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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천도교령 준암 박인준 교령, 첫 걸음을 걷다지난 3월 20일 제42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천도교 교령으로 당선되셨습니다. 천도교는 무입후보 비밀투표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교령을 선출하고 있습니다. 교단의 수장으로 당선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당선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대의원들이 입후보자 없이 이름을 써냄으로서 교령을 뽑는 이 선거 방법은 추대제의 일종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후보자가 공공연하게 알려지게 되고, 선거운동도 장기간에 걸쳐 하게 됨으로써 선거가 과열되는 폐단을 남기는 이 선거제도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좋은 제도임에도 그 장점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좋은 제도라고는 할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이제는 보다 종교적이고 완전한 교령 선출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실적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뽑아주신 대의원들께 감사드리며, 대의원들의 뜻을 받들어 교단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역할을 다할 각오입니다. 어깨가 무겁습니다. 함께 경쟁했던 다른 분들께도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3대의 계대교인으로서 오랫동안 천도교를 신앙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신앙을 이어오셨는지 서 간략하게 소개해 주십시오. 저의 증조부께서는 동학혁명 때 혁명에 참전하기 위해서 남해 동학농민혁명군과 함께 노량나루를 건너 뭍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때는 고창전투, 섬진강 전투, 하동 고성산 전투가 연이어 벌어지고 있던 때였지요. 그러나 그 어느 전투에 참전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증조부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노량나루를 건너가신 날이 10월 23일이었고, 그날을 기일로 삼아 지금껏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로 볼 때 저희 집은 동학혁명 이전에 천도교에 입교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3대를 이어 천도교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부터 교당에 나가게 되었지만, 이런 증조부의 사연은 이후 저를 견고한 천도교인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대를 잇는 천도교 신앙은 어릴 적부터 교구에서 많은 활동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동안 천도교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 활동을 해오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고향 남해에서 유소년 때부터 중고등학교 때까지 천도교 활동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학생회를 만들어 학생신문 발행, 백일장, 사생대회, 웅변, 연극 등 학예활동을 열심히 하였으며, 청년기에는 진주시교구에서 대학생 지도활동 등을 펼쳤으며, 동천고등학교에 봉직하면서는 동천교구 창설 등에 역할을 다했습니다. 동천교구에서 경리, 교화부장을 거쳐 교구장을 직을 퇴임 직전까지 맡아 맡은 바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안관성 종법사가 천도교 이념으로 설립한 부산 동천고등학교에서 오랜동안 교직생활을 하셨습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가장 의미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천도교와 관련해서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천도교와 관련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동천고등학교 종학교육을 제대로 하기 위하여 천도교 교육자회 주관으로 서울의 백인영 교장 선생님과 공동으로 천도교 교과서를 만들고, 중앙총부의 지원으로 학생들에게 천도교 교과서를 보급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또 지방교구로서 시일보를 처음으로 만들고, 학교 교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족 합동시일을 창안했으며, 시일날 성화실이 꽉 찰 정도로 가족 교인들이 모여 밥을 나눠 먹으며 어린이들의 재롱잔치를 즐겼던 일이 떠오릅니다. 또 교사와 가족이 함께 야외시일을 갔던 일이며, 방학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수도원을 찾아 길게는 한 주간씩 수련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외에도 천도교 명사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고, 천도교 부산시 연합 체육대회를 개최했던 기억이 납니다. 참으로 천도교 활동을 왕성하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중앙총부와 재단으로부터 공로패를 여러 차례 받은 기억이 새롭습니다. 천도교는 한국근대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바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천도교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천도교가 한국 근대사회 끼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동학, 천도교를 빼면 한국근대사가 성립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때 천도교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간추리면 그건, 포덕천하하여 보국안민하고 광제창생하므로써 이 세상을 천국 세상으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대단히 종교적 이상이 담긴 슬로건이었지요. 지금 이 시대 한국 사회에서 천도교가 할 일 또한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패권주의, 신사대주의에 대응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적이며 평화적인 시대정신을 현창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열어가는 신앙적 실천에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또 남북한 평화통일을 위하고 동서화합을 위한 종교적 역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 의한 지구 환경의 파괴를 극복하고 자연재해를 줄임으로써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새생명 살리기 운동 같은 것을 펼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천도교 교령의 임기는 3년입니다. 앞으로 교령님께서 중점적으로 추진할 일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습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다할 수 없지요. 무엇보다도 그동안의 소모적 갈등과 대립을 동귀일체 정신으로 해소해야만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천도교 조직의 뿌리를 살리는 일이 시급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지방교구를 살려나가는 일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봉사와 헌신하는 전문 교역자 양성이 필요합니다. 교단내 교육 기관을 십분 활용할 생각입니다. 신앙체는 본래 성금으로 운영하는 것이고 보면 성금 활동을 활성화하여 포덕사업을 전개하고, 그 포덕사업을 통하여 성금 활동을 극대화해 나가는 선순환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내세운 공약을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선택과 집중을 통해 과욕을 부리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천도교의 대중화 또는 교세 확장을 위해 교단에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천도교의 교세가 많이 약화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만, 대표적인 것 하나만 든다면, 참 아이러니하게도 지나치게 민족적이고 이념적인 경향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천도교 정신은 북쪽에도 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북쪽은 이 정신을 이념적으로 이용하려 했지요. 하지만 북한 천도교인들은 그들의 정치적 체제가 천도교 정신에 부합하지 않음을 깨닫고 궁을기를 앞세우고 반공을 외치면서 월남하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로 인하여 북한 천도교인들이 압박을 받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반대로 남한 사회에서는 서구 세력이 급격히 확장되면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가 두 분 교령이 월북하는 바람에 세간으로부터 이념집단으로 오해받아 극도로 교세가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념적 대립에 민감한 사회에서 지도자들의 신앙적 선택이 포덕활동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 후 오랜 동안 침체기에 잠겨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곤경한 일을 겪었으니, 이제는 우리 천도교인은 이념이 아니라 신념으로 다시개벽하는 참 신앙인, 스승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참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포덕이 될 것이고, 이것이 교세확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령 당선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끝으로 교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천도교를 올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행할 것이 아니라, 스승님의 말씀에 따라 신앙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한울님을 모신 귀한 존재로 공경하는 대인접물 정신을 실천하고, 덕을 베푸는 삶으로 자신의 삶을 다시개벽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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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유지재단 이사회 개최포덕 166년 4월 3일 17시, 천도교유지재단 이사회에서 신임 이사장에 김산 통일포 도정을 인준하였다. 