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주)신인간사, 제27기 주주총회 개최(주)신인간사는 3월 31일 오후 2시 수운회관 970호에서 제27기 주주총회를 개최하고 신임 이사와 감사를 선출하였다. 코로나 이후 3년 만에 개최된 이번 주주총회는 박해용 관리국장의 사회로 의식에 이어 변종제 대표의 인사말(염정모 이사 대독), 주용덕 교령대행의 격려사, 박해용 관리국장의 영업보고 및 감사보고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어 박길수 이사를 임시의장으로 추대 후 진행된 회의는 제1호 의안 제25, 26, 27기 결산은 접수 승인하였으며, 제2호 의안 임원선출은 이사 6명과 감사 2명을 선임하기로 하고, 신임 이사에는 이미애(교화관장), 정갑선(교무관장), 성주현(신인간 주필), 박해용(신인간 관리국장), 변종제(전 신인간사 대표), 윤태원(서울교구장) 등 6명과 신인 감사에는 강대기(종의원)과 박길수(전 신인간사 이사) 등 2명을 각각 선임하였다. 제3호 의안 기타 사항으로 첫째 신인간사 자회사 또는 문화단체를 만들어 사업을 수주할 것, 둘째 천도교단의 문화콘텐츠는 신인간사에서 주도할 것, 신인간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구성 등을 세 가지를 권고하였다. 제1차 이사회 개최 대표에 성주현 이사 선임 신인간사는 주주총회 직후 제1차 이사회를 개최하고 대표이사를 선임하였다. 신임 이사로 선임된 이미애, 정갑선, 성주현, 박해용, 윤태원 이사 등 5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표이사에 성주현 이사를 선출하였다. 신임 성주현 대표이사는 1986년 신인간에 입사한 후 편집장과 주필, 중앙총부 교무관서 등으로 오랫동안 근무하였으며 한양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경기대, 중앙대, 전남대 등에 출강하였고 현재 평택박물관연구소장, 1923 제노사이드연구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식회사 신인간사는 천도교중앙총부의 ‘신인간사 설치운영 규정’(포덕 137년 12월 종의원 총회 의결)에 의거하여 포덕 138년에 천도교중앙총부 및 교인의 출자로 설립된 천도교중앙총부 부설기관이다. 중앙총부가 전체 주식의 2분의 1을 출자하였다.
-
천도교의 생명관: 대생명(大生命) (1)Ⅰ 「동학의 생명평화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2004년에 논의한 적이 있기에 논의범위를 좀 더 종교철학적으로 심화시키고자 한다. 수운 최제우는 한울님과의 대화에서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을 받아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았다고 한다. 주문은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21자인데 그 가운데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해월의 해석을 중심으로 천도교의 생명관을 논하고자 한다. 수운은 모실시(侍)를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로 풀이하였고 해월은 다음처럼 구체화하였다. “안에 신령이 있다는 것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갓난아기의 마음이요, 밖에 기화가 있다는 것은 포태할 때에 이치와 기운이 바탕에 응하여 체를 이룬 것이니라. 그러므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과 「지기금지 원위대강」이라 한 것이 이것이니라.” (“經曰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內有神靈者 落地初赤子之心也 外有氣化者 胞胎時 理氣應質而成體也 故「外有接靈之氣內有降話之敎」「至氣今至願爲大降」是也,” 해월, [영부주문]) 이를 근거로 천도교는 생명체는 두 번의 강령으로 잉태되고 마음을 받아 태어나고 주문수행에 의하여 세 번째 강령으로 영성을 자각하게 된다고 본다. 첫째 강령인 ‘외유기화’에 의하여 포태되고, 둘째 강령인 ‘내유신령’으로 갓난아기가 처음으로 호흡할 때 영이 ‘적자지심’으로 내려온다. 셋째 강령인 ‘각지불이’는 주문수련으로 내 몸과 마음이 영성을 깨달아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난다. 이 세 번의 강령이 이루어지게 되면 사람은 비로소 천주를 자신 안에 온전하게 모신 ‘시천주’ 인간이 된다. 이렇게 한울님을 모신 사람을 천도교에서는 신선(神仙), 신인간(新人間), 신인(神人)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과정으로 대생명이 된다. 이 글은 첫 번째 강령인 ‘외유기화’와 두 번째 강령인 ‘내유신령’을 통하여 천도교의 생명관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생명의 포태가 영(靈)의 강림(降臨)으로 이루어진다는 해월의 설명은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이해되는 의학과는 다른 설명방식이다. 이기(理氣)와 기운(氣運)이 바탕이 되는 질료(質)를 만나서 포태가 된다는 종교철학적 설명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생명의 탄생은 천리(天理)와 천기(天氣)라는 우주적 기운과의 관계맺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점만 분명히 하면 될 듯하다. ‘외유기화’는 ‘외유접령지기(外有接靈之氣)’로도 표현되는데 밖으로 영에 접하는 기운이 있다는 뜻이다. ‘밖에 있다(外有)’는 표현 때문에 영(靈) 또는 지기(至氣)가 마치 시공간적 타자로 보이지만 영과 지기에 열려(開闢) 우주기운이 곧 나의 기운으로 되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지기(至氣)’ 또는 ‘혼원일기(混元一氣)’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음양오행과 같은 기운과 달리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과 접함으로써 생명이 잉태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수운은 ‘음양합덕으로 수백천만물이 화해난다’고도 하지만 ‘외유기화’는 한울님의 기운이 유기적 생명체로 나타나는 것을 서술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생명체의 잉태는 다 한울님 기운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수운의 [불연기연]에 나타나는 우주만유의 알 수 없는 불연에 대한 대답도 외유기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 더 나아가 자연사물까지 모두 다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과 하나로 통해져 잉태되었다는 실상을 통찰한다면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우주생명의 신묘함을 그렇고 그렇게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불연기연]은 황하수가 어찌 성인의 탄생을 알아서 천년에 한번 물이 맑아질 수 있는지 묻고 있다. 