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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은 힘을 모으는 것, 내 마음을 믿어야죠지난 12월 1일 현도기념식을 마치고 서울교구 여성회에서 박태량 여성회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경로잔치와 봉사활동을 비롯하여 서울교구의 온갖 살림을 도맡아 해온 서울교구 여성회의 이야기와 박태량 여성회장의 신앙생활, 교단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소망을 들어보았다. 서울교구 박태량 여성회장은 인터뷰에서 천도교 신앙의 핵심은 수련에 있다고 말했다. 반갑습니다. 서울교구 박태량 여성회장님 모십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헌신해 오셨는데, 오늘 뜻깊은 현도기념일에 인터뷰하게 되어 더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해 오시고 또 교회를 위해 헌신해 오셨습니다. 서울교구 여성회장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교회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서울교구 여성회가 천도교 여성회본부에 통합됐다가 포덕 124년도에 재결성했습니다. 그때 제가 재무부장을 맡았어요. 그때 당시에 저는 바로 이 앞에서 가게를 하면서 교회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행사가 있을 때마다 청수봉전을 참 많이도 했지요. 남편이 교단에서 오래 일했어요. 관리실에서요. 소암 김경규씨가 제 남편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한평생 교회에서 늙었습니다. 교회 일을 참 열심히 하시던 분이에요. 그 바람에 저도 교회 일을 열심히 하게 되었지요. 교회의 모든 일에 여성회의 손이 닿지 않는 일이 없었을 텐데, 생업을 하시면서 교회 일을 열심히 하기가 참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지금 수운회관 바로 앞인 덕성여대 자리에서 18년 동안 사진 인화, 복사집을 했어요.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이 있었죠. 우리 집이 작업이 많기로 서울 시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집이었어요. 그때는 여기 통계청도 있었거든요. 지금 이 옆에 있는 노인복지관 그 자리가 통계청이었어요. 지금은 대전으로 이사를 갔죠. 덕성여대 평생교육원도 학생이 천 명 가까이 됐어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교회 일에는 정성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참 기쁘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서울교구 여성회 재무부장을 하다가, 본부로 가서는 6년간 조직부장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여성회본부에서 감사를 맡고 있습니다. 서울교구 여성회장직은 2010년부터, 2016년 박징재 회장 역임 기수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13년간 역임하고 계시는데, 보람된 일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몇 가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 여성회에서 경로잔치를 참 오래 해왔지요. 옛날엔 가정 방문도 많이 다니면서 어른들 대접하기도 했고, 봉사활동을 참 많이 했습니다. 불우이웃 돕기도 많이 했지요. 그러다가 최근 코로나가 오면서부터 못하게 되었어요. 그전에는 여성회에서 중심이 되어서 시일식 후 교인분들에게 서울교구 식당에서 직접 식사를 준비하여 밥을 대접해왔습니다. 코로나 이후에는 식사를 못 하게 되니 식당 문을 닫아놓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몇 년 사이에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시게 되었고요. 경로잔치는 우리가 직접 반찬을 만들어서 대접했습니다. 다음 세대들이 좀 이어서 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늘 하던 일이니까 내가 맡은 임무는 다해야죠. 회비만 내고 참여하지 않는 분들도 많고, 그런데 그나마 회비를 내는 회원들도 지금은 많이 줄었어요. 경로잔치를 하면 어른들께서 참 좋아하시거든요. 가정 방문도 좋아하시는데, 지금은 그게 다 멈춰져 버렸어요. 정리하자면, 우리 여성회에서는 경로잔치, 가정 방문 등의 교단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 그리고 바자회, 불우이웃돕기 등을 해마다 하면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청에서 임명장도 받고 상장도 받았어요. 박 회장은 서울교구 여성회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며 액자 속 사진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 사진은 서울교구 성지순례 중 활영한 기념사진이다. 박 회장은 서울교구 여성회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며 액자 속 사진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 사진은 천도교중앙대교당 앞마당에서 열린 일일찻집 및 바자회 사진이다. 박 회장은 서울교구 여성회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며 액자 속 사진에 대해 설명하였다. 회장님의 리더십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께하시는 여성회 동덕님들께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이니까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이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너무 오래 장기 집권을 하고 있으니까요. 하여튼 여태까지 활동은 내가 힘 닿는 데까지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교구 행사에 사람이 많이 왔고, 우리 여성회 많은 회원이 같이 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을 도맡아서 할 사람이 줄어들어서 갈수록 어려워지고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조직이나 사람들이 줄어들고 젊은 세대들은 찾아보기 힘들죠. 마음을 내서 함께하는 일이니 한사람 한사람이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죠. 모든 일은 내가 앞장을 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저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와 주니 고맙죠. 교회 일은 내 몸을 아끼지 말고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돈을 떠나서 내 몸을 불사르고 봉사를 하면 모든 것이 자동으로 따르는 것 같아요. 말씀 들으면서 신앙의 힘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회장님께서는 천도교를 하면서 언제가 제일 좋으셨어요? 내가 처음에는 천도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왔잖아요. 그러다가 교회 일을 하다 보니 전국을 돌아다니게 되었고, 1년에 두 번, 여름과 겨울이면 수련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처음 수련을 하는데, 주문을 외우면서 3일 동안은 제대로 앉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3일이 지나서야 아픈 다리가 싹 나아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수련을 한 200명씩 다녔어요. 그땐 선풍기 같은 것도 없을 때예요. 밥도 된장 국물 한 그릇을 먹어도 참 꿀맛이었어요. 그뿐인가요. 세탁기도 없었어요. 경주에 가면, 계곡물에서 발도 담그고, 세수도 하고 잠잘 때도 한 방에서 다 같이 잤어요. 생각해 보면 경주 용담교구는 수련을 참 많이 합니다. 수련을 많이 하는 교구는 뭔가 다릅니다. 우리 서울교구도 수련을 많이 하면 좋겠습니다.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많지만, 본부에서 지방을 돌아다닐 때, 가서 인사하고 지방 교구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각 교구에서 경과보고를 하는데, 이 교회가 서울에만 있는 게 아니고 지방에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참 기뻤습니다. 처음에 ‘천도교’에 대해 잘 몰랐으니까, 천주교도 아니고 이거 뭐지, 그런 생각도 했어요. 올해 대신사님 출세 200주년을 맞이하며 대교당에서 며칠 동안 다 함께 수련했잖아요. 그때도 참여하셨지요? 대교당에서의 주문 수련은 어떠셨나요? 참 좋았어요. 저는 교회에서 하는 수련은 절대 빠지지 않아요. 시일식도 그렇고요. 평생 그랬어요.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지요. 우리 교회의 목적은 수련에 있는데, 무슨 일을 해도 수련부터 먼저 해야겠더라고요. 제가 서른 몇 살에 교회에 들어왔는데, 지금 나이 팔십을 바라봅니다. 올해 일흔 아홉이에요. 그동안을 돌이켜보면 그렇습니다. 우리 천도교에서는 수련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 일 하시면서 보람도 되고 또 신앙 생활 하시면서 가슴에 품고 있는 스승님 말씀 같은 거 있잖아요. 어떤 말씀이 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남의 흉을 보지 말고 내 마음을 지켜라. 그 말씀입니다. 나는 ‘나의 마음을 잘 지키는 것’ 그것 하나를 품고 살지요. 그런데 신앙생활이라는 게, 평소에 실천이 잘 안될 때가 많잖아요. 그럴 땐 어떻게 하시나요? 사람 때문에 괴로울 때는 내가 남한테 말을 안 합니다. 속으로 계속 삭입니다. 장사를 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는데, 그럴 때면 스스로 마음을 꽃 피우는 거지. 그럴 땐 수련을 하는 거죠. 지금도 수련을 하면 내가 엄청나게 울어요. 속에 쌓인 게 많은가 봐요. 심고 드릴 때 주로 어떤 마음을 품으시나요? 주위에 모든 것이 바른길로 돌아가게 해달라고요. 그리고 가족이 건강하게 해 달라고요. 그것 말고는 없어요. 회장님 자신을 위해서 하시는 기도는요? 나를 위해서는 안 합니다. 지금도 내가 새벽에 일어나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고 그렇게 기도를 2시간 합니다. 자기 전에는 한울님 앞에 앉아서 고합니다. 한울님, 오늘 하루가 다 끝나고 잡니다, 하고요. 그리고 나쁜 일 있으면 좀 잘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또 심고합니다. 아이들에게 크게 나쁜 일 없이 원하는 대로 풀리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요. 그 덕에 손주들도 좋은 대학 다니고 다들 잘 풀렸어요. 내 안에 한울님이 계시고, 한울님이 간섭을 하신다고, 그렇게 느낍니다. 제가 좀 아프기도 했는데, 그때도 한울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늘 심고를 합니다. 회장님께서는 타인을 위해 마음을 모으고 심고를 드리신다고 하셨는데, 회장님 자신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꽃 피워지기를 바라세요? 