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뉴스목록
-
[칼럼] 수운대신사 탄신 200주년, 득도 및 순도의 순간들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는 인류가 살아가는 방법을 세세히 교훈으로 후학들에게 알려 주시고 대구장대에서 순도하신 것이다. 수운선생의 탄신과 득도 및 순도의 순간순간 들이 모두 신비에 쌓여 있다. 신인임을 말해 주는 위대하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요한 순간들을 살펴보면서 다시 한 번 수운 선생의 200주년 탄신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먼저 수운선생의 탄신에 대해 살펴보자. 갑신년 1824년(순조24년)10월 28일(양력 12월 18일) 새벽 먼동이 틀 무렵 경주 현곡면 가정리 안쪽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63세의 근암공(수운 선생의 부친)은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태어날 때 하늘이 아주 맑았으며, 해와 달이 밝은 빛을 발했다. 상서러운 기운이 집 주위에 둘러졌다. 또한, 태어나자마자 구미산 봉우리가 3일간이나 기이한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최씨 가문에 유명 인사가 탄생하면 구미산이 울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7대조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탄생했을 때도 구미산이 3번 울었다고 한다. 수운대신사 탄신일에 구미산이 3일이나 울었다는 것은 수운이 위대한 인물, 즉 신인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용담가에서도 “기장하다 기장하다 구미산기 기장하다 거룩한 가암 최씨 복덕산 아닐런가”하여 구미산과 최씨 가문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였다. 득도의 순간을 보자. 1860년 경신년 4월 5일(양력 5월 25일) 오전 11시에 한울님으로부터 후천 오만년 무극대도를 받으셨다. 포덕 5년 전, 1855년 3월 울산여시바윗골에서 을묘천서를 받고 수련을 거듭한 후 1859년 10월, 용담으로 돌아온 지 7개월만이다. 그로부터 4월말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수없이 많은 천사문답이 계속되었다. 득도 당시의 심정과 상황을 친히 저술하신 하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8편에 기술하셨다. 간단히 살펴보면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뜻 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증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거늘 깜짝 놀라 캐어물은 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한울님)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로 시작해서 천사문답이 이어 졌다. 나중에는 수운 선생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씀과 천사문답이 이어졌다. 드디어 시천주의 진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순도의 순간을 살펴보자. 조정으로부터 사형 집행 명령이 대구 감영에 하달되어 포덕 5년 갑자년 3월 10일(양력 4월 15일)에 대구 감영에서 수운대신사를 참형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형졸이 수 삼차 대신사의 목을 베어도 되지 않았다. 모든 관속들이 창황실색하여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이때 대신사께서 형졸에게 명하여“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열 두자를 써서 펼쳐 놓고 청수 한 그릇을 모셔다가 그 위에 놓으라고 하신 후 청수를 향하여 한참동안 기도하신 다음 형졸을 향하여“이제는 안심하고 베라”하시고는 형장에 나아가시니 당년 41세였다. 이때 갑자기 천지가 어둑하여 지고, 광풍이 일어나고, 폭우가 쏟아지고 실로 천지신명이 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 크게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마침내 수운대신사는 순도하시었는데 금년은 순도 1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모든 탄신, 득도 및 순도의 과정이 신비에 쌓여 그 영적들을 쉽게 일반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종교는 영적의 순간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우리 천도교인들은 선배 동덕님들로부터 이러한 내용들을 무수히 많이 들어 왔고, 교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수운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설적으로 한국의 근대사를 장식하는 빛나는 삼일독립운동, 동학혁명 등이 과연 수운대신사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가능했겠는가를 자문해 본다. 한편으로 우리는 과거사에 매이지 말고 이를 기반으로 앞으로 200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미래 지향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현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탄생한 인공지능 시대에 온 사회가 초지능과 초연결사회로 가고 있다. 이에 부합하는 교단 운영과 교인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미래 시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지 등 막중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에 대한 교단 차원의 현명한 지혜와 교인들의 사명이 눈앞에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정의필(울산교구, 울산대 명예교수)
-
[칼럼] 보수를 참칭하는 기득권 세력과 동학인의 후예1789년 7월 14일 프랑스의 성난 민중들이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했다. 세금인상을 위한 형식적인 삼부회에 동원된 평민대표들은 사제들과 귀족층의 일방적인 회의결정에 분노해 민중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의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프랑스대혁명의 순간이었다. 프랑스의 봉건적 구체제 하에서 고통받던 민중이 비로소 국가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자각을 하고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열기는 구체제의 파괴를 명분으로 왕과 왕비를 처형하는 등 극도의 공포정치로 이어졌다. 영국은 프랑스보다 먼저 시민혁명을 달성해 의회정치가 일찍 자리를 잡은 나라였지만 혁명 소식은 바로 전달되었다. 그때 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 의회에서 성공한 정치인이었던 에드먼드 버크는 이 사태를 예의 주시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가 영국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급격한 변혁보다는 검증된 과거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지지했다. 