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뉴스목록
-
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에게 듣다(1)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님을 만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를 거쳐 우리 역사가 흘러온 절망과 희망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 시절을 건너 온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야말로 한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구십 살이 넘은 생을 넘나드는 기억들을 풀어내며 선생의 생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선생의 말씀 속에 선생이 경험한 모든 것을 표현할 때 ‘감사한 마음’이었다. 주어진 삶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느껴졌다. 소개 부탁드립니다. 성함과 언제, 어디서 태어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이창번이라고 합니다. 1934년 1월 17일생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90세가 되는 거예요. 참 안 믿겨져요. 평안남도 성천군 대구면 원평에서 태어났어요. 완전히 시골이에요.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장남이고 남동생이 3명이 있었어요. 아버님께서는 해방 후에 천도교 활동을 하시고 증조할아버지가 왜정 때부터 천도교를 하셨어요. 어릴 때 기억에 남는 일 있으세요? 어릴 때의 기억이, 겨울철에는 갓을 쓴 할아버지들이 매일 찾아오고 그래요. 요새는 집에 손님이 오시면 커피 대접을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추운 데 오시느라 고생하셨다고 활활 타는 화롯불을 내왔는데, 그게 대접이 됐어요. 그 화롯불을 들고 증조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는 게 저의 일이었어요. 그 방에 들어가면 갓을 쓴 그 할아버지들이 한 서너 명 앉아 있거든요. 그걸 갖다 놓으면 증조할아버지가, “그래, 이 어른이 이런 분들인데 인사드려라.” 하시며 인사를 시키셨거든요. 그럼 그냥 시키는 대로 엎드려서 절을 하잖아요. 근데 그때 놀라운 것은, 그 할아버지들이 앉아서 절을 안 받아요. 같이 일어나서 똑같이 나에게 절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왜 그렇게 우습던지 그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나한테 절을 하더라고. 아마도 그 당시 천도교인들의 모습이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어린애도 역시 한울님을 모신 존재로 그렇게 인정을 하는 거예요. 방에서 나와서는 동생하고 막 그 얘기를 하면서 웃던 생각이 나요. 증조할아버님께서 천도교를 하셨고 대를 이어 교인으로 살아오셨군요. 당시의 신앙생활에 대해 좀 들으신 이야기 있으세요? 내 증조할아버지의 함자는 이병근.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저는 늘 증조할아버지하고 잠자리도 같이 했고, 식사도 같이 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증조할머니는 할아버님께서 천도교 하신 것에 대해 상당히 못마땅했던 것 같아요. 증조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다니면서 늘 얘기하셨는데, “저 밭이 옛날에 우리 밭이었는데 네 할아비가 저거 팔아먹었다고”, “저 산도 우리 산이었는데 네 할아버지가 팔았다고.” 3.1운동 때 논밭 팔아서 전부 교회에 바쳤다는 것 같아요. 그걸 할머니는 그게 아주 못마땅하게 말씀하셨는데, 나보고도 절대 천도교는 해선 안 된다, 이런 뜻으로 말씀하셨어요. 근데 해방이 되고 나니까 아버지가 완전히 천도교에 몰두를 하기 시작을 해서 청우당 당위원장까지 하게 되니까 할머니가 그때는 그냥 완전히 손을 들고 말았죠. 평안남도 쪽에 동학이 들어오게 된 시기는 동학혁명 이후였는데, 동학혁명이 끝나고 난 다음에 그쪽에서 학살들이 심하니까 그때 피난 오다시피 올라왔는데, 3.1운동 때는 제일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했거든요. 틀림없이 할아버지가 어떤 직책을 맡았던 것만은 틀림없어요. 동네 인근 할아버지들이 찾아오는 걸 보면 뭔가 어떤 직책을 맡으셨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몰랐어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건 할아버지 책상 위에 <창건사>, <창건록>이라는 책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노상 그걸 뒤져보았거든요. 그때가 해방 이전이니까 40년대 초였을 거예요. 왜정시대 때의 기억은 거의 없지만요. 어릴 때의 가정에서의 살림살이는 어떠셨어요? 사는 것은 그때 그렇게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굶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땅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집에 땅이 있어서 (농작물)들어오는 게 있었고 산도 또 있었어요. 그 산에 밤나무가 많았던 기억이 나요. 생활하는 데 그렇게 어려운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왜정 때도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서기로 있었어요. 배급을 타고 그러니까 배를 곯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해방이 되고 나니까 북한에는 청우당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먼저 입당을 해서 활동을 하고 그러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께 일을 도맡기는 거예요. 그때는 천도교가 아니었고 먼저 청우당에 들어가는 거예요. 48년도쯤 되니까 교회에서 시일을 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전까지는 그런 것을 전혀 몰랐어요. 시일 보는 것도 모르고 청수 모시는 것도 몰랐고요. 그때 아버지가 청우당 면당 위원장을 할 때인데 47년도에 여기 남한에서는 동학혁명을 삼월 이십칠일 날 기념식을 했는데 북한에서는 일월 일일날 했어요. 그때 면에서 동학혁명 기념식을 국민학교 교정에서 했는데 한 300명 모이더라고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기념식을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 천도교의 교세가 더 확장되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때 해방되고 난 다음에 그 천도교가 다시 일어나게 된 동기는 결국 동학혁명한 게 있잖아요. 갑오년 동학혁명이요. 많은 사람들이 동학혁명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농민들이 반상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서 일어난 동학, 그리고 3.1운동, 이러한 국군운동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3.1운동을 천도교가 주도했다는 건 공산당도 다 아니까. 그 시절에 어떤 기관이 그런 걸 한 데가 있었겠어요. 노동당도 김일성이가 뭐 만주에서 빨치산 운동했다고 하지만은 그거는 별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그런 작용을 한 거예요. 천도교는 농민을 위한 정당이고 바로 구국의, 나라를 구하려고 했던 정당이라는 게 나타나니까 그게 선전이 된 거예요. 그때도 민주당은 있었어요. 