁명으로 쫒겨난 그의 말로를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판에, 독재자 이승만을 두고 다시 논쟁하는 자체가 소모적이다. 이승만의 악행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8ㆍ15해방 이후에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어 독재정치를 하면서 학살한 무고한 양민들이 100만명 이상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이승만을 국가보훈부가 지난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고, 국방부는 그를 혜안을 지닌 지도자로 미화하는 교재를 발간하기도 했다. ‘홍범도 지우기’로 국민의 공분을 산 집권 세력이 ‘이승만 국부 만들기’로 이념전쟁에 불을 붙이고 있는 형국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후 북한·중국·러시아가 공산화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했다”고 그를 칭송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농지개혁·교육개혁·정치개혁이란 3개 개혁으로 대한민국의 토대를 닦았다.”며 이승만을 한껏 찬양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격동의 해방 공간에서 그가 내린 선택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강변한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용하고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역사적 사실도 그들의 눈에는 크게 문제가 될 게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편다. 진실을 덮고 거짓을 호도하려는 영화 한 편에 부화뇌동하는 것이 2024년 대한민국의 현주소인 것만 같아 정말 씁쓸하다. 정권은 유한하고 역사의 흐름은 도도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이런 시도가 성공하겠는가. 말 그대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으로 국회에 상정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하고자 하는 법률안이 아직도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을미의병 참여자에 대해서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145명을 서훈하면서도, 전봉준·최시형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승만 띄우기’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를 거스르는 세력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역사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독재자 이승만을 구국의 민족지도자로 받들려는 기도를 절대 묵과할 수 없다. 국민 공감대도 없이 진행되는 시대착오적 ‘이승만 띄우기’는 성공할 수도 없고 결국 이념전쟁으로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것으로 끝날 것이 뻔하다. ‘이승만 국부 만들기’에 주력해온 뉴라이트 역사관에 따른 반역사적인 악행을 당장 멈추기를 요구한다. 글_윤여진(시인,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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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다올해는 3.1운동 105주년이다. 모든 언론이 3·1운동 105주년이라고 쓰고 있다. 오랫동안 사용해 화석화된 잘못된 용어이다. 105년 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 인근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했고 일경에 체포되어 갔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경성 거리의 민중들을 바라보며 끌려가던 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동학혁명이 좌절된 후 혁명의 최후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고 1900년대 초의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언론과 교육, 출판 운동 등으로 민도를 높이는 개혁을 전개하다가 1913년부터 전국의 천도교 교역자 483명을 차례로 불러 특별 연성 수련을 실시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장차 국가를 위해서 쓰일 인재를 미리 양성해 놓고자 한 지도자의 혜안이었다. 세계 제1차 대전이 종결되고 민족자결의 운동이 세계적으로 유행되자 의암은 우리의 독립을 위한 시점에 이르렀음을 직감했다. 드디어 1919년 천도교는 전체 인구 1,800만 명에 300만 명의 신도 수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단이 되었다. 