나는 늘 교회를 위해 심고를 드리는데, 교구는 교구대로 화합이 좀 됐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나와서 같이 화합되면 좋겠고, 서로 위하며 하나가 되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여성회실을 찾은 함형숙 여성회본부 중앙위원(맨 왼쪽)과 박징재 여성회본부 회장(맨 오른쪽) 지금까지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 여성회 회장으로서 오래 봉사를 해오셨습니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교인들이 모여 봉사하고 실천해 오셨던 선하고 강한 에너지가 교단을 이끈 힘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교단에 바라는 점, 그리고 후학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과거에는 대교당에서 행사를 하면 수백 명이 자리를 채워 앉아 대교당 안이 꽉 찼는데 지금은 빈자리가 많아서 안타까워요. 그리고 우리 천도교는 서로 편 가르지 말고 단합이 돼야 해요. 나는 우리 교단이 수련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천도교의 맥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학들이 잘 크려면 윗사람들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큽니다. 이제 누가 그 씨앗이라도 잘 키워가면 좋겠습니다. 기자는 이 인터뷰를 통해 수련의 힘은 어디서 오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하나 더 드렸다. 수련의 힘이 어디서 온다고 보세요? 신앙의 힘은 무엇인가요? 수련은 교회에 힘을 모아주는 거예요. 신앙은? 글쎄요. 내 마음을 믿어야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마음’이라는 말을 오래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심고는 드리지 않는다는 말씀이 떠올라, 서울교구 박태량 여성회장께서 건강하시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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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하얀 혁명>의 작가 김현종을 만나다지난 여름 소설 신인간사를 찾은 소설 <하얀 혁명>을 쓴 김현종 소설가 본지에서 동학 소설 연재를 앞두고 김현종 소설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소설의 집필 계기와 과정, 이 시대 동학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까지 간결하지만 묵직한 이야기가 오래 남았다. 김현종 소설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작가님 반갑습니다. 천도교 신문과 <신인간>에 선생님께서 쓰신 소설 <하얀 혁명>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귀한 작품 기고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작가님께서 그동안 어떤 작품 활동을 하셨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천도교 인터넷신문 독자 여러분, 저는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에 단편소설 「이각형」으로 등단했고 동 문예지에 장편 대하소설 『아버지의 나라』를 8년간 연재하기도 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소설집 『보다 보이다』, 장편소설 『천살의 시대』를 출간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소개가 될까요? 작가님께서 본지에 연재하실 소설 <하얀 혁명>은 어떤 계기로 쓰셨는지 궁금합니다. 동학혁명이라 하면 흔히 남도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 항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독서 활동과 문헌 연구, 현장답사를 통해 밝혀낸 바에 따르면, 동학혁명은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 일어난 항쟁이 아니라 전국 모든 지방에서 봉기한 민족적 저항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거병한 경기 동학군의 활약상과 유혈 투쟁은 다른 지역에서 봉기한 동학군 못지않음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 왜곡되고, 축소되고, 폄훼되거나, 손망실 처리된 바가 적지 않았습니다. 소설 <하얀 혁명>은 그동안 묻히고 소실된 경기 동학군의 면모를 역사적 실체에 접근해 천착하고, 이를 서사 구조로 내면화하는 과정을 통해 한국 근대사의 질곡을 바로잡고자 기획하고 저술하였습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신영우, 표영삼, 성주현, 박맹수, 최홍규, 최효식 등 선행 연구자의 연구 성과에 기댄 바가 크며, 이들에 의해 눈이 떠지고, 세상 보는 눈이 밝아진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동학은 폭정에 맞서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으려 했던 민중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중봉기였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민중들이 일어선 혁명인데요, 이 작품을 통해 작가님께서 어떤 세상을 꿈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동학혁명의 사상적 기저는 단연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과 만민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실천강령은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였습니다. 이는 곧 외세의 침탈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독립투쟁이며, 수운 대신사께서 창도하신 동학을 정신적 기반으로 하는 인본주의 혁명이자 풀뿌리 농민봉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얀 혁명>은 이런 정신혁명에 기반하여 민중의 힘을 기르고, 혹세무민하는 탐관을 징치하며, 강도 왜적과 과감히 맞서 싸우는 견결한 현장을 펼쳐 보임으로써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 사람을 하늘로 여기는 세상이 여기에 있음을 보여주고자 밤을 잊은 날이 많습니다. 소설 집필을 마치시고 이제 이 작품이 독자들을 향해 걸어갑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동학의 가치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듯 동학혁명은 실패한 봉기였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항쟁이었습니다. 세계정세에도 깜깜이였고, 무기도 열세였으며, 동조하지 않는 세력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술이란 불가능을 꿈꾸는 것이라고 역설한 김수영의 말처럼, 혁명이란 불가능한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열망입니다. 혁명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불편하고 괴로운 것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혁명하지 않는 안주는 나를 잊는 것인데 반해, 혁명의 가치는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인 줄 모르고 남의 입에서 나온 말이나 신본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학은 인본주의 혁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 복무하지 않는 것은, 종교든 무엇이든, 옳지 않다고 봅니다. 서(西)가 동(東)이 아니듯, 동(東)은 서(西)가 아닙니다. 동학은 바로 나를 되찾는 일이고 인간을 위하는 길입니다. 지금부터 <하얀 혁명>은 그 이야기를 피 붓에 적셔 아프게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김현종 작가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소설집에 『보다 보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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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에 들어가기에 앞서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 수련 전(前) 강의를 맡은 원암 김창석입니다. 제가 부족한데도, 특히 수련에 있어서는 더욱 부족한데도, 총부 지시를 받아 감히 이 자리에 섰습니다. 수련은 말 잘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스스로 잘 알기에 매우 송구스럽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선생님, 사모님, 동덕님들 앞에서 ‘강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부족한 사람이 조그마한 증험과 생각, 경전공부를 토대로 수련 전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 드리는 말씀으로,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수련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고 처음 수련할 때의 마음가짐을 되살려보는 시간이라 여기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이곳 대교당까지 와서 수련을 합니다만, 수련이란 무엇입니까? 수련은 잊고 잃어버린 본래의 나를 찾고 회복하려는 정성입니다. 그런데, 본래의 나는 내가 그냥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천가지 만가지 방법을 써도 현재 물든 상태의 이 마음으로는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반드시 한울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애초 한울님에게서 나온 것은 맞습니다만, 지금은 많이 잊고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걸 다시 찾으려면, 억 억만년 전부터 본래 상태 그대로 존재해 오셨고, 앞으로 억 억만년 후에도 변함없이 본래 상태 그대로 존재하실 한울님한테서 받아야 합니다. 무엇을? 깨끗한 물을, 생혼(生魂)을 받아야 합니다. 천심(天心)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 어느 곳도 아닌 한울님한테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한울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내 안에 계십니다. 바로 내 안의 한울님과 통하고 교감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한울님이라는 참(眞)의 세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걸 분명히 알고 주문공부를, 수련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본래의 나를 찾고, 삶을 헤쳐 나갈, 원활하고 행복한 삶을 열어나갈 지혜와 용기와 능력을 받아 갖추게 됩니다. 그러면 수련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마음 가짐,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선, 내 안에 한울님, 스승님이 계심을 명심하고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한울님 스승님을 늘 생각해서 온화하고 공경스러워야 합니다. 