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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학의 힘, 힘차게 달려온 1년창립 1주년을 맞이한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의 허채봉 대표를 만났다. 허채봉 대표는 오랫동안 동학을 기반으로 활동해 왔으며, 동학을 주제로 학위과정을 마친 연구자이기도 하다. 열정적인 활동을 이어온 허채봉 대표에게 이 시대 동학, 천도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동학의 가르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허채봉 대표를 만나보자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 창립1주년을 맞이하셨습니다. 기념사업회를 어떻게 창립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2022년 2월에 동학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이 2023년 1월에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아카이브에 등재 되면서 동학 신진연구자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그때 우리 천도교단 활동과는 조금 결이 다른 동학을 주제로 활동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중에서도 2021년부터 동학 서훈 운동을 했던 분들, 동학혁명 유족회, 그리고 전국의 기념사업회 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제가 활동하는 부산에도 동학 기념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 작년 6월이었고 동학 신진연구자 모임을 한 이후 7월 8일에 기념사업회를 창립한 것입니다. 그 흐름에 이어 전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전국 워크샵이 열리기도 했고요. 그렇게 일사천리로 이뤄졌습니다. 첫 번째로 연구자로서 논문을 쓴 게 계기가 됐을 거고 동학 신진연구자 워크숍에서 다양한 분들을 가면서 활동의 폭이 넓어진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 과정들에는 굉장히 깊은 고민과 또 오랜 성찰이 있었을 것 같아요. 제가 동학을 하기 전에, 오랫동안 택견이라는 무예를 했어요. 택견은 우리 민족 무예로서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76호로 지정돼 있고, 2015년도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세계 인류 무형의 유산이면서 수련종목인 택견을 하면서 새롭게 현대의 스포츠로 계승하는 일을 해왔고, 그런 과정들을 한 30년 정도 하다보니 동학을 알게 되고부터는 자연스럽게 내가 무엇을 할 건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모색해왔습니다. 전국을 다니며 동학의 역사를 찾고, 알아가는 과정이 삶의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동학을 접하게 된 최초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천도교에 입교하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2016년도 가을에 녹색당 농업특별위원회의 농업 먹거리 활동을 했는데 흔히 우리가 녹색 농부라고 얘기해요. 이분들이 저력이 있는 사람이 많아요. 어느 날 녹색농부 중 한 선생님께 여쭸어요. 혹시 종교가 있으시냐고요. 그냥 묻고 싶었어요. 그분이 천도교라는 거예요. 내가 다시 물었어요. 천도교가 뭔가요? 천리교인가요? 천리교는 일본 종교잖아요. 그게 아니래요. 동학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깜짝 놀랐어요. 동학이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얘기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랬더니 맞대요. 그래서 내가, 그러면 동학농민혁명이 종교란 말이에요? 그렇게 또 물었어요. 그게 종교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지금까지도 이어진다는 거예요. 나는 민족무예 택견의 지도자로서 몇십 년을 살았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종교였다는 것을 몰랐어요. 뒷통수를 딱 맞는 느낌이었어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동학농민혁명이 그 순간에 있었던 이벤트나 사건이 아니었고 계속 어떤 흐름 속에서 일어난 건가, 그러면 왜 나는 그런 걸 몰랐지? 너무 충격을 받아서 한 며칠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며칠 고민을 하다가 천도교중앙총부에 전화를 했어요. 입교 같은 걸 할 수 있냐고요. 전교인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지도 물었어요. 나는 천도교 안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전교인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선생님한테 가서 그랬어요. 천도교에 입교를 하겠다고요. 선생님, 전교인이 되어 주세요. 이렇게 얘기를 했죠. 그때 목암 전희식 선생님이 책 <소농은 혁명이다> 북콘서트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 천도교중앙대교당 이라는 곳을 가 봤지요. 그날이 2017년 포덕 158년 4월 9일이었는데, 4월 5일 천일기념일이 있던 주의 시일, 4월 9일이었습니다. 그날 입교를 하게 된 거예요. 그때 입교를 하신 거군요. 그럼 그 전에는 천도교중앙대교당을 전혀 모르셨나봐요. 와보시니 어떻던가요? 압도적인 어떤 기운이 느껴지시던가요? 첫 느낌이 예수상이나 십자가, 부처상과 같은 우상이 없고 궁을기가 보였어요. 대교당 건물이 굉장히 아름다웠고요. 제가 20대때 길 건너 원서동에 살았거든요. 그런데 천도교중앙대교당을 몰랐단 말이에요. 처음 대교당에서의 모든 느낌이 다 좋았어요. 청수봉전을 보며, 여성이 청수를 봉전 해야 그 의식이 시작이 된다는 게 좀 신기했고 우상이 없는 것도, 성직자 없이 일반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시일을 모시는 것도 참 놀라웠어요. 고정관념을 깨는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고 신선했어요. 입교를 한 이후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 대교당에서 전희식 선생님의 북 콘서트를 보러 갔는데, 일주일 뒤에 전주에서 또 북콘서트를 하신다고 하더군요. 전주 한옥마을 안에 있는 동학혁명기념관에서요. 그 말씀을 듣는데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에 너무너무 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당시 임형진 종학대학원장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해부터 종학대학원 전주 분원과 부산 분원이 만들어질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부산 분원 개원소식을 기다렸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종학대학원 부산분원이 열렸습니다. 거기서 본격적으로 천도교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열심히 활동하시는 교인분들 한분 한분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고 사회 곳곳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이 시대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부산기념사업회가 창립 후 1년 동안 바쁜 걸음으로 달려오셨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부산은 알다시피 동학의 유적지가 없잖아요.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놓고 보니까 갈 데가 없더군요. 창립을 했는데 기념사업회에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도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창립하자마자 기념재단에서 동학농민혁명 편람을 보내왔어요. 전국에 있는 동학 유적지를 다 모아놓은 거였어요. 경상도권 전라도권 경기권 충청권 이런 게 전국에 있는 권역별로 쭉 있는데 등급이 A, B, C, D 이렇게 나눠져 있는데 부산에 딱 두 곳이 있는 거예요. 그것도 B급이더라고요. 부산성에 1893년에 "척왜양창"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때는 천도교인이 부산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떻게 붙어 있는지 참 신기하다 이런 식으로 멘트가 되어 있고 그거의 출처는 없는 거예요. 그리고 또 두 번째는 일본군 토벌대가 주둔을 했던 곳인데, 그곳이 재단의 자료에서는 '40계단'이라고 나오는데 중앙동의 40계단은 유명한 곳이에요. 그곳은 6. 25 동란 때 피란민들이 살었던 곳이에요. 그러니까 토벌군들이 있었던 곳은 부산 이사청, 그리고 국립강제동원역사관에 있는 나인협 흉상을 세 번째 유적지로 해서 세 군데가 생긴 거예요. 그게 너무 극적으로 느껴졌어요. 재단에 너무 감사했어요. 내 논문을 아카이브에 등재해준 것도 감사했지만 부산 지역에 동학유적지를 밝혀준 것이 반가웠거든요. 그래서 내가 우리 대학원에 자랑도 했어요. 동학농민혁명재단 아카이브에 논문 등재됐다고요. 축하도 많이 받았죠. 재단에서 보내왔던 동학농민혁명 편람이 너무너무 큰 도움이 됐지요. 동학의 불모지 부산지역에 기념사업회를 창립하여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서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이렇게 1년을 돌이켜보면 꽤 많은 일을 했어요. 저 혼자 한 게 아니고 도와준 분들이 참 많더군요. 감사한 일이죠. 그때그때 나타나서 함께해준 사람들이 반드시 있었어요. 지속적으로도 있는데 희한하게 또 시민들 중에도 있는 거예요. 마침 제가 올해 부산시 택견단체 부회장의 마지막 임기거든요. 올해를 끝으로 활동의 방향을 동학으로 전환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버릴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제가 30년 넘게 택견을 하면서 배운 것들이 또 이렇게 쓰이게 될 테니까요. 기쁜 점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통해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동학혁명 서훈 운동을 하면서 천도교를 알려나가고 천도교의 뿌리가 결국 동학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천도교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들이 이제 귀를 열고 듣기 시작했다는 거죠. 최근 전국 동학혁명 연대가 봉황각에서 취회를 했어요. 저녁 9시 기도식도 하고 주문 수련을 하는 시간들을 함께 하시더군요. 대교당에 가서 시일식도 같이 참여했고요. 이럴 때 천도교인들이 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산이 동학의 역사나 유적에 대해서는 불모지라고 생각을 했지만 , 뚜껑을 열어보니까 유적지는 유적지대로 갇혀서 과거의 기억 운동에만 집중해서 하는데, 저는 부산이 조금 더 역동성을 가질 수 있는 민주시민교육 운동과 함께 동학과 궤를 같이 하면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 같아서 보람이 큽니다. 기념사업회가 생기기를 기다려준 것만 같아요. 이렇게 동학에 대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계시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나는 택견을 하면서 어떤 소명이라는 거를 느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은 각자의 소명이 있는데 나의 소명은 이제 오래된 전통의 부활 그러니까 Rebirth, 재탄생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낡은 것의 가치를 새롭게 이끌어 내면서 오늘에 맞는 정서나 감성으로 새롭게 콘텐츠로 부활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게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택견을 할 때에도 시나리오를 쓰고 작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동학에 와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어요. 부산기념사업회 1년 동안 딱 한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같이 걷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그만큼 기대가 클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좀 하고 싶은지 그것도 좀 궁금해요. 부산기념사업회를 만들면서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연구소입니다. 말하자면 부산동학기념사업회를 잘하기 위해서 동학연구소가 있어야 되겠고, 궁극적인 목표는 동학혁명 서훈 국민운동이나 우리 전동연(전국동학연대)을 통해서 동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보를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또 전동연 하고 있는 장흥 동학 무명동학군 묘역 성역화나 이런 게 다 맞물려 있잖아요. 이러한 전 국민적인 움직임과 함께 동학이 국민적 필수 인문 과목으로 자리 잡는 것, 그게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운동이 되겠네요. 부산기념사업회는 부산이라는 지역을 통해서 하는 건데 이제 그런 뜻을 펼쳐나가면서 전 세계 인류의 교양 과목이 되는 게 동학의 포덕 사업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천도교를 해서 참 행복한 사람이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를 할래, 천도교를 할래?" 하면 난 천도교를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나는 처음부터 범신론자였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우주적인 어떤 질서 속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라고 어렴풋이 알 뿐이었어요. 그런데 천도교의 경전을 접하면서 내 마음속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그대로 글로 적혀 있어서 참 놀라웠어요. 경전에 모든 게 다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더 천도교에 대해 알고 싶고 천도교의 진리를 깨닫고 싶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바를 기념사업회 일을 하면서 펼쳐 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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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에게 듣다(3)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님을 만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를 거쳐 우리 역사가 흘러온 절망과 희망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 시절을 건너 온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야말로 한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구십 살이 넘은 생을 넘나드는 기억들을 풀어내며 선생의 생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선생의 말씀 속에 선생이 경험한 모든 것을 표현할 때 ‘감사한 마음’이었다. 주어진 삶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느껴졌다. (지난 호에 이어) 판문점 수용소로 가서는 생활이 어땠습니까? 수용소에서는 병원에 입원 환자를 만들어 입원을 시키면서 간호원을 통해 중앙정보부에다 연락을 하고 그랬어요. 거기 있는 동안에는 아무 작업도 없이 편했어요. 가서 설득만 한 번 받으면 끝나니까. 그런데 그것도 거부를 한 거예요. 안 하겠다고 들어가서 인민군 장교 멱살 잡고 막 두들겨 패고 그때 그랬는데, 그 당시 인도군들은 우리가 볼 때 군인 같지 않았어요. 그때 미군들 상대하다가 인도군 상대하니까 말 안 들었어요. 거기에서는 설득을 안 받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때 계속 설득을 시키려고 애를 써도 북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있어야지. 안 간다고 욕들만 하고 인민군 장교한테 막 대들고 설득을 거부한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여기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어가서 지금 설득을 방해하고 있다고 그거 다 잡아내라. 그래야 설득하겠다. 그러다가 설득 기간이 끝난 거예요. 끝나면 1개월 동안 여유기간이 있어요. 6개월 동안 정치회담을 통해 포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할 거냐 하는 걸 회담에서 결정을 하게 됐는데 설득이 안 되었습니다. 미군은 무조건 1월 23일 날 휴전에서 규정된 그 날짜에 석방시키라고 하고, 북한은 설득이 안 됐으니까 서로 옥신각신하는 거예요. 우린 가운데 끼어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 만약에 설득이 안 될것 같으면 탈출하려고 그랬어요. 거기서 휴전선까지, 북한군 진지까지가 얼마 안 멀어요. 한 500m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포로 한 사람당 한 사람씩 교환하자 이렇게 또 했잖아요. 1대 1 교환 원칙이요. 원래는 그게 아니에요. 제네바 협정에서는 무조건 본국으로 송환시키게 된 거예요. 100% 다 송환시키게 돼 있는데 한국전쟁에서는 이게 참 특이하게 사상 문제가 나오기 시작을 한 거예요. 왜 그러냐면 우리는 같은 한민족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정서나 언어가 통하는 거예요. 2차대전 때도 독일하고 소련하고 그랬는데, 많은 독일 포로가 소련으로 갔거든요. 이 사람들은 다 돌아오는 거예요. 그때는 서로가 송환을 거부하거나 그런 게 없었어요. 그런데 이게 한국전쟁만은 그런 게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1월 23일 날 석방이 되는데 그때 마지막에 북한에서 방송으로 계속 방송을 해요. 지금이 탈출의 시기라고. 지금 탈출을 못 하면 당신들은 일생 동안 후회할 거라고 막 공갈을 치면서 방송이 들어오는데, 거기는 휴전선 안쪽이잖아요. 북한에서는 방송이 맞바로 들어와요. 삐라도 막 보내고요. 그때 남쪽에서도 삐라 보내고 그랬어요. 우리도 북한에 풍선을 만들어서 밑에다가 불을 피워놓으면 그게 떠요. 거기다 삐라를 북으로 보내고 그런 적도 있었어요 그때. 그 삐라 내용은 뭐였어요? ‘김일성이 타도하자’, 이런 것들이죠. 저쪽에서 오는 거는 우리한테 오질 않아요. 그때 마지막 그 한 달 동안에 우리는 탈출할 걸로 생각을 해서 배낭 다 꾸려놓고 밤에 잘 때도 신발을 신고 잤어요. 