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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오전 11시 천도교 경주교구 별관이 ‘동소경주’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재탄생하며 개관식을 열었다. 개관식은 꿈나무 달기, 길놀이, 청수봉전, 동학소년회 선언문 낭독, 영남사물놀이 공연 등으로 이어졌다.
100년의 깊은 역사를 품은 <동소경주>는 해월 최시형 신사의 생가터이자 3.1운동의 사상적 발상지인 천도교 경주교구에서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고 생명과 평화를 위해 새롭게 출발하며, 이 공간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복합 공간이다.
또한 어린이들에게 동학의 정신이 깃든 놀이와 교육의 장으로 자리매김하며, 동시에 시민들에게 동학사상의 이해를 바탕으로 3.1 독립 정신과 천도교의 철학, 나아가 생명평화의 시대적 가치를 펼칠 것으로 기대한다.
이번 동소경주 개관식은 동학의 생명 존중과 평화 정신을 지역 사회와 세계로 확산시키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박연환 경주교구장은 "포덕 51년, 114년 전에 경주전교실로 개관했습니다. 3세 교조이신 의암성사의 지시로 227~9번지에 해당하는 건축물 두 동과 밭을 매입하여 경주교구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곳은 무인멸왜기도 운동의 기초가 되었던 대교구 중의 하나인 역사적인 공간으로, 이 자리에 젊은 인재들이 새로 키워질 땅이라고 생각하니 더 뜻깊은 자리로 느껴집니다. 교당은 주말에는 공실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주중에는 이렇게 의미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찾다가 시작된 일이 이렇게 멋진 공간으로 재탄생되었습니다. 모쪼록 이 공간이 크게 활성화됐으면 좋겠습니다. 곧 동소 2호점도 개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작이 반이기 때문에 큰 마음을 내어 시작했고, 앞으로 힘을 합쳐서 잘해 나가야겠죠."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의 계획으로, “1926년에 해월 신사께서 탄생하신 경주시에서 생가터 매입을 약속했고, 매입이 끝나면 공원화가 되거나 생가터로 복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됐을 때 동소가 시민들한테도 더 많이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이곳이 해월 신사님의 탄신지이기 때문에 의암 성사께서 매입을 지시하셨다고, 경주교구 연역에 기재가 돼 있습니다. 8년 전부터 시작된 해월 신사님 생가터 복원사업이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과정과 동소 경주도 자연스럽게 알려지고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동학사상이 경주를 넘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기를 바라며 이날 개관식을 마무리했다.
공익법인 동학소년회는 “아이들과 시민들을 위한 이 공간이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실천하는 곳으로 거듭나길 바란다”라고 밝히며,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이 공간을 키워갈 것을 약속했다.
임재택 동학소년회 이사장은 개관식에서 “동소경주는 100년을 이어온 근본적인 사상의 터전이며,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생명 평화의 철학이 시작된 중요한 곳이라고 강조하였다. 천지만물이 평등하며, 생명과 평화가 인간과 자연의 기본적인 가치라는 점을 설파하며 이곳이 어린이들에게 올바른 정신과 의를 가르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천도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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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함께답사 12월 18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출발천도교중앙총부는 오는 12월 18일 (수) 종교계 추진 시민참여 행사로 2024년 마지막 답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 프로그램은 서대문형무소-임시정부기념관-식민지역사박물관-효창공원을 답사하며 선착순 20명 모집한다. 참가비는 없으며 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 주관한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장소에서 직접 몸소 느끼고, 그 시간을 따라가 보는 이번 답사는 단순히 과거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기억을 되새기고,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는 소중한 시간이다. 이번 답사에서는 그중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장소를 찾아,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취지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답사는 서울시가 후원하는 '3.1운동, 함께 답사' 시리즈로서 "3.1운동 이후 우리는?" 주제로 하는 3차 답사이다. 함께 답사를 통해 동학·천도교에 대한 이해와 3.1운동 전·후 달라진 모습을 되짚어 보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구성하였다. 이날 오전 9시 30분에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서 집결하여 답사를 마치는 오후 3시에 다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해산한다. 문의 : 천도교 사회문화관 (최진영 차장) 010-7534-3907 신청하기 : http://form.naver.com/response/m0q6AgYscY_Sjc4HzOLt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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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12)- 본래생명 실천하기실천이 없는 공부와 수련은 죽은 것이다. 마음공부하는 사람이 기준과 목표로 삼아야 할 2가지 실천덕목인 '사인여천'(사람을 하늘같이 높고 귀하게 섬긴다), '한울님 본성'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 이 2가지를 실천해 나가면 내 공부는 더욱 원활해지고, 한울님과 보다 친밀해지며, 나아가 하나 되는 경지에도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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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을 이어온 사상의 터전에서 생명을 꽃피우길, 동소경주 7일 개관지난 7일 오전 11시 천도교 경주교구 별관이 ‘동소경주’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재탄생하며 개관식을 열었다. 개관식은 꿈나무 달기, 길놀이, 청수봉전, 동학소년회 선언문 낭독, 영남사물놀이 공연 등으로 이어졌다. 100년의 깊은 역사를 품은 <동소경주>는 해월 최시형 신사의 생가터이자 3.1운동의 사상적 발상지인 천도교 경주교구에서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고 생명과 평화를 위해 새롭게 출발하며, 이 공간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복합 공간이다. 또한 어린이들에게 동학의 정신이 깃든 놀이와 교육의 장으로 자리매김하며, 동시에 시민들에게 동학사상의 이해를 바탕으로 3.1 독립 정신과 천도교의 철학, 나아가 생명평화의 시대적 가치를 펼칠 것으로 기대한다. 