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천도교 인터넷 신문 개국 기념 축사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 뜻깊은 지일 기념일을 맞아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천도교가 세상과 소통할 또 하나의 길인 천도교 인터넷 신문이 개국하고 봉고식을 거행하는 일입니다. 특히 오늘은 해월신사님의 승통 기념일입니다. 해월신사님의 가르침 중에 ‘대저 도는 때를 맞추어 쓰고 활용하는 데 있나니 때와 짝하여 때를 알고 때에 맞추어 쓸 줄 알아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어 소통의 방식도 달라지고 있으니 인터넷 신문 역시 그 바탕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천도교가 한때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간 적이 있습니다. 또 그렇지 못한 때도 있었습니다. 천도교는 같지만 이처럼 시기에 따라 천도교가 다른 모습을 보이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천도교가 얼마나 세상과 잘 소통하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도교 인터넷 신문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얘기를 전하는 것만큼 세상의 변화와 문제점을 우리의 고민 속으로 끌어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의암성사께서 말씀하신 삼전론 가운데 ‘언전(言戰)’을 제대로 수행하기를 바랍니다. 천도교 인터넷 신문이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의 목적 달성에 중심에 설 수 있기를 간곡히 바라는 말씀드리며 축사에 갈음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암 박남수 심고
-
인터넷천도교신문 개국을 축하드립니다천도교신문의 인터넷판 개국을 축하합니다. 만시지탄의 심정으로 우리 도의 숙원이었던 정보화, 디지털화가 실현되어 매우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인터넷 천도교 신문은 교인들 곁에 한층 가깝게 다가가고 무엇보다도 젊은 층에 우리의 진리를 알릴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중앙총부 임직원 여러분들의 노고에 우선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언론은 사회적 공기로서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라고 합니다. 금번의 인터넷 천도교 신문의 개국은 우리 도를 위한 공기이고 우리 도의 민주적 확대입니다. 그동안 우리 도의 가장 뒤진 부분이 홍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제는 그 역할을 천도교 신문이 담당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제 천도교 신문은 인터넷으로 우리의 활동을 보다 속도감 있게 전달하여 우리의 도가 살아있음을 만천하에 알리게 될 것입니다. 의암 성사님의 삼전론에서 언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다만 천도교 신문은 우리의 진리를 홍보하되 내부의 소리도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사회나 조직도 내부의 비판기능이 활발해야 만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칼 도이치라는 학자는 언론을 인체의 혈액순환에 비유해 올바른 언론의 역할과 건강한 사회를 연결했습니다. 모쪼록 천도교 신문이 진정한 천도교의 대변지이자 천도교 언론의 역할을 해 주기를 심고 드립니다. 신암 송범두 심고
-
천도교 인터넷신문 개국을 축하하면서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천도교 인터넷신문」 개국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21세기 사회는 전 분야가 인터넷 디지털 시대입니다. 모바일로 검색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실상과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기사로 인터넷신문으로의 추세는 빠르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교단의 발전을 위해서도 인터넷신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터넷신문이 제2의 부흥을 개척해 가는 계기가 되어 천도교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하는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기를 심고 합니다. 그리고 교단의 소식을 제대로 알리고 활성화에 보탬이 되어 모든 분이 상생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천도교의 교리와 교사 그리고 새로운 지식 정보를 제공해 주고, 다양한 문화를 전달하는 뉴스매체로 성장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아울러 그동안 인터넷신문 개국을 위해 애써주신 여러분의 헌신 노력에 감사드리며, 더 큰 열매가 열리기를 기원하면서 무한한 지지와 박수를 보냅니다. 모쪼록 건강한 눈과 진솔한 마음으로 이 시대에 걸맞은 언론매체로 거듭 나가기를 기대하며, 「천도교 인터넷신문」의 뿌리가 나날이 깊어지고, 그 열매는 더욱 튼실해지도록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바랍니다. 종무원장 용암 주용덕 심고
