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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사 비전 마련을 위한 1-1차 간담회 개최신인간사 비전 마련을 위한 1차 간담회가 2월 13일(금) 오후 4시, 온라인(줌)과 오프라인(수운회관 1301호)을 병행해 개최됐다. 이날 간담회에는 지광철, 이윤정, 조영은, 박길수 등 관계자들이 참석해 신인간사의 정체성과 향후 실행 전략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이어갔다. 이번 간담회는 “신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넘어 “신인간을 어떻게 다시 작동시킬 것인가”라는 현실적 전환점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 참석자들은 향후 논의를 ▲1차 비전 수립 ▲2차 실행 계획 설계 ▲3차 작은 성공 경험 축적의 단계로 구체화해 나가자는 데 뜻을 모았다. 참석자들은 신인간사의 정체성을 단순한 월간 잡지사가 아닌 ‘천도교·동학의 종합 콘텐츠·문화 플랫폼’으로 재정의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신인간은 ▲개벽 사상의 실천적 계승자이자 창조적 제작자 ▲동학·천도교의 살아 있는 역사 기록자 ▲대학 부재 상황 속 준(準)연구·교육 플랫폼의 역할을 감당해 왔으며, 앞으로도 출판·콘텐츠 유통·문화사업 기획의 결절점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특히 “함께 만드는 신인간”이라는 100주년 구호를 선언에 그치지 않고 구조로 구현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날 회의에서는 예산·인력·기술력 부족이라는 ‘3무 상황’을 전제로 한 현실적 대응 방안도 제시됐다. 예산 부족에 대해서는 ▲정부·공공 지원사업 활용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크라우드 펀딩 기획 ▲100주년 특별 후원 멤버십 도입 등 다층적 수익 구조를 모색하기로 했다. 인력 부족 문제는 ▲대학생 서포터즈 운영 ▲객원 에디터 제도 ▲교구 통신원 네트워크 구축 등을 통해 보완할 수 있다는 제안이 나왔다. 특히 청년층을 단순 의견 제시자가 아닌 실제 콘텐츠 생산 주체로 참여시키자는 의견이 주목을 받았다. 기술력 부족과 관련해서는 AI 보조 편집 체계 도입, 노코드·템플릿 기반 운영 등 경량화 전략을 적극 활용하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오디오북·웹진·뉴스레터… “읽히는 방식의 전환”, 굿즈·문화사업 연계로 수익 모델 다각화 콘텐츠 확장 방향에 대한 논의도 활발했다. 종이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웹진 구축 ▲전자책(e-book) 제작 ▲오디오북 파일럿 제작 ▲영상 콘텐츠 병행 등 멀티 포맷 전략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특히 오디오북은 이동 중 청취가 가능한 점에서 실효성 높은 대안으로 평가됐다. 또한 전권 소비가 어려운 독자 환경을 고려해 주 1회 뉴스레터 발송, 섹션별 큐레이션 등 ‘부분 소비’ 전략도 제안됐다. 청소년·어린이용 쉬운 언어 콘텐츠를 일부 삽입해 연령층을 확장하자는 의견도 제시됐다. 100주년을 맞아 창간호 복각본 제작과 표지 디자인을 활용한 엽서·포스터·무지노트 등 굿즈 개발, ‘신인간 독자’ 정체성을 상징하는 표식 제작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논의됐다. 이와 함께 청년 포럼의 영상화, 성지순례 및 체험형 프로그램 연계, 교단 내 출판물 광고 수익 쉐어, 방정환 브랜드를 활용한 사업 모델 등 문화사업과 연계한 수익 창출 방안도 공유됐다. “작은 성공 경험이 출발점” 참석자들은 무엇보다 ‘실행 가능한 작은 프로젝트’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단기 과제로는 ▲웹진 1차 오픈 ▲뉴스레터 시범 발송 ▲오디오 콘텐츠 파일럿 제작 ▲굿즈 소량 테스트 ▲대학생 서포터즈 모집 등이 제시됐다. 이날 간담회를 마무리하며 참석자들은 “문제는 콘텐츠 부족이 아니라 이용되지 않는 구조”라며, 생산자 관점이 아닌 독자·이용자 심리 분석을 기반으로 한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신인간사 100주년을 앞두고 열린 이번 간담회는 ‘읽는 잡지’에서 ‘참여하는 플랫폼’으로의 도약을 향한 첫 실행 단계로 평가된다. 작지만 구체적인 실천이 쌓일 때, 100년의 자산은 다시 살아 움직이는 문화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1-2차 간담회 / 2026년 2월 20일(금) 오후 4시 - 온라인(줌), 참여문의 010-5207-6487) -
“서울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 복원과 정립”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사장 채길순)은 2월 7일(토) 오후 2시부터 기념사업회 사무실(수운회관 1301호)에서 2026년도 총회와 서울지역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순도순국 추도식을 거행했다. 현재 튀르키예에 체류 중인(한국어 교수) 채길순 이사장은 이 행사를 위해 일시 귀국하였다. 박길수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총회는 2025년도 사업보고 및 결산보고, 2026년도 사업계획 및 예산(안) 심의의결 순으로 진행되었다. 채길순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이사장으로 해외 체류 중이어서 지난해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올 한 해 체류 기간이 연장되었다. 국내에 계신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면서 “서울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를 복원하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와 세계화에서 핵심적인 고리가 된다”면서 올 한 해도 성과 있는 진전을 이루자고 당부하였다.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2024년 4월에 결성되어 서울지역의 동학사적과 인물 발굴 및 기념사업, 전국동학농민혁명 관련 단체와의 연대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지난해(2025)에는 사상 최초로 국립 현충원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추모식 및 학술대회와 답사를 진행한 바 있다. 기념사업회는 채길순 이사장을 제외한 대다수의 회원이 천도교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올해 추모 행사는 국립 서울현충원 또는 망우리 묘역 등지에서 진행할 예정이며, 회원 확장과 동학민족통일회 등과의 연대사업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가기로 했다. -
