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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부모 공경 캠페인, 전주교구에서6월25일 전주교구(교구장 윤철현)에서 시일식 후 2023 천지부모공경캠페인 환경 교육이 진행되었다. 이윤영 동학기념관장의 환경설교, 김의동 환경전문 강사의 천도교인과 탄소중립 그리고 자원순환 실천 강의, 정진숙 지은당의 환경퀴즈, 커피박키트 체험실습으로 이 어졌다. 윤철현 교구장은 행사 후 “덕분에 즐거운 시간되었습니다. 강의 내용도 유익했습니다. 선물도 많이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인들께서 모두 행복해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전국교구장 단톡방에 감사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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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반공포로의 활동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되는 해이고, 정전협정이 조인된 지 70주년, 반공포로 석방 70주년을 맞는 의미있는 해이다.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는 험난한 여정을 맞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38선 분할점령은 자주국가와 통일국가 건설에 앞장섰던 천도교단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해방 공간에서 자주적 국가, 통일 국가를 주장하던 천도교단은 이념의 굴레에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반공포로 석방 70주년을 맞아 험난했던 한국전쟁 시기 북한 출신 천도교 포로의 발생과 수용소 에서의 활동, 그리고 반공포로 석방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천도교 포로의 규모와 신앙 생활 해방 당시 38선 이북의 북한에 천도교인의 2/3 이상이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천도교인들도 북한군으로 차출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으로 포로로 수용된 약 14만 명 가운데 마지막까지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약 35,698명이었고 이 가운데 천도교 포로는 약 4천 명으로 추산된다. 먼저, 광주수용소에는 제2수용소와 제3수용소에 천도교종리원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김응몽은 제3수용소의 천도교인이 처음에 100명이었으나 포덕하여 500명 정도까지 늘어났고, 제2수용소는 더 활발하였 다고 하였으나 제3수용소와 같이 500명으로 계산하여총 1,000명으로 추계하였다. 둘째, 논산수용소는 제2수 용소의 포로 명부에 올라 있는 1,253명과 성기남, 오용삼, 양제호 등이 수용되었던 제3수용소의 천도교대대인 7대대와 다른 대대의 인원을 합해 850명으로 잡아 총 2,103명으로 추계하였다. 셋째, 부산의 가야수용소에는 B대대에 천도교종리원이 구성되어 있었고 다른 대대의 천도교 포로를 합치면 약 600명으로 추산된다. 부산 거제리 병원수용소는 『신인간』의 기사를 통해 10여 명이 확인되며, 길두만의 증언으로 2개 대대에 종리원이 구성되어 각각 수십 명의 교인이 있었다고 해 약 100명의 천도교 포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넷째, 마산포로수 용소에는 김택룡을 책임자로 52명의 포로가 있었다는 명부가 천도교 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 영천과 대구의 포로수용소의 천도교계 포로는 확인되지 않는 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약 4천 명의 송환거부 천도교 포로, 곧 천도교 반공포로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들은 어떻게 천도교 포로임을 알렸을까? 각 수용소에 산재해 있던 천도교 포로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서로를 확인하고 규합해나갔다. (A) (부산 수영대밭수용소에서) 저마다 노래를 한 마디씩 부르는데내 차례에 돌아오자 나는 천덕송(天徳頌)을 한 곡 불렀다. 그랬더니 이곳 저곳에서 몇 사람이 천덕송을 따라 부른다. 그리해서 내가 있는 천막 안에서는 5, 6명의 천도교인을 찾아냈다. 그 후 서로 연락하여 수십 명의 천도교인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경비로 있는 사람도 있었고 중대간부로 있는 교인도 있었다.(김응몽의 글) (B) 그 다음에 여기저기서 왔다 갔다 하며 알아봤더니 바로 모잘 썼는데 궁을 마크를 새겨서 쓴 사람들이 있어 …… 궁을 마크를 단 사람들이 있더라구. 그래 그 사람들을 접촉을 했지요, 그 사람들을 보고(이성운 구술) (C) 근데 내가 들어가 가지구 심문하는 사람하고 얘기를 하다가 천도 교라고 그랬더니 그 뒤에 앉았던 사람이 “야 너 천도교야?”그래요. “예 천도교입니다.”, “ 너 일루 나와 봐” 그래서 그 앞으로 갔어요, 그게 그 감찰대 부대장이에요. 이동찬 씨라고 그분이 그 후에도 나하구 막역한 관계에 있었는데 그분이 “너 천도교 했어?” 그래요, “예, 천도교 했습니다.” “1세 교조가 누구야?” “아 수운대신사입니다.” “2세 교조는?” “해월신 사입니다.” “어 요 새끼 진짜 하나 왔네” 그러는 거예요. “하하하, 너 일루 나와 봐” 그리고 나서 감찰대 쇼리(급사)로 들어간 거예요.(이창번 구술)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같은 신앙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수용소에서 노래를 부르는 과정에서 천덕송을 같이 부르면서 수십 명의 천도교인을 확인하거나 모자에 뺏지를 달거나 옷에 궁을 모양을 그려 자신이 천도교인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수용소의 감찰대 등 포로 간부가 천도교를 신앙하고 있을 경우 에는 천도교인을 규합하기가 수월했다. 이렇게 모인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의 한 곳에 모여 시일식을 보고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51년 여름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수용소의 이념 대결이 심화되었다. 이 와중에서 포로수용소를 장악하기 위한 친공 포로에 의한 반공포로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 는데 대표적 사건인 ‘9.17폭동’이었다. 특히 85수용소의 9·17폭동은 전형적인 천도교 포로 학살 사건이었다. 사건 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천도교 포로였던 정승도는 이사건의 원인을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천도교 포로가 주도한 혈서 사건 때문이었다고 증언하였다. 평안북도 정주군 안흥면의 천도교종리원 원장으로 활동하다 포로가 된 박찬호는 8월 하순부터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의 혈서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이 송환 거부 혈서에 동참한 이들이 대부분 천도교 포로 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친공 포로들은 박찬호 등 14명의 천도교 포로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이후 포로 심사가 진행되어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내륙의 논산, 광주, 마산, 영천 등지로 분산 수용되었다. 이때부터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당국에 천도교 대대의 설치를 요구했고, 수용소의 정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서 천도교인 포로들로 구성된 천도교 대대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곳이 논산 제2수용소의 7대대였다. 부산의 가야수용소에 서는 B대대에 천도교종리원이 설치된 천도교 대대였다. 이 대대 500명은 전체가 천도교 포로로 구성되었다.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당국에 건의해 공식적인 천도교 활동을 시작했다. (D) 1952년 3월경에 천도교인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부터 그 안에 천막을 치고 시일식을 봉행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 그래서 이만하면 천도교 간판을 내걸 수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덕범씨가 미군과 교섭을 해서 시일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천막을 지원받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E) 궁을기를 맨들어 달았던 것도 같고 거스끼니 수용소에서는 그 천막 가빠 그걸 베끼면 잘 베껴진다고 그거 살 베끼면 잘 베껴지는데 그러면 안에 나일론이 참 좋거든 그걸로 거기다 이제 그러가지고 물감 같은 거 같다가 궁을기 만들고 태극기도 그렇게들 만들고 어디서 보급을 받아서 하는 게 아니고 자체적으로(성기남 구술) 위의 증언처럼 수용소 내에 천막을 치고 천도교종리원 간판을 걸었다. 논산 제2수용소의 천도교 대대인 7대 대장은 유래운이 맡았고, 절반이 천도교인이었던 8대대 장도 천도교인 허신관이 맡았다. 제3수용소의 천도교종 리원은 용천 출신 정용기가, 부위원장은 은율 출신의 주제명이 맡았다. 천도교 대대를 비롯한 수용소의 천도교종리원의 대표적 활동은 천일기념일을 비롯한 각 천도교 기념일을 봉행하는 일이었다. 기념일에는 수백 명의 천도교 포로 들이 한 자리에 모여 수용소 여단장을 비롯한 각급 간부를 초청하여 성대히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식후에는 다채로운 여흥과 잔치도 벌였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포로들을 대상으로 천도교 수련을 시켜 신앙심을 높였고, 천도교 교리 강좌와 교리 연구도 하였다.