-
개국을 축하합니다.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우리가 늘 생각하고 바라던 천도교 인터넷 신문을 창간하게 되어 무척 반갑고 기쁜 마음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천도교 인터넷 신문을 준비하고 발행하신 중앙총부와 담당자분들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천도교 인터넷 신문이 발행되어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고 천도교의 소식을 빠르게 전달하여 교인 여러분의 마음을 전달 할 수 있는 천도교 인터넷 신문이 되리라 믿습니다. 천도교 인터넷 신문을 보다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도 교인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격려가 필요하며, 중앙총부와 담당자께서는 인적 자원과 재원의 투입, 체계적인 조직관리와 지속적인 운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무원장님과 관계자분께서는 지금까지 천도교 인터넷 신문을 개국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과 수고가 있었기에 오늘의 인터넷 신문 개국이 가능하였다고 봅니다.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전진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기상의 변화로 올해는 비가 많이 오고 무더운 날씨에 건강 관리 잘하시고 교인 여러분들의 가정이 모두 행복하시길 심고 드립니다. 종의원 의장 명암 선우철수 심고
-
축 인터넷 신문 개국!모시고 안녕하십니까.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극단화되는 정치 성향과 갈등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세상 돌아가는 사실을 진실하게 보도하고 세상을 선도할 매체가 과연 어느 곳인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영논리에 경도된 보도 매체들에 현혹되어 실제 상황이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지 무척 알기 어려운 상황에 계시는 동덕님도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천도교에서 천도교 신문을 전자적 매체로 구현하게 된 점은 무척 고무적이라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잠시나마 세상을 선도해 오던 우리 도가 침체에 빠진 지 무려 50년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 안팎의 공감대입니다. 우리 동학 천도교가 세상을 구하는 유일한 무극대도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매체로서 인터넷 천도교 신문의 출발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이유는 이 매체 도구가 세상을 구하는 포덕의 대도가 되어야 한다는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유사 종단조차 방송 매체를 소유하고 세상에 영향력을 전파하는 작금의 현실을 볼 때 만시지탄이 있다는 소회는 뒤로 하고 천도교 신문을 이어 더욱 활활 발발하게 우리 도의 전파, 포덕을 책임질 매체의 탄생을 염원하면서 우리 천도의 포덕에 인터넷 천도교 신문이 그 영역에서 맡은 바 임무를 백분 발휘하여 줄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 동덕님 모두와 함께 가슴에 품고 그 성공을 기원하면서 진심으로 축복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원장 부암 정덕재 심고
-
인터넷판 천도교신문 개국 축하 한마디
-
동천고등학교 학생 18명 입교식 봉행동천고등학교 학생 18명 입교식 봉행 지난 7월 10일 오후 4시 30분 천도교 정신을 건학이념으로 설립한 동천고등학교의 동천교구에서는 18명의 학생이 천도교에 들어오는 입교식을 봉행하였다. 신원기 교화부장의 사회로 시작한 입교식에서 중암 김대석 동천교구장은 전교인인 배미화 원곡학원 이사장을 대신해 학생들에게 주문을 일일이 수여하였다. 이날 입교한 학생은 김성민(2학년), 김하진, 이재연, 이준혁, 최우혁, 홍준재, 강민재, 강준성, 이승모, 강석민, 서창석, 송승윤, 정세헌, 정시현, 이준용, 박정환, 이용민, 김규민(이상 1학년) 등 총 18명이다. 중암 김대석 동천교구장은 입교식 후 학생들에게 “천도교는 미래의 종교로 여러분이 미래의 주인공으로서 천도교에 입교한 것을 축하하며, 천도교를 바르게 신앙해 한울님을 모신 거룩한 존재임을 깨닫고 미래 사회의 주역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덕담을 주었다. 이어 종학실장을 맡고 있는 덕암 성강현 흥신포 직접도훈은 “천도교 입교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울님 모심을 찾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나아가 우리 사회를 이끌어 나갈 개벽군으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염원하는 심고를 드리겠다.”고 격려의 인사를 전했다. 입교식 후 인근의 못골시장에서 입교를 축하하는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다. 이날 입교한 18명은 동천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자율적으로 동천교구에서 주관하는 월요 시일식에 참여해 감화를 받고 천도교의 정신에 공감하여 입교를 결정했다. 