그렇지만 황하수도 하나의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의 산물이고 성인의 마음의 탄생도 똑같은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의 소산이라면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즉, 성인의 청정무구한 마음기운도 황하수의 진흙탕 물도 한울님의 하나의 기운으로 통해져 있으므로 두 기운이 통하여 같아져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량수의 생명체들은 오직 하나의 기운에서 태어났음을 알게 되면 해월의 표현대로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한 동포이고(人吾同胞) 만물과 내가 또한 한 동포(物吾同胞)’라는 점도 스스로 자명해진다. 천리와 천기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초월적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몸과 내 마음에 내려와 있다고 본다면 왜 해월이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시행하였는지도 쉽게 이해된다. 신위(神位)를 마주보는 벽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여 설치하는 이유는 천지정신과 천지기운이 모두 내게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혼원일기, 우주정신, 신령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영의 강림(降臨)이라고 표현하지만 초월적 영이 내려온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잉태 순간에 지극한 한울님 기운과 접하여 자신 안에 모시게 된 것이다. 신위를 자신을 향하여 돌릴 수 있는 것은 물론 한울님 모심을(侍天主) 스스로 깨달은 사람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의암 손병희는 [성령출세설]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신사께서 사람이 곧 한울인 심법을 받으시고 향아설위의 제법을 정하시니 이것은 우주의 정신이 곧 억조의 정신인 것을 표명하심과 아울러, 다시 억조의 정신이 곧 내 한 개체의 정신인 것을 밝게 정하신 것이니라.” 조금 넓혀 표현하자면 개체정신이 곧 우주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 정신은 나의 정신이면서 동시에 ‘천만년 전 사람이나 천만년 후 사람의 정신과 같은 정신’이라고도 말한다. 한울님의 정신기운이 잉태의 순간에 영으로 이미 내 안에 모셔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근본적 동일성령이 천차만별의 인과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생명위기를 실감하는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생명의 우주적 연계성 또는 인드라망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의식이 열렸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천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가야할 길이 아직 멀다. 생명의 그물망을 느껴보고자 한다면 해월의 언행보다 더 좋은 전범(典範)은 없어 보인다. 해월은 베짜는 며느리를 보고 한울님이 베를 짠다고 하였으며,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때리지 말라고 하였으며, 동식물도 다 아끼고 사랑하라고 하였으며, 새소리도 한울님의 소리이며, 나뭇가지도 함부로 꺽지 말라고 하였으며, 어린아이가 나막신을 끌고 가니 가슴에 통증을 느꼈으며, 땅을 어머님 살처럼 여겨 침을 뱉거나 물을 멀리 뿌리지 말라고 하였다. 세상으로 눈을 잠시라도 돌려 보면 현대문명이 어느 곳을 향하여 전력질주하는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방향전환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점을 동학·천도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월은 “궁을이 문명을 돌이킨다(弓乙回文明)”라고 하였다. 궁을은 수운이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영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영부는 말 그대로 신령(神靈)에 그대로 부합하는 형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운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종이 위에 뚜렷한 형상을 그려내어 불에 타서 먹어보니 온갖 질병이 나았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주었더니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도덕을 따르는 사람은 매번 적중하였다고 하였다. 즉 받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해월은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영에 부합하는 마음이라고 하여 “영부심(靈符心)”이라고 하였다. 즉, 병을 치유하는 것은 천령에 부합하는 마음인 것이다. 이 마음이 문명을 대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에 부합하는 마음을 얻는 마음공부가 된다. 놀라운 점은 사람은 태어날 때 이 궁을마음을 타고났다는 사실이다. (계속) *본 글은 2023년 5월 12일/대화아카데미 바람과물연구소, 생명애콜로키움 [종교와 생태문제] 에서 발표하였으며 저자(오문환)의 허락을 받아 게재되었음을 밝힙니다. 글_오문환(정치학박사, 선도사, 영등포교구)