순간, 순간 느끼는『홀로 피어 꽃이 되는 사람』 천도교신문에서는 시인이자 숲 해설가인 이시백 동덕의 생활 명상 글과 라명재 송탄교구장이 엄선한 동학 경전 구절을 함께 엮어,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동학의 지혜를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이 일상의 삶 속에서 꽃피우는 동학의 길을 함께 사유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순간, 순간 느끼는 인연은 기다리기로 한다만 머뭇거리는 순간이 많다. 아플 때, 누가 귀찮게 할 때 가슴이 답답해진다. 신선 이웃이 점점 지척 간에 가까워지는데 티끌을 씻고자 하나 누가 인연이 되겠는가. <의암법설 : 강시> 너무 머뭇거리다보면, 몸이 아파온다. 마음의 짐이 쌓이는 결과이다. 어렵더라도 용기를 내서 실천하자. 그와 반대로 누가 나를 귀찮게 하면 어찌해야 하나? 서로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것, 이것이 덕이다. -
북간도·연해주의 3·1운동-한인사회의 내적 논리를 중심으로(1)이 글은 「북간도·연해주의 3·1운동 – 한인사회의 내적 논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연구 논문으로, 3·1운동을 국외 한인사회의 시각에서 조명한 글이다. 특히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 한인사회의 역사적 조건과 사상적 흐름 속에서 3·1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본지는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정신을 오늘에 되새기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아 이 논문을 게재한다. Ⅰ. 머리말 3·1운동 이후 한반도 내 민족운동은 쇠퇴 국면에 접어들지만, 망명과 이주로 운동의 역량이 새로이 집결하기 시작한 간도, 연해주의 민족운동은 괄목할만한 양적, 질적 성장이 이루어진다. 민족운동 단체, 소속 인원이 급증하였고, 이러한 양적 확장에 기반한 민족운동의 총체적 역량 역시 성장하였다. 이후 전개된 간도, 연해주 지역의 민족운동은 3·1운동의 직접적인 성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이나 성과와 분리할 수 없다. 3·1운동은 한반도를 포함한 일본, 미국, 중국 관내, 만주, 연해주 등 세계의 모든 한인사회가 포함된 세계 한인네트워크가 구축되고, 한민족의 ‘근대적 정체성’이 일제의 폭압을 촉매로 실체적 모습을 드러낸 혁명적 사건이었다. 3·1운동에 대해 그간 다양한 관점을 가진 풍부한 논의들이 생산되었음에도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남아있다. 특히, 3·1운동 이후 민족운동 근거지 역할을 하였던 북간도, 연해주 한인사회와 3·1운동이 연동되는 메커니즘, 3·1운동이 담지한 근대적, 민족적 의미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북간도, 연해주 한인사회가 수행한 역할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를 보는 기존 관점도 돌아볼 여지가 있다. 한인들이 직면했던 다양한 내적, 외적 조건들을 외면하고, ‘우리=한국사’가 읽고 싶은 맥락만을 취한다면 운동의 동력과 조건이었던 한인사회의 주요 의제들은 읽어낼 도리가 없다. 중국 조선족, 중앙아시아 고려인이라는, 역사적 결과로 존재하는 이들의 정체성은 결국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본고는 북간도, 연해주 한인사회의 내적 논리에 주목하여, 3·13, 3·17운동을 살펴보려 한다. 한인사회의 내적 논리에 주목하는 민족사의 관점에서 접근하되, 3·1운동 전후 구축된 세계 한인네트워크와 한인사회의 관계에도 주목해보려 한다. Ⅱ. 3·1운동 전후의 국제정세 산업혁명 이래 진행된 서구 자본의 절대 권력화와 식민지 쟁탈전은 1차 세계대전으로 조정의 국면을 맞이했다. 자본의 본질인 탐욕이 서구의 침략성을 극대화하였고, 탐욕을 좇은 무한경쟁은 서구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1차 세계대전과 전후 질서는 서구의 추악한 탐욕을 승자의 담론으로 정리하기 위한 과격하고, 극단적인 조정의 과정이었다. 북아프리카, 발칸반도를 둘러싼 신·구 제국의 갈등은 1차 세계대전의 혼돈을 야기했지만, 러시아에는 혁명의 기회가 되었다. 최초의 ‘현실 사회주의국가’ 소련이 천명한 반자본, 반제국주의 노선은 서구의 침탈로 고통받던 약소민족에게 현실적 해방의 희망이자 새로운 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비록 러시아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과 연대하면서 일시적으로 연해주와 간도의 주요 한인 단체들이 대대적 탄압을 받았지만, 러시아혁명의 성과와 사상은 인접한 연해주, 간도 한인사회, 이들과 연결된 세계 한인사회에 혁명적 민족운동의 전략, 전술로 공유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조선총독부의 폭압적 지배가 이어지고 있었다. 헌병경찰로 민족운동을 탄압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의 기본적 권리도 억압하였다.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형벌로 인권을 유린하고,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을 통해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일제의 탄압에도 동학혁명의 영향으로 전파된 평등, 평화 지향의 근대적 의식 「포덕문 」(『경주판 동경대전』)에서 표방된 누구나 3년에 도를 이루고, 입도한 그날 군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조선의 차별적 신분질서를 근본부터 부정하는 평등 사상이었다. 이 평등사상은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여 조선 내부에서 주체적으로 제기된 거의 유일한 근대적 의식이자 사상이었다.)은 다양한 민족운동과 결합하며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민족종교, 교육의 보급은 근대 지식과 의식으로 무장한 청년·학생층을 성장시켰고, 전 산업 분야에 걸친 무자비한 수탈은 계급의식으로 각성한 노동자·농민층을 양산하였다. 