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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법, 50세 완경 여성과 13세 초경 소녀의 순환 사이클 만들어액티브시니어 여성을 위한 웰니스 큐레이션 플랫폼 ‘노는법’의 운영사 바바그라운드는 50세 완경 여성과 13세 초경 여성의 순환 사이클을 만드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번 캠페인은 중년 여성이 갱년기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자신의 성향에 맞는 ‘일상 속 갱년기 극복 방법’을 알도록 하기 위해 기획됐다. 특히 바바그라운드는 이 캠페인이 더 큰 사회적 임팩트를 갖도록 ‘저소득 소녀 생리대 기부’로 활동을 확장했다. 완경을 맞이한 여성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생리대가 이제 막 초경을 시작하는 저소득 소녀에게 기부되면서 생리의 끝과 시작을 연결해 순환 사이클을 완성하는 것이다. ‘노는법’은 중년 여성이 가장 젊고 아름다운 지금 이 순간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개인화된 맞춤형 웰니스 큐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비스 고도화를 위해 올해 4월 대한갱년기학회(회장 오한진)와 업무협약(MOU) 체결 후 시니어 여성의 갱년기 상태분석 및 맞춤형 웰니스 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를 발전시켜 왔다. 여성은 완경 이후 라이프스타일을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따라 100세 시대의 남은 50년 동안 삶의 질이 결정될 수 있다. 여성의 생애주기 중 3분의 1 이상인 생리기간(가임기)은 평균 12.9세부터 49.5세까지 약 37년 정도로 긴 시간이지만, ‘노는법’은 그보다 더 긴 완경 이후 50년을 어떻게 사느냐에 주목했다. ‘노는법’에서 제안하는 갱년기의 관리는 라이프스타일 조정, 자가 관리 관행, 경우에 따라 증상을 완화하는 노력과 함께 자연스러운 삶의 단계를 원활하게 전환하도록 도움을 주는 비의료적인 웰니스 솔루션이다. 완경은 여성의 가임 기간이 끝나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과정으로, 정확한 시기는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에 맞게 된다. 완경기에 이르면 눈에 띄는 신체적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때 ‘노는법’ 웰니스 솔루션은 일상에서 자신의 유형에 맞게 생활 습관과 갱년기 극복 방법을 제시해 주고, 갱년기에 특화돼 관리할 수 있는 개인화 서비스를 제공한다.이번 캠페인을 통한 생리대 기부 목표는 4만5000개다. 생리대는 개당 230원이며, 모집금액 1035만원 달성시 경제적 어려움으로 생리대 구매가 어려운 저소득 청소년들에게 사회적기업 업드림코리아의 산들산들 생리대를 사단법인 따뜻한 하루를 통해 전달한다. 바바그라운드 허정 대표는 “노는법 서비스는 여성의 갱년기 유형에 따라 운동, 마음관리, 시간활용, 피트니스다이닝, 뷰티웰빙 등의 방법으로 갱년기를 관리하는 전략과 요령을 알려주는 매력적인 서비스”라며 “이번 생리대 기부 캠페인에 뜻을 같이 하는 기업 또는 개인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바바그라운드는 정보기술로 시니어 세대의 건강과 여가에 관한 디지털 접근성을 개선하는 회사로, 웰니스 큐레이션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외모의 노화, 갱년기 등 정신적·신체적으로 특수한 상황을 겪는 액티브시니어 여성에게 최적화된 서비스에 집중하고 있다. 운동을 통한 행복 호르몬 만들기, 마음 관리하기, 나의 가치 올리기, 혈당관리, 피부관리, 맛있는 웰니스 모임 등 시니어 여성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 기존 플랫폼과의 차별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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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 여름철 폭염 및 태풍대비 안정적 전력공급 총력한국전력(사장 직무대행 이정복)은 8월 7일(월) 오후 전국 15개 지역본부와 함께 전력사용량 증가 및 태풍 북상에 대비한 준비 상황을 논의하는 긴급 화상회의를 갖고, 안정적 전력공급을 위한 비상대응 체계와 전력설비 관리사항을 집중 점검했다.현재 8월 2주의 전력 공급능력은 104GW, 전력수요는 92.9GW 수준으로 전망돼, 예비력이 10GW 이상으로 수급상황은 안정적일 것으로 보고 있으나, 습하고 무더운 날씨로 인한 전력수요 급증 및 흐린 날씨로 인한 태양광 발전량 감소 등 기상 변수가 상존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이에 한전은 본사 경영진, 유관처·실 및 전국 15개 지역본부장이 참여하는 화상회의를 통해 예비력 부족 상황에 대비한 단계별 조치사항을 점검하고, 태풍 피해 예방을 위한 설비관리 강화와 신속한 복구체계 확립 등 여름철 안정적 전력공급 방안에 대해 집중 논의했다.이날 회의에서는 본사 수요 담당부서 외 배전 및 송변전 전력설비 운영 부서와 안전담당 부서가 함께 참여해 폭염과 태풍 대비 전력설비 사전 점검 강화와 직원과 협력회사 근로자들의 혹서기 온열질환 예방 조치 등 현장 안전관리의 중요성을 재차 전달했다.이정복 사장 직무대행은 “계속되는 폭염과 태풍 등으로 여름철 기상 상황의 불확실성이 큰 만큼, 비상대응 준비에 철저를 기해 줄 것”을 강조하며 “사전 설비 점검과 신속한 고장복구 대응체계 유지, 특히 안전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작업현장 관리에 만전을 기해 달라”고 당부했다.한전은 전력수급에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8월 한 달 동안, 경영진을 중심으로 전력설비 현장점검을 지속적으로 시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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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문화재단, 제7회 성북문화바캉스 ‘성북 어린이 물놀이장’ 개최성북문화재단이 7월 29일 토요일부터 ‘제7회 성북문화바캉스’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8월 9일까지 성북구 곳곳에서 진행되는 이번 행사는 매년 1만명이 넘게 찾아오는 성북의 대표 물놀이 축제다. 올해 7회째를 맞아 운영 기간을 연장하고, 주민들에게 더 친숙한 공간들을 추가로 섭외했다. 각각의 공간에는 특성에 맞는 초대형 슬라이드부터 다양한 크기의 풀장들을 준비해 이용객들에게 큰 만족감을 선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서울시, 서울특별시체육회 후원으로 올해는 처음으로 길음1동 7단지 앞 공터에서 ‘성북 어린이 물놀이장’이 개최된다. 성북 어린이 물놀이장은 8월 5일(토)부터 9일(수)까지 운영하며, 풀이 무성하던 공터에 대형풀 및 대형 슬라이드까지 설치해 어린이들이 가까운 곳에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도심 속 축제를 구성했다. 8월 5일(토)~6일(일) 이틀간 성북 어린이 물놀이장이 개최된 길음1동 7단지 앞 공터에는 첫 개장이었음에도 개장 시간보다 앞선 이용자들의 오픈런을 위한 대기 줄이 이어졌으며, 행사장을 찾은 이용객은 2500여 명으로 집계됐다.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로, 더 안전한 물놀이를 위해 오전반(10:30~13:30)과 오후반(12:30~17:30)으로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이용 인원의 밀집 예방을 위해 입장 인원을 선착순으로 제한하고, 인파 관리 인력을 별도로 배치하고 있다. 또 물놀이 전에는 물놀이 이용 인원 전체가 함께하는 안전 체조를 진행하며, 온열 질환자 발생 등 안전사고에 대비해 의료진과 구급차가 현장에 대기하고 있다. 이용자들은 건강한 물놀이를 위해 수영모는 필수로 지참해야 한다. 주차장은 따로 없어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하며, 이용료는 신분증을 지참한 성북구민이면 무료다. 아직 2023년 여름을 즐기지 못한 성북구민은 8월 9일(수)까지 진행되니 참여해보길 바란다. 