그는 영국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는 것이 프랑스처럼 혁명적 변혁보다도 우수하다는 논지의 글을 썼다. 그 글이 유명한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이었다. 여기서 버크는 보수주의(Conservatism)라는 정치사상을 창조해 냈다. 버크의 보수주의는 결코 변화를 거부하는 사상이 아니다. 한 사회의 문명은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전통적 도의와 관습의 힘으로 완성되기에 그것을 지키고 새로운 가치가 추가되면서 발전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사회는 점진적인 변화 속에서 발전해 온다는 주장이었다. 그것이 보수주의였다. 버크는 프랑스혁명이 전통을 파괴하여 사회를 피폐화시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프랑스대혁명을 공포정치로 몰고 갔던 로페스 피에르와 위기의 프랑스를 구한 나폴레옹의 독재는 분명 부정적인 결과였지만 혁명을 통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완성은 성공이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는 이후 전 세계 정치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정치는 점진적 개혁을 상징하는 페비안니즘이 자리를 잡았고, 페비안니즘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의 사령관이었던 파비우스 장군에서 유래했다. 파비우스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장장 16년을 로마에 들어와 괴롭히고 있을 때 끈질긴 지구전으로 결국은 한니발 부대를 무찌른 로마의 장군이었다. 이처럼 점진적인 승리 또는 변화를 바라는 주의가 페비안니즘이고 영국 정치의 기본이 되었다. 다른 국가들도 비슷하게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등장해 급격한 변화보다는 완만한 개혁과 변화를 지향했다. 이들 보수주의 정당의 특징은 전통적 가치의 옹호와 대외적으로 자국 우선주의였다. 철저한 민족주의에 입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대부분 국가가 취하는 국익 우선주의는 전적으로 보수주의의 영향이다.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이 대외문제에 관해서는 한결같이 자국 우선주의인 것처럼 보수를 표방하는 모든 나라의 공통된 인식이고 결론이다. 우리나라도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도, 언론도, 시민단체도, 보수 국민도 있다. 특히 분단의 극심한 이분법 하에서 더욱 노골적이었다. 이들은 타국처럼 전통과 민족을 중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상황을 보면 금방 거짓말임이 드러난다. 국익을 주장하지만 대한민국의 국익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국가를 더 배려하고, 그들의 마음을 걱정한다. 연일 친일적 발언을 경쟁하고, 국내 투자보다는 미국 투자에 열을 올린다. 일본이 군사 대국화를 지향해도 눈 감고 있는듯 하더니 급기야 일본군(자위대)의 국내 진출이 국회의 허가사항이 아니라고까지 한다. 외교에 있어서는 오로지 미일외교 외에는 없는 듯해도 보수를 자랑하는 언론은 이를 지적하기보다는 오히려 응원하고 있다. 보수를 표방해서 이익을 얻은 위장 시민단체는 이런 행위들에 무조건적인 찬양을 하고, 일부 생각 없는 국민은 무차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지식인 세계에서도 보수주의를 앞세우며 세상을 곡학아세하는 지식 판매꾼들만이 출세길을 열어주고 있다. 세상에 이런 보수주의는 없다. 이들에게는 전통적 가치는 고사하고 역사, 민족주의, 민족의식, 국토 존중의 정신마저도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그들이 한결같이 자신들은 보수란다. 보수의 의미도 모르면서 보수를 참칭한다. 안타까운 것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무조건 지지하는 진짜 보수를 사랑하는 국민이다. 더는 속지 말아야 한다. 보수주의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 우리 역사를 통털어 가장 진보적인 사상과 정신은 단연코 동학이었다. 동학보다 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상은 일찍이 없었다. 엄혹한 신분제 사회에서 모두가 하늘을 모신 존재이므로 만민은 평등하다는 자각을 일깨워준 동학은 이후 눈부신 업적을 쌓아갔다. 130년 전의 동학혁명은 그 절정이었을 것이다.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아 백성을 안심시키고자 했던 그들이 어쩌면 에드먼드 버크가 설파한 진정한 보수주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동학혁명은 분명 구체제를 전복시키는 혁명적 내용을 담고 있지만 기존의 왕조체제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구상을 하고 있었으며 외적의 침략에는 단연코 한 치의 땅도 내어줄 수 없다는 척왜양창의를 외쳤다. 그러니까 가장 진보적 이론이면서도 진정한 보수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동학사상의 위대함은 단순히 진보와 보수의 이념을 담을 수 없기에 그 가치가 끝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오늘 우리는 보수를 참칭하는 엉터리 보수주의를 어떻게 바라다보아야 하는가이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정권에 동학의 후예답게 단호히 나설 것인가 아니면 가짜 보수에 동조할 것인가 선택은 천도교인들에 달려 있다. 분명한 사실은 1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권은 짧고 국민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년암 임형진(동서울교구, 경희대 교수)
-
[칼럼] 늘 공경하며 살아가기어떤 사람이 좋으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편한 사람, 이해심 많은 사람, 화를 잘 안 내는 사람, 말이 무겁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 배려심 있는 사람, 양보하며 베풀기를 잘하는 사람 등을 꼽는다. 그런 사람은 남을 공경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누구나 그런 사람을 좋아하리라. 나는 매일 새벽 수련을 하는 사람들과 같이 읽는 ‘오늘의 말씀’이 있다. 오늘 말씀에는 자기 자신과 남들을 공경하라는 취지의 말이 있었다. 공경하며 사는 게 쉬울까 어려울까? ‘오늘의 말씀’에서는 많은 사람이 힘들게 산다는 사실을 알면 된다고 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비통함과 한 맺힌 생각에 기반한 행동을 하는지를 알면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했다. 근데 그게 좀 어렵다. 또 의문이 든다. 어떻게 하면 늘 사람들의 비통함과 맺힌 한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말이다. 최근에 우리 마을 주민 대상으로 서명을 받을 일이 있었다. 실수로 감옥에 간 마을 사람이 있어서 탄원서를 내려는 것이었다. 탄원서나 진정서, 소장이나 준비서면, 진술서 등을 많이 써 봤기에 무난하면서도 감성에 호소하는 탄원서를 써 들고 집집을 다니며 서명을 받는데 반응이 정말 흥미로웠다. 첫째는 거절하는 사람이다. 자기 이름 석 자를 쓰지 않겠다는 사람이다. 너무 놀랐다. 자기 이름을 저렇게나 고귀하게 간직하려고 하는구나 싶어서 신기하기도 했다. 그 이유로 감옥에 가 있는 사람과의 이런저런 꼬인 일화들을 꺼내 들었다. 