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한국지방행정연구원 ‘2024 지방행정 미래 트렌드 분석’ 연구보고서 발간한국지방행정연구원(원장 권한 대행 주재복, 이하 연구원)은 지방자치단체의 미래지향적 의사결정을 지원하기 위해 ‘2024 지방행정 미래 트렌드 분석’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이 보고서는 글로벌 메가트렌드를 분석하고 예상되는 지방행정의 환경변화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역할과 미래방향성을 제시했다.특히 ‘과거-현재-미래’라는 통합적 관점을 통해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를 정확하게 진단한 뒤, 다양한 미래예측방법론(퓨처스 휠, 토픽 모델링, 델파이 조사 등)을 활용해 미래 가능성을 예측하고자 했다.한국지방행정연구원 미래전략연구센터는 주요 분석 결과를 토대로 ‘2024년 8대 지방행정 미래 트렌드와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2024년 8대 지방행정 미래 트렌드로는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에 대한 전략적 접근 강화 △지역 특색을 반영한 인재 육성 재구조화 △재난⋅안전관리 회복력 중심의 패러다임 전환 △보건의료 불평등 완화와 사회적 안전망 확대 △자치역량 강화를 위한 지방행정체제 개편 △디지털기술을 활용한 행정의 문제해결력 강화 △교육 수요를 반영한 지방교육재정 개편 △균형 잡힌 지역성장 생태계 조성이 선정됐다.유수동 미래전략연구센터장(연구 책임)은 미래사회의 사회적⋅경제적⋅기술적 변화에 대비하고 적응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지방자치단체로의 권한 및 기능에 대한 적극적인 이양이 전제돼야 하며, 예산⋅인력 등 각종 자원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이 전제돼야 한다고 밝혔다.지방행정의 도전과제로는 정부 및 공공정책의 변화, 과학기술과 혁신의 촉진, 역량과 교육 강화, 사회적 포용과 다양성 증진, 주민 참여와 사회적연대, 지속가능한 발전과 환경보호, 글로벌 협력과 국제사회와의 협력과 참여를 제시했다.한국지방행정연구원 주재복 원장 권한 대행은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미래 트렌드 관련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으나, 국가 차원의 분야별 트렌드에 초점을 두고 진행됐는데, 이번 연구는 지방자치단체의 역할과 구체적인 정책 방향 설정에 대한 현실 정합성과 체감도를 높일 수 있는 지방행정 미래 트렌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한편 연구원은 매해 지방행정의 미래 트렌드 연구를 수행해 지방행정의 현재를 더 잘 이해하고, 미래 전망에 대한 지평을 넓히고자 한다고 밝혔다.한국지방행정연구원은 1984년에 설립된 정책 연구 기관으로 지방자치 관련 국정 과제 개발, 정책, 제도 입안을 주도하며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비전 제시 및 자문, 경영 진단 및 컨설팅 등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연구원은 지방자치를 선도하는 중추적 기관으로서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지방자치행정의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자치 분권과 균형 발전 관련 학문적 기반을 구축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웹사이트: http://www.krila.re.kr
-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서울국제여성영화제 ‘필름X젠더’ 단편영화 제작지원 공모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원장 장명선)이 주최하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집행위원장 이숙경)가 주관하는 ‘필름X젠더’ 단편영화 제작지원 공모가 1월 15일부터 2월 5일까지 진행된다. 2019년 시작돼 올해로 6회를 맞이한 ‘필름X젠더’ 단편영화 제작지원 공모는 일상 속의 양성평등 및 젠더 이슈를 다루면서 창의적인 시선이 돋보이는 단편 두 편을 선정, 총 4000만원 규모의 제작비 지원 및 멘토링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지원작으로 선정된 작품은 제작 완료 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필름X젠더’ 섹션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다.일상 속의 양성평등 및 젠더 이슈를 다루는 단편영화 제작지원2편 이상의 영화 연출 경력 있는 연출자 누구나 지원 가능2월 5일까지 공모 접수, 최종 2편 선정 후 각 2000만원 제작비 지원응모 자격은 ‘공모 시작일 기준 2편 이상의 영화 연출 경력이 있는 연출자 개인’이며, 일상 속의 양성평등 이슈를 다루는 20분 이내의 단편영화 프로젝트라면 형식과 장르를 불문하고 지원 가능하다.그동안 ‘필름X젠더’를 통해 제작된 작품은 총 10편으로, 기존 제작지원작 중 ‘차가운 숨’(채한영 감독)이 2023년 서울독립영화제에 단편경쟁 부문에 초청돼 독립스타상을 수상하고 ‘자매들의 밤’(김보람 감독)이 2022년 서울국제노인영화제 청년감독부문 대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영 및 수상하는 성과를 거둔 바 있다. 