또한 북암 김선배 서무과장을 재단 사무국장으로 지명하여 이사회의 동의를 거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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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6년 4월 6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포덕 (명암 정윤택 서울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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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6년 천일기념식 봉행천도교는 포덕 166년 천일기념일을 맞아 중앙대교당과 전국 각 교구에서 기념식을 봉행하였다 서울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는 이날 오전 11시, 전명운 교화관장의 집례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행사는 개식을 시작으로 ▲청수봉전(이정녀 천도교여성회본부 정심당 부회장) ▲시작하는 심고, ▲주문 3회 병송 ▲경전 봉독(포덕문, 김명덕 천도교여성회본부 수정당 회장) ▲천덕송 합창(제13장 기념송) ▲박인준 교령의 기념사 ▲내빈 축사 ▲포상 ▲천덕송 합창(천일기념가) ▲마치는 심고 ▲ 폐식 순으로 진행되었다. 박인준 교령은 기념사에서 “오늘은 수운 대신사님께서 한울님과 문답하여 무극대도 천도를 받으신 천일기념일이자, 후천개벽이 시작된 지 166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입니다”라며, “생명평화세계의 실현과 민족통일, 교단 중흥을 기원하며, 시천주·다시개벽·보국안민의 사상을 되새기고, 인류와 지구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해 새로운 문명을 열어가야 할 때”라고 강조하였다. 이날 기념식에는 각 종단을 대표한 인사들의 축사도 이어졌다.최종수 성균관 관장(한국종교인평화회의 대표회장)은 “상생과 보국안민의 천도교 포덕 166주년을 경하드린다”며 “AI 시대에도 수운 대신사님의 가르침은 여전히 빛나는 진리이며, 인내천과 사인여천의 정신이 오늘날 사회에 널리 펼쳐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진우 스님(대한불교조계종 사회부장, 진경 스님 대독)은 “천도교는 문화, 교육, 사회 분야에서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고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다”며 “천일기념일과 박인준 교령님의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고 하였다. 원불교 나상호 교정원장은 “천도교는 민족종교의 장자로서 역사적 전환기마다 중심 역할을 해왔으며, 창조 정신은 오늘날에도 큰 가치를 지닌다”며 “박인준 교령님의 지도 아래 교단의 큰 발전이 기대된다”고 축하를 전했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 김령하 회장은 “3.1운동을 이끈 천도교는 지금의 위기 속에서도 반드시 그 역할을 다하리라 믿는다”며, “신임 박인준 교령님께서 종단과 국가의 어려움을 치유하고 이끄는 큰 역할을 해주시리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축사가 이용욱 종무관에 의해 대독되었다. 유 장관은 “천도교는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 존엄과 자유, 평화를 실천해 온 자랑스러운 민족 정신의 산실”이라며, “천일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신앙과 실천, 희생과 헌신의 역사이며,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절실히 요구된다”고 강조하였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교단 발전에 기여한 인사들에게 공로패와 장학증서도 수여되었다.공로패는 윤석산 전 교령, 이범창 전 종무원장, 이미애 전 교화관장, 정갑선 전 교무관장, 이상면 전 종학대학원장, 이선화 전 차장이 수상하였으며, 조화정 천도교대학생단장이 장학증서를 받았다. 천덕송(제15장 천일기념가) 합창과 마침 심고로 1부 공식행사를 마무리한 후, 2부에서는 축하공연이 이어졌다. 대학생단 조화정 단장의 사회로 진행된 공연에는 샘연합합창단, 천도교대학생단 합창단, 히스토리보이스, 역사어린이합창단이 출연해 축하와 흥겨운 분위기를 더하였다. 아래는 기념사 전문이다. 기 념 사 공경하는 국내외 동덕 여러분!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수운대신사님이 한울님과 만나 최초로 문답한 날이고, 한울님은 성공(成功)하고 수운대신사님은 득의(得意)한 날이며, 후천 개벽 세상이 열린 지 166주년이 되는 천일기념일입니다. 이러한 뜻 깊은 천일기념일에 먼저 하루속히 이 지구상에서 전쟁이 종식되어 생명평화세계가 펼쳐지고, 남북한의 통일대업이 이루어지고 우리나라가 평화롭게 안정되어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우리 천도교인들이 새로운 중앙총부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정성을 모아 교단 중흥을 이룩하고, 천도교의 4대 목적인 포덕천하·광제창생·보국안민·지상천국 건설에 매진할 수 있게 되기를 심고합니다. 위대한 우리의 스승 대신사님의 남다른 구도 동기(動機)는 바로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대신사님의 자작시 『시문』을 보면 대신사님의 구도적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겨우 한 가닥 길을 얻어 걸음걸음 험한 길 걸어가노라 산 밖에 다시 산이 보이고 물 밖에 또 물을 만나도다. 다행히 물 밖에 물을 건너고 간신히 산 밖에 산을 넘어 왔노라. 바야흐로 들 넓은 곳에 이르니 비로소 대도가 있음을 깨달았노라” 이처럼 지극한 정성과 공경과 믿음으로 구도한 결과 37세 되시던 경신(1860)년 4월 5일에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無極大道)인 천도(天道)를 얻으셨습니다. 그 후 창생을 널리 구제하시다가 41세인 갑자(1864)년 3월 10일에 대구장대에서 거룩하게 순도(殉道)하셨습니다. 이러한 대신사님의 일생은 한마디로 ‘다시개벽의 새 세상을 여신 신인(神人)’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경하는 국내외 동덕 여러분! 수운대신사님은 경신년(1860년) 4월 5일부터 시작된 한울님과의 문답을 통해 이 시대를 선천 오만년이 끝나고 새롭게 후천 오만년이 시작되는 ‘다시 개벽 시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신사님이 득도하신 그날 이후의 한국사와 세계사를 살펴보면 조선의 멸망, 일제 강점, 1,2차 세계대전, 6·25전쟁 등 세계질서가 재편되는 ‘다시 개벽’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요즘의 우리는 지금이 ‘다시 개벽’되는 시대라는 것을 전지구적인 기후 재앙과 코로나 등 새로운 괴질(怪疾)의 창궐, 나라와 나라의 전쟁, 문명의 충돌, 국가적 혼란 등을 통해 실감하고 있습니다. 서구학자들은 이 시대를 인류의 영향력이 지질대에까지 미치고 있는 ‘인류세(人類世)’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세 철학’을 논하고 ‘지구행성론(地球行星論)’ 등 지구인문학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의들은 모두 수운대신사님의 ‘다시 개벽설’과 상통하는 ‘서구적 표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문명전환의 후천개벽시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지구행성에서 우리는 인류 구원의 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길을 ‘한울님의 덕을 세상에 펴서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하고, 창생을 널리 구하라’는 천명(天命)을 받으신 대신사님의 독창적이고 위대한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공경하는 국내외 동덕 여러분! 수운대신사님의 가르침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시천주(侍天主) 사상입니다. 이것은 한울님이 저 먼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 몸에 모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사상입니다. 이러한 시천주 사상에서 만민평등론(萬民平等論)이 나오게 되고,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 윤리와 동서고금을 회통(會通)하는 새로운 신관(神觀)이 나온 것입니다. 특히 수운대신사님은 시천주 절대평등 사상의 실제적인 실천으로 두 여종을 해방시켜 한 명은 딸로, 다른 한 명은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이는 신분제 사회였던 당시로서는 파천황(破天荒)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다시 개벽’ 사상입니다. ‘다시 개벽’ 사상은 천도의 순환법칙에 근거한 시대인식론입니다. 이 시대가 시운(時運)의 변화로 인하여 대변혁의 시대요, 문명의 대전환기라는 소식(消息)을 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적 변혁시대에는 한울님을 모시는 시천주 신앙과 생명 사상을 중심으로, 인문개벽(人文開闢)에 힘써서 새로운 생태문명(生態文明)을 구축해야 인류와 생물종이 모두 살아날 수 있다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운대신사님의 ‘다시 개벽’ 사상은 이후 한국 신종교의 개벽사상이 흘러나오게 되는 연원(淵源)이 되고, 모든 개벽운동의 원천(源泉)이 되었습니다. 셋째, ‘보국안민(輔國安民)’ 사상입니다. ‘보국안민’ 사상은 한울님을 모신 모든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나라를 바로잡고 세상 사람들을 평안하게 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에 바탕하여 갑오 동학혁명도 일어났고, 갑진 개화혁신운동, 거족적인 기미 삼일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천도교는 이러한 선열들의 숭고한 보국안민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북통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등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있고, 앞으로 도래할 통일국면에서도 더욱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공경하는 국내외 동덕 여러분! 우리는 오늘 제166년 천일기념일을 맞이하여 한울님과 스승님의 은덕을 염념불망하면서 교단 중흥을 위한 결의를 새롭게 다져야하겠습니다. 앞으로 중앙총부에서는 수운대신사님의 위대한 삶과 사상을 현창(顯彰)하고, 교단 혁신(革新)을 위한 다각적인 방안을 강구하여 행복한 교단, 행복한 나라, 평화로운 세상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국내외 모든 동덕님들 특히 북한 천도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수운대신사님이 한울님을 만나서 뜻을 이루신 그 기쁨과 기장한 운수를 노래한 <용담가> 한 구절을 음미하면서, 모든 동덕님이 한울님과 스승님의 감응 속에서 만사여의하시기를 심고합니다. “천은이 망극하여 경신사월 초오일에 글로 어찌 기록하며 말로 어찌 성언할까 만고 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득도로다 기장하다 기장하다 이내운수 기장하다” 감사합니다! 포덕 166(2025)년 4월 5일 천도교 교령 박 인 준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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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암 박인준 교령 취임식,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봉행포덕 166(2025)년 4월 5일 오전 10시 30분,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준암 박인준 교령의 취임식이 봉행되었다. 