다른 지역 주민은 1인당 2000원에 해당 물놀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성북 어린이 물놀이장은 야외 물놀이 행사인 만큼 기상 상황에 따라 개장 상황이 달라질 수 있어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이는 성북문화재단 누리집 또는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성북문화재단은 도서관, 영화관, 미술관, 여성·구민회관 등 다양한 문화 시설을 운영하며 지역 대표 축제, 생활문화 활성화, 시각예술 활성화 등 여러 프로그램 및 문화 정책 등을 통해 성북구민의 삶과 문화 발전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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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앞에 시도 경계 없다...선제적 국가 소방 동원체계 마련소방청(청장 남화영)은 시도 경계를 넘어선 대형재난 대비 국가적 차원의 총력대응을 위해 「전국 소방력 동원 및 운영 관리에 관한 규정」을 전면개정․시행(`23.7.27.)했다고 밝혔다. 국가 소방 동원은 재난이 발생할 우려가 현저히 높거나 재난이 발생하였을 때 해당 시·도의 소방력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경우, 재난에 총력대응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전국의 소방력을 재난현장에 동원해 관리하는 것이다. 먼저 행정규칙의 제명을「전국 소방력 동원 및 운영 관리에 관한 규정」에서 「국가 소방 동원에 관한 규정」으로 변경해 재난 발생 시 국가의 권한과 책임을 강화했다. 또한 대형산불 등 소방력이 장기간 동원될 경우를 대비, 현장대원의 피로 등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원소방력에 대한 근무교대, 휴식제공 방안 등을 동원계획에 포함하도록 했다. 아울러 동원소방력을 운영·관리하는 자원집결지 관리반의 임무를 명확히 하여 적재적소에 적절한 소방력을 투입, 효과적인 재난 대응이 이뤄질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소방청장의 동원령 발령 시기를 구체화하여 긴급구조통제단 운영 여부와 관계없이 소방력이 필요할 경우 동원령을 발령할 수 있도록 했다. 동원령은 재난 규모 및 상황에 따라 동원령 1․2․3호로 구분하여 운영된다. △1호는 8개 시·도 미만(장비 100대 미만 또는 인원 250명 미만)이 동원되며 △2호는 8~13개 시·도(장비 100~200대 또는 인원 250~500명), △가장 큰 규모인 3호는 14개 시·도 이상(장비 200대 이상 또는 인원 500명 이상)이 동원된다. 소방청장은 신속한 동원을 위해 소방력을 사전지정할 수 있으며, 재난지역과 가까운 시․도와 먼 시․도의 동원 규모를 달리 정해 동원하거나 상황에 따라 가감할 수 있다. 또, 재난유형 및 현장상황에 따라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소방장비 및 인력을 선별하여 동원할 수 있다. 한편, 소방청은 국가적 대응이 필요한 경우 국가소방동원령을 선제적으로 발령해 재난 대응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이번 2023년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행사에도 참가자들의 안전을 위해 중앙119구조본부와 9개 시·도의 재난현장회복차 11대와 구급차 20대 등을 동원했다. 김조일 소방청 119대응국장은“이번 개정으로 재난 발생 시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며“변화하는 기후위기 등 재난환경에 맞춰 선제적 대응을 통하여 국민의 안전을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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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 김치 수출액 8100만 달러 달성…평년보다 20.3% 증가농림축산식품부는 올해 6월 기준 김치 수출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8%, 평년 같은 기간보다 20.3% 각각 증가한 8100만 달러(원화 1055억 원)를 달성했다고 7일 밝혔다. 미국, 유럽 시장의 수요 증가 등에 힘입어 올해 상반기 170만 달러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수출량도 지난해보다 3.0%, 평년보다 20.0% 각각 늘었다. 농식품부는 최근 제3차 김치산업진흥 종합계획(2023~2027)에 2027년까지 김치 수출액 3억 달러를 목표로 설정하고, 한국 김치의 압도적인 품질경쟁력 확보를 위해 4대 전략 9대 과제 추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주요 과제로 우수종균을 지난해 27종에서 2027년까지 60종 개발을 진행하고 종균보급 확대, 기능성 표시제품·비건·저염김치 등 현지 맞춤형 상품 다양화, 수출김치 숙성 지연을 위한 장기유통 기술개발 등을 추진한다. 더불어 해외 김치의 날 제정을 지난해 8곳에서 2027년 15곳으로 확대한다. 또한 김치 이슈 대응 등을 위한 ‘김치산업 관계기관 협의체’를 상시 운영해 김치 수출 활성화를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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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새만금잼버리 참가자들에게 문화유산 체험 지원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전라북도 부안군 새만금 일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2023 새만금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8.1.~8.12.) 참여 차 대한민국을 찾은 전 세계의 스카우트 대원 및 행사 지원자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유산을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프로그램 체험을 12일까지 지원하기로 하였다. 먼저, 궁능유적본부(본부장 직무대리 신성희)는 수도권에 소재한 4개 궁궐[경복궁, 창덕궁(후원 별도 협의), 덕수궁, 창경궁]과 종묘, 조선왕릉의 입장료를 면제하고 안내해설(외국어 포함)이 필요한 경우 최대한 제공할 예정으로 관람을 희망하는 참가자는 해당 관리소로 신청문의(관리소별 전화번호는 붙임 참조)하면 된다. * 잼버리 스카우트 복장 착용자에 대해 입장료 면제 및 해설 제공 또한, 연중 무료로 개방하고 있는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직무대리 윤태정)은 잼버리 참가자가 단체관람 요청 시 우선 예약과 안내해설을 지원하고, 소정의 기념품도 제공한다.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안형순)은 전주시와 함께 전시·전통문화 공연·체험 등 지역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함과 동시에 참가자들에게 쉼터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운영하는 전통문화 편의시설(국립고궁박물관·경복궁·창덕궁·덕수궁의 ‘사랑’ 카페 ) 이용 시 할인혜택을 지원할 예정이다. 자세한 내용은 국립고궁박물관(☎02-3701-7611), 국립무형유산원(☎063-280-1411), 한국문화재재단(☎02-2270-1202)으로 문의하면 된다. 문화재청은 이번 기회를 통해 대한민국을 방문한 전 세계의 잼버리 대원들과 행사 관계자들이 우리 전통문화에 담긴 고귀한 가치를 느껴볼 수 있는 뜻깊은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한류로 대변되는 대중문화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전통문화의 영역까지 확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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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164년 8월 6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식포덕 164년 8월 6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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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김제 동학 유적지를 찾아서01. 동학군 점령지, 금구관아 터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구면 금구리 177-16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이 점령하였던 곳이다. 