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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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 제막식내년이면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는다. 동학농민혁명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수십만 명의 동학혁명군이 희생되었다. 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1894년 1월 10일 고부에서 첫 기포한 동학농민혁명은 1895년 초까지 호남을 비롯하여 영남, 호서, 경기, 강원, 해서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정부 관군과 동학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한 일본군의 연합전선으로 각지에서 동학혁명군은 죽임을 당하였다. 일부에서는 이를 제노사이드 즉 대학살이라고 한다.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앞두고 지난 10월 30일 오전 11시 반경 전남 나주시 나주역사공원 내에서 동학혁명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이날 제막식에는 일본인 동학기행 참가자 30여 명과 한국 측 참가자, 신정훈 국회의원, 윤병태 나주시장 등 한·일 두 나라 시민 1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은 이날 동학혁명군의 넋을 기리면서 전날 세상을 떠난 고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 95) 사죄비 건립 일본 쪽 공동추진위원장(일본 나라대학 명예교수)을 추모하는 묵념을 올렸다. 제막식은 사죄비 제막, 나천수 사죄비건립추진위원회 공동대표의 경과보고, 동학농민혁명군의 혼을 부른 시 낭송과 살풀이춤(작시 나천수, 살풀이춤 나금자, 시 낭송 김태정),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와 나천수 공동대표의 비문 낭독, 이노우에 가츠오 교수와 박맹수 사죄비건립추진위원장의 각각 인사말, 윤병내 나주시장의 환영사, 신정훈 국회의원·이상만 나주시의회 의장·주영채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의 축사, 기념촬영의 순으로 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주영채(주선원)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은 축사에서 ‘슬픈 가족사’를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그는 “나주 동학농민군 희생자 사죄비는 한국과 일본 ‘동학’ 시민들의 노고와 바람의 결실”이며, “사죄비의 현장은 한·일 평화와 화해의 원점이자 동북아·세계 평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죄비 건립 경과보고에 의하면, 2018년 제13차 한일동학기행 방문단이 나주 호남초토영을 답사하면서 비롯되었다. 나주 호남초토영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에 의해 동학혁명군의 처형장이 있었고, 이곳에서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호남초토영은 동학혁명군의 진압 책임자인 일본군 미나미 고시로(南小次郞) 소좌가 관장하고 있었다. 일본 동학기행 방문단을 이끌던 나카츠카 교수는 “일본군이 가해했던 역사를 덮어 놓는다는 것은 학자적 양심에 위배된다”하고 조그마한 위령비를 세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위령비 건립은 이듬해 2019년 민간인인 차원에서 건립하기로 하였다. 위령비는 2019년 나주에서 개최된 한일동학학술대회에서 이노우에 교수가 ‘사죄문’을 발표한 후 <사죄비>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22년 일본 측에서 건립 모금운동을 전개하였고, 한국 측에서 뜻있는 시민들의 모금운동이 이어졌으며, 2023년 10월 30일 사죄비를 제막하였다. 한편 이날 사죄비 제막식에는 천도교 측에서는 주선원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 관장, 성주현 신인간 주필, 박길수 모시는사람들 대표, 김명재 순천동학농민혁명 영호도회소 사무국장 등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사진, 글_성주현(신인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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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유적지를 찾아서(2)2022년 11월 20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동면 화암약수터 입구까지 산책하다가 오는 도중에 정선문화원과 정선군 향토사연구소에서 설치한 동학유허지 싸내에는 (동학교조 수운 대신사 부인 박씨 사모님이 말년에 기거하시던 곳이다) 대신사가 1864년 참형을 받아 순도하신 이후 박씨 사모님은 단양접주 민사엽(閔士葉)의 도움으로 정선 문두곡에서 사시다가 민사엽이 환원하자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후 2세 교조 해월신사(海月神師)가 정선지역에서 자리를 잡게 되자 도접주 유인상(劉寅常) 등의 주선으로 1872년 이곳 싸내(米川)에 정착하시게 되었다. 대신사부인 박씨 사모님은 동학도인(東學道人)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다가 1873년 12월 10일 향년 49세로 환원하셨다고 적고 있다. 그 후에는 사시던 터라는 곳은 찾을 길이 없이 싸내에 유허지만 남아 있다. 