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전북 김제 동학 유적지를 찾아서

기사입력 2023.08.04 14:44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s url

    01. 동학군 점령지, 금구관아 터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구면 금구리 177-16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이 점령하였던 곳이다.

    금구관아 터에는 현재 금구면사무소와 금구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금구면은 조선시대에는 금구현으로 독립된 행정구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김제군에 병합되었고, 이후 김제시가 김제군과 잠시 분리되었으나, 1995년 다시 김제시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구는 동학혁명 당시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김덕명과 김인배를 배출한 지역으로 동학혁명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선 1893년 3월 10일 동학교단이 주도하는 척왜양운동이 충청도 보은에서 열렸을 때 이곳 금구현 원평에서도 전라도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별도의 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당시 금구 원평과 충청도 보은에 집결하였던 동학교도들 가운데 변혁지향세력은 ‘척왜양’의 기치를 내걸고 전국적인 저항운동을 시도하였으나, 교단지도부의 반대와 집회에 참여한 동학교도들의 호응이 소극적이어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금구집회 이후 전봉준은 조정의 간당을 소탕하고 정부를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그것은 바로 민란의 확산을 통해 전라도 전 지역의 봉기, 나아가 전국적인 봉기를 구상하고 추진한 것이다. 〈사발통문 거사계획〉과 고부봉기는 바로 그 결과이며, 고부봉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1894년 3월 20일의 무장기포로 연결되었음은 주지하는 대로이다.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일어난 동학군은 고창-흥덕-부안-정읍-고부-태인 등을 거치며 세몰이를 하며 전주성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3월 35일 이후 고부 백산 일대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동학군은 전주성 공격에 나서기 위해 군량과 군기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3월 29일 밤에는 태인읍으로 들어가 곧장 동헌과 내아內衙를 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고, 거기서 하루를 머문 다음 4월 1일 정오 무렵에는 원평으로 진군하여 마을 앞 냇가에 진을 치고 하루를 머물렀다.

    이어 4월 2일에 금구까지 진격했던 동학군은 감영 포군 1만여 명이 동학군을 치러온다는 소문을 듣자 4월 3일 태인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감영에서는 김제 등 7개 읍에 동학군이 도망할 때 뒤를 쫓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어 다음날에는 태인, 김제, 부안, 고부 등 4개 읍으로 통하는 길을 모두 차단하여 동학군들의 이동을 막도록 하고, 감영의 중군中軍이 병대를 이끌고 태인 지역으로 들어가 금구 원평에서 113명의 동학군을 체포하였다.

    4월 3일 태인으로 후퇴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동학군은 4월 6일 ~7일에 걸쳐 고부 황토현 전투에서 감영병을 크게 물리치고 4월 8일 고창을 점령하였으며, 4월 9일 무장, 4월 12일 영광, 4월 16일 함평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4월 21일에는 장성에 도착하였고, 23일에는 처음으로 경군과 접전하여 승리한 후 여세를 몰아 정읍을 거쳐 전주를 향하였다. 4월 25일 원평에 도착한 동학군은 이곳에서 국왕의 효유문을 가지고 온 이효응李斅應과 배은환裵垠煥을 살해하였다. 국왕이 보낸 군대와 맞서 싸운데 이어 국왕이 보

    낸 사자를 죽인 것이다. 원평에서 하루를 숙영한 동학군은 다음날 팥정(두정)으로 이동하여 하루를 더 보낸 후 삼천을 건너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5월 8일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물러난 동학군은 각지로 돌아갔다. 이때 관군은 동학군에게 물침표勿侵標를 나누어 주고 동학군을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나, 금구현감은 이를 어기고 동학군을 체포, 처형하였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이미 5월 11일의 원정原情에서부터 몇 차례에 걸쳐 그들의 파직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은 동학군 측에서 이들을 먼저 공격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전봉준은 김학진에게 나주와 금구의 수령에 대해서도 파직을 꾸준히 요구하였고, 7월 18일 금구현령 김명수는 자기가 관할하는 금구 경내에서 땅과 산을 매점買占한 행위가 국법을 어겼다는 명목으로 파직되고 의금부로 잡혀 올라갔다.

     

    이후 제2차 봉기 시기에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부대에 패배한 동학군은 다시 전라도 쪽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이 이끌던 동학군 주력부대는 퇴각하면서도 논산 등지에서 수차례 접전하며 11월 19일에는 전주로 들어갔으며, 11월 23일에는 금구 쪽으로 이동하였다. 

