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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연해주의 3·1운동-한인사회의 내적 논리를 중심으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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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연해주의 3·1운동-한인사회의 내적 논리를 중심으로(1)

  • 장우순
  • 등록 2026.02.13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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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북간도·연해주의 3·1운동 – 한인사회의 내적 논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연구 논문으로, 3·1운동을 국외 한인사회의 시각에서 조명한 글이다. 특히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 한인사회의 역사적 조건과 사상적 흐름 속에서 3·1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본지는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정신을 오늘에 되새기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아 이 논문을 게재한다.

 

Ⅰ. 머리말


  3·1운동 이후 한반도 내 민족운동은 쇠퇴 국면에 접어들지만, 망명과 이주로 운동의 역량이 새로이 집결하기 시작한 간도, 연해주의 민족운동은 괄목할만한 양적, 질적 성장이 이루어진다. 민족운동 단체, 소속 인원이 급증하였고, 이러한 양적 확장에 기반한 민족운동의 총체적 역량 역시 성장하였다. 이후 전개된 간도, 연해주 지역의 민족운동은 3·1운동의 직접적인 성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이나 성과와 분리할 수 없다. 

  3·1운동은 한반도를 포함한 일본, 미국, 중국 관내, 만주, 연해주 등 세계의 모든 한인사회가 포함된 세계 한인네트워크가 구축되고, 한민족의 ‘근대적 정체성’이 일제의 폭압을 촉매로 실체적 모습을 드러낸 혁명적 사건이었다. 

  3·1운동에 대해 그간 다양한 관점을 가진 풍부한 논의들이 생산되었음에도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남아있다. 특히, 3·1운동 이후 민족운동 근거지 역할을 하였던 북간도, 연해주 한인사회와 3·1운동이 연동되는 메커니즘, 3·1운동이 담지한 근대적, 민족적 의미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북간도, 연해주 한인사회가 수행한 역할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를 보는 기존 관점도 돌아볼 여지가 있다. 한인들이 직면했던 다양한 내적, 외적 조건들을 외면하고, ‘우리=한국사’가 읽고 싶은 맥락만을 취한다면 운동의 동력과 조건이었던 한인사회의 주요 의제들은 읽어낼 도리가 없다. 중국 조선족, 중앙아시아 고려인이라는, 역사적 결과로 존재하는 이들의 정체성은 결국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본고는 북간도, 연해주 한인사회의 내적 논리에 주목하여, 3·13, 3·17운동을 살펴보려 한다. 한인사회의 내적 논리에 주목하는 민족사의 관점에서 접근하되, 3·1운동 전후 구축된 세계 한인네트워크와 한인사회의 관계에도 주목해보려 한다.

          


Ⅱ. 3·1운동 전후의 국제정세


  산업혁명 이래 진행된 서구 자본의 절대 권력화와 식민지 쟁탈전은 1차 세계대전으로 조정의 국면을 맞이했다. 자본의 본질인 탐욕이 서구의 침략성을 극대화하였고, 탐욕을 좇은 무한경쟁은 서구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1차 세계대전과 전후 질서는 서구의 추악한 탐욕을 승자의 담론으로 정리하기 위한 과격하고, 극단적인 조정의 과정이었다. 

  북아프리카, 발칸반도를 둘러싼 신·구 제국의 갈등은 1차 세계대전의 혼돈을 야기했지만, 러시아에는 혁명의 기회가 되었다. 최초의 ‘현실 사회주의국가’ 소련이 천명한 반자본, 반제국주의 노선은 서구의 침탈로 고통받던 약소민족에게 현실적 해방의 희망이자 새로운 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비록 러시아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과 연대하면서 일시적으로 연해주와 간도의 주요 한인 단체들이 대대적 탄압을 받았지만, 러시아혁명의 성과와 사상은 인접한 연해주, 간도 한인사회, 이들과 연결된 세계 한인사회에 혁명적 민족운동의 전략, 전술로 공유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조선총독부의 폭압적 지배가 이어지고 있었다. 헌병경찰로 민족운동을 탄압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의 기본적 권리도 억압하였다.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형벌로 인권을 유린하고,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을 통해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일제의 탄압에도 동학혁명의 영향으로 전파된 평등, 평화 지향의 근대적 의식  「포덕문 」(『경주판 동경대전』)에서 표방된 누구나 3년에 도를 이루고, 입도한 그날 군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조선의 차별적 신분질서를 근본부터 부정하는 평등 사상이었다. 이 평등사상은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여 조선 내부에서 주체적으로 제기된 거의 유일한 근대적 의식이자 사상이었다.)은 다양한 민족운동과 결합하며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민족종교, 교육의 보급은 근대 지식과 의식으로 무장한 청년·학생층을 성장시켰고, 전 산업 분야에 걸친 무자비한 수탈은 계급의식으로 각성한 노동자·농민층을 양산하였다. 식민지라는 조건이 청년·학생과 노동자·농민을 3·1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 주체적 역량으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첫째, 천도교, 대종교 등 민족종교의 교세가 성장하면서 교인들을 중심으로 민족의식 또한 빠르게 확산되었다.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는 일찍이 ‘독립선언’ 형식의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최린, 「자서전」, 『여암문집』 상, 1971, 182쪽. 1919년 1월 손병의는 천도교 관계자들에게 대사의 준비를 지시했다. 1918년 말, 1919년 초에는 구체적 계획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불교계를 규합하였다. 또한, 자금을 동원하고,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였으며, 각 지역 교인을 시위운동에 동원함으로써 사실상 3·1운동의 전 과정을 주도하였다. 