-
[칼럼]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일이다105년 전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역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함성소리는 매해 3월이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고동치게 한다. 3.1만세운동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평화로운 항거였으며 3.1정신은 이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루는 근간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3월이면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공적에 비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이 있다. 바로 3.1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하고 자금을 준비하였던 의암 손병희선생이다. 천도교 제3세교조인 의암 손병희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우리나라가 강제로 강탈당하게 되자 10년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해 나가게 된다. 우이동에 땅을 구입해 수련도장인 봉황각을 짓고 전국에 있는 유능한 지도자들을 모아서 독립의지를 확고하게 심어주기 위하여 심신훈련을 하게 한다. 3년에 걸쳐 7차례 483명이 봉황각 연성수련을 통해서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3.1운동때 전국 각 지역에서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지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부구총회를 통하여 결의하고 교호당 10원이상씩 건축성금을 내도록 하였다. 이 자금은 후에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리고 당시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가 적자경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끝까지 폐쇄하지 않고 훗날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전국 37개 대교구로 하여금 등사기를 1대씩 구입하도록 하여 훗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의암 손병희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한 49일 특별기도를 지시하였다. “먼저 보국안민(독립)이 된 다음에야 광제창생 포덕천하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 등 아홉 곳에 대표 기도처를 정하고 각 기도처마다 4명씩 대표를 파견하여 기도식을 지도하게 하면서 3.1독립운동을 위한 전국 교단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그리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와 대연합으로 33인 민족대표를 결성하기에 이르른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전국 조직망을 정비하고 독립자금까지 전담하는 등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지도해 나갔지만 매년 3.1절이 되면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은 미미하게 들리는 듯 마는 듯하다. 또한 천도교의 3.1운동에 대한 역할 또한 알려지기도 전에 잊혀져 가기만 한다.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해야만 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역사는 사라지고 심지어 왜곡되기까지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업적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의 잘못이며 이대로 가다가는 사라지고 왜곡될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세상이 떠들썩 하도록 매해 기억하고 기록하고 또 기념해야 할 것이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는 방법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자. 독일을 예로 들어보자. 독일은 틀에 박힌 상징과 형식이 아닌, 권위적이지도 않고 위압적이지도 않은 형식으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참회하며 가장 예술적으로 역사를 작품속에 표현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살아있는 곳으로 피터 아이젠먼의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1998~2005)는 홀로코스트(Holocaust)로 희생된 600만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고 있다. 다음은 나치의 분서사건 60주년을 즈음하여 독일 베벨광장에 세워진 미하 울만의 「도서관」이라는 작품을 보자. 베벨광장 중심부에 가로120센티미터, 세로120센티미터 크기의 정사각형 투명유리창이 있고 그 지하에 텅빈 직방체 공간이 있다. 이스라엘 예술가 미하 울만의 「도서관」작품이다. 책들의 화형식이 있었던 그 장소의 지하에 설치된 경고의 기념조형물이다. 이처럼 그들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념하는 방법으로 문화예술 공간을 이용하고 있다. 문화예술공간은 시민들의 삶속에 스며들고 있으며 그들은 생활속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보고 느끼면서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의암 손병희선생님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_숙현당 정정숙(근현대사미술관 담다 관장, 천도교선도사)