대단한 소신파다. 둘째는 “서명을 하기는 하는데요.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되지요. 그러니까 감옥 갔지요”라며 훈계를 하는 사람이다. 셋째는 무조건 파다. “나오고 봐야지요. 날도 더운데 감옥소에서 무슨 고생이람.”이라는 사람이다. 아주 시원시원하다. “서명하면 나온 뎌? 그라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하지 뭐”라고 덧붙인다. 이것만이 아니다.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 사람 됐어.”라고도 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니 무조건 서명하는 사람이다. 이 세 번째 사람에 주목해 보자. 자기 잘못으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비난하거나 훈계하기에 앞서 그런 그의 (잘못된) 선택마저도 공경하며 서명을 하는 사람. 자초지종은 나중에 들어도 된다는 듯 서둘러 서명하는 이 사람. 앞뒤 가리지 않고 남을 공경함으로써 스스로 ‘공경하는 사람’이 되었다. 욕을 하면 욕하는 사람이고 흉을 보면 흉보는 사람인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의 마을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 일단 건져놓고 본다는 식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니까 일단 서명을 해버리는 사람이다. 서명을 한 어느 사람은 감옥에 있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라고까지 했다. 뚜렷한 이유도 없다. 자기가 서명한 사람이니 좋은 사람이라는 식이다. 서명을 안 하고서 “그 사람 좋다”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절대. 절대로. 물에 빠진 사람에게 보이는 다섯 가지 반응이 있다고 한다. 1. 물에 뛰어들어 건지는 사람. 2. (수영을 못하므로) 소리를 질러서 주위 사람들에게 사태를 알리는 사람. 3. 왜 빠졌대? 물은 깊어? 한가하게 원인을 따지는 사람. 4. 수영도 못하면서 물엔 왜 들어갔어. 바보 아냐?라며 물 빠진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 유형은 이렇다고 한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공경이라는 것이 실천을 말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눈 감고 하는 기도는 섬세하며 직접 연결되는 기도이긴 하다. 효력 역시 섬세하고 은근하다. 이런 기도는 높은 정성과 집중력, 특별한 기도 빨 없이는 어림도 없는 기도 방식이다. 실천(기도)은 좀 거친 면은 있으나 강력한 효과를 낸다. 말과 글의 실천보다 몸뚱이 실천이 더 그렇다.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반듯한 사람이 아닌, 그냥 보통에도 못 미치는 이를 공경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높은 공경하는 삶으로 도약하는 디딤돌이라 하겠다. 공경하며 살면 더 공경을 베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좋아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유형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진리다. 그러니 오늘 우리 공경하며 살자. 아니 내일도 모레도.. 목암 전희식(진주교구. 한울연대 공동대표/ 마음치유 농장 대표)
-
[칼럼] 동학기행-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 동학·천도교 제1성지 용담정 순례(2)(지난 호에 이어) 2. 용담정, 그리고 와룡암과 용담서사 용담정은 동학·천도교 제1성지라 일컫는 곳이기에 용담정의 유래에 대해 교중 기록과 표영삼, 한태원 선생의 기록을 중심으로 연혁을 살펴보겠다. 근암문집(수운 대신사 부친 최옥)에 의하면, 구미산은 경주의 높은 산으로서 큰 바위가 솟아있는 것이 마치 거북이와 용이 서려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근암공은 ‘구미산은 경치가 매우 좋아 일찍이 26경을 읊은 바 있는데, 구미산 밑에 있는 와룡담臥龍潭은 그중의 빼어난 모습중의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1778년 복령이란 승려가 와룡담臥龍潭 북쪽에 암자를 짓고 원적암圓寂庵이라 하였다. 그 후 스님들이 흩어져 암자가 폐지되었으므로 처사공處士公 종하宗夏(수운 대신사 조부)가 그 집과 전답 수백평을 사들여 이곳에서 자제분 근암공으로 하여금 학업을 닦게 하였다. 원적암은 근암공의 스승이신 기와畸窩 이상원李象遠 선생이 정자의 이름을 와룡암臥龍庵이라 새롭게 지었다. 그 후 30여년을 지난 후 집이 쇠퇴하여 허물어져, 근암공이 그 자리(와룡암)에 다섯 칸의 집을 새로 짓고, 또한 북쪽에 네 칸을 지어 용담서사龍潭書社라고 이름 하였다. 수운 대신사께서 득도 이전에 이사 왔을 당시 와룡암터 집은 허물어져 방치되었던 것을 가족과 생활하는 집으로 수리하여 기거하였다. 그런데 현재 용담정이라 부르는 건물 이름이 수운 대신사 당시 부른 이름인지 훗날 제자들에 의해 불렀는지 정확하지 않다. 용담정이란 이름의 유래를 추적해보면 다음과 같은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용담정龍潭亭이란 건물 이름은 수운 대신사께서 지은 교훈가 ‘···구미용담龜尾龍潭 일정각一亭閣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의 용담정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운 대신사는 득도 원년(1860, 경신) 4월 5일 11시경 와룡암터 또는 용담서사터 집에서 득도하였다. 그런데 용담서사 터가 현재의 용담정 자리인지, 와룡암 터가 현재의 용담정 자리인지 정확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수운 대신사의 득도 장소인 현재의 용담정이 용담서사龍潭書社자리인지, 와룡암臥龍庵자리인지 지금으로서는 구분하기는 어렵다. 교중 동학·천도교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표영삼 선생과 윤석산 교수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표영삼 선생의 의견은 수운 대신사의 득도 장소가 현재의 용담정 자리 즉 용담서사 자리가 아니고, 와룡암 자리에 무게를 둔다. 그 이유는 수운 대신사께서 용담서사 즉 학문을 공부했던 건물이 아니라, 가족과 생활했던 건물 즉 와룡암터에 근암공이 새로 집을 지었던 것을 수운 대신사가 수리하여 살던 장소라는 것이다. 이는 용담유사 여러 곳에 득도 당시 가족이 지켜보았다는 대신사의 기록에서 근거를 찾는다. 윤석산 교수의 의견은 와룡암과 용담서사 두 곳 모두 인정하고 있다. 수운 대신사의 득도 과정이 한 순간 이뤄진 것이 아니고, 수일을 경과하면서 지속되었던 것을 참고하면 가족과 생활했던 와룡암터 집과, 학문을 연구하고 경전을 쓰셨던 용담서사터 집, 두 곳에서 득도하였다는 추정이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두 장소인 와룡암터와 용담서사터를 모두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수운 대신사의 득도 장소인 역사적인 건물은 1863 12월 10일 대신사께서 관군에게 피체되어 이듬해 1864년 3월 10일 좌도난정율左道亂正律이라는‘도를 그릇되게 하고 바름을 어지럽게 하는 법률’ 즉 반역죄反逆罪로 대구 장대에서 순도殉道한 뒤, 살림집 다섯 칸인 와룡암터 집과 용담서사터 네 칸의 집은 돌보는 이가 없어 모두 무너지고 몰락되어 그 곳은 황폐한 터가 되었다. 