    전봉준은 이때 동학군 상황에 대해 

    "금구에 이르러 다시 초모하였을 때 동학군의 그 수는 증가되었으나, 기율이 없어 다시 개전하기 어려웠다”

    라고 진술하였으며, 관군 측에서는 금구 원평으로 간 동학군이 삼천여 명, 25일 원평에 집결해 있는 동학군의 수가 1만여 명 이상인 것으로 보고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원평 구미란 산자락에 진을 치고 일본군 및 관군과 접전하였다. 

    오전 9시경에 시작된 전투는 오후 4시경에 끝났다. 이 전투에서 동학군은 37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관군과 일본군은 조총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동학군은 원평에서 물러나 태인으로 후퇴하였다.

    현재 금구면사무소와 금구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자리가 관아 자리이며, 그 앞으로 금구장터가 펼쳐진다.

     

    김제01.jpg

     

    김제02.jpg

     


     

    02. 동학군 처형지, 금구장터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구면 금구리 453 일원

    동학혁명 당시 전주 감영의 수교 정석희와 동학군들이 처형당한 곳이다. 현재 금구면사무소 앞에서 금구농협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금구장터였음을 지역주민들이 모두 잘 알고 있다. 

    현재도 금구면 소재지의 중심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전주로 내려보내 동학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홍계훈은 장위 영병 700여 명을 이끌고 4월 5일 오전에 군산항에 도착하였으며, 6일에 상륙하여 4월 7일 오후 6시경 전주부에 도착하였다. 

    홍계훈이 인솔하던 경군들 가운데는 군산에 상륙한 이후 도망하는 자가 속출하여 군산에 도착한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난 4월 12일경에 이미 그 수가 원래의 700명에서 470명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또 향병은 물론 도망한 경군까지 동학군에 합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계훈은 동학군 진압에 나서기보다는 전주 감영의 군사책임자들을 동학군과 내통했다는 구실로 하나씩 처단해 나가는 엉뚱한 짓만 하고 나섰다. 

     

    4월 11에는 전前 전라감영의 영장 김시풍金始豊이 동학군과 내통하였으며, 심지어 ‘7월 15일 불궤(반역, 七月望日不軌)’를 꾀하고 있다는 죄목으로 당시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 수감중이던 김용하 등 동학군 3명과 함께 전주 남문 밖에서 처형하고 효수하였다. 

    이어 4월 11일 전라 감영의 수교首校 정석희鄭錫禧를 잡아 가두고 체포한 동학군 80여 명 중 3명을 남문 밖에서 처형하였으며, 정석희에게도 본래 간사하고 흉악한 부류로서 고부봉기 당시 전봉준으로부터 뇌물 1,200냥을 받는 등 동학군과 내통하였다는 죄목으로 4월 17일 오후 2시경 금구장터에 이르러 군민을 크게 모아 효수하였다.

    이때 정석희의 목을 쳤는데 단칼에 베어지지 않자 톱질하듯이 베어서 처참하게 죽였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금구장터에서는 정석희뿐만 아니라 관군에 체포된 많은 동학군들이 효수되었다. 동학군을 참수하여 가로수에 매달아 놓았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전해지고 있다. 

    가로수들은 도로가 확장되면서 모두 베어지고 현재 한 그루만 남아 있다.

     

    김제03.jpg

     


     

    03. 금구·원평 도소(都所, 동록개의 집)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84-3

    동학혁명 당시 금구 원평지역 동학도소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원평 도소가 있었던 장소는 지역주민들 사이에 구전되고 있고, 도소가 설치되었던 건물은 많이 훼손되기는 했으나, 현재까지 그 위치에 남았다.

    제1차 봉기 후 전주성을 점령하였던 동학군은 5월 8일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빠져나왔다. 

    이때부터 이들은 각지로 돌아가 도소를 중심으로 폐정개혁 활동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전봉준은 우도지역을, 김개남은 좌도지역을, 맡아 동학군을 통할하면서 폐정개혁 활동을 추진해나갔다.

    금구 원평 지역에서는 이 지역의 대접주 김덕명이 중심이 되어 폐정개혁 활동을 추진하였다. 

    그때 원평리 학원마을 살던 백정 출신의 신분이었지만, 부를 축적해서 부자가 되어 있던 동록개라는 사람이 김덕명을 찾아와 “신분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이 집을 동학군에게 헌납하였다 한다. 동학군은 이 집을 동학군 도소로 활용하여 백정 출신인 동록개가 원하던 신분 부정운동을 비롯한 폐정개혁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건물은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 도소 혹은 집강소로 사용되던 건물로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며, 지붕만 초가에서 와가로 바뀌었을 뿐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집강소 통치기 동안 전봉준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전봉준이 군수물자를 비축했던 곳)

     

     

    김제04.jpg

     

    04. 금구·원평 집회지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49 (옛 원평장터 일대)

    동학혁명의 전사前史를 이루는 교조신원운동 당시 동학교도들의 척왜양집회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동학농민혁명 금구 원평집회 장소 원평장터〉 안내판을 설치해 두었다.