또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위촉 전문강사를 통해 일선 교육 현장에서 성평등 교육용 콘텐츠로도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올해 공모는 1월 15일부터 2월 5일까지 진행되며, 신청서와 제작계획안, 예산안 등 지원서식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홈페이지(www.siwff.or.kr) 또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홈페이지(www.kigepe.or.kr)에서 다운로드받은 후 이메일(filmxgender@gmail.com)로 접수하면 된다. 지원작에 선정된 두 편의 작품에는 총 4000만원(작품당 2000만원)의 제작비가 지원되며, 완성된 작품은 2024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전 세계 최초 공개)로 상영될 예정이다.‘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올해로 26회를 맞이하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 개최된다.제6회 ‘필름X젠더’ 단편영화 제작지원 공모 개요· 주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주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모대상: 형식 및 장르 불문, 20분 이내의 단편영화· 공모주제: 일상 속의 양성평등 및 젠더 이슈를 다루는 자유 주제· 응모자격: 공모 시작일 기준 2편 이상의 영화 연출 경력이 있는 연출자 개인(※포트폴리오 제출 필수, 기존 연출작은 장/단편 구분하지 않음)· 접수기간: 2024년 1월 15일(월) ~ 2월 5일(월) 오전 11시까지· 지원내용: 제작지원금 총 4000만원(편당 2000만원)· 지원방법: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홈페이지(www.siwff.or.kr) 또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홈페이지(www.kigepe.or.kr) 지원서식을 다운로드받아 이메일(filmxgender@gmail.com) 접수· 문의: filmxgender@gmail.com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국내 최고,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여성영화제다. 2024년 기준 총 25회의 영화제를 개최하며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여성영화인 네트워크 허브로 자리매김했다. 여성영화 아카이브 운영, 여성주의 교육 프로그램 및 작품 제작지원 등 상시 사업을 통해 영상산업에서의 성평등가치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웹사이트: http://www.siwff.or.kr
-
진정한 동귀일체가 필요할 때(2)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2시간 반,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부산으로 향하며 걸음걸음 걷는 땅,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끓는 청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역사가 보였다. 먼 이야기가 아닌,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내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늘 걷는 땅은 어제와 다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렇게 역사의 한 획이 된다. 그 선명한 줄기를 따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넘나드는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난다.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지난 기사에 이어) 천도교신문 : 대를 이어 천도교단을 위해 헌신해오셨는데,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어린시절, 청년기의 교구장님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게 됩니다. 박차귀 교구장 : 어릴 적에 제가 중고등학교 때 우리 부산시 교구에서는 '소년의 서사', '내성당 서사' 이런 거 외워보라고 하면 늘 제가 단골이었어요. 아무도 그걸 잘 안 외우려고 하니까 집행부에서 저더러 매주 나와서 하라고 하죠. 그럼 나도 매번 내가 해야 되는 걸로 생각을 했고요. 그때 천덕송을 부르면 제가 오르간으로 연주하면서 창호지에 쓴 가사를 넘겨가면서 함께 부르곤 했어요. 아무튼 제가 좀 다른 애들보다 용기있게 앞장서서 했어요. 천도교 공부를 하면서 그 옛날에 조기주 선생님이나 백세명 선생님, 김용문 선생님 등 제가 그 분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를 했어요. 대학 막 들어갔을 때였을 거예요. 서울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우이동에 내려서 의창수도원 걸어가는 길, 나는 그 길을 참 좋아했어요. 