그 후 조선왕조의 동학에 대한 가혹한 탄압에 50여년을 지나는 동안 관의 지목이 두려워 그 누구도 득도 장소이자 성지인 건물복구에 착수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4월 황해도 천도교 교역자 오응선과 교인 이계화 등이 21일 특별 기도를 마친 뒤에 한울님의 감응을 받아 경주 용담성지를 찾았으나, 건물은 흔적조차 없고 잡초만이 무성하여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오응선씨는 용담정자 재건을 결심하고 이계화씨와 함께 다시 백오일 기도를 단행하고, 용담정자를 착공하여 1914년 10월 15일에 준공을 하고 용담정龍潭亭이란 현판을 붙였다. 오늘날 용담정이란 건물의 이름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후 40여년이 지내는 동안 용담정은 다시 무너지고 몰락되니 인적마저 끊기게 되었다. 현재의 용담정 복원은 천도교 부인회 주최, 천도교 창도 1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서, 양이제와 권태화 두 할머니가 나서서 천도교인들의 성금을 모아 다시 용담정을 중창하고 1960년 6월 30일에 많은 교인들과 함께 낙성식을 봉행하였다. 3. 와룡암터에 유적표지판 하나라도 세우자 천도교단에서 현재까지 수운 대신사 득도터인 와룡암 자리에는 복원건물은 고사하고 아무런 유적표지판도 세우지 않고 있다. 그 연유는 현재 용담정 건물과 대비되어 득도 장소에 대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역사는 분명 역사이다.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고자 역사를 바르게 전하지 않는다면 천사天師님을 어찌 대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수운 대신사님의 제자로서 부끄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가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 동학농민혁명130년이다. 천도교단은 중지를 모아 와룡암 터에 유적표지판을 세울 것을 논의해야 된다. 와룡암터는 와룡암터대로, 현재의 용담정은 용담정대로 그 역사와 가치가 있다. 지난 와룡암 역사가 사라지고 있는 마당에 무슨 유적표지판이냐고 반대의 의견들도 많을 것이다. 더 나아가 현재의 용담정 자리가 지난 원적암과 와룡암 자리였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 용담정 연혁을 역사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현재의 용담정 자리는 지난 용담서사 자리였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용담서사 자리가 지난 원적암과 와룡암 자리였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담서사 자리와 원적암과 와룡암 자리는 분명 다른 장소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끝으로 필자는 와룡암 자리에 유적표지판이 세워지지 않더라도 이렇게 글을 써서 역사에 남길 생각이다. 와룡암 터와 용담서사 터는 현재 용담정으로 대변 되지만 두 성지는 후천 5만년 길이 전해질 다시개벽 즉 주문呪文과 영부靈符는 물론 시천주侍天主·인시천人是天·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압축되는 동학의 진리를 수운 대신사께서 한울님께 받으셨고, 또한 대각을 이루신 곳이다. 그만큼 현재 용담정과 과거 와룡암은 세계인류역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번 글이 ‘와룡암 터를 알리는 공개적인 두 번째 글이다.’는 것을 밝히면서 용담정 순례에 대한 글을 마친다. 4. 수운 최제우 대신사 십상도(일생을 열 개의 그림으로 묘사) <끝> 글 : 이윤영(천도교연원회 직접도훈,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장) 그림 : 박홍규 작 2015년, 송암 이윤영 저술 동학이야기 ‘만고풍상겪은손 삽화’
-
[칼럼] 동학기행-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 동학·천도교 제1성지 용담정 순례(1)1. 용담정龍潭亭 가는 길 2. 용담정, 그리고 와룡암과 용담서사 3. 와룡암터에 유적표지판 하나라도 세우자 4. 수운 최제우 대신사 십상도(일생을 열 개의 그림으로 묘사) 올해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130년이다. 이러한 뜻 깊은 기념의 해를 맞이하여, 동학·천도교 교단 내 외에서도 여러 가지 기념행사 준비는 물론 이미 진행 중인 사업들도 있다. 필자는 포덕165(2024)년 7월 13일부터 개최되는 천도교연원회 하계수련에 참여하여, 첫날 용담정 순례에 나섰다. 순례 도중 사진촬영과 휴대폰 메모장에 글을 남겨, 이곳 용담정에 답사오시는 분들을 위해 글과 사진을 공개하기로 하였다. 또한 용담정 연혁을 솔직하게 정리하여 동학·천도교를 연구하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고자 한다. 1. 용담정龍潭亭 가는 길 용담정은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용담정길135(가정리 산63-1) 구미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용담정 가는 길은, 자동차로 용담정 주차장에 도착하기 전前 오른쪽 아랫길에 「동학교육수련원」을 지나면 용담정 주차장 앞에 용담정 첫 관문인 포덕문布德門이 나온다. 포덕문은 고풍과 현대풍이 조화를 이루는 특이한 담장식 문이다. 포덕문에 들어서면 왼쪽 대각선 위치에 수운 최제우 대신사 동상 「大神師水雲崔濟愚像(대신사 수운 최제우상)」이 보인다. 포덕문에서 동상까지의 거리는 대략 30보步이다. 수운 대신사 동상에서 약간 오르막길 215보步 정도 걸어가면 오른쪽 방향에 종교시설인 포덕관布德館과 진성관眞誠館이 보인다. 포덕관에서 77보 걸어 들어가면 용담수도원龍潭修道院에 도착한다. 그리고 포덕관에서 용담정 쪽으로 30보정도 걸어 올라가면 성화문聖化門이 나온다. 성화문聖化門에서 185보 걸어 올라가면 오른쪽에 약 50여평의 평지가 있다. 이곳이 수운 대신사의 또 다른 득도터라 알려진 원적암圓寂庵터 즉 와룡암臥龍庵터가 보인다. 와룡암터에서 70보 걸어 올라가면 용담정 앞 용담교龍潭橋가 나온다. 용담교에서 37보, 교량과 계단 등을 걸어 올라가면 「경주 구미산龜尾山 자락에 위치한 용담정龍潭亭」이 나온다. 용담정 첫 관문 포덕문에서 직선 코스로, 사람에 따라 약500보~550보步를 걸어 올라가면 용담정에 도착한다. 「포덕문을 지나 성화문을 거쳐 와룡암터를 지나고 용담교까지 약간 오르막길을 걷다보면 그 길 바로 좌측에 깊은 계곡물이 흐른다. 용담정 위쪽 용추각龍湫閣에서 폭포를 이루며 쏟아지는 물줄기가 용치골 즉 용추계곡으로 이어지며, 물 흐는 소리와 계곡바람소리가 하늘의 소리처럼 신비롭게 들려온다. 용담교를 건너 올라가면 용담정 앞 깊숙한 계곡에서 마치 와룡臥龍 즉 누워 때를 기다리는 용처럼 소리 없이 조용히 흐른다. 구미산 용담정 가는 길의 풍경은 사계절에 따라 펼쳐지는 느낌이 다르게 다가온다. 그 길은 세속의 탁한 기운을 씻어주고, 신선神仙 즉 신성의 불멸의 존재가 되어 여유롭게 노닐만한 그야말로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 할만하다.」 용담정에서 약간 위쪽으로 우측방향에 용담약수터가 있다. 수운 대신사께서 득도 전후 청수를 봉전하고 기도 및 수도 하실 때에 이곳 물을 사용하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용담정 옆 오른쪽 방향 위쪽에 용추각龍湫閣이 있다. 용추각에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부친인 근암 최옥 선생의 문집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약수터 아래쪽에서 용추각을 바라보면 쏟아지는 물줄기 위에 환상처럼 보이는 용추각의 모습이 그야말로 절경을 이룬다. 글, 사진 이윤영(천도교연원회 직접도훈,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장)
-
