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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반공포로의 활동

기사입력 2023.06.2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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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공포로석방 7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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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태극기와 궁을기를 앞세우고 판문점을 나서는 천도교 포로(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되는 해이고, 정전협정이 조인된 지 70주년, 반공포로 석방 70주년을 맞는 의미있는 해이다.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는 험난한 여정을 맞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38선 분할점령은 자주국가와 통일국가 건설에 앞장섰던 천도교단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해방 공간에서 자주적 국가, 통일 국가를 주장하던 천도교단은 이념의 굴레에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반공포로 석방 70주년을 맞아 험난했던 한국전쟁 시기 북한 출신 천도교 포로의 발생과 수용소 에서의 활동, 그리고 반공포로 석방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천도교 포로의 규모와 신앙 생활 

    해방 당시 38선 이북의 북한에 천도교인의 2/3 이상이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천도교인들도 북한군으로 차출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으로 포로로 수용된 약 14만 명 가운데 마지막까지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약 35,698명이었고 이 가운데 천도교 포로는 약 4천 명으로 추산된다.

    먼저, 광주수용소에는 제2수용소와 제3수용소에 천도교종리원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김응몽은 제3수용소의 천도교인이 처음에 100명이었으나 포덕하여 500명 정도까지 늘어났고, 제2수용소는 더 활발하였 다고 하였으나 제3수용소와 같이 500명으로 계산하여총 1,000명으로 추계하였다. 둘째, 논산수용소는 제2수 용소의 포로 명부에 올라 있는 1,253명과 성기남, 오용삼, 양제호 등이 수용되었던 제3수용소의 천도교대대인 7대대와 다른 대대의 인원을 합해 850명으로 잡아 총 2,103명으로 추계하였다. 셋째, 부산의 가야수용소에는 B대대에 천도교종리원이 구성되어 있었고 다른 대대의 천도교 포로를 합치면 약 600명으로 추산된다. 부산 거제리 병원수용소는 『신인간』의 기사를 통해 10여 명이 확인되며, 길두만의 증언으로 2개 대대에 종리원이 구성되어 각각 수십 명의 교인이 있었다고 해 약 100명의 천도교 포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넷째, 마산포로수 용소에는 김택룡을 책임자로 52명의 포로가 있었다는 명부가 천도교 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 영천과 대구의 포로수용소의 천도교계 포로는 확인되지 않는 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약 4천 명의 송환거부 천도교 포로, 곧 천도교 반공포로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들은 어떻게 천도교 포로임을 알렸을까? 각 수용소에 산재해 있던 천도교 포로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서로를 확인하고 규합해나갔다.

     

    (A) (부산 수영대밭수용소에서) 저마다 노래를 한 마디씩 부르는데내 차례에 돌아오자 나는 천덕송(天徳頌)을 한 곡 불렀다. 그랬더니 이곳 저곳에서 몇 사람이 천덕송을 따라 부른다. 그리해서 내가 있는 천막 안에서는 5, 6명의 천도교인을 찾아냈다. 그 후 서로 연락하여 수십 명의 천도교인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경비로 있는 사람도 있었고 중대간부로 있는 교인도 있었다.(김응몽의 글) (B) 그 다음에 여기저기서 왔다 갔다 하며 알아봤더니 바로 모잘 썼는데 궁을 마크를 새겨서 쓴 사람들이 있어 …… 궁을 마크를 단 사람들이 있더라구. 그래 그 사람들을 접촉을 했지요, 그 사람들을 보고(이성운 구술) (C) 근데 내가 들어가 가지구 심문하는 사람하고 얘기를 하다가 천도 교라고 그랬더니 그 뒤에 앉았던 사람이 “야 너 천도교야?”그래요. “예 천도교입니다.”, “ 너 일루 나와 봐” 그래서 그 앞으로 갔어요, 그게 그 감찰대 부대장이에요. 이동찬 씨라고 그분이 그 후에도 나하구 막역한 관계에 있었는데 그분이 “너 천도교 했어?” 그래요, “예, 천도교 했습니다.”

