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뉴스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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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여성회, 이제 창립 100주년이 한 해 앞으로지난 3월 25일 여성회 창립 제99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제 창립 100주년이 한 해 앞으로 다가왔다. 포덕65(1924)년 4월 5일 천도 교내수단이 창립되어 어느덧 99주년을 맞이한 것이다. 올해의 창립 기념일은 내년 100주년을 준비하는 리허설 형식으로 임했다. 우리나라 여성단체 중에서 100주년을 맞이하는 것은 천도교 여성회가 처음이다. 그만큼 긍지와 자부심도 크지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과 부담감도 큰 것이 사실이다. 이제 100주년은 일 년 앞으로 다가왔고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고 정성을 기울이고 마음가짐을 다잡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여성회 100년 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본부 차원의 준비와 노력도 중요하지만 100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활동한 원 사료와 각 지부의 활동, 회원들의 신앙생활 자료를 함께 담아내는 기록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아직은 미진한 각 지부의 활동 자료를 모으는 일에도 더많은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이미 결성된 천도교여성회 100 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보다 더 활성화하고 추진위원들이 합심하여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수도자들은 항상 ‘도고일척(道高一尺)마고일장(魔高一丈)’을 경계 한다. 도가 높을수록 마 또한 커진다는 이 일침은 도가 한 자 높아지면 마는 열 배나 더 높아진다는 말인데 원래 의미는 ‘선비의 수양이한 자 높아지면 그에 따른 유혹은 한 길이나 더 높아진다는’ 뜻이다. 현대에서는 ‘경찰이 뛰면 도둑은 난다’는 식의 일반화된 속담처럼 즐겨 쓰는 표현이 됐다. 정도(正道)의 높이가 일 척이면 사마(邪魔)의 높이는 일 장이다는 뜻이다. 우리 여성회에서 창립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는 데도 그만큼 어려움과 힘든 과정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 164년의 역사와 여성회 100년사를 돌이켜보면 지금 우리는 스승님과 선열들이 겪었던 그 모진 고난과 형극의 세월에 비할 바 없이 편하고 쉬운 길을 가고 있다. 그분들이 목숨으로 지킨 거룩한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우리 모두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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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역사강사 김명재 동덕 입교식순천 지역에서 역사 강사로 활동하는 김명재 동덕이 6월 28일(수) 11시 중앙대교당에서 입교식을 봉행했다. 성암 정갑선 교무관장(진주교구) 집례, 혜허당 허채봉(부산시교구) 동덕을 전교인으로 입교식을 봉행한 김명재(53세) 동덕은 순천에서 시민 학생등을 대상으로 평화통일, 3·1운동, 여순항쟁 등을 강의하는 역사 강사로 ‘동학농민혁명 영호도회소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다. 김 동덕은 2015년경 국립5·18민주묘지(광주) 어느 돌에 새겨진 “5·18민주화운동의 뿌리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에 있다”는 글을 보고 동학을 연구하게 되었으며, 동학정신으로 미래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며. 작년 원평취회에서 처음 만난 허채봉 동덕 권유로 천도교 유튜브 시일식을 몇달 동안 보고는 "천도교가 내가 찾던 동학을 실천하는 곳"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어 입교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날 입교식에는 박상종 교령, 윤석산 상주선도사, 주용덕 종무원장, 이미애 교화관장, 문범식 전서실장 등이 참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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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4년 6월 25일 시일식포덕 164년 6월 25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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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부모 공경 캠페인, 전주교구에서6월25일 전주교구(교구장 윤철현)에서 시일식 후 2023 천지부모공경캠페인 환경 교육이 진행되었다. 이윤영 동학기념관장의 환경설교, 김의동 환경전문 강사의 천도교인과 탄소중립 그리고 자원순환 실천 강의, 정진숙 지은당의 환경퀴즈, 커피박키트 체험실습으로 이 어졌다. 윤철현 교구장은 행사 후 “덕분에 즐거운 시간되었습니다. 강의 내용도 유익했습니다. 