만약에 탈출하게 되면 여기서 거리가 멀지 않으니까, 한국군 진지가 빤히 보이니까. 지뢰가 있어서 그렇지. 그때 궁을기를 그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 궁을기, 태극기 그려서 다 그거 들고 갔어요. 태극기, 궁을기를 그때 들고 나가기 시작한 거예요. 여기 사진이 말씀하신 용산역에 도착한 사진인데 한쪽에는 궁을기, 한쪽에는 태극기가 보이네요. 1954년 1월에 우리가 석방되잖아. 석방돼 가지고 문산에서부터 차를 타고 가는데 우리는 객차가 아니라 화차거든요. 문을 활짝 열어놓고 용산에 도착을 했어요. 도착하니까 중앙총부에서도 우리를 환영하러 나왔더라고요. 중앙총부 직원들이 저쪽에 있는데 우리 차가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직접 상봉을 하진 못했어요. 도착하자마자 김밥도 주고 선물들을 막 주고 그래요. 그래서 그거 먹으면서 내려갔는데 그때 선물 참 많이 받았어요. 그때 판문점에서 차에 올라타니까 미군들이 씨레이션을 주는 거예요. 씨레이션은 미군 야전 식량이죠. 그걸 한 박스씩 이렇게 주는 거예요. 그때 중국 중공군이 대만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통조림 같은 걸 가지고 왔더라고요. 그걸 또 나눠주더라고요. 인도군들도 설탕 같은 걸 한 봉지씩 주고 한국군은 포 같은 거, 그때 차 안에서 잘 수 있게끔 그걸 주고 이러는데 하여간 선물을 한 보따리씩 받았어요. 역에 도착할 때마다 환영하는 사람들이 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받아서 가는데 한국군 보충대가 군산에 있어서 우리는 군산으로 간 거예요. 보충대까지 행군을 하는데 시민들이 나와서 환영을 하고 그러더라고요. 큰 배낭에 내 옷이며 책을 꽉 채워서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어요. 수용소 차 안에서 선물 받은 게 한 보따리였지. 태극기 배낭마다 꽂았지. 근데 그 한 1키로 되는 데를 가는데, 거기에서 방송으로 하는 말이 여러분들을 빨리 수용소로 가서 쉬게끔 하고 싶지만, 군산 시민들이 여러분에게 환영인사를 한다는 거야. 아침부터 나와서 환영을 받는데, 아이고 내가 그때 보따리 가지고 태극기 들고 압박과 설움에서..(벗어나는 구나) 아이고 그때 고생한 생각을 하면.. 보충대에 들어가니까 그때부터는 위문단이 들어오더라고요. 그 와중에 천도교 부산종리원, 대전교구에 성금을 내셨다고 들었어요. 여기 월남한 천도교인들이 51년 1월 1.4후퇴 때 부산에 있는 종리원에 모이신 적이 있어요. 부산시교구 자리에 천도교인들이 모이기 시작을 한 거예요. 난 수용소 안에 있어서 거기는 못 갔고 그때 내가 가야수용소에 있을 때인데, 부산종리원이 어려우니까 거기를 돕자고 해가지고 사지스봉을 벗어서 보낸 적이 있었어요. 그때 돈들이 그쪽으로 많이 나갔을 거예요. 대전교구도 그랬죠. 거기 모금 운동을 하잖아요. 그 사지스봉 같은 거 팔아요. 미군들이 내주는 수용소 옷들 전부 사지스봉들이거든요. 그때 그것들 내다 팔아서 도와주는 거예요. 그때 우리는 팔 수가 없으니까 못 팔고 보내는 거예요. 그걸 거기서 팔았겠죠. 계속 말씀해주세요. 그 안에서는 그럼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이가 스무 살도 안 된 사람이 여기서 나가서 갈 수 있는 길은 딱 군대밖에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거기에 며칠 있으면서 가만히 보니까 도저히 뭐 딴 길이 없어. 그래, 군대 가자 이렇게 생각했지. 그리고 자꾸 군대를 권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원을 해서 군대에 들어간 건데, 우리 수용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조직에 그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때 수용소 안에서는 바로 소대, 분대 편성까지 다 돼 있었거든. 거의 그대로 들어갔어. 군인이 되는 길을 선택하셨군요. 인민군 생활이랑은 많이 달랐지요? 논산훈련소 25연대 10중대에 들어갔는데 참 실망스러운 게 누비옷, 중공군 같은 옷, 몇 번이나 입었는지 때가 반질반질하게 새까만 옷을 주더라고요. 게다가 밥은 요만큼씩 주죠. 그때 실망이라는 건 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이 새끼, 저 새끼 소리가 막 나오는 거야. 수용소 안에서 반장하던 사람, 분대장 하던 사람이 여기 들어 와서 또 분대장을 하는 거예요. 수용소 안에서도 훈련장 갈 때 국군보다도 더 질서정연하게 노래 부르면서 군가 부르면서 갈 수 있었어 우리는. 사격장에 가서 사격을 하는데 이 사람들 대부분이 전쟁터를 겪었던 사람들이잖아. 그러니까 사격 명중률이 아주 높아서 논산훈련소 창설 이래 처음 이런 성적 났다고 소장이 와 가지고 막 칭찬을 하더라고. 전쟁터에 나갔던 사람들인데, 신병, 농사꾼들 데려다 놓고 교육 시킨 것하고 다르잖아. 군가를 누가 배워주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배웠거든. 조교들이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는 거예요. 이 새끼, 저 새끼 소리를 못해. 그렇게 단결이 돼서 논산훈련소에서 훈련하는데 내가 그때 소대장 노릇을 했어요. 그런데 대장을 했던 현역 육군 소위가 와서는 나보고 자꾸 장교로 가라는 거예요. 간부 장교로 가라고. 언제 시험이 있다고 알려주면서 그 사람이 권하는 바람에 지원서를 냈죠. 간부 장교 시험 때, 시험장에 가서 내가 수학은 100점 맞을 수가 있었고, 영어도 내가 수용소에 있으면서 좀 배웠으니까 괜찮은데 국어나 역사 같은 거는 전혀 못 했어요. 그때 내가 보기에도 성적이 간들간들할 정도로 내가 겨우 합격 됐을 것 같아요. 면접을 보러 면접장에 딱 들어가니까 대위급들이 한 4~5명이 쭉 앉아 있는데 한 사람씩 불려서 들어갔어. 그렇게 면접을 보고 다시 군인이 되었지. 선생님 그리고 또 월남전도 갔다 오신 거죠? 전쟁도 겪으시고 시대의 비극을 차례로 지켜보셨네요. 군대 생활을 20년 가까이 하다 보니까 우리 애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아무 데 끌고 다녀도 괜찮았어요. 어디 가도 초등학교 다닐 수가 있었는데 중학교 때부터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집사람하고 애들은 남고 나만 따로 왔다 갔다 해야 되는데 서로 불편한 거예요. 그때부터는 제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제대하려면 20년 만기를 채워야 연금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월남에 가게 되면 2년이 가산이 돼요. 그래서 월남 지원을 한 거예요. 그때도 운이 좋았어요. 그것도 내가 월남 가기 전에 화학학교에서 본부 중대장을 했어요. 화학학교에서 내가 핵무기 원리 강의를 했어요. 강의를 하다가 본부 중대장을 하라고 해서 중대장을 맡았죠. 그리고 월남에 갔다 와서 바로 제대를 했어요. 참 어려운 시절을 지나왔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요. 선생님, 이제 제대 이후의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천도교 교단에서 아주 오래 직책을 맡아 일하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교단 안에서 일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처음 교단에 들어와서는, 재단 일을 했어요. 76년 9월 달에 천도교 유지재단의 관리과장으로 들어온 거예요. 교단에 들어오게 된 동기가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하고 같이 천도교 활동을 했던 사람이 여기 감사원장으로 계셨던 이재순 선생이라고 그분이 감사원장을 했어요.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내가 중학교 때 선생으로 있던 신덕순 씨가 감사원장이 된 거예요. 아버지하고 친구였던 이재순 선생이 처음 날 만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자네 아버지가 무척 교회를 위했었네. 근데 자기네 아버지는 이 경운당 88번지 근처에도 못 와 봤어. 자네가 여기에 들어와서 일을 한다면 자네 아버지가 중앙총부에 우리 아들이 근무한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겠나.”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들어오라는 거야. 그런데 그때 천도교에 들어올 생각은 안 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그때 군대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받던 봉급이 18만 원인가 했는데 총부 월급이 5만 2천 원이야. 그런데 그분이 몇 번 권하시는 바람에 그때 들어온 거예요. 선생님 여기 재직하기 시작했을 때 수운회관만큼 이렇게 높은 건물이 있었나요? 없었어요.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 이 수운회관 1층, 2층이 유정회가 들어왔어요. 그다음에 3, 4층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있었어요. 그다음으로 5층에서부터 11층까지에 수협이 들어왔어요. 다 국가기관들이니까 아주 싼 전세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다른 곳에 비해서 전세금 부담도 3분의 1 정도의 값으로서 들어오게끔 그렇게 된 거예요. 들여다 보니까 전세금 받은 게 6억 정도가 되는데 월세 수입 들어올 데는 절반층 밖에 없어요. 그러니 그 적자가 계속 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때 수운회관이 영국제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었는데, 서울 시내에서 유일했어요. 수세식 변소 설치가 되어 있었고요. 그리고 이 마당이 얼마나 넓어요. 주차장도 잘 돼 있죠. 중앙청도 가깝죠. 그러니까 여기가 최고의 인기 건물이 돼서 정부기관이 다 차지한 거예요. 그래서 나는 사무국장으로 들어와가지고 이 사람들하고 싸워서 내보내려고 그러는 거예요. 통일주체국민회의 같은 곳을 내보내면 3배 정도 임대료를 높이 받을 수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 계속 싸워서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정회를 내보냈고 수협도 나갔어요.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 손실이 1년에 4천만 원 정도가 나고 그랬는데 내가 들어와서 흑자로 변해서 수협이 마지막 나갈 때 전세금 21억원을 받았던 걸 거의 다 갚았어요. 나 있을 때는 임대 안 된 평수가 없었어요. 감사하게도 100% 임대할 정도로 그렇게 했지요. 선생님 지금까지 교단의 일도 그렇지만 선생님이 살아오신 삶을 통틀어서 보면 정말 파란만장하게 살아오셨어요. 그렇죠. 저는 진짜 파란만장한 생활을 했거든요. 진짜 소설 같은 삶을 산 거예요. 사실 난 이북에서 고등학교도 채 졸업 못했잖아요. 남한의 아무 근거가 없는데 내가 이 사회에서 와 가지고 그래도 참 무난하게 살았어.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가 할 정도로 그렇게 순조롭게 살아갔어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이 군대 생활하면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리고 수운회관에 들어와서 천도교에 다시 들어오게 된 것도 우연찮게 들어오게 됐고 그러고 나서 지금 내 가정생활도 그래요. 아들 형제 둘 뒀거든요. 둘이 다 나보다는 다 훨씬 잘 됐어. 다 사장들하고 그래. 그러고 거기에 나온 손녀 손자들이 5명인데 다 괜찮아요. 제 앞길 다 잘 할 수 있는 애들이야. 그렇게 나는 내 가정생활에도 축복받았어요. 제일 불행한 세대로 태어났지만, 그래도 무난하게 살았구나. 그렇게 생각해요. 늘 감사한 생각이에요. 9시 기도식 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요. 다른 건 뭐 없어 진짜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됐어요. 마지막으로 선생님 하시고 싶은 말씀 그리고 다음 세대들에게 천도교가 어떻게 나아갔으면 좋겠는지 한 말씀부탁드려요. 제일 중요한 게 수련이에요. 우리는 내게 모신 한울님을 내가 진짜 모시고 있다는 걸 깨닫는 거예요. 기독교 같은 데는 성경 말씀대로 내세가 있다고 하니까 있는 걸 믿는 거 잖아요. 우리는 달라요. 우리는 실천을 해야 해요. 내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걸, 그걸 못 느끼면 인내천이 안 돼요. 모든 어린이도 한울님을 모신 존재로서 존경해야 한다고, 그게 내가 모신 한울님을 내가 느끼기 전에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수련부터 해야 해요. 지금 일반 사람들한테 생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물으면 종교가 필요하다고 답하는 사람이 6%밖에 안 된대요. 그다음 제일 중요한 게 건강이라는 게 건강이 50 몇 프로예요. 그다음 세 번째가 중요한 게 가정 행복이에요. 그러니까 수련을 하게 되면 건강해지고 가정이 행복하다고 하는 교리로써, 수련을 해야 해요. 난 그래서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보다는 체험을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직접 한울님 모시고 있다는 강령 체험하게 되면 그걸 느껴요. 내 안에 나 아닌 다른 게 뭐 있는 거예요. 모든 게 내 임의로 하는 게 아니에요. 막 발광하다시피 하는 게 내가 임의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몸으로 느끼는 것, 그걸 한 사람이라면 거의 신앙인이 다 돼요. 선생님은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 언제 느끼세요? 우리는 달라요. 우리는 사람을 상대로 그분을 한울님으로 모셔야 하고 자연을 또 한울님으로 모셔야 하는 거예요. 자연까지도요. 그래서 난 앞으로 우리 천도교는 지금 기상이변 같은 게 일어나는 걸 보면서 앞으로 천도교의 시대가 될 거라고 난 그렇게 봐요. 지금 우리 사회는 환경에 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천도교의 교리는 한울님을 존경하고 사람을 존경하고 자연을 존경하는 데 있는데 그렇게 돼야 한다고 봐요. 풀 한 포기도 다 한울님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사람 몸에 오장 육부라고 하는 게 심장이라든가 폐라든가 간이라든가 이게 다 죽고 나면 살덩어리예요. 근데 어떻게 거기에서 영양분을 섭취해서 뇌로 보내고 위장으로 보내고 이걸 보내고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해주고 그다음에 호흡도 해주고 맥박 뛰는 것도 일정하게 해주는 거 그건 누가 해주느냐, 한울님이에요. 한울님이 계시니까 그게 가능한 거예요. 우리가 밥을 떠서 입에 넣어서 씹어서 삼키는 것까지는 내가 하지만, 그러나 안에 들어가서 영양분으로서 소화시키고 배포하는 건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한울님이 하는 거예요. 그 안에서 그걸 느끼는데, 하는 그래서 틀림없이 한울님이 같이 계시다는 거예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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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에게 듣다(2)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님을 만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를 거쳐 우리 역사가 흘러온 절망과 희망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 시절을 건너 온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야말로 한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구십 살이 넘은 생을 넘나드는 기억들을 풀어내며 선생의 생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선생의 말씀 속에 선생이 경험한 모든 것을 표현할 때 ‘감사한 마음’이었다. 주어진 삶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느껴졌다. (지난 호에 이어) 수용소 안에서의 종교생활은 어땠나요? 그 안에서는 글자를 읽을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러니 성경을 읽었죠. 읽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때 성경을, 아마 기독교 신자들보다 내가 더 많이 읽었을 거예요. 당시 수용소에 있던 분들하고 천도교인이라는 걸 서로 알게 됐을 때 어떠셨어요? 무척 반갑죠. 91수용소에 있을 때는 완전히 우익이 장악하고 있을 때니까 내놓고 얘기를 할 수가 있을 때예요. 그래서 2대대 경비대에 가서 안에 시일을 봤거든요. 황승훈 씨 이분이 경전을 암기한 걸 적었어요. 적으면서, 이게 아니야, 이 글자야, 이 글자야 서로 이러면서 경전을 만들었어요. 그거 가지고서 시일을 보았다니까요. 그때 나 있던 수용소에서는 그렇게 완전히 시일식을 했어요. 시일을 보는데 천덕송은 그때 김영찬 씨라고 하는 분이 아주 잘 가르쳤어요. 그분이 천덕송을 가르치고, 저는 북한에 있을 때도 천덕송을 불러왔기 때문에 수용소에서도 천덕송을 아주 그때 잘 불렀어요. 판문점에 올라가 가지고 거기서도 천덕송 부르고 천덕송 대회도 하고 그랬어요. 거기서. 시일식의 식순은 북한이나 여기나 똑같아요. 당시에 포로수용소에서는 얼마나 계셨죠? 저는 거의 3년 동안 수용소에 있었어요. 투쟁이 너무 심하니까 분리 심사를 하는데, 그때 나오는 방송이 앞으로 며칠 후에 하는 심사는 여러분이 일생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결심을 해야 된다. 이 결심을 한 번 하게 되면 다시 옮길 수가 없다. 신중히 생각해라. 그런 방송이 나왔어요. 그러고 나서 한 줄로 쭉 들어가서 심사관 앞에 가면, 북으로 갈 거냐 남의 잔류할 거냐, 이걸 묻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방송에서, 혹시 북으로 안 가고 남에 남겠다고 해도 정부에서는 여러분의 장래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거예요. 알아서 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돌아가길 바라는 것처럼 이렇게 방송을 했다고요. 그래서 북으로 갈 거냐, 남으로 갈 거냐, 남으로 가면 이쪽, 저쪽 방으로 들어가면 북으로. 딱 갈라놓는 거예요. 북으로 갈 사람들을 따로 모아가지고 수용소에다 잡아놓고 남에 남겠다는 사람은 여기에 남고. 분리 심사 후 북으로 송환을 거부한 사람 3만 5천 명 정도가 북으로 안 가겠다고 그러고, 북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9만 명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여기에 남겠다는 사람이 반공 때문에 남겠다고 그런 것도 아니고 북으로 가는 사람들이 친공 때문에 간 게 아니에요. 그때 누구나가 생각하기를 통일은 앞으로 2~3년 안에 될 거다. 또 하나는 북한이 그 당시만 하더라도 집단 농장이 안 됐어요. 왜정 때와 똑같았어요. 모든 게 다 국유화됐다고 그러지만 내 집에 살고 있었고 내 땅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거 생각을 한 거예요. 북한도 지금처럼 집단 농장이 되고 그런 식이 된다면 누가 북으로 가요, 아무도 안 가요. 2~3년만 있으면 통일될 거다. 이런 생각을 하고 분류가 된 거예요. 그래서 북한에 간 사람들은 사실은 그것 때문에 갔지요. 선생님은 어떻게 여기에 남게 되셨어요? 여기(남한에) 나와서 제 고향 사람 한 분 집에 내가 그 집 아들로 입양이 돼서 호적을 만들었어요. 대한민국에서 석방되어 나와서 장교로 있을 때, 그때 호적을 만들었어요. 그 고향 분이 아버지하고 친구고 같은 성주 이 씨예요. 