이날 취임식에는 교인들과 교단 관계자를 비롯해 종교계, 정치계, 시민사회 등 각계의 귀빈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취임식은 지암당 서소연 교무관장의 집례로 진행되었으며, ‘축하의 노래’를 시작으로 ‘시작하는 심고’, 교령 취임사, 꽃다발 증정식, 신임 집행부 소개, 내빈 소개, 축전 및 화환 소개, ‘마치는 심고’ 순으로 거행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 대표회장인 성균관 최종수 관장,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부장 진경 스님, 원불교 나상호 교정원장, 민족종교협의회 김령하 회장, 문화체육관광부 이용욱 담당관 등 각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여 축하의 뜻을 전했다. 취임사에서 박 교령은 “천일기념일에 중앙대교당에서 교령으로 취임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참석해 주신 내빈과 교인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라며, “천도교는 한 개인의 종교를 넘어 민족과 인류의 대서사로, 지역에서 시작해 세계로 확장되는 미래 정신입니다. 세계화와 더불어 지방화의 중요성을 함께 실현하며, 생명 존중과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앞장서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저는 특별한 존재가 아닌 평범한 교인으로서, 시천주·인내천·사인여천의 정신을 실천하고, 보국안민·광제창생·지상천국 건설의 대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교인들과 함께 성심을 다해 나아가겠습니다”라고 포부를 전했다. 취 임 사 역사의 전당 천도교중앙대교당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은 수운대신사님께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인 천도를 받으신 천일기념의 뜻깊은 날입니다. 이 뜻깊은 날에 교령으로 취임하게 되어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바쁘신 가운데도 불구하고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신 내빈 여러분과 동덕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천도교의 탄생은 한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우리 민족, 나아가 인류사의 대서사입니다. 따라서 동학에 내포된 정신적, 사상적 의미는 단순히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민족, 나아가 지구촌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도교는 경주 용담, 울산 여시바윗골, 양산 천성산의 적멸굴을 잇는 소박한 동선에서 시작하지만, 한반도의 동서남북을 아우르는 주유팔로로 확장되고, 세계 곳곳으로 번져서 이어지는 미래 정신의 새로운 기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미래 정신의 보석을 이 땅에서 찾아낸 민족입니다. 그러함에도 사람들은 아직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남의 것을 넘보고, 부러워하고, 흉내 내기에만 급급합니다. 천도교는 우리 것이며 우리의 소중한 보석입니다. 그러면서 세계 인류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세계인이 천도교를 이해하고 신봉할 때 진정한 포덕천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천도교의 세계화와 함께, 나라 안으로 우리가 시급하게 추진해야 할 것은 천도교의 지방화 시대를 펼치는 일입니다. 뿌리가 빈약하면 그 나무가 자랄 수 없듯이 지방교구가 튼실하지 않으면 천도교 시대를 열어가기 어렵습니다. 우선 우리나라 어느 곳을 가더라도 천도교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 교인들이 마음 놓고 신앙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 천도교는 기성 종교에 비해 그 역사가 짧은 편입니다. 천도교 창명 166년, 백 년 하고도 반세기를 더 지난 시간이지만, 인류 역사 전체 기간에서 볼 때, 아직 초창기인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물줄기를 잘 흐르게 하여 비로소 대양에 닿아 큰 물바다를 이루게 해야 합니다. 지금 나라가, 세계가 멍들고 상처투성입니다. 자연재해가 하루가 멀다 일어나는가 하면, 인간에 의한 문명 재해 또한 끊일 줄 모르고 발생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나라와 나라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 정치적, 이념적 대립으로 인한 전쟁과 상업자본주의로 인한 강대국들의 무역전쟁으로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병들고 아픈 세상을 살려내야 합니다. 천도의 거룩한 덕을 널리널리 펼침으로서 세상을 천국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앞장서 나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모든 생명체가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도 앞장서 나가야 합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모기, 벌레 한 마리가 살아야 우리 인간도 살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천도교는 이 모든 생명체를 살림으로써 사람이 사는 모심의 세상, 평화의 세상을 만들고자 합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동덕 여러분, 오늘 천도교령에 취임하는 저는 깨달은 자는 아닙니다. 수많은 우리 천도교인 동덕들과 마찬가지로 시천주, 인내천, 사인여천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널리 세상에 천도의 덕을 펼쳐나가고자 하는 보통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천도교를 대표하는 교령으로서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 지상천국 건설의 대원을 이루기 위해 우리 동덕님들과, 남북한을 아우러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심을 다해 나아가려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탄생하고 꽃 피어난 천도교의 정신적 유산을 함께 받고 향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진정 통합사회, 통일사회가 될 것입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나아가 지구촌 곳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행복한 사회 건설을 위해 하나씩 둘씩 포덕 행진에 동참할 때 우리가 바라는 지상천국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그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날을 위하여 교령으로서 성심을 다해 천도 정신을 펼쳐나가겠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성원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바쁘신 중에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시고 축하해 주신 내빈 여러분과 동덕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역사의 전당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의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한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포덕166년 4월 5일 천도교령 박인준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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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인용에 대한 천도교 성명서탄핵 인용에 대한 천도교 성명서 천도교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을 존중하며, 이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한층 성숙해졌음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순간이라 확신합니다. 헌법과 법 절차에 따른 심판이 이루어진 만큼, 국민 모두가 헌재의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탄핵 심판 과정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견고함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가의 지도자가 법의 심판을 받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으며, 국민은 평화로운 촛불 시위를 통해 민주적 의사를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준 것이며, 앞으로도 우리 사회가 정의와 상식을 바탕으로 운영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천도교는 모든 국민이 화합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탄핵 인용 이후의 과정에서도 국론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지 않도록 서로를 존중하며 하나로 나아가야 합니다. 천도교의 정신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모두가 평등하고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지향합니다. 우리 사회가 다시 한 번 대동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해야 합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대한민국은 더욱 발전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모든 정치인과 국민은 이번 사건이 주는 교훈을 깊이 새기고, 국가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써야 합니다. 천도교 또한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제는 갈등과 대립을 넘어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5년 4월 4일 천도교중앙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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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천도교령 준암 박인준 교령, 첫 걸음을 걷다지난 3월 20일 제42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천도교 교령으로 당선되셨습니다. 천도교는 무입후보 비밀투표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교령을 선출하고 있습니다. 