천도교는 일제의 압제에 대항할 충분한 인원과 조직 그리고 자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학도들만이 참여했던 동학혁명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절감했던 손병희는 거대한 민족운동을 천도교만의 단독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3.1의거는 제2의 동학혁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국외에서의 독립선언과 의문스러운 고종황제의 죽음으로 민중의 분노가 치솟자 손병희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비밀리에 각계의 지도층에게 함께 할 것을 제의했지만 대부분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를 무시하며 함께 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개신교의 이승훈 선생과 길선주 목사 등은 이미 개신교의 독단으로 독립청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종단이 비밀리에 접촉했고 함께 독립선언을 하기로 합의했다. 다른 교단과 함께한다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시절임을 고려할 때 이들 종단 지도자들의 결단은 돋보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불교계의 큰 스님인 용성 스님과 만해가 함께 하니 비로소 종교연합으로 민족대표를 꾸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독립선언에 동참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들 지도자들의 위대한 희생과 헌신적 정신이 바로 3.1의거의 출발점이었고, 그들의 고뇌 어린 결단이 있었기에 3.1의거는 추진될 수 있었다. 의거의 중심인 천도교는 과거 실패했던 동학혁명을 다시 일으킨다는 자세로 준비했다. 손병희는 최남선을 시켜 작성된 독립선언서를 자체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에게 비밀리에 인쇄할 것을 지시했다. 인쇄 중 종로경찰서의 악질 조선인 순사에게 발각되기도 하고, 완성된 선언서를 옮기는 과정에 파출소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는 등 곡절 끝에 3만 5천 장의 선언서를 종교 조직을 이용해 전국에 퍼트리는 데 성공하였다. 만세 시위는 당일 오후 2시 경성 등 전국 6개 도시를 시작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당황한 일본은 민족대표들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하고 전국의 시위에는 강력한 무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밟으면 밟을수록 일어서는 우리 민족이었다. 특히 경기도의 시위가 가장 격렬했다. 수원 화성 지역은 장날마다 시위가 일어났으며 제암리와 고주리의 학살은 대표적인 피해 사건이 되었다. 3월부터 3달 동안에만 시위에 나선 이가 전국적으로 210만 명에 이르고 체포·투옥된 수도 4만6,948명, 부상자 5만 명 이상이었으며 사망자도 7,500명이 넘었다. 그런데 운동이란다. ‘쓰리 포인트 원 스포츠’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하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된단 말인가? 3·1운동이란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가. 해방 이후 헌법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의 헌법전문 초안에도 분명 3·1혁명이었다. 그러나 국회로 넘어가 심의 중에 바꾸었는데 일설에는 대통령에 유력한 이승만의 온화한(?) 이미지와 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아첨꾼들이 권했고 이승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헌법전문에 운동으로 수록되었다고 한다. 이승만도 일제강점기 시절 내내 사용하던 3·1혁명을 버린 것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3.1운동이 아닌 3·1혁명, 3·1대혁명이라고 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과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에도 명백히 3·1혁명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지난 3·1혁명 100주년 당시 정명(正名) 운동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명 되지 못하고 있다. 제국의 신민이 아닌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된다고 선언한 것은 분명 혁명이었는데. 이제 우리부터라도 제대로 된 명칭을 사용하자. 3.1혁명이라고.◎ 글 임형진(년암, 동서울교구,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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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 년 전 천도교인처럼지금부터 백 년 전인 1923년 8월 10일 지금의 천도교중앙총부 전신인 천도교중앙종리원의 직원회에서는 중대한 결정 하나를 내렸다. 그것은 천도교 교조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대신사출세백년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을 조직한 결정이었다.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대신사는 1824년 10월 28일 태어났다. 1924년이 수운대신사가 탄신한지 꼭 백 년을 맞는 뜻깊은 해로 이를 교단적 차원에서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기념사업회는 5일 후인 8월 15일 결성되었고, 위원장은 춘암상사가 맡았다. 