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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일기념일의 의미와 의암성사님의 숭고한 정신 되새기자12월 24일은 의암 성사께서 해월 최시형 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날을 기념하는 인일기념일이다. 올해는 제127주년을 맞이하며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교구에서 기념식을 봉행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는 이날 인일기념일을 계기로 교단 중흥을 위한 굳건한 결의를 펼쳤다. 중앙대교당에서 봉행된 인일기념식은 인화당 이미애 교화관장의 집례, 수정당 김명덕 여성회부회장의 청수봉전, 박징재 여성회장의 경전 봉독(인여물개벽설), 윤석산 교령의 기념사가 이어졌다. 윤석산 교령은 기념사에서 “의암성사님께서는 ‘천지와 해와 달이 가슴 속에 들어오니, 천지가 큰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이 큰 것이라, 군자의 말과 행동은 천지를 움직이나니, 천지조화는 내 마음대로 할 것이라’고 일깨워주셨습니다. 이러한 스승님의 가르침처럼 우리 천도교인이 모두 ‘자기 마음 한울’을 자각(自覺)한다면 우리의 염원인 교단의 중흥은 가능하리라고 생각됩니다.”라고 하면서 “오늘날 우리 인류는 기후 위기를 비롯한 생태적·정신적인 대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일찍이 우리 수운대신사님께서는 ‘다시개벽’의 소식을 전하시면서, ‘문명의 대전환(大轉換)’을 예고하셨습니다. 우리 천도교는 이 위기를 생태문명으로의 전기(轉機)로 삼아, 모든 존재들이 차별받지 않고 거룩한 한울님으로 모심과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천추만대에 빛날 의암성사님의 의기(義氣)와 일제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조를 지켜 순도 순국하신 그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을 우리가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의암 성사께서 생의 마지막에 남긴 유시를 되새기며 기념사를 마쳤다. 기념식이 끝나고 2부 문화공연은 천도교대학생단 조영은 단장의 사회로 이어졌다. 이날 기념공연은 ‘민족의 꽃’이신 의암 성사께서 ‘민중의 성자’이신 해월 신사께 도통을 이어받은지 127주년을 기념하여 천도교대확생단 단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 이뤄졌다. 첫순서는 ‘천도교 대학생단 합창단’ 8명의 단원이 삶과 죽음,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진 사랑과 위로를 이야기하는 ‘천개의 바람이 되어’와 고난과 어둠을 지나 빛을 향해 날아오르는 이야기를 노래 ‘Butterfly’로 표현하여 참석한 교인들이 축하와 위로의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두 번째 순서에서는 대학생단 여성 4인으로 결성된 ‘천도퀸즈’의 무대가 이어져 추운 겨울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너와의 모든 지금’, 그리고 천도퀸즈와 스페셜 게스트로 이재선 청년회장이 함께 신명 나는 트로트 ‘날 봐 귀순’이 이어져 큰 박수를 받았다. 이번 인일기념일 행사는 청년 교인들의 빛나는 열정을 무대로 더욱 뜻깊은 시간이었다. 다음은 제 127주년 인일기념일 기념사 전문이다. 기 념 사 공경하는 동덕 여러분!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어느덧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 기운과 함께 새해가 시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세밑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숨가쁘게 달려오느라 세월의 흐름을 잊은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의암성사님께서 해월신사님으로부터 도통(道統)을 이어받으신 지 127주년이 되는 인일기념일입니다. 우리는 이 뜻깊은 날을 맞이하여 위대한 의암성사님의 삶과 사상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결의(決意)를 새롭게 다져야 하겠습니다. 의암성사님은 조선이 저물어가던 무렵인 포덕 2년(서기 1861년) 청주군 대주리 손씨 집안에서 서자로 탄생하셨는데, 신분 차별에 분노하며 젊은 시절 한때 울분으로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기가 남달랐던 의암성사님께서는 보국안민(輔國安民)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가르침이 동학이라는 말을 듣고 단번에 입도를 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날의 잘못된 습관을 단칼에 끊어버리고, 2년간 용맹정진하여 대도의 기초를 단단하게 쌓았습니다. 그 후 해월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하루에 주문 3만독 송주로 끊임없는 독공 수련 끝에 천도를 체득하셔서 큰 인물로 거듭나셨습니다. 의암성사님께서는 동학혁명 당시 북접통령(統領)으로서 동학군을 지휘하며,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자유와 평등의 세상을 구현하고자 헌신하셨습니다. 