이번 동소경주 개관식은 동학의 생명 존중과 평화 정신을 지역 사회와 세계로 확산시키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박연환 경주교구장은 "포덕 51년, 114년 전에 경주전교실로 개관했습니다. 3세 교조이신 의암성사의 지시로 227~9번지에 해당하는 건축물 두 동과 밭을 매입하여 경주교구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곳은 무인멸왜기도 운동의 기초가 되었던 대교구 중의 하나인 역사적인 공간으로, 이 자리에 젊은 인재들이 새로 키워질 땅이라고 생각하니 더 뜻깊은 자리로 느껴집니다. 교당은 주말에는 공실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주중에는 이렇게 의미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찾다가 시작된 일이 이렇게 멋진 공간으로 재탄생되었습니다. 모쪼록 이 공간이 크게 활성화됐으면 좋겠습니다. 곧 동소 2호점도 개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작이 반이기 때문에 큰 마음을 내어 시작했고, 앞으로 힘을 합쳐서 잘해 나가야겠죠."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의 계획으로, “1926년에 해월 신사께서 탄생하신 경주시에서 생가터 매입을 약속했고, 매입이 끝나면 공원화가 되거나 생가터로 복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됐을 때 동소가 시민들한테도 더 많이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이곳이 해월 신사님의 탄신지이기 때문에 의암 성사께서 매입을 지시하셨다고, 경주교구 연역에 기재가 돼 있습니다. 8년 전부터 시작된 해월 신사님 생가터 복원사업이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과정과 동소 경주도 자연스럽게 알려지고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동학사상이 경주를 넘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기를 바라며 이날 개관식을 마무리했다. 공익법인 동학소년회는 “아이들과 시민들을 위한 이 공간이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실천하는 곳으로 거듭나길 바란다”라고 밝히며,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이 공간을 키워갈 것을 약속했다. 임재택 동학소년회 이사장은 개관식에서 “동소경주는 100년을 이어온 근본적인 사상의 터전이며,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생명 평화의 철학이 시작된 중요한 곳이라고 강조하였다. 천지만물이 평등하며, 생명과 평화가 인간과 자연의 기본적인 가치라는 점을 설파하며 이곳이 어린이들에게 올바른 정신과 의를 가르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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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천도교 단체, 윤석열 대통령 위헌적 비상계엄 책임퇴진 촉구12월 3일 벌어진 윤석열 대통령의 위헌적 비상계엄과 이후 확인된 시국 상황에 대하여 보국안민의 기치로 싸웠던 동학농민군의 후예인 동학·천도교 제 단체들이 책재원수(責在元帥-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음)임을 밝히며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을 2024년 12월 7일 12시 전북 부안 백산 인근의 천도교호암수도원에서 발표하였다. 130년 전 동학농민군은 기포 후 부안 백산에서 대회를 개최하여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 명의로 격문을 발표하고, 전봉준을 대장, 손화중, 김개남을 총관령, 김덕명, 오시영을 총참모, 최경선을 영솔장, 송희옥, 정백현 등을 비서로 뽑았다. 백산대회는 동학군 1만여 명이 모여 군을 정비하고 그 창의격문을 통해 기포의 뜻을 밝힌 곳으로 후일 사람들은 당시를 회상하며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천도교청년회 이재선 회장의 사회로 동학 의례인 청수봉전을 시작으로 성명 발표를 시작하였다. 사회자는 취지설명에서 “부안 백산에서 동학군들이 창의격문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당위성을 밝히었듯 오늘 동학농민군의 후예인 동학-천도교 제 단체들이 공동 시국 성명을 백산 인근인 천도교호암수도원에서 발표함은 나라를 도와 국민을 편안케 한다는 보국안민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동학‧천도교 제 단체 공동성명은 동학민족통일회, 천도교여성회, 천도교청년회 등 천도교 단체들과 동학혁명기념관, 2차 동학농민혁명참여자 서훈국민연대(참여단체55개),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참여단체42개) 등 동학 관련 단체들이 참여하여 총 30개 단체가 연명하였으며, 윤석열 퇴진을 바라는 동학 시민들 30여 명이 개별 연명하였다. 성명 발표는 동학혁명기념관 이윤영 관장, 정읍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곽형주 이사장이 낭독하였다. 공동 시국 성명에서 이들은 12월 3일 벌어진 위헌적 비상계엄은 반민주적 폭거이며, 사실상 내란이라 규정하고, 모든 일의 책임은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있다는 책재원수라는 성어를 내세우며 윤석열 대통령이 자격을 상실하였으니 책임지고 스스로 하야하라고 촉구했다. 성명 발표에 참가한 이들은 “윤석열은 책임지고 하야하라! 위헌적 비상계엄의 진상을 규명하라! 국민의힘은 탄핵에 찬성하라! 국민들의 촛불을 동학군의 횃불로 지켜내자!”라고 구호를 제창하고 성명 발표를 마무리하였다. 이하 동학·천도교 제 단체 공동 시국 성명 전문 [동학-천도교 제 단체 공동 시국 성명] 책재원수 아닐런가? 위헌적 비상계엄, 윤석열은 책임지고 물러나라. 위가 미덥지 못하면 아래가 의심하며 위가 공경치 못하면 아래가 거만하니 이런 일을 본다 해도 책재원수(責在元帥) 아닐런가 이는 역시 그러해도 수신제가 아니 하고 도성입덕 무엇이며 삼강오륜 다 버리고 현인 군자 무엇이며 가도화순(家道和順) 하는 법은 부인에게 관계하니 가장(家長)이 엄숙하면 이런 빛이 왜 있으며 부인 경계(警戒) 다 버리고 저도 역시 괴이하니 절통(切痛)코 애달하다. 유시부(有是夫) 유시처(有是妻)라 하는 도리(道理) 없다마는 - 천도교 경전 용담유사 도수사 중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12월 3일 밤 기자회견을 열어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계엄포고령을 공포하고 군경을 동원하여 국회 개원을 저지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나, 국회에서 재석의원 만장일치로 계엄해제가 의결되었다. 현재까지 드러난 비상계엄 상황과 이후 윤석열의 모르쇠에 국민들은 한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권의 만행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23년 삼일절에 벌인 윤석열의 반민족 매국 행위를 시작으로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국가원수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반민족 반민주 행위를 그동안 일삼아왔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되는 해이다. 또한 동학농민군들의 정신적 토대가 된 동학을 창명한 위대한 스승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 되는 해이다. 우리 동학-천도교 제 단체를 비롯하여 국민들은 지난 시간 윤석열이 벌인 행태에 수차례 경고하였으나 개선하지 않고, 급기야 윤석열은 요건도 갖추지 못한 비상계엄 선포라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이는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반민주적 폭거이며 사실상 내란 행위이다. 