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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에게 듣다(1)이창번 천도교중앙도서관장님을 만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를 거쳐 우리 역사가 흘러온 절망과 희망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 시절을 건너 온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야말로 한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구십 살이 넘은 생을 넘나드는 기억들을 풀어내며 선생의 생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선생의 말씀 속에 선생이 경험한 모든 것을 표현할 때 ‘감사한 마음’이었다. 주어진 삶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느껴졌다. 소개 부탁드립니다. 성함과 언제, 어디서 태어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이창번이라고 합니다. 1934년 1월 17일생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90세가 되는 거예요. 참 안 믿겨져요. 평안남도 성천군 대구면 원평에서 태어났어요. 완전히 시골이에요.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장남이고 남동생이 3명이 있었어요. 아버님께서는 해방 후에 천도교 활동을 하시고 증조할아버지가 왜정 때부터 천도교를 하셨어요. 어릴 때 기억에 남는 일 있으세요? 어릴 때의 기억이, 겨울철에는 갓을 쓴 할아버지들이 매일 찾아오고 그래요. 요새는 집에 손님이 오시면 커피 대접을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추운 데 오시느라 고생하셨다고 활활 타는 화롯불을 내왔는데, 그게 대접이 됐어요. 그 화롯불을 들고 증조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는 게 저의 일이었어요. 그 방에 들어가면 갓을 쓴 그 할아버지들이 한 서너 명 앉아 있거든요. 그걸 갖다 놓으면 증조할아버지가, “그래, 이 어른이 이런 분들인데 인사드려라.” 하시며 인사를 시키셨거든요. 그럼 그냥 시키는 대로 엎드려서 절을 하잖아요. 근데 그때 놀라운 것은, 그 할아버지들이 앉아서 절을 안 받아요. 같이 일어나서 똑같이 나에게 절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왜 그렇게 우습던지 그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나한테 절을 하더라고. 아마도 그 당시 천도교인들의 모습이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어린애도 역시 한울님을 모신 존재로 그렇게 인정을 하는 거예요. 방에서 나와서는 동생하고 막 그 얘기를 하면서 웃던 생각이 나요. 증조할아버님께서 천도교를 하셨고 대를 이어 교인으로 살아오셨군요. 당시의 신앙생활에 대해 좀 들으신 이야기 있으세요? 내 증조할아버지의 함자는 이병근.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저는 늘 증조할아버지하고 잠자리도 같이 했고, 식사도 같이 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증조할머니는 할아버님께서 천도교 하신 것에 대해 상당히 못마땅했던 것 같아요. 증조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다니면서 늘 얘기하셨는데, “저 밭이 옛날에 우리 밭이었는데 네 할아비가 저거 팔아먹었다고”, “저 산도 우리 산이었는데 네 할아버지가 팔았다고.” 3.1운동 때 논밭 팔아서 전부 교회에 바쳤다는 것 같아요. 그걸 할머니는 그게 아주 못마땅하게 말씀하셨는데, 나보고도 절대 천도교는 해선 안 된다, 이런 뜻으로 말씀하셨어요. 근데 해방이 되고 나니까 아버지가 완전히 천도교에 몰두를 하기 시작을 해서 청우당 당위원장까지 하게 되니까 할머니가 그때는 그냥 완전히 손을 들고 말았죠. 평안남도 쪽에 동학이 들어오게 된 시기는 동학혁명 이후였는데, 동학혁명이 끝나고 난 다음에 그쪽에서 학살들이 심하니까 그때 피난 오다시피 올라왔는데, 3.1운동 때는 제일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했거든요. 틀림없이 할아버지가 어떤 직책을 맡았던 것만은 틀림없어요. 동네 인근 할아버지들이 찾아오는 걸 보면 뭔가 어떤 직책을 맡으셨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몰랐어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건 할아버지 책상 위에 <창건사>, <창건록>이라는 책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노상 그걸 뒤져보았거든요. 그때가 해방 이전이니까 40년대 초였을 거예요. 왜정시대 때의 기억은 거의 없지만요. 어릴 때의 가정에서의 살림살이는 어떠셨어요? 사는 것은 그때 그렇게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굶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땅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집에 땅이 있어서 (농작물)들어오는 게 있었고 산도 또 있었어요. 그 산에 밤나무가 많았던 기억이 나요. 생활하는 데 그렇게 어려운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왜정 때도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서기로 있었어요. 배급을 타고 그러니까 배를 곯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해방이 되고 나니까 북한에는 청우당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먼저 입당을 해서 활동을 하고 그러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께 일을 도맡기는 거예요. 그때는 천도교가 아니었고 먼저 청우당에 들어가는 거예요. 48년도쯤 되니까 교회에서 시일을 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전까지는 그런 것을 전혀 몰랐어요. 시일 보는 것도 모르고 청수 모시는 것도 몰랐고요. 그때 아버지가 청우당 면당 위원장을 할 때인데 47년도에 여기 남한에서는 동학혁명을 삼월 이십칠일 날 기념식을 했는데 북한에서는 일월 일일날 했어요. 그때 면에서 동학혁명 기념식을 국민학교 교정에서 했는데 한 300명 모이더라고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기념식을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 천도교의 교세가 더 확장되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때 해방되고 난 다음에 그 천도교가 다시 일어나게 된 동기는 결국 동학혁명한 게 있잖아요. 갑오년 동학혁명이요. 많은 사람들이 동학혁명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농민들이 반상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서 일어난 동학, 그리고 3.1운동, 이러한 국군운동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3.1운동을 천도교가 주도했다는 건 공산당도 다 아니까. 그 시절에 어떤 기관이 그런 걸 한 데가 있었겠어요. 노동당도 김일성이가 뭐 만주에서 빨치산 운동했다고 하지만은 그거는 별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그런 작용을 한 거예요. 천도교는 농민을 위한 정당이고 바로 구국의, 나라를 구하려고 했던 정당이라는 게 나타나니까 그게 선전이 된 거예요. 그때도 민주당은 있었어요. 조선민주당이 있었는데, 거기는 선전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근데 우리 천도교는 그게 아마 강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천도교에는 그때 문화운동-어린이 운동 등 천도교 청년당 조직의 당 활동을 해본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 사람들은 당에 가서 당 조직을 어떻게 만들고, 선전을 어떻게 했는지를 전부 체험했던 분들이기 때문에 공산당도 오히려 처음에 시작할 때 회의를 진행할 줄 몰라서 천도교 와서 배워갈 정도였어요. 회의 진행을 누가 해봤나요? 당시에 천도교인들은 다 지식인들이었잖아. 그리고 그때 당시에 또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천도교 활동을 하면서 그리고 이후에도 다 연결이 돼 있어요.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었으니까 활동할 수가 있어요. 노동당에 들어간 사람들은요, 농촌에서도 제일 불쌍하게 살던 사람들, 학대받고 살던 사람들이 노동당에 들기는 했지만 아무 지식이 없는 거예요. 동학혁명 기념식 때는 청우당 대표, 노동당 대표, 민주당 대표가 나와서 연설을 하는데, 천도교 대표는 그때 막 책상을 치면서 하는데, 노동당 대표는 연설문을 써 가지고 나와서 낭독을 하는데 뜨물뜨물해요. 지식이 없었으니까. 그때 그랬어요. 그러니까 청우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거예요. 해방이 되고 나서는 식민지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청우당에 가입을 했고, 청우당에서 뭔가 기대를 했겠죠. 민족 의지를 좀 불태우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1948년에 천도교 교인이 170만 명 정도가 됐던 거예요. 그러다가 1950년도 되니까 270만으로 늘어나요.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거죠. 그때 청우당의 기록을 보면 3.1운동 재현하는 것, 그리고 재현 운동으로 크게 활동을 하면서, 1948년 유엔총회서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을 실시해서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결의를 했거든요. 그래서 유엔 감시단이 나와서 선거를 하게 했는데 북한은 거절한 거예요. 감시단이 남한은 들어왔는데 북한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죠. 그렇게 되니까 할 수 없이 유엔에서 다시 결의를 하기를, 유엔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 먼저 한다, 그렇게 그해 5월 10일인가 선거를 하거든요. 그때 대한민국 정부가 8월 15일날 수립이 돼요. 북한도 곧 따로 선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민공화국을 새로 세우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걸 만들기 전에 남한의 최린 선생을 비롯한 천도교가 그 당시에 분열이 돼. 통일이 안 되면 이게 100년이 갈는지, 200년이 갈는지 모른다 이거야. 신라 백제가 통일할 때까지 천 년이 걸렸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런 문제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든 단독정부 수립은 안 되고 통일 정부 세워야 한다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3.1재현운동이에요. 그래서 그때 남한의 최린 선생 등이 북한에다가 지령을 보내 가지고 3월 1일날 남북한이 다시 한번 일어나자, 3.1운동을 다시 한번 일으키자 하는 재현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남한은 일어나질 않았어요. 북한만 가서 일을 하려고 여기에서 그때 오근 선생 선생 부인이 그 유은덕 여사인데 그분이 밀사로 올라가고 또 한 분, 박현화라는 분을 밀사로 보낸 거예요. 북한에서 온 분인데 그런데 박현화 이분은 지령문을 가지고서 평양까지 도착해서 전달을 하고 무사히 내려왔는데 오근 선생 부인, 유은덕 여사는 가다가 경비한테 발견이 되니까 도망을 치다가 그때 눈이 왔는데 신발 벗은 채로 도망을 치고 하룻밤을 그냥 굴속에 숨어 있다가 동상에 걸린 거예요. 그래서 평양을 가지 못하고 황해 도당위원장이 그때 김용환이라고 하는 분이 도당위원장인데 이분이 황해도 인민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었어요. 