그러고보니 옛날이 그리울 때가 참 많습니다. 천도교신문 : 젊은 시절이 그리운 마음도 있으실 거예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또 의창수도원까지 가시는 길에 실린 열정도 그렇구요. 박차귀 교구장 : 저는 방학을 이용해서 공부를 했어요. 여름방학이었는데, 의창수도원 가는 길이 지금은 도로가 났는데, 그 길이 다 개울이었어요. 휴식시간이면 그 개울물에 발을 담그던 추억이 있죠. 그때는 그런 낭만이 있었는데 요즘은 너무나 삭막하다는 그런 아쉬움도 있습니다. 최덕신 교령님 때였는데, 제가 천도교 청년회 주최 웅변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최덕신 교령님 자택에도 가서 하룻밤 자고 사모님하고 같이 대화도 나누고 그렇게 많이 귀여워해 주시던 기억이 많이 나고요. 돌이켜보면 추억들이 참 많아요. 그 이야기들은 제가 맨날 며칠 해도 많습니다.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으로부터 내려온 집안의 역사, 교구장님께서 어릴 때부터 쌓아온 신념, 그 단단한 힘이 지금까지 교구장님을 끌고 오신 것 같습니다. 박차귀 교구장 : 그 영향을 받아서 지금까지도 KCRP, 민족종교협의회에서도 제가 여성회장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의 경험이 생각의 폭을 넓혀준 것 같고, 그런 경험들로 인해 천도교를 사랑하는 만큼 또 이웃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시일에는 제 건강이라든지 또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해서 젊은 사람들한테 이제 넘겨줘야 되는데, 아직 더 해도 된다고 그래서 제가 아직 더 하고 있습니다.(웃음) 천도교신문 : 굉장히 많은 활동들을 하셨는데 여성 리더로서 천도교에서 또 이 시대의 종교의 역할하고 같이 해서 한 말씀해주세요. 박차귀 교구장 : 지금은 여성 시대라고 하죠. 모성의 마음으로, 우리가 어머니의 마음으로 신앙을 한다면, 어쩌면 여성 지도자가 더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 여성회가 곧 100주년이잖아요. 남성들이 자꾸만 더 우리 여성들을 뒷전으로 생각하는 문제들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결과도 있었습니다. 천도교는 남성들만 하느냐, 왜 남성들만 다 직책을 갖느냐 하는 말을 제가 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여성 교역자를 많이 양성해서 여성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해 내야만 교단이 더욱더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뒤에 후배 세대들이 큰 역할들을 하겠지만 좀 더 좋은 세상을 보고 가야 하는데, 하는 그런 아쉬움도 같이 듭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제 나이가 들은 것 같아요. 천도교신문 : 교구장님께서는 동귀일체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진정한 동귀일체란 무엇일까요? 박차귀 교구장 : 동귀일체가 우리가 하나의 뜻으로 돌아가 같이 힘을 모은다는 뜻이라면, 하나가 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을 때 진정한 동귀일체가 될텐데, 형식적으로 입으로만 동귀일체가 되자고 하지 말고 반목과 갈등에서 화해와 단결로 각자위심에서 공동체형성으로 나아가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한울님의 큰 정신에 합쳐서 한울님과 한 몸이 되자는 것, 진정한 동귀일체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는 ‘吾心 卽 如心’ 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신문 : 교구장님께서, 아버님, 할아버님부터 천도교를 해오셨는데 후학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도 있으실 것 같아요. 박차귀 교구장 : 저도 천도교를 제일 우선으로 하고 살라고 말하면 제 동생들부터도 저와는 다른 마음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제 동생들은 언니가, 누나가 열심히 하니까 우리는 적당히 해도 되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할 때, 그럴 때는 생각이 많아지거든요. 그 각자가 다 자기 신앙관이 뚜렷해질 수 있도록 신앙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교단에서도 많은 연구도 해야하고 교육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옛날하고 다르기 때문에 그 시대에 발맞춰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천도교의 진리는 이미 시대를 앞서 걸어왔습니다. 우리가 행동으로도 그에 맞게 펼쳐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곱게 내려앉을 때, 함박눈이 푹푹 내려 차곡차곡 쌓일 때, 박차귀 교구장의 열정적인 걸음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손길을 내밀던 모습을 오래 생각했다. 동귀일체로 함께, 잠깐이라도 걸어볼 일이다.