나라를 망가뜨리는 윤석열과 그 주변에서 부당한 정권에 부역하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헌법을 유린한 매국도당들을 엄중히 심판해야 한다. 책재원수(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음)라 하였다. 동학-천도교 제 단체는 윤석열이 대통령으로서 자격을 상실했음을 확인하며 윤석열을 퇴진시켜, 보국안민(나라를 도와 국민을 편안케 함)의 길을 위해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앞장설 것이다. 1. 윤석열은 책임지고 이제 하야하라. 1. 위헌적인 비상계엄령 선포의 진상을 규명하라. 1. 야당이 발의한 윤석열 탄핵안에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은 동참하라. 1. 윤석열이 퇴진할 때까지 국민들의 촛불을 동학농민군의 횃불로써 지켜내자. 2024년 12월 7일 대통령 탄핵안 표결에 앞서 국민들을 대신하여 동학-천도교 제 단체 일동(무순) 사) 동학민족통일회, 천도교여성회, 천도교청년회, 천도교한울연대, 동학혁명기념관, 2차 동학농민혁명참여자 서훈국민연대(참여단체 55개),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참여단체 42개), 동학학회, 사)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정읍), 동학농민혁명부산기념사업회, 동학농민혁명 영호도회소 기념사업회,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남해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장성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경북동학농민혁명연대, 경기도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경기3·1운동기념사업회,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개벽하는 사람들, 이 가을에 나누는 한울님 향기, 천도교서울교구 천도교전주교구, 천도교광주교구, 천도교수원교구, 천도교여주교구, 천도교부산남부교구, 천도교용인시교구추진위원회, 천도교김제교구, 동학천도교보국안민실천연대 윤석열 퇴진을 바라는 동학시민들(개인연명-무순) 김인환 윤태원 박도연 박정균 최용근 권도경 안영수 정윤택 지승신 노은정 최은석 정보택 윤영숙 이재용 최태형 권호성 이지영 박길수 연승현 이상호 지광철 황진오 최성만 조남혜 김영희 KIM YONG KYU 김동순 최갑선 이서윤 이재선 김정화 최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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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7주년 인일기념식 봉행오는 12월 24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는 제127주년 인일기념일 기념식을 봉행한다. 올해는 의암성사께서 해월신사님께 도통을 이어받은 지 127주년이 되는 해로 12월 24일 인일기념식은 서울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교구에서 일제히 봉행된다. 이날 기념식은 개식, 청수봉전, 심고, 주문3회병송, 경전봉독, 천덕송 합창, 기념사 등의 순서로 예정되어 있으며 교인 및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개최될 예정이다. 윤석산 교령은 기념식을 앞두고 보도자료를 통해 “의암성사님께서 해월신사님으로부터 도통(道統)을 이어받으신 지 127주년이 되는 인일기념일입니다. 우리는 이 뜻깊은 날을 맞이하여 위대한 의암성사님의 삶과 사상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결의(決意)를 새롭게 다져야 하겠습니다.”라고 127주년 인일기념일을 맞이하는 소감을 밝혔다. 이어 “ 공경하는 동덕 여러분! 우리는 의암성사님이 유시에서 당부하신 것처럼 뒷일을 책임져야 합니다. 천도교를 더욱 굳건하게 지켜내고, 침체된 교단을 중흥시켜 중원포덕을 넘어 세계포덕을 실현해내야 합니다. 이것은 천명(天命)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업(大業) 실현은 오직 우리의 믿음과 공경과 정성의 힘이 모일 때만이 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인일기념식에 이어 인일기념 문화공연도 개최될 예정이다. 한편 천도교의 5대 기념일 중 하나인 인일 기념일은 의암 성사께서 해월 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로, 천도교의 주요 기념일은 다음과 같다. 천일기념일 : 매년 4월 5일 수운 대신사께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인 천도를 받아 동학을 창명한 날을 기념함 지일기념일 : 매년 8월 14일 해월신사께서 수운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을 기념함 인일기념일 : 매년 12월 24일 의암성사께서 해월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을 기념함 도일기념일 : 매년 1월 18일 춘암상사께서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을 기념함 현도기념일 : 매년 12월 1일 의암성사께서 동학을 천도교로 세상에 선포한 날을 기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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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영해동학혁명과 1894영해봉기를 주제로 학술대회 열려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는 2024년 12월 6일(금), 경북 영덕군 영해면 무형문화재전수관에서 ‘1871영해동학혁명과 1894영해봉기’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영덕군의 후원으로 열린 이번 학술대회는 동학의 역사적 의의와 영해 지역 혁명의 흐름을 재조명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행사는 오후 2시, 권태용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사회로 시작되었으며, 권대천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 위원장이 ‘1871영해동학혁명 역사적 대의를 위한 제고’를 주제로 기조 발표를 진행했다. 권 위원장은 1871년 영해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을 단순한 지역적 사건이 아닌, 조선 후기 민중의 혁명적 열망을 담은 역사적 운동으로 평가하며, 이를 근대사 연구의 중요한 단초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발표에서는 박대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 ‘신미아변시일기를 통해 본 1871년 영해 사건’을 주제로 사건의 전개와 의의를 살펴보았다. 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교수는 ‘1871년 영해동학혁명 이후의 영해부 동향과 1894년 영해 혁명’ 발표를 통해 동학혁명의 유산이 영해 농민 봉기로 이어진 과정을 분석했다. 마지막으로, 장우순 동학연구소 연구위원이 ‘영해동학혁명의 유산과 1894년 영해농민봉기 - 한국적 근대를 향한 발자취’를 발표하며 동학의 역사적 가치를 조명했다. 종합 자유토론에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의견이 오갔다. 특히 남두병 선생의 후손인 남상균 선생이 동학인명록에서 새롭게 확인된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다. 또한, 이상국 영양동학인시천 해월최시형 기념사업회 회장은 "영해동학혁명을 단순히 이필제로 이어진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며, 동학의 기류 속에서 시대적 필요와 동학의 원리에 따라 일어난 운동임을 강조했다. 