금구관아 터에는 현재 금구면사무소와 금구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금구면은 조선시대에는 금구현으로 독립된 행정구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김제군에 병합되었고, 이후 김제시가 김제군과 잠시 분리되었으나, 1995년 다시 김제시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구는 동학혁명 당시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김덕명과 김인배를 배출한 지역으로 동학혁명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선 1893년 3월 10일 동학교단이 주도하는 척왜양운동이 충청도 보은에서 열렸을 때 이곳 금구현 원평에서도 전라도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별도의 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당시 금구 원평과 충청도 보은에 집결하였던 동학교도들 가운데 변혁지향세력은 ‘척왜양’의 기치를 내걸고 전국적인 저항운동을 시도하였으나, 교단지도부의 반대와 집회에 참여한 동학교도들의 호응이 소극적이어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금구집회 이후 전봉준은 조정의 간당을 소탕하고 정부를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그것은 바로 민란의 확산을 통해 전라도 전 지역의 봉기, 나아가 전국적인 봉기를 구상하고 추진한 것이다. 〈사발통문 거사계획〉과 고부봉기는 바로 그 결과이며, 고부봉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1894년 3월 20일의 무장기포로 연결되었음은 주지하는 대로이다.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일어난 동학군은 고창-흥덕-부안-정읍-고부-태인 등을 거치며 세몰이를 하며 전주성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3월 35일 이후 고부 백산 일대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동학군은 전주성 공격에 나서기 위해 군량과 군기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3월 29일 밤에는 태인읍으로 들어가 곧장 동헌과 내아內衙를 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고, 거기서 하루를 머문 다음 4월 1일 정오 무렵에는 원평으로 진군하여 마을 앞 냇가에 진을 치고 하루를 머물렀다. 이어 4월 2일에 금구까지 진격했던 동학군은 감영 포군 1만여 명이 동학군을 치러온다는 소문을 듣자 4월 3일 태인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감영에서는 김제 등 7개 읍에 동학군이 도망할 때 뒤를 쫓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어 다음날에는 태인, 김제, 부안, 고부 등 4개 읍으로 통하는 길을 모두 차단하여 동학군들의 이동을 막도록 하고, 감영의 중군中軍이 병대를 이끌고 태인 지역으로 들어가 금구 원평에서 113명의 동학군을 체포하였다. 4월 3일 태인으로 후퇴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동학군은 4월 6일 ~7일에 걸쳐 고부 황토현 전투에서 감영병을 크게 물리치고 4월 8일 고창을 점령하였으며, 4월 9일 무장, 4월 12일 영광, 4월 16일 함평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4월 21일에는 장성에 도착하였고, 23일에는 처음으로 경군과 접전하여 승리한 후 여세를 몰아 정읍을 거쳐 전주를 향하였다. 4월 25일 원평에 도착한 동학군은 이곳에서 국왕의 효유문을 가지고 온 이효응李斅應과 배은환裵垠煥을 살해하였다. 국왕이 보낸 군대와 맞서 싸운데 이어 국왕이 보 낸 사자를 죽인 것이다. 원평에서 하루를 숙영한 동학군은 다음날 팥정(두정)으로 이동하여 하루를 더 보낸 후 삼천을 건너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5월 8일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물러난 동학군은 각지로 돌아갔다. 이때 관군은 동학군에게 물침표勿侵標를 나누어 주고 동학군을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나, 금구현감은 이를 어기고 동학군을 체포, 처형하였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이미 5월 11일의 원정原情에서부터 몇 차례에 걸쳐 그들의 파직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은 동학군 측에서 이들을 먼저 공격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전봉준은 김학진에게 나주와 금구의 수령에 대해서도 파직을 꾸준히 요구하였고, 7월 18일 금구현령 김명수는 자기가 관할하는 금구 경내에서 땅과 산을 매점買占한 행위가 국법을 어겼다는 명목으로 파직되고 의금부로 잡혀 올라갔다. 이후 제2차 봉기 시기에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부대에 패배한 동학군은 다시 전라도 쪽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이 이끌던 동학군 주력부대는 퇴각하면서도 논산 등지에서 수차례 접전하며 11월 19일에는 전주로 들어갔으며, 11월 23일에는 금구 쪽으로 이동하였다. 전봉준은 이때 동학군 상황에 대해 "금구에 이르러 다시 초모하였을 때 동학군의 그 수는 증가되었으나, 기율이 없어 다시 개전하기 어려웠다” 라고 진술하였으며, 관군 측에서는 금구 원평으로 간 동학군이 삼천여 명, 25일 원평에 집결해 있는 동학군의 수가 1만여 명 이상인 것으로 보고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원평 구미란 산자락에 진을 치고 일본군 및 관군과 접전하였다. 오전 9시경에 시작된 전투는 오후 4시경에 끝났다. 이 전투에서 동학군은 37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관군과 일본군은 조총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동학군은 원평에서 물러나 태인으로 후퇴하였다. 현재 금구면사무소와 금구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자리가 관아 자리이며, 그 앞으로 금구장터가 펼쳐진다. 02. 동학군 처형지, 금구장터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구면 금구리 453 일원 동학혁명 당시 전주 감영의 수교 정석희와 동학군들이 처형당한 곳이다. 현재 금구면사무소 앞에서 금구농협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금구장터였음을 지역주민들이 모두 잘 알고 있다. 현재도 금구면 소재지의 중심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전주로 내려보내 동학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홍계훈은 장위 영병 700여 명을 이끌고 4월 5일 오전에 군산항에 도착하였으며, 6일에 상륙하여 4월 7일 오후 6시경 전주부에 도착하였다. 홍계훈이 인솔하던 경군들 가운데는 군산에 상륙한 이후 도망하는 자가 속출하여 군산에 도착한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난 4월 12일경에 이미 그 수가 원래의 700명에서 470명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또 향병은 물론 도망한 경군까지 동학군에 합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계훈은 동학군 진압에 나서기보다는 전주 감영의 군사책임자들을 동학군과 내통했다는 구실로 하나씩 처단해 나가는 엉뚱한 짓만 하고 나섰다. 4월 11에는 전前 전라감영의 영장 김시풍金始豊이 동학군과 내통하였으며, 심지어 ‘7월 15일 불궤(반역, 七月望日不軌)’를 꾀하고 있다는 죄목으로 당시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 수감중이던 김용하 등 동학군 3명과 함께 전주 남문 밖에서 처형하고 효수하였다. 이어 4월 11일 전라 감영의 수교首校 정석희鄭錫禧를 잡아 가두고 체포한 동학군 80여 명 중 3명을 남문 밖에서 처형하였으며, 정석희에게도 본래 간사하고 흉악한 부류로서 고부봉기 당시 전봉준으로부터 뇌물 1,200냥을 받는 등 동학군과 내통하였다는 죄목으로 4월 17일 오후 2시경 금구장터에 이르러 군민을 크게 모아 효수하였다. 이때 정석희의 목을 쳤는데 단칼에 베어지지 않자 톱질하듯이 베어서 처참하게 죽였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금구장터에서는 정석희뿐만 아니라 관군에 체포된 많은 동학군들이 효수되었다. 동학군을 참수하여 가로수에 매달아 놓았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전해지고 있다. 가로수들은 도로가 확장되면서 모두 베어지고 현재 한 그루만 남아 있다. 03. 금구·원평 도소(都所, 동록개의 집)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84-3 동학혁명 당시 금구 원평지역 동학도소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원평 도소가 있었던 장소는 지역주민들 사이에 구전되고 있고, 도소가 설치되었던 건물은 많이 훼손되기는 했으나, 현재까지 그 위치에 남았다. 