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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학대학원 하계수련 실시종학대학원에서 포덕164(2023)년 하계수련을 실시한다.이번 하계수련은 현 재원생 중심으로 교육일정의 일환으로 포덕164. 하계수련을 실시한다. 하계수련 신청하기 https://forms.gle/5Bi36g1ncYfkCW976 재원생이 아닌경우에도 위 서식 제출후 하계수련을 신청할 수 있으나,반드시 종학대학원 교무처(02 720 3020)로 전화확인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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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통보제’ 국회 통과…공포 1년 후 시행문 듣기 시작 글아동의 출생신고 누락을 방지하기 위한 ‘출생통보제’가 도입된법무부는 30일 이같은 내용의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아동의 출생신고 누락을 방지하기 위한 ‘출생통보제’가 도입된다. 법무부는 30일 이같은 내용의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보건복지부, 법원행정처, 행정안전부 등 관련 부처·기관과 협의해 모든 아동의 출생 등록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지난해 3월 4일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출생통보제는 의료기관의 출생정보 통보로 아동의 출생을 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출생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아동이 살해, 유기, 학대 등의 위험에 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다. 이번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의료기관에서 아동이 출생할 경우 의료인은 모친의 성명·주민등록번호, 출생자의 성별·출생연월일시 등의 출생 정보를 해당 의료기관에서 관리하는 출생자 모친의 진료기록부에 기재해야 한다. 의료기관의 장은 출생일로부터 14일 이내에 출생 정보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제출해야 한다. 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지체없이 모친의 주소지를 관할하는 시·읍·면의 장에게 출생 사실을 통보해야 한다. 시·읍·면의 장은 통보받은 아동이 출생 후 1개월 내에 출생신고가 됐는지 확인해야 한다. 1개월 이내에 출생신고가 되지 않으면 모친 등 신고 의무자에게 7일 이내에 출생신고를 하도록 통지해야 한다. 이후에도 신고가 되지 않으면 법원 허가를 받아 직권으로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 개정법은 공포 후 1년이 경과한 날로부터 시행된다. 법무부는 “개정안의 통과로 아동의 ‘태어난 즉시 출생 등록될 권리’가 보장되고 출생신고 누락을 방지해 아동의 복리에 보다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관련 부처와 적극 협의해 제도가 차질 없이 시행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문의 : 법무부 법무실 법무심의관실(02-2110-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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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 이제는 뮤지컬이 이끈다코로나19에서 완전히 벗어나 우리 공연시장의 맏형 역할을 하고 있는 K-뮤지컬이 아시아를 넘어 뮤지컬의 본고장인 미국과 유럽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며 K-컬처를 이끌기 위한 시동을 걸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6월 30일(금), K-뮤지컬 비전 발표회 ‘K-뮤지컬 어디까지 가봤니?’를 열어 K-뮤지컬 지원 정책과 K-뮤지컬 해외 진출 사례 등을 발표했다. 박보균 장관은 “문화매력국가의 근간인 K-컬처 중 뮤지컬은 국내 공연시장의 76% 이상을 차지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제 <마리퀴리> 같은 창작뮤지컬이 해외로 수출될 만큼 우리의 뮤지컬 제작 능력과 배우들의 역량이 상당하다. 뮤지컬계에서도 영화 <기생충> 같이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는 작품이 나오고, K-뮤지컬이 아시아를 넘어 미국, 유럽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민관이 힘을 합쳐 노력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단계적 해외 진출 지원, 창작뮤지컬 활성화 토양 마련 K-뮤지컬 성장에 힘쓴 서울예술단, 국립정동극장 등 유관 단체 적극 지원 한국 뮤지컬은 지난 20년간 지속적인 고성장을 거듭해 오고 있으며, 2022년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작년에 최초로 4천억 원을 넘는 티켓판매액*을 기록하며 국내 공연시장의 성장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창작뮤지컬은 2000년 이후 지속적으로 해외시장에 문을 두드리고 있으며, 최근에는 <마리퀴리>[(주)라이브], <베토벤>(EMK뮤지컬컴퍼니) 등의 국내 작품들이 해외에 수출되는 사례가 다수 나올 정도로 K-뮤지컬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 2022년 뮤지컬 장르 티켓 판매액 4,253억 원, 전체 공연시장 규모의 76.1% 이번 행사에서는 이와 같은 뮤지컬계의 노력과 뮤지컬 관련 단체, 공공기관의 협력을 바탕으로 도출한 K-뮤지컬 비전, ‘K-컬처를 이끌 K-뮤지컬,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를 발표했다. 