경외지심(敬畏之心), 효제온공(孝悌溫恭)의 마음을 쌓고 기르는 데 계속 노력하고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강조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 경인(敬人)・경물(敬物)도 이처럼 내 안의 한울님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밖으로 확장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내 마음이 낮아야, 불손한 마음이 없어야 한울님 스승님 앞에 떳떳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그럴수록 주문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어떻게 낮출 수 있습니까? 항상 내 마음을 점검하고 살펴야 합니다. 내 마음 상태는 어떤지 스스로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쓸 때, 내 마음 작용이 일어날 때 어떠한지 진솔하게 살피고 지켜봐야 합니다. 이를 좀 구분해서 말씀드리면, 평소에는 이렇게 늘 마음 상태를 살피면서, 잘못되고 부족한 점이 나오면, 반성하면서 개선을 다짐해야 합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고 계속 주문을 외우면서 개선을 약속하는 심고를 드리면서 내 안의 한울님께 정성 공경을 다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같이 특별히 수련을 할 때는 집중적인 참회반성을 해야 합니다. 지난번 수련 이후, 나아가서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내가 마음 쓰는 것,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 그로 인해 일어난 일과 결과를 숨김없이 되돌아보면서 솔직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잘못된 삶과 인과(因果)를 알고 풀어가는 과정입니다. 더욱이 오늘은 대신사님 탄생 200주년이라는 내 생애 다시 오지 않을 때를 맞아, ‘나는 과연 그 분의 생전 가르침과 헌신, 참형을 당하시며 남기신 뜻을 제대로 지키고 따랐는가’, ‘과연 제대로 실천하고 펴기 위해 내 도리와 역할을 다해 왔는가’, ‘정작 내 할 일은 알지 못하고 하지 않으면서, 때와 여건, 주변의 교구장님과 동덕님들, 교단 탓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하고 내 가슴 저 밑에서부터 참되고 솔직하게 참회반성해야 합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스스로 살피면서, 진실하게 참회반성할 때, 내 안의 한울님 스승님과 새로운 만남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한울님 마음, 천심, 생명의 물, 생혼이 화해 나오면서, 본래의 나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오늘 이 뜻깊은 자리에 부합하는 수련 시간을 비로소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련의 증험과 단계 그리고 모처럼 수련을 하기 위해 모였으니, 이렇게 수련을 하면, 어떤 증험과 과정을 밟게 되는지 같이 알아봤으면 합니다. 보이지 않고 무형한 마음 공부라는 일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지도를 미리 펼쳐보는 심정으로 의암성사님 법설 <십삼관법>에 비춰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천도교 동귀일체’ 발간 『천도교 신앙심화』(글나무, 2022) 28-32쪽을 참고하였다. ) 먼저, 한울님 스승님 앞에 마음을 낮추고 진실되게 참회반성하면서 주문을 열심히 외우면, ‘염주관 감화관(念呪觀 感化觀)’이라고 한울님의 감화를 받게 됩니다. 그동안은 한울님이 계시고 감화가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일상에 빠진 나머지 잊고 지내다가, 주문을 지성으로 외움으로써 한울님 감응이 있음을 증험하고 새로운 세계를 감격스럽고 흐뭇하게 느끼게 됩니다. 두 번째는 ‘아무관 천유관(我無觀 天有觀)’이라고, 한울님의 감화를 받고 감개무량한 심경이 되어 무한한 기쁨을 느끼는 동시에, 그동안 한울님의 은덕을 모르고 살아온 것이 너무도 부끄럽고 죄송한 나머지, 자기자신마저 망각하고 한울님만 지극히 생각하는 단계입니다. 신앙이 본궤도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자칫하면 한울님에 너무 예속되고 의존적인 신앙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알고 다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 번째는 ‘아유관 천무관(我有觀 天無觀)’입니다. 한울님 감화로 내 생각보다 한울님 생각을 주로 하면서, 한울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차차 내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면서 한울님을 부리는 마음이 됩니다. 즉 사람의 권능이 한울을 이긴 상태입니다. 한울님께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하는 것은 좋은데, 나는 아직 육신관념이 남아 있으므로, 자칫 자만과 감정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성무관 심유관(性無觀 心有觀)’입니다. 한울님만 믿으면서 신앙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그것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내 마음가짐에 따라 모든 일이 좌우됨을 알고, 마음을 닦아야 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한울님 모심을 알아야 마음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천도교는 한울님을 믿는 동시에 자기 마음을 닦고, 마음을 닦는 동시에 한울님을 믿고 수행하는 종교입니다. 그동안 마음공부를 모르고 살아온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참회하면서 열심히 마음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성품에 대한 생각은 하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다섯 번째는 ‘심무관 성유관(心無觀 性有觀)’입니다. 마음을 닦아 깨끗한 마음이 되게 하고, 괴로운 마음을 기쁜 마음이 되게 하고, 복잡한 마음을 일심(一心)이 되게 하는 마음공부를 하다 보니, 마음의 근본이 성품임을 알게 됩니다. 성품공부를 해야 무궁한 나를 찾고 마음공부도 제대로 할 수 있고, 도를 통하게 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무심하고 비고 고요한 경지에 이르기 위한 성품공부에 집중하고 정진하는 단계입니다. 여섯 번째는 ‘성무관 심무관(性無觀 心無觀)’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니 성품도 있고 마음도 있는 것이지, 완전히 성품 세계로 들어가 한울님 입장에서 보면 성품도 없고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수도를 계속하여 육신관념과 개체의식이 없어지고, 오로지 무형한 성령의 세계에서 살면서 모든 사물을 한울님 입장에서 바라보는 높은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성유관 심유관(性有觀 心有觀)’즉, 성품도 있고 마음도 있는 단계입니다. 성품도 마음도 없다고 보는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가 다시 성품도 있고 마음도 있다고 보면서 성품공부와 마음공부를 병행하는 성심쌍수의 단계입니다. 마음과 성품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성심 양방향으로 잘 닦아 견성각심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마지막 열세 번째‘세계관 극락관(世界觀 極樂觀)’까지 단계가 많이 있습니다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살펴보고, 이후는 앞으로 공부가 더 많이 되면 그때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내가 수련을 하면 이런 과정과 단계를 거쳐 가게 되는구나’ 하고 머리 속으로 한번 그려보고 임했으면 합니다 맺는 말씀 오늘 이 자리는 대신사님 탄신 200주년을 맞아 다함께 수련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모쪼록 자신에게 참되고 솔직한 자세로, 내 안에 모신 한울님 스승님께 충실하고 떳떳한 시간을 만들어가시길 염원드리면서 부족한 저의 말씀 마치겠습니다. 정말 송구하고 감사합니다. 원암(元菴) 김창석(동귀일체 회장 / 마산교구) ※ 이 글은 지난 10월 16일부터 22일까지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진행한 특별기도 강의안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였습니다. 이 글의 원문은 ‘천도교 동귀일체’ 네이버카페(https://cafe.naver.com/chonsim)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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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구 남정포 영암 김영철 선도사 환원한강교구 남정포 영암 김영철 전 도훈이 포덕 165년 10월 16일 환원하였다. 빈소는 일산 백병원장례식장 특1호(고양시 일산서구 주화로 170 지하 2층)이며 10월 17일(목) 저녁 9시에 영결식을 봉행한다.(한강교구장) 발인은 10월 18일(금) 아침 6시 30분이며 장지는 포천 천도교 묘지이다. 유족으로는 하점선 내수도(회암 하준천 선생 딸), 딸 : 김진영, 김진경, 김진주, 김진아 사위 : 안치성, 엄인철, 이수배, 정재헌 손자 : 형진, 우진, 태경, 종윤, 민영, 성빈이다. *상주 대표 : 김진영(010-3945-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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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는 날(김병휘 작)김병휘 작, <꽃이 피는 날>(본인제공) 꽃이 피는 날 꽃이 피는 듯 물 흐르는 듯 꽃이 피는 날 마음이 화해지기를 심고 드리며... 김병휘(교화홍보분과 위원/서울교구) 이 작품은 작가의 허락을 받아 천도교신문에 게재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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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슬기로운 천도교 생활천도교중앙대교당 사람 팔자는 참 알 수 없다. 나 같은 샌님이 주말마다 인사동에 가서 맛집을 돌아다닐 줄 알았으랴. 고풍스러운 천도교 대교당에서 시일식을 마치고, 바로 옆 인사동에서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암 김창석 선생님과 ‘디딤돌’ 사람들, 또는 천도교의 연원 모임 서운포 사람들과 함께 한다. 알고 봤더니 천도교가 인사동 상권을 살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었다. 다른 교회들처럼 자체 식당이 없고, 대신 맛있는 떡을 나눠준다. 교인들은 시일이 끝나면 삼삼오오 인사동으로 몰려가서 함께 밥을 먹는다. 그동안 시일식에서 나눠주는 떡을 받기만 하다가 어제 드디어 사무실에 전화했다. 떡값을 보내겠다고. 천도교에 나온 지 여덟 달쯤 되었고, 입교는 올 1월에 했다. 처음 나온 사람들이 함께 공부하는 ‘디딤돌’ 프로그램이 있다. 원암 김창석 선생님이, 천도교 ‘동귀일체’ 모임에서 펴낸 책을 바탕으로 친절히 가르쳐주셨다. 아, 천도교가 이런 것이구나! 선생님한테 교리도 배우고 경험담도 듣고 내 의견도 얘기하다 보면, 아침 한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곧바로 시일식에 참석한다. 천도교인으로, 부드럽게 연착륙하고 있다. 시일식을 마친 뒤엔 다 같이 식사도 하고. 