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칼럼]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일이다105년 전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역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함성소리는 매해 3월이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고동치게 한다. 3.1만세운동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평화로운 항거였으며 3.1정신은 이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루는 근간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3월이면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공적에 비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이 있다. 바로 3.1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하고 자금을 준비하였던 의암 손병희선생이다. 천도교 제3세교조인 의암 손병희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우리나라가 강제로 강탈당하게 되자 10년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해 나가게 된다. 우이동에 땅을 구입해 수련도장인 봉황각을 짓고 전국에 있는 유능한 지도자들을 모아서 독립의지를 확고하게 심어주기 위하여 심신훈련을 하게 한다. 3년에 걸쳐 7차례 483명이 봉황각 연성수련을 통해서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3.1운동때 전국 각 지역에서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지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부구총회를 통하여 결의하고 교호당 10원이상씩 건축성금을 내도록 하였다. 이 자금은 후에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리고 당시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가 적자경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끝까지 폐쇄하지 않고 훗날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전국 37개 대교구로 하여금 등사기를 1대씩 구입하도록 하여 훗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의암 손병희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한 49일 특별기도를 지시하였다. “먼저 보국안민(독립)이 된 다음에야 광제창생 포덕천하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 등 아홉 곳에 대표 기도처를 정하고 각 기도처마다 4명씩 대표를 파견하여 기도식을 지도하게 하면서 3.1독립운동을 위한 전국 교단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그리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와 대연합으로 33인 민족대표를 결성하기에 이르른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전국 조직망을 정비하고 독립자금까지 전담하는 등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지도해 나갔지만 매년 3.1절이 되면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은 미미하게 들리는 듯 마는 듯하다. 또한 천도교의 3.1운동에 대한 역할 또한 알려지기도 전에 잊혀져 가기만 한다.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해야만 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역사는 사라지고 심지어 왜곡되기까지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의 잘못이며 이대로 가다가는 사라지고 왜곡될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세상이 떠들썩 하도록 매해 기억하고 기록하고 또 기념해야 할 것이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는 방법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자. 독일을 예로 들어보자. 독일은 틀에 박힌 상징과 형식이 아닌, 권위적이지도 않고 위압적이지도 않은 형식으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참회하며 가장 예술적으로 역사를 작품속에 표현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살아있는 곳으로 피터 아이젠먼의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1998~2005)는 홀로코스트(Holocaust)로 희생된 600만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고 있다. 다음은 나치의 분서사건 60주년을 즈음하여 독일 베벨광장에 세워진 미하 울만의 「도서관」이라는 작품을 보자. 베벨광장 중심부에 가로120센티미터, 세로120센티미터 크기의 정사각형 투명유리창이 있고 그 지하에 텅빈 직방체 공간이 있다. 이스라엘 예술가 미하 울만의 「도서관」작품이다. 책들의 화형식이 있었던 그 장소의 지하에 설치된 경고의 기념조형물이다. 이처럼 그들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방법으로 문화예술 공간을 이용하고 있다. 문화예술공간은 시민들의 삶속에 스며들고 있으며 그들은 생활속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보고 느끼면서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의암 손병희선생님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_숙현당 정정숙(근현대사미술관 담다 관장, 천도교선도사)