촌수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이분도 분류 심사할 때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하시더라고요. 집에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고 처자식이 있었는데, 내가 안 가면 부모님은 어떻게 모시고 자식은 어디 갈 거냐고요. 그런데 내가 말렸어. 가지 말자고. 이제 뭐 2, 3년 있으면 통일될 테니까 가서 고생할 필요가 뭐 있냐고, 그냥 있자고. 그래서 내가 그분을 부모처럼 모신 거예요. 여기서 내가 그분의 아들로 내가 입적을 해가지고서 그렇게. 고민을 하면서도 이제 2~3년이면 통일되겠지 하고서 남았던 사람이 있는 것처럼 또 북에 가는 사람도 그랬어요. 가족들을 생각해서 한 2~3년만 참으면 어떻게든 통일될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분리 심사할 때 사실상 북으로 간 사람들 있는데 다 불행하게 됐죠. 북에 갔던 사람들은 전부 아오지 탄광으로 가고 그때 그랬어요. 그리고 이후엔 어떻게 되었나요? 우리는 부산 가야 수용소로 왔습니다. 거제도에서 부산 가야 수용소로 왔어요. 그땐 완전히 반공포로 출신이죠. 가야의 수용소가 a, b, c, d, e, f, g, h까지 있었어요. 그 수용소가 a 수용소 b 수용소 이렇게 해서 h 수용소까지 있었는데 b 수용소가 천도교인만이 모인 수용소였어요. 한 수용소가 한 1300여 명씩이나 됐어요. 천도교인만이 모여 있는 곳이 있었지만. 다른 곳에도 천도교인이 있었어요. 나는 그때 H수용소에 있었어요. 반공 프로들이 여러 수용소에서 분리 심사를 해서 오니까 어떤 데서는 91 수용소에도 들어오고 그랬는데, 혼합이 돼 들어올 때 천도교인들은 H 수용소에 있었는데 지금 당산교구에 있는 안명록 씨라고 그분이 나랑 같이 H수용소에 있다가 온 분이죠. 거기에서 그때 하야리아 부대라고 하는 미군 부대가 있었어요. 거기에 식당 요원을 뽑는데 이 양반이 통역관이니까 같이 나가게 됐는데 그때 미군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니까 신체 검사가 보통 심한 게 아니에요. 몇 번을 가서 검사를 받고 합격이 돼야만 그 식당에 갔어요. 그 쪽에 큰 미군부대가 있어요. 미국에서 오는 모든 장병들이 거기에 왔다가 전방에 나가고, 제대해서 나가는 사람들도 거기 왔다가 다시 본국으로 가는 큰 수용소인데 거기에 식당이 여러 개가 있었어요. 그럼 수용소의 포로들이 인근 부대에서 일을 했다는 말씀이신거죠? 네. 미군 식당이 있었는데 우리가 간 데가 장교식당이에요. 소위에서부터 중령까지만 식사하는 데예요. 그리고 거기에 장군 식당은 대령에서부터 장군들만 식당하는 데가 따로 있었는데, 내가 그 식당에 가서 일을 하게끔 됐어요. 원래는 일반 민간인을 채용해서 쓰다가 그 사람들은 월급을 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포로를 쓰게 되면 그게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미군들이 일반 민간인들 다 내보내고 포로들, 반공포로에서 골라서 데려왔어요. 저도 그때 안명록 씨하고 같이 거기로 나갔어요. 가서 제가 배치된 곳이 창고였어요. 식품이 꽉 찬 창고를 내가 지키는 일을 맡았어요. 반공포로 석방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6월 18일날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시킬 때, 내가 있던 곳은 미군 부대니까 여기는 건드리지 못한 거예요. 우리는 전혀 몰랐어요. 포로들이 석방된 걸. 6월 18일 아침이 기억이 나네요. 내가 매일 아침에 커피를 가져다 줬던 장교가 와 있더군요. 또 커피 가져오라고 그럴 것 같아서 미리 가서 커피 두 잔을 가지고 가서, 그 사람 앞에다 놓고 나도 한잔 마시려고 그랬는데, 나를 딱 쳐다보더니 "너 왜 여기 있냐" 이거야. 난 그 무슨 소리인지 몰랐어요. 왜 도망치지 않고 여기 있냐 이 소리예요. 다 도망쳤다는 거예요. 난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몰랐어요. 어떻게 수용소 안에서 전체가 다 도망을 칠 수가 있냐, 그걸 모르고 있는데 이 사람이 다 나갔다는 거예요. 그때 밖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신문을 가져 왔는데 딱 보니까, ‘포로 전원 석방’이라고 나온 거예요. 우리가 여기에 멀쩡하게 지금 있는데 전원 석방이라고 나온 거야. 아이고, 눈이 캄캄해지는 거예요. 야 이게 우리만 떨어졌구나, 우리만 탈출을 못했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던 거죠. 그래서 그 신문을 여러 사람한테,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화장실에다 그 신문을 놓고는 교대로 들어가서 그걸 보고 오라고 했어요. 그때부터는 일을 못하는 거예요. 다들 들떠가지고서. 어디 가야 하나, 우리도 뛰어야 하나. 양놈들이 눈치를 채고 조금 있으니까 무장한 군인들이 확 오더니 그때는 경비 두 명이 따라와 가지고 전부 태워가지고 다시 그 수용소한데다 잡아놓은 거예요. 그날 밤에 한잠도 못 자고 지금도 철조망을 뚫고 나가야 하나,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탈출은 못 했어요. 다음 날 되니까 장갑차가 오더니 무장 군인들이 15명 정도 와가지고 다 태우는 거예요. 문 딱 잠그고서 가는데 우리는 북송하는 줄 알았어. 그랬더니 가야 수용소, 우리가 있던 수용소에다 잡아넣는 거예요. 그런데 a 수용소 b 수용소였는데 거기 가니까 미국 탱크가 정문 앞에다가 또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군이 석방을 시켰으니까 탱크들이 와서 지키고 있어요. 우리가(식당에서 일하던 사람들) 그때 한 30여 명 됐어요. 도망치다가 다시 붙잡혀 들어온 사람들 한 60명하고 합류가 된 거예요. 거기다 잡아놨는데 그때부터는 진짜 그 밥이라는 게 먹히질 않는 거예요. 거기서 한 일주일 정도 있다가 갑자기 밤중에 그냥 자는데 그때는 뭐 불침번이고 뭐고 없었을 때예요. 그냥 자고 자는데 밤중인데 막 불을 켜더니 깨우더라고요. 다 배낭 지고서 소지품 가지고 나오라는 거예요. 틀림없이 북송하는 줄 알았어. 절망감이 오면서 어떻게 할 생각이 안 드는 거야. 그래서 어디로 가신 건가요? 어디로 가나, 가만히 보고 있는데 열차를 태우게 되면 북으로 가는 건데... 여수면 역을 지나가더라고요. 수용소에 갔더니 거기도 석방 안 된 사람이 우리 말고 더 있었어요. 한 2천여 명이 거기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9월 달에 판문점 갈 때까지 6월달서부터니까 그 한 서너 달 거기에 있었죠. 그때도 고통스러웠어. 진짜. 거기 있을 때 한국군이 우리 붙잡지 않는다는 거야. 그때는 탈출하게 되면 경찰들도 붙잡아서 미군에게다 갖다 놓는데 이제는 대통령이 석방시켜 주니까 이제 우리 나가면 이제 환영하거든 서로 탈출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철조망이 이렇게 이중 철조망으로 쳐졌는데 땅굴 파기 시작했던 거예요. 또 거기서 그런데 적발이 돼 가지고 탈출을 못 했어요. 그러다 결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헌병사령관을 보내가지고 수용소 안에 방송으로 이번에 석방 못 됐지만 여러분들은 판문점에 갔다가 1월달이면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참아달라. 우리 대한민국이 절대적으로 책임지겠다. 그걸 하는 게 그때부터 안심이 된 거예요. 그래서 그러고 나서 그때부터는 우리도 이제 땅굴 팔 생각 안 하고 이제 석 달만 지나면 이제 우리 석방될 테니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미군하고도 협조가 돼가지고서 미군들도 우리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거예요. 프랭카트 만들겠다고 하니 천을 가져다 주고 그래가지고 그때 판문점 갈 때는 궁을기를 만들어 가지고 간 거예요. 태극기하고 궁을기 그 당시에 마음대로 만들 수가 있었으니까 나도 그때 궁을기 만드는 방법을 배웠어. 그럼 그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셨어요? 중립지대로 가서는 마음대로 했어요. 그때는 작업도 없이 수용소에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그때는 천막 하나를 쳐놓고 교회를 만들었는데, 노상 교회에 가서 살았어. 밥 먹고 가면 교회 가서 천덕송 부르고 그때 경전의 일부가 들어왔던 적이 있었어요. 경전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어. 신인철학도 내가 그때 처음 봤어요. 그때 중립지대는 미군은 완전히 손 떼고 인도군이 우리 경비를 했어요. 인도군의 감시하에 경비를 하고 병원 수용소에는 한국 간호원들이 들어와 있었어요. 병원 수용소에서 서로 연락을 하는 거예요. 중앙정보부하고 우리하고의 모든 연락을 간호원들이 했어요. 그래서 그때 각 수용소 간에 연락할 게 있으면 병원으로 입원을 시키는 거예요. 내가 여기에 도서관장으로 오면서, 처음 들어와가지고 그 기록을 찾아보니까, 반공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명부가 있더라고요. 나도 그게 있는 줄은 몰랐어. 거기 보니까 내 이름이 나와. 천도교인 그 이름이. (다음 호에 계속) 인터뷰영상 바로가기==>http:// https://www.youtube.com/watch?v=UMIi5P5Dfq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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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에게 듣다(1)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님을 만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를 거쳐 우리 역사가 흘러온 절망과 희망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 시절을 건너 온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야말로 한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구십 살이 넘은 생을 넘나드는 기억들을 풀어내며 선생의 생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선생의 말씀 속에 선생이 경험한 모든 것을 표현할 때 ‘감사한 마음’이었다. 주어진 삶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느껴졌다. 소개 부탁드립니다. 성함과 언제, 어디서 태어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이창번이라고 합니다. 1934년 1월 17일생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90세가 되는 거예요. 참 안 믿겨져요. 평안남도 성천군 대구면 원평에서 태어났어요. 완전히 시골이에요.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장남이고 남동생이 3명이 있었어요. 아버님께서는 해방 후에 천도교 활동을 하시고 증조할아버지가 왜정 때부터 천도교를 하셨어요. 어릴 때 기억에 남는 일 있으세요? 어릴 때의 기억이, 겨울철에는 갓을 쓴 할아버지들이 매일 찾아오고 그래요. 요새는 집에 손님이 오시면 커피 대접을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추운 데 오시느라 고생하셨다고 활활 타는 화롯불을 내왔는데, 그게 대접이 됐어요. 그 화롯불을 들고 증조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는 게 저의 일이었어요. 그 방에 들어가면 갓을 쓴 그 할아버지들이 한 서너 명 앉아 있거든요. 그걸 갖다 놓으면 증조할아버지가, “그래, 이 어른이 이런 분들인데 인사드려라.” 하시며 인사를 시키셨거든요. 그럼 그냥 시키는 대로 엎드려서 절을 하잖아요. 근데 그때 놀라운 것은, 그 할아버지들이 앉아서 절을 안 받아요. 같이 일어나서 똑같이 나에게 절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왜 그렇게 우습던지 그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나한테 절을 하더라고. 아마도 그 당시 천도교인들의 모습이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어린애도 역시 한울님을 모신 존재로 그렇게 인정을 하는 거예요. 방에서 나와서는 동생하고 막 그 얘기를 하면서 웃던 생각이 나요. 증조할아버님께서 천도교를 하셨고 대를 이어 교인으로 살아오셨군요. 당시의 신앙생활에 대해 좀 들으신 이야기 있으세요? 내 증조할아버지의 함자는 이병근.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저는 늘 증조할아버지하고 잠자리도 같이 했고, 식사도 같이 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증조할머니는 할아버님께서 천도교 하신 것에 대해 상당히 못마땅했던 것 같아요. 증조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다니면서 늘 얘기하셨는데, “저 밭이 옛날에 우리 밭이었는데 네 할아비가 저거 팔아먹었다고”, “저 산도 우리 산이었는데 네 할아버지가 팔았다고.” 3.1운동 때 논밭 팔아서 전부 교회에 바쳤다는 것 같아요. 그걸 할머니는 그게 아주 못마땅하게 말씀하셨는데, 나보고도 절대 천도교는 해선 안 된다, 이런 뜻으로 말씀하셨어요. 근데 해방이 되고 나니까 아버지가 완전히 천도교에 몰두를 하기 시작을 해서 청우당 당위원장까지 하게 되니까 할머니가 그때는 그냥 완전히 손을 들고 말았죠. 평안남도 쪽에 동학이 들어오게 된 시기는 동학혁명 이후였는데, 동학혁명이 끝나고 난 다음에 그쪽에서 학살들이 심하니까 그때 피난 오다시피 올라왔는데, 3.1운동 때는 제일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했거든요. 틀림없이 할아버지가 어떤 직책을 맡았던 것만은 틀림없어요. 동네 인근 할아버지들이 찾아오는 걸 보면 뭔가 어떤 직책을 맡으셨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몰랐어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건 할아버지 책상 위에 <창건사>, <창건록>이라는 책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노상 그걸 뒤져보았거든요. 그때가 해방 이전이니까 40년대 초였을 거예요. 왜정시대 때의 기억은 거의 없지만요. 어릴 때의 가정에서의 살림살이는 어떠셨어요? 사는 것은 그때 그렇게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굶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땅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집에 땅이 있어서 (농작물)들어오는 게 있었고 산도 또 있었어요. 그 산에 밤나무가 많았던 기억이 나요. 생활하는 데 그렇게 어려운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왜정 때도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서기로 있었어요. 배급을 타고 그러니까 배를 곯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해방이 되고 나니까 북한에는 청우당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먼저 입당을 해서 활동을 하고 그러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께 일을 도맡기는 거예요. 그때는 천도교가 아니었고 먼저 청우당에 들어가는 거예요. 48년도쯤 되니까 교회에서 시일을 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전까지는 그런 것을 전혀 몰랐어요. 시일 보는 것도 모르고 청수 모시는 것도 몰랐고요. 그때 아버지가 청우당 면당 위원장을 할 때인데 47년도에 여기 남한에서는 동학혁명을 삼월 이십칠일 날 기념식을 했는데 북한에서는 일월 일일날 했어요. 그때 면에서 동학혁명 기념식을 국민학교 교정에서 했는데 한 300명 모이더라고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기념식을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 천도교의 교세가 더 확장되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때 해방되고 난 다음에 그 천도교가 다시 일어나게 된 동기는 결국 동학혁명한 게 있잖아요. 갑오년 동학혁명이요. 많은 사람들이 동학혁명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농민들이 반상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서 일어난 동학, 그리고 3.1운동, 이러한 국군운동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3.1운동을 천도교가 주도했다는 건 공산당도 다 아니까. 그 시절에 어떤 기관이 그런 걸 한 데가 있었겠어요. 노동당도 김일성이가 뭐 만주에서 빨치산 운동했다고 하지만은 그거는 별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그런 작용을 한 거예요. 천도교는 농민을 위한 정당이고 바로 구국의, 나라를 구하려고 했던 정당이라는 게 나타나니까 그게 선전이 된 거예요. 그때도 민주당은 있었어요. 조선민주당이 있었는데, 거기는 선전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근데 우리 천도교는 그게 아마 강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천도교에는 그때 문화운동-어린이 운동 등 천도교 청년당 조직의 당 활동을 해본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 사람들은 당에 가서 당 조직을 어떻게 만들고, 선전을 어떻게 했는지를 전부 체험했던 분들이기 때문에 공산당도 오히려 처음에 시작할 때 회의를 진행할 줄 몰라서 천도교 와서 배워갈 정도였어요. 회의 진행을 누가 해봤나요? 당시에 천도교인들은 다 지식인들이었잖아. 그리고 그때 당시에 또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천도교 활동을 하면서 그리고 이후에도 다 연결이 돼 있어요.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었으니까 활동할 수가 있어요. 노동당에 들어간 사람들은요, 농촌에서도 제일 불쌍하게 살던 사람들, 학대받고 살던 사람들이 노동당에 들기는 했지만 아무 지식이 없는 거예요. 동학혁명 기념식 때는 청우당 대표, 노동당 대표, 민주당 대표가 나와서 연설을 하는데, 천도교 대표는 그때 막 책상을 치면서 하는데, 노동당 대표는 연설문을 써 가지고 나와서 낭독을 하는데 뜨물뜨물해요. 지식이 없었으니까. 그때 그랬어요. 그러니까 청우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거예요. 해방이 되고 나서는 식민지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청우당에 가입을 했고, 청우당에서 뭔가 기대를 했겠죠. 민족 의지를 좀 불태우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1948년에 천도교 교인이 170만 명 정도가 됐던 거예요. 그러다가 1950년도 되니까 270만으로 늘어나요.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거죠. 그때 청우당의 기록을 보면 3.1운동 재현하는 것, 그리고 재현 운동으로 크게 활동을 하면서, 1948년 유엔총회서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을 실시해서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결의를 했거든요. 그래서 유엔 감시단이 나와서 선거를 하게 했는데 북한은 거절한 거예요. 감시단이 남한은 들어왔는데 북한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죠. 그렇게 되니까 할 수 없이 유엔에서 다시 결의를 하기를, 유엔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 먼저 한다, 그렇게 그해 5월 10일인가 선거를 하거든요. 