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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련 작가 소설 『동학』 원작, 연극 "사람, 한울이 되다"대하소설 <동학>의 저자 김동련 작가와의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하였다. 오는 5월 10일~13일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연극 <사람, 한울이 되다>가 무대에 오른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꿈, 동학이 가르쳐준 지혜와 오늘날 동학의 가치를 묻는 대화 속으로 독자 여러분을 모신다. 집필 계기와 과정 소설 <동학>을 집필하셨습니다. 총 6권 분량의 대하소설인데요, 집필하시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였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 동학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게 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강원도 묵호에서 중학을 졸업한 후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7살 먹던 해 봄부터 방파제 축조회사인 흥아공작소에 급사로 일했습니다. 30톤 기중기선 화장으로 일하던 또래의 친구가 당시 태극출판사에서 나온 『위대한 한국인』 전집을 구했으나 도저히 읽어내지 못하겠다고 하여 제가 넘겨받았습니다. 그 전집 두 번째 책이 『해월 최시형』이었습니다. 그 전집에는 이승만이나 김옥균 등 여러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저는 그분들에게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해월 선생님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저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특별히 어떤 점에서 충격에 빠지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스승 최제우가 순도한 후 30년 동안 포졸들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홀로 전국을 돌며 스승의 뜻을 이어 동학 조직을 재건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의 옳고 강한 의지가 불의로 점철된 잘못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면서 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해월 선생님의 행적에 비하면 기독교에서 전하는 바울의 전도 여행 같은 것은 어린아이 장난 같아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해월 선생님에 대한 소설을 써 보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해월 선생님의 이야기를 쓰려면 해월 선생님께 그러한 동력을 제공한 수운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운과 해월 두 분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려면 두 분의 뜻을 행동으로 옮긴 전봉준 장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난한 세월이 오래 이어졌으나 저는 이 꿈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험난한 세월이 오래 이어졌겠네요. 스승님들의 고된 여정만큼 작가님의 집필 여정은 그 과정을 고스란히 닮아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이 주제를 계속 삭이려 국내에 나온 동학 관련 문헌을 꾸준히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나 독서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44살 때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 문학을 수업했습니다. 문학사 자격을 얻었으나 마음에 드는 글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경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들어가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철학박사를 수료했습니다. 그 후 두 권의 책을 출간하며 문장 수업을 계속했습니다. 열 일곱 살에 처음 해월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되고 해월의 이야기로 소설을 쓰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해, 마흔이 넘어 비로소 국문과에 입학하셨는데, 배움의 뜻을 그렇게 이어가는 일도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배움의 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경험도 중요하고요. 동학에 관한 소설을 쓰려면 소설 속에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저는 사람의 죽음에 관한 경험을 하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을 얻어 합천 노인전문요양원에 입사해 8개월 동안 근무하며 사람의 마지막 삶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4년 전 여름, 저는 더는 집필을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당시의 국내외 상황과 작금의 국내외 상황이 중첩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동학이 그 시대의 희망이자 세상을 밝히는 횃불로써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던 것에는 그 시절에 처한 절박한 현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갑오년 동학군들이 맞이했던 상황을 다시 맞이하고 있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갑오년에 실패한 동학혁명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혁명 당시 동학군들이 외쳤던 숭고한 이상과 목표를 지금도 완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갑오년 당시 조선을 지배했던 세력은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인식하지도 못했고 잘못된 틀을 바꿀 의지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갑오년에 민족의 생존을 보장할 지혜는 결국 민중 속에서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지혜는 결국 푸른 눈을 뜬 시민 속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지혜는 동학의 인내천과 보국안민 같은 동학의 빛나는 사유를 반추하고 계승하고 선양하는 작업에 의해서 나올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가 점점 더 흥미로워집니다. 집필 과정에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집필하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금 총부의 감사원장을 맡고 계시는 부암 정덕재 선생님께서 천도교 관련 학자들과 문헌을 지극 정성으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소개받은 동학의 쟁쟁한 학자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섬세하고 명료하게 동학을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동학은 수운 선생님 나이 20에서 30살 사이에 사유의 기본 뼈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10년 사이 수운 선생님의 행적에 관한 남아있는 기록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각궁거상" 단 네 글자가 전부입니다. 각궁 즉 활을 손에서 놓았다니 무술을 익혔을 것입니다. 거상 즉 행상을 나섰다니 각지를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오지를 돌면서 조선의 실상을 뚜렷하게 목격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홀로 숙고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싶으셨나요? 저는 소설 속에서 당시 조선의 제반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구성했고 그 당시 범람하던 거대 담론인 유학과 불교와 도교를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 학술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이렇게 재해석된 거대 담론을 바탕으로 행상을 하며 현자를 만나 지혜를 구하던 수운 선생님의 사유로 종합하여 독자적인 동학으로 이루어 가는 과정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이후의 모든 문장은 많은 상황을 문학적 상상보다는 구체적인 자료로써 직접 이야기하게 하는 서술 방법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소설 곳곳에 나오는 대부분의 대화는 모두 조선 시대의 말로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의 대형 사전에서도 찾지 못하는 고유한 우리 말과 관용어가 수도 없이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집필 태도는 일반 독자들의 가독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저는 감수했습니다. 집필 기간은 어느 정도가 걸렸나요? 집필에서 출간까지 만 2년이 걸렸습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수운과 해월 선생님을 물론 당시의 동학 도인들의 절박하고 안타까운 심정과 자주 동화되었고 그럴 때마다 많이 울었습니다. 두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심장이 아리고 억장이 막힐 때도 많았습니다. 어떤 때는 서재 바닥을 뒹굴면서 몸부림치며 통곡을 하기도 했습니다. 글이 막힐 때는 만취해서 자다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17살 때 품었던 그 꿈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나고 나서야 여섯 권의 대하소설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자료조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1차 자료로 참고한 문헌은 동학 경전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일본외무성자료』 등입니다. 『동경대전』‧『용담유사』에 나타나는 범재신론은 종교철학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의 단계인데 이러한 사유는 서양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영국의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에 의하여 제시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19세기에 수운 선생님에 의하여 종교철학의 가장 높은 단계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은 조정의 입장으로 쓰인 글이므로 제가 백성의 입장에 서서 다시 번역해 소설에 넣었습니다. 『일본외무성자료』도 일본 입장으로 썼기 때문에 사실의 왜곡이나 축소가 심해 제가 조선 백성의 입장에 서서 다시 번역했습니다. 해월과 의암 선생님이 남긴 글들은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 대표 오암 박길수 선생의 도움을 받아 모두 정독했습니다. 원광대학교 박맹수 총장님께서는 아직 발표하지 않은 여러 논문을 보내주셨습니다. 영산대학교 송봉구 교수님과 동의대학교 성강현 교수님의 도움도 컸습니다. 기타 동학 관련 단행본이나 논문들은 살아오면서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하여 꼼꼼히 읽었기에 이미 횡설과 수설이 자유로운 상태였습니다. 특히 표영삼 선생님과 이이화 선생님의 저작을 읽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더러는 역사에 묻혀 외면당했던 여러 사건을 파내어 드러내기도 했고, 동학을 교단의 입장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재해석하여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 노력했습니다. 저의 스승인 경상대학교 오이환 교수님은 제 소설을 읽으시고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술이 섬세하다고 평가해 주셨는데 그것은 허구인 소설을 자료로써 직접 말하게 하려는 저의 무모한 서술 태도가 가져다 준 선물이 되었습니다. 소설과 연극의 차이 오는 5월에 부산 원곡예술관에서 3일에 걸쳐 선생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50년간 가슴에 품어 온 이야기가 소설로 완성되고 연극 작품으로 제작이 되는데, 감회가 어떠신지도 궁금합니다. 또 이 작품을 보시는 관객분들에게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앞에 말씀드렸듯이 제 소설은 거의 역사서와 학술서 수준에다가 조선 시대의 언어로 썼기 때문에 가독성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독자들의 요청을 받아 전국을 돌며 북토크를 했습니다. 특히 유학과 불교 그리고 도교와 천주교에 관한 저의 재해석이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오래된 우리 말이 많아 독자들은 사전을 옆에 펴 놓고 일일이 찾아가며 제 소설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동학은 우리에게 매우 아픈 상처라고 생각했기에 저는 다른 소설처럼 글을 쉽고 재미있게 쓸 수는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독자들은 그러한 저의 입장을 십분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소설이 이렇게 적극적인 독자층을 넘어 많은 분에게 알려지려면 좀 더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컨텐츠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소설 중 일부분을 발췌하여 주제를 강화한 이야기로 연극 공연이 만들어진다면 다면, 좀 더 가깝게 시민들에게 다가가 동학을 알릴 수 있고 또한, 공연에 참여한 분들이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깊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대 동학의 가치 내내 생각하게 됩니다. 