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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주·평화 실현의 길 모색광복과 분단 80주년을 맞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민족자주 평화 실현 범시민대토론회’가 12월 12일 오후 2시 서울 수운회관 907호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회는 임남희 공동대표의 사회로 청수봉전과 심고 등 천도교 의식으로 문을 열며, 민족자주와 평화 실현을 향한 뜻을 함께 모으는 자리로 마련됐다. 이어 박인준 교령의 축사는 전명운 교화관장이 대독했으며, 이우재 동학민족통일회 상임고문이 격려사를 통해 토론회의 의미를 더했다. 박인준 교령은 축사(전명운 교화관장 대독) 통해 “우리는 끊임없는 다시개벽의 길을 걸어왔다”며 “이는 우리 민족이 하나로 연결되고 통일되며, 더 나아가 한울나라 건설을 향한 몸부림이었다고 자부한다”고 밝혔다. 이어 다시개벽의 길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이고 상호주의에 부합하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박 교령은 동학민족통일회에 대해 “결코 편향되지 않은 노력과 방향을 존중한다”며, 특히 삼통(통상·통신·통행) 실현의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동학민족통일회의 유의미한 활동을 기대한다”며 “오늘 범시민대토론회 개최를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했다. 주선원 상임의장은 개회사에서 광복 이후 80년의 역사와 분단 현실을 성찰하며, 지금이야말로 시민사회가 중심이 되어 민족자주와 항구적 평화를 향한 실천적 대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임을 강조했다. 또한 다양한 시민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평화와 통일의 길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해 나가자고 밝혔다. 이날 토론회는 1부 기조강연으로 강민조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회 회장의 <통일은 민족자주의 동질성 회복으로>에 이어 2부 발표에서는 이결렬(전직 외교관), <민족자결 외교를 위한 길>, 김용휘(대구대학교 교수), <동학의 정신과 경험에서 찾아본 통일한국의 청사진(조선식 신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허상수(전 진실화해위원회 위원), <공존의 조건과 화해의 전망>, 김올가(김경천 장군의 혈손), <김경천 장군의 항일 독립투쟁 정신과 한민족 통합의 의의>, 노태구((사)동학민족통일회 고문), <강재 신숙의 삼본주의 통일독립사상> 등을 주제로 이어졌으며 3부 토론에는 김경임 전 튀니지 대사, 성강현 동의대학교 교수, 윤기종 남북민간교류협의회 공동대표, 임채완 전남대 명예교수, 정인갑 중국 칭화대학 명예교수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는 시민사회 관계자와 교인 등 100여 명이 참석해, 한반도 평화와 민족자주 실현을 위한 방향과 과제를 놓고 깊이 있는 논의를 이어갔다. -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 11일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봉행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이 포덕 166년(2025) 12월 11일 오후 2시, 울산광역시 중구 여시바윗골 동학관 앞마당에서 130여 명의 교인과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되었다. 여시바윗골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10여 년의 주유천하를 마치고 정착하여 명상과 수련에 전념하던 곳으로, 1997년부터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어 유허비와 초가가 복원되었고, 오늘날에도 천도교(동학)의 뿌리를 전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번 봉고식은 중앙총부 서소연 교무관장의 집례로 진행되었으며, 청수봉전(울산시교구 덕인당 최정숙), 심고, 주문 3회 병송,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경과보고 및 약력보고(강병로 종무원장), 식사(박인준 교령), 축사(김산 유지재단 이사장), 헌화(수정당 김명덕 여성회장), 부산시연합 '한울합창단'의 천덕송 합창(제13장 기념송 1~3절), 심고, 폐식 순으로 봉행되었다. 강병로 종무원장은 경과보고를 통해 출세 200년이었던 포덕 165년(2024)을 기점으로 추진된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사업에 대해 대신사의 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학술·출판, 문화·공연, 성역화·기념물 건립 등 다각적인 분야에서 진행되었음을 밝혔다. 경과보고에 따르면, 학술·출판 분야에서 2024년 10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기념 컨퍼런스를 열어 동학·천도교의 역사와 미래 과제를 논의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읽기 쉬운 동경대전·용담유사』와 『수운 최제우 대신사 자료집』을 출간해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널리 알렸다. 문화 분야에서는 창작 뮤지컬 〈용담 가는 길〉 공연과 출세 200년 기념식, 동학·천도교 초기 유물 전시회가 이어졌고, 전국 수운대신사의 유적지를 따라 걷는 동학 답사 퍼포먼스를 통해 대신사의 피체 노정을 체험하는 기록 사업도 진행됐다. 아울러 성역화 사업으로 수운대신사 태묘 일대 정비를 완료했으며, 유물전시회 당시 제작된 흉상을 청동 흉상으로 완성해 오늘 울산 여시바윗골 유허지에 제막함으로써 출세 200년 기념사업의 대미를 장식하게 됐다. 이번 흉상 제막은 대신사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개벽과 시천주의 가르침을 미래 세대에 전하는 상징적 결실로 평가된다. 박인준 교령은 식사를 통해 여시바윗골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와 대신사의 구도 행적을 짚으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대신사께서는 20세에 제세안민과 구도의 큰 뜻을 품고 이곳 처가에 의탁한 채 명산대천을 두루 살피며 인심과 풍속을 살피는 주유천하의 길에 나서셨습니다. 그러나 10여 년에 걸친 주유에도 구도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새로운 구도의 길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다시 여시바윗골로 돌아오셨습니다. 포덕 전 6년인 1854년 초옥을 짓고 농사와 수행을 병행하며 정진하던 중, 포덕 전 5년 1855년 3월 어느 날 한 이인이 나타나 건네준 책, 곧 『을묘천서』를 받는 첫 신비 체험을 하게 됩니다. 여시바윗골은 창도 이전 가장 근원적인 성지로서, 적멸굴과 함께 한울님과 소통하기 위한 정신세계의 발원지가 되는 곳입니다. 『을묘천서』의 수득은 천도교 창명 과정의 중대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곳은 동학 천도를 여는 여정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봉고식 이후 참석자들은 준비된 차와 음료, 다과를 나누며 담소의 시간을 가졌다. 천도교 창도의 정신이 깃든 여시바윗골에서 열린 이번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은 대신사의 구도 행적을 기리고, 동학·천도교의 정체성과 역사적 의미를 다시금 새기는 자리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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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나와 우리를 다시 찾는 길입니다" 성강현 교구장의 동학 연구와 삶겨울의 문턱에 접어든 어느 날, 성강현 대동교구장을 만났다. 최근 『수운의 길을 걸어 동학을 만나다』(선인)를 펴낸 그는, 출간 소감과 더불어 천도교인으로서, 동학 연구자로서, 그리고 역사 연구자로 살아가는 길에 대해 담담히 들려주었다. 아울러 오늘의 시대에 동학의 가르침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오래도록 품어온 생각들을 차분히 풀어놓았다. 문 : 반갑습니다. 교구장님께서는 그동안 포로수용소 내 천도교인들의 활동 연구, 동학과 천도교사 연구, 그리고 근현대사 전반에 대한 연구에 매진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폭넓은 연구를 관통하는 핵심 문제의식은 무엇인가요? 특히 동학과 천도교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나 전환점이 있었다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에 ‘수운 최제우의 길’을 따르는 연구를 책으로 묶어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답 : 2024년이 수운대신사 탄생 200주년이라 교단 안팎에서 기념식, 국제 콘퍼런스, 자료집 발간 등 여러 행사가 진행됐지만, 제게는 조금 ‘나와 떨어져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수운대신사 탄생 200주년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 있는 일인데, 여기에 나만의 의미를 하나 더 보탤 수는 없을까?” 동학과 천도교가 말하는 ‘인간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제 삶 속에서 실천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역사를 공부하고, 답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수운대신사 200주년을 기념해 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수운대신사님의 집안 이야기(정무공, 근암공, 어머니와 가족사), 구도 과정, 동학 창도 이후의 삶, 그리고 이후 안타까운 가족들의 운명을 생애 전반과 유적지를 망라해 정리한 결과물이 바로 이번 책입니다. 문 : 각자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주체적인 실천이 모여 수운대신사 탄생 200주년이 풍성해지고 빛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이번 신간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책 속에서 수운 대신사의 사상을 대신사의 발자취 따라가며, 오늘의 사회와 신앙 현실에 맞추어 재해석하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여기서 궁금해집니다. 동학과 천도교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답 : 개인적인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계기는 “나를 찾는 작업, 우리를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역사는 늘 외세에 휘둘리고 간섭받아왔습니다. 