  둘째, 애국계몽운동, (신용하는 애국계몽운동이 민족과 사회를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3·1운동과 독립군 무장투쟁을 비롯한 독립운동의 직접적인 원류를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신용하, 「한말애국계몽사상과 운동」, 『한국사학』 1, 1980). 애국계몽운동이 변혁운동의 성격을 가진 시기가 있었지만, 사상적 기반이 사회진화론이고, 이후 친일 지치운동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는 인식이다.) 실력양성론의 관점에서 전개한 교육·문화운동으로 각지에 사립학교, 서당, 야학 등이 설립되어 민족의식에 눈뜬 청년·학생들이 대거 양성되었다. 이들은 3·1운동 당시 각 지역의 항일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셋째, 일제의 수탈이 심화되면서 노동자·농민들은 점차 계급모순을 자각, 산발적인 쟁의와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유된 민족의식은 3·1운동을 확산, 지속시킨 가장 강력한 민족 내부의 동력이었다.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 반대투쟁, 삼림정책 반대투쟁, 수리조합 반대투쟁, 각종 조세 반대투쟁 등을 벌였으며, 주재소, 면사무소 등 일제 통치기구를 공격하였다. 노동자들도 민족적 차별대우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일제가 강제한 동일한 성격의 모순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투쟁의 방향은 민족적 저항으로 수렴되었다. 

  한편, 한반도와 국경을 접한 북간도와 연해주에는 이주 한인들에 의해 한인사회가 개척되면서 일제의 무단통치에 억눌려있던 한반도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근거로 하는 민족운동의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Ⅲ. 한인사회의 토대와 내적 축적


  1860년대 조선 민중은 봉건경제의 파탄과 관리들의 탐학으로 연명조차 불가능한 한계상황에 직면했다. 북부지방에 극심한 자연재해마저 지속되자 (『일성록』 ; 『철종실록』 12, 철종 11년 4월 20일 ; 『고종실록』 1, 고종 1년 4월 7일. 등에는 1859년, 1960년, 1961년, 1863년, 1869년, 1970년 관북지역의 극심한 자연재해가 기록되어 있다.) 변경지역 주민 일부가 중국과 러시아로 이주를 감행하였고, 이들에 의해 간도 (김원석, 「중국 조선족의 천입사에 대한 연구」, 『동아연구』 25,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1992 ; 김춘선, 「청조시기 한인의 만주이주와 정착. 1」, 『한중미래연구』 2, 동덕여대미래연구소, 2014.)와 연해주 (프로트니코바 마리나, 「1863∼1910년까지 연해주로의 한인 이주와 그들에 대한 러시아의 정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연해주로 한인들이 최초로 이주한 것은 1863년 말로, 14가구, 65명의 함경도 주민이 두만강 건너 한·러 접경의 뽀시예트로 이주하였다고 한다.)의 황무지가 개간되기 시작했다. 빈궁한 농민들의 이주가 한인사회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초기 한인사회가 사상, 문화적 구심점 없이 여러 사상과 가치가 혼재하는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인들의 최초 이주 시기는 간도와 연해주 지역이 서로 다르지만, 한인사회가 형성될 정도의 대량 이주는 두 지역 모두 1860년대 후반 이후 이루어졌고, 북간도의 경우 1880년대의 일이다. 북간도는 서간도보다 늦게 개척되었다. 두만강 대안에서 봉금정책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주 초기 두만강을 건넌 한인들은 연해주나 서간도로 다시 이주해야만 했다.  