식민지라는 조건이 청년·학생과 노동자·농민을 3·1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 주체적 역량으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첫째, 천도교, 대종교 등 민족종교의 교세가 성장하면서 교인들을 중심으로 민족의식 또한 빠르게 확산되었다.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는 일찍이 ‘독립선언’ 형식의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최린, 「자서전」, 『여암문집』 상, 1971, 182쪽. 1919년 1월 손병의는 천도교 관계자들에게 대사의 준비를 지시했다. 1918년 말, 1919년 초에는 구체적 계획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불교계를 규합하였다. 또한, 자금을 동원하고,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였으며, 각 지역 교인을 시위운동에 동원함으로써 사실상 3·1운동의 전 과정을 주도하였다. 둘째, 애국계몽운동, (신용하는 애국계몽운동이 민족과 사회를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3·1운동과 독립군 무장투쟁을 비롯한 독립운동의 직접적인 원류를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신용하, 「한말애국계몽사상과 운동」, 『한국사학』 1, 1980). 애국계몽운동이 변혁운동의 성격을 가진 시기가 있었지만, 사상적 기반이 사회진화론이고, 이후 친일 지치운동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는 인식이다.) 실력양성론의 관점에서 전개한 교육·문화운동으로 각지에 사립학교, 서당, 야학 등이 설립되어 민족의식에 눈뜬 청년·학생들이 대거 양성되었다. 이들은 3·1운동 당시 각 지역의 항일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셋째, 일제의 수탈이 심화되면서 노동자·농민들은 점차 계급모순을 자각, 산발적인 쟁의와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유된 민족의식은 3·1운동을 확산, 지속시킨 가장 강력한 민족 내부의 동력이었다.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 반대투쟁, 삼림정책 반대투쟁, 수리조합 반대투쟁, 각종 조세 반대투쟁 등을 벌였으며, 주재소, 면사무소 등 일제 통치기구를 공격하였다. 노동자들도 민족적 차별대우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일제가 강제한 동일한 성격의 모순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투쟁의 방향은 민족적 저항으로 수렴되었다. 한편, 한반도와 국경을 접한 북간도와 연해주에는 이주 한인들에 의해 한인사회가 개척되면서 일제의 무단통치에 억눌려있던 한반도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근거로 하는 민족운동의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Ⅲ. 한인사회의 토대와 내적 축적 1860년대 조선 민중은 봉건경제의 파탄과 관리들의 탐학으로 연명조차 불가능한 한계상황에 직면했다. 북부지방에 극심한 자연재해마저 지속되자 (『일성록』 ; 『철종실록』 12, 철종 11년 4월 20일 ; 『고종실록』 1, 고종 1년 4월 7일. 등에는 1859년, 1960년, 1961년, 1863년, 1869년, 1970년 관북지역의 극심한 자연재해가 기록되어 있다.) 변경지역 주민 일부가 중국과 러시아로 이주를 감행하였고, 이들에 의해 간도 (김원석, 「중국 조선족의 천입사에 대한 연구」, 『동아연구』 25,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1992 ; 김춘선, 「청조시기 한인의 만주이주와 정착. 1」, 『한중미래연구』 2, 동덕여대미래연구소, 2014.)와 연해주 (프로트니코바 마리나, 「1863∼1910년까지 연해주로의 한인 이주와 그들에 대한 러시아의 정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연해주로 한인들이 최초로 이주한 것은 1863년 말로, 14가구, 65명의 함경도 주민이 두만강 건너 한·러 접경의 뽀시예트로 이주하였다고 한다.)의 황무지가 개간되기 시작했다. 빈궁한 농민들의 이주가 한인사회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초기 한인사회가 사상, 문화적 구심점 없이 여러 사상과 가치가 혼재하는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인들의 최초 이주 시기는 간도와 연해주 지역이 서로 다르지만, 한인사회가 형성될 정도의 대량 이주는 두 지역 모두 1860년대 후반 이후 이루어졌고, 북간도의 경우 1880년대의 일이다. 북간도는 서간도보다 늦게 개척되었다. 두만강 대안에서 봉금정책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주 초기 두만강을 건넌 한인들은 연해주나 서간도로 다시 이주해야만 했다. 북간도의 경우 1881년 청이 훈춘에 초간총국을 설치, ‘이민실변’정책 (청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한인의 간도 이주를 허용하고, 귀화·입적과 간도지역 개척을 권장하여 청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자 실시한 한인 이민 수용정책)을 실시하면서 이주 한인이 급증하고, 개척이 진행되었다. 이후 북간도 한인사회는 만주 전역 및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인들의 기착지이자,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사회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연해주는 러시아 정부가 연해주 식민화에 매진하던 상황이라 황무지를 개척하는 한인의 이주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러시아 당국은 한인 이주에 우호적이었고, 이주 한인들은 초기에 당국의 식량을 지원받으며 토지를 개간, 빠르게 안정적으로 정착하였다. 연해주의 토지 대부분은 개간할 노동력만 있다면 확보가 가능했기에 피폐한 한반도의 삶을 등지고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인들이 증가하였고, 한인사회가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프로트니코바 마리나, 앞의 글, 45-52쪽.) 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는 시기별로 중국, 러시아의 이민정책, 일본의 침략정책과 국제정세 등으로부터 복합적인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1860년대 이후 꾸준히 한인 이주가 증가하면서 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고, 총체적 역량도 함께 성장하였다. 