그 굴레를 끊는 출발점이 동학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저는 동학을 ‘자주적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K-컬처, K-문화도 결국 200년 전 수운대신사가 이 땅에 와서 ‘나를 발견하고, 우리의 의미를 새롭게 세운 것’에서 시작된 흐름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문제의식은 역사학적으로는 자주적 근대화, 동학과 천도교, 민족운동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또 하나의 계기는 아버지입니다. 아버님이 황해도 금천 출신 천도교인이셨고, 북한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셨습니다. 천도교 포로 연구는 곧 아버지 세대, 북한 천도교인들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서, 대학 진학 때 ‘정 붙일 데가 천도교밖에 없었다’는 아버님의 말이 마음에 남았고, “내가 대학에 가면 동학·천도교를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사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이후엔 교사생활을 하며 연구에서 멀어졌지만, 형님 성주현 상주전도사님의 “정신 차려라” 한마디에(웃음) 대학원에 진학해 다시 본격적인 연구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문 : 천도교 포로 연구와 학위 논문은 어떻게 연구하게 되셨되었나요? 답 : 대학원 시절 거제도 포로수용소 답사를 갔다가, 제가 발표에서 “이 포로수용소에 천도교인이 많았다, 활동도 활발했다.”고 말했더니 지도교수님이 크게 관심을 가지시며 “이걸 연구 주제로 삼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자료가 거의 없어서, 석사 논문은 아버님과 또 한 분, 두 분의 구술증언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이후 박사 과정에서는 구술자를 약 열 명으로 늘리고, 미군 측 문서(85포로수용소, 1951년 9월 17일 학살 사건)에 대한 자료를 찾았습니다. 구술 증언 중에 “9월 17일에 천도교인들이 희생됐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미군 방첩대(CIC)의 조사 기록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발견했습니다. 마이크로필름 자료와 구술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순간, “역사적 가치가 입증됐다.”는 감각을 강하게 느꼈고, 연구자로서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문 : 선생님이 생각하는 ‘연구 방법론’, 특히 현장 답사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답 : 역사 연구는 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이 주는 감응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 책에도 적멸굴에서의 경험이나 은적암에서 느낀 것, 손봉조의 집을 찾아가는 과정 등이 담겨 있는데, 현장에 가면 ‘대신사께서 여기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세상을 꿈꾸었을까’를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동학을 알고 싶은 분들께는 책에 적어둔 주소들을 따라 직접 답사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연구자의 시각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는 철학의 입장에서, 문학 연구자는 문학의 입장에서, 예술가는 예술의 감각으로 동학과 수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청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살기 힘들다’고 하지만, 인생의 고비마다 수운대신사의 수난로, 동학 순례길을 걸어보며 내 삶의 문제의식과 수운대신사의 문제의식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책에서 저는 “수운대신사의 수난로를 동학 순례길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제안도 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삶의 해답을 찾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문 :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연구하시다 보면, 사료가 부족하고 기록에 공백이 있을 때가 많았을 텐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답 :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역사적 상상력입니다. 사실과 사실 사이에 생기는 ‘틈’을 어떻게 메워갈 것인가, 그것이 역사 연구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저는 현장에 가서, 이렇게 스스로 묻습니다. “내가 수운대신사였다면 여기서 어떻게 했을까?” 예를 하나 들면, 대학 때 김개남 대접주의 손자를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모내기를 한창 하고 계셨는데, 그냥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죠. 그런데 “내가 따르는 선배였다면 여기서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함께 논에 들어가 모내기를 도왔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열리고, 점심까지 같이 먹으며 집안 이야기와 할아버지 이야기를 깊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현장 속에서 몸으로 함께하는 행위가, 사료의 틈을 메우는 역사적 상상력을 가능하게 합니다. 문 : 오늘날 학계와 사회에서 동학과 수운대신사의 연구는 어떤 위치에 있다고 보시나요? 답 : 많이 진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동학은 아직도 ‘비주류’, ‘언더그라운드’ 정도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자주적 근대화를 이야기하면서 동학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시각의 편향입니다. 외부 학자들은 ‘객관화’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두고 멀리서만 조망하려 하고, 교단 연구자들은 교단의 틀 안에 갇혀 사회화·공론화에 미숙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부 학자들은 조금 안으로 들어오고, 교단 연구자들은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동학 연구가 살아있는 학문이 되고, 사회와도 소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 : 여기서 조금 이야기를 넓혀서 여쭙고 싶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개벽’, ‘시천주·인내천’ 정신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답 : 우리 사회의 갈등은 결국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풀 수 있습니다. 동학의 시천주·인내천은 바로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한가운데에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사 갈등, 환경 문제, 여러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들을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우주, ‘천지부모’라는 인식 속에서 새롭게 바라봐야 합니다. 동학의 가르침인 ‘유무상자’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모두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정신 위에서 삶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돈이 곧 권력이 되어 버렸지만, 동학의 사상으로 세상을 잘 설명해줄 수 있다면, 사람들은 “동학 속에 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믿습니다. 문 : 앞으로의 연구 계획과, 연구자로서의 다짐을 들려주신다면요? 답 : 저는 역사 연구자로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동학의 이야기를 계속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번 수운대신사 책에 이어, 해월신사, 의암성사, 춘암상사, 그리고 동학혁명, 3.1운동, 민족운동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자료집과 유적지 소개 형식으로 정리해, 동학을 더 쉽게 세상에 알리고 싶습니다. 나아가 동학·천도교의 전체 역사를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작업도 언젠가 해보고 싶습니다. 이 일은 혼자 할 수 없고, 여러 연구자들과의 협업이 필요합니다. 갈 길이 멉니다. 무엇보다도 후학으로서 수운대신사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그 마음으로, 더 공부하고, 더 연구하고, 더 많은 자료를 찾으며 나아가고자 합니다. 문 : 자, 이제 마지막으로, 인터넷천도교신문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과 기억에 남는 현장 경험이 있다면 소개해주시길 바랍니다. 답 : “이 책을 많이 읽어주시고, 널리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꼭 한 가지를 권하고 싶습니다. “역사의 현장에 직접 가셔서 수운대신사님의 기운을 한번 느껴보십시오.” 제가 은적암에서 경험한 일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간 적이 있습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온 다음 날이었는데, 눈을 쓰며 은적암으로 올라갔어요. 바람 한 점 없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은적암에 발을 딛는 순간, 강풍이 확 휘몰아치더니, 이내 다시 고요해졌습니다. 그때 저는 “아, 정말 이곳이 대신사님께서 공부하신 자리구나.”하는 현장감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책과 연구를 넘어, 우리가 역사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날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덕암 성강현(역사학자, 대동교구장) 강원도 삼척 출신으로 강릉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사학과 졸업, 동의대학교 대학원에서 『6.25전쟁시기 천도교 포로의 전향과 종교 활동애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천고등학교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동의대학교와 예문여자고등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6.25전쟁시기 천도교 포로들의 일상생활』, 『태안 동학농민혁명사』(공저), 『대한민국의 역사 교육과정 1』(공저) 등 다수 인터뷰를 마치고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울림이 있었다. 성강현 교구장의 말은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동학의 길과 포개지고 깊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고백처럼 들렸다. 동학의 사상은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발걸음과 질문, 그리고 끊임없는 성찰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성강현 교구장이 말하는 ‘나를 찾는 일, 우리를 찾는 일’은 수운 대신사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는 일이 곧 오늘의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는 일이라는 것. 그 길이 청년들에게, 연구자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진하게 전해졌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따뜻하게 남는 인터뷰였다. 앞으로 성강현 교구장이 이어갈 연구의 길과 그 길을 통해 다시 밝혀질 동학의 빛을 기대해본다. -