비록 일본군의 개입으로 혁명의 기세는 꺾였지만, 개벽 세상을 향한 마음만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한때 천하대세와 선진문명을 살피기 위해 중국과 일본에 머물며 서양의 앞선 물질문명을 탐색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세상은 물질문명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개벽의 바탕 위에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시고, 포덕 46년(서기 1905년) 12월 1일에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大告天下) 하시는 용단(勇斷)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운명은 저물고 결국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게 됩니다. 나라를 잃은 후, 자주독립을 향한 성사의 강인한 의지는 드디어 3·1 대혁명으로 세계에 커다란 충격과 영감(靈感)을 주게 됩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이 거사는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당시 고통 속에 시달리던 식민지 민중들에게도 커다란 희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거대한 제국의 폭력에 당당히 맞서는 풀뿌리 민중의 위대한 힘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의암성사님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애는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구도자,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가, 위대한 교육자이면서 종교지도자, 3·1 대혁명의 영도자 등 그 참모습을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풍운대수(風雲大手)의 삶이셨습니다. 그래서 일부 세상 사람들은 의암성사님이 당시 상황에 따라 용시용활로서 행한 일을 보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 무어라고 해도 의암성사님이 발휘하신 탁월한 경륜(經綸)과 영도력(領導力), 시대를 내다보는 형안(炯眼)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이 나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의암성사님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인간이 본래부터 품고 있는 ‘한울님 성품’으로 돌아가서 지상천국을 건설하자는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인류를 구원할 생명존중의 가르침이며, 더 나아가 우리와 함께 있는 지구행성의 만물을 살릴 수 있는 살림과 돌봄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또한 의암성사님의 성령출세설(性靈出世說)은 수운대신사님의 포덕장생설(布德長生說), 해월신사님의 향아설위설(向我設位說)을 이어받아서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성령의 자각을 통한 영적 장생설(靈的 長生說)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출세의 진리를 체득할 때 우리는 생사를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또 의암성사님께서는 봉황각 49일 수련시에 “육신은 한때의 객체(客體)이며, 성령(性靈)이야말로 영원한 주체(主體)이므로, 성령이 주체가 된 삶을 살으라”고 하신 이신환성(以身換性)의 법설을 특히 강조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신환성의 가르침은 일제강점기에는 3·1대혁명을 일으킨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으며, 현재의 우리에게는 신앙과 수도(修道)의 요결(要訣)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의암성사님의 이신환성 가르침은 대기번복(大氣飜覆)의 시대를 맞이하여 전염병과 전쟁, 기후 재앙 등으로 고통받는 인류와 만물을 구제할 한 줄기 활로(活路)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공경하는 동덕 여러분! 만약 의암성사님께서 지금 이 세상에 나타나신다면 그 형형하신 눈빛을 빛내시면서, 우리들에게 아니 이 세상을 향하여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의암성사님께서는 ‘천지와 해와 달이 가슴 속에 들어오니, 천지가 큰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이 큰 것이라, 군자의 말과 행동은 천지를 움직이나니, 천지조화는 내 마음대로 할 것이라’고 일깨워주셨습니다. 이러한 스승님의 가르침처럼 우리 천도교인이 모두 ‘자기 마음 한울’을 자각(自覺)한다면 우리의 염원인 교단의 중흥은 가능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우리 인류는 기후 위기를 비롯한 생태적·정신적인 대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일찍이 우리 수운대신사님께서는 ‘다시개벽’의 소식을 전하시면서, ‘문명의 대전환(大轉換)’을 예고하셨습니다. 