우리 일행은 유허지 밑에 꽃씨를 뿌리고 아침식사를 마치고 점심도시락을 각자 받아가지고 숙소 근처에 있는 화암동굴(畵岩洞窟)을 견학하기로 하여 도보로 동굴에 도착, 화암동굴은 금광석과 석회석 자연동굴이 함께 어울러져 있는 세계 유일의 화암동굴은 세계문화 유산이 되었단다. 대자연의 신비 화암동굴은 동양최대 규모의 유석폭포는 높이 28m의 황금색 종류 폭포로 웅장한 규모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조금 더 내려가면 6억년 동안 생성된 대석순과 석주(石柱)가 자리잡고 부처상과 성모마리아상은 정교하기가 극치를 이루고 남근(男根)은 천하일품이다. 화암동굴을 관람하고 우리는 해월신사께서 49일 기도를 하신 적조암(寂照庵)으로 자동차 편에 분승하여 태백산 고한으로 출발하였다. 적조암 입구에 고한(古汗) 사랑이라는 서비(石碑)가 있으며 아래쪽에 정선문화원에서 세운 동학유허지에 기록을 보면 적조암은 동학2세 교조 해월신사 최시형(海月神師 崔時亨, 1927-1898년)가 1872년 10월 15일부터 12월 5일까지 49일의 특별기도를 드린 곳이다. 당시 해월신사는 적조암의 老스님 철수좌(哲首座)의 양해를 얻어 강수, 윤인상, 전성문, 김해성 등 동학의 지도자를 대동하고 특별기도를 하였다. 이 특별기도는 이필재의 난(1871년 3월)에 풍비박산이 된 동학교문이 다시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 강원도 정선과 영월, 충청도 단양 등 삼남일대로 교세를 넓혀 1894년 갑오동학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적조암으로 오르는 길은 산길인데, 바닥이 돌로 되어 있어 울퉁불퉁하여 잠시도 소홀히 하면 넘어질 수 있어 조심조심 가파른 돌길을 오르는데 힘이 들어 몇 번 쉬었다가 오르니 적조암에 도착하였다. 이정표가 있어 살펴보니 정암사 2.8km 만항재 3.7km 자장율사 순례길이라 기록되었는데 적조암은 흔적만 남아 있다. 적조암의 터를 보니 배산(背山)이 병풍을 쳐놓은 듯 좋으며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며 안산(案山)이 조화를 이루었는데 개울물이 돌속으로 숨어 흐르니 물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한 후에 기도를 시작하여 오후 4시에 끝나 하산하기 시작하였다. 적조암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편으로 고한역이 아닌 민둥산역으로 출발하였다. 민둥산역은 옛 지명은 증산역이었다. 증산역은 지명(地名)에서 유래되었는데 동쪽에 고부산 북쪽에 지억산 남쪽에 두위봉이 둘러선 가운데 시루봉이 있다는 증산 떡시루 갔다하여 증산이라 하였는데 석탄생산으로 한때 번창하였지만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새로 2009년 주민들이 민둥산역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통하여 관광자원으로 활력을 찾고 있다. 억세풀축제로 말이다. 우리는 민둥산 역에서 서울 청량리 도착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좌석표가 있어 피곤함을 풀기가 좋았다. 사진, 글_ 허 유 충남 공주 출생. 아호 : 창포(蒼.浦). 서예가. (사)한국비림박물관 관장. 문화예술신지식인. 한국비림박물관서화대전 운영위원장. 중국한원비림 고문. 중국상지비림 명예박물관장. 중국중원공자학회 명예회장. 한국고서연구회 부회장. 세계비림협회 한국대표. 중국한국명예대사. <한빛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제4회 <한빛문학상> 수상.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 회원 *본 글은 2023 제13회 <시와 창착 문학상> 특별문화대상 수상작으로 저자와 잡지사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도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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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유적지를 찾아서(1)2022년 11월 19일 토요일 오전 7시 34분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동해 - 중앙선 열차에 몸을 싣고 박동산 선생님의 인솔 아래 16명이 동행하였다. 정선 민둥산 갈대축제로 기차표가 매진되어 입석으로 가게 되었다. 성강현 교수님, 종무원, 정갑선 현 교무관장, 여성회장 등이 합류하여 정시에 출발하였다. 좌석이 없으니 사람이 없는 자리를 찾아다니면서 기차는 달리고 있다. 벌써 덕소, 양평을 지나 용문 지평을 지나더니, 석불(石佛), 일신 매곡(梅谷) 양동, 삼산을 거처 서원주(西原州)에 도착하니 자리가 많이 남아 우리 일행 모두가 의자에 앉게 되었다. 원주(原州)역에 9시에 도착 제천, 연당, 영월, 예미(禮美)을 지나 자미원역 민둥산 역에 10시45분에 도착하여 남면(별아곡역) 옆 청솔가든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목적지 동면 싸네로 도보행진으로 출발하였다. 정성군 남면은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로 고려가 망하고 두문동(杜門洞) 72인 중 7인이 정선으로 은거하던 곳으로 매일같이 고려 수도가 있는 송도(松都)에 북향 제배하고 충신불사2군(忠臣不事二君)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충절로서의 지조를 지키던 곳이다. 두문동 7인은 전오륜, 김충한, 고천우, 이수생, 황의용, 변귀수, 김한 등 7현(七賢)이 매일같이 산위에 올라 통곡하여 한시(漢詩)로 달래니, 이 시(詩)가 인근에 전하여져 정선아리랑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1978년경에 정선문화원 최문규 원장이 두문동 7인의 도원가곡(桃園歌曲)의 자료를 발견하여 정선역 광장에 도원가곡비를 세우게 되었다. 내가 제호를 쓰게 되어 제막식에 참석하여 그후로 매년 화암약수(畵岩藥水)터 시비(詩碑)를 지은 정공채 시인과 같이 최문규 원장의 초청으로 하계학교 강사로 참석하였기 때문에 낯설지 않았는데, 남면에서 동면으로 넘어오는 길은 초행이며 도보(徒步)로 걷다보니 다리도 몸도 말을 듣지 않았다. 