그때 대한민국 정부가 8월 15일날 수립이 돼요. 북한도 곧 따로 선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민공화국을 새로 세우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걸 만들기 전에 남한의 최린 선생을 비롯한 천도교가 그 당시에 분열이 돼. 통일이 안 되면 이게 100년이 갈는지, 200년이 갈는지 모른다 이거야. 신라 백제가 통일할 때까지 천 년이 걸렸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런 문제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든 단독정부 수립은 안 되고 통일 정부 세워야 한다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3.1재현운동이에요. 그래서 그때 남한의 최린 선생 등이 북한에다가 지령을 보내 가지고 3월 1일날 남북한이 다시 한번 일어나자, 3.1운동을 다시 한번 일으키자 하는 재현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남한은 일어나질 않았어요. 북한만 가서 일을 하려고 여기에서 그때 오근 선생 선생 부인이 그 유은덕 여사인데 그분이 밀사로 올라가고 또 한 분, 박현화라는 분을 밀사로 보낸 거예요. 북한에서 온 분인데 그런데 박현화 이분은 지령문을 가지고서 평양까지 도착해서 전달을 하고 무사히 내려왔는데 오근 선생 부인, 유은덕 여사는 가다가 경비한테 발견이 되니까 도망을 치다가 그때 눈이 왔는데 신발 벗은 채로 도망을 치고 하룻밤을 그냥 굴속에 숨어 있다가 동상에 걸린 거예요. 그래서 평양을 가지 못하고 황해 도당위원장이 그때 김용환이라고 하는 분이 도당위원장인데 이분이 황해도 인민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었어요. 천도교 도당 위원장이면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는데 유은덕 여사의 남편이랑 같이 청년당 활동할 때 같이 활동했던 분이거든요. 그 집으로 찾아간 거예요. 그 평양으로 못 가고 그러고서 그때 평양 보낼 때 지령이, 이거는 김일대 선생 그러니까 평안남도 도당위원장 김일대 선생 외에는 절대로 이걸 전달하면 안 된다. 밝히면 안 된다. 해서 몸에 감추고 있으면서 그 안에서 얘기를 못한 거예요. 김용환 씨한테도 도당 위원장한테도 얘기를 못하고 아버님이 불편하다고 그래서 내 한 번 병문안 왔다가 이렇게 됐다고 그렇게만 속이고 있는데 근데 이제 이쪽에서 그 박현화 씨가 갔으니까 북한 천도교에서는 다 알았어요. 그 내용을. 그러면서 또 한 분이 올 거라고 했는데 오질 않거든요. 도당, 군당, 중앙당 회의에 갔는데 김용환 씨가 회의에 가서 이 사람(박현화씨) 고향이 평안북도 구성인가 그랬거든요. 구성 사람을 만나니까 당신 고향 사람 누가 우리 집에 와 있다고 그때 얘기가 그러니까 아, 유은덕 여사가 거기에 와 있구나. 그래서 그분이 돈을 가지고 내려가 가지고 밀사 지령을 다 갖고 있으니까 빨리 이제 남한으로 내려가라. 여기 있지 말고 내려가라고. 그때 공산당에서는 그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미행을 한 거예요. 그리로 가는 걸 알고 그 사람이 떠나자마자 체포를 해버렸어요. 그래서 이분은 그때 돌아가셨어요. 사형당해서. 그렇게 된 게 3.1재현운동이에요. 그때 천도교인 1만 8천 명이 구속됐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선생님 개인사를 좀 여쭤보면 언제 남쪽으로 내려오세요? 1950년 이제 6.25가 일어났죠. 그해 7월 8일날 나는 그때 양덕고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북한에서는 4월에 개학이 아니라 9월에 개학을 해요. 그래서 그때 8월 달이니까, 한참 졸업시험을 칠 때였어요. 시험을 치르는 동안에 어느 학교에서 인민군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학생증을 안 주니까 집에 갈 수가 없는 거예요. 북한에서는 공민증이 신분증인데 그때 우리는 학생증을 가지고 있었고 가는 데마다 검문소가 있어서 그것 없이는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시험 치고서 빨리 가려고 했는데 시험 치다 말고 갑자기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치더니 강당으로 가래요. 거기서 바로 군대로 가게 된 거예요. 학생들 전체가 다 간 거예요. 2학년, 3학년생들이. 1학년은 아니고. 그때 나는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집에 연락도 못하고, 그날 제가 시험 칠 때 가지고 있던 책갈피에다가 편지를 쓴 거예요. 동생과 아버지한테 편지를 써 가지고 책갈피에 넣고 평양으로 간다니까,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책갈피에 넣어 가지고 보따리에 책을 이만큼 싸가지고서 새벽에 우리 부락 앞을 지났는데 그 물길로 돼 있는 길에다가 책을 확 던지고 갔어요. 후에 월남한 사람한테 들으니까 그 책이 우리 집에 도착이 됐다고 그러더라고요. 편지를 동생들이랑 봤다고요. 그렇게 해서 내가 평양에 갔어요. 그럼 그때 바로 군에 입대를 하신 건가요? 바로 그 다음 날 원산으로 들어가서는 행군을 해서 삼척까지 내려갔습니다. 거기에서 입대를 했어요. 정식 부대에 9451육전대라고 하는 해병대예요. 거기서 입대를 해가지고 있다가 며칠 안 있어서 바로 또 올라와 가지고 원산 원부대가 거기에 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해병대예요. 거기 도착을 해서 한 10여 일 동안 있다가 바로 서울 쪽으로 나오기 시작을 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쭉 나오다가 낙동강 쪽에서 저지를 당하니까 인민군이 내려가다가 거기서 이제 왜관 있는 데서 혈전이 붙으니까 낙동강 도하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해병대니까 해병대 1개 대대를 그리로 보냈는데 내가 거기에 끼어 들어갔어요. 들어가서 생전 처음 전쟁이라는 걸 하게 되었습니다. 17살, 18살 때예요. 최전방에 가니까 인민군은 벌써 낙동강을 건너갔더라고 그리고 3일 후에 반격을 하고 쫓겨오기 시작하는데 우리 진지에 떨어지는 포탄 파편을 맞은 거예요. 저도 파편 맞아가지고 허벅지 다리에 피가 그냥 흐르는데.. 그래서 광주로 호송되어 간 거예요. 광주로 가니까 우리 원부대가 광주에 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약이 없는 거예요. 호송되는 것도 엠뷸런스를 타고 후송을 하는 게 아니라, 밤에 이쪽 부락에서 저쪽 부락으로 연결을 하고 그런 식으로 이동을 하는 거예요. 한 3~4일인가 지나고 나서야 광주에 도착했는데 바로 우리 부대가 있더라고요. 여단 사령부에 가서는 후퇴하기 시작했어요. 인천 상륙하는 바람에. 그때가 50년도 9월 달이에요. 그리고 내가 포로된 게 10월 8일날이니까 석 달 동안 인민군 생활을 한 거죠. 인민군 생활은 어땠어요? 그리고 어떻게 포로가 되셨나요? 인민군 생활은 그렇게 어렵진 않았어요. 그때 당시에는 한창 승리해서 내려갈 때니까 훈련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서 소총알 세 발 쏴보고 전방에 투입이 되니 잘 싸우지 못해요. 후퇴하다가 바로 귀순해버리고 말았어요. 부대에서 이탈해서 귀순해 나와서는 포로가 돼서 부산으로 갔죠. 포로 수용소로 간다는 건 몰랐어요. 포로수용소라는 그 말 자체도 몰랐어요. 그저 귀순하게 되면 그냥 끝난 줄 알았어요. 총만 뺏고 그냥 보내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수용소 생활을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이후로 시작된 수용소 생활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거기 가니까 낙동강에서부터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인천 상륙 후 포위되어 포로들이 무더기로 들어오는 거예요. 수용소도 미처 짓지 못한 상황이었고요. 처음에는 포로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모르고 수용소를 만들어 놨는데 감당을 못한 정도로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을 하는 거야 포로들이. 그러니까 그 옆에도 수용소를 만들고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거제도에다가 만들기 시작했어요. 너무 많이 모이니까. 그때 거의 7~8만 명 정도가 포로가 되어 들어왔으니까. 거제수용소는 골짜기예요. 제법 넓은. 60수용소 70수용소, 80수용소, 90수용소 이렇게 4개 수용소가 있었어요. 그리고 수용소마다 91, 92, 93, 94, 95 이렇게 나오거든요. 나는 78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70수용소 중 78번수용소에 들어갔는데 여기 들어가니까 완전히 빨갱이 수용소지. 인민군들이 있는. 처음에 들어가서 제가 놀란 게. 들어가니까 밖으로 북한에 민주 선전실에 들어간 것처럼 김일성 초상화를 연필로 그려서 붙여놓고 그런 상태예요. 거기 있다 죽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여기는 안 되겠다 해서 그때 기독교인들이 선교사들한테 탈출한다고 약속을 했던 모양이에요. 이 사람들 탈출할 때 같이 탈출한 거예요. 탈출해 가지고 갔는데 91수용소로 배치가 됐어요. 거기서 그 이동찬 선생을 그때 만나게 된 거예요. 감찰대 부대장을 했는데 거기에 가니까 빨갱이 수용소에서 온 놈들이라고, 여름철 8월 달인데 옷을 그냥 팬티까지 싹 벗겨요. 홀랑 벗겨가지고 조사를 하는데. 무슨 지령문 가지고 온 게 있나 그거 본다고요. 한 사람씩 감찰대에 끌고 들어가서 심사를 받는데 북한에서 심사를 한다는 건 고향이라든가 입대는 언제 했느냐, 어디에서 귀순했냐 뭐 이런 것들이에요. 북한에서 무슨 당에 들었냐고 물어서 천도교 청우당에 있었다고 그 얘기했더니 감찰대 부대장 그 양반 이동찬 씨가 뒤에 있다가, “너 천도교했어?” 묻더라고. “예, 천도교 했습니다.” 그랬더니 물어보는 게, 1세 교조가 누구야? 이거 물어봐 수운대신사입니다. 말했지. 2세 교조는 누구야? 또 물어봐. 해월신사입니다. 라고 또 답했지. 3세까지 물어보더라고. 의암성사라고 했더니 “아. 이 새끼 진짜 하나 왔네” 그러더라고. 참 드라마틱한 순간이네요. 선생님이 천도교인이라는 걸 밝히고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인데, 이후엔 수용소 생활이 어땠습니까? 난 그때부터 심사는 안 받았어요. 천도교인이라니까 봐주기 시작을 해서, ‘쇼리’라고 해요. 당번병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땐 식사가 좀 적어가지고 배가 고팠거든. 한창 먹을 때니까 배가 고파. 그런데 감찰대에 있으니까 마음대로 먹는 거예요. 내가 가서 밥을 타오는 당번병 노릇을 하고 그랬으니까. 그때 2대대 경비대는 모두 천도교인들만 모인 거예요. 계시던 분 중에는 연대통역관으로 있던 사람이 안명록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미군 사령관 통역을 하고 있으니까 그분이 지금 살아계세요. 그래서 당산교구에서 나하고 같이 활동하고 그랬던 분이에요. 그때 계셨던 수용소가 어디었는지, 또 그 안에서의 일들 기억하세요? 65수용소에 있다가 78수용소 2대대에 갔다가 다시 그다음에 91 수용소로 가서 감찰대로 떨어진 거예요. 감찰대가 당번병으로요. 그때 2대대가 천도교인들만 모여 있었기 때문에 시일이면 시일식을 보러 그리로 갔어요. 그때 경비대장으로 있던 분이 이창근 씨라고 하는 분이 여기에 나와서 시흥교구장을 했어요. 석방돼서 나와서 시흥교구장을 했는데 거기에 이제 김월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영복 교령님이 교령할 때 감찰 상임감사로 계셨고요. 그다음에 그 황승훈 씨라고 하는 분이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데 이분도 역시 천도교 경전을 거의 외웠던 분이에요. 선생님, 그러면 그 수용소 안에서는 천도교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됐어요? 본인이 천도교인이라고 이렇게 밝히고 밝혀지고 알려지는 계기가 있었나요? 빨갱이 수용소에서는 거의 몰라요. 그때는 자기 신분을 절대 밝히지 않았어요. 내가 그때 신분이 노출될 것 같아서 그 기독교인들 탈출하는데 같이 끼어서 나온 거예요. 북한에서 천도교를 했다는 게 알려지면 박해를 받을 것 같았거든요. 거기서는 밝힐 수가 없었어요. 나하고 같이 자는 사람은 내가 천도교인이라는 걸 알았어요. 같이 자면서 그 양반이 천주교 신자가 됐는데 그분이 자꾸 천주교로 오라고 그러는 바람에 내가 그때 난 천도교에 있다고 그 얘기를 했지요. 나도 그 천주교회 신앙하는데엘 몇 번 나가봤어요. 그때 수용소에는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가지고 성경을 수없이 뿌렸어요. 그때 마가복음, 누가복음 이런 것들을 단행본으로 찍어 가지고 그걸 돌리고 그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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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련 작가 소설 『동학』 원작, 연극 "사람, 한울이 되다"대하소설 <동학>의 저자 김동련 작가와의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하였다. 오는 5월 10일~13일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연극 <사람, 한울이 되다>가 무대에 오른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꿈, 동학이 가르쳐준 지혜와 오늘날 동학의 가치를 묻는 대화 속으로 독자 여러분을 모신다. 집필 계기와 과정 소설 <동학>을 집필하셨습니다. 총 6권 분량의 대하소설인데요, 집필하시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였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 동학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게 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강원도 묵호에서 중학을 졸업한 후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7살 먹던 해 봄부터 방파제 축조회사인 흥아공작소에 급사로 일했습니다. 30톤 기중기선 화장으로 일하던 또래의 친구가 당시 태극출판사에서 나온 『위대한 한국인』 전집을 구했으나 도저히 읽어내지 못하겠다고 하여 제가 넘겨받았습니다. 그 전집 두 번째 책이 『해월 최시형』이었습니다. 그 전집에는 이승만이나 김옥균 등 여러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저는 그분들에게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해월 선생님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저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특별히 어떤 점에서 충격에 빠지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스승 최제우가 순도한 후 30년 동안 포졸들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홀로 전국을 돌며 스승의 뜻을 이어 동학 조직을 재건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의 옳고 강한 의지가 불의로 점철된 잘못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면서 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해월 선생님의 행적에 비하면 기독교에서 전하는 바울의 전도 여행 같은 것은 어린아이 장난 같아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해월 선생님에 대한 소설을 써 보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해월 선생님의 이야기를 쓰려면 해월 선생님께 그러한 동력을 제공한 수운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운과 해월 두 분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려면 두 분의 뜻을 행동으로 옮긴 전봉준 장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난한 세월이 오래 이어졌으나 저는 이 꿈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험난한 세월이 오래 이어졌겠네요. 스승님들의 고된 여정만큼 작가님의 집필 여정은 그 과정을 고스란히 닮아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이 주제를 계속 삭이려 국내에 나온 동학 관련 문헌을 꾸준히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나 독서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44살 때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 문학을 수업했습니다. 문학사 자격을 얻었으나 마음에 드는 글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경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들어가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철학박사를 수료했습니다. 그 후 두 권의 책을 출간하며 문장 수업을 계속했습니다. 열 일곱 살에 처음 해월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되고 해월의 이야기로 소설을 쓰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해, 마흔이 넘어 비로소 국문과에 입학하셨는데, 배움의 뜻을 그렇게 이어가는 일도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배움의 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경험도 중요하고요. 동학에 관한 소설을 쓰려면 소설 속에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저는 사람의 죽음에 관한 경험을 하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을 얻어 합천 노인전문요양원에 입사해 8개월 동안 근무하며 사람의 마지막 삶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4년 전 여름, 저는 더는 집필을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당시의 국내외 상황과 작금의 국내외 상황이 중첩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동학이 그 시대의 희망이자 세상을 밝히는 횃불로써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던 것에는 그 시절에 처한 절박한 현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갑오년 동학군들이 맞이했던 상황을 다시 맞이하고 있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갑오년에 실패한 동학혁명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혁명 당시 동학군들이 외쳤던 숭고한 이상과 목표를 지금도 완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갑오년 당시 조선을 지배했던 세력은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인식하지도 못했고 잘못된 틀을 바꿀 의지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갑오년에 민족의 생존을 보장할 지혜는 결국 민중 속에서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지혜는 결국 푸른 눈을 뜬 시민 속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지혜는 동학의 인내천과 보국안민 같은 동학의 빛나는 사유를 반추하고 계승하고 선양하는 작업에 의해서 나올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가 점점 더 흥미로워집니다. 