이상국 회장은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가르침인 ‘용시용활(用時用活)’, 즉 “시간과 시대를 잘 이해하고 이를 신속히 활용하라”는 교훈을 언급하며 당시의 혁명이 동학 사상과 조응하는 혁신적 대응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석태 포항 동대해문화연구소 이사장은 해월 최시형 동학기념관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동학 사상이 음양오행과 칠성의 전통사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이석태 이사장은 이를 통해 동학 사상의 철학적 기반과 전통적 가치를 재조명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동학과 영해 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탐구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동학혁명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를 통해 우리 근대사 연구를 풍요롭게 발전시키길 바란다”고 밝혔다. 사진 및 자료 제공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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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2)<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벼린 무기가 미흡하고 쌓인 전량이 부족하다 하여 천심을 회복하려는 한울님의 뜻을 저버리고 출진을 망설여서 되겠습니까? 철성(鐵聲) 소리만 듣고서도 떨쳐 일어서는 기백이 있어야 천지가 돕고 신명이 동할 것입니다. 이미 호남의 전봉준 장군이 일어섰다 하고, 해월선생께서도 기포를 명하셨는데 무얼 더 주저한단 말입니까? 내 안에 한울님이 모셔져 있음을 아직도 믿지 못한단 말입니까?” 이창진 접주의 절명(絶命)이라도 불사할 만한 토로가 있자 의기소침해 있던 좌중에 일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규석은 평소 이창진의 척왜양에 대한 소회를 잘 알고 있었기에 성심을 다해 동의했고, 다른 접주들도 우레 같은 박수로 격려를 보냈다. 특히나 호남동학군이 기포했다는 소식에 경기동학군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당위성이 더해져 회의장 분위기가 일변 출진하는 쪽으로 울흥하게 일었다. 수접주가 다시 나섰다. “이창진 접주의 고변(高辯)을 듣자니 묵우(默祐)의 기운이 출중하여 후천개벽이 멀지 않은 듯합니다. 그럼 우리 이천포도 기포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이제부터는 도소의 육임(六任)을 중심으로 서로 뜻이 맞는 접주들끼리 모여 출진을 위한 세부 사항을 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도소 회의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일동 심고. 한울님 감사하옵니다. 한울님의 은덕으로 오늘 이천포 동덕이 일심으로 기포를 결의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안위보다는 한울님의 섬김에서 기쁨을 찾고자 하오며, 광제창생한 나라에서 평등한 백성 되기를 간구하오니, 척왜양의 기치가 한울님께 닿아 사해 만민이 한울사람과 더불어 살게 해주시기 바라옵나이다. 이천포 접주들 모두 엎드려 기도드렸사옵니다.” 수접주의 심고가 끝나자 각 고을의 접주와 도소의 육임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향후의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장 시급한 것은 무기와 전량의 확보였다. 이미 황산의 강용구 접주가 음죽과 안성의 관아를 깨뜨릴 방도를 제시하고 나선 터라 젊은 접주들은 자연스레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강용구 접주가 먼저 말머리를 잡았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음죽과 안성은 저의 세거지(世居地)인 황산과 지척이라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두 관아는 방비도 허술하고 제가 익히 알고 지내는 별감과 좌수가 여럿 있어 미리 연통을 넣어두었습니다. 더하여 향청(鄕廳)의 담이 높지 않아 월장(越墻)하기로 친다면 여반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군사의 숫자도 몇 안 되고 기강도 무뎌 동학군의 철성 소리만 들어도 삼십육계 줄행랑칠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안성은 신임군수가 부임하기 전이어서 가히 최적의 기회라 할 만합니다. 화승총이나 활을 든 인원 200인이면 능히 성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강용구의 말에 용기를 얻은 접주들이 자기 접에서 힘을 보탤 만한 인원수를 어림해 숫자를 내놓았다. 삽시간에 400인이 모여졌다. 강용구는 화선지를 꺼내 접별로 제시된 인원수를 적고 물건 실어 나를 달구지 숫자도 추렴해 함께 적었다. 화선지 가득 숫자가 적혀나가자 젊은 접주들은 일본군과 맞붙어 싸우기도 전에 벌써 승리를 쟁취한 듯 흐뭇하게 양팔을 겹쳐 겨드랑이 밑에 고였다. 출진에 앞서 비축할 물건의 목록을 만들어두자는 건의가 나와 즉석에서 현물 없는 오일장이 열리기도 했다. 화선지를 따로 꺼내 쌀이나 콩, 동아줄, 푸른 대나무, 삼 줄기, 볏짚, 소금, 석유, 화약, 대동목(大同木) 등 비축해야 할 물품의 목록과 수량을 세세히 적어나갔다. 드디어 거사 날짜가 정해졌다. 정확히 닷새 후인 9월 25일, 오포가 울리는 정오. 민정(民丁)을 200인씩 둘로 나누어 음죽과 안성의 두 관아를 동시에 공격하며, 탈취한 무기와 전량은 즉각 광혜원으로 옮겨 본격적인 출진에 대비키로 했다. 공격은 의외로 쉽게 진행되었다. 어디서 비밀이 누설되었는지 막상 당일이 되자 동학군이 당도하기도 전에 곡괭이와 쇠스랑, 거릿대를 든 농민들이 관아 앞에 구름처럼 몰려와 꽹과리를 치고 고함을 지르자 혼비백산한 관군들이 무기를 집어 던지고 삼십육계 줄행랑치기 바빴다. 동학군은 죽창 한번 휘두르지 않고 쉽사리 관아를 점령했다. 싸움이라기보다는 마을 축제 같았다. 그만큼 동학군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방증이기도 했고,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일이라면 농민들이 쌍수를 들어 소매를 걷고 나선 결과였다. 탈취한 물건은 달구지에 싣지 못할 만큼 많았다. 화승총이나 창, 장검 같은 무기류도 많았고, 곡식이나 피륙은 몰려든 백성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고도 넘쳐났으며, 노비문서나 채무문서 등을 샅샅이 찾아내 불살라버림으로써 애초에 동학이 기치로 내걸었던 폐정 개혁안 12조를 실천했다. 이 정도 무기와 군량이면, 특히나 이렇게 들끓는 민심이면 출진을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관아 공격을 성공적으로 마친 각 접은 접주를 중심으로 바삐 움직여 무기와 전량을 싣고 애초에 모이기로 했던 광혜원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허연 옷을 입고 구름같이 몰려든 인파를 보자 이천 수접주는 일이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모일 사람은 관군이나 일본군을 상대로 싸울 젊은이들이어야 하거늘 막상 인원을 점고해보니 어린애까지 동반한 식솔 전체가 떨쳐나섰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나는 유랑민 차림의 농부가 부지기수였다. 이런 무리를 이끌고 싸움을 벌인다는 건 숫자만 요란했지 오히려 방해꾼이 더 많다는 사실에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급히 몇몇 접주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가속(家屬)을 대동하고 나서면 어찌 총 든 일본군과 대적한단 말이오?” 