-
포덕165년 천일기념식 봉행오는 4월 5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는 포덕 165년 천일기념식을 봉행한다. 개식과 함께 청수봉전, 심고, 주문3회 병송, 경전봉독, 천덕송 합창, 기념사 등의 식순으로 이어지며 올해는 식후 행사로 축하강연/공연이 준비되어 있다. 주용덕 교령대행은 기념식을 앞두고 보도자료를 통해 "'산천초목들이 푸르게 살아나 기쁜 생명의 노래가 창창한 오늘은 한울님과 수운대신사께서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으로 무극대도 세상 열어 한울님 성공하신 날입니다. 수운대신사께서 오직 한울님을 믿고 믿으며 공경으로 정성으로 그 어떤 두려움도 의심도 한 바람에 떨쳐버리시고 지기금지 원위대강 한울님 기운과 내 기운이 하나라고 하시며 시천주 조화정 한울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라고 하시며 외롭고 고단한 긴긴 어둠을 지날지라도 가야할 길이라면 내쳐 멈추지 말라고 이마에 전등을 달아주시고 가슴에 태양 빛을 심어주신 날입니다. 올해는 대신사탄신 200주년입니다. 대신사님 무극대도에 동참하기를 맹세하신 동덕여러분 믿음과 기쁨으로 물결치는 형상있는 한울님으로~ 다시 시작이 됩시다"라고 천일기념일을 앞두고 소감을 밝혔다. 천일 기념일은 4월 5일 오전11시 서울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지방교구에서 일제히 봉행되며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리는 천일기념식은 용암 주용덕 교령대행을 비롯하여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된다. 기념식에 이어 축하강연/공연도 개최될 예정이다. 한편 천도교의 5대 기념일 중 하나인 천일 기념일은 수운 대신사께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인 천도를 받아 동학을 창명한 날로, 천도교의 주요 기념일은 다음과 같다. 천일기념일 : 매년 4월 5일 수운 대신사께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인 천도를 받아 동학을 창명한 날을 기념함 지일기념일 : 매년 8월 14일 해월신사께서 수운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을 기념함 인일기념일 : 매년 12월 24일 의암성사께서 해월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을 기념함 도일기념일 : 매년 1월 18일 춘암상사께서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을 기념함 현도기념일 : 매년 12월 1일 의암성사께서 동학을 천도교로 세상에 선포한 날을 기념함
-
천도교여성회 제 100주년 창립기념식 성황리 개최포덕 165(2024)년 3월 25일 오전 11시 천도교 중앙대교당(종로구 경운동)에서 ‘천도교여성회 제100주년 창립기념식 및 『천도교여성회100년사』 출판 봉고식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천도교여성회는 포덕 65(1924)년 4월 5일에 주옥경 종법사를 초대회장으로 모시고 ‘천도교내수단’이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었다. 이후 포덕 72년(1931)에 ‘내성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포덕 81년(1940)에 ‘내수회’, 포덕 97년(1956)에 ‘천도교부인회’를 거쳐 포덕 109년(1968) 지금의 ‘천도교여성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95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 가입하는 등 대외활동도 활발하게 해오고 있다. (계속)
-
종로 출마 곽상언 더불어민주당 후보 중앙총부 방문천도교 주용덕 교령대행은 종로구에서 22대 총선에 출마하는 더불어민주당 곽상언 후보를 만나 “자주독립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종로구를 위해 애써달라”고 당부했다. 3월 26일 오전 10시 천도교중앙총부를 예방한 곽상언 후보는 학창시절 선생님의 결혼식이 있었던 천도교중앙대교당을 방문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동경대전을 비롯한 천도교경전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히며 “전봉준 장군 동상 앞을 지나갈 때면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전봉준 장군의 눈빛을 바라보며 눈을 맞춰보기도 한다”며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 종로구에 산적해 있는 독립운동의 역사적 장소들에 대해서도 보존 및 정비하여 기억공간 등으로 재생산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도 말했다. 주용덕 교령대행은 종로구에 위치한 탑골공원에 대해 “3.1운동 이전에 동학혁명이 없었다면 과연 민주화가 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역사는 연결되어 있고 이어져 온다. 우리의 근대 시민운동이 동학과 3.1운동에서 시작되었듯, 천도교가 민족의 정신의 근간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탑골공원의 역사도 편향되지 않고 모든 시민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민족공원이 되도록 종교 간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 배석한 이미애 교화관장은 “해월 선생님의 가르침은 환경과 생태, 생명존중 사상으로 기후위기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곽상언 후보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제경제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4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경희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법무법인 인강 대표변호사이다.
