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세계 잼버리에서 꿈과 희망을 나누세요! - ‘국악신동’ 김태연 홍보대사재생버튼을 누르시면 동영상이 재생됩니다. Draw your Dream! 세계스카우트잼버리 홍보대사 아기호랑이 김태연입니다! 스카우트잼버리 홍보대사를 맡게 되어 너무너무 영광입니다. 이 멋진 행사가 우리나라, 그리고 저의 고향인 부안에서 개최된다니 너무너무 기대되는데요, 2023년 8월 스카우트잼버리에 참가하는 모든 분들이 꿈과 우정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국민 여러분들도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자료제공 :(www.korea.kr)]
-
오강남 교수 초청특강
-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5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 216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동학농 민혁명기록물」, 「4.19혁명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 산 ( UNESCO 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19혁명기록 물」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먼저,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1894년 ~1895년 조선에서 발발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185점의 기록물로, 조선 백성 들이 주체가 되어 자유, 평등,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기 위해 노력했던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또한, 「4.19 혁명기록물」은 1960년대 봄 대한민국에서 발발한 학생 주도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1,019점의 기록물로, 1960년대 세계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친 기록유산으로서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중앙총부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 목록은 다음과 같다. 오세용 부참모장 임명장, 무장 포고문 필사본, 나동환 교장 임명장, 홍재인 대정 임명장, 정순경 교장 임명장, 이승룡 교수 임명장, 양언남 봉헌 임명장, 이수방 접주 임명장, 최운용표 등 9건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게 된 근본 원인은 동학이 당시 민중의 의식을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天主)을 모신 평등한 사람’이라는 동학사상이 동학농민혁명의 기본 정신이었고 이를 이루기 위한 혁명이었다. 한편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 『용담유사』가 이번 세계기록유산으로 함께 등재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는 의견이다.
-
제129주년 동학농민혁명 백산 대회 기념행사제129주년 부안 동학농민혁명 백산 대회 기념행사가 5월 1일 오전 9시부터 부안 백산 성지 및 백산면 일원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백산고등학교 야외무대에서 거행된 기념식에는 주용덕 천도교종무원장, 권익현 부안군수, 김광수 부안군의회 의장, 김정기, 김슬지 전북도의원, 배의명 부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신순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군의원을 비롯한 여러 기관단체장과 기념사업회 관계자, 천도교인, 군민, 학생등 4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주용덕 종무원장은 축사에서 “백산은 동학농민군이 혁명군으로서의 체제를 정비하여 그 위용을 갖춘 역사적인 혁명의 성지이다. 그리고 동학의 정신은 우리 역사가 어려울 때마다 민중의 희망이었다. 동학의 정신이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나갈 수 있도록,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동학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말했다. 동학농민혁명 백산 대회는 1894년 5월 1일(음력 3월 26일), 부안 백산에서 대규모의 군중이 동학농민혁명군으로 조직화하고,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대의를 대내외에 천명한 격문과 사대명의, 군율을 선포하는 등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