왜 동학이었는가, 그리고 160년이 지나서도 왜 다시 동학이어야 하는가를요. 이 시대 동학의 가치를 참 오래 생각하시고 또 수운 대신사님과 해월 신사님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해오셨을텐데요. 이 시대 동학의 가치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현대사회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빼앗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듯합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을 다만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을 소비하는 구매자로만 대우하고 있습니다. 돈이 슈퍼에고가 된 세상에서 개인은 생산자가 상품만 판매하면 게임에서 이기는 룰 속에 헤매고 있습니다. 거대한 관료주의는 개인을 자기들이 지향하는 기계속의 작은 톱니바퀴로만 대우하고 있습니다. 권력이 돈을 추구하면서 남발한 오염된 담론으로 인하여 개인은 무엇이 옳고 그른 지를 판단할 수 없도록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 내동댕이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은 자신이 진실로 어떤 존재인지 숙고하기가 어렵습니다. 동학은 인내천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은 각자가 이 우주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답고 신비한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곧 한울이라는 가르침은 암울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 자신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주어 그들의 삶 자체를 올바르게 바꾸게 합니다. 향아설위는 이러한 사유가 삶 속에서 실천되는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이 추구하는 보국안민은 국가가 잘못하면 백성이 직접 나서서 그 잘못을 옳게 고쳐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정의롭고 적극적인 실천의 정신입니다. 부패한 권력에 맞서 백성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권력을 창출하는 것은 동학이 그동안 끊임없이 추구했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과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동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제 소설에는 동학이 제시한 여러 강령과 가치들이 구체적인 예를 통하여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동학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빈부격차나 저출산 그리고 안보위기나 사회적인 정의와 환경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줄 수 있으며 나아가 사람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대단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동학혁명 130주년을 맞이합니다. 소회가 어떠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130년 전 동학은 세상의 잘못된 틀을 바꾸려 목숨을 걸고 일어났습니다. 그 혁명은 안타깝게도 완수되지 못하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제2의 동학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동동학농민기념사업회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동학혁명 당시 경상도 지역의 최대 격전지였던 하동을 재조명하기 위해 전적지를 보존하고 동학을 선양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초 전국의 기념사업회가 장흥에 모여 전국동학농민기념사업연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흐름이 민중 속에서 동학의 지혜를 다시 반추하고 계승하여 이 시대에 당면한 문제들은 해결하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에 저희가 기획한 동학의 컨텐츠화를 위한 연극 공연이 조그만 기여라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부산 공연이 잘 마무리되면 올해 전국을 돌며 재공연할 계획입니다. 서울의 예술의 전당에서 마지막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저희의 계획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정부를 비롯하여 천도교 총부나 관련 단체의 많은 관심과 격려를 기대합니다. 김동련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학사/국립경상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동대학원 철학박사 수료/경상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방송통신대학교 출강/도서출판 후아유북스 대표/ 카페 여래(다솔사) 대표/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대표 <저서> 장편소설 『우리가 사랑할 때』(밥북)/인문서적 『천자문으로 세상보기』(인간사랑)/대하소설 『소설동학』전6권(모시는 사람들)/번역서 『안원의 사존편』(후아유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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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동귀일체가 필요할 때(2)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2시간 반,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부산으로 향하며 걸음걸음 걷는 땅,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끓는 청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역사가 보였다. 먼 이야기가 아닌,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내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늘 걷는 땅은 어제와 다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렇게 역사의 한 획이 된다. 그 선명한 줄기를 따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넘나드는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난다.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지난 기사에 이어) 천도교신문 : 대를 이어 천도교단을 위해 헌신해오셨는데,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어린시절, 청년기의 교구장님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게 됩니다. 박차귀 교구장 : 어릴 적에 제가 중고등학교 때 우리 부산시 교구에서는 '소년의 서사', '내성당 서사' 이런 거 외워보라고 하면 늘 제가 단골이었어요. 아무도 그걸 잘 안 외우려고 하니까 집행부에서 저더러 매주 나와서 하라고 하죠. 그럼 나도 매번 내가 해야 되는 걸로 생각을 했고요. 그때 천덕송을 부르면 제가 오르간으로 연주하면서 창호지에 쓴 가사를 넘겨가면서 함께 부르곤 했어요. 아무튼 제가 좀 다른 애들보다 용기있게 앞장서서 했어요. 천도교 공부를 하면서 그 옛날에 조기주 선생님이나 백세명 선생님, 김용문 선생님 등 제가 그 분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를 했어요. 대학 막 들어갔을 때였을 거예요. 서울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우이동에 내려서 의창수도원 걸어가는 길, 나는 그 길을 참 좋아했어요. 그러고보니 옛날이 그리울 때가 참 많습니다. 천도교신문 : 젊은 시절이 그리운 마음도 있으실 거예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또 의창수도원까지 가시는 길에 실린 열정도 그렇구요. 박차귀 교구장 : 저는 방학을 이용해서 공부를 했어요. 여름방학이었는데, 의창수도원 가는 길이 지금은 도로가 났는데, 그 길이 다 개울이었어요. 휴식시간이면 그 개울물에 발을 담그던 추억이 있죠. 그때는 그런 낭만이 있었는데 요즘은 너무나 삭막하다는 그런 아쉬움도 있습니다. 최덕신 교령님 때였는데, 제가 천도교 청년회 주최 웅변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최덕신 교령님 자택에도 가서 하룻밤 자고 사모님하고 같이 대화도 나누고 그렇게 많이 귀여워해 주시던 기억이 많이 나고요. 돌이켜보면 추억들이 참 많아요. 그 이야기들은 제가 맨날 며칠 해도 많습니다.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으로부터 내려온 집안의 역사, 교구장님께서 어릴 때부터 쌓아온 신념, 그 단단한 힘이 지금까지 교구장님을 끌고 오신 것 같습니다. 박차귀 교구장 : 그 영향을 받아서 지금까지도 KCRP, 민족종교협의회에서도 제가 여성회장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의 경험이 생각의 폭을 넓혀준 것 같고, 그런 경험들로 인해 천도교를 사랑하는 만큼 또 이웃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시일에는 제 건강이라든지 또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해서 젊은 사람들한테 이제 넘겨줘야 되는데, 아직 더 해도 된다고 그래서 제가 아직 더 하고 있습니다.(웃음) 천도교신문 : 굉장히 많은 활동들을 하셨는데 여성 리더로서 천도교에서 또 이 시대의 종교의 역할하고 같이 해서 한 말씀해주세요. 박차귀 교구장 : 지금은 여성 시대라고 하죠. 모성의 마음으로, 우리가 어머니의 마음으로 신앙을 한다면, 어쩌면 여성 지도자가 더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 여성회가 곧 100주년이잖아요. 남성들이 자꾸만 더 우리 여성들을 뒷전으로 생각하는 문제들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결과도 있었습니다. 천도교는 남성들만 하느냐, 왜 남성들만 다 직책을 갖느냐 하는 말을 제가 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여성 교역자를 많이 양성해서 여성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해 내야만 교단이 더욱더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뒤에 후배 세대들이 큰 역할들을 하겠지만 좀 더 좋은 세상을 보고 가야 하는데, 하는 그런 아쉬움도 같이 듭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제 나이가 들은 것 같아요. 천도교신문 : 교구장님께서는 동귀일체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진정한 동귀일체란 무엇일까요? 박차귀 교구장 : 동귀일체가 우리가 하나의 뜻으로 돌아가 같이 힘을 모은다는 뜻이라면, 하나가 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을 때 진정한 동귀일체가 될텐데, 형식적으로 입으로만 동귀일체가 되자고 하지 말고 반목과 갈등에서 화해와 단결로 각자위심에서 공동체형성으로 나아가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한울님의 큰 정신에 합쳐서 한울님과 한 몸이 되자는 것, 진정한 동귀일체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는 ‘吾心 卽 如心’ 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신문 : 교구장님께서, 아버님, 할아버님부터 천도교를 해오셨는데 후학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도 있으실 것 같아요. 박차귀 교구장 : 저도 천도교를 제일 우선으로 하고 살라고 말하면 제 동생들부터도 저와는 다른 마음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제 동생들은 언니가, 누나가 열심히 하니까 우리는 적당히 해도 되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할 때, 그럴 때는 생각이 많아지거든요. 그 각자가 다 자기 신앙관이 뚜렷해질 수 있도록 신앙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교단에서도 많은 연구도 해야하고 교육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옛날하고 다르기 때문에 그 시대에 발맞춰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천도교의 진리는 이미 시대를 앞서 걸어왔습니다. 우리가 행동으로도 그에 맞게 펼쳐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곱게 내려앉을 때, 함박눈이 푹푹 내려 차곡차곡 쌓일 때, 박차귀 교구장의 열정적인 걸음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손길을 내밀던 모습을 오래 생각했다. 동귀일체로 함께, 잠깐이라도 걸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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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동귀일체가 필요할 때(1)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2시간 반,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부산으로 향하며 걸음걸음 걷는 땅,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끓는 청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역사가 보였다. 