선물도 많이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인들께서 모두 행복해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전국교구장 단톡방에 감사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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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반공포로의 활동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되는 해이고, 정전협정이 조인된 지 70주년, 반공포로 석방 70주년을 맞는 의미있는 해이다.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는 험난한 여정을 맞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38선 분할점령은 자주국가와 통일국가 건설에 앞장섰던 천도교단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해방 공간에서 자주적 국가, 통일 국가를 주장하던 천도교단은 이념의 굴레에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반공포로 석방 70주년을 맞아 험난했던 한국전쟁 시기 북한 출신 천도교 포로의 발생과 수용소 에서의 활동, 그리고 반공포로 석방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천도교 포로의 규모와 신앙 생활 해방 당시 38선 이북의 북한에 천도교인의 2/3 이상이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천도교인들도 북한군으로 차출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으로 포로로 수용된 약 14만 명 가운데 마지막까지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약 35,698명이었고 이 가운데 천도교 포로는 약 4천 명으로 추산된다. 먼저, 광주수용소에는 제2수용소와 제3수용소에 천도교종리원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김응몽은 제3수용소의 천도교인이 처음에 100명이었으나 포덕하여 500명 정도까지 늘어났고, 제2수용소는 더 활발하였 다고 하였으나 제3수용소와 같이 500명으로 계산하여총 1,000명으로 추계하였다. 둘째, 논산수용소는 제2수 용소의 포로 명부에 올라 있는 1,253명과 성기남, 오용삼, 양제호 등이 수용되었던 제3수용소의 천도교대대인 7대대와 다른 대대의 인원을 합해 850명으로 잡아 총 2,103명으로 추계하였다. 셋째, 부산의 가야수용소에는 B대대에 천도교종리원이 구성되어 있었고 다른 대대의 천도교 포로를 합치면 약 600명으로 추산된다. 부산 거제리 병원수용소는 『신인간』의 기사를 통해 10여 명이 확인되며, 길두만의 증언으로 2개 대대에 종리원이 구성되어 각각 수십 명의 교인이 있었다고 해 약 100명의 천도교 포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넷째, 마산포로수 용소에는 김택룡을 책임자로 52명의 포로가 있었다는 명부가 천도교 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 영천과 대구의 포로수용소의 천도교계 포로는 확인되지 않는 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약 4천 명의 송환거부 천도교 포로, 곧 천도교 반공포로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들은 어떻게 천도교 포로임을 알렸을까? 각 수용소에 산재해 있던 천도교 포로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서로를 확인하고 규합해나갔다. (A) (부산 수영대밭수용소에서) 저마다 노래를 한 마디씩 부르는데내 차례에 돌아오자 나는 천덕송(天徳頌)을 한 곡 불렀다. 그랬더니 이곳 저곳에서 몇 사람이 천덕송을 따라 부른다. 그리해서 내가 있는 천막 안에서는 5, 6명의 천도교인을 찾아냈다. 그 후 서로 연락하여 수십 명의 천도교인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경비로 있는 사람도 있었고 중대간부로 있는 교인도 있었다.(김응몽의 글) (B) 그 다음에 여기저기서 왔다 갔다 하며 알아봤더니 바로 모잘 썼는데 궁을 마크를 새겨서 쓴 사람들이 있어 …… 궁을 마크를 단 사람들이 있더라구. 그래 그 사람들을 접촉을 했지요, 그 사람들을 보고(이성운 구술) (C) 근데 내가 들어가 가지구 심문하는 사람하고 얘기를 하다가 천도 교라고 그랬더니 그 뒤에 앉았던 사람이 “야 너 천도교야?”그래요. “예 천도교입니다.”, “ 너 일루 나와 봐” 그래서 그 앞으로 갔어요, 그게 그 감찰대 부대장이에요. 이동찬 씨라고 그분이 그 후에도 나하구 막역한 관계에 있었는데 그분이 “너 천도교 했어?” 그래요, “예, 천도교 했습니다.” “1세 교조가 누구야?” “아 수운대신사입니다.” “2세 교조는?” “해월신 사입니다.” “어 요 새끼 진짜 하나 왔네” 그러는 거예요. “하하하, 너 일루 나와 봐” 그리고 나서 감찰대 쇼리(급사)로 들어간 거예요.(이창번 구술)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같은 신앙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수용소에서 노래를 부르는 과정에서 천덕송을 같이 부르면서 수십 명의 천도교인을 확인하거나 모자에 뺏지를 달거나 옷에 궁을 모양을 그려 자신이 천도교인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수용소의 감찰대 등 포로 간부가 천도교를 신앙하고 있을 경우 에는 천도교인을 규합하기가 수월했다. 이렇게 모인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의 한 곳에 모여 시일식을 보고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51년 여름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수용소의 이념 대결이 심화되었다. 이 와중에서 포로수용소를 장악하기 위한 친공 포로에 의한 반공포로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 는데 대표적 사건인 ‘9.17폭동’이었다. 