-
포덕165년 천일기념식 봉행오는 4월 5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는 포덕 165년 천일기념식을 봉행한다. 개식과 함께 청수봉전, 심고, 주문3회 병송, 경전봉독, 천덕송 합창, 기념사 등의 식순으로 이어지며 올해는 식후 행사로 축하강연/공연이 준비되어 있다. 주용덕 교령대행은 기념식을 앞두고 보도자료를 통해 "'산천초목들이 푸르게 살아나 기쁜 생명의 노래가 창창한 오늘은 한울님과 수운대신사께서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으로 무극대도 세상 열어 한울님 성공하신 날입니다. 수운대신사께서 오직 한울님을 믿고 믿으며 공경으로 정성으로 그 어떤 두려움도 의심도 한 바람에 떨쳐버리시고 지기금지 원위대강 한울님 기운과 내 기운이 하나라고 하시며 시천주 조화정 한울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라고 하시며 외롭고 고단한 긴긴 어둠을 지날지라도 가야할 길이라면 내쳐 멈추지 말라고 이마에 전등을 달아주시고 가슴에 태양 빛을 심어주신 날입니다. 올해는 대신사탄신 200주년입니다. 대신사님 무극대도에 동참하기를 맹세하신 동덕여러분 믿음과 기쁨으로 물결치는 형상있는 한울님으로~ 다시 시작이 됩시다"라고 천일기념일을 앞두고 소감을 밝혔다. 천일 기념일은 4월 5일 오전11시 서울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지방교구에서 일제히 봉행되며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리는 천일기념식은 용암 주용덕 교령대행을 비롯하여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된다. 기념식에 이어 축하강연/공연도 개최될 예정이다. 한편 천도교의 5대 기념일 중 하나인 천일 기념일은 수운 대신사께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인 천도를 받아 동학을 창명한 날로, 천도교의 주요 기념일은 다음과 같다. 천일기념일 : 매년 4월 5일 수운 대신사께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인 천도를 받아 동학을 창명한 날을 기념함 지일기념일 : 매년 8월 14일 해월신사께서 수운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을 기념함 인일기념일 : 매년 12월 24일 의암성사께서 해월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을 기념함 도일기념일 : 매년 1월 18일 춘암상사께서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을 기념함 현도기념일 : 매년 12월 1일 의암성사께서 동학을 천도교로 세상에 선포한 날을 기념함
-
천도교여성회 제 100주년 창립기념식 성황리 개최포덕 165(2024)년 3월 25일 오전 11시 천도교 중앙대교당(종로구 경운동)에서 ‘천도교여성회 제100주년 창립기념식 및 『천도교여성회100년사』 출판 봉고식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천도교여성회는 포덕 65(1924)년 4월 5일에 주옥경 종법사를 초대회장으로 모시고 ‘천도교내수단’이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었다. 이후 포덕 72년(1931)에 ‘내성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포덕 81년(1940)에 ‘내수회’, 포덕 97년(1956)에 ‘천도교부인회’를 거쳐 포덕 109년(1968) 지금의 ‘천도교여성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95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 가입하는 등 대외활동도 활발하게 해오고 있다. (계속)
-
종로 출마 곽상언 더불어민주당 후보 중앙총부 방문천도교 주용덕 교령대행은 종로구에서 22대 총선에 출마하는 더불어민주당 곽상언 후보를 만나 “자주독립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종로구를 위해 애써달라”고 당부했다. 3월 26일 오전 10시 천도교중앙총부를 예방한 곽상언 후보는 학창시절 선생님의 결혼식이 있었던 천도교중앙대교당을 방문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동경대전을 비롯한 천도교경전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히며 “전봉준 장군 동상 앞을 지나갈 때면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전봉준 장군의 눈빛을 바라보며 눈을 맞춰보기도 한다”며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 종로구에 산적해 있는 독립운동의 역사적 장소들에 대해서도 보존 및 정비하여 기억공간 등으로 재생산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도 말했다. 주용덕 교령대행은 종로구에 위치한 탑골공원에 대해 “3.1운동 이전에 동학혁명이 없었다면 과연 민주화가 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역사는 연결되어 있고 이어져 온다. 우리의 근대 시민운동이 동학과 3.1운동에서 시작되었듯, 천도교가 민족의 정신의 근간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탑골공원의 역사도 편향되지 않고 모든 시민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민족공원이 되도록 종교 간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 배석한 이미애 교화관장은 “해월 선생님의 가르침은 환경과 생태, 생명존중 사상으로 기후위기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곽상언 후보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제경제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4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경희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법무법인 인강 대표변호사이다.