총부에서는 매년 400만원을 지원하여 학생들의 장학과 학생 포덕 활동에 지원하고 있다. 동천고등학교는 고 흥암 안관성 종법사가 천도교의 인내천 정신을 갖춘 새로운 인재를 배출하고자 1980년 개교하여 올해 44년을 맞은 부산의 명문 고등학교이다. 동천고등학교는 교직원과 학생들의 교화를 위해 종학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 교직원이 동천교구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며 동학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지도하고 있다.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세계시민’과목에서 세계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이 바로 동학의 시천주와 인내천 정신에 있음을 지도하고 있다. 또, ‘세계시민과 동학부(이전 종학부)’라는 자율동아리를 두어 희망학생을 모집해 월요시일식 참석, 정신문화유적지 탐방, 인근 교구 시일식 참석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영웅 최진립 장군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글을 남겼다. “우리 선조 험천 땅에 공덕비를 높이 세워 만고유전 하여보세. 송백 같은 이내 절개 금석으로 세울 줄을 세상 사람 뉘가 알꼬.”, “선조의 충의와 절개는 용산에 남아 있네. 해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우리 임금님 성덕을 다시 돌아보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언급한 ‘선조’는 잠와 최진립 장군으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7대조이다. ‘용산’은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있는 용산서원을 말한다. 유림에서는 최진립 장군의 충절과 학문을 기려 용산서원을 창건하여 공을 제향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숙종 37년에 임금이 친히 ‘숭렬사우崇烈祠宇’로 글을 내린 사액 사당이다. 당시 무신으로 사액 사당을 받은 이는 이순신과 김시민 장군뿐일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용산서원 입구에 공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1568~1636) 장군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최진립 장군은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의 17세 후손이며 사성공 최예의 6세 후손이다. 1568년 경주 현곡면 하구리 구미산 아래에서 참판공 최신보와 평해황씨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나 자랐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4월 21일 경주성이 함락됐다. 당시 25세였던 장군은 아우 최계종, 당숙 최신린, 최봉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5월 27일 김호, 손엽, 권사악, 이눌 등의 의병장들과 힘을 합해 계연(김유신 장군 묘 아래 경주 서천 일원)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6월 2일에는 언양에서 경주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김기 의병장과 함께 열박재(충의당과 울주군 두서면의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7월 27일에는 경주 손엽, 권복시, 권사민 의병장들과 함께 영천성 수복 전투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 100여 명을 이끌고 울산 서생포에 주둔 중인 적을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장군은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2등을 받았고, 훈련부정, 도총도부사, 마량진 첨사, 경원 부사 등을 역임했다. 1636년 12월 13일,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군대는 며칠 지나지도 않은 12월 16일에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까지 포위했다. 최진립 장군은 69세라는 많은 나이에도 군사를 일으켜 남한산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가 전장으로 달려가기 직전, 충청감사 정세규가 ‘늙어 전장에 나가기 마땅치 않다’고 만류했지만 최진립 장군은 “내가 늙어 싸워서 이길 수 없더라도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는 있다”고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1637년 1월 2일, 청나라 장수 양고리(楊古利·양굴리)가 이끄는 적과 대치했다. 열세인 상황에서 최진립, 나성 현감 김홍익, 남포 현감 이경징, 금정 찰방 이상재 등은 포기하지 않았다. 훈련이 부족하고 전투력이 미약한 소수 부대지만 잘 통솔하여 적과 대등하게 싸웠고, 하루종일 10여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아군은 탄약과 화살이 바닥나고 군사도 이미 반이나 잃었다. 최진립 장군은 공주영장으로 군사를 이끌고 용인 험천 전투에 참여하여 용전하다가 장렬히 순절했다. 