On Propagating Truth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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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준 교령 포덕으로 김성군 해운대구의회 부의장 동천교구에 입교포덕 166년(2025) 11월 3일(월), 부산 해운대구의회 김성군 부의장이 흥신포 동천교구에 입교하였다. 동천교구는 월요시일식을 봉행하는 관계로 이날 오후 5시 성화실에서 시일식을 봉행한 뒤 입교식을 봉행하였다. 입교식에는 흥신포 도정 박인준 교령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하였으며, 서천문과 주문을 전수하였다. 또한 김대석 교구장, 유석운 동천고등학교 교장, 박효 교감, 신원기, 김용휘, 최민국, 안길중 부장 등 교구 간부와 학생 동덕들이 함께하여 새 동덕의 탄생을 축하했다. 집례는 신원기 교화부장이 맡았다. 남해가 고향인 김성군 부의장은 “할아버지 때부터 천도교를 해온 집안이었지만, 오랫동안 객지를 떠돌며 신앙을 잊고 있었다”며 “준암 교령님을 만나 다시 천도교를 할 수 있게 되어 마음이 매우 기쁘다”고 입교 소감을 밝혔다. 한편 교구에서는 김 부의장이 동천고등학교의 현안 사업과 관련하여 교육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입교는 박인준 교령이 직접 포덕하여 이뤄진 뜻깊은 사례로, 지역사회와 교단 안팎에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
[특별기고] 통권 900호, 한 세기를 건너온 이름 ‘신인간’종이 잡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다는 말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닌 시대에, 한 권의 잡지가 묵묵히 99년 9개월, 1,197개월을 채우고 통권 900호에 도달했다. 1926년 4월 1일 창간된 월간 『신인간』이 그 주인공이다. 천도교 유일의 기관지이자, 한국 근현대사 100년, 격동의 세월을 통과해 온 이 잡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인간·역사·신앙 아카이브”다. 이번 포덕 166(2025)년 12월호, 통권 900호는 단순한 ‘기념호’가 아니라, “다시 신인간,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 새 만물”을 선언하고 다시 출발하는 기념호다. 권두언에서 오암(박길수 주간)은 1926년 4월, 창간호 권두언의 문장, “우리가 바라는 바는 오직 ‘신인간’의 창조이다”를 다시 불러내 오늘의 우리(천도교인, 동학하는 사람들)을 비춘다. 이로써 지난 99년 9개월의 시간을 ‘자축’이 아니라 ‘자기성찰과 재천명’의 시간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인류세의 기후위기, 디지털·AI 혁명, 지구 질서의 격변 속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과 만물이 새로워지는 때”를 후천개벽의 시대로 읽어내고, 여기에 응답하는 새 하늘(한울), 새 땅(문명), 새 사람(신인간), 새 만물(사물의 주체성)을 하나의 비전으로 제시한다. 1. “천도교의 시간, 신인간의 시대”를 말하는 900호 이번 900호의 중심에는 두 개의 굵은 축이 있다. 첫째 축은 “신인간의 시대입니다, 천도교의 시간입니다”라는 선언으로 요약되는 준암 박인준 교령 인터뷰 기사다다. 교령 취임 200일과 『신인간』 900호를 기념해 마련된 긴 대담은, 한 개인의 신앙 이력에서 출발해, 교단의 현황과 과제,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 준비, 인류세·AI 시대의 문명 전환, 남북 평화와 민족통일, 탈종교 시대의 영성과 수도, K-사상으로서 동학·천도교의 가능성까지 폭넓게 다룬다. “천도교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동학·천도교 사상은 K-철학, K-사상이 될 수 있다”는 언급은, 동학-천도교가 더 이상 과거의 종교가 아니라 미래 문명을 설계하는 사상 자원임을 분명히 한다. 둘째 축은 「신인간 통권 900호–창간 100주년 특집: 축하와 제언」이다. 종법사·전직 교령·교단 각 기관 대표·동학민족통일회·여성회·청년회 등 교단과 시민사회 각 부문의 필자들이 총출동해, 100년을 건너온 『신인간』에 대한 축하와 함께 냉정한 제언을 보낸다. “후천개벽의 등불로 우뚝 서라”, “잡지의 미래를 개척하는 선구자가 되라”, “청년들의 손을 잡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가자”, “한울 공동체의 잡지가 되라”는 메시지들은, 신인간이 더 이상 ‘총부의 잡지’에 머물 수 없으며, 교단 전체와 동학 시민사회,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의 공적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요구이기도 하다. 연원회 의장 김성환, 종무원장 강병로, 종의원 의장 정정숙, 감사원장 대행 박돈서, 종학대학원장 김혁태,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 주선원, 천도교여성회본부 김명덕 회장, 천도교청년회 이상미 회장, 영등포교구 조광걸 교구장 등 교단 각 영역의 책임자들이 한데 모여 한 권의 잡지를 두고 각자의 축하와 당부를 건넨다는 것은, 『신인간』이 단지 “사보”가 아니라 교단의 정신적 지형을 형성해 온 공적 매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2. 100년의 발자취 위에서 다시 ‘신인간’을 묻다 『신인간』의 역사는 곧 천도교의 역사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변천사다.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전쟁과 독재, 민주화와 세계화, 그리고 오늘의 인류세·AI 시대까지, 잡지의 지령(誌齡)은 곧 시대의 상처와 희망의 연대기를 의미한다. 900호라는 숫자는 국내 잡지 가운데 서너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장구한 지령이며, 그 사이 수만 명의 필자들이 이 지면을 거쳐 갔다. 이번 호의 특별기획 「『신인간』 발행사를 통해 본 한국 근현대사」는, 이 오랜 역사를 한 번 더 조명한다. 잡지가 매달 써 내려간 발행사의 기록을 따라가며, ‘신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가 겪어 온 고난과 역경, 도전과 재기를 함께 되짚는다. 신인간의 100년은 곧 “다시개벽”을 향한 한국 근현대사의 또 다른 얼굴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인간 명품 30선’ 연재의 일곱 번째 글로 실린 신언준의 「자중·분투·창조」는, 20세기 초 신인간 창간기의 사상적 긴장을 다시 불러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새것이란 무엇인가, 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새 사람, 새 생활, 새 문명’이라는 신인간의 원초적 문제의식을 지금 여기의 독자에게 되묻는다. 또 한 편, 박길수의 연재 「다시개벽의 이론과 역사」는 이번 호에서 7회, 그리고 연재의 마지막 회를 맞으며, 천도교 경전에 나타난 시대인식과 개벽론을 정리한다. 창도시대–은도시대–현도시대를 거쳐 오늘의 후천개벽기로 이어지는 사상적 지형이 정리되면서, 900호는 자연스럽게 ‘100년 뒤 다시개벽’을 사유하는 좌표가 된다. 연구논단에서는 라명재의 「해월신사 통문 연구(3·끝)」, 이동초의 「천도교 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 관리(4)」가 실려, 신인간이 단지 감성적인 잡지가 아니라, 교단 사상과 유산을 학문적으로 축적하는 플랫폼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해월신사의 통문을 통해 19세기 동학운동의 정신을 복원하고, 전국에 산재한 천도교 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 과제를 짚어내는 작업은, 2027년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준비하는 교단 전체의 과제와도 직결된다. 3. 청년과 미래세대와 함께 만드는 900호 통권 900호는 과거만을 회고하지 않는다. AI·디지털 시대를 통과하는 청년 세대의 고민과 감각을, 지면의 중요한 축으로 배치한다. 「내가 생각하는 신인간」 코너에서는, 정의필이 「AI시대의 신인간상」을 통해 생성형 AI와 인간, 영성과 도덕성의 문제를 사유하고, 명승철은 「다시 100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에서 신인간 2세대·3세대 독자의 시선으로 다음 100년을 상상한다. 윤철현은 「영성을 회복하여 도덕 사회를 이루는 사람」이라는 글에서, ‘영성’과 ‘도덕 사회’라는 키워드를 통해 신인간 독자의 삶의 방향을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청년·학생 지면도 풍성하다. 「학생마당」의 김상휘는 “사람과 공간을 바라보는 시야의 확장”을, 「청년마당」의 박현빈은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기록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신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작은 에세이를 들려준다. 이것은 단지 청년·학생의 ‘코너’가 아니라, 100년 잡지가 다음 세대와 어떻게 호흡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천도교여성회본부 회장 김명덕의 축하 글과 더불어, ‘마음편지’ 코너에서 임남희가 들려주는 “부모님의 신앙은 살아 있는 경전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은, 세대 간 신앙의 전승이 어떻게 한 가정과 한 교단의 생명을 이어왔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이다. 4. 