  북간도의 경우 1881년 청이 훈춘에 초간총국을 설치, ‘이민실변’정책 (청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한인의 간도 이주를 허용하고, 귀화·입적과 간도지역 개척을 권장하여 청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자 실시한 한인 이민 수용정책)을 실시하면서 이주 한인이 급증하고, 개척이 진행되었다. 이후 북간도 한인사회는 만주 전역 및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인들의 기착지이자,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사회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연해주는 러시아 정부가 연해주 식민화에 매진하던 상황이라 황무지를 개척하는 한인의 이주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러시아 당국은 한인 이주에 우호적이었고, 이주 한인들은 초기에 당국의 식량을 지원받으며 토지를 개간, 빠르게 안정적으로 정착하였다. 연해주의 토지 대부분은 개간할 노동력만 있다면 확보가 가능했기에 피폐한 한반도의 삶을 등지고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인들이 증가하였고, 한인사회가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프로트니코바 마리나, 앞의 글, 45-52쪽.)

 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는 시기별로 중국, 러시아의 이민정책, 일본의 침략정책과 국제정세 등으로부터 복합적인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1860년대 이후 꾸준히 한인 이주가 증가하면서 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고, 총체적 역량도 함께 성장하였다.       

  

 1. 한인사회의 형성과 성장


  북간도 한인사회는 1860년대 후반 형성되기 시작하여, 1880년대부터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1880년 회령부사 홍남주는 부민들이 청원서를 제출하면 두만강 대안을 개간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경진(庚辰)개척’이라는 집단개척이 이루어져 길이 500리 폭 40∼50리의 토지가 개척되었다. 1883년에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간도 이주자에게 지권을 발급, 거주를 보장해주기도 하였다.

 이주민 관리가 시급해진 조선 정부는 정확한 경계 설정을 위해 청과 ‘감계회담’에 나서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회담은 종결되었다. 두 차례 감계회담이 진행되었지만, 대한제국은 두만강 상류 홍토수를, 청은 이보다 남쪽에 있는 석을수를 경계로 주장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회담 결과와 상관없이 조선의 경제 파탄, 정치 불안으로 한인의 간도 이주는 계속 증가하였다. 대한제국은 백두산정계비, 간도 거주 한인을 근거로 하고, 서구 열강의 위력 특히, 러시아와 미국에 영향력에 의지하였다.

을 지렛대 삼아 중화적 세계관을 탈피하고 간도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후과인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간도는 일제의 침략 전술에 따라 청에 귀속되고 말았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철도와 부속토지를 넘겨받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세우고 만주 침략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1907년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1909년 간도협약을 체결, 간도의 영유권을 청에 넘겨주는 대가로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포함한 이권들을 확보하고 일본총영사관을 설치했다. 이로써 한반도와 간도의 연결고리는 일제에 의해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한인의 간도 이주는 초기부터 청, 장년층 위주로 이루어졌으므로, 이들이 생산한 2세들의 인구는 전체 인구증가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었다. 장우순, 「1920년대 만주한인사회의 세대교체와 운동이념의 변화」, 『사림』 26, 수선사학회, 2006. 2세대 인구 증가를 만주 한인사회 인구 증가의 주요 원인으로 처음 제기하였다. 

 2세 인구의 증가는 간도 한인사회가 안정된 경제 기반을 토대로 지속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의 하나였다. 해당 시기 북간도 한인의 인구변동 추이는 다음과 같다. 

 

화면 캡처 2026-02-13 154931.jpg

〈표 1〉 북간도 한인의 인구변화추이(단위는 名)(沈如秋, 『延邊調査實錄』, 1930, 22쪽∼23쪽 ; 延边朝鲜自治州地方志编纂委员会 编, 『延边州志』, 中華書局, 1996, 255쪽.)



  북간도는 인구뿐 아니라 경제,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만주 한인사회의 중심지였다. 북간도 한인사회의 급속한 성장에 세계 각 지역 한인사회가 주목하였다. 전 세계 한인사회의 총체적 역량에서 북간도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 이후 1926년까지 서간도 111,324명, 북간도 126,974명 등 모두 238,298명이 간도로 이주하였다. 이 기간 전체 한인이 340,115명 증가하였고, 한반도 귀환 한인이 95.000명 정도이므로 (朝鮮總督府內務局社會課 編, 『滿洲及西比理亞に於ける朝鮮人事情』, 1927, 14쪽.) 전체 증가분에서 이주로 증가한 238,298명을 제외한 101,817명에서 귀한한 한인 수를 감안한 196,817명까지가 자연증가로 추정된다. (장우순, 앞의 글, 144쪽.)