-
김동련 작가 소설 『동학』 원작, 연극 "사람, 한울이 되다"대하소설 <동학>의 저자 김동련 작가와의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하였다. 오는 5월 10일~13일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연극 <사람, 한울이 되다>가 무대에 오른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꿈, 동학이 가르쳐준 지혜와 오늘날 동학의 가치를 묻는 대화 속으로 독자 여러분을 모신다. 집필 계기와 과정 소설 <동학>을 집필하셨습니다. 총 6권 분량의 대하소설인데요, 집필하시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였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 동학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게 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강원도 묵호에서 중학을 졸업한 후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7살 먹던 해 봄부터 방파제 축조회사인 흥아공작소에 급사로 일했습니다. 30톤 기중기선 화장으로 일하던 또래의 친구가 당시 태극출판사에서 나온 『위대한 한국인』 전집을 구했으나 도저히 읽어내지 못하겠다고 하여 제가 넘겨받았습니다. 그 전집 두 번째 책이 『해월 최시형』이었습니다. 그 전집에는 이승만이나 김옥균 등 여러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저는 그분들에게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해월 선생님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저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특별히 어떤 점에서 충격에 빠지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스승 최제우가 순도한 후 30년 동안 포졸들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홀로 전국을 돌며 스승의 뜻을 이어 동학 조직을 재건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의 옳고 강한 의지가 불의로 점철된 잘못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면서 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해월 선생님의 행적에 비하면 기독교에서 전하는 바울의 전도 여행 같은 것은 어린아이 장난 같아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해월 선생님에 대한 소설을 써 보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해월 선생님의 이야기를 쓰려면 해월 선생님께 그러한 동력을 제공한 수운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운과 해월 두 분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려면 두 분의 뜻을 행동으로 옮긴 전봉준 장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난한 세월이 오래 이어졌으나 저는 이 꿈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험난한 세월이 오래 이어졌겠네요. 스승님들의 고된 여정만큼 작가님의 집필 여정은 그 과정을 고스란히 닮아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이 주제를 계속 삭이려 국내에 나온 동학 관련 문헌을 꾸준히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나 독서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44살 때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 문학을 수업했습니다. 문학사 자격을 얻었으나 마음에 드는 글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경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들어가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철학박사를 수료했습니다. 그 후 두 권의 책을 출간하며 문장 수업을 계속했습니다. 열 일곱 살에 처음 해월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되고 해월의 이야기로 소설을 쓰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해, 마흔이 넘어 비로소 국문과에 입학하셨는데, 배움의 뜻을 그렇게 이어가는 일도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배움의 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경험도 중요하고요. 동학에 관한 소설을 쓰려면 소설 속에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저는 사람의 죽음에 관한 경험을 하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을 얻어 합천 노인전문요양원에 입사해 8개월 동안 근무하며 사람의 마지막 삶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4년 전 여름, 저는 더는 집필을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당시의 국내외 상황과 작금의 국내외 상황이 중첩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동학이 그 시대의 희망이자 세상을 밝히는 횃불로써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던 것에는 그 시절에 처한 절박한 현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갑오년 동학군들이 맞이했던 상황을 다시 맞이하고 있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갑오년에 실패한 동학혁명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혁명 당시 동학군들이 외쳤던 숭고한 이상과 목표를 지금도 완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갑오년 당시 조선을 지배했던 세력은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인식하지도 못했고 잘못된 틀을 바꿀 의지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갑오년에 민족의 생존을 보장할 지혜는 결국 민중 속에서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지혜는 결국 푸른 눈을 뜬 시민 속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지혜는 동학의 인내천과 보국안민 같은 동학의 빛나는 사유를 반추하고 계승하고 선양하는 작업에 의해서 나올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가 점점 더 흥미로워집니다. 