집필 과정에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집필하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금 총부의 감사원장을 맡고 계시는 부암 정덕재 선생님께서 천도교 관련 학자들과 문헌을 지극 정성으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소개받은 동학의 쟁쟁한 학자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섬세하고 명료하게 동학을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동학은 수운 선생님 나이 20에서 30살 사이에 사유의 기본 뼈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10년 사이 수운 선생님의 행적에 관한 남아있는 기록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각궁거상" 단 네 글자가 전부입니다. 각궁 즉 활을 손에서 놓았다니 무술을 익혔을 것입니다. 거상 즉 행상을 나섰다니 각지를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오지를 돌면서 조선의 실상을 뚜렷하게 목격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홀로 숙고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싶으셨나요? 저는 소설 속에서 당시 조선의 제반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구성했고 그 당시 범람하던 거대 담론인 유학과 불교와 도교를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 학술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이렇게 재해석된 거대 담론을 바탕으로 행상을 하며 현자를 만나 지혜를 구하던 수운 선생님의 사유로 종합하여 독자적인 동학으로 이루어 가는 과정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이후의 모든 문장은 많은 상황을 문학적 상상보다는 구체적인 자료로써 직접 이야기하게 하는 서술 방법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소설 곳곳에 나오는 대부분의 대화는 모두 조선 시대의 말로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의 대형 사전에서도 찾지 못하는 고유한 우리 말과 관용어가 수도 없이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집필 태도는 일반 독자들의 가독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저는 감수했습니다. 집필 기간은 어느 정도가 걸렸나요? 집필에서 출간까지 만 2년이 걸렸습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수운과 해월 선생님을 물론 당시의 동학 도인들의 절박하고 안타까운 심정과 자주 동화되었고 그럴 때마다 많이 울었습니다. 두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심장이 아리고 억장이 막힐 때도 많았습니다. 어떤 때는 서재 바닥을 뒹굴면서 몸부림치며 통곡을 하기도 했습니다. 글이 막힐 때는 만취해서 자다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17살 때 품었던 그 꿈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나고 나서야 여섯 권의 대하소설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자료조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1차 자료로 참고한 문헌은 동학 경전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일본외무성자료』 등입니다. 『동경대전』‧『용담유사』에 나타나는 범재신론은 종교철학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의 단계인데 이러한 사유는 서양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영국의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에 의하여 제시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19세기에 수운 선생님에 의하여 종교철학의 가장 높은 단계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은 조정의 입장으로 쓰인 글이므로 제가 백성의 입장에 서서 다시 번역해 소설에 넣었습니다. 『일본외무성자료』도 일본 입장으로 썼기 때문에 사실의 왜곡이나 축소가 심해 제가 조선 백성의 입장에 서서 다시 번역했습니다. 해월과 의암 선생님이 남긴 글들은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 대표 오암 박길수 선생의 도움을 받아 모두 정독했습니다. 원광대학교 박맹수 총장님께서는 아직 발표하지 않은 여러 논문을 보내주셨습니다. 영산대학교 송봉구 교수님과 동의대학교 성강현 교수님의 도움도 컸습니다. 기타 동학 관련 단행본이나 논문들은 살아오면서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하여 꼼꼼히 읽었기에 이미 횡설과 수설이 자유로운 상태였습니다. 특히 표영삼 선생님과 이이화 선생님의 저작을 읽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더러는 역사에 묻혀 외면당했던 여러 사건을 파내어 드러내기도 했고, 동학을 교단의 입장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재해석하여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 노력했습니다. 저의 스승인 경상대학교 오이환 교수님은 제 소설을 읽으시고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술이 섬세하다고 평가해 주셨는데 그것은 허구인 소설을 자료로써 직접 말하게 하려는 저의 무모한 서술 태도가 가져다 준 선물이 되었습니다. 소설과 연극의 차이 오는 5월에 부산 원곡예술관에서 3일에 걸쳐 선생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50년간 가슴에 품어 온 이야기가 소설로 완성되고 연극 작품으로 제작이 되는데, 감회가 어떠신지도 궁금합니다. 또 이 작품을 보시는 관객분들에게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앞에 말씀드렸듯이 제 소설은 거의 역사서와 학술서 수준에다가 조선 시대의 언어로 썼기 때문에 가독성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독자들의 요청을 받아 전국을 돌며 북토크를 했습니다. 특히 유학과 불교 그리고 도교와 천주교에 관한 저의 재해석이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오래된 우리 말이 많아 독자들은 사전을 옆에 펴 놓고 일일이 찾아가며 제 소설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동학은 우리에게 매우 아픈 상처라고 생각했기에 저는 다른 소설처럼 글을 쉽고 재미있게 쓸 수는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독자들은 그러한 저의 입장을 십분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소설이 이렇게 적극적인 독자층을 넘어 많은 분에게 알려지려면 좀 더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컨텐츠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소설 중 일부분을 발췌하여 주제를 강화한 이야기로 연극 공연이 만들어진다면 다면, 좀 더 가깝게 시민들에게 다가가 동학을 알릴 수 있고 또한, 공연에 참여한 분들이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깊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대 동학의 가치 내내 생각하게 됩니다. 왜 동학이었는가, 그리고 160년이 지나서도 왜 다시 동학이어야 하는가를요. 이 시대 동학의 가치를 참 오래 생각하시고 또 수운 대신사님과 해월 신사님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해오셨을텐데요. 이 시대 동학의 가치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현대사회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빼앗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듯합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을 다만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을 소비하는 구매자로만 대우하고 있습니다. 돈이 슈퍼에고가 된 세상에서 개인은 생산자가 상품만 판매하면 게임에서 이기는 룰 속에 헤매고 있습니다. 거대한 관료주의는 개인을 자기들이 지향하는 기계속의 작은 톱니바퀴로만 대우하고 있습니다. 권력이 돈을 추구하면서 남발한 오염된 담론으로 인하여 개인은 무엇이 옳고 그른 지를 판단할 수 없도록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 내동댕이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은 자신이 진실로 어떤 존재인지 숙고하기가 어렵습니다. 동학은 인내천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은 각자가 이 우주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답고 신비한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곧 한울이라는 가르침은 암울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 자신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주어 그들의 삶 자체를 올바르게 바꾸게 합니다. 향아설위는 이러한 사유가 삶 속에서 실천되는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이 추구하는 보국안민은 국가가 잘못하면 백성이 직접 나서서 그 잘못을 옳게 고쳐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정의롭고 적극적인 실천의 정신입니다. 부패한 권력에 맞서 백성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권력을 창출하는 것은 동학이 그동안 끊임없이 추구했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과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동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제 소설에는 동학이 제시한 여러 강령과 가치들이 구체적인 예를 통하여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동학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빈부격차나 저출산 그리고 안보위기나 사회적인 정의와 환경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줄 수 있으며 나아가 사람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대단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동학혁명 130주년을 맞이합니다. 소회가 어떠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130년 전 동학은 세상의 잘못된 틀을 바꾸려 목숨을 걸고 일어났습니다. 그 혁명은 안타깝게도 완수되지 못하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제2의 동학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동동학농민기념사업회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동학혁명 당시 경상도 지역의 최대 격전지였던 하동을 재조명하기 위해 전적지를 보존하고 동학을 선양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초 전국의 기념사업회가 장흥에 모여 전국동학농민기념사업연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흐름이 민중 속에서 동학의 지혜를 다시 반추하고 계승하여 이 시대에 당면한 문제들은 해결하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에 저희가 기획한 동학의 컨텐츠화를 위한 연극 공연이 조그만 기여라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부산 공연이 잘 마무리되면 올해 전국을 돌며 재공연할 계획입니다. 서울의 예술의 전당에서 마지막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저희의 계획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정부를 비롯하여 천도교 총부나 관련 단체의 많은 관심과 격려를 기대합니다. 김동련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학사/국립경상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동대학원 철학박사 수료/경상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방송통신대학교 출강/도서출판 후아유북스 대표/ 카페 여래(다솔사) 대표/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대표 <저서> 장편소설 『우리가 사랑할 때』(밥북)/인문서적 『천자문으로 세상보기』(인간사랑)/대하소설 『소설동학』전6권(모시는 사람들)/번역서 『안원의 사존편』(후아유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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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동귀일체가 필요할 때(2)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2시간 반,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부산으로 향하며 걸음걸음 걷는 땅,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끓는 청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역사가 보였다. 먼 이야기가 아닌,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내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늘 걷는 땅은 어제와 다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렇게 역사의 한 획이 된다. 그 선명한 줄기를 따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넘나드는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난다.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지난 기사에 이어) 천도교신문 : 대를 이어 천도교단을 위해 헌신해오셨는데,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어린시절, 청년기의 교구장님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게 됩니다. 박차귀 교구장 : 어릴 적에 제가 중고등학교 때 우리 부산시 교구에서는 '소년의 서사', '내성당 서사' 이런 거 외워보라고 하면 늘 제가 단골이었어요. 아무도 그걸 잘 안 외우려고 하니까 집행부에서 저더러 매주 나와서 하라고 하죠. 그럼 나도 매번 내가 해야 되는 걸로 생각을 했고요. 그때 천덕송을 부르면 제가 오르간으로 연주하면서 창호지에 쓴 가사를 넘겨가면서 함께 부르곤 했어요. 아무튼 제가 좀 다른 애들보다 용기있게 앞장서서 했어요. 천도교 공부를 하면서 그 옛날에 조기주 선생님이나 백세명 선생님, 김용문 선생님 등 제가 그 분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를 했어요. 대학 막 들어갔을 때였을 거예요. 서울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우이동에 내려서 의창수도원 걸어가는 길, 나는 그 길을 참 좋아했어요. 그러고보니 옛날이 그리울 때가 참 많습니다. 천도교신문 : 젊은 시절이 그리운 마음도 있으실 거예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또 의창수도원까지 가시는 길에 실린 열정도 그렇구요. 박차귀 교구장 : 저는 방학을 이용해서 공부를 했어요. 여름방학이었는데, 의창수도원 가는 길이 지금은 도로가 났는데, 그 길이 다 개울이었어요. 휴식시간이면 그 개울물에 발을 담그던 추억이 있죠. 그때는 그런 낭만이 있었는데 요즘은 너무나 삭막하다는 그런 아쉬움도 있습니다. 최덕신 교령님 때였는데, 제가 천도교 청년회 주최 웅변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최덕신 교령님 자택에도 가서 하룻밤 자고 사모님하고 같이 대화도 나누고 그렇게 많이 귀여워해 주시던 기억이 많이 나고요. 돌이켜보면 추억들이 참 많아요. 그 이야기들은 제가 맨날 며칠 해도 많습니다.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으로부터 내려온 집안의 역사, 교구장님께서 어릴 때부터 쌓아온 신념, 그 단단한 힘이 지금까지 교구장님을 끌고 오신 것 같습니다. 박차귀 교구장 : 그 영향을 받아서 지금까지도 KCRP, 민족종교협의회에서도 제가 여성회장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의 경험이 생각의 폭을 넓혀준 것 같고, 그런 경험들로 인해 천도교를 사랑하는 만큼 또 이웃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시일에는 제 건강이라든지 또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해서 젊은 사람들한테 이제 넘겨줘야 되는데, 아직 더 해도 된다고 그래서 제가 아직 더 하고 있습니다.(웃음) 천도교신문 : 굉장히 많은 활동들을 하셨는데 여성 리더로서 천도교에서 또 이 시대의 종교의 역할하고 같이 해서 한 말씀해주세요. 박차귀 교구장 : 지금은 여성 시대라고 하죠. 모성의 마음으로, 우리가 어머니의 마음으로 신앙을 한다면, 어쩌면 여성 지도자가 더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 여성회가 곧 100주년이잖아요. 남성들이 자꾸만 더 우리 여성들을 뒷전으로 생각하는 문제들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결과도 있었습니다. 천도교는 남성들만 하느냐, 왜 남성들만 다 직책을 갖느냐 하는 말을 제가 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여성 교역자를 많이 양성해서 여성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해 내야만 교단이 더욱더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뒤에 후배 세대들이 큰 역할들을 하겠지만 좀 더 좋은 세상을 보고 가야 하는데, 하는 그런 아쉬움도 같이 듭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제 나이가 들은 것 같아요. 