-
전봉준 장군, 보국안민의 깃발 아래 고창의 중심에 서다고창은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로 무장포고문을 선포하며 동학농민혁명의 전국적인 출발을 알린 역사적인 곳이다.지난 1월 10일 전북 고창 문화의 전당 및 고창군청 앞에서 전봉준 장군 탄생 제 168주년 기념 행사 및 전봉준 장군 동상 제막식 행사가 개최되었다. 심덕섭 고창군수와 이경신 고창군의회 부의장 및 군의원, 진윤식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위원회와 군민 700여 명이 참석했다. 전봉준 장군 동상은 12인 군상으로 범국민 성금 모금과 군비를 더해 총 6억원의 사업비로 추진됐다. 식전행사로 전북이 낳은 소리꾼 왕기석 명창의 창극 <천명> 중에서 “하늘님이시어 기원합니다”와 "절명가"를 시작으로 헌수, 봉정, 봉주, 헌화가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국민의례와 내빈 소개 후 전봉준 장군 탄생 제 168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23년에 발간한 <동학농민혁명> 책자와 <고창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의 새로운 이해> 학술대회 단행본을 올리는 봉정식과 함께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 경과 보고와 감사패 증정식도 거행되었다. 감사패는 열정과 헌신으로 역작을 탄생시킨 국경호 작가와 강관욱 작가가 받았다. 또 전봉준 장군 동상 자문위원회 신순철 자문위원장, 그리고 신영우, 강용명, 문병학 자문위원이 감사패를 받았다. 고창군은 동상 건립비 6억 원과 주변 공사비를 추가 확보하여 지난해 12월 30일까지 설치 공사를 마치고 이날 전봉준 장군 탄생 168주년과 행사와 병행하여 제막식을 하였다. 대한민국 대표 구상조각가인 국경오·강관욱 작가의 작품인 '義의 깃발 아래'는 전체 12인 군상으로 이루어진 조형이다. 먼저 선두에 전봉준 장군이 무장포고문을 읽고 나서 의연한 자세로 앞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을 긴장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그 옆에 보국안민, 제폭구민 등이 새겨진 커다란 깃발 아래 거사를 앞둔 농민군이 각자 비장하게 결의하는 모습을 사실감 있게 나타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뒤편 언덕에선 시대적으로 고통받았던 민 초들의 처절한 얼굴을 섬세하게 표현했고, 다양한 인물의 감정 표현으로 민중의 애환을 느낄 수 있다. 심덕섭 고창군수는 인사말을 통해 “매일 아침 군수실 창문 너머로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볼 때면 무장기포 그날의 비장함과 의연함이 느껴지고 앞으로 더 고창을 잘 살게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동상 건립을 위해 기꺼이 정성을 모아주신 고창 군민들을 비롯한 전국의 3만 8,353명의 기부자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밝히며, 전봉준 장군의 업적을 되새기고 근대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만든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우는 소중한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고창군은 동학농민혁명의 이념과 지표를 담은 무장포고문, 전봉준 공초 등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 185점을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시키며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의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이번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으로 동학의 가치가 널리 퍼져 나가기를 기대한다.