먼 이야기가 아닌,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내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늘 걷는 땅은 어제와 다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렇게 역사의 한 획이 된다. 그 선명한 줄기를 따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넘나드는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난다.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천도교신문 :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님 반갑습니다. 교단의 역사와 함께 오랫동안 헌신해오셨습니다. 천도교신문에서 교구장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박차귀 교구장 : 반갑습니다. 이렇게 먼 길 와주셔서 더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에게는 어찌 보면 천도교가 내 삶의 전부라고 얘기할 정도로 저와 천도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숙명적인 관계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더불어서 살아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천도교신문 : 천도교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천도교인으로 사셨습니다. 어릴 적 이야기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릴 때 기억나시는 장면 같은 것 있으세요? 박차귀 교구장 : 우리 집에 제일 많은 건 책이었어요. 제가 어린이 책 귀한 줄도 모르고, 학교에서 옛날에 헌책 가져오라고 해서 어린이 책을 하나 갖고 갔더니 선생님이 보시고는 너무 좋아하는 거야. 나는 선생님이 좋아하시니까 저리 좋아하시면 또 갖다 드려야 되겠네하고 갖다드렸지. 나중에 그 책이 천도교에 대한 책이었다는 걸 알고 많은 후회를 했죠.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환원하시기 전날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소고기가 귀했어요. 우리 집 밑에 유명한 갈비 집들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그때 갈비를 사가지고 오셔서는 무릎에 저를 앉히고 이렇게 먹여주더라고요. 그렇게 할아버지가 유독 저를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내 위에 언니가 있었는데 언니가 일찍 가버렸어. 그러고 나니까 저를 아주 귀하게 대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이름이 버금 차, 귀할 귀 자예요. 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러고보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가 벌써 70년이 흘렀네요.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께서 부산시 교구를 설립하신 박찬표 선생님이시지요. 할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시겠어요.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는 제가 학교 초등학교 막 들어갈 때쯤 환원을 하셨어요. 1월 28일이었어요. 가장 추운 날이었어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이 참 추웠다는 것과 교구에서 교인들에게 특별 동계수련을 지도하시다가 환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수련에 너무 열중하셨던 것 아니었나 하고 생각이 듭니다만 요즘 같으면 좋은 보약도 좀 잡수고 했더랬으면 할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그런 아쉬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일찍 가셔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할아버지가 써놓은 일기책이 있습니다. 한문으로 돼 있어서 제가 해독을 못 했어요. 언젠가는 책을 만들어 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박찬표 선생님은 우리 역사에서도 아주 의로운 일을 하셨던 독립운동가로 기록되어 있더라고요. 신인간 통권 582호(포덕 140년 2월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인암 박찬표 선생은 3.1운동 당시 보성학교 2학년 시절,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구치소와 부산교도소에 수감된다. 이후 26세 때인 포덕63년 3월 17일 묵암 신용구 선생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한다. 이후 조국 독립의 길과 진실한 삶이 천도교에 있음을 깨닫고 천도교의 불모지인 부산에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씨앗을 뿌리내린다.(성주현, ‘부산 지역에 천도교를 심은 인암 박찬표’, 신인간 582호, 1999)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께서 보성전문학교 다닐 적에 독립 3.1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발각되어서 구치소에 계셨어요. 국가기록원에도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는 그 기록도 좀 더 조사하고 보완해서 책을 발간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잡지들이나 저서들은 할아버지께서 남겨놓은 책들로 영인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신인간』, 『개벽』, 『당성』 등으로 대표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우리 천도교에서는 소장자와 기증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아버지께서는 천도교의 발전을 위해 누구든지 와서 보고 가라고 하셨고 많은 분들이 오셔서 보고 가시는 걸 제가 봤습니다. 어릴 적에 부산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들이 우리 집에 와서 책을 보셨고요. 서울 중앙총부의 신인간에 계시던 분들도 많이 와서 그 책들을 보고 가셨고요. 그렇게 할아버지가 교단의 책들을 잘 모아놓으셨기 때문에 영인본을 낼 수 있었다는 것에 저는 참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소중하게 소장하셨던 분들에 대해서도 좀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선생님은 어릴 적에 할아버님을 많이 따르셨나요? 박차귀 교구장 : 예. 제가 어릴 적에는 조금 활발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어느 교인 집에 순회를 가시면 제가 꼭 따라갔어요. 손잡고 따라간 기억이 나요. 오늘은 어디 어디를 가자 하시면, 제가 그냥 앞장서서 가는 거예요. 골목골목을요. 그럼 할아버지가 잘 찾는다고 참 좋아하셨어요. 그러면 나는 그 칭찬에 더 신이 나가지고 매일 할아버지가 가자 하시면 따라갔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참 잘했다, 수고했다 하시면서 벽장에서, 옛날에 그 박하사탕 같은 걸 벽장에 두셨거든. 그 사탕 하나 주시는 거, 그게 그때는 귀할 때니까 그거 하나 먹는 재미로 기분 좋게 다녀오곤 했습니다. 또 옛날에는 차가 별로 없어서 걸어 다녔을 때거든요. 우리 천도교인들은 흰 도포자락을 펄럭이면서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다니셨던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할아버지랑 순회를 갔다오면, 할아버지는 저에게 “너는 참 어찌 그리 기억력도 좋냐” 하시면서 참 대견해 하셨어요.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의 손녀를 향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정말 할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참 아쉬우셨을 것 같아요.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께서 유치원을 경영하셨는데, 그때 마당이 있었어요. 그러면 제가 그 마당을 막 뛰어다니고 그런 기억이 있죠. 너무 일찍 가셔서 그 뒤에 추억이 없는 게 좀 아쉽습니다. 정말 더 오래 사셨더라면 저하고 많은 추억을 남겼을 텐데 말이죠. 저는 항상 그런 트라우마가 있었어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단명하셨거든요. 다행히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 나이보다 훨씬 더 이렇게 오래 살고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교구장님께서 여성 교구장님이시고 또 여성회장도 역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도교 집안 여성의 이야기도 궁금해집니다. 박차귀 교구장 : 우리 할머니가 천석꾼 집안의 딸이었는데 할아버지한테 시집을 와서 천도교 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대요. 그런데도 불평, 불만 한마디 없이 그렇게 따라주는 것이 내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고 정말 성내는 얼굴 없이 내조를 잘 하셨다고 해요.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조금 일찍 환원하셨는데 할머니가 우리 부산시 교구 초대 여성회장을 하셨지요. 지금 우리 부산시 교구 여성회가 80년이 더 되었거든요. 지방 교구 중에는 여성회가 빨리 창립이 됐죠. 할아버지의 영향인 것 같아요. 초대 여성회장을 하시다가 그 뒤로 다른 분이 여성회장을 하시다가 우리 어머니가 여성회장을 하셨어요. 제가 고등학교가 다닐 때였지요. 서울에서 중앙위원회가 있으면 내가 어머니 대신 부산시 교구 대표로 서울에 올라가곤 했어요. 우리집 여성들은 고생을 많이 하셨죠. 손님들이 참 많이 오셨어요. 지방에서 오시는 교인분들이었죠. 그때는 여관이 별로 없었으니까 교인분들 오시면 할머니나 어머니나 고생하셨지. 늘상 교인들 밥 해드리고 대접해드리고 그러셨어요. 어머니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88세에 환원하셨습니다만, 양반집 귀한 딸이었는데, 고생을 좀 하셨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인물이 참 좋았어요.(웃음) 요새 젊은 사람 같으면 아마 그렇게 살아라 해도 못 살 거야. 나도 그렇게는 못 할텐데,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도 내가 이겨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천도교를 잊지 말고 지켜야 한다고요. 그런 이야기를 해 주셔서 저도 열심히 그 뜻을 받들어서 하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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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아이들을 키우고, 아이들은 한울님을 키운다Q. 2014년 방정환 한울어린이집을 설립하게 된 배경과 계기를 알려주세요. A. 한울연대는 한울님과 사람을 섬기며 만물을 공경하여 생명을 개벽하고자 하는 실천 단체입니다. 그동안 타종단과 연대하여 환경파괴로 깊은 상처로 입은 사람들의 절망과 현장을 찾아 목소리도 높여보았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해결이 필요함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수련을 강화하며 ‘영성이 곧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우선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영성의 주인(한울님)이 되는 마음을 심자, 그리고 부모들에게 다가가, 지금 세상에 횡횡하는 오염된 마음의 존재를 밝히고 내 마음을 바르게 운용하는 힘부터 길러보자는 강력한 의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Q. 운영방식이 기존 어린이집과 다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원장님의 운영 철학도 궁금합니다. A. 기존의 어린이집과 다른 점은 우리 사회에 팽배한 관습적인 교육방식을 초월하려는 노력입니다. 바로 친구와 짝을 이기고 일어나야 하는 경쟁 중심의 교육과정 자체가 미래를 보장한다는, 그야말로 삭막한 이 세태를 극복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나’를 소중히 보호하고, 나를 드러내는 행위를 존중합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가 아니라,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니?’ 입니다. Q. 소파 선생께서 '어린이가 세상의 주인이며 미래의 주역'이라고 말씀하신대로 어린이집을 운영하시더군요. 특히 신경 쓰시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A. 방정환 선생님께서는 어린이는 새로운 사람이며 어른보다 더 높게 대접하라고 하셨지요. 자식도 내 소유가 아니니, 부모 욕심대로 진로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내 아이를 잘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산들맘(산, 들, 마음)’이라는 부모활동을 운영합니다. 등원해서 새날열기(함께절, 맑은물, 나누미)부터 나들이, 점심식사까지 참여하면서 어린이 활동을 돕고 관찰하면서 아이의 특성을 하나하나 깊이 있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아이들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뿐만 아니라 서로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이를 위해 부모연수와 교사연수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어요. Q. 원장님께서는 어린이들과 자연의 교감을 중시하시는데, 주요 프로그램은 무엇인지요. A. ‘날마다 나들이’와 ‘마당 흙놀이’, ‘작은농부’ 활동입니다. ‘날마다 나들이’에서는 웬만한 날씨쯤은 어린이들의 놀이 친구가 될 뿐이지요. 자연의 기운을 마음껏 누립니다. 그러면 순수하고 거룩한 자연, 그들이 아이들을 키워내지요. 어린이들은 오전에는 나들이, 오후엔 흙 놀이를 하면서 놉니다. ‘작은 농부’는 땅과 생명의 마음을 살리기 위해 농사를 짓는 프로그램입니다. 어린이집 대표(방정환배움공동체구름 달, 구 방정환한울학교)께서 땅 500평을 기증하셨고, 천도교 대학생단에서 생태화장실을 지어 주셨습니다. 