음, 분위기 좋다. ‘디딤돌’에서 교재로 쓰는 책, <마음공부, 영원한 행복의 길>은 일반인들이 읽어도 될 만큼 좋은 내용을 알기 쉽게 알려준다. 게다가 2부에선 우리나라라는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설거지할 때, 주문을 외워도 되나요? 천도교에선 주문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한울님한테 받은 것인 까닭이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주문의 뜻이 참 좋고 마음에 와닿는다. 저녁때 자기에 앞서 설거지와 청소를 하는데, 이때 주문을 외우고 있다. 그래서 원암 선생님한테 물어봤던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천도교 신앙생활을 해왔던 원암 선생님은 스승 얘기를 가끔 해주었다. 스승은 또 스승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전통이 천도교엔 남아 있는 듯하다. 경전이 아니라 스승들을 통해서만 대대로 전해질 수 있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또 워낙 수련과 마음공부에 철저한 분이라서 크게 울림을 준다. 주말 휴식 시간마저 고스란히 천도교에 바치고 있음에랴! 천도교엔 참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아서 좋다. ‘디딤돌’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원암 선생님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혹자는 천도교 교세가 옛날과 견주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이백 해 동안 불어닥쳤던 엄청난 서양 바람을 생각해보라. 온몸을 던져 평생 천도교를 지켜온 여러 선생님과 선배 교인들이 참 훌륭하게 느껴진다. 백배를 드릴만큼 고맙다. 더구나 수많은 분들이 나라와 교를 위하여 피를 흘렸음에랴! 때마침 올해는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이 백 돌이다. 지난 시절 천도교는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들을 해왔지만, 지금부터 할 일이 더 많지 않을까? 이상우(서울교구) 본 글은 네이버카페 "동귀일체"(https://cafe.naver.com/chonsim)에 게재된 글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천도교신문에 게재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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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마음으로 짓는 농사, 도상록 동덕을 만나다인삼 밭에서 도상록 동덕 "저는 제 존재의 가치를 한울님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한울님이 내려주신 거지 스스로 이룬 것이 없습니다." 충남 서산 가림다영농조합에서 홍삼을 생산하여 유통하고 있는 도상록 동덕을 만났다. 도상록 동덕은 맨몸으로 홍삼액 가공에 뛰어든지 20년이 넘었다. 서산은 토질이 황토 찰흙으로 유기물이 풍부해 인삼의 유효성분을 높여줄 뿐 아니라 서리가 내리는 기간이 짧아 인삼 생육기간이 길고, 여름에는 서늘한 서해 갯바람이 불어와 한여름 고온 피해를 줄일 수 있어 인삼 재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라고 한다. 한울마음으로 짓는 농사는 어떻게 다를까? 도상록 동덕에게 물어보았다. 물질은 풍요롭고 이제 소비자들의 선택에는 더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먹거리에 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 제품을 만드는가, 이 농사를 짓는가, 내가 식탁에서 먹는 이 농산물을 생산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만나 뵙는 동덕님의 이야기가 더 궁금합니다. 현재 인삼을 재배하고 유통하고 계신데, 농사를 지으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제가 한살림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기 때문에 한살림에서 많이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한살림의 근본적인 취지가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 인데요, 제가 그 취지에 동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한살림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좋은 모습으로 매듭을 짓는 것은 귀농이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저농약, 무농약, 유기재배 농사 등 친환경 농사가 시대의 화두가 된 것은 안전한 먹을거리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친환경 농산물을 단순히 자신들의 건강만을 위해서 필요로 하고, 생산자들은 값비싸게 팔 수 있다는 논리로 규정해 버리면 친환경 농사도 상업적인 범주에 갇혀버립니다. 그러다 보면 관행농법과 다르지 않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우를 범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우를 범하지 않고 모든 생명을 살리는 지속가능한 농사를 실현하고 싶어서 귀농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한살림의 기본 취지가 해월 선생님의 “밥 한 그릇을 제대로 아는 것이 모든 세상 이치를 아는 것이다”라는 말씀에 충분히 저하고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천도교를 믿었는데, 저의 삶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연결돼 있더라고요. 한살림에서 일하실 때와 농업 현장은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농사에 있어서 동덕님의 특별한 철학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한살림 취지에 맞게 농사를 지어야 하기도 하고요. 좀 거창하지만, 내가 짓는 이 농사는 천지만물을 살리는 농사여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단순히 우리가 어떤 농작물을 재배해가지고 상품으로 팔아가지고 밥을 먹는다는 그런 단순한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굉장히 소중해요. 그렇지만 땅을 죽이는 농사를 지으면 또 안 되잖아요. 그래서 땅을 살리는 농사, 땅을 살릴 수 있는 농사를 짓는 것에 저는 가장 큰 의미를 두고 해왔습니다. 살아있는 땅에서 생산된 인삼이야말로 사람을 또 살릴 수 있는 약재가 되는 것 아닙니까. 특히 인삼은 사람들이 약으로 많이 먹잖아요.그래서 그런 부분에서는 좀 더 마음을 쓰면서, “땅 보기를 어머님 살같이 하라”는 해월 선생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품고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저는 천도교인으로서는 그런 농사를 짓지 않으면 제대로 된 농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재배 과정을 설명하는 도상록 동덕 재배 과정을 설명하는 도상록 동덕 인삼밭에서 인삼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인삼을 직접 재배하시고, 또 홍삼 제품으로 제조하고 계신데, 선생님이 만드신 제품을 드시고 건강이 좀 회복됐다는 말씀 들으시면 보람도 크시겠어요. 우리 인삼은 역사적으로 약 중에 상약이고 그런 꾸준한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유행을 타지 않는 건강식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홍삼을 믿고 이용하고 활용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또 생활습관, 개인의 특성이 잘 맞아야 효과를 볼 수 있겠죠. 그런 부분들이 각자 개개인의 체질과 잘 맞으면 중증 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한 사례는 분명히 있죠.선생님, 특별히 인삼 농사를 하시게 된 계기도 있을 것 같은데,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일단 고려인삼은 우리 한반도가 고유한 원산지로 보시면 돼요. 고려인삼은 한반도를 품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끼친 영향이 너무나 큰 민족문화유산 입니다. 여기서 일일이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고려인삼은 우리민족의 운명과 그 궤를 함께했다고 확신합니다. 그 부분은 저의 학위논문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한반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고려인삼을 재배해 온 거죠. 우리가 동학이냐 서학이냐, 했을 때 내가 동쪽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동을 서라 하며 서로 동으로 하겠느냐 그런 이치죠.일단 그래서 저는 우리 한반도에서 나는 인삼을 가지고 어떤 질병으로 고통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고 충분히 그걸로 보람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고려인삼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을 치료하고 예방을 했기 때문에 저는 그 맥을 잇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남북이 또 분단돼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휴전선이 가로막혀 있어서 참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인삼은 서늘한 땅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 남쪽에는 인삼을 심을 수 있는 땅이 점점 고갈돼 가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는 기후위기를 불러왔고 기후위기의 가장 취약한 부분의 하나가 농사 입니다. 사과를 비롯한 과일값이 갑자기 폭등한 이유는 우리나라 농산물의 유통구조도 한몫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후위기 입니다. 연구자들의 견해에 따르먼 2090년 쯤에는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고려인삼 재배할 수 있는 땅이 현재와 비교해서 5% 밖에 남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려인삼의 재배지는 위도가 높은 북쪽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부터라도 북쪽과 자연럽게 교류하면서 고려인삼의 재배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고려인삼을 계기로 남북이 교류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가공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도상록 동덕 가림다영농조합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동료들과 함께 선한 마음이 향하는 선한 일들이 결국은 세상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로 만들어간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이 사람과 땅과 사람과 자연을 함께 살리는 농사가 되어야 하죠. 어느 한 부분만 보고 농사를 짓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저는 보기 때문에 이제 하늘, 땅, 사람을 조화롭게 보아야 겠죠.