교단의 수장으로 당선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당선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대의원들이 입후보자 없이 이름을 써냄으로서 교령을 뽑는 이 선거 방법은 추대제의 일종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후보자가 공공연하게 알려지게 되고, 선거운동도 장기간에 걸쳐 하게 됨으로써 선거가 과열되는 폐단을 남기는 이 선거제도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좋은 제도임에도 그 장점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좋은 제도라고는 할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이제는 보다 종교적이고 완전한 교령 선출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실적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뽑아주신 대의원들께 감사드리며, 대의원들의 뜻을 받들어 교단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역할을 다할 각오입니다. 어깨가 무겁습니다. 함께 경쟁했던 다른 분들께도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3대의 계대교인으로서 오랫동안 천도교를 신앙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신앙을 이어오셨는지 서 간략하게 소개해 주십시오. 저의 증조부께서는 동학혁명 때 혁명에 참전하기 위해서 남해 동학농민혁명군과 함께 노량나루를 건너 뭍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때는 고창전투, 섬진강 전투, 하동 고성산 전투가 연이어 벌어지고 있던 때였지요. 그러나 그 어느 전투에 참전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증조부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노량나루를 건너가신 날이 10월 23일이었고, 그날을 기일로 삼아 지금껏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로 볼 때 저희 집은 동학혁명 이전에 천도교에 입교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3대를 이어 천도교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부터 교당에 나가게 되었지만, 이런 증조부의 사연은 이후 저를 견고한 천도교인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대를 잇는 천도교 신앙은 어릴 적부터 교구에서 많은 활동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동안 천도교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 활동을 해오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고향 남해에서 유소년 때부터 중고등학교 때까지 천도교 활동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학생회를 만들어 학생신문 발행, 백일장, 사생대회, 웅변, 연극 등 학예활동을 열심히 하였으며, 청년기에는 진주시교구에서 대학생 지도활동 등을 펼쳤으며, 동천고등학교에 봉직하면서는 동천교구 창설 등에 역할을 다했습니다. 동천교구에서 경리, 교화부장을 거쳐 교구장을 직을 퇴임 직전까지 맡아 맡은 바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안관성 종법사가 천도교 이념으로 설립한 부산 동천고등학교에서 오랜동안 교직생활을 하셨습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가장 의미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천도교와 관련해서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천도교와 관련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동천고등학교 종학교육을 제대로 하기 위하여 천도교 교육자회 주관으로 서울의 백인영 교장 선생님과 공동으로 천도교 교과서를 만들고, 중앙총부의 지원으로 학생들에게 천도교 교과서를 보급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또 지방교구로서 시일보를 처음으로 만들고, 학교 교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족 합동시일을 창안했으며, 시일날 성화실이 꽉 찰 정도로 가족 교인들이 모여 밥을 나눠 먹으며 어린이들의 재롱잔치를 즐겼던 일이 떠오릅니다. 또 교사와 가족이 함께 야외시일을 갔던 일이며, 방학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수도원을 찾아 길게는 한 주간씩 수련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외에도 천도교 명사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고, 천도교 부산시 연합 체육대회를 개최했던 기억이 납니다. 참으로 천도교 활동을 왕성하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중앙총부와 재단으로부터 공로패를 여러 차례 받은 기억이 새롭습니다. 천도교는 한국근대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바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천도교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천도교가 한국 근대사회 끼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동학, 천도교를 빼면 한국근대사가 성립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때 천도교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간추리면 그건, 포덕천하하여 보국안민하고 광제창생하므로써 이 세상을 천국 세상으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대단히 종교적 이상이 담긴 슬로건이었지요. 지금 이 시대 한국 사회에서 천도교가 할 일 또한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패권주의, 신사대주의에 대응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적이며 평화적인 시대정신을 현창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열어가는 신앙적 실천에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또 남북한 평화통일을 위하고 동서화합을 위한 종교적 역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 의한 지구 환경의 파괴를 극복하고 자연재해를 줄임으로써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새생명 살리기 운동 같은 것을 펼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천도교 교령의 임기는 3년입니다. 앞으로 교령님께서 중점적으로 추진할 일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습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다할 수 없지요. 무엇보다도 그동안의 소모적 갈등과 대립을 동귀일체 정신으로 해소해야만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천도교 조직의 뿌리를 살리는 일이 시급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지방교구를 살려나가는 일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봉사와 헌신하는 전문 교역자 양성이 필요합니다. 교단내 교육 기관을 십분 활용할 생각입니다. 신앙체는 본래 성금으로 운영하는 것이고 보면 성금 활동을 활성화하여 포덕사업을 전개하고, 그 포덕사업을 통하여 성금 활동을 극대화해 나가는 선순환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내세운 공약을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선택과 집중을 통해 과욕을 부리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천도교의 대중화 또는 교세 확장을 위해 교단에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천도교의 교세가 많이 약화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만, 대표적인 것 하나만 든다면, 참 아이러니하게도 지나치게 민족적이고 이념적인 경향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천도교 정신은 북쪽에도 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북쪽은 이 정신을 이념적으로 이용하려 했지요. 하지만 북한 천도교인들은 그들의 정치적 체제가 천도교 정신에 부합하지 않음을 깨닫고 궁을기를 앞세우고 반공을 외치면서 월남하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로 인하여 북한 천도교인들이 압박을 받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반대로 남한 사회에서는 서구 세력이 급격히 확장되면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가 두 분 교령이 월북하는 바람에 세간으로부터 이념집단으로 오해받아 극도로 교세가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념적 대립에 민감한 사회에서 지도자들의 신앙적 선택이 포덕활동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 후 오랜 동안 침체기에 잠겨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곤경한 일을 겪었으니, 이제는 우리 천도교인은 이념이 아니라 신념으로 다시개벽하는 참 신앙인, 스승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참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포덕이 될 것이고, 이것이 교세확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령 당선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끝으로 교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천도교를 올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행할 것이 아니라, 스승님의 말씀에 따라 신앙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한울님을 모신 귀한 존재로 공경하는 대인접물 정신을 실천하고, 덕을 베푸는 삶으로 자신의 삶을 다시개벽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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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유지재단 이사회 개최포덕 166년 4월 3일 17시, 천도교유지재단 이사회에서 신임 이사장에 김산 통일포 도정을 인준하였다. 또한 북암 김선배 서무과장을 재단 사무국장으로 지명하여 이사회의 동의를 거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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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 바람꽃변산의 외딴 계곡 바위밑에서 겨우내 잠을 자다가 봄바람이 잠을 깨워 온 힘을 다해 지구를 뚫고 나온 바람 꽃. 백설같은 자태와 맑은 영혼은 가슴설레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으로 돌려놓고 꽁꽁 얼어붙었던 나그네의 마음에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어 사랑의 마음을 일게 한다. 作 운암 오제운(전북 신태인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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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 물씬한 지상천국불만스러운 삶을 포기하는 길에 애먼 천진무구한 어린이를 재물로 삼았던 명아무개 교사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명 교사는 귀신에 씐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악마도 아니다. 