수접주가 물고 있던 장죽을 뽑아 놋재떨이를 탕탕 치며 힐난하자 접주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답했다. “가장이 떠나고 나면 남은 식솔이 받을 핍박이 극심한지라 함께 나선 것이지요.” “작년 보은 취회 때도 온 식구가 따라나선 바 있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하니 막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연초(年初)에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 이후 안핵사가 지역 인민을 동학패당이라 지칭하고 겁박하기를 부지기수, 당사자가 없으면 처자를 붙잡아 대살(代殺)까지 행하였다 들었습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누가 남고자 하겠습니까?” “전장에 나가더라도 밥은 먹어야 할 터, 불 때고 밥 짓는 일을 어찌 허투루 보냐며 아녀자들이 팔 걷고 나서는 통에 떼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보니 접주들의 말이 구구절절 옳은지라 수접주는 장죽에 담긴 담뱃가루가 줄줄 새는 것도 모르고 생각에 잠겼다.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은 다시 없었다. 유탄이 날고 포환이 떨어지는 전쟁터에 사패지(賜牌地) 경작하러 떠나는 작인들처럼 가속을 대동하고 나섰으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무리를 이끌고는 전투는커녕 보은까지 행군해 갈 자신이 없었다. 가는 도중에 맞닥뜨리게 될 일본군과 관군과의 교전을 생각하면 머리칼이 쭈뼛 섰다. 동학군을 보면 굶주린 담비처럼 덤벼들 게 분명한데 이런 오합지졸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흘리게 될 피의 강이 눈앞에서 벙벙하게 흘렀다. “아무래도 아니 되겠소. 전장에 나가는 사람이 식솔을 대동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내 한 가지 제안하리다. 무기 없는 사람은 인원에서 제외합시다. 화승총이나 장창, 최소한 궁시를 든 자 이상만 추리자 이 말이오. 어떻소?” “그 말씀이 장히 타당합니다. 그렇게 합시다.” 즉석에서 동의가 나왔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하는 접주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사코 고집을 꺾지 않는 자가 있을 것인즉.” 중구난방이 이어졌다. 더 듣자 해도 뻔한 말들이라 수접주가 단호하게 오금을 박았다. “군율로 그리 정했다 하면 필시 마음을 돌릴 것이오. 엄중한 군율로 말이오.” 손사래 치며 나서려던 자들이 세웠던 무릎을 도로 개고 주저앉았다. 수접주가 윽박지르던 기세를 몰아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일단 그 일은 그렇게 하십시다. 그보다 먼저, 이번에 관아에서 탈취한 병장기를 다룰 훈련이 필요할 텐데 말이오?” 수접주가 어디서 들은 말이 있었던 듯 군사 훈련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 일이라면 각 접에 포수 노릇하는 도인이 상당수 있을 것이니 이들에게 포술을 가르치게 함이 어떻겠소?” “좋소. 당장 내일부터 훈련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포수를 모이라 연통을 넣으시오.” 얘기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더 뭉개고 앉아 있을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회의를 마친 접주들이 본거지로 돌아가 결과를 알렸다. 무수한 반대가 일었으나 결사코 참여하겠다는 사람에 한해 죽창이라도 가졌다면 끼워주는 선에서 무마하고 포수 교관을 선발하여 화승총 사격훈련에 돌입했다. 그러나 말이 훈련이지 심지에 불을 붙이다가 손가락을 태워 먹기 일쑤였고, 화약 쟁이는 손놀림이 허술해 쏟는 게 태반이었으며, 총알 튀어나가는 시간을 가늠하지 못해 헛방을 놓기 일쑤였다. 한나절 씨름한 끝에 겨우 탄환 장전 기술은 익혔으나 과녁 맞추는 일은 또 다른 연찬이 필요한지라 능숙해지기까지는 하세월이었다. 사격훈련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그것은 군사의 숫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총기 탓이었다. 총이 많으면 한꺼번에 여러 명을 훈련시킬 수 있지만, 워낙에 숫자가 부족한지라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게다가 화승총은 명중률이 떨어져 조준 사격이 쉽지 않았고, 재장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 일제사격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총은 칼이나 창과 달리 직접 만들 수 있는 무기가 아니어서 관아나 적병에게 탈취하지 않고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기왕에 지니고 있던 것과 음죽과 안성에서 빼앗은 화승총을 합친다 해도 일본군이나 경군(京軍)이 지닌 신식무기를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게 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있는 다른 관아를 습격하여 탈취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창진 접주가 진천(鎭川) 관아를 기습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사격훈련을 마친 동학도를 중심으로 특공부대를 편성해 야습하자는 계획이었다. 그의 계획에 찬동하는 도인이 대거 몰려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많은 인원이었다. 엄선을 거친 후 1개의 주공 부대와 2개의 협공 부대를 편성해 맹훈련에 돌입했다. 습격 계획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무기는 빈약할지라도 워낙 많은 숫자가 야음을 틈타 일시에 달려드니 진천 관아의 관군은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줄행랑치고 말았으며, 현감과 아전을 포박해 꿇리고, 군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다수의 무기와 탄환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음죽과 안성에 이어 진천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두자 동학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제는 신식무기를 가진 일본군을 상대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천포가 진천 관아 습격에 성공한 직후 경기포 본진으로부터 광혜원에서 황산으로 이동하라는 군령이 내려왔다. 이천 수접주의 지휘 아래 큰 짐은 소달구지에 싣고, 멜 수 있는 짐은 등에 지고 길을 나섰다. 만 하루가 걸리는 거리였다. 황산에 도착하니 원주, 횡성, 홍천 지역의 강원도 군과 충청도 북부에서 기포한 동학군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족히 1만은 넘어 보였다. 의암 손병희 대접주가 경기동학군의 수장으로 나선 것도 큰 힘이 되었다. 한울님의 옹위와 보살피심이 황산에 모인 동학도의 신심을 부추겨 주문 외우는 소리가 낭자하게 울려 퍼졌다. 다시 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황산은 지세가 협소해 사소한 움직임에도 목화송이 휩쓸리는 형국이라 인근의 무극 장터까지 주둔지를 확장하여 북새통을 이룬 후 드디어 동학군은 보은을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연도에 구경 나왔다가 빗겨 깎은 죽창이나마 꼬나들고 끼어드는 인원이 늘어나는 통에 대열은 열두 발 상모 끈처럼 장사진을 이루며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대열은 크게 선봉군과 중앙군, 후위군의 셋으로 나누고, 중앙군은 다시 손병희 대접주가 이끄는 중군과 좌, 우군의 셋으로 공격대형을 갖추었다. 진천 관아 공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천포는 후위군의 주력으로 편성되었다. 경기동학군은 소걸음으로 꾸준히 움직여 증평을 거쳐 괴산을 향해 짓쳐 나아갔다. 괴산은 동학군이 섬멸해야 할 1차 목표 지점이기도 했다. 