천지인이 다 이롭게 할 수 있는 농사, 그래서 그런 부분이 저의 보람으로 나타난다면 굉장히 소중하게 남을 것 같습니다. 농장과 공장을 돌아보며 선생님이 홍삼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담는 마음과 함께 작업을 같이 하시는 동료분들과도 굉장히 끈끈한 연대, 팀웍이 돋보이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우리가 일을 함에 있어 추구하는 가치가 각기 다르면 일이 잘 안 되거든요. 그런데, 그분들이 공감하고 동감해주기 때문에 같이 일을 저는 할 수 있다고 보고 서로가 동감하는 순간 확실한 상승작용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단순히 그냥 밥벌이를 하는 것이 아니다, 땅과 사람과 하늘, 자연을 살리는 그런 일을 한다는 가슴 뿌듯함이 우리 내부에서 함께 흐른다고 생각합니다. 올해가 대신사 출세 200주년을 맞이하며 홍삼 판매 수익의 일정부분을 성금으로 돌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교인분들게 큰 울림을 주고 계신데 천도교 신앙의 힘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제가 천도교 신앙을 하게 되어 운이 좋습니다. 천도교나 동학을 몰랐다면, 천도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저는 사람과 땅을 이해하는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끈끈한 연대에도 한없이 모자랐을 것입니다. 해월 선생님의 ‘밥 한 그릇 사상’, 이 부분이 저한테는 절대적이었고 그런 마음이 결국은 지금 저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고 내가 그 부분을 현실에 맞게 키워나가느냐, 이 부분에서는 당연히 저는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수익금의 일부를 대신사님 출세 200주년 행사에 조금 도움이 되도록 하려고 합니다. 저는 제 존재의 가치를 한울님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한울님이 내려주신 거지 스스로 이룬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신앙의 힘으로 묵묵히 주어진 길을 가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혹시 가슴에 품고 계시는 스승님의 말씀이 있다면 어떤 말씀이 있을까요? 조금 전에도 약간 언급했습니다만, 해월신사님께서 성(誠)경(敬)신(信)편에서 하신 말씀인데요,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님의 살같이 하라”는 구절입니다. 땅이 살면 사람이 살고 땅이 죽으면 사람도 살지 못합니다. 해월 신사님께서 ‘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디 땅 뿐이겠습니까? 천지 만물을 아끼고 존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동덕님께서 농작물을 재배하고 가공해서 유통하는 과정에 스승님 말씀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겠어요 그렇죠 일단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저 스스로가 굉장히 중요한데요, 저는 한울사람으로서 한울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저의 존재가치를 한울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의미가 없다고 봐요. 그래서 그 한울 일이라는 것이 나를 살리고 남들도 살려내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재물을 갖게 된다면 그것도 사람을 살리고 나도 살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해요.본래 내 것은 전혀 없잖아요. 다 한울님이 내려주신 어떤 재물에다가 나의 일 노동이 합쳐져서 비로소 재화가 되는 거잖아요. 동덕님이 재배하신 인삼으로 만든 홍삼을 드시는 얼굴도 모르고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도 모르는 분들, 오직 선생님의 홍삼을 통해 선생님과 만나고 계시는 분들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한말씀 해주세요. 그리고 가림다 영농조합에서 생산되는 홍삼제품의 특성을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이 사실 전달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저는 이심전심이라는 말을 믿어요. 그건 제가 얼마큼 정성을 들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봅니다.우리 사회 시스템이 단절돼 있고 눈에 잘 안 보일지는 모르지만 제가 정성을 들이면 분명, 받아보시는 분들께서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저희 들은 인삼을 생산할 때 기본적인 약속을 지키려 하고 있습니다. 첫째,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농사을 짓다보면 풀과 굉장한 갈등을 해야합니다. 적당하게 타협을 해야 하는데 농촌의 일손 부족으로 그냥 제초제를 사용하여 말끔하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농사방법입니다. 이것은 땅을 죽이는 행위이고 결국 사람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저희들은 사람의 손으로 뽑습니다. 둘째,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화학비료는 식물 에게는 정크식품입니다. 그런 화학비료를 사용하여 재배한 작물은 사람에게도 좋을 리가 없겠지요. 셋째, 토양살충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농법은 뿌리를 주로 이용하는 작물이기에 굼벵이나 거세미같은 땅속 벌레들이 인삼의 생육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미리 예방을 하는차원에서 땅속에댜 농약을 사용합니다. 벌레들이 살지 못하는 땅에 서 재배된 작물이 사람에게 도움을 줄수는 없겠지요. 넷째, 가축의 분뇨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축 사료는 98% 이상 수입에 의존하는데, 수입 사료의 원료가 되는 곡물은 유전자 조작된 작물이 대부분 입니다. 그런 곡물을 먹고 배설한 분뇨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거름을 사용합니까? 저희 들은 인삼을 심을 밭의 땅심을 돋우기 위해 2년동안 밭에 수단그라스, 호밀, 보리 등을 심어 자라게 한 다음 갈아엎기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땅심을 돋우고 마지막에 볏짚을 충분히 넣어 받을 만든 다음 인삼을 심습니다. 따라서 퇴비나 축분 등 별도의 거름을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덧 붙힌다면 저희들은 홍삼을 만들어 3년 간저온 숙성시킵니다. 그러한 원료로 홍삼액을 추출하기 때문에 홍삼 추출액이 부드럽고 풍미가 좋아집니다. 홍삼 달이면서 이것을 드시는 분들이 건강하시면 좋겠다고 저는 거기서 그렇게 기도를 해요. 스테인리스 추출기 속에 들어있는 거지만 저는 진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과 정성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스테인리스 추출기를 보면서 홍삼을 드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도상록 동덕 충남 서산에 위치한 가림다마을 영농조합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어떤 것이 있을 까요? 두 가지 바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려인삼이 남과 북에서 각기 무형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무형문화재라고 하고 북쪽은 비물질 문화유산이라고 합니다. 저는 고려인삼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재로 남과북이 힘을 합쳐 공동등재를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두번째는 고려인삼을 남과북이 공동브랜드로 만들어 고려인삼의 세계화를 이루어냈으면 합니다. 이것의 의의는 한민족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려내는 문화적인 측면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코로나19 등 앞으로 예견되는 셰계 적인 감염병을 예방하는 차원으로서 고려인삼을 이용한 신약개발이 남과북이 그간 축적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인류에게 도움이 되도록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남과 북이 서로 미워하지 말고 혐오하지 말고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소통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입문의)https://smartstore.naver.com/garimda 리플렛 참조 가림다마을 영농조합 법인 리플렛 가림다마을 영농조합 법인 리플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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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165 종학대학원 하계수련 소감여름은 나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계절이다. 따갑고 자외선이 강한 햇살을 피해야 하는, 치료되지 않는 피부질환이 있어서다. 20대부터 여름에는 좀체 움직이지 않았고 이런저런 모임이나 여행도 여름에는 피했고 야외활동을 할라치면 해가 지고 난 후에 했다. 이번 여름에도 오랜 습관처럼 지내겠거니 생각했는데 종학대학원 하계수련을 한단다. 여름이기도 하고 나는 청강생이라 참여하지 않으려 했지만, 우리 교구에서 연암 부산분원장을 비롯한 종학대학원 수강하는 어르신 여러분과 최근 입교한 신입 교인-말이 신입이지 실은 동학을 오랫동안 공부한 분들이다-중 종대원생 세 분 모두 참여하신다니 우리 교구의 원우들은 다 가는 셈이다. 안가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햇살 대신 비가 오면 좋을텐데... 다행히 하계수련 내내 비가 올 것이라 한다. 일기예보가 반가울 수도 있구나. 게다가 의창수도원은 한 차례 방문은 했어도 한 번도 수련해 보지 못한 곳이라서 수련 의지가 조금 솟아올랐다. 이곳은 의암성사께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수차례에 걸쳐 전국의 동학 지도자들을 불러들여 49일 수련을 시키시던 곳이 아닌가. 원우 여섯 분과 분원장님을 부산역 대합실에서 만나 사진 찍고 두런두런 담소도 나누다 보니 나들이 가는 느낌이었다. 의창수도원에 모인 전국 각지의 서른다섯 분 동덕님들을 만나 보니 그 옛날 동학 지도자 못지않게 각오와 도력이 단단하셨다. 지난 용담정 겨울수련에는 짧은 기간 참여해서 여러 원우들과 서로를 알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는 함께 밥을 먹고, 설거지하며, 쉬는 시간에 차를 나눠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었고 각자의 직업과 신앙 이력 등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매일 오후마다 한 차례씩 열린 특강은 천도교의 주문수련과 경전, 역사 등 교인이라면 누구나 관심 가질 만한 주제였고 여느 강의 못지않게 알찬 강의였다. 혜원당 김춘성 상주선도사님은 오랜 수련경험과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입문자를 위한 수련법」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셨다. 