자연농법으로 2월부터 주요 농사를 두루 체험합니다. Q. 방정환배움공동체 구름달에서 '교사, 방정환에게 길을 묻다' 책을 펴내셨는데요. 원장님께서 쓰신 한울어린이집에 대해 가장 강조하신 내용이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A. 영성(마음, 모심)프로그램으로,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새날열기 ㅡ ◯함께절("서로 배우겠습니다" 큰절하기)ㅡ ◯맑은 물(마음담기, 마음소리, 마음 먹기) ㅡ ◯나누 미(밥한그릇에 담긴 천지만물의 순환과 고마움 알기) 2) 다섯 가지 약속(도와줄게, 같이하자, 할 수 있어, 나누어 줄게, 기다려줄게) 3) 모심인사(모든 일의 시작과 마무리 인사에 모시고~를 붙입니다) 이것이 기존의 생태어린이집과는 다른 영성 프로그램입니다. 마음과 한울님을 모시기가 핵심입니다. 공경의 덕목을 위해 항상 시작이나 마칠 때 둥글게 모여 함께 진심으로 절을 합니다. 믿음의 덕목으로 ‘맑은물’ 시간은 방정환 선생님 말씀처럼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시간이지요. 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기 마음을 헤아리고 읽어내며 표현하는 시간입니다. 정성의 덕목으로 ‘나누미’를 합니다. 밥 한 그릇에 담긴 이치와 정성을 생각하며 쌀을 한 숟가락씩 떠서 모읍니다. 나누미에 참여하는 가정도 점점 늘어나 밥하기 전 나누미를 하고 일주일 단위로 가져오면 쌀은 어린이들이 밥을 지어먹고, 모아진 쌀 만큼의 금액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합니다. Q ‘한울님’ 호칭을 둘러싸고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있는데요. 원장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A. 한울에 님자를 붙여 ‘한울님’이라고 칭함에는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께서 다시 개벽이라고 하는 그 출발점이 천지운용의 이치인 한울을 부모와 같이 섬기고 공경해야 하는 초월적 신성한 존재로서 정신생명 곧 영성, 성령에 대해 확연한 깨우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Q. 동학인으로 자부하며 활동하는 ‘한울님’, 즉 활동가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동학인이라면 우리 스승님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고 사람들이 진정 어떤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셨는지, 어려울 때마다 어떻게 수련하면서 난관을 극복해 왔는지 철저히 돌아 보고 자세히 살피는 공부부터 해야 합니다. 스스로 동학인이라고 말한다면 스승님으로 거듭나야 하는 과제와 책임이 동시에 부여되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감히 동학인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스승님을 들먹이면 안 됩니다. 동학인이라면 이런 모든 단계를 체득하고 나서 ‘혁명’을 말해야 합니다. 글. 함경숙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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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 역사가 있는 여행반갑습니다. 박광일 여행작가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여행이야기라는 회사의 대표님이시기도한데요, 방송에서 뵙기가 더 익숙합니다. 어떤 방송에서 만날 수 있는지 독자여러분께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최근에는 TV방송보다는 라디오 방송을 더 많이했습니다. 라디오 고정 프로그램으로 7개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데, KBS는 3개, SB와 EBS, CBS, 국악방송 각 1개씩 그렇게 7개의 코너에서 저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전부 역사코너인데 어떤 코너는 유적, 어떤 코너는 사건, 도 어떤 코너는 역사 속의 법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다룬 이야기들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청취자 여러분들께서 법과 관련된 이야기는 흥미로워하시더군요. 전봉준 장군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도 그랬습니다. 무라카미 텐신의 사진을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전봉준의 재판은 근대법정의 모습이 등장한 재판이고 또 한편으로 해월 신사의 재판에 참여했던 재판관 중에 조병갑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주로 독립운동 등의 역사를 다룬 방송을 일반적으로 하고 있고, JTBC에서 세계다크투어, 일제 침탈의 역사, 일본으로 끌려간 노동자들의 이야기 등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매주 7개의 레포트를 쓰는 느낌으로 방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 테마가 있겠지만, 역사를 주제로 많은 방송을 하시다보니 콘텐츠를 구성하는 일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콘텐츠를 구성하는 일은 언제부터 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우선 방송 콘텐츠 구성에 대한 말씀을 먼저 드리면, 이런 역사 콘텐츠를 한 방송에서 짧으면 7~8개월 길면 4~5년동안 해오다 보니 소재를 구성하기가 참 어렵고, 대학 다닐 때보다 실록과 문집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또 최근에는 라디오가 대부분 팟케스트, 보이는 라이도, 유튜브 등으로 또 CBS의 경우 콘텐츠를 제공하는 플랫폼을 통해 전달되고 있어서 동시에 듣지 않고 찾아서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제가 역사를 전공했고, 또 역사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교수님께서는 대학원을 그만두고 회사 차린다고 했을 때 참 속상해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몇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교수님이나 동학들에게 폐가 되어선 안된다고요.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더군요.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또 역사 방송은 팩트오류라던가 관점 등이 중요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어요. 영상과 사진의 자료들이 사실과 다른 자료들이 많아서요. 여행이야기라는 회사는 여행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역사콘텐츠를 생산하는 회사라고 볼 수 있겠군요. 1999년에 회사를 만들 때였는데 당시는 이른바 다크투어라는 개념도 없었고 회사라기보다 동호회 정도로 있을 때였어요. 유홍준 교수의 책이 나오면서 역사여행이나 기행이 주목받게 되었는데, 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업의 영역으로 바꾼 것이 수학여행이었어요. 기관과 업체와 협업, 운영할 수 있는 담당자를 찾게 되면서 회사가 성장했죠. 역사기행과 관련된 어린이, 청소년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면서 만들어졌어요.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역사 인식이 넓어지는데 좀 아쉽긴 합니다. 조금 더 빨리 이루어졌다면 소실되지 않았을 자료들이 많았을 것고 또 더 일찍 발굴할 수 있는 문화재들도 많았을 것 같아요. 대중 영역에서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우리 것을 높이다 보니 국수주의 현상이 일어나고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으로 표출되기 때문에 조율하는 것이 힘듭니다. 역사는 좋다, 나쁘다가 아닌 있는 그대로인데 가치관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을 무너뜨리는 것도 큰 일입니다.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 왜 그들이 그렇게 했는가. 그 부분이 여전히 그런 어려움은 시대가 변했어도 갖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예인이 말을 잘못하면 크게 문제 삼으면서 정치인이 오류를 범하는 것에는 너그럽게 대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어요. 사회적으로 그런 위치에 있고, 또 공부를 했음에도 그런 오류를 범하면서 문제가 되는데, 이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부가 바뀌면서 여당 인사들이 가진 일본에 대한 태도도 그렇습니다. 전범집안을 일본 전통의 유능한 정치가문으로 묘사하는 등, 이것이야 말로 대서특필해서 다루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면서 언론이 다뤄야 하는데 한두 번 다루다가 끝내더군요. 짚어내지 못합니다. 전범, BC급 까지도 인식을 못합니다. 오히려 이 부분이 문제가 있겠다 싶어요. 교과서 문제도 그렇고요,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에서 그런 제대로 된 역사 콘텐츠를 생산해내지 못한 것도 문제 아닐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대중영역에서는 일본에 대한 비판의식이 굉장히 높은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정책에 반영될 때 어떤 모습으로 반영되어야 할지 모르는. 그 단계로 넘어서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것이 안 됩니다. 작가님의 책 “제국에서 민국으로”라는 책을 보니 이해하기 쉽게 글로 쓰시고 문체가 쉽게 쓰시려는 노력이 보이더라고요.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 임시정부에 대한 책인데 임시정부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합니다. 어떻게 바라보고 책을 쓰셨는지 궁금합니다. 1919년이 임시정부 100주년이기도 했고, 제가 임시정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에 놀랐고 80~90년대에는 임시정부에 대해 과소평가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구가 한 게 뭐냐,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자신들의 영역들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1919년 3.1운동의 결과로서 계속해서 우리 독립운동은 이어져 왔고, 근대 역사의 시작의 기준이 되는 게 3.1운동인데, 3.1운동 이후에 끝까지 이어졌던 기관이나 단체는 유일하게 임시정부예요. 1948년 정부수립할 때 제헌 헌법에 보면 복국과 재건은 1919년입니다. 1919년을 극대화 시키는 것, 표상할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성과는 미약했고 그들의 지향점도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그 성과를 온몸으로 가지고 있었던 임시정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임시정부의 역사는 한국엔 없다는 거죠. 흥미롭지 않습니까. 특별히 관심을 갖고 책을 쓰시게 된 이유가 있나요?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많았어요. 1990년 이전만 해도 중국과 교류가 없었으니 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소수일 수밖에 없었죠. 이 책을 쓴 이유도 임시정부에 대해 누군가 전달하면 좋겠는데 내용이 좀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간의 흐름에 따라 시기적으로 쉽게 설명해주면 여행가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서였습니다. 자료를 찾다보니 전문가 영역과 비전문가 영역의 간극이 너무 크더군요. 전문가 영역은 한 사람 한 사람, 한 시기 한 시기를 찾아가는데 비전문가의 영역은 그냥 김구 답사기인 거예요. 김구 선생은 독립임시정부사무소 만들 때부터, 중경시절 주석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경시절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그 사이사이 참여한다는 것,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 시대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큰 시선으로 보는 책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 책을 썼습니다. 집필기간은 2년 정도인데 앞뒤 답사, 자료까지 5~6년정도 됩니다. 자료고증도 쉽지 않았습니다. 또 외국이다보니 현장을 가는 것이 행사로 간 것과 개인적으로 간 것, 그 교집합을 찾는 것도 힘들었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동학과 독립운동사를 뗄 수 없는데, 선생님이 바라보시는 우리가 동학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동학이 끼치고 있는 영향은 곳곳에 있고, 동학이냐 천도교냐를 구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보면 저는 최근 대종교 관련된 독립운동사를 조명한 적 있습니다. 대종교의 특징은 생기자마자 백두산 옆으로 본거지를 옮겼다는 것입니다. 단군교에서 대종교라는 이름으로 처음 바꾼 것도 1년 뒤였습니다. 나철 선생이 대종교이전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단체를 만들고 이는 1920년 북로군정서의 기반이 됩니다. 또 임시정부 인사 중 20명 이상이 대종교신자거든요. 우리가 알고 있는 박은식 선생, 신채호 선생 등 이 분들이 대종교신자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흔적이 다 사라졌습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것과 현재와 비교해보면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대종교의 기반도 동학이었습니다. 이렇듯 동학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한데 다만, 근대역사를 살펴볼 때 서학과 개신교가 가진 역할도 큽니다. 