제1차 봉기 후 전주성을 점령하였던 동학군은 5월 8일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빠져나왔다. 이때부터 이들은 각지로 돌아가 도소를 중심으로 폐정개혁 활동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전봉준은 우도지역을, 김개남은 좌도지역을, 맡아 동학군을 통할하면서 폐정개혁 활동을 추진해나갔다. 금구 원평 지역에서는 이 지역의 대접주 김덕명이 중심이 되어 폐정개혁 활동을 추진하였다. 그때 원평리 학원마을 살던 백정 출신의 신분이었지만, 부를 축적해서 부자가 되어 있던 동록개라는 사람이 김덕명을 찾아와 “신분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이 집을 동학군에게 헌납하였다 한다. 동학군은 이 집을 동학군 도소로 활용하여 백정 출신인 동록개가 원하던 신분 부정운동을 비롯한 폐정개혁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건물은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 도소 혹은 집강소로 사용되던 건물로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며, 지붕만 초가에서 와가로 바뀌었을 뿐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집강소 통치기 동안 전봉준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전봉준이 군수물자를 비축했던 곳) 04. 금구·원평 집회지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49 (옛 원평장터 일대) 동학혁명의 전사前史를 이루는 교조신원운동 당시 동학교도들의 척왜양집회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동학농민혁명 금구 원평집회 장소 원평장터〉 안내판을 설치해 두었다. 동학혁명과 관련하여 원평은 대단히 뜻깊은 곳으로 전주로부터 서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1893년 금구취회의 현장이었으며 금구대접주 김덕명 포의 근거지였다. 1893년 3월 동학지도부가 주도한 취회가 충청도 보은에서 열리고 있을 때 일군의 호남지방 동학지도부에 의한 취회가 이곳 원평에서 열렸다. 이를 금구취회 또는 호남취당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전봉준이 중심이 되었고 손화중도 참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전 시기에 전개된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주로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등 종교적 목적에 치중하였던 것과 달리 1893년 3월의 금구집회와 보은취회에서는 ‘척왜양’의 기치가 중심을 이루었다. 05. 김덕명 추모비 / 위령각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80-2 (학수재) 김덕명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김제 시민들이 1987년에 건립한 비이다. 1987년에 현 위치 학수재鶴壽齋에 건립된 이래 현재까지 존치되고 있다. 학수재 동산에는 김덕명 장군을 비롯한 이 지역 출신 중요 인물들의 추모비·공적비 등이 들어서 있으며, 현재까지도 매년 위령제를 올리는 등 지역주민들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동학혁명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원평 출신인 김덕명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김덕명 장군의 이름은 준상峻相이고 자는 덕명德明 호는 용계龍溪, 본관은 언양彦陽으로 1845년 10월 언양 김씨의 세거지인 금구현 수류면 삼봉리 거야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금산사 입구 용계마을에서 아버지 한기漢驥와 어머니 파평윤씨의 장자로 출생했다. 그 성장 과정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풍채가 뛰어나고 언변이 유창했다고 한다. 동학혁명의 지도자들 가운데서는 비교적 일찍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이후 삼례집회와 금구·원평집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으며, 동학혁명 당시에는 원평의 대접주로 동학군을 이끌었다. 공주전투에서 패배한 후 원평전투(1894년 11월 25일)와 태인전투(11월 27일)를 마지막 항전으로 1895년 정월 1일 본면 장흥리 안정 절골에서 태인 수성군에 의해 피체되어 그해 3월 29일 서울에서 같은 혁명 동지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혁명가의 한 생이 막을 내렸으니 향년 51세였다. 김제와 원평 지역주민들은 김덕명 장군의 이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87년 11월 이 고장 노인들의 모임인 원평 학수재영락회 회원들이 주체가 되어 동학혁명 당시의 구미란 전투에서 전사한 무명동학군이 묻혀 있던 작은 동산인 학수재에 무명동학군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위령각〉을 짓고, 〈애국지사 용계김덕명장군추모비龍溪金德明將軍追慕碑〉를 세웠다. 비문은 당시 모악향토문화연구 회장을 맡고 있던 향토사학자 최순식이 지었다. 김덕명 추모비 바로 오른편에는 원평 출신의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남정이종희추모비愛國志士南亭李鍾熙先生追慕碑〉가 세워져 있다. 원평 지역주민들은 이 학수재 동산 위에 위령각을 짓고 전봉준장군, 김덕명장군, 동학혁명 무명 전몰용사, 독립운동가 이종희, 원평장터에서 일어난 1919년의 기미독립만세운동 항일투사 9명 등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년 원평 전투가 일어난 11월 25일을 기해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06. 구미란 전적지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623-3일대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과 관군 및 일본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수십 명의 동학군이 전사한 곳으로 이름 없이 쓰러져 간 동학군의 무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동학군은 우금치에서 패배한 후 논산을 거쳐 전라도로 후퇴하였다. 11월 19일 전봉준은 1,000명(500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전주로 들어갔으며, 23일에는 금구 쪽으로 이동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25일 원평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관군 및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이 전투는 오전 9시에 시작되어 오후 4시경에 끝났다. 수십 명의 동학군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현재 구미란 전적지에는 당시 전투과정에서 희생당한 무명동학군들의 무덤이 다수 남아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이 1994년부터 구미란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동학군의 넋을 위로하고 상생과 화합을 위한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동학혁명의 꽃을 끝끝내 피워보지도 못하고 꺾여진 자리다. 신영우 충북대 교수는 구미란 전투를 “참혹했다”고 기술했다. 이 전투에 관한 기록은 진압군이 쓴 몇 구절밖에 없기 때문에 전투상황조차 재구성할 수 없지만, 생존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본 구미란 전투는 참혹했다는 것이다. 기록에는 단지 시체 37구와 쌀 500석 조총 등을 포획했다고 적혀 있지만, 이는 일본군이 우금치전투의 희생자를 대폭 축소해 기록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는 분석이다. 이이화 역사학자도 구미란 전투의 치열했던 상황을 여러 기록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는 “우금치에서 패한 전봉준은 다시 세를 규합해 3000여 명의 동학군을 원평 구미산에 집결시켜 진을 펼쳤다. 뒤따라 온 일본군과 관군 300여 명은 진을 치고 대치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포격을 퍼부었다. 