문체부는 앞으로 ‘K-뮤지컬 국제마켓’을 통해 우리 작품을 소개해 해외 진출 기회를 제공하고, 아시아권, 영미권에서의 로드쇼를 통해 해외 쇼케이스를 늘려나갈 예정이다. 최종 단계에서는 작품의 현지화, 현지와의 공동작업을 지원해 성공적으로 해외시장에서 유통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후속지원을 이어간다. 또한 ▴ 뮤지컬 예비인력과 전문 글로벌 프로듀서 인력을 양성하고 ▴ 창작산실(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속 지원, 공연예술 창·제작-유통 협력 생태계 구축(예술경영지원센터) 등을 통해 창작뮤지컬을 활성화하는 토양을 다진다. ▴ 업계와 함께 공연통합전산망을 고도화해 공연시장 정보에 대한 신뢰를 더욱 높이고 공연 투자를 확대하는 환경도 만들어간다. 아울러 서울예술단이 <다윈영의 악의 기원>을 일본 시장에 수출하고 국립정동극장이 올해 초 ‘한국뮤지컬 어워즈’에서 뮤지컬 <쇼맨>으로 대상을 수상한 사례처럼 문체부 유관 단체가 국내 민간 뮤지컬 제작사와 함께 K-뮤지컬의 킬러콘텐츠를 육성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계획이다. 뮤지컬 제작사와 배우들로부터 해외 진출 사례와 경험담 들어 이번 비전 발표회에서는 뮤지컬 제작사와 배우들의 현장 목소리도 들었다. ▴ 신춘수 ‘K-뮤지컬 국제마켓’ 총감독과 뮤지컬 제작사 (주)네오 이헌재 대표, 라이브(주) 강병원 대표는 K-뮤지컬 해외 진출 사례를, ▴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한 한국 창작뮤지컬 <영웅>의 양준모 씨와 폴란드 바르샤바 뮤직가든스 페스티벌에 오른 <마리퀴리>에서 열연한 김히어라 씨는 뮤지컬 배우로서 느낀 소감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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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성우그룹, 대학생 서포터즈 ‘현대성우 챌린저스’ 4기 모집현대성우그룹이 대학생 서포터즈 ‘현대성우 챌린저스’ 4기를 모집한다고 밝혔다.2020년 발족한 현대성우 챌린저스는 캐스팅, 휠, 배터리, 모터스포츠 등 기술 집약적인 자동차 산업을 이끄는 글로벌 자동차 부품 기업 현대성우그룹의 대학생 서포터즈로, 기업 가치관인 ‘도전’을 대학생들과 함께 실현하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이다.올해 4주년을 맞은 현대성우 챌린저스는 현대성우그룹 소식 및 다양한 모빌리티 산업 관련 콘텐츠를 △영상 제작 △기획 기사 작성 △카드뉴스 제작 등 다양하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통해 전달해왔다. 특히 올해부터는 릴스, 유튜브 쇼츠 등 최신 트렌드에 맞는 콘텐츠도 추가해 홍보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현대성우 챌린저스 4기 모집 대상은 △개인 계정의 블로그 및 소셜 미디어를 활발히 운영하고 있는 대학생·휴학생 △자동차 산업 및 콘텐츠 제작에 관심이 많은 학생 △서포터즈 활동 시 온라인·오프라인 미팅 참석이 가능한 학생이다.지원 기간은 6월 29일(목)부터 7월 14(금)까지 온라인으로만 진행하며, 서류 심사 및 화상 면접을 거쳐 최종 12명을 선발한다.최종 선발된 현대성우 챌린저스 4기에게는 △매월 소정의 활동비 지원 △최종 수료 시 수료증 수여 △활동 우수자 시상 및 포상금 수여 △실무자와의 멘토링 기회 제공 △팀웨어 및 각종 굿즈 제공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현대성우 챌린저스 4기는 올 8월부터 11월까지 4개월간 활동하며, 활동 기간에 매월 주어진 미션 키워드를 주제로 콘텐츠를 제작한 뒤 개인 블로그 및 소셜 미디어에 올리면 된다.지원 방법은 현대성우저널 홈페이지 내 서포터즈 모집 게시글을 참고해 7월 14일 밤 12시까지 온라인 지원서를 제출하면 된다. 추가 문의 사항은 현대성우쏠라이트 경영지원팀(마케팅/커뮤니케이션팀)으로 연락하면 확인할 수 있다.현대성우그룹은 콘텐츠 기획 및 제작·멘토링 등 다양한 경험을 제공할 예정이니 많은 지원을 바란다며, 현대성우그룹은 모든 대학생의 꿈과 열정을 응원하며 현대성우 챌린저스가 모빌리티 산업 취업을 희망하는 대학생들의 대표 대외 활동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현대성우쏠라이트 소개경원산업에 뿌리를 둔 현대성우쏠라이트는 1979년 2월 설립된 차량용 및 산업용 배터리 전문 제조업체다. 현대성우쏠라이트는 기술 집약적인 제품의 개발과 생산을 통해 파트너에게는 신뢰, 고객에게는 만족을 주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맞게 다양한 해외 네트워크망을 구축했으며, 이런 혁신 과정을 통해 성장세를 이어가며 세계로 뻗어 나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현대성우쏠라이트는 자동차 산업의 주요 부품인 브레이크 디스크, 엔진 파츠, 알로이 휠 등의 전문 제조사인 현대성우캐스팅, 물류 및 신소재 전문 기업인 현대성우신소재 등과 함께 현대성우그룹에 속해 있다. 현대성우그룹은 1997년 쏠라이트 인디고 레이싱 창단을 기점으로 현재까지 꾸준히 팀 후원을 맡고 있다.언론연락처: 현대성우쏠라이트 경영지원팀 마성민 차장 02-2189-5318 황보세리 사원 02-2189-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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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에 참여한 민족대표, 유암 홍기조유암 홍기조 : 1865-1938 (천도교, 당시 55세) 생애 홍기조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호는 유암游菴. 