    동학혁명과 관련하여 원평은 대단히 뜻깊은 곳으로 전주로부터 서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1893년 금구취회의 현장이었으며 금구대접주 김덕명 포의 근거지였다.

    1893년 3월 동학지도부가 주도한 취회가 충청도 보은에서 열리고 있을 때 일군의 호남지방 동학지도부에 의한 취회가 이곳 원평에서 열렸다.

    이를 금구취회 또는 호남취당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전봉준이 중심이 되었고 손화중도 참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전 시기에 전개된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주로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등 종교적 목적에 치중하였던 것과 달리 1893년 3월의 금구집회와 보은취회에서는 ‘척왜양’의 기치가 중심을 이루었다.

     

    김제05.jpg

     

    05. 김덕명 추모비 / 위령각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80-2 (학수재)

     

    김제06.jpg

     

    김덕명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김제 시민들이 1987년에 건립한 비이다. 

    1987년에 현 위치 학수재鶴壽齋에 건립된 이래 현재까지 존치되고 있다. 

    학수재 동산에는 김덕명 장군을 비롯한 이 지역 출신 중요 인물들의 추모비·공적비 등이 들어서 있으며, 현재까지도 매년 위령제를 올리는 등 지역주민들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동학혁명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원평 출신인 김덕명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김덕명 장군의 이름은 준상峻相이고 자는 덕명德明 호는 용계龍溪, 본관은 언양彦陽으로 1845년 10월 언양 김씨의 세거지인 금구현 수류면 삼봉리 거야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금산사 입구 용계마을에서 아버지 한기漢驥와 어머니 파평윤씨의 장자로 출생했다. 그 성장 과정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풍채가 뛰어나고 언변이 유창했다고 한다.

    동학혁명의 지도자들 가운데서는 비교적 일찍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이후 삼례집회와 금구·원평집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으며, 동학혁명 당시에는 원평의 대접주로 동학군을 이끌었다. 

    공주전투에서 패배한 후 원평전투(1894년 11월 25일)와 태인전투(11월 27일)를 마지막 항전으로 1895년 정월 1일 본면 장흥리 안정 절골에서 태인 수성군에 의해 피체되어 그해 3월 29일 서울에서 같은 혁명 동지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혁명가의 한 생이 막을 내렸으니 향년 51세였다.

     

    김제와 원평 지역주민들은 김덕명 장군의 이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87년 11월 이 고장 노인들의 모임인 원평 학수재영락회 회원들이 주체가 되어 동학혁명 당시의 구미란 전투에서 전사한 무명동학군이 묻혀 있던 작은 동산인 학수재에 무명동학군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위령각〉을 짓고, 〈애국지사 용계김덕명장군추모비龍溪金德明將軍追慕碑〉를 세웠다. 

     

    비문은 당시 모악향토문화연구 회장을 맡고 있던 향토사학자 최순식이 지었다. 

    김덕명 추모비 바로 오른편에는 원평 출신의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남정이종희추모비愛國志士南亭李鍾熙先生追慕碑〉가 세워져 있다. 

    원평 지역주민들은 이 학수재 동산 위에 위령각을 짓고 전봉준장군, 김덕명장군, 동학혁명 무명 전몰용사, 독립운동가 이종희, 원평장터에서 일어난 1919년의 기미독립만세운동 항일투사 9명 등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년 원평 전투가 일어난 11월 25일을 기해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06. 구미란 전적지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623-3일대

    김제07.jpg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과 관군 및 일본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수십 명의 동학군이 전사한 곳으로 이름 없이 쓰러져 간 동학군의 무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동학군은 우금치에서 패배한 후 논산을 거쳐 전라도로 후퇴하였다. 11월 19일 전봉준은 1,000명(500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전주로 들어갔으며, 23일에는 금구 쪽으로 이동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25일 원평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관군 및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이 전투는 오전 9시에 시작되어 오후 4시경에 끝났다. 수십 명의 동학군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현재 구미란 전적지에는 당시 전투과정에서 희생당한 무명동학군들의 무덤이 다수 남아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이 1994년부터 구미란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동학군의 넋을 위로하고 상생과 화합을 위한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동학혁명의 꽃을 끝끝내 피워보지도 못하고 꺾여진 자리다.