서로 진의 거리는 1000보쯤 됐다고 한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재래식 무기를 쓴 동학군은 불리했다.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지만, 동학군은 더욱 결사항전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결국 저녁 무렵 관군은 먼저 산 위에 올라 육박전을 벌인다. 그리고 수많은 시체가 쌓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우금치에서 대패한 전봉준은 이 전투에서 반전의 계기를 잡고자 했으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고 재기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룬 채 도피길에 올랐다. 07. 무명 농민군 묘역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산121, 원평리 산2 일대 동학혁명 당시인 1894년 11월 25일 벌어진 원평 구미란 전투에서 전사한 무명동학군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학살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자행되었다. 아직도 공주, 홍성, 보은, 홍천, 논산, 장흥, 강진, 광양, 해남, 진주, 하동, 상주, 예천, 강릉, 해주 등지에 동학군의 원혼이 떠돌고 있다. 원평에서는 구미란 뒷산과 학수재 앞산에 묻힌 이름 없는 희생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학수재에 무명동학군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 왔다. 08. 김덕명 생가터 소재지) 충남 예산군 삽교읍 역리 125-23 동학혁명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던 김덕명이 살던 곳이다. 김덕명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 있던 이곳에는 현재 오성제과라는 과자 공장이 들어서 있어 동학혁명과 관련된 어떤 의미도 확인할 길이 없다. 김덕명 생가터는 원평집회터나 구미란 전적지 동쪽으로 불과 1km 정도 떨어져 있다. 원평은 금구취회의 중심지이자 집강소 통치기에 대도소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의 접주 김덕명은 언양김씨 세거지인 금구현 수류면 거야마을 일대(금산면 삼봉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금산사 입구 용계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평의 동학접주로 활동하면서 1893년 금구·원평집회에 적극 참여하였고, 백산대회 때에는 총대장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 김개남의 총참모로 추대되어 군량미 공급과 금구 일대의 동학군 규합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황토현전투, 장성전투, 전주성 점령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원평전투와 태인전투에서 패한 뒤, 김덕명은 참담한 심정으로 전봉준과 헤어져 집안 재실이 있는 안정사 절골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1895년 1월 1일 태인 수성군에 의해 체포되어 일본군에 넘겨진 그는 서울에서 전봉준과 함께 3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09. 김덕명 장군 묘역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장흥리 114 (안정 절골)에서 금산면 삼봉리 산59-1로 유족이 이전 김덕명은 금구·원평지역의 대접주로서 1893년 3월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보은집회가 있을 당시, 전라도 금구 지역에서 교도 1만여 명을 소집하여 독자적인 금구집회를 개최하는 등, 금구 취당세력의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금구 토반인 언양 김씨로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었던 그는 전라도 일대의 접주들(전봉준, 손화중, 김개남등)의 구심점으로 활동하였다. 김덕명은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에서 1개월가량 은신하다 마을 사람들의 밀고로 1895년 1월 1일 태인 수성군에 체포되었다. 김덕명에게 짚둥우리를 씌우고 상투와 양쪽 팔을 묶어 끌고 가자, 설날 준비로 부산하던 부녀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애통했다고 한다. 동학혁명 지도자 중 가장 연장자였던 김덕명은 1895년 3월 29일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에서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과 함께 51세로 최후를 마쳤다. 김덕명 장군의 묘역은 1987년 후손들에 의해 조성되었다. 묘비에는 ‘의사언양김공덕명지묘’라고 씌어 있으며, 묘역의 아래에 있는 것이 부인 이씨의 무덤이고, 위쪽에 둘레석이 있는 것이 김덕명 장군의 무덤이다. 10.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 김인배 생가터 소재지) 전북 김제시 봉남면 화봉리 23-18 일원 동학혁명 당시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로 전남 동남부와 경남 서남 지역에서 동학군을 이끈 동학군 지도자 김인배가 태어난 집터이다. 김인배의 생가터는 후손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생가터에는 현재 정미소가 들어서 있다. 김인배(金仁培, 1870~1894)의 보명譜名은 용배龍培이며, 자子는 양여陽汝,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870년 6월 10일 아버지 현표와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김제시 봉남면 화봉리(봉서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당숙인 현모에게 입양된 후 한학을 하였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일찍이 구국의 뜻을 세우고 1894년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한 동학혁명에 참여해 황토현 전투와 전주성전투에 장령으로 활동하여 청년 장군이란 명성을 얻었다. 김개남과 기맥이 통하던 금구출신의 대접주 김인배는 1894년 6월 말경 동학군을 이끌고 순천에 들어와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폐정개혁 활동을 전개하였다. 9월 1일에는 흥양·순천 곤양의 동학군을 이끌고 경상도 하동을 공격하면서 9월 10일경에 재기포하는 전봉준에 앞서 사실상 재기포를 시작하였다. 하동부사는 도주하였고 민보군이 저항하였으나, 동학군은 2일 초저녁 하동부를 점령하였다. 3일 날이 밝자 동학군은 하동부 안에 도소를 설치하였다. 제일 먼저 민보군이 일어났던 화개동에서는 민가 500여 채를 불태웠다. 이들은 5~6일간 머물다가 일부는 호남으로 되돌아가고 나머지는 김인배를 따라 진주 공격에 나섰다. 영호남 연합 동학군이 진주성을 점령한 것은 9월 17일이었다. 다음날 영호대접주 김인배가 천여 명을 이끌고 진주로 들어와 질청作廳에 대도소를 설치하였다. 동학군들은 성 둘레에 오색깃발을 휘날렸다. 그중 성루의 맨 앞 큰 깃대에는 붉은 바탕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 쓴 대형 깃발을 내걸었다. 10월에 들어 일본군과 관군에 쫓겨 순천으로 후퇴했다가 22일 다시 하동으로 진격하다 섬거역에서 일본군을 앞세운 관군에 패하여 광양으로 후퇴했다. 11월 10일에는 좌수영(여수)으로 진격했다. 동학군은 덕양역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좌수영의 진산인 종고산을 점령했으나 추운 계절이어서 지탱하지 못하고 그냥 회군했다. 11월 16일 다시 좌수영으로 진격하여 서문에서 며칠 동안 접전을 벌였으나 입성을 못하고 회군했다. 11월 20일 세 번째로 좌수영을 공격하여 종고산을 점령하였는데 이날 밤 일본군은 서북의 흥국사 쪽에서 수사 김철규의 관군은 남쪽으로부터 협공하는 바람에 패하여 좌수영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12월 6일 일본군과 관군이 남하하여 광양으로 밀려 다음날인 7일에는 민보군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접주 류하덕과 함께 피체되어 효수당했다. 김인배는 6일 밤 최후를 각오한 나머지 처남 조승현를 불러 “장부가 사지에서 죽음을 얻는 것은 떳떳한 일이요 다만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로다. 