평안남도 용강 출신. 홍경래洪景來의 후손으로 어려서 한학漢學과 필법筆法을 배웠고, 22세 때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해서 황해도, 평양도의 수접주首接主, 대접주大接主, 의창대령義倡大領, 도사道師, 장로長老 등을 역임하고, 1906년 이후에는 제13대 교구장 대리 및 교령, 평양교구장, 교수, 예비도훈 등을 지냈다. 이러는 가운데, 그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서지방의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참가하기도 했으며, 민중 계몽 운동에도 힘썼으며, 1910의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국외의 독립단체에 제공하는 등 조국광복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계 1차 대전의 종전과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는 등, 독립운동의 기운이 고조되던 1919년 2월 25일, 홍기조는 고종의 인산因山과 교주 최제우崔濟愚의 환원還元기도 참배 목적으로 나인협, 나용환, 임예환 등 평안도의 천도교 지도자들과 함께 서울에 상경했다. 천도교 중앙종부에서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 천도교 간부들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찬성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하기로 하였다. 2월 27일에는 서울 재동의 김상규金相奎 집에서 오세창, 최린崔麟, 임예환林禮煥, 권병덕權秉悳, 나인협羅仁協, 김완규金完圭, 나용환羅龍煥, 홍병기洪秉箕, 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默 등과 다시 만나,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고, 28일 밤에는 재동의 손병희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 준비사항을 최종 협의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2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비록 홍기조는 구금된 상태였지만, 3ㆍ1독립운동은 그가 활동하던 평안도에 확산되어 성천成川, 양덕陽德, 영원寧遠, 덕천德川 지역과 특히 평안남도 시위의 최대의 참극이 빚어진 맹산 등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들 지역은 홍기조, 임예환, 나인협, 나용환 등 평안도 출신 천도교 지도자들이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맹산시위의 경우, 3월 10일 100여 명의 천도교도에 의해 주도되고 이에 기독교도들이 이에 가세된 형태로 시작되어, 주민 56명이 일제 헌병들의 발포로 희생된 사건이었다. 출옥 후 홍기조는 고향에 돌아가, 천도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진남포 종리원 주임종리사(1923.5.1), 도사(1934), 장로를 지내면서 청소년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38년 7월 6일 병사했다. 대한민국정부는 고인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洪基兆 신문조서 (제1회) 洪基兆 위 사람에 대한 내란사건에 대하여 대정 8년 8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예심계 조선총독부 판사 楠常藏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宮原悅次 열석하여 판사는 피고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문하다. 문 : 성명, 연령, 족칭, 직업, 주소, 본적 및 출생지를 말하라. 답 : 성명은 洪基兆. 연령은 55세(12월 19일생). 족칭은 - 직업은 천도교 도사. 주소는 平安南道 龍岡郡 吾新面 霞陽里 749번지. 본적은 平安南道 龍岡郡 吾新面 霞陽里 749번지. 출생지는 平安南道 龍岡郡 吾新面 霞陽里 749번지. 문 : 작위, 훈장, 기장을 가지고 연금, 은급을 받거나 또는 공직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답 : 없다. 문 : 지금까지 형벌은 받은 일은 없는가. 답 : 없다. 문 : 피고가 權東鎭의 권유로 조선 독립운동에 가맹하여 명월관 지점에서 선언서를 발표하고 체포되기에 이르기까지의 사실 및 그것에 관련된 사실은 전에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피고가 진술한대로 모두 틀림이 없는가. 답 : 그렇다. 조금도 틀림없다. 문 :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선언서를 배포하고, 일본정부 및 조선총독부, 귀족원, 중의원, 강화회의의 각국 대표자, 그리고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도 청원서를 제출했다는데, 모두 그대로 틀림이 없는가. 답 : 그렇다. 틀림없다. 領제330호의 3, 6, 7, 8을 보이다. 문 : 이것이 선언서, 청원서인가. 답 : 모두 내가 본 일이 없는 것이지만, 이러한 취지의 문서를 각각 발송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귀족원, 중의원 양원에 보낸 서면에는 내가 조인한 것이 틀림없다. 문 : 피고는 그러한 독립운동을 하면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답 : 그렇게 하면 일본제국은 반드시 세계의 대세에 비추어 쉽게 조선의 독립을 허락해 줄 것으로 생각했었다. 