특히 85수용소의 9·17폭동은 전형적인 천도교 포로 학살 사건이었다. 사건 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천도교 포로였던 정승도는 이사건의 원인을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천도교 포로가 주도한 혈서 사건 때문이었다고 증언하였다. 평안북도 정주군 안흥면의 천도교종리원 원장으로 활동하다 포로가 된 박찬호는 8월 하순부터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의 혈서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이 송환 거부 혈서에 동참한 이들이 대부분 천도교 포로 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친공 포로들은 박찬호 등 14명의 천도교 포로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이후 포로 심사가 진행되어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내륙의 논산, 광주, 마산, 영천 등지로 분산 수용되었다. 이때부터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당국에 천도교 대대의 설치를 요구했고, 수용소의 정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서 천도교인 포로들로 구성된 천도교 대대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곳이 논산 제2수용소의 7대대였다. 부산의 가야수용소에 서는 B대대에 천도교종리원이 설치된 천도교 대대였다. 이 대대 500명은 전체가 천도교 포로로 구성되었다.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당국에 건의해 공식적인 천도교 활동을 시작했다. (D) 1952년 3월경에 천도교인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부터 그 안에 천막을 치고 시일식을 봉행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 그래서 이만하면 천도교 간판을 내걸 수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덕범씨가 미군과 교섭을 해서 시일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천막을 지원받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E) 궁을기를 맨들어 달았던 것도 같고 거스끼니 수용소에서는 그 천막 가빠 그걸 베끼면 잘 베껴진다고 그거 살 베끼면 잘 베껴지는데 그러면 안에 나일론이 참 좋거든 그걸로 거기다 이제 그러가지고 물감 같은 거 같다가 궁을기 만들고 태극기도 그렇게들 만들고 어디서 보급을 받아서 하는 게 아니고 자체적으로(성기남 구술) 위의 증언처럼 수용소 내에 천막을 치고 천도교종리원 간판을 걸었다. 논산 제2수용소의 천도교 대대인 7대 대장은 유래운이 맡았고, 절반이 천도교인이었던 8대대 장도 천도교인 허신관이 맡았다. 제3수용소의 천도교종 리원은 용천 출신 정용기가, 부위원장은 은율 출신의 주제명이 맡았다. 천도교 대대를 비롯한 수용소의 천도교종리원의 대표적 활동은 천일기념일을 비롯한 각 천도교 기념일을 봉행하는 일이었다. 기념일에는 수백 명의 천도교 포로 들이 한 자리에 모여 수용소 여단장을 비롯한 각급 간부를 초청하여 성대히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식후에는 다채로운 여흥과 잔치도 벌였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포로들을 대상으로 천도교 수련을 시켜 신앙심을 높였고, 천도교 교리 강좌와 교리 연구도 하였다.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반입이 어렵게 되자 천도교 포로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구절을 모아 수용소판 경전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들 천도교 포로는 반공포로 석방과 이후 판문점포로수용소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한의 생활을 준비하였다. 천도교 반공포로의 석방 1953년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포로의 송환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미국은 전쟁의 종결을 위해 모든 포로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이승만은 수용소 내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1953년 6월 18일을 기해 광주, 논산, 부산, 마산, 영천, 부평, 대구 등지의 수용소에서 반공포로를 일제히 석방했다. 이때 석방된 반공포로는 모두 27,389명으로 송환거부 포로의 16.7%였 다. 천도교 반공포로들도 이때 석방되어 남한에 정착했 다. 석방하지 못한 송환거부 포로들은 정전협정이 조인 되고 중립국송환위원회로 넘겨졌다. 인도군은 중립국송 환위원회의 포로 관리를 맡았고, 수용소는 휴전선 비무장 지대인 판문점에 만들었다. 판문점에 수용된 북한군 포로 가운데 천도교 포로는 1,667명으로 파악된다. 북한군 포로가 있었던 16개 대대에는 모두 천도교종리원이 구성되어 있었다. 종리원장만 있는 대대도 있었지만 종리원장, 교화부원, 교무부원, 경리부원, 감사원 등 종리원 조직이 잘 갖추어진 곳이 8곳으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100명 이상의 천도교 포로가 있었던 대대가 9개였다. 이중 3개 대대는 150명 이상의 천도교 포로가 있어 대대원의 1/3 정도를 차지하였다. 이들 대대에서는 천도교 포로가 주도권을 갖고 다양한 종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판문점 시기 천도교 활동으로 대표적인 것이 1953년 12월 24일의 인일기념식 행사였다. 판문 점의 관리를 맡은 인도군은 천도교 활동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 통상적인 시일식 활동은 물론 기념일 활동도 지원하였다. 