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반입이 어렵게 되자 천도교 포로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구절을 모아 수용소판 경전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들 천도교 포로는 반공포로 석방과 이후 판문점포로수용소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한의 생활을 준비하였다. 천도교 반공포로의 석방 1953년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포로의 송환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미국은 전쟁의 종결을 위해 모든 포로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이승만은 수용소 내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1953년 6월 18일을 기해 광주, 논산, 부산, 마산, 영천, 부평, 대구 등지의 수용소에서 반공포로를 일제히 석방했다. 이때 석방된 반공포로는 모두 27,389명으로 송환거부 포로의 16.7%였 다. 천도교 반공포로들도 이때 석방되어 남한에 정착했 다. 석방하지 못한 송환거부 포로들은 정전협정이 조인 되고 중립국송환위원회로 넘겨졌다. 인도군은 중립국송 환위원회의 포로 관리를 맡았고, 수용소는 휴전선 비무장 지대인 판문점에 만들었다. 판문점에 수용된 북한군 포로 가운데 천도교 포로는 1,667명으로 파악된다. 북한군 포로가 있었던 16개 대대에는 모두 천도교종리원이 구성되어 있었다. 종리원장만 있는 대대도 있었지만 종리원장, 교화부원, 교무부원, 경리부원, 감사원 등 종리원 조직이 잘 갖추어진 곳이 8곳으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100명 이상의 천도교 포로가 있었던 대대가 9개였다. 이중 3개 대대는 150명 이상의 천도교 포로가 있어 대대원의 1/3 정도를 차지하였다. 이들 대대에서는 천도교 포로가 주도권을 갖고 다양한 종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판문점 시기 천도교 활동으로 대표적인 것이 1953년 12월 24일의 인일기념식 행사였다. 판문 점의 관리를 맡은 인도군은 천도교 활동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 통상적인 시일식 활동은 물론 기념일 활동도 지원하였다. 46대대에서는 인일기념식에 대해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일기념일을 기해가지고 한문언 선생님이 그 1984년 동학 혁명 그걸 주제로 해가지고 ‘봉화’라는 영화[연극]를 3막 4장을 …… 연극을 연출을 했어요.(길두만 구술) 46대대에서는 인일기념식에 기념식 후 동학혁 명을 주제로 한 연극 ‘봉화’를 공연하였다. 당시 연극 공연의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김문제와 한문언이었다. 두 사람은 직접 원고를 쓰고 포로 들에게 배역을 맡겨 1달 동안 연습을 시켜 무대에 올렸다. 포로들은 하루 종일 모여서 연습과 공연 무대 설치 등의 준비를 하였다. 특히 김문제는 포로들의 공연에 필요한 복장과 염색 등의 물품은 당시 수용소에 출퇴근하는 간호사를 통해 조달했다. 이렇게 준비한 연극은 인도군 장교는 물론 다른 종교를 가진 포로들까지 초대해 공연했 는데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46대대의 연극단은 이후 여러 수용소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을 뿐 아니라, 이듬해 1월 석방이된 이후에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고 한다. 판문점에서의 포로 재심사에서 북한을 택한 포로는 296명이었고 7,604명이 최종적으로 남한을 선택했다.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도 74명이 있었다. 1953년 9월 20일 중립국송환위원회로 넘겨진 포로는 1954년 1월 20일 대한민국 정부에 인계되었다. 판문점에서 석방될 당시 천도교 포로의 활동을 보여주는 사진이 새로 발견되어 여기에서 소개한다. <사진 1>은 1954년 1월 21일 판문점의 중립국 송환위원회를 나서는 천도교 포로의 모습이다. 사진의 가운데에는 태극기가 있고 왼쪽에 궁을기가 있다. 미군이 찍은 이 사진에는 “송환 작전”에서 수천 명의 중국과 북한 공산당 포로들이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를 포기한 후 한국의 포로수용 소(판문점수용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북한군들은 깃발(태극기와 궁을기)을 들고 한국의 UN Point #2(장단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행진합니다. 1954년 1월 21일.”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 2>도 판문점에서 석방되는 천도교 반공 포로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사진 1>과 같은 포로로 보인다. 사진을 보면 헌병 순찰차를 앞세 우고 포로들이 4열 횡대로 헌병들의 인솔에 따라 행진하고 있다. 대열 중앙에 대형 태극기를 들고 오른쪽에는 중형 궁을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다. 위의 사진을 보면 이 행진은 천도교 포로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3>은 앞의 두 사진과는 다른 포로 사진 이다. 우선 포로의 수가 앞의 사진보다 많다. 그리고 앞의 사진 설명은 UN point #2가 목적지라고 했는데 이 사진은 UN point #1로 행선지가 다르 다. 궁을기의 위치도 달라 앞의 사진에는 궁을기를 앞줄에서 들고 행진하고 있는데, 이 사진에서는 궁을기가 가운데에 있다. 또한 궁을기의 크기도 다르다. 앞의 사진에서는 궁을기가 태극기보다 작은데 이 사진에서는 궁을기의 크기가 태극기보다 커 보인다. 반공포로석방 70주년을 맞아 우리 역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에 천도교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포로수용소의 천도교 포로의 활동에 대해 기억해야 하겠다. 글_성강현 동의대학교 겸임교수(직접도훈, 동천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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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회, 2023년도 ‘답게살겠습니다’ 운동 전개천도교여성회본부(회장 박징재)는 6 월 24일 한국사회평화협의회의 ‘2023 년 답게살겠습니다’ 운동의 시작으로 세미나와 탄소중립 실천 캠페인을 전개 했다. 세미나는 원불교 소태산 기념관에서 ‘지구인답게 일상 속 녹색 발자국 만들기’ 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또한 2023년 연간 사업 소개 및 7대 종단 신도들은 ‘탄소중립 실천 다짐문’을 낭독하고, 강연을 들으며 지구 위기 대응에 앞장서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흑석역 1번 출구 앞에서 진행된 탄소중립 실천 캠페인은 공기정화에 효과 적인 식물 나눔 및 체험 프로그램으로 운영됐다. 탄소중립 실천 다짐서 작성시 식물과 교환해 주는 반려식물 나눔 행사에는 약 500명의 시민이 참여해 탄소중립 실천을 약속하였으며, 한국사회평화협의회 7대 종단 대표들은 탄소 중립 피켓 퍼포먼스를 통해 개개인의 사회적 참여를 촉구했다. 또한 공병 지참시 세제를 제공하는 리필스테이션과 플라스틱 병뚜껑을 가져올 시 증정품을 제공하는 체험 부스 등을 운영해 일반인들에게 어렵게 다가오던 탄소중립 실천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했다. 한국사회평화협의회 관계자는 “점점 심각해지는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과 다양한 실천 활동을 진행할 예정”이라며 “탄소중립 캠페인의 지속적 관심 부탁드린다”라고 밝혔다. 한편 2018년 설립된 사단법인 한국 사회평화협의회는 한국 종교를 대표하는 7대종단(천도교·유교·불교·개신교·원 불교·천주교·민족종교협의회)의 신도 연합체 단체로 ‘답게살겠습니다’ 운동을 추진하며 사회적으로 대두되는 다양한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방향을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2023년 답게살겠습니다’ 운동은 전년과 같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종교 화합’, ‘이웃사랑’ 캠페인이 진행되며, 특히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온난화 문제를 극복하고자 ‘지구인답게 희망은숲 캠페인’을 비롯한 탄소중립 실천을 촉구하는 다양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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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의 피체노정, 길 위에서 길을 묻다신춘호 박사는 연행노정 전문가로 꼽힌다.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인 그는 방송카메듀서로서 연행노정에 대한 기록 사진을 공공전시한 바 있다. 또 실학박물관, 천안박물관, 심양 총영사관과 TV다큐멘터리 ‘열하일기-길 위의 향연’(촬영·공동연출)을 제작했다. 신 박사는 “길(路·路程)은 단순한 교통로를 넘어 문화와 문화가 교류하고 문명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전통시대 한국과 중국 사이에 600여년 이상의 교류역사가 서려있는 연행노정 또한 인문유대의 현장이자 동아시아 문화로드”라면서 “연행노정은 조선을 벗어나서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였다”고 강조했다. 