집필 과정에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집필하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금 총부의 감사원장을 맡고 계시는 부암 정덕재 선생님께서 천도교 관련 학자들과 문헌을 지극 정성으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소개받은 동학의 쟁쟁한 학자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섬세하고 명료하게 동학을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동학은 수운 선생님 나이 20에서 30살 사이에 사유의 기본 뼈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10년 사이 수운 선생님의 행적에 관한 남아있는 기록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각궁거상" 단 네 글자가 전부입니다. 각궁 즉 활을 손에서 놓았다니 무술을 익혔을 것입니다. 거상 즉 행상을 나섰다니 각지를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오지를 돌면서 조선의 실상을 뚜렷하게 목격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홀로 숙고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싶으셨나요? 저는 소설 속에서 당시 조선의 제반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구성했고 그 당시 범람하던 거대 담론인 유학과 불교와 도교를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 학술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이렇게 재해석된 거대 담론을 바탕으로 행상을 하며 현자를 만나 지혜를 구하던 수운 선생님의 사유로 종합하여 독자적인 동학으로 이루어 가는 과정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이후의 모든 문장은 많은 상황을 문학적 상상보다는 구체적인 자료로써 직접 이야기하게 하는 서술 방법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소설 곳곳에 나오는 대부분의 대화는 모두 조선 시대의 말로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의 대형 사전에서도 찾지 못하는 고유한 우리 말과 관용어가 수도 없이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집필 태도는 일반 독자들의 가독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저는 감수했습니다. 집필 기간은 어느 정도가 걸렸나요? 집필에서 출간까지 만 2년이 걸렸습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수운과 해월 선생님을 물론 당시의 동학 도인들의 절박하고 안타까운 심정과 자주 동화되었고 그럴 때마다 많이 울었습니다. 두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심장이 아리고 억장이 막힐 때도 많았습니다. 어떤 때는 서재 바닥을 뒹굴면서 몸부림치며 통곡을 하기도 했습니다. 글이 막힐 때는 만취해서 자다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17살 때 품었던 그 꿈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나고 나서야 여섯 권의 대하소설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자료조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1차 자료로 참고한 문헌은 동학 경전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일본외무성자료』 등입니다. 『동경대전』‧『용담유사』에 나타나는 범재신론은 종교철학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의 단계인데 이러한 사유는 서양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영국의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에 의하여 제시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19세기에 수운 선생님에 의하여 종교철학의 가장 높은 단계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은 조정의 입장으로 쓰인 글이므로 제가 백성의 입장에 서서 다시 번역해 소설에 넣었습니다. 『일본외무성자료』도 일본 입장으로 썼기 때문에 사실의 왜곡이나 축소가 심해 제가 조선 백성의 입장에 서서 다시 번역했습니다. 해월과 의암 선생님이 남긴 글들은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 대표 오암 박길수 선생의 도움을 받아 모두 정독했습니다. 원광대학교 박맹수 총장님께서는 아직 발표하지 않은 여러 논문을 보내주셨습니다. 영산대학교 송봉구 교수님과 동의대학교 성강현 교수님의 도움도 컸습니다. 기타 동학 관련 단행본이나 논문들은 살아오면서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하여 꼼꼼히 읽었기에 이미 횡설과 수설이 자유로운 상태였습니다. 특히 표영삼 선생님과 이이화 선생님의 저작을 읽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더러는 역사에 묻혀 외면당했던 여러 사건을 파내어 드러내기도 했고, 동학을 교단의 입장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재해석하여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 노력했습니다. 저의 스승인 경상대학교 오이환 교수님은 제 소설을 읽으시고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술이 섬세하다고 평가해 주셨는데 그것은 허구인 소설을 자료로써 직접 말하게 하려는 저의 무모한 서술 태도가 가져다 준 선물이 되었습니다. 소설과 연극의 차이 오는 5월에 부산 원곡예술관에서 3일에 걸쳐 선생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50년간 가슴에 품어 온 이야기가 소설로 완성되고 연극 작품으로 제작이 되는데, 감회가 어떠신지도 궁금합니다. 또 이 작품을 보시는 관객분들에게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앞에 말씀드렸듯이 제 소설은 거의 역사서와 학술서 수준에다가 조선 시대의 언어로 썼기 때문에 가독성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독자들의 요청을 받아 전국을 돌며 북토크를 했습니다. 