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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동학혁명기념관, 장흥군청과 원광대 학군단 잇따라 방문… 동학정신 확산에 앞장전주한옥마을 내 동학혁명기념관(관장 이윤영, 천도교직접도훈)에 최근 의미 있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전라남도 장흥군청과 원광대학교 학군단이 각각 기념관을 방문해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장흥군청, 동학혁명기념관 찾아 역사문화 현장학습 지난 4월 7일(월), 장흥군청 김성 군수를 비롯한 이서희 연구관 등 직원 30여 명은 전주한옥마을에 있는 동학혁명기념관을 사전 예약을 통해 방문했다. 이날 이윤영 관장은 김 군수와의 질의응답을 통해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에 대해 깊이 있는 설명을 진행했다. 특히 답사 인원을 유치하는 방법과 역사문화를 효과적으로 해설하는 방식 등 기념관 운영에 관한 노하우도 함께 공유해 참석자들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원광대 학군단, 전(戰)사적지 탐방 목적으로 기념관 방문 이어 4월 11일(금)에는 원광대학교 학군단이 전사적지 탐방 목적으로 동학혁명기념관을 찾았다. 이날 탐방에는 권세영 학군단장(대령)과 박맹수 전 원광대 총장이 인솔자로 함께했으며, 동학사상 및 동학혁명 역사문화 해설은 이재선 동학혁명기념관 기획실장(천도교중앙총부 종무위원)이 맡아 강의를 진행했다. 이 실장은 동학사상이 동학농민혁명에 미친 영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며, 당시 민중들의 삶과 정신, 저항 의식이 어떻게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졌는지를 조명했다. 동학혁명기념관 관계자는 “기념관은 앞으로도 다양한 기관 및 단체와의 연계를 통해 동학 정신의 현대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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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민족통일회 새 상임의장에 정암 주선원 선출4월 10일 오후 3시 (사)동학민족통일회 정기총회가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렸다. 이날 정기총회는 임남희 공동의장의 사회로 시작하여 노태구 상임의장의 인사말, 종무원장 축사, 전년도 감사 보고, 임시의장 선출, 의안 심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노태구 상임의장은 인사말에서 “총회는 모든 법규와 규범을 능가하는 힘이 있다. 천도교의 대북 통일의 정치단체인 동민회의 3통실현, 3한대통을 위한 역사적인 자리에 동지 동덕님들의 각별한 이해와 성원이 요청되는 상황이다. 우리는 기존에 추구해온 3통 실현의 정신과 정책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나왔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강병로 종무원장은 “동학 천도교의 가르침에는 민족 자주의 진취적 기상을 발행하고 잠들었던 민족혼을 일깨우고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편견과 독선, 아집과 위선, 그리고 부패로부터 사회 문화를 개혁하고 인간과 자연을 조화시키며 새로운 생명의 질서와 생명의 이치로 인간과 우주가 다시 개벽하는 솔루션이 있다. 이것으로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새로 선출되는 의장님을 중심으로 많은 인재가 모여서 동학 천도교의 통일을 위한 정신을 더 깊이 연구하고 확장하는 동민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축사하였다. 또한 박인준 교령을 대신하여 강병로 종무원장이 평화통일운동을 위한 정책개발에 정성을 다하는 등 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한 노태구 전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에게 공로패를 수여하였다. 이어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매암 이재선 전 천도교청년회장의 사회로 의안 심의가 이어졌다. 2024년 결산 승인, 정관 개정과 상임의장 선출, 감사 선출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2025년 예산 및 사업계획안 승인, 공동의장단 선출 등은 새롭게 선출된 상임의장에게 일임키로 결정하였다. 이날 상임의장으로 선출된 정암 주선원 회원은 “동민회의 업무와 회계사무를 정상화하고, 통일부 예산 지원 사업을 재수립하고, 끊겨졌던 천도교 예산 지원도 정상화되도록 하겠다. 통일 정책 정립과 각종 대민 교육 사업, 남측 대북 관련 제 단체와의 교류 정상화, 북측 천도교 청우당과의 관계 정상화, 남측 청우당 창당 기반 조성과 창당화, 국민의 신입 회원 확장 및 다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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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이 세상에 태어난 은적암에 다녀오다사람에게는 정말 연(緣)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천도교와 연을 맺게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저 인사동과 안국동을 오가며 첨탑이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특이해 기억에 남아 있던 수운회관에, 오랜 지인이었던 천도교 동두천교구 연암 강정환 교구장의 초대로, 2024년 12월 수운 최제우 대신사 탄신 200주년 행사에 참석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지나간 역사로만 알고 지내던 동학에 관해 공부해보자는 생각에, 포덕 166년에 천도교종학대학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4시간씩 동경대전과 주역을 배우며 동학과 천도교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경대전과 주역이 한자로 되어 있는 데다, 한자를 이해한다 해도,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참뜻을 이해하기는 정말 버거웠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 수운 최제우 대신사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었다. 그는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양반인데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던 시기였다. 게다가 반상의 구분이 엄격한 시대에 그는 크게 깨달은 뒤 먼저 자신의 여종 둘을 해방한다.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고, 다른 사람은 며느리도 삼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링컨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대통령 신분으로 노예해방에 반대하는 남부와 몇 년간 남북전쟁을 했다. 하지만 수운 최제우는 이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기반으로, 봉건적 착취와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에서 동학을 창도했다. 이것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면서, 성실과 신의로서 새롭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었으며 어지러웠던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하지만 수운 대신사의 동학에 동조하는 동학교도들이 늘어나자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유림의 질시와 관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졌다. 이를 피해 자신이 주장한 바를 글로써 남기고자 1861년 겨울에 남원의 은적암에 은거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동학을 밝히는 동학론(논학문)을 집필하고,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의 내용을 정리하여 ‘동학’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번에 대신사께서 천도교의 귀한 경전들을 집필하신 남원의 은적암으로 성주현 교수님과 수업을 같이 듣는 동덕들과 함께 현장학습을 다녀왔다. 선국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길을 오르니 은적암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서울교구가 세운 “은적암 터’ 안내판과 남원 문화원에서 세운 교룡산 산신단 유래비 그리고 “독립선언서 대표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대종사 첫 출가 성지”란 비목이 서 있었다. 은적암 터 안내판에는 “이곳은 제1세 교조인 대신사께서 관의 탄압을 피해 포덕 2년(신유년, 단기 4194년) 12월 그믐날에 오셔서 은거하시던 곳이다. 대신사께서는 이곳 덕밀암을 은적암이라 이름하시고 머무르시며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 등을 집필하셨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조금 안쪽으로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음각된 암벽만이 그곳이 은적암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은적암 터에 도착하자마자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주문 13자(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를 암송하며 걸었다. 수운 대신사님의 체취를 오롯이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고, 한울님과 하나가 되는 나만의 의식을 치렀다. 은적암을 떠나면서 든 생각은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6개월 이상을 은둔하며 처음으로 동학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을 집필하고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정리한 동학의 성지인 이곳이 역사적인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이곳 은적암 터에서 내 안에 모신 한울님께 진심으로 간청드렸다. 글, 황규만(종학대학원 수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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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학대학원, 남원 은적암으로 현장학습 진행지난 4월 12일(토요일), 종학대학원은 전북 남원에서 동학의 역사와 정신을 되새기는 현장학습을 실시했다. 이번 현장학습은 성주현 종학대학원 교수의 지도로 진행되었다. 광한루원 주차장에서 오후 1시에 집결하여 광한루 탐방, 은적암 터 답사, 검결비 등으로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인근에서 식사를 나눈 뒤, 2시부터 30분간 광한루원을 둘러보며 남원의 역사적 배경을 체험했다. 이후 오후 3시부터는 본격적인 답사 일정으로 은적암터를 찾았다. 은적암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직접 산문을 열고 도를 닦았던 동학의 성지로, 참가자들은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고요한 산세를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특히 은적암으로 오르는 길은 수운 대신사의 숨결을 몸소 느끼는 여정으로, 참가자 모두에게 깊은 의미와 울림을 주었다. 이 날 일정은 예기치 못한 교통 상황과 우천으로 인해 일부 지연되었으나, 전체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으며 오후 5시 30분 검결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종학대학원 관계자는 “은적암터와 같은 동학의 성지를 직접 밟으며 수운 대신사의 사상과 삶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며 “참가자 모두에게 뜻깊은 배움의 시간이 되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자료 및 사진 : 천도교종학대학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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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행적 조사(2)(지난 호에 이어) 오사카역(大阪驛) 오사카역은 성사가 오사카에서 고베, 나라, 교토 등지를 다닐 때 이용하던 역이었다. 성사는 오사카에서 도쿄로 이주할 때도 이 역을 이용했다. 일본의 자료를 살펴보니 최초의 오사카역은 포덕 25년(1884) 5월 11일 문을 열었다. 당시 오사카에서 고베로 향하는 노선이 개통되면서 역사가 만들어졌다. 초대 역사는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우메다 스텐쇼(梅田驛)”라는 애칭이 있었다. 이 일대에 매화밭이 있었던 것 같아 그렇게 불린 듯하다. 오사카역은 포덕 52년(1901) 7월 1일 제2세대 역사로 확장되었다. 제2세대 역사는 초기 역사에서 약 200m 동쪽으로 이동해 지어졌다. 역 앞에는 인력거꾼을 위한 광장이 조성되었고, 역 동쪽 끝에는 오사카우체국 우메다 지점과 전신국 등 공공시설이 함께 건설되었다. 제2세대 오사카역은 고딕 양식의 석조 건물이었으며, 당시 일본은행 오사카 지점, 센푸칸(泉布觀)과 함께 ‘오사카 3대 명소’로 불렸다. 성사가 일본에 왔을 때는 제2세대 역사가 지어진 직후였다. 이후 오사카역은 포덕 91년(1940) 제3세대 건축으로 확장되었고, 일본의 발전과 더불어 오사카역의 기능도 확장되어 포덕 120년(1979) 제4세대 오사카역이 건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오사카역은 제2세대 자리에 시대의 흐름에 맞게 현대적으로 확장된 것이다. 카미후쿠시마(上福島) 카미후쿠시마는 성사가 오사카에서 처음 묵었던 여관이 있던 곳이다. 당시 주소는 ‘오사카시(大阪市) 기타구(北區) 카미후쿠마치(上福町) 2정목(丁目) 733번지’였다. 성사는 포덕 45년(1904) 3월 19일 오사카에 도착해 이곳에 머물렀다. 성사가 머물렀던 여관이 있었던 이 일대는 현재 주택가로 변해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성사께서 이곳을 택한 이유는 오사카역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답사 당시 일대를 돌아보며 ‘카미후쿠시마’라는 지명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上福島” 우체국뿐이었다. 조사단이 우체국을 찾아가 직원에게 물었지만, 너무 오래된 지명이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조사단은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가능한 최대 범위까지 조사하기 위해 일대를 훑었다. 그 결과 카미후쿠마치(上福町) 2정목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으나, 733번지는 지번 자체가 없어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이 지역에서 오래된 “福島天滿宮”을 찾아 주지에게 물어보니, 그곳의 예전 주소가 카미후쿠시마 154번지였다는 것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확한 지번 확인을 위해서는 일본 지적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답사를 통해 느꼈다. 성사가 묵었던 733번지는 이번 답사로는 찾을 수 없어 추가 답사가 요망된다. 도지마우라마치(堂島裏町) 도지마우라마치는 성사가 포덕 45년(1904) 3월 말부터 6월 30일까지 약 3개월간 거주했던 곳이다. 당시 주소는 ‘오사카시(大阪市) 기타구(北區) 도지마우라마치(堂島裏町) 3정목(丁目) 11번지’였다. 성사는 이곳에 숙소를 정하고 인근에 사무실을 하나 더 구입해 사용했다. 성사는 이곳을 끝으로 오사카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도쿄로 이주했다. 이후 이곳은 천도교인들이 오사카를 방문했을 때 사용되었으며, 천도교 유학생들이 체류한 곳이기도 했다. 현재 이 일대는 일본의 통신회사 NTT(Nippon Telegraph and Telephone Corporation)의 도지마 지부가 자리 잡고 있다. 자료집에는 이곳이 NTT의 고베지부라고 되어 있었지만, 조사를 통해 도지마지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이전 조사의 오류를 바로잡은 유의미한 성과였다. 자료집에는 도지마지부 건물 안에 테니스코트가 있고 그 자리가 11번지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건물 안내도에는 4개의 큰 건물이 있었고 중앙에는 주차장이 있었다. 처음에는 위치를 잘못 찾은 줄 알았지만, 한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 보니 주차장 지붕 위에 테니스코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성사가 기거했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쁜 마음에 사진을 찍고 조사단을 불렀다. 