-
[칼럼] 2024년 정치참여를 기대하며2024년 벽두부터 정치뉴스가 암울하다. 4월에 있을 제22대 국회위원 선거를 앞두고 여당과 야당의 격돌이 도를 넘는 위험 수위이더니 양당 모두 소외 그룹들이 신당 창당을 발표하고 있는 등 혼란의 연속이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야당 대표에 대한 테러(거칠게 표현하면 암살시도)이다. 아무리 상대방이 밉더라도 그가 이토 히로부미도 아니거늘 죽일 생각을 했다니. 정말 갈 데까지 간 한국 정치의 단상이다. 정치가 존재하는 목적은 갈등하는 여러 사회세력과 개인들을 화합시켜서 조화시킴으로써 한 사회의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건강한 공동체 유지를 위해 법과 제도 그리고 문화, 예술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망라해 저마다의 역할을 맡기고 제 기능을 다 하도록 하는 것이 정치이다. 따라서 정치는 공동체의 형성과 유지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정치를 하는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정치학을 전공한 박사가 전문가일까. 아니다. 그들은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들일 뿐 정작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래서인가 정치 전문가에게 지급되는 라이센스(자격증)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사도, 변호사도, 엔지니어도 모두 자격증이 있는 자들만이 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지만, 전문화 분업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유독 정치 분야만은 자격증이 없다. 정치인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만 보아도 온갖 직업군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심지어는 전공의 다양성을 넘어 학벌도 대학 졸업자부터 초등학교 졸업자까지 있다. 왜 그럴까. 그만큼 정치는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모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은 민주주의 기원인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였다. 즉, 아테네 시민이고자 한다면 직업, 학벌과 무관하게 누구나 아테네의 운명을 함께 고민하고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것이 오늘 민주주의의 출발이 된 것이고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시대를 구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국가 사회든 반드시 정치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의 건강성 여부는 구성원들의 정치 참여가 얼마나 활발하느냐로 판단된다. 최근 1,2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얼마나 허무하게 본분을 망각한 군인들에 의해 유린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979년 12.12 사태를 다룬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제목이 서울의 봄이다. 봄이 과연 왔는가? 아니 분명히 봄은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목이 봄인 이유는 박정희 통치 18년을 끝내고 간절히 봄을 기다리던 국민들의 염원이 좌절된 절박함의 표현이라고 해석된다. 분명한 사실은 12.12 사태이후 정치는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장악한 군인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다 보니 어느 틈에도 국민들이 들어갈 틈새는 없었다. 완벽한 정치실종의 시대를 우리가 겪은 것이 지난 5공화국 시대였다. 그런데 과연 작금의 정치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국민의 참여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관과 민의 소통은 원활하며 국민은 활기에 넘치는가 말이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정치 현실은 국민과의 소통단절과 일방통행에, 정치권은 극렬한 대립과 갈등 그리고 증오와 적대감만이 확대일로가 되고 있다. 많은 국민의 기대 속에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것을 퇴보시키고 있다. 코로나 이후 세계 경제가 회복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코로나 상태이고, 외교는 미국과 일본 일변도로 나가다 보니 브릭스(BRICS) 체제가 출범해도 기후 정상회의에도 무관심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하는 가운데 남북이 각기 상대국에 무기 지원을 함으로써 깊은 늪에 빠져들고 있으며, 정권의 호언과는 달리 작년 말 엑스포 투표 결과 29표가 우리 외교의 현주소가 아닌가. 더욱이 남북관계는 언제 6.25 전쟁이 다시 발발해도 무방할 분위기로 급냉되고 있다. 국민은 통합되기보다는 시대착오적인 이념 논쟁으로 다시금 7-80년대식 이념으로 갈라져 대립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언론과 시민단체에 대한 규제와 탄압 그리고 노조의 적대시 등 도시 종잡을 수 없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를 다잡아 주어야 할 정치가 역할 방기 아니 무능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동학 창도 이래로 우리 도의 가장 큰 특징은 현실 참여를 통한 이상세계의 실현이었다. 즉, 내세에서의 지상천국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지상천국을 만들기 위해 진력을 다하는 것이 동학 천도교가 다른 종교와의 가장 큰 차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단 한 순간도 그것을 피하거나 숨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자랑스럽게 되내이는 1백만 명에 이르는 순도자의 종단인 동학 천도교의 역사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자각하는 2024년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영역이 정치 분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유지와 공공선을 달성하고자 하는 가장 커다란 영역이 정치이기 때문에 끈임없는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 임형진(년암, 동서울교구, 경희대 교수)
