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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선생의 삶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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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선생의 삶과 길

고된 삶이었다.

험난한 삶이었다.

의로운 삶이었다.

외로운 삶이었다.

찬란한 삶이었다.

 

101년 전, 의암 손병희 선생이 눈을 감았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의 주축이 되어 독립을 선언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를 보낸 충북 청주에는 생가터가 복원되어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6인이 충북 출신인만큼 청주 삼일공원에는 선생을 비롯한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친일 행적이 드러난 정춘수의 동상은 1996년 시민단체에 의해 철거되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동학의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의 지도자로서, 독립운동가로 교육사업가로 한평생 사람을 한울님처럼 모시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을 바쳤다.

 

스승님의 가르침이었다.

선생이 걷던 한걸음 한걸음에 스승님의 말씀이 있었고 한울처럼 모실 사람들이 있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이 눈 감은지 100년이 흘렀다.

선생이 꿈꿨던 독립된 나라에서 사람이 한울님이 되는 세상은 과연 얼만큼 와 있을까.

 

<편집자 주> 

 


01.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지

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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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충북 청주시에는 동학혁명의 지도자이며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대표로 독립을 위해 희생한 손병희 선생의 생가와 사당이 잘 조성되어진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지’가 있다. 이곳은 3·1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 주위에는 의암영당, 의암동상, 의암기념관, 의암정 등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지’가 조성돼 있다. 또 유허지 옆 동산에는 1961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허비가 건립됐다.

의암 손병희(1861~1922) 선생은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간본위를 중시하고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자주독립정신을 주장했다.

손병희 선생은 1861년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났다. 1882년 22세때 동학에 입교해 3년 뒤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됐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으로서 북접의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 등지로 피신했다. 그는 1897년 최시형 선생의 뒤를 이은 제3대 교주가 되고 동학운동의 지도자만이 아닌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손병희 선생은 탄압을 피해 중국에 피신했으나 ‘손병희의 망명을 받아 들이지 말라’는 조선정부의 압력으로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5년 일본에서 같은 망명자 신분이었던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조희연 등 개화파 전직 관료들과 교류하고 망명 중 신문 기고 등으로 내정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설파했다. 1905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귀국했다. 천도교 교인이라면 무조건 잡아갈 정도로 천도교를 극심히 탄압하던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으로 무기력해진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1908년 교주 자리를 자리를 박인호에게 승계하고 우이동 봉황각에 은거하며 교육 사업(보성전문학교, 동덕여학교 인수)과 출판사업에 힘을 쏟았다.

1919년 민족 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해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경각심과 우리 민족 모두에게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중 뇌일혈로 쓰러져 1920년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1922년 5월 19일 상춘원에서 요양하다 62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02.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 ‘손병희 생가’

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524-4

손병희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전면 4칸 반의 초가집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어 1979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됐다. 손병희 선생 생가는 조선 철종12년(1861) 4월 8일 손병희 선생이 태어나서 22세가 되는 시기까지 살던 집이다.

생가는 네모반듯한 마당을 앞에 두고 본채의 북쪽에는 광채를 두어 곡식과 생활 도구를 넣어두는 헛간이 있다. 마당 한편에는 자그마한 산수유나무도 있어 봄이 되면 노란 산수유 꽃을 만나 볼 수 있다.

이곳 생가 주위에는 의암영당, 의암동상, 의암기념관, 의암정 등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지’가 조성돼 있다. 또 유허지 옆 동산에는 1961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허비가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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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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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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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03. 밀양손씨 역승공파 종중 수정재 ‘의암 손병희 추모비’

소재지) 대전 광역시 서구 변동 25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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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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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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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대전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의암 손병희 선생의 종중이다.

수정재水晶齋 밀양손씨택승공파종중의 재사齋舍로, 재실 뒷산을 수정암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1945년 폭격으로 불타버리고, 1966년 문중의 결의에 따라 재건축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 끝으로 1칸씩 온돌방을 두었다.

이곳에 2012년 10월 의암 순국90주년을 맞아 역승공파 종중에서 추모비를 세웠다.

 



04. 의암기념관과 의암정

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524-4

의암기념관에는 손병희 선생의 살아생전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 유물의 대부분은 천도교측에서 반영구 임대 형식으로 임대하였다고 한다.

또한 민족 사관을 정립한 단재 신채호 선생, 의병장 한봉수 선생 등을 소개하는 방도 별도로 마련돼 있다. 이곳에는 독립운동사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한 충북 독립지사를 소개한 자료와 이야기들이 함께 담겨있다.

 

탑골 공원의 팔각정을 복원해 만든 ‘의암정’

의암기념관 옆에는 의암정이라는 팔각정도 자리해 있다.