종이 잡지가 사라지는 시대, 왜 신인간인가 오늘 우리는 “종이 잡지가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대형 서점의 잡지 코너는 해마다 줄어들고, 무가(무료잡지)와 SNS 숏폼이 사람들의 시간을 가져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100년 가까운 시간을 버텨온 한 권의 월간지는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이번 호 신인간 칼럼 「AI와 숏폼 콘텐츠의 진화, 문화 전파의 새로운 지평」은, AI와 숏폼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문화 환경 속에서 신인간 같은 ‘롱폼’(장문의, 천천히 읽는 글쓰기)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AI가 요약하고 숏폼이 주목도를 끄는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깊이 읽고, 오래 생각하고, 함께 질문하는 매체”를 필요로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인간』은, “사라지는 종이”가 아니라 “거꾸로 시대를 비추는 종이 등잔”이 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통권 900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내 마음 열리는 곳에 세상 또한 열리고 – 『신인간』 통권 900호, 새로운 시작입니다」에서 발행인 윤태원은, 신인간을 단지 한 권의 잡지가 아니라, 천도교와 동학, 그리고 넓게는 생명평화의 미래를 꿈꾸는 이들의 ‘공동 플랫폼’으로 재정의한다. 종이·웹·영상·강좌·좌담회를 아우르는 종합 미디어로서, 다시 100년을 준비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5. 다시개벽의 과거를 안고, AI 이후의 미래를 향해 『신인간』 통권 900호는, “다시개벽의 과거를 안고, 현재를 밟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한 걸음이다.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해방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간을 통과해 온 이 잡지는, 이제 인류세·AI 시대 이후의 인류 사회, 곧 생명평화·대동·지상천국을 향한 문명 전환의 비전을 묻고 있다. 900호의 여러 글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같은 것을 말한다. 인간은 다시 “한울을 모시고, 사람을 하늘로 섬기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 종교는 교권이 아니라 영성과 삶의 실천으로 다시 서야 한다는 것, AI와 디지털 기술은 인간과 만물의 존엄을 살리는 방향으로만 쓰여야 한다는 것, 청년과 여성, 지역과 농촌, 돌봄과 생태가 새 문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 99년 9개월의 시간을 지나 통권 900호에 이른 지금, 『신인간』은 묻는다. “다음 100년, 우리는 어떤 신인간으로 살 것인가?” 이 질문에 응답하고 싶은 이라면, 이번 900호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시라. 지난 100년의 겹겹의 기록 위에, 지금 여기의 우리의 얼굴과, AI 이후를 살아갈 미래 세대의 얼굴이 함께 겹쳐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겹침 속에서, ‘다시개벽’의 시대를 여는 작은 길잡이 불빛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목 차 ●권두언 / 다시 신인간,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 새 만물 / 오암 04 ●성명서 / 12·3 비상계엄 사태 1년 천도교 성명서 / 천도교중앙총부 06 ●신인간이 만난 사람 - 준암 박인준 교령 / “신인간의 시대입니다 천도교의 시간입니다” / 박길수 08 ●지상설교 / 수도와 한울님 마음 / 정윤택 31 ●특집 신인간 통권 900호 - 창간 100주년 : 신인간900호-100주년 특집: 축하와 제언37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 조동원_ 종법사 38 ○--100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개벽의 미래로 / 박남수_ 전 천도교 교령 39 ○-- 신인간, 사람다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 송범두_ 전 천도교 교령, 순의포 도정 42 ○-- 후천개벽의 등불로 우뚝 서기를 / 이정희_ 전 천도교 교령 46 ○-- 잡지의 미래를 개척하는 선구자로 / 백동민_ (사)한국잡지협회 회장 49 ●신인간을 빛낸 사람들 (3) ○-- 불꽃처럼 살아간 『신인간』의 에너자이저, 박달성 I 박길수 51 ●내가 생각하는 신인간 (9) ○AI시대의 신인간상 / 정의필 64 ○다시 100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 명승철 66 ○영성을 회복하여 도덕 사회를 이루는 사람 / 윤철현 68 ●신인간 명품 30선–07 / 자중自重·분투奮鬪·창조創造 I 신언준 71 ●신인간900호-100주년 특집: 축하와 제언 ○-- “한울님의 감응이 함께하기를 심고합니다” / 김성환_ 연원회 의장 80 ○-- 중일변을 맞이하는 『신인간』 / 강병로_ 종무원장 83 ○-- 꿈은 꾸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 / 정정숙_ 종의원 의장 86 ○-- 새 시대를 여는 『신인간』으로 발전하기를 / 박돈서_ 감사원장 대행 89 ○-- 100년의 거룩한 여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 김혁태_ 종학대학원 원장 91 ○-- 평화 세계의 교두보가 되라 / 주선원_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 93 ○-- 『신인간』 100년 대계를 마련하길 김산_ 천도교유지재단 이사장 96 ○-- 함께 만들어가는 한울 공동체의 잡지가 되길 / 김명덕_ 천도교여성회본부 회장 98 ○-- 청년들의 손을 잡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가자 / 이상미_ 천도교청년회 중앙본부 회장 101 ○-- 『신인간』, 영우靈友의 마음속으로 / 조광걸_ 영등포교구 교구장 104 ●신인간칼럼 / AI와 숏폼 콘텐츠의 진화, 문화 전파의 새로운 지평 / 최태형 108 ●마음편지 / 부모님의 신앙은 살아 있는 경전이었습니다 / 임남희 114 ●신인간통신 / 『신인간』 제호 로고를 다시 디자인하며 / 윤태원 120 ●학생마당 / 사람과 공간을 바라보는 시야의 확장 / 김상휘 122 ●청년마당 /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첫 걸음을 내딛고 / 박현빈 126 ●기획연재 / 다시개벽의 이론과 역사(7. 끝) / 박길수 130 ●연구논단 / 해월신사 통문 연구(3.끝) / 라명재 145 ●연구논단 / 천도교 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 관리(4) / 이동초 151 ●시운시변 / 이 땅에 평화와 사랑의 눈발이 나부끼는 그날까지 / 주선원 161 ●신인간 함께 읽기 / 의심과 성찰을 통과한 믿음을 위하여 / 편집실 172 ●특별기획 / 『신인간』 발행사를 통해 본 한국 근현대사 / 성강현 174 ●내 마음 열리는 곳에 세상 또한 열리고 / 『신인간』 통권 900호, 새로운 시작입니다 / 윤태원 184 신인간 구독 / 신인간 보내기 운동 참여 문의 02 - 730 - 6710 1권 5,000원 / 1년 50,000 / 평생구독 1,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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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인현(玆仁縣) 후연주점(後淵酒店)감영에서 참형을 시행한 이후 사흘 후에 처자를 불러 방면하며, 시신(屍身)을 거두도록 분부하였다고 되어 있다. 대신사의 시신은 단양 접주 민사엽(閔士燁)의 지도를 받는 동학 교도 김경숙과 김경필, 옥바라지를 전담했던 곽덕원, 그리고 대신사의 양사위인 정용서(鄭用瑞)와 해월 신사의 매부인 임익서(林益瑞), 상주 사람 김덕원(金德元) 등에 의해 수습되어, 3월 13일에 대구를 떠나 자인현(慈仁縣)에 이르렀다. 지금 자인현은 경산시(慶山市) 자인면(玆仁面)이다. 관덕당, 즉 현대백화점 앞길인 반월당 길을 따라 영남대로를 내려가면, 경산시로 들어서게 되고 이내 자인면에 이른다. 자인면 소재지로 들어가기 전 오래된 큰 연못이 있다. 이름은 ‘삼정지(三政池)’이다. 자인면 입구의 나지막한 구릉 일대는 유물 지정지이기도 하다. 삼정지는 구릉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의 유물은 한장군묘(韓將軍墓)를 중심으로 그 주변 일대에 삼국시대 경질토기편(硬質土器片), 조선시대 자기편(磁器片) 및 와편(瓦片) 등이 다량으로 채집되었다. 특히 예전에는 목곽묘(木槨墓) 단계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삼정지 일원이 중요한 유물의 자리임을 알 수가 있다. 이 삼정지가 대신사 시신이 사흘을 머문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그렇다면 집 뒤에 연못이 있는 주점, 즉 후연주점(後淵酒店)은 어디쯤 있었을까? 삼정지에서 자인면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지금은 슈퍼가 하나 있다. 이 슈퍼가 있는 자리가 주막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예로부터 주막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하고, 바로 이 슈퍼가 있는 자리가 옛날 자인현으로 들어가는 삼거리 입구이기 때문이다. 대구 관덕당에서 경주까지 대신사의 시신을 운구하며 들렸던 자인현 어느 주막. 지금은 찾을 길 없지만, 삼정지에 석양이 내려앉는 아름다운 모습이 왜 이리 처연한지 눈물이 흐른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포덕 166년 11월 30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13관법 : 무극대도"포덕 166년 11월 30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13관법 : 무극대도" 상암 오문환 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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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신인간』 통권 900호 특집 - 권두언“우리가 바라는 바는 오직 ‘신인간’의 창조이다.” 포덕 167년 4월 1일 발행된, 『신인간』 창간호, 통권 1호 권두언 <무하설>의 핵심 문장입니다. 그로부터 99년 9개월, 1,197개월을 지나, 오늘, 통권 900호입 니다. 『신인간』 편집자나 교단(중앙총부)만이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현재 입니다. 『신인간』 독자는 물론 천도교인 모두의 마음이 있었기에 이를 수 있었 던 오늘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한편 “『신인간』이 충분히 ‘신인간 창조’의 제 길을 걸어왔느냐” 하 면, 말문이 막힙니다. “지금 세상이 『신인간』이 예견하고, 약속한 대로, ‘신세 계’냐”고 자문해 보면,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신인간』 통권 900호에 즈 음하여 『신인간』 자신의 장래를 기약하는 일보다, 『신인간』의 사명을 재확인, 재천명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인류는 지금 ‘거대한 전환’의 시간, 후천개벽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최근 몇 년의 시간은 유별난 데가 있습니다. 