나는 공생동사를 맹세한 동지들과 최후를 같이할 것이니 그대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를 봉양하시오”라고 일렀다. 그리하여 조승현은 이날 밤 광양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광양읍의 빙고등氷庫嶝은 동학군의 포살장이었다고 한다. 그가 중심이 된 ‘영호도회소’는 동학혁명사에서 유일하게 다른 지역과 연대한 조직을 만들고 활동을 벌인 사례로 꼽힌다. 김인배가 이끈 영호남 연합군이 순천에 본영을 두고 인근 광양현과 낙안군, 좌수영 지역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서부 경남지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김인배라는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1.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 김인배 장군 추모비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선동리 407-1 동학혁명 당시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로 전남 동남부와 경남 서남 지역에서 동학군을 이끈 김제 원평 출신의 동학군 지도자 김인배를 추모하여 2010년에 세운 비이다. 김인배를 비롯한 김해 김씨 경파 화원 종중의 영모당에 함께 있다. 추모비로 올라가는 농로 변에는 〈동학농민혁명군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 김인배 봉안묘奉安墓〉라는 돌로 된 작은 비가 서 있다. 그 옆에는 김해 김씨 경파 화원 종중 영모당 입구라는 작은 석비가 서 있다. 글 조성갑 사진 최인경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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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선생의 삶과 길고된 삶이었다. 험난한 삶이었다. 의로운 삶이었다. 외로운 삶이었다. 찬란한 삶이었다. 101년 전, 의암 손병희 선생이 눈을 감았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의 주축이 되어 독립을 선언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를 보낸 충북 청주에는 생가터가 복원되어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6인이 충북 출신인만큼 청주 삼일공원에는 선생을 비롯한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친일 행적이 드러난 정춘수의 동상은 1996년 시민단체에 의해 철거되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동학의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의 지도자로서, 독립운동가로 교육사업가로 한평생 사람을 한울님처럼 모시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을 바쳤다. 스승님의 가르침이었다. 선생이 걷던 한걸음 한걸음에 스승님의 말씀이 있었고 한울처럼 모실 사람들이 있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이 눈 감은지 100년이 흘렀다. 선생이 꿈꿨던 독립된 나라에서 사람이 한울님이 되는 세상은 과연 얼만큼 와 있을까. <편집자 주> 01.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지 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충북 청주시에는 동학혁명의 지도자이며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대표로 독립을 위해 희생한 손병희 선생의 생가와 사당이 잘 조성되어진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지’가 있다. 이곳은 3·1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 주위에는 의암영당, 의암동상, 의암기념관, 의암정 등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지’가 조성돼 있다. 또 유허지 옆 동산에는 1961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허비가 건립됐다. 의암 손병희(1861~1922) 선생은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간본위를 중시하고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자주독립정신을 주장했다. 손병희 선생은 1861년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났다. 1882년 22세때 동학에 입교해 3년 뒤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됐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으로서 북접의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 등지로 피신했다. 그는 1897년 최시형 선생의 뒤를 이은 제3대 교주가 되고 동학운동의 지도자만이 아닌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손병희 선생은 탄압을 피해 중국에 피신했으나 ‘손병희의 망명을 받아 들이지 말라’는 조선정부의 압력으로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5년 일본에서 같은 망명자 신분이었던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조희연 등 개화파 전직 관료들과 교류하고 망명 중 신문 기고 등으로 내정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설파했다. 1905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귀국했다. 천도교 교인이라면 무조건 잡아갈 정도로 천도교를 극심히 탄압하던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으로 무기력해진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1908년 교주 자리를 자리를 박인호에게 승계하고 우이동 봉황각에 은거하며 교육 사업(보성전문학교, 동덕여학교 인수)과 출판사업에 힘을 쏟았다. 1919년 민족 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해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경각심과 우리 민족 모두에게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중 뇌일혈로 쓰러져 1920년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1922년 5월 19일 상춘원에서 요양하다 62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02.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 ‘손병희 생가’ 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524-4 손병희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전면 4칸 반의 초가집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어 1979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됐다. 손병희 선생 생가는 조선 철종12년(1861) 4월 8일 손병희 선생이 태어나서 22세가 되는 시기까지 살던 집이다. 생가는 네모반듯한 마당을 앞에 두고 본채의 북쪽에는 광채를 두어 곡식과 생활 도구를 넣어두는 헛간이 있다. 마당 한편에는 자그마한 산수유나무도 있어 봄이 되면 노란 산수유 꽃을 만나 볼 수 있다. 이곳 생가 주위에는 의암영당, 의암동상, 의암기념관, 의암정 등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지’가 조성돼 있다. 또 유허지 옆 동산에는 1961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허비가 건립됐다. 03. 밀양손씨 역승공파 종중 수정재 ‘의암 손병희 추모비’ 소재지) 대전 광역시 서구 변동 253-47 대전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의암 손병희 선생의 종중이다. 수정재水晶齋 밀양손씨택승공파종중의 재사齋舍로, 재실 뒷산을 수정암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1945년 폭격으로 불타버리고, 1966년 문중의 결의에 따라 재건축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 끝으로 1칸씩 온돌방을 두었다. 