천도교신문 : 교구장님께서는 동귀일체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진정한 동귀일체란 무엇일까요? 박차귀 교구장 : 동귀일체가 우리가 하나의 뜻으로 돌아가 같이 힘을 모은다는 뜻이라면, 하나가 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을 때 진정한 동귀일체가 될텐데, 형식적으로 입으로만 동귀일체가 되자고 하지 말고 반목과 갈등에서 화해와 단결로 각자위심에서 공동체형성으로 나아가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한울님의 큰 정신에 합쳐서 한울님과 한 몸이 되자는 것, 진정한 동귀일체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는 ‘吾心 卽 如心’ 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신문 : 교구장님께서, 아버님, 할아버님부터 천도교를 해오셨는데 후학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도 있으실 것 같아요. 박차귀 교구장 : 저도 천도교를 제일 우선으로 하고 살라고 말하면 제 동생들부터도 저와는 다른 마음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제 동생들은 언니가, 누나가 열심히 하니까 우리는 적당히 해도 되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할 때, 그럴 때는 생각이 많아지거든요. 그 각자가 다 자기 신앙관이 뚜렷해질 수 있도록 신앙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교단에서도 많은 연구도 해야하고 교육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옛날하고 다르기 때문에 그 시대에 발맞춰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천도교의 진리는 이미 시대를 앞서 걸어왔습니다. 우리가 행동으로도 그에 맞게 펼쳐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곱게 내려앉을 때, 함박눈이 푹푹 내려 차곡차곡 쌓일 때, 박차귀 교구장의 열정적인 걸음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손길을 내밀던 모습을 오래 생각했다. 동귀일체로 함께, 잠깐이라도 걸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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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동귀일체가 필요할 때(1)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2시간 반,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부산으로 향하며 걸음걸음 걷는 땅,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끓는 청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역사가 보였다. 먼 이야기가 아닌,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내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늘 걷는 땅은 어제와 다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렇게 역사의 한 획이 된다. 그 선명한 줄기를 따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넘나드는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난다.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천도교신문 :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님 반갑습니다. 교단의 역사와 함께 오랫동안 헌신해오셨습니다. 천도교신문에서 교구장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박차귀 교구장 : 반갑습니다. 이렇게 먼 길 와주셔서 더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에게는 어찌 보면 천도교가 내 삶의 전부라고 얘기할 정도로 저와 천도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숙명적인 관계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더불어서 살아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천도교신문 : 천도교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천도교인으로 사셨습니다. 어릴 적 이야기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릴 때 기억나시는 장면 같은 것 있으세요? 박차귀 교구장 : 우리 집에 제일 많은 건 책이었어요. 제가 어린이 책 귀한 줄도 모르고, 학교에서 옛날에 헌책 가져오라고 해서 어린이 책을 하나 갖고 갔더니 선생님이 보시고는 너무 좋아하는 거야. 나는 선생님이 좋아하시니까 저리 좋아하시면 또 갖다 드려야 되겠네하고 갖다드렸지. 나중에 그 책이 천도교에 대한 책이었다는 걸 알고 많은 후회를 했죠.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환원하시기 전날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소고기가 귀했어요. 우리 집 밑에 유명한 갈비 집들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그때 갈비를 사가지고 오셔서는 무릎에 저를 앉히고 이렇게 먹여주더라고요. 그렇게 할아버지가 유독 저를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내 위에 언니가 있었는데 언니가 일찍 가버렸어. 그러고 나니까 저를 아주 귀하게 대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이름이 버금 차, 귀할 귀 자예요. 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러고보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가 벌써 70년이 흘렀네요.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께서 부산시 교구를 설립하신 박찬표 선생님이시지요. 할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시겠어요.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는 제가 학교 초등학교 막 들어갈 때쯤 환원을 하셨어요. 1월 28일이었어요. 가장 추운 날이었어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이 참 추웠다는 것과 교구에서 교인들에게 특별 동계수련을 지도하시다가 환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수련에 너무 열중하셨던 것 아니었나 하고 생각이 듭니다만 요즘 같으면 좋은 보약도 좀 잡수고 했더랬으면 할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그런 아쉬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일찍 가셔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할아버지가 써놓은 일기책이 있습니다. 한문으로 돼 있어서 제가 해독을 못 했어요. 언젠가는 책을 만들어 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박찬표 선생님은 우리 역사에서도 아주 의로운 일을 하셨던 독립운동가로 기록되어 있더라고요. 신인간 통권 582호(포덕 140년 2월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인암 박찬표 선생은 3.1운동 당시 보성학교 2학년 시절,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구치소와 부산교도소에 수감된다. 이후 26세 때인 포덕63년 3월 17일 묵암 신용구 선생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한다. 이후 조국 독립의 길과 진실한 삶이 천도교에 있음을 깨닫고 천도교의 불모지인 부산에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씨앗을 뿌리내린다.(성주현, ‘부산 지역에 천도교를 심은 인암 박찬표’, 신인간 582호, 1999)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께서 보성전문학교 다닐 적에 독립 3.1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발각되어서 구치소에 계셨어요. 국가기록원에도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는 그 기록도 좀 더 조사하고 보완해서 책을 발간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잡지들이나 저서들은 할아버지께서 남겨놓은 책들로 영인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신인간』, 『개벽』, 『당성』 등으로 대표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우리 천도교에서는 소장자와 기증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아버지께서는 천도교의 발전을 위해 누구든지 와서 보고 가라고 하셨고 많은 분들이 오셔서 보고 가시는 걸 제가 봤습니다. 어릴 적에 부산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들이 우리 집에 와서 책을 보셨고요. 서울 중앙총부의 신인간에 계시던 분들도 많이 와서 그 책들을 보고 가셨고요. 그렇게 할아버지가 교단의 책들을 잘 모아놓으셨기 때문에 영인본을 낼 수 있었다는 것에 저는 참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소중하게 소장하셨던 분들에 대해서도 좀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선생님은 어릴 적에 할아버님을 많이 따르셨나요? 박차귀 교구장 : 예. 제가 어릴 적에는 조금 활발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어느 교인 집에 순회를 가시면 제가 꼭 따라갔어요. 손잡고 따라간 기억이 나요. 오늘은 어디 어디를 가자 하시면, 제가 그냥 앞장서서 가는 거예요. 골목골목을요. 그럼 할아버지가 잘 찾는다고 참 좋아하셨어요. 그러면 나는 그 칭찬에 더 신이 나가지고 매일 할아버지가 가자 하시면 따라갔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참 잘했다, 수고했다 하시면서 벽장에서, 옛날에 그 박하사탕 같은 걸 벽장에 두셨거든. 그 사탕 하나 주시는 거, 그게 그때는 귀할 때니까 그거 하나 먹는 재미로 기분 좋게 다녀오곤 했습니다. 또 옛날에는 차가 별로 없어서 걸어 다녔을 때거든요. 우리 천도교인들은 흰 도포자락을 펄럭이면서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다니셨던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할아버지랑 순회를 갔다오면, 할아버지는 저에게 “너는 참 어찌 그리 기억력도 좋냐” 하시면서 참 대견해 하셨어요.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의 손녀를 향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정말 할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참 아쉬우셨을 것 같아요.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께서 유치원을 경영하셨는데, 그때 마당이 있었어요. 그러면 제가 그 마당을 막 뛰어다니고 그런 기억이 있죠. 너무 일찍 가셔서 그 뒤에 추억이 없는 게 좀 아쉽습니다. 정말 더 오래 사셨더라면 저하고 많은 추억을 남겼을 텐데 말이죠. 저는 항상 그런 트라우마가 있었어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단명하셨거든요. 다행히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 나이보다 훨씬 더 이렇게 오래 살고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교구장님께서 여성 교구장님이시고 또 여성회장도 역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도교 집안 여성의 이야기도 궁금해집니다. 박차귀 교구장 : 우리 할머니가 천석꾼 집안의 딸이었는데 할아버지한테 시집을 와서 천도교 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대요. 그런데도 불평, 불만 한마디 없이 그렇게 따라주는 것이 내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고 정말 성내는 얼굴 없이 내조를 잘 하셨다고 해요.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조금 일찍 환원하셨는데 할머니가 우리 부산시 교구 초대 여성회장을 하셨지요. 지금 우리 부산시 교구 여성회가 80년이 더 되었거든요. 지방 교구 중에는 여성회가 빨리 창립이 됐죠. 할아버지의 영향인 것 같아요. 초대 여성회장을 하시다가 그 뒤로 다른 분이 여성회장을 하시다가 우리 어머니가 여성회장을 하셨어요. 제가 고등학교가 다닐 때였지요. 서울에서 중앙위원회가 있으면 내가 어머니 대신 부산시 교구 대표로 서울에 올라가곤 했어요. 우리집 여성들은 고생을 많이 하셨죠. 손님들이 참 많이 오셨어요. 지방에서 오시는 교인분들이었죠. 그때는 여관이 별로 없었으니까 교인분들 오시면 할머니나 어머니나 고생하셨지. 늘상 교인들 밥 해드리고 대접해드리고 그러셨어요. 어머니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88세에 환원하셨습니다만, 양반집 귀한 딸이었는데, 고생을 좀 하셨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인물이 참 좋았어요.(웃음) 요새 젊은 사람 같으면 아마 그렇게 살아라 해도 못 살 거야. 나도 그렇게는 못 할텐데,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도 내가 이겨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천도교를 잊지 말고 지켜야 한다고요. 그런 이야기를 해 주셔서 저도 열심히 그 뜻을 받들어서 하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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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아이들을 키우고, 아이들은 한울님을 키운다Q. 2014년 방정환 한울어린이집을 설립하게 된 배경과 계기를 알려주세요. A. 한울연대는 한울님과 사람을 섬기며 만물을 공경하여 생명을 개벽하고자 하는 실천 단체입니다. 그동안 타종단과 연대하여 환경파괴로 깊은 상처로 입은 사람들의 절망과 현장을 찾아 목소리도 높여보았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해결이 필요함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수련을 강화하며 ‘영성이 곧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우선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영성의 주인(한울님)이 되는 마음을 심자, 그리고 부모들에게 다가가, 지금 세상에 횡횡하는 오염된 마음의 존재를 밝히고 내 마음을 바르게 운용하는 힘부터 길러보자는 강력한 의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Q. 운영방식이 기존 어린이집과 다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원장님의 운영 철학도 궁금합니다. A. 기존의 어린이집과 다른 점은 우리 사회에 팽배한 관습적인 교육방식을 초월하려는 노력입니다. 바로 친구와 짝을 이기고 일어나야 하는 경쟁 중심의 교육과정 자체가 미래를 보장한다는, 그야말로 삭막한 이 세태를 극복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나’를 소중히 보호하고, 나를 드러내는 행위를 존중합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가 아니라,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니?’ 입니다. Q. 소파 선생께서 '어린이가 세상의 주인이며 미래의 주역'이라고 말씀하신대로 어린이집을 운영하시더군요. 특히 신경 쓰시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A. 방정환 선생님께서는 어린이는 새로운 사람이며 어른보다 더 높게 대접하라고 하셨지요. 자식도 내 소유가 아니니, 부모 욕심대로 진로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내 아이를 잘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산들맘(산, 들, 마음)’이라는 부모활동을 운영합니다. 등원해서 새날열기(함께절, 맑은물, 나누미)부터 나들이, 점심식사까지 참여하면서 어린이 활동을 돕고 관찰하면서 아이의 특성을 하나하나 깊이 있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아이들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뿐만 아니라 서로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이를 위해 부모연수와 교사연수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어요. Q. 원장님께서는 어린이들과 자연의 교감을 중시하시는데, 주요 프로그램은 무엇인지요. A. ‘날마다 나들이’와 ‘마당 흙놀이’, ‘작은농부’ 활동입니다. ‘날마다 나들이’에서는 웬만한 날씨쯤은 어린이들의 놀이 친구가 될 뿐이지요. 자연의 기운을 마음껏 누립니다. 그러면 순수하고 거룩한 자연, 그들이 아이들을 키워내지요. 어린이들은 오전에는 나들이, 오후엔 흙 놀이를 하면서 놉니다. ‘작은 농부’는 땅과 생명의 마음을 살리기 위해 농사를 짓는 프로그램입니다. 어린이집 대표(방정환배움공동체구름 달, 구 방정환한울학교)께서 땅 500평을 기증하셨고, 천도교 대학생단에서 생태화장실을 지어 주셨습니다. 자연농법으로 2월부터 주요 농사를 두루 체험합니다. Q. 방정환배움공동체 구름달에서 '교사, 방정환에게 길을 묻다' 책을 펴내셨는데요. 원장님께서 쓰신 한울어린이집에 대해 가장 강조하신 내용이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A. 영성(마음, 모심)프로그램으로,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새날열기 ㅡ ◯함께절("서로 배우겠습니다" 큰절하기)ㅡ ◯맑은 물(마음담기, 마음소리, 마음 먹기) ㅡ ◯나누 미(밥한그릇에 담긴 천지만물의 순환과 고마움 알기) 2) 다섯 가지 약속(도와줄게, 같이하자, 할 수 있어, 나누어 줄게, 기다려줄게) 3) 모심인사(모든 일의 시작과 마무리 인사에 모시고~를 붙입니다) 이것이 기존의 생태어린이집과는 다른 영성 프로그램입니다. 마음과 한울님을 모시기가 핵심입니다. 공경의 덕목을 위해 항상 시작이나 마칠 때 둥글게 모여 함께 진심으로 절을 합니다. 믿음의 덕목으로 ‘맑은물’ 시간은 방정환 선생님 말씀처럼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시간이지요. 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기 마음을 헤아리고 읽어내며 표현하는 시간입니다. 정성의 덕목으로 ‘나누미’를 합니다. 밥 한 그릇에 담긴 이치와 정성을 생각하며 쌀을 한 숟가락씩 떠서 모읍니다. 나누미에 참여하는 가정도 점점 늘어나 밥하기 전 나누미를 하고 일주일 단위로 가져오면 쌀은 어린이들이 밥을 지어먹고, 모아진 쌀 만큼의 금액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합니다. Q ‘한울님’ 호칭을 둘러싸고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있는데요. 