우리 천도교는 이 위기를 생태문명으로의 전기(轉機)로 삼아, 모든 존재들이 차별받지 않고 거룩한 한울님으로 모심과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천추만대에 빛날 의암성사님의 의기(義氣)와 일제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조를 지켜 순도 순국하신 그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을 우리가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 127주년 인일기념일을 계기로 우리는 의암성사님의 성령과 융합하여 이신환성의 삶을 살아가자는 말씀을 드리면서, 의암성사님께서 생의 마지막에 남기신 유시(遺詩)를 가슴 속 깊이 새겨봅니다. 쇠 몸인들 어찌 덥지 아니하리오. 세 번 나누고 합하는 연분을 지으니 늙은 용은 폐택으로 돌아가고, 철새는 가을 한울로 보내네. 손을 잡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못하니 이별하는 말인들 어찌 선명하리오. 앞 길에 더욱 어려움이 많으리니 뒷일을 여러 어진이에게 맡기노라. 공경하는 동덕 여러분! 우리는 의암성사님이 유시에서 당부하신 것처럼 뒷일을 책임져야 합니다. 천도교를 더욱 굳건하게 지켜내고, 침체된 교단을 중흥시켜 중원포덕을 넘어 세계포덕을 실현해내야 합니다. 이것은 천명(天命)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업(大業) 실현은 오직 우리의 믿음과 공경과 정성의 힘이 모일 때만이 가능합니다. 이제 얼마 후면 갑진년 ‘푸른 용의 해’를 마감하고 곧 을사년(乙巳年) ‘푸른 뱀의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새해에는 한울님과 스승님의 감응으로 동덕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한울님의 뜻과 함께 이루어지는 ‘만사여의의 해, 성공하는 한 해’가 되길 심고 드리면서 기념사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포덕 165(2024)년 12월 24일 천도교 교령 윤 석 산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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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13)- 수련의 최종 목적마음공부 즉, 수련의 최종 목적을 각 개인이 모신 한울님과 하나되어 영원한 행복을 얻는 개인적 목적과, 이를 기반으로 모든 사람이 서로 한울님으로 대하면서, 한울님 이치와 본성에 맞는 정치.경제 제도를 마련하여 다함께 행복한 세상을 실현하는 사회적 목적의 2가지로 구분하여 차분히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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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모심과 나눔 사업’, 종로구 저소득 취약계층에 온정 전달천도교중앙총부는 연말연시를 맞아 12월 20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1·2·3·4가동 주민센터 앞 주차장에서 ‘2025 희망온돌 따뜻한 겨울나기 천도교중앙총부 물품 전달식’을 하고 저소득 취약계층 400가구를 지원하는 뜻깊은 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사업은 천도교중앙총부가 ‘인내천 모심과 나눔 사업’의 하나로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종로구 1·2·3·4가동 주민센터의 협력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에서는 김치 400상자와 라면 400상자가 저소득 취약계층 가구에 전달되었다. 총 2,840만원의 물품은 종로구 내 도움이 필요한 가구들에 전달되어 실질적인 생활 지원을 제공하게 되었다. 행사에는 천도교중앙총부 관계자들과 종로 1·2·3·4가동 주민센터 관계자들이 참석했고, 특히, 천도교 여성회와 천도교 청년회, 대학생단 교인들이 참여하여 물품 포장과 배부 작업에 함께하며 자발적인 봉사의 가치를 실천했다.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인내천 정신 천도교중앙총부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정신을 기반으로 이번 나눔 활동을 기획했다. 천도교중앙총부 이범창 종무원장은 “이번 사업은 천도교가 추구하는 나눔과 화합의 가치를 지역사회와 함께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며 사인여천을 실천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라며, “앞으로도 꾸준히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지원 활동을 펼쳐 나가겠다”고 말했다. 지원 대상인 저소득 취약계층 400가구는 주민센터와 협력하여 선정되었다. 특히 겨울철 필수 식료품인 김치와 라면을 준비함으로써 가구의 실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했다. 