1. 한인사회의 형성과 성장 북간도 한인사회는 1860년대 후반 형성되기 시작하여, 1880년대부터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1880년 회령부사 홍남주는 부민들이 청원서를 제출하면 두만강 대안을 개간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경진(庚辰)개척’이라는 집단개척이 이루어져 길이 500리 폭 40∼50리의 토지가 개척되었다. 1883년에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간도 이주자에게 지권을 발급, 거주를 보장해주기도 하였다. 이주민 관리가 시급해진 조선 정부는 정확한 경계 설정을 위해 청과 ‘감계회담’에 나서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회담은 종결되었다. 두 차례 감계회담이 진행되었지만, 대한제국은 두만강 상류 홍토수를, 청은 이보다 남쪽에 있는 석을수를 경계로 주장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회담 결과와 상관없이 조선의 경제 파탄, 정치 불안으로 한인의 간도 이주는 계속 증가하였다. 대한제국은 백두산정계비, 간도 거주 한인을 근거로 하고, 서구 열강의 위력 특히, 러시아와 미국에 영향력에 의지하였다. 을 지렛대 삼아 중화적 세계관을 탈피하고 간도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후과인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간도는 일제의 침략 전술에 따라 청에 귀속되고 말았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철도와 부속토지를 넘겨받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세우고 만주 침략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1907년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1909년 간도협약을 체결, 간도의 영유권을 청에 넘겨주는 대가로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포함한 이권들을 확보하고 일본총영사관을 설치했다. 이로써 한반도와 간도의 연결고리는 일제에 의해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한인의 간도 이주는 초기부터 청, 장년층 위주로 이루어졌으므로, 이들이 생산한 2세들의 인구는 전체 인구증가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었다. 장우순, 「1920년대 만주한인사회의 세대교체와 운동이념의 변화」, 『사림』 26, 수선사학회, 2006. 2세대 인구 증가를 만주 한인사회 인구 증가의 주요 원인으로 처음 제기하였다. 2세 인구의 증가는 간도 한인사회가 안정된 경제 기반을 토대로 지속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의 하나였다. 해당 시기 북간도 한인의 인구변동 추이는 다음과 같다. 〈표 1〉 북간도 한인의 인구변화추이(단위는 名)(沈如秋, 『延邊調査實錄』, 1930, 22쪽∼23쪽 ; 延边朝鲜自治州地方志编纂委员会 编, 『延边州志』, 中華書局, 1996, 255쪽.) 북간도는 인구뿐 아니라 경제,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만주 한인사회의 중심지였다. 북간도 한인사회의 급속한 성장에 세계 각 지역 한인사회가 주목하였다. 전 세계 한인사회의 총체적 역량에서 북간도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 이후 1926년까지 서간도 111,324명, 북간도 126,974명 등 모두 238,298명이 간도로 이주하였다. 이 기간 전체 한인이 340,115명 증가하였고, 한반도 귀환 한인이 95.000명 정도이므로 (朝鮮總督府內務局社會課 編, 『滿洲及西比理亞に於ける朝鮮人事情』, 1927, 14쪽.) 전체 증가분에서 이주로 증가한 238,298명을 제외한 101,817명에서 귀한한 한인 수를 감안한 196,817명까지가 자연증가로 추정된다. (장우순, 앞의 글, 144쪽.) 2세대 인구의 증가는 2세대 교육의 문제를 한인사회 주요 의제로 부상시켰다. 북간도 한인 민족운동을 주도한 간민교육회는 교육을 한인 실력양성의 기초로 보고 학교설립 등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북간도에서 한인이 세운 사립학교는 1911년 8개, 1913년 46개, 1917년 50개로 급속한 증가세가 확인된다. (중국조선족교육사집필소조, 『중국조선족교육사』, 연변, 동북조선족민족교육출판사, 1991, 14쪽.) 간민교육회는 1907년 8월 한인 자치와 교육을 위해 결성되었다. (공식 명칭은 연길부간민교육회로 이동춘, 구춘선, 정재면, 윤해 등이 결성한 귀화인 중심의 자치, 교육운동 조직. 본고는 당안자료를 근거로 결성일을 1907년 8월로 추정하였다.) 간민회, 간도국민회로 발전하였으며, 북간도를 대표하여 다양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독립전쟁에도 참여하였다. (간민회가 결성되는 1913년부터 이동휘 계열의 영향으로 강한 민족의식을 드러나기 시작한다.) 간민교육회가 명동, 정동, 은진, 명신· 광성, 창동, 북일 등의 중학교와 간민모범학당 등을 설치, 민족교육을 실시한 것은 교육운동을 민족운동의 핵심 전술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간민교육회는 또한, 「교육보」를 발행하고, 연해주의 「권업신문」, 미주의 「신한민보」를 구입, 한인사회에 보급하였다. 다른 지역 한인사회를 이해하고, 연결하기 위한 이러한 노력은 세계 한인사회를 하나로 묶고 공동 의제에 대한 의견교환 및 연대 활동을 가능케 하였다. 세계 한인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를 이용하여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역량을 북간도 한인사회는 3·1운동 발발하기 한잠 이전인 1910년을 전후한 시기 이미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있었다. 연해주에서는 북간도와 다른 양상으로 한인사회가 성립되어갔다. 1874년 블라디보스토크 구개척리에 한인촌이 만들어졌고, 흑정자, 녹둔도, 도비허, 남석동, 와봉, 수청 등지에 주요 한인촌이 성립되었다. (뒤바보, 「아령실기」 2, 3, 『독립신문』, 1920년 3월 1일, 3월 4일. 뒤바보는 계봉우의 필명.) 러·일전쟁은 한인의 연해주 이주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러·일전쟁과 그 후속 결과의 하나인 을사조약으로 농민뿐 아니라 정치적 망명자 역시 급증하였다. 