중간에 잠시 쉬어가는 길목 작은 동리에 처음 보는 고목이 느릅나무(楡)라고 하는데 730년 되는 수령이며 보호수(保護樹)란다. 그 동네에 군락을 이루는데 3그루가 제일 오래된 보호수다.(정선군 남면 유명리) 고구려 평원왕 공주가 어려서 울기를 좋아하여 왕인 아버지가 자주 울며는 장차 공주는 바보 온달한테 시집보낸다고 하였더니 공주가 자라서 아버지 평원왕 호위무사장군한테 정혼하려고 하니 공주 말이 어렸을 때 바보 온달한테 시집보낸다고 하셨으니 바보 온달한테 시집간다니 바보 온달보다 바보 공주가 아닌가. 시녀 한 명과 금은보화를 가지고 산속으로 바보 온달을 찾아가 보니 늙은 어머니는 장님이고 온달은 나무꾼인데 그래도 공주는 어려서 아버지가 맺어준 인연이라 생각하고 패물을 정리하여 말(馬)을 사고 훈련시켜 장군을 만들었는데, 힘이 천하장사라 젊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생계를 하다 보니 그중에 느릅나무로 양식을 하였다는 말이 있다. 지금도 중국 집안시(集安市) 그 당시 고구려 수도에 가며는 느릅나무로 녹말을 만들어 국수와 부침도 해먹고 있다. 남면에 있는 730년이나 되는 느릅나무는 대단한 보호수다. 느릅나무 보호수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싸내를 향하여 걷고 또 걸어 화암 약수터에 도착하였다. 나는 몇 차례 약수터에 왔기 때문에 낯설지가 않았는데 화암장(畵岩莊) 숙소가 변하였다. 서울에 계신 김수복(金洙福) 여사가 운영하던 곳으로 정선문화원 최문규 원장과 2박 정도 숙박을 하였었다. 김수복 여사는 5년 전에 고인이 되셨다고 여걸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다. 화암장이 지금은 군청에서 인수하여 화암 콘도를 개조하여 관광객들을 받는다고 하며 화암약수터는 그대로인데 정공채 시인의 시가 나그네를 반기네요. 화암 약수터까지 성강현 교수, 정갑선 교무관장 나와 셋이서 약수 한 잔씩 마시고 탁주일배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어 다시 싸내로 출발 숙소에 도착하였다. 숙소에서 1시간을 기다리니 동학도들이 도착하기 시작, 꿀맛 같은 만찬으로 시작 기도를 하고 12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사진, 글_ 허 유 충남 공주 출생. 아호 : 창포(蒼.浦). 서예가. (사)한국비림박물관 관장. 문화예술신지식인. 한국비림박물관서화대전 운영위원장. 중국한원비림 고문. 중국상지비림 명예박물관장. 중국중원공자학회 명예회장. 한국고서연구회 부회장. 세계비림협회 한국대표. 중국한국명예대사. <한빛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제4회 <한빛문학상> 수상.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 회원 *본 글은 2023 제13회 <시와 창착 문학상> 특별문화대상 수상작으로 저자와 잡지사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도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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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영웅 최진립 장군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글을 남겼다. “우리 선조 험천 땅에 공덕비를 높이 세워 만고유전 하여보세. 송백 같은 이내 절개 금석으로 세울 줄을 세상 사람 뉘가 알꼬.”, “선조의 충의와 절개는 용산에 남아 있네. 해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우리 임금님 성덕을 다시 돌아보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언급한 ‘선조’는 잠와 최진립 장군으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7대조이다. ‘용산’은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있는 용산서원을 말한다. 유림에서는 최진립 장군의 충절과 학문을 기려 용산서원을 창건하여 공을 제향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숙종 37년에 임금이 친히 ‘숭렬사우崇烈祠宇’로 글을 내린 사액 사당이다. 당시 무신으로 사액 사당을 받은 이는 이순신과 김시민 장군뿐일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용산서원 입구에 공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1568~1636) 장군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최진립 장군은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의 17세 후손이며 사성공 최예의 6세 후손이다. 1568년 경주 현곡면 하구리 구미산 아래에서 참판공 최신보와 평해황씨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나 자랐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4월 21일 경주성이 함락됐다. 