-
김동련 작가 소설 『동학』 원작, 연극 "사람, 한울이 되다"대하소설 <동학>의 저자 김동련 작가와의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하였다. 오는 5월 10일~13일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연극 <사람, 한울이 되다>가 무대에 오른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꿈, 동학이 가르쳐준 지혜와 오늘날 동학의 가치를 묻는 대화 속으로 독자 여러분을 모신다. 집필 계기와 과정 소설 <동학>을 집필하셨습니다. 총 6권 분량의 대하소설인데요, 집필하시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였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 동학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게 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강원도 묵호에서 중학을 졸업한 후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7살 먹던 해 봄부터 방파제 축조회사인 흥아공작소에 급사로 일했습니다. 30톤 기중기선 화장으로 일하던 또래의 친구가 당시 태극출판사에서 나온 『위대한 한국인』 전집을 구했으나 도저히 읽어내지 못하겠다고 하여 제가 넘겨받았습니다. 그 전집 두 번째 책이 『해월 최시형』이었습니다. 그 전집에는 이승만이나 김옥균 등 여러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저는 그분들에게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해월 선생님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저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특별히 어떤 점에서 충격에 빠지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스승 최제우가 순도한 후 30년 동안 포졸들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홀로 전국을 돌며 스승의 뜻을 이어 동학 조직을 재건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의 옳고 강한 의지가 불의로 점철된 잘못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면서 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해월 선생님의 행적에 비하면 기독교에서 전하는 바울의 전도 여행 같은 것은 어린아이 장난 같아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해월 선생님에 대한 소설을 써 보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해월 선생님의 이야기를 쓰려면 해월 선생님께 그러한 동력을 제공한 수운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운과 해월 두 분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려면 두 분의 뜻을 행동으로 옮긴 전봉준 장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난한 세월이 오래 이어졌으나 저는 이 꿈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험난한 세월이 오래 이어졌겠네요. 스승님들의 고된 여정만큼 작가님의 집필 여정은 그 과정을 고스란히 닮아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이 주제를 계속 삭이려 국내에 나온 동학 관련 문헌을 꾸준히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나 독서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44살 때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 문학을 수업했습니다. 문학사 자격을 얻었으나 마음에 드는 글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경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들어가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철학박사를 수료했습니다. 그 후 두 권의 책을 출간하며 문장 수업을 계속했습니다. 열 일곱 살에 처음 해월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되고 해월의 이야기로 소설을 쓰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해, 마흔이 넘어 비로소 국문과에 입학하셨는데, 배움의 뜻을 그렇게 이어가는 일도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배움의 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경험도 중요하고요. 동학에 관한 소설을 쓰려면 소설 속에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저는 사람의 죽음에 관한 경험을 하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을 얻어 합천 노인전문요양원에 입사해 8개월 동안 근무하며 사람의 마지막 삶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4년 전 여름, 저는 더는 집필을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당시의 국내외 상황과 작금의 국내외 상황이 중첩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동학이 그 시대의 희망이자 세상을 밝히는 횃불로써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던 것에는 그 시절에 처한 절박한 현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갑오년 동학군들이 맞이했던 상황을 다시 맞이하고 있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갑오년에 실패한 동학혁명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혁명 당시 동학군들이 외쳤던 숭고한 이상과 목표를 지금도 완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갑오년 당시 조선을 지배했던 세력은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인식하지도 못했고 잘못된 틀을 바꿀 의지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갑오년에 민족의 생존을 보장할 지혜는 결국 민중 속에서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지혜는 결국 푸른 눈을 뜬 시민 속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지혜는 동학의 인내천과 보국안민 같은 동학의 빛나는 사유를 반추하고 계승하고 선양하는 작업에 의해서 나올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가 점점 더 흥미로워집니다. 