조선민주당이 있었는데, 거기는 선전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근데 우리 천도교는 그게 아마 강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천도교에는 그때 문화운동-어린이 운동 등 천도교 청년당 조직의 당 활동을 해본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 사람들은 당에 가서 당 조직을 어떻게 만들고, 선전을 어떻게 했는지를 전부 체험했던 분들이기 때문에 공산당도 오히려 처음에 시작할 때 회의를 진행할 줄 몰라서 천도교 와서 배워갈 정도였어요. 회의 진행을 누가 해봤나요? 당시에 천도교인들은 다 지식인들이었잖아. 그리고 그때 당시에 또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천도교 활동을 하면서 그리고 이후에도 다 연결이 돼 있어요.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었으니까 활동할 수가 있어요. 노동당에 들어간 사람들은요, 농촌에서도 제일 불쌍하게 살던 사람들, 학대받고 살던 사람들이 노동당에 들기는 했지만 아무 지식이 없는 거예요. 동학혁명 기념식 때는 청우당 대표, 노동당 대표, 민주당 대표가 나와서 연설을 하는데, 천도교 대표는 그때 막 책상을 치면서 하는데, 노동당 대표는 연설문을 써 가지고 나와서 낭독을 하는데 뜨물뜨물해요. 지식이 없었으니까. 그때 그랬어요. 그러니까 청우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거예요. 해방이 되고 나서는 식민지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청우당에 가입을 했고, 청우당에서 뭔가 기대를 했겠죠. 민족 의지를 좀 불태우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1948년에 천도교 교인이 170만 명 정도가 됐던 거예요. 그러다가 1950년도 되니까 270만으로 늘어나요.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거죠. 그때 청우당의 기록을 보면 3.1운동 재현하는 것, 그리고 재현 운동으로 크게 활동을 하면서, 1948년 유엔총회서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을 실시해서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결의를 했거든요. 그래서 유엔 감시단이 나와서 선거를 하게 했는데 북한은 거절한 거예요. 감시단이 남한은 들어왔는데 북한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죠. 그렇게 되니까 할 수 없이 유엔에서 다시 결의를 하기를, 유엔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 먼저 한다, 그렇게 그해 5월 10일인가 선거를 하거든요. 그때 대한민국 정부가 8월 15일날 수립이 돼요. 북한도 곧 따로 선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민공화국을 새로 세우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걸 만들기 전에 남한의 최린 선생을 비롯한 천도교가 그 당시에 분열이 돼. 통일이 안 되면 이게 100년이 갈는지, 200년이 갈는지 모른다 이거야. 신라 백제가 통일할 때까지 천 년이 걸렸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런 문제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든 단독정부 수립은 안 되고 통일 정부 세워야 한다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3.1재현운동이에요. 그래서 그때 남한의 최린 선생 등이 북한에다가 지령을 보내 가지고 3월 1일날 남북한이 다시 한번 일어나자, 3.1운동을 다시 한번 일으키자 하는 재현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남한은 일어나질 않았어요. 북한만 가서 일을 하려고 여기에서 그때 오근 선생 선생 부인이 그 유은덕 여사인데 그분이 밀사로 올라가고 또 한 분, 박현화라는 분을 밀사로 보낸 거예요. 북한에서 온 분인데 그런데 박현화 이분은 지령문을 가지고서 평양까지 도착해서 전달을 하고 무사히 내려왔는데 오근 선생 부인, 유은덕 여사는 가다가 경비한테 발견이 되니까 도망을 치다가 그때 눈이 왔는데 신발 벗은 채로 도망을 치고 하룻밤을 그냥 굴속에 숨어 있다가 동상에 걸린 거예요. 그래서 평양을 가지 못하고 황해 도당위원장이 그때 김용환이라고 하는 분이 도당위원장인데 이분이 황해도 인민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었어요. 천도교 도당 위원장이면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는데 유은덕 여사의 남편이랑 같이 청년당 활동할 때 같이 활동했던 분이거든요. 그 집으로 찾아간 거예요. 그 평양으로 못 가고 그러고서 그때 평양 보낼 때 지령이, 이거는 김일대 선생 그러니까 평안남도 도당위원장 김일대 선생 외에는 절대로 이걸 전달하면 안 된다. 밝히면 안 된다. 해서 몸에 감추고 있으면서 그 안에서 얘기를 못한 거예요. 김용환 씨한테도 도당 위원장한테도 얘기를 못하고 아버님이 불편하다고 그래서 내 한 번 병문안 왔다가 이렇게 됐다고 그렇게만 속이고 있는데 근데 이제 이쪽에서 그 박현화 씨가 갔으니까 북한 천도교에서는 다 알았어요. 그 내용을. 그러면서 또 한 분이 올 거라고 했는데 오질 않거든요. 도당, 군당, 중앙당 회의에 갔는데 김용환 씨가 회의에 가서 이 사람(박현화씨) 고향이 평안북도 구성인가 그랬거든요. 구성 사람을 만나니까 당신 고향 사람 누가 우리 집에 와 있다고 그때 얘기가 그러니까 아, 유은덕 여사가 거기에 와 있구나. 그래서 그분이 돈을 가지고 내려가 가지고 밀사 지령을 다 갖고 있으니까 빨리 이제 남한으로 내려가라. 여기 있지 말고 내려가라고. 그때 공산당에서는 그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미행을 한 거예요. 그리로 가는 걸 알고 그 사람이 떠나자마자 체포를 해버렸어요. 그래서 이분은 그때 돌아가셨어요. 사형당해서. 그렇게 된 게 3.1재현운동이에요. 그때 천도교인 1만 8천 명이 구속됐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선생님 개인사를 좀 여쭤보면 언제 남쪽으로 내려오세요? 1950년 이제 6.25가 일어났죠. 그해 7월 8일날 나는 그때 양덕고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북한에서는 4월에 개학이 아니라 9월에 개학을 해요. 그래서 그때 8월 달이니까, 한참 졸업시험을 칠 때였어요. 시험을 치르는 동안에 어느 학교에서 인민군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학생증을 안 주니까 집에 갈 수가 없는 거예요. 북한에서는 공민증이 신분증인데 그때 우리는 학생증을 가지고 있었고 가는 데마다 검문소가 있어서 그것 없이는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시험 치고서 빨리 가려고 했는데 시험 치다 말고 갑자기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치더니 강당으로 가래요. 거기서 바로 군대로 가게 된 거예요. 학생들 전체가 다 간 거예요. 2학년, 3학년생들이. 1학년은 아니고. 그때 나는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집에 연락도 못하고, 그날 제가 시험 칠 때 가지고 있던 책갈피에다가 편지를 쓴 거예요. 동생과 아버지한테 편지를 써 가지고 책갈피에 넣고 평양으로 간다니까,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책갈피에 넣어 가지고 보따리에 책을 이만큼 싸가지고서 새벽에 우리 부락 앞을 지났는데 그 물길로 돼 있는 길에다가 책을 확 던지고 갔어요. 후에 월남한 사람한테 들으니까 그 책이 우리 집에 도착이 됐다고 그러더라고요. 편지를 동생들이랑 봤다고요. 그렇게 해서 내가 평양에 갔어요. 그럼 그때 바로 군에 입대를 하신 건가요? 바로 그 다음 날 원산으로 들어가서는 행군을 해서 삼척까지 내려갔습니다. 거기에서 입대를 했어요. 정식 부대에 9451육전대라고 하는 해병대예요. 