종학대학원생 대부분은 이미 오랜 수련을 해온 분들이라 신입 교인이나 자녀들에게 올바른 수련의 절차와 방법을 안내하고 지도할 위치에 있어서 혜원당님 강의는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혜원당님은 소춘 김기전 선생님이 「신인간」에 기고하셨던 글과 당신의 수련체험을 맛깔나게 잘 버무려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는데 매우 구체적이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주문을 외울 때 한울님에 대한 경외지심, 한울님 기운과 하나가 되려는 강렬하고 간절한 마음, 오직 일념으로 주문의 뜻을 생각해야 하는 점을 강조하였고, 수련 중에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소개하는 등 타성에 젖어가던 나의 주문공부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특히 강화에 대한 해원당님의 말씀 중에 깊이 와닿았던 것이 있다. ‘질문이 없으면 강화가 없다’는 말씀이다. 나는 ‘스승님의 가르침이 지금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경전의 어떤 말씀을 두고 그게 무슨 뜻일까 깊이 고민하는 중에 어느 날 느닷없이 답을 얻은 적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혜원당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일이 강화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다른 원우가 또 이렇게 질문했다. “천도교인과 동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살겠습니다’와 ‘잘 알겠습니다’의 차이가 아닐까요.”라고 답하셨는데 정리를 참 잘해주시구나 싶다. 아니, 그렇게 살아오셨으니 쉽고도 명쾌한 대답이 저절로 나오는 것일 게다. 앞으로 포덕하는 현장에서 잘 활용할 수 있는 강의였다. 물론 체험이 선행되어야겠지만. 두 번째 특강은 윤석산 교령님께서 맡아 주셨다. 연일 바쁘신 중에도 방문해 주시니 우리로선 감사하지만 교령님의 건강이 염려된다. 피로가 쌓인 모습에 의자에 앉아서 강의하시길 권했다. 수련생들 모두 걱정스런 시선으로 교령님을 쳐다보는 가운데 오히려 교령님께선 여유있게 유머를 구사하며 강의를 이끄셨다. ‘동학’에서 ‘천도교’로의 大告天下 당시 시대상황과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에 맞서 의암성사님께서 용시용활하는 전략을 짧은 시간 동안 드라마틱하게 보여 주셨다. 동학의 종교화를 위하여 오관을 제정하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하는 한편, 교리강습소를 운영하고, 출판사를 인수하여 교리해설서를 출간하여 일관된 교리체계를 세웠던 과정을 학술적 근거 자료를 제시해 가며 생생하게 설명하셨다. 또한 성사께서 일제의 탄압을 뚫고 천도를 계승 발전시키고, 전국의 지도자들을 천도교 신앙심으로 결집하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독립과 개화에의 열망으로 승화시켜 가는 과정을 배운 값진 시간이었다. 이번 특강은 현재 교단의 엄중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의암성사님과 같은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교령님의 마음이 담긴 것으로 다가왔고, 교인들의 同歸一體, 同歸一心을 촉구하는 간절함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원우들의 힘찬 박수에는 교단발전을 위해 애쓰시는 교령님이 항상 건강하시길 바라고, 오랫동안 교인들에게 스승님의 가르침을 전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종학대학원 하계 수련, 봉황각에서(종학대학원 제공) 세 번째 특강은 탁암 심국보 전 신인간 주간이 진행하셨다. 나는 진작에 탁암님의 진가를 엿보았다. 「신인간」의 기획 기사와 저서 『동학의 비결』, 블로그의 여러 글에서 웅숭깊은 글을 보면서 조용히, 그리고 오랜 시간 스승님의 가르침을 속독상미하여 재해석해 내고 마음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구나 생각했다. 탁암님의 강의는 ‘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양철학의 치열한 논증과정을 보여주었고 뇌과학의 최신 성과까지 다루었다. 나는 평소 서양이라는 지리와 그 산물인 서양인도 한울님 조화의 흔적인데 당연히 몸과 마음, 정신, 이성과 감정 등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철학과 종교에서 많은 연구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비록 과문하여 전체를 조망할 수 없지만 서양의 주류가 아닐지라도 동양사상 또는 동학의 사상에 필적하는 흐름도 있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탁암님의 강의는 이런 점을 잘 짚어 주셨다. 그럼에도 탁암님의 강의 방점은 행도(行道)에 있는 것 같다. ‘정명선의(正明善義. 바르고 밝고 착하고 의롭게)’(의암성사, 「성범설」), “주문 천 독하는 것이 선한 마음 한 번 쓰는 것만 못하고, 선한 마음 천 번 쓰는 것이 한 번 기운 상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묵암 신용구 강론집, 『글로 어찌 기록하며』), “지상천국이란 ‘개인과 공동체가 고통받지 않는 것’”(성해영,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등 이런 말씀을 들려줌으로써 ‘마음’을 닦는 것은 물론이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그나저나 막걸리 한잔 나누게 빨리 건강 회복하시길... 네 번째 특강은 지암당 서소연 교무처장님이 맡으셨다. 지암당님은 종학대학원에서 축구선수 박지성과 같은 존재다. 그는 미드필더였다. 미드필더는 전체 경기흐름을 조율하고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를 유지한다. 그 역량에 따라 경기의 승패가 갈리는 핵심적인 포지션이다. 팀이 위기에 처하면 직접 골을 넣어서 팀을 패배에서 구하기도 한다. 나는 지암당님이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지암당님이 아니라면 종학대학원이 이 정도의 안정된 시스템을 갖추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학기 중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동, 하계수련을 잘 조직하였고, 다양한 콘텐츠가 갖춰진 수련회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급기야 직접 골(특강)까지 넣지 않았는가. 종학대학원 원우님들의 연세가 높은지라 첨단(?) 테크놀로지 활용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상황에서 매번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특강을 통해 원우들의 디지털기기 활용능력을 조금이나마 높였다고 본다. 지금까지 학기 중 강의가 온라인으로 진행되어서 전국 각 지역의 원우들의 어려움이 많았는데 이번에 좀 해소되었기를 바란다. 이번 하계수련의 하이라이트는 수련시간이었다. 새벽, 오전, 저녁에 하루 세 차례 수련하는 시간에는 참여한 모든 분들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원우들은 물론이고 대구시교구장님의 사모님과 막내 따님, 원처근처에서 격려차 오신 교인, 또 아직 입교하시지 않았지만 동학 천도교에 깊은 관심을 가진 여러 동덕님들 모두가 “주릴 때 밥 생각하듯이, 추울 때 옷 생각하듯이, 목마를 때 물 생각하듯이” 간절하게 큰 소리로 주문을 외웠고, 비고 고요한 경지에서 묵송을 하였다. 특히 서종환 수도원장님은 경전과 수련에 관한 강의는 수련시간을 더욱 가열차게 했다. 젊은 시절부터 이어온 마음공부에 대한 갈망과 여정, 경전에 대한 깊고 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일목요연하게 꿰는 놀라운 혜안 등 실로 예상치 못한 말씀이 수련시간마다 이어졌다. 심지어 1시간 30분 동안 주문수련하지 않고 꼬박 말씀으로 이어가도 원우들은 원장님의 말씀을 더 듣길 원했던 적도 있다. 여기에 원장님의 말씀을 옮길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많은 교인들이 의창수도원에서 하루라도 머물면서 원장님의 말씀을 듣고 수련도 해보길 권한다. 환경이나 재정적으로 매우 열악한 여건인데도 수도원장직을 맡아 몸을 사리지 않는 모습을 보며 존경심이 절로 우러났다. 사모님은 또 어떠신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하루 세 끼 비할 데 없는 정성으로 수련생들을 대접하셨다. 정말 감사드린다. 그러고 보니 용담수도원을 비롯한 전국의 수도원의 원장님들이 다 그러하지 않은가? 천도교를 지탱하는 또 다른 힘이 드러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새삼 원장님들께 감사드린다. 아, 빠트릴 뻔했네. 수암 김희수 마산교구장님은 참으로 독특한 분이시다. 펄펄 넘치는 기운으로 하루 세 번 몸살림 운동으로 굳은 몸을 풀어주셨다. 그냥 몸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동작에 노래를 곁들여 신명을 이끌어내는 드문 능력을 지닌 분이다. 우리 가락이, 신명이 안에서 샘솟듯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 같다. 게다가 목청은 얼마나 좋으신가. 높은 음을 쑥쑥 잘도 뽑아내신다. 옆에 있으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다. 수련기간 내내 몸으로 노래로 기운을 북돋워 주셔서 감사하다. 천덕송 지도를 해주신 천도교 연합합창단 지휘자 김윤경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오랫동안 천덕송과 송가 보급에 고군분투해 왔고, 합창단 지휘도 맡아 연주수준을 높이고 각종 행사에 활력을 불어넣으신 분이다. 하계수련을 위해 피곤하고 바쁜 와중에도 노래를 지도하러 오셨다. 게다가 수련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목상태가 조금 좋지 않음에도 열창까지 해주셔서 큰 호응을 얻었다. 아직도 천덕송을 부르는 그녀의 美聲이 귓가에 맴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여름에는 따가운 햇살도 피하고 유익한 강의도 듣게 되어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고, 수련 기간 내내 오롯이 마음을 한곳에 모을 수 있었는데 앞으로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각오를 해본다. 아직 나의 마음에 티끌이 많아 순도 100% ‘寶鏡’에 이르기까지 갈 길이 멀지만, 이제부터라도 티끌 한 점 한 점 떼어내 보자. 글 노암 강병로(대동교구) 사진 종학대학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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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정성과 공경으로수인당 손윤자 선도사 만나서 반갑습니다. 부산시교구에서 교당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선도사님, 천도교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천도교 집안에 시집을 왔지요. 결혼하니까 시댁이 천도교 집안이었어요. 결혼식도 천도교 식으로 했고, 결혼하고 바로 첫 번째 시일날 입교식을 했지요. 그 후엔 시일마다 교당에 다니게 되었는데, 제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경리부장을 시켜주시더군요. 그래서 뭣도 모르고 경리부장을 했어요. 참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어요. 당시에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또 천도교 신앙의 가르침은 어떻게 마음에 와 닿았나요? 