특히 유학과 불교 그리고 도교와 천주교에 관한 저의 재해석이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오래된 우리 말이 많아 독자들은 사전을 옆에 펴 놓고 일일이 찾아가며 제 소설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동학은 우리에게 매우 아픈 상처라고 생각했기에 저는 다른 소설처럼 글을 쉽고 재미있게 쓸 수는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독자들은 그러한 저의 입장을 십분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소설이 이렇게 적극적인 독자층을 넘어 많은 분에게 알려지려면 좀 더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컨텐츠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소설 중 일부분을 발췌하여 주제를 강화한 이야기로 연극 공연이 만들어진다면 다면, 좀 더 가깝게 시민들에게 다가가 동학을 알릴 수 있고 또한, 공연에 참여한 분들이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깊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대 동학의 가치 내내 생각하게 됩니다. 왜 동학이었는가, 그리고 160년이 지나서도 왜 다시 동학이어야 하는가를요. 이 시대 동학의 가치를 참 오래 생각하시고 또 수운 대신사님과 해월 신사님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해오셨을텐데요. 이 시대 동학의 가치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현대사회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빼앗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듯합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을 다만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을 소비하는 구매자로만 대우하고 있습니다. 돈이 슈퍼에고가 된 세상에서 개인은 생산자가 상품만 판매하면 게임에서 이기는 룰 속에 헤매고 있습니다. 거대한 관료주의는 개인을 자기들이 지향하는 기계속의 작은 톱니바퀴로만 대우하고 있습니다. 권력이 돈을 추구하면서 남발한 오염된 담론으로 인하여 개인은 무엇이 옳고 그른 지를 판단할 수 없도록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 내동댕이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은 자신이 진실로 어떤 존재인지 숙고하기가 어렵습니다. 동학은 인내천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은 각자가 이 우주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답고 신비한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곧 한울이라는 가르침은 암울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 자신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주어 그들의 삶 자체를 올바르게 바꾸게 합니다. 향아설위는 이러한 사유가 삶 속에서 실천되는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이 추구하는 보국안민은 국가가 잘못하면 백성이 직접 나서서 그 잘못을 옳게 고쳐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정의롭고 적극적인 실천의 정신입니다. 부패한 권력에 맞서 백성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권력을 창출하는 것은 동학이 그동안 끊임없이 추구했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과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동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제 소설에는 동학이 제시한 여러 강령과 가치들이 구체적인 예를 통하여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동학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빈부격차나 저출산 그리고 안보위기나 사회적인 정의와 환경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줄 수 있으며 나아가 사람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대단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동학혁명 130주년을 맞이합니다. 소회가 어떠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130년 전 동학은 세상의 잘못된 틀을 바꾸려 목숨을 걸고 일어났습니다. 그 혁명은 안타깝게도 완수되지 못하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제2의 동학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동동학농민기념사업회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동학혁명 당시 경상도 지역의 최대 격전지였던 하동을 재조명하기 위해 전적지를 보존하고 동학을 선양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초 전국의 기념사업회가 장흥에 모여 전국동학농민기념사업연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흐름이 민중 속에서 동학의 지혜를 다시 반추하고 계승하여 이 시대에 당면한 문제들은 해결하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에 저희가 기획한 동학의 컨텐츠화를 위한 연극 공연이 조그만 기여라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부산 공연이 잘 마무리되면 올해 전국을 돌며 재공연할 계획입니다. 서울의 예술의 전당에서 마지막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저희의 계획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정부를 비롯하여 천도교 총부나 관련 단체의 많은 관심과 격려를 기대합니다. 김동련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학사/국립경상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동대학원 철학박사 수료/경상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방송통신대학교 출강/도서출판 후아유북스 대표/ 카페 여래(다솔사) 대표/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대표 <저서> 장편소설 『우리가 사랑할 때』(밥북)/인문서적 『천자문으로 세상보기』(인간사랑)/대하소설 『소설동학』전6권(모시는 사람들)/번역서 『안원의 사존편』(후아유북스)
-