정치적 망명자들은 러·일전쟁의 패배로 조성된 러시아의 반일 정서를 배경으로 연해주를 한인의 항일운동 중심지로 만들어 갔다. 이러한 연해주의 초기 항일운동을 대표하는 것이 1908년 의병진의 국내진공작전이다. 이러한 의병운동은 연해주를 근거로 하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갈래이자 훗날 시베리아 내전기와 1920년 독립전쟁기 한인 빨치산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1920년 북간도 독립전쟁에 참여한 의군부, 대한총군부 역시 이범윤의 의병부대를 기반으로 한 부대였다(강덕상, 『현대사자료 24(조선 4)』, 399-405쪽.). 총재는 문창범, 사령관은 최진동이었다.) 1910년대 연해주 한인의 계급은 귀화 여부가 결정했다. 러시아 이주민 정책이 귀화인(이하, 원호인)과 비귀화인(이하, 여호인) (원호인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한인, 여호인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한인을 지칭한다.)을 극단적으로 차별하였기 때문이다. 원호인은 1호당 16.4헥타아르의 토지를 무상으로 받아 이를 기반으로 상당한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정 정도 소득 규모를 갖춘 원호인들은 한인사회의 상층계급이 되었고, 토지를 받지 못한 여호인들은 매우 열악한 조건 속에서 하층 구성원으로 전락하였다. 다음은 1906년에서 1917년의 기간 연해주 이주 한인의 인구 및 원호인, 여호인 구성이다. (계속) 글, 장우순(한국학진흥원) -
박인준 교령, 원음방송에서 종교의 사회적 책임 강조, ‘통합과 서로 살림’의 시대적 과제 제시[편집자주] 이 기사는 지난 2월 9일(월) 원음방송 FM 89.7MHz 〈둥근 소리 둥근 이야기〉 ‘종교너머 아하!’ 코너 신년특집에 출연한 천도교 박인준 교령의 라디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박 교령은 방송을 통해 국내외 정세에 대한 진단과 함께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통합과 서로 살림’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제시했다. 분열과 갈등의 현실 속에서 종교가 앞장서 공존과 화합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청취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 새해를 맞는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공경하는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천도교 교령 박인준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오년 새해를 맞아 한울님의 큰 울림과 감응이 여러분 가정에 함께하시기를 심고드립니다. 하시는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이루어져 행복한 나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새해를 맞았지만 국내외 정세가 녹록지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새해는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과 갈등이 이어지고 있으며, 강대국 간 패권 경쟁으로 국제 질서와 경제 환경도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인에게 불안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 국민의 민주 역량을 믿습니다. 흔들림 속에서도 스스로를 바로 세워온 힘이 있기에 희망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 정치권의 대립과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길은 무엇일까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우리 국민은 개성이 강하고 활발하지만, 동시에 서로 돕고 화합하는 힘 또한 큰 민족입니다. 그러나 정치가 이념에 치우쳐 집단의 이익과 자존심만을 앞세운다면 사회는 평화를 잃게 됩니다.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통선’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자기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낮추는 미덕이 필요합니다. 나만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극단적 태도는 갈등을 키울 뿐입니다. 통합과 서로 살림의 정신을 최우선 가치로 삼을 때 비로소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 천도교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부족한 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천도교의 가르침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신 존재, 곧 시천주(侍天主)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진리가 핵심이지요. 그래서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뿐만 아니라 만물 또한 한울님의 기운으로 존재합니다. 만유를 공경하는 정신이 살아난다면 세상은 곧 한울 세상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러한 철학적 토양을 널리 펼쳐 국민의 정신적 기반을 다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토양이 건강해야 그 위에 자라는 삶도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 오늘날 종교인들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분단과 분열, 대립과 갈등 속에 있습니다. 이를 해소하는 일, 곧 통합과 서로 살림을 실천하고 이끄는 일이 종교인의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 7대 종교 지도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고 계십니다. 종교 협력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입니까?