후천개벽은 현실적으로 선천 물질개벽과 축의시대 인지認知혁명까지를 포괄하면서, 이를 다시 개벽하 는 인문개벽과 산업産業혁명까지입니다. 그중에서도 지금은 ‘디지털혁명’, 즉 ‘4차 산업혁명기’로서, AI가 산업구조는 물론 인간의 인식 체계까지도 혁명적 변화의 흐름 속에 밀어 넣고 있습니다. 더욱이 인류세人類世라는, 일찍이 경험 하지 못했던 전 지구적 기후위기 속에서 ‘지구 개벽’의 층이 보태지고 있습니 다.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과 사람과 만물이 새로워지는” 때입니다. 하늘(한울)의 새로움은 한울(神性)의 재발견, 재발명(밝힘)입니다. 호모 데우스 (Homo Deus)는 각자위심하던 그 인간의 신화神化를 이야기할 뿐, 신성의 내면 화와 동귀일체를 말하지 않습니다. 내 몸에 모신 내재적 신성이자 우주에 가 득차고 무위이화하는 기화적 신성인 한울님으로의 존재론적 전회를 결여한 ‘신神인간’은 인간중심주의의 극단적 과잉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한울 됨, 즉 영성을 회복하고 다시 밝히며, 생명의 문명이 작동하는 천도의 복권이 곧 새 한울(新天)입니다. 땅의 새로움은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 온 제도, 기술, 경제, 국가와 세계 체 제의 재편성, 재수립 과정입니다. 그동안의 지구 질서는 한계에 도달하여 새로 운 질서를 기다리며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미국내의 내전 상황, 러시아 대 우 크라이나(미국, 유럽) 전쟁,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 영토를 둘러싼 일본과 중 국의 갈등, 미국과 남미의 전쟁 위기 등에서 파열음이 나고 있습니다. 낡은 틀 이 부서지고 새로운 틀이 모색되는 중입니다. 미국 일극 체제가 종말을 고하 고, 중국, 러시아, 인도, 중동, 아프라카가 제 목소리 내는 다극체제가 부활하 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도덕문명, 생태문명으로 인류의 생활 윤리를 새롭게 하여 새로운 세계의 창조적 재구축을 도모하는 것이 곧 새 땅(新地)입니다. 사람의 새로움은 기하급수적 속도로 기술, 자본, 데이터의 부속물로 전락하 며 개인화하는 인간의 재탄생, 재창조입니다. 한울의 신성이 재발견되는 만큼 내재적 신성의 대변자로서의 인간으로 재발명再發明된 것이 곧 신인간입니다. 한울(神性)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삼경三敬과 물오동포物吾同胞의 신념으로 만 물과의 관계도 재발견한 인간, 새로운 윤리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영 성, 즉 한울의 나 됨을 자각하고, 관계의 신성을 자각하여 만물의 지휘자, 대변 자, 조화자로서 역할 하는 것이 곧 새 사람(新人)입니다. 만물의 새로움은 사물의 주체성을 재조명, 재구축하는 일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이 한울님 조화의 결실로서 신령한 존재임, 인간과 더불어 형제자 매임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사물 인터넷’을 통해 ‘그들’과 직접 소통하는 것이 가능해진 오늘날, AI를 매개로 만물이 인간의 ‘반려자’로서 자리매김하는 시대 입니다. 인간과 사물 간의 관계 역시 일방적 소비가 아니라 한울이 한울을 먹 는 관계로 다시 자리매김됩니다. 비인간 존재가 동포임을 수긍하고 AI와 물질 이 행위자임을 인정하여, 착취(추출), 남용, 남발(폐기)하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공생하고 동귀일체하는 신문명 구성원으로 재발견하는 새 만물(新物)입니다. 오늘, 참 좋은 날입니다. 고맙습니다! 『신인간』 900호까지를 성찰하고, 다 시 새로움을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 입니다. ‘『신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종교, 도덕, 윤리, 정치, 경제, 법률! 그것이 곧 신세계의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더 높이, 더 멀리[高飛遠走]까지 갈 수 있다 고 믿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너(후손, 후학, 후배)를 만나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悟菴) 추신 : 1. 『신인간』 통권 900호, 『신인간』 창간 + 신인간사 창립 100주년에 즈음하여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천도교신문> 광고 참조) 2. 『신인간』 보내기 운동, 『신인간』 구독 확장 운동에도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 봉행천도교중앙총부는 포덕 166년(2025) 12월 11일(목) 오후 2시, 울산시 중구 원유곡로에 위치한 수운 최제우 유허지 동학관에서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을 봉행한다. 이번 봉고식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숭고한 정신과 대신사의 크신 행적을 기리는 동시에, 동학이 제시한 시천주(侍天主)의 가르침과 인내천(人乃天)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지니는 의미를 다시금 환기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특히 천도교 성지인 울산 여시바윗골 유허지에 흉상을 봉안하고 제막식을 진행함으로써, 동학 창도 정신을 시대에 맞게 계승하고자 하는 천도교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자리이다. 중앙총부는 이번 제막 봉고식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정신이 한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뿌리내리고 확장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천도교중앙총부 서소연교무관장은 “수운대신사님의 가르침은 시대를 넘어 인간 존엄과 공동선의 가치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정신적 유산”이라며 “뜻깊은 자리에 많은 분들이 함께하여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하고 천도교중앙총부 교무관이 주관하는 가운데, 울산 여시바윗골 유허지 보존회가 후원하여 진행된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 흉상 제막 봉고식’은 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하며, 관련 문의는 02-6488-6825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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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인현(玆仁縣) 후연주점(後淵酒店)자인면으로 들어가는 삼거리 입구 자인면 입구에 있는 삼정지 전경 감영에서 참형을 시행한 이후 사흘 후에 처자를 불러 방면하며, 시신(屍身)을 거두도록 분부하였다고 되어 있다. 대신사의 시신은 단양 접주 민사엽(閔士燁)의 지도를 받는 동학 교도 김경숙과 김경필, 옥바라지를 전담했던 곽덕원, 그리고 대신사의 양사위인 정용서(鄭用瑞)와 해월 신사의 매부인 임익서(林益瑞), 상주 사람 김덕원(金德元) 등에 의해 수습되어, 3월 13일에 대구를 떠나 자인현(慈仁縣)에 이르렀다. 지금 자인현은 경산시(慶山市) 자인면(玆仁面)이다. 관덕당, 즉 현대백화점 앞길인 반월당 길을 따라 영남대로를 내려가면, 경산시로 들어서게 되고 이내 자인면에 이른다. 자인면 소재지로 들어가기 전 오래된 큰 연못이 있다. 이름은 ‘삼정지(三政池)’이다. 자인면 입구의 나지막한 구릉 일대는 유물 지정지이기도 하다. 삼정지는 구릉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삼정지가 보이는 자인면 전경 삼정 마을 입구, 삼정지 뒤에 있던 주점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지금은 부동산이 들어서 있다. 이 일대의 유물은 한장군묘(韓將軍墓)를 중심으로 그 주변 일대에 삼국시대 경질토기편(硬質土器片), 조선시대 자기편(磁器片) 및 와편(瓦片) 등이 다량으로 채집되었다. 특히 예전에는 목곽묘(木槨墓) 단계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삼정지 일원이 중요한 유물의 자리임을 알 수가 있다. 이 삼정지가 대신사 시신이 사흘을 머문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그렇다면 집 뒤에 연못이 있는 주점, 즉 후연주점(後淵酒店)은 어디쯤 있었을까? 삼정지에서 자인면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지금은 슈퍼가 하나 있다. 이 슈퍼가 있는 자리가 주막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예로부터 주막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하고, 바로 이 슈퍼가 있는 자리가 옛날 자인현으로 들어가는 삼거리 입구이기 때문이다. 대구 관덕당에서 경주까지 대신사의 시신을 운구하며 들렸던 자인현 어느 주막. 지금은 찾을 길 없지만, 삼정지에 석양이 내려앉는 아름다운 모습이 왜 이리 처연한지 눈물이 흐른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 대서사 『모두가 하늘이었다』 펴내이윤영 저, <모두가 하늘이었다>표지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이 동학 166년의 사상과 역사를 하나의 인간 개벽 서사로 재구성한 신간 『모두가 하늘이었다』를 출간했다. 저자는 40여 년간 동학과 민중운동사를 취재·연구하며 축적해 온 방대한 기록을 토대로, 수운의 깨달음에서 동학농민혁명·의병전쟁, 그리고 오늘날 시민사회에 이르는 정신사적 흐름을 한 권에 담아냈다. 이번 책은 동학의 탄생과 실천·혁명·항쟁·계승의 전 과정을 ‘한 인간의 깨달음이 사회적 변화로 확장되는 과정’이라는 큰 줄기로 처음 엮어낸 대중서로 평가된다. 수운의 구도에서 시작된 “인내천의 탄생” 이윤영 저자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생애를 ‘한 인간이 절망 속에서 길을 찾는 역사적 구도기’로 새롭게 조명한다. 여시바윗골의 체험, 천성산의 49일 수행, 용담정의 실존적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인간학이 탄생하는 순간을 서사적으로 재구성했다. 책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수운대신사의 심경을 생생하게 전한다.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 그러나 기쁨 뒤에는 반드시 굴곡이 온다는 ‘무왕불복’의 가르침은 고난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스승의 각오였다. (p.133) 또한 을묘천서 설화를 수운대신사의 실제 기록과 비교하며 인간과 하늘의 만남이 어떤 체험에서 비롯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잠을 깨어 살펴보니 그곳에 아무도 없더라.” 