괴산을 공격 목표로 삼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아직도 부족한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괴산 관아에서 이 지역의 동학 접주 2명을 붙잡아 처형한 것을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괴산 일대는 삽시간에 몰려드는 동학군으로 북적였고, 공격 정보를 입수한 관아의 수성군(守城軍) 역시 횃불을 치켜들고 여장(女牆)을 두텁게 덧쌓아 방비하고 있었다. 한편 괴산은 일본군이 동학군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는 지역이기도 했다. 일주일 전, 경기동학군 선발대의 습격으로 괴산과 지척에 있는 안보(安堡) 병참부가 공격을 당해 군용전신이 끊기는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군용전신은 일본군이 보호 1순위에 놓는 군사 장비로서, 만약 괴산이 점령되면 인근에 위치한 가흥(可興) 병참부 역시 위협받을 처지에 놓이기에 일본군은 이미 이 일대에 정찰병까지 내보내 첩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전투는 뜻밖에도 일본군의 기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경기동학군의 선봉이 괴산 못미처의 작은 고개를 넘기 위해 접근하는 도중 이곳에서 정찰 활동을 벌이던 일본군 정찰병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일본군 2개 분대 30명의 정찰대가 2개 조로 나뉘어 1개 조는 선봉군의 정면을 파고들었고, 다른 1개 조는 측면으로 우회하여 중앙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과의 첫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기습 공격을 받은 동학군은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뿔뿔이 흩어졌고, 고작 2개 분대의 공격으로 선봉군과 중앙군이 속수무책 당하고 만 것이었다. 이번에도 전세를 유리하게 이끈 이는 이창진 접주였다. 일본군 숫자가 많지 않은 걸 알아차린 그가 후위군 화승총 부대를 지휘해 일제사격을 가한 결과 실탄이 바닥난 일본군이 퇴각하기 시작했고, 사상자가 발생하자 군용품까지 버린 채 충주 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이렇게 괴산 초입에서 치른 일본군과의 첫 전투가 승리로 끝나자 동학군은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기쁨에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경기동학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청산에서 북상하여 올라온 동학군과 세를 합쳐 괴산 관아로 쳐들어갔다. 동학군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성벽에 운제(雲梯)를 걸치고 불화살을 날리며 통나무수레로 성문을 깨뜨렸다. 이를 본 관군이 대군의 숫자에 놀라 감히 대적할 엄두도 못 내고 도망쳐버렸고, 관군과 함께 저항하던 부락민 삼십여 명을 붙잡아 도륙 내자 괴산 일대는 일순간 걷잡을 수 없는 화염과 함성으로 뒤덮여 동학군 세상이 되고 말았다. 중앙군 손병희 대접주의 행렬이 성문을 지나 관아에 도착하는 것을 끝으로 괴산전투는 막을 내렸다. 한규석은 이창진과 함께 관아로 들어가 손병희 대접주에게 승리 축하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길이었다. “대접주께서 무척 기뻐하셨어. 이번 전투에서 자네의 공로가 지대하다는 걸 잘 알고 계시더군.” 한규석은 이창진의 무공을 추켜세우며 진중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디 칭찬이나 듣자고 한 일이겠나?” “아무튼 장한 일을 했어. 그런데 말일세. 우리가 승리했다고는 하나 죽거나 다친 자가 무수하다 들었네. 그 수가 얼마나 된다던가?” “아직 다 수습된 건 아니지만 죽은 자가 족히 백 명은 넘는다 들었네. 자세한 것은 곧 알게 되겠지.” “관군과 일본군은 몇이나 죽었다던가?” “관군의 숫자는 지금 파악 중이고, 일본군은 한 명이 죽고 네 명이 부상당했다 들었네.” “어허, 낭패로고.” “낭패라니?” “관군의 사상자는 빼더라도 일본군 한 명을 죽이는 동안 동학군 백 명이 죽었다면 이 어찌 승리한 전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가진 무기가 열세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네. 이 어찌 제대로 된 전투라 할 수 있겠나? 그리고 앞으로가 더 문젤세. 고작 일본군 정찰병 삼십 명이 우리 동학군 일만 명을 업신여기고 달려들 정도인데 장차 일본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파견했다는 후비보병(後備步兵) 19대대를 만나면 어찌 되겠나? 게다가 죽산 부사 이두황(李斗璜)의 장위영(壯衛營) 군과 안성 군수 성하영(成夏泳)의 경리청(經理廳) 군이 지난번 우리가 지나왔던 광혜원과 안성에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나? 일본군과 관군이 우리 동학군만 보면 진멸하러 달려들 것이 불 보듯 뻔한데 항차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래서 괴산 관아를 공격한 게 아니었나? 노획한 무기도 상당하고 환곡 사백 석에 공전(公錢)도 팔천 금이나 확보했다네.” “앞으로 날은 더 추워질 테니 입성도 두툼히 갖추어야 하고, 많은 인원에 먹성 대기도 쉽지 않을 거야. 게다가 걱정이 하나 더 생겼네. 자네도 괴산 읍내 불타는 것 보지 않았는가? 탐관오리들이 끼친 패악을 참지 못해 당장 개벽 세상을 만들 것처럼 날뛰는 사람들 말일세. 이들이 관가나 민가 지붕에 불쏘시개를 찔러 넣어 소실된 가옥만도 오백 채가 넘는다네.” “나도 기실은 그게 걱정일세.” 둘은 전화(戰火)의 참상이 채 가시지 않은 읍내를 둘러보며 품었던 소회를 풀어냈다. 외적의 침탈과 모리배의 악행을 징치하기 위해 기포한 동학군이건만 이 중에는 시정잡배, 협잡꾼까지 묻어 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이가 있으나 이들을 추려낼 방도가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로 인해 화란(禍亂)이 더욱 극심해질 게 염려스러웠다. 이창진은 가던 길을 멈추고 행전을 조여 매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이제부터라도 군율로 더욱 엄히 다스리고 전량을 철저히 단속함은 물론, 무리 중에서 동학교에 입도하지 않은 자들을 솎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화적 떼와 다를 것이 무언가? 우리 이천접이 먼저 솔선하여 경기포의 모범을 보이세.” 한규석이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전투 결과를 세밀히 분석하고 기록해 차기 전투에 대비하는 일도 생각해봐야겠어. 허투루 병력을 낭비하여 1대 100으로 동학군이 죽어서야 쓰겠는가? 전황의 유불리와 진퇴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전투상보(戰鬪詳報)를 꼼꼼히 기록하는 것도 엄중한 일일 걸세. 내가 이 일을 자청해서 맡아 할 터이니 그리 알게나.” 한규석은 이천접 진중으로 돌아오는 즉시 한지 두루마리를 한 채 사서 마름질하여 지니고 다니며 난중 세사(亂中細事)를 꼼꼼히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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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인내천수운문화제 따뜻함을 나누는 우리만의 콘서트 HEALING:CON천도교중앙총부는 오는 12월 13일 18시 30분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2024인내천수운문화제 따뜻함을 나누는 우리만의 콘서트 HEALING:CON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어 인내천수운문화제를 통하여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문화행사로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교인 및 일반인들에게 뜻깊은 의미를 전달할 예정이다. 인내천수운문화제의 기본 정신을 표현한 '당신이 한울입니다.'라는 슬로건처럼 “따뜻함을 나누는 우리만의 콘서트, HEALING:CON”을 이웃 시민을 초청한다. 