인권위, 평등법 입법 추진을 위한 종교계 지도자 초청간담회 개최3월 22일 오전 11시 국가인권위원회가 종단 지도자들과 만나 평등법 제정 취지와 경과를 설명하고 자문을 구했다. 인권위는 이날 천도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주교 등 종교 지도자들과 평등법 입법 추진 간담회를 열었으며 이날 간담회에는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의 천도교 교령 대행 주용덕,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 원불교 교정원장 나상호 교무, 유교 성균관장 최종수 관장이 참석했다. 인권위는 "'평등에 관한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은 평등법 제정에 찬성하는 입장"이라며 "입법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높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등법 제정 취지와 주요 경과를 공유하고 종교계 지도자들의 자문을 듣고자 간담회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주용덕 교령대행은 이날 간담회에서 평등법 입법추진에 대해, “평등의 원칙인 기본권 보장에 대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할 것,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지 아니한다’라고 우리 헌법 전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실증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성소수자와 동성애자를 지지하며 그분들이 대해서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주용덕 교령대행은 “독거노인들이 2025년 197만명으로 증가한다. 독거노인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천도교의 삼경사상에서 밝히고 있듯 모든 생명이 공존 공생하고 순환하는 것처럼, 모든 생명을 공경하여 인간의 평등함,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권위는 2020년 6월 국회에 평등법 제정 의견을 표명했다. 인권위는 "장애나 성별, 연령이나 특정 고용형태로 인한 차별 문제가 발생해도 개별법의 적용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이유"로 법 제정의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종교계는 일부의 입법 반대 목소리를 표출해왔다. 현재 제21대 국회에서 평등법안 4건이 발의됐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아직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
[칼럼] 반역사적인 ‘이승만 띄우기’ 시도요즘 독재자와 학살자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이승만 대통령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을 자주 접하게 된다. 뜬금없이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여 독재자를 기리겠다고 한다거나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뒤짚으려고 한다.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기술한 우리나라 헌법전문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런 준동에 분노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현재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권 말살과 부정부패를 저질러 4.19혁명으로 쫒겨난 그의 말로를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판에, 독재자 이승만을 두고 다시 논쟁하는 자체가 소모적이다. 이승만의 악행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8ㆍ15해방 이후에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어 독재정치를 하면서 학살한 무고한 양민들이 100만명 이상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이승만을 국가보훈부가 지난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고, 국방부는 그를 혜안을 지닌 지도자로 미화하는 교재를 발간하기도 했다. ‘홍범도 지우기’로 국민의 공분을 산 집권 세력이 ‘이승만 국부 만들기’로 이념전쟁에 불을 붙이고 있는 형국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후 북한·중국·러시아가 공산화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했다”고 그를 칭송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농지개혁·교육개혁·정치개혁이란 3개 개혁으로 대한민국의 토대를 닦았다.”며 이승만을 한껏 찬양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격동의 해방 공간에서 그가 내린 선택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강변한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용하고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역사적 사실도 그들의 눈에는 크게 문제가 될 게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편다. 진실을 덮고 거짓을 호도하려는 영화 한 편에 부화뇌동하는 것이 2024년 대한민국의 현주소인 것만 같아 정말 씁쓸하다. 정권은 유한하고 역사의 흐름은 도도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이런 시도가 성공하겠는가. 말 그대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으로 국회에 상정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하고자 하는 법률안이 아직도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을미의병 참여자에 대해서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145명을 서훈하면서도, 전봉준·최시형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승만 띄우기’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를 거스르는 세력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역사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독재자 이승만을 구국의 민족지도자로 받들려는 기도를 절대 묵과할 수 없다. 국민 공감대도 없이 진행되는 시대착오적 ‘이승만 띄우기’는 성공할 수도 없고 결국 이념전쟁으로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것으로 끝날 것이 뻔하다. ‘이승만 국부 만들기’에 주력해온 뉴라이트 역사관에 따른 반역사적인 악행을 당장 멈추기를 요구한다. 글_윤여진(시인,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부회장)