이곳에 2012년 10월 의암 순국90주년을 맞아 역승공파 종중에서 추모비를 세웠다. 04. 의암기념관과 의암정 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524-4 의암기념관에는 손병희 선생의 살아생전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 유물의 대부분은 천도교측에서 반영구 임대 형식으로 임대하였다고 한다. 또한 민족 사관을 정립한 단재 신채호 선생, 의병장 한봉수 선생 등을 소개하는 방도 별도로 마련돼 있다. 이곳에는 독립운동사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한 충북 독립지사를 소개한 자료와 이야기들이 함께 담겨있다. 탑골 공원의 팔각정을 복원해 만든 ‘의암정’ 의암기념관 옆에는 의암정이라는 팔각정도 자리해 있다. 이곳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체포됐던 탑골공원의 팔각정을 복원해 만들어진 곳이다. 05. 청주 삼일공원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 159-1 삼일공원은 우암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3·1 운동과 관련이 있는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충청도 출신 인사인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 횃불”의 동상을 찾을 수 있다. 횃불은 본래 정춘수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후에 친일 행적이 드러나 1996년 2월 8일 시민단체에 의해 동상이 철거 됐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념탑이 있다. 06. 청주 (육거리) 시장 청주 건재약 도매시장 앞을 지날 때에 행길가에 돈주머니가 떨어져 있어 주어서 세어보니 삼백냥이라는 큰 돈이었다. 손병희는 돈을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이곳 길가에서 임자를 만나면 내어 주리라고 마음먹고 유실물 돈 3백 냥을 주인을 찾아준 장소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또한 짚신 두 컬레 만들어서 판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 시장은 약재 건재상과 일반 시장이 함께 조성 되어 있는 청주의 옛시장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청주의 전통시장이다. 이 장소의 출처는 ‘천도교창건사’와 이광순 저 ‘위대한 한국인 의암 손병희’(태극출판사, 1975.12.18. 초판 발행) 참고 하여 추정한 것이다. 07. 초정 약수터 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 135-1 초정약수椒井藥水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초정리에 있는 약수터이다. 지하 100m의 석회암층에서 하루 약 8,500L 정도 솟아나는 무균의 탄산수이므로, 인체에 무해한 각종 미네랄(광물질)이 포함되어 있다. 흔히 ‘세계 3대 광천수’라고 불리나, 공인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초정椒井이란 지명은 ‘후추처럼 톡 쏘는 물이 나오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동국여지승람』·『조선왕조실록』등에도 기록될 만큼 유명했던 이 약수터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1881년 7월 초정에 약수를 마시러 갔던 손병희는 많은 사람들이 약수를 마시지 못하고 서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일인지 살펴보니 강원도 영월군수를 지냈다는 송월령과 평안남도 숙천군수를 지냈다는 변숙천이 약수터를 독차지하고 주변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이를 본 손병희는 두 사람에게 약수터에서도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있냐며 큰 소리로 꾸짖고, 약수를 떠서 마신 후 주변 사람들에게도 약수를 돌렸다. 또한 그는 송월령과 변숙천에게 자신을 ‘청주에서 온 상놈’이라고 소개하며, 시 한 수를 지어 이들을 훈계했다고 전해진다. 손병희는 상대가 문중의 어른이나 양반일지라도 신분차별에 대해 분노하며, 당당히 맞섰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 신분에 따른 사회적 차별의 철폐는 그에게 반드시 타도해야 할 과제이자 숙명이 되었다. 이런 기질이 평등을 외친 동학에의 입도의 기반이 되었다. 훗날 손병희는 ‘초정약수음’이라는 시를 남겼다. ‘비록 가시나무라 이름 지어도 핀 꽃은 아름답고 雖云芒木發花佳 더러운 못에 연꽃일지라도 향기는 더욱 좋더라 蕩地蓮花尤香好 예와 지금 양반과 상놈이 무엇이 다름이 있으랴 古今班常何有別 초정에 마음을 씻으니 사람은 평등하더라 椒井洗心平等人’ 새롭게 이곳에 공원이 조성되었는데 초정약수 원터와 세종대왕과 한글이라는 테마로 조성되면서 의암 손병희 테마는 사라졌다. 청주시에서는 이곳에 손병희선생의 테마도 반드시 조성해야 한다. 08. 문의문화재 단지내 소재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로 721 1997년 청원군이 사라져가는 고유의 전통문화를 재현하여 선조들의 얼을 기리고 배우기 위해 조성한 역사교육장이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9호인 문산관과 양반가옥, 민속자료전시관을 비롯하여 10동의 고건물이 있고, 장승, 연자방아, 성황당 등 옛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수집되어 있다. 1998년 11월에 개관한 기와박물관이 있는데, 백제시대부터 근대까지의 기와를 전시해 놓았다. 권태성이 기증한 와당 및 기와 등 774점과 문화적 가치를 지닌 불상과 석조유물 20여 점 등 총 200여 점을 고증을 거쳐 전시하고 있다. 단지 안에는 약수터, 놀이광장 등 편의 시설이 있으며, 도내에서 처음 개장한 자동차 전용극장이 있어서 문의영화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입구를 지나 처음 길가 왼편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충청지역 애국지지사 7분의 상이 세워져 있다. 이중 가운데가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다.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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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암 전희식의 책 '똥꽃' 개정판 출간책소개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들의 실재 이야기. 늙고 병든 노인이 관리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로 내려가 부모의 존엄과 나아가 자신의 존재 근원을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를 따뜻하고 아름답게 풀어냈다.도시에서는 방안에 있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어, 늙고 병들어 이젠 쓸모 없어졌나 자책해오던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기자 적극적이 되고 밝아진다. 치매를 86년을 살아오신 어머니 삶의 고단함이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여 치매가 병이 아닌 치유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출판사 서평 귀도 멀고 똥오줌도 잘 못 가리는 어머니가 계실 곳은 결코 서울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더구나 사시사철 두 평 남짓한 방에서만 지내면서 밥도 받아먹고 똥오줌도 방에서 해결하는 것은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편할지 모르지만 여든여섯 노쇠한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가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나는 어머니에게 파란 하늘도 보여 드리고 바위와 나무, 비나 눈, 구름도 보여 드리려고 한다. 어머니가 철따라 피고 지는 꽃도 보시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계곡의 바람결도 느끼시고 크고 작은 산새들이 처마 밑까지 와서 노닥거리는 것도 보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30-31쪽)“아이가! 저기 눈 아이가? 눈이 다 내리네. 이기 몇 년 마이고.”눈 내리는 풍경을 보고 놀라는 어머니 모습이 더 놀라웠던 나는 신문지에 눈을 받아 방으로 들어왔다.