그런데 천도교인은 이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개신교의 경우 클러스터로 들어옵니다. 학교, 병원, 교회, 이렇게 세 개가 기본적으로 들어와서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그런 모습에 국내에서 대응했던 존재가 동학입니다. 그런데 1919년 이후 약해지고 분열되고 회유의 대상이 되었어요. 동학의 본래 모습, 그 시대의 고민들이 광복 이후에 보여지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볼 때, 개신교는 이후에 변신했고, 카톨릭은 참여하지 않았다가 반성하면서 민주주의를 통해 크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는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시대의 고민을 담아냈던 조직이 보여준 광복 이후의 모습에 아쉽습니다. 옛것으로 그시대의 고민만이 고민으로 생각하는 그런 평가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님의 역할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요? 동학 천도교인으로서, 또 연구자로서, 작가로서 콘텐츠 생산자로서 동학을 어떻게 재현하고 보여줄 수 있는지 고민해오신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우선 어린이날, 삼일절 등 중요한 날에는 그 역할을 하고 있죠. 또 라디오가 7개니까 반복되는 이야기를 서너개는 할 수 있더라고요.그 과정 속에서 남들이 몰랐던 이야기를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그들의 고민과 노력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역할로 설정하고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제 일 자체가 어떤 것들에 대한 규정이 아닌 역사 유적과 사건을 다 살펴봐야 하니 눈에 띄는 것이있습니다. 불교의 인프라와 개신교의 네트워크나 기념의 방식, 카톨릭의 경우도 그렇고요. 그들을 비판하는 것보다도 정체성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 동학과 천도교는 어떻게 정체성을 보고 미래를 바라보고 우리의 역할을 이야기할 것인지. 삼일운동 당시 천도교가 다른 교단을 압도해서 도와주고 앞장섰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 개신교가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애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하죠. 미국으로 교포들을 대한 외국인회로 묶어냈던 것도 기독교예요. 그런 면에서는 그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가 보여준 힘. 때에 따라 굴복하기도 하고 민족보다 종교를 먼저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키워낸 인재들, 그 배경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겠죠. 동학은 거기서 구체적 답을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민을 현재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충분히 가치있고 그 가치의 현재의 모습을 어필할 수 있는 모습이 있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다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 속에 등장했던 엄청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신교가 아무리 훌륭해도 외국의 자산입니다. 스코필드 박사가 아무리 훌륭해도 캐나다사람이잖아요. 그들이 이식돼서 헌재 큰 대한민국이된 거예요. 개신교, 사회주의, 카톨릭 이들이 더해서 커진 나라인데 우리는 인정하고 강조하고 그렇게 그 줄기 속에서 동학이 가진 의미를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사 작가로서 여행지나 답사지를 추천해주신다면 어떤 곳이 있을까요? 독자분들이 서울에 있는 개신교나 카톨릭의 근대 유적지를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요소중 하나였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하는 방법을 통해 메시지를 얻을 수도,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강우규 열사가 폭탄을 던진 서울역에서 넘어가면 약현성당, 또 다음 공간은 서소문성지 등 성당이 있던 자리는 다 성지이지 않습니까. 전주를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박해가 있던 곳이 전동성당이었고 풍남문을 열어젖히고 집강소를 설치했던 1894년의 동학,또 그곳을 중심으로 했던, 경기전을 바탕으로 했던 전주 부락, 그런 연결고리를 살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에서는 다양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오히려 일반화된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동학 천도교를 비롯한 우리 역사를 바라보던 시선, 복잡한 시선들을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광일 여행작가, 여행이야기 대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역사 기행 프로그램 운영과 역사 대중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은 <우리 아이 첫 경주여행(공저)>를 비롯해 <아빠의 답사 혁명>과 같은 어린이, 청소년 답사 안내서와 한국사 대중서인 <교과서 밖으로 나온 한국사(공저)(전3권>를 썼다 최근 쓴 책으로는 임시정부 27년의 여정을 살펴보는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공저)>이 있다. 이와 함께 역사 기행 전문기획사인 ㈜여행이야기 대표로 활동하며 소규모 답사 프로그램인 ‘동갑내기 사회탐구’를 통해 현장체험학습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 기업 및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 국제교류재단,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등 여러 기관의 역사,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였다. 최근에는 KBS의 <여유만만> <쌤과 함께>, 그리고 EBS의 <문화유산 코리아>, jtbc의 <세계다크투어> 등 방송에 출연하였으며 SBS의 <허지웅쇼>, KBS의 <김태훈의 프리웨이> 등 여러 라디오 방송에서 활동하고 있다. 글 : 신채원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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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 임진택의 시대정신임진택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은 지난 10월 28일 저녁 정읍의 전봉준 고택에서 창작 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의 공개 시연을 시작으로 순회공연을 열었다. 그동안 동학에 관련된 많은 학술 세미나, 예술 공연 등이 있었지만 이 공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전통예술의 고장이자 동학혁명발상지 정읍에서 현대 문화운동의 거목인 창본 작가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리꾼이 함께 자리하며 판을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창작판소리 창본 집필의 주인공은 바로 한국 마당극의 창시자 임진택 이사장. 작창과 완창을 도울 이는 전주 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 송재영 명창, 국립민속국악원장 왕기석 명창이다. 그들은 3시간 동안 동학에 대한 이해와 진실을 소개하며 소리판으로 이끌었다. 이 공연은 누구나 평등 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사상과 더불어 급변하고 있는 국제정세 속에 한반도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정읍 전봉준 생가에서의 시연회를 시작으로 11월 10일 전주 한국전통문화전당, 19일 서울 돈화문국악당에서도 이어졌다. 동학혁명은 1894년 신분제 중심의 오래된 체제를 개혁하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일어난 혁명이다. 또한, 일본 국권 침탈에 맞서 싸운 민족의 봉기로써 큰 의미도 있으며 애국이라는 민족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과 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에도 정치적 혼란으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고 왜곡, 축소되어 왔다. 그러던 중 1960년 4.19혁명 이후 동학혁명의 재조명이 시작되었고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과거사 정리를 위한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이 추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프롤로그는 수운 최제우의 탄생 <아니리> 천하가 한번 크게 변할 양이면 천지간에 괴이한 변이 잇달아 나타나는 법. 허나 난법 뒤에 정법이 나온다 했으니 어찌 진인이 아니 날소냐? 전라도는 전주요 경상도는 경주인디, 경주 근도리 어느 곳에 최제우라는 이가 사는디, 그 이가 태어날제 구미산이 사흘을 크게 울어 댄즉, 어진 사람들은 이 집에 신인이 났다 하고, 모진 사람들은 역적이 났다고 했다더라. 때는 조선조 말엽이라. 왕권은 무능하고 세도가 판을 칠제, 벼슬아치 양반들은 토색질로 날을 새고 가련한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거날, 개같은 왜적놈들 호시탐탐 침노하고 맹수같은 양귀자들 때도 없이 출몰하니 어허 우리 중생, 목숨 보명을 어찌할거나! 최제우가 중생 구할 도를 찾아 천하를 주유했으나 온갖 처세가 다 낭패라. 울산 처가에 얹혀 남의 땅 부쳐먹으며 근근히 지낼적에 - 임진택 창본, ‘녹두장군 전봉준’ 중에서 임진택 경기아트센터이사장은 인터뷰를 통해 창극 녹두장군 전봉준은 동학의 역사를 되새기고 부패한 권력에 맞선 동학농민군들의 처절한 심정과 굳건한 결의를 보여주고자 한다고 밝혔다. 또 전봉준에 대한 작품이지만 수운 최제우 선생과 해월 최시형 선생의 탄생과 일대기를 먼저 보여줌으로써 동학의 사상적 배경이 시작된 역사를 먼저 짚고 싶었다고 말한다. 선생은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제’ 때 ‘고부봉기 역사 맞이굿’을 기획하면서 정읍과 인연을 맺고 동학농민혁명을 판소리로 엮어냈다. 김제 출신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온 그는 대학 시절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고 이후 판소리에 빠져 소리꾼과 연출자의 길을 걸어왔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공연에서는 주제별로 국내 최고의 기량을 갖춘 명창 3인이 무대에 올랐다. 1부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이자 판소리 ‘수궁가’ 예능 보유자인 왕기석 명창이 ‘탐학을 금(禁)해주시오’를 주제로 교조 신원과 고부 봉기의 내용을, 2부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이자 판소리 ‘심청가’ 예능 보유자인 송재영 명창이 맡아 ‘고통받는 민중은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를 주제로 무장기포와 황토현 전승, 전주성 입성을 보여주었다. 3부는 오랜 기간 동학에 천착하며 이번 작품의 창본을 완성한 광대 임진택이 ‘갑오세 가보세’를 주제로 집강소 설치와 우금치 전투 등의 내용을 노래하였다. 전봉준 누구인가,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횃불처럼 우뚝 서서 피투성이로 싸운 사람 그 어떤 고통도 두려워 하지 않은 사람 누구보다도 그 시대를 온몸으로 살은 사람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 합치더니 운이 다 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의(義)를 바로 함에 무슨 허물 있으랴만 나라 위한 애국단심(愛國丹心) 그 누구가 알아줄꼬. - 임진택 창본, ‘녹두장군 전봉준’ 중에서 광대 임진택 다시 동학으로 판을 열다 역사와 함께, 시대를 노래한 광대 임진택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이 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인 1994년 최초로 선보였던 ‘녹두장군 전봉준’은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큰 의미가 있다. 초연 당시에도 전봉준의 일대기를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 19세기말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 아래 봉건제도의 수탈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섰던 동학농민운동의 역사를 판소리로 엮어낸 바 있는 이 작품은 그때와 지금 어떻게 다를까. 작품은 전봉준의 탄생이 아닌 수운 최제우의 탄생과 무능한 왕권과 세도가 판을 치는 세상, 가련한 백성을 구하고자 했던 수운 최제우의 주유천하, 그리고 깨달음으로 문을 연다.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수운 최제우의 깨달음과 도의 실천은 많은 민중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고 혹세무민의 죄로 수운 최제우의 순도(처형), 그리고 해월 최시형이 펼친 동학의 교세 확장은 혁명의 사상적 기반으로 굳건히 서게 된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때 등장하며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으로 이어진다. 수운 최제우의 탄생과 동학의 창도, 해월 최시형 선생이 수운 최제우 선생으로부터 도통을 전수 받아 2대 교주가 되어 도의 실천과 확장으로 동학혁명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과정, 죽창을 든 민중들의 봉기, 그리고 전봉준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한편 이 작품의 1부와 2부, 3부는 왕기석, 송재영, 임진택 세 소리꾼이 각각 맡아서 서사를 끌고 가는 것이 특징이며 여 운, 김정헌, 임옥상 등의 작가들의 걸개그림으로 무대를 구성한다. 