나눔을 통한 희망 전달 행사에 참석한 종로구 1·2·3·4가동 주민센터 이중복 동장은 “의미 있는 나눔을 실천해 주시는 '천도교중앙총부'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저소득 취약계층 분들이 혹한기에 소외되지 않고 잘 보내실 수 있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앞으로도 지역사회에 이웃사랑 나눔이 더욱 확산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라고 전했다. 또한, 행사에 참여한 천도교 대학생단의 한 교인은 “이번 나눔 활동을 통해 취약계층을 위해 생필품을 전달하게 되어 뜻깊었다.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계속 봉사하고 싶다. 추운 겨울이 따뜻해지는 경험이었다”라며 봉사 소감을 밝혔다. 나눔의 열기로 따뜻해진 종로구 연말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인내천 모심과 나눔 사업’은 따뜻한 나눔의 열기를 전파했다. 천도교중앙총부 관계자는 “이번 행사가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나눔의 가치를 공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도 꾸준히 지역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함께할 것”이라며, “인내천 정신을 실천하는 나눔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이번 나눔이 종로구 취약계층 가구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작은 밑거름이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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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5년 12월 15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설교 : 중암 라명재(송탄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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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차 종의원 총회, 20일 중앙대교당에서 열려제 8차 천도교종의원(의장 선우철수) 총회가 12월 20일 오후 1시 중앙대교당에서 개최되었다. 최홍규 부의장의 집례로 점명(성원보고), 개회, 청수봉전, 심고, 주문3회병송, 인사말에 이어 윤석산 교령, 김성환 연원회의장의 격려사에 이어 전차회의록 보고와 함께 의안심의가 진행되었다. 선우철수 종의원 의장은 인사말을 통해 “바쁘신 와중에 참석해주신 종의원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포덕 166년도 예산에 대한 심의를 하기 위해 종의원들이 모였습니다. 좋은 심의를 거쳐 차후 내년도 새로운 집행부와 지장없이 운영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께서 마음을 모아 결정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에 대해 꼼꼼히 살피는 것이 우리 종의원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검토해주시고 잘 마무리 짓기를 심고드립니다” 라고 말했다. 윤석산 교령은 격려사를 통해 “한해 동안 우리 교단에 어려움이 많았었고 또 우리나라도 많은 어려움을 지금 겪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지금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 천도교는 이러한 현실을 가만히 외면하지 않고 종교적 수행만 하는 그러한 종단이 아니라 현실도 직시하고 이 현실을 어떻게 헤쳐갈 것인가 하는 대안도 내놓을 수 있는 종단으로 지난 160년 동안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오늘 이 회의를 통해 내년도 예산안 심의 등에 있어 좋은 결론에 이르기를 당부드리겠습니다.”라고 격려하였다. 마지막으로 김성환 연원회 의장은 격려사에서 “우리 교단의 재정 상태가 넉넉치 않지만 용시용활에 맞춰서 잘 활용하고 잘 쓸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올해 우리 교단의 많은 어려움 속에서 큰 행사를 치렀습니다. 내년 3월에 탄생하는 새로운 집행부가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곳곳에 잘 배분하셔서 잘 만들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고 격려하였다. 이날 제 8차 천도교종의원 총회에서는 중앙총부, 유지재단의 포덕 166년도 사업예산안 등을 안건으로 심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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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어린이도서관 ‘다시 열리는 한마당’ 열려오는 12월 24일 방정환어린이도서관이 ‘다시 열리는 한마당’ 잔치를 개최한다. 수운회관 5층에 위치한 방정환어린이도서관 및 복도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기념전시, 기념품 증정, 도반과 함께 나누는 다과와 도담 등을 진행한다. 기념전시는 『천도교인명대사전』에서 ‘방정환’ 찾기, 천도교 서울교구 작품 전시, 『천도교경전』 한 구절로 서양 동화 읽기를 통해 행사의 의미를 더한다.. 