이 위치에 대해 설명하는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위기에 처한 교단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성사의 힘겨운 외유 생활이 떠올랐고,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답사의 고단함과 정확한 위치를 찾은 안도감이 겹쳐 한참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윤봉길 의사 감옥 터 제4사단사령부 감옥 터는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를 성공시킨 윤봉길 의사가 갇혔던 곳이다. 이 감옥은 오사카성 안에 위치해 있었다. 필자는 여러 차례 오사카를 방문하고 오사카성을 찾았지만, 이 사실을 몰랐다. 이번에 김동우 사진작가의 안내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답사할 수 있었다. 오사카성에 들어가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풍국신사(豊國神社)가 보이고, 신사 조금 못 미친 왼편 정원 안에 ‘제4사단사령부 건물터’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 옆에는 일본 시인의 시비도 있다. 안내문에는 “동대번두소옥적(위수감옥적)(東大番頭小屋跡(衛戍監獄跡))”이라고 쓰여 있다. 윤봉길 의사는 포덕 73년(1932)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행사에서 일본군 지도부를 향해 폭탄을 던진 직후 체포되어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제는 11월 18일 윤 의사를 우편 수송선에 태워 오사카로 보냈고, 11월 20일부터 약 한 달간 오사카 형무소, 즉 이 제4사단사령부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12월 18일 가나자와 구금소로 이송되어 다음 날인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에 총살되었다. 그의 마지막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라는 주문을 낭랑하게 읊으며 순국한 것이었다. 조사단은 이 감옥 터에서 청수를 모시고, 윤 의사의 순국 정신이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횃불이 되리라는 믿음을 담아 같은 주문을 외쳤다. 텐노지(天王寺) 공원과 통국사(統國寺) 텐노지 공원은 포덕 60년(1919) 3월 19일, 3·1운동 이후 오사카 재일 유학생들이 만세를 외치기로 모였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로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 23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시위를 이끈 인물은 염상섭이었다. 현재 텐노지 공원은 일본인의 휴식처로 잘 조성되어 있다. 근처에는 통국사라는 사찰이 있다. 통국사는 ‘백제고념불사(百濟古念佛寺)’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재일교포들이 고향을 기리는 절이다. 해방 이후 오사카의 재일교포가 이 절을 매입하여 ‘원효종’이라는 종파로 운영하고 있다. 절 안에는 재일교포들의 묘와 함께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해가 봉안된 납골당이 있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유해 74구는 2019년(포덕 160년) 2월 27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고국으로 송환되었으며, 지금은 미송환 유해 1구가 별도로 봉안되어 있다. 절에는 제주 4·3항쟁 희생자 비와 함께 각 마을의 돌로 조성된 공간도 있으며, 입구에는 베를린 장벽도 설치되어 있다. 오모리(大森) 정류장 오모리 정류장은 오사카 외곽의 사카이시 미나미구에 위치한다. 오사카 시내에서 약 40분 정도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다. 성사는 이 먼 곳까지 조희연 등 개화파 인사들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한다. 일본의 요시찰 문서에는 성사가 오모리 정류장까지 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왜 이 한적한 곳을 택했는가? 조희연 등이 근처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만나기 위한 장소로 선택했을 수도 있다. 성사의 작은 움직임조차도 일제는 요시찰 인물로 주목해 기록에 남겼다. 유적 조사의 기쁨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유적지를 답사하는 일은 책이나 문서로는 경험할 수 없는 깊은 감응을 준다. 필자는 스승님들의 유적지를 답사하며 잊지 못할 체험을 여러 차례 해왔다. 이번 성사의 일본 행적 답사도 그러한 경험 중 하나였다. 성사의 외유가 지닌 깊은 의미를 다시금 떠올렸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개벽의 정신,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기상이 느껴졌다. 찾은 장소도 있었고 찾지 못한 곳도 있었기에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아직 조사해야 할 행적도 남아 있으며, 이를 후속 조사에 반영할 예정이다. 조사에 함께해준 사회문화관과 동료 조사원들에게 감사드리며, 이 기록이 뒤를 잇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끝. 글. 덕암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 대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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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구, 목요청수회 시간 변경안내천도교서울교구는 이번 주부터 매주 목요일 5시에 목요청수회를 봉행한다고 밝혔다. 목요청수회는 매주 수련을 통해 신앙을 다지는 자리로 이어져 왔다. 청수회는 오후 5시 개식을 시작으로 ▲청수봉전 ▲심고 ▲주문 3회 병송 ▲참회문 봉독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후 ▲현송 ▲묵송 ▲신사주문 105회 합송을 하며 신앙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서울교구 인화당 이미애 교화부장은 “한 분이라도 더 참석하시기를 기대하며 시간을 변경했습니다. 조금 일찍 오셔서 간식으로 준비한 쌀떡국, 쌀국수, 야채 등을 함께 드시고 수련을 하셔도 좋겠습니다. 많이 참석하셔서 주문 소리 울려 퍼지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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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주년 제주4‧3희생자 천도교 합동 위령식 봉행77년 전 제주 4‧3의 아픔과 희생을 기리는 자리가 마련됐다. 천도교는 4월 3일, ‘제77주년 제주4‧3희생자 천도교 합동 위령식’을 봉행하며 무고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평화와 통합의 메시지를 되새겼다. 이번 위령식은 이재선 천도교청년회 전 회장의 집례로 진행되었으며, 경건하고 정제된 분위기 속에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다양한 의식이 엄숙하게 봉행되었다. 의식은 청수봉전, 분향으로 시작되었다. 이재선 천도교청년회 전 회장은 심고문을 낭독하였다. 이어 참석자들은 마음을 모아 심고의 시간을 가졌다. 이어 주문 3회 병송, 천도교 서울교구 여성회 이종분 동덕이 ‘성령출세설’을 봉독하였다. 이후 동학민족통일회 임남희 공동의장이 위령문을 낭독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살아남은 이들의 다짐을 담았다. 이어 유족 및 참례인들이 분향하며 개개인의 추모의 뜻을 전했고, 이 순간 배경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며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제주4‧3범국민위원회 백경진 이사장은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도 많은 유족들이 상처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밝히며 “제주도에는 ‘살민 살아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체념이 아닌 강인한 치유와 회복의 의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또, "제주의 역사적 비극은 단지 지역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기억하고 치유해야 할 대한민국의 아픔”이라고 강조하며, 연대와 화합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다짐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심고의 시간을 가진 뒤, 폐식을 통해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이날 위령식은 종교적 경건함 속에서도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평화와 인권,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염원을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로 자리매김했다. 아래는 심고문의 전문이다. < 심 고 문 > 한울님과 스승님 제주4.3으로 희생되신 선열들의 성령이시여 감응하옵소서. 오늘 저희들은 삼가 옷깃을 여미고 제주4.3의 제77주년을 맞아 제주4.3으로 희생되신 선열들을 추모하면서 합동으로 위령식을 봉행하옵니다. 저희는 당신들이 나라를 사랑하였으나 정의롭지 못했던 공권력과 거기에 기댄 불의한 총칼에 희생되셨음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주4·3으로 희생되신 선열들이시여 생전에 꿈꾸셨으나 미처 이루지 못했던 그 많은 꿈과 남기신 뜻을 저희가 계승하여 우리나라가 더욱 행복하고 폭력에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한울님과 스승님 그리고 제주4.3으로 희생되신 선열들의 성령이 저희들의 심령과 융합하여 장생하시면서 항상 앞길을 밝게 밝혀 주시기를 기원하옵니다. 스승님과 선열들의 성령이시여! 감응하옵소서. 아래는 위령문의 전문이다. <위 령 문> 제주 4.3 선열들의 성령이시여!오늘 우리들은 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제주 4·3 77주년을 맞아, 여러 종교인들이 함께 제주 4.3으로 희생되신 이들을 추모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에 우리는 제주 4·3으로 희생되신 분들을 추모하는 합동위령식을 봉행하오니 성령이시여 감응하옵소서! 수운대신사께서 고통받는 민초들이 사람답게 사는 후천개벽의 새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 무극대도를 창명하신 후, 선열들께서는 수도와 포덕에 전념하시면서 온갖 고초를 감수하며 이 땅에 무극대도를 펴기 위해서 지극한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그러나 시운이 여의치 못하여 거룩한 뜻을 세상에 펴지 못한 채, 동학, 천도교인들은 참형, 교형, 전사, 옥사, 익사, 장사, 총살 등으로 참혹하게 순도하셨습니다. 제주 4.3으로 희생되신 선열들의 고통 또한 얼마나 참담한지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만 한 몸과 한 집을 위하여 살다가 안방에서 편안하게 죽어도 슬퍼하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거늘, 제주 4.3의 선열들께서는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았으나 나라가 분단되는 상황에서 소중한 생명을 바치셨으니 그 숭고한 뜻과 불멸의 공덕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동안 제주 4.3에서 희생되신 분들에 대한 제대로 된 추모가 이루어지지 못하던 중, 대한민국 정부가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제는 제주 4.3으로 희생되신 선열들을 추모하고자 함께하고 있습니다. 뒤늦은 일이지만 이제라도 선열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주 4.3의 정확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는지 밝혀지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이름도 갖지 못한 채 77년의 세월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실재했던 역사임에도 이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으니 후손된 우리는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이제는 더이상 늦추지 말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해가야 할 것입니다. 한울님께서 사람을 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한 자로서 만기만상의 이치를 모두 한 몸에 갖추어 화생시키신 것은 바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지상천국 세상을 실현하고자 함입니다. 제주 4.3 선열들의 성령이시여!이제 우리 후생들의 심령 가운데 영원히 함께하시면서 그 불굴의 정신을 받들어 후천의 새 세상을 이룩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들은 수도와 포덕에 힘쓰면서 대도의 목적인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건설의 대원을 달성하고 제주 4.3 선열들의 그 굳은 뜻을 이어가고자 선열들의 영전에 맹세하오니, 성령이시여 굽어살피시옵고 명우(冥祐)가 있어지이다. 포덕 166년 서기 2025년 4월 3일 천도교 임남희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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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암 박인준 교령, 조동원 종법사 예방지난 11일 준암 박인준 교령은 가리산 수도원을 찾아 조동원 종법사를 예방하였다. 조동원 종법사는 박인준 교령에게 “잘난 체하지 말고 있는 체하지 말고 아는 체하지 말고 항상 우·목·눌 세 글자를 항상 잊지 말고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일상 생활에 도가 있으니 항상 평상시의 삶 속에서 한울님 모심을 잊지 말고 주문을 염염불망하면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이제 새로운 교령이 되셨으니까 앞으로 우리 교단 발전과 포덕 교화를 위해서 많이 힘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고 당부하였다. 박인준 교령은 “이제 종법사님 뜻을 잘 받들어서, 좋은 말씀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우리 교단을 위해서 제가 열심히 우리 총부 직원들과 힘을 합쳐서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종법사께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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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동학혁명기념관, 장흥군청과 원광대 학군단 잇따라 방문… 동학정신 확산에 앞장전주한옥마을 내 동학혁명기념관(관장 이윤영, 천도교직접도훈)에 최근 의미 있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전라남도 장흥군청과 원광대학교 학군단이 각각 기념관을 방문해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장흥군청, 동학혁명기념관 찾아 역사문화 현장학습 지난 4월 7일(월), 장흥군청 김성 군수를 비롯한 이서희 연구관 등 직원 30여 명은 전주한옥마을에 있는 동학혁명기념관을 사전 예약을 통해 방문했다. 이날 이윤영 관장은 김 군수와의 질의응답을 통해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에 대해 깊이 있는 설명을 진행했다. 특히 답사 인원을 유치하는 방법과 역사문화를 효과적으로 해설하는 방식 등 기념관 운영에 관한 노하우도 함께 공유해 참석자들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원광대 학군단, 전(戰)사적지 탐방 목적으로 기념관 방문 이어 4월 11일(금)에는 원광대학교 학군단이 전사적지 탐방 목적으로 동학혁명기념관을 찾았다. 이날 탐방에는 권세영 학군단장(대령)과 박맹수 전 원광대 총장이 인솔자로 함께했으며, 동학사상 및 동학혁명 역사문화 해설은 이재선 동학혁명기념관 기획실장(천도교중앙총부 종무위원)이 맡아 강의를 진행했다. 이 실장은 동학사상이 동학농민혁명에 미친 영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며, 당시 민중들의 삶과 정신, 저항 의식이 어떻게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졌는지를 조명했다. 동학혁명기념관 관계자는 “기념관은 앞으로도 다양한 기관 및 단체와의 연계를 통해 동학 정신의 현대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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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민족통일회 새 상임의장에 정암 주선원 선출4월 10일 오후 3시 (사)동학민족통일회 정기총회가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렸다. 