기념사업회는 기념사업의 방향을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정했다. 하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장래를 서로 전망하고, 다른 하나는 수운대신사를 본받고 법으로 삼아 천도교인을 독려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는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 기념이 단순히 후천의 성인인 수운대신사가 탄생한 사실을 축하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24년을 사는 천도교인들이 수운대신사와 같은 사람으로 거듭나 수운대신사가 목적한 바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다지자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줄이면 과거를 기념하여 현재를 고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기념사업을 하자는 방향이었다. 사업의 방향에 맞춰 기념사업은 크게 세 가지로 준비하였다. 첫째는 과거를 기념하는 행사로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잇는 특별기도 봉행이었다.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은 포덕과 광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뜻을 계승하기 위해 천도교인 전체가 참여하는 특별기도를 하기로 했다. 천도교단에서는 교회나 국가의 큰 일이 있을 때 전 교인들이 일정 기간의 특별기도를 봉행해 정신 통일과 행동 통일을 추구했다. 대표적인 특별기도가 3·1운동 직전의 49일 특별기도였다. 기념사업회는 특별기도 기간을 수운대신사가 탄생한 달인 1924년 10월 1일부터 10월 21일까지의 21일간으로 정했다. 수운대신사가 태어난 달에 전 교인들이 몸과 마음을 일치해 포덕천하와 광제창생의 대원을 실현하는 천도교인으로 무장할 것을 기원하기로 했다. 기도 시간은 낮 12시로 정했다. 기도 시간을 하루의 중심인 낮 12시로 정한 것은 수운대신사의 득도가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는 의미를 담았다. 기도의 방식은 봉청수(지금의 청수봉전), 묵념기도(지금의 심고), 본주문 105회 묵송, 묵념기도의 순서로 했다. 특별기도를 통해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둘째는 현재의 천도교를 담는 행사로 1924년을 사는 천도교인의 활동을 보여주는 기념행사였다. 기념행사는 이틀에 걸처 진행되었다. 10월 27일 저녁 7시부터 중앙대교당에서 당대 천도교를 대표하는 연사인 이돈화, 이종린, 방정환 세 사람이 수운대신사 탄신의 의미를 돌아보는 강연회를 열었다. 탄신일인 10월 28일에는 11시 반부터 새로 지어진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에서 탄신 백주년 기념식을 열어 수운대신사 창도 정신을 기렸다. 이어서 청년당 대회를 열어 추모사 낭독과 대신사와 청년당에 관한 연설, 선언문 낭독 등을 진행하였다. 청년당 대회 폐회 후에는 여흥이 진행되었는데 동덕여학교 학생의 축하 공연, 김문필 일행의 기마술과 무도, 청년당의 가장행렬과 광대 줄타기, 경성악대의 주악 등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기념행사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는데 저녁 7시부터 청년당, 내수단(여성회), 학생회, 소년회 등 7개 부문 단체에서 준비한 공연이 밤 12시까지 진행되었다. 기념관 뜰에는 전등을 달고 만국기를 내걸어 화려하게 장식해 기념행사 분위기를 높였으며, 기념관 안에는 7개 부문단체에서 만든 각종 모형물이 찿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전국에서 4천 명이 참여해 일대의 교통이 혼잡할 정도였다. 셋째, 미래를 준비하는 사업으로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의 건립이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수운대신사 탄신 백주년이라는 뜻깊은 해를 맞아 천도교인 만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사업으로 기념관을 건립해 일반에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독실 교인 3만 5천 집을 선정하여 이들이 1원씩 성금을 낸 3만 5천 원으로 대공회장을 건립하기로 했다. 기념관은 6월 25일 착공해서 탄신일인 10월 28일 기념식을 겸해 낙성식을 가졌다. 총공사비는 약 5만 원이었다고 알려졌다. 기념관은 앞은 2층, 뒤는 1층으로 연건평 160평으로 1천 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대공회장이었다. 이 기념관에 대해 “기념관의 넓이는 9칸이요. 길이는 12칸인데, 동 기념관은 일반 집회에 제공할 터이요, 활동사진(영화), 강연, 연극 등 어떠한 것을 사용하더라도 편리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데, 조선인의 손으로도 집회 장소를 건축한 것은 이곳이 효시라 할 수 있다.”라고 당시 언론에서 기념관 건립의 의미를 설명했다. 수운대신사의 정신을 담은 기념관은 서울에서 제일 큰 공연장으로 시민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민족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념관을 우리의 힘으로 만든 것은 수운대신사의 창도의 정신을 세상에 펴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업이었다. 