이는 을묘천서를 낳은 체험의 흔적을 짐작케 한다. (p.60) 해월 최시형 신사, 깨달음을 생활로 구현한 ‘삶의 철학자’ 해월신사의 마당포덕, 대인접물(待人接物) 중심의 윤리 정립, 지도 체계 재건은 동학을 사상에서 공동체 실천으로 옮겨 놓은 결정적 활동이었다. 저자는 해월신사를 “스승의 깨달음을 민중의 삶 속에서 구체적 질서로 만든 실천의 지도자”로 규정한다. 동학농민혁명·동학의병전쟁 — “모두가 하늘이었다”의 역사적 실천 전봉준이 이끈 고부기포·백산대회·황토현 전투는 인간 존엄의 회복이라는 동학의 철학이 ‘실천적 혁명’으로 구현된 장면이었다. 저자는 특히 수운대신사 순도 30년 후인 1894년 혁명의 본격적 봉기가 모두 3월에 일어난 사실에 주목한다. “순도한 3월, 30년 뒤 백산대회 역시 3월에 기포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역사의 깊은 연속성이다.” (p.233) 또한 갑오년 동학의병전쟁이 일본군에 예속된 조선 관군의 체제 속에서 얼마나 치열하고 고독한 항쟁이었는지를 역사 자료와 함께 상세히 분석한다. 또한 혁명군의 집강소 통치가 한국 민주주의의 원형이라는 저자의 해석도 주목된다. “‘사람이 하늘’이라는 철학은 ‘모두가 하늘이었다’로 실천된다. 인간 존엄의 원리는 공화정과 민주주의의 시원이다.” (p.417) 저자 이윤영, 동학 현장과 기록을 평생의 과제로 삼아 온 연구자 1958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이윤영 관장은 1989~2024년까지 《전북일보》, 《전북도민일보》, 《오마이뉴스》, 《천도교신문》 등에 칼럼·논단·기고 100여 편을 집필하며 동학과 근현대사 기록에 헌신해 온 현장 중심의 연구자이자 언론인이었다. 특히 수운대신사 탄신 200주년과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은 2024년, 『모두가 하늘이었다』의 원고를 《오마이뉴스》에 74화로 연재하여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 공로로 2025 동학·천도교 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이윤영 관장은 동학혁명연구소 소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등 동학 관련 기관에서 폭넓은 활동을 펼쳐 왔다. 저서로는 『만고풍상 겪은 손』(신인간사, 2014), 장편소설 『혁명』(모시는사람들, 2018), 『동학농민혁명 이야기』(거름, 2019) 등이 있다. 동학 166년을 ‘하나의 이야기’로 복원한 최초의 작업 출판사 리뷰는 이 책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수운에서 해월, 전봉준, 의병장들, 그리고 3·1운동과 현대 시민사회까지 한 인간의 깨달음이 공동체의 실천이 되고, 혁명이 되고, 국가적 항쟁이 되고, 결국 한 시대의 정신으로 남는 흐름을 하나의 선으로 복원한 최초의 서사다.” 『모두가 하늘이었다』는 동학의 역사적 장면들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으로 존엄한가?” 라는 질문으로 꿰어낸 21세기 개벽의 기록이자, 오늘날 독자에게 던지는 시대적 메시지로 남는다. -
동학이랑 천도교랑 같은 건가요?희암 성주현 상주선도사의 답변 : 동학과 천도교는 같습니다. 동학은 1860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창명하였으며, 천도교는 동학을 창명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를 제1세 교조로 받들고 있습니다. 동학 3세 교조 의암 손병희 성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라고 하였으며, 이를 ‘대고천하(大告天下)’라고 합니다. 의암 손병희 성사 천도교(天道敎)의 대고천하(大告天下) 의암성사께서는 드디어 동학(東學)의 현도(顯道)를 결심하고 이 해 (포덕46년1905) 12월 1일을 기하여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라 이름하고 천하(天下)에 광포(廣布)하였으니 이것이 곧 천도교(天道敎)의 대고천하(大告天下)이다. 동학을 천도교라 이름하게 된 것은 대신사께서 논학문(論學文)에서 ‘도즉천도 학즉동학 ( 道則天道 學則東學) 이라고 한 데서 연유한 것인데 이로써 40여 년 동안 염원하던 현도(縣道)가 획기적(劃期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현도에 대한 광고문(廣告文)은 광무9년(1905)12월 1일(금요일)자 제국(帝國)신문 제8권 제274호 첫머리에 게재(揭載) 된 것을 비롯해서 15회나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廣告(광고) (원문)-夫吾敎는 天道之大原일세 曰 天道라 吾敎之刱明이 及今四十六年에 信奉之人이 如是其廣하며 如是其多하되 敎堂之不遑建築은 其爲遺憾이 不容提設이요 現今人文이 천개하야 各敎之自由信仰이 爲萬國之公禮요 其敎堂之自由建築도 亦係成例니 吾敎會堂之翼然大立이 亦應天順人之一大表準也라 惟我同胞諸君은 亮悉함 敎會堂建築開工은 明年2월로 爲始事 天道敎大道主 孫秉熙 고백 (교서 ‘천도교백년약사(상)’에서 옮김) (원문해설) - 무릇 우리 교는 천도의 큰 근원일세. 그 이름을 천도라고 하니라. 우리 교가 창명된 지 이제 46년이 지나는 가운데 신봉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널리 있으며 이와 같이 믿는 사람이 많은데, 교당을 건축하지 못한 것은 유감 되기 다시 말할 것이 없고, 지금 세계는 인류 문화가 드러나고 열려서 각 종교의 자유로 신앙하는 것이 만국의 공예가 되었고 그 교당을 자유로 건축하는 것도 또한 전례가 되어 있으니, 우리 교회의 교당도 날아갈 듯이 크게 짓는 것도 또한 천시에 응하고 사람이 순히 따르는 일대 표준인 것이다. 우리 동포 모든 분들이여 이와 같이 믿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당 건축공사 시작은 명년 2월로 시작할 것입니다. 천도교대도주 손병희 고백 (원문해설: 경암 이영노) -
검등골, 돌과 바람 사이검등골, 돌과 바람 사이 2002년 태풍 루사, 2003년 태풍 매미 골짜기를 휘몰아간 날 부드럽고 아름다웠던 계곡 돌 속에 묻히고 사람의 길 조그만 논밭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돌과 풀 사이 시간 속 골짜기 너머 한 숨결이 남아 있다 해월 최시형 검등골에서 도를 받고 세상에 알린 자리 평등 존경 바람과 물 속에도 묵묵히 흐른다 돌 속에도 풀 속에도 평등과 존경의 숨결 여전히 살아 검등골을 지키며 시간 위를 흐른다 그리고 돌과 풀, 바람과 물 그 모든 것 속에서 골짜기는 조용히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세상과 세상 사이 흐르는 도의 숨결 군암 박남문(포항교구) -
대구 감영과 관덕당동학이라는 가르침이 맹위를 떨치며 퍼져간다는 소문이 조선의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선전관(宣傳官)을 임명하고 무예별감 두 사람과 군관 한 사람, 그리고 하인 한 사람을 딸려 동학의 진원지인 경주로 급파했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의하면, 선전관에 정운구(鄭雲龜)를 선임하고, 수행원에는 무예별감(武藝別監) 양유풍(梁有豊)과 장한익(張漢翼), 좌변포도군관(左邊捕盜軍官) 이은식(李殷植) 등이 임명되었다. 이 밖에 정운구의 종자인 고영준(高英晙)까지 합하여, 일행은 모두 다섯 명이 된다. 宣傳官鄭雲龜書啓 臣於十一月十二日 敬奉傳敎 率武藝別監梁有豊張漢翼 左邊捕盜廳軍官李 殷植等 以慶尙道慶州等地 東學魁首詳探捉上次 忙出城外 藏蹤秘跡 星夜馳往 선전관 정운구가 서계를 올리니다. 신은 11월 12일에 전교를 받들어 무예별감 양유풍 장한익 좌 변포도청군관 이은식 등을 인솔하여 경상도 경주 등지에서 동학 괴수를 자세히 탐지하여 체포 하고자 성문을 나서 남모르게 밤길을 도와 달려왔습니다. - 『고종실록(高宗實錄)』 원년 12월 24일 임진(元年 十二月 二十日 壬辰) 그날로 서울에서 출발하여, 남대문을 나선 일행은 어명을 개봉하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소임을 확인한 다음 며칠을 머문 뒤, 11월 22일 길을 떠나 밤낮으로 목적지인 경주로 향하였다. 문경 새재를 넘어서면서 이들은 동학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탐문하기 시작하였다. 새재를 넘어 영남지방에 이르자 각 주(州) 군(郡)마다 밤이면 동학의 주문이 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동학이 심각하게 많이 퍼졌음을 이들은 실감하게 된다. 이들은 경주부에 들어가 명을 받고 왔음을 신고하고 경주부의 지원을 받아 경주와 용담 일원의 시장이나 절간 등을 중심으로 탐문을 하였다. 탐문이 끝난 12월 9일 양유풍과 종자 고영준을 직접 용담에 보내 상황을 조사토록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용담으로 들어가는 동구 근처에 있는 장(張) 모라는 사람을 통해 용담정으로 들어가 대신사를 만나 입도하러 왔다고 거짓을 말하고는 접근을 하며, 내방하는 사람들의 동정과 대신사의 언동, 용담의 지형 등을 자세히 살핀 다음, 피곤하다는 핑계를 꾸며대고는 다시 용담을 빠져나온다. 관덕정 터(위아래), 연립주택 자리가 관 덕정이 있던 터이다. 12월 10일 새벽 급습하여 용담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여 경주부 감옥에 넣는다. 다음 날에 신상 파기를 한 이후 대신사를 비롯한 몇 사람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올라가는데, 문경 새재에 동학도들이 집결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길을 돌려 상주 화령을 거쳐 보은으로 압송 길을 다시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과천에 이르러 죄인을 서울로 압송할 것을 조정에 품의하니, 당시 철종(哲宗)이 승하를 하였기에, 국상(國喪)이 났으니 죄인을 본부 감영으로 다시 돌려보내라는 명을 받고는 본부 감영이 있는 대구(大邱)로 발길을 돌린다. 이리하여 추운 겨울 서울로 압송되던 대신사 는 다시 길을 돌려 대구를 향하여 압송되었다. 대신사 일행은 다시 길을 돌려 충주를 지나 새재를 넘어 초곡(草谷)을 지나 유곡리(幽谷里)에서 과세를 하고 대구에 이르러 감영에 수감되었다. 당시 대구 감영에서의 대신사 계신 상황과 문초 과정 등이 『도원기서』에 실려 있다 대구현대백화점, 대신사께서 참형을 당하신 관덕당이 대구현대백화점과 그 맞은편 일대에 있었다. 관덕당 훈련장이 있던 자리이자 수운대신사께서 참형을 당한 장소인 동아백화점은 철거되고 없다. 수운대신사 동상 1964년 수운대신사 순도 100주기를 맞아 대구 달성공원내에 건립했다. 대구 감사가 주관하여 대신사를 문초하고, 사형이라는 엄형을 내리고자, 당시 막 등극한 어린 임금 고종(高宗)을 대신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던 조대비(趙大妃)에게 장계(狀啓)를 올려 대신사를 사형 집행하였다. 달성공원에서 멀지 않은 반월당사거리 현대백화점과 그 맞은편 일대가 대신사께서 참형을 당하신 관덕당(觀德堂)이 있던 곳이다. 현대백화점 앞에 대구시교구가 중심이 되어 세운 대신사 순도비가 자리하고 있고, 길 건너편에는 천주교 순교 기념관이 서 있다. 이 지역은 당시 아미산이라고 불렀는데, 잡범들은 이곳 아미산에서 처형을 했다. 천주교 신도들은 잡범으로 분류되어 아미산에서 사형을 당하였기 때문에 천주교 순교 기념관이 이곳에 들어선 것이다. 현대백화점 뒤에서 종로초등학교에 이르는 넓은 부지가 대구 감영이 있던 곳이고, 대신사께서는 참형 직전까지 그곳에 구금되어 계셨다. 종로초등학교 마당에 ‘최제우 나무’라고 명명된 큰 회화나무가 서 있는데, 수령이 400여 년에 이른다. 대신사께서 감옥에 있으면서 내다본 나무라고 하여 이 나무를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그곳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달성공원에는 1964년 3월 31일 대신사 순도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신사순도백주년기념동상건립위원회’가 주최가 되어 건립한 대신사 동상이 있다. 