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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태어날 때부터 천도교인은 아니었어요. 결혼을 하고 서울에 살았는데, 우리 영감님이 일요일마다 어디를 가더라고요. 어딜 그렇게 가냐고 물었는데, 이 다음에 알려줄게, 그러고 안 알려주더라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 데려간 곳이...”
남편은 일요일마다 집을 나섰다. 신혼시절 남편을 따라 간 곳이 바로 서울의 천도교중앙대교당이었다. “이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꾸 다니면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남편과는 아홉 살 차이, 남편이 보기에는 ‘아기’같았을 거라고 말하는 이칠순 동덕은 이제 구십을 넘겼지만 매우 정정하셨다. 또랑또랑한 눈빛과 분명한 말씨, 그리고 상냥한 표정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기쁨이 넘쳤다.
남편을 따라 천도교당에 나가기 시작하여 스물 예닐곱에 입교했다. 60년이 넘는 세월 신앙생활을 했다. 영화사 제작부장으로 일했던 남편은 4.19와 5.16라는 시절의 풍파를 맞으며 영화산업이 내리막길을 향하게 되어 이칠순 동덕 스스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힘들었던 젊은 날, 고생도 아픔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때를 회상하면 아련해진다고 말한다.
"내 고생한 얘기를 하면 기도 안 차고 한도 끝도 없습니다. 내가 한복 바느질을 30년 했어요. 내가 벌어서 살림 해 나가고 그렇게 살았죠.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신앙의 힘으로 버틴 거죠. 내가 서울 살다 여기 부산에 내려온지 한 60년 돼요. 이사 오고서 시일식에 한 번도 결석을 안 했어요. 해마다 개근상 타요. 천도교 신앙이 나를 살린 거예요”
매주 시일식 나오시면서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세요?
동덕님들을 만나면 화기애애 하고 시름을 다 잊고 그냥 좋아요. 점심 맛있게 차려줘서 고마운 마음으로 먹고요. 지금 여기서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요. 그런데 아주 건강합니다. 걱정이 없어서 그런가봐요. 교회에 나오면 천덕송을 같이 부르니까 좋지. 옛날에 수련 다닐 때도 많이 불렀거든요. 내가 목소리가 좋다고 잘한다고 그랬어요. 천덕송 부를 때나 경전 봉독 할 때 다들 잘한다고 말해줬어요. 집례도 자주 봤고요. 이제 나이를 먹으니까 숨이 차서 못하지만, 그런 옛날 생각도 나고 참 좋아요. 무엇보다도 동덕님들하고 가족처럼 그렇게 잘 어울리는 게 좋아요.
내가 이제 나이가 많으니까 나한테 그렇게 대접을 안 해줘도 되는데 대우를 너무 극진히 해주니까는 어떤 때는 미안하기도 하고 점심 먹다가 남은 음식 집에 가서 드시라고 또 싸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어떤 때는 너무 미안해서 시일식에 가지 말까 하는 마음도 들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또 그게 아닌 거예요. 아침 5시면 꼭 청수를 모시고 그러고 나면 교회 가야지, 하는 마음이 생겨요. 또 시일식 아침마다 우리 아파트 앞에 나를 데리러 오시는 분도 계세요.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
평소에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계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또 신앙생활을 통해 선생님의 삶을 변화시킨 경험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나는 바느질을 오래 했는데, 주문을 외워가면서 했어요. 그러면 주변의 사람들이 뭘 맨날 그렇게 중얼거리고 앉아있냐고 물어요. 그럼 저는, 당신 내들도 해보시라고 해요.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따라해보라고요. 그럼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죠. 천도교라는 교회가 있는데 그게 주문이다. 예수교에서 하나님, 아멘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거다. 그렇게 말해주곤 했죠. 주문을 외우면 잡념이 하나도 없어져요. 잠 안 올 때도 주문을 외우면은 그냥 어느 결에 잠이 오는지 그냥 잠들고 말죠. 제 증손녀가 이제 4살인데 장주를 목에 걸고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그래요.
저는 우리 신앙이 실천이라고 생각해요. 실천이라는 게 딴 게 없죠. 사회생활 하면서, 남에 대해 흉 안 보는 것. 그리고 나는 그냥 항상 기뻐요. 속상할 일도 없고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에도 신앙의 힘이 컸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수련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도 있으세요?
우리 영감님이 말년에 많이 아팠어요. 내가 11년동안 대소변을 받아냈죠. 그래서 정부에서 상도 받았어요. 참 힘들 때도 많았는데 지금은 그 시기가 다 지나갔어요. 돌아가신 영감님은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어요. 덕분에 저도 수련을 많이 다녔죠. 영감님이 못 가면 저 혼자라도 갔으니까요.
참 신비한 일도 있었어요. 우이동에서 처음 수련을 하는데, 내가 수련이라는 걸 알지도 못하면서 주문을 외웠어요. 그렇게 현송을 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영감님이 아래 위로 정장을 하고 내가 수련을 하고 있는 그 복판으로 들어오더니 어느 분과 대화를 하면서 뭔가를 주고는 나가더라고요. 나는 졸지도 자지도 않았는데 마치 꿈처럼, 현몽으로 나타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내가 수도원장님한테 가서, 그 말씀을 드렸더니,
방금 편지가 왔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때는 전화도 없을 때잖아요. 집사람이 처음 수련회에 갔으니까 잘 지도해달라는 편지가 왔다면서 보여주더라고요. 그런 현몽이 진짜 다 있더라고요.
참 신기했어요.
천도교인으로 사시면서 선생님의 삶에 어떤 점이 가장 좋은 점으로 남아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또 다른 분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마음공부를 하면 좋은지 그 비결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우리 친구들한테도 그러거든요. 힘든 일이 있어도 하는 청수 한 그릇이면 뭐든지 해결이 난다고요. 우리 영감님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하더라고요. 나는 살아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죽는 거니까 나 죽으면은 아무것도 다 필요 없고 청수 한 그릇에 심고만 해달라고 하셨어요. 영감님 돌아가시고 나서 그 뜻에 따라서 지금까지 청수 한 그릇으로 끝이에요. 참 열심히 천도교 신앙을 했어요.
저는 9시 기도식과 청수를 지극히 모십니다. 월성미, 연성미도 한 번도 안 빠졌어요.
정성이 지극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딸 하나 낳아 키우면서 딸을 이 부산 촌구석에서 서울 이화여대 대학원까지 졸업시켰고 교수까지 됐으면 내 할 일은 다 했다 싶더라고요.
마음공부는요, 우리는 천도교인이잖아요. 주문 외우고 마음을 비우고 사는 거예요. 그저 마음을 비우고 힘들어도 되겠지, 되겠지 하면 되더라고요. 정말로 그렇게 되더라고요.
지난 해 대동교구에서는 이칠순 어르신의 90살 생일잔치가 열렸다.
인터뷰 내내 꽃처럼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에서 하루에 한 송이 그렇게 삼백 예순 송이, 그렇게 90년을 살아오신 수천 수만의 꽃송이가 활짝 피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눈이 부시게, 환한 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