다음 해에 시체를 수습했는데 ‘그 모양이 살아 있는 듯하고 화살과 총알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름을 떨쳤던 장수 중 1636년 병자호란 때까지 생존한 이는 거의 없었다. 일본군 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이 당시 63세의 고령으로 병자호란에 참전한 사실이 두드러지는 정도다. 그런 만큼 불과 25세의 나이로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했던 최진립 장군의 69세 병자호란 참전과 순절은 특별한 이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진립 장군 묘소는 나라에서 내린 명당 터에 장지를 마련하여 장례를 치르고,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청백리에 녹선하였다. 고향 내남면 이조리에 정려비각을 세워 충절을 만대에 전하도록 하였다. 최진립 장군 묘소 뒤편에는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던 셋째아들 현감공 최동량의 묘소가 있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실천하며,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고, 해방 후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경주 최부자의 현조이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99호인 충의당은 경주 최씨 종가로 최진립 장군이 살았던 집이다. 본래 당호는 흠흠당欽欽堂이었는데, 1760년 무렵 건물을 고쳐 지으면서 집 이름을 충의당으로 바꾸었다. 충의당 일대는 ‘충의 공원’으로 조성하였고, 장군의 기마동상과 유물관인 충의관이 건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취재진이 충의당 종택을 방문한 날 종손을 만나 집안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에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와 한씨 사모님 이야기도 있었다. 사당인 충렬사와 닫혀있던 최진립 장군 위패도 열어서 보여주셨다. 사당 들어가는 입구에 200년 된 매실나무가 세월의 인고를 견디며 잘 자라고 있다. 기나긴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고 꽃 활짝 피는 날 다시 방문하고 싶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탄신하신 비슷한 시기에 심어졌으리라 여겨진다. 동학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는 마지막 경주 최부자인 최준을 나이로는 22살이나 많았지만 늘 존중했다고 한다. 최준에게 수시로 “동학은 경주 최씨와 최부자 가문의 가르침”이라며 예우했다. 경주 최씨, 그중 최진립 장군으로 시작되는 가계도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런 표현을 했을 것이다. 최진립 장군 묘소 아래 사패지賜牌地에 울산과학기술원(UNIST)이 건립되니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동학을 창명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최진립 장군의 7세손이니 공의 위대한 정신은 자손 대대로 이어졌다. 글 조성갑 사진 최인경 (탐방 팁) 용산서원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59 충의당과 충의공원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충의당길 15 최진립 장군 정려비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513-1 최진립 장군 묘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 산 157 (울산과학기술원 교수아파트 입구)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
일본군 상대로 최초의 위대한 승리내포 동학, 하나의 세력으로 내포 지역의 동학은 1880년대 초에 전파되고 188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1894년 5월 홍주 목사 이승우李勝宇가 부임하면서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이승우는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동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였고 관군을 동원하여 체포와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내포의 동학군들은 하나의 세력으로 거대화하려는 자구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이는 지역적으로 포별 각개활동을 하기가 더 이상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전국적으로는 이른바 2차 봉기의 분위기도 무르익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포의 동학군들도 그동안 위축되었던 활동을 회복하고,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목적에 동참하기 위하여 여미벌(餘美坪, 현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 총집결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여미벌에서는 ‘내포 동학군’이라는 하나의 거대 조직이 탄생하게 되었고, 내포 각지에서 