[칼럼] 고부봉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지난 5월 말일에는 국회에서 고부봉기와 관련된 학술대회가 동학학회의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정읍시를 비롯한 많은 관계자와 22대 국회를 처음 입성한 국회의원들도 다수 참석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발표를 맡아준 교수들은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진지하고 성의있게 준비해서 학술대회의 의의를 더욱 높여 주었고 토론자들 역시 깊이 있는 토론에 임해 주었다. 과연 고부봉기는 1894년 동학혁명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는 결론 지을 수는 없었지만 많은 문제 제기를 통해 풍성한 연구과제를 던져 주기에 충분했다. 동학혁명은 전북 고부군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에서 130년 전 전봉준 장군의 사자후와 함께 조병갑의 학정에 시달리던 고부 일대 동학교도와 군민이 들고 일어남으로써 시작되었다. 누구나 다 아는 상식임에도 언제부터인가 고부봉기를 동학혁명과 결부시키면 마치 크나큰 실수를 한 것처럼 또는 고부봉기는 동학혁명의 금기어처럼 인식되어 버렸다. 실제로 올해 고부봉기 기념식에서 축사한 필자는 많은 곳에서 비난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분명히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에는 1894년 3월부터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명명했는데 왜 고부봉기를 기점으로 잡느냐는 것이 주였다. 특별히 무장기포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냉랭한 눈초리를 느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필자를 실망하게 한 것은 열린 시각과 마음을 가져야 하는 학계의 연구자들이 이상할 정도로 자신들의 의견을 닫아버리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에 그들의 행위가 곡학아세(曲學阿世)였다면 반드시 심판받게 될 것이다. 과연 고부봉기 없이 동학혁명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에서 학술대회는 출발했다. 특별히 학술대회의 의도는 새로운 연구자들을 통한 연구로 설정했다. 어차피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 없는 상황에서 기존의 연구자들에게 일임하면 또 그 나물에 그 밥이 될 것을 우려해 가급적 고부봉기를 주요 연구과제로 삼지 않았던 신진 연구자들에게 발표 기회를 주고 토론은 대신 기존 고부봉기를 주제로 연구를 많이 한 분들에게 맡기기로 기획했었다. 물론 처음의 의도대로 되지 않아서 곡절 끝에 기존 연구자와 적절히 안배되는 발표 토론자들로 구성되었지만, 학술대회의 성과는 나름 꽤 있었다고 자평한다. 기조 강연을 맡아주신 전 독립기념관 관장이신 김삼웅 선생님은 산모의 고통 없이 출생하는 아이가 없듯이 동학혁명은 고부봉기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셨고 이어진 주제 발표에서는 한결같이 고부봉기의 중요성이 거론되었다. 특히 사발통문의 해석을 놓고 고부봉기의 도화선이 된 사발통문의 계획은 동학교단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한 거사였으므로 동학혁명은 고부봉기가 시작이었다. 전봉준 자신도 공초에서 고부봉기를 명백히 고부기포라고 주장함으로써 동학의 조직이 처음부터 참여했으므로 봉기가 아니라 고부기포라고 써야 맞는 것이다. 백산대회의 격문이 갑오정월일(甲午正月日)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고부에서의 의거를 동학군의 첫 출발임을 밝히는 것이다. 심지어 학계 정설이 되고 있는 무장기포를 문건 해석을 통해서 그것은 하나의 선언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주장과 무장기포설을 최초로 주장한 신용하 교수의 연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우리 학계의 문제까지 학술대회에서 나온 내용들 모두 음미해 보아야 하고 또 앞으로의 과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동안 무장기포설을 줄기차게 주장해 오던 학자 한 분은 대회 자료집을 본 뒤에 자신의 연구에서 부족했던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학술대회였다고 고백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왜 우리들의 상식과 어긋나는 동학혁명사가 정설이 되고 있는가. 이것은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적시된 시점 때문이다. 갑오년 3월부터 참여한 동학군들이 동학혁명에 참여자라고 하는 바람에 갑오년 1월에 있었던 고부에서의 의거에 참여한 분들은 소외되어 버렸다. 소외된 분들은 고부봉기 참여자들만이 아니다. 정작 동학혁명이 대신사님이 그린 사람이 하늘과 같이 대접받는 지상천국의 세상을 추구하며 오랜 질곡의 시간을 보낸 분들 모두가 혁명의 단초를 제공해 주신 분들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시점을 못 박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경북 영덕·영해 지방에서 최초로 교조신원운동이 발생한 1871년의 영해의거에서부터 공주, 삼례, 서울 광화문, 보은 장내리 등의 역사가 소외되어서는 안 되는 사건들이다. 특히 특별법에 3월부터라고 명명해 놨음에도 갑오년 3월 10일 무렵에 기포한 금산지역의 동학혁명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이들 지역의 동학혁명을 기억하고 선양하고자 하는 분들 모두 어쩌면 동학혁명 기념식이 슬픈 기념일이 되고 있을 것이다. 비록 학술대회에서는 고부지역의 의거만을 주제로 담았지만, 여력이 닿는다면 남은 소외된 지역도 모두 연구의 과제가 되었으면 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도를 깨달은 그들은 비로소 세상의 주인이 ‘나’ 자신이라는 근대적 자각을 이룬 최초의 사건이 동학혁명이기에 그 자랑스러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 교단이라고 본다. 천도교단이야 동학혁명에 관해서 특정한 일자를 주장하거나 특정 지역을 편들 필요는 없지만, 특별히 소외된 지역과 사건에 대해서는 따뜻한 애정의 시선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특별히 동학혁명 관련 행사나 기념식 등에 관심을 가져 주고 참석해 주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모두가 한울님이라면 그 모두를 아우르는 것은 우리 도뿐이기 때문이다. 년암 임형진(동서울 교구, 경희대)
-
[칼럼] 일상 속에서 진리를 깨닫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지난 6월에는 가뭄에 무더운 날씨가 연이어 그 기록을 깼다. 낮에는 몹시 덥고 밤에는 쌀쌀한 사막화 현상이 말뿐인 것이 아니라, 피부로 느껴지고 있다. 이러다가 사람은 물론 지구생명들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7월초 다시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필자는 습관적인 걷기(하루 만보 걷기)로,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우산은 썼지만 바람결에 빗물이 바지를 적시고 신발까지 척척해졌다. 이렇게 비 오는 거리를 걸으니까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간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벌써 해마다 한두 개 치아에 문제가 생겨 임플란트 시술을 하였다. 그리고 배부르게 먹으면 소화도 잘 되지 않는다. 시력도 약해지고 귀에 이명까지 생겨 약간은 고통스럽다. 그런데 말이다. 