천도교 도당 위원장이면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는데 유은덕 여사의 남편이랑 같이 청년당 활동할 때 같이 활동했던 분이거든요. 그 집으로 찾아간 거예요. 그 평양으로 못 가고 그러고서 그때 평양 보낼 때 지령이, 이거는 김일대 선생 그러니까 평안남도 도당위원장 김일대 선생 외에는 절대로 이걸 전달하면 안 된다. 밝히면 안 된다. 해서 몸에 감추고 있으면서 그 안에서 얘기를 못한 거예요. 김용환 씨한테도 도당 위원장한테도 얘기를 못하고 아버님이 불편하다고 그래서 내 한 번 병문안 왔다가 이렇게 됐다고 그렇게만 속이고 있는데 근데 이제 이쪽에서 그 박현화 씨가 갔으니까 북한 천도교에서는 다 알았어요. 그 내용을. 그러면서 또 한 분이 올 거라고 했는데 오질 않거든요. 도당, 군당, 중앙당 회의에 갔는데 김용환 씨가 회의에 가서 이 사람(박현화씨) 고향이 평안북도 구성인가 그랬거든요. 구성 사람을 만나니까 당신 고향 사람 누가 우리 집에 와 있다고 그때 얘기가 그러니까 아, 유은덕 여사가 거기에 와 있구나. 그래서 그분이 돈을 가지고 내려가 가지고 밀사 지령을 다 갖고 있으니까 빨리 이제 남한으로 내려가라. 여기 있지 말고 내려가라고. 그때 공산당에서는 그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미행을 한 거예요. 그리로 가는 걸 알고 그 사람이 떠나자마자 체포를 해버렸어요. 그래서 이분은 그때 돌아가셨어요. 사형당해서. 그렇게 된 게 3.1재현운동이에요. 그때 천도교인 1만 8천 명이 구속됐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선생님 개인사를 좀 여쭤보면 언제 남쪽으로 내려오세요? 1950년 이제 6.25가 일어났죠. 그해 7월 8일날 나는 그때 양덕고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북한에서는 4월에 개학이 아니라 9월에 개학을 해요. 그래서 그때 8월 달이니까, 한참 졸업시험을 칠 때였어요. 시험을 치르는 동안에 어느 학교에서 인민군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학생증을 안 주니까 집에 갈 수가 없는 거예요. 북한에서는 공민증이 신분증인데 그때 우리는 학생증을 가지고 있었고 가는 데마다 검문소가 있어서 그것 없이는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시험 치고서 빨리 가려고 했는데 시험 치다 말고 갑자기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치더니 강당으로 가래요. 거기서 바로 군대로 가게 된 거예요. 학생들 전체가 다 간 거예요. 2학년, 3학년생들이. 1학년은 아니고. 그때 나는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집에 연락도 못하고, 그날 제가 시험 칠 때 가지고 있던 책갈피에다가 편지를 쓴 거예요. 동생과 아버지한테 편지를 써 가지고 책갈피에 넣고 평양으로 간다니까,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책갈피에 넣어 가지고 보따리에 책을 이만큼 싸가지고서 새벽에 우리 부락 앞을 지났는데 그 물길로 돼 있는 길에다가 책을 확 던지고 갔어요. 후에 월남한 사람한테 들으니까 그 책이 우리 집에 도착이 됐다고 그러더라고요. 편지를 동생들이랑 봤다고요. 그렇게 해서 내가 평양에 갔어요. 그럼 그때 바로 군에 입대를 하신 건가요? 바로 그 다음 날 원산으로 들어가서는 행군을 해서 삼척까지 내려갔습니다. 거기에서 입대를 했어요. 정식 부대에 9451육전대라고 하는 해병대예요. 거기서 입대를 해가지고 있다가 며칠 안 있어서 바로 또 올라와 가지고 원산 원부대가 거기에 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해병대예요. 거기 도착을 해서 한 10여 일 동안 있다가 바로 서울 쪽으로 나오기 시작을 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쭉 나오다가 낙동강 쪽에서 저지를 당하니까 인민군이 내려가다가 거기서 이제 왜관 있는 데서 혈전이 붙으니까 낙동강 도하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해병대니까 해병대 1개 대대를 그리로 보냈는데 내가 거기에 끼어 들어갔어요. 들어가서 생전 처음 전쟁이라는 걸 하게 되었습니다. 17살, 18살 때예요. 최전방에 가니까 인민군은 벌써 낙동강을 건너갔더라고 그리고 3일 후에 반격을 하고 쫓겨오기 시작하는데 우리 진지에 떨어지는 포탄 파편을 맞은 거예요. 저도 파편 맞아가지고 허벅지 다리에 피가 그냥 흐르는데.. 그래서 광주로 호송되어 간 거예요. 광주로 가니까 우리 원부대가 광주에 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약이 없는 거예요. 호송되는 것도 엠뷸런스를 타고 후송을 하는 게 아니라, 밤에 이쪽 부락에서 저쪽 부락으로 연결을 하고 그런 식으로 이동을 하는 거예요. 한 3~4일인가 지나고 나서야 광주에 도착했는데 바로 우리 부대가 있더라고요. 여단 사령부에 가서는 후퇴하기 시작했어요. 인천 상륙하는 바람에. 그때가 50년도 9월 달이에요. 그리고 내가 포로된 게 10월 8일날이니까 석 달 동안 인민군 생활을 한 거죠. 인민군 생활은 어땠어요? 그리고 어떻게 포로가 되셨나요? 인민군 생활은 그렇게 어렵진 않았어요. 그때 당시에는 한창 승리해서 내려갈 때니까 훈련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서 소총알 세 발 쏴보고 전방에 투입이 되니 잘 싸우지 못해요. 후퇴하다가 바로 귀순해버리고 말았어요. 부대에서 이탈해서 귀순해 나와서는 포로가 돼서 부산으로 갔죠. 포로 수용소로 간다는 건 몰랐어요. 포로수용소라는 그 말 자체도 몰랐어요. 그저 귀순하게 되면 그냥 끝난 줄 알았어요. 총만 뺏고 그냥 보내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수용소 생활을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이후로 시작된 수용소 생활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거기 가니까 낙동강에서부터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인천 상륙 후 포위되어 포로들이 무더기로 들어오는 거예요. 수용소도 미처 짓지 못한 상황이었고요. 처음에는 포로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모르고 수용소를 만들어 놨는데 감당을 못한 정도로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을 하는 거야 포로들이. 그러니까 그 옆에도 수용소를 만들고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거제도에다가 만들기 시작했어요. 너무 많이 모이니까. 그때 거의 7~8만 명 정도가 포로가 되어 들어왔으니까. 거제수용소는 골짜기예요. 제법 넓은. 60수용소 70수용소, 80수용소, 90수용소 이렇게 4개 수용소가 있었어요. 그리고 수용소마다 91, 92, 93, 94, 95 이렇게 나오거든요. 나는 78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70수용소 중 78번수용소에 들어갔는데 여기 들어가니까 완전히 빨갱이 수용소지. 인민군들이 있는. 처음에 들어가서 제가 놀란 게. 들어가니까 밖으로 북한에 민주 선전실에 들어간 것처럼 김일성 초상화를 연필로 그려서 붙여놓고 그런 상태예요. 거기 있다 죽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여기는 안 되겠다 해서 그때 기독교인들이 선교사들한테 탈출한다고 약속을 했던 모양이에요. 이 사람들 탈출할 때 같이 탈출한 거예요. 탈출해 가지고 갔는데 91수용소로 배치가 됐어요. 거기서 그 이동찬 선생을 그때 만나게 된 거예요. 감찰대 부대장을 했는데 거기에 가니까 빨갱이 수용소에서 온 놈들이라고, 여름철 8월 달인데 옷을 그냥 팬티까지 싹 벗겨요. 홀랑 벗겨가지고 조사를 하는데. 무슨 지령문 가지고 온 게 있나 그거 본다고요. 한 사람씩 감찰대에 끌고 들어가서 심사를 받는데 북한에서 심사를 한다는 건 고향이라든가 입대는 언제 했느냐, 어디에서 귀순했냐 뭐 이런 것들이에요. 북한에서 무슨 당에 들었냐고 물어서 천도교 청우당에 있었다고 그 얘기했더니 감찰대 부대장 그 양반 이동찬 씨가 뒤에 있다가, “너 천도교했어?” 묻더라고. “예, 천도교 했습니다.” 그랬더니 물어보는 게, 1세 교조가 누구야? 이거 물어봐 수운대신사입니다. 말했지. 2세 교조는 누구야? 또 물어봐. 해월신사입니다. 라고 또 답했지. 3세까지 물어보더라고. 의암성사라고 했더니 “아. 이 새끼 진짜 하나 왔네” 그러더라고. 참 드라마틱한 순간이네요. 선생님이 천도교인이라는 걸 밝히고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인데, 이후엔 수용소 생활이 어땠습니까? 난 그때부터 심사는 안 받았어요. 천도교인이라니까 봐주기 시작을 해서, ‘쇼리’라고 해요. 당번병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땐 식사가 좀 적어가지고 배가 고팠거든. 한창 먹을 때니까 배가 고파. 그런데 감찰대에 있으니까 마음대로 먹는 거예요. 내가 가서 밥을 타오는 당번병 노릇을 하고 그랬으니까. 그때 2대대 경비대는 모두 천도교인들만 모인 거예요. 계시던 분 중에는 연대통역관으로 있던 사람이 안명록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미군 사령관 통역을 하고 있으니까 그분이 지금 살아계세요. 그래서 당산교구에서 나하고 같이 활동하고 그랬던 분이에요. 그때 계셨던 수용소가 어디었는지, 또 그 안에서의 일들 기억하세요? 65수용소에 있다가 78수용소 2대대에 갔다가 다시 그다음에 91 수용소로 가서 감찰대로 떨어진 거예요. 감찰대가 당번병으로요. 그때 2대대가 천도교인들만 모여 있었기 때문에 시일이면 시일식을 보러 그리로 갔어요. 그때 경비대장으로 있던 분이 이창근 씨라고 하는 분이 여기에 나와서 시흥교구장을 했어요. 석방돼서 나와서 시흥교구장을 했는데 거기에 이제 김월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영복 교령님이 교령할 때 감찰 상임감사로 계셨고요. 그다음에 그 황승훈 씨라고 하는 분이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데 이분도 역시 천도교 경전을 거의 외웠던 분이에요. 선생님, 그러면 그 수용소 안에서는 천도교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됐어요? 본인이 천도교인이라고 이렇게 밝히고 밝혀지고 알려지는 계기가 있었나요? 빨갱이 수용소에서는 거의 몰라요. 그때는 자기 신분을 절대 밝히지 않았어요. 내가 그때 신분이 노출될 것 같아서 그 기독교인들 탈출하는데 같이 끼어서 나온 거예요. 북한에서 천도교를 했다는 게 알려지면 박해를 받을 것 같았거든요. 거기서는 밝힐 수가 없었어요. 나하고 같이 자는 사람은 내가 천도교인이라는 걸 알았어요. 같이 자면서 그 양반이 천주교 신자가 됐는데 그분이 자꾸 천주교로 오라고 그러는 바람에 내가 그때 난 천도교에 있다고 그 얘기를 했지요. 나도 그 천주교회 신앙하는데엘 몇 번 나가봤어요. 그때 수용소에는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가지고 성경을 수없이 뿌렸어요. 그때 마가복음, 누가복음 이런 것들을 단행본으로 찍어 가지고 그걸 돌리고 그랬거든요. (계속) 인터뷰영상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UMIi5P5Dfq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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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련 작가 소설 『동학』 원작, 연극 "사람, 한울이 되다"대하소설 <동학>의 저자 김동련 작가와의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하였다. 오는 5월 10일~13일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연극 <사람, 한울이 되다>가 무대에 오른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꿈, 동학이 가르쳐준 지혜와 오늘날 동학의 가치를 묻는 대화 속으로 독자 여러분을 모신다. 집필 계기와 과정 소설 <동학>을 집필하셨습니다. 