활동하던 동학도들이 여미벌에 총집결하니 그 수가 1만 50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총봉기를 향한 서막-역사적 전투로 이들은 여미벌에서 창의의 뜻을 바로세우고 기세를 올리며, 대오를 엄중히 하고 식량과 무기를 준비하는 등 조직을 재편하면서 조만간 닥쳐올 전쟁에 대해서도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1894년 10월, 여미벌에서는 동학군의 총봉기에 동참하기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고 국왕을 능멸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일본군을 일거에 몰아내고, 반민족적 탐관오리들까지 축출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여미벌에서 박인호를 중심으로 한 총봉기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무렵, 내포 동학군들은 한양으로부터 진압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드디어 10월 24일, 내포 동학군들은 경군과 일본군의 연합 부대를 맞아 현재 충남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목(勝戰項, 승전곡勝戰谷, 승전우僧田隅)에서 역사적인 전투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승전목 전투’이다. 승전목 전투에서 운명을 걸다 승전목은 당진군 당진읍 구룡리 동쪽과 면천면 사기소리 서쪽에 걸쳐 약 3km 정도의 좁은 계곡을 이룬 곳이다. 계곡의 북쪽에는 이배산(離背山, 220m)이, 남쪽에는 웅산(雄山, 253m)이 솟아 있어 깊고 좁으며 꼬불꼬불하게 난 계곡 길을 굽어보고 있다. 내포 동학군들은 자신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과 경군의 이동 경로를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일본군과 경군이 면천을 출발해 여미로 향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급히 용장천을 따라 도동에 도착해서는 이배산 서쪽의 험한 능선과 반대편 검암산 능선에 미리 매복하였다. 승전목은 완벽한 S자형 협곡으로 수십m 높이의 바위들이 양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험한 지형이다. 이 협곡을 따라 나있는 샛길이 바로 면천과 운산을 이어 주는 유일한 통로였는데, 내포 동학군들은 바로 이 길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압군들은 삼웅리를 지나면서 동학군의 척후병과 맞닥뜨렸으나 간단하게 제압하였고, 승전목 입구에서도 400여 명의 동학군과 재차 교전을 치르고는 곧바로 승전목에 다다랐다. 기록에 남은 승전곡 전투 당시 치열했던 승전곡 전투 상황을 사료를 통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봉 척후가 관군이 행군해 옴을 보고하니 우리는 승전곡 양 산등으로 올라가 복병하고 있었소, 관군이 골짜기 속으로 몰려들어 왔소. 관군이 골짜기를 들어서자 우리는 곧 전단을 일으켜 교전 1시간여에 관군을 여지없이 대파하니…… 여미로 출병했던 병사들이 승전곡에 이르러 겨우 일진을 돌파하고 검암 후봉에 이르렀으나 수만명이 진을 친 것을 보고 기가 질려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퇴병했다고 한다. 경군과 일본군이 면천의 도동에 이르러 처음으로 적과 부딪혀서 한 번 싸워 이기고 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 경병과 일본군이 지세의 험준함을 알지 못하고 급히 험하고 막힌 곳에 들어가 적에게 포위를 당했는데 군사의 수효가 매우 차이가 나서 탈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혼자 도망쳐 와서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적은 승전곡의 협애를 끼고 방어했으며 그 수가 400명, 500명 되지만 드디어 격파하고 여미의 고지를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적은 사방의 고지를 점령하고 사력을 다해 이곳을 지켰다. 그 수가 각처에 5,000여 명씩 있었으며 1개 소대의 병력으로 이를 공격하려 해도 우리를 포위하고 급습하여 끝내 지탱할 수 없어서 홍주로 퇴각하였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당시 전투 상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동학군들은 미리 산 양쪽을 선점하고 매복하였으며 일본군과 경군이 진격해 오자 일차 교전하고 패전하는 척 가장하여 연합군을 골짜기 안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방어전을 펼친 내포 동학군의 숫자는 15,000여 명으로 추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과 경군은 자신들의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승전목 앞까지 다다랐다. 긴박한 순간들, 전투 하지만 이들도 승전목의 험한 지형에 매복한 동학군들을 보자 멈칫거렸고,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을 시도하였으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과감히 돌파하기로 작전을 변경하고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배산과 검암산의 양쪽 능선을 모두 선점한 동학군들은 열세한 무기와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지형지물을 십분 활용하면서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전투 시간이 길어지고 한 시간이 지났지만 동학군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서 일본군과 경군은 조금도 진격할 수가 없었다.