문제가 많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 교사 생활을 했던 선생님이요, 우리 이웃이었다. 인내천, 동학 천도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신 사람은 이에 한울님이다(인내천) 따라서 이렇게 한울님을 모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한울님을 모신(시천주) 존재이기에, 한울님이다. 그런 한울님을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어린이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를 옛부터 꼬마라고 했다. 고마는 신을 말한다. 말세다. 어둠이 너무 깊은 세상이다. 극도로 자신을 위하는 마음, 각자위심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망친다. 아무 죄의식도 느끼지 않고. 수운 최제우 선생이 말한 각자위심이 너무나 가득찬 사회다. 인내천은 존중과 배려다. 다만 좋은 게 좋다는 휴머니즘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 안의 한울님을 깨닫고 만남으로써 영원한 평화를 얻는 길이다. 굳이 말하자면 영성의 휴머니즘이다. 이것이 후천세상을 여는 다시개벽이며, 봄빛 물씬한 지상천국이 아닐까? 글, 이상우(서울교구)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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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쉬운 도(道)일용행사(日用行事)가 도 아닌 게 없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온몸으로 실천하고 보여준 이 말을 난 좋아한다. 도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교훈가>에서 말씀하신, ‘이같이 쉬운 도를 자포자기한단 말인가’ 이 말씀 또한 내가 좋아한다. 교훈가는 선생이 자녀와 조카들한테 한 말씀이다. 천도교에 몸담은 지 겨우 한 해 반이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나름 도가 텄다고 말하는 분야가 있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 말이다. 입교식 뒤에 연원회 모임에서, 손수 만든 빵을 가져와서 사람들과 나눠 먹은 것은, 아마 내가 처음일 것이다. 누룩막걸리를 넣고 띄운 토종 앉은키 밀가루에 국산 잣까지 넣고 만든 빵이다. 전교인인 명암 정윤택 선생이 잠시 흐뭇한 얼굴을 보였다. 나처럼 먹는 걸 좋아하고 음식 만드는 걸 즐기는 사람은 음식값이 아무리 올라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값싼 식재료로 훌륭한 음식을 얼마든지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오늘 나의 점심은 10곡 식빵 봄동 샌드위치와 우유, 요거트였다. 요즘 끝물인 봄동은 된장국, 쌈, 샌드위치 등에 써먹을 수 있는 좋아하는 식재료. 추위를 이겨낸 노지 배추로서, 속알은 없을지언정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진한 냄새와 맛이 담겼다. 나는 한살림에서 조합원 활동을 하면서 음식 만들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몇 해 앞서 낡은 오븐 하나를 중고가게에서 4만5천 원에 사면서 크게 폭이 넓어졌다. 지금 우리집 아랫목에는 뚝배기 하나가 놓여있다. 토종 앉은키 밀가루에 누룩막걸리를 넣고 치댄 반죽을 이틀째 띄우고 있는 것이다. 오늘 집에 돌아가면 구운 삼치에 밀가루 반죽을 얹어 삼치빵을 만들 것이다. 내가 빵을 만든 것은 네댓 해밖에 되지 않았다. 아는 사람을 통해 빵 만드는 곳을 소개받았다. 그런데 그곳이 너무 멀었고, 수업료가 10만 원이었다. 무엇보다 이 아는 사람이 빵 반죽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유튜브를 보면서 빵 만들기를 그냥 시작했다.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냥 만들어 먹을 만하다. 이렇게 쉬운 도(?)를 자포자기한단 말인가? 생협에서 나온 질 좋은 두유를 띄워서 두유 요구르트를 만든 것은 누구한테 배운 것이 아니다. 스스로 고안하고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귀한 제품이 나오기도 한다. 수운 최제우 선생처럼 생이지지(生而知之)인 것이다. 타고났다는 얘기인데, 먹는 쪽에서 그렇다. 이 두유 요구르트는 중증장애가 있는 우리 아들한테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열량도 낮고 영양도 풍부해 저녁밥으로 먹이고 있다. 내가 날마다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소중한 일은, 아침마다 두유 요거트를 만드는 것이다. 두유 한 병에 요거트만 조금 붓고 따듯하게 해주면 된다. 난 아이들한테도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평소 생각해왔다. 천도교 여러 교구에서도 음식을 만들어서 서로 나눠 먹는다면, 동덕의 정이 더욱 깊어지고 탄소배출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은 교구에선 오븐 하나씩을 사라고 권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훌륭한 교육이요, 포덕이라고 여긴다. 천도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해월 최시형 선생이 한 말씀을 경전에서 읽고 쾌재를 불렀다. 음식을 먹을 때 한울님께 고하는 식고(食告)야말로 도를 얻는 지름길이라고 한 말씀이다. 이렇게 쉬운 도를 자포자기한단 말인가! 기세등등했지만, 식고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앞에 맛있는 것이 보이면 머릿속에서 식고가 싹 사라져버리고, 바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간다. 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원초의 욕망인가! 그 뒤로 지금까지 내가 식고를 제대로 하고 있다고 여기진 않는다. 다만 열심히 하려고 애를 쓰고 있을 뿐이다. 천도교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주문 수련을 하면서도 느낀 점이 있었다. 살아가면서 내가 얼마나 어두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순간순간 힘들다, 두렵다, 짜증스럽다, 걱정스럽다 하는 나쁜 생각들이 내 마음을 옥죄고 있다. 그럴 때 ‘한울님을 내 안에 모셨습니다’ 하고 다짐하고, 21자 주문을 외우는 것은 큰 힘을 주고 있다. 어제는 <신과 인간>이란 영화를 보았다. 반군이 들끓는 혼란한 무슬림 국가인 알제리 시골 마을에서 가톨릭 수도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일곱 사람의 수도사, 한 사람의 의사는 가난한 마을 사람들을 돕고 가톨릭의 여러 수행 방법을 함께 한다. 그렇게 평생 온몸을 던져 살아왔지만, 늙어가기만 할 뿐이다. 왜일까? 형식에 지나지 않는 수행 방법만 있을 뿐, 천도교처럼 주문 수행이 없는 까닭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내가 천도교에 입교한 뒤 가장 놀라웠던 점은, 경전 내용과 주문 수행 등 내가 봐도 수긍할만한 방법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일용행사가 도 아닌 게 없다.’ 이렇게 쉬운 도를 자포자기한다는 말인가! 글, 이상우(서울교구) 신설된 코너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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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하얀 혁명>(7)(지난 호에 이어) 이상한 일이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초막이 보이지 않았다. 경사진 언덕을 삼단으로 깎아 지은 초막 자리엔 갯바람에 흩어진 사구처럼 헐리고 쓸린 집터만이 추비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고향 집에서의 따뜻한 하룻밤을 생각했던 북접군은 폐허로 변해버린 터전 앞에서 망연자실 투레질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눈길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너럭바위 옆에서 오백 년을 견딘 느티나무였다. 고목은 거지꼴로 돌아온 북접군을 나무라듯 잎을 모두 지운 채 된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너럭바위 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온통 늑굴(勒掘) 당한 무덤처럼 처연한 형색뿐이었다. 때마침 중늙은이 하나가 짚북데기 비옷을 덮어쓰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가 동학군을 보자 오던 걸음을 되짚어 내려가며 말했다. “이녁들이 떠나고 나서 왜놈이 쳐들어왔어. 여기뿐 아니라 왼 동네를 쑤시고 다니며 불을 싸질렀지. 내가 늘그막에 얻은 애 종자까지 태워 죽였단 말여. 이매망량 악다구니 같은 그놈들이. ” 예리성(曳履聲) 하나 없이 사라지는 노인을 보자 그도 이승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북접군은 경풍(驚風) 맞은 아이처럼 비척거리며 노인이 앞서간 청산 읍내를 향해 뜬 발길을 옮겼다. 청산은 평야가 넓고 토질이 비옥해 예로부터 실속 있는 부자와 자작농이 많이 살던 동네였으나 동학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모두 종적을 감추었다. 북접군은 관원들마저 도망친 동헌과 인적이 사라진 빈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러는 동안 관군과 민보군의 닦달에 이리저리 숨어 있던 농민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고 나와 동학군과 어울렸다. 스산한 귀향의 밤, 동학군과 농민은 윤똑똑이 말치레할 무용담도 없이 울음 반 눈물 반으로 화란의 세월을 탓하며 긴 밤을 함께 지새웠다. 하룻밤 사이에도 북접군을 토멸하려는 추격군의 동향이 시시각각 전해져왔다. 이번에 따라붙은 진압군은 용산 전투에서 패배한 지방군과 달리 경군과 일본군이었다. 무장과 전량이 빈약하고 입성도 남루한 북접군이 대적하기엔 벅찬 상대였다. 한시라도 빨리 익숙한 터전으로 자리를 옮겨 방비를 서둘러야 했다. 목적지는 대도소가 있는 보은 장내리. 거기에 가면 북접군이 기거하던 사백여 채의 초막과 대도소 건물이 남아 있을 것이며, 견고히 쌓은 돌담과 무엇보다도 동학군을 지지하는 지역민들이 반겨줄 것이었다. 대열을 둘로 나누어 1대는 원남을 경유하고, 2대는 보청천을 따라 관기 쪽으로 방향을 잡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틀 걸려 장내리에 도착한 북접군을 맞이한 건 처참하게 부서진 잔해뿐이었다. 대도소와 초막은 간데없이 사라졌고, 불에 탄 기둥과 부서진 서까래가 시린 눈밭에 나뒹굴고 있었다. 북접군은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폐허가 된 터전을 둘러보았다. 깨진 장독대엔 말라비틀어진 메줏덩어리가 토사물처럼 뒤엉켜 있었고, 허물어진 돌담 사이로 들바람에 흩날리는 새앙쥐 털이 허옇게 썩어가고 있었다. 공주 전투를 위해 북접군이 자리를 뜬 직후 관군이 쳐들어와 대도소를 폐허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문바위골에 이어 장내리까지 쑥대밭이 된 걸 보자 북접군은 그만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사정이 이러니 수련이 깊지 않은 병졸 몇이 보은 읍내로 달려가 동헌과 관사(官司)를 닥치는 대로 부수고, 민가를 뒤져 식량이 될 만한 것이라면 소, 돼지는 물론 씨오쟁이에 든 강냉이까지 끌어냈다. 수뇌부가 말리고 각 포의 접주가 나서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우선 당장 오천 명에 가까운 대군이 숙영할 장소부터 찾아야 했다. 5. 횃불 북접군이 찾은 곳은 말티재를 멀리 끼고 돌아 만나는 북실마을이었다. 북실은 평지가 넓고 골이 깊어 대군이 주둔할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 추격군과의 거리도 멀어 하룻밤 유숙하기에 이만한 적지가 없었다. 