거기서 입대를 해가지고 있다가 며칠 안 있어서 바로 또 올라와 가지고 원산 원부대가 거기에 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해병대예요. 거기 도착을 해서 한 10여 일 동안 있다가 바로 서울 쪽으로 나오기 시작을 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쭉 나오다가 낙동강 쪽에서 저지를 당하니까 인민군이 내려가다가 거기서 이제 왜관 있는 데서 혈전이 붙으니까 낙동강 도하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해병대니까 해병대 1개 대대를 그리로 보냈는데 내가 거기에 끼어 들어갔어요. 들어가서 생전 처음 전쟁이라는 걸 하게 되었습니다. 17살, 18살 때예요. 최전방에 가니까 인민군은 벌써 낙동강을 건너갔더라고 그리고 3일 후에 반격을 하고 쫓겨오기 시작하는데 우리 진지에 떨어지는 포탄 파편을 맞은 거예요. 저도 파편 맞아가지고 허벅지 다리에 피가 그냥 흐르는데.. 그래서 광주로 호송되어 간 거예요. 광주로 가니까 우리 원부대가 광주에 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약이 없는 거예요. 호송되는 것도 엠뷸런스를 타고 후송을 하는 게 아니라, 밤에 이쪽 부락에서 저쪽 부락으로 연결을 하고 그런 식으로 이동을 하는 거예요. 한 3~4일인가 지나고 나서야 광주에 도착했는데 바로 우리 부대가 있더라고요. 여단 사령부에 가서는 후퇴하기 시작했어요. 인천 상륙하는 바람에. 그때가 50년도 9월 달이에요. 그리고 내가 포로된 게 10월 8일날이니까 석 달 동안 인민군 생활을 한 거죠. 인민군 생활은 어땠어요? 그리고 어떻게 포로가 되셨나요? 인민군 생활은 그렇게 어렵진 않았어요. 그때 당시에는 한창 승리해서 내려갈 때니까 훈련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서 소총알 세 발 쏴보고 전방에 투입이 되니 잘 싸우지 못해요. 후퇴하다가 바로 귀순해버리고 말았어요. 부대에서 이탈해서 귀순해 나와서는 포로가 돼서 부산으로 갔죠. 포로 수용소로 간다는 건 몰랐어요. 포로수용소라는 그 말 자체도 몰랐어요. 그저 귀순하게 되면 그냥 끝난 줄 알았어요. 총만 뺏고 그냥 보내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수용소 생활을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이후로 시작된 수용소 생활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거기 가니까 낙동강에서부터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인천 상륙 후 포위되어 포로들이 무더기로 들어오는 거예요. 수용소도 미처 짓지 못한 상황이었고요. 처음에는 포로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모르고 수용소를 만들어 놨는데 감당을 못한 정도로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을 하는 거야 포로들이. 그러니까 그 옆에도 수용소를 만들고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거제도에다가 만들기 시작했어요. 너무 많이 모이니까. 그때 거의 7~8만 명 정도가 포로가 되어 들어왔으니까. 거제수용소는 골짜기예요. 제법 넓은. 60수용소 70수용소, 80수용소, 90수용소 이렇게 4개 수용소가 있었어요. 그리고 수용소마다 91, 92, 93, 94, 95 이렇게 나오거든요. 나는 78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70수용소 중 78번수용소에 들어갔는데 여기 들어가니까 완전히 빨갱이 수용소지. 인민군들이 있는. 처음에 들어가서 제가 놀란 게. 들어가니까 밖으로 북한에 민주 선전실에 들어간 것처럼 김일성 초상화를 연필로 그려서 붙여놓고 그런 상태예요. 거기 있다 죽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여기는 안 되겠다 해서 그때 기독교인들이 선교사들한테 탈출한다고 약속을 했던 모양이에요. 이 사람들 탈출할 때 같이 탈출한 거예요. 탈출해 가지고 갔는데 91수용소로 배치가 됐어요. 거기서 그 이동찬 선생을 그때 만나게 된 거예요. 감찰대 부대장을 했는데 거기에 가니까 빨갱이 수용소에서 온 놈들이라고, 여름철 8월 달인데 옷을 그냥 팬티까지 싹 벗겨요. 홀랑 벗겨가지고 조사를 하는데. 무슨 지령문 가지고 온 게 있나 그거 본다고요. 한 사람씩 감찰대에 끌고 들어가서 심사를 받는데 북한에서 심사를 한다는 건 고향이라든가 입대는 언제 했느냐, 어디에서 귀순했냐 뭐 이런 것들이에요. 북한에서 무슨 당에 들었냐고 물어서 천도교 청우당에 있었다고 그 얘기했더니 감찰대 부대장 그 양반 이동찬 씨가 뒤에 있다가, “너 천도교했어?” 묻더라고. “예, 천도교 했습니다.” 그랬더니 물어보는 게, 1세 교조가 누구야? 이거 물어봐 수운대신사입니다. 말했지. 2세 교조는 누구야? 또 물어봐. 해월신사입니다. 라고 또 답했지. 3세까지 물어보더라고. 의암성사라고 했더니 “아. 이 새끼 진짜 하나 왔네” 그러더라고. 참 드라마틱한 순간이네요. 선생님이 천도교인이라는 걸 밝히고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인데, 이후엔 수용소 생활이 어땠습니까? 난 그때부터 심사는 안 받았어요. 천도교인이라니까 봐주기 시작을 해서, ‘쇼리’라고 해요. 당번병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땐 식사가 좀 적어가지고 배가 고팠거든. 한창 먹을 때니까 배가 고파. 그런데 감찰대에 있으니까 마음대로 먹는 거예요. 내가 가서 밥을 타오는 당번병 노릇을 하고 그랬으니까. 그때 2대대 경비대는 모두 천도교인들만 모인 거예요. 계시던 분 중에는 연대통역관으로 있던 사람이 안명록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미군 사령관 통역을 하고 있으니까 그분이 지금 살아계세요. 그래서 당산교구에서 나하고 같이 활동하고 그랬던 분이에요. 그때 계셨던 수용소가 어디었는지, 또 그 안에서의 일들 기억하세요? 65수용소에 있다가 78수용소 2대대에 갔다가 다시 그다음에 91 수용소로 가서 감찰대로 떨어진 거예요. 감찰대가 당번병으로요. 그때 2대대가 천도교인들만 모여 있었기 때문에 시일이면 시일식을 보러 그리로 갔어요. 그때 경비대장으로 있던 분이 이창근 씨라고 하는 분이 여기에 나와서 시흥교구장을 했어요. 석방돼서 나와서 시흥교구장을 했는데 거기에 이제 김월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영복 교령님이 교령할 때 감찰 상임감사로 계셨고요. 그다음에 그 황승훈 씨라고 하는 분이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데 이분도 역시 천도교 경전을 거의 외웠던 분이에요. 선생님, 그러면 그 수용소 안에서는 천도교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됐어요? 본인이 천도교인이라고 이렇게 밝히고 밝혀지고 알려지는 계기가 있었나요? 빨갱이 수용소에서는 거의 몰라요. 그때는 자기 신분을 절대 밝히지 않았어요. 내가 그때 신분이 노출될 것 같아서 그 기독교인들 탈출하는데 같이 끼어서 나온 거예요. 북한에서 천도교를 했다는 게 알려지면 박해를 받을 것 같았거든요. 거기서는 밝힐 수가 없었어요. 나하고 같이 자는 사람은 내가 천도교인이라는 걸 알았어요. 같이 자면서 그 양반이 천주교 신자가 됐는데 그분이 자꾸 천주교로 오라고 그러는 바람에 내가 그때 난 천도교에 있다고 그 얘기를 했지요. 나도 그 천주교회 신앙하는데엘 몇 번 나가봤어요. 그때 수용소에는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가지고 성경을 수없이 뿌렸어요. 그때 마가복음, 누가복음 이런 것들을 단행본으로 찍어 가지고 그걸 돌리고 그랬거든요. (계속) 인터뷰영상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UMIi5P5Dfqg
-