종학대학원 상주지역 동학유적지 답사종학대학원(원장 이상면)은 4월 29일 오전 8시 서울, 부산(분원장 송봉구) 등에서 각자 출발하여 식당 (두락: 상주시 식산로 112)에서 만나 먼저 점심식사를 하였다. 부산분원은 올라오는 길에 문경 새재를 답사한 상태였다. 답사는 성주현 교수가 동학혁명의 현장인 ①상주 관아터(향청), ②해월신사 교조신원운동 전개 당시 머물렀던 왕실촌 ③그리고 동학하면 괴질도 비껴간다는 신화를 만든 전성촌 등을 안내하였다. 이번 현장체험에는 서울과 부산지역 원생과 풍기의 금주연 동덕, 대구의 이승호 동덕 등 30명이 넘게 참가하여 높은 참가율을 보였다. 상주는 대신사뿐만 아니라 대신사의 박씨사모님과 가족들 그리고 해월신사의 흔적이 여러 군데 있다. 상주 동학 천도교와 동학 혁명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다. 대신사 유적지: 화령, 낙동 상주는 대신사께서 체포되어 압송 도중 상주 화령 (12.15)에서, 또 상주 낙동(1.4)에서 각각 하루를 묵었 다. 경주 용담에서 대신사가 체포되신 때가 계해년(포덕 4년, 1863) 12월 10일이다. 서울로 압송되던 길은 경주-영천-대구-선산-상주 낙동-상주 화령-보은-직 산-오산을 거쳐 과천(12.29)까지 갔다가, 철종이 사망 하여 국상이 나자 과천-용인-충주-요성-유곡-상주 낙동-선산을 거쳐 대구(1.13)까지 다시 압송되었다. 그리고 고문과 재판 끝에 갑자년(1864년) 3월 10일 순도하셨다. 동관음 포덕 8년(1867) 2월에 신사께서 울진군 죽변리에서 예천군 수산리로 옮겨 살게 되고, 박씨 사모님을 비롯한 대신사 가족은 상주 동관음의 육씨 집안에서 은신하였다. 화남면 동관리 (동관2리 마을회관: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3길 84) 전성촌 포덕 26년(1885) 9월, 신사께서는 가족을 거느리고 상주 전성촌으로 옮겨온다. 여름옷을 입은 신사의 가족은 가재도구도 양식도 없었다. 6월 관졸들이 보은 장내를 급습하였을 때 급히 피신한 때문이었다. 포덕 27년(1886) 4월에 신사께서 제자들에게 일러 말씀하기를 “금년에는 악질(콜레라)이 크게 유행하리니 도인들은 기도에 힘쓰는 동시에 특히 청결을 주로 하라.” 하라 하셨다. 이 해 6월에 과연 괴질(콜레라)이 크 게 유행하여, 수만 명이 죽었고 서울에서만 만 명 넘는 사망자가 보고되었다. 그러나 동학하는 도가는 무사하였을 뿐 아니라, 신사께서 사시는 마을 40여 호에도 병에 걸린 자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충청, 경기, 전라, 경상 등에서 소문을 듣고 신사를 찾아 도에 드는 자 그 수를 헤일 수 없었다. 상주시 화서면 봉촌리 전성촌 마을회관: 경북 상주시 화서면 봉촌1길 65-4 왕실촌: 효곡로 429-33 이곳은 해월신사께서 교조신원운동을 지도한 현장이다. 해월신사는 충청감사의 지목을 피해 포덕 33 년(1892) 5월 경 상주 왕실로 피신하여, 이듬해 3월 초순까지 머물렀다.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 높은터, 상주 은척원, 청계사 경북 상주시 화서면 하송3길 213. 동학혁명 이후 포덕 37년(1896) 3월초, 지목이 심하여 신사께서는 상주 높은터로 거처를 옮겼다. 3월에 호남 도인 이병 춘이 신사의 거처를 찾아 사방 다니다가, 하루는 청계 사에서 자게 되었는데, 꿈에 신사를 뵙고 물었더니 신사께서 ‘근처에 있노라’ 하므로 꿈을 깨어, 화전민들이 모여 사는 높은터에서 신사를 만났다. 이병춘의꿈 이야기를 듣고, 신사께서 “네 힘써 호남 일을 보라” 하고 도의 장래를 말씀하셨다. 이 무렵 신사께서 각지의 두령을 임명할 때첩장(帖狀)에 해월 장(海月章)을 사용 하였다. 4월에서 6월 사이 충주, 음성, 청주로 거처를 옮겼 다가, 8월에 신사께서 다시 상주 은척원(銀尺院)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호남도인 손병규, 홍계관, 최익서 등이 찾아와서 포(包)를 설치할 뜻을 고하였다. 이에 신사께서 말씀하기를 “이 시기에 포(包)를 설하는 것은 불을 다시 불어 일으킴과 다름이 없으니, 한갓 인심(人心)을 어지럽게 할 뿐이라” 하였다. 황해도 도인 방찬두가 방문하였다. 상주지역의 동학혁명유적지 1890년대 상주에서 동학이 가장 왕성했던 곳은 화동면 덕곡이었다. 신광서, 정기복 등이 접주였고, 화남면의 강선보(선희), 모동면의 남진갑, 이화춘, 모서면의 김현영, 김현동, 김현양 삼형제, 구팔선, 서치 대, 정항여, 조재하 등도 접주였다. 이관영은 상공대 접주로 임명되었다. 포덕 35년(1894) 9월 22일(양10. 22) 상주관아를 점령하였고, 9월 28일 일본군과 민보군에 패하여 많은 동학군이 학살되었다. 2008년 10월 상주동학농 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무양동 북천교 북천공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동학혁명과 관련하여 둘러볼 곳은 상주관아(남성 동), 임곡리(동학군 근거지), 낙동면의 일본군 병참소 (낙동파출소), 모서면의 김현영 집터, 동학군 처형터 로는 화남면의 광주원터, 남성동의 남사정터, 모동면의 중모장터, 화서면의 화령장터 등이 있다. 천도교 상주교구 황우원(中菴,1854~1929)이 1893년 입도하여 청계 동에서 수련을 하며 해월신사를 모셨다. 그는 편의장 으로 동학혁명에 참여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천도교 상주교구장을 역임하며 모서면의 전교실을 낙양리로 옮겼다. 황신오(鎭菴, 1898년생)는 1905년 입교하여 순원포 선정(1935), 상주종리원장(1937), 종의원(1963), 선도사(1967) 등을 역임했다. 해방 이전 상주 옥산(공성면) 지역은 도촌(道村)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묵암 신용구가 포덕활동을 하였다. 