문 : 그것은 먼저 선언서를 배포하여 조선 안을 시끄럽게 해놓고, 강화회의로 하여금 조선을 독립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향이 일어나도록 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할 수 없이 독립을 승인하도록 하게 할 생각이었는가, 또는 조선 안에서는 소요하고 있고, 강화회의에서도 일본에게 독립을 시키도록 권고하고, 그러면 용이하게 일본이 승인하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했는가. 어떤가. 답 : 온 조선에 걸쳐 선언서를 배포하고, 한편으로 일본정부에 대하여 청원서를 제출하면 일본에서도 당연히 독립을 허락해 주리라고 생각했으므로 강화회의의 의제로 올리는 것이 어떠한가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문 : 그렇다면 강화회의나 미국 대통령에 청원서를 보낼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답 : 나는 미국 대통령에게 서면을 보냈다는 것 등에 대해서는 모른다. 문 : 그렇게 쉽게 독립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더욱 깊게 연구한 일이 있지 않은가. 답 : 그렇지 않다. 우리들은 독립을 도모한다는 목적이 훌륭한 것이므로 꼭 일본정부에서 승인해주리라고 생각했었다. 문 : 동양의 평화에 해가 된다고 해서 병합한 조선을 그와 같이 청원서를 좀 냈다는 정도의 일로 좀처럼 독립을 시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피고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을 곧바로 허락해 주리라고 생각한 것은 그 밖에 무엇인가 승인해 주리라고 생각하게 된 까닭이 있었는가. 답 : 그 밖에 이유는 없다. 나는 다만 청원하면 독립은 허락해 주리라고 생각했었다. 문 : 그런 생각이었다면 선언서까지 배포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답 : 그것은 사사로운 일이 아니고, 온 조선민족의 일이므로 모두에게 알려두기 위한 것이다. 문 : 선언서를 보낸 조선은 독립국이다, 자주민이다. 따라서 독립의 의사를 발표하라고 되어있는데, 지금 피고가 말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뿐 아니라, 조선인을 선동하는 문구로 되어 있는데 어떤가. 답 : 그것은 그렇게 하라고 권유한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이러 이러한 의사로 독립을 발표하니 너희들은 그것에 찬성한다면 역시 독립의 의사를 발표하는 등 자유로 하라는 의미로 쓴 것으로 생각한다. 문 : 그러나 그 의사를 발표하라고 되어있지 않은가. 답 : 문구로 보아서는 그러므로 결국 조선민족은 어디까지나 독립의 의사를 발표하라는 것이 되는 것이다. 문 : 최후의 1인까지라든지, 최후의 1각까지라든지 사람에게 자극을 주는 것 같은 문구를 적은 선언서를 발표한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일본정부에 끝까지 반항하라는 의미로 그렇게 쓴 것이 아닌가. 답 : 나는 그런 것쯤의 문구로 인심에 자극을 준다고는 생각하지않는다. 문 : 그리고 의사 발표의 방법은 어떤 방법으로 하라는 것이 씌어있지 않으므로 혹은 폭력으로 하라는 의미로도 생각되는데, 그 점은 어떤가. 답 : 나는 그런 위험한 일까지는 모른다. 문 : 그와 같이 선언서를 발표하면 그것에 자극되어 폭동 소요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은 피고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답 : 나는 그런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끝에 질서를 존중하라는 것이 씌어있는 것은 그것을 만들 때 혹은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있지나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문 : 그와 같이 주의한 것으로 보아도, 또한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을 변경하여 일부러 명월관지점에서 한 것을 보더라도 폭동이 일어난다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 답 : 사실이 그렇게 되어있으니 그와 같이 말해도 하는 수 없고, 변명할 말이 없다. 문 : 당장 피고 등이 발표한 선언서를 보고 그것에 자극되어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폭동을 일으킨 일이 平安北道 義州郡 玉尙面, 黃海道 遂安郡 遂安面, 京畿道 安城郡 陽城面·元谷面 등지에 있는데 어떤가. 답 : 그런 일은 지방법원의 예심결정에서 비로소 알았는데 그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진실로 뜻밖이다. 이 신문은 조선총독부 재판소 통역생 植山健藏의 통역에 의하였으며, 위 녹취한 것을 그 통역생에게 읽어서 들려주었더니 틀림이 없다고 승인하고 다음에 서명 날인하다. 통역 조선총독부 재판소 통역생 植山健藏 작성일 대정 8년 8월 22일 고등법원 서기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宮原悅次 신문자 예심계 조선총독부 판사 楠常藏 洪基兆 신문조서(제2회) 洪基兆 위 사람에 대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사건에 대하여 대정 8년 7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예심계 조선총독부 판사 永島雄藏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磯村仁兵衛 열석하여 예심판사는 전회에 이어 피고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문하다. 문 : 洪基兆인가. 답 : 그렇다. 문 : 이것은 林圭가 東京으로 가지고 가서 귀족원 및 중의원에 제출한 독립통고문인데 피고의 성명 밑에 찍힌 도장은 피고의 도장임에 틀림없는가. 이때 증제419호, 증제420호를 보이다. 답 : 틀림없다. 