이러한 노화현상이 조금씩 늙어가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긍정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울님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또한 아프지도, 병에 걸리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한울님의 자연적인 현상 즉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변화로 생각해야 한다. 내가 지난날 귀에서 심하게 소리가 나는 이명현상으로 고통스러워 할 때, 갑자기 한울님의 말씀이 들리는 듯 했다. “귀에서 나는 소리도 한울님 소리니라” 그래, ‘이명도 내 안에서 들리는 한울님 소리야’ 하는 생각을 하게 되자, 정신이 안정되고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이명도 신경 쓰지 않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또 며칠 전 겪은 이야기다. 자려고 침대에 눕자 내 왼쪽 어금니 하나가 송곳으로 쑤시듯 아파왔다. 치통의 응급약도 없고 손으로 턱을 움켜쥐고 머리를 침대에 박고 고통을 참으며 신음소리를 연발했다. 그런데 순간 스쳐지나가는 한울님 말씀이 들리는 듯 했다. “치통도 한울님이다. 감사하게 생각하라” 그 말씀을 그대로 인정했더니 신통하게 치통이 사라졌다. 물론 다음날 치과에 가서 아까운 치아 하나를 제거 했다. 그런데 한울님은 어디에 계실까? 내 생각은 한울님은 마음에 계시고 몸에 모셔져 있다. 바로 주문 삼칠자에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주문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至氣今至願爲大 降 지기금지원위대 강 侍 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시 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주문(呪文) 삼칠자(三七字)에 대해서 “천지(天地)의 무궁한 수(數)와 도(道)의 무극(無極)한 이치가 다 이글에 실여있다.”라고 수운 최제우 스승님께서 논학문(論學文_동학론(東學論)에 밝히셨다. 나는 천도교(동학)를 시작하면서 거의 매일 빼먹지 않고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수도(修道)를 해왔다. 그리고 그 도통이라는 것과 깨달음이라는 것을 가끔은 화두로 여기며 수련을 했다. 그러다가 지난해(2023) 1월 어느 날 새벽수련을 할 때 내 마음에 상쾌한 진리가 번갯불처럼 깨침을 주었다. 「道(도), 사람은 누구나 도통이 이루어져 있고 깨달아져 있다. 다만 그것을 모를 뿐이다. 그 진리를 아는 것이 진정한 도통이요, 깨달음이다. 수도수련은 그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요, 단련이다. 원래 도가 통해있고, 진리가 깨달아져 있다는 것은 주문 삼칠자에 담겨있다.」 진리에 대한 도통과 깨달음은 물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성인이요 성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해월 최시형 스승님은 독공(篤工)법설에서 성인(聖人)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씀하였다. “내가 젊었을 때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옛날 성현(聖賢)은 뜻이 특별히 남다른 표준이 있으리라 하였다. 그런데 한번 수운 대선생님을 뵈옵고 마음공부를 한 뒤부터는, 비로소 별다른 사람이 아니요 다만 마음을 정(定)하고 정하지 못하는데 있는 줄 알았다. 요순(堯舜)의 일을 행하고 공맹(孔孟)의 마음을 쓰면 누가 요순이 아니며 누가 공맹이 아니겠는가. 여러분은 내 이 말을 터득하여 스스로 굳세게 하여 쉬지 않는 것이 옳겠다.” 해월 스승님은 부지런히 힘써 공부하고 수련하면 누구나 성인(聖人)이라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하였다. 의암 손병희 스승님은 성범설(聖凡設)에서,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에 대하여 본래 구별이 없다고 말씀하였다. “한 나무에 꽃이 피니 꽃도 같은 색깔이요, 한 꼭지에 열매가 맺혔으니 열매 또한 같은 맛이라. 성품은 본래 한 근원이요, 마음은 본래 한 하늘이요, 법은 본래 한 체이니 어찌 성인과 범인이 있으리오.” 사람은 누구나 도통이 이루어져 있고 깨달아져 있다. 그리고 모두가 성인이고 성현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실천을 안 할 뿐이다. 그 실천하는 진리와 방법에 대해 해월 스승님은 대인접물(待人接物) 법설에서 상세히 밝히셨다. 주문 수행을 통해 원래 갖추어져 있던 성인을 되찾고, 도통과 깨달음이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 그대로 실천하면 될 일이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 물물천사사천(物物天事事天)이다. 한울님과 나는 둘 아닌 하나라는 생각에, ‘한울님과 일체화되면 늙지도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병에 걸리지도 않는다.’는 수운 스승님의 말씀이 관연 옳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뿐이겠는가 무한한 행복이 샘솟듯, 꽃이 피어나듯, 멈출 줄 모르고 시들 줄 모르고 영세무궁할 것이다. 다만 의암 스승님 말씀대로 이신환성(以身煥性) 즉 몸을 성령으로 개벽시킨 사람만이 이 진리를 알 것이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신환성은 엄청 힘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육신관념을 한울님의 성령관념으로 바꾸면 된다. 쉽게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 속에서 먹는 밥이, 밥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생각을 바꾸는 것과 같다. 밥이 하늘이다. 사람이 하늘이다. 우주만물이 하늘이다. 왜? 시천주(侍天主)이니까. 우리는 일상 속에서 진리를 깨닫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자, 성현이고 한울님들이다. 글_송암 이윤영(천도교 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
[칼럼] 상상칼럼-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한 수운대신사!바캉스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기후변화로 6월부터 무더위기 계속되고 있는 요즈음은 바캉스 계절이 따로 없다. 연속된 휴일이 있는 날이면 모두들 산으로 바다로 또는 해외로 떠난다. 코로나 시기 3년간 여행을 떠나지 못한 한풀이라도 하는 듯이 모든 사람들이 술렁인다. 얼마 전에 나도 두바이를 다녀왔다. 두바이하면 연상되는 단어들이 있다. 아랍에미레이트, 사막, 중동,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 등등.... 두바이는 아랍에미레이트의 7개 부족국가 중 하나이다. 세계 최대높이의 163층 건물인 828미터의 부르즈할리파, 세계최대의 두바이 몰과 분수쇼, 야자수 모양의 인공섬인 팜 주메이라, 버즈알아랍 건물 등 두바이를 상징하는 건물 등으로 7개의 부족국가 중 두바이가 전 세계에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두바이보다는 아부다비에 더욱 관심이 쏠렸다. 아부다비는 생소한 부족국가이름이었지만 아랍에미레이트의 수도이며 7개의 부족국가 중 인구와 석유매장량이 최대인 도시이다. 대통령도 아부다비에서만 나오고 있다. 아부다비 도시를 들어가는 순간 눈에 띄는 장면은 바로 가로수들이다. 엄청 큰 나무들이 도저히 사막이라고는 상상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각각 수도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이 수도는 시간이 되면 저절로 물이 나와서 나무들에게 물을 공급한다고 한다. 