총 6권 분량의 대하소설인데요, 집필하시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였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 동학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게 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강원도 묵호에서 중학을 졸업한 후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7살 먹던 해 봄부터 방파제 축조회사인 흥아공작소에 급사로 일했습니다. 30톤 기중기선 화장으로 일하던 또래의 친구가 당시 태극출판사에서 나온 『위대한 한국인』 전집을 구했으나 도저히 읽어내지 못하겠다고 하여 제가 넘겨받았습니다. 그 전집 두 번째 책이 『해월 최시형』이었습니다. 그 전집에는 이승만이나 김옥균 등 여러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저는 그분들에게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해월 선생님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저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특별히 어떤 점에서 충격에 빠지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스승 최제우가 순도한 후 30년 동안 포졸들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홀로 전국을 돌며 스승의 뜻을 이어 동학 조직을 재건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의 옳고 강한 의지가 불의로 점철된 잘못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면서 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해월 선생님의 행적에 비하면 기독교에서 전하는 바울의 전도 여행 같은 것은 어린아이 장난 같아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해월 선생님에 대한 소설을 써 보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해월 선생님의 이야기를 쓰려면 해월 선생님께 그러한 동력을 제공한 수운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운과 해월 두 분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려면 두 분의 뜻을 행동으로 옮긴 전봉준 장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난한 세월이 오래 이어졌으나 저는 이 꿈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험난한 세월이 오래 이어졌겠네요. 스승님들의 고된 여정만큼 작가님의 집필 여정은 그 과정을 고스란히 닮아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이 주제를 계속 삭이려 국내에 나온 동학 관련 문헌을 꾸준히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나 독서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44살 때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 문학을 수업했습니다. 문학사 자격을 얻었으나 마음에 드는 글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경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들어가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철학박사를 수료했습니다. 그 후 두 권의 책을 출간하며 문장 수업을 계속했습니다. 열 일곱 살에 처음 해월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되고 해월의 이야기로 소설을 쓰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해, 마흔이 넘어 비로소 국문과에 입학하셨는데, 배움의 뜻을 그렇게 이어가는 일도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배움의 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경험도 중요하고요. 동학에 관한 소설을 쓰려면 소설 속에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저는 사람의 죽음에 관한 경험을 하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을 얻어 합천 노인전문요양원에 입사해 8개월 동안 근무하며 사람의 마지막 삶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4년 전 여름, 저는 더는 집필을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당시의 국내외 상황과 작금의 국내외 상황이 중첩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동학이 그 시대의 희망이자 세상을 밝히는 횃불로써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던 것에는 그 시절에 처한 절박한 현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갑오년 동학군들이 맞이했던 상황을 다시 맞이하고 있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갑오년에 실패한 동학혁명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혁명 당시 동학군들이 외쳤던 숭고한 이상과 목표를 지금도 완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갑오년 당시 조선을 지배했던 세력은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인식하지도 못했고 잘못된 틀을 바꿀 의지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갑오년에 민족의 생존을 보장할 지혜는 결국 민중 속에서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지혜는 결국 푸른 눈을 뜬 시민 속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지혜는 동학의 인내천과 보국안민 같은 동학의 빛나는 사유를 반추하고 계승하고 선양하는 작업에 의해서 나올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가 점점 더 흥미로워집니다. 집필 과정에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집필하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금 총부의 감사원장을 맡고 계시는 부암 정덕재 선생님께서 천도교 관련 학자들과 문헌을 지극 정성으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소개받은 동학의 쟁쟁한 학자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섬세하고 명료하게 동학을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동학은 수운 선생님 나이 20에서 30살 사이에 사유의 기본 뼈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10년 사이 수운 선생님의 행적에 관한 남아있는 기록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각궁거상" 단 네 글자가 전부입니다. 각궁 즉 활을 손에서 놓았다니 무술을 익혔을 것입니다. 거상 즉 행상을 나섰다니 각지를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오지를 돌면서 조선의 실상을 뚜렷하게 목격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홀로 숙고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싶으셨나요? 저는 소설 속에서 당시 조선의 제반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구성했고 그 당시 범람하던 거대 담론인 유학과 불교와 도교를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 학술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이렇게 재해석된 거대 담론을 바탕으로 행상을 하며 현자를 만나 지혜를 구하던 수운 선생님의 사유로 종합하여 독자적인 동학으로 이루어 가는 과정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이후의 모든 문장은 많은 상황을 문학적 상상보다는 구체적인 자료로써 직접 이야기하게 하는 서술 방법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소설 곳곳에 나오는 대부분의 대화는 모두 조선 시대의 말로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의 대형 사전에서도 찾지 못하는 고유한 우리 말과 관용어가 수도 없이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집필 태도는 일반 독자들의 가독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저는 감수했습니다. 집필 기간은 어느 정도가 걸렸나요? 집필에서 출간까지 만 2년이 걸렸습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수운과 해월 선생님을 물론 당시의 동학 도인들의 절박하고 안타까운 심정과 자주 동화되었고 그럴 때마다 많이 울었습니다. 두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심장이 아리고 억장이 막힐 때도 많았습니다. 어떤 때는 서재 바닥을 뒹굴면서 몸부림치며 통곡을 하기도 했습니다. 글이 막힐 때는 만취해서 자다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17살 때 품었던 그 꿈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나고 나서야 여섯 권의 대하소설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자료조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1차 자료로 참고한 문헌은 동학 경전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일본외무성자료』 등입니다. 『동경대전』‧『용담유사』에 나타나는 범재신론은 종교철학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의 단계인데 이러한 사유는 서양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영국의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에 의하여 제시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19세기에 수운 선생님에 의하여 종교철학의 가장 높은 단계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은 조정의 입장으로 쓰인 글이므로 제가 백성의 입장에 서서 다시 번역해 소설에 넣었습니다. 『일본외무성자료』도 일본 입장으로 썼기 때문에 사실의 왜곡이나 축소가 심해 제가 조선 백성의 입장에 서서 다시 번역했습니다. 해월과 의암 선생님이 남긴 글들은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 대표 오암 박길수 선생의 도움을 받아 모두 정독했습니다. 원광대학교 박맹수 총장님께서는 아직 발표하지 않은 여러 논문을 보내주셨습니다. 영산대학교 송봉구 교수님과 동의대학교 성강현 교수님의 도움도 컸습니다. 기타 동학 관련 단행본이나 논문들은 살아오면서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하여 꼼꼼히 읽었기에 이미 횡설과 수설이 자유로운 상태였습니다. 특히 표영삼 선생님과 이이화 선생님의 저작을 읽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더러는 역사에 묻혀 외면당했던 여러 사건을 파내어 드러내기도 했고, 동학을 교단의 입장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재해석하여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 노력했습니다. 저의 스승인 경상대학교 오이환 교수님은 제 소설을 읽으시고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술이 섬세하다고 평가해 주셨는데 그것은 허구인 소설을 자료로써 직접 말하게 하려는 저의 무모한 서술 태도가 가져다 준 선물이 되었습니다. 