처음엔 제가 뭘 모르고 수련을 시작했지만, 제게 많은 분들께서 가르침을 주셨어요. 우암 김명진 종법사님께서는 살아생전 제게 주문만 열심히 하면 다 될 거라고 하셨고, 그래서 주문수련을 아주 열심히 했어요. 31세에 시작한 공부가 벌써 40년이 흘렀네요. 당시 제가 다니던 선구교구에서는 경전봉독으로 용담유사만 열심히 읽었어요. 용담유사 구절이 한울님 가르침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구절 구절이 그랬어요. 그렇게 15년 동안 전국의 수도원을 다니면서 끊임없이 공부를 했어요. 수련을 하다 보니 성격도 많이 고쳐지고 새카맣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지요. 저를 오랫동안 보신 90살이 된 어르신들 말씀이, "수인당이 처음에 교당 왔을 때는 얼굴이 새카맸는데 지금은 온 얼굴이 밝아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수련을 하면서 마음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었고, 좋은 점은 엄마가 늘 공부를 하니까 아이들이 자라면서 엄마 말도 잘 들었어요. 천도교 신앙은 자기 완성의 수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련을 하면서 삶이 더 좋은 방향으로 전환되어가는 과정을 겪으셨네요. 그렇습니다. 제 평생 늘 감사한 마음으로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남편을 만난 일이에요. 남편을 만났기 때문에 천도교를 알았잖아요. 그래서 사람이 됐잖아요. 제가 처음 천도교 공부를 하면서 그동안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어요.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고 또 시골에서 자랐으니까 너무 어리숙하고 순진했지요. 그런데 천도교 공부를 하다보니 지혜와 용기가 생겨나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받으면서부터는 제 안에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생기던가요? 신앙의 큰 힘을 느끼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세요. 한울님의 가르침으로 집안이 바뀌고 살아가는 지혜를 배웠어요. 그 덕에 집도 사고 재산도 늘려가는 재미도 알게 되었지요. 저는 큰 부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살아가면서 참 행복하다고 느껴요. 늘 주문수련을 하고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나는 평생을 주문 공부를 안 하면 죽는 줄 알았어요. 공부를 다 하면서 경전을 외우게 된 거죠. 또 하나는 작년에 내가 쓸개 제거 수술을 했어요. 쓸개에 돌이 있다는 것은 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예전에 용담에서 수련을 하는데, 쓸개 자리에 조그마한 점이 느껴졌어요. 그때 제게 느껴진 한울님 가르침은, 아프지 않으면 이렇게 평생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고 잊어버리고 살았죠. 그 돌이 처음에는 3개, 그다음 7개까지 늘어났는데 하나도 안 아팠어요. 그런데 작년에 소화가 안 돼서 병원에 가니까 쓸개주머니에 돌이 가득 찬 거예요. 할 수 없이 쓸개 제거 수술을 했죠. 그리고 교구에서 맡고 있던 직책을 모두 내려놓고 쉬려고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교화부장을 맡게 되고, 설교도 다시 하게 되니 또 건강해지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내가 앞으로 인생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지 아직 모르지만 나에게 남은 날들 하루하루를 아낌없이 쓰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렇게 한울님 감응을 받고부터는 하루를 전투적으로 살게 되었어요.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수인당 손윤자 선도사 큰 울림을 주시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선도사님께서 오랜시간 마음공부를 해오셨는데, 마음 속에 늘 품고 계시는 가르침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화악산 수도원에서 21일 동안 100만독 수련을 한 적도 있는데, 저에게 수련을 지도해주신 분들께 정성과 공경을 배웠습니다. 그 수련으로 인해 마음도 자유로워진지 오래되었고요. 늘 만나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해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친구들을 만날 때나, 어른들을 만나면 늘 대접하고 마음을 나눕니다. 만물에 대한 정성과 공경은 천도교 신앙의 가장 큰 가르침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해주셨듯이 40년 이상 신앙생활을 해오셨는데 천도교 신앙의 장점이 무엇인가요? 수련을 지극히 하면 알게 됩니다. 저는 처음 주문수련을 열심히 할 때 강령이 오기도 하고, 어떤 형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소리로 들려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 언제가부터는 순간순간 한울님의 감응이 있다는 걸 알게 되더군요. 모든 순간 내 마음이 편안한 마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마음이 어느 정점에 이르게 되면 자유로워지죠. 나의 마음에 어떤 틀이 있었다면, 그 틀이 다 깨져서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그리고 우주와 내가 하나가 돼버려요. 자존심이나 밉고, 곱고, 좋고, 나쁜 그런 마음이 하나도 없이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게 되면서 편안해집니다. 어떤 일이 앞에 닥쳐왔을 때 바로 답이 바로 나와요. 천도교를 하니까 자유로워서 좋아요.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서 좋아요. 그래서 저는 우리집 모든 식구들에게 포덕을 했어요. 교단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말씀 해주세요. 1년에 한 번씩이라도 대대적으로 교인들을 대교당으로 다 모이게 해서 다 같이 주문 수련을 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대교당에 갈 때마다 어떤 기운을 느끼는데, 교인들이 다 모여서 주문 합송을 하면서 교인들과 함께 마음의 빛을 발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한울님께서 가르침을 주시는 걸 언제 느끼세요? 또 인터뷰를 통해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힘든 역경을 건너가고 있는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설교라는 것은 스승님 말씀을 바탕으로 교인들이 신앙생활하는데 보탬이 되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도 설교를 할 때나 어떤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그런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내가 앞으로 몇십 년을 살 거라 생각하면 오늘의 이 어려움이 참 힘들게 느껴져요. 근데 내가 오늘만 살고 끝이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힘든 게 없어요. 내가 있어야 무엇이 있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오늘 이 순간만을 살고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은 없어요. 그게 답이에요. 하루를 알차게 살면 좋겠어요. 많이 살아봐야 100년 사는 인생이잖아요.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오래 생각하고 마음에 담은 말들이었다. 그리고 인터뷰에 실린 수인당 손윤자 선도사의 지극한 정성과 공경의 마음이 역경과 고난을 건너가고 있는 누군가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기를 바랐다. 손윤자 선도사 1976년 입교(선구교구) 부산시교구 어린이회 지도교사, 여성회장, 감사, 순의포 도훈 역임, 현 부산시교구 교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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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학의 힘, 힘차게 달려온 1년창립 1주년을 맞이한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의 허채봉 대표를 만났다. 허채봉 대표는 오랫동안 동학을 기반으로 활동해 왔으며, 동학을 주제로 학위과정을 마친 연구자이기도 하다. 열정적인 활동을 이어온 허채봉 대표에게 이 시대 동학, 천도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동학의 가르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허채봉 대표를 만나보자 동학농민혁명부산기념사업회 허채봉 대표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 창립1주년을 맞이하셨습니다. 기념사업회를 어떻게 창립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2022년 2월에 동학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이 2023년 1월에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아카이브에 등재되면서 동학 신진연구자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그때 우리 천도교단 활동과는 조금 결이 다른 동학을 주제로 활동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중에서도 2021년부터 동학 서훈 운동을 했던 분들, 동학혁명 유족회, 그리고 전국의 기념사업회 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제가 활동하는 부산에도 동학 기념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 작년 6월이었고 동학 신진연구자 모임을 한 이후 7월 8일에 기념사업회를 창립한 것입니다. 그 흐름에 이어 전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전국 워크샵이 열리기도 했고요. 그렇게 일사천리로 이뤄졌습니다. 첫 번째로 연구자로서 논문을 쓴 게 계기가 됐을 거고 동학 신진연구자 워크숍에서 다양한 분들을 가면서 활동의 폭이 넓어진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 과정들에는 굉장히 깊은 고민과 또 오랜 성찰이 있었을 것 같아요. 제가 동학을 하기 전에, 오랫동안 택견이라는 무예를 했어요. 택견은 우리 민족 무예로서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76호로 지정돼 있고, 2015년도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세계 인류 무형의 유산이면서 수련종목인 택견을 하면서 새롭게 현대의 스포츠로 계승하는 일을 해왔고, 그런 과정들을 한 30년 정도 하다보니 동학을 알게 되고부터는 자연스럽게 내가 무엇을 할 건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모색해왔습니다. 전국을 다니며 동학의 역사를 찾고, 알아가는 과정이 삶의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동학을 접하게 된 최초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천도교에 입교하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2016년도 가을에 녹색당 농업특별위원회의 농업 먹거리 활동을 했는데 흔히 우리가 ‘녹색농부’라고 말해요. 