조동원 종법사님을 만나다(3)<지난 호에 이어> 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던 날이었다. 홍천에 있는 가리산수도원으로 조동원 종법사를 만나러 갔다. 조동원 종법사는 1926년 평북 구성에서 타어나 19세에 우암 김동화 선생(1987년 환원)과 혼인하면서 천도교인이 되었다. 선생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극한 정성과 수련으로 천도교의 참진리를 깨닫게 되며 자기완성과 함께 많은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으로서 교단 발전에 기여해왔다. 가리산수도원은 1982년 8월에 작고하신 남편 김동화 선생과 함께 창설하여 현재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도교인이라면 한번쯤 깊은 수련의 참된 경험을 안겨준 성지로서의 기능을 해 왔다. 1925년 평안북도 구성군 이현면 진도동 참새골에서 태어난 조동원 종법사는 아버지 조만경, 어머니 김문채 사이에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오십 리 밖에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다니지 못했다. 길쌈과 바느질 등의 일을 배우며 18세가 되어 열 여섯 살이 많은 천도교인 故김동화 선생과 혼인한다. 일제강점기와 전쟁기의 상흔 속에서 살아왔다. 천도교의 진리를 깨닫고 수련을 이어나가며 수도자의 길을 걸어왔다. 절망의 순간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피워 올리기 위해 염주알을 손에 쥐고 주문을 외웠던 삶의 길이 촘촘히 수도원 가는 길에 이어졌다. 인생은 때로 너무 짧다. 전쟁이 일어났지. 6.25 때야 뭐 말도 못하게 죽을 고비 다 겪었어요. 스물세 살에 남편을 따라 월남을 했습니다. 삼팔선을 넘어왔지요. 남편이 몇 달 먼저 월남하시고 내가 뒤따라 왔어. 그때 북한은 공산당이 독재를 할 때였어. 살 수가 없는 거야. 삼팔선을 넘어 남한 땅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지. 남편을 만나러 춘천으로 갔어요. 가는 길도 순탄치는 않았지요. 월남해서 춘천에서 지내던 어느 날 밤 춘천 시내에 포가 떨어져요. 밤새 총소리가 나더니만 아침에 공산당이 춘천에 점령했어요. 방공호에 숨었지. 사흘을 있었어. 인민군이 집까지 쳐들어와서는 사람들을 끌고 나와서는 방공호로 쳐 넣어서 따발총으로 쏘았지.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죽었어. 피난을 가다가, 첫 아기 낳은 거를 안고 있었는데, 애가 죽었어. 두 살된 첫아기가. 방공호 속에서 남편을 찾았지. 이렇게 살펴보니까 문턱에 염주를 두른 팔뚝이 보이더라고. 아, 저기다 하고서는 죽은 사람을 막 비집고 나가서 팔을 탁 쳐드니까, 눈을 반짝 뜨면서 날 더러 죽은 이처럼 하고 가만히 있으래요. 그래서 아이고, 남편이 살아있으면 됐다, 하고서는 아이 있던 자리로 돌아와서 죽은 애를 안아 올렸더니, 피가 주르르 흘려. 그 자리에서 염주를 올려놓고 정신 빠지게 주문만 외웠지. 밖에서 소리치는 여자가 하는 말이 “공산당이 사람 살리려고 나왔지 사람 죽일려고 나온 줄 아느냐”고 말이야. 공산당들이 나더러 남편 내놓으라, 그래. 남편 돌아가시고 애들만 데리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더니 거짓말이라면서 총을 갖다가 가슴에 대고 쏘려고 하더라고. 그런데 총알이 안 나가는 거야. 그러는데 대문이 열리더니 중국 군인이 총을 메고 들어오는 거야. 총을 겨누고 있던 사람이 총을 빼앗겼지. 그런 순간들마다 주문을 외웠어. 그러니까 주문을 많이 외우니까 한울님이 살려주는 거라. 한울님이 ‘오늘은 콩밭으로 나가라.’ 하시거든. 그 말씀에 따라 콩밭으로 나가면 집에 와서 천장에 총을 쏘았어. 그리고 다른 날 콩밭에 가 있으면 한울님이 ‘오늘은 들어가라’, 하시거든. 그러면 콩밭에 와서 사람들을 다 잡아갔어. 그렇게 안 죽고 살았어요. 그때 생각을 하면 말로 다 못해. 옛날 어른들 하는 말이 염주만 두르고 있으면 난리가 나도 안 죽고 산다고 했어요. 피난길에 남편이 죽은 줄 알았어. 그런데 이 양반이 깨진 얼음을 타고서 건너와서 안 죽고 살아왔어. 거기서 붙들고 울고 염주 때문에 살아왔다고 했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염주 때문에 살아서 돌아온 거야. 남편은 수도원을 차려놓고 3년 만에 돌아가셨어. 일흔 아홉에. 천도교 믿는 사람들은 모든 걸 내가 해야 할 수련으로 해야해. 내 하는 모든 것이 도가 되기 때문에 일용 행사가 도야. 밥을 할 때도 쌀 다섯 번씩 씻으라고 하잖아요. 쌀을 다섯 번씩 씻어서, 안칠 적에 잘 되게 해달라고 심고하고, 밥 풀적에 심고, 먹을 때 또 심고, 다 먹고 나서 심고. 하여튼 심고를 수십 번 해야 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뭐 지금도 누가 뭐 사업이 안 된다고 하면 심고를 해요. 또 부화부순이 안 된다, 암에 걸렸다, 그런 말을 들으면 그냥 심고부터 하는 거야. 그렇게 심고를 부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심고 드리는 사람은 셀 수가 없어.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다리를 못 쓰니까, 어떻게 보면 심고 드리는 것이 내게 주어진 한울님 뜻 같아. 그것밖에 이루어질 수가 없는 거야. 제가 유방암에 걸렸을 때도, 수련을 했어요. 저는 화악산에 가서 수련을 하면서 유방암을 다 고쳤어요. 병원에서, 조동원이는 사람 못 될 거라고 그랬대. 아휴 말도 못해. 하여튼 도 닦는 일을 그저 열심히, 일용행사로 해야 해요. 딴 거 없어. 남의 말 듣고서 그렇게 되려고도 하지 말고, 내가 가정에서 으뜸가는 한 식구가 돼야 해. 내가 일용 행사를 잘하면 그 자리에 들어가고 못 하면 못 들어가는 거야. 남이야 떡을 먹든지 밥을 먹든지 남의 말 하지 말고 이목구비 사지백태 오장육부만 하나 하나 잘 간직하면 돼요. 그거는 남이 훔쳐가질 못해. 이거 못 훔쳐가. 물질이 많으면 훔쳐가죠. 말도 못해. 그러니까 묵묵부답하고 닦아도 묵묵부답하고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 한울님으로 대해줘야 해. 다 한울님이지. 한울님 아닌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가리지 말고 다 일체 똑같이 대해주세요. 내 손에 귀중한 게 있다고 합시다. 먹는 거라든가, 물건이라든가 내 손에 생겨서 누군가에게 갖다 주려면, 내 자식보다 남의 자식에게 더 많이 줄 마음이 생겨야 해. 내 자식은 조금 줘도, 남의 자식 많이 주고. 내 부모를 조금 드려도, 남의 부모에게 많이 드리고. 마음을 그렇게 쓰도록 바꿔줘야지. 그거 바꾸지 못하면 주문 암만 외워도 안 되고 경전을 암만 봐도 입에서만 달달 외우지 소용이 없어. 정답으로 들어가야 해. 천도교를 왜 해야 하냐? 천도교를 해서 한울님을 찾아야지. 그리고 한울님을 찾는 것보다도 내가 바로 잘해야 해. 이목구비 사지백태, 오장육부를 똑바로 잘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딴 거는 다 저절로 돼요. 범인들도 밥 먹고 나면 배부른 거 알고, 배고픈 거 알고 화장실에 가는 거 알잖아요. 알고 가잖아요. 그거는 저절로 다 알고서 느껴서 가는 거지. 도를 제대로 닦으면 그걸 느껴서 알고 가는 것처럼 매사 이래, 몸으로 느껴져. 그렇게 몸으로 느껴서 알게 되는 거야. 그리고, 중요한 것 또 하나는 남의 비밀은 말하지 말라. 지켜줘라. 나는 평생 천도교를 했어요. 내가 죽기 전에 후학들에게 왜 천도교를 해야 되는가? 이 천도교의 진리에 대해 말해주고 싶어요. 천도의 진리는 내가 깨달은 게 진리야. 내가 사람 되는 게 진리야. 하늘 사람 되는 게 진리야. 그거 안 되면 껍데기를 찾는 거지. 내가 아무리 배운 글이 없고 무식해도 내가 한울님을 위하는 마음, 식구들을 위하는 마음 그거는 알고 진리를 찾는 거지. 딴 게 없어. 그게 도야. 우리는 다 한울님 은덕으로 먹고 살아요. 땅에 실려서 하늘이 덮어주잖아. 그게 바로 땅은 어머니고 하늘은 아버지야. 그러니까 항상 어머니, 아버지를 찾아야 해요. 내 엄마 아버지도 돌아가셔서 한울님한테 합해진 거야. 그러니까 천지부모로 엄마, 아빠 찾으면 나를 낳아준 엄마도 거기 다 들어가는 거야. 그러니까 엄마를 못 봐도 항상 어머니 아버지 감응해 주시옵소서. 하고 심고를 드리는 거지. 종법사님이 마음에 품었던 스승님 말씀이 뭐였어요? 마음에 품은 스승님의 말씀은 제일 먼저 그거지. 내가 일용 행사를 잘 해야 한다. 첫째 부화부순 부모 잘 모시는 것 그거를 100점 만점으로 해야 된다 이거야. 