소설과 연극의 차이 오는 5월에 부산 원곡예술관에서 3일에 걸쳐 선생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50년간 가슴에 품어 온 이야기가 소설로 완성되고 연극 작품으로 제작이 되는데, 감회가 어떠신지도 궁금합니다. 또 이 작품을 보시는 관객분들에게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앞에 말씀드렸듯이 제 소설은 거의 역사서와 학술서 수준에다가 조선 시대의 언어로 썼기 때문에 가독성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독자들의 요청을 받아 전국을 돌며 북토크를 했습니다. 특히 유학과 불교 그리고 도교와 천주교에 관한 저의 재해석이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오래된 우리 말이 많아 독자들은 사전을 옆에 펴 놓고 일일이 찾아가며 제 소설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동학은 우리에게 매우 아픈 상처라고 생각했기에 저는 다른 소설처럼 글을 쉽고 재미있게 쓸 수는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독자들은 그러한 저의 입장을 십분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소설이 이렇게 적극적인 독자층을 넘어 많은 분에게 알려지려면 좀 더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컨텐츠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소설 중 일부분을 발췌하여 주제를 강화한 이야기로 연극 공연이 만들어진다면 다면, 좀 더 가깝게 시민들에게 다가가 동학을 알릴 수 있고 또한, 공연에 참여한 분들이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깊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대 동학의 가치 내내 생각하게 됩니다. 왜 동학이었는가, 그리고 160년이 지나서도 왜 다시 동학이어야 하는가를요. 이 시대 동학의 가치를 참 오래 생각하시고 또 수운 대신사님과 해월 신사님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해오셨을텐데요. 이 시대 동학의 가치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현대사회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빼앗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듯합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을 다만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을 소비하는 구매자로만 대우하고 있습니다. 돈이 슈퍼에고가 된 세상에서 개인은 생산자가 상품만 판매하면 게임에서 이기는 룰 속에 헤매고 있습니다. 거대한 관료주의는 개인을 자기들이 지향하는 기계속의 작은 톱니바퀴로만 대우하고 있습니다. 권력이 돈을 추구하면서 남발한 오염된 담론으로 인하여 개인은 무엇이 옳고 그른 지를 판단할 수 없도록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 내동댕이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은 자신이 진실로 어떤 존재인지 숙고하기가 어렵습니다. 동학은 인내천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은 각자가 이 우주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답고 신비한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곧 한울이라는 가르침은 암울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 자신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주어 그들의 삶 자체를 올바르게 바꾸게 합니다. 향아설위는 이러한 사유가 삶 속에서 실천되는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이 추구하는 보국안민은 국가가 잘못하면 백성이 직접 나서서 그 잘못을 옳게 고쳐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정의롭고 적극적인 실천의 정신입니다. 부패한 권력에 맞서 백성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권력을 창출하는 것은 동학이 그동안 끊임없이 추구했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과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동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제 소설에는 동학이 제시한 여러 강령과 가치들이 구체적인 예를 통하여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동학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빈부격차나 저출산 그리고 안보위기나 사회적인 정의와 환경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줄 수 있으며 나아가 사람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대단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동학혁명 130주년을 맞이합니다. 소회가 어떠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130년 전 동학은 세상의 잘못된 틀을 바꾸려 목숨을 걸고 일어났습니다. 그 혁명은 안타깝게도 완수되지 못하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제2의 동학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동동학농민기념사업회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동학혁명 당시 경상도 지역의 최대 격전지였던 하동을 재조명하기 위해 전적지를 보존하고 동학을 선양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초 전국의 기념사업회가 장흥에 모여 전국동학농민기념사업연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흐름이 민중 속에서 동학의 지혜를 다시 반추하고 계승하여 이 시대에 당면한 문제들은 해결하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에 저희가 기획한 동학의 컨텐츠화를 위한 연극 공연이 조그만 기여라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부산 공연이 잘 마무리되면 올해 전국을 돌며 재공연할 계획입니다. 서울의 예술의 전당에서 마지막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저희의 계획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정부를 비롯하여 천도교 총부나 관련 단체의 많은 관심과 격려를 기대합니다. 김동련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학사/국립경상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동대학원 철학박사 수료/경상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방송통신대학교 출강/도서출판 후아유북스 대표/ 카페 여래(다솔사) 대표/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대표 <저서> 장편소설 『우리가 사랑할 때』(밥북)/인문서적 『천자문으로 세상보기』(인간사랑)/대하소설 『소설동학』전6권(모시는 사람들)/번역서 『안원의 사존편』(후아유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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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원 종법사님을 만나다(3)<지난 호에 이어> 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던 날이었다. 홍천에 있는 가리산수도원으로 조동원 종법사를 만나러 갔다. 조동원 종법사는 1926년 평북 구성에서 타어나 19세에 우암 김동화 선생(1987년 환원)과 혼인하면서 천도교인이 되었다. 선생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극한 정성과 수련으로 천도교의 참진리를 깨닫게 되며 자기완성과 함께 많은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으로서 교단 발전에 기여해왔다. 가리산수도원은 1982년 8월에 작고하신 남편 김동화 선생과 함께 창설하여 현재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도교인이라면 한번쯤 깊은 수련의 참된 경험을 안겨준 성지로서의 기능을 해 왔다. 1925년 평안북도 구성군 이현면 진도동 참새골에서 태어난 조동원 종법사는 아버지 조만경, 어머니 김문채 사이에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오십 리 밖에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다니지 못했다. 길쌈과 바느질 등의 일을 배우며 18세가 되어 열 여섯 살이 많은 천도교인 故김동화 선생과 혼인한다. 일제강점기와 전쟁기의 상흔 속에서 살아왔다. 천도교의 진리를 깨닫고 수련을 이어나가며 수도자의 길을 걸어왔다. 절망의 순간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피워 올리기 위해 염주알을 손에 쥐고 주문을 외웠던 삶의 길이 촘촘히 수도원 가는 길에 이어졌다. 인생은 때로 너무 짧다. 전쟁이 일어났지. 6.25 때야 뭐 말도 못하게 죽을 고비 다 겪었어요. 스물세 살에 남편을 따라 월남을 했습니다. 삼팔선을 넘어왔지요. 남편이 몇 달 먼저 월남하시고 내가 뒤따라 왔어. 그때 북한은 공산당이 독재를 할 때였어. 살 수가 없는 거야. 삼팔선을 넘어 남한 땅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지. 남편을 만나러 춘천으로 갔어요. 가는 길도 순탄치는 않았지요. 월남해서 춘천에서 지내던 어느 날 밤 춘천 시내에 포가 떨어져요. 밤새 총소리가 나더니만 아침에 공산당이 춘천에 점령했어요. 방공호에 숨었지. 사흘을 있었어. 인민군이 집까지 쳐들어와서는 사람들을 끌고 나와서는 방공호로 쳐 넣어서 따발총으로 쏘았지.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죽었어. 피난을 가다가, 첫 아기 낳은 거를 안고 있었는데, 애가 죽었어. 두 살된 첫아기가. 방공호 속에서 남편을 찾았지. 이렇게 살펴보니까 문턱에 염주를 두른 팔뚝이 보이더라고. 아, 저기다 하고서는 죽은 사람을 막 비집고 나가서 팔을 탁 쳐드니까, 눈을 반짝 뜨면서 날 더러 죽은 이처럼 하고 가만히 있으래요. 그래서 아이고, 남편이 살아있으면 됐다, 하고서는 아이 있던 자리로 돌아와서 죽은 애를 안아 올렸더니, 피가 주르르 흘려. 그 자리에서 염주를 올려놓고 정신 빠지게 주문만 외웠지. 밖에서 소리치는 여자가 하는 말이 “공산당이 사람 살리려고 나왔지 사람 죽일려고 나온 줄 아느냐”고 말이야. 공산당들이 나더러 남편 내놓으라, 그래. 남편 돌아가시고 애들만 데리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더니 거짓말이라면서 총을 갖다가 가슴에 대고 쏘려고 하더라고. 그런데 총알이 안 나가는 거야. 그러는데 대문이 열리더니 중국 군인이 총을 메고 들어오는 거야. 총을 겨누고 있던 사람이 총을 빼앗겼지. 그런 순간들마다 주문을 외웠어. 그러니까 주문을 많이 외우니까 한울님이 살려주는 거라. 한울님이 ‘오늘은 콩밭으로 나가라.’ 하시거든. 그 말씀에 따라 콩밭으로 나가면 집에 와서 천장에 총을 쏘았어. 그리고 다른 날 콩밭에 가 있으면 한울님이 ‘오늘은 들어가라’, 하시거든. 그러면 콩밭에 와서 사람들을 다 잡아갔어. 그렇게 안 죽고 살았어요. 그때 생각을 하면 말로 다 못해. 옛날 어른들 하는 말이 염주만 두르고 있으면 난리가 나도 안 죽고 산다고 했어요. 피난길에 남편이 죽은 줄 알았어. 그런데 이 양반이 깨진 얼음을 타고서 건너와서 안 죽고 살아왔어. 거기서 붙들고 울고 염주 때문에 살아왔다고 했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염주 때문에 살아서 돌아온 거야. 