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질 무렵 때마침 불어오는 서풍을 이용하여 동학군들이 화공을 시작하였다. 거센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앞을 가리자 검암산 쪽으로 진격하던 관군들이 먼저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의 기세마저 급격하게 꺾이기 시작하였다. 이를 목도한 동학군들이 용기백배하여 한꺼번에 산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며 압박을 가하자, 일본군과 경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때에 일본군들은 앞다퉈 쫓겨 가면서 개인의 군장까지 모두 팽개치고 달아났다. 그들이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쳤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승전목 전투에서 첫 승을 거머쥔 동학군들은 배낭 78개, 상하 겨울 내의 78벌, 휴대 식량 312인분, 일대 78개, 수첩 78개, 깡통과 소금 각각 78개, 쌀자루 78매, 반합 78개, 구두 78켤레 등 다량의 노획물도 획득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하다 승전목 전투에서 동학군들의 승리는, 연합군을 지휘한 일본군들이 내포 동학군들을 너무 얕본 원인도 있겠지만, 이미 엄청난 수와 조직적인 움직임 그리고 전투력 측면에서 이미 이전의 동학군들과는 월등히 달라졌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승전목 전투는 내포 동학군들에게 첫 승리로, 일본군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낼 수 있는 대승이었다. 이날의 전투는 동학군들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한 단 두 곳 중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군과 정면 전투에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전투로도 알려져 있다. 전승지로서의 승전곡-승전목 승전곡이라는 명칭은 동학 연구자들 사이에 불리는 명칭이고, 당진 지역민들 사이에는 승전곡보다는 승전목으로 불리고 있다. 내포문화숲길에서 ‘내포동학길 1코스’(9.4km, 약 3시간 30분 소요)가 동학군이 무혈입성한 면천읍성을 출발해 승전목 전투지까지 조성되어 있다. 현재 승전목 전승지는 당진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석산 개발과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파괴되어 훼손이 심각한 상태이다. 역사적 의미가 깊은 승전목 전승지가 개발과 발전 논리에 계속 파괴되고 있다. 향토유적은 비지정 문화재의 범주이기에 온전한 문화재의 보존관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향토유적의 밑바탕에서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다. 당진시는 승전목 전승지를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되도록 노력하고 더 이상 훼손되지 않고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글 조성갑 (탐방 팁) 승전목(곡) 전투(승)지 : 충남 당진시 면천로 142 (참고문헌) 디지털당진문화대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당진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양상과 승전목전투 당진지역 농민항쟁 관련 역사자원의 활용 당진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실태와 보존 방안 동학농민혁명 시기 당진 동학농민군 활동과 문화콘텐츠 활용방안 [출처] 승전목 전투, 일본군 상대로 최초의 위대한 승리|작성자 동학집강소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
증약·문의 전투에 빛나는 동학혁명의 푸르른 정신경부고속도로 대전I·C에서 옥천 방향으로 난 첫 터널을 빠져나가면 오른편으로 증약리가, 왼편으로 청남대가 있는 문의까지 펼쳐진 대청호수가 보인다. 이곳에 이르면 하늘과 물, 산이 뿜어내는 푸르름에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경부선 철도 세천역 부근이기도 한 이곳이 1894년 동학혁명 당시 격전지였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려면 현재 경부고속도로 대전터널이 놓인 마달령(馬達嶺)이라는 고갯마루 너머 증약역을 지나야 했다. 증약역은 전국 40개 주요 역을 거느리는 중심 역이었다. 특히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경로인 추풍령-옥천-증약-문의-청주로 이어지지는 율봉도, 상주-보은-옥천-증약-무주로 연결되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중심에 있던 증약역은 지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일본군은 증약·문의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 전투를 다음과 같이 본부에 보고하였다. 