함께 돌아보면 어떨까 한다. 수운대신사 순도비, 2017년 5월 26일 천도교 수운 최제우 선생 순도비 건립위원회에서 세웠다. 대신사께서 대구 감영에 갇혀 있을 때 해월 신사께서 옥리의 하인으로 분장하고 들어와 진지상을 올렸다. 이때 해월 신사에게 시를 한 편 내리고 또 멀리 달아나라는 ‘고비원주(高飛遠 走)’의 글을 내렸다고 한다.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등불이 밝아 물 위로는 아무러한 혐의의 틈이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이 남아 있다. - 『동경대전』 최제우 나무 현대백화점 뒤편 종로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회화나무. 이곳에 있던 대구 감영에 구금된 대신사께서 감옥에서 내다본 나무라고 하여 ‘최제우 나무’라고 부른다. 경상감영공원 표지석 공덕비 경상감영공원내에 있는 관찰사 공덕비 윤석산 교수의 풀이에 의하면 등불의 빛이 물 위로 퍼져, 환하게 모든 것을 비추어 주듯이 자신은 아무런 혐의가, 또 아무런 잘못된 틈이 없다는, 자신의 무혐의와 결백을 노래한 시이다. 그런가 하면, 한울님의 도란 바로 물 위에 비추어 조금의 틈도 없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저 등불과 같이 세상의 모든 곳을 밝혀주는, 바로 그러한 참된 진리라는 의미가 이중(二重)으로 담겨 있는 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자신이 세상의 잘못된 제도에 의하여 죽게 되어도, 그래서 자신이 펼친 무극대도가 지금은 죽은 나무와 같이 보이나, 그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니라 후일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울 것이라는, 그래서 자신의 도가 이내 올바르게 세상에 알려질 것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시이다. 대신사의 거룩한 피는 대구 관덕당에 뿌려졌지만, 무극대도는 이어져 해월 신사의 지도력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갑오년 동학혁명의 뜨거운 불길로 번졌다. 의암 성사에 의해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도 300만 교인들이 힘을 합쳐 3·1혁명 만세 소리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대신사 순도의 피는 지금도 사해(四海)의 근원이 되어 흐르고 있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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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산 추모의 길에서제131주년 고성산 동학혁명군 위령식 ©허채봉 초록 무성한 잎 울긋불긋 말라 후더덕 떨어져 앙상한 자리, 붉은 감 홍시 찬연히 자태를 뽐내는 늦가을. 이곳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고성산 정상에, 1894 동학농민혁명 영호도회군들은 일본군에 쫓기고 쫓겨 절벽까지 내몰려 쫓기고 쫓기고 또 쫓기었다. 방금 전까지 함께 했던 동지들의 주검 위로 차곡차곡, 오갈 데 없는 단말마 외마디 비명이 넘었고, 그리운 이들의 엇갈린 생사로 산천의 서슬은 바위 절벽 꽁꽁 언 골짜기 바람으로 남아 131년이 지난 오늘도 휘휘 돌아 비바람에 고시랑거리는 초목으로 스며들었다. 목숨을 다 바쳐 산화하신 하동 고성산 동학혁명군 추모위령식을 돌아보면, 1988년 전적지 보존 추진위가 발족한 이후 1989년 보존회 결성, 1992년 부지 확보와 첫 위령제, 1994년 국가 기념물 지정, 1995년 위령탑 제막식, 그리고 그 뒤로도 이어진 진입로 정비와 매년의 추모식까지… 37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의 손길이 멈추지 않았기에 오늘의 위령식이 있었다. 들밥을 나눠먹는 참가자들의 모습 ©허채봉 박홍규 작가의 작품이 현장에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허채봉 하동 고성산 위령탑으로 가는 길목의 표지판 오랜 세월 만고풍상 겪은 동학혁명 위령의 길 위에 선 오늘. 모든 설움과 굴욕을 너머 함께하는 동학도인들의 모습에도 길고 긴 세월의 서리가 소리 없이 깊은 감응으로 다가왔다. 131년 전 전라에서 충청, 경기·강원, 경상, 북쪽에서… 또 그 이전 154년 전 영해에서 붉디붉은 꽃으로 산화하신 동학혁명군들의 성령과 함께 오늘의 시간이 하얗게 빛이 되어 빛났다. 눈부신 가을빛, 코발트 청명한 남빛 하늘바다. 노랗게, 선홍 감빛으로 물든 꽃보다 예쁜 단풍. 겨울마중의 길목에서 깊은 샘물처럼 솟는 천어(天語)를 되뇌인다. “이제, 대한민국은 동학의 성지가 되어야 한다. 더 이상 지역에 국한된 한정적인 기억 공간이 아닌, 대한민국이 동학의 기억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세계인들이 경외하는 대한민국, K-민주주의의 원형은 바로 동학민주주의가 그 시작이다.” -
은목서가 환히 피어났습니다삼천포교당 앞마당에 은목서가 환히 피어났습니다. 맑은 바람에 실려오는 은은한 향이 가을의 깊이를 더하고, 고요히 교당을 감싸 안습니다. 저희만 보기 아까워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진, 글 삼천포교구 최희수 교구장 제공 -
흥해 손봉조의 집손봉조 집터_최초 동학 접주제를 실행한 곳 남원 은적암에서 돌아온 이후 대신사는 각 처로 다니며 가르침을 폈다. 이러한 결과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도 나날이 늘어나고, 또 그 지역도 넓어져 다만 경상도 일원만이 아니라 충청도에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인원을 보다 조직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방법의 하나로 떠오른 것이 ‘접(接)’을 조직하는 것이다. 본래 접이라는 이름은 유생들이 쓰던 용어이다. 그러나 대신사께서 만든 접은 이와는 다르다. 흥해 매곡동(현재는 매산리) 손봉조의 집에서 행한 접주제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포항시 흥해 손봉조의 집은 매우 중요하다. 동학 교도가 늘어나자 대신사는 이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지도하기 위하여 접(接)을 구성하였다. 그래서 각 처의 지도자들을 이곳으로 오게 하여 접주를 정해 주었다. 이때가 임술년(1862년) 12월 말이다. 본래 ‘접(接)’이라는 용어는 우리 전통 사회에서 쓰던 말이다. ‘접’은 예전에 글방 학생이나 과거를 보는 유생의 동아리를 이르던 말이었다. 또 보부상(褓負商)의 동아리를 이르던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신사께서 구성한 ‘접’은 이러한 개념과는 다르다. 접은 철저한 속인제(屬人制)에 의한 구성이다. 내가 한 사람을 포덕하면, 그 사람은 나의 접이 된다. 일컫는바 점조직과도 매우 유사하다. 한 사람이 잡혀도 그 사람을 포덕한 사람만 알 뿐, 그다음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경주 본부의 접주로 임명된 이내겸(李乃謙)은 본래 영천(永川)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듯 경주 본부의 접주로 임명이 된 것은 동학이 본래 속지제(屬地制)를 따르지 않고 속인제(屬人制)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전도자(傳道者)와 도를 받는 사람 사이에 인적 유대를 중요시 여긴 까닭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도의 전수(傳受)는 ‘정신의 전수’라는 면이 강조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접 제도는 오늘까지 천도교에서 연원제(淵源制)로 전승되고 있다. 대신사는 이러한 접 조직을 통하여 갑자기 늘어난 동학 도인들을 조직하고 관리하였다. 그래서 손봉조라는 제자의 집에서 각처의 지도자들을 오게 하여 각 접의 접주(接主)를 정해 주었던 것이다. 각 접주가 마치 지역별로 정해진 듯하지만, 옛날에는 지금과 같이 이사를 하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서 죽을 때까지 몇 대를 이어가며 살았다. 그래서 비록 속인제이지만, 속지제와 같이 지역을 중심으로 접주를 정해 준 것이다. 접주를 정해 준 뒤에 새해인 계해년(1863년) 1월 1일 아침 대신사는 이에 대한 시를 쓴다. 訣 問道今日何所知 意在新元癸亥年 成功幾時又作時 莫爲恨晩其爲然 時有其時恨奈何 新朝唱韻待好風 去歲西北靈友尋 後知吾家此日期 春來消息應有知 地上神仙聞爲近 此日此時靈友會 大道其中不知心 도를 묻는 오늘, 아는 바가 무엇인가. 뜻은 새해 계해년에 있도다. 공을 이룬 것이 언제인데, 또 때를 만나겠는가. 늦는다고 한하지 마라. 그렇게 되는 것을. 때는 그 때가 있나니, 한탄한들 무엇 하리. 새해 새 아침에 운을 불러 좋은 때를 기다린다. 지난 해 서쪽, 북쪽에서 좋은 벗들이 찾아옴이여, 훗날 알리라. 우리의 이 집에서의 그날 그 기약을. 봄이 오고 있음을 마음으로부터 응하여 알 수 있으니, 지상신선의 소식 가까워지네. 이날 이때 신령한 벗들의 모임이여, 헤아릴 수 없는 마음, 그 가운데 자리한 대도(大道)여. - 『동경대전』 “지난해 서쪽, 북쪽에서 좋은 벗들이 찾아옴이여, 훗날 알리라. 우리의 이 집에서의 그날 그 기약을 [去歲西北靈友尋 後知吾家此日期]”이라는 이 구절이 바로 흥해 손봉조의 집에서 접주를 정한 사실이다. 지난해는 접주제를 행한 임술년(1862년)이다. 그해 말에 서쪽 북쪽에서 온 영우(靈友)들이란 다름 아닌 접주들을 일컫는 것이다. 이러한 접주제는 훗날 동학혁명을 보다 조직적으로 이끈 중요한 바탕이 된다. 매곡동 마을 정자나무와 마을 일원 안내 표지판 앞에 선 감수자 윤석산 교수와 필자 최초 동학 조직 안내 표지판을 설치한 후 기념촬영하는 답사단 손봉조가 살았다는 흥해 매산리의 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훗날 지은 집이 서 있다. 손봉조의 집 앞으로는 제법 큰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 건너편에는 마을 사람들이 쉬고 노는 정자와 당수나무인 팽나무가 서 있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인 이곳에는 그간 표지판 하나 없었다. 다행히도 필자가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 동학역사문화선양회와 (사)동대해문화연구소가 2022년 11월 18일, 팽나무 부근에 ‘최초 동학 조직 안내 표지판’을 설치했다. 또한 포항시에서도 동학에 관한 스토리텔링을 발굴하고 이곳을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닌 시설로 홍보하는 것과 동시에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한 장소로 개발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앞으로의 변화가 기대된다. ✦ 다음 회 예고 : 대구 감영과 관덕당 편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설교의 목적과 방법설교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한 번은 심도 있게 논의해 보고 싶었다. 