신 박사는 또 “연행노정 영상기록 작업은 연행록의 내용에 기반한 역사공간 기록”이라면서 “연행노정은 비록 중국에 산재하고 있지만 우리역사의 한 장면이 깃든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의 역사지리에 대한 공간의 변화를 확장해 살펴볼 의미 있는 곳”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신 박사가 연행노정을 주기적으로 관찰하고 변화를 기록한 영상역사학적 가치를 가리킨다. 신 박사는 2000년 8월 연행노정을 처음 답사한 이래 현재까지 연행노정의 변화를 추적해왔다. 노정이라는 키워드로 글을 쓰시던데 어떻게 쓰시게 되었는지? 회사 업무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어요. 문화의 현장, 역사의 현장 프로그램 제작을 자주 하다 보니 관심도 있었고, 원래 문학이나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그 현장을 다녀보는 것을 즐겨했죠. 제 관심사와 맞았어요. 방송대학 TV 카메라 감독님이시죠? 방송대학은 교육 현장에 나올 수 없는 장애인이나 재소자들도 학습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역사의 현장을 찾는 프로그램은 많은 관심을 갖고 시청할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까지 포괄해서 교육의 기회를 줘야하는 것이 방송대학이니 그렇게 맞춰가고 있습니다. 저는 25년동안 방송대학 촬영을 해 왔어요. 교육채널이지만 방송대학교 교육프로그램 제작, 일반인 대상으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제작하니, 학과의 교과목이면서도 일반인들도 많이 좋아하더군요. 동학은 언제 관심있게 보셨나요?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제가 일하는 스타일이 연출자는 카메라를 알아야 하고 촬영은 연출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을 해 오는데, 그렇다 보니 프로그램을 맡아서 나가면 주제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는 습관이 있어요. 동학을 할 때도 다른 사람이 출장을 가야 하는데, 제가 가겠다고 했어요. 특히 동학은 동학 자체보다는 그 당시 전봉준이나 동학의 지도자들에 대해 관심이 있었어요. 역사를 좋아하니까. 그때 관심이 생겼고, 5~6년이 지나고 천도교중앙총부에서 주관한 독립대장정 참가자로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다보니, 그러려면 의병을 공부해야했고, 의병을 공부하다 보니 동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군요. 그렇게 독립대장정 다녀와서 관심이 더 생겼어요. 피체노정이라는 용어 자체도 낯설어요. 피체노정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먼저 관심을 갖게 된 부분은 해월의 피체노정이었어요. 지금은 수운 선생의 피체노정 작업을 하고 있고요. 이후엔 손병희 선생님까지도 순차적으로 계획하고 있어요. 신체가 구속되었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기까지의 여정을 말하는 것인데, 연행노정을 하면서 병자호란 때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의 피로노정, 노예로 끌려가는 노정. 연행 길을 연구하면서 연행에 중첩된 600년 역사에 병자호란, 조선 포로들, 길 위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하게 생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연행이라고 하는, 외교 사신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양한 각자의 시선들로 연행을 바라볼 수 있고 특정한 시기, 대한제국 시절 유럽으로 갔던 사절단까지 시대적으로, 또 인물로 사건으로 다양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피체노정의 경우도 동학의 지도자들 중 특히 수운 선생님 보다는 해월 선생님 이야기가 더 풍부합니다. 선생님에게 길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 전공은 문화콘텐츠학입니다. 저는 길에 대해 논문과 강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길은 단순히 교통로의 의미를 넘어선다고요. 교통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문화가 있고 교류하고 소통하는 공간이 길입니다. 피체노정의 경우도 끌려간 행적뿐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 끌려간 과정에 나룻배가 있는 주막에서 잠시 쉬어가며 호송되고 근처에서 잡힌 사람들이 같이 끌려가고, 길 위에 남긴 역사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요. 주막, 나루, 물길의 풍경들이 어떠했는지를요. 당시의 호송체계를 보면, 관헌이 이동하는 길, 수로 등이 정해졌어요. 뱃길이기도 하고 관로이기도 하고 상인들이 이동하는 무역로이기도 하고요. 피체노정 하나에 예를 들어 최시형 선생이 붙잡혀서 한양까지 압송되던, 조선시대의 사회상, 문화상을 볼 수 있으니 그것까지 보고 싶은 거예요 끌려가고 고난 당한 일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의 문화를 같이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그 당시 문화에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길은 교통로뿐만이 아니라 문화사적 측면에서 볼 수 있어요. 연암 박지원의 일기를 보면 한양에서 북경까지 다녀와서 기록한 것, 길을 가면서 지역마다 문화를 봤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위대한 문학 작품이며 기록물입니다. 단순한 여행기록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책의 가치가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은, 우리의 삶의 영역, 문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 교통로의 의미를 벗어나는 겁니다. ‘동아시아 문화로드’라고 명명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바라보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신춘호는 길 위에서 길을 묻는 사람이다. “최동희 선생을 이야기하려면 최시형 선생 이야기를 해야 하고, 최시형 선생 이야기를 하려면 손병희 선생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수운 최제우 선생을 이야기하려면 해월 최시형 선생의 이야기를 해야겠죠. 과연 이 이야기들을 분리할 수 있을까요? 다 연결됩니다.” 길을 연구하는 사람 신춘호에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 ‘신춘호의 노정’은 어떻게 연결됩니까?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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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도 바다인 곳에서 독립을 꿈꾼 사람들‘뭉우리돌’ 그들은 누구인가 찬란하고 강인한 뭉우리돌의 역사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누가 남았을까 한 자동차 광고에 등장한 독립운동의 섬 소안도, 그 현장을 찍고 있는 사진 작가 김동우의 렌즈가 닿는 시선은 조명 받지 못한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찾아낸다. “발로 쓰는 거잖아요. 이런 이야기는” 기록에 남아 있는 이야기와 만나는 지점은 또 다른 고민이이었다. “논문이나 기록들을 보고 있으면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대중과의 접점에 공백이 있는 것 같아요” 사진제공_김동우 작가님, 작가님의 글에는 한 문장에 많은 이야기, 해석의 여지가 많습니다. 이 책에서는 몇 개국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까? 책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이 책은 세 권의 시리즈 중 첫 번 째 책이고, 총 10개국을 다녔고 이 책에는 4개국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저의 책 《뭉우리돌의 바다》는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발굴하고 기록한 최초의 다큐멘터리입니다. 저는 세계일주를 하던 중 인도 델리 레드포트에서 우연히 그 장소가 한국광복군의 훈련지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도라니, 그것도 우리 독립운동사라니!”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아홉 명의 한국광복군이 인도에서 영국군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웠던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접한 이야기에 저는 번개를 맞은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몰랐던 독립운동의 현장이 얼마나 많았나, 검색을 해 보니 아프리카와 남미 빼고 전 세계에 있었어요. 심지어 호주까지 안창호 선생님이 거쳐가셨더라고요. 러시아, 영국, 프랑스까지. 충격을 받았어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역사였거든요. 마침 잘 됐다, 그럼 이 이야기를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사진 속 인물들이 평생 가슴에 품었을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처음엔 사적지만 기록하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후손이 있으면 만나보고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찾게 된 후손분들은 사적지가 해 주지 못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그 이야기가 저에게 참 소중했어요. 