부화부순도 100점, 부모님 모시는 것도 100점, 자식들 키우는데 때리고 욕하고 그러지 말라. 어린아이는 한울님이기 때문에, 한울님을 못 쓰게 된다. 애 때리면 죽는다. 내수도문에 다 있잖아요. 『탄도유심급』에 마음을 닦아야 덕을 알고, 덕을 오직 밝히는 것이 도니라. 덕에 있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믿음에 있고 공부에 있는 것이 아니요, 가까운 데 있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정성에 있고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은 듯하나 그러하고 먼 듯하나 멀지 아니하니라. 종법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지상천국은 어떤 모습인가요? 지상천국? 지상천국이 여기가 천국이여 이게 천국이여 그러면 여기서 천당을 찾아야지. 여기서 천당을 못 찾으면은 저 세상에는 천당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 그러니까 있다 하면 여기서 천당 찾은 사람이 거기 갈 수 있고 천당 못 찾은 사람이 있어도 못 가. 그러니까 여기서 천당 차원을 찾아야 돼요. 나 하나 다 닦아라. 한울님으로 닦아 놓으면은, 그러니까 다른 거 여러 가지 자꾸 생각할 거 없고 사심을 버리고 천심으로 발을 디디면 돼. 천심으로. 모든 게 내 말대로 전부 내 것이지, 다 남의 것이 아니야. 부모도 내 부모, 다 내 형제니까 언제든지 욕심 버리고 남을 미워하는 거 버리고 그것만 따라가면 되는 거야. 그래서 주문을 많이 외우고 주문 외워서 저절로 열어줘야지. 내가 반드시 열겠다. 이런 생각하지 말고 내가 부지런히. 생활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내 식구들한테 열심히 해주고 그게 도지 딴 게 도가 아니여 은성당 조동원 가리산수도원 원장 약력 포덕 67년 평안북도 구성군 이현면 진도동 출생 포덕 86년 우암 김동화 선도사와 혼인 포덕 88년 38선은 넘어 월남, 강원도 춘천에 정착 포덕 103년 충청남도 대덕군 탄동면으로 이주, 우암 김동화 선도사와 탄동전교실 운영 포덕 109년 충청남도 대덕군 유성읍으로 이주, 우암 김동화 선도사와 유성전교실 운영 포덕 110년 천도교종학원 수료, 유성전교실 전교사 포덕 115년 부산시 광안리로 이주 포덕 118년 강원도 홍천으로 이주, 홍천전교실 운영 포덕 120~포덕123년 3년간 독공수련 포덕 123년 가리산수도원 개원, 초대 원장 취임 포덕 128년 남편인 우암 김동화 선도사 환원(향년 79세) 포덕 134년 천도교 금강포 연원회 도훈 포덕 143년 가리산수도원 개원 20주년 포덕 153년 가리산수도원 개원 30주년 포덕 163년 가리산수도원 개원 40주년 <끝> 인터뷰영상 바로가기==>http://www.youtube.com/watch?v=JPTR63nSXFo&t=1s
-
은성당 조동원 종법사님을 만나다(2)(지난 호에 이어) 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던 날이었다. 홍천에 있는 가리산수도원으로 조동원 종법사를 만나러 갔다. 조동원 종법사는 1926년 평북 구성에서 타어나 19세에 우암 김동화 선생(1987년 환원)과 혼인하면서 천도교인이 되었다. 선생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극한 정성과 수련으로 천도교의 참진리를 깨닫게 되며 자기완성과 함께 많은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으로서 교단 발전에 기여해왔다. 가리산수도원은 1982년 8월에 작고하신 남편 김동화 선생과 함께 창설하여 현재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도교인이라면 한번쯤 깊은 수련의 참된 경험을 안겨준 성지로서의 기능을 해 왔다. 부화부순, 남편은 하늘이요, 아내는 땅이니까 첫째 부화부순을 잘해야 천지가 합일이 되겠죠. 천지 합일이 못 되면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부화부순이 못 되면 그 집안은 잘 될 수가 없는 거야. 내가 하나 닦으려고 하는 건 쉬운 거지. 눈에 보이는 건 소용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정에서 부모는 부모의 도리, 자식은 자식의 도리,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다 남의 부모가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 똑같은 마음을 가져야죠. 저는 잘 못하면서 남들 잘하라고 그러면 욕밖에 더 먹는 거 없어요. 그러니까 가정에서 행복을 찾은 사람은 밖에 나가도 행복해. 언제든지 웃는 모습으로, 항상 웃어야 해요. 화가 난 얼굴로 무섭게 보이면 한울님이 감응을 안 하시거든요. 한울님이 감응할 수 있도록 나부터 공부를 하자. 나부터 닦고, 내가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나는 후학들에게 어려운 도를 닦으라고 하지 않아요. 춘하추동 사시절 농사꾼들은 제대로 도를 닦는 거예요. 봄이 오면 심고, 여름이 오면 가꾸고, 가을이 오면 거둬들이는 것. 하늘이 비를 주고 해를 주니 모든 것을 하늘과 땅이 먹여주고 입혀주는 걸 잘 모르는 거예요. 우리 도 닦는 사람은 앞으로 많은 지도자로 성장해서 후학들에게 바르게 가르쳐 줘야 합니다. 이 늙은이보다야 젊은이들이 더 잘하겠지마는 경전 하나 하나를 먼저 다 외워야 해요. 지극한 정성, 그리고 마음을 바로 하는 데 있어요. 마음을 똑바로 해야 해요. 지금은 서울을 차로 가지만 옛날엔 걸어서 다녔거든요. 서울 가는 길을, 대전으로 갈 수 있고 춘천으로 갈 수 있어요. 이게 바로 만 길이예요. 만 길이 흩어지는 것, 지금 치매 걸린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입버릇, 눈버릇, 귓버릇을 다 잘못 쓴 거예요. 지금부터 바른 현실의 공부를 택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하여튼, 스승님의 말씀은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닦아야 덕을 알고 덕을 오로지 밝히는 것이 도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많이 들어도 소용없어요. 한두 가지 들어서 그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전부가 아닌 게 없기 때문에 식사할 때도 내 마음에 꼭 맞게 식사를 해야지 지나치게 먹으면 배탈이 나고 위장병이 생기거든요. 그러니까 말도, 그대로 실천을 하게끔 해야지 말만 많이 해준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실천을 해서 앞으로의 대덕의 큰 일꾼들이 돼 주시기를 간절히 저는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게 소원입니다. (환원하신 남편분과 함께 수도원을 세우시고 신앙생활도 하신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우리 우리 부부는요 나이가 차이가 많이 집니다. 결혼할 때 우리 신랑님은 36세, 저는 19세였어요. 그때는 왜정시대예요. 왜정시대에는 처녀 공출을 했습니다. 구성군 이원면 진도에서 제가 공출에 들어갔어요. 빨리 결혼을 하면은 공출에 면제가 된다고 해서 결혼을 했어요. 남편은 천도교를 했거든요. 천도교인이에요. 저는 예수 믿었지요. 예수를 믿으면서 천도교 믿는 집에 갈 수가 없지, 안 가지. 그런데 그 급한 상황이니까 그때 처녀 공출을 가면 처녀 껍데기를 까서 그걸로 탑을..(세운다고) 그렇게 하면 전쟁에 이긴다고요. 그러니까 결혼 상대가 늙었거나, 젊었거나, 바보거나 가릴 새가 없었던 거예요. 결혼을 해가지고 제가 왜놈 때문에 내가 영감한테 시집갔다고 그렇게 일본사람들 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천도교 믿는 사람한테 시집을 와가지고 천도교를 배우고 몰랐던 글을 배우고 그랬어요. 남편이 경전을 배워주면서, 몰라도 몸으로 실천을 하면 다 알게 된다고, 그렇게 가르쳐줘서 그때부터 주문을 많이 외웠어요. 남편 말이 한울님이 몸에 베어서 전부 가르쳐 준다고요. 그 말을 듣고 경전을 배우고 한문도 배우고, 책을 한 권 한 권 다 배웠습니다. 그렇게 가르쳐주신 분이 남편이에요. 거기서부터 천도교에 재미를 붙여가지고 나중에는 일본사람 욕을 안 하게 되었어요. 