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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힘으로, 영성의 힘으로

기사입력 2023.08.10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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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종무원장 준암 박인준

    현대를 흔히 경제의 시대니 자본의 시대니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현대사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들어낸 것으로서, 현대사회는 경제 질서에 의해서 운용되며, 이는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 구조라는 뜻입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현대는 그야말로 황금만능 또는 물질 만능의 시대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풍조 때문에 하루도 끊이지 않고 금권과 얽힌 사건 사고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직면하여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모두가 그렇게 치달릴 때,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라도 올바른 가치판단으로, 쏠림현상으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이 현상적 사회를 제동하고 안정적으로 순항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사회현상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엇이 중요하냐 하는 개개인의 생각이 모여서 그 시대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것에 따라서 시대사회의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생각은 개인차가 있기 마련입니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과 교육, 정치적 방향 등이 개인의 생각을 만듭니다. 

    그 개인의 생각이 모이면 그 시대의 가치관이 되고, 그 가치관에 의해서 사회현상이 나타나고… 연결고리가 형성됩니다. 나쁜 방향으로 진행되면 그걸 악순환이라고 하지요.

     

    역사적으로 우리 천도교인들은 부조리하고 모순된 사회를 개혁하려 들었습니다. 그것을 스승님께서는 개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개벽을 또 하나의 사명으로 여기면서 신앙을 해왔습니다. 그러니 구조적으로 부조리하고 모순된 현대사회에 소속된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 그걸 간과할 리가 없습니다. 혁명으로 또는 운동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한 역사적 사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반란임에도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쿠데타라고 합니다. 성공한 자는 충신이 되고 실패한 자는 역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매우 결과론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변함이 없는 것은 성패라는 것은 당대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실패로 끝난 것일지라도 훗날 역사적으로 평가되어 운동 또는 혁명으로 명명되기도 합니다. 

    동학혁명이 그렇고, 3·1운동이 그렇습니다. 천도교의 교리는 교인들을 시대 사회현상에 대하여 직시하게 하였으며 행동하게 하였습니다. 아무리 거대하고 바위 같은 구조라도 그것이 부조리하고 모순된 것이라면 천도교인들은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그것을 변화시키려 하였습니다. 

    물론 방법적 이견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큰 흐름에서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도의 두 흐름을 순수와 참여로 규정해 보기도 합니다. 순수 신앙의 흐름에서 보면 신앙의 자세는 오로지 경전과 주문을 통하여 공부하고 수련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자연히 따라와 모두가 군자 사람의 반열에 들어 이 세상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참여 신앙의 흐름에서 보면 신앙의 자세는 보다 적극적입니다. 경전과 주문 공부를 통하여 성인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물론 그러한 도력으로 세상을 개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시도 멈춤이 없이 부조리와 맞서 싸워서 세상을 개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진보해 가기 때문에 개벽하는 일이 교인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 신앙적 태도든 참여 신앙적 태도든 하나의 견해일 따름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큰 흐름에서는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줄기는 하나입니다. 단지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치우친 신앙의 태도는 절름발이 신앙이 되어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그르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시 정명하고 균형 잡힌 신앙 자세로 세상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자본이 지배하고 권력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 천도교인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저는 무엇보다도 천도교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천도교가 역사적으로 개척해온 일들이 너무나 숭고하고 위난이 닥칠 때마다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힘이 미약했더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도전하고 응전하였겠습니까? 절대적 우위는 아닐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녔기 때문에 혁명을 시작하고 운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이 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을 바로잡고 새로운 질서로 개벽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자본이나 권력에서 나옵니까? 

    저는 그 힘이 설령 권력이나 자본에서 나온다고 해도 그걸 부정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생각으로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에게서 나옵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는 모두 사람입니다. 

    우리의 힘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곧 한울의 힘으로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한울의 힘이란 영성의 힘을 말합니다. 

    영성을 확신하는 사람은 한울을 믿습니다. 영성의 주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만이 영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지요. 

    저 노래하는 새도 예쁜 꽃을 피우는 풀꽃도 한울이긴 하지만 사람과 같은 영성을 지닌 건 아닙니다. 자연물을 한울로 보는 건 사람이 자연물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한울님과 같이 대한다는 뜻이지 자연물 자체가 영성을 지녔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한 마리 새의 우는 소리를 한울님의 목소리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그 새를 한울님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성을 지닌 건 우리 사람뿐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힘이 곧 영성의 힘이므로, 사람이 많아지면 영성의 힘도 커지는 것입니다.