메인MC 민서의 사회로 첫 번째 공연은 신진발달장애인 연주 그룹 파라솔의 클라리넷 앙상블 연주 공연으로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의미를 되새기며 서로 만들어 나가는 연주 속에서 큰 감동과 울림을 선사하고자 한다. 장예예술교육 및 사회 공헌 활동 등을 통하여 발달장애인의 의식개선에 앞장서기 위해 설립된 단체인 뮤직그룹 파라솔의 공연과 함께 조은세 아티스트, 오웬(O.WHEN) 아티스트, 백아연 아티스트의 공연 및 토크가 이어진다. 윤석산 교령은 행사를 앞두고 “올해는 동학 천도교를 창명하신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의 출세 200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입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시천주와 인내천 운동은 우리 안에 평등과 조화로 여여한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략) 인내천수운문화제를 통해 돌봄과 실천을 함께하는 따뜻한 공동체를 회복하고 행복한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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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5년 12월 8일 온라인 어린이 시일식 봉행포덕 165년 12월 8일, 천도교 어린이들이 온라인을 통해 하나 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이번 어린이 시일식은 북부산 교구의 박민성 어린이가 집례를 맡고, 삼천포 교구의 이채윤 어린이가 경전을 봉독하였다. 이어지는 설교는 천도교 청년회 이재선 회장이 맡아 어린이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시일식 후에는 천도교 대학생단 조영은 동덕의 지도 아래 어린이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특별 활동, ‘궁을장 자개 그립톡 만들기’가 진행되었다. 어린이들은 전통 공예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체험하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온라인 어린이 시일식은 매달 둘째 주 일요일 오전 11시에 진행되며, 전국 각지의 교구 어린이들이 모여 경전 봉독과 설교를 통해 신앙심을 다지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교류를 나누는 자리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천도교 청년회는 매달 2, 4주차 시일 저녁 9시에 청소년들을 위한 ‘청소년 저녁 기도식’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청소년들이 신앙적 성장을 도모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이 마련된다. 직접 참여하는 방법은 각 교구에 한달에 한 번 매월 2, 4주차에 출석하여 참여하거나, 일요일 교당에 나오기 어려운 경우 집에서 줌으로 접속해서 참여할 수 있다. 또 신청을 하면, 시일활동 물품을 교구나 각 가정으로 발송하여 받을 수 있다. (신청 : 010-9275-8060) 천도교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신앙과 함께 창의력을 키우고 서로를 이해하며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사진, 글 조영은(천도교 대학생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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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은 힘을 모으는 것, 내 마음을 믿어야죠지난 12월 1일 현도기념식을 마치고 서울교구 여성회에서 박태량 여성회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경로잔치와 봉사활동을 비롯하여 서울교구의 온갖 살림을 도맡아 해온 서울교구 여성회의 이야기와 박태량 여성회장의 신앙생활, 교단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소망을 들어보았다. 반갑습니다. 서울교구 박태량 여성회장님 모십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헌신해 오셨는데, 오늘 뜻깊은 현도기념일에 인터뷰하게 되어 더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해 오시고 또 교회를 위해 헌신해 오셨습니다. 서울교구 여성회장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교회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서울교구 여성회가 천도교 여성회본부에 통합됐다가 포덕 124년도에 재결성했습니다. 그때 제가 재무부장을 맡았어요. 그때 당시에 저는 바로 이 앞에서 가게를 하면서 교회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행사가 있을 때마다 청수봉전을 참 많이도 했지요. 남편이 교단에서 오래 일했어요. 관리실에서요. 소암 김경규씨가 제 남편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한평생 교회에서 늙었습니다. 교회 일을 참 열심히 하시던 분이에요. 그 바람에 저도 교회 일을 열심히 하게 되었지요. 교회의 모든 일에 여성회의 손이 닿지 않는 일이 없었을 텐데, 생업을 하시면서 교회 일을 열심히 하기가 참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지금 수운회관 바로 앞인 덕성여대 자리에서 18년 동안 사진 인화, 복사집을 했어요.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이 있었죠. 우리 집이 작업이 많기로 서울 시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집이었어요. 그때는 여기 통계청도 있었거든요. 지금 이 옆에 있는 노인복지관 그 자리가 통계청이었어요. 지금은 대전으로 이사를 갔죠. 덕성여대 평생교육원도 학생이 천 명 가까이 됐어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교회 일에는 정성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참 기쁘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서울교구 여성회 재무부장을 하다가, 본부로 가서는 6년간 조직부장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여성회본부에서 감사를 맡고 있습니다. 서울교구 여성회장직은 2010년부터, 2016년 박징재 회장 역임 기수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13년간 역임하고 계시는데, 보람된 일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몇 가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 여성회에서 경로잔치를 참 오래 해왔지요. 옛날엔 가정 방문도 많이 다니면서 어른들 대접하기도 했고, 봉사활동을 참 많이 했습니다. 불우이웃 돕기도 많이 했지요. 그러다가 최근 코로나가 오면서부터 못하게 되었어요. 그전에는 여성회에서 중심이 되어서 시일식 후 교인분들에게 서울교구 식당에서 직접 식사를 준비하여 밥을 대접해왔습니다. 코로나 이후에는 식사를 못 하게 되니 식당 문을 닫아놓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몇 년 사이에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시게 되었고요. 경로잔치는 우리가 직접 반찬을 만들어서 대접했습니다. 다음 세대들이 좀 이어서 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늘 하던 일이니까 내가 맡은 임무는 다해야죠. 회비만 내고 참여하지 않는 분들도 많고, 그런데 그나마 회비를 내는 회원들도 지금은 많이 줄었어요. 경로잔치를 하면 어른들께서 참 좋아하시거든요. 가정 방문도 좋아하시는데, 지금은 그게 다 멈춰져 버렸어요. 