아부다비는 석유를 팔아서 바닷물을 정제하여 식수 혹은 생활용수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석유값보다는 물값이 더 비싼 나라이다. 나무들을 이렇게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기에 아름드리 나무들을 가로수로 볼 수 있었다. 사막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또 한가지 인상깊었던 것은 아부다비의 루브르국립박물관이었다. 아부다비 루브르국립박물관은 2017년 11월 8일에 개관하였다. 2007년 10월 프랑스 정부와 30년 협약을 맺어 프랑스 의회로부터 박물관 설립허가를 받아 아부다비 문화관광청이 운영하고 있다. 아부다비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미화 5억 2천 5백만 달러(7,247억 6,250만원) 상당을 지불하여 “루브르” 이름 사용 허가를 받고, 추가로 미화 7억 4천 7백만 달러(1조 312억 3,350만원)를 지불하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소장품 대여, 특별전, 관리 교육 관련 협약을 맺었다. 아부다비 관광객들은 아부다비 루브르국립박물관을 꼭 관람하고 있으며 두바이 관광객들도 물론 관람하러 오고 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따로 있다. 천도교의 포덕 교화사업을 예술을 통해서 하자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감성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예술이다. 음악, 미술, 무용, 연극 등 예술분야는 고대부터 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왔다. 가까운 예로 예술을 활용하여 종교 교화사업을 한 예를 들어보자. 16세기 로마교황청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영국은 성공회가 등장하고 프랑스에서는 칼뱅파가 나타나게 된다. 위기상황에 처한 교황청은 대책회의를 마련하게 되는데 신교로 이탈하는 신자들을 그림으로 막아보려고 하였다. 미술을 이용하여 교세의 유지와 확장을 꾀하기로 하였다. 교황청은 성서에 나오는 그림들이 신자들에게 아주 좋은 포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 시대를 통하여 경험하였기 때문에 미술이 신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고 있었다. 교황청의 진보적인 생각으로 미술계에서는 바로크라는 새로운 시대를 도래하게 만들었으며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삼손과 데릴라>는 이러한 배경위에서 탄생하였다. 루벤서는 구약성서의 사사기에 등장하는 삼손의 이야기를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극적으로 구성하였다.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루벤스의 그림들은 가톨릭 교도들에게 신앙심을 느끼고 감동을 주었다. 루벤스는 교황청과 가톨릭 국가의 절대적인 후원으로 바로크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종교와 건축물과의 관계 또한 밀접하다. 해외여행을 가면 꼭 방문하는 곳이 있다. 밀라노 대성당, 두오모 성당, 스페인성당 등 바로 그 나라의 성당들이다. 성당의 화려함과 웅장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며 건축물이 주는 웅장함과 엄숙함은 관람객들에게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100년 이상 걸려서 완공된 성당은 후손들에게 문화적인 가치를 유산으로 물려주고 있으며 현재에도 짓고 있는 미완성인 성당들을 보러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는 수운대신사 탄신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0주년을 맞이하여 천도교단에서도 뭔가 후대까지 남길 수 있는 예술적인 그 무언가를 했으면 좋겠다. 수운 대신사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용담정을 먼저 생각해보자. 용담정에 갈 때마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오는가? 내가 용담정을 처음 찾는 방문객이라고 생각하고 상상해보자. 먼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을 것이다. 안내자가 없더라도 스스로 용담정을 알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포덕문을 들어서면서 우리는 수운대신사 동상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길을 따라 올라오면 아무런 안내 표시가 없다. 이 길이 어떤 길인지 안내가 되면 좋겠다. 길 따라 올라오면서 대신사님 관련 조각상이나 혹은 경전에 나오는 내용에 맞추어 예술작품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길 따라 걷는 사람들에게 예술품으로 동학 천도교를 알려주면 좋지 않을까? 성화문부터 용담정까지는 대신사님의 출생과 고행, 득도과정, 득도순간, 순교까지 일생을 그림, 벽화, 조각품들도 길을 따라 안내하면 좋겠다. 용담정까지 가는 길 한편은 낭떠러지이다. 낭떠러지 길을 막고 그 쪽을 예술작품으로 보완하면 일거양득이 아닐까? 그리고 정원을 아름답게 꾸몄으면 좋겠다. 용담정을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수 있도록 경관을 꾸미면 좋겠다. 용담정을 방문하였을 때 썰렁한 정원을 보고 허술한 경관을 보면서 마음 아파한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제는 용담정을 자주 찾아 가고 싶도록 정이 가는 용담정, 예술이 숨 쉬는 용담정이 되면 좋겠다. 우리 후학들이 지금의 우리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 유산을 만들어서 교화하고 포덕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면 좋겠다.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교단이 업그레이드되는 길,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이렇게 생각해 본다. 글_숙현당 정정숙(근현대사미술관 <담다> 관장, 천도교선도사)
-
[칼럼] 내가 만든 신흥종교가장 신기하고 의아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이성을 만나 평생을 같이 산다는 것이다. 한 종교만을 갖고 사는 사람도 그렇다. 이해가 안 된다. 사회의 집단 최면에 걸린 결과로 보인다. 집단성은 심적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에 이성을 마비 시킨다. 하늘 기운과의 접속을 차단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면 솔깃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평생을 자기가 태어난 지역에서만 살다 가는 사람이 있다면? 평생을 한 가지 음식만 먹고 산다고 하면? 딱 한 가지 옷만 입고 산다면? 그걸 강요하는 종교가 있다면? 나란히 비교될 수 있는 소재들이다. 내가 심취했던 종교는 다섯 개나 된다. 이제 다 심드렁하다. 심드렁하다기보다 모두가 소중하되 근본은 같아 보이고 차별성이 있다고 한들 시대와 지역 변수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자기 종교의 특정 교리를 들먹이며 신관과 우주관, 인간관과 자연관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기에 좀 딱하다. 그래서 나는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신흥종교를 하나 만들었다. 내가 해 오던 여러 수행 방편의 진수가 담긴 셈이다. 