46대대에서는 인일기념식에 대해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일기념일을 기해가지고 한문언 선생님이 그 1984년 동학 혁명 그걸 주제로 해가지고 ‘봉화’라는 영화[연극]를 3막 4장을 …… 연극을 연출을 했어요.(길두만 구술) 46대대에서는 인일기념식에 기념식 후 동학혁 명을 주제로 한 연극 ‘봉화’를 공연하였다. 당시 연극 공연의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김문제와 한문언이었다. 두 사람은 직접 원고를 쓰고 포로 들에게 배역을 맡겨 1달 동안 연습을 시켜 무대에 올렸다. 포로들은 하루 종일 모여서 연습과 공연 무대 설치 등의 준비를 하였다. 특히 김문제는 포로들의 공연에 필요한 복장과 염색 등의 물품은 당시 수용소에 출퇴근하는 간호사를 통해 조달했다. 이렇게 준비한 연극은 인도군 장교는 물론 다른 종교를 가진 포로들까지 초대해 공연했 는데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46대대의 연극단은 이후 여러 수용소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을 뿐 아니라, 이듬해 1월 석방이된 이후에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고 한다. 판문점에서의 포로 재심사에서 북한을 택한 포로는 296명이었고 7,604명이 최종적으로 남한을 선택했다.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도 74명이 있었다. 1953년 9월 20일 중립국송환위원회로 넘겨진 포로는 1954년 1월 20일 대한민국 정부에 인계되었다. 판문점에서 석방될 당시 천도교 포로의 활동을 보여주는 사진이 새로 발견되어 여기에서 소개한다. <사진 1>은 1954년 1월 21일 판문점의 중립국 송환위원회를 나서는 천도교 포로의 모습이다. 사진의 가운데에는 태극기가 있고 왼쪽에 궁을기가 있다. 미군이 찍은 이 사진에는 “송환 작전”에서 수천 명의 중국과 북한 공산당 포로들이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를 포기한 후 한국의 포로수용 소(판문점수용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북한군들은 깃발(태극기와 궁을기)을 들고 한국의 UN Point #2(장단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행진합니다. 1954년 1월 21일.”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 2>도 판문점에서 석방되는 천도교 반공 포로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사진 1>과 같은 포로로 보인다. 사진을 보면 헌병 순찰차를 앞세 우고 포로들이 4열 횡대로 헌병들의 인솔에 따라 행진하고 있다. 대열 중앙에 대형 태극기를 들고 오른쪽에는 중형 궁을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다. 위의 사진을 보면 이 행진은 천도교 포로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3>은 앞의 두 사진과는 다른 포로 사진 이다. 우선 포로의 수가 앞의 사진보다 많다. 그리고 앞의 사진 설명은 UN point #2가 목적지라고 했는데 이 사진은 UN point #1로 행선지가 다르 다. 궁을기의 위치도 달라 앞의 사진에는 궁을기를 앞줄에서 들고 행진하고 있는데, 이 사진에서는 궁을기가 가운데에 있다. 또한 궁을기의 크기도 다르다. 앞의 사진에서는 궁을기가 태극기보다 작은데 이 사진에서는 궁을기의 크기가 태극기보다 커 보인다. 반공포로석방 70주년을 맞아 우리 역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에 천도교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포로수용소의 천도교 포로의 활동에 대해 기억해야 하겠다. 글_성강현 동의대학교 겸임교수(직접도훈, 동천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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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회, 2023년도 ‘답게살겠습니다’ 운동 전개천도교여성회본부(회장 박징재)는 6 월 24일 한국사회평화협의회의 ‘2023 년 답게살겠습니다’ 운동의 시작으로 세미나와 탄소중립 실천 캠페인을 전개 했다. 세미나는 원불교 소태산 기념관에서 ‘지구인답게 일상 속 녹색 발자국 만들기’ 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또한 2023년 연간 사업 소개 및 7대 종단 신도들은 ‘탄소중립 실천 다짐문’을 낭독하고, 강연을 들으며 지구 위기 대응에 앞장서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흑석역 1번 출구 앞에서 진행된 탄소중립 실천 캠페인은 공기정화에 효과 적인 식물 나눔 및 체험 프로그램으로 운영됐다. 탄소중립 실천 다짐서 작성시 식물과 교환해 주는 반려식물 나눔 행사에는 약 500명의 시민이 참여해 탄소중립 실천을 약속하였으며, 한국사회평화협의회 7대 종단 대표들은 탄소 중립 피켓 퍼포먼스를 통해 개개인의 사회적 참여를 촉구했다. 또한 공병 지참시 세제를 제공하는 리필스테이션과 플라스틱 병뚜껑을 가져올 시 증정품을 제공하는 체험 부스 등을 운영해 일반인들에게 어렵게 다가오던 탄소중립 실천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했다. 한국사회평화협의회 관계자는 “점점 심각해지는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과 다양한 실천 활동을 진행할 예정”이라며 “탄소중립 캠페인의 지속적 관심 부탁드린다”라고 밝혔다. 