황우원의 손자 황국환(靑菴, 1922년생)은 동학회 상주지회 위원장, 천도교 상주교구장(1977) 등을 역임 했다. 현재 천도교 상주교당을 유지하고 있는 경암(鏡 菴)황숙 동덕은 동학사상연구소, 상주동학회 추진위 원장 등의 직함을 맡고 있다. 은척동심교구_상주시 은척면 우기리33-6 은척면에는 천도교 은척동심교구가 있다. 김근오 (1924~2020) 전 용담수도원장의 마당포덕으로 ‘동학 교’인 다수가 천도교에 입교하여 만든 교구다. 수련을 열심히 하는 교구로 “스승님 수련을 따라 하신다고 2 만 독, 3만 독을 날짜를 정하고 1년에 몇 차례 하며, 천도사업을 위하여 봉고차를 준비해서 시일은 교인 수송, 수련 때마다 교인들을 모시고 먼 수도원을 다니 면서 수련을 시키는 천도가 살아있는 교구”라는 평이 있었다. (사진.글 제공 천도교종학대학원)
-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제129주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을 맞이하여,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는 국가보훈처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하였다고 밝혔다. 이번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은 윤준병 국회의원의 제안으로 신청하게 되었으며, 또한 동학단체의 상징성으로, 주영채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박용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상임대표와 사전에 협의 조율했으며, 학계의 임형진 동학학회 회장·성주현 청암대 교수의 자문을 거쳤으며, 국회의 김성주 의원·김윤덕 의원·강성희 의원 등과 협의했다. 특히 박상종 교령과 주용덕 천도교 종무원장과의 사전 논의가 있었으며, 많은 동학관련 단체 임원들과 협의하여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하게 되었다고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했다.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의 구비서류 및 참고문헌은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 독립운동가 평생이력서, 유족의 주민등록등본, 제적등본, 가족관계증명서. 전봉준·손화중 판결선고서(김개남은 재판절차 없이 순국), 전봉준 공초, 전봉준·김개남·손화중 관련 족보와 특히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의 명분과 법적 근거’를 첨부하였다. 동학의병, 명예회복 특별법의 법적 근거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즉 동학의 병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은 법률‘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2004) 제정과 2019년 2월 법정기념일즉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완결되었다. 특히 을미의병이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내규에 국권침탈에 항거한 법적 근거가 된다면, 동학의병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법적 근거가 있다. 특별법 제2조 제1호에서, 제2차 동학 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해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로 정의하고 있다. 바로 <독립유공자법> 제1장 총칙. 제4조(적용 대상자)인 국권침탈 전후에 적용되는 법적 근거가 된다. 을미의병 참여자 포상이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내규에 근거한다 면, 동학의병 즉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 자는 특별법에 근거를 둔 법적 정당성에 있다. 또한 다른 방법이 있다. 국가보훈처 공적심사 내규에, ‘독립운동(국권침탈)의 기점은 을미의병이다.’로 정해놓은 것을 ‘독립운동(국권침탈)의 기점은 동학의병 (2차 동학농민혁명)이다.’로 다시 정하면 된다. 이를 헌법 차원에서 짚어보면, 1895년 을미의병은 독립유공자로 서훈 즉 포상 하고, 1894년 2차 동학농민혁명은 독립 유공자로 포상하지 않는 것은, 헌법 위반에 해당된다. ‘헌법 11조 1항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로 되어 있다. 이윤영 관장은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에 대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즉 동학의병 서훈, 포상에 대한 법적 근거를 특별법의 예를 들어서 밝혔다. 또한 을미의병과 동학의병의 차별법 즉 헌법 위반의 모순을 지적했다. 그리고 국가보 훈부 공적심사 내규에 ‘독립운동(국권침 탈)의 기점은 동학의병(2차 동학농민혁 명)이다.’로 다시 정할 것을 요청하면서, 동학농민혁명 3대 지도자를 상징하여 먼저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선생의 독립 유공자 서훈, 일체 서류를 구비하여 포상을 신청한다. 국가보훈부장관, 공훈발굴 과장, 공적심사위원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