이어 참가자들에게 방정환 친환경 물병과 감초로움 오란다 등의 기념품을 증정한다. 도반과 함께 나누는 다과와 도담은 어린이를 사랑한 방정환 선생의 정신과 어린이 운동을 꽃피운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이 될 것이다. 방정환어린이도서관은 이 행사를 기점으로 삼아 천도교정신에 공감하는 교인 공동체와 일반 시민들에게 도서관 시설을 개방한다. 남연호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은 “수운 대신사님 출세 200년을 보내는 포덕 165년 동짓달, 늘 새로운 마음으로 뜻깊은 인일기념일을 모시며, 저희 도서관이 조촐하게 마련한 방정환 어린이도서관 ‘다시 열리는 한마당’ 잔치에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랍니다. 이 공간은 향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단체와 협의하여 공간을 활용하고 전문 연구자들을 위한 특별 연구실도 개방, 운영하겠습니다. 단체 프로그램 진행이 없는 시간에는 개인 이용도 가능하니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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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서에 나타난 동학혁명기 일본군의 인식조선후기 성리학의 통치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변혁을 시도한 동학은 35년이 지난 1894년 동학혁명을 전개함으로써 조선사회 변화의 큰 물줄기로서 역할을 하였다. 양반과 상민, 그리고 천민의 철저한 신분을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서와 남녀의 차별을 해소하고자 한 동학은 조선 정부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1894년 사회변혁을 주도하였지만 그 과정에 조선 정부 뿐만 아니라 일분군으로부터 적지 않은 탄압을 받고 피해를 받은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동학혁명 초기 동학군과 관군의 전투에서는 동학군의 전과가 훨씬 컸다. 동학군과 관군이 고부 황토현에서 전개된 첫 전투에서는 동학군이 대승하였다. 이 기세를 몰아 호남 일대를 장악하였으며 마침내 全州를 점령함으로써 조선 정부와 화약을 맺고 호남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첫 民政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조선 정부에서는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도 조선에 출병하였다. 동학군과 정부의 화약 이후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에게 철병을 요구하였지만, 조선을 지배하고자 한 일본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청국과 일본의 전쟁터로 변하였고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조선은 점차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동학군이 다시 기포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동학군은 일본군의 점령을 조선 침략의 전초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동학군은 전국적으로 다시 재무장하고 본격적으로 관군을 지휘하는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결과 동학군은 참담하게 학살을 당하였고, 이후에도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적으로 감시와 억압, 나아가 회유의 대상이 되었다. 본글은 동학교단에서 서술한 역사서를 중심으로 일본군의 인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활용하고자 하는 자료는 이돈화의 『천도교창건사』, 오지영의 『동학사』, 그리고 천도교단에서 발행한 『천도교백년약사』와 『천도교약사』를 활용하였다. 다만 『천도교창건사』와 『동학사』는 일제강점기에 간행되었던 자료인 관계로 일본군에 대한 인식이 한계가 적지 않았음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일본군의 개입에 대한 인식 1894년 3월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군이 승리하자 조선정부에는 청국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고자 하는 흐름이 이미 존재하였고,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함에 따라 청국의 파병 요청은 본격화되었다. 즉 전주성 함락으로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4월 30일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일본은 조선정부가 청국에 원군파병을 요청할 것으로 관측됨으로 일본도 출병할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하였다.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에 따라 청군은 동학군은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출병하였으며, 일본은 거류민을 보호하고 텐진조약에 따라 군대는 서울로 들어왔다. 