남편은 수도원을 차려놓고 3년 만에 돌아가셨어. 일흔 아홉에. 천도교 믿는 사람들은 모든 걸 내가 해야 할 수련으로 해야해. 내 하는 모든 것이 도가 되기 때문에 일용 행사가 도야. 밥을 할 때도 쌀 다섯 번씩 씻으라고 하잖아요. 쌀을 다섯 번씩 씻어서, 안칠 적에 잘 되게 해달라고 심고하고, 밥 풀적에 심고, 먹을 때 또 심고, 다 먹고 나서 심고. 하여튼 심고를 수십 번 해야 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뭐 지금도 누가 뭐 사업이 안 된다고 하면 심고를 해요. 또 부화부순이 안 된다, 암에 걸렸다, 그런 말을 들으면 그냥 심고부터 하는 거야. 그렇게 심고를 부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심고 드리는 사람은 셀 수가 없어.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다리를 못 쓰니까, 어떻게 보면 심고 드리는 것이 내게 주어진 한울님 뜻 같아. 그것밖에 이루어질 수가 없는 거야. 제가 유방암에 걸렸을 때도, 수련을 했어요. 저는 화악산에 가서 수련을 하면서 유방암을 다 고쳤어요. 병원에서, 조동원이는 사람 못 될 거라고 그랬대. 아휴 말도 못해. 하여튼 도 닦는 일을 그저 열심히, 일용행사로 해야 해요. 딴 거 없어. 남의 말 듣고서 그렇게 되려고도 하지 말고, 내가 가정에서 으뜸가는 한 식구가 돼야 해. 내가 일용 행사를 잘하면 그 자리에 들어가고 못 하면 못 들어가는 거야. 남이야 떡을 먹든지 밥을 먹든지 남의 말 하지 말고 이목구비 사지백태 오장육부만 하나 하나 잘 간직하면 돼요. 그거는 남이 훔쳐가질 못해. 이거 못 훔쳐가. 물질이 많으면 훔쳐가죠. 말도 못해. 그러니까 묵묵부답하고 닦아도 묵묵부답하고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 한울님으로 대해줘야 해. 다 한울님이지. 한울님 아닌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가리지 말고 다 일체 똑같이 대해주세요. 내 손에 귀중한 게 있다고 합시다. 먹는 거라든가, 물건이라든가 내 손에 생겨서 누군가에게 갖다 주려면, 내 자식보다 남의 자식에게 더 많이 줄 마음이 생겨야 해. 내 자식은 조금 줘도, 남의 자식 많이 주고. 내 부모를 조금 드려도, 남의 부모에게 많이 드리고. 마음을 그렇게 쓰도록 바꿔줘야지. 그거 바꾸지 못하면 주문 암만 외워도 안 되고 경전을 암만 봐도 입에서만 달달 외우지 소용이 없어. 정답으로 들어가야 해. 천도교를 왜 해야 하냐? 천도교를 해서 한울님을 찾아야지. 그리고 한울님을 찾는 것보다도 내가 바로 잘해야 해. 이목구비 사지백태, 오장육부를 똑바로 잘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딴 거는 다 저절로 돼요. 범인들도 밥 먹고 나면 배부른 거 알고, 배고픈 거 알고 화장실에 가는 거 알잖아요. 알고 가잖아요. 그거는 저절로 다 알고서 느껴서 가는 거지. 도를 제대로 닦으면 그걸 느껴서 알고 가는 것처럼 매사 이래, 몸으로 느껴져. 그렇게 몸으로 느껴서 알게 되는 거야. 그리고, 중요한 것 또 하나는 남의 비밀은 말하지 말라. 지켜줘라. 나는 평생 천도교를 했어요. 내가 죽기 전에 후학들에게 왜 천도교를 해야 되는가? 이 천도교의 진리에 대해 말해주고 싶어요. 천도의 진리는 내가 깨달은 게 진리야. 내가 사람 되는 게 진리야. 하늘 사람 되는 게 진리야. 그거 안 되면 껍데기를 찾는 거지. 내가 아무리 배운 글이 없고 무식해도 내가 한울님을 위하는 마음, 식구들을 위하는 마음 그거는 알고 진리를 찾는 거지. 딴 게 없어. 그게 도야. 우리는 다 한울님 은덕으로 먹고 살아요. 땅에 실려서 하늘이 덮어주잖아. 그게 바로 땅은 어머니고 하늘은 아버지야. 그러니까 항상 어머니, 아버지를 찾아야 해요. 내 엄마 아버지도 돌아가셔서 한울님한테 합해진 거야. 그러니까 천지부모로 엄마, 아빠 찾으면 나를 낳아준 엄마도 거기 다 들어가는 거야. 그러니까 엄마를 못 봐도 항상 어머니 아버지 감응해 주시옵소서. 하고 심고를 드리는 거지. 종법사님이 마음에 품었던 스승님 말씀이 뭐였어요? 마음에 품은 스승님의 말씀은 제일 먼저 그거지. 내가 일용 행사를 잘 해야 한다. 첫째 부화부순 부모 잘 모시는 것 그거를 100점 만점으로 해야 된다 이거야. 부화부순도 100점, 부모님 모시는 것도 100점, 자식들 키우는데 때리고 욕하고 그러지 말라. 어린아이는 한울님이기 때문에, 한울님을 못 쓰게 된다. 애 때리면 죽는다. 내수도문에 다 있잖아요. 『탄도유심급』에 마음을 닦아야 덕을 알고, 덕을 오직 밝히는 것이 도니라. 덕에 있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믿음에 있고 공부에 있는 것이 아니요, 가까운 데 있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정성에 있고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은 듯하나 그러하고 먼 듯하나 멀지 아니하니라. 종법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지상천국은 어떤 모습인가요? 지상천국? 지상천국이 여기가 천국이여 이게 천국이여 그러면 여기서 천당을 찾아야지. 여기서 천당을 못 찾으면은 저 세상에는 천당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 그러니까 있다 하면 여기서 천당 찾은 사람이 거기 갈 수 있고 천당 못 찾은 사람이 있어도 못 가. 그러니까 여기서 천당 차원을 찾아야 돼요. 나 하나 다 닦아라. 한울님으로 닦아 놓으면은, 그러니까 다른 거 여러 가지 자꾸 생각할 거 없고 사심을 버리고 천심으로 발을 디디면 돼. 천심으로. 모든 게 내 말대로 전부 내 것이지, 다 남의 것이 아니야. 부모도 내 부모, 다 내 형제니까 언제든지 욕심 버리고 남을 미워하는 거 버리고 그것만 따라가면 되는 거야. 그래서 주문을 많이 외우고 주문 외워서 저절로 열어줘야지. 내가 반드시 열겠다. 이런 생각하지 말고 내가 부지런히. 생활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내 식구들한테 열심히 해주고 그게 도지 딴 게 도가 아니여 은성당 조동원 가리산수도원 원장 약력 포덕 67년 평안북도 구성군 이현면 진도동 출생 포덕 86년 우암 김동화 선도사와 혼인 포덕 88년 38선은 넘어 월남, 강원도 춘천에 정착 포덕 103년 충청남도 대덕군 탄동면으로 이주, 우암 김동화 선도사와 탄동전교실 운영 포덕 109년 충청남도 대덕군 유성읍으로 이주, 우암 김동화 선도사와 유성전교실 운영 포덕 110년 천도교종학원 수료, 유성전교실 전교사 포덕 115년 부산시 광안리로 이주 포덕 118년 강원도 홍천으로 이주, 홍천전교실 운영 포덕 120~포덕123년 3년간 독공수련 포덕 123년 가리산수도원 개원, 초대 원장 취임 포덕 128년 남편인 우암 김동화 선도사 환원(향년 79세) 포덕 134년 천도교 금강포 연원회 도훈 포덕 143년 가리산수도원 개원 20주년 포덕 153년 가리산수도원 개원 30주년 포덕 163년 가리산수도원 개원 40주년 <끝> 인터뷰영상 바로가기==>http://www.youtube.com/watch?v=JPTR63nSXFo&t=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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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당 조동원 종법사님을 만나다(2)(지난 호에 이어) 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던 날이었다. 홍천에 있는 가리산수도원으로 조동원 종법사를 만나러 갔다. 조동원 종법사는 1926년 평북 구성에서 타어나 19세에 우암 김동화 선생(1987년 환원)과 혼인하면서 천도교인이 되었다. 선생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극한 정성과 수련으로 천도교의 참진리를 깨닫게 되며 자기완성과 함께 많은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으로서 교단 발전에 기여해왔다. 가리산수도원은 1982년 8월에 작고하신 남편 김동화 선생과 함께 창설하여 현재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도교인이라면 한번쯤 깊은 수련의 참된 경험을 안겨준 성지로서의 기능을 해 왔다. 부화부순, 남편은 하늘이요, 아내는 땅이니까 첫째 부화부순을 잘해야 천지가 합일이 되겠죠. 천지 합일이 못 되면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부화부순이 못 되면 그 집안은 잘 될 수가 없는 거야. 내가 하나 닦으려고 하는 건 쉬운 거지. 눈에 보이는 건 소용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정에서 부모는 부모의 도리, 자식은 자식의 도리,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다 남의 부모가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 똑같은 마음을 가져야죠. 저는 잘 못하면서 남들 잘하라고 그러면 욕밖에 더 먹는 거 없어요. 그러니까 가정에서 행복을 찾은 사람은 밖에 나가도 행복해. 언제든지 웃는 모습으로, 항상 웃어야 해요. 화가 난 얼굴로 무섭게 보이면 한울님이 감응을 안 하시거든요. 한울님이 감응할 수 있도록 나부터 공부를 하자. 나부터 닦고, 내가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나는 후학들에게 어려운 도를 닦으라고 하지 않아요. 춘하추동 사시절 농사꾼들은 제대로 도를 닦는 거예요. 봄이 오면 심고, 여름이 오면 가꾸고, 가을이 오면 거둬들이는 것. 하늘이 비를 주고 해를 주니 모든 것을 하늘과 땅이 먹여주고 입혀주는 걸 잘 모르는 거예요. 우리 도 닦는 사람은 앞으로 많은 지도자로 성장해서 후학들에게 바르게 가르쳐 줘야 합니다. 이 늙은이보다야 젊은이들이 더 잘하겠지마는 경전 하나 하나를 먼저 다 외워야 해요. 지극한 정성, 그리고 마음을 바로 하는 데 있어요. 마음을 똑바로 해야 해요. 지금은 서울을 차로 가지만 옛날엔 걸어서 다녔거든요. 서울 가는 길을, 대전으로 갈 수 있고 춘천으로 갈 수 있어요. 이게 바로 만 길이예요. 만 길이 흩어지는 것, 지금 치매 걸린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입버릇, 눈버릇, 귓버릇을 다 잘못 쓴 거예요. 지금부터 바른 현실의 공부를 택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하여튼, 스승님의 말씀은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닦아야 덕을 알고 덕을 오로지 밝히는 것이 도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많이 들어도 소용없어요. 한두 가지 들어서 그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전부가 아닌 게 없기 때문에 식사할 때도 내 마음에 꼭 맞게 식사를 해야지 지나치게 먹으면 배탈이 나고 위장병이 생기거든요. 그러니까 말도, 그대로 실천을 하게끔 해야지 말만 많이 해준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실천을 해서 앞으로의 대덕의 큰 일꾼들이 돼 주시기를 간절히 저는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게 소원입니다. (환원하신 남편분과 함께 수도원을 세우시고 신앙생활도 하신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우리 우리 부부는요 나이가 차이가 많이 집니다. 결혼할 때 우리 신랑님은 36세, 저는 19세였어요. 그때는 왜정시대예요. 왜정시대에는 처녀 공출을 했습니다. 구성군 이원면 진도에서 제가 공출에 들어갔어요. 빨리 결혼을 하면은 공출에 면제가 된다고 해서 결혼을 했어요. 남편은 천도교를 했거든요. 천도교인이에요. 저는 예수 믿었지요. 예수를 믿으면서 천도교 믿는 집에 갈 수가 없지, 안 가지. 그런데 그 급한 상황이니까 그때 처녀 공출을 가면 처녀 껍데기를 까서 그걸로 탑을..(세운다고) 그렇게 하면 전쟁에 이긴다고요. 그러니까 결혼 상대가 늙었거나, 젊었거나, 바보거나 가릴 새가 없었던 거예요. 결혼을 해가지고 제가 왜놈 때문에 내가 영감한테 시집갔다고 그렇게 일본사람들 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천도교 믿는 사람한테 시집을 와가지고 천도교를 배우고 몰랐던 글을 배우고 그랬어요. 남편이 경전을 배워주면서, 몰라도 몸으로 실천을 하면 다 알게 된다고, 그렇게 가르쳐줘서 그때부터 주문을 많이 외웠어요. 남편 말이 한울님이 몸에 베어서 전부 가르쳐 준다고요. 그 말을 듣고 경전을 배우고 한문도 배우고, 책을 한 권 한 권 다 배웠습니다. 그렇게 가르쳐주신 분이 남편이에요. 거기서부터 천도교에 재미를 붙여가지고 나중에는 일본사람 욕을 안 하게 되었어요. 