    신영우 충북대 교수는 구미란 전투를 “참혹했다”고 기술했다. 이 전투에 관한 기록은 진압군이 쓴 몇 구절밖에 없기 때문에 전투상황조차 재구성할 수 없지만, 생존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본 구미란 전투는 참혹했다는 것이다. 

    기록에는 단지 시체 37구와 쌀 500석 조총 등을 포획했다고 적혀 있지만, 이는 일본군이 우금치전투의 희생자를 대폭 축소해 기록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는 분석이다.

     

    이이화 역사학자도 구미란 전투의 치열했던 상황을 여러 기록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는 “우금치에서 패한 전봉준은 다시 세를 규합해 3000여 명의 동학군을 원평 구미산에 집결시켜 진을 펼쳤다. 뒤따라 온 일본군과 관군 300여 명은 진을 치고 대치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포격을 퍼부었다. 

    서로 진의 거리는 1000보쯤 됐다고 한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재래식 무기를 쓴 동학군은 불리했다.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지만, 동학군은 더욱 결사항전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결국 저녁 무렵 관군은 먼저 산 위에 올라 육박전을 벌인다. 그리고 수많은 시체가 쌓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우금치에서 대패한 전봉준은 이 전투에서 반전의 계기를 잡고자 했으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고 재기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룬 채 도피길에 올랐다.

     

     

     

    07. 무명 농민군 묘역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산121, 원평리 산2 일대

    김제08.png

    동학혁명 당시인 1894년 11월 25일 벌어진 원평 구미란 전투에서 전사한 무명동학군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학살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자행되었다. 아직도 공주, 홍성, 보은, 홍천, 논산, 장흥, 강진, 광양, 해남, 진주, 하동, 상주, 예천, 강릉, 해주 등지에 동학군의 원혼이 떠돌고 있다. 

    원평에서는 구미란 뒷산과 학수재 앞산에 묻힌 이름 없는 희생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학수재에 무명동학군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 왔다.

     

     

    08. 김덕명 생가터

    소재지) 충남 예산군 삽교읍 역리 125-23

    김제09.jpg

    동학혁명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던 김덕명이 살던 곳이다.

    김덕명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 있던 이곳에는 현재 오성제과라는 과자 공장이 들어서 있어 동학혁명과 관련된 어떤 의미도 확인할 길이 없다. 김덕명 생가터는 원평집회터나 구미란 전적지 동쪽으로 불과 1km 정도 떨어져 있다.

    원평은 금구취회의 중심지이자 집강소 통치기에 대도소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의 접주 김덕명은 언양김씨 세거지인 금구현 수류면 거야마을 일대(금산면 삼봉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금산사 입구 용계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평의 동학접주로 활동하면서 1893년 금구·원평집회에 적극 참여하였고, 백산대회 때에는 총대장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 김개남의 총참모로 추대되어 군량미 공급과 금구 일대의 동학군 규합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황토현전투, 장성전투, 전주성 점령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원평전투와 태인전투에서 패한 뒤, 김덕명은 참담한 심정으로 전봉준과 헤어져 집안 재실이 있는 안정사 절골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1895년 1월 1일 태인 수성군에 의해 체포되어 일본군에 넘겨진 그는 서울에서 전봉준과 함께 3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09. 김덕명 장군 묘역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장흥리 114 (안정 절골)에서 금산면 삼봉리 산59-1로 유족이 이전

    김제11.jpg김제10.jpg

     

    김덕명은 금구·원평지역의 대접주로서 1893년 3월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보은집회가 있을 당시, 전라도 금구 지역에서 교도 1만여 명을 소집하여 독자적인 금구집회를 개최하는 등, 금구 취당세력의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금구 토반인 언양 김씨로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었던 그는 전라도 일대의 접주들(전봉준, 손화중, 김개남등)의 구심점으로 활동하였다.

     

    김덕명은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에서 1개월가량 은신하다 마을 사람들의 밀고로 1895년 1월 1일 태인 수성군에 체포되었다. 김덕명에게 짚둥우리를 씌우고 상투와 양쪽 팔을 묶어 끌고 가자, 설날 준비로 부산하던 부녀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애통했다고 한다.

    동학혁명 지도자 중 가장 연장자였던 김덕명은 1895년 3월 29일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에서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과 함께 51세로 최후를 마쳤다.

    김덕명 장군의 묘역은 1987년 후손들에 의해 조성되었다. 묘비에는 ‘의사언양김공덕명지묘’라고 씌어 있으며, 묘역의 아래에 있는 것이 부인 이씨의 무덤이고, 위쪽에 둘레석이 있는 것이 김덕명 장군의 무덤이다.