너희 때문에 내가 천도교를 찾았다. 이렇게 마음을 바꿔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어느새 세월이 가서 이제는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하고 싶은 데도 못 가서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떠나기 전에 앞으로 진실한 천도교인이 좀 돼 주기를, 부탁을 좀 하고 싶습니다. 수련을 하다 보면, 하품이 자꾸 나잖아요. 하품이 나는 이유를 알아야 해요. 몸 속에 찌꺼기가 빠져나오는 겁니다. 눈 감고 속으로 주문을 외우면 자꾸 눈물이 줄줄 나옵니다. 눈에 청소를 하는 겁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자세를 똑바로 하고 한울님께 어머니, 아버지 저를 잘 자게 해주셔서 잘 잤습니다. 심고 드리고 오늘 하루 모든 일을 잘 되게 해달라고 심고 드리고 거기 앉은 자리에서 경전 두 페이지를 읽어요. 그리고, 오늘 하루에 그대로 실천에 옮기게 해주옵소서, 하죠. 지금 제가 나이 100살이 다 되었는데 이제 뭘 옮기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닌데, 지금도 하고 있어요. 내가 잊어버리지 않아야 후학들에게 한마디라도 더 해주지 않겠는가 싶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나는 배운 글이 없어요. 일자무식이라도 몸부터 닦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잘들 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제 남편은 천도교를 열심히 하신 분인데, 중국에 가서 대학까지 다녔지요. 저와 결혼하기 전에 상처를 했고, 나는 공출에 들어가게 생겼으니까 급하게 결혼을 했지요. 남편은 천도교 잘해서 장가 잘 들었다고 하고, 나는 그런 분을 만난 거예요. 우리는 한울님 덕을 본 거죠. 당신도 한울님 덕을 봤지만 나도 한울님 덕 봤다고요. 저 시집을 가서 보니까, 시댁이 큰 부잣집이야. 남편의 형제가 오형제인데, 산에 가서 우물을 파고 조그마한 동이를 이고 가서 청수물을 떠 가지고 와서 밖에다 선반을 매놓고 거기다 올려놓고 9시가 되면 저에게 “동서, 가서 청수 물 떠 와라.” 그렇게 말해요. 청수 모셔오라고요. 큰 독이 몇 개 있었고 그 독을 쭉 돌려놓으면 그 독에다 물을 다 길어다 놓아야 해요. 아니 물이 저렇게 많은데 왜 산에 가서 청수물을 새로 떠다가 놓지? 그때까지는 모르니까 물이 뭐가 다른가 싶어서 청수 그릇을 가지고 뚜껑을 떠서 내가 먼저 먹어봤는데 ‘그 물이 그 물이지. 똑같은 물인데 이 사람들이 미쳤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청수물을 잘 떠서 갖다 모셔다 드리고 했어요. 그렇게 한 이십 일. 시집가서 이제 막 한 달쯤 지나갔는데, 내가 예수에 미쳤던 사람인데 천도교에 미치려면은 어떻게 미쳐야 됩니까? 남편에게 물어봤더니, 독공수련을 좀 해야 된다고 해. 그래서 독공수련에 들어갔어요. 시집은 큰 부잣집이니까 큰 창고가 있어요. 창고에 판대기 문을 해서 닫고 거기에서 시집 갈 때 해 간 병풍을 치고 돗자리를 깔아놓고 촛불을 켜놓고 거기서 수련 20일만 해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저녁을 해먹고 설거지를 다 하고서는 창고에 가서 문을 꼭 닫고 촛불 켜놓고 청수물 떠 가지고 그리 들어가는 건데 한번 찾아보자. 열 사흘 만에 관을 쓴 할아버지가 탁 나타나는 거예요. 무서워서 눈을 딱 떴어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없어져요. 왜 할아버지가 보일까 그러고서는 또 눈을 감고서 염주알을 105회 또 돌렸는데 할아버지가 또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염주를 내려놓고 촛불을 끄고서는 방에 들어가 가지고 남편한테 그 얘기를 하니까, “대신사님을 본 것 같소.” 하시는 거예요. 집에 대선생님 사진이 있었거든요. 남편이 사진을 펴 놓으면서, 이 분이냐고 물어봐요. “맞아요, 이 영감이에요.” 남편이 무서워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했어요. 그때 집에서는 명주를 두드려서 바지 저고리 바느질을 하고 그랬는데, 남편이 궂은일, 힘든 일을 더 많이 하라고. 그래야 깨닫는다고 해요. 그런데 동서들이 제가 궂은일을 하려고 하면 쫓아내는 거예요. 들어가서 바느질이나 하라고요. 하지만 남편한테 들은 말 때문에 나는 편안히 앉아서 바느질이나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날은 춥고 눈이 쌓여서 푹푹 빠지는데 저고리에 솜을 넣고 머리에 쓰는 수건에도 솜을 넣고 일을 합니다. 그렇게 추웠어요. 우리가 살던 평안북도가 소변을 누면 얼 정도로 그렇게 추웠어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편안히 있어서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의 일과는 저녁 9시 기도식을 하고 나서 오 형제가 돌려 앉아서는 삼을 삼아요. 그러다가 12시가 되면 방방으로 들어가서 다 자거든요. 그때 내가 새벽에 물을 길어 왔어요. 독에다가 물지게를 지고 갔다 와서 붓고 거기서부터 내가 결심을 하고서는 독들을 다 열어놓고 물지게 지고 일곱 지게 여덟 지게 졌어요. 뚜껑을 갖다 씌어놓고 방에 들어가면 남편이 추운 데 나가서 고생했다고, 이불 덮어주고 그랬어요. 내가 잘해야 복을 받는다. 이게 복이로구나 그러니까 남편한테도 사랑을 받는 구나 싶었어요. 맏동서님이 또 내가 물을 길어 온 것을 알고는 아이고, 그러면 되느냐고, 나를 끌고 방으로 들여 보내고는 밖에서 잠궈요. 자라고요, 맏동서가 밥 다 하고는 다 차려놓고 밥 먹자고 하는데, 아 그때 그걸 깨달은 거예요. 내가 잘하면 복을 받는구나, 내가 잘하니까 맏동서가 이렇게 사랑해주는구나 하면서 그때부터 실제로 현실이 도로구나 하는 걸 내가 알은 거야. 현실이 도지 현실이 아닌 무형을 따라가면 안 돼요. 밤에 달밤에 나가보세요. 달밤에 나가면 내 그림자가 있잖아요. 실제인 사람한테 가 물어야 답이 있지. 내 그림자 앞에 가서 물으면 답이 없어요. 내가 혼자 수련을 하는 것이 그래요. 무형으로 보는 것은 그림자와 같아요. 소용없는 것, 허공에 빠지는 겁니다. 그러니 후학들은 앞으로 그런 데 빠지지 말고 실제로 하시고, 실제로 남의 부모도 내 부모 남의 형제도 내 형제 남의 아들 내 아들 마음으로 진짜 그렇게 먹고, 그러면 머지않아서 천사문답으로, 모두 한울님의 뜻으로 돌아옵니다. <다음에서 계속> 인터뷰영상 바로가기==>http://www.youtube.com/watch?v=JPTR63nSXFo&t=1s
-
은성당 조동원 종법사님을 만나다(1)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던 날이었다. 홍천에 있는 가리산수도원으로 조동원 종법사를 만나러 갔다. 조동원 종법사는 1926년 평북 구성에서 타어나 19세에 우암 김동화 선생(1987년 환원)과 혼인하면서 천도교인이 되었다. 선생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극한 정성과 수련으로 천도교의 참진리를 깨닫게 되며 자기완성과 함께 많은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으로서 교단 발전에 기여해왔다. 가리산수도원은 1982년 8월에 작고하신 남편 김동화 선생과 함께 창설하여 현재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도교인이라면 한번쯤 깊은 수련의 참된 경험을 안겨준 성지로서의 기능을 해 왔다. 글쓴이가 선생의 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간 날,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더 깊은 질문을 향하게 되었다. 이날 조동원 종법사님의 말씀을 옮겨 적으며 선생이 살아오신 삶을 상상해보며 긴 호흡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제가 이제는 떠나기 전에 우리 후학들에게 간곡히 한 말씀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수도원 원장으로서, 하루에 40명, 50명, 60명까지 지도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바르게 수도를 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어요. 