그래서 인물 작업도 시작했어요. 지금껏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으니 그분들에게는 기회가 없었어요. 저를 너무 반가워하셨어요. 또 제게는 자료를 접하는 것과 그분들이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 다르게 다가왔고, 그곳에서 살아온 그분들의 표정 하나 하나가 생생하게 다가와서 마음이 급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이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으면 또 묻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쿠바의 경우 우리와 수교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역사가 묻혀 있거든요. 긴 여정이었겠네요. 책 출간 이후 최근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책 <뭉우리돌의 바다>가 나오기까지 작업을 한 시기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인데, 10개국을 다녔습니다. 이후로 코로나가 터졌어요. 작업은 중단됐고 넋 놓고 있을 수 없고 작업은 해야 하니 그해엔 부산에 방을 얻고 부산에 내려가서 경남 지역에 남아 있는 일본군의 흔적들을 찾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해방 이후 6.25 전쟁 후에 70년이 지나는 동안 무엇을 했나 싶어서요. 먹고 살아야 했고, 민주화도 해야했죠. 그러는 동안 우리가 너무 많은 역사를 지웠습니다. 또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부족했죠. 작가님이 사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그런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현장이 주는 말이 있죠? 제가 이 책에도 썼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공’이 었어요. 비어 있는 공.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비어 있지 않은 공이더라, 서성이면서 이곳이 가진 의미, 사건을 어떻게 담아낼까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그것이 그분들에 대한 예의와 추모였어요. 저는 사진들을 보면서 작가님의 이 작업 자체가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0년 뒤에도 이 사진들은 남을 거니까요. 비어 있는 ‘공’을 가득 채우는 것들이 보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특히 후손들의 사진들을 보면 아버지의 부재가 보이기도 하고, 그 공간이 가진 의미를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을 보면 많은 이야기들이 말을 걸어옵니다. 독립운동의 상징 같은 곳에 살고 있던 아버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의 후손이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것, 저는 그 공간에서 그 인물들을 희미해진 역사, 빛바랜 사진처럼 표현했습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희미해지고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멕시코의 경우 한인들이 7세대까지 내려갔는데, 이분들에게 당신이 코리안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우리가 그 역사를, 그분들을 기억하지 않으면 이 사진처럼 된다는 이야기예요. 집단기억을 가지고 가야만 이 사람들의 삶도 의미가 있을 거예요. 제가 인물사진을 흐릿하게 찍은 이유는 그런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기억이나 인식들이 지워지고 흐릿해지고 있다는 것, 또 이렇게 되어선 안된다는 이런 의도였어요. 우리 역사가 이렇게 흐릿해지고 있다고. 책의 제목이 ‘뭉우리돌의 바다’입니다. 바다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다 바다에서 왔구나, 저 보이지 않는 곳에 집이 있는데, 너무 멀리 왔구나, 나라가 힘이 없어서 데려오지 못했구나, 그리고 저 바다는 벽이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분들은 저 수평선 너머로 얼마나 가고 싶었을까요. 이 책이 첫 번째 시리즈라고 말씀하셨어요. 다음 책은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고려인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이민은 1861년 13가구가 넘어갔던 때를 말합니다. 안중근의 활동, 최재형, 홍범도 이야기, 그리고 1937년 강제 이주되어 중앙아시아로 간 이야기가 다음 책입니다. 사진_기아자동차 광고 스틸컷 현장에 직접 가보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작가님의 사진이 많은 위로를 주기도 합니다. 끝으로 독자들에게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유적지를 소개해주시죠. 거제도에 가면 ‘금포마을’이라는 곳이 있어요. 일본군들이 조선인 징용자를 동원해서 해안진지, 땅굴진지를 만들어 놓은 곳이 있어요. 대여섯 개의 땅굴이 있어요. 우리에게는 그렇게 아픈 역사의 현장인데, 그곳이 ‘거제도 인생 샷 포인트’라고 알려져서 사람들은 거기서 인생 샷을 남기고 있어요. 데이트하러 가서 줄을 서서 역광으로 실루엣 사진을 찍고 있어요. 이번 전시에서도 그 사진을 걸었어요. 인생 샷 남기는 모습까지요. 우리가 역사를 이렇게 회피하고 있고 인스턴트처럼 가볍게 대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어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는데, 가볍게 즐기고 소비하는 문화가 되어버린 현장을 1회용 인스탁스 필름을 이어붙여서 표현했어요. 저는 역사의 현장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가를 말하고 싶었어요. 사진제공_김동우 김동우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이 바람 소리를 들었던 그때 그 사람들을 떠올리며, 저 나무 아래 서 있던 그때 그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하며. 기자 생활을 접고 하고 싶은 이야기에 천착했다고 하는 김동우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여기까지 오는 데 10년이 걸렸다. 인터뷰를 마치며, 당신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냐고 물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제 인생은 ‘독립운동’이 되었죠. 저는 아마 전생에 친일파였을 것 같아요. 그래서 속죄하고 사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무슨 일을 할 때 지하에 계신 독립운동가들이 다 도와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무서울 게 없나 봐요."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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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 선생 생가터를 찾아서충남 태안군 원북면 옥파로 199-7번지 옥파 이종일 선생 생가지의 주소다. 옥파沃波는 선생의 호로 ‘옥지 파안’, 강변에 옥토와 같은 땅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선생이 태어나 15세까지 자란 생가 터 주변은 과거에 ‘닻개’라는 지명으로도 불리었다. 배가 닻을 내리고 정박하는 포구라는 뜻이다. 선생이 살았던 시절에는 태안군 북이면 정포리로 불리었으며 지금은 닻개의 하류 약 2Km지점에 방조제를 축조하여 선박의 출입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나 과거에는 왕래하는 선박이 태풍 등을 피하여 정박할 수 있는 천혜적인 좋은 포구로서의 그 역할을 다하였던 곳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며 더 넓은 세상을 꿈꾸며 큰 뜻을 품었으리라. 사진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제공 @최인경 옥파 이종일 선생 충청남도 기념물 제 85호로 1986년에 준공한 생가 복원지는 건넌방, 안방,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 선생의 생가 복원지에서 찾을 수 있는 선생에 대한 흔적은 대들보뿐이었다. 태안군에서는 이종일 선생을 비롯한 문양목 선생 등 일제강점기 국권 회복과 민중계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을 기리는 공간을 조성하고 있다. 선생은 1858년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의 닻개에서 성주 이씨인 교환敎煥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찍이 한학에 눈을 떠 머리가 명석하였다. 천도교에 입교(1905)하여 묵암默菴이라는 도호를 받았으며 필명으로 천연자天然子, 중고산인中皐散人, 중헌中軒이라 하였다. 15세때 상경하여 다음 해에 문과에 급제 하였다. 후에 1882년 박영효 수신사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당시 일본사회의 개회된 실상을 목격하고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1989년 대한학자인 김윤식 선생의 영향을 받아 개화사상을 배우고 사제의 인연을 맺은 이종일 선생은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개화된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을 펼치며 언론인으로서, 교육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계몽운동가로서 여성해방운동을 주장하기도 했던 선각자였다. 