-
즐거운 도가모임지난 3월 17일 즐거운 도가모임 시흥교구 모임이 있었다. 시흥교구의 마지막 도가모임으로 세 가정의 모여 진행하였다. 생일을 맞은 어린이 한울님의 파티를 통해 서로 촛불을 끄고 노래를 부르고 선물을 주고 받는 기쁨을 나눴다. 도가모임을 진행한 시흥교구 교인은, "3월 큰형한울님의 생일에 모두 모여 생일 축하하고 맛있는 음식 같이 먹었습니다. 서로 촛불끈다고 울고 불고...앞으로도 생일인 달에 어린한울님들이 모여서 생일파티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기회 가질 수 있도록 기획하고 노력해주신 여러 동덕님들께 감사인사 드립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
3·1운동 105주년기념 특별기획 전시회근현대사미술관“담다”(관장 정정숙, 용인교구추진위원장)는 3·1운동 105주년기념 특별기획 전시회를 3월 21일부터 5월 25일까지 개최한다, ‘용인의 3·1운동, 예술로 피어나다!’ 주제로 용인지역의 3.1운동에 대하여 조망하고 향토사를 알아가는 전시회다. 용인의 3.1운동은 3월 15일부터 원삼면 좌항리의 황경준, 김영달, 김성남, 맹리의 이은표, 이용환 등이 서울의 만세 소식을 듣고 용인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21일 새벽, 원삼면 좌찬고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까지 행진하면서 용인의 3.1운동은 시작되었다. 이후에 수지구, 기흥구에서 만세운동이 4월 3일까지 이어졌다. 용인에는 3대가 독립운동가인 집안이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의병활동을 한 오인수 의병장, 그의 아들 오광선 장군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가게 된다.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고 교관 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임무를 맡아 항일운동을 하게 된다. 그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이름도 광선(光鮮)으로 개명하였다. 부인 정정산(후에 정현숙으로 개명) 지사는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로서 독립군에게 하루 12번의 밥을 해 먹일 정도로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한 사람이며 비밀연락, 밀서 전달 등의 일을 하게 된다. 그의 딸 오희영, 오희옥 지사는 16세, 14세의 나이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서 일본군 내의 한국인 사병을 탈출 시키는 공작, 초모(招募)공작,선전활동을 하였다. 오희영 지사의 남편인 신송식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령 참모를 지냈으며 일본군 점령지구에 대한 선전공작, 정보수집, 유격전 등의 활동을 하였다. 용인의 2대 독립운동가 집안도 있다. 홍재설 지사는 1907년 고종황제 양위를 반대, 대한문 앞 석고단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정미7조약을 반대하고 을사오적 이완용의 집에 방화를 하였다. 두 아들 홍종욱, 홍종엽 선생은 1919년 3월 28일 처인구 포곡읍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외에도 신민부 집행위원장으로서 김좌진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에 참가하고 무장투쟁을 한 김 혁장군 뿐만 아니라 외교관으로 순절한 이한응 선생, 독립운동가 정철수, 권종목, 김운식, 심종윤, 이덕균, 정규복, 한영규선생 등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이들에 대한 자료와 수감자 인물카드, 판결문 등이 전시된다. 또한 독립군들이 불렀던 독립군가, 광복군가, 애국가, 의병가 등이 함께 전시되며 한국최초의 여성의병지도자 윤희순이 직접 쓴 가사집도 전시된다. 근현대사미술관 “담다”는 이번 특별전시를 위하여 용인작가 중 신혜선, 예미숙, 이보름 세 분을 선정하여 그들의 작품을 함께 전시한다. 정정숙 관장은 “역사는 기억하며 기록하고 기념하는 일이다. 역사를 잊어버리면 그 역사는 사라지고 왜곡된다. 올바른 역사를 전달하고 잊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이다.” 이번 전시회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전시회 개막식은 21일 오후 2시에 미술관에서 하며 개막식 때에 용인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모시고 함께 진행한다. 특히 여성독립운동가 중 유일하게 생존해 계시는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의 오희옥 지사의 동영상이 개막식 중에 상영된다. 오희옥 여사는 현재 서울 보훈병원에서 입원중이다. 이번 전시는 5월 25일까지이며 월요일은 휴관이다. (미술관주소: 용인시 기흥구 강남동로140번길1-6/031-283-7222/www.damda3.com)
-
천도교여성회100년사 출간“여성이 천도교의 주인이다! 여성이 다음(새로운) 세상의 주인이다!”를 표방하며 창립된 천도교여성회가 2024년으로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천도교여성회는 1924년 4월 5일, 천도교 제3세 교조이자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대표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부인 수의당 주옥경(守義堂 朱玉卿, 1894~1982) 초대회장을 중심으로 천도교의 여성들이 창립한 단체로, 창립 당시 이름은 ‘천도교내수단(天道敎內修團)’이다. 전성기에는 전국 200여 개 지부에 3만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때도 있었으나, 현재는 전국 60여 개 지부 3천여 명의 회원을 망라하고 있다. 역대 임원은 초대회장 주옥경을 비롯하여 42대에 걸쳐 모두 20명의 여성회장(중임 또는 3연임 이상 포함)이 재임하였으며, 부회장 이하 임원 숫자만 1천 명에 육박한다. 처음 이름인 ‘내수(內修)’는 천도교의 핵심 교리인 시천주(侍天主) 사상에 따라, 내 안(內) 모신 한울님 마음을 갈고 닦아서(修) “인내천 세상”을 이루는 주역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도교여성회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6.25 전쟁과 근대 산업화시기를 거쳐 오는 동안, 안으로는 수도연성을 통한 도가완성과 교회발전을 도모하고, 여성 지도자를 길러내는 한편, 밖으로는 사회봉사 활동, 여성인권 신장 운동, 남북 천도교여성 교류사업, 선열 선양사업, 수도원(修道院) 및 기념관 건립 사업 등 굵직한 대외 사업 등을 전개해 왔다. 