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 임진택의 시대정신 “이 작품은 동학의 태동에서 시작해서 전봉준의 최후에서 끝납니다. 수운의 동학 창도에서 녹두 전봉준의 최후까지라고 볼 수 있죠.” 3시간에 가까운 작품 분량으로 동학의 역사를 한판의 판소리로 완성시켰다. 최근 시간은 짧고 화려한 형식으로 구성되는 공연의 풍조와는 다르다. 화려한 조명과 영상 등에 개의치 않고 정통 판소리 방식으로 공연을 열었다. 정통적인 판소리 공연의 형식을 고집했던 이유는 100여년 전에 있었던 이 긴 이야기를 관객에게 바쁜 마음이 아닌 시간을 충분히 내고 자기 침잠을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임진택 선생은 50년 가까이 판소리 창작자로, 마당극 연출가로 민중들과 함께 했다. 스물 다섯 살에 소리를 시작한 선생은 소리는 적어도 열다섯에 시작해야 하는데 스스로 늦게 시작했다고 말한다. 스물 다섯에 시작한 소리꾼, 광대인생은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며 더욱 특별했다. 그리고 앞서 걷는 길은 외로웠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뒤를 따르고 곁에서 함께 울고 웃었다. 함께 건너온 시절의 짙은 그늘이 주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의 작품은 언제나 이 사회에 주는 메시지가 있었다 “나는 옛날 판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 판소리가 한동안은 그 메시지를 주지 못하던 때가 있었어. 그때 나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 실제로 옛날 판소리는 거의 소멸 위기에 있었지.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판소리 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걱정해야 했어. 그러다가 문화재 제도가 생기고 문화재 보존 정책이 들어온 거지. 그 당시에 소리들은 현실을 이야기한다고 아무도 생각지 않았지. 그때 나는 옛날 판소리 그대로는 안 되고 판소리를 새롭게 만들어 져야 한다고 생각했지.” 시대의 스승들 박동실의 <열사가>를 처음 접했을 때, 선생은 의미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은 했으나 예술작품으로서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옛날 판소리에 비해 열사가는 너무 비분강개만 한다고 생각했어. 프로파간다로 민족과 애국을 외치는 게 예술은 아니기 때문에 좀 미흡하다고 느꼈어. 특히 판소리에는 비장과 골계가 있어야 하는데 골계는 없고 비장만 있다고 평가했어. 그런데 내가 창작판소리를 하는 사람이 된 거야.” 그땐 몰랐다. 당신 스스로 소리꾼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판으로 가서 새로운 세상을 한 번 만들어볼까, 외교관이 되려고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한 선생이었다. 대학시절 선생은 연출가로서 연극을 하며, 마당극이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과 양식을 시도하던 때였다. 무대 위에서, 5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선배도, 동료도, 후배도 늙어갔지만 언제나 시대의 어둠을 밝히던 사람들. 2000년을 맞이하며 창작판소리 열두 바탕을 새로 만들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안에 동학, 독립운동, 통일 문제를 담아내겠다고 결심하고, 다시 박동실 선생의 열사가를 다시 마주한 선생은 당시의 소감을 말한다. “엄청나더라고. 느낌이 달라졌어요. 이만큼 창작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그 당시 창작판소리에 박동실 명창이 얼마나 사설에 관여했는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있었다고는 해요. 이준, 안중근, 윤봉길, 그리고 유관순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만든 작품, 그게 열사가야. 처음엔 진부하고 예술 미학이 뭔지 모르는 분들이 만든 방식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창작을 해보니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어. 사설보다는 작창이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지.” 임진택 창작 판소리의 시작은 ‘지하형’의 작품으로 회상한다. 김지하의 담시 세 편, <오적>, <소리내력>, <똥바다>는 오늘날 임진택의 창작판소리가 탄생하게 된 커다란 물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김지하 시인의 시로 눈물 지새우지 않은 청년은 없었을 것이다. 이 사회의 어둠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읊으며 피워낸 가슴마다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을 키워냈을 것이다. 선생이 만든 창작판소리는 백범 김구, 안중근, 전태일, 다산 정약용, 장보고, 남한산성, 그리고 오월 광주의 윤상원까지 우리 역사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빛을 밝혔던 인물과 빛나던 순간들이었다. “그 이전에 김지하의 담시 세 편, 오적, 소리내력, 똥바다 이 세 편이내 창작판소리의 시작이야. 판소리계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 마당극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던 시절, 선생은 극장을 벗어나 더 큰 무대를 꿈꿨다. 사전에 단어가 없다는 건 그런 현상이나 실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호칭을 준 적이 없을 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극장이라는 게 생긴 지는 얼마 안 된다고, 우리나라엔 연극 자체가 없었다고 말하는 선생은 연극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연극은 허영된 사치가 아닌 자기 현실을 외치는 시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때는 창작극이 많았는데, 나는 생각했지. 창작극 가지고는 안된다고. 남의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 사람이 이 시대를 살아오면서 사회의식을 가지고 쓴 창작극이어야 한다고. 거기엔 사회의식을 담아 내고 있느냐, 한국 사람의 정서에 맞느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 무렵 대학에 탈춤반이 생기면서 탈춤이 처음 공연되는 걸 보게 된 선생은 거기서 ‘마당’을 만나게 된다. 선생이 하던 연극은 학교에서 허가를 내어주지 않았지만, 극장이 없으면 ‘마당’에서 공연을 하면 될 것 아닌가. 지금 왜 동학인가? “내가 아직 동학이 뭔지 모를 때 내가 태어난 고향과 어릴 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데, 그 이야길 좀 들려줄까?” 어린 시절 집 앞 큰 길가에서 버스 차장이었던 사촌 형이 진택아, 장터 구경가자 하고 차에 태워서는 데려간 적이 있다. 장터 구경 간다고 신이 나서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선생이 태어나 살던 곳은 김제군(지금은 김제시) 봉남면이었다. 대여섯살 때까지 거기 살았다. 김제읍에서 봉남을 지나 원평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그 버스는 하루에 두 번 운행을 했다. 그걸 타고 원평에 갔다.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며, 부조화를 느꼈다. 사람들이 전부 쪼그라져 있었다. “그때가 1955~6년쯤 되었으려나. 바로 몇 년 전, 6.25전쟁이 훑고 갔겠지. 나는 그 일그러진 얼굴들이 6.25의 상처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닌 거야. 동학난리의 기억이 아직 그들에게 남아 있는 거야. 동학에서 원평 땅이 굉장히 중요하지. 전봉준의 최초의 근거지가 원평이거든. 최근 나온 자료를 보니 원평 김개남과 같은 동네에 살았을 때 서당을 다녔는데 거기가 봉남이야. 봉남과 원평이 붙어 있거든. 그걸 알고 놀랐어.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 6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내 머릿속에 남아 있어. 동학의 상처가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남아 있었던 것처럼.” 선생은 어릴 때 빈 사당에서 만난 마치 동학군의 형상을 한 사내를 만난 이야기도 어느 마을의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이나 설화처럼 이야기했다. 동학을 모르는 땅은 어디에도 없건만, 선생이 태어난 자란 김제는 오죽할까 싶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는 동학을 모르고 지내다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친구 김민기를 통해 가슴에 동학의 불꽃을 지펴냈던 선생은, “김민기가 아침이슬 이후로 탄압을 받다가, 자기 고향인 익산으로 가서 농사를 짓고 살았어요. 그때가 30살 전후였지. 그 전에 김지하가 민청학련으로 감옥가기 전에 동학 이야길 꺼냈었지. ‘장일담’이라는 작품인데 동학 이야기야. 거기서 밥이 하늘이라고 하니까.” 이후 역사적인 작품 하나가 탄생한다. 1980년대에 김민기가 여는 무대,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이 작품은 1982년 제6회 대한민국연극제 참가작품으로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그 주된 이야기를 이루고 있으며 개항 때부터 갑오년까지의 고난의 움직임과 외세와의 역학관계가 군데군데 삽입되어 있다. 연극이 너무 무거워서 임진택 선생은 거기에 소리를 붙였다. 80년대 광주항쟁 직후, 무슨 공연에도 광주항쟁과 연결해서 가슴 아픈 작품을 할 때였다. 그 사이 동학농민혁명은 1994년 100주년을 맞이한다. 전라북도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1994년에 전주에서 100주년기념행사를 치렀다. “1994년에 동학이 완전히 일어났어. 그해에 한편으로는 고부 역사맞이굿을 하면서 전체 동학100주년 기념사업을 하면서 한편으로 1982년에 했던 전체로 판소리로 만들었는데 실패했지.” 다시 왜 전봉준인가, 왜 동학인가. 선생은 말한다. 동학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고 미래라고. 동학에 들어있는 사상을 다시 생각하자고. 동학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선생은 또 말한다. 귀천이 없는 평등이었다, 척양척왜의 자주였다, 그리고 동학은 궁극적으로 생명사상이다. 사람이 한울이라 하지 않는가. 선생이 걸으면 다 길이었다. 맨 앞에서 걸었다. 마른 풀들이 일어서서 길을 내어주었다. 길 잃은 새들은 선생이 가는 길을 따라 더 멀리 날아가기로 하였다. 글 신채원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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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눈꽃으로 꼿꼿이 승화하신 님께2015년부터 원평집강소를 운영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2015년도에 문화재청이 원평집강소를 복원했어요. 저는 원평집강소를 복원하려고 애쓰시다가 2008년 1월에 세상을 떠나신 선친의 유지를 받들다 보니 인연이 됐고요. 고인이 되신 이이화 선생님께서 선친과 각별하셨는데, 마침 동학농민혁명 민간 재단에 계실 때라서 지역에 기념사업회 창립하는 방안을 제시해주셨지요. 2008년도에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원평집강소 복원을 최우선 과제로 삼게 된 겁니다. 선친께서 보내신 30여 년 세월과 합해서 40여 년이 걸려 복원됐지만 복원 후가 더 큰 고민이었어요. 원평집강소 상징성에 큰 의미를 두고 찾아오지만, 기껏해야 건물 밖에서 잠시 쳐다만 보고 가는 게 전부였지요.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다시 찾아오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웃들과 꽃을 심고 놀이터처럼 놀며 한솥밥을 나누는 날을 정했고요. 음악회와 북콘서트를 열고, 인문학강연, 연극, 영화, 공연 등 재밌는 구실을 만들어서 신명 나게 놀게 됐답니다. 방문객이 오는 날은 구미란에 있는 이름 없는 동학농민군 무덤밭까지 안내하며 걸어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제 앞에 보이는 일이다 보니 그냥 자연스레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동안 원평집강소에서 다양한 행사 및 공연, 위령제 등을 추진해 오셨는데요. 대표적인 행사와 가장 뜻깊은 것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원평집강소에서는 행사보다 잔치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집강소 잔치가 뜻깊은 것은 기획단계부터 이웃들이 참여하고 준비한다는 겁니다. 해마다 12월 21일에는 원평 구미란전투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원평집강소의 대표 행사지요. 구미마을 주민들이 모셔온 위령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만 모든 준비는 이웃들이 함께해요. 이웃들이 풍물을 울리고 잠깐이나마 시대를 풍자하며 집강소 정신을 외치는 상황극도 열다 보니, 추모제가 잔치 분위기가 됐어요. 설움 많은 세월을 지나와 이제는 보란 듯이 북치고 장구치며 제를 올릴 수 있으니, 사실 기쁜 날이기도 하고요. 추운 겨울 동지무렵에 이웃들이 모여서 제를 올린다는 게 결코 쉽지않은 일이기에 고맙고 뿌듯하답니다. 제가 잊지 못할 잔치는 ‘동록개의 꿈’을 죽이고 살렸던 두번의 공연 ‘동록개 지게상여놀이’입니다. 원평집강소는 백정으로 천민 신분이었던 동록개님이 차별없는 평등 세상을 만들자고 직접 지은 건물을 내어준 것으로 그 상징성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2016년 가을, ‘동록개의 꿈’이라고 새겨진 장승을 무형문화재 불교목조각장 임성안 선생님의 재능기부로 세웠는데 다음날 김제시에 민원이 들어갔어요. 장군님이 주재하신 건물에 감히 백정놈의 이름을 내세웠으니 굴착기로 파내겠다고요. 살리고 싶었던 집강소 정신과 더불어 장승을 세우기까지 많은 이의 노고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장승이 파손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기에 새긴 글자를 스스로 파내겠다고 했습니다. 