한편 2018년 설립된 사단법인 한국 사회평화협의회는 한국 종교를 대표하는 7대종단(천도교·유교·불교·개신교·원 불교·천주교·민족종교협의회)의 신도 연합체 단체로 ‘답게살겠습니다’ 운동을 추진하며 사회적으로 대두되는 다양한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방향을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2023년 답게살겠습니다’ 운동은 전년과 같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종교 화합’, ‘이웃사랑’ 캠페인이 진행되며, 특히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온난화 문제를 극복하고자 ‘지구인답게 희망은숲 캠페인’을 비롯한 탄소중립 실천을 촉구하는 다양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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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4년 6월 18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식포덕 164년 6월 18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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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천지부모 공경 캠페인 전개천도교한울연대(대표 천은당 정미라) 는 ‘천지부모 공경 캠페인’ 행사를 6월 18일 부산 대동교구에서 시행함으로써 전국 교구 환경교육순회를 시작하였다. 이날 대동교구에서는 시일설교로 노암 강병로 선도사의 환경설교가 있었고 시일식에 이어 김의동 환경전문 강사의 ‘천도교인에게 탄소중립이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강의와 지은당 정진숙 동덕이 진행한 환경퀴즈, 커피 찌꺼기 재활용 커피화분 만들기 등 우수한 프로그램으로 함께 한 시간이었다. 2023년도 환경부 공모 사업으로 선정된 ‘천지부모 공경 캠페인’은 금년 8월까지 지방 교구를 방문하여 진행된다. 생명·평화·영성을 기치로 전국을 순회 하는 천도교한울연대의 탄소중립 환경교육 ‘천지부모 공경 캠페인’을 희망하는 교구는 한울연대 사무국(02-900-9323)으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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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동학농민혁명기록물 9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주요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지정됐다. 천도교에 따르면 유네스코는 지난 달 18일(현지시간) 파리에서 열린 집행이사회에서 한국이 신청한 ‘4.19혁명 기록물’과 함께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UNESCO Memory of the World)으로 최종 등재 승인되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한국 사회의 근대적 전환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았으며, 이번에 오른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총 185건으로 이중 천도교중앙총부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은 모두 9건이고 목록은 다음과 같다. ①나동환 교장 임명장, ②정순경 교장 임명장, ③이승룡 교수 임명장, ④홍재인 대정 임명장, ⑤오세용 부참모장 임명장, ⑥양언남 봉헌 임명장, ⑦이수방 접주 임명장, ⑧최운용표, ⑨무장 포고문 필사본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신사는 1884년부터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의 육임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천도교의 교역자 제도의 효시이다. 1885년부터는 각 지방에서도 육임제를 확장하면서 동학의 교세가 크게 늘어났다. 교장은 ‘자질이 알차고 덕망이 두터운 사람’에게 수여된 직책이었고, 교수는 ‘성심으로 수도하여 가히 교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 대정은 ‘공평하며 부지런하고 중후한 사람’에게 수여된 직책이었다. 위 세계기록유산은 위 육임제의 직책에 따라 각각 수여한 임명장으로 나동환, 정순경에게 교장을, 이승룡에게 교수를, 홍재인에게 대정의 임명장을 수여했다는 증서인 것이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동학군은 총사령관, 대장, 참모장, 부참모장의 직책으로 나뉘었는데, 위 오세용 부참모장 임명장은 오세용을 수성 부참모장으로 임명하는 사료이며 양언남 봉헌 임명장은 갑오년(1894년) 8월에 해월 최시형이 양언남에게 봉헌이라는 직책을 수여한 임명장인데, 봉헌은 오늘날로 하면 비서의 직책이다. 또 이수방 접주 임명장에서 ‘접주’란 동학교도 약50가구를 맡아 이끄는 지도자를 부르는 말이었으며, 이수방의 경우는 여러 개의 접을 합친 대접주로 사료를 보건대 오늘날 정읍시 태인면의 대접주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최운용표는 경주최씨인 최운용에게 미도인표(동학교도가 아니다)라는 확인표를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동학교도 체포령이 내린 상태에서 체포당하지 않기 위해 가지고 있던 확인표로 결성현(오늘날의 충남 홍성)에서 발행한 확인표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번에 등재된 185건중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은 30건인데 이중 18개의 생산자가 해월신사이다. 