당시 25세였던 장군은 아우 최계종, 당숙 최신린, 최봉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5월 27일 김호, 손엽, 권사악, 이눌 등의 의병장들과 힘을 합해 계연(김유신 장군 묘 아래 경주 서천 일원)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6월 2일에는 언양에서 경주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김기 의병장과 함께 열박재(충의당과 울주군 두서면의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7월 27일에는 경주 손엽, 권복시, 권사민 의병장들과 함께 영천성 수복 전투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 100여 명을 이끌고 울산 서생포에 주둔 중인 적을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장군은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2등을 받았고, 훈련부정, 도총도부사, 마량진 첨사, 경원 부사 등을 역임했다. 1636년 12월 13일,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군대는 며칠 지나지도 않은 12월 16일에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까지 포위했다. 최진립 장군은 69세라는 많은 나이에도 군사를 일으켜 남한산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가 전장으로 달려가기 직전, 충청감사 정세규가 ‘늙어 전장에 나가기 마땅치 않다’고 만류했지만 최진립 장군은 “내가 늙어 싸워서 이길 수 없더라도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는 있다”고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1637년 1월 2일, 청나라 장수 양고리(楊古利·양굴리)가 이끄는 적과 대치했다. 열세인 상황에서 최진립, 나성 현감 김홍익, 남포 현감 이경징, 금정 찰방 이상재 등은 포기하지 않았다. 훈련이 부족하고 전투력이 미약한 소수 부대지만 잘 통솔하여 적과 대등하게 싸웠고, 하루종일 10여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아군은 탄약과 화살이 바닥나고 군사도 이미 반이나 잃었다. 최진립 장군은 공주영장으로 군사를 이끌고 용인 험천 전투에 참여하여 용전하다가 장렬히 순절했다. 다음 해에 시체를 수습했는데 ‘그 모양이 살아 있는 듯하고 화살과 총알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름을 떨쳤던 장수 중 1636년 병자호란 때까지 생존한 이는 거의 없었다. 일본군 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이 당시 63세의 고령으로 병자호란에 참전한 사실이 두드러지는 정도다. 그런 만큼 불과 25세의 나이로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했던 최진립 장군의 69세 병자호란 참전과 순절은 특별한 이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진립 장군 묘소는 나라에서 내린 명당 터에 장지를 마련하여 장례를 치르고,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청백리에 녹선하였다. 고향 내남면 이조리에 정려비각을 세워 충절을 만대에 전하도록 하였다. 최진립 장군 묘소 뒤편에는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던 셋째아들 현감공 최동량의 묘소가 있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실천하며,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고, 해방 후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경주 최부자의 현조이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99호인 충의당은 경주 최씨 종가로 최진립 장군이 살았던 집이다. 본래 당호는 흠흠당欽欽堂이었는데, 1760년 무렵 건물을 고쳐 지으면서 집 이름을 충의당으로 바꾸었다. 충의당 일대는 ‘충의 공원’으로 조성하였고, 장군의 기마동상과 유물관인 충의관이 건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취재진이 충의당 종택을 방문한 날 종손을 만나 집안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에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와 한씨 사모님 이야기도 있었다. 사당인 충렬사와 닫혀있던 최진립 장군 위패도 열어서 보여주셨다. 사당 들어가는 입구에 200년 된 매실나무가 세월의 인고를 견디며 잘 자라고 있다. 기나긴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고 꽃 활짝 피는 날 다시 방문하고 싶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탄신하신 비슷한 시기에 심어졌으리라 여겨진다. 동학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는 마지막 경주 최부자인 최준을 나이로는 22살이나 많았지만 늘 존중했다고 한다. 최준에게 수시로 “동학은 경주 최씨와 최부자 가문의 가르침”이라며 예우했다. 경주 최씨, 그중 최진립 장군으로 시작되는 가계도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런 표현을 했을 것이다. 최진립 장군 묘소 아래 사패지賜牌地에 울산과학기술원(UNIST)이 건립되니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동학을 창명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최진립 장군의 7세손이니 공의 위대한 정신은 자손 대대로 이어졌다. 