설교, 수련, 천덕송 보급, 교리의 체계화, 천도교 용어사전 편찬, 각주 경전 편찬, 어린이 강재 보급, 자선사업, 봉사활동 등이 모두 포덕․교화의 한 방편이 되겠지만, 이 중 설교가 포덕․교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이다. 한울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정성, 공경으로 한울님의 성령이 충만한 설교자의 말씀은 육체적․정신적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무위이화(無爲而化)로 병을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정신적 평화와 안정감을, 사업에 실패한 사람에게는 성공에 대한 확신을, 사랑에 실패한 사람에게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하는 영적 에너지가 있다. 이처럼 설교는 복잡한 현대문명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한울님에 대한 좀더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하고 인생의 온갖 어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좌표를 제시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게 하고, 나와 가정, 나아가서 사회 및 국가에 대해 폭넓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한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분명한 목적을 세우고 노력할 때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듯이, 설교에서도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게 되면, 이에 맞게 계획을 수립하고 노력하여 설교 원고를 만들고 몇 번의 연습을 통해 본래 계획한 의도를 성취할 수 있다. 또 설교를 한 뒤에는 무엇이 잘못 되었나 스스로 반성해 보는 교역자의 자세가 될 때, 우리 교회의 장래는 그만큼 더 밝아질 것이다. 천도교에서의 설교 목적은 대신사님의 『동경대전』<포덕문〉에 밝혀놓으신 것처럼, 첫째 동덕들이 주문 수련을 통해 ‘영부(靈簿)’를 받아 세상 사람들의 육체적․정신적 질병을 건지도록 하는 것이고, 둘째 동덕들이 주문수련을 통해 한울님의 은덕을 깨닫고 ‘시천주’ 한울님의 진리를 온 세상에 밝히며, 한울님의 진리에 맞게 올바른 생활과 실천을 할 수 있도록 감동과 감화를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우선 천도교 내의 설교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각 교당에 설교를 할 만한 신앙의 실력자가 거의 없다는 점이며, 게다가 대부분 충분히 준비된 것이 아니라, 임시방편적인 내용 위주라는 점이고, 둘째, 동덕들의 일용행사와 가정문제, 사회문제를 도외시한 ‘자아완성’, ‘이신환성’, ‘보국안민’, ‘남북통일’, ‘포덕천하’와 같은 너무나도 크고 이상적인 목적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경전내용을 고지식하게 인용, 열거하는 식으로 실생활이나 시대조류와 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현행 설교의 문제점 등을 고려해 형식적 ․ 내용적 측면에서 설교의 올바른 방향과 설교의 단계를 한 번 정립해보자. 먼저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형식적 조건으로 첫째, 설교에 임하는 사람은 설교를 명(命) 받은 그 주에는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해야 한다. 둘째, 고저장단에 따라 물 흐르듯 어조 및 성량을 조절해야 하며, 설교 내용에 알맞게 감정이입이 되어야 한다. 셋째, 설교 시간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교중에서 시간 문제가 가끔 거론되는 경우를 듣게 된다. 설교시간은 기왕이면 짧으면 좋다는 견해, 1시간을 다 채워야 한다는 견해 등이 있지만, 규모일치를 위해 설교시간도 의절에 분명히 명시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청중의 수준 또한 고려해야 한다. 즉 노년층, 장년층, 청년층, 유소년 층이냐에 따라 그 수준에 알맞은 언어 선택과 설명 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 청중의 수준에 맞는 언어를 선택할 때 더욱 많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내적 조건으로, 첫째 설교 내용은 수련을 통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수련하면서 깨달은 보편적인 생각은 누구에게나 가슴 속 깊이 심금을 울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경전은 이의역지[(以意逆志) : 읽는 이의 생각으로 스승님의 생각을 거슬러 구하는 방법]로 공부해서 반영한 내용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스승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설교 내용에는 시대에 맞는 시사 내용이나 스승님 또는 선인들의 예화를 적절히 인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흥미와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폭넓은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진리의 말씀을 보강하거나, 증명하는 논거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컨대 불교계의 성철 스님도 그러한 분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의 인연설, 윤회 사상 등을 증명하기 위해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영적 세계를 공부한 학자들의 책을 인용했고, 사후세계를 증명하기 위해 영혼사진을 예로 들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물리학까지 섭렵해 불교사상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바 있다. 또한 프랑스의 미셸 노스트라다무스, 조선조 명종 때 철인 격암 남사고,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루스 몽고메리 등의 예언가 말들을 인용하면서 후천 개벽의 운수를 설파하여 비판이 되기도 한 증산도의 『이것이 개벽이다(안경전 편저)』란 책도 이런 아류에 들지 않나 싶다. 그런데 우리 종단은 어떠한가? 우리 도의 가장 근본인 수련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며, 더구나 경전과 교사를 연구하는 사람도 극소수이며, 나아가 폭넓은 독서와 연구로 천도교의 진리를 좀더 시대에 맞게 체계화하고 증명하여 널리 알리려는 도인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다음으로 설교의 단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설교의 단계는 편의상 원고 설교, 메모 설교, 강화(降話) 설교로 나눌 수 있는데, 초보자 입장에서는 원고 설교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다. 원고를 써서 설교를 하다가 메모를 해서 설교한 뒤, 차원 높은 경지에 가면 강화 설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제는 시대의 변천과 함께 설교도 다양하게 바꿔져야 한다. 일용행사를 다루는 설교, 개인의 삶과 가족 문제를 다루는 설교, 사회문제, 국가문제를 다루는 설교 등 다양한 설교가 필요한 때이다. 이상 수련의 목적과 방법 및 설교의 단계에 대해 지극히 단편적이고 수박 겉핥기 식의 논의를 해 보았다. 동학은 여느 종교와는 달리 믿음의 종교요, 깨달음의 종교이기에 무극대도에 신명을 바칠 수운 학도는 정성, 공경, 믿음으로 공부와 수련에 능한 자가 되어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진정한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깨달음은 로고스(이성)의 분석력과 파토스(감성)의 직관력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불이 붙는다. 이럴 때, 우리는 황홀감을 느끼고 영대(靈臺)가 환하게 열린다. 부디 훌륭한 설교자들이 많이 나와 동덕님들에게 이런 경지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글 운암 오제운( 신태인교구장, 동귀일체 고문) -
적조암에서 하늘을 훔치다적조암에서 하늘을 훔치다 함백산 그늘 깊은 곳, 눈 쌓인 적조암의 토굴에 관솔불이 흔들렸다. 그곳에 해월이 오시니 하늘과 땅이 한 호흡으로 고요해지고, 도접주 유시헌은 그 뒤를 따랐다. 세상은 어지럽고, 사람의 길은 잿빛으로 흐르던 때, 그들은 오직 기도로 길을 찾으려 했다. “하늘은 사람 안에 계시니 스스로 한울을 모시라.” 해월의 음성이 바위 틈새로 스며들자 산조차 숨을 죽였다. 유시헌은 무릎을 꿇고 세상과의 인연을 내려놓았다. 그의 이마 위로 내리는 눈발이 참회의 눈물인 양 흩날렸다. 새벽마다 향을 사르고 49일의 숨결을 쌓아 올릴 때, 기도는 바람이 되고 바람은 빛이 되었다. 전세인, 젊은 사서가 붓을 들었다. 그는 말보다 조용히, 그러나 떨리는 손끝으로 그들의 말씀을 적어 내려갔다. 그 글줄마다 하늘과 사람이 만나는 자취가 깃들었으니, 견봉날인 훗날 세상은 그것을 최선생 도원기서라 불렀다. 사십구일째 되는 날, 태백산맥의 줄기 함백산의 하늘이 열리고 여덟 마리 봉황이 내려와각기 빛을 품었다. 그 빛이 사람의 심장을 스치자 기도하던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하늘의 색으로 번졌다. 해월은 말했다. “하늘의 뜻은 나뉘지 않는다. 사람마다 그 빛을 품을 뿐이니, 그대 또한 한울의 사람이로다.” 유시헌은 그 자리에서 고개 숙이고 “삶으로 도를 행하겠습니다.” 그 말이 눈발 속에 사라질 때 적조암의 종이 울렸다. 눈꽃이 천의봉을 덮고 은빛 고요가 산을 감싸며 세상의 소리가 잠들었다. 해월은 조용히 읊조렸다. “도는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의 마음속이 곧 하늘이니라.” 그 말씀에 전세인의 붓이 멈추었다. 그는 눈물로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하늘은 사람 안에 있고, 그 뜻은 사랑으로 흘러나온다.’ 세월이 지나 산은 그대로이되 적조암의 돌벽에는 그날의 숨결이 아직 남아 있다. 전세인은 노년의 손으로 말했다. “그 기도는 세상을 위한 등불이었고, 그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적조암의 새벽, 누군가 종을 울리면 봉황의 노래가 다시 들린다. 어두운 마음에 빛을 밝히라 그곳에 하늘이 열리리라. 글쓴이 성진 고종호 정선문화원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정선의 정신을 동학에서 찾아야겠다고 자각하고 정선동학선양회를 조직했다. 유시헌의 증손, 동학난중기 등을 개발하며 정선동학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정선문화원 사무국장직에서 물러난 지금도 동학에의 열정을 살려 동학아리랑을 새로이 개발, 제작하고 있다. 이 시는 해월 최시형과 도접주 유시헌이 정암사 적조암 토굴에서 드린 49일 기도를 기록한 사서 전세인의 『최선생도원기서』를 바탕으로 적조암을 세 차례 답사한 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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