동학도가 되고 천도교인으로 활동하였으며 한글 보급에 앞장서 한글로 된 제국신문을 창간하게 된다.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보성사 사장으로서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여 3·1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이후 선생은 1920년 조선총독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21년 12월에 가출옥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22년 자주독립선언문(제2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가 일경에게 발각되어 압수당했다. 나라를 잃은 절망의 시절 일경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선생은 1925년도에 아사로 순국하였다. 1960년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고, 1962년 대한민국은 선생에게 건국훈장복장을 추서하였다. 여기까지가 선생의 삶을 정리한 기록이다. (선생의 생가를 발견하고 복원지 건립, 선생의 삶을 재조명하고 연구한 박춘석의 저서 <옥파 이종일>(2008, 태안향토문화연구소)에서 참고) 사진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제공 @최인경 언론인, 교육자, 종교인,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종일 기념관에는 선생의 업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었다. 한식 건물로 지어진 내부전시실에는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느낄 수 있는 묵암 비망록와 옥파 전집 등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또 이곳을 찾는 학생들에게 태극기의 4괘를 찍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구들이 마련되어 있다. 언론인으로서의 선생은 독립신문에 논설을 담당하며 언론활동을 시작하였고 개화와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하고자 1898년 제국신문 창간하였다. 경성신문, 황성신문, 만세보, 경향신문, 대한매일신보, 대한민보, 천도교회월보 등에서 언론활동을 펼쳤다. 교육구국운동과 국문 연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898년 흥화학교와 1901년 국문학교 설립에 참여한 선생은 1894년 이미 보성보통학교 교장을 시작으로 보성학교, 보광학교, 흥화학교 등 7개교 교장을 역임하며 교육 사업에도 헌신하였다. 순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차안하고 전문교육기관인 국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옥파의 국문사랑 정신은 1907년 학부의 국문연구소 연구위원에 임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1913년 『언문의해』를 저술하고 국문연구의 구체적 방법으로 천지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동학의 보국안민 사상과 평등 인문주의를 주목하고 민족종교의 위국적 이념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로 파악하여 1906년 천도교에 입교, 제국신문 등이 폐간되자, 1910년 천도교회 월보과장과 보성사의 사장으로 취임하여 천도교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게 된다. 동경대전, 대종발원설 등 동학을 기반으로 개화사상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동학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여성해방론, 남녀평등론을 주장한 선생은 자녀교육의 주체인 어머니로서의 소양을 기르고 사회활동을 위한 지식을 체득하는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858년에 태어난 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환갑의 나이였다. 민족대표 33인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큰 뜻을 품은 선생은 동학에 입교 후 천도교 조직을 이용한 각종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가슴에 큰 뜻을 품었으니, 어제의 당신이 오늘의 우리에게 사당에 걸린 그림을 통해 선생의 눈을 본다. 선생의 눈빛이 아직도 펼치지 못한 독립운동의 꿈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밤,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을 만들던 선생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어제의 당신이 오늘 우리를 있게 했다고. 선생은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생존한 후손이 없어 업적을 밝혀내는 일도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선생이 품었던 큰 뜻은 100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의 정신을 일깨워 준다. 1979년 선생의 생가를 박춘석(대안여상 교장)이 발견해 옥파이종일선생추모업원북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생가를 복원하고 사당을 건립하였다. 생가터에는 선생의 순국일인 매년 8월 31일 추모제향과 3·1절 기념행사, 현충일 추념식 등을 거행하고 있으며, 기념관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숭고한 애국사상을 알리고 있다. 사진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제공 @최인경 이종일 생가 터 :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809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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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물결을 따라, 동학의 발자취를 따라『새로 쓰는 동학기행 2』 책을 출간하셨습니다. 이 시리즈로는 두 번째 책인데, 출간하게 된 계기에 대해 들려주세요. 무엇보다도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사의 전국화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한 이해는 조선팔도에 퍼져나간 거대 혁명의 물결을 읽어내야 제대로 된 이해입니다. 전라도 전봉준에 매어 있는 동학농민혁명사는 발전하지 못합니다. 제가 처음에 접근한 것은 충청도 동학농민혁명사였고, 이를 추적하다 보니 2세 교주 최시형의 행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여기서 전국으로 퍼져나간 동학의 행적을 이해하면서 전국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전국 각 지역의 동학의 사적을 찾아내는 동학기행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하게는 각 지역의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사의 흔적을 찾아 정리하는 일입니다. 지역의 역사서에 『동학기행』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된 이유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각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사적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채길순 교수, 사진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제공 @최인경 이 책의 성격이나 출간 과정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동학기행은 1988년에 지방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소설연재가 끝난 뒤에는 지방 신문사와 월간지 <신인간> 월간 신문 <개벽>에 줄곧 지역 단위의 동학기행 연재를 해왔습니다. 비교적 덜 알려진 지역부터 정리하다 보니 『동학기행1』은 강원도, 서울 · 경기, 충청남도 충청북도 편을 펴냈습니다. 『동학기행1』이 2012년에 나왔는데, 동학기행의 연재는 2020년 8월에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미 발표된 원고지만 새로 발굴된 자료를 보충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번에 낸 『동학기행2』는 경상북도 경상남도 북한 편입니다. 참고로 『동학기행3』은 전라북도 전라남도 제주편인데, 지금 편집에 들어가 이번에 전국의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사를 펴내게 되었습니다. 새 책 이야기를 조금 더 여쭙고 싶습니다. 동학연구사에서 『동학기행2』가 갖는 특별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번 책에서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북한 편을 다뤘습니다. 경상북부 지역은 일찍이 신영우 교수가 박사학위논문을 써서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자료도 많이 나왔고, 경상남부지역은 연구가 최근에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렇지만 경상도 지역별 동학 연구는 오랫동안 소외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이를 체계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 편도 비록 사적 답사는 불가능했지만 각종 사료에서 나오는 사적(史蹟)을 찾아 이를 정리했습니다. 