문 : 독립선언서에 질서를 존중하라고 쓰여 있는데 어떤 취지인가. 답 : 그것은 나로서는 모른다. 문 : 선언서를 발표하면 폭동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경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피고도 그것을 염려했던 것이 아닌가. 답 : 그렇다. 염려하고 있었다. 문 : 피고 등의 선언서를 보고 황해도·평안도·함경도·경기도 등의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데,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답 : 그런 폭동을 선동한 일은 없으나 폭동이 일어난데 대한 책임을 법에 따를 뿐이며, 나로서는 딴 생각이 없다. 문 : 선언서 발표의 장소를 변경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 그것은 학생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여 어떤 소요가 일어나서는 안되므로 장소를 변경했었다. 문 : 학생을 모이게 한 것은 누군가가 지시했다는 것이 아니었는가. 답 : 그런 것은 모른다. 조선총독부 재판소 통역생 尾田滿 위 서명자에게 읽어서 들려주었더니 그것을 승인하다. 앞에서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이 조서를 작성하였으므로 재판소의 직인을 찍지 못함. 서기 경성지방법원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磯村仁兵衛 신문자 예심계 조선총독부 판사 永島雄藏 자료1, 독립운동가 공훈록-국가보훈처 성명 : 홍기조 생몰년도 : 1865.12.6 ~ 1938.7.6 출신지 : 평남 용강 운동계열 : 3·1운동 훈격(연도) : 대통령장 (62) 공적내용 :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안남도 용강(龍岡)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홍경래(洪景來)의 후손으로, 어려서 한학과 필법을 배웠고, 1886년(고종 23) 동학에 들어가 황해도와 평안도의 수접주(首接主)·대접주(大接主)·창의대령(倡義大領)등을 역임하고 동학혁명에 가담했다. 1910년 이후에는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국외의 독립단체에 제공했으며,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조국광복에 심혈을 기울였다. 점차 조국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25일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배관키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천도교측 간부들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찬성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키로 하였다. 27일 재동(齋洞)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오세창·최 린(崔麟)·임예환(林禮 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 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와 다시 만나,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 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준비사항을 최종 협의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에 돌아가 천도교의 도사(道師)·장로(長老)를 지내면서 청소년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註 · 조선독립운동년감 : 2면 · 고등경찰요사 : 17·2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 307·309·818·821, 82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 681·682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 1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 2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 91·117·268·355·40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 614·66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 11·14·20·21·28·38·41, 50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 103·147·148·174·48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 305면 자료2, 동학천도교인명대사전 ○ 홍기조(洪基兆)-유암游菴, 1865년 12월 6일 용강군 오신면 가양리 홍경래(洪景來)의 후손으로 1894년에 동학에 입도, 접주, 황해도와 평안도의 수접주·대접주·창의대령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이후에는 독립운동자금을 모금, 국외의 독립단체에 제공하였다. 제13대교구장 대리 및 교령(1906.5), 평양대교구장 (1906.12), 은장(1907.5), 교수(1907.10), 예비도훈(1909.5), 도선암-제1회연성(1912.4.15-6.2), 삼일운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1919), 출옥 후 현기관장(1921), 제42구-종법사(1922.11), 진남포종리원 주임종리사(1923.5.1), 화성포 대표 포덕사(1926), 주임종리사(1927), 주간포덕사(1931.1), 진남포종리원 종리사(1923), 도사(道師), 법정(1934), 장로(長老)를 역임하였다. 