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와 한국종교인평화회의 같은 협력 기구가 있습니다. 7대 종단이 먼저 종교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경쟁적으로 힘을 과시할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돕고 협력해야 합니다. 모두가 연결된 하나라는 인식 속에서 통합된 좋은 나라, 통합된 좋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합니다. ■ 천도교는 올해 어떤 계획을 중심에 두고 있습니까? 내년은 천도교 제2세 교조이신 해월 최시형 신사 탄생 2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를 맞아 교단은 교인뿐 아니라 국민이 함께 참여하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해월 신사의 정신은 특정 종단의 소유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입니다. 이번 기념사업을 통해 천도교 정신과 사상이 더 널리 알려지고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국민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마지막으로 국민들께 희망의 메시지를 부탁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많이 어렵고 힘드실 것입니다. AI 시대를 맞아 윤리 문제 또한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인간성을 회복하고 평정심을 되찾아야 합니다. 물질 중심의 삶에만 치우치기보다 마음공부를 통해 정신개벽을 이루어야 합니다. 나와 너, 우리가 함께 신바람 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하루빨리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에 한울님의 감응으로 행복이 충만하시길 간절히 심고드립니다. -
정선 방시학가(房時學家) 동학 최초의 역사서 『도원기서』 간행정선의 인물인 방시학(房時學)의 집에 수단소(修單所)가 차려지고, 동학의 역사서가 편찬 발간된다. 그 역사서의 이름이 『도원기서』이다. 그러나 아직 방시학의 집이 어디인지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방시학과 함께 활동했고, 또 방시학의 집에서 『도원기서』를 간행할 때 글씨를 쓴 전세인(全世仁)의 손자 되는 분이 정선에 살고 있다. 이분의 증언에 따라 전세인이 살던 마을을 찾고, 인근에 방시학도 살았을 것으로 추정만 할 뿐이다. 『도원기서』는 대신사에서 해월 신사로 어떻게 도(道)가 이어졌는가를 살피고 다듬어 그 연원을 기록한 동학 최초의 역사서이다. 그래서 ‘도(道)의 연원[源]을 기록한 책[記書]’이라는 의미에서 『도원기서』라고 이름하였다. 이에 관한 기록을 보도록 하자. 自初一日爲始 先生修單所定于房時學家 其時修單有司分定 道布德主 崔時亨 監有司 崔箕東 道次主 姜時元 安敎一 道接主 劉時憲 書有司 全世仁 修正有司 辛時永 筆有司 安敎常 校正有司 辛時一 紙有司 金源仲 都所主人 房時學 接有司 尹宗賢 收有司 洪時來 安敎伯 崔昌植 輪通有司 洪錫道 冊字有司 辛潤漢 安敎綱 (11월) 초하루부터 선생 수단소(修單所: 道源記書)를 방시학(房時學)의 집에 정하였다. 그때에 수단유사(修單有司)를 나누어 정하였다. 도포덕주(道布德主) 최시형(崔時亨) 도차주(道次主) 강시원(姜時元), 안교일(安敎一) 도접주(道接主) 유시헌(劉時憲) 수정유사(修正有司) 신시영(辛時永) 교정유사(校正有司) 신시일(辛時一) 도소주인(都所主人) 방시학(房時學) 감유사(監有司) 최기동(崔箕東), 안교일(安敎一) 서유사(書有司) 안교상(安敎常) 지유사(紙有司) 김원중(金源中) 접유사(接有司) 윤종현(尹宗賢) 수유사(收有司) 홍시래(洪時來), 최창식(崔昌植) 책자유사(冊字有司) 신윤한(辛潤漢), 안교백(安敎伯) 윤통유사(輪通有司) 홍석도(洪錫道), 안교강(安敎康) - 『도원기서(道源記書)』 도적(道迹)에 해당하는 『도원기서』는 1879년 정선 남면에 있는 방시학(房時學)의 집에서 기획되었고, 이곳에서 필사본으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간행되자마자 견봉날인(堅封捺印)이 되어 유시헌(劉時憲, 劉寅常의 개명한 이름)에게 맡겨졌고,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깊이 감추어 두라는 명을 받는다. 감추어진 이유는 많은 연구자가 추론하듯이, 이 책의 내용 중에 해월 신사를 비롯한 동학 교도들이 이필제(李弼濟)의 난(亂)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견봉날인이 되어 감추어졌지만, 훗날이라도 도(道)의 연원이 바르게 세상에 이어지고 또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와 같은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감추어졌던 『도원기서』는 1906년경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학 교단의 역사서 기록에 활용된다. 그러던 중 임치(任置)하고 있던 유시헌의 아들인 유택하(劉澤夏)로부터 시천교(侍天敎)로 옮겨가, 훗날 계룡산에서 상제교(上帝敎)를 연 김연국(金演局)이 가져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계룡산 상제교에 보관되어 오다가, 이후 1978년 김연국의 아들인 김덕경(金德經)이 세상에 공개함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는 상제교의 후신인 천진교 본부에 보관되어 있다. 『도원기서』는 현행 동학 역사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본교역사』, 『천도교서』, 『천도교창건사』, 『천도교회사 초고』 등의 중요한 저본이 된다. 『도원기서』의 간행은 동학의 초기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사건이다. 신용하 교수는 이 책을 “지금까지 구전에 의존했던 초창기의 동학 성립 과정이 밝혀질 한국 근세 사상사의 획기적 자료”라고 평가하였고, 최동희 교수는 “동경대전 초간본의 발간 경위와 해월의 비밀 활동 기록이 공개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라고 이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해 출간한 윤석산 교수는 “동학의 어느 기록보다도 생생한 기록들”이라고 하였다. 수암 염상철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동학민족통일회, 제3차 의장단·제2차 운영위원회의 개최(사)동학민족통일회(상임의장 주선원)는 2월 12일 오후 2시 종학대학원 강의실(803호)에서 제3차 의장단 회의 및 제2차 운영위원회의를 열고, 2025년도 사업결과 및 결산안, 2026년도 사업계획 및 예산안, 고문 추대, 운영위원 추가 선출, 의장단 등에 대한 징계 규약 제정 등의 안건을 심의·의결하였다. 