내가 밝아지는 것부터 원하니 그게 틀렸거든요. 내 마음부터 고쳐야 합니다. 이 마음속에 한울님이 계시거든요. 그러니까 마음을 잘 닦아서 성령과 쌍령이 돼야 해요. 스승님께서 경전으로 말씀을 다 하셨습니다. 탄도유심급을 보면 아주 구체적으로 정답까지 다 나와 있습니다. 천지부모님 편, 내수도문 편, 거기 전부 정답이 있어요. 그러니까 딴 거보다도 그 세 편은 반드시 외워야 합니다. 입으로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라 거기 정답이 나와 있어요. 그 정답을 그대로,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하거든요. 그걸 그렇게 가르쳐 주어야 하고 수도생은 그 정답에 따라야 하는데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무슨 수도를 얼마나 했다, 경전을 얼마를 봤다는 것을 내세우려고만 했지, 자기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다 이거요. 지금 우리 천도교가 쇠운이거든요. 우리 스승님께서 참 참혹스럽게 그 고생을 하시고 돌아가셨지요. 편안히 잘 가실 수 있는 능력이 다 있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돌아가셨느냐, 앞으로의 천도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가신 거거든요. 앞으로 천도 세상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후학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큰데, 경전에 정답이 다 나와 있다고 했잖아요. 남의 부모도 내 부모요, 남의 형제도 내 형제요, 남의 자식도 내 자식이요. 이런 마음으로 내 자식, 내 형제, 내 부모를 같은 머리, 같은 생각으로 대해야 남의 부모도 내 부모한테 하듯이 하거든요. 그래서 그 실천의 길을 간곡히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57세에 수도원 개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100살이 다 되어 가는데 책 한 권을 못 냈습니다. 제가 일자무식이에요. 저 국민학교도 못 다닌 사람입니다. 책을 한 권 못 내고 말로써, 그러나 많은 말이 필요 없고 간단히 스승님의 말씀을 배워가지고 스승님과 같이 실천에 옮겨 달라. 얼마 안 있으면 우리 천도세상 된다.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춘하추동 사시절이 현실이 그게 도입니다. 봄에는 씨앗 뿌리고, 심어야죠. 부지런히 하는 사람은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거고, 게으른 사람들은 못 해요. 우리가 도를 닦는다고 하면, 현실이 도지 그냥 눈으로 허깨비를 보는 거, 들리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 (지도하는 입장에서)이를 절실히 끊어주지 못한 것은 참 후회가 됩니다. 발령받은 사람은 많은데 발령받으면 도를 깨달아서 사람이 변화가 돼야 하거든요. 선생들이 잘 가르쳐야 하는 겁니다. 제가 전국에 안 다니는 데가 없이 참 부지런히 다니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면서는 이런 이야기를 주로 했습니다. 제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다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셨다고 어머니, 아버지를 안 찾는 게 아닙니다. 땅은 어머니요, 하늘은 아버지요. 천지 부모님이 내 부모입니다. 그래서 심고 드릴 때, “어머니, 아버지 잘 좀 가르쳐 주세요.” 그렇게 부탁을 해요. 저는 ‘한울님’, ‘천지부모님’이라고 하지 않고 ‘어머니, 아버지라고 그럽니다. 경전에 천지 부모 편을 보세요. 천지 부모님의 부모랑 내 부모가 같다고 정답이 나와 있어요. 정답대로 내가 실천을 해서 하면 내 몸에 모신 한울님이 전부 가르쳐줘요. 천사 문답이라고 하죠. “어머니 아버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면은 정답이 나와요. 또 이것만 기다리고 하지 말고 사람이 한번 바뀌어야 하겠다. 그래서 옛날부터 입버릇, 손버릇, 몸버릇 이 세 가지만 고치면 군자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이목구비, 사지백태, 오장 육부가 다 내 거예요. 한울님이 주신 그것만 바르게 쓰면 되는데. 내가 금덩이가 몇 개가 있다 하더라도 내게 있을 땐 내 거라고 하지만 누가 훔쳐 가면 그 사람 것이 되지, 그때부터는 내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 물건을 누가 훔쳐갔을 때, 욕을 하고 미워하고 그러면 안 돼요. ‘갖다가 잘 써라’, ‘잘 쓰게 해주십사, 그 사람 죄를 주지 마소서.’ 이렇게 심고를 드려야 합니다. 훔쳐가는 걸 봤어도 못 본 척, 누구한테 들어도 못 들은 척, 내가 다 알아도 아는 척하지 말아야 해요. 그 한 가지를 내가 지키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게 해야 스승님이 가르쳐 주신 정답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가정이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자식은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해요. 내가 부모님께 효도하면 그 복은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깐 결혼하면 시부모님 잘 모시고요. 일용 행사가 도지 딴 게 도가 아니다 이거야. 그러니까 일용 행사를 절실히 잘해 주십사 하는 것이 내가 떠나기 전에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고, 그게 제 소원이에요. 남이야 잘하거나, 못하거나 나쁘게 말하지 말고 언제든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말하는 것은 그 안에 모셔져 있는 신령님이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똑바로 보고 직관을 잘해야 해요. 어떤 사람에 대해 아무 죄도 없는데 남의 말 듣고 나쁘게 말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직관으로 봐야 해요. 가정에서도 부모는 부모의 도리,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잘 하려고 서로가 노력을 해야 해요. 그게 도지 딴 게 도가 아니에요. 그래서 24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죠. <다음에서 계속> 인터뷰영상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JPTR63nSXFo&t=1s
-
극작가 이강백교수 교령사 예방29년 전인 포덕 135(1994)년 ‘동학혁명100주년 기념 칸타타’ 국립합창단 정기공연(국립중앙극장 대극장)을 기획하여 성공적으로 공연하였던 이강백교수가 10월 25일 천도교중앙총부 교령사를 예방하고 100만원을 성금하였다. 이교수는 “동학혁명100주년 기념공연를 위해 고부, 백산, 우금티 등의 현지를 답사하였고 100년 전의 동학혁명을 당시의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사건으로 느낌을 전달하려고 시를 썼다.”면서 자신이 29년 전 천도교로부터 받은 100만원을 성금으로 냈다. 이 100만원은 29년 전 동학혁명100주년 기념공연에 대해 감사의 의미로 받은 돈이라고 한다. 이강백교수는 주로 현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우화적인 희곡을 많이 썼다. 주요 작품으로 ‘파수꾼’, ‘느낌, 극락 같은’ 등이 있으며, 2001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2020 보관문화훈장을 받은 작가이다.