나는 그게 신흥종교인 줄 모르고 지냈는데 존경하는 선배가 그게 바로 신흥종교라고 일러 줘서 이름까지 붙이게 됐다. ‘박장대소교’다. 교리와 경전과 성소가 없는 종교다. 교주도 없다. 이 글의 제목이 ‘내가 만든 신흥종교’지만 스스로 교주라고 여긴 적은 없다. 어느 순간, 딱 네 곳의 인상 깊은 기억이 한 순간에 겹쳐 왔고 그걸 시연한 게 계기였다. 재작년 봄이었다. 터박이 씨앗을 연구하고 수집하는 단체에서 나더러 명상 수련을 지도해 달라고 했던 때었다. 전혀 계획에 없던 제안이었다. 나는 딱 5초 만에 강의를 끝냈다. “쳇! 자기네 황토집에서 재워준다면서 배 불리 먹이더니 강의 들으라는 것이었군.”하는 눈치가 역력해서였다. 이 5초짜리 강의가 ‘박장대소교’의 출현이 될 줄이야! 짧디짧은 강의는 폭소를 자아냈고 더 해 달라고 해서 5분을 더 했고 이어서 1시간이나 강의를 하게 되었다. 박장대소교의 교리와 의례와 전교가 완성되는 시간이었다. 내가 한 5초 명상 강의는 이랬다. 말과 몸짓으로 나를 따라 하는 것이었다. 오른쪽 어깨와 왼쪽 어깨를 교대로 크게 들썩이며 “이래도 좋아. 저래도 좋아”라고 했다. 그리고 양 무릎을 벌떡 세워 일어나 두 팔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다~~ 좋아. 아이구 좋아라. 으하하하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박장대소’라는 농장을 운영하는 친구, 만날 때마다 ‘아이구~ 반가워요’라는 선배, 몸짓을 가르쳐 준 어느 신부님 등의 기억이 결합 된 것이다. ‘박장대소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기성 종교인에게 양다리 갈등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헌금도 없다. 성직자도 없다. 모든 대상을 행해서 아이구 반가워 하하하. 아이구 맛있다 하하하. 아이구 좋아라 하하하. 아이구 몬 살아 하하하. 아이구 내 팔자야 으하하하하라고 하면 된다. 약간 과장스러운 몸짓을 곁들일 것을 권하다. 이게 다다. 근데 좀 귀 티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내 얼굴과 입과 팔다리에 완전한 자기 주권이 실현된 종교다. 마음 자기 결정권이라는 게 있다면 그걸 행사하는 종교다. 멋지지 않은가? 누구나 스스로 바라지 않는다. 짜증이나 불행이나 화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다. 원하지 않는데도 습관과 기억에 얽매여 그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신의 참 바람을 몸과 마음과 입으로 시도 때도 없이 성취해 가는 종교다. 박장대소하면서 웃음을 전염시키는 종교다. 이 정도라면 세상 모든 종교의 통합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미라고 해도 될 것이다. 교인이 되시라. 절차도 의례도 없다. 위에 나온 걸 참고로 자기만의 교리와 의례를 적절하게 만들면 된다. 글_목암 전희식(진주교구. 한울연대 공동대표)
-
[칼럼]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수운대신사님께서 권학가에서 시운과 관련하여 말씀하시길 “시운을 의논해도 일성일쇠 아닐런가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 하였던가”라고 하셨다. 과거 창도기부터 동학혁명, 삼일운동을 거치면서 동덕님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따라 동귀일체를 하면서 국가와 교회에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하였다. 선배 동덕님들은 궁을을 가슴에 품고 주문의 힘으로 동학혁명과 삼일 운동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인다. 그 당시 사회적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였지만 포덕천하, 보국안민, 광제창생, 지상천국 건설로 가는 그야말로 신명나는 동학군, 천도교인의 삶이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 교단은 어떠한가. 과거에 비해 쇠운이 지극해 보이고 침체해 있다. 성운이 온다고 하지 마는 누가 천도교를 성운의 물줄기로 돌려놓을 것인가? 누가 모든 교인들이 동귀일체 하도록 할 수 있는가? 누구는 바로 우리들이어야 한다.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성운이 오는가? 마치 시험을 치러야 할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 준비를 잘 해야 하는데 게으름 피우고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없듯이 우리도 성운으로 가는 노력을 정성스럽게 하고 동귀일체를 한다면 쇠운을 성운의 물줄기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권학가는 수운대신사님께서 포덕 2년 말에서 포덕 3년 초 사이에 전라도 은적암에서 저술하신 것으로 후학들이 명심해야할 중요한 교훈의 말씀들을 하시면서 흠재훈사하라고 하셨다. 몇 가지를 더 살펴보면 먼저 사람은 경천 순천해야한다라고 하셨다. “효박한 이 세상에 불고천명 하단말가 장평갱졸 많은 사람 한울님을 우러러서 조화중에 생겼으니 은덕은 고사하고 근본조차 잊을소냐 가련한 세상사람 각자위심 하단말가 경천순천 하였어라.” 우리의 문제는 바로 경천순천하여 동귀일체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각자위심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각자위심을 하면 에너지가 분산되고 갈등이 심화되어 될 일도 안된다. “만고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창건하니 이도역시 시운이라 일일시시 먹는 음식 성경이자 지켜내어 한울님을 공경하면 자아시 있던 신병 물약자효 아닐런가 가중차제 우환없어 일년 삼백 육십일을 일조같이 지내나니 천우신조 아닐런가.” 우리가 매일 매일 먹는 음식도 지극한 정성과 공경으로 지켜내어 한울님을 공경하면 물약자효되고 집안도 편안하게 되는데 이것 또한 한울님의 도움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화세상 사람들아 세세명찰하온 후에 잊지 말고 지켜내어 성지우성 공경해서 한울님만 생각하소.”라고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여 한울님만 생각하고 한울님을 성지우성으로 공경하라는 말씀을 여러 번 강조하셨다. 권학가 마지막 절에서는 “어진사람 만나거던 시운시변 의논하고 백년신세 말하거던 이글 주고 결의해서 붕우유신 하여보세.”라고 하셨다. 대인 관계의 중요한 말씀으로 천도교인으로서, 동학을 하는 후학으로서 마땅히 지켜 나가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어진사람 만나거던 세상 돌아가는 일 이야기하고 인생을 말하거던 이글을 주고 결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권학가에는 수운대신사님께서 후학들이 실행해야할 중요한 말씀들을 명교하셨는데, 이러한 말씀들을 새기고 또 새겨서 실행에 옮겨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단의 집행부가 바뀔 때마다 천도교의 발전 방향을 토론하고 수없이 많은 질문과 제안들이 나온 것을 보아왔다. 그러나 실행이 잘 되지 않아서인지 항상 교단은 제자리걸음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교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특별한 해답이 별도로 있지 않다. 경전 속에 모든 해답이 있다. 당연히 경전공부를 열심히 하여 문제의 해답을 찾아내어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리고 침체된 교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쇠운을 종식하고 동귀일체하는 성운의 길로 나아갔으면 한다. 글, 이암 정의필(울산교구, 울산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