또한 대외적으로 (사)한국여성단체연합,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여성위원회 등의 연합단체와 연계하는 등 종교 및 사회 평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천도교여성회 100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모심과 살림의 길이었으며, 천도교 여성들은 그 길을 정성과 공경과 믿음의 자세로 걸어왔다. 모심과 살림이란 안으로 나 자신을 한울여성으로서 고귀한 존재로 모시고, 밖으로 가정과 교회와 사회 전체를, 나아가 기후위기 등으로 말미암아 생존-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한 전 지구적 재난 상황을 생명살림의 자세로 살려나가는 주역을 (천도교)여성들로 설정하는 사상적 근거와 역사적 실천의 경험을 통해서 제시한다. 천도교에서 여성운동은, 일찍이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가 노비를 해방하여 며느리와 수양딸로 삼는 실천을 몸소 행한 것은 물론, 시천주, 즉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가르침에 따라 남녀 평등한 조건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수련에 임하게 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제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은 “베 짜는 며느리가 곧 한울님”이라고 선언하였으며, 또한 “부인(여성)은 한 집안의 주인”이라고 하고, 또 “구녀일남(九女一男: 남성 1명이 도통하는 동안 여성은 9명이 도통함)의 운수가 도래한다”고 하였으며, 또 “나(=최시형)는 부인(여성)도 스승으로 삼는다”고 하는 등 여성 존중의 교리를 설파하였다. 또한 동학의 향아설위(向我設位) 제사법은 나를 향하여 제사상을 차리는 혁명적인 제사법이고, 훗날 ‘청수 한 그릇으로 제사상을 차리는’ 천도교 특유의 제사법으로 발전하였는데, 이 또한 과중한 제사 문화에 시달리는 여성해방의 중요한 사례가 된다.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는 그때까지 이름이 없이 ‘○씨 부인’ 등으로 불리던 여성들에게, 모두 이름을 짓도록 하였으며, 동덕여학교(오늘날 동덕여대) 등의 여학교를 운영 또는 지원하여 여성 인재 양성과 계발을 위한 여건을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바탕 위에 창립한 천도교여성회는 그 후 천도교내성단, 천도교내수회, 천도교부인회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야 하는 시련을 거쳐, 1968년 ‘천도교여성회’라는 이름을 쓰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도교여성회100년사』는 100년간의 천도교여성회 역사를 제1부에서 여명기(창립 전) - 창립기(1924~1936) - 시련기(1936~1956) - 재건기(1956~1968) - 준비기(1968~1980) - 성장기(1980~2001) - 개화기(2001~2019) - 전환기(2019~현재)로 구분하여 시간 흐름을 축으로 여성회 활동사를 살피고, 제2부에서 ‘기념사업’, ‘조사 및 학술연구사업’, ‘문화사업’, ‘사회활동 및 대외협력사업’ 등으로 공시적으로 살피면서 천도교여성회 역사와 주요 여성 지도자들을 조명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여성으로서 천도교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宗法師)에 초대회장 주옥경(1894~1982)을 비롯하여, 양이제(1892~1985), 차기숙(1899~1994), 최시영(1904~1992, 이상 환원), 조동원(1926~ 생존) 등 5명이 추대되었으며, 현재 천도교단의 유일한 종법사는 ‘조동원(전 가리산수도원장)’이다. 결론부에서는 천도교여성회 과거 100년사를 기반으로 미래 100년의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이 책이 과거사 정리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선언문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책은 천도교여성회의 역사를 통해 한국의 여성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종교 내의 여성 역할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천도교여성회가 겪은 시련과 그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신적 강인함과 사회적 기여는, 단순한 종교 단체의 활동을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여성의 역할과 위치를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천도교단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천도교여성회의 역사 또한 내적이며 종교적인 활동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사 속에서 시대 흐름과 시대적 과제에 적극적으로 응전해간 민족운동사, 여성운동사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으므로 그러한 내용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여성회100년사』는 한국 여성사와 사회사의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천도교여성회의 100년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 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에서 여성들이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지를 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천도교 여성들이 사회적 약자로서 겪어야 했던 고난과 도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간 과정을 상세히 담고 있다. 이는 단순한 종교 단체의 역사를 넘어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이끌어왔는지에 대한 귀중한 사례이다. 한편 이 책은 천도교여성회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조직으로 편찬위원, 자료위원, 집필위원으로 구성되어 집필하였다. 최종 집필은 박길수, 노은정이 담당하였다. 기획은 천도교여성회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담당하였다. 추진위원회는 박징재 현 천도교여성회회장을 위원장으로 여성회 원로, 고문들을 자문위원으로, 여성회본부 상임위원, 중앙위원과 전국 여성회지부 회장들을 추진위원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천도교여성회는 오는 3월 25일 창립 100주년을 맞아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삼일대로 457)에서 제100주년 창립기념식과 함께, 『천도교여성회100년사』 출판봉고식(기념식)도 함께 봉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