동학을 소재로 소설을 쓰신지 벌써 30 여년이 흘렀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동학을 접하게 된 계기, 그리고 소설을 쓰시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1988년 지방신문 충청일보에 연재를 시작했으니 햇수로는 정확하게 33년의 세월이군요. 처음에는 지역(충청북도)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소재로 소설을 시작했는데, 3년 동안 연재했습니다. 이 소설이 대하소설 『동트는산맥』①-⑦입니다. 2세 교주 최시형의 잠행포덕 행적을 중심으로 고찰하게 되었는데, 최시형의 동학이 경상도를 거쳐 강원도로부터 넘어왔고, 서울·경기 충청도 전라도로 포교된 역사를 추적하면서 자연 전국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소설을 쓴다고 역사를 찾아다녔는데, 이는 최시형의 발자국을 쫓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 역사적 도정은 박맹수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 <최시형 연구>가 기본 골격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저는 소설가인지 역사가인지 애매한 처지가 되었고요. 그간 출간하신 『동트는산맥』①-⑦, 『흰옷이야기』①-③, 『조캡틴정전』, 『웃방데기』, 『모든이의 벗 최보따리』 등 많은 소설을 쓰셨는데, 소설로 이야기를 풀어갈 때의 동학과 역사적 사실로서의 학술적 글쓰기를 하실 때 각각 동학을 바라보는 시점이 달랐을텐데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소설을 쓰기 위해 역사를 대입하다보면 너무 역사적 사실에 치우치게 되고, 소설적 허구와 재미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역사논문을 쓰다 보면 나와서는 안 될 소설적인 구성이나 소설문장이 나옵니다. 논문문장과 소설문장은 엄연히 다르거든요. 그렇지만 다른 작가의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사 소재의 역사소설을 보면 역사적 사실과 너무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내가 공부해서 정확하게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맞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동학기행』 3권이 마무리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저는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사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동학을 소재로 한 다양한 콘텐츠의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영화 시나리오, 방송 드라마 대본 등입니다. 이는 내 재주가 다양해서가 아니라 동학을 널리 알리겠다는 목적을 우선에 뒀기 때문입니다. 동학을 잘 아는 사람이 뮤지컬이든 영화든 방송대본이든 잘 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KBS방송드라마 작가 연수생 출신이고, 제 작품이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공모전에서 뮤지컬 대본상 수상 경력도 있습니다. 설령 이 계획이 여의치 않더라도 이 스토리는 소설로 옮겨갈 수 있으니 결국에는 소설을 쓸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동학기행단(가칭)을 모집하여 정기적으로 답사팀을 만들어 안내하고 싶습니다. 원론적이긴 하지만, 각 지역사회 별로 동학농민혁명사가 연구되고, 이를 문화컨텐츠화 하여 널리 알리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사가 멀리 있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났던 역사로 인식할 때 절실하게 다가오겠지요.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사는 각박한 현실에서 해방을 꿈꾸는 역할을 해왔고, 이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꿈입니다. 동학농민혁명사는 우리의 역사적 노정으로 보면 3·1운동, 4·19혁명, 부마항쟁, 5·18광주 민중항쟁으로 투쟁의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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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과 조화의 ‘한울님’ 세상윤석산 교수, 사진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제공 @최인경 지난 해 『주해 동경대전』 책을 내셨습니다. 동학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쓰셨는데 이번 책이 나오게 된 배경과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이번 『주해 동경대전』의 의미는, 주해를 새롭게 한 것, 한글판을 낸 것, 동경대전의 변천사를 바라보는 것, 그것을 자료화 시키는 것 이렇게 네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동경대전은 한문에 대해 식견을 가진 사람이나 제대로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한글판 동경대전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이 책의 1부는 주해서를 쓰고 2부는 한글판 동경대전을 썼습니다. 한글판의 목적은 우리나라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왔거든요. 이 책이 읽는 사람에게 얼만큼 도달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1994년 동경대전 주해를 처음 냈습니다. 그 이후 내가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하다 보니 내가 저지른 오류가 그 안에 많더군요. 그래서 한두 번 더 개정판을 냈습니다. 몇 년 전, 서울동학-최보따리인문포럼에서 동경대전 강의를 하며 지금까지 했던 동경대전을 다시 번역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의 목적은 그간 동경대전이 1880년 인제에서부터 오늘까지 지속적으로 나왔는데 수많은 판이 나왔습니다. 목판본이 20세기 전에 나왔어요. 20세기에 들어와 의암성사 시절부터 활자본이 나오기 시작했고요. 그것이 변하면서 오늘의 천도교 경전 안에 있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된 겁니다. 그동안 지금까지의 판본은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검토해서 동경대전이 체제나 내용이 어떻게 변모되었는지도 고찰해야 할 필요를 느꼈어요. 그리고 동경대전의 체제와 내용, 그리고 동경대전 초판본에 대한 논문을 엮어서 자료집으로 문헌연구의 자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활자본, 그것이 1908년에 나오는데 그것까지 자료로써 실어 좀 두꺼운 책을 냈습니다. 나도 이제 나이가 칠십 대 중반이 되었는데, 동경대전 주해를 또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내 생에 마지막이지 않을까, 그런 각오로 낸 책입니다. 최근 도올 김용옥 선생의 책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에서도 밝히셨듯 을묘천서-천주실의 논란에 대해서도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김용옥 선생의 실수입니다. 결코 천주실의가 아닙니다. 이번 책 머리말에도 썼지만, 김용옥 선생의 주장은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는 것인데요, 천도교 시대로 들어가며 천도교인들이 교조 최제우를 신비화 시키면서 을묘천서라고 했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1863년 대신사를 체포하러 온 선전관이 올린 장궤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서를 받았다고요. <고종 실록>에 나옵니다. 김용옥 선생은 그것을 못 봤어요.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만약 수운 대신사께서 천주실의를 받고 을묘천서라고 말했다면 수운 대신사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사이비 교주로 만드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해야 할 말이죠. 만약 천주실의라면 동경대전에 그 말이 한 마디라도 나와야 할 텐데 나오지 않습니다. 천서와 같은 신비주의가 수운 대신사의 글에 없다고 하는데, 포덕문, 논학문에 종교체험에 대한 신비한 말들이 수없이 나옵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당연히 을묘천서는 천주실의가 아닙니다. 수운 대신사 시절 200년 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책인데 그것을 새로운 책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곤란한 문제입니다. 천도교인으로 평생 살아오셨고, 학자로, 신앙인으로 살아오셨는데 신앙인으로서 동학을 연구하시게 된 계기, 그리고 실천적 학문으로서의 동학은 선생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천도교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서른두 살에 천도교에 입교했어요. 그때도 사람이 신통치 않아서 천도교의 진수를 잘 모릅니다. 그러다 나이 서른다섯 살에 화악산 수도원을 찾아갑니다. 거기서 일주일간 수련을 했는데, 이전과 다르다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젊은 교수였는데, 지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천도교에 대해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던 천도교가 아니더라,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을 했죠. 