이번 운영위원회는 동학민족통일회 정관에 따라 오는 5월 개최 예정인 정기총회에 상정할 안건을 사전 심의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으며, 주요 안건은 대체로 원안대로 의결되었다. 주선원 상임의장은 인사말에서 “올해는 오랫동안 정체되었던 남북 관계가 4월로 예정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방중을 계기로 전향적인 변화가 기대된다”며, “동학민족통일회의 내실을 더욱 탄탄히 다져 불시에 닥쳐올 남북 교류의 기회를 준비하자”고 당부했다. 조직 정비와 평화·통일 연대 활동 본격화 2025년 동학민족통일회는 조직 정비와 대외 연대 활동, 평화·통일 관련 사업을 폭넓게 전개하였다. 4월 10일 정기총회에서는 정관 개정안을 가결하고, 주선원(주영채) 상임의장을 중심으로 공동의장과 중앙위원을 새롭게 선출하였다. 6월 5일에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주최 ‘DMZ 생명평화 순례 및 위령식’에서 천도교 의례(화석정)를 집행하였으며, 7월과 8월에는 평택 미군기지 평화행동, 입암 이도천 선도사 위령식, 광복 80주년 기념 공연 및 범시민대회 등에 참여하며 평화·역사 정의 실현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9월에는 동학 서훈 입법과 관련해 국가보훈부 장관 간담회에 참석했으며, 통일정책 포럼, 통일부 장관-민화협 의장단 간담회 등 정부 및 시민사회와의 정책 협의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는 ▲남북공동선언 국회 비준 동의 및 정부 비준 ▲통일부 장관의 NSC 상임위원장 겸임 ▲대통령 대북특사 역할 ▲남북통일센터(가칭) 건립 ▲민화협 예산 복구 및 남북협력기금 활용 ▲남북교류협력재단(가칭) 설립 등을 요청하였다. 10월에는 고양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에 참석해 위령문을 봉독했으며, 한국 시민사회 원로 기자회견 및 통일부 주관 대북 민간단체 초청행사에도 참여해 동민회 사업에 대한 협력과 지원을 요청했다. 11월에는 ‘동학 서훈법 당론 채택’ 촉구 간담회에 동학 관련 단체 대표들과 함께 참석했다. 12월 4일에는 사회문화관 지원사업으로 ‘2025 DMZ 평화소풍’을 진행해 회원 32명이 참여했으며, 12월 12일에는 수운회관에서 ‘민족자주 평화 실현 범시민 대토론회’를 개최해 회원과 시민 80여 명이 함께했다. 강민조 회장의 기조강연과 외교·통일 분야 전문가들의 발제 및 토론이 이어지며 민족 자주와 평화통일의 과제를 모색했다. 2026년, 남북공동사업과 통일교육 확대 운영위원회는 2026년도 사업계획 및 예산안도 심의·의결했다. 2026년 사업은 크게 ▲남북교류협력사업 ▲독립운동 및 민족정신 함양사업 ▲교양사업 ▲대외협력사업 ▲기획 및 조직운영 강화로 구분된다. 남북교류협력 분야에서는 남북공동사업 및 공동 기념사업, 다양한 교류사업을 추진하고, 독립운동 및 민족운동의 역사적 가치 재조명 사업을 통해 선열의 삶과 사상을 선양할 계획이다. 또한 시민강좌 4회, 통일기행 2회 등 통일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6.15 남측위원회 등 범국민 시민단체와의 연대 활동을 확대할 방침이다. 아울러 중앙총부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조직 정비와 회원 확대에도 힘쓸 계획이다. 동학민족통일회는 이번 회의를 통해 조직의 내실을 다지고, 다가올 남북 교류의 새로운 국면에 대비하는 실천적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하였다. -
포덕 167년 2월 8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대신사의 순도와 우리의 길"포덕 167년 2월 8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대신사의 순도와 우리의 길" 운암 오제운 신태인교구장 -
On Propagating Truth 5 -
천도교 한울연대, 신규 핵발전소 건설 결정에 성명 발표한울연대가 정부의 신규 핵발전소 건설 결정에 대해 공식 성명을 발표하고, 원자력 확대 정책의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한울연대는 2월 11일 발표한 성명에서 “만물에는 한울이 깃들어 있으며 인간과 자연, 오늘의 삶과 미래 세대는 서로를 희생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조화와 책임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라며, 최근 정부의 신규 핵발전소 건설 추진이 “한울의 질서와 시민 민주주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숙의 없는 결정은 민주주의 아니다” 한울연대는 첫째로 정부의 결정 과정이 충분한 숙의를 거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진행한 여론조사에 대해 “질문 구성과 정보 제공이 편향되었으며, 원자력의 위험성과 지역 피해, 재생에너지와의 구조적 충돌 등 핵심 쟁점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에너지 정책은 단기간의 선호를 묻는 여론조사로 결정될 사안이 아니라 수십 년간 지역의 삶과 미래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제”라며, “비판적 질문을 배제한 동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관리된 합의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핵발전은 특정 지역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둘째로 한울연대는 핵발전소가 특정 지역 주민의 일상적 위험과 부담 위에 세워져 왔다고 밝혔다.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은 사고 위험과 방사성 오염에 대한 불안을 감내하고 있으며, 토지 이용 제한과 지역 낙인 문제를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명은 “전력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곳은 위험을 지지 않고, 전력을 생산하는 지역이 위험을 떠안는 구조는 명백한 에너지 불평등”이라며, 이는 정의의 문제라고 규정했다. 또한 “어느 지역의 삶도, 어느 사람의 안전도 대체 가능한 비용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감발 어려운 원자력, 재생에너지와 구조적으로 충돌” 셋째로 한울연대는 원자력의 구조적 특성이 재생에너지 전환과 충돌한다고 주장했다. 