 2세대 인구의 증가는 2세대 교육의 문제를 한인사회 주요 의제로 부상시켰다. 북간도 한인 민족운동을 주도한 간민교육회는 교육을 한인 실력양성의 기초로 보고 학교설립 등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북간도에서 한인이 세운 사립학교는 1911년 8개, 1913년 46개, 1917년 50개로 급속한 증가세가 확인된다. (중국조선족교육사집필소조, 『중국조선족교육사』, 연변, 동북조선족민족교육출판사, 1991, 14쪽.)

   간민교육회는 1907년 8월 한인 자치와 교육을 위해 결성되었다. (공식 명칭은 연길부간민교육회로 이동춘, 구춘선, 정재면, 윤해 등이 결성한 귀화인 중심의 자치, 교육운동 조직. 본고는 당안자료를 근거로 결성일을 1907년 8월로 추정하였다.) 간민회, 간도국민회로 발전하였으며, 북간도를 대표하여 다양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독립전쟁에도 참여하였다. (간민회가 결성되는 1913년부터 이동휘 계열의 영향으로 강한 민족의식을 드러나기 시작한다.)

 간민교육회가 명동, 정동, 은진, 명신· 광성, 창동, 북일 등의 중학교와 간민모범학당 등을 설치, 민족교육을 실시한 것은 교육운동을 민족운동의 핵심 전술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간민교육회는 또한, 「교육보」를 발행하고, 연해주의 「권업신문」, 미주의 「신한민보」를 구입, 한인사회에 보급하였다. 다른 지역 한인사회를 이해하고, 연결하기 위한 이러한 노력은 세계 한인사회를 하나로 묶고 공동 의제에 대한 의견교환 및 연대 활동을 가능케 하였다. 세계 한인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를 이용하여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역량을 북간도 한인사회는 3·1운동 발발하기 한잠 이전인 1910년을 전후한 시기 이미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있었다. 

  연해주에서는 북간도와 다른 양상으로 한인사회가 성립되어갔다. 1874년 블라디보스토크 구개척리에 한인촌이 만들어졌고, 흑정자, 녹둔도, 도비허, 남석동, 와봉, 수청 등지에 주요 한인촌이 성립되었다. (뒤바보, 「아령실기」 2, 3, 『독립신문』, 1920년 3월 1일, 3월 4일. 뒤바보는 계봉우의 필명.)

 러·일전쟁은 한인의 연해주 이주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러·일전쟁과 그 후속 결과의 하나인 을사조약으로 농민뿐 아니라 정치적 망명자 역시 급증하였다. 정치적 망명자들은 러·일전쟁의 패배로 조성된 러시아의 반일 정서를 배경으로 연해주를 한인의 항일운동 중심지로 만들어 갔다. 이러한 연해주의 초기 항일운동을 대표하는 것이 1908년 의병진의 국내진공작전이다. 이러한 의병운동은 연해주를 근거로 하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갈래이자 훗날 시베리아 내전기와 1920년 독립전쟁기 한인 빨치산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1920년 북간도 독립전쟁에 참여한 의군부, 대한총군부 역시 이범윤의 의병부대를 기반으로 한 부대였다(강덕상, 『현대사자료 24(조선 4)』, 399-405쪽.). 총재는 문창범, 사령관은 최진동이었다.)

 

 1910년대 연해주 한인의 계급은 귀화 여부가 결정했다. 러시아 이주민 정책이 귀화인(이하, 원호인)과 비귀화인(이하, 여호인) (원호인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한인, 여호인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한인을 지칭한다.)을 극단적으로 차별하였기 때문이다. 원호인은 1호당 16.4헥타아르의 토지를 무상으로 받아 이를 기반으로 상당한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정 정도 소득 규모를 갖춘 원호인들은 한인사회의 상층계급이 되었고, 토지를 받지 못한 여호인들은 매우 열악한 조건 속에서 하층 구성원으로 전락하였다. 다음은 1906년에서 1917년의 기간 연해주 이주 한인의 인구 및 원호인, 여호인 구성이다.

 

 

(계속)

글, 장우순(한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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