    “1세 교조가 누구야?” “아 수운대신사입니다.” “2세 교조는?” “해월신 사입니다.” “어 요 새끼 진짜 하나 왔네” 그러는 거예요. “하하하, 너 일루 나와 봐” 그리고 나서 감찰대 쇼리(급사)로 들어간 거예요.(이창번 구술)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같은 신앙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수용소에서 노래를 부르는 과정에서 천덕송을 같이 부르면서 수십 명의 천도교인을 확인하거나 모자에 뺏지를 달거나 옷에 궁을 모양을 그려 자신이 천도교인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수용소의 감찰대 등 포로 간부가 천도교를 신앙하고 있을 경우 에는 천도교인을 규합하기가 수월했다. 이렇게 모인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의 한 곳에 모여 시일식을 보고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51년 여름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수용소의 이념 대결이 심화되었다. 이 와중에서 포로수용소를 장악하기 위한 친공 포로에 의한 반공포로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 는데 대표적 사건인 ‘9.17폭동’이었다. 특히 85수용소의 9·17폭동은 전형적인 천도교 포로 학살 사건이었다. 사건 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천도교 포로였던 정승도는 이사건의 원인을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천도교 포로가 주도한 혈서 사건 때문이었다고 증언하였다. 평안북도 정주군 안흥면의 천도교종리원 원장으로 활동하다 포로가 된 박찬호는 8월 하순부터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의 혈서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이 송환 거부 혈서에 동참한 이들이 대부분 천도교 포로 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친공 포로들은 박찬호 등 14명의 천도교 포로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이후 포로 심사가 진행되어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내륙의 논산, 광주, 마산, 영천 등지로 분산 수용되었다. 이때부터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당국에 천도교 대대의 설치를 요구했고, 수용소의 정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서 천도교인 포로들로 구성된 천도교 대대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곳이 논산 제2수용소의 7대대였다. 부산의 가야수용소에 서는 B대대에 천도교종리원이 설치된 천도교 대대였다.

    이 대대 500명은 전체가 천도교 포로로 구성되었다.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당국에 건의해 공식적인 천도교 활동을 시작했다.

     

    (D) 1952년 3월경에 천도교인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부터 그 안에 천막을 치고 시일식을 봉행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 그래서 이만하면 천도교 간판을 내걸 수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덕범씨가 미군과 교섭을 해서 시일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천막을 지원받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E) 궁을기를 맨들어 달았던 것도 같고 거스끼니 수용소에서는 그 천막 가빠 그걸 베끼면 잘 베껴진다고 그거 살 베끼면 잘 베껴지는데 그러면 안에 나일론이 참 좋거든 그걸로 거기다 이제 그러가지고 물감 같은 거 같다가 궁을기 만들고 태극기도 그렇게들 만들고 어디서 보급을 받아서 하는 게 아니고 자체적으로(성기남 구술)

     

    위의 증언처럼 수용소 내에 천막을 치고 천도교종리원 간판을 걸었다. 논산 제2수용소의 천도교 대대인 7대 대장은 유래운이 맡았고, 절반이 천도교인이었던 8대대 장도 천도교인 허신관이 맡았다. 제3수용소의 천도교종 리원은 용천 출신 정용기가, 부위원장은 은율 출신의 주제명이 맡았다.

    천도교 대대를 비롯한 수용소의 천도교종리원의 대표적 활동은 천일기념일을 비롯한 각 천도교 기념일을 봉행하는 일이었다. 기념일에는 수백 명의 천도교 포로 들이 한 자리에 모여 수용소 여단장을 비롯한 각급 간부를 초청하여 성대히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식후에는 다채로운 여흥과 잔치도 벌였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포로들을 대상으로 천도교 수련을 시켜 신앙심을 높였고, 천도교 교리 강좌와 교리 연구도 하였다.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반입이 어렵게 되자 천도교 포로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구절을 모아 수용소판 경전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들 천도교 포로는 반공포로 석방과 이후 판문점포로수용소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한의 생활을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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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 태극기와 궁을기를 들고 행진하는 판문점 석방 천도교 포로(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천도교 반공포로의 석방

    1953년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포로의 송환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미국은 전쟁의 종결을 위해 모든 포로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이승만은 수용소 내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1953년 6월 18일을 기해 광주, 논산, 부산, 마산, 영천, 부평, 대구 등지의 수용소에서 반공포로를 일제히 석방했다. 이때 석방된 반공포로는 모두 27,389명으로 송환거부 포로의 16.7%였 다. 천도교 반공포로들도 이때 석방되어 남한에 정착했 다. 석방하지 못한 송환거부 포로들은 정전협정이 조인 되고 중립국송환위원회로 넘겨졌다. 인도군은 중립국송 환위원회의 포로 관리를 맡았고, 수용소는 휴전선 비무장 지대인 판문점에 만들었다.