이날 정기총회는 임남희 공동의장의 사회로 시작하여 노태구 상임의장의 인사말, 종무원장 축사, 전년도 감사 보고, 임시의장 선출, 의안 심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노태구 상임의장은 인사말에서 “총회는 모든 법규와 규범을 능가하는 힘이 있다. 천도교의 대북 통일의 정치단체인 동민회의 3통실현, 3한대통을 위한 역사적인 자리에 동지 동덕님들의 각별한 이해와 성원이 요청되는 상황이다. 우리는 기존에 추구해온 3통 실현의 정신과 정책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나왔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강병로 종무원장은 “동학 천도교의 가르침에는 민족 자주의 진취적 기상을 발행하고 잠들었던 민족혼을 일깨우고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편견과 독선, 아집과 위선, 그리고 부패로부터 사회 문화를 개혁하고 인간과 자연을 조화시키며 새로운 생명의 질서와 생명의 이치로 인간과 우주가 다시 개벽하는 솔루션이 있다. 이것으로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새로 선출되는 의장님을 중심으로 많은 인재가 모여서 동학 천도교의 통일을 위한 정신을 더 깊이 연구하고 확장하는 동민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축사하였다. 또한 박인준 교령을 대신하여 강병로 종무원장이 평화통일운동을 위한 정책개발에 정성을 다하는 등 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한 노태구 전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에게 공로패를 수여하였다. 이어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매암 이재선 전 천도교청년회장의 사회로 의안 심의가 이어졌다. 2024년 결산 승인, 정관 개정과 상임의장 선출, 감사 선출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2025년 예산 및 사업계획안 승인, 공동의장단 선출 등은 새롭게 선출된 상임의장에게 일임키로 결정하였다. 이날 상임의장으로 선출된 정암 주선원 회원은 “동민회의 업무와 회계사무를 정상화하고, 통일부 예산 지원 사업을 재수립하고, 끊겨졌던 천도교 예산 지원도 정상화되도록 하겠다. 통일 정책 정립과 각종 대민 교육 사업, 남측 대북 관련 제 단체와의 교류 정상화, 북측 천도교 청우당과의 관계 정상화, 남측 청우당 창당 기반 조성과 창당화, 국민의 신입 회원 확장 및 다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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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행적 조사(1)뜻깊었던 의암성사 행적 조사 뜬금없는 계엄 선포와 국회의 해제 의결 이후 국내 정치가 소란했던 지난해 12월 6일 총부 사회문화관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후원하는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과 독립유적지 조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평소 의암성사에 관한 논문과 글을 발표하는 입장에서 늘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조사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번 답사에 동행한 조사단은 교단을 대표해서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이 참여했고, 답사의 진행은 사회문화관의 최인경 관장과 최진영 차장이 맡았다. 연구자로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박성현 큐레이터와 필자가 참여했고, 유적지 사진 기록으로 독립운동 유적 담기로 잘 알려진 김동우 작가와 민족운동 유적을 사진으로 알려주는 신춘호 방송통신대 교수가, 동영상 자료는 교단 동영상 자료를 정리하는 김정호 선도사가 맡았다. 원활한 답사를 위해 박동호 여행사 대표가 참여했다. 조사단은 12월 6일 아침 6시 인천국제공항에 집결하여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정을 시작했다. 고베(神戶)에서 이틀간 조사하고, 교토(京都)로 이동해 하루, 다시 오사카(大阪)로 이동해 이틀을 조사하고 12월 10일 오후 22시경에 인천국제공항으로 도착한 힘든 일정이었다. 돌아오면서 이번 조사단에 참가해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탐방하는 의미 있는 작업에 참여했지만, 이번 조사가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의 절반밖에 찾지 못했기 때문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올해에 마무리 사업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이번 조사단의 활동을 간략하게 전한다. ‘외유’는 성사의 큰 그림 의암성사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해월신사를 보필해 강원도에서 도피 생활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으로 괴멸된 교단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인 포덕 38년(1897) 12월 24일 해월신사는 동학 교단을 이끌 후계자로 의암성사를 지명했다. 이듬해인 포덕 39년(1898) 4월 5일 해월신사는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어 그해 6월 2일 순도하였다. 이후 의암성사는 김연국 등의 반발을 수습하고 포덕 41년(1900) ‘경자설법’을 통해 교단을 안정화의 기초를 마련했다. 교단은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교인이 체포되어 순도하거나 영어의 몸으로 고통받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손천민도 순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암성사의 처지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의암성사는 위기에 처한 교단의 발전을 위한 획기적 발상을 했다. 하나는 피난 방법의 변화였고, 다른 하나는 세계 대세의 파악이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외유(外遊)’였다. 성사는 외유를 통해 교단의 개벽을 꿈꾸었다. 성사는 이전에도 외유의 의견을 내비쳤으나 교단 원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포덕 42년(1901)에 교단의 주요 간부를 모아 외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辛丑(신축, 1901년) 三月(삼월)에 聖師(성사)가 門弟(문제)와 相議(상의)하야 갈으되, “往年(왕년)에 내 孫天民(손천민) 金演局(김연국)으로 더부러 相議(상의)하고 美國(미국)을 遊覽(유람)코저하다가 金演局(김연국)이 쫓지 않음으로 未果(미과)하엿거니와 이제 다시금 생각하여 본즉 將來(장래) 吾道(오도)를 世界(세계)에 彰明(창명)코저 할진대 今日(금일) 文明(문명)의 大勢(대세)를 觀察(관찰)하지 않으면 不可(불가)하다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내 이제 十年(십년)을 限(한)하고 外遊(외유)하야 世界(세계)의 形便(형편)을 歷探(역탐)코저하노니 諸君(제군)의 뜻이 어떠하뇨.” -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제3편 제6장, 27쪽.- 위의 글을 보면 의암성사는 처음에는 미국으로 외유하고자 했다. 이는 동학에서 추구하는 시천주의 세상과 일맥상통하는 민주공화정 국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사는 미국을 돌아보고 민주공화정을 우리나라에 채택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포덕 37년(1896)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미국을 ‘문명개화를 이룩한 모범적인 선진국’으로 칭송한 매체였다. (오영섭, 「『독립신문』에 나타난 미국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67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6∼7쪽 참조) 이미 성사께서는 포덕 34년(1893) 보은교조신원운동에서 “민당(民黨)”과 “민회(民會)”를 경험하기도 했다. 시천주의 교의와 합치하는 정치체제가 민주공화정이었다는 점과 당시 미국을 모범국으로 소개한 사회적 분위기 등이 성사의 미국 외유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의암성사는 포덕 42년(1901) 3월에 원산을 거쳐 미국을 가려 했지만, 원산에서는 미국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어서 부산으로 내려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일본에 경유하는 동안 미국행 배표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에게 피해를 당해 경비 부족으로 부득이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機密 제85호, 「李祥憲ノ身元及擧動ニ關シ回申」, 『要視察韓國人擧動』3, 1904년 9월 7일자. “李祥憲始ノ各李圭完(或ハ元孫時秉)京畿道陰竹ノ人三四年前始メテ日本ニ遊フ其目的ハ世界漫遊ニあアリテ先ツ釜山ニ出ツルヤ二三日本人ノ欺ク所ト成リ汽船買入ノ約ヲ為シ代価貳萬餘圓ト定メ先ツじ若干手付金ヲ交付シ大阪ニ於テ現物受授ノ約ヲ結ヒ大阪ニ赴キタルニ現汽船ノ所在ヲ認メス全ク詐偽ノ行為ニ出タルヲ知リ空シク滞留中.” 참조) 당시 성사의 최우선 목표는 교단의 재건이었고 이를 위한 방법은 문명개화된 외국을 직접 보고 근대문명의 실상을 파악하고 이를 교단에 접목시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성사께서 일본에 머무른 이유는 당시의 일본도 미국 못지않게 근대문명을 접하고 배우기에 적합한 나라였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의암성사께서 일본 외유 당시 탑승했던 관부연락선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1901년 3월부터 1906년 1월까지였다. 이 시기는 다시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1901년 3월부터 1903년 6월까지의 2년 4개월간이고, 1기는 1903년 6월부터 1906년 1월까지의 2년 8개월간이다. 중간에 중국 상하이 등을 방문하고, 일시 귀국하기도 했지만, 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대략 5년이다. 성사는 원래 10년을 목표로 외유를 하고자 했으나 그 연한을 채우지 못했다. 그 원인으로 성사의 명을 받아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이끌었던 이용구가 친일파인 송병준과 합동해 진보회를 일진회로 고치고 친일에 앞장서 동학 교단을 친일화하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성사는 이용구의 일진회와 단절하고,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꾸어 근대적 종단으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교단은 일신하여 국내 제일의 종단으로 성장했다. 첫 방문지는 고베(神戶)교구 답사단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고베교구’였다. 고베교구는 일본에 있는 유일한 천도교 교구이다. 교베교구의 연원은 1944년 해방 직전 귀국하지 못한 고베의 독실한 강영태(姜永泰), 성사경(成仕卿), 김성오(金聖五), 하재술(河在述) 등 천도교인 4명이 중심이 되어 70여 명의 교인을 규합해 현재 고베교구가 있는 고베시 나가타구(長田區 背蜜峰)에 “천도교고베종리원(天道敎神戶宗理院)”을 설립하고 종교법인 등록을 마친 것에서 시작한다. 연원은 ‘동원포’이고, 현 교구장은 김태환(金泰煥)이다. 같은 시기 ‘오사카교구’와 ‘교토교구’도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일본에는 고베교구만 남았다. 특히 교토교구는 눌암 황태익의 4남인 황용수가 세워 교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음에도 없어져 안타깝다. 고베교구에 도착하니 사전에 조사단의 방문을 인지하고 있던 김 교구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훤칠한 키에 강건한 인상의 김 교구장은 70대 후반의 고령임에도 건강했다. 인사를 나누고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의 집례로 방문 참례식을 가졌다. 윤석산 전 교령은 인사말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고베교구와 김태환 교구장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일본어 경전을 준비해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김태환 교구장은 답사에서 “고베교구에는 매 시일 20명 이상이 시일식을 보고 있으나 어려움이 있으며, 경전과 자료의 일본어 번역, 일본어가 가능한 교인이 와서 생활하면서 지도해줄 인사를 요청한다.”라며 해외 신앙의 어려움과 도움을 요청했다. 이어서 윤석산 교령은 선물로 준비해 간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메달’과 대신사 출세 200년을 맞아 간행한 『읽기 쉬운 천도교경전(동경대전, 용담유사)』을 기증했다. 또 윤석산 전 교령은 자신의 저서와 시집 등도 선물하였다. 김 교구장과 아쉬운 작별의 정을 나누고 조사단은 포덕 136년(1995) 1월 17일 고베대지진 유적이 있는 ‘고베항지진메모리얼파크’를 찾아 보존된 지진 흔적을 둘러보았다. 김태환 교구장은 고베교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충분해 교인 자제 중에 유학생이 있으면 교구에서 지원할 수 있고, 또 유학생이 아니더라도 고베교구에서 신앙을 함께할 동덕이 있으면 숙식과 경비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달해달라고 하였다.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은 12월 8일의 시일식에 다시 고베교구를 방문해 시일식을 봉행하며 30여 교인들과 함께 천도교 종교행사인 시일 의식을 봉행하고 고베 교인들이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으며 동귀일체의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후등승장(後藤勝藏) 여관 터 2월 7일 오전에는 성사께서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을 찾아 나섰다. 기록에 따르면 후등승장 여관이 위치했던 곳은 고베시 중앙구 해안통 3정목(中央區 海岸通 3丁目)이었다. 이곳은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가 손병흠, 민기호와 같이 묵었던 여관이 있던 곳이다. 현재 주소는 고베시 추오구 사케마치도리 3정목 2-8이다. 기존의 자료에는 여관 자리에 미쓰비시 게스트하우스라고 되어있어 주위에 이런 이름의 건물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주변에 미쓰비시 건물은 찾을 수 없었다. 해안통 3정목 일대의 가게를 돌아다니며 조사단이 확인한 결과 당시 성사가 흐등승장 여관은 현재 “더 레지던스 모코마치 카이간도리(The Residence Motomachi Kaigandori)”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사가 머물렀던 후등 여관은 고베항 바로 앞에 있는 숙박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유물로 옆 골목인 해안통 2정목에 있는 ‘고베항 평화의 탑’이 있었다.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고베항으로 들어왔고, 오자마자 이 여관에 투숙했다. 성사가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는 니시무라[西村] 여관이 있었다. 이 여관은 1882년 8월 9일 박영효가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묵었던 여관이다. 박영효는 메이지마루(明治丸)을 타고 일본으로 오는 동안 배에서 태극기를 그렸고, 이를 게양한 곳이 니시무라 여관이다. 따라서 니시무라 여관은 해외에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니시무라 여관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이 건축되었고 1층에 니시무라사진연구소가 있어 예전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니시무라 여관의 주소는 고베시 중앙구 영정통 3정목(神戸市 中央区 栄町通 3丁目) 2-12이다.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노동자상 7일 오전의 후등승장 여관 답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고베의 유럽풍의 거리인 기타노이진칸을 둘러본 후 고베철도 부설 공사 중에 사망한 조선인노동자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조선인노동자상은 고베시 효고구 에게야마 공원 북쪽에 있다. 고베철도는 이곳 에게야먀[會下山] 공원 옆을 지나는데 고베 남쪽 바닷가와 그 반대쪽 아리마 온천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고베철도 공사는 산을 뚫어서 터널을 만드는 난공사였다. 포덕 68년(1927)부터 조선인 노동자가 공사 중에 희생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손과 관련 단체, 그리고 뜻있는 일본인들이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희생자를 조사하고 추모하는 모임)을 만들어 포덕 137년(1996) 11월 노동자상을 건립했다. 노동자상은 곡괭이를 어깨에 진 깡마른 작은 체구의 모자를 눌러쓴 채 힘겹게 일하는 모습을 그렸다. 