집필 과정에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집필하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금 총부의 감사원장을 맡고 계시는 부암 정덕재 선생님께서 천도교 관련 학자들과 문헌을 지극 정성으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소개받은 동학의 쟁쟁한 학자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섬세하고 명료하게 동학을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동학은 수운 선생님 나이 20에서 30살 사이에 사유의 기본 뼈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10년 사이 수운 선생님의 행적에 관한 남아있는 기록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각궁거상" 단 네 글자가 전부입니다. 각궁 즉 활을 손에서 놓았다니 무술을 익혔을 것입니다. 거상 즉 행상을 나섰다니 각지를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오지를 돌면서 조선의 실상을 뚜렷하게 목격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홀로 숙고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싶으셨나요? 저는 소설 속에서 당시 조선의 제반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구성했고 그 당시 범람하던 거대 담론인 유학과 불교와 도교를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 학술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이렇게 재해석된 거대 담론을 바탕으로 행상을 하며 현자를 만나 지혜를 구하던 수운 선생님의 사유로 종합하여 독자적인 동학으로 이루어 가는 과정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이후의 모든 문장은 많은 상황을 문학적 상상보다는 구체적인 자료로써 직접 이야기하게 하는 서술 방법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소설 곳곳에 나오는 대부분의 대화는 모두 조선 시대의 말로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의 대형 사전에서도 찾지 못하는 고유한 우리 말과 관용어가 수도 없이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집필 태도는 일반 독자들의 가독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저는 감수했습니다. 집필 기간은 어느 정도가 걸렸나요? 집필에서 출간까지 만 2년이 걸렸습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수운과 해월 선생님을 물론 당시의 동학 도인들의 절박하고 안타까운 심정과 자주 동화되었고 그럴 때마다 많이 울었습니다. 두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심장이 아리고 억장이 막힐 때도 많았습니다. 어떤 때는 서재 바닥을 뒹굴면서 몸부림치며 통곡을 하기도 했습니다. 글이 막힐 때는 만취해서 자다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17살 때 품었던 그 꿈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나고 나서야 여섯 권의 대하소설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자료조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1차 자료로 참고한 문헌은 동학 경전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일본외무성자료』 등입니다. 『동경대전』‧『용담유사』에 나타나는 범재신론은 종교철학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의 단계인데 이러한 사유는 서양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영국의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에 의하여 제시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19세기에 수운 선생님에 의하여 종교철학의 가장 높은 단계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은 조정의 입장으로 쓰인 글이므로 제가 백성의 입장에 서서 다시 번역해 소설에 넣었습니다. 『일본외무성자료』도 일본 입장으로 썼기 때문에 사실의 왜곡이나 축소가 심해 제가 조선 백성의 입장에 서서 다시 번역했습니다. 해월과 의암 선생님이 남긴 글들은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 대표 오암 박길수 선생의 도움을 받아 모두 정독했습니다. 원광대학교 박맹수 총장님께서는 아직 발표하지 않은 여러 논문을 보내주셨습니다. 영산대학교 송봉구 교수님과 동의대학교 성강현 교수님의 도움도 컸습니다. 기타 동학 관련 단행본이나 논문들은 살아오면서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하여 꼼꼼히 읽었기에 이미 횡설과 수설이 자유로운 상태였습니다. 특히 표영삼 선생님과 이이화 선생님의 저작을 읽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더러는 역사에 묻혀 외면당했던 여러 사건을 파내어 드러내기도 했고, 동학을 교단의 입장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재해석하여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 노력했습니다. 저의 스승인 경상대학교 오이환 교수님은 제 소설을 읽으시고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술이 섬세하다고 평가해 주셨는데 그것은 허구인 소설을 자료로써 직접 말하게 하려는 저의 무모한 서술 태도가 가져다 준 선물이 되었습니다. 소설과 연극의 차이 오는 5월에 부산 원곡예술관에서 3일에 걸쳐 선생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50년간 가슴에 품어 온 이야기가 소설로 완성되고 연극 작품으로 제작이 되는데, 감회가 어떠신지도 궁금합니다. 또 이 작품을 보시는 관객분들에게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앞에 말씀드렸듯이 제 소설은 거의 역사서와 학술서 수준에다가 조선 시대의 언어로 썼기 때문에 가독성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독자들의 요청을 받아 전국을 돌며 북토크를 했습니다. 특히 유학과 불교 그리고 도교와 천주교에 관한 저의 재해석이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오래된 우리 말이 많아 독자들은 사전을 옆에 펴 놓고 일일이 찾아가며 제 소설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동학은 우리에게 매우 아픈 상처라고 생각했기에 저는 다른 소설처럼 글을 쉽고 재미있게 쓸 수는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독자들은 그러한 저의 입장을 십분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소설이 이렇게 적극적인 독자층을 넘어 많은 분에게 알려지려면 좀 더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컨텐츠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소설 중 일부분을 발췌하여 주제를 강화한 이야기로 연극 공연이 만들어진다면 다면, 좀 더 가깝게 시민들에게 다가가 동학을 알릴 수 있고 또한, 공연에 참여한 분들이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깊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대 동학의 가치 내내 생각하게 됩니다. 