즉 동학혁명의 최고지도자가 해월신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무장포고문은 1894년 3월 21일 동학의 대접주인 손화중과 접주인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전북 고창군 무장읍 동음치에서 ‘동학이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려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우리는 살상과 약탈을 하지 않을 것이나 오직 탐관오리만은 처벌할 것이다’라는 기치로 만천하에 재봉기할 것을 선언한 발표문이다.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역사적 의의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지도층에 저항하고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며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중이 봉기한 사건이다. 운동 과정에서 동학군은 집강소라는 민-관 협력 거버넌스 체제를 설치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를 통해 그들은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부당한 관행을 바로잡았다. 이러한 형태의 거버넌스는 신선한 민주주의 실험으로, 19세기 당시까지 이와유사한 제도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이 번영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을 놓았으며, 외국의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근대주의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중국군과 일본군의 조선으로의 군대 파병, 이로 인한 청일전쟁 촉발과 이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이어져,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해체를 촉발시켰다. 이 기록물들은 어떻게 민중이 주체가 되어 역사를 보편적 가치, 즉 평등, 자유, 인권, 정의의 방향으로 전진시켜나갔는지를 보여주는 기억의 저장소이다. 천도교는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에 이어 2대 교주 최시형, 그리고 3대 교주 의암 손병희가 개칭한 민족종교로서 3.1운동의 기틀을 세운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천도교는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토대로서 오늘날까지도 신분철폐, 조세개혁, 자주독립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로 흘러왔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동학농민군, 정부, 관료, 진압군, 민간지식인 등 여러 주체가 직접 생산한 종합적인 역사 기록이다. 이 기록물에는 동학농민군이 작성한 문서, 정부 보고서, 개인 일기와 문집, 각종 임명장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진행 과정과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인간의 권리와 평등, 식민주의에 대한 반대 등을 다양한 시각에서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기록물로서 희귀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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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4년 천일기념식천도교중앙총부는 포덕 164년 천일기념일을 맞아 중앙대교당과 전국 교구에서 기념식을 봉행하였다. 이날 오전 11시 중앙대교당에서 봉행된 기념식은 이미애 교화관장의 집례로 개식, 청수봉전(고윤옥 여성회 부회장), 심고, 주문3회병송에 이어 박징재 여성회장의 경전봉덕(포덕문), 천덕송합창(기념송), 박상종 교령의 기념사,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장관(김대현 종무실장 대독) · 정문헌 종로구청장 ·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대표의장 진우 스님(범종 스님, 조계종 사회부장 대독) · 김령하 한국민족종교협의회장 등의 축사, 포상및 장학증서 수여, 천덕송합창(천일기념가), 심고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박상종 교령은 기념사에서 “오늘은 수운대신사께서 동학 천도교를 창명하신 지 163년이 되는 천일기념일이며, 개벽 후 오만년 동안 노이무공하시던 한울님이 수운대신사를 만나 성공하고 한울과 사람과 만물이 더불어 새로워짐을 선포하신 후천개벽의 첫날”임을 전제하고 “지금 남북 정세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남북 천도교인들이 앞장 서서 보국안민 정신을 면면히 계승하여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이루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장학증서와 공로패 수여 한편 이날 박상종 교령은 대학생단장 장학증서와 교단에 공로가 많은 12명에게 공로패를 수여하였다. 공로패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조보아 연합합창단장(서울교구), 정점교(대구대덕교 구), 안진혁(대구대덕교구), 최창식(서초추진위), 이정필 (포항교구), 성경순(대구대덕교구), 정영엽(고현교구), 나인경(대구대덕교구), 임남희(부산남부교구), 박혜선 (북부산교구), 양남순(포항교구), 안정애(포항교구). 기념식 후에는 축하 행사로 천도교연합합창단(수운의 길, 대각), 봄눈별(북아메리카 원주민 피리 연주), 히스토리보이스(수운 최제우, 아름다운 나라)의 공연이 진행되었다. 또한 윤석열 대통령의 축하화환을 비롯 하여 많은 화환이 자리를 빛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