조사단은 소주를 한잔 따르고 성령출세의 심고를 올렸다. 노동자상에 붙은 안내판에는 포덕 68년(1927) 8월 1일부터 포덕 77년(1936) 11월 25일까지 13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터널 작업 중에 희생되었다고 희생자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이 공사에 참가한 조선인 노동자는 1,500명에 달했으며, 확인된 13명 이외에도 더 많은 조선인이 부상당하거나 희생되었다고 한다. 노동자상 아래에는 이들이 만든 터널을 오가는 철마가 쌩쌩 달리고 있다. (박현국, 「고베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을 기억하는 동상 –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노동자 동상」, 『오마이뉴스』, 2018.6.22. 참조) 윤동주와 정지용 8일 아침에 고베를 출발해 1시간 30분에 걸쳐 교토로 이동했다. 조사단은 교토로 와서 먼저 도시샤(同志社)대학을 찾았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와 정지상의 시비(詩碑)가 나란히 있다. 필자가 포덕 134년(1993)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윤동주 시비만 있었는데 이후 포덕 146년(2005) 정지용의 시비도 건립되었다. 「서시」로 잘 알려진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졸업한 후 국내로 들어와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연희 재학 중 『소년』에 시를 발표해 등단했다. 포덕 83년(1942)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으로 유학 왔으나 6개월 만에 중퇴하고 교토의 도시샤대학 문학부에 전학해 수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포덕 46년(1945)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7세로 옥사했다. 사후 정지용 등이 그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시비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다. 「향수」로 널리 알려진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출신이다. 해월신사의 외손주인 정순철도 옥천 출신으로 비슷한 시기에 거주해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와 휘문보고를 거쳐 포덕 44년(1923)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휘문보고 시절부터 시를 발표했으며. 1929년 귀국 후 휘문보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영랑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을 문단에 등단시켰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시비에는 그가 일본에서 생활했던 지역을 그린 「압천(鴨川)」이 새겨져 있다. 시비는 옥천군과 옥천문화원, 정지용기념사업회에서 힘을 모아 걸립했다. 조사단은 찾은 시비 옆에는 작은 태극기가 꽂혀있어 뭉클했다. 식민지 시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뇌하던 청년 시인 윤동주와 향토색 짙은 조국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시를 쓰던 정지용을 기리며 일행은 심고를 했다. 고노에중학교(近衛中學校) 아침부터 흐린 날씨가 오후에 비를 뿌렸다. 비를 맞으며 조사단은 성사께서 유학생을 입학시켰던 고노에 중학교를 찾았다. 고노에 중학교는 지금은 시립중학교인데 메이지정부가 수립된 후 ‘교토부립제1중학교(京都府立第一中學校)’로 설립되었다. 이 중학교는 의암성사가 교단의 발전과 나라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유학생을 보낸 학교이다. 1차로 포덕 43년(1902) 3월 1차로 교인 자제 24명을 선발해 보냈고, 포덕 45년(1904) 3~4월의 2차로 40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입학시켰다. 이때에는 교인 자제뿐만 아니라 교인이 아니더라도 능력 있는 인재도 선발했다. 성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총 64명의 유학생을 파견한 곳이다. 이때 파견된 유학생으로는 제2세 교조 해월신사의 아들 최동희를 비롯해 정광조, 이인숙 등의 동학교인 자제와 춘원 이광수 등 전국에서 선발된 인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노에 중학교는 교토대학 후문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서 유학생들은 교토대학을 드나들며 청운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둘러보고 정문 옆 화단에서 이 학교가 교토부립제1중학교이었음을 알려주는 2개의 흔적이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헤이안[平安] 건도(建都) 1200년을 기념해 “각목백선선정수목(名木百選選定壽木)” 안내판에 “本校(본교)의 前身(전신)이었던 旧制京都一中(구경도일중, 明治(명치) 30年~昭和(소화) 4年)”이라는 구절과 다른 하나는 “소화 49년 9월 경일중낙북고교동창회건지(京一中洛北高校同窓會建之)”라고 세운 기념석이었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한 바퀴 둘러보고 운동장도 살펴보면서 당시 유학생들의 심정에 느껴보고자 했다. 쇼고인마치(聖護院町) 8일 오후에는 교토에서 성사가 거주했던 쇼고인마치 일대를 찾아 나섰다. 쇼고인이 있는 쇼고인마치는 의암성사가 교토에서 거주했던 동네이다. 성사는 포덕 44년(1903) 6월에 이곳으로 이사했다. 교토시 사쿄구 쇼고인나카마치에 있는 쇼고인은 현재 본산수험종(本山修験宗)의 총본산(総本山) 사원이다. 쇼고인의 문적사원(門跡寺院)은 헤이안 시대에 창건된 사원으로 일왕과 황족이 거주하였던 사원이다. 일본 왕실에 큰불이 났던 1788년과 1854년에는 일왕이 임시로 거쳐한 ‘임시황궁’으로 사용되었다. 쇼고인은 메이지왕이 궁궐을 나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쇼고인마치에서 성사가 어디에 거주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쇼고인마치 일대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사는 이곳 쇼고인마치의 건물을 빌려 머무르면서 동시에 유학생들이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쇼고인마치에서 고노에중학교까지는 두세 블록 밖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사는 이곳에 거주지를 만들어 생활하면서 함께 유학생들이 지낼 수 있도록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조사단은 쇼고인의 문적사원 앞에서 골목길을 따라 고노에중학교까지 걸어보니 시간은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필자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당시 수십명의 유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웃고 떠들면서 등하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조국과 교단의 앞날을 위해 준비하던 유학생들의 강렬한 눈빛이 떠올려 졌다. 당시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던 성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성사는 이곳에서 유학생들을 지원하다 포덕 45년(1904) 6월에 도쿄로 이주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天ケ瀨橋]와 윤동주 시비 9일 아침은 화창했다. 조사단은 교토의 우지시에 위치한 시인 윤동주의 유적을 찾았다. 조사단의 김동우 작가는 이곳을 꼭 가보아야 한다고 건의해 일정에 포함되었다. 윤동주는 귀국을 결심하고 도시샤 대학 친우들과 송별회를 위해 이곳으로 왔다. 윤동주는 이곳 강변에서 불을 지펴 친구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당시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윤동주와 친구들이 찍은 사진이 친구의 앨범에서 발견되었다. 윤동주는 당시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자 ‘아리랑’을 불러 주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이곳을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포덕 84년(1943) 7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후쿠시마 형무소에서 포덕 86년(1945) 2월 16일 옥사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는 윤동주의 생의 마지막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곳이다. 윤동주가 이곳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것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 ‘시인 윤동주의 기억과 화해의 비’이다. 이 비는 아마가세 구름다리를 건너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약 5분 걸으면 왼쪽 길가에서 서 있다. 이 기억과 화해의 비는 2004년 유엔에서 5월 8~9일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추억과 화해의 時(시)”가 결의된 후, 일본에서 윤동주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시인 윤동주 기념비건립위원회”가 조직되었고, 포덕 158년(2017) 10월 18일에 결실을 맺었다. 이 비에는 “새로운 길”이 새겨져 있다. 새로운 길 - 尹東柱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가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의 유적을 보고 조사단은 마지막 조사를 위해 오사카로 향했다. (계속) 글. 덕암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 대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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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시축 시 준암 박인준 교령님 취임식에 부쳐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타고 꽃비 뿌리며 내려온 선녀가 봄바람을 몰고 오니, 겨우내 얼어붙었던 용담물이 스르르 녹아내리네. 이에 잠자던 용이 기지개를 켜고 날을 준비를 하니, 학발노인[(鶴髮老人- 학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신선 )]이 용마에 오르려 하네! 하늘은 서광(瑞光)을 비추고 산천초목은 우쭐우쭐 춤추며 온갖 새들은 시천주 소리로 울어대니 천지가 진동하네! 용마에 오른 신선이여! 천지와 동서남북, 오대양 육대주를 날아다니며 한울님 말씀을 널리 알리소서! 마른나무에 새싹이 나며, 꽃이 피도록 생기를 불어넣어주시고 심화기화로 창생을 살리소서! 시천주 조화정으로 각자의 마음과 몸을 살리게 하고, 영세불망 만사지로 세상을 건지고 만인을 살리게 하소서! 용마에 오른 신선이시여! 구름이 용을 따르듯[(雲從龍-운종용)]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듯 [(風從虎-풍종호)]성인의 덕화를 베푸소서!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운암 오제운(전북 신태인교구장)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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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대학생단, 일본 성지순례 진행교토의 도시샤 대학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오사카 쓰루하시 역 부근에 있는 종리원 터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뒷편의 세븐일레븐 자리가 종리원 터 천도교 대학생단은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4박 5일 동안 일본 오사카, 교토, 고베 일대에서 성지순례를 진행했다. 이번 성지순례는 지난해 가을에 진행된 국내 성지순례에 이어, 국외 성지를 방문하며 천도교의 역사와 한국의 아픔을 되새기고, 과거를 잊지 않으며 미래를 이어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첫날, 오사카에서 천도교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다 성지순례의 첫날인 2월 13일, 참가자들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천도교의 중요한 유적들을 탐방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오사카 쓰루하시 역 부근에 있는 종리원 터였다. 종리원은 천도교의 사무와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한반도 외의 동포들에게 천도교의 뜻을 전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의암성사께서 일본에 거주하던 숙소를 찾아, 교토와 오사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당시의 흔적을 되새겼다. 오사카 우메다역도 방문지에 포함되어, 의암성사께서 독립운동을 위한 교통 거점으로 사용한 이 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둘째 날, 윤동주 시인 기념비와 이웃 종교와의 만남 둘째 날인 2월 14일, 성지순례 참가자들은 교토의 도시샤 대학을 찾아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를 방문했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그가 다녔던 도시샤 대학은 그를 기리기 위해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후 참가자들은 일본 성공회 유시경 신부님과 간담회를 통해 이웃 종교를 이해하고, 천도교와 성공회 간의 관계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으로는 의암성사께서 일본 체류 초기 거주하셨던 곳의 대략적인 위치인 쇼고인몬제키에 방문하며, 일본에서의 천도교 역사를 돌아보았다. 교토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니시혼간지를 방문했다. 일본 정토진종 본산인 니시혼간지는 일본 불교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로, 일본 불교의 역사와 교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장소다. 참가자들은 사찰 내부를 둘러보며 일본 불교의 신앙과 전통을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천도교와 불교 간의 역사적 연관성을 살펴보며 종교 간의 교류에 대해 생각해 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셋째 날, 일본 문화 체험과 자유시간 셋째 날인 2월 15일은 자유 일정으로, 참가자들은 각 팀으로 나누어 일본의 문화와 음식을 체험했다. 오사카성을 방문하거나 일본 전통 음식을 맛보는 등 일본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저녁에는 일정을 되돌아보며 간담회를 진행하고, 성지순례가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들이 직접 자료를 준비하고 공부하며 이야기를 나누니 머리와 마음에 잘 새겨져, 일방적 강의식 순례보다 뜻깊게 다가온다는 만족감도 있었다. 고베교구에서 시일식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마지막 날, 고베에서의 종교 체험과 지진 메모리얼 방문 마지막 공식 일정은 2월 16일 고베에서 진행되었다. 고베 교구는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한 재일동포들이 자진 성금을 모아 설립한 천도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그곳에서 시일식을 봉행했다. 또한 고베항과 고베 지진 메모리얼 파크를 방문하여, 1995년 발생한 고베 대지진의 피해와 그 당시 한국인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새겼다. 마지막 일정으로 이쿠타 신사를 방문하여 일본 전통 종교 체험을 통해 대학생단 간의 소중한 인연을 기원하며 성지순례를 마무리했다. 성지순례의 의미와 참가자들이 느낀 점 성지순례를 마친 참가자들은 이번 여행을 통해 천도교의 역사와 신앙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신앙 생활을 다짐했다. 참가자들는 성지순례 이후, "성지에 담긴 이야기와 정보를 듣고, 천도교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며, "이번 성지순례를 계기로 스스로 신앙하고, 탐구하며 전진해 나갈 것"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이번 성지순례는 천도교의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하며 신앙을 새롭게 다지기 위한 중요한 시간이었으며, 대학생단은 앞으로도 국내외 성지를 순례하며 천도교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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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단 임기를 마치며모시고 안녕하십니까 포덕 165년 제44대 대학생단 천도교청년회 대학생단 단장이었던 조영은입니다. 