마을 초입에 파수꾼을 배치하고 서둘러 숙영 준비에 들어갔다. 본진은 평지인 바깥북실에, 경기포는 야산을 안고 있는 안북실에 자리를 잡았다. 민가는 비어 있었으나 몇 집 되지 않았기에 마른 논바닥에 볏짚을 깔고 볏단과 장작을 날라 화톳불을 피워 늦은 잠자리를 마련했다. 저녁 끼니를 위해 하는 수 없이 읍내에서 끌고 온 소와 돼지를 잡았다. 밤이 되자 눈발이 짙어지기 시작하더니 해가 떨어지면서 이내 목화송이처럼 굵어졌다. 눈이 쌓인 진중(陣中)은 솜이불을 덮은 것처럼 포근해 보였으나 버성긴 입성으로는 눈 호강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래도 분분한 눈발 속에 불티가 날아오르자 너른 북실벌이 때아닌 정월대보름 쥐불놀이 한마당같이 정겹게 변했다. 북접군은 계속된 행군과 피로에 지쳐 식사가 끝나자마자 아무 데나 쓰러져 곯아떨어졌다. 젖은 거적때기를 덮은 위로 두꺼운 눈 이불이 쌓이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고추바람에 흔들리는 화톳불만이 춥고 헐벗은 이들을 시리게 얼비추고 있었다. 북접군은 너무 지쳐 있었다. 척왜양창의의 기치를 내건 혁명군이었지만 군기가 엄한 군대도 아니고, 군 전략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군기가 엄했다면 파괴된 장내리 대도소를 보고 광분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았을 것이고, 냉철한 전략가가 있었다면 아무리 피곤해도 평지에 숙영지를 펴지 않았을 것이다. 광분한 탓에 보은 읍내에서 민폐를 저질러 밀고자가 생겨났고, 개활지에 지은 숙영지는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동태가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눈이 와서 야습이 없으리라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다. 초입에 파수꾼을 두기는 했어도 그들 역시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농민에 불과했다. 시간은 해시(亥時)를 넘어가고 있었다. 북실은 눈 속에 파묻혀 잠들었으나 이곳을 향해 접근해오는 한 무리의 군사가 있었다. 상주 유격장 김석중이 이끄는 민보군 240명과 후비보병 19대대 소속 일본군 37명이었다. 상주 민보군은 대부분 포수 출신으로 화승총을 휴대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유격장 김석중은 병서를 많이 읽어 병법에 능한 유생으로 이번 야습도 그가 주장한 계책이었다. 그런 그들이 일본군 장교의 지휘하에 3개 조로 나누어 숫눈길을 헤치며 접근해온 것이었다. 이걸 알 리 없는 북접군은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 아침에 움직일 요량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추격군은 고양이 걸음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고, 흩날리는 눈발 속에 발자국마저 지워졌다. 추격군 척후병이 호리병 지나는 뱀처럼 움직여 모닥불을 쬐고 있던 최전방 파수병을 낚아채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추격군은 파수병을 심문해 북접군 배치 상황을 파악한 뒤 3개 방향에서 일제사격을 가하며 돌진해 들어왔다. 오천 명의 대군 속으로 삼백 명이 채 안 되는 돌격대가 기습을 시작한 것이다. 화톳불을 쬐고 있던 파수병이 장전할 틈도 없이, 논바닥에서 잠자던 사람이 일어나 눈 이불을 털 사이도 없이, 민가 안에서 잠들어 있던 사람이 문고리 당길 시간도 없이, 빗발치듯 날아드는 총알에 속수무책 쓰러졌다. 깨어 있던 이들도 혼비백산 도망치느라 넋이 나갔다. 민보군은 노루 사냥 나온 포수처럼 화승총을 쏘아댔고, 양총을 든 일본군은 도망치는 무리를 뒤쫓으며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저항하던 대열의 선두가 피를 쏟으며 나뒹굴자 뒤따르는 무리는 도망도 못 치고 오금이 접혀 주저앉았다. 화톳불 장작이 발길에 차이면서 쥐불 통이라도 던진 듯 온 벌판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추격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북접군을 쏘아 쓰러뜨렸다. 눈밭에 꽂히며 사그라든 장작개비에서 피어오른 연기도 북접군의 발목을 잡았다. 매캐한 연기가 눈을 가리고 기침을 터뜨리게 해 추격군 귀에는 ‘나 여깄소’하는 과녁판 소리로 들렸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사냥이었다. 토끼몰이 섶사냥이었다. 바깥북실 들판은 한순간 살육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추격군은 벌통 앞에 도사려 앉은 말벌처럼 북접군을 도륙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논바닥에 흩뿌려진 더운 피가 눈을 녹이며 벼 밑동을 드러냈고, 떨어져 나간 팔다리는 흘린 장작개비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화톳불이 사그라들어 뿌연 눈밭으로 변한 벌판은 흑백 수묵화처럼 희고 검은 핏빛으로 벌바람에 흔들렸다. 눈발이 더욱 굵어져 쓰러진 주검을 하얗게 덮었다. 바깥북실에 숙영하던 북접군의 완벽한 패배였다. 그러나 안북실의 상황은 달랐다. 안북실 야산에 진을 치고 있던 경기포가 반격을 시작했다. 고지를 선점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경기포가 안북실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가 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안북실의 주둔 사실을 몰랐던 추격군으로서는 의외의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경기포는 사거리를 좁혀 축차적으로 공격해왔다가 물러나며 사격을 이어갔고, 추격군은 정면과 좌, 우측 세 갈래로 나누어 반격을 시작했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밤새 이어졌다. 경기포는 무기에서는 열세였으나 숫자가 많고 고지를 선점하고 있어서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팽팽하던 균형이 깨진 건 시간이 갈수록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탄환 때문이었다. 몇 정 되지도 않는 모젤 소총은 총알이 떨어져 무용지물이 되었고, 화승총은 사거리가 짧아 멀리 있는 적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반면, 추격군의 스나이더 소총은 먼 거리에서 날아와 사정없이 경기포를 두들겨댔다. 고지 위에 엎드려 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총에 맞아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병사도 있었다. 경기포의 공격이 지지부진해지자 추격군은 공격 방향을 바꾸어 양쪽 능선으로 산개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기가 없는 경기포는 철창과 환도, 맨주먹으로 맞서 싸웠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바깥북실에서의 살육전이 안북실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산은 시체로 뒤덮였고, 바윗돌에 쌓인 눈이 피에 젖어 녹아내렸다. 추격군의 참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뒷고개로 도망치는 북접군을 쫓아가며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바깥북실, 안북실, 하판리, 백현리 전체가 피의 강으로 흘러넘쳤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동학군을 말살하는 초멸의 대학살, 천살(擅殺)이었다. 이창진 수접주와 한규석이 이끄는 이천포의 한 무리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절골을 넘어 학림리로 도망쳐 들어왔다. 마을 주민 대부분은 이웃 동네 북실에서 벌어진 전투 소리에 놀라 황급히 몸을 피했지만, 촌장 김교무를 비롯해 남아 있던 이들이 도망쳐온 이천포군을 마을 뒤편 대밭에 숨겨주었다. 그러나 뒤따라 밀고 들어온 추격군이 북접군을 찾기 위해 지른 불로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어버렸고, 흰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온 마을사람을 북접군으로 오인해 무차별 살상이 벌어졌다. 몇몇 젊은이들이 불붙은 장작개비와 쇠스랑을 치켜들고 대항해보았으나 총을 든 군인에겐 적수가 되지 못했다. 새도록 쏟아지는 눈발 속에 마을은 밤새 불탔고, 총성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한규석과 이창진은 대밭에 숨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한규석은 떨어져 나간 한쪽 팔목에서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핏물이 새벽 한기로 얼어붙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남은 한 손으로 이창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마을은 화염에 불타 일렁이고 있었고, 이창진의 얼굴에서는 생의 마지막 그림자가 시취(屍臭)를 풍기며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그의 한쪽 눈이 함몰되어 꾸덕꾸덕 마르면서 그 위로 눈이 내려와 하얗게 덮였다. 한규석은 감각이 사라진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부서져 나간 정강이뼈가 드러나면서 풍화된 규화목처럼 눈발에 시렸다. 한규석은 이창진을 감쌌던 손을 뽑아 속적삼 안에 넣어두었던 전투상보(戰鬪詳報)를 꺼냈다. 전투를 치를 때마다 꼼꼼히 적어왔던 귀 닳은 두루마리가 핏물에 젖어 있었다. 남은 한 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쳤다. 검은 미명 속에 깨알같이 적어놓은 글귀들이 하얗게 떠올랐다. 이제는 더이상 쓸 수 없게 된 전쟁의 기록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지난 석 달간의 일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두루마리였다. 한규석은 탄환 없는 혁명의 끝을 반추해 보았다. 한울님의 나라도 떠올려 보았고, 다시 개벽한 후의 세상도 그려보았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것이 혁명이라고 말씀하신 해월의 음성도 되짚어 보았다. 그러나 생각의 형체가 잡히지 않았다. 형체는 없고 아련한 형상만이 날리는 눈발 속에 명멸했다. 눈 속 세상은 밝고 환했으나 대숲 속은 어둡고 추웠다. 후회는 없었다. 언제라도 한울님이 부르시면 믿음 하나만으로도 달려 나갈 것만 같았다. 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끊어진 팔목과 다리를 통해 체온이 빠져나가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닫히는 육혈(六穴)을 통해 치받아 들어오는 열기가 몸을 후끈 데웠다. 횃불의 종심에 닿은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다. 불의 떨림이 미처 이루지 못한 혁명의 형상으로 흔들렸다. 횃불 속의 하얀 혁명이었다. 횃불은 민가의 지붕이 타는 불꽃 배경 속에서 자라고, 흔들리고, 커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대숲에 고여 있던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대숲을 휘젓고, 횃불을 휘젓고, 전답을 휘젓고, 송림을 휘저으며 퍼져나갔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어도, 먼 곳에서, 솔가지에 둥지를 튼 백학들이 시리고 지친 다리를 바꿔 딛기 위해 푸드덕 날아올랐다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여명의 붉은 기운이 학림의 대숲에 번지기 시작했다. 먼동이 트는 소리였다. 끝. (연재를 마칩니다.)