너희 때문에 내가 천도교를 찾았다. 이렇게 마음을 바꿔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어느새 세월이 가서 이제는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하고 싶은 데도 못 가서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떠나기 전에 앞으로 진실한 천도교인이 좀 돼 주기를, 부탁을 좀 하고 싶습니다. 수련을 하다 보면, 하품이 자꾸 나잖아요. 하품이 나는 이유를 알아야 해요. 몸 속에 찌꺼기가 빠져나오는 겁니다. 눈 감고 속으로 주문을 외우면 자꾸 눈물이 줄줄 나옵니다. 눈에 청소를 하는 겁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자세를 똑바로 하고 한울님께 어머니, 아버지 저를 잘 자게 해주셔서 잘 잤습니다. 심고 드리고 오늘 하루 모든 일을 잘 되게 해달라고 심고 드리고 거기 앉은 자리에서 경전 두 페이지를 읽어요. 그리고, 오늘 하루에 그대로 실천에 옮기게 해주옵소서, 하죠. 지금 제가 나이 100살이 다 되었는데 이제 뭘 옮기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닌데, 지금도 하고 있어요. 내가 잊어버리지 않아야 후학들에게 한마디라도 더 해주지 않겠는가 싶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나는 배운 글이 없어요. 일자무식이라도 몸부터 닦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잘들 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제 남편은 천도교를 열심히 하신 분인데, 중국에 가서 대학까지 다녔지요. 저와 결혼하기 전에 상처를 했고, 나는 공출에 들어가게 생겼으니까 급하게 결혼을 했지요. 남편은 천도교 잘해서 장가 잘 들었다고 하고, 나는 그런 분을 만난 거예요. 우리는 한울님 덕을 본 거죠. 당신도 한울님 덕을 봤지만 나도 한울님 덕 봤다고요. 저 시집을 가서 보니까, 시댁이 큰 부잣집이야. 남편의 형제가 오형제인데, 산에 가서 우물을 파고 조그마한 동이를 이고 가서 청수물을 떠 가지고 와서 밖에다 선반을 매놓고 거기다 올려놓고 9시가 되면 저에게 “동서, 가서 청수 물 떠 와라.” 그렇게 말해요. 청수 모셔오라고요. 큰 독이 몇 개 있었고 그 독을 쭉 돌려놓으면 그 독에다 물을 다 길어다 놓아야 해요. 아니 물이 저렇게 많은데 왜 산에 가서 청수물을 새로 떠다가 놓지? 그때까지는 모르니까 물이 뭐가 다른가 싶어서 청수 그릇을 가지고 뚜껑을 떠서 내가 먼저 먹어봤는데 ‘그 물이 그 물이지. 똑같은 물인데 이 사람들이 미쳤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청수물을 잘 떠서 갖다 모셔다 드리고 했어요. 그렇게 한 이십 일. 시집가서 이제 막 한 달쯤 지나갔는데, 내가 예수에 미쳤던 사람인데 천도교에 미치려면은 어떻게 미쳐야 됩니까? 남편에게 물어봤더니, 독공수련을 좀 해야 된다고 해. 그래서 독공수련에 들어갔어요. 시집은 큰 부잣집이니까 큰 창고가 있어요. 창고에 판대기 문을 해서 닫고 거기에서 시집 갈 때 해 간 병풍을 치고 돗자리를 깔아놓고 촛불을 켜놓고 거기서 수련 20일만 해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저녁을 해먹고 설거지를 다 하고서는 창고에 가서 문을 꼭 닫고 촛불 켜놓고 청수물 떠 가지고 그리 들어가는 건데 한번 찾아보자. 열 사흘 만에 관을 쓴 할아버지가 탁 나타나는 거예요. 무서워서 눈을 딱 떴어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없어져요. 왜 할아버지가 보일까 그러고서는 또 눈을 감고서 염주알을 105회 또 돌렸는데 할아버지가 또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염주를 내려놓고 촛불을 끄고서는 방에 들어가 가지고 남편한테 그 얘기를 하니까, “대신사님을 본 것 같소.” 하시는 거예요. 집에 대선생님 사진이 있었거든요. 남편이 사진을 펴 놓으면서, 이 분이냐고 물어봐요. “맞아요, 이 영감이에요.” 남편이 무서워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했어요. 그때 집에서는 명주를 두드려서 바지 저고리 바느질을 하고 그랬는데, 남편이 궂은일, 힘든 일을 더 많이 하라고. 그래야 깨닫는다고 해요. 그런데 동서들이 제가 궂은일을 하려고 하면 쫓아내는 거예요. 들어가서 바느질이나 하라고요. 하지만 남편한테 들은 말 때문에 나는 편안히 앉아서 바느질이나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날은 춥고 눈이 쌓여서 푹푹 빠지는데 저고리에 솜을 넣고 머리에 쓰는 수건에도 솜을 넣고 일을 합니다. 그렇게 추웠어요. 우리가 살던 평안북도가 소변을 누면 얼 정도로 그렇게 추웠어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편안히 있어서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의 일과는 저녁 9시 기도식을 하고 나서 오 형제가 돌려 앉아서는 삼을 삼아요. 그러다가 12시가 되면 방방으로 들어가서 다 자거든요. 그때 내가 새벽에 물을 길어 왔어요. 독에다가 물지게를 지고 갔다 와서 붓고 거기서부터 내가 결심을 하고서는 독들을 다 열어놓고 물지게 지고 일곱 지게 여덟 지게 졌어요. 뚜껑을 갖다 씌어놓고 방에 들어가면 남편이 추운 데 나가서 고생했다고, 이불 덮어주고 그랬어요. 내가 잘해야 복을 받는다. 이게 복이로구나 그러니까 남편한테도 사랑을 받는 구나 싶었어요. 맏동서님이 또 내가 물을 길어 온 것을 알고는 아이고, 그러면 되느냐고, 나를 끌고 방으로 들여 보내고는 밖에서 잠궈요. 자라고요, 맏동서가 밥 다 하고는 다 차려놓고 밥 먹자고 하는데, 아 그때 그걸 깨달은 거예요. 내가 잘하면 복을 받는구나, 내가 잘하니까 맏동서가 이렇게 사랑해주는구나 하면서 그때부터 실제로 현실이 도로구나 하는 걸 내가 알은 거야. 현실이 도지 현실이 아닌 무형을 따라가면 안 돼요. 밤에 달밤에 나가보세요. 달밤에 나가면 내 그림자가 있잖아요. 실제인 사람한테 가 물어야 답이 있지. 내 그림자 앞에 가서 물으면 답이 없어요. 내가 혼자 수련을 하는 것이 그래요. 무형으로 보는 것은 그림자와 같아요. 소용없는 것, 허공에 빠지는 겁니다. 그러니 후학들은 앞으로 그런 데 빠지지 말고 실제로 하시고, 실제로 남의 부모도 내 부모 남의 형제도 내 형제 남의 아들 내 아들 마음으로 진짜 그렇게 먹고, 그러면 머지않아서 천사문답으로, 모두 한울님의 뜻으로 돌아옵니다. <다음에서 계속> 인터뷰영상 바로가기==>http://www.youtube.com/watch?v=JPTR63nSXFo&t=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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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당 조동원 종법사님을 만나다(1)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던 날이었다. 홍천에 있는 가리산수도원으로 조동원 종법사를 만나러 갔다. 조동원 종법사는 1926년 평북 구성에서 타어나 19세에 우암 김동화 선생(1987년 환원)과 혼인하면서 천도교인이 되었다. 선생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극한 정성과 수련으로 천도교의 참진리를 깨닫게 되며 자기완성과 함께 많은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으로서 교단 발전에 기여해왔다. 가리산수도원은 1982년 8월에 작고하신 남편 김동화 선생과 함께 창설하여 현재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도교인이라면 한번쯤 깊은 수련의 참된 경험을 안겨준 성지로서의 기능을 해 왔다. 글쓴이가 선생의 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간 날,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더 깊은 질문을 향하게 되었다. 이날 조동원 종법사님의 말씀을 옮겨 적으며 선생이 살아오신 삶을 상상해보며 긴 호흡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제가 이제는 떠나기 전에 우리 후학들에게 간곡히 한 말씀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수도원 원장으로서, 하루에 40명, 50명, 60명까지 지도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바르게 수도를 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어요. 내가 밝아지는 것부터 원하니 그게 틀렸거든요. 내 마음부터 고쳐야 합니다. 이 마음속에 한울님이 계시거든요. 그러니까 마음을 잘 닦아서 성령과 쌍령이 돼야 해요. 스승님께서 경전으로 말씀을 다 하셨습니다. 탄도유심급을 보면 아주 구체적으로 정답까지 다 나와 있습니다. 천지부모님 편, 내수도문 편, 거기 전부 정답이 있어요. 그러니까 딴 거보다도 그 세 편은 반드시 외워야 합니다. 입으로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라 거기 정답이 나와 있어요. 그 정답을 그대로,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하거든요. 그걸 그렇게 가르쳐 주어야 하고 수도생은 그 정답에 따라야 하는데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무슨 수도를 얼마나 했다, 경전을 얼마를 봤다는 것을 내세우려고만 했지, 자기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다 이거요. 지금 우리 천도교가 쇠운이거든요. 우리 스승님께서 참 참혹스럽게 그 고생을 하시고 돌아가셨지요. 편안히 잘 가실 수 있는 능력이 다 있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돌아가셨느냐, 앞으로의 천도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가신 거거든요. 앞으로 천도 세상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후학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큰데, 경전에 정답이 다 나와 있다고 했잖아요. 남의 부모도 내 부모요, 남의 형제도 내 형제요, 남의 자식도 내 자식이요. 이런 마음으로 내 자식, 내 형제, 내 부모를 같은 머리, 같은 생각으로 대해야 남의 부모도 내 부모한테 하듯이 하거든요. 그래서 그 실천의 길을 간곡히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57세에 수도원 개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100살이 다 되어 가는데 책 한 권을 못 냈습니다. 제가 일자무식이에요. 저 국민학교도 못 다닌 사람입니다. 책을 한 권 못 내고 말로써, 그러나 많은 말이 필요 없고 간단히 스승님의 말씀을 배워가지고 스승님과 같이 실천에 옮겨 달라. 얼마 안 있으면 우리 천도세상 된다.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춘하추동 사시절이 현실이 그게 도입니다. 봄에는 씨앗 뿌리고, 심어야죠. 부지런히 하는 사람은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거고, 게으른 사람들은 못 해요. 우리가 도를 닦는다고 하면, 현실이 도지 그냥 눈으로 허깨비를 보는 거, 들리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 (지도하는 입장에서)이를 절실히 끊어주지 못한 것은 참 후회가 됩니다. 발령받은 사람은 많은데 발령받으면 도를 깨달아서 사람이 변화가 돼야 하거든요. 선생들이 잘 가르쳐야 하는 겁니다. 제가 전국에 안 다니는 데가 없이 참 부지런히 다니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면서는 이런 이야기를 주로 했습니다. 제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다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셨다고 어머니, 아버지를 안 찾는 게 아닙니다. 땅은 어머니요, 하늘은 아버지요. 천지 부모님이 내 부모입니다. 그래서 심고 드릴 때, “어머니, 아버지 잘 좀 가르쳐 주세요.” 그렇게 부탁을 해요. 저는 ‘한울님’, ‘천지부모님’이라고 하지 않고 ‘어머니, 아버지라고 그럽니다. 경전에 천지 부모 편을 보세요. 천지 부모님의 부모랑 내 부모가 같다고 정답이 나와 있어요. 정답대로 내가 실천을 해서 하면 내 몸에 모신 한울님이 전부 가르쳐줘요. 