단장직을 수행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청년회 활동을 하게 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2020년 제가 대학에 입학하고 천도교 대학생단 활동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천도교를 시작한 건 이미 천도교를 하고 계신 이모와 이모부의 영향으로 봉황각 어린이 캠프에 참여했던 계기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또래 동덕들과 함께 저희들의 눈 높이에 맞춰서 활동을 진행해 주셨던 기억이 아직까지 나는 것 같습니다. 이 계기를 시작으로 매년 여름, 겨울마다 한울 나눔터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학생단으로 편입된 것 같습니다. 어린이날 행사에 대학생단이 보조로 진행하고 있다. 사회문화관과 협업해 종로구 주민센터에서 봉사활동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부산 대동교구에서 대학생단과 청년회가 개벽제 후 나인협 선생 동상을 참례하였다. 신입생이 되고 대학생단 활동도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 19의 여파로 학교는 물론 대학생단 활동도 무기한 연기되는 것을 느끼며 많은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42대 단장이셨던 민경 동덕과의 연락을 시작으로 작년에는 43대 대학생단의 부단장을 맡아 많은 선후배 동덕들과 자리를 가지며 천도교 대학생단만의 색깔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를 계기로 44대 대학생단 단장이 되어 많이 부족하지만 1년간의 시간 동안 더 많은 청소년 동덕들이 대학생단이 될 수 있게, 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덕들을 모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따스한 봄날 한강교구에서 진행한 정기모임부터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대학생단과 청년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치렀던 어린이날, 경기도 지역에 거주하는 천도교 어린이 동덕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경기한울학교, 여러 종교 교류 캠프 등 다양한 경험들과 전국의 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작년은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기념해 많은 기념식과 기도식에 대학생단이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현도기념일과 인일기념일에 합창과 공연을 하고 사회문화관에서 진행했던 수운대신사 피체노정과 봉사활동에도 참여해 단순히 정기모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사회참여 활동도 함께 할 수 있어서 뜻깊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1년간의 활동을 돌아볼 수 있었던 대학생단 송년회와 청년회원들과 함께 진행한 부산에서의 개벽제까지 정말 쉼 없이 많은 활동들을 진행했던 날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값지고 소중했습니다. 단장이라는 직책을 맡으면서 때로는 책임감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고, 생각처럼 되지 않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했던 동덕들과 선배, 후배 동덕들이 있었기에 이 모든 순간이 더욱 의미 있었습니다. 함께 웃고, 고민하고, 때로는 어려움을 나누며 보낸 시간들이 앞으로도 제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따뜻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단장에서 물러나지만, 청년회원으로서, 대학생단을 졸업한 선배로서 후배분들이 성장하고 더 많은 교인들로 채워지는 대학생단을 기대하며 뒤에서 열심히 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대학생단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 힘이 되어드릴 수 있는 선배가 되겠습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신 모든 동덕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포덕 166년 3월 27일 44대 대학생단 단장 조영은 심고 사진 조영은(본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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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떡처럼 얘기해도 찰떡처럼 알아듣기언젠가 한 미국인 교수가 '또라이'에 대해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 인생에서 기쁜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 한마디로 재수 없는 사람들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종종 우리 곁에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위축되고 분노하며 기분을 망쳐야 할까? 최근 나는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수련 41일째입니다"라고 말했다. 나 자신이 너무 기특하고 대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런 거 아무리 많이 해도 다 소용없다." 순간 '이런 또라이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함께 기뻐해 주고 격려해 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찬물을 끼얹다니. 처음에는 기분이 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분은 아마도 수련을 많이 하고도 인격적으로 훌륭하지 못한 사람을 겪어 본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단순히 부러워서 한 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말을 원래 개떡같이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상처받고 위축될 것인가? 아니다. 나는 상처받고 위축되고, 휘둘리는 대신, 내 내면을 들여다 보고 내 한울님 지키고, 유쾌하게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보면 또라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지 않는가? 적어도 '나는 저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누군가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즐겁게 한 걸음 더 나아가자. 글, 둥지가 되어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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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이 세상에 태어난 은적암에 다녀오다사람에게는 정말 연(緣)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천도교와 연을 맺게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저 인사동과 안국동을 오가며 첨탑이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특이해 기억에 남아 있던 수운회관에, 오랜 지인이었던 천도교 동두천교구 연암 강정환 교구장의 초대로, 2024년 12월 수운 최제우 대신사 탄신 200주년 행사에 참석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지나간 역사로만 알고 지내던 동학에 관해 공부해보자는 생각에, 포덕 166년에 천도교종학대학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4시간씩 동경대전과 주역을 배우며 동학과 천도교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경대전과 주역이 한자로 되어 있는 데다, 한자를 이해한다 해도,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참뜻을 이해하기는 정말 버거웠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 수운 최제우 대신사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었다. 그는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양반인데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던 시기였다. 게다가 반상의 구분이 엄격한 시대에 그는 크게 깨달은 뒤 먼저 자신의 여종 둘을 해방한다.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고, 다른 사람은 며느리도 삼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링컨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대통령 신분으로 노예해방에 반대하는 남부와 몇 년간 남북전쟁을 했다. 하지만 수운 최제우는 이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기반으로, 봉건적 착취와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에서 동학을 창도했다. 이것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면서, 성실과 신의로서 새롭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었으며 어지러웠던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하지만 수운 대신사의 동학에 동조하는 동학교도들이 늘어나자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유림의 질시와 관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졌다. 이를 피해 자신이 주장한 바를 글로써 남기고자 1861년 겨울에 남원의 은적암에 은거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동학을 밝히는 동학론(논학문)을 집필하고,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의 내용을 정리하여 ‘동학’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번에 대신사께서 천도교의 귀한 경전들을 집필하신 남원의 은적암으로 성주현 교수님과 수업을 같이 듣는 동덕들과 함께 현장학습을 다녀왔다. 선국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길을 오르니 은적암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서울교구가 세운 “은적암 터’ 안내판과 남원 문화원에서 세운 교룡산 산신단 유래비 그리고 “독립선언서 대표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대종사 첫 출가 성지”란 비목이 서 있었다. 은적암 터 안내판에는 “이곳은 제1세 교조인 대신사께서 관의 탄압을 피해 포덕 2년(신유년, 단기 4194년) 12월 그믐날에 오셔서 은거하시던 곳이다. 대신사께서는 이곳 덕밀암을 은적암이라 이름하시고 머무르시며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 등을 집필하셨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조금 안쪽으로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음각된 암벽만이 그곳이 은적암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은적암 터에 도착하자마자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주문 13자(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를 암송하며 걸었다. 수운 대신사님의 체취를 오롯이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고, 한울님과 하나가 되는 나만의 의식을 치렀다. 은적암을 떠나면서 든 생각은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6개월 이상을 은둔하며 처음으로 동학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을 집필하고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정리한 동학의 성지인 이곳이 역사적인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이곳 은적암 터에서 내 안에 모신 한울님께 진심으로 간청드렸다. 글, 황규만(종학대학원 수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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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단편소설 '거룩한 이의 죽음'을 듣고춘원 이광수가 대신사님의 순도를 개벽지에 단편소설로 게재한 것만 보아도 천도교를 보통사람뿐만 아니라, 학자나, 지식인, 저명인사까지도 믿거나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소설이라, 역사적 사실이 허구적으로 서술된 점이 매우 아쉽습니다. 소설 속에는 수운 대신사(水雲 大神師)님이 경주 서면 박대여와 부인 김씨 집에서 머물다 해월신사님이 찾아뵌 후, 관원에게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 갇혀 경상감사 서헌순에게 네 차례 고문을 받아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천도교약사(천도교중앙총부 출판부. 2006)에는 '임술년 1862년 12월 10일 새벽에 선전관 정운구가 용담정을 급습하여 대신사, 박씨부인, 큰아들 세정, 그리고 제자들을 포함해서 23명을 체포, 대구 감영에 가두고 해월선생님께서 현풍도인 곽덕원의 고용인으로 변장, 옥리에게 재물을 주어 대신사님에게 사재밥을 드리며 뵙자, 대신사께서 담뱃대를 하나 주었는데, 그 속에는 '등불이 물 위에 밝았으니 틈새가 없고 기둥이 마른것 같으나 힘은 남아 있도다(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라는 시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필자는 이를 '기둥은 말랐으나 힘은 남아 있다', '기둥은 말라버린 모습이지만, 여전히 힘은 남아 있다'. 즉 당신은 죽어가지만, 동학은 살아 여전히 이어간다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약사에는 '나는 순히 천명을 받을 것이니 너는 멀리 달아나라(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되어 있는데,(천도교약사 42~44쪽 참조) 소설 속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유튜브 '책 읽어주는 여자'를 통해 해월 선생님의 용시용활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포덕의 방법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시, 소설, 수필 같은 문학이나, 미술, 음악 등 예술을 인터넷이나 유투브를 통해 천도교의 시천주 신앙을 널리 알리는 방법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유튜브 '책을 읽어주는 여자'를 통해 수운 대신사(거룩한 이의 죽음)의 순도를 5년 동안 이십육만 명이 들었다는 것은 과히 충격적입니다. 이처럼 포덕의 매체도 중요하지만, 포덕의 내용, 컨텐츠가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내용을 만드는 전문가가 절실하다고 여깁니다. 신태인 교구장 운암 오제운 심고 ※ 『천도교약사』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일용행사가 도> 코너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와 체험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쓴 수기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개인의 주관적 견해와 체험이 담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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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핀 벚꽃처럼 우리네 마음도상주해수욕장 가는 길목에 활짝 핀 벚꽃입니다. 아래 사진엔 상주전교실 입간판이 선명한데 그 옛날에는 전교실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활짝 핀 벚꽃처럼 밝고 아름답게 천도교 운수가 밝아지기를 기원해봅니다. 만개한 벚꽃처럼 우리네 마음도 밝고 화사한 봄같이 화해나기를 기원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글 時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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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새벽수련을 마치며경전을 좀더 정성스럽게 봉독하며 스승님들께서 하시고 싶으셨던 뜻을 잘, 제대로 새겨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저런 공부를 하지만 그 처음에도 끝에도 스승님들의 말씀이 진리에 닿아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도 나의 공경을 통해 만물의 공경이 실현되기를 심고해봅니다. 