이로써 청군과 일본군은 결국 조선에서 무력적 충돌 즉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일본군이 조선에 진출한 것을 어떻게 기록하였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이때-각도 열읍 도중이 聞風蜂起하여 각기 군수를 참수하고 來附함에 조정에서 도저히 관군의 힘으로 抵當치 못함을 알고 駐京淸國總里事 袁世凱와 상의한 후에 駐津直隸總督 李鴻章에게 電請하여 구원병을 청하니, 이에 淸將 葉志超와 葉士成이 1,500여 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6월 6일에 아산포에 도착하였다. 청국은 이와 같이 조선에 출병하는 동시에 그 旨를 동월 7일부 공문으로 일본에 知照한 바 일본에서는 天津條約(천진조약은 을유년에 日淸 양국이 天津에서 모여 조약한 것을 이름이니, 조약 當者는 伊藤博文과 李鴻章 양인이오, 조약의 내용은 일, 조인일로부터 4개월 이내에 일청 양국은 한 가지로 조선에서 철병할 것 2, 조선국왕에게 권하여 병사를 교련하여 스스로 치안을 유지케 하고 일청 양국은 누구나 敎師를 보내지 못할 것 3, 장래 조선에 변란 중대의 사건이 있어 일청 양국이 혹은 파병하게 될 시는 먼저 조지하고 일이 끝나면 곧 철병할 것)에 예선 知照하는 약속에 위반한 것을 책잡는 동시에 거류민 보호의 이름 아래서 또한 출병하여 마침 귀국하였던 大鳥 公使는 水兵 4백을 거느리고 10일에 경성에 귀임하고 후 13일에는 일본군 3천 인이 또한 경성에 입하였는데 이에 한일청 삼국병과 동학군이 접전이 되게 되는 동시에 불원하여 일청 양국이 선전포고가 되면서 동양풍운이 一飜하게 되었었다.( 『천도교창건사』) 나) 淸國兵은 大將 葉志超, 葉士成의 영솔하에 6천의 육군과 5함의 해군이 충청도 아산만에 내주하였다. 이것을 본 일본에서는 왕년 일청간에 천진조약(만약 조선에 출병할 事가 有할 時는 양국이 相互照會하여 양해를 得한 후에 출병하기로 함)이라는 것을 증거로 하여 爾淸國이 출병하는 시는 我日本도 또한 출병하겠다 하여 일본공사 大鳥圭介는 병함 7척을 거느리고 인천 해안으로 상륙하고 또 육군 1,400여 명과 대포 2문을 앞세우고 바로 아산으로 달려들어 (중략) 先是 일본공사 大鳥圭介가 병을 거느리고 경성에 들어와서 주재할 시에 왕궁에 폐견하고 奏曰 이제 조선 남방 백성들이 蠢動跳梁하여 정부에서 西으로 청국에 구원병을 청한 사실이 있음으로 我 일본 정부에서는 이 말을 듣고 써하되 이는 사태가 가장 중대한 지라. 우리 국왕 폐하께서 臣을 命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나가 우리의 商民을 보호하고 또는 귀국에서 만일 우리에게 청구하는 事가 있으면 一臂之力이라도 도와 드릴까 하고 왔노라 하며, 또 부강자치책으로써 말이 많았었다.(『동학사』) 가)에 의하면 일본군의 출병은 ‘천진조약’에 따른 것과 ‘일본 거류민 보호’를 위한 것이었으며, 나)에 의하면 ‘일청 간의 천진조약’을 명분으로 하고 ‘일본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출병하였다고 하였다. 이 두 기록으로 볼 때 ‘천진조약’ 및 ‘거류민 보호’ 때문에 일본군이 조선에 출병하게 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여기에 『동학사』는 조선에서 ‘청구하는 事’라는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의 부강자치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인식으로 볼 때 두 기록은 조선의 입장보다는 가능한 한 일본 측의 입장을 옹호하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다. 이와 같은 인식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이에 비해 해방 이후에 간행된 글에서는 일본군의 출병을 보다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천도교백년약사』에 의하면, “일본 외무대신의 훈령으로 제물포조약에 의해 군사를 파견한다”고 하여, 천진조약보다는 제물포조약에 무게를 다 두고 있다. 그리고 제물포조약의 내용으로 “서울에 있는 공사관이 소실되고 재류일본인이 학살을 당한 후 한일 양측은 제물포에서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키 위해 군사를 파견할 수 있다”는 주해로 부연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전주화약 이후 일본군의 파병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大鳥 일본공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출병하였다고 하는 한편 나아가 이러한 상황을 ‘일본의 침략’이라고 인식하였다. 