1938년 7월 6일 74세로 환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다. ※ 龍江郡 梧井面 中二里 <현기관일기>1913. ※ 형-洪基億. 처-盧信嬅 손자-洪春源<신인간/제126호>1938.9.15. ※ 축사「천도교회월보창간」<교회월보/제3호>1910.10.15. 자료3, 개벽 제51호 > 朝鮮文化基本調査(其八) - 平南道號 잡지명/개벽 제51호 발행일/ 1924년 09월 01일 기사제목/ 朝鮮文化基本調査(其八) - 平南道號 필자/ 踏査員 金起田 車相瓚 기사형태/ 기행문 朝鮮文化基本調査/ 平壤의 天道敎會 朝鮮에 天道敎(東學)가 創建되기는 벌서 64年前(庚申 4月 5日)의 일이다. 三南一帶를 中心삼아, 100만名 以上의 敎徒가 動員되고, 10만名 以上의 生命이 殺戮되며, 朝鮮初有의 革命運動(東學亂)을 니르킨 그때에 잇서도, 平安道方面에서는 東學이란 니야기도 듯기가 어려웠다. 그 後 庚子, 辛丑年 間에 니르러서, 비로소 西北에서도 東學의 群을 보게 되며, 平壤城內에도 若干의 東學群이 潛居하엿다. 그러나 그 때 까지도 平壤城內에서는 東學의 有無조차 모르던 中 甲辰 9月에, 東學이 進步會로 잡아 뒤치며, 羅龍煥, 吳榮昌, 羅仁協, 林禮煥, 洪基兆, 洪基億, 黃學道 等 約 13,000의 東學群이 平壤營門뜰안에서 開會를 宣言하고 4大綱領을 發表하며, 9月 1日부터 6日의 間에 一齊 斷髮을 行하야, 깍근 머리털이 4間 倉庫에 가득하는 悲壯한 盛况을 드리며, 形勢-宏壯하야, 平壤은 勿論, 各面 各洞에 臨時會所를 設하엿스며, 時 觀察使 李承載 以下 城內城外의 人民 大部가 侍天主造化定을 불으는(勿論 一時의 現像) 景况을 演出하엿다. 後 己未 3月에 이곳 天道敎徒-亦是 基督敎會와 한 가지로 萬歲運動을 니르켜, 金洙玉, 金衡國, 趙基栞 等 20餘人의 檢擧를 當한 以外에, 그 동안은 무슨 特別한 일이 업시 今日에 니르럿는대, 平壤天道敎會의 現况으로는 信徒 1,475名, 宗理院이 2處가 잇스며, 內修團(女子靑年會), 靑年黨少年會의 組織이 잇다. 그리고 昨年中에는 20,000圓을 드려, 새로 敎堂을 建築하야, 平壤市民도 만히 그 집을 使用하는 中이며, 그 敎會에 只今 有數한 이론 羅仁協, 林禮煥, 劉啓善, 劉漢基, 金洙玉, 李楚玉, 金衡國가튼 이가 잇는 外에 別로 靑年便으로 李基說, 金明熺 等 幾多의 篤實靑年이 잇다.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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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짜는 며느리한간난, 서택순의 며느리, CJB방송 캡쳐 해월은 전성촌에 머물면서 충청도 청주와 진천 지역을 순회하며 도인들을 지도하는 데 힘썼다. 전성촌에 있으면서 청주 지역으로 포덕을 나갔다가 겪었던 유명한 일화가 ‘천주직포’ ‘베 짜는 한울님’이다. 내가 청주(淸州)를 지나다가 서택순(徐垞淳)의 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徐君)에게 묻기를 “저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하니, 서군이 대답하기를 “제 며느리가 베를 짭니다.”하는지라, 내가 또 묻기를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인가?”하니, 서군이 나의 말을 분간치 못하더라. 어찌 서군뿐이랴. 도인(道人)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降臨)하셨다 말하라.(<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해월은 충청북도 진천(鎭川)의 금성동(金城洞)으로 포덕을 하고 돌아오다 청주 북이면 금암리에 있는 서택순의 집에 들렀다. 해월이 마당에 들어서자 안방에서 베 짜는 소리가 들려왔다. 밥을 먹고 나서도 베 짜는 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해월은 서택순에게 베를 짜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서택순은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다고 하자 해월은 웃으면서 “그대의 며느리가 베를 짜는 게 진정으로 그대의 며느리인가?”하고 다시 물었다. 서택순은 해월이 말을 하는 의미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동행했던 제자들이 서택순의 집을 나선 후에 베 짜는 며느리에 대해 물어오자 해월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우리는 밥을 먹는데 끼니도 거르고 물레질을 하는 며느리도 가족인데 같이 밥을 먹고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자신의 며느리를 한울님으로 대하면 끼니를 거르고 일을 하도록 놔두겠느냐고 반문했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셨는데 며느리도 한울님을 모신 사람으로 대해야 도를 바르게 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_성강현, 해월 평전 베짜는 며느리, 한울님 “내가 청주를 지나다가 서택순의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하니, 서군이“제 며느리가 베를 짜는 소리입니다.”하는지라, 내가 또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인가?”라고 물으니, 서군이내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어찌 서군뿐이겠는가?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 말하라.” <해월 신사 법설 중>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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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움직여라! 마음을 움직여라!