-
제 116주년 도일기념식 봉행포덕165년 1월 18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는 제 116주년 도일기념일 기념식을 봉행한다. 이날 행사는 개식과 함께 청수봉전, 심고, 주문3회 병송, 경전봉독, 천덕송 합창, 기념사 등의 식순으로 이어지며 식후 행사로 문화공연이 준비되어 있다. 박상종 교령은 기념식을 앞두고 보도자료를 통해 "춘암상사 시절에는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추호도 어김없이 시행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주문 소리가 사무쳤습니다. 또한, 천도교의 개혁 사상과 종교 조직의 잠재력에 매료된 신진 지도층이 가세했습니다. 이에 천도교는 성·경·신이 투철한 교인들의 신앙심을 바탕으로 민족운동의 전환기 때마다, 그 중심에 서서 민족 자긍심 고취와 독립운동의 핵심적 주축이 되었습니다. ‘이제 천도교 주인은 오늘을 지키고 있는 우리 천도교인들입니다.’ 춘암상사의 이 말씀을 가슴속 깊이 새겨서 천도교 발전을 위해 우리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모심으로 하나 되어 동귀일체 하여 마음을 모아야 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도일 기념일은 1월 18일 11시 서울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교구에서 일제히 봉행되며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리는 도일기념식은 광암 박상종 교령을 비롯하여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된다. 기념식에 이어 '다함께 수련과 도일기념 문화공연도 개최될 예정이다. 한편 천도교의 5대 기념일 중 하나인 도일 기념일은 춘암 상사께서 의암 성사로부터 대도주 직을 선수받은 날로, 천도교의 주요 기념일은 다음과 같다. 천일기념일 : 매년 4월 5일 수운 대신사께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인 천도를 받아 동학을 창명한 날을 기념함 지일기념일 : 매년 8월 14일 해월신사께서 수운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을 기념함 인일기념일 : 매년 12월 24일 의암성사께서 해월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을 기념함 도일기념일 : 매년 1월 18일 춘암상사께서 의암성사로부터 대도주 직을 선수받은 날을 기념함 현도기념일 : 매년 12월 1일 의암성사께서 동학을 천도교로 세상에 선포한 날을 기념함
-
주용덕 종무원장, 故김대중 탄생 100년 기념행사 참석지난 6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 제1전시장 5A홀에서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문재인 전 대통령,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한덕수 국무총리, 김진표 국회의장을 비롯해 전·현직 정계·정부 유력인사들이 참석했다. 천도교에서는 주용덕 종무원장이 참석하였으며 여야 지도부 및 종교계에서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으며 화해와 통합의 'DJ 정신' 계승을 다짐했다. 1부 기념식 「하나로 미래로」에서는 김덕수 사물놀이 명인의 식전공연으로 행사의 문을 열었으며 권노갑 김대중재단 이사장, 신영균 국민의 힘 상임고문의 개식선언과 함께 국민의례, 내빈소개가 이어졌다. 문희상 김대중재단 준비위원장의 환영사와 함께 문재인 전 대통령, 반기문 전 UN사무총장, 김진표 국회의장, 한덕수 국무총리,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축사를 마치고 바리통 고성현, 소프라도 조수미의 축하공연도 이어졌다. 김홍억 가족 대표는 감사의 말씀을 통해 故김대중 탄생 100주년의 소감을 밝혔다. 2부 100주년 기념공연 드라마콘서트 「평화의 별, 통일의 강」 은 한반도 평화와 안보를 위한 역대 정권의 노력과 그 대장정을 음악과 영상 그리고 연기를 통해 재현하였다. 김동연 경기도지사, 김경일 남북평화협력 지방정부협의회 회장의 여는 말씀, 김명곤 총감독&변사, 바리톤 고성현, 테너 김재형, 가수 신형원, 명창 이영태, 소프라노 권 로, 윤서연의 출연, 김영봉 연출의 공연, 코리아모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연주로 공연이 이어졌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롯해 김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주요국 정상이었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등의 축하 영상과 서한도 소개되어 더욱 뜻깊은 의미를 남겼다.
-
한번 크게 패배하여라 그리하여 영원히 승리 하리라, (가칭)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 창립총회 .. 장흥에서 개최장흥에서 동학농민혁명 130년을 맞이하여 (가칭)'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 창립총회를 개최한다. (가칭) '전국동학농민혁명 전국연대'는 오는 1월 12일부터 13일까지 동학농민혁명 130년을 맞아 전국적 모임 결성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하기 위해 장흥취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1일차 1월 12일은 장흥 동학 무명농민군 묘역에서 신년참배(제암산 공원묘지 4묘역)를 마친 후 소년뱃사공 윤성도 덕도 견학이 예정되어 있다. 이어서 가칭)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 창립총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2일차 1월 13일에는 박홍규 동학판화작가의 특강이 전남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 장흥취회는 창립총회를 통해 전국적인 연대활동을 확장해 갈 계획이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
-
칭찬합니다!