그런데 그 지인이 그럼 주문을 가지고 학위논문을 써보라는 겁니다. 용담유사는 내가 공부하는 가사문학 작품이기도 하니, 국문학 박사논문으로 용담유사를 가지고 썼어요. 그때부터 방학만 되면 수도원에 들어가 수련을 하면서 용담유사와 동학의 교리에 대한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동경대전에서 내가 읽어내지 못한 것들을 읽어낼 수 있게 되더군요. 그렇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머릿속에 들어오더군요. 수련의 과정에서 내가 마음 속에 불을 지피고 떠올리며 깨달은 것들이 바탕이 되어 학위논문도 쓰고 동경대전 주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동경대전은 그렇게 나의 수련과 만나서 오늘의 동경대전 주해가 된 거죠. 일찍이 등단하셔서 가슴을 울리는 시도 많이 쓰셨습니다. 선생님 세대는 그야말로 한과 눈물의 수난을 온전히 다 경험한 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브레히트의 말처럼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는 어떻게 건너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는 서정시를 비겁자가 쓰는 것과 같이 생각했어요. 참여시와 순수시로 나누기도 했고요.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시의 본령은 아무리 시대가 어려워도 어려움 속에서 민중의 주먹을 쥐게 하는 것보다 민중의 가슴을 녹이는 서정이 더 중요하다고요. 나는 그때도 서정시를 썼고 지금도 서정시를 쓰는데, 나의 서정이 민중의 가슴을 녹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그만큼 좋은 시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70년대와 80년대를 견디면서 그렇게 시를 써왔습니다. 나는 그 시기를 건너오면서 시는 서정의 본질이라고 생각했고 아직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브레히트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윤석산 교수, 사진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제공 @최인경 동학은 어느 시대에나 희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동학-천도교가 그 역할을 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동학-천도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연구자로서 신앙인으로서 또 시인으로서 선생님은 사람이 한울인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상상하시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신앙인으로서, 동학연구자로서, 시인으로서 세 분야에서 다 신통치가 않아요. 박인환이라는 시인은 죽으나 사나 ‘목마와 숙녀’라는 시로 독자들에게 영원히 남아요. 나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시인으로서 내 소임을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한 사람의 독자라도 좋으니 내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것은 사람이 ‘한울’이라는 말과 달라요. 사람이 한울은 사람을 높이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한울님’은 한울님같이 생각하고, 한울님같이 말하고, 한울님같이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충분한 사람입니다. 그게 한울님의 모습니다. 내가 존중받는 것이 아닌 나의 말로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내 행동으로 사람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만들고 내 마음 씀 하나로 세상을 함께 가꿔나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겁니다. 그런 세상이 된다면 이 세상은 오늘날 갈등을 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균형과 조화’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균형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사람이 한울님인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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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열정과 의지의 동학『동학 천도교 인물사전』, 『천도교종령존인』, 『보국안민 발길로 서울을 걷다』, 『천도교대교당 50년 이야기』, 『춘암상사댁일지』 등을 펴낸 이동초 선생을 만나 동학 천도교에 대한 말씀을 들어 보았다. 이동초 교수, 사진_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제공 @최인경 선생님께서는 2020년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추진한 동학문화해설사 교육에서 현장 위주로 동학과 천도교를 재미있게 진행해 주셨는데요. 직접 현장을 방문해서 생생한 소식을 담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동학은 물론 동학 관련 유적지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알려 주더군요. 특히 천도교중앙대교당은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데 문화해설사 또는 선생님도 마치 소설을 쓰듯 제멋대로 해설을 하더라구요. 천도교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학자들처럼 논리적, 학술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자고 다짐했죠. 그 후로 동학 역사현장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일일이 발로 뛰어 다니며 작업을 했습니다. 부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종로구청, 서울시청, 문체부 등에도 엄청나게 문의하였습니다. 어느 날 공무원 한 분이 “선생님의 정성과 열정은 인정합니다. 동학이나 천도교 관련 유적지를 발견하시면 우선 돌멩이라도 하나 세워 두세요. 그럼 저희들이 객관적, 역사적 사실을 찾아서 유적지에 표지석이나 표지판을 세워 드릴게요.”하더군요. 선생님께서 그동안 쓰신 책이나 논문은 일반 동학학자와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데요. 동학에 대한 선생님의 관점이나 생각은 어떠신지요? 동학혁명,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제대로 알아야 해요. 그런데 학자들 특히 동학 연구자들의 개인적 견해에 따라 잘못된 해석을 하고 주장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요. 특히 동학군에 의해 의병이나 백성들이 받은 피해도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다룬 자료는 거의 없더군요. 그래서 저는 역사적인 자료를 근거로 실제 현장을 찾아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숨겨진 이야기를 밝혀내는 일을 해 온 셈입니다. 선생님께서 <이동초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신데요. 흥미롭고 이슈가 될 만한 콘텐츠가 많습니다. 특별한 노하우가 있다면 알려 주세요. 블로그 이전에 카페를 운영했는데 주제를 선정하고 표현하는데 시간은 물론 엄청난 노력과 열정이 요구되는 작업인 셈이죠. 그 당시만 해도 젊어서 밤에 글을 많이 썼어요. 지금은 나이가 들어 주로 낮에 틈틈이 쓰고 있죠. 최근에는 일반인들이 관심을 갖는 주제 선정이나 콘텐츠 기획에 대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어요. 그동안 동학 관련 자료를 발굴, 확인 작업을 해 오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동학 천도교 인명사전』은 인물 10만여 명의 정보와 30만명의 이름이 수록된 방대한 규모의 동학 천도교 관련 인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전을 제작할 때였어요. 전국에서 200여명이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숨어 있던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고 확인하는 열정을 보며 보람이 컸어요. 『보국안민 발길로 서울을 걷다』 책을 발간할 때는 현장 사진을 수준있게 담아 보려고 야심찬 기획을 했어요. 하지만 경제적인 여건이 넉넉지 못해 제가 찍은 사진을 자료로 쓸 수밖에 없어 아쉬움이 많아요. 동학과 천도교에 관하여 일반인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학과 천도교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정보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고 있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한 말씀해 주시죠 저는 동학과 천도교에 쓴 소리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우이동 봉황각에 보리수나무가 있었어요. 그 열매로 염주도 만들 정도로 크게 자랐어요. 그런데 관리자가 낙엽이 많이 생긴다고 가지를 잘라 몽당연필처럼 만들어 놓더니 그마저도 베어 버렸어요. 이것을 칼럼으로 썼더니 불려가서 엄청 혼이 났어요.(웃음)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특히 천도교의 정체성을 외부학자에 의해 왜곡하고 훼손하여도 아무런 대응이 없어요. 