특히 “일본군은 우리 국민의 뜻과는 상관없이 대군을 진주시켜 무력으로 국권을 유린하며 정권을 농단하는 등 야만적인 침략행위를 자행”하였다고 하여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때문에 일본군을 침략군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에 비해 『천도교약사』에서는 “청국에 대해 동학군 토벌을 위한 원병을 요청하게 되었다. (중략)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이 사실을 통보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조선 정부가 요청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의대로 6천여 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무방비 상태인 서울로 진입케 함으로써”라고 하여, 일방적으로 일본군이 출병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분군 출병의 원인이었던 천진조약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을 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하였던 또 하나의 원인이었던 ‘거류민 보호’에 대해서도 전혀 기술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식은 일제강점기 간행된 『천도교창건사』나 『동학사』보다 오히려 느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계속) 희암 성주현(신인간 주필, 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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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5년 12월 15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오심즉여심과 주문설교 : 광암 윤철현 종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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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남 도원포 도정, 평생 모은 도서와 자료 기증중암 박충남 도원포 도정은 지난 10월 29일 80 평생 모은 도서와 자료 1,000여 점을 그가 태어나고 자란 남해교구에 기증하였다. 그는 그가 펴낸 책 『그 누구 없소』(2014.02.25. 발행) 서문에서 “…나는 고향과 도원포 연원, 남해교구에 많은 빚을 졌다. 내가 평생 모은 도서 자료 일체를 남해교구에 기증할 것을 밝혀 두고자 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책 서문에서 약속한 대로 이번에 실행에 옮겨 자료를 보내왔다. 중암 박충남 도정은 “지금은 비록 TV, 컴퓨터 등에 밀려 도서의 중요성이 사라져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나, 자라나는 어린 세대, 후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바람이 없겠다.”라고 하였다. 글, 사진 남해교구 송암 박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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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박물관, 대만 낙생원 초청 행사 개최국립소록도병원(원장 직무대리 박종억) 한센병박물관은 2024년 12월 19일(목)에 대만 낙생원* 관계자 초청행사를 개최한다. * 1930년 대만총독부에 의해 설립되어 현재까지 운영 중인 대만의 국립 한센병 요양소 이번 행사는 한센병박물관 국제학술대회*의 부대행사로, 2024년 10월 2일 1차 초청행사에 이어 두 번째로 진행되는 행사이다. 앞선 행사에서는 낙생원에 거주하고 있는 한센인을 포함한 3명의 관계자를 초청하여 소록도주민자치회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 바 있다. * (한센병박물관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 한센병 유산의 초국가적 연계 가능성’을 주제로 개최(10.4.) 초청 대상은 2008년부터 낙생원 보존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젊은 활동가와 ▲다큐멘터리 감독, ▲현재 한센병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개원 제108주년 기념 기획전시 <두 개의 목소리>’에 참여한 큐레이터 등 3명이다. <두 개의 목소리>는 한센병으로 소록도와 낙생원에 격리되어 평생을 지내 온 두 인물의 생애를 통해 양 기관의 역사를 비교하고 소록도가 지닌 국가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알리고자 기획되었으며, 전시는 이번 달 31일까지 진행된다. 소록도병원과 낙생원은 일제강점기 총독부에 의해 설립된 격리시설로 질병에 대한 편견으로 인권을 탄압받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의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행사는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진행된다. 오전에는 소록도와 낙생원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며 질의응답하는 시간을 갖는다. 오후에는 국가정책에 의해 철거되어 사라질뻔했던 낙생원을 지켜낸 청년들의 이야기와 낙생원의 일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감독과의 대화를 이어간다. 박종억 국립소록도병원장 직무대리는 “이번 초청행사는 동아시아 한센병 유산의 초국가적 연계 가능성을 논의했던 학술대회의 부대행사인 만큼,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두 기관 간 지속적인 교류․협력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