원장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A. 한울에 님자를 붙여 ‘한울님’이라고 칭함에는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께서 다시 개벽이라고 하는 그 출발점이 천지운용의 이치인 한울을 부모와 같이 섬기고 공경해야 하는 초월적 신성한 존재로서 정신생명 곧 영성, 성령에 대해 확연한 깨우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Q. 동학인으로 자부하며 활동하는 ‘한울님’, 즉 활동가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동학인이라면 우리 스승님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고 사람들이 진정 어떤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셨는지, 어려울 때마다 어떻게 수련하면서 난관을 극복해 왔는지 철저히 돌아 보고 자세히 살피는 공부부터 해야 합니다. 스스로 동학인이라고 말한다면 스승님으로 거듭나야 하는 과제와 책임이 동시에 부여되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감히 동학인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스승님을 들먹이면 안 됩니다. 동학인이라면 이런 모든 단계를 체득하고 나서 ‘혁명’을 말해야 합니다. 글. 함경숙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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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 역사가 있는 여행반갑습니다. 박광일 여행작가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여행이야기라는 회사의 대표님이시기도한데요, 방송에서 뵙기가 더 익숙합니다. 어떤 방송에서 만날 수 있는지 독자여러분께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최근에는 TV방송보다는 라디오 방송을 더 많이했습니다. 라디오 고정 프로그램으로 7개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데, KBS는 3개, SB와 EBS, CBS, 국악방송 각 1개씩 그렇게 7개의 코너에서 저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전부 역사코너인데 어떤 코너는 유적, 어떤 코너는 사건, 도 어떤 코너는 역사 속의 법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다룬 이야기들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청취자 여러분들께서 법과 관련된 이야기는 흥미로워하시더군요. 전봉준 장군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도 그랬습니다. 무라카미 텐신의 사진을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전봉준의 재판은 근대법정의 모습이 등장한 재판이고 또 한편으로 해월 신사의 재판에 참여했던 재판관 중에 조병갑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주로 독립운동 등의 역사를 다룬 방송을 일반적으로 하고 있고, JTBC에서 세계다크투어, 일제 침탈의 역사, 일본으로 끌려간 노동자들의 이야기 등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매주 7개의 레포트를 쓰는 느낌으로 방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 테마가 있겠지만, 역사를 주제로 많은 방송을 하시다보니 콘텐츠를 구성하는 일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콘텐츠를 구성하는 일은 언제부터 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우선 방송 콘텐츠 구성에 대한 말씀을 먼저 드리면, 이런 역사 콘텐츠를 한 방송에서 짧으면 7~8개월 길면 4~5년동안 해오다 보니 소재를 구성하기가 참 어렵고, 대학 다닐 때보다 실록과 문집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또 최근에는 라디오가 대부분 팟케스트, 보이는 라이도, 유튜브 등으로 또 CBS의 경우 콘텐츠를 제공하는 플랫폼을 통해 전달되고 있어서 동시에 듣지 않고 찾아서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제가 역사를 전공했고, 또 역사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교수님께서는 대학원을 그만두고 회사 차린다고 했을 때 참 속상해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몇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교수님이나 동학들에게 폐가 되어선 안된다고요.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더군요.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또 역사 방송은 팩트오류라던가 관점 등이 중요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어요. 영상과 사진의 자료들이 사실과 다른 자료들이 많아서요. 여행이야기라는 회사는 여행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역사콘텐츠를 생산하는 회사라고 볼 수 있겠군요. 1999년에 회사를 만들 때였는데 당시는 이른바 다크투어라는 개념도 없었고 회사라기보다 동호회 정도로 있을 때였어요. 유홍준 교수의 책이 나오면서 역사여행이나 기행이 주목받게 되었는데, 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업의 영역으로 바꾼 것이 수학여행이었어요. 기관과 업체와 협업, 운영할 수 있는 담당자를 찾게 되면서 회사가 성장했죠. 역사기행과 관련된 어린이, 청소년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면서 만들어졌어요.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역사 인식이 넓어지는데 좀 아쉽긴 합니다. 조금 더 빨리 이루어졌다면 소실되지 않았을 자료들이 많았을 것고 또 더 일찍 발굴할 수 있는 문화재들도 많았을 것 같아요. 대중 영역에서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우리 것을 높이다 보니 국수주의 현상이 일어나고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으로 표출되기 때문에 조율하는 것이 힘듭니다. 역사는 좋다, 나쁘다가 아닌 있는 그대로인데 가치관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을 무너뜨리는 것도 큰 일입니다.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 왜 그들이 그렇게 했는가. 그 부분이 여전히 그런 어려움은 시대가 변했어도 갖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예인이 말을 잘못하면 크게 문제 삼으면서 정치인이 오류를 범하는 것에는 너그럽게 대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어요. 사회적으로 그런 위치에 있고, 또 공부를 했음에도 그런 오류를 범하면서 문제가 되는데, 이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부가 바뀌면서 여당 인사들이 가진 일본에 대한 태도도 그렇습니다. 전범집안을 일본 전통의 유능한 정치가문으로 묘사하는 등, 이것이야 말로 대서특필해서 다루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면서 언론이 다뤄야 하는데 한두 번 다루다가 끝내더군요. 짚어내지 못합니다. 전범, BC급 까지도 인식을 못합니다. 오히려 이 부분이 문제가 있겠다 싶어요. 교과서 문제도 그렇고요,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에서 그런 제대로 된 역사 콘텐츠를 생산해내지 못한 것도 문제 아닐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대중영역에서는 일본에 대한 비판의식이 굉장히 높은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정책에 반영될 때 어떤 모습으로 반영되어야 할지 모르는. 그 단계로 넘어서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것이 안 됩니다. 작가님의 책 “제국에서 민국으로”라는 책을 보니 이해하기 쉽게 글로 쓰시고 문체가 쉽게 쓰시려는 노력이 보이더라고요.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 임시정부에 대한 책인데 임시정부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합니다. 어떻게 바라보고 책을 쓰셨는지 궁금합니다. 1919년이 임시정부 100주년이기도 했고, 제가 임시정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에 놀랐고 80~90년대에는 임시정부에 대해 과소평가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구가 한 게 뭐냐,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자신들의 영역들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1919년 3.1운동의 결과로서 계속해서 우리 독립운동은 이어져 왔고, 근대 역사의 시작의 기준이 되는 게 3.1운동인데, 3.1운동 이후에 끝까지 이어졌던 기관이나 단체는 유일하게 임시정부예요. 1948년 정부수립할 때 제헌 헌법에 보면 복국과 재건은 1919년입니다. 1919년을 극대화 시키는 것, 표상할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성과는 미약했고 그들의 지향점도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그 성과를 온몸으로 가지고 있었던 임시정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임시정부의 역사는 한국엔 없다는 거죠. 흥미롭지 않습니까. 특별히 관심을 갖고 책을 쓰시게 된 이유가 있나요?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많았어요. 1990년 이전만 해도 중국과 교류가 없었으니 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소수일 수밖에 없었죠. 이 책을 쓴 이유도 임시정부에 대해 누군가 전달하면 좋겠는데 내용이 좀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간의 흐름에 따라 시기적으로 쉽게 설명해주면 여행가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서였습니다. 자료를 찾다보니 전문가 영역과 비전문가 영역의 간극이 너무 크더군요. 전문가 영역은 한 사람 한 사람, 한 시기 한 시기를 찾아가는데 비전문가의 영역은 그냥 김구 답사기인 거예요. 김구 선생은 독립임시정부사무소 만들 때부터, 중경시절 주석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경시절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그 사이사이 참여한다는 것,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 시대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큰 시선으로 보는 책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 책을 썼습니다. 집필기간은 2년 정도인데 앞뒤 답사, 자료까지 5~6년정도 됩니다. 자료고증도 쉽지 않았습니다. 또 외국이다보니 현장을 가는 것이 행사로 간 것과 개인적으로 간 것, 그 교집합을 찾는 것도 힘들었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동학과 독립운동사를 뗄 수 없는데, 선생님이 바라보시는 우리가 동학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동학이 끼치고 있는 영향은 곳곳에 있고, 동학이냐 천도교냐를 구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보면 저는 최근 대종교 관련된 독립운동사를 조명한 적 있습니다. 대종교의 특징은 생기자마자 백두산 옆으로 본거지를 옮겼다는 것입니다. 단군교에서 대종교라는 이름으로 처음 바꾼 것도 1년 뒤였습니다. 나철 선생이 대종교이전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단체를 만들고 이는 1920년 북로군정서의 기반이 됩니다. 또 임시정부 인사 중 20명 이상이 대종교신자거든요. 우리가 알고 있는 박은식 선생, 신채호 선생 등 이 분들이 대종교신자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흔적이 다 사라졌습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것과 현재와 비교해보면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대종교의 기반도 동학이었습니다. 이렇듯 동학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한데 다만, 근대역사를 살펴볼 때 서학과 개신교가 가진 역할도 큽니다. 그런데 천도교인은 이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개신교의 경우 클러스터로 들어옵니다. 학교, 병원, 교회, 이렇게 세 개가 기본적으로 들어와서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그런 모습에 국내에서 대응했던 존재가 동학입니다. 그런데 1919년 이후 약해지고 분열되고 회유의 대상이 되었어요. 동학의 본래 모습, 그 시대의 고민들이 광복 이후에 보여지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볼 때, 개신교는 이후에 변신했고, 카톨릭은 참여하지 않았다가 반성하면서 민주주의를 통해 크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는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시대의 고민을 담아냈던 조직이 보여준 광복 이후의 모습에 아쉽습니다. 옛것으로 그시대의 고민만이 고민으로 생각하는 그런 평가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님의 역할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요? 동학 천도교인으로서, 또 연구자로서, 작가로서 콘텐츠 생산자로서 동학을 어떻게 재현하고 보여줄 수 있는지 고민해오신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우선 어린이날, 삼일절 등 중요한 날에는 그 역할을 하고 있죠. 또 라디오가 7개니까 반복되는 이야기를 서너개는 할 수 있더라고요.그 과정 속에서 남들이 몰랐던 이야기를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그들의 고민과 노력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역할로 설정하고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제 일 자체가 어떤 것들에 대한 규정이 아닌 역사 유적과 사건을 다 살펴봐야 하니 눈에 띄는 것이있습니다. 불교의 인프라와 개신교의 네트워크나 기념의 방식, 카톨릭의 경우도 그렇고요. 그들을 비판하는 것보다도 정체성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 동학과 천도교는 어떻게 정체성을 보고 미래를 바라보고 우리의 역할을 이야기할 것인지. 삼일운동 당시 천도교가 다른 교단을 압도해서 도와주고 앞장섰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 개신교가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애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하죠. 미국으로 교포들을 대한 외국인회로 묶어냈던 것도 기독교예요. 그런 면에서는 그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가 보여준 힘. 때에 따라 굴복하기도 하고 민족보다 종교를 먼저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키워낸 인재들, 그 배경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겠죠. 동학은 거기서 구체적 답을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민을 현재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충분히 가치있고 그 가치의 현재의 모습을 어필할 수 있는 모습이 있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다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 속에 등장했던 엄청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신교가 아무리 훌륭해도 외국의 자산입니다. 스코필드 박사가 아무리 훌륭해도 캐나다사람이잖아요. 그들이 이식돼서 헌재 큰 대한민국이된 거예요. 개신교, 사회주의, 카톨릭 이들이 더해서 커진 나라인데 우리는 인정하고 강조하고 그렇게 그 줄기 속에서 동학이 가진 의미를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사 작가로서 여행지나 답사지를 추천해주신다면 어떤 곳이 있을까요? 독자분들이 서울에 있는 개신교나 카톨릭의 근대 유적지를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요소중 하나였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하는 방법을 통해 메시지를 얻을 수도,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강우규 열사가 폭탄을 던진 서울역에서 넘어가면 약현성당, 또 다음 공간은 서소문성지 등 성당이 있던 자리는 다 성지이지 않습니까. 전주를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박해가 있던 곳이 전동성당이었고 풍남문을 열어젖히고 집강소를 설치했던 1894년의 동학,또 그곳을 중심으로 했던, 경기전을 바탕으로 했던 전주 부락, 그런 연결고리를 살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에서는 다양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오히려 일반화된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동학 천도교를 비롯한 우리 역사를 바라보던 시선, 복잡한 시선들을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광일 여행작가, 여행이야기 대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역사 기행 프로그램 운영과 역사 대중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은 <우리 아이 첫 경주여행(공저)>를 비롯해 <아빠의 답사 혁명>과 같은 어린이, 청소년 답사 안내서와 한국사 대중서인 <교과서 밖으로 나온 한국사(공저)(전3권>를 썼다 최근 쓴 책으로는 임시정부 27년의 여정을 살펴보는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공저)>이 있다. 이와 함께 역사 기행 전문기획사인 ㈜여행이야기 대표로 활동하며 소규모 답사 프로그램인 ‘동갑내기 사회탐구’를 통해 현장체험학습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 기업 및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 국제교류재단,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등 여러 기관의 역사,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였다. 