     

    10.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 김인배 생가터

    소재지) 전북 김제시 봉남면 화봉리 23-18 일원

    동학혁명 당시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로 전남 동남부와 경남 서남 지역에서 동학군을 이끈 동학군 지도자 김인배가 태어난 집터이다. 김인배의 생가터는 후손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생가터에는 현재 정미소가 들어서 있다.

    김인배(金仁培, 1870~1894)의 보명譜名은 용배龍培이며, 자子는 양여陽汝,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870년 6월 10일 아버지 현표와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김제시 봉남면 화봉리(봉서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당숙인 현모에게 입양된 후 한학을 하였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일찍이 구국의 뜻을 세우고 1894년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한 동학혁명에 참여해 황토현 전투와 전주성전투에 장령으로 활동하여 청년 장군이란 명성을 얻었다. 

    김개남과 기맥이 통하던 금구출신의 대접주 김인배는 1894년 6월 말경 동학군을 이끌고 순천에 들어와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폐정개혁 활동을 전개하였다.

    9월 1일에는 흥양·순천 곤양의 동학군을 이끌고 경상도 하동을 공격하면서 9월 10일경에 재기포하는 전봉준에 앞서 사실상 재기포를 시작하였다. 

    하동부사는 도주하였고 민보군이 저항하였으나, 동학군은 2일 초저녁 하동부를 점령하였다. 3일 날이 밝자 동학군은 하동부 안에 도소를 설치하였다. 

     

    제일 먼저 민보군이 일어났던 화개동에서는 민가 500여 채를 불태웠다. 이들은 5~6일간 머물다가 일부는 호남으로 되돌아가고 나머지는 김인배를 따라 진주 공격에 나섰다.

    영호남 연합 동학군이 진주성을 점령한 것은 9월 17일이었다. 다음날 영호대접주 김인배가 천여 명을 이끌고 진주로 들어와 질청作廳에 대도소를 설치하였다. 동학군들은 성 둘레에 오색깃발을 휘날렸다. 그중 성루의 맨 앞 큰 깃대에는 붉은 바탕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 쓴 대형 깃발을 내걸었다.

     

    10월에 들어 일본군과 관군에 쫓겨 순천으로 후퇴했다가 22일 다시 하동으로 진격하다 섬거역에서 일본군을 앞세운 관군에 패하여 광양으로 후퇴했다.

    11월 10일에는 좌수영(여수)으로 진격했다. 동학군은 덕양역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좌수영의 진산인 종고산을 점령했으나 추운 계절이어서 지탱하지 못하고 그냥 회군했다. 11월 16일 다시 좌수영으로 진격하여 서문에서 며칠 동안 접전을 벌였으나 입성을 못하고 회군했다. 11월 20일 세 번째로 좌수영을 공격하여 종고산을 점령하였는데 이날 밤 일본군은 서북의 흥국사 쪽에서 수사 김철규의 관군은 남쪽으로부터 협공하는 바람에 패하여 좌수영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12월 6일 일본군과 관군이 남하하여 광양으로 밀려 다음날인 7일에는 민보군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접주 류하덕과 함께 피체되어 효수당했다. 

    김인배는 6일 밤 최후를 각오한 나머지 처남 조승현를 불러 “장부가 사지에서 죽음을 얻는 것은 떳떳한 일이요 다만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로다. 

    나는 공생동사를 맹세한 동지들과 최후를 같이할 것이니 그대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를 봉양하시오”라고 일렀다. 그리하여 조승현은 이날 밤 광양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광양읍의 빙고등氷庫嶝은 동학군의 포살장이었다고 한다.

     

     

    그가 중심이 된 ‘영호도회소’는 동학혁명사에서 유일하게 다른 지역과 연대한 조직을 만들고 활동을 벌인 사례로 꼽힌다. 

    김인배가 이끈 영호남 연합군이 순천에 본영을 두고 인근 광양현과 낙안군, 좌수영 지역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서부 경남지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김인배라는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제12.jpg

     

    11.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 김인배 장군 추모비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선동리 407-1

    동학혁명 당시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로 전남 동남부와 경남 서남 지역에서 동학군을 이끈 김제 원평 출신의 동학군 지도자 김인배를 추모하여 2010년에 세운 비이다. 

    김인배를 비롯한 김해 김씨 경파 화원 종중의 영모당에 함께 있다.

    추모비로 올라가는 농로 변에는 〈동학농민혁명군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 김인배 봉안묘奉安墓〉라는 돌로 된 작은 비가 서 있다. 그 옆에는 김해 김씨 경파 화원 종중 영모당 입구라는 작은 석비가 서 있다.


    김제13.jpg

     

    글 조성갑

    사진 최인경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