본부와 제3중대, 조선 관군은 11월 23일 오전 1시 30분 청주를 출발, 문의를 향해 전진했다. 오전 11시 30분 지명강 북쪽 강기슭에 도착했을 때, 남쪽 강기슭에는 많은 적도(1만2,3천)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이때 사격을 시작하면서 전위 소대원을 첨병 왼쪽으로 증가시켰다. 그리고 1개 소대를 전위 첨병선으로 증가시켰다. 오전 12시, 왼쪽으로 2개 분대를 내보내 적도의 배후를 치게 했다. 적도는 회덕과 주안周安(주암舟巖) 방향으로 물러났다. 문의로 돌아와 숙박했다(대대장 보병소좌 南小四郞). 문의文義 부근 전투상보 1894년 11월 23일(음력 10월 26일) - 필자 요약 오전 11시 20분 북쪽으로 행군하는 1만명 이상의 적을 만났다. 적은 일본군을 향해 급히 공격해 왔다. 조선군과 함께 응사해, 110여 명을 쓰러뜨리고 적의 기세를 크게 꺾었다. 그러나 적군의 우익은 산을 타고 문의 방면으로 진격하고, 적의 본군과 좌익은 우리 군대를 향해 일제히 사격을 해왔다. 조선군은 겁을 먹고 퇴각했다. 적은 이산 저산에서, “저놈들을 포위하라.”고 소리 지르며 돌격해 왔다. 그래서 일본군으로 이를 막게 했다. 적은 지명강 건너편을 점령했다. 주민의 태반이 적에 가담한 것 같았다. 지명에서 우리 군대와 조선 군대를 모아 문의로 철수했다(소위 宮本竹五郞). 증약增若 부근 전투상보 1894년 11월 26일(음력 10월 29일) - 필자 요약 이 전투들이 벌어질 당시, 내포 지역 동학혁명군은 홍주성을 공략하고 있었고, 공주성에서는 전봉준과 통령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혁명군이 일본군·조선관군에 맞서고 있었다. 따라서 공주성 전투와 홍주성 전투, 그리고 증약·문의 전투는 개별적으로 벌어진 산만한 전투가 아니라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라는 거대한 담론 속에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전투들이었다. 1894년, 조선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쟁의 소용돌이에 참가하고 있는 주체들의 성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이 중에서 가장 약자였던 동학혁명군은 남들의 지배를 받지 않고 민족국가를 유지하며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염원하였다. 이들과 가장 가까운 세력이 조선 관군 세력(사실은 조선 왕실과 양반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동학혁명 초기에는 청나라에게 업혀 동학혁명군을 공격하였고, 1894년 7월 22일(양력) 이후에는 그 태도가 급변하더니 일본 세력을 빌려 조선 백성의 소망을 짓밟기 시작했다. 1592년 임진왜란의 공포가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명나라, 무능한 조선 지배 세력이 남긴 고통은 동학의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를 통해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동학혁명은 가혹하기만 한 국내정치를 바로잡으려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이었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청나라와 일본 세력이 조선의 충청도에서 벌이기 시작한 국제적 싸움이 청일전쟁이었다. 당연히 가장 큰 피해자는 충청도에 사는 조선 백성들이었다. 당시 증약과 같은 옥천군 관내인 청산면 문바위골에서는 동학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머무르며 동학을 이끌고 있었다. 문바위골은 동학의 이상을 만천하에 알리고 혁명의 문을 열었던 1893년의 보은 취회를 결정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미 이때부터 청산 문바위골은 동학의 '장안(長安, 수도)'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증약·문의 동학 전투는 일시적으로나마 옥천 문바위골을 중심지로 하는 동학의 근거지를 보호했다는 의미가 있다. 증약·문의 전투가 동학혁명에서 지니는 또 하나의 큰 의미는 공주에서 합류하려 했던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계획에 크게 타격을 입혀 실행을 지연시켰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미 대륙침략을 목표로 측량 및 설계 단계에 있었던 경부·경의선 철도 부설이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구체적 목표에 상당한 타격을 주며, 조선 백성의 주권 의식을 떨쳤다는 점에 의의가 크다. 동학혁명이 좌절되자마자 조선 왕실과 양반 세력들은 제 나라 땅을 일본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며, 공짜나 다름없는 저임금으로 제 백성들을 몰아붙여 경부철도 부설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증약·문의 동학 전투에서 이 지역 양반들이 동학혁명군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다.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 왕권이 연합한 침략·지배 세력에 맞섰던 조선 백성들의 함성만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길 주변에 푸르게 남아 여전히 빛날 뿐이다. 글_남연호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