원자력은 출력 조절이 어려워 일정한 출력을 유지하려는 특성을 지니며, 이로 인해 전력 수요가 낮은 시간대에는 재생에너지가 우선적으로 차단되는 구조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성명은 “햇빛이 충분해도 태양광은 꺼지고, 바람이 불어도 풍력은 멈춰 선다”며, 이는 재생에너지의 한계가 아니라 원자력 중심 전력 체계의 구조적 결과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원자력 확대는 재생에너지 전환의 보완이 아니라 그 전환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밝혔다. “숙의 민주주의 재개·에너지 불평등 시정·재생에너지 전환 선언” 한울연대는 정부에 ▲숙의 민주주의에 기초한 공론 과정 재개 ▲핵발전이 특정 지역 희생 위에 유지돼 왔음을 인정하고 에너지 불평등 구조를 시정할 것 ▲원자력 중심 전력 체계를 중단하고 재생에너지 중심 전환을 선언할 것을 요구했다. 한울연대는 “보이지 않는 희생 위에 세워진 핵발전소를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천도교는 한울의 흐름을 끊는 에너지 선택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이날 발표한 성명서의 전문이다. 정부의 신규 핵발전소 건설 결정에 대한 천도교 한울연대 성명 비민주적 결정, 보이지 않는 희생, 그리고 공존할 수 없는 에너지에 대하여 만물에는 한울이 깃들어 있다. 인간과 자연, 지역과 지역, 오늘의 삶과 미래 세대는 서로를 희 생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한울을 모시고 조화와 책임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 다. 그러나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규 핵발전소 건설 논의는 이러한 한울의 질서와 시민 민주주의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깊은 우려를 표하며, 원자력 확대 정책의 전면적 재검토를 요구한다. 1. 숙의 없는 결정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정부는 신규 핵발전소 건설과 관련하여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과 달리, 찬반 양쪽 의 입장을 충분히 듣고 숙의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최근 정부가 진행한 여론조사는 질문 구성과 정보 제공에서 편향된 전제를 담고 있었으며, 원자력의 위험성, 지역 피해, 재 생에너지와의 구조적 충돌과 같은 핵심 쟁점은 제대로 제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 결과를 근거로 마치 사회적 합의가 형성된 것처럼 정책 방향을 발표하였다. 에너지 정책은 단기간의 선호를 묻는 여론조사로 결정될 사안이 아니다. 그 결정은 수십 년간 지역의 삶을 바꾸고, 미래 세대에 돌이킬 수 없는 부담을 남긴다. 숙의 없는 결정, 비 판적 질문을 배제한 동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관리된 합의에 불과하다. 불편한 질문을 지우고, 다른 가능성을 배제한 결정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2. 핵발전소는 일부 지역의 희생 위에 서 있다 원자력은 추상적인 에너지원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특정 지역, 특정 주민들의 삶의 터전 위에 세워진다. 핵발전소 인근 지역 주민들은 사고의 위험과 방사성 오염에 대한 불안을 일상적으로 감내하며, 토지 이용 제한과 지역 낙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부담은 ‘국가 발전’과 ‘전력 수급’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지만, 그 혜택은 대부분 다른 지역, 특히 대도시와 수도권이 누려왔다. 전력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곳은 위험을 지지 않고, 전력을 생산하는 지역이 위험을 떠안는 구조. 이는 명백한 에너지 불평등 이며, 정의의 문제이다. 더 심각한 것은 대다수 시민들이 이 구조를 인식하지 못한 채 원자력 확대에 동의하게 된다는 점이다. 핵발전소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세워지고, 피해는 숫자와 확률 뒤에 숨겨진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이 사용하는 전력이 누군가의 불안과 침묵, 희생 위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쉽게 외면하게 된다. 어느 지역의 삶도, 어느 사람의 안전도 대체 가능한 비용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3. 감발할 수 없는 핵발전은 재생에너지와 공존할 수 없다 원자력은 구조적으로 출력 조절이 어려운 에너지이다. 잦은 감발 운전은 설비와 안전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원자력은 항상 일정한 출력을 유지하려는 특성을 지닌다. 이 경직성 은 전력 체계 안에서 재생에너지와 직접적으로 충돌한다. 전력 수요가 낮은 시간대, 원자 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되는 것은 언제나 재생에너지의 차단이다. 햇빛이 충분해도 태양광 은 꺼지고, 바람이 불어도 풍력은 멈춰 선다. 이는 재생에너지의 한계가 아니라, 감발할 수 없는 원자력 중심 체계가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가 공존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전력 시스템의 현실을 외면한 말이다. 경직된 에너지는 반드시 더 유연한 에너지를 희생시킨다. 원자력 확대는 재생에너지 전환 의 보완이 아니라, 그 전환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자연의 흐름에 응답하는 재생에너지를 꺼버리면서 기후위기를 말하는 사회는 스스로의 모순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요구 하나, 정부는 신규 핵발전소 건설 논의의 비민주성과 편향성을 인정하고, 숙의 민주주의에 기초한 공론 과정을 다시 시작하라. 하나, 핵발전이 특정 지역 주민의 희생 위에 유지되어 왔음을 명확히 인정하고, 에너지 불평등 구조를 시정하라. 하나, 감발할 수 없는 원자력 중심 전력 체계가 재생에너지를 차단하는 현실을 중단하고, 재생에너지 중심 전환을 분명히 선언하라. 보이지 않는 희생 위에 세워진 핵발전소를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천도교는 한울의 흐름을 끊는 에너지 선택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2026년 2월 11일 천도교 한울연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