지금ㆍ오늘ㆍ여기의 나의 삶이 또 다른 새날을 만듭니다. 우린 한울님이니까요. 감사한 새날입니다. 함께 할 동덕님들이 있어 가능합니다. 고맙습니다. 인화당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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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동상과 마주치면탄핵 집회에서 종로를 행진할 때마다 녹두장군 동상과 마주치면 마음이 아프면서 기쁘기도 했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 늘 스스로에게 묻고 함께 답을 찾아 나가겠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날이네요. 자유롭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천도교한울연대 사무처장 신해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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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행적 조사(1)뜻깊었던 의암성사 행적 조사 뜬금없는 계엄 선포와 국회의 해제 의결 이후 국내 정치가 소란했던 지난해 12월 6일 총부 사회문화관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후원하는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과 독립유적지 조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평소 의암성사에 관한 논문과 글을 발표하는 입장에서 늘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조사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번 답사에 동행한 조사단은 교단을 대표해서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이 참여했고, 답사의 진행은 사회문화관의 최인경 관장과 최진영 차장이 맡았다. 연구자로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박성현 큐레이터와 필자가 참여했고, 유적지 사진 기록으로 독립운동 유적 담기로 잘 알려진 김동우 작가와 민족운동 유적을 사진으로 알려주는 신춘호 방송통신대 교수가, 동영상 자료는 교단 동영상 자료를 정리하는 김정호 선도사가 맡았다. 원활한 답사를 위해 박동호 여행사 대표가 참여했다. 조사단은 12월 6일 아침 6시 인천국제공항에 집결하여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정을 시작했다. 고베(神戶)에서 이틀간 조사하고, 교토(京都)로 이동해 하루, 다시 오사카(大阪)로 이동해 이틀을 조사하고 12월 10일 오후 22시경에 인천국제공항으로 도착한 힘든 일정이었다. 돌아오면서 이번 조사단에 참가해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탐방하는 의미 있는 작업에 참여했지만, 이번 조사가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의 절반밖에 찾지 못했기 때문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올해에 마무리 사업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이번 조사단의 활동을 간략하게 전한다. ‘외유’는 성사의 큰 그림 의암성사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해월신사를 보필해 강원도에서 도피 생활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으로 괴멸된 교단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인 포덕 38년(1897) 12월 24일 해월신사는 동학 교단을 이끌 후계자로 의암성사를 지명했다. 이듬해인 포덕 39년(1898) 4월 5일 해월신사는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어 그해 6월 2일 순도하였다. 이후 의암성사는 김연국 등의 반발을 수습하고 포덕 41년(1900) ‘경자설법’을 통해 교단을 안정화의 기초를 마련했다. 교단은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교인이 체포되어 순도하거나 영어의 몸으로 고통받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손천민도 순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암성사의 처지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의암성사는 위기에 처한 교단의 발전을 위한 획기적 발상을 했다. 하나는 피난 방법의 변화였고, 다른 하나는 세계 대세의 파악이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외유(外遊)’였다. 성사는 외유를 통해 교단의 개벽을 꿈꾸었다. 성사는 이전에도 외유의 의견을 내비쳤으나 교단 원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포덕 42년(1901)에 교단의 주요 간부를 모아 외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辛丑(신축, 1901년) 三月(삼월)에 聖師(성사)가 門弟(문제)와 相議(상의)하야 갈으되, “往年(왕년)에 내 孫天民(손천민) 金演局(김연국)으로 더부러 相議(상의)하고 美國(미국)을 遊覽(유람)코저하다가 金演局(김연국)이 쫓지 않음으로 未果(미과)하엿거니와 이제 다시금 생각하여 본즉 將來(장래) 吾道(오도)를 世界(세계)에 彰明(창명)코저 할진대 今日(금일) 文明(문명)의 大勢(대세)를 觀察(관찰)하지 않으면 不可(불가)하다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내 이제 十年(십년)을 限(한)하고 外遊(외유)하야 世界(세계)의 形便(형편)을 歷探(역탐)코저하노니 諸君(제군)의 뜻이 어떠하뇨.” -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제3편 제6장, 27쪽.- 위의 글을 보면 의암성사는 처음에는 미국으로 외유하고자 했다. 이는 동학에서 추구하는 시천주의 세상과 일맥상통하는 민주공화정 국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사는 미국을 돌아보고 민주공화정을 우리나라에 채택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포덕 37년(1896)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미국을 ‘문명개화를 이룩한 모범적인 선진국’으로 칭송한 매체였다. (오영섭, 「『독립신문』에 나타난 미국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67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6∼7쪽 참조) 이미 성사께서는 포덕 34년(1893) 보은교조신원운동에서 “민당(民黨)”과 “민회(民會)”를 경험하기도 했다. 시천주의 교의와 합치하는 정치체제가 민주공화정이었다는 점과 당시 미국을 모범국으로 소개한 사회적 분위기 등이 성사의 미국 외유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의암성사는 포덕 42년(1901) 3월에 원산을 거쳐 미국을 가려 했지만, 원산에서는 미국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어서 부산으로 내려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일본에 경유하는 동안 미국행 배표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에게 피해를 당해 경비 부족으로 부득이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機密 제85호, 「李祥憲ノ身元及擧動ニ關シ回申」, 『要視察韓國人擧動』3, 1904년 9월 7일자. “李祥憲始ノ各李圭完(或ハ元孫時秉)京畿道陰竹ノ人三四年前始メテ日本ニ遊フ其目的ハ世界漫遊ニあアリテ先ツ釜山ニ出ツルヤ二三日本人ノ欺ク所ト成リ汽船買入ノ約ヲ為シ代価貳萬餘圓ト定メ先ツじ若干手付金ヲ交付シ大阪ニ於テ現物受授ノ約ヲ結ヒ大阪ニ赴キタルニ現汽船ノ所在ヲ認メス全ク詐偽ノ行為ニ出タルヲ知リ空シク滞留中.” 참조) 당시 성사의 최우선 목표는 교단의 재건이었고 이를 위한 방법은 문명개화된 외국을 직접 보고 근대문명의 실상을 파악하고 이를 교단에 접목시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성사께서 일본에 머무른 이유는 당시의 일본도 미국 못지않게 근대문명을 접하고 배우기에 적합한 나라였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의암성사께서 일본 외유 당시 탑승했던 관부연락선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1901년 3월부터 1906년 1월까지였다. 이 시기는 다시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1901년 3월부터 1903년 6월까지의 2년 4개월간이고, 1기는 1903년 6월부터 1906년 1월까지의 2년 8개월간이다. 중간에 중국 상하이 등을 방문하고, 일시 귀국하기도 했지만, 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대략 5년이다. 성사는 원래 10년을 목표로 외유를 하고자 했으나 그 연한을 채우지 못했다. 그 원인으로 성사의 명을 받아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이끌었던 이용구가 친일파인 송병준과 합동해 진보회를 일진회로 고치고 친일에 앞장서 동학 교단을 친일화하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성사는 이용구의 일진회와 단절하고,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꾸어 근대적 종단으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교단은 일신하여 국내 제일의 종단으로 성장했다. 첫 방문지는 고베(神戶)교구 답사단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고베교구’였다. 고베교구는 일본에 있는 유일한 천도교 교구이다. 교베교구의 연원은 1944년 해방 직전 귀국하지 못한 고베의 독실한 강영태(姜永泰), 성사경(成仕卿), 김성오(金聖五), 하재술(河在述) 등 천도교인 4명이 중심이 되어 70여 명의 교인을 규합해 현재 고베교구가 있는 고베시 나가타구(長田區 背蜜峰)에 “천도교고베종리원(天道敎神戶宗理院)”을 설립하고 종교법인 등록을 마친 것에서 시작한다. 연원은 ‘동원포’이고, 현 교구장은 김태환(金泰煥)이다. 같은 시기 ‘오사카교구’와 ‘교토교구’도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일본에는 고베교구만 남았다. 특히 교토교구는 눌암 황태익의 4남인 황용수가 세워 교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음에도 없어져 안타깝다. 고베교구에 도착하니 사전에 조사단의 방문을 인지하고 있던 김 교구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훤칠한 키에 강건한 인상의 김 교구장은 70대 후반의 고령임에도 건강했다. 인사를 나누고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의 집례로 방문 참례식을 가졌다. 윤석산 전 교령은 인사말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고베교구와 김태환 교구장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일본어 경전을 준비해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김태환 교구장은 답사에서 “고베교구에는 매 시일 20명 이상이 시일식을 보고 있으나 어려움이 있으며, 경전과 자료의 일본어 번역, 일본어가 가능한 교인이 와서 생활하면서 지도해줄 인사를 요청한다.”라며 해외 신앙의 어려움과 도움을 요청했다. 이어서 윤석산 교령은 선물로 준비해 간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메달’과 대신사 출세 200년을 맞아 간행한 『읽기 쉬운 천도교경전(동경대전, 용담유사)』을 기증했다. 또 윤석산 전 교령은 자신의 저서와 시집 등도 선물하였다. 김 교구장과 아쉬운 작별의 정을 나누고 조사단은 포덕 136년(1995) 1월 17일 고베대지진 유적이 있는 ‘고베항지진메모리얼파크’를 찾아 보존된 지진 흔적을 둘러보았다. 김태환 교구장은 고베교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충분해 교인 자제 중에 유학생이 있으면 교구에서 지원할 수 있고, 또 유학생이 아니더라도 고베교구에서 신앙을 함께할 동덕이 있으면 숙식과 경비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달해달라고 하였다.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은 12월 8일의 시일식에 다시 고베교구를 방문해 시일식을 봉행하며 30여 교인들과 함께 천도교 종교행사인 시일 의식을 봉행하고 고베 교인들이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으며 동귀일체의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후등승장(後藤勝藏) 여관 터 2월 7일 오전에는 성사께서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을 찾아 나섰다. 기록에 따르면 후등승장 여관이 위치했던 곳은 고베시 중앙구 해안통 3정목(中央區 海岸通 3丁目)이었다. 이곳은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가 손병흠, 민기호와 같이 묵었던 여관이 있던 곳이다. 현재 주소는 고베시 추오구 사케마치도리 3정목 2-8이다. 기존의 자료에는 여관 자리에 미쓰비시 게스트하우스라고 되어있어 주위에 이런 이름의 건물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주변에 미쓰비시 건물은 찾을 수 없었다. 해안통 3정목 일대의 가게를 돌아다니며 조사단이 확인한 결과 당시 성사가 흐등승장 여관은 현재 “더 레지던스 모코마치 카이간도리(The Residence Motomachi Kaigandori)”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사가 머물렀던 후등 여관은 고베항 바로 앞에 있는 숙박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유물로 옆 골목인 해안통 2정목에 있는 ‘고베항 평화의 탑’이 있었다.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고베항으로 들어왔고, 오자마자 이 여관에 투숙했다. 성사가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는 니시무라[西村] 여관이 있었다. 이 여관은 1882년 8월 9일 박영효가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묵었던 여관이다. 박영효는 메이지마루(明治丸)을 타고 일본으로 오는 동안 배에서 태극기를 그렸고, 이를 게양한 곳이 니시무라 여관이다. 따라서 니시무라 여관은 해외에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니시무라 여관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이 건축되었고 1층에 니시무라사진연구소가 있어 예전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니시무라 여관의 주소는 고베시 중앙구 영정통 3정목(神戸市 中央区 栄町通 3丁目) 2-12이다.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노동자상 7일 오전의 후등승장 여관 답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고베의 유럽풍의 거리인 기타노이진칸을 둘러본 후 고베철도 부설 공사 중에 사망한 조선인노동자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조선인노동자상은 고베시 효고구 에게야마 공원 북쪽에 있다. 고베철도는 이곳 에게야먀[會下山] 공원 옆을 지나는데 고베 남쪽 바닷가와 그 반대쪽 아리마 온천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고베철도 공사는 산을 뚫어서 터널을 만드는 난공사였다. 포덕 68년(1927)부터 조선인 노동자가 공사 중에 희생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손과 관련 단체, 그리고 뜻있는 일본인들이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희생자를 조사하고 추모하는 모임)을 만들어 포덕 137년(1996) 11월 노동자상을 건립했다. 노동자상은 곡괭이를 어깨에 진 깡마른 작은 체구의 모자를 눌러쓴 채 힘겹게 일하는 모습을 그렸다. 조사단은 소주를 한잔 따르고 성령출세의 심고를 올렸다. 노동자상에 붙은 안내판에는 포덕 68년(1927) 8월 1일부터 포덕 77년(1936) 11월 25일까지 13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터널 작업 중에 희생되었다고 희생자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이 공사에 참가한 조선인 노동자는 1,500명에 달했으며, 확인된 13명 이외에도 더 많은 조선인이 부상당하거나 희생되었다고 한다. 노동자상 아래에는 이들이 만든 터널을 오가는 철마가 쌩쌩 달리고 있다. (박현국, 「고베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을 기억하는 동상 –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노동자 동상」, 『오마이뉴스』, 2018.6.22. 참조) 윤동주와 정지용 8일 아침에 고베를 출발해 1시간 30분에 걸쳐 교토로 이동했다. 조사단은 교토로 와서 먼저 도시샤(同志社)대학을 찾았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와 정지상의 시비(詩碑)가 나란히 있다. 