천사 문답이라고 하죠. “어머니 아버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면은 정답이 나와요. 또 이것만 기다리고 하지 말고 사람이 한번 바뀌어야 하겠다. 그래서 옛날부터 입버릇, 손버릇, 몸버릇 이 세 가지만 고치면 군자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이목구비, 사지백태, 오장 육부가 다 내 거예요. 한울님이 주신 그것만 바르게 쓰면 되는데. 내가 금덩이가 몇 개가 있다 하더라도 내게 있을 땐 내 거라고 하지만 누가 훔쳐 가면 그 사람 것이 되지, 그때부터는 내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 물건을 누가 훔쳐갔을 때, 욕을 하고 미워하고 그러면 안 돼요. ‘갖다가 잘 써라’, ‘잘 쓰게 해주십사, 그 사람 죄를 주지 마소서.’ 이렇게 심고를 드려야 합니다. 훔쳐가는 걸 봤어도 못 본 척, 누구한테 들어도 못 들은 척, 내가 다 알아도 아는 척하지 말아야 해요. 그 한 가지를 내가 지키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게 해야 스승님이 가르쳐 주신 정답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가정이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자식은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해요. 내가 부모님께 효도하면 그 복은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깐 결혼하면 시부모님 잘 모시고요. 일용 행사가 도지 딴 게 도가 아니다 이거야. 그러니까 일용 행사를 절실히 잘해 주십사 하는 것이 내가 떠나기 전에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고, 그게 제 소원이에요. 남이야 잘하거나, 못하거나 나쁘게 말하지 말고 언제든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말하는 것은 그 안에 모셔져 있는 신령님이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똑바로 보고 직관을 잘해야 해요. 어떤 사람에 대해 아무 죄도 없는데 남의 말 듣고 나쁘게 말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직관으로 봐야 해요. 가정에서도 부모는 부모의 도리,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잘 하려고 서로가 노력을 해야 해요. 그게 도지 딴 게 도가 아니에요. 그래서 24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죠. <다음에서 계속> 인터뷰영상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JPTR63nSXFo&t=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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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천도교서울교구 故 권암 최병권 선도사 환원천도교서울교구 故권암 최병권(성신포, 향년88세) 선도사가 포덕 165년(2024년) 2월 27일(화) 숙환으로 환원하였다. 유족으로는 상주-최정규, 최창호 딸-최미영, 최경숙, 자부-이명숙, 사위-박왕현, 김재환이다. - 장례식장 : 양주 장례문화원 202호 - 주소 : 경기 양주시 평화로1357번길 8 - 전화 : 031-863-4444 - 환원기도식 : 포덕 165.2.27(화) 오후 9시 - 영결식 : 포덕 165.2.28(수) 오후 9시 - 발인 : 포덕 165.2.29(목) - 장지 : 안성 유토피아 <유족> - 상주 / 최정규, 최창호 – 딸 / 최미영, 최경숙 - 자부 / 이명숙 - 사위 / 박왕현, 김재환 <연락처> 최창호 / 010-4311-1506 <마음전할 곳> 신한은행 / 110123588928 / 예금주 : 최창호 <온라인부고장> https://funein.com/b/f/1551983/118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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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합니다! (칭찬주인공, 수암 정의수)포덕165년 2월 칭찬릴레이, 시암 정의적 진주시교구장 추천 칭찬 주인공은 부산시교구 수암 정의수 동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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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동귀일체가 필요할 때(2)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2시간 반,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부산으로 향하며 걸음걸음 걷는 땅,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끓는 청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역사가 보였다. 먼 이야기가 아닌,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내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늘 걷는 땅은 어제와 다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렇게 역사의 한 획이 된다. 그 선명한 줄기를 따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넘나드는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난다.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지난 기사에 이어) 천도교신문 : 대를 이어 천도교단을 위해 헌신해오셨는데,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어린시절, 청년기의 교구장님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게 됩니다. 박차귀 교구장 : 어릴 적에 제가 중고등학교 때 우리 부산시 교구에서는 '소년의 서사', '내성당 서사' 이런 거 외워보라고 하면 늘 제가 단골이었어요. 아무도 그걸 잘 안 외우려고 하니까 집행부에서 저더러 매주 나와서 하라고 하죠. 그럼 나도 매번 내가 해야 되는 걸로 생각을 했고요. 그때 천덕송을 부르면 제가 오르간으로 연주하면서 창호지에 쓴 가사를 넘겨가면서 함께 부르곤 했어요. 아무튼 제가 좀 다른 애들보다 용기있게 앞장서서 했어요. 천도교 공부를 하면서 그 옛날에 조기주 선생님이나 백세명 선생님, 김용문 선생님 등 제가 그 분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를 했어요. 대학 막 들어갔을 때였을 거예요. 서울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우이동에 내려서 의창수도원 걸어가는 길, 나는 그 길을 참 좋아했어요. 그러고보니 옛날이 그리울 때가 참 많습니다. 천도교신문 : 젊은 시절이 그리운 마음도 있으실 거예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또 의창수도원까지 가시는 길에 실린 열정도 그렇구요. 박차귀 교구장 : 저는 방학을 이용해서 공부를 했어요. 여름방학이었는데, 의창수도원 가는 길이 지금은 도로가 났는데, 그 길이 다 개울이었어요. 휴식시간이면 그 개울물에 발을 담그던 추억이 있죠. 그때는 그런 낭만이 있었는데 요즘은 너무나 삭막하다는 그런 아쉬움도 있습니다. 최덕신 교령님 때였는데, 제가 천도교 청년회 주최 웅변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최덕신 교령님 자택에도 가서 하룻밤 자고 사모님하고 같이 대화도 나누고 그렇게 많이 귀여워해 주시던 기억이 많이 나고요. 돌이켜보면 추억들이 참 많아요. 그 이야기들은 제가 맨날 며칠 해도 많습니다.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으로부터 내려온 집안의 역사, 교구장님께서 어릴 때부터 쌓아온 신념, 그 단단한 힘이 지금까지 교구장님을 끌고 오신 것 같습니다. 박차귀 교구장 : 그 영향을 받아서 지금까지도 KCRP, 민족종교협의회에서도 제가 여성회장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의 경험이 생각의 폭을 넓혀준 것 같고, 그런 경험들로 인해 천도교를 사랑하는 만큼 또 이웃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시일에는 제 건강이라든지 또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해서 젊은 사람들한테 이제 넘겨줘야 되는데, 아직 더 해도 된다고 그래서 제가 아직 더 하고 있습니다.(웃음) 천도교신문 : 굉장히 많은 활동들을 하셨는데 여성 리더로서 천도교에서 또 이 시대의 종교의 역할하고 같이 해서 한 말씀해주세요. 박차귀 교구장 : 지금은 여성 시대라고 하죠. 모성의 마음으로, 우리가 어머니의 마음으로 신앙을 한다면, 어쩌면 여성 지도자가 더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 여성회가 곧 100주년이잖아요. 남성들이 자꾸만 더 우리 여성들을 뒷전으로 생각하는 문제들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결과도 있었습니다. 천도교는 남성들만 하느냐, 왜 남성들만 다 직책을 갖느냐 하는 말을 제가 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여성 교역자를 많이 양성해서 여성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해 내야만 교단이 더욱더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뒤에 후배 세대들이 큰 역할들을 하겠지만 좀 더 좋은 세상을 보고 가야 하는데, 하는 그런 아쉬움도 같이 듭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제 나이가 들은 것 같아요. 천도교신문 : 교구장님께서는 동귀일체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진정한 동귀일체란 무엇일까요? 박차귀 교구장 : 동귀일체가 우리가 하나의 뜻으로 돌아가 같이 힘을 모은다는 뜻이라면, 하나가 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을 때 진정한 동귀일체가 될텐데, 형식적으로 입으로만 동귀일체가 되자고 하지 말고 반목과 갈등에서 화해와 단결로 각자위심에서 공동체형성으로 나아가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한울님의 큰 정신에 합쳐서 한울님과 한 몸이 되자는 것, 진정한 동귀일체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는 ‘吾心 卽 如心’ 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신문 : 교구장님께서, 아버님, 할아버님부터 천도교를 해오셨는데 후학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도 있으실 것 같아요. 박차귀 교구장 : 저도 천도교를 제일 우선으로 하고 살라고 말하면 제 동생들부터도 저와는 다른 마음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제 동생들은 언니가, 누나가 열심히 하니까 우리는 적당히 해도 되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할 때, 그럴 때는 생각이 많아지거든요. 그 각자가 다 자기 신앙관이 뚜렷해질 수 있도록 신앙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교단에서도 많은 연구도 해야하고 교육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옛날하고 다르기 때문에 그 시대에 발맞춰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천도교의 진리는 이미 시대를 앞서 걸어왔습니다. 우리가 행동으로도 그에 맞게 펼쳐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곱게 내려앉을 때, 함박눈이 푹푹 내려 차곡차곡 쌓일 때, 박차귀 교구장의 열정적인 걸음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손길을 내밀던 모습을 오래 생각했다. 