되살린 동록개의 꿈에 다시 죽음을 고하는 장례라도 치러야 위안이 될 것 같았어요. 충남 공주 지게상여 놀이팀을 초청해서 이웃들과 함께 문화공연으로 장례식을 진행했지요. 그날 이후 기념사업이 무기력하게 방향을 잃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2017년에 다시 ‘동록개의 꿈’을 새기자고 결의했어요. 그러니 결국 살아서 돌아오는 동록개를 발벗고 맞이하기 위해 환생을 축하하는 지게상여놀이 공연을 기꺼이 다시 또 열었습니다. 동록개의 꿈이 ‘평등세상’이었듯이 원평집강소의 꿈이 있다면? 첫 번째 꿈은 구태여 기념사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을 바라지요. 기념사업회를 만들 때 궁극의 목표가 단체 해산, 해체이었듯이 따로 기념사업이 필요치 않길 바랍니다. 이름 없는 동학농민군들의 구미란 무덤을 기억하는 게 이웃들의 일상이 되고, 기획된 잔치가 아니어도 이웃들의 집강소 공유가 신명 나면 좋겠어요. 모두의 바람처럼, 역병도 물러나서 이웃들과 맘 편하게 집강소 밥을 먹고 웃고 떠들며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만을 바랍니다. 두 번째 꿈은 1894년에 전라도 53곳 53개였던 집강소가 세계 방방곡곡마다 가슴 가슴마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다양한 형태와 빛깔로 별처럼 많아지면 좋겠어요. 실제로 (사)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겸 사무국장을 맡으며 지역에서 활발한 동학운동을 하고 계신데요. 동학연구활동가로서 개인적인 꿈이 궁금합니다. 활발한 움직임으로 보였다면 다행일까요. 한편으론 부끄럽습니다. 가늘게 버텨온 세월이었어요. 다행히도 ‘작게 만 들고 적게 채우고 비워두자’ 라는 처음 신념을 잃지 않아서 남들에게 보여진 것과 달리 낙천적으로 걸어왔지요. 이제 저는, 제가 활동가로서의 꿈은 그만 꾸고 싶어요. 어느 지역 어느 곳이 의미가 덜 한 곳 있을까요. 어느 날이 더 중요하고 어느 날은 덜 중요할까요. 다만 기록된 날만을 우리가 기억할 뿐이지요. 1년 365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아닌 날이 없지요. 100년 전의 역사가 아무리 중요해도 지금 사는 이웃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관계 속에 늘 신중해야 했어요. 너무 늦지않게 그 부담을 벗고 자연인 구미란댁으로 숨고 싶어요. 점점 건강을 자신할 수 없는 저는 늘 떠나는 날을 꿈꾼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제가 좋아서 시작하게 된 일이지만 무거운 사명을 벗고 기꺼이 떠날 수 있으면 행복하지요. 저는 제가 없는 날을 꿈꿉니다. 원평 구미란전투 희생자 추모제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원평집강소를 출발해서 원평취회가 열렸던 원평장터를 지나 전투 당시 불에 탔던 마을 구미란을 거쳐 동학농민군 무덤이 있는 구미산을 오를 때에도 이웃과 유족이 함께 풍물 장단을 울리며 걸었습니다. "제삿밥 지게 지고 북장단에 너울너울, 동짓달 서릿발에 지게춤을 건등건등 추면서 님을 뵈러 가는 길, 그 겨울 눈꽃으로 꼿꼿이 승화하신 님께 그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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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토산 새하늘을 열다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소개 부탁드립니다. 2020년 9월의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창립은 뜻있는 논산시민들의 오랜 바람이 이뤄진 것입니다. 논산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 때에 수만명의 남북접 동학농민군이 만나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단일대오를 이뤄 공주로 진군했던 땅이었다는 자부심으로 저희들은 계승사업회를 창립했습니다. 곧이어 2021년 3월 ‘논산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가 공포되어 계승사업을 더욱 힘차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창립부터 논산시 농민회, 논산평통사, 논산민예총 등의 민주시민단체들과 함께하며 활동력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모임 안에 연구조사위원회, 현장답사위원회, 기념사업위원회를 두고 논산동학 답사 및 강좌, 논산동학 인물 탐구, 논산동학 한마당 등을 실시하며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오늘에 바로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창립준비과정, 해마다 논산동학예술제를 개최하셨는데 그 과정도 궁금합니다.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창립은 2019년 11월 7일 논산 시민단체 주최 ‘평화협정과 방위비 분담금 바로 알기 강연회’를 마치고 제가 논산동학모임을 제안한 데서 출발하였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분들에 모임의 취지에 공감하고 함께해주셔서 놀랐습니다. 그해 12월에 박성묵 충남동학혁명기념사업회 위원장을 강사로 ‘함께 나누는 논산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강좌를 개최하며 논산동학모임 창립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단체이름을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로 정하고 다음 해인 2020년 1월부터 8월까지 10차례의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창립 준비모임을 갖고 연산관아터, 황산성, 황화대, 소토산 등 논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을 답사하며 논산동학농민혁명 관련 강좌를 열기도 했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2020년 9월 6일 마침내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창립식을 논산시농민회 사무실 앞에서 열 수 있었습니다. 논산동학예술제는 작년에 충청남도의 지원으로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논산동학 마당극 ‘소토산 출정’(2022.9.24. 논산문화원)과 ‘서사 대동마당’(2022.9.25. 논산이트센터)으로 나누어 연이틀 개최하고 논산시 지원으로 논산동학답사와 전시회도 병행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논산동학 한마당’을 개최하며 쌓은 역량과 논산민예총, 논산평통사 활동가들의 협력으로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전문인들의 기획과 연출, 역량 있는 예술인들의 출연, ‘동학실천 시민행동’ 등 동학단체들의 방문과 성원이 행사를 더욱 알차게 했습니다. 논산동학의 가치, 논산동학의 역사에서 주목해야할 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논산동학의 가치’는 1894년 음력 시월에 전라도 삼례에서 출발한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농민군과 충청도 청산에서 출발한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농민군이 논산 소토산에 집결하여 며칠간 단일대오를 갖추고 공주로 출정하도록 논산이 그들을 도왔다는 사실입니다. 수만의 동학농민군이 며칠간 먹고 자고 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논산이 동학군에 우호적이었고 군수물자를 대는 등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특히 논산 유림의 협력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상상력을 좀 발휘하면, 드넓은 논산 평야의 포용으로 남북접 동학농민은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전봉준과 손병희는 이른바 ‘형제 결의’를 했고, 모두거 하나 되는 ‘해방구’나 ‘대동세상’을 맛보고 공주로 진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외세라고 할 수 있는 나당연합군에 끝까지 맞섰던 논산 ‘황산벌 전투’의 결기는 19세기 말에 역사의 어둠을 밝히려고 척양척왜의 깃발을 높이 든 아래 소토산 동학농민군들의 함성과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 이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1919년 3.1운동 시기에 매우 거셌던 논산인들의 만세운동으로 되살아납니다. 교육현장에서 아이들과 만나면서 동학의 사상이나 가르침이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동학의 인간존엄, 생명, 평화, 평등의 사상은 우리 민본민주주의의 태동이요 근간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시천주, 인내천, 사인여천, 오심즉여심 등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고 제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민족시인 신동엽의 대서사시 ‘금강’의 감동과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를 창립하고 활동하며 배우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교사와 문화예술 활동가인 저를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수운 대신사의 ‘인간만이 최고 신령한 존재이니라.(獨惟人 最靈者也)’, 해월 선생의 ‘아이를 때리지마라. 아이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다.’, 동학의 영향으로 어린이 날을 제정한 방정환 선생의 일생과 어록은 제게도 큰 울림을 살아나고 있으며 제자들에게도 제가 전해주는 내용입니다. 시인이자 풍물을 하시는 예술가로서, 이번 동학예술제 극본을 직접 쓰셨고 또 마당극에서 전봉준 역할로 무대에 오르셨는데, 선생님께서 이 작품에 담고 싶었던 동학의 의미에 대해 말씀부탁드립니다. 동학 교주는 처형을 당하고 동학 지도자들은 평생 쫒기는 신세였습니다. 세계의 그 누구도 그들 편이 아니었기에 말 그대로 ‘고립무원’이었습니다. 동학도들은 도저히 살 수 없어 목숨을 걸고 죽창을 들었습니다. 19세기 말 우리의 지성과 영성은 동학은 세계에 내놓아도 으뜸입니다. 동학혁명군은 전쟁에서 패하고 처참하게 죽었으나 도도한 역사의 장에서 이겼습니다. 논산동학 마당극 ‘소토산 출정’은 바로 논산에 왔다 간 무명 동학농민군들이 온몸으로 쓴 살 떨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분들이 쓰러지며 바라보았을 논산의 하늘을 바라보며 대본을 썼습니다. 현실이 어렵고 절망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128년 전 동학군들이 논산 들녘에 묻은 전언(傳言)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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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의 피체노정, 길 위에서 길을 묻다신춘호 박사는 연행노정 전문가로 꼽힌다.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인 그는 방송카메듀서로서 연행노정에 대한 기록 사진을 공공전시한 바 있다. 또 실학박물관, 천안박물관, 심양 총영사관과 TV다큐멘터리 ‘열하일기-길 위의 향연’(촬영·공동연출)을 제작했다. 신 박사는 “길(路·路程)은 단순한 교통로를 넘어 문화와 문화가 교류하고 문명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전통시대 한국과 중국 사이에 600여년 이상의 교류역사가 서려있는 연행노정 또한 인문유대의 현장이자 동아시아 문화로드”라면서 “연행노정은 조선을 벗어나서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였다”고 강조했다. 신 박사는 또 “연행노정 영상기록 작업은 연행록의 내용에 기반한 역사공간 기록”이라면서 “연행노정은 비록 중국에 산재하고 있지만 우리역사의 한 장면이 깃든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의 역사지리에 대한 공간의 변화를 확장해 살펴볼 의미 있는 곳”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신 박사가 연행노정을 주기적으로 관찰하고 변화를 기록한 영상역사학적 가치를 가리킨다. 신 박사는 2000년 8월 연행노정을 처음 답사한 이래 현재까지 연행노정의 변화를 추적해왔다. 노정이라는 키워드로 글을 쓰시던데 어떻게 쓰시게 되었는지? 회사 업무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어요. 문화의 현장, 역사의 현장 프로그램 제작을 자주 하다 보니 관심도 있었고, 원래 문학이나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그 현장을 다녀보는 것을 즐겨했죠. 제 관심사와 맞았어요. 방송대학 TV 카메라 감독님이시죠? 방송대학은 교육 현장에 나올 수 없는 장애인이나 재소자들도 학습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역사의 현장을 찾는 프로그램은 많은 관심을 갖고 시청할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까지 포괄해서 교육의 기회를 줘야하는 것이 방송대학이니 그렇게 맞춰가고 있습니다. 저는 25년동안 방송대학 촬영을 해 왔어요. 교육채널이지만 방송대학교 교육프로그램 제작, 일반인 대상으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제작하니, 학과의 교과목이면서도 일반인들도 많이 좋아하더군요. 동학은 언제 관심있게 보셨나요?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제가 일하는 스타일이 연출자는 카메라를 알아야 하고 촬영은 연출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을 해 오는데, 그렇다 보니 프로그램을 맡아서 나가면 주제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는 습관이 있어요. 동학을 할 때도 다른 사람이 출장을 가야 하는데, 제가 가겠다고 했어요. 특히 동학은 동학 자체보다는 그 당시 전봉준이나 동학의 지도자들에 대해 관심이 있었어요. 역사를 좋아하니까. 그때 관심이 생겼고, 5~6년이 지나고 천도교중앙총부에서 주관한 독립대장정 참가자로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다보니, 그러려면 의병을 공부해야했고, 의병을 공부하다 보니 동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군요. 