꿈을 이야기할 때,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꿈꾸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곳, 바로 무대다. 그 꿈의 현장을 찾아다니는 월간 The Move 발행인 임효정을 만났다. 무수히 많은 문화예술전문매거진들이 탄생했다가 소멸했다. 꿈꾸는 예술가들과 관객들을 담아내는 매거진들은 그 꿈을 지켜내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10년이 넘는 긴 시간 현장을 지키고 있는데에는 보이지 않는, 눈에 보이는 노력이 있었다. 어느새 가을로 접어든 양재천 산책길이 내려다 보이는 한 카페에서 임효정 대표와 늦은 오후 한때를 보냈다.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문화예술전문매거진 <THE MOVE> 를 월간으로 발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10년 창간 이래 올해 13년째 되는 더무브 THE MOVE (www.ithemove.com)는 ‘알려지지 않은 미적 가치를 찾아 세상과 소통’하고자 합니다. 세상의 다양한 음악과 퍼포먼스 등 예술의 새로운 방식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THE MOVE는 음악과 예술의 새로운 변화와 트렌드를 반영하고 한국 전통 음악의 동시대적 변화와 전파 방식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예술로 통하는 한국의 미(美)를 확산하려고 합니다. 공연예술과 더불어 세상의 다양한 예술 장르, 음악, 미술, 무용, 그리고 문화와 관련된 뉴스를 전하고 인물을 소개하며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특히 한국의 전통문화와 민족 문화에 대한 정체성을 부각하고 한국적인 미를 재발견하는 법고창신의 이념에 따라 세계로 통하는 우수한 ‘한류 콘텐츠’ 확산에 노력합니다. 문화와 예술로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일에 지향점을 두고 글을 쓰며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문화계 최근 동향은 어떤가요? 특별히 주목받고 있는 장르가 있다면? 나날이 급변하는 세상입니다. 오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문화예술계는 큰 변화를 겪으며 새로운 전환기에 있습니다. 뉴노멀의 시대에 직면해 대응하는 새로운 방식은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기술과의 융합이 새로운 트렌드라고 할 수 있죠. 문화 활동의 기본 요건인 ‘대면’이 불가해지며 이동성, 특히 국제교류와 협업에 제약이 생기면서 온라인 줌으로 또는 OTT(over-thetop)방식이 활성화되고, 최근엔 기술과의 융합으로 영상 및 메타버스 등 가상공간에서의 예술활동이 가속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특히, BTS, 오징어게임, 미나리 등으로 K=팝에 이은 K-콘텐츠의 세계적 확산에 힘입어 K-클래식, K-Arts가 활황을 맞고 있는 시기죠. 무엇보다 최근 미술시장이 핫한 이슈로 떠올랐는데, 지난 달 강남 코엑스에서 개최된 국내 최대 미술시장인 ‘KIAF 2022’에서는 세계 3대 아트마켓인 프리즈와 공동으로 개최돼 엄청난 호황으로 화제가 됐었죠. 이 또한 K-컬처의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한국을 방문한 PATRICK LEE(프리즈서울 디렉터)는 뜨거운 미술시장에 대해 “지금의 아트신을 한 장의 스냅샷으로 남기는 경험이 될 것” 이라며, “미술사를 배울 수 있는 이전 세기의 명작들로부터 지금 가장 저명한 갤러리의 컬렉션,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작품까지 구성은 다채롭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지금'의 현상을 모은 것이다. 현상을 체감하는 즐거움이 있다.”고 호언했습니다. 문화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고, 그 삶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향유하는 즐거움이 있고, 궁극에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침, 새정부의 120대 국정과제 중 문화예술분야 6개 과제에도 K콘텐츠의세계적 확산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국민의 문화복지 향상으로 행복한 사회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해야겠지요. 동학을 문화적으로 재현한 재현물들이 많은데 어떤 부분이 대중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하시나요? 단순히 역사적인 재현을 담아서는 감흥을 전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가 발딛고 있는 시대의 정서와 밀접한 트렌드의 매체 전달방식을 통해 재창조하는 창작물이 필요합니다. 동학의 정신- 경전의 사상을 담을 다양한 예술적 장르를 찾아 예술가를 적극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최근 제주 4.3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오페라 <순이삼촌>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습니다. 현기영 소설을 원작으로 오페라로 창작된 작품인데, 4.3 사건을 알리고자 노력한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연 관람을 통해 4.3 사건의 희생자들의 슬픔과 자유에 대한 의지를 공감했습니다. 수운제나 동학제 등 다양한 동학 행사의 경우, 대중적인 엔터테인먼트 위주의 일회적 행사가 아니라 본래의 의미를 담은 심오하고 격조 있는 행사로 준비되었으면 합니다. 