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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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서에 나타난 동학혁명기 일본군의 인식(2)3.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과 그에 대한 인식 일본군의 개입과 경복궁 점령으로 재기포한 2차 동학혁명은 관군과 일본군으로 구성된 조일 연합군과 동학군의 직접적인 전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동학군 진압에 참여한 일본군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후비보병 제19대대의 3개 중대를 중심으로 후비보병 제18대대의 1개 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 제6중대의 1개 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의 제4중대와 제7중대의 일부 병력, 그리고 부산수비대의 1개 중대, 해군 츠쿠바함(筑波艦)과 죠코함(操江艦)이었다. 동학군 진압의 주력부대인 후비보병은 만 20세에 상비병으로 3년간 군복무를 하고 예비역으로 4년을 보낸 후 다시 5년의 복무를 한 군 경험이 많고 노련한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동학군 진압의 주력부대라고 할 수 있는 후비보병 제19대대는 일본 에히메(愛媛) 지역 출신들이었다. 후비보병 제19대대는 11월 12일(음 10월 15일) 용산을 출발하였다. 출발에 앞서 전달된 훈령에 의하면, 첫째는 동학군의 근거지를 찾아내어 이를 초절(剿絶)할 것, 둘째 동학군을 격파하고 그 화근을 초멸(剿滅)함으로써 동학군이 재흥하는 후환을 남기지 말 것, 셋째 조선군의 진퇴에 대해서는 일본군의 지휘 명령을 받을 것, 넷째 보병 1중대는 서로(수원-천안-공주-전주), 보병 1중대는 중로(용인-죽산-청주-성주), 보병 1중대는 동로(가흥-충주-문경-낙동-대구)로 행진할 것, 다섯째 동학군을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내몰도록 하며 가능하면 러시아 국경으로 향하지 않게 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이후 동학군은 조일연합군(朝日聯合軍)에 의해 철저하게 진압당하였다. 그렇다면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천도교창건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학군이 일본군과의 첫 교전은 괴산이었다. 이에 괴산에 당도하니 괴산군수, 충주군 주차 일병을 청하여 영전함에 포환(砲丸)이 여우(如雨)라. 도중(道衆)이 사(死)를 서(誓)하고 교전하여 피차 살상이 상당하더니, 마침 일모(日暮)한지라. 다수 교도 일제히 눌함(吶喊) 전진하여 일군(日軍)을 습살(襲殺)하였다.(『천도교창건사』) 동학군과 일본군은 괴산에서 첫 교전이 있었는데, 이 괴산전투에서는 동학군이 비록 승리하였지만 많은 희생을 해야만 했다. 당시 동학군은 2만여 명에 달하였으며, 일본군은 2개 분대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하라다(原田) 소위 등 부상 4명, 병사 1명 즉사에 불과하였지만, 동학군은 2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외에 일본군과의 전투는 공주 우금치전투를 비롯하여 태인전투, 용산전투, 광양과 섬진강전투 등에 관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즉 (전략) 때에 마침 관군의 원병인 일군이 대거 합류한지라. 동군(東軍)이 공주 효포에서 혈전 7일에 전세 불리함을 보고 퇴각하여 태인에서 일군과 교전하고(『천도교창건사』) 동군(東軍)이 용산에 이름에 뒤로 일군의 추격이 심하고 앞으로는 관군이 영격포위(迎擊包圍)하여 진퇴유곡이 된 지라.(『천도교창건사』) 퇴각 중의 도인 수만은 광양 섬진강 안에 둔하였다가 관군과 일군의 피습한 바 되어 강수(江水)에 빠져 진멸(盡滅)하고(『천도교창건사』) 이라고 하여 동학군과 일본군과의 교전을 한두 줄로 언급만 하였다. 하지만 이들 전투는 동학혁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우금치전투는 동학혁명 기간 가장 규모가 큰 전투였으며 동학군 역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그러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동학군 전사자가 37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비해 『동학사』에서는 일본군의 동향에 대해 더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병은 세를 합하여 동학군의 앞을 막아들어 온다”라고 하여 일본군의 진압과정에 대해 축소하였다. 이후 동학군의 퇴로과정에서 적지 않은 일분군과의 교전이 있었지만,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일부 지역 교정에서 일본군의 활동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수원부를 점령하고 남군(南軍)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바, 관병과 일병을 만나 여러 날을 두고 싸우다가 (동학군이) 마침내 패하였고, (중략) 황해 일도의 동학군 수만을 일으켜 장차 남군과 세를 합하여 경성을 치고자 해주감영을 점령하고 있었던 바, 또한 관병과 일병을 만나 수십 일 동안을 두고 서로 싸워 양방의 많은 사상을 내었고, 마침내 동학군은 관일병에게 패한 바 되었다”(『동학사』)라고 하여, 수원전투와 해주전투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각지의 교전에서 “관병과 일병도 많이 죽고”라고 하여 일본군도 적지 않은 피해자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동학혁명이 끝나가는 1894년 12월 이후부터는 “조선의 남쪽은 관병과 일본군의 천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일본군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일본군을 포함한 관군, 수성군, 민보군 등의 동학군을 참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광경이었으며, 그 결과 3, 40만 명의 동학군이 피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천도교창건사』도 20만 이상의 동학군이 죽임을 당하는 대참(大慘)이었다고 하였다. 그럼 해방 후에는 어떻게 기록하였을까. 먼저 『천도교백년약사』를 살펴보자. 우선 동학군이 재기포한 배경은 “범궐(犯闕)한 일군들이 국왕을 핍박하고 국권을 유린”과 일군이 각지에서 동학군을 마구 참살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반봉건에서 반침략으로 전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동학군이 재기포하자 일본군은 관군과 연합하여 동학군 진압할 것을 제안하고 관군을 지휘하여 작전계획에 따라 동학군을 초멸코자 하였다. 동학군과 일본군은 안동을 비롯하여 괴산, 세성산, 홍성, 이인, 공주, 해주, 원평과 태인, 은률, 서흥, 홍천, 하동 등지에서 치열하게 교전을 하였으며, 수백 명의 동학군이 살해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전봉준의 피체와 재판과정에 일본군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천도교백년약사』는 앞서 살펴본 『천도교창건사』와 『동학사』보다는 구체적으로 폭넓게 일본군의 동향을 다루고 있다. 특히 동학혁명이 끝날 무렵에는 “일본군의 수색이 극심해지자 전국적으로 전토(田土)가 황폐해지고 도시와 농촌이 모두 일군의 왕래를 꺼리어 수확을 포기하고 촌민(村民)들이 도망하여 마을이 모두 비었다”할 정도로 일본군의 폐해성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천도교약사』에서도 여전히 보이고 있다. 즉 세성산전투에서 “동학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전멸당하였다”거나 공주 우금치전투에서는 “일본군 연합군이 최신무기로 무장한 채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우금치전투 이후 “일본군과 정부 연합군은 계속 동학군을 추격 공격하였다”하고 하여, 동학군을 섬멸하고자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인전투와 종곡전투에서도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전하였음도 아울러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동학혁명 개입에 대해 “아시아에서 저지른 일본군의 최초 대량학살”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간행된 교서에서는 동학군과 일분군과의 전투과정 뿐만 아니라 그 실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판단된다. 이로 볼 때 일본군에 대한 인식은 초기 동학교서에서는 가급적이면 필요 이상으로 학살 등에 대해 표현하지 않고 있지만 후기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동학혁명에 관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연구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제에 대한 책임을 보다 강조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희암 성주현(신인간 주필, 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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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행적 조사(1)뜻깊었던 의암성사 행적 조사 뜬금없는 계엄 선포와 국회의 해제 의결 이후 국내 정치가 소란했던 지난해 12월 6일 총부 사회문화관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후원하는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과 독립유적지 조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평소 의암성사에 관한 논문과 글을 발표하는 입장에서 늘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조사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번 답사에 동행한 조사단은 교단을 대표해서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이 참여했고, 답사의 진행은 사회문화관의 최인경 관장과 최진영 차장이 맡았다. 연구자로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박성현 큐레이터와 필자가 참여했고, 유적지 사진 기록으로 독립운동 유적 담기로 잘 알려진 김동우 작가와 민족운동 유적을 사진으로 알려주는 신춘호 방송통신대 교수가, 동영상 자료는 교단 동영상 자료를 정리하는 김정호 선도사가 맡았다. 원활한 답사를 위해 박동호 여행사 대표가 참여했다. 조사단은 12월 6일 아침 6시 인천국제공항에 집결하여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정을 시작했다. 고베(神戶)에서 이틀간 조사하고, 교토(京都)로 이동해 하루, 다시 오사카(大阪)로 이동해 이틀을 조사하고 12월 10일 오후 22시경에 인천국제공항으로 도착한 힘든 일정이었다. 돌아오면서 이번 조사단에 참가해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탐방하는 의미 있는 작업에 참여했지만, 이번 조사가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의 절반밖에 찾지 못했기 때문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올해에 마무리 사업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이번 조사단의 활동을 간략하게 전한다. ‘외유’는 성사의 큰 그림 의암성사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해월신사를 보필해 강원도에서 도피 생활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으로 괴멸된 교단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인 포덕 38년(1897) 12월 24일 해월신사는 동학 교단을 이끌 후계자로 의암성사를 지명했다. 