필자가 포덕 134년(1993)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윤동주 시비만 있었는데 이후 포덕 146년(2005) 정지용의 시비도 건립되었다. 「서시」로 잘 알려진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졸업한 후 국내로 들어와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연희 재학 중 『소년』에 시를 발표해 등단했다. 포덕 83년(1942)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으로 유학 왔으나 6개월 만에 중퇴하고 교토의 도시샤대학 문학부에 전학해 수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포덕 46년(1945)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7세로 옥사했다. 사후 정지용 등이 그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시비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다. 「향수」로 널리 알려진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출신이다. 해월신사의 외손주인 정순철도 옥천 출신으로 비슷한 시기에 거주해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와 휘문보고를 거쳐 포덕 44년(1923)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휘문보고 시절부터 시를 발표했으며. 1929년 귀국 후 휘문보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영랑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을 문단에 등단시켰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시비에는 그가 일본에서 생활했던 지역을 그린 「압천(鴨川)」이 새겨져 있다. 시비는 옥천군과 옥천문화원, 정지용기념사업회에서 힘을 모아 걸립했다. 조사단은 찾은 시비 옆에는 작은 태극기가 꽂혀있어 뭉클했다. 식민지 시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뇌하던 청년 시인 윤동주와 향토색 짙은 조국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시를 쓰던 정지용을 기리며 일행은 심고를 했다. 고노에중학교(近衛中學校) 아침부터 흐린 날씨가 오후에 비를 뿌렸다. 비를 맞으며 조사단은 성사께서 유학생을 입학시켰던 고노에 중학교를 찾았다. 고노에 중학교는 지금은 시립중학교인데 메이지정부가 수립된 후 ‘교토부립제1중학교(京都府立第一中學校)’로 설립되었다. 이 중학교는 의암성사가 교단의 발전과 나라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유학생을 보낸 학교이다. 1차로 포덕 43년(1902) 3월 1차로 교인 자제 24명을 선발해 보냈고, 포덕 45년(1904) 3~4월의 2차로 40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입학시켰다. 이때에는 교인 자제뿐만 아니라 교인이 아니더라도 능력 있는 인재도 선발했다. 성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총 64명의 유학생을 파견한 곳이다. 이때 파견된 유학생으로는 제2세 교조 해월신사의 아들 최동희를 비롯해 정광조, 이인숙 등의 동학교인 자제와 춘원 이광수 등 전국에서 선발된 인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노에 중학교는 교토대학 후문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서 유학생들은 교토대학을 드나들며 청운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둘러보고 정문 옆 화단에서 이 학교가 교토부립제1중학교이었음을 알려주는 2개의 흔적이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헤이안[平安] 건도(建都) 1200년을 기념해 “각목백선선정수목(名木百選選定壽木)” 안내판에 “本校(본교)의 前身(전신)이었던 旧制京都一中(구경도일중, 明治(명치) 30年~昭和(소화) 4年)”이라는 구절과 다른 하나는 “소화 49년 9월 경일중낙북고교동창회건지(京一中洛北高校同窓會建之)”라고 세운 기념석이었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한 바퀴 둘러보고 운동장도 살펴보면서 당시 유학생들의 심정에 느껴보고자 했다. 쇼고인마치(聖護院町) 8일 오후에는 교토에서 성사가 거주했던 쇼고인마치 일대를 찾아 나섰다. 쇼고인이 있는 쇼고인마치는 의암성사가 교토에서 거주했던 동네이다. 성사는 포덕 44년(1903) 6월에 이곳으로 이사했다. 교토시 사쿄구 쇼고인나카마치에 있는 쇼고인은 현재 본산수험종(本山修験宗)의 총본산(総本山) 사원이다. 쇼고인의 문적사원(門跡寺院)은 헤이안 시대에 창건된 사원으로 일왕과 황족이 거주하였던 사원이다. 일본 왕실에 큰불이 났던 1788년과 1854년에는 일왕이 임시로 거쳐한 ‘임시황궁’으로 사용되었다. 쇼고인은 메이지왕이 궁궐을 나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쇼고인마치에서 성사가 어디에 거주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쇼고인마치 일대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사는 이곳 쇼고인마치의 건물을 빌려 머무르면서 동시에 유학생들이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쇼고인마치에서 고노에중학교까지는 두세 블록 밖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사는 이곳에 거주지를 만들어 생활하면서 함께 유학생들이 지낼 수 있도록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조사단은 쇼고인의 문적사원 앞에서 골목길을 따라 고노에중학교까지 걸어보니 시간은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필자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당시 수십명의 유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웃고 떠들면서 등하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조국과 교단의 앞날을 위해 준비하던 유학생들의 강렬한 눈빛이 떠올려 졌다. 당시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던 성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성사는 이곳에서 유학생들을 지원하다 포덕 45년(1904) 6월에 도쿄로 이주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天ケ瀨橋]와 윤동주 시비 9일 아침은 화창했다. 조사단은 교토의 우지시에 위치한 시인 윤동주의 유적을 찾았다. 조사단의 김동우 작가는 이곳을 꼭 가보아야 한다고 건의해 일정에 포함되었다. 윤동주는 귀국을 결심하고 도시샤 대학 친우들과 송별회를 위해 이곳으로 왔다. 윤동주는 이곳 강변에서 불을 지펴 친구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당시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윤동주와 친구들이 찍은 사진이 친구의 앨범에서 발견되었다. 윤동주는 당시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자 ‘아리랑’을 불러 주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이곳을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포덕 84년(1943) 7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후쿠시마 형무소에서 포덕 86년(1945) 2월 16일 옥사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는 윤동주의 생의 마지막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곳이다. 윤동주가 이곳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것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 ‘시인 윤동주의 기억과 화해의 비’이다. 이 비는 아마가세 구름다리를 건너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약 5분 걸으면 왼쪽 길가에서 서 있다. 이 기억과 화해의 비는 2004년 유엔에서 5월 8~9일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추억과 화해의 時(시)”가 결의된 후, 일본에서 윤동주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시인 윤동주 기념비건립위원회”가 조직되었고, 포덕 158년(2017) 10월 18일에 결실을 맺었다. 이 비에는 “새로운 길”이 새겨져 있다. 새로운 길 - 尹東柱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가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의 유적을 보고 조사단은 마지막 조사를 위해 오사카로 향했다. (계속) 글. 덕암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 대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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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시축 시 준암 박인준 교령님 취임식에 부쳐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타고 꽃비 뿌리며 내려온 선녀가 봄바람을 몰고 오니, 겨우내 얼어붙었던 용담물이 스르르 녹아내리네. 이에 잠자던 용이 기지개를 켜고 날을 준비를 하니, 학발노인[(鶴髮老人- 학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신선 )]이 용마에 오르려 하네! 하늘은 서광(瑞光)을 비추고 산천초목은 우쭐우쭐 춤추며 온갖 새들은 시천주 소리로 울어대니 천지가 진동하네! 용마에 오른 신선이여! 천지와 동서남북, 오대양 육대주를 날아다니며 한울님 말씀을 널리 알리소서! 마른나무에 새싹이 나며, 꽃이 피도록 생기를 불어넣어주시고 심화기화로 창생을 살리소서! 시천주 조화정으로 각자의 마음과 몸을 살리게 하고, 영세불망 만사지로 세상을 건지고 만인을 살리게 하소서! 용마에 오른 신선이시여! 구름이 용을 따르듯[(雲從龍-운종용)]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듯 [(風從虎-풍종호)]성인의 덕화를 베푸소서!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운암 오제운(전북 신태인교구장)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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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대학생단, 일본 성지순례 진행교토의 도시샤 대학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오사카 쓰루하시 역 부근에 있는 종리원 터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뒷편의 세븐일레븐 자리가 종리원 터 천도교 대학생단은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4박 5일 동안 일본 오사카, 교토, 고베 일대에서 성지순례를 진행했다. 이번 성지순례는 지난해 가을에 진행된 국내 성지순례에 이어, 국외 성지를 방문하며 천도교의 역사와 한국의 아픔을 되새기고, 과거를 잊지 않으며 미래를 이어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첫날, 오사카에서 천도교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다 성지순례의 첫날인 2월 13일, 참가자들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천도교의 중요한 유적들을 탐방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오사카 쓰루하시 역 부근에 있는 종리원 터였다. 종리원은 천도교의 사무와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한반도 외의 동포들에게 천도교의 뜻을 전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의암성사께서 일본에 거주하던 숙소를 찾아, 교토와 오사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당시의 흔적을 되새겼다. 오사카 우메다역도 방문지에 포함되어, 의암성사께서 독립운동을 위한 교통 거점으로 사용한 이 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둘째 날, 윤동주 시인 기념비와 이웃 종교와의 만남 둘째 날인 2월 14일, 성지순례 참가자들은 교토의 도시샤 대학을 찾아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를 방문했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그가 다녔던 도시샤 대학은 그를 기리기 위해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후 참가자들은 일본 성공회 유시경 신부님과 간담회를 통해 이웃 종교를 이해하고, 천도교와 성공회 간의 관계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으로는 의암성사께서 일본 체류 초기 거주하셨던 곳의 대략적인 위치인 쇼고인몬제키에 방문하며, 일본에서의 천도교 역사를 돌아보았다. 교토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니시혼간지를 방문했다. 일본 정토진종 본산인 니시혼간지는 일본 불교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로, 일본 불교의 역사와 교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장소다. 참가자들은 사찰 내부를 둘러보며 일본 불교의 신앙과 전통을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천도교와 불교 간의 역사적 연관성을 살펴보며 종교 간의 교류에 대해 생각해 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셋째 날, 일본 문화 체험과 자유시간 셋째 날인 2월 15일은 자유 일정으로, 참가자들은 각 팀으로 나누어 일본의 문화와 음식을 체험했다. 오사카성을 방문하거나 일본 전통 음식을 맛보는 등 일본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저녁에는 일정을 되돌아보며 간담회를 진행하고, 성지순례가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들이 직접 자료를 준비하고 공부하며 이야기를 나누니 머리와 마음에 잘 새겨져, 일방적 강의식 순례보다 뜻깊게 다가온다는 만족감도 있었다. 고베교구에서 시일식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마지막 날, 고베에서의 종교 체험과 지진 메모리얼 방문 마지막 공식 일정은 2월 16일 고베에서 진행되었다. 고베 교구는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한 재일동포들이 자진 성금을 모아 설립한 천도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그곳에서 시일식을 봉행했다. 또한 고베항과 고베 지진 메모리얼 파크를 방문하여, 1995년 발생한 고베 대지진의 피해와 그 당시 한국인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새겼다. 마지막 일정으로 이쿠타 신사를 방문하여 일본 전통 종교 체험을 통해 대학생단 간의 소중한 인연을 기원하며 성지순례를 마무리했다. 성지순례의 의미와 참가자들이 느낀 점 성지순례를 마친 참가자들은 이번 여행을 통해 천도교의 역사와 신앙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신앙 생활을 다짐했다. 참가자들는 성지순례 이후, "성지에 담긴 이야기와 정보를 듣고, 천도교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며, "이번 성지순례를 계기로 스스로 신앙하고, 탐구하며 전진해 나갈 것"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이번 성지순례는 천도교의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하며 신앙을 새롭게 다지기 위한 중요한 시간이었으며, 대학생단은 앞으로도 국내외 성지를 순례하며 천도교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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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단 임기를 마치며모시고 안녕하십니까 포덕 165년 제44대 대학생단 천도교청년회 대학생단 단장이었던 조영은입니다. 단장직을 수행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청년회 활동을 하게 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2020년 제가 대학에 입학하고 천도교 대학생단 활동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천도교를 시작한 건 이미 천도교를 하고 계신 이모와 이모부의 영향으로 봉황각 어린이 캠프에 참여했던 계기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또래 동덕들과 함께 저희들의 눈 높이에 맞춰서 활동을 진행해 주셨던 기억이 아직까지 나는 것 같습니다. 이 계기를 시작으로 매년 여름, 겨울마다 한울 나눔터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학생단으로 편입된 것 같습니다. 어린이날 행사에 대학생단이 보조로 진행하고 있다. 사회문화관과 협업해 종로구 주민센터에서 봉사활동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부산 대동교구에서 대학생단과 청년회가 개벽제 후 나인협 선생 동상을 참례하였다. 