이 시대 동학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불변의 가치는 시대가 변해도 영원하다고 봅니다. 잊지 않고 단련을 통해 체화해 일상에 생활화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동학의 가치는 경전에 있고, 교리에 있고 스승님의 말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심즉여심’- 내 안의 마음이 곧 한울이므로 그 마음을 공경하여, 언제나 밝고 신령한 본마음을 회복해 잃어버리지 않으면 도덕 실천의 본바탕이 마련되어 인의예지를 저절로 실천할 수 있다.- 는 것만큼 무극대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_「흥비가」 노래는 여전히 생생한 울림입니다. 니체는 “인간의 본성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삶과 세상을 살며 미래를 개척해 나아갑니다. 지성과 통찰, 수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예술이 한 몫을 하지 않을까요?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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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 희망을 움켜진 사람들, 당진대도소의 복원당진대도소는 현존하는 유일한 동학대도소이다. 손병희 선생 가옥이기도 했으며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군지도부가 와해되고 해월 최시형 선생 마저 사형당한 후 동학의 최고지도부가 은신 잠행했던 곳이 당진 동학대도소이다. 아쉽게도 현재까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다가 동학혁명 과정에서 당진지역에서 발생한 ‘합덕민란’과 승전목 전투 등이 재조명되면서, ‘당진동학대도소’의 보존에 관심을 갖고 복원하게 된 것이다. 의암 손병희 선생이 1년 이상 은신 잠행했던 당진시 수청동 '당진동학 대도소'가 도시개발로 인해 헐릴 위기에 몰리자 천도교와 전국의 동학 관련 단체들이 당진시를 찾아 유허지의 보존을 탄원한 끝에 성사된 것이다. 의암 손병희선생은 1898년 8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1년 넘게 당진시 수청동 띠울마을에서 은신한 것으로 기록(천도교서 등)에 전해져 왔다. 이후 당진 지역의 동학도들의 구심점이 된 곳이 수청동 동학대도소였다. 고요한 햇살이 마른 땅에 내려 앉을 때, 의암 손병희 선생은 이곳에서 동학의 가르침을 꾹꾹 눌러 쓰는 심정으로 교인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일어서자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그렇게 동학은 다시 일어섰고 뚜벅뚜벅 걸어왔을 것이다. 당진에서 절망을 딛고 희망을 움켜쥔 사람들을 다시 생각한다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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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여성회 창립99주년천도교여성회 창립99주년 기념영상 포덕164(2023)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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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의 '물총축제' 개최4년 만에 ‘물총축제’가 개최된다. 이번 축제는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8월 12일(토)~13(일) 양일간 ‘2023 물총축제(2023 WATERGUN FESTIVAL)’라는 타이틀로 펼쳐진다.‘2023 물총축제’의 콘셉트는 ‘I AM ALIVE’다. 참가자들이 도심에서 서로 물총을 쏘며 일상에서의 해방감을 맛보는 유일한 축제다. 또한 행사장 내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페스티벌이 될 것이다.이번 축제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거리에서 탈피해 좀 더 넓고 활동성 좋은 공간에서 물총축제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맞춰 주최 측은 행사장 곳곳에서 쏟아지는 다채로운 워터 어트랙션과 신나는 DJ 음악을 선보이고, 청년 기획단과 함께 물을 활용한 짜릿한 프로그램을 기획해 배치할 예정이다.주최·주관사인 도심형 콘텐츠기획사 헤이웨이는 축제를 통해 지역과 사회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방법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일곱 번의 ‘신촌 물총축제’에서는 사회적기업과 협업해 회당 2톤의 물총을 재활용 및 재사용했다. 이로 인해 약 14톤의 플라스틱이 선순환됐다.11년간 이어온 ‘물총축제’를 새로운 장소에서 개최하는 헤이웨이 김현경 대표는 “물로 즐길 수 있는 가장 신나고 짜릿한 프로그램을 4년간 고민한 만큼 모두가 행사장에서 물총으로 소통하며 하나 되는 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해 일 년에 단 한 번 젖어도 괜찮은 축제를 기다려 온 시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헤이웨이는 2013년부터 개최해 온 ‘신촌 물총축제’를 비롯해 △신촌 맥주축제 △명동 우주맥주축제 △펫터파크 축제와 같은 지역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운영하고 있다.행사는 2023년 7월 5일(수)부터 ‘위메프’에서 사전 예매를 시작한다. 행사 관련 문의 사항은 공식 인스타그램(@watergun_festival) 또는 전화로 문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