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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이 참 요상하다. 이런 제목은 낚싯밥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현실에서건 글에서건 낚시를 모른다. 물살이(‘물고기’의 생명어)의 존엄성과 존중을 대대적으로 펼칠 때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우리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
이 말을 듣고(읽고) 나는 살아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灵)의 적극적인 표현은 형상이 있는 것이고 소극적인 섭리는 형상이 없는 것이다”이다. 존재의 본령은 형상이 없다. 형상 있음은 한시적이다. 정해진 역할을 위해 형상을 띈 것이다.
잠수부가 물에 들 때 잠수복을 입는 것과 같다. 일이 끝나면 잠수복을 벗는다. 우주인이 우주에서 유영할 때 입는 우주복을 지구에 귀환해서도 계속 입고 다닌다면 미친놈(년) 소리를 듣는다. 죽고 사는 건 그런 것이다. 우리는 잠시 오욕칠정과 희노애락이라는 지구복은 입고 지구에 머무는 존재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자. 엊그제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동행한 동료와 “살아서 죽자”라고 의기투합했다.
생전 장례식을 치르자고 했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것을 애벌레가 나방이 되고 나방이 번데기가 되는 변환에 비하면 이해가 쉽다.
태어날 때를 보자. 숨을 어디로 쉬는가? 엄마 탯줄로 쉰다. 밥도 그렇다. 태어나면 어떻게 되는가? 한순간에 변한다. 숨은 허파로 쉬고 밥(젖)은 입으로 먹는다. 혁명적인 변화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안다. 누구나 다 안다. 알면서 모른 척한다. 모르면서도 아는 척한다.
이럴 때는 다중우주론이 적격이다. 상상이 가능한 모든 형태로 우주가 존재하듯이 사람이 죽으면 상상이 가능한 모든 형태로 사후세계는 펼쳐진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가? 그러면 죽어보라. 바로 알 수 있다.
우리가 생전 장례식을 말한 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 세상천지에 어떻게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이런 식으로 쓰레기 같은 국적도 알 수 없는 음식을 내놓는단 말인가? 식어 빠진 싸구려 돼지비계 몇 쪽을 그것도 일회용 접시에 담아 내놓는가? 한 사람 일어설 때마다 쓰레기가 한 보따리다. 분리수거도 안 된 채 쓰레기통으로 간다.
그토록 생태적으로 살았고, 유기농 포도 농사를 알뜰히도 짓던 그 후배는 절대 님들에게 이런 식으로 허접한 음식을 일회용품 식기로 대접할 사람이 아니다. 장례식장이면은 으레 그래도 되는가?
생전 장례식을 한다면야 완전 유기농으로 플라스틱과 비닐이나 일회용품은 100미터 이내 접근 금지! 그리고 죽는 사람과 죽음을 소재로 질펀하게 잡담을 늘어놓는 장례식을 치를 수 있다.
둘째가 중요하다. 애벌레가 나방이 되듯, 생전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삶의 전환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신성의(영적) 존재로 전환한다. 나는 지인의 생전 장례식을 이렇게 치른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 살아서 죽자.
목암 전희식('밥은 하늘입니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