동귀일체로 함께, 잠깐이라도 걸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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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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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동귀일체가 필요할 때(1)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2시간 반,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부산으로 향하며 걸음걸음 걷는 땅,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끓는 청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역사가 보였다. 먼 이야기가 아닌,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내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늘 걷는 땅은 어제와 다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렇게 역사의 한 획이 된다. 그 선명한 줄기를 따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넘나드는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난다.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천도교신문 :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님 반갑습니다. 교단의 역사와 함께 오랫동안 헌신해오셨습니다. 천도교신문에서 교구장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박차귀 교구장 : 반갑습니다. 이렇게 먼 길 와주셔서 더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에게는 어찌 보면 천도교가 내 삶의 전부라고 얘기할 정도로 저와 천도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숙명적인 관계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더불어서 살아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천도교신문 : 천도교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천도교인으로 사셨습니다. 어릴 적 이야기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릴 때 기억나시는 장면 같은 것 있으세요? 박차귀 교구장 : 우리 집에 제일 많은 건 책이었어요. 제가 어린이 책 귀한 줄도 모르고, 학교에서 옛날에 헌책 가져오라고 해서 어린이 책을 하나 갖고 갔더니 선생님이 보시고는 너무 좋아하는 거야. 나는 선생님이 좋아하시니까 저리 좋아하시면 또 갖다 드려야 되겠네하고 갖다드렸지. 나중에 그 책이 천도교에 대한 책이었다는 걸 알고 많은 후회를 했죠.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환원하시기 전날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소고기가 귀했어요. 우리 집 밑에 유명한 갈비 집들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그때 갈비를 사가지고 오셔서는 무릎에 저를 앉히고 이렇게 먹여주더라고요. 그렇게 할아버지가 유독 저를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내 위에 언니가 있었는데 언니가 일찍 가버렸어. 그러고 나니까 저를 아주 귀하게 대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이름이 버금 차, 귀할 귀 자예요. 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러고보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가 벌써 70년이 흘렀네요.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께서 부산시 교구를 설립하신 박찬표 선생님이시지요. 할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시겠어요.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는 제가 학교 초등학교 막 들어갈 때쯤 환원을 하셨어요. 1월 28일이었어요. 가장 추운 날이었어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이 참 추웠다는 것과 교구에서 교인들에게 특별 동계수련을 지도하시다가 환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수련에 너무 열중하셨던 것 아니었나 하고 생각이 듭니다만 요즘 같으면 좋은 보약도 좀 잡수고 했더랬으면 할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그런 아쉬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일찍 가셔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할아버지가 써놓은 일기책이 있습니다. 한문으로 돼 있어서 제가 해독을 못 했어요. 언젠가는 책을 만들어 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박찬표 선생님은 우리 역사에서도 아주 의로운 일을 하셨던 독립운동가로 기록되어 있더라고요. 신인간 통권 582호(포덕 140년 2월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인암 박찬표 선생은 3.1운동 당시 보성학교 2학년 시절,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구치소와 부산교도소에 수감된다. 이후 26세 때인 포덕63년 3월 17일 묵암 신용구 선생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한다. 이후 조국 독립의 길과 진실한 삶이 천도교에 있음을 깨닫고 천도교의 불모지인 부산에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씨앗을 뿌리내린다.(성주현, ‘부산 지역에 천도교를 심은 인암 박찬표’, 신인간 582호, 1999)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께서 보성전문학교 다닐 적에 독립 3.1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발각되어서 구치소에 계셨어요. 국가기록원에도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는 그 기록도 좀 더 조사하고 보완해서 책을 발간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잡지들이나 저서들은 할아버지께서 남겨놓은 책들로 영인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신인간』, 『개벽』, 『당성』 등으로 대표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우리 천도교에서는 소장자와 기증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아버지께서는 천도교의 발전을 위해 누구든지 와서 보고 가라고 하셨고 많은 분들이 오셔서 보고 가시는 걸 제가 봤습니다. 어릴 적에 부산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들이 우리 집에 와서 책을 보셨고요. 서울 중앙총부의 신인간에 계시던 분들도 많이 와서 그 책들을 보고 가셨고요. 그렇게 할아버지가 교단의 책들을 잘 모아놓으셨기 때문에 영인본을 낼 수 있었다는 것에 저는 참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소중하게 소장하셨던 분들에 대해서도 좀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선생님은 어릴 적에 할아버님을 많이 따르셨나요? 박차귀 교구장 : 예. 제가 어릴 적에는 조금 활발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어느 교인 집에 순회를 가시면 제가 꼭 따라갔어요. 손잡고 따라간 기억이 나요. 오늘은 어디 어디를 가자 하시면, 제가 그냥 앞장서서 가는 거예요. 골목골목을요. 그럼 할아버지가 잘 찾는다고 참 좋아하셨어요. 그러면 나는 그 칭찬에 더 신이 나가지고 매일 할아버지가 가자 하시면 따라갔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참 잘했다, 수고했다 하시면서 벽장에서, 옛날에 그 박하사탕 같은 걸 벽장에 두셨거든. 그 사탕 하나 주시는 거, 그게 그때는 귀할 때니까 그거 하나 먹는 재미로 기분 좋게 다녀오곤 했습니다. 또 옛날에는 차가 별로 없어서 걸어 다녔을 때거든요. 우리 천도교인들은 흰 도포자락을 펄럭이면서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다니셨던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할아버지랑 순회를 갔다오면, 할아버지는 저에게 “너는 참 어찌 그리 기억력도 좋냐” 하시면서 참 대견해 하셨어요.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의 손녀를 향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정말 할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참 아쉬우셨을 것 같아요.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께서 유치원을 경영하셨는데, 그때 마당이 있었어요. 그러면 제가 그 마당을 막 뛰어다니고 그런 기억이 있죠. 너무 일찍 가셔서 그 뒤에 추억이 없는 게 좀 아쉽습니다. 정말 더 오래 사셨더라면 저하고 많은 추억을 남겼을 텐데 말이죠. 저는 항상 그런 트라우마가 있었어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단명하셨거든요. 다행히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 나이보다 훨씬 더 이렇게 오래 살고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교구장님께서 여성 교구장님이시고 또 여성회장도 역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도교 집안 여성의 이야기도 궁금해집니다. 박차귀 교구장 : 우리 할머니가 천석꾼 집안의 딸이었는데 할아버지한테 시집을 와서 천도교 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대요. 그런데도 불평, 불만 한마디 없이 그렇게 따라주는 것이 내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고 정말 성내는 얼굴 없이 내조를 잘 하셨다고 해요.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조금 일찍 환원하셨는데 할머니가 우리 부산시 교구 초대 여성회장을 하셨지요. 지금 우리 부산시 교구 여성회가 80년이 더 되었거든요. 지방 교구 중에는 여성회가 빨리 창립이 됐죠. 할아버지의 영향인 것 같아요. 초대 여성회장을 하시다가 그 뒤로 다른 분이 여성회장을 하시다가 우리 어머니가 여성회장을 하셨어요. 제가 고등학교가 다닐 때였지요. 서울에서 중앙위원회가 있으면 내가 어머니 대신 부산시 교구 대표로 서울에 올라가곤 했어요. 우리집 여성들은 고생을 많이 하셨죠. 손님들이 참 많이 오셨어요. 지방에서 오시는 교인분들이었죠. 그때는 여관이 별로 없었으니까 교인분들 오시면 할머니나 어머니나 고생하셨지. 늘상 교인들 밥 해드리고 대접해드리고 그러셨어요. 어머니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88세에 환원하셨습니다만, 양반집 귀한 딸이었는데, 고생을 좀 하셨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인물이 참 좋았어요.(웃음) 요새 젊은 사람 같으면 아마 그렇게 살아라 해도 못 살 거야. 나도 그렇게는 못 할텐데,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도 내가 이겨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천도교를 잊지 말고 지켜야 한다고요. 그런 이야기를 해 주셔서 저도 열심히 그 뜻을 받들어서 하고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