제129주년 동학농민혁명 산청 기념식5월 11일 오전 11시 경남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앞에서 천도교인, 유족, 기관장, 동학 관련단체, 지역농민회, 지역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29주년 동학농민혁명기념 식을 봉행하였다. 내빈으로 하재호(산청동학농민회장), 김동규(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신명식(천도교유지재단 이사장), 김영희(산청읍. 자유총연맹 전 산청지회장)을 소개하고, 정덕재 천도교 중앙감사원장, 맹암 정의맹 남정포 도정, 송암 최봉수 순원포 도정, 천도교 원로이신 화암 김덕칠 선도사, 원암 백복기 선도사, 남해, 선구, 고현, 포상, 사천, 삼천포, 진주, 고성, 마산, 부산시, 대동, 창녕, 영산교구 13개 교구장과 동덕들을 소개되었고, 이어서 경상남도 도의회 신종철 운영위원장, 산청군 임결택 경제교통과장, 허종권 시천면장, 심재화 전 산청군의회의장, 양정석 산청군 농민회장, 이우완 창원특례시의원, 이택환 대한노인회 산청지회장, 박정일 남대리장, 남상용 내대리장, 박대길 동학학회 교수(유해발굴책임연구위원), 박창경 종교연합진주소장, 서봉석 산청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부회장이 소개되어 인사를 했다. 한편 이날 기념식은 경남 동학농민혁명 계승사 업회가 주최하고, 산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가 주관하였고, 산청군, 산청군 의회, 천도교 중앙총부, 천도교 경상도연원회가 후원하였다.
-
어린이날과 소파 방정환5월은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이다.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은 1년 중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이다. 또한 5월은 가정에 관한 기념일로 가득 채 워져 있어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뜻깊은 달이지만, 어린이날이 가장 먼 저 생각난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미래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날은 어린이의 존엄성과 지위 향상을 위해 제정됐다. 어린이라는 단어는 아동문학가인 소 파 방정환 선생이 처음 사용했으며, 어린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우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21년, 방정환 선생님은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갑시다.”라는 표어로 김기전, 이정호 선생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면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4월, 천도교소년회 창립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5월 1일 어린이날이 선포되었고, 이듬해인 3월 20 일, 방정환 선생에 의해 아동 잡지인 ‘어린이’가 창간되었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어린이 잡지가 폐간(1934년)되고, 어린이날 행사가 중단(1939년)되는 등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 어린이날 행사가 다시 시작된 날은 1946년 5월 5일이며, 1975년에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어린이날 하면 먼저 소파(小波) 방정환 선생을 떠올린다. 소파 선생은 의암 손병희 성사님의 셋째 사위로 35년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어린이들의 권리 보장을 위해 노력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어린이 인권 운동가이다. 또한 한국뿐 만 아니라 세계 최초로 어린이 인권 해방을 선언하며, 어린이 문화의 새 장을 일군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이시다. 올해는 하필 어린이날 비가 와서 어린이를 위한 모든 행사가 축소되거나 연 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어린이날을 맞는 지금의 우리 사회는 면목 없다 못해 참담하다. 그 뒤편의 모습은 너무나 어둡고 우울하기 때문이다. 아동학대, 어린이가 유괴· 살인, 성폭행 등 범죄의 대상이 되는, 막장 드라마나 소설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현실에서 은밀하게 자행되고 있는 낯부끄러운 우 리 사회가 흉악하기 그지없다. 매 맞고 버림받고 죽어가는 아이들, 학원 과외의 노예가 된 아이들, 가족과 단절된 채 인터넷에 빠진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 연 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우리 아이들의 일그러진 모습에 부끄럽고 안쓰러울 뿐이 다. 