이곳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체포됐던 탑골공원의 팔각정을 복원해 만들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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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선생의 부모님 묘소, 사진_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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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내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사진_최인경

 



05. 청주 삼일공원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 159-1

삼일공원은 우암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3·1 운동과 관련이 있는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충청도 출신 인사인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 횃불”의 동상을 찾을 수 있다.

 

횃불은 본래 정춘수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후에 친일 행적이 드러나 1996년 2월 8일 시민단체에 의해 동상이 철거 됐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념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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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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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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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06. 청주 (육거리) 시장

청주 건재약 도매시장 앞을 지날 때에 행길가에 돈주머니가 떨어져 있어 주어서 세어보니 삼백냥이라는 큰 돈이었다. 손병희는 돈을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이곳 길가에서 임자를 만나면 내어 주리라고 마음먹고 유실물 돈 3백 냥을 주인을 찾아준 장소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또한 짚신 두 컬레 만들어서 판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 시장은 약재 건재상과 일반 시장이 함께 조성 되어 있는 청주의 옛시장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청주의 전통시장이다.

이 장소의 출처는 ‘천도교창건사’와 이광순 저 ‘위대한 한국인 의암 손병희’(태극출판사, 1975.12.18. 초판 발행) 참고 하여 추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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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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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07. 초정 약수터

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 135-1

초정약수椒井藥水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초정리에 있는 약수터이다. 지하 100m의 석회암층에서 하루 약 8,500L 정도 솟아나는 무균의 탄산수이므로, 인체에 무해한 각종 미네랄(광물질)이 포함되어 있다. 흔히 ‘세계 3대 광천수’라고 불리나, 공인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초정椒井이란 지명은 ‘후추처럼 톡 쏘는 물이 나오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동국여지승람』·『조선왕조실록』등에도 기록될 만큼 유명했던 이 약수터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1881년 7월 초정에 약수를 마시러 갔던 손병희는 많은 사람들이 약수를 마시지 못하고 서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일인지 살펴보니 강원도 영월군수를 지냈다는 송월령과 평안남도 숙천군수를 지냈다는 변숙천이 약수터를 독차지하고 주변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이를 본 손병희는 두 사람에게 약수터에서도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있냐며 큰 소리로 꾸짖고, 약수를 떠서 마신 후 주변 사람들에게도 약수를 돌렸다. 또한 그는 송월령과 변숙천에게 자신을 ‘청주에서 온 상놈’이라고 소개하며, 시 한 수를 지어 이들을 훈계했다고 전해진다. 손병희는 상대가 문중의 어른이나 양반일지라도 신분차별에 대해 분노하며, 당당히 맞섰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 신분에 따른 사회적 차별의 철폐는 그에게 반드시 타도해야 할 과제이자 숙명이 되었다. 이런 기질이 평등을 외친 동학에의 입도의 기반이 되었다. 훗날 손병희는 ‘초정약수음’이라는 시를 남겼다.

 

 

‘비록 가시나무라 이름 지어도 핀 꽃은 아름답고 雖云芒木發花佳

더러운 못에 연꽃일지라도 향기는 더욱 좋더라 蕩地蓮花尤香好

예와 지금 양반과 상놈이 무엇이 다름이 있으랴 古今班常何有別

초정에 마음을 씻으니 사람은 평등하더라 椒井洗心平等人’

 

새롭게 이곳에 공원이 조성되었는데 초정약수 원터와 세종대왕과 한글이라는 테마로 조성되면서 의암 손병희 테마는 사라졌다.

청주시에서는 이곳에 손병희선생의 테마도 반드시 조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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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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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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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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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08. 문의문화재 단지내

소재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로 721

1997년 청원군이 사라져가는 고유의 전통문화를 재현하여 선조들의 얼을 기리고 배우기 위해 조성한 역사교육장이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9호인 문산관과 양반가옥, 민속자료전시관을 비롯하여 10동의 고건물이 있고, 장승, 연자방아, 성황당 등 옛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수집되어 있다.

1998년 11월에 개관한 기와박물관이 있는데, 백제시대부터 근대까지의 기와를 전시해 놓았다. 권태성이 기증한 와당 및 기와 등 774점과 문화적 가치를 지닌 불상과 석조유물 20여 점 등 총 200여 점을 고증을 거쳐 전시하고 있다.

단지 안에는 약수터, 놀이광장 등 편의 시설이 있으며, 도내에서 처음 개장한 자동차 전용극장이 있어서 문의영화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입구를 지나 처음 길가 왼편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충청지역 애국지지사 7분의 상이 세워져 있다. 이중 가운데가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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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인경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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