신입생이 되고 대학생단 활동도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 19의 여파로 학교는 물론 대학생단 활동도 무기한 연기되는 것을 느끼며 많은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42대 단장이셨던 민경 동덕과의 연락을 시작으로 작년에는 43대 대학생단의 부단장을 맡아 많은 선후배 동덕들과 자리를 가지며 천도교 대학생단만의 색깔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를 계기로 44대 대학생단 단장이 되어 많이 부족하지만 1년간의 시간 동안 더 많은 청소년 동덕들이 대학생단이 될 수 있게, 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덕들을 모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따스한 봄날 한강교구에서 진행한 정기모임부터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대학생단과 청년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치렀던 어린이날, 경기도 지역에 거주하는 천도교 어린이 동덕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경기한울학교, 여러 종교 교류 캠프 등 다양한 경험들과 전국의 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작년은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기념해 많은 기념식과 기도식에 대학생단이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현도기념일과 인일기념일에 합창과 공연을 하고 사회문화관에서 진행했던 수운대신사 피체노정과 봉사활동에도 참여해 단순히 정기모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사회참여 활동도 함께 할 수 있어서 뜻깊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1년간의 활동을 돌아볼 수 있었던 대학생단 송년회와 청년회원들과 함께 진행한 부산에서의 개벽제까지 정말 쉼 없이 많은 활동들을 진행했던 날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값지고 소중했습니다. 단장이라는 직책을 맡으면서 때로는 책임감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고, 생각처럼 되지 않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했던 동덕들과 선배, 후배 동덕들이 있었기에 이 모든 순간이 더욱 의미 있었습니다. 함께 웃고, 고민하고, 때로는 어려움을 나누며 보낸 시간들이 앞으로도 제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따뜻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단장에서 물러나지만, 청년회원으로서, 대학생단을 졸업한 선배로서 후배분들이 성장하고 더 많은 교인들로 채워지는 대학생단을 기대하며 뒤에서 열심히 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대학생단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 힘이 되어드릴 수 있는 선배가 되겠습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신 모든 동덕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포덕 166년 3월 27일 44대 대학생단 단장 조영은 심고 사진 조영은(본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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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떡처럼 얘기해도 찰떡처럼 알아듣기언젠가 한 미국인 교수가 '또라이'에 대해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 인생에서 기쁜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 한마디로 재수 없는 사람들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종종 우리 곁에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위축되고 분노하며 기분을 망쳐야 할까? 최근 나는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수련 41일째입니다"라고 말했다. 나 자신이 너무 기특하고 대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런 거 아무리 많이 해도 다 소용없다." 순간 '이런 또라이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함께 기뻐해 주고 격려해 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찬물을 끼얹다니. 처음에는 기분이 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분은 아마도 수련을 많이 하고도 인격적으로 훌륭하지 못한 사람을 겪어 본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단순히 부러워서 한 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말을 원래 개떡같이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상처받고 위축될 것인가? 아니다. 나는 상처받고 위축되고, 휘둘리는 대신, 내 내면을 들여다 보고 내 한울님 지키고, 유쾌하게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보면 또라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지 않는가? 적어도 '나는 저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누군가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즐겁게 한 걸음 더 나아가자. 글, 둥지가 되어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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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이 세상에 태어난 은적암에 다녀오다사람에게는 정말 연(緣)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천도교와 연을 맺게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저 인사동과 안국동을 오가며 첨탑이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특이해 기억에 남아 있던 수운회관에, 오랜 지인이었던 천도교 동두천교구 연암 강정환 교구장의 초대로, 2024년 12월 수운 최제우 대신사 탄신 200주년 행사에 참석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지나간 역사로만 알고 지내던 동학에 관해 공부해보자는 생각에, 포덕 166년에 천도교종학대학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4시간씩 동경대전과 주역을 배우며 동학과 천도교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경대전과 주역이 한자로 되어 있는 데다, 한자를 이해한다 해도,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참뜻을 이해하기는 정말 버거웠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 수운 최제우 대신사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었다. 그는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양반인데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던 시기였다. 게다가 반상의 구분이 엄격한 시대에 그는 크게 깨달은 뒤 먼저 자신의 여종 둘을 해방한다.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고, 다른 사람은 며느리도 삼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링컨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대통령 신분으로 노예해방에 반대하는 남부와 몇 년간 남북전쟁을 했다. 하지만 수운 최제우는 이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기반으로, 봉건적 착취와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에서 동학을 창도했다. 이것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면서, 성실과 신의로서 새롭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었으며 어지러웠던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하지만 수운 대신사의 동학에 동조하는 동학교도들이 늘어나자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유림의 질시와 관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졌다. 이를 피해 자신이 주장한 바를 글로써 남기고자 1861년 겨울에 남원의 은적암에 은거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동학을 밝히는 동학론(논학문)을 집필하고,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의 내용을 정리하여 ‘동학’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번에 대신사께서 천도교의 귀한 경전들을 집필하신 남원의 은적암으로 성주현 교수님과 수업을 같이 듣는 동덕들과 함께 현장학습을 다녀왔다. 선국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길을 오르니 은적암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서울교구가 세운 “은적암 터’ 안내판과 남원 문화원에서 세운 교룡산 산신단 유래비 그리고 “독립선언서 대표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대종사 첫 출가 성지”란 비목이 서 있었다. 은적암 터 안내판에는 “이곳은 제1세 교조인 대신사께서 관의 탄압을 피해 포덕 2년(신유년, 단기 4194년) 12월 그믐날에 오셔서 은거하시던 곳이다. 대신사께서는 이곳 덕밀암을 은적암이라 이름하시고 머무르시며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 등을 집필하셨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조금 안쪽으로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음각된 암벽만이 그곳이 은적암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은적암 터에 도착하자마자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주문 13자(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를 암송하며 걸었다. 수운 대신사님의 체취를 오롯이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고, 한울님과 하나가 되는 나만의 의식을 치렀다. 은적암을 떠나면서 든 생각은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6개월 이상을 은둔하며 처음으로 동학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을 집필하고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정리한 동학의 성지인 이곳이 역사적인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이곳 은적암 터에서 내 안에 모신 한울님께 진심으로 간청드렸다. 글, 황규만(종학대학원 수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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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단편소설 '거룩한 이의 죽음'을 듣고춘원 이광수가 대신사님의 순도를 개벽지에 단편소설로 게재한 것만 보아도 천도교를 보통사람뿐만 아니라, 학자나, 지식인, 저명인사까지도 믿거나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소설이라, 역사적 사실이 허구적으로 서술된 점이 매우 아쉽습니다. 소설 속에는 수운 대신사(水雲 大神師)님이 경주 서면 박대여와 부인 김씨 집에서 머물다 해월신사님이 찾아뵌 후, 관원에게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 갇혀 경상감사 서헌순에게 네 차례 고문을 받아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천도교약사(천도교중앙총부 출판부. 2006)에는 '임술년 1862년 12월 10일 새벽에 선전관 정운구가 용담정을 급습하여 대신사, 박씨부인, 큰아들 세정, 그리고 제자들을 포함해서 23명을 체포, 대구 감영에 가두고 해월선생님께서 현풍도인 곽덕원의 고용인으로 변장, 옥리에게 재물을 주어 대신사님에게 사재밥을 드리며 뵙자, 대신사께서 담뱃대를 하나 주었는데, 그 속에는 '등불이 물 위에 밝았으니 틈새가 없고 기둥이 마른것 같으나 힘은 남아 있도다(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라는 시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필자는 이를 '기둥은 말랐으나 힘은 남아 있다', '기둥은 말라버린 모습이지만, 여전히 힘은 남아 있다'. 즉 당신은 죽어가지만, 동학은 살아 여전히 이어간다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약사에는 '나는 순히 천명을 받을 것이니 너는 멀리 달아나라(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되어 있는데,(천도교약사 42~44쪽 참조) 소설 속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유튜브 '책 읽어주는 여자'를 통해 해월 선생님의 용시용활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포덕의 방법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시, 소설, 수필 같은 문학이나, 미술, 음악 등 예술을 인터넷이나 유투브를 통해 천도교의 시천주 신앙을 널리 알리는 방법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유튜브 '책을 읽어주는 여자'를 통해 수운 대신사(거룩한 이의 죽음)의 순도를 5년 동안 이십육만 명이 들었다는 것은 과히 충격적입니다. 이처럼 포덕의 매체도 중요하지만, 포덕의 내용, 컨텐츠가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내용을 만드는 전문가가 절실하다고 여깁니다. 신태인 교구장 운암 오제운 심고 ※ 『천도교약사』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일용행사가 도> 코너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와 체험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쓴 수기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개인의 주관적 견해와 체험이 담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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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핀 벚꽃처럼 우리네 마음도상주해수욕장 가는 길목에 활짝 핀 벚꽃입니다. 아래 사진엔 상주전교실 입간판이 선명한데 그 옛날에는 전교실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활짝 핀 벚꽃처럼 밝고 아름답게 천도교 운수가 밝아지기를 기원해봅니다. 만개한 벚꽃처럼 우리네 마음도 밝고 화사한 봄같이 화해나기를 기원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글 時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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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새벽수련을 마치며경전을 좀더 정성스럽게 봉독하며 스승님들께서 하시고 싶으셨던 뜻을 잘, 제대로 새겨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저런 공부를 하지만 그 처음에도 끝에도 스승님들의 말씀이 진리에 닿아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도 나의 공경을 통해 만물의 공경이 실현되기를 심고해봅니다. 지금ㆍ오늘ㆍ여기의 나의 삶이 또 다른 새날을 만듭니다. 우린 한울님이니까요. 감사한 새날입니다. 함께 할 동덕님들이 있어 가능합니다. 고맙습니다. 인화당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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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동상과 마주치면탄핵 집회에서 종로를 행진할 때마다 녹두장군 동상과 마주치면 마음이 아프면서 기쁘기도 했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 늘 스스로에게 묻고 함께 답을 찾아 나가겠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날이네요. 자유롭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천도교한울연대 사무처장 신해 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