    판문점에 수용된 북한군 포로 가운데 천도교 포로는 1,667명으로 파악된다. 북한군 포로가 있었던 16개 대대에는 모두 천도교종리원이 구성되어 있었다. 종리원장만 있는 대대도 있었지만 종리원장, 교화부원, 교무부원, 경리부원, 감사원 등 종리원 조직이 잘 갖추어진 곳이 8곳으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100명 이상의 천도교 포로가 있었던 대대가 9개였다.

    이중 3개 대대는 150명 이상의 천도교 포로가 있어 대대원의 1/3 정도를 차지하였다. 이들 대대에서는 천도교 포로가 주도권을 갖고 다양한 종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판문점 시기 천도교 활동으로 대표적인 것이 1953년 12월 24일의 인일기념식 행사였다. 판문 점의 관리를 맡은 인도군은 천도교 활동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 통상적인 시일식 활동은 물론 기념일 활동도 지원하였다. 46대대에서는 인일기념식에 대해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일기념일을 기해가지고 한문언 선생님이 그 1984년 동학 혁명 그걸 주제로 해가지고 ‘봉화’라는 영화[연극]를 3막 4장을 …… 연극을 연출을 했어요.(길두만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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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3> 행진 가운데 궁을기를 들고 행진하는 천도교 포로(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46대대에서는 인일기념식에 기념식 후 동학혁 명을 주제로 한 연극 ‘봉화’를 공연하였다. 당시 연극 공연의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김문제와 한문언이었다. 두 사람은 직접 원고를 쓰고 포로 들에게 배역을 맡겨 1달 동안 연습을 시켜 무대에 올렸다. 포로들은 하루 종일 모여서 연습과 공연 무대 설치 등의 준비를 하였다. 특히 김문제는 포로들의 공연에 필요한 복장과 염색 등의 물품은 당시 수용소에 출퇴근하는 간호사를 통해 조달했다. 이렇게 준비한 연극은 인도군 장교는 물론 다른 종교를 가진 포로들까지 초대해 공연했 는데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46대대의 연극단은 이후 여러 수용소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을 뿐 아니라, 이듬해 1월 석방이된 이후에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고 한다.

    판문점에서의 포로 재심사에서 북한을 택한 포로는 296명이었고 7,604명이 최종적으로 남한을 선택했다.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도 74명이 있었다. 1953년 9월 20일 중립국송환위원회로 넘겨진 포로는 1954년 1월 20일 대한민국 정부에 인계되었다. 판문점에서 석방될 당시 천도교 포로의 활동을 보여주는 사진이 새로 발견되어 여기에서 소개한다.

    <사진 1>은 1954년 1월 21일 판문점의 중립국 송환위원회를 나서는 천도교 포로의 모습이다.

    사진의 가운데에는 태극기가 있고 왼쪽에 궁을기가 있다. 미군이 찍은 이 사진에는 “송환 작전”에서 수천 명의 중국과 북한 공산당 포로들이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를 포기한 후 한국의 포로수용 소(판문점수용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북한군들은 깃발(태극기와 궁을기)을 들고 한국의 UN Point #2(장단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행진합니다. 1954년 1월 21일.”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 2>도 판문점에서 석방되는 천도교 반공 포로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사진 1>과 같은 포로로 보인다. 사진을 보면 헌병 순찰차를 앞세 우고 포로들이 4열 횡대로 헌병들의 인솔에 따라 행진하고 있다. 대열 중앙에 대형 태극기를 들고 오른쪽에는 중형 궁을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다. 위의 사진을 보면 이 행진은 천도교 포로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3>은 앞의 두 사진과는 다른 포로 사진 이다. 우선 포로의 수가 앞의 사진보다 많다. 그리고 앞의 사진 설명은 UN point #2가 목적지라고 했는데 이 사진은 UN point #1로 행선지가 다르 다. 궁을기의 위치도 달라 앞의 사진에는 궁을기를 앞줄에서 들고 행진하고 있는데, 이 사진에서는 궁을기가 가운데에 있다. 또한 궁을기의 크기도 다르다. 앞의 사진에서는 궁을기가 태극기보다 작은데 이 사진에서는 궁을기의 크기가 태극기보다 커 보인다.

    반공포로석방 70주년을 맞아 우리 역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에 천도교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포로수용소의 천도교 포로의 활동에 대해 기억해야 하겠다.

     

    글_성강현 동의대학교 겸임교수(직접도훈, 동천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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