글 조성갑 사진 최인경 (탐방 팁) 용산서원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59 충의당과 충의공원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충의당길 15 최진립 장군 정려비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513-1 최진립 장군 묘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 산 157 (울산과학기술원 교수아파트 입구)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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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상대로 최초의 위대한 승리내포 동학, 하나의 세력으로 내포 지역의 동학은 1880년대 초에 전파되고 188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1894년 5월 홍주 목사 이승우李勝宇가 부임하면서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이승우는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동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였고 관군을 동원하여 체포와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내포의 동학군들은 하나의 세력으로 거대화하려는 자구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이는 지역적으로 포별 각개활동을 하기가 더 이상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전국적으로는 이른바 2차 봉기의 분위기도 무르익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포의 동학군들도 그동안 위축되었던 활동을 회복하고,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목적에 동참하기 위하여 여미벌(餘美坪, 현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 총집결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여미벌에서는 ‘내포 동학군’이라는 하나의 거대 조직이 탄생하게 되었고, 내포 각지에서 활동하던 동학도들이 여미벌에 총집결하니 그 수가 1만 50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총봉기를 향한 서막-역사적 전투로 이들은 여미벌에서 창의의 뜻을 바로세우고 기세를 올리며, 대오를 엄중히 하고 식량과 무기를 준비하는 등 조직을 재편하면서 조만간 닥쳐올 전쟁에 대해서도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1894년 10월, 여미벌에서는 동학군의 총봉기에 동참하기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고 국왕을 능멸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일본군을 일거에 몰아내고, 반민족적 탐관오리들까지 축출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여미벌에서 박인호를 중심으로 한 총봉기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무렵, 내포 동학군들은 한양으로부터 진압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드디어 10월 24일, 내포 동학군들은 경군과 일본군의 연합 부대를 맞아 현재 충남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목(勝戰項, 승전곡勝戰谷, 승전우僧田隅)에서 역사적인 전투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승전목 전투’이다. 승전목 전투에서 운명을 걸다 승전목은 당진군 당진읍 구룡리 동쪽과 면천면 사기소리 서쪽에 걸쳐 약 3km 정도의 좁은 계곡을 이룬 곳이다. 계곡의 북쪽에는 이배산(離背山, 220m)이, 남쪽에는 웅산(雄山, 253m)이 솟아 있어 깊고 좁으며 꼬불꼬불하게 난 계곡 길을 굽어보고 있다. 내포 동학군들은 자신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과 경군의 이동 경로를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일본군과 경군이 면천을 출발해 여미로 향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급히 용장천을 따라 도동에 도착해서는 이배산 서쪽의 험한 능선과 반대편 검암산 능선에 미리 매복하였다. 승전목은 완벽한 S자형 협곡으로 수십m 높이의 바위들이 양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험한 지형이다. 이 협곡을 따라 나있는 샛길이 바로 면천과 운산을 이어 주는 유일한 통로였는데, 내포 동학군들은 바로 이 길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압군들은 삼웅리를 지나면서 동학군의 척후병과 맞닥뜨렸으나 간단하게 제압하였고, 승전목 입구에서도 400여 명의 동학군과 재차 교전을 치르고는 곧바로 승전목에 다다랐다. 기록에 남은 승전곡 전투 당시 치열했던 승전곡 전투 상황을 사료를 통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봉 척후가 관군이 행군해 옴을 보고하니 우리는 승전곡 양 산등으로 올라가 복병하고 있었소, 관군이 골짜기 속으로 몰려들어 왔소. 관군이 골짜기를 들어서자 우리는 곧 전단을 일으켜 교전 1시간여에 관군을 여지없이 대파하니…… 여미로 출병했던 병사들이 승전곡에 이르러 겨우 일진을 돌파하고 검암 후봉에 이르렀으나 수만명이 진을 친 것을 보고 기가 질려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퇴병했다고 한다. 경군과 일본군이 면천의 도동에 이르러 처음으로 적과 부딪혀서 한 번 싸워 이기고 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 경병과 일본군이 지세의 험준함을 알지 못하고 급히 험하고 막힌 곳에 들어가 적에게 포위를 당했는데 군사의 수효가 매우 차이가 나서 탈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혼자 도망쳐 와서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적은 승전곡의 협애를 끼고 방어했으며 그 수가 400명, 500명 되지만 드디어 격파하고 여미의 고지를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적은 사방의 고지를 점령하고 사력을 다해 이곳을 지켰다. 