-
진정한 동귀일체가 필요할 때(1)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2시간 반,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부산으로 향하며 걸음걸음 걷는 땅,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끓는 청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역사가 보였다. 먼 이야기가 아닌,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내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늘 걷는 땅은 어제와 다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렇게 역사의 한 획이 된다. 그 선명한 줄기를 따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넘나드는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난다.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천도교신문 :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님 반갑습니다. 교단의 역사와 함께 오랫동안 헌신해오셨습니다. 천도교신문에서 교구장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박차귀 교구장 : 반갑습니다. 이렇게 먼 길 와주셔서 더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에게는 어찌 보면 천도교가 내 삶의 전부라고 얘기할 정도로 저와 천도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숙명적인 관계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더불어서 살아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천도교신문 : 천도교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천도교인으로 사셨습니다. 어릴 적 이야기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릴 때 기억나시는 장면 같은 것 있으세요? 박차귀 교구장 : 우리 집에 제일 많은 건 책이었어요. 제가 어린이 책 귀한 줄도 모르고, 학교에서 옛날에 헌책 가져오라고 해서 어린이 책을 하나 갖고 갔더니 선생님이 보시고는 너무 좋아하는 거야. 나는 선생님이 좋아하시니까 저리 좋아하시면 또 갖다 드려야 되겠네하고 갖다드렸지. 나중에 그 책이 천도교에 대한 책이었다는 걸 알고 많은 후회를 했죠.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환원하시기 전날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소고기가 귀했어요. 우리 집 밑에 유명한 갈비 집들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그때 갈비를 사가지고 오셔서는 무릎에 저를 앉히고 이렇게 먹여주더라고요. 그렇게 할아버지가 유독 저를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내 위에 언니가 있었는데 언니가 일찍 가버렸어. 그러고 나니까 저를 아주 귀하게 대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이름이 버금 차, 귀할 귀 자예요. 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러고보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가 벌써 70년이 흘렀네요.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께서 부산시 교구를 설립하신 박찬표 선생님이시지요. 할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시겠어요.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는 제가 학교 초등학교 막 들어갈 때쯤 환원을 하셨어요. 1월 28일이었어요. 가장 추운 날이었어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이 참 추웠다는 것과 교구에서 교인들에게 특별 동계수련을 지도하시다가 환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수련에 너무 열중하셨던 것 아니었나 하고 생각이 듭니다만 요즘 같으면 좋은 보약도 좀 잡수고 했더랬으면 할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그런 아쉬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일찍 가셔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할아버지가 써놓은 일기책이 있습니다. 한문으로 돼 있어서 제가 해독을 못 했어요. 언젠가는 책을 만들어 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박찬표 선생님은 우리 역사에서도 아주 의로운 일을 하셨던 독립운동가로 기록되어 있더라고요. 신인간 통권 582호(포덕 140년 2월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인암 박찬표 선생은 3.1운동 당시 보성학교 2학년 시절,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구치소와 부산교도소에 수감된다. 이후 26세 때인 포덕63년 3월 17일 묵암 신용구 선생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한다. 이후 조국 독립의 길과 진실한 삶이 천도교에 있음을 깨닫고 천도교의 불모지인 부산에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씨앗을 뿌리내린다.