어린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린이를 위한 일 회성 행사가 아닌 진정 어린이들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진정할 일을 다 하 고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이다. 그래서 중앙총부도 어린이날(어린이 인권선언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많은 고민이 있었다. 장소는 우이동 봉황각과 만남의 광장, 참석 대상은 천도교 어린이와 강북구에 사는 어린이. 두 달 전부터 강북구청과 손잡고 강북구 소재한 어린이집에 공문을 보내 어린이날 행사 내용을 홍보했다. 올해 어린이날 사업을 기획하며 중점을 둔 것은 3·1정신의 요람인 봉황각이 천도교의 성지임을 알 리고 어린이가 행복한 어린이날을 만들고자 움직이는 단체가 천도교임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행사는 1,000여 명이 참가하여 여느 해보다 풍성하고 어린이들이 주인인 행복한 날이었다. 어린이들이 주관한 기념식을 시작으로 봉황각에서는 보물찾기, 슬러시, 페이스 페인팅, 캐리커처, 세계 어린이 청소년 인권 말하기 대회, 어린이 인권 100년사 전시회가 이뤄졌다. 그리고 만남의 광장에서는 에어바운스, 다람쥐 통, 마술/버블아트쇼/어린이댄스대회/퀴즈, 풍선아트 등 놀이 존이 펼쳐졌다. 이날은 볼거리, 할거리, 놀거리가 풍성한, 말 그 대로 어린이 잔칫날이었다. 어린이날을 제정하게 된 배경은 해월 신사께서 “어린아이를 때리지 말라. 아 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라.”라고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본 다. 어린이 헌장에도 “어린이는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 나갈 새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어린이날은 모든 국민과 부모들이 언제나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 하게 생각하고 어린이가 행복하고 즐겁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인 어린이들이 스스로 더 좋은 세상을 위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하고, 자유롭게 꿈꾸고 차별 없이 존중받는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가자.
-
6월 4일 오강남 교수 특강
-
의암성사 순국 제101주기 추모3·1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순국한 의암 손병희 선생 순국 101주기 추모 묘소 참례식이 5월 19일(금) 오전 11시 서울 도봉구 우이동 봉황각 옆 묘소에서 열렸다. 참례식은 이미애 교화관장의 집례로 청수봉전, 심고, 주문3회병송, 헌화, 심고(폐식) 순으로 진행되었다. 헌화는 박상종 교령, 이순희 강북구청장 등 주요 내빈, 이정희 천도교 연원회 의장, 박남수 전 천도교 교령, 최흥규 천도교 종의원 부의장, 주용덕 천도교 종무원장 등이 하였다. 식후 박상종 천도교 교령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부터 의암 손병희 성사는 10년 내에 나라를 되찾겠다면서 이곳 우이동에 3만여 평의 땅을 매입하고 봉황각을 지어 독립투사를 양성하시고 3·1독립운 동을 기획·주도하셨다. 뜻깊은 날에 참석해 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며 인사했고, 이순희 강북구청장은 “천도교에서 어린이날 행사를 이곳 봉황각에서 열어 강북구 어린이들을 행복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앞으로 도울 일이 있으면 적극 협조하겠다”라고 말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1861년 4월 8일 청주에서 태어나 22세에 동학에 입도하였다. 선생은 해월 최시형 선생의 명을 받아 교조 신원운동(敎祖伸冤運動)을 전개했고 1893년 광화문복합상소에도 참여했다. 동학혁명 때에는 북접 통령으로 이인 전투, 우금티전투, 태인 성황산전투, 보은 전투 등을 치루며 항일 구국전선에 나섰다. 이후 1897년 12월 24일 해월 최시형 선생으로부터 도통을 전수받고 1901년 국제정세를 살피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흑의단발을 단행하는 문명,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하였다. 1912년 우이동에 봉황각을 건립하여 3년 동안 483명의 교역자를 선발 수련을 통해 독립운동 지도자로 양성하여 1919년 3·1독립운동을 기획·주도 하였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독립운동 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1920년 10월 22일 병보석 되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1922년 5월 19일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