-
우암 김명진 종법사 추모식 봉행우암 김명진 종법사 환원 33주기를 맞아 9월 13일 11시 남해선구교구에서 추모식을 봉행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신암 송범두 도정을 비롯하여 서울, 부산 등지에서 많은 동덕이 참석하였다. 박철 선구교구장의 집례로 교회의식에 이어 용암 김환용 도훈의 약력소개, 수인당 손윤자 선도사의 경전봉독(성령출세설), 건암 김대부 동덕의 추모사, 분향, 원암 김용 동덕의 유족대표 인사 순으로 진행 되었다. 건암 김대부 동덕은 추모사를 통해 종법사님의 생전을 회고하며 후학으로서 종법사님의 유훈을 받들어 남해 지역 천도교 발전을 위해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참석한 동덕들은 추모식을 마친후 인근 선산의 종법사 묘소를 참배한 후 예약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곁들이면서 종법사님을 기리는 담소의 시간을 가졌다. 김명진종법사는 천도교 남해선구교구장과 중앙총부종무원장을 역임하는 등 평생을 교단발전과 포덕천하를 위해 애썼고 1971년에는 천도교 최고 예우인 종법사에 추대된 교단의 큰 어른이었다.
-
월산 김승복 종법사 추모식 봉행10월 8일 정원포(도정 득암 이상선)는 영등포교구에서 월산(공암) 김승복 종법사 환원 19주기 추모시일식을 봉행하였다. 조광걸 교구장은 추모사에서 “선생님께서는 경천명 순천리 하셔서 천도교에 대한 가이없는 헌신과 삼세 스승님에 대한 깊은 존경과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중략>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정진하고, 진리를 온전히 체득하여 어김이 없게 하고자 합니다. 온 우주에 21자 주문의 힘을 보태겠습니 다.”라고 다짐하면서 “‘모든 게 하나다. 오직 유일무이한 성령뿐이다. 주문공부 열심히 하세요.’라는 월산 선생님의 음성이 귀에 쟁쟁합니다”라고 추모하였다. 김승복 종법사는 평생을 천도교 수도 진작을 위하여 애쓰신 분으로 영등포교구와 화악산수도원을 중심으로 전국에 수도의 바람을 일으켰다. 다음은 당일 배포한 식순지에 실린 김승복 종법사의 어록이다. *걱정할 기운이 있으면 기도하세요. 한울님하고 해결 을 봐야 해결이 되지, 딴 거 해 가지고 해결이 안됩니다. *순수 신앙하는 천도교. 나를 고치는 천도교. 마음 고치는 천도교. 가정 고치는 천도교. 그 다음에 나라도 고치고 온 세상도 고치는 거지. 자기 마음도 못고치고 누구를 어떻게 고치겠어요? *도를 하는 사람이 제일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절대 화를 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
법원포, 춘암상사성묘 탐방 및 야외합동시일식 봉행법원포(직접도훈 이영노)에서는 포덕 164년 9월 17일 춘암상사묘를 탐방하였으며 야외합동시일식도 봉행하였다. 이번 법원포 춘암상사묘 탐방계획은 3년 전부터 하려고 하였으나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고 이번 추석을 기하여 탐방을 이루었다. 이에 창암 조한창 회장의 동도회도 같이 참여하여 더욱 뜻깊은 모임이었으며 동산 박노진 회장의 참석은 금상첨화였다. 천도교중앙총부 이미애 교화관장이 참석하여 고마웠으며 여성회 중앙본부 박징재 회장의 참석은 춘암상사님 가족으로서 필연적인 것이다. 생각하였던 인원보다 많이 참석하여 주어서 더욱 뜻깊었으며 특히 시흥교구 용암 최기영 동덕의 가족들은 어린 애기를 안고 업고 참석하여 더욱 고마웠다. 참석인원이 무려 50여명이었다. 며칠전 정암 박기성 회장 지휘하에 예산교구 동덕들이 묘지 벌초를 하여 금번 탐방을 더욱 빛내 주었다. 시일식은 선암 김영선교구장의 집례로 진행되었으며 이영노 법원수도원장의 우리 천도교 운수에 대한 설교가 있었으며 끝으로 초학주문 21회 합송으로 말미를 장식하였다. ‘춘암상사님 앞에서 초학주문을 합송한 적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감회가 새로웠다. 글/부암 박부섭
-
할머니! 울산 땅을 너무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송탄교구 가혜당 이영혜 동덕이 대신사 대사모 숭모비 건립기념 도보순례에 참가한 소감을 전했다. 지난 8월 26일~27일 서울과 부산 등 각지에서 교인들이 참여한 대신사 대사모 숭모비 건립기념 도보 순례를 마친 가혜당 이영혜 동덕은 편집실에 직접 찾아와서 기행문을 전달했다. 기행문에는 "나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역에 KTX를 타러 갔고, 50년 만에 처음으로 울산역에 가 봤다"고 전하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회를 밝혔다. 울산->경주->대신사 생가->용담정으로 이어진 이번 순례에 참가하여 마을 곳곳을 누비며 꿈 같은 3만보를, 72세의 나이에 동참하게 되어 스승님의 큰 은덕을 느꼈다고 말했다. 순례를 하며 빼곡이 손으로 쓴 기행문에는 머물던 곳마다 느낀 천사님의 감응이 묻어있다. "저는 용추각 앞 시루떡 같은 바위에 앉아 물소리와 함께 심고합니다", "전시관 곳곳 유지 관리를 잘 해주시니 참 고맙습니다" 가혜당 이영혜 동덕은 이 기행문을 전하며 이번 순례에서 스승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한 걸음씩 따라 걸었던 심경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했다고 전했다. 한편 대신사님의 후손인 가혜당 이영혜 동덕이 대신사 대사모 숭모비의 건립기념 도보순례에 참여한 것은 더욱 큰 의미가 되었다.
-
청주교구에 도착한 따뜻한 마음청주교구에 온정을 베푼 교인들의 손길이 있어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청주교구 대덕당 주선자 동덕은 65인치 TV, 마이크, 엠프, 스피커 등의 기증 물품을 보며 한울님 은덕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전 종의원 의장을 지낸 수암 염상철동덕, 연원회 부의장 수암김산 동덕, 마포교구 김정호 동덕이 기증한 물품을 지난 9월14일 김정호 동덕과 서울교구 정상기 동덕이 직접 청주교구를 방문하여 설치하고 성금을 전달하였다. 대덕당 주선자 동덕은 "한울님과 성사님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마움은 정말로 큰데요, 마음에 무게는 많이 무겁습니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힘든데 이렇게 도움을 받으니 더 힘내서 일하라고 하신뜻인걸 알기에 힘이 닫는데 까지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소감을 전했다. 교구와 교인이 서로 돕는 유무상자의 정신이 널리 퍼져 나가는 천도교의 공동체의식이 빛나는 사례로써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