정리하자면, 우리 여성회에서는 경로잔치, 가정 방문 등의 교단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 그리고 바자회, 불우이웃돕기 등을 해마다 하면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청에서 임명장도 받고 상장도 받았어요. 회장님의 리더십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께하시는 여성회 동덕님들께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이니까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이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너무 오래 장기 집권을 하고 있으니까요. 하여튼 여태까지 활동은 내가 힘 닿는 데까지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교구 행사에 사람이 많이 왔고, 우리 여성회 많은 회원이 같이 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을 도맡아서 할 사람이 줄어들어서 갈수록 어려워지고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조직이나 사람들이 줄어들고 젊은 세대들은 찾아보기 힘들죠. 마음을 내서 함께하는 일이니 한사람 한사람이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죠. 모든 일은 내가 앞장을 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저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와 주니 고맙죠. 교회 일은 내 몸을 아끼지 말고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돈을 떠나서 내 몸을 불사르고 봉사를 하면 모든 것이 자동으로 따르는 것 같아요. 말씀 들으면서 신앙의 힘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회장님께서는 천도교를 하면서 언제가 제일 좋으셨어요? 내가 처음에는 천도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왔잖아요. 그러다가 교회 일을 하다 보니 전국을 돌아다니게 되었고, 1년에 두 번, 여름과 겨울이면 수련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처음 수련을 하는데, 주문을 외우면서 3일 동안은 제대로 앉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3일이 지나서야 아픈 다리가 싹 나아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수련을 한 200명씩 다녔어요. 그땐 선풍기 같은 것도 없을 때예요. 밥도 된장 국물 한 그릇을 먹어도 참 꿀맛이었어요. 그뿐인가요. 세탁기도 없었어요. 경주에 가면, 계곡물에서 발도 담그고, 세수도 하고 잠잘 때도 한 방에서 다 같이 잤어요. 생각해 보면 경주 용담교구는 수련을 참 많이 합니다. 수련을 많이 하는 교구는 뭔가 다릅니다. 우리 서울교구도 수련을 많이 하면 좋겠습니다.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많지만, 본부에서 지방을 돌아다닐 때, 가서 인사하고 지방 교구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각 교구에서 경과보고를 하는데, 이 교회가 서울에만 있는 게 아니고 지방에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참 기뻤습니다. 처음에 ‘천도교’에 대해 잘 몰랐으니까, 천주교도 아니고 이거 뭐지, 그런 생각도 했어요. 올해 대신사님 출세 200주년을 맞이하며 대교당에서 며칠 동안 다 함께 수련했잖아요. 그때도 참여하셨지요? 대교당에서의 주문 수련은 어떠셨나요? 참 좋았어요. 저는 교회에서 하는 수련은 절대 빠지지 않아요. 시일식도 그렇고요. 평생 그랬어요.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지요. 우리 교회의 목적은 수련에 있는데, 무슨 일을 해도 수련부터 먼저 해야겠더라고요. 제가 서른 몇 살에 교회에 들어왔는데, 지금 나이 팔십을 바라봅니다. 올해 일흔 아홉이에요. 그동안을 돌이켜보면 그렇습니다. 우리 천도교에서는 수련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 일 하시면서 보람도 되고 또 신앙 생활 하시면서 가슴에 품고 있는 스승님 말씀 같은 거 있잖아요. 어떤 말씀이 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남의 흉을 보지 말고 내 마음을 지켜라. 그 말씀입니다. 나는 ‘나의 마음을 잘 지키는 것’ 그것 하나를 품고 살지요. 그런데 신앙생활이라는 게, 평소에 실천이 잘 안될 때가 많잖아요. 그럴 땐 어떻게 하시나요? 사람 때문에 괴로울 때는 내가 남한테 말을 안 합니다. 속으로 계속 삭입니다. 장사를 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는데, 그럴 때면 스스로 마음을 꽃 피우는 거지. 그럴 땐 수련을 하는 거죠. 지금도 수련을 하면 내가 엄청나게 울어요. 속에 쌓인 게 많은가 봐요. 심고 드릴 때 주로 어떤 마음을 품으시나요? 주위에 모든 것이 바른길로 돌아가게 해달라고요. 그리고 가족이 건강하게 해 달라고요. 그것 말고는 없어요. 회장님 자신을 위해서 하시는 기도는요? 나를 위해서는 안 합니다. 지금도 내가 새벽에 일어나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고 그렇게 기도를 2시간 합니다. 자기 전에는 한울님 앞에 앉아서 고합니다. 한울님, 오늘 하루가 다 끝나고 잡니다, 하고요. 그리고 나쁜 일 있으면 좀 잘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또 심고합니다. 아이들에게 크게 나쁜 일 없이 원하는 대로 풀리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요. 그 덕에 손주들도 좋은 대학 다니고 다들 잘 풀렸어요. 내 안에 한울님이 계시고, 한울님이 간섭을 하신다고, 그렇게 느낍니다. 제가 좀 아프기도 했는데, 그때도 한울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늘 심고를 합니다. 회장님께서는 타인을 위해 마음을 모으고 심고를 드리신다고 하셨는데, 회장님 자신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꽃 피워지기를 바라세요? 나는 늘 교회를 위해 심고를 드리는데, 교구는 교구대로 화합이 좀 됐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나와서 같이 화합되면 좋겠고, 서로 위하며 하나가 되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 여성회 회장으로서 오래 봉사를 해오셨습니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교인들이 모여 봉사하고 실천해 오셨던 선하고 강한 에너지가 교단을 이끈 힘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교단에 바라는 점, 그리고 후학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과거에는 대교당에서 행사를 하면 수백 명이 자리를 채워 앉아 대교당 안이 꽉 찼는데 지금은 빈자리가 많아서 안타까워요. 그리고 우리 천도교는 서로 편 가르지 말고 단합이 돼야 해요. 나는 우리 교단이 수련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천도교의 맥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학들이 잘 크려면 윗사람들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큽니다. 이제 누가 그 씨앗이라도 잘 키워가면 좋겠습니다. 기자는 이 인터뷰를 통해 수련의 힘은 어디서 오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하나 더 드렸다. 수련의 힘이 어디서 온다고 보세요? 신앙의 힘은 무엇인가요? 수련은 교회에 힘을 모아주는 거예요. 신앙은? 글쎄요. 내 마음을 믿어야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마음’이라는 말을 오래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심고는 드리지 않는다는 말씀이 떠올라, 서울교구 박태량 여성회장께서 건강하시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