왜 동학이었는가, 그리고 160년이 지나서도 왜 다시 동학이어야 하는가를요. 이 시대 동학의 가치를 참 오래 생각하시고 또 수운 대신사님과 해월 신사님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해오셨을텐데요. 이 시대 동학의 가치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현대사회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빼앗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듯합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을 다만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을 소비하는 구매자로만 대우하고 있습니다. 돈이 슈퍼에고가 된 세상에서 개인은 생산자가 상품만 판매하면 게임에서 이기는 룰 속에 헤매고 있습니다. 거대한 관료주의는 개인을 자기들이 지향하는 기계속의 작은 톱니바퀴로만 대우하고 있습니다. 권력이 돈을 추구하면서 남발한 오염된 담론으로 인하여 개인은 무엇이 옳고 그른 지를 판단할 수 없도록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 내동댕이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은 자신이 진실로 어떤 존재인지 숙고하기가 어렵습니다. 동학은 인내천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은 각자가 이 우주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답고 신비한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곧 한울이라는 가르침은 암울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 자신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주어 그들의 삶 자체를 올바르게 바꾸게 합니다. 향아설위는 이러한 사유가 삶 속에서 실천되는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이 추구하는 보국안민은 국가가 잘못하면 백성이 직접 나서서 그 잘못을 옳게 고쳐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정의롭고 적극적인 실천의 정신입니다. 부패한 권력에 맞서 백성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권력을 창출하는 것은 동학이 그동안 끊임없이 추구했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과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동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제 소설에는 동학이 제시한 여러 강령과 가치들이 구체적인 예를 통하여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동학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빈부격차나 저출산 그리고 안보위기나 사회적인 정의와 환경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줄 수 있으며 나아가 사람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대단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동학혁명 130주년을 맞이합니다. 소회가 어떠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130년 전 동학은 세상의 잘못된 틀을 바꾸려 목숨을 걸고 일어났습니다. 그 혁명은 안타깝게도 완수되지 못하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제2의 동학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동동학농민기념사업회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동학혁명 당시 경상도 지역의 최대 격전지였던 하동을 재조명하기 위해 전적지를 보존하고 동학을 선양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초 전국의 기념사업회가 장흥에 모여 전국동학농민기념사업연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흐름이 민중 속에서 동학의 지혜를 다시 반추하고 계승하여 이 시대에 당면한 문제들은 해결하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에 저희가 기획한 동학의 컨텐츠화를 위한 연극 공연이 조그만 기여라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부산 공연이 잘 마무리되면 올해 전국을 돌며 재공연할 계획입니다. 서울의 예술의 전당에서 마지막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저희의 계획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정부를 비롯하여 천도교 총부나 관련 단체의 많은 관심과 격려를 기대합니다. 김동련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학사/국립경상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동대학원 철학박사 수료/경상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방송통신대학교 출강/도서출판 후아유북스 대표/ 카페 여래(다솔사) 대표/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대표 <저서> 장편소설 『우리가 사랑할 때』(밥북)/인문서적 『천자문으로 세상보기』(인간사랑)/대하소설 『소설동학』전6권(모시는 사람들)/번역서 『안원의 사존편』(후아유북스)
-