그 수가 각처에 5,000여 명씩 있었으며 1개 소대의 병력으로 이를 공격하려 해도 우리를 포위하고 급습하여 끝내 지탱할 수 없어서 홍주로 퇴각하였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당시 전투 상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동학군들은 미리 산 양쪽을 선점하고 매복하였으며 일본군과 경군이 진격해 오자 일차 교전하고 패전하는 척 가장하여 연합군을 골짜기 안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방어전을 펼친 내포 동학군의 숫자는 15,000여 명으로 추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과 경군은 자신들의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승전목 앞까지 다다랐다. 긴박한 순간들, 전투 하지만 이들도 승전목의 험한 지형에 매복한 동학군들을 보자 멈칫거렸고,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을 시도하였으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과감히 돌파하기로 작전을 변경하고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배산과 검암산의 양쪽 능선을 모두 선점한 동학군들은 열세한 무기와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지형지물을 십분 활용하면서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전투 시간이 길어지고 한 시간이 지났지만 동학군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서 일본군과 경군은 조금도 진격할 수가 없었다.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질 무렵 때마침 불어오는 서풍을 이용하여 동학군들이 화공을 시작하였다. 거센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앞을 가리자 검암산 쪽으로 진격하던 관군들이 먼저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의 기세마저 급격하게 꺾이기 시작하였다. 이를 목도한 동학군들이 용기백배하여 한꺼번에 산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며 압박을 가하자, 일본군과 경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때에 일본군들은 앞다퉈 쫓겨 가면서 개인의 군장까지 모두 팽개치고 달아났다. 그들이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쳤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승전목 전투에서 첫 승을 거머쥔 동학군들은 배낭 78개, 상하 겨울 내의 78벌, 휴대 식량 312인분, 일대 78개, 수첩 78개, 깡통과 소금 각각 78개, 쌀자루 78매, 반합 78개, 구두 78켤레 등 다량의 노획물도 획득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하다 승전목 전투에서 동학군들의 승리는, 연합군을 지휘한 일본군들이 내포 동학군들을 너무 얕본 원인도 있겠지만, 이미 엄청난 수와 조직적인 움직임 그리고 전투력 측면에서 이미 이전의 동학군들과는 월등히 달라졌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승전목 전투는 내포 동학군들에게 첫 승리로, 일본군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낼 수 있는 대승이었다. 이날의 전투는 동학군들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한 단 두 곳 중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군과 정면 전투에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전투로도 알려져 있다. 전승지로서의 승전곡-승전목 승전곡이라는 명칭은 동학 연구자들 사이에 불리는 명칭이고, 당진 지역민들 사이에는 승전곡보다는 승전목으로 불리고 있다. 내포문화숲길에서 ‘내포동학길 1코스’(9.4km, 약 3시간 30분 소요)가 동학군이 무혈입성한 면천읍성을 출발해 승전목 전투지까지 조성되어 있다. 현재 승전목 전승지는 당진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석산 개발과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파괴되어 훼손이 심각한 상태이다. 역사적 의미가 깊은 승전목 전승지가 개발과 발전 논리에 계속 파괴되고 있다. 향토유적은 비지정 문화재의 범주이기에 온전한 문화재의 보존관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향토유적의 밑바탕에서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다. 당진시는 승전목 전승지를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되도록 노력하고 더 이상 훼손되지 않고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글 조성갑 (탐방 팁) 승전목(곡) 전투(승)지 : 충남 당진시 면천로 142 (참고문헌) 디지털당진문화대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당진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양상과 승전목전투 당진지역 농민항쟁 관련 역사자원의 활용 당진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실태와 보존 방안 동학농민혁명 시기 당진 동학농민군 활동과 문화콘텐츠 활용방안 [출처] 승전목 전투, 일본군 상대로 최초의 위대한 승리|작성자 동학집강소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