    천도교인이면 모두가 인식하고 있을 것입니다만, 과거에 비해서 천도교의 교세가 약화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두 걱정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쇠락한 교세를 크게 중흥시킬 수 있을까? 큰 교당을 짓고, 그 건물의 힘으로? 저는 웅장한 건물의 힘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교회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당을 짓는 것도 사람이요, 사람을 모으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정치의 힘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려 합니다만 그것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결합하면 오만과 독선에 빠지게 됩니다. 가장 위험한 환경이 되고 맙니다. 정치의 힘으로 교회를 성장시킬 것이 아니라, 교회의 힘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고 국민을 편안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지 돈이 먼저가 아닙니다. 돈을 모으려 하지 말고 사람을 모으려고 해야 합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사람들에게 친화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친화적인 사람이란 남들이 어려워하지 않고 기피하지 않으며 곁에 있으면 언제나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남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친화적인 사람입니다. 남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주장을 일삼아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상대방의 처지에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평가하려 하지 말고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친화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모으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쉬운 일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 바로 사람 모으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 천도교의 관점에서 말씀드리자면, 먼저 자기 자신을 진실한 천도교인으로 만들어야만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진실한 천도교인이란 너무 교리로 무장된 경직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천도교인은 투철함을 내세우기보다는 아름다움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도교 신앙인의 참 모습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경쾌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삶이 진정 아름다운 삶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남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견본과 같은 삶입니다.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마치 신념에 죽고 사는 이 마냥 신념 타령을 해대면서 남에게 부담을 안겨준다면 상대방이 따라오겠습니까? 기회를 보다가 피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신념이란 주장하고 내세운다고 해서 견고해지는 것은 아니며, 상대방 또한 공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 마을에 태암이라는 어른이 계셨습니다. 이 어른은 아이들을 얼마나 좋아하든지 이분이 가는 데는 언제나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지게를 지고 일하러 가는 길이어도 아이들이 “할아버지 노래 불러주세요” 하고 채근하면 지게 작대기로 지겟다리를 두드리고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아리랑과 같은 민요를 주로 불러주었지만, 끝에 가서는 꼭 천덕송을 불러주었습니다. 주문을 노래처럼 부르시거나 우리의 길, 안심가, 도수사 등을 어찌나 흥겹게 부르시던지… , 6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 어른이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하여 춤추고 노래 부르시던 모습이 아름답게 남아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합니다.

     

    우리 스승님께서 실천하신 도와 덕은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우리 가까이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변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지극히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스승님의 도와 덕을 진실로 실천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해서 가까이 가려고 할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전통적인 실성미 제도가 사라지면서 성미상납이 부담스러워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 지방에 가보면 교당에 사람이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의 원인은 연로한 어르신들에게는 지금의 성미금액이 상당히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한 달 두 달 연체되다 보면 연체된 성미 금액이 10만 단위를 넘게 되고 아무런 수입이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 금액을 낼 수 없게 되어 미안해서 교당에도 못 나오는 실정에 있습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성미의 부담을 덜어드려야 합니다. 지금 어려운 사람들이 성미 부담 때문에 교당에 나오지 않는 것은 돈 때문에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는 비근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중요한가 사람이 중요한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 하나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돈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필요한 수단이고 동력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우리 삶에서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설켜서 살아갑니다. 사람이 재화를 만들고 관리하니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천도교인들은 돈의 소중함을 알지만 사람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끼고 아껴서 성미를 내고 특성금을 냅니다. 좋은 곳에 쓰이고 천덕사업에 꼭 필요하다고 여기면 아낌없이 성금을 냅니다. 함께 돈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면 우리 교인들이 스스로 돈을 마련할 것입니다. 

    성미든 특성금이든 필요한 만큼 모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돈으로 숭고한 천덕사업을 할 수 있지요. 그 일을 잘하면 사람과 재화가 선순환 구조가 되어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우리 교당에 사람이 많이 모이면 포덕을 위한 돈이 모입니다.

    사람이 모여야 덕을 펼 수 있습니다. 포덕은 사람을 대상으로 사람이 펼쳐 나가는 일입니다. 사람이 기피하고 사람이 부담스러워하는 천도교가 되어서는 우리가 지향하는 세상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지금 코로나19의 심술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올해도 코로나 괴질은 쉽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코로나가 극악하더라도, 우리 스승님들이, 그리고 우리 교도들이 당했던 은도시대의 그 압제와 수난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승님과 선도들이 그 암울한 시대를 극복해 내었듯이 지금 우리 또한 이 괴질의 시대를 훌륭히 극복해 낼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조용함 속에서 포덕 교화의 사명을 달성하고 천도교 중흥의 시대를 열어나갈 것입니다.

    코로나19 괴질은 바로 이 시대의 부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코로나19 괴질이 우리 인간의 생명성을 농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세상에서 우리 인간은 온갖 질병을 달고 살며, 더 무서운 괴질과 끊임없이 맞닥뜨리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보다 적극적이고 참여적으로 행동해야 할 일은, 우리 교단 내의 잡다한 일로 인하여 서로 갈등하고 대립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생명성을 농단하는 괴질 내지는 질병과 맞서 싸우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도교를 위하는 일을 우선하되, 교인 간에 각자위심을 버리고 잘못된 일에는 자기를 먼저 책하고 좋은 일은 서로 권하는 교단의 풍토를 조성하는 일입니다.

     

    사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실천하더라도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무리 선제적으로 괴질에 대응하고 신앙으로 극복하려 하며, 진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쉽게 정화되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 천도교인을 좋아해서 친화감이 쉽게 조성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대신사께서도 포덕문에서 「賢者聞之하고 其或不然이 吾將慨歎이나 世則無奈라(어진 사람도 이를 듣고 그것이 혹 그렇지 않다고 여기니 내 못내 개탄하거니와 세상은 어찌할 수 없는지라)」 라고 하여 세상은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야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스승님께서 구도 수행을 하셨고 결국 목숨까지 바치신 것 아닙니까? 정말 스승님 말씀대로 세상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있고 천도교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을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영성으로 즐겁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보지 않겠습니까? 너무 큰 꿈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나부터 내 가정부터 내 이웃부터 아름답게 만듦으로써 이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도의 힘으로 세상이 아름다워지면 사람들이 우리 도를 좋아해서 우리의 교당에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가득 찬 천도의 길을 함께 걸으며 그 힘으로 세상을 더욱 아름다운 천국으로 바꾸어 갈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포덕162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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