그렇게 독립대장정 다녀와서 관심이 더 생겼어요. 피체노정이라는 용어 자체도 낯설어요. 피체노정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먼저 관심을 갖게 된 부분은 해월의 피체노정이었어요. 지금은 수운 선생의 피체노정 작업을 하고 있고요. 이후엔 손병희 선생님까지도 순차적으로 계획하고 있어요. 신체가 구속되었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기까지의 여정을 말하는 것인데, 연행노정을 하면서 병자호란 때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의 피로노정, 노예로 끌려가는 노정. 연행 길을 연구하면서 연행에 중첩된 600년 역사에 병자호란, 조선 포로들, 길 위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하게 생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연행이라고 하는, 외교 사신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양한 각자의 시선들로 연행을 바라볼 수 있고 특정한 시기, 대한제국 시절 유럽으로 갔던 사절단까지 시대적으로, 또 인물로 사건으로 다양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피체노정의 경우도 동학의 지도자들 중 특히 수운 선생님 보다는 해월 선생님 이야기가 더 풍부합니다. 선생님에게 길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 전공은 문화콘텐츠학입니다. 저는 길에 대해 논문과 강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길은 단순히 교통로의 의미를 넘어선다고요. 교통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문화가 있고 교류하고 소통하는 공간이 길입니다. 피체노정의 경우도 끌려간 행적뿐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 끌려간 과정에 나룻배가 있는 주막에서 잠시 쉬어가며 호송되고 근처에서 잡힌 사람들이 같이 끌려가고, 길 위에 남긴 역사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요. 주막, 나루, 물길의 풍경들이 어떠했는지를요. 당시의 호송체계를 보면, 관헌이 이동하는 길, 수로 등이 정해졌어요. 뱃길이기도 하고 관로이기도 하고 상인들이 이동하는 무역로이기도 하고요. 피체노정 하나에 예를 들어 최시형 선생이 붙잡혀서 한양까지 압송되던, 조선시대의 사회상, 문화상을 볼 수 있으니 그것까지 보고 싶은 거예요 끌려가고 고난 당한 일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의 문화를 같이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그 당시 문화에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길은 교통로뿐만이 아니라 문화사적 측면에서 볼 수 있어요. 연암 박지원의 일기를 보면 한양에서 북경까지 다녀와서 기록한 것, 길을 가면서 지역마다 문화를 봤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위대한 문학 작품이며 기록물입니다. 단순한 여행기록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책의 가치가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은, 우리의 삶의 영역, 문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 교통로의 의미를 벗어나는 겁니다. ‘동아시아 문화로드’라고 명명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바라보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신춘호는 길 위에서 길을 묻는 사람이다. “최동희 선생을 이야기하려면 최시형 선생 이야기를 해야 하고, 최시형 선생 이야기를 하려면 손병희 선생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수운 최제우 선생을 이야기하려면 해월 최시형 선생의 이야기를 해야겠죠. 과연 이 이야기들을 분리할 수 있을까요? 다 연결됩니다.” 길을 연구하는 사람 신춘호에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 ‘신춘호의 노정’은 어떻게 연결됩니까?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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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도 바다인 곳에서 독립을 꿈꾼 사람들‘뭉우리돌’ 그들은 누구인가 찬란하고 강인한 뭉우리돌의 역사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누가 남았을까 한 자동차 광고에 등장한 독립운동의 섬 소안도, 그 현장을 찍고 있는 사진 작가 김동우의 렌즈가 닿는 시선은 조명 받지 못한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찾아낸다. “발로 쓰는 거잖아요. 이런 이야기는” 기록에 남아 있는 이야기와 만나는 지점은 또 다른 고민이이었다. “논문이나 기록들을 보고 있으면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대중과의 접점에 공백이 있는 것 같아요” 사진제공_김동우 작가님, 작가님의 글에는 한 문장에 많은 이야기, 해석의 여지가 많습니다. 이 책에서는 몇 개국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까? 책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이 책은 세 권의 시리즈 중 첫 번 째 책이고, 총 10개국을 다녔고 이 책에는 4개국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저의 책 《뭉우리돌의 바다》는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발굴하고 기록한 최초의 다큐멘터리입니다. 저는 세계일주를 하던 중 인도 델리 레드포트에서 우연히 그 장소가 한국광복군의 훈련지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도라니, 그것도 우리 독립운동사라니!”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아홉 명의 한국광복군이 인도에서 영국군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웠던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접한 이야기에 저는 번개를 맞은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몰랐던 독립운동의 현장이 얼마나 많았나, 검색을 해 보니 아프리카와 남미 빼고 전 세계에 있었어요. 심지어 호주까지 안창호 선생님이 거쳐가셨더라고요. 러시아, 영국, 프랑스까지. 충격을 받았어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역사였거든요. 마침 잘 됐다, 그럼 이 이야기를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사진 속 인물들이 평생 가슴에 품었을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처음엔 사적지만 기록하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후손이 있으면 만나보고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찾게 된 후손분들은 사적지가 해 주지 못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그 이야기가 저에게 참 소중했어요. 그래서 인물 작업도 시작했어요. 지금껏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으니 그분들에게는 기회가 없었어요. 저를 너무 반가워하셨어요. 또 제게는 자료를 접하는 것과 그분들이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 다르게 다가왔고, 그곳에서 살아온 그분들의 표정 하나 하나가 생생하게 다가와서 마음이 급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이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으면 또 묻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쿠바의 경우 우리와 수교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역사가 묻혀 있거든요. 긴 여정이었겠네요. 책 출간 이후 최근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책 <뭉우리돌의 바다>가 나오기까지 작업을 한 시기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인데, 10개국을 다녔습니다. 이후로 코로나가 터졌어요. 작업은 중단됐고 넋 놓고 있을 수 없고 작업은 해야 하니 그해엔 부산에 방을 얻고 부산에 내려가서 경남 지역에 남아 있는 일본군의 흔적들을 찾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해방 이후 6.25 전쟁 후에 70년이 지나는 동안 무엇을 했나 싶어서요. 먹고 살아야 했고, 민주화도 해야했죠. 그러는 동안 우리가 너무 많은 역사를 지웠습니다. 또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부족했죠. 작가님이 사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그런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현장이 주는 말이 있죠? 제가 이 책에도 썼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공’이 었어요. 비어 있는 공.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비어 있지 않은 공이더라, 서성이면서 이곳이 가진 의미, 사건을 어떻게 담아낼까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그것이 그분들에 대한 예의와 추모였어요. 저는 사진들을 보면서 작가님의 이 작업 자체가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0년 뒤에도 이 사진들은 남을 거니까요. 비어 있는 ‘공’을 가득 채우는 것들이 보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특히 후손들의 사진들을 보면 아버지의 부재가 보이기도 하고, 그 공간이 가진 의미를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을 보면 많은 이야기들이 말을 걸어옵니다. 독립운동의 상징 같은 곳에 살고 있던 아버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의 후손이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것, 저는 그 공간에서 그 인물들을 희미해진 역사, 빛바랜 사진처럼 표현했습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희미해지고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멕시코의 경우 한인들이 7세대까지 내려갔는데, 이분들에게 당신이 코리안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우리가 그 역사를, 그분들을 기억하지 않으면 이 사진처럼 된다는 이야기예요. 집단기억을 가지고 가야만 이 사람들의 삶도 의미가 있을 거예요. 제가 인물사진을 흐릿하게 찍은 이유는 그런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기억이나 인식들이 지워지고 흐릿해지고 있다는 것, 또 이렇게 되어선 안된다는 이런 의도였어요. 우리 역사가 이렇게 흐릿해지고 있다고. 책의 제목이 ‘뭉우리돌의 바다’입니다. 바다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다 바다에서 왔구나, 저 보이지 않는 곳에 집이 있는데, 너무 멀리 왔구나, 나라가 힘이 없어서 데려오지 못했구나, 그리고 저 바다는 벽이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분들은 저 수평선 너머로 얼마나 가고 싶었을까요. 이 책이 첫 번째 시리즈라고 말씀하셨어요. 다음 책은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고려인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이민은 1861년 13가구가 넘어갔던 때를 말합니다. 안중근의 활동, 최재형, 홍범도 이야기, 그리고 1937년 강제 이주되어 중앙아시아로 간 이야기가 다음 책입니다. 사진_기아자동차 광고 스틸컷 현장에 직접 가보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작가님의 사진이 많은 위로를 주기도 합니다. 끝으로 독자들에게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유적지를 소개해주시죠. 거제도에 가면 ‘금포마을’이라는 곳이 있어요. 일본군들이 조선인 징용자를 동원해서 해안진지, 땅굴진지를 만들어 놓은 곳이 있어요. 대여섯 개의 땅굴이 있어요. 우리에게는 그렇게 아픈 역사의 현장인데, 그곳이 ‘거제도 인생 샷 포인트’라고 알려져서 사람들은 거기서 인생 샷을 남기고 있어요. 데이트하러 가서 줄을 서서 역광으로 실루엣 사진을 찍고 있어요. 이번 전시에서도 그 사진을 걸었어요. 인생 샷 남기는 모습까지요. 우리가 역사를 이렇게 회피하고 있고 인스턴트처럼 가볍게 대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어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는데, 가볍게 즐기고 소비하는 문화가 되어버린 현장을 1회용 인스탁스 필름을 이어붙여서 표현했어요. 저는 역사의 현장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가를 말하고 싶었어요. 사진제공_김동우 김동우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이 바람 소리를 들었던 그때 그 사람들을 떠올리며, 저 나무 아래 서 있던 그때 그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하며. 기자 생활을 접고 하고 싶은 이야기에 천착했다고 하는 김동우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여기까지 오는 데 10년이 걸렸다. 인터뷰를 마치며, 당신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냐고 물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제 인생은 ‘독립운동’이 되었죠. 저는 아마 전생에 친일파였을 것 같아요. 그래서 속죄하고 사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무슨 일을 할 때 지하에 계신 독립운동가들이 다 도와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무서울 게 없나 봐요."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