(성주현, ‘부산 지역에 천도교를 심은 인암 박찬표’, 신인간 582호, 1999)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께서 보성전문학교 다닐 적에 독립 3.1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발각되어서 구치소에 계셨어요. 국가기록원에도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는 그 기록도 좀 더 조사하고 보완해서 책을 발간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잡지들이나 저서들은 할아버지께서 남겨놓은 책들로 영인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신인간』, 『개벽』, 『당성』 등으로 대표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우리 천도교에서는 소장자와 기증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아버지께서는 천도교의 발전을 위해 누구든지 와서 보고 가라고 하셨고 많은 분들이 오셔서 보고 가시는 걸 제가 봤습니다. 어릴 적에 부산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들이 우리 집에 와서 책을 보셨고요. 서울 중앙총부의 신인간에 계시던 분들도 많이 와서 그 책들을 보고 가셨고요. 그렇게 할아버지가 교단의 책들을 잘 모아놓으셨기 때문에 영인본을 낼 수 있었다는 것에 저는 참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소중하게 소장하셨던 분들에 대해서도 좀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선생님은 어릴 적에 할아버님을 많이 따르셨나요? 박차귀 교구장 : 예. 제가 어릴 적에는 조금 활발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어느 교인 집에 순회를 가시면 제가 꼭 따라갔어요. 손잡고 따라간 기억이 나요. 오늘은 어디 어디를 가자 하시면, 제가 그냥 앞장서서 가는 거예요. 골목골목을요. 그럼 할아버지가 잘 찾는다고 참 좋아하셨어요. 그러면 나는 그 칭찬에 더 신이 나가지고 매일 할아버지가 가자 하시면 따라갔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참 잘했다, 수고했다 하시면서 벽장에서, 옛날에 그 박하사탕 같은 걸 벽장에 두셨거든. 그 사탕 하나 주시는 거, 그게 그때는 귀할 때니까 그거 하나 먹는 재미로 기분 좋게 다녀오곤 했습니다. 또 옛날에는 차가 별로 없어서 걸어 다녔을 때거든요. 우리 천도교인들은 흰 도포자락을 펄럭이면서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다니셨던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할아버지랑 순회를 갔다오면, 할아버지는 저에게 “너는 참 어찌 그리 기억력도 좋냐” 하시면서 참 대견해 하셨어요.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의 손녀를 향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정말 할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참 아쉬우셨을 것 같아요.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께서 유치원을 경영하셨는데, 그때 마당이 있었어요. 그러면 제가 그 마당을 막 뛰어다니고 그런 기억이 있죠. 너무 일찍 가셔서 그 뒤에 추억이 없는 게 좀 아쉽습니다. 정말 더 오래 사셨더라면 저하고 많은 추억을 남겼을 텐데 말이죠. 저는 항상 그런 트라우마가 있었어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단명하셨거든요. 다행히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 나이보다 훨씬 더 이렇게 오래 살고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교구장님께서 여성 교구장님이시고 또 여성회장도 역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도교 집안 여성의 이야기도 궁금해집니다. 박차귀 교구장 : 우리 할머니가 천석꾼 집안의 딸이었는데 할아버지한테 시집을 와서 천도교 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대요. 그런데도 불평, 불만 한마디 없이 그렇게 따라주는 것이 내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고 정말 성내는 얼굴 없이 내조를 잘 하셨다고 해요.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조금 일찍 환원하셨는데 할머니가 우리 부산시 교구 초대 여성회장을 하셨지요. 지금 우리 부산시 교구 여성회가 80년이 더 되었거든요. 지방 교구 중에는 여성회가 빨리 창립이 됐죠. 할아버지의 영향인 것 같아요. 초대 여성회장을 하시다가 그 뒤로 다른 분이 여성회장을 하시다가 우리 어머니가 여성회장을 하셨어요. 제가 고등학교가 다닐 때였지요. 서울에서 중앙위원회가 있으면 내가 어머니 대신 부산시 교구 대표로 서울에 올라가곤 했어요. 우리집 여성들은 고생을 많이 하셨죠. 손님들이 참 많이 오셨어요. 지방에서 오시는 교인분들이었죠. 그때는 여관이 별로 없었으니까 교인분들 오시면 할머니나 어머니나 고생하셨지. 늘상 교인들 밥 해드리고 대접해드리고 그러셨어요. 어머니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88세에 환원하셨습니다만, 양반집 귀한 딸이었는데, 고생을 좀 하셨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인물이 참 좋았어요.(웃음) 요새 젊은 사람 같으면 아마 그렇게 살아라 해도 못 살 거야. 나도 그렇게는 못 할텐데,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도 내가 이겨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천도교를 잊지 말고 지켜야 한다고요. 그런 이야기를 해 주셔서 저도 열심히 그 뜻을 받들어서 하고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