이처럼 백 년 전 천도교인은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후천의 성인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열과 성을 다해서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성과를 내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고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전 천도교인들이 단결해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 년이 갖는 의미를 새기고 이를 세상에 전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교인들이 특성을 모아 국내 최고의 대공연장을 건축해 세상을 위해 내어놓았다. 이 소식에 민족 구성원들은 가슴이 들떴다. 백 년 전 천도교는 민족의 한 가운데에서 희망이 되었다. 이제 다시 백 년이 지났다. 올해가 수운대신사 탄신 2백주년이다. 천도교에서 대신사 탄신 2백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번에는 어떤 기념물이 만들어져 수운대신사의 탄신의 의미를 새기고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백 년 전 우려했던 것처럼 그냥 행사를 위한 행사, 해마다 지내는 제사와 같은 무의미한 행사를 준비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다못해 천도교박물관을 건립해 세상 사람들에게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알리는 공간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한다. 백 년전 천도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그때와 같이 세상의 희망으로 천도교가 우뚝서기를 기대한다. 글, 덕암 성강현(흥신포 직접도훈, 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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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되는대로 살아야지 뭘 어떡해?“티브이 없었으면 어떡할 뻔하셨어요?” 라고 내가 묻자 준비한 것처럼 촌각의 틈도 없이 돌아온 대답이었다. “되는대로 살아야지 뭘 어떡해?”. 마을(노인)회관에 옹기종기 앉아서 티브이만 보고 있는 어르신들. 거의 혼자 사시는 분들이라 체온도 그립고 난방비도 겁나니 노쇠한 몸 하나 의지하기엔 마을회관이 좋다. 종일 티브이 장면을 따라가며 얘기 보따리를 끌렀다 싸맸다 하시는 노인들. 그러다 심드렁해지면 묵은 기억 들추다가 말다툼도 벌이지만 다시 티브이 따라 깔깔 웃는다. ‘되는대로 산다’라는 말은 주어진 조건에 저항하지 않고 뭐든 수용한다는 말이다. 《놓아버림》의 데이비드 호킨스나 《당신이 플라시보다》의 조 디스펜자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이는 어르신들의 몸에 밴 삶의 지혜다. 일단 수용한 다음에 한발 더 나아갈지 여부를 궁리하는 생활 태도. 한울 모심의 태도다. 티브이 없어도 얼마든지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잘 보내실 어르신들이다. 하지만 마을회관에 모이긴 해도 늘 벽에 기댄 등은 더 구부정해지고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는지라 약을 한 주먹씩 먹는다. 움직이지 않으니 식욕도 별로 없어서 면사무소에서 나온 쌀과 부식은 옆방에 쌓여있다. 옛날과 달리 요즘 먹거리가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 맛을 내느라 섞어 놓은 첨가물들이 얼마나 몸을 망치는지 모른다. 멸치와 쥐포조차 인공조미료가 듬뿍 스며있다는 내 말에 깜짝 놀란다. 특별한 날에 즐겨 드시는 회도 모두 양식한 것이고 정전이 되면 물고기가 폐사하는 게 강제로 산소를 공급하다가 전기가 끊기니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하니 입을 쩍 벌린다. 작년부터 어쩌다 내가 공식 노인이 되었고, 올해 처음으로 노인 일자리 가서 목격한 우리 마을 노인들 모습이었다. 좋은 먹거리가 뭔지를 말하기보다 믹스커피 통 옆에 아몬드와 쌍화탕 분말 차를 한 통씩 사 놓았더니 잘 드신다. 이 역시 가공식품이지만 자연 식재료는 노인들 일거리라 어쩔 수 없기도 하다. 내가 시간 나는 두 번째 날과 세 번째 날은 건강 체조를 해 봤다. 손뼉치기와 발끝 부딪치기. 팔을 뻗어서 가 닿는 곳 모두를 토닥토닥 두드리기. 손 비비기와 얼굴 비비기를 앉은 채로 했다.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해서다. 서로 왼손으로 악수하게 해서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팔과 왼 어깨를 골고루 두드려주는 놀이도 했다. 목덜미와 등짝까지 두드리다 보면 자연스레 포옹을 하게 된다. 순간순간 깔깔 웃는다. 쇠똥 구르는 것만 봐도 웃어댄다는 소녀들처럼.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내 스마트폰으로 모바일 핫스팟을 설정하고 에이치디엠아이(HDMI) 케이블을 티브이에 연결해서 유튜브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비록 오래된 프로지만 웃음보따리인 에스비에스(SBS)의 《고향에서 온 편지》도 보고 보건복지부에서 만든 치매예방 영상도 봤다.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은 발 마사지였다. 