방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런 책을 대량 구입해서 보급하는 것을 보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어요. 무엇보다 청년들이 앞장 서서 해월 신사님의 용시용활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새기고 보국안민정신을 이 시대에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는지 고민하고 실천하려는 열정과 의지가 중요해요. 글_ 함경숙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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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에 적극 나서야지난 3월 9일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 제1소위는 회의를 열어 이정문 의원 등 의원 60명이 공동발의한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1차 심사했다. 일부개정법률안은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 서훈대상으로 포함하고 있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지난 수년 동안 관련 학계와 시민단체에서 계속 나왔다. 관련 학계와 시민단체는 을미의병(1895) 서훈이 합당하다면, 2차 동학농민혁명(1894) 참여자도 서훈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을미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이 똑같은 항일무장투쟁 즉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보훈을 담당하고 있는 국가보훈처는 을미의병 참여자에 대해서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145명을 서훈하면서도, 전봉준·최시형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을 하지 않았다. 3월 9일 법안심사 제1소위에 참석한 윤종진 국가보훈처 차장은 "동학 2차 봉기도 독립운동으로 볼 여지가 있다는 찬성 의견, 2차 봉기가 반일 투쟁의 국면을 보인 것은 맞지만 반봉건 투쟁도 함께 진행돼 단정할 수 없다는 내용도 있다. 양 의견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이에 정무위 위원들은 "보훈처는 찬반 의견에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해 분명히 밝히라"는 질의를 하였다고 한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50개 단체 참여)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독립운동사 전공 역사학자)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일제가 일으킨 국권침탈 사건이었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일본군이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하여 국왕 고종을 포로로 잡고 조선군대의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친일개화파 정권을 세워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경복궁 점령사건 때에 조선군 궁궐 수비대 17명이 전사하였고 60여 명이 부상하였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1895년 을미사변보다 더 규모가 컸고 더 폭력적이었다. 을미사변으로 조선군 궁궐 수비대 11명이 전사하였고 민비가 시해되었으며 궁녀 2명이 사망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를 국권침탈로 보는 국가보훈처의 주장을 따른다면(<제2차 동학농민혁명 서훈 해결의지 없는 보훈처>, 2021, 10, 12. 민형배 국회의원실 작성 문서, 4쪽), 1895년 을미의병 참여자 145명에 대한 서훈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둘째, 항일투쟁인 을미의병 참여자 145명의 서훈이 합당하다면, 2차 동학농민혁명(1894) 참여자도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 똑같은 항일 독립운동이기 때문이다. 독립보훈을 책임지고 있는 국가기관은 형평성과 공정성에서 같은 잣대를 대야 한다. 일제가 일으킨 1894년 경복궁점령사건(국권침탈사건)에 맞서,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2차 동학농민혁명(=항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한국 역사학계는 2차 동학농민혁명이 '독립운동사의 범주에 포함된다'라고 논증하였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갑오의병(1894)과 2차 동학농민혁명(1894)에서 시작되었다고 대학의 한국독립운동사 개설서인 <한국독립운동사 강의>(한울, 1998년∼2023년)에서 가르쳐왔다. 김상기 교수는 국권침탈 사건으로 갑오변란(1894년 경복궁 침범사건)을 설명하면서, 갑오변란을 계기로 반침략투쟁인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났다(김상기, <갑오·을미 의병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8, 16쪽)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어 김 교수는 갑오·을미의병이 항일투쟁이기에, 독립운동에 해당한다고 여러 저서와 논문을 통해 강조했다. 한시준 교수(현 독립기념관장)는 <총설: 한국 독립운동사의 이해>에서,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사건인 '갑오변란'과 1895년 민비시해사건을 계기로,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군과 을미의병들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싸우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라고 서술하였다. 김희곤 교수(현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장)도 "독립운동사는 1894년부터 1945년까지 51년 동안 전개되었고, 그 가운데 첫머리를 장식한 것이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갑오의병이었다. 그런데 독립운동사의 출발점인 갑오의병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곳 안동이었다"(김희곤, <안동의 독립운동사>, 안동시, 1999, 23쪽)라고 갑오의병을 한국 독립운동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들도 2차 동학농민혁명을 "민족독립운동"으로 주장하였다. 청일전쟁 연구의 대가인 일본 나라여자대학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현대 일본의 역사인식>(2007, 256∼257쪽)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이 '조선의 민족독립운동'이고, '동아시아 민족독립운동의 선구'라고 주장하였다.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는 2020년 "동학농민혁명은 동아시아 민족독립운동의 선구, 세계 민족독립운동의 선구"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고 민족의 독립을 지키려는 운동"(<세계사의 현단계와 동학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생각한다>, <나주동학농민혁명 재조명과 세계시민적 공공성구축-자료구축을 중심으로-2020년 나주동학농민혁명 한·일학술대회 자료집), 나주시, 2020, 10, 28, 14∼15쪽)이라고 강조했다. 셋째, 역사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1차 동학농민혁명(1894, 3, 20, 무장 봉기)은 신분제 철폐와 같은 반봉건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2차 동학농민혁명(1894, 9, 10. 전주 삼례 봉기)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1894, 6, 21.)으로,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의병운동에도 반봉건 운동의 성격이 있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후기의병도 반봉건 투쟁이 있었다. 의병운동에서 반봉건 투쟁이 있었다고 해서, 의병운동 참여자가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되는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독립유공자 서훈은 항일투쟁, 반일투쟁을 가지고 하였다. 2차 동학농민혁명 봉기가 항일 투쟁을 전개한 것이 맞으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해야 한다. 넷째, 1980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2023년 현재 9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까지 43년 동안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한 항일 투쟁 즉 독립운동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은 법률 제정과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완결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4)은 제2조(정의)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2019년 2월 대한민국 정부는 동학농민혁명을 국가기념일(5월 11일)로 제정하여, 매년 국가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