최근에는 KBS의 <여유만만> <쌤과 함께>, 그리고 EBS의 <문화유산 코리아>, jtbc의 <세계다크투어> 등 방송에 출연하였으며 SBS의 <허지웅쇼>, KBS의 <김태훈의 프리웨이> 등 여러 라디오 방송에서 활동하고 있다. 글 : 신채원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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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 임진택의 시대정신임진택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은 지난 10월 28일 저녁 정읍의 전봉준 고택에서 창작 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의 공개 시연을 시작으로 순회공연을 열었다. 그동안 동학에 관련된 많은 학술 세미나, 예술 공연 등이 있었지만 이 공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전통예술의 고장이자 동학혁명발상지 정읍에서 현대 문화운동의 거목인 창본 작가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리꾼이 함께 자리하며 판을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창작판소리 창본 집필의 주인공은 바로 한국 마당극의 창시자 임진택 이사장. 작창과 완창을 도울 이는 전주 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 송재영 명창, 국립민속국악원장 왕기석 명창이다. 그들은 3시간 동안 동학에 대한 이해와 진실을 소개하며 소리판으로 이끌었다. 이 공연은 누구나 평등 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사상과 더불어 급변하고 있는 국제정세 속에 한반도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정읍 전봉준 생가에서의 시연회를 시작으로 11월 10일 전주 한국전통문화전당, 19일 서울 돈화문국악당에서도 이어졌다. 동학혁명은 1894년 신분제 중심의 오래된 체제를 개혁하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일어난 혁명이다. 또한, 일본 국권 침탈에 맞서 싸운 민족의 봉기로써 큰 의미도 있으며 애국이라는 민족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과 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에도 정치적 혼란으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고 왜곡, 축소되어 왔다. 그러던 중 1960년 4.19혁명 이후 동학혁명의 재조명이 시작되었고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과거사 정리를 위한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이 추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프롤로그는 수운 최제우의 탄생 <아니리> 천하가 한번 크게 변할 양이면 천지간에 괴이한 변이 잇달아 나타나는 법. 허나 난법 뒤에 정법이 나온다 했으니 어찌 진인이 아니 날소냐? 전라도는 전주요 경상도는 경주인디, 경주 근도리 어느 곳에 최제우라는 이가 사는디, 그 이가 태어날제 구미산이 사흘을 크게 울어 댄즉, 어진 사람들은 이 집에 신인이 났다 하고, 모진 사람들은 역적이 났다고 했다더라. 때는 조선조 말엽이라. 왕권은 무능하고 세도가 판을 칠제, 벼슬아치 양반들은 토색질로 날을 새고 가련한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거날, 개같은 왜적놈들 호시탐탐 침노하고 맹수같은 양귀자들 때도 없이 출몰하니 어허 우리 중생, 목숨 보명을 어찌할거나! 최제우가 중생 구할 도를 찾아 천하를 주유했으나 온갖 처세가 다 낭패라. 울산 처가에 얹혀 남의 땅 부쳐먹으며 근근히 지낼적에 - 임진택 창본, ‘녹두장군 전봉준’ 중에서 임진택 경기아트센터이사장은 인터뷰를 통해 창극 녹두장군 전봉준은 동학의 역사를 되새기고 부패한 권력에 맞선 동학농민군들의 처절한 심정과 굳건한 결의를 보여주고자 한다고 밝혔다. 또 전봉준에 대한 작품이지만 수운 최제우 선생과 해월 최시형 선생의 탄생과 일대기를 먼저 보여줌으로써 동학의 사상적 배경이 시작된 역사를 먼저 짚고 싶었다고 말한다. 선생은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제’ 때 ‘고부봉기 역사 맞이굿’을 기획하면서 정읍과 인연을 맺고 동학농민혁명을 판소리로 엮어냈다. 김제 출신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온 그는 대학 시절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고 이후 판소리에 빠져 소리꾼과 연출자의 길을 걸어왔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공연에서는 주제별로 국내 최고의 기량을 갖춘 명창 3인이 무대에 올랐다. 1부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이자 판소리 ‘수궁가’ 예능 보유자인 왕기석 명창이 ‘탐학을 금(禁)해주시오’를 주제로 교조 신원과 고부 봉기의 내용을, 2부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이자 판소리 ‘심청가’ 예능 보유자인 송재영 명창이 맡아 ‘고통받는 민중은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를 주제로 무장기포와 황토현 전승, 전주성 입성을 보여주었다. 3부는 오랜 기간 동학에 천착하며 이번 작품의 창본을 완성한 광대 임진택이 ‘갑오세 가보세’를 주제로 집강소 설치와 우금치 전투 등의 내용을 노래하였다. 전봉준 누구인가,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횃불처럼 우뚝 서서 피투성이로 싸운 사람 그 어떤 고통도 두려워 하지 않은 사람 누구보다도 그 시대를 온몸으로 살은 사람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 합치더니 운이 다 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의(義)를 바로 함에 무슨 허물 있으랴만 나라 위한 애국단심(愛國丹心) 그 누구가 알아줄꼬. - 임진택 창본, ‘녹두장군 전봉준’ 중에서 광대 임진택 다시 동학으로 판을 열다 역사와 함께, 시대를 노래한 광대 임진택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이 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인 1994년 최초로 선보였던 ‘녹두장군 전봉준’은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큰 의미가 있다. 초연 당시에도 전봉준의 일대기를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 19세기말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 아래 봉건제도의 수탈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섰던 동학농민운동의 역사를 판소리로 엮어낸 바 있는 이 작품은 그때와 지금 어떻게 다를까. 작품은 전봉준의 탄생이 아닌 수운 최제우의 탄생과 무능한 왕권과 세도가 판을 치는 세상, 가련한 백성을 구하고자 했던 수운 최제우의 주유천하, 그리고 깨달음으로 문을 연다.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수운 최제우의 깨달음과 도의 실천은 많은 민중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고 혹세무민의 죄로 수운 최제우의 순도(처형), 그리고 해월 최시형이 펼친 동학의 교세 확장은 혁명의 사상적 기반으로 굳건히 서게 된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때 등장하며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으로 이어진다. 수운 최제우의 탄생과 동학의 창도, 해월 최시형 선생이 수운 최제우 선생으로부터 도통을 전수 받아 2대 교주가 되어 도의 실천과 확장으로 동학혁명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과정, 죽창을 든 민중들의 봉기, 그리고 전봉준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한편 이 작품의 1부와 2부, 3부는 왕기석, 송재영, 임진택 세 소리꾼이 각각 맡아서 서사를 끌고 가는 것이 특징이며 여 운, 김정헌, 임옥상 등의 작가들의 걸개그림으로 무대를 구성한다. 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 임진택의 시대정신 “이 작품은 동학의 태동에서 시작해서 전봉준의 최후에서 끝납니다. 수운의 동학 창도에서 녹두 전봉준의 최후까지라고 볼 수 있죠.” 3시간에 가까운 작품 분량으로 동학의 역사를 한판의 판소리로 완성시켰다. 최근 시간은 짧고 화려한 형식으로 구성되는 공연의 풍조와는 다르다. 화려한 조명과 영상 등에 개의치 않고 정통 판소리 방식으로 공연을 열었다. 정통적인 판소리 공연의 형식을 고집했던 이유는 100여년 전에 있었던 이 긴 이야기를 관객에게 바쁜 마음이 아닌 시간을 충분히 내고 자기 침잠을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임진택 선생은 50년 가까이 판소리 창작자로, 마당극 연출가로 민중들과 함께 했다. 스물 다섯 살에 소리를 시작한 선생은 소리는 적어도 열다섯에 시작해야 하는데 스스로 늦게 시작했다고 말한다. 스물 다섯에 시작한 소리꾼, 광대인생은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며 더욱 특별했다. 그리고 앞서 걷는 길은 외로웠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뒤를 따르고 곁에서 함께 울고 웃었다. 함께 건너온 시절의 짙은 그늘이 주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의 작품은 언제나 이 사회에 주는 메시지가 있었다 “나는 옛날 판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 판소리가 한동안은 그 메시지를 주지 못하던 때가 있었어. 그때 나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 실제로 옛날 판소리는 거의 소멸 위기에 있었지.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판소리 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걱정해야 했어. 그러다가 문화재 제도가 생기고 문화재 보존 정책이 들어온 거지. 그 당시에 소리들은 현실을 이야기한다고 아무도 생각지 않았지. 그때 나는 옛날 판소리 그대로는 안 되고 판소리를 새롭게 만들어 져야 한다고 생각했지.” 시대의 스승들 박동실의 <열사가>를 처음 접했을 때, 선생은 의미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은 했으나 예술작품으로서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옛날 판소리에 비해 열사가는 너무 비분강개만 한다고 생각했어. 프로파간다로 민족과 애국을 외치는 게 예술은 아니기 때문에 좀 미흡하다고 느꼈어. 특히 판소리에는 비장과 골계가 있어야 하는데 골계는 없고 비장만 있다고 평가했어. 그런데 내가 창작판소리를 하는 사람이 된 거야.” 그땐 몰랐다. 당신 스스로 소리꾼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판으로 가서 새로운 세상을 한 번 만들어볼까, 외교관이 되려고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한 선생이었다. 대학시절 선생은 연출가로서 연극을 하며, 마당극이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과 양식을 시도하던 때였다. 무대 위에서, 5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선배도, 동료도, 후배도 늙어갔지만 언제나 시대의 어둠을 밝히던 사람들. 2000년을 맞이하며 창작판소리 열두 바탕을 새로 만들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안에 동학, 독립운동, 통일 문제를 담아내겠다고 결심하고, 다시 박동실 선생의 열사가를 다시 마주한 선생은 당시의 소감을 말한다. “엄청나더라고. 느낌이 달라졌어요. 이만큼 창작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그 당시 창작판소리에 박동실 명창이 얼마나 사설에 관여했는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있었다고는 해요. 이준, 안중근, 윤봉길, 그리고 유관순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만든 작품, 그게 열사가야. 처음엔 진부하고 예술 미학이 뭔지 모르는 분들이 만든 방식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창작을 해보니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어. 사설보다는 작창이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지.” 임진택 창작 판소리의 시작은 ‘지하형’의 작품으로 회상한다. 김지하의 담시 세 편, <오적>, <소리내력>, <똥바다>는 오늘날 임진택의 창작판소리가 탄생하게 된 커다란 물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김지하 시인의 시로 눈물 지새우지 않은 청년은 없었을 것이다. 이 사회의 어둠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읊으며 피워낸 가슴마다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을 키워냈을 것이다. 선생이 만든 창작판소리는 백범 김구, 안중근, 전태일, 다산 정약용, 장보고, 남한산성, 그리고 오월 광주의 윤상원까지 우리 역사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빛을 밝혔던 인물과 빛나던 순간들이었다. “그 이전에 김지하의 담시 세 편, 오적, 소리내력, 똥바다 이 세 편이내 창작판소리의 시작이야. 판소리계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 마당극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던 시절, 선생은 극장을 벗어나 더 큰 무대를 꿈꿨다. 사전에 단어가 없다는 건 그런 현상이나 실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호칭을 준 적이 없을 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극장이라는 게 생긴 지는 얼마 안 된다고, 우리나라엔 연극 자체가 없었다고 말하는 선생은 연극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연극은 허영된 사치가 아닌 자기 현실을 외치는 시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때는 창작극이 많았는데, 나는 생각했지. 창작극 가지고는 안된다고. 남의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 사람이 이 시대를 살아오면서 사회의식을 가지고 쓴 창작극이어야 한다고. 거기엔 사회의식을 담아 내고 있느냐, 한국 사람의 정서에 맞느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 무렵 대학에 탈춤반이 생기면서 탈춤이 처음 공연되는 걸 보게 된 선생은 거기서 ‘마당’을 만나게 된다. 선생이 하던 연극은 학교에서 허가를 내어주지 않았지만, 극장이 없으면 ‘마당’에서 공연을 하면 될 것 아닌가. 지금 왜 동학인가? “내가 아직 동학이 뭔지 모를 때 내가 태어난 고향과 어릴 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데, 그 이야길 좀 들려줄까?” 어린 시절 집 앞 큰 길가에서 버스 차장이었던 사촌 형이 진택아, 장터 구경가자 하고 차에 태워서는 데려간 적이 있다. 장터 구경 간다고 신이 나서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선생이 태어나 살던 곳은 김제군(지금은 김제시) 봉남면이었다. 대여섯살 때까지 거기 살았다. 김제읍에서 봉남을 지나 원평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그 버스는 하루에 두 번 운행을 했다. 그걸 타고 원평에 갔다.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며, 부조화를 느꼈다. 사람들이 전부 쪼그라져 있었다. “그때가 1955~6년쯤 되었으려나. 바로 몇 년 전, 6.25전쟁이 훑고 갔겠지. 나는 그 일그러진 얼굴들이 6.25의 상처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닌 거야. 동학난리의 기억이 아직 그들에게 남아 있는 거야. 동학에서 원평 땅이 굉장히 중요하지. 전봉준의 최초의 근거지가 원평이거든. 최근 나온 자료를 보니 원평 김개남과 같은 동네에 살았을 때 서당을 다녔는데 거기가 봉남이야. 봉남과 원평이 붙어 있거든. 그걸 알고 놀랐어.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 6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내 머릿속에 남아 있어. 동학의 상처가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남아 있었던 것처럼.” 선생은 어릴 때 빈 사당에서 만난 마치 동학군의 형상을 한 사내를 만난 이야기도 어느 마을의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이나 설화처럼 이야기했다. 동학을 모르는 땅은 어디에도 없건만, 선생이 태어난 자란 김제는 오죽할까 싶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는 동학을 모르고 지내다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친구 김민기를 통해 가슴에 동학의 불꽃을 지펴냈던 선생은, “김민기가 아침이슬 이후로 탄압을 받다가, 자기 고향인 익산으로 가서 농사를 짓고 살았어요. 그때가 30살 전후였지. 그 전에 김지하가 민청학련으로 감옥가기 전에 동학 이야길 꺼냈었지. ‘장일담’이라는 작품인데 동학 이야기야. 거기서 밥이 하늘이라고 하니까.” 이후 역사적인 작품 하나가 탄생한다. 1980년대에 김민기가 여는 무대,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이 작품은 1982년 제6회 대한민국연극제 참가작품으로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그 주된 이야기를 이루고 있으며 개항 때부터 갑오년까지의 고난의 움직임과 외세와의 역학관계가 군데군데 삽입되어 있다. 연극이 너무 무거워서 임진택 선생은 거기에 소리를 붙였다. 80년대 광주항쟁 직후, 무슨 공연에도 광주항쟁과 연결해서 가슴 아픈 작품을 할 때였다. 그 사이 동학농민혁명은 1994년 100주년을 맞이한다. 전라북도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1994년에 전주에서 100주년기념행사를 치렀다. “1994년에 동학이 완전히 일어났어. 그해에 한편으로는 고부 역사맞이굿을 하면서 전체 동학100주년 기념사업을 하면서 한편으로 1982년에 했던 전체로 판소리로 만들었는데 실패했지.” 다시 왜 전봉준인가, 왜 동학인가. 선생은 말한다. 동학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고 미래라고. 동학에 들어있는 사상을 다시 생각하자고. 동학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선생은 또 말한다. 귀천이 없는 평등이었다, 척양척왜의 자주였다, 그리고 동학은 궁극적으로 생명사상이다. 사람이 한울이라 하지 않는가. 선생이 걸으면 다 길이었다. 맨 앞에서 걸었다. 마른 풀들이 일어서서 길을 내어주었다. 길 잃은 새들은 선생이 가는 길을 따라 더 멀리 날아가기로 하였다. 글 신채원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