발바닥과 발등의 혈 자리 이미지를 칼라로 인쇄하여 나눠 준 다음에 반사구니 서혜부니 하는 원리를 쉽게 설명하고서 내가 쓰던 호호바 오일과 코코넛 오일에 오렌지 에센셜 오일이나 라벤더 오일을 브랜딩 해서 발라 드렸다. 증상에 따른 혈자리를 누르게 하다가 그냥 막 “되는대로 눌러도 된다”라고 말씀드렸다. 나도 노인들과 노는 이 놀이를 되는대로 계속할 생각이다. “되는대로”. 글, 목암 전희식('밥은 하늘입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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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SG 경영의 근본이 천도교에 있다최근 사회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의 시작은 1970년대 UN에서 논의된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에서 시작되었는데 UNSDGs에 의하면 인류의 보편문제와 지구 환경문제 및 경제 사회문제를 2030년 까지 17가지 주목표와 169가지 세부 목표를 정해 국제적 공동 목표를 세웠다. 우리나라 역시 이 분야에 큰 관심과 함께 향후 계획 및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기업은 가격이 싸고 품질이 좋은 생산품을 만들어 이익을 많이 내면 되었지만 향후는 생산품을 만드는 과정과 더불어 비재무적인 요소(환경(E), 사회(S), 지배구조(G))까지도 평가를 하여 투자자들이 투자를 결정할 때 고려하도록 하였다. ESG 경영 평가단은 사용하는 제품이 원자재의 생산부터 건전하고 합법적인 과정을 거쳤는지를 확인하고 평가를 한다. 이것은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에 전 분야에도 이러한 개념이 바탕이 되어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종교계에서도 이러한 ESG 경영이론을 도입하는 것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천도교에서는 ESG와 관련된 내용들이 이미 경전 속에 많이 들어 있다. 환경(Environmental)은 기후 변화 및 탄소 배출, 에너지 사용, 수질, 폐기물, 토양 오염, 소음, 진동, 환경 친화 등의 환경 측면에서 위험 사고를 바탕으로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환경 활동이며, 해월신사님의 생태 존중 말씀은 탄소제로시대에 새겨야 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땅을 어머니 살처럼 여기면 온갖 만물이 그 위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Social)는 노동, 인권, 안전, 보건, 성 평등, 지역사회 기여 등의 사회적 책임 활동이며, 천도교의 시천주 진리로서 인내천 세상이 된다면 사회적 책임 활동에 앞장 설 수 있다.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종교인들의 노력이 필요하며, 특히 천도교는 다른 어느 종단보다 인권을 존중한다. 마음속으로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니 그 이상 소중한 인권과 사회적 책임활동이 어디 있겠는가. 지배구조(Governance)는 기업의 투명성, 윤리적 경영, 이사회의 역할과 책임을 다함으로서 기업의 장기적 이익과 지속 가능한 경영 활동인데, 천도교의 임사실천십개조를 보면 ‘윤리를 밝히라’ 그리고 ‘일에 임하여 지극히 공정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지배구조의 바탕이 되는 말씀이다. 윤리를 바로 세워 책재원수가 되지 않도록 건실한 천도교의 지배구조가 필요하다. 침체된 교단에 새로운 기운이 필요하다. 천도교도 높은 도덕성과 함께 훌륭한 경영마인드를 갖춘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전 세계 선진국들은 지금 ESG의 경영전략에 올인하고 있다. 2050년 탄소제로 사회구현을 목표로 세계적인 기업들이 앞장서서 이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천도교단에서도 급변하는 ESG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교단차원의 ESG위원회가 구성되고 전문가들이 모여서 교단 발전을 의논하였으면 한다. 향후 기후 변화는 이대로 가면 지구의 큰 이변으로 삶, 즉 생존 자체를 위협당할 수 있다. 온 세계가 함께 기후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사회적 가치 창출과 투명한 윤리 경영에 노력해야 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온실가스 즉 탄소배출이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었다. 우리나라는 이 문제에 지속가능한 해법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겨 가고 있다. 종교계 역시 탄소 제로 사회 구현에 기여하고 동참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더욱이 천도교가 앞장서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ESG 경영의 확대 측면에서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 간의 상호 작용으로 지속가능한 개발과 환경보호 및 사회적 공헌 등으로 종합적 삶의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글, 울산교구 이암 정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