“눈 맞아요. 이기 눈인기라요.”그러면서 나는 어머니 손에 눈을 털어 놓았다.“그래, 눈 맞네. 세상 참 좋아졌네. 눈 내리는 것도 다 볼 수 있고.”눈 내리는 풍경을 보는 것이 세상 좋아진 것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여러 해를 햇볕 한 줄기 들어오지 않고 잿빛 하늘을 손바닥만 한 창문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도시의 방안에서 형광등 불빛만 의지해 사셨던 생각을 하면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39-40쪽)어머니를 모시기로 작정하고 시도한 일 가운데 하나가 기저귀 없이 생활하는 것이었다. 기저귀는 3년 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기로 작정한 결정적인 계기기도 했다. 3년 전에 나는 늘 어머니에게 기저귀를 채워 놓는 것은 ‘똥오줌도 못 가리는 애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공인하는 과정이라고 여겼다. 노출되지 않은 개인의 수치와는 달리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 인정되어 버리면 심리 상태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두 달 이상 거치면서 어머니의 배뇨감각이 회복된 것은 물론 당신 스스로 안방 뒷문을 열고 나가서 내가 특별히 고안해 만든 어머니 전용 뒷간에서 똥오줌을 보실 수 있게 되었다. (121쪽)사고로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신 어머니는 예전 같으면 늘 방안에 앉아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괴로우셨겠지만 시골집에 오셔서는 그럴 시간이 없다. 전희식 씨가 그럴 틈을 만들지 않는다.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끌고 마당에 나와 텃밭에 물을 주고, 필사적으로 부엌 문턱을 넘어 아궁이 불을 지피기도 하신다. 어릴 적 먹던 가죽자반을 만들고 20년 만에 수제비를 만들어 자식 밥상을 차려주셨다. 늙고 병든 노인들이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한없이 위축되지만, 전희식 씨는 어머니가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해드린다. 어머니는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일을 하면서 예전의 기억들이 서서히 재생되기 시작한다.전희식 씨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신 어머니에게 그만의 방법으로 현실감각을 되찾아드린다. 일부러 양말에 구멍을 내 어머니에게 슬쩍 내밀면 어머니의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바느질에 집중하신다. 전희식 씨는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할 때 끼어드는 것이 망상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현대의학이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백기를 들어버린 치매는 이 책에서 ‘포기한 삶의 틈새로 끼어든 이물질’일 뿐이다. 86년을 살아오신 어머니 삶의 고단함이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늘의 이치에 귀 기울일 때, 치매는 병이 아니라 치유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전희식 씨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3년 여 동안 수많은 관련 책과 자료, 노인병원에서 자원 활동을 하면서 얻게 된 것이다. 귀농을 통해 생태적인 삶에 눈을 뜨고 모심과 돌봄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현대의학은 치매의 원인을 알 수 없다고 선언했다. 완치는 없고 진행을 완화시키는 약이 있을 뿐이라고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대뇌피질 속에 쌓이는 특수한 단백질인 ‘베타아밀로이드’가 뇌세포를 파괴하는 데 따른 기억 손실과 분별력 상실이 치매 증상이라는 진단은 일찍이 했지만 손상된 세포를 보호하는 작용을 하는 베타아밀로이드가 왜 과잉되어 도리어 세포를 공격하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나는 나름대로의 치매 원인도 알고 처방도 알고 돌보는 방법도 알았다.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는 것,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며 거기서 삶의 이치와 하늘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83쪽)전희식 씨는 책읽기를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동화나 옛이야기를 찾아서 읽어 드리다 정작 노인들이 읽을 만한 책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은 것들’이 봐야 할 효도를 주제로 한 이야기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동화도 어머니에게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전희식 씨는 직접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노화老話’이다. 노인을 소재로 하거나 노인문제를 다룬 책들은 있지만, 노인이 읽을 만한 이야깃감으로 만들어진 책은 거의 드문 현실에서 ‘노인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된 것이다. 노화는 어머니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한 편 두 편 노화가 만들어지면서 어머니의 기억들이 또렷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내가 동화를 쓰기로 했다. 아니 노화를 쓰기로 했다. ‘젊은 것들’보는 책이 아니라 ‘늙으신 분들’ 보는 책 말이다. 적당한 동화책 이야기를 뼈대로 삼아 어머니의 옛 생활과 연결시키고 어머니의 한결같은 소원인 ‘벌떡 일어나 남들처럼 돌아댕기는’ 이야기를 곁들여 만들었다. 옷에 똥오줌 싸는 할머니를 등장시켜 그것이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이야기도 만들었다. 출산휴가나 육아휴가가 있듯이 치매부모 돌보는 ‘효도휴가’라는 제도도 만들어 이야기 속에 넣었다. (182쪽)어머니를 모시면서 전희식 씨 가슴에 가장 깊게 자리 잡은 것은 바로 ‘존엄’이다. 늙고 병든 노인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우리 사회가 노인에게 저지르는 무례와 무시는 바로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전희식 씨는 어머니에게 절대 반말을 쓰지 않는다. 집을 나가고 들어올 때는 언제나 큰절로 인사를 드리고 무슨 일이든 어머니에게 먼저 알리고 한다.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결코 흘려듣는 법이 없다. 이 책이 나올 수 있게 된 것도 어머니의 말씀에 온전히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되살려지는 기억들을 통해 오히려 전희식 씨가 새로 배우고 깨닫는 것이 더 많았다. 자연치유는 어머니와 더불어 어머니를 모신 아들에게도 가닿은 것이다. 일하러 나갔다 온 사이 혼자 뒷간에 못 가시고 방에 누신 어머니 똥이 꽃으로 보이는 놀라운 치유의 힘.똥꽃감자 놓던 뒷밭 언덕에연분홍 진달래 피었더니방안에는묵은 된장 같은 똥꽃이 활짝 피었네.어머니 옮겨 다니신 걸음마다검노란 똥자국들.어머니 신산했던 세월이방바닥 여기저기이불 두 채에고스란히 담겼네.어릴 적 내 봄날은보리밭 밀밭에서구릿한 수황냄새로 풍겨났지.어머니 창창하시던 그 시절 그때처럼고색창연한 봄날이 방안에 가득 찼네.진달래꽃몇 잎 따다깔아 놓아야지. (43쪽)이 책의 모든 소재들을 제공하고 이야기 줄기를 엮은 어머니가 공동저자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치매라는 병을 넘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 전희식 씨의 어머니를 넘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존엄을 깨닫게 하는 『똥꽃』. 자식이 없는 삶은 가능하지만 부모가 없는 삶은 없기에 이 책은 누구 가슴에나 깊숙이 다가갈 것이다. 한편 이 책의 저자 목암 전희식은 저서 묶음 판매를 직접 진행하고 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저자의 책 판매 글과 할인받아 구매할 수 있다. <똥꽃> 개정판 외 졸저를 소개합니다. (google.com)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