인권위, 평등법 입법 추진을 위한 종교계 지도자 초청간담회 개최3월 22일 오전 11시 국가인권위원회가 종단 지도자들과 만나 평등법 제정 취지와 경과를 설명하고 자문을 구했다. 인권위는 이날 천도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주교 등 종교 지도자들과 평등법 입법 추진 간담회를 열었으며 이날 간담회에는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의 천도교 교령 대행 주용덕,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 원불교 교정원장 나상호 교무, 유교 성균관장 최종수 관장이 참석했다. 인권위는 "'평등에 관한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은 평등법 제정에 찬성하는 입장"이라며 "입법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높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등법 제정 취지와 주요 경과를 공유하고 종교계 지도자들의 자문을 듣고자 간담회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주용덕 교령대행은 이날 간담회에서 평등법 입법추진에 대해, “평등의 원칙인 기본권 보장에 대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할 것,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지 아니한다’라고 우리 헌법 전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실증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성소수자와 동성애자를 지지하며 그분들이 대해서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주용덕 교령대행은 “독거노인들이 2025년 197만명으로 증가한다. 독거노인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천도교의 삼경사상에서 밝히고 있듯 모든 생명이 공존 공생하고 순환하는 것처럼, 모든 생명을 공경하여 인간의 평등함,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권위는 2020년 6월 국회에 평등법 제정 의견을 표명했다. 인권위는 "장애나 성별, 연령이나 특정 고용형태로 인한 차별 문제가 발생해도 개별법의 적용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이유"로 법 제정의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종교계는 일부의 입법 반대 목소리를 표출해왔다. 현재 제21대 국회에서 평등법안 4건이 발의됐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아직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
[칼럼] 반역사적인 ‘이승만 띄우기’ 시도요즘 독재자와 학살자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이승만 대통령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을 자주 접하게 된다. 뜬금없이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여 독재자를 기리겠다고 한다거나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뒤짚으려고 한다.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기술한 우리나라 헌법전문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런 준동에 분노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현재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권 말살과 부정부패를 저질러 4.19혁명으로 쫒겨난 그의 말로를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판에, 독재자 이승만을 두고 다시 논쟁하는 자체가 소모적이다. 이승만의 악행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8ㆍ15해방 이후에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어 독재정치를 하면서 학살한 무고한 양민들이 100만명 이상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이승만을 국가보훈부가 지난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고, 국방부는 그를 혜안을 지닌 지도자로 미화하는 교재를 발간하기도 했다. ‘홍범도 지우기’로 국민의 공분을 산 집권 세력이 ‘이승만 국부 만들기’로 이념전쟁에 불을 붙이고 있는 형국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후 북한·중국·러시아가 공산화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했다”고 그를 칭송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농지개혁·교육개혁·정치개혁이란 3개 개혁으로 대한민국의 토대를 닦았다.”며 이승만을 한껏 찬양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격동의 해방 공간에서 그가 내린 선택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강변한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용하고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역사적 사실도 그들의 눈에는 크게 문제가 될 게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편다. 진실을 덮고 거짓을 호도하려는 영화 한 편에 부화뇌동하는 것이 2024년 대한민국의 현주소인 것만 같아 정말 씁쓸하다. 정권은 유한하고 역사의 흐름은 도도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이런 시도가 성공하겠는가. 말 그대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으로 국회에 상정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하고자 하는 법률안이 아직도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을미의병 참여자에 대해서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145명을 서훈하면서도, 전봉준·최시형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승만 띄우기’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를 거스르는 세력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역사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독재자 이승만을 구국의 민족지도자로 받들려는 기도를 절대 묵과할 수 없다. 국민 공감대도 없이 진행되는 시대착오적 ‘이승만 띄우기’는 성공할 수도 없고 결국 이념전쟁으로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것으로 끝날 것이 뻔하다. ‘이승만 국부 만들기’에 주력해온 뉴라이트 역사관에 따른 반역사적인 악행을 당장 멈추기를 요구한다. 글_윤여진(시인,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부회장)
-
즐거운 도가모임지난 3월 17일 즐거운 도가모임 시흥교구 모임이 있었다. 시흥교구의 마지막 도가모임으로 세 가정의 모여 진행하였다. 생일을 맞은 어린이 한울님의 파티를 통해 서로 촛불을 끄고 노래를 부르고 선물을 주고 받는 기쁨을 나눴다. 도가모임을 진행한 시흥교구 교인은, "3월 큰형한울님의 생일에 모두 모여 생일 축하하고 맛있는 음식 같이 먹었습니다. 서로 촛불끈다고 울고 불고...앞으로도 생일인 달에 어린한울님들이 모여서 생일파티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기회 가질 수 있도록 기획하고 노력해주신 여러 동덕님들께 감사인사 드립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