이분들 중 저력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어느 날 녹색 농부 중 한 선생님께 여쭸어요. 혹시 종교가 있으시냐고요. 그냥 묻고 싶었어요. 그분 종교가 ‘천도교라’는 거예요. 내가 다시 물었어요. 천도교가 뭔가요? 천리교인가요? 천리교는 일본 종교잖아요. 그게 아니래요. ‘동학’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깜짝 놀랐어요. 동학이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얘기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랬더니 맞대요. 그래서 내가, 그러면 동학농민혁명이 종교란 말이에요? 그렇게 또 물었어요. 그게 종교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지금까지도 이어진다는 거예요. 나는 민족무예 택견의 지도자로서 몇십 년을 살았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종교였다는 것을 몰랐어요. 뒤통수를 딱 맞는 느낌이었어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동학농민혁명이 그 순간에 있었던 이벤트나 사건이 아니었고 계속 어떤 흐름 속에서 일어난 건가, 그러면 왜 나는 그런 걸 몰랐지? 너무 충격을 받아서 한 며칠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며칠 고민을 하다가 천도교중앙총부에 전화를 했어요. 입교 같은 걸 할 수 있냐고요. 전교인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지도 물었어요. 나는 천도교 안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전교인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선생님한테 가서 그랬어요. 천도교에 입교를 하겠다고요. 선생님, 전교인이 되어 주세요. 이렇게 얘기를 했죠. 그때 목암 전희식 선생님이 책 <소농은 혁명이다> 북콘서트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 ‘천도교중앙대교당’이라는 곳을 가 봤지요. 그날이 2017년 포덕 158년 4월 9일이었는데, 4월 5일 천일기념일이 있던 주의 시일, 4월 9일이었습니다. 그날 입교를 하게 된 거예요. 그때 입교를 하신 거군요. 그럼 그 전에는 천도교중앙대교당을 전혀 모르셨나봐요. 와보시니 어떻던가요? 압도적인 어떤 기운이 느껴지시던가요? 첫 느낌이 예수상이나 십자가, 부처상과 같은 우상이 없고 궁을기가 보였어요. 대교당 건물이 굉장히 아름다웠고요. 제가 20대 때 길 건너 원서동에 살았거든요. 그런데 천도교중앙대교당을 몰랐어요. 처음 대교당에서의 모든 느낌이 다 좋았어요. 청수봉전을 보며, 여성이 청수를 봉전해야 그 의식이 시작된다는 게 좀 신기했고 우상이 없는 것도, 성직자 없이 일반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시일을 모시는 것도 참 놀라웠어요. 고정관념을 깨는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고 신선했어요. 입교를 한 이후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 대교당에서 전희식 선생님의 북 콘서트를 보러 갔는데, 일주일 뒤에 전주에서 또 북콘서트를 하신다고 하더군요. 전주 한옥마을 안에 있는 동학혁명기념관에서요. 그 말씀을 듣는데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에 너무너무 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당시 임형진 종학대학원장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해부터 종학대학원 전주 분원과 부산 분원이 만들어질 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부산 분원 개원소식을 기다렸고, 이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종학대학원 부산분원이 열렸습니다. 거기서 본격적으로 천도교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열심히 활동하시는 교인분들 한분 한분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고 사회 곳곳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이 시대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가 창립 후 1년 동안 바쁜 걸음으로 달려오셨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부산은 알다시피 동학의 유적지가 없잖아요.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놓고 보니까 갈 데가 없더군요. 창립을 했는데 기념사업회에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창립하자마자 기념재단에서 동학농민혁명 편람을 보내왔어요. 전국에 있는 동학 유적지를 다 모아놓은 거였어요. 경상도권 전라도권 경기권 충청권 등 전국에 있는 권역별로 쭉 있는데 등급이 A, B, C, D 이렇게 나뉘어 있는데 부산에 딱 두 곳이 있는 거예요. 그것도 B급이더라고요. 1893년, 부산성에 “척왜양창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때는 천도교인이 부산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떻게 붙어 있었는지 참 신기하다 이런 식으로 소개가 되어 있고 출처는 없었어요. 그리고 또 두 번째는 일본군 토벌대가 주둔을 했던 곳인데, 그곳이 재단의 자료에서는 '40계단'이라고 나오더군요. 부산 중앙동의 40계단은 유명한 곳이에요. 그곳은 6. 25 동란 때 피란민들이 살던 곳이에요. 그렇게 토벌군들이 있었던 부산 이사청, 그리고 국립강제동원역사관에 있는 나인협 흉상을 세 번째 유적지로 해서 세 군데가 생긴 거예요. 그게 너무 극적으로 느껴졌어요. 기념재단에 감사했어요. 내 논문을 아카이브에 등재해준 것도 감사했지만 부산 지역에 동학유적지를 밝혀준 것이 반가웠거든요. 그래서 우리 대학원에 자랑도 했어요. 동학농민혁명재단 아카이브에 논문 등재됐다고요. 축하도 많이 받았죠. 재단에서 보내왔던 동학농민혁명 편람이 기념사업회에 큰 도움이 됐지요. 동학혁명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부산지역에 기념사업회를 창립하여 자리를 잡아가고 계시는데,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이렇게 1년을 돌이켜보면 꽤 많은 일을 했어요. 저 혼자 한 게 아니고 도와준 분들이 참 많더군요. 감사한 일이죠. 그때그때 나타나서 함께해준 사람들이 반드시 있었어요. 마침 제가 올해 부산시 택견 단체 부회장의 마지막 임기거든요. 올해를 끝으로 활동의 방향을 동학으로 전환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버릴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제가 30년 넘게 택견을 하면서 배운 것들이 또 이렇게 쓰이게 될 테니까요. 기쁜 점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통해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동학혁명 서훈 운동을 하면서 천도교를 알려 나가고 천도교의 뿌리가 결국 동학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천도교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들이 이제 귀를 열고 듣기 시작했다는 거죠. 최근 전국 동학혁명 연대가 봉황각에서 취회를 했어요. 저녁 9시 기도식도 하고 주문 수련을 함께 하시더군요. 대교당에 가서 시일식도 같이 참여했고요. 이럴 때 천도교인들이 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산이 동학의 역사나 유적에 대해서는 불모지라고 생각을 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까 유적지는 유적지대로 갇혀서 과거의 기억 운동에만 집중해서 하는데, 저는 부산이 조금 더 역동성을 가질 수 있는 민주시민교육 운동과 함께 동학과 궤를 같이 하면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 같아서 보람이 큽니다. 기념사업회가 생기기를 기다려준 것만 같아요. 이렇게 동학에 대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계시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나는 택견을 하면서 어떤 소명이라는 거를 느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은 각자의 소명이 있는데 나의 소명은 이제 오래된 전통의 부활 그러니까 “Rebirth”, 재탄생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낡은 것의 가치를 새롭게 이끌어 내면서 오늘에 맞는 정서나 감성으로 새롭게 콘텐츠로 부활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게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택견을 할 때에도 시나리오를 쓰고 작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동학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어요. 부산기념사업회 1년, 그렇게 딱 한 걸음을 걷는 동안 같이 걷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그만큼 기대가 클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도 궁금합니다. 부산기념사업회를 만들면서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연구소입니다. 말하자면 부산동학기념사업회를 잘하기 위해서 동학연구소가 있어야 되겠고, 궁극적인 목표는 동학혁명 서훈 국민운동이나 전동연(전국동학연대)을 통해서 동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보를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또 전동연에서 함께 하고 있는 장흥 무명동학군 묘역 성역화나 이런 게 다 맞물려 있잖아요. 이러한 전 국민적인 움직임과 함께 동학이 국민적 필수 인문 과목으로 자리 잡는 것, 그게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운동이 되겠네요. 부산기념사업회는 부산이라는 지역을 통해서 하는 건데 이제 그런 뜻을 펼쳐나가면서 전 세계 인류의 교양 과목이 되는 게 동학의 포덕 사업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천도교를 해서 참 행복한 사람이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를 할래, 천도교를 할래?" 하면 난 천도교를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나는 처음부터 범신론자였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우주적인 어떤 질서 속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라고 어렴풋이 알 뿐이었어요. 그런데 천도교의 경전을 접하면서 내 마음속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그대로 글로 적혀 있어서 참 놀라웠어요. 경전에 모든 게 다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더 천도교에 대해 알고 싶고 천도교의 진리를 깨닫고 싶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바를 기념사업회 일을 하면서 펼쳐 나가고 싶습니다. 지난 7월 7일 부산 민주공원 소극장에서 개최한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 창립1주년 기념식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