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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산 교수, 사진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제공 @최인경
지난 해 『주해 동경대전』 책을 내셨습니다. 동학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쓰셨는데 이번 책이 나오게 된 배경과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이번 『주해 동경대전』의 의미는, 주해를 새롭게 한 것, 한글판을 낸 것, 동경대전의 변천사를 바라보는 것, 그것을 자료화 시키는 것 이렇게 네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동경대전은 한문에 대해 식견을 가진 사람이나 제대로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한글판 동경대전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이 책의 1부는 주해서를 쓰고 2부는 한글판 동경대전을 썼습니다. 한글판의 목적은 우리나라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왔거든요. 이 책이 읽는 사람에게 얼만큼 도달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1994년 동경대전 주해를 처음 냈습니다. 그 이후 내가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하다 보니 내가 저지른 오류가 그 안에 많더군요. 그래서 한두 번 더 개정판을 냈습니다. 몇 년 전, 서울동학-최보따리인문포럼에서 동경대전 강의를 하며 지금까지 했던 동경대전을 다시 번역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의 목적은 그간 동경대전이 1880년 인제에서부터 오늘까지 지속적으로 나왔는데 수많은 판이 나왔습니다. 목판본이 20세기 전에 나왔어요. 20세기에 들어와 의암성사 시절부터 활자본이 나오기 시작했고요. 그것이 변하면서 오늘의 천도교 경전 안에 있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된 겁니다. 그동안 지금까지의 판본은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검토해서 동경대전이 체제나 내용이 어떻게 변모되었는지도 고찰해야 할 필요를 느꼈어요. 그리고 동경대전의 체제와 내용, 그리고 동경대전 초판본에 대한 논문을 엮어서 자료집으로 문헌연구의 자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활자본, 그것이 1908년에 나오는데 그것까지 자료로써 실어 좀 두꺼운 책을 냈습니다.
나도 이제 나이가 칠십 대 중반이 되었는데, 동경대전 주해를 또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내 생에 마지막이지 않을까, 그런 각오로 낸 책입니다.
최근 도올 김용옥 선생의 책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에서도 밝히셨듯 을묘천서-천주실의 논란에 대해서도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김용옥 선생의 실수입니다. 결코 천주실의가 아닙니다. 이번 책 머리말에도 썼지만, 김용옥 선생의 주장은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는 것인데요, 천도교 시대로 들어가며 천도교인들이 교조 최제우를 신비화 시키면서 을묘천서라고 했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1863년 대신사를 체포하러 온 선전관이 올린 장궤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서를 받았다고요. <고종 실록>에 나옵니다. 김용옥 선생은 그것을 못 봤어요.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만약 수운 대신사께서 천주실의를 받고 을묘천서라고 말했다면 수운 대신사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사이비 교주로 만드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해야 할 말이죠. 만약 천주실의라면 동경대전에 그 말이 한 마디라도 나와야 할 텐데 나오지 않습니다. 천서와 같은 신비주의가 수운 대신사의 글에 없다고 하는데, 포덕문, 논학문에 종교체험에 대한 신비한 말들이 수없이 나옵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당연히 을묘천서는 천주실의가 아닙니다. 수운 대신사 시절 200년 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책인데 그것을 새로운 책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곤란한 문제입니다.
천도교인으로 평생 살아오셨고, 학자로, 신앙인으로 살아오셨는데 신앙인으로서 동학을 연구하시게 된 계기, 그리고 실천적 학문으로서의 동학은 선생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천도교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서른두 살에 천도교에 입교했어요. 그때도 사람이 신통치 않아서 천도교의 진수를 잘 모릅니다. 그러다 나이 서른다섯 살에 화악산 수도원을 찾아갑니다. 거기서 일주일간 수련을 했는데, 이전과 다르다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젊은 교수였는데, 지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천도교에 대해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던 천도교가 아니더라,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을 했죠. 그런데 그 지인이 그럼 주문을 가지고 학위논문을 써보라는 겁니다. 용담유사는 내가 공부하는 가사문학 작품이기도 하니, 국문학 박사논문으로 용담유사를 가지고 썼어요. 그때부터 방학만 되면 수도원에 들어가 수련을 하면서 용담유사와 동학의 교리에 대한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동경대전에서 내가 읽어내지 못한 것들을 읽어낼 수 있게 되더군요. 그렇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머릿속에 들어오더군요. 수련의 과정에서 내가 마음 속에 불을 지피고 떠올리며 깨달은 것들이 바탕이 되어 학위논문도 쓰고 동경대전 주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동경대전은 그렇게 나의 수련과 만나서 오늘의 동경대전 주해가 된 거죠.
일찍이 등단하셔서 가슴을 울리는 시도 많이 쓰셨습니다. 선생님 세대는 그야말로 한과 눈물의 수난을 온전히 다 경험한 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브레히트의 말처럼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는 어떻게 건너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는 서정시를 비겁자가 쓰는 것과 같이 생각했어요. 참여시와 순수시로 나누기도 했고요.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시의 본령은 아무리 시대가 어려워도 어려움 속에서 민중의 주먹을 쥐게 하는 것보다 민중의 가슴을 녹이는 서정이 더 중요하다고요. 나는 그때도 서정시를 썼고 지금도 서정시를 쓰는데, 나의 서정이 민중의 가슴을 녹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그만큼 좋은 시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70년대와 80년대를 견디면서 그렇게 시를 써왔습니다. 나는 그 시기를 건너오면서 시는 서정의 본질이라고 생각했고 아직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브레히트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윤석산 교수, 사진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제공 @최인경
동학은 어느 시대에나 희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동학-천도교가 그 역할을 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동학-천도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연구자로서 신앙인으로서 또 시인으로서 선생님은 사람이 한울인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상상하시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신앙인으로서, 동학연구자로서, 시인으로서 세 분야에서 다 신통치가 않아요. 박인환이라는 시인은 죽으나 사나 ‘목마와 숙녀’라는 시로 독자들에게 영원히 남아요. 나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시인으로서 내 소임을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한 사람의 독자라도 좋으니 내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것은 사람이 ‘한울’이라는 말과 달라요. 사람이 한울은 사람을 높이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한울님’은 한울님같이 생각하고, 한울님같이 말하고, 한울님같이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충분한 사람입니다. 그게 한울님의 모습니다. 내가 존중받는 것이 아닌 나의 말로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내 행동으로 사람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만들고 내 마음 씀 하나로 세상을 함께 가꿔나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겁니다. 그런 세상이 된다면 이 세상은 오늘날 갈등을 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균형과 조화’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균형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사람이 한울님인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