이듬해인 포덕 39년(1898) 4월 5일 해월신사는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어 그해 6월 2일 순도하였다. 이후 의암성사는 김연국 등의 반발을 수습하고 포덕 41년(1900) ‘경자설법’을 통해 교단을 안정화의 기초를 마련했다. 교단은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교인이 체포되어 순도하거나 영어의 몸으로 고통받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손천민도 순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암성사의 처지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의암성사는 위기에 처한 교단의 발전을 위한 획기적 발상을 했다. 하나는 피난 방법의 변화였고, 다른 하나는 세계 대세의 파악이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외유(外遊)’였다. 성사는 외유를 통해 교단의 개벽을 꿈꾸었다. 성사는 이전에도 외유의 의견을 내비쳤으나 교단 원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포덕 42년(1901)에 교단의 주요 간부를 모아 외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辛丑(신축, 1901년) 三月(삼월)에 聖師(성사)가 門弟(문제)와 相議(상의)하야 갈으되, “往年(왕년)에 내 孫天民(손천민) 金演局(김연국)으로 더부러 相議(상의)하고 美國(미국)을 遊覽(유람)코저하다가 金演局(김연국)이 쫓지 않음으로 未果(미과)하엿거니와 이제 다시금 생각하여 본즉 將來(장래) 吾道(오도)를 世界(세계)에 彰明(창명)코저 할진대 今日(금일) 文明(문명)의 大勢(대세)를 觀察(관찰)하지 않으면 不可(불가)하다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내 이제 十年(십년)을 限(한)하고 外遊(외유)하야 世界(세계)의 形便(형편)을 歷探(역탐)코저하노니 諸君(제군)의 뜻이 어떠하뇨.” -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제3편 제6장, 27쪽.- 위의 글을 보면 의암성사는 처음에는 미국으로 외유하고자 했다. 이는 동학에서 추구하는 시천주의 세상과 일맥상통하는 민주공화정 국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사는 미국을 돌아보고 민주공화정을 우리나라에 채택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포덕 37년(1896)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미국을 ‘문명개화를 이룩한 모범적인 선진국’으로 칭송한 매체였다. (오영섭, 「『독립신문』에 나타난 미국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67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6∼7쪽 참조) 이미 성사께서는 포덕 34년(1893) 보은교조신원운동에서 “민당(民黨)”과 “민회(民會)”를 경험하기도 했다. 시천주의 교의와 합치하는 정치체제가 민주공화정이었다는 점과 당시 미국을 모범국으로 소개한 사회적 분위기 등이 성사의 미국 외유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의암성사는 포덕 42년(1901) 3월에 원산을 거쳐 미국을 가려 했지만, 원산에서는 미국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어서 부산으로 내려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일본에 경유하는 동안 미국행 배표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에게 피해를 당해 경비 부족으로 부득이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機密 제85호, 「李祥憲ノ身元及擧動ニ關シ回申」, 『要視察韓國人擧動』3, 1904년 9월 7일자. “李祥憲始ノ各李圭完(或ハ元孫時秉)京畿道陰竹ノ人三四年前始メテ日本ニ遊フ其目的ハ世界漫遊ニあアリテ先ツ釜山ニ出ツルヤ二三日本人ノ欺ク所ト成リ汽船買入ノ約ヲ為シ代価貳萬餘圓ト定メ先ツじ若干手付金ヲ交付シ大阪ニ於テ現物受授ノ約ヲ結ヒ大阪ニ赴キタルニ現汽船ノ所在ヲ認メス全ク詐偽ノ行為ニ出タルヲ知リ空シク滞留中.” 참조) 당시 성사의 최우선 목표는 교단의 재건이었고 이를 위한 방법은 문명개화된 외국을 직접 보고 근대문명의 실상을 파악하고 이를 교단에 접목시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성사께서 일본에 머무른 이유는 당시의 일본도 미국 못지않게 근대문명을 접하고 배우기에 적합한 나라였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의암성사께서 일본 외유 당시 탑승했던 관부연락선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1901년 3월부터 1906년 1월까지였다. 이 시기는 다시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1901년 3월부터 1903년 6월까지의 2년 4개월간이고, 1기는 1903년 6월부터 1906년 1월까지의 2년 8개월간이다. 중간에 중국 상하이 등을 방문하고, 일시 귀국하기도 했지만, 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대략 5년이다. 성사는 원래 10년을 목표로 외유를 하고자 했으나 그 연한을 채우지 못했다. 그 원인으로 성사의 명을 받아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이끌었던 이용구가 친일파인 송병준과 합동해 진보회를 일진회로 고치고 친일에 앞장서 동학 교단을 친일화하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성사는 이용구의 일진회와 단절하고,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꾸어 근대적 종단으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교단은 일신하여 국내 제일의 종단으로 성장했다. 첫 방문지는 고베(神戶)교구 답사단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고베교구’였다. 고베교구는 일본에 있는 유일한 천도교 교구이다. 교베교구의 연원은 1944년 해방 직전 귀국하지 못한 고베의 독실한 강영태(姜永泰), 성사경(成仕卿), 김성오(金聖五), 하재술(河在述) 등 천도교인 4명이 중심이 되어 70여 명의 교인을 규합해 현재 고베교구가 있는 고베시 나가타구(長田區 背蜜峰)에 “천도교고베종리원(天道敎神戶宗理院)”을 설립하고 종교법인 등록을 마친 것에서 시작한다. 연원은 ‘동원포’이고, 현 교구장은 김태환(金泰煥)이다. 같은 시기 ‘오사카교구’와 ‘교토교구’도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일본에는 고베교구만 남았다. 특히 교토교구는 눌암 황태익의 4남인 황용수가 세워 교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음에도 없어져 안타깝다. 고베교구에 도착하니 사전에 조사단의 방문을 인지하고 있던 김 교구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훤칠한 키에 강건한 인상의 김 교구장은 70대 후반의 고령임에도 건강했다. 인사를 나누고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의 집례로 방문 참례식을 가졌다. 윤석산 전 교령은 인사말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고베교구와 김태환 교구장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일본어 경전을 준비해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김태환 교구장은 답사에서 “고베교구에는 매 시일 20명 이상이 시일식을 보고 있으나 어려움이 있으며, 경전과 자료의 일본어 번역, 일본어가 가능한 교인이 와서 생활하면서 지도해줄 인사를 요청한다.”라며 해외 신앙의 어려움과 도움을 요청했다. 이어서 윤석산 교령은 선물로 준비해 간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메달’과 대신사 출세 200년을 맞아 간행한 『읽기 쉬운 천도교경전(동경대전, 용담유사)』을 기증했다. 또 윤석산 전 교령은 자신의 저서와 시집 등도 선물하였다. 김 교구장과 아쉬운 작별의 정을 나누고 조사단은 포덕 136년(1995) 1월 17일 고베대지진 유적이 있는 ‘고베항지진메모리얼파크’를 찾아 보존된 지진 흔적을 둘러보았다. 김태환 교구장은 고베교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충분해 교인 자제 중에 유학생이 있으면 교구에서 지원할 수 있고, 또 유학생이 아니더라도 고베교구에서 신앙을 함께할 동덕이 있으면 숙식과 경비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달해달라고 하였다.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은 12월 8일의 시일식에 다시 고베교구를 방문해 시일식을 봉행하며 30여 교인들과 함께 천도교 종교행사인 시일 의식을 봉행하고 고베 교인들이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으며 동귀일체의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후등승장(後藤勝藏) 여관 터 2월 7일 오전에는 성사께서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을 찾아 나섰다. 기록에 따르면 후등승장 여관이 위치했던 곳은 고베시 중앙구 해안통 3정목(中央區 海岸通 3丁目)이었다. 이곳은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가 손병흠, 민기호와 같이 묵었던 여관이 있던 곳이다. 현재 주소는 고베시 추오구 사케마치도리 3정목 2-8이다. 기존의 자료에는 여관 자리에 미쓰비시 게스트하우스라고 되어있어 주위에 이런 이름의 건물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주변에 미쓰비시 건물은 찾을 수 없었다. 해안통 3정목 일대의 가게를 돌아다니며 조사단이 확인한 결과 당시 성사가 흐등승장 여관은 현재 “더 레지던스 모코마치 카이간도리(The Residence Motomachi Kaigandori)”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사가 머물렀던 후등 여관은 고베항 바로 앞에 있는 숙박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유물로 옆 골목인 해안통 2정목에 있는 ‘고베항 평화의 탑’이 있었다.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고베항으로 들어왔고, 오자마자 이 여관에 투숙했다. 성사가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는 니시무라[西村] 여관이 있었다. 이 여관은 1882년 8월 9일 박영효가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묵었던 여관이다. 박영효는 메이지마루(明治丸)을 타고 일본으로 오는 동안 배에서 태극기를 그렸고, 이를 게양한 곳이 니시무라 여관이다. 따라서 니시무라 여관은 해외에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니시무라 여관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이 건축되었고 1층에 니시무라사진연구소가 있어 예전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니시무라 여관의 주소는 고베시 중앙구 영정통 3정목(神戸市 中央区 栄町通 3丁目) 2-12이다.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노동자상 7일 오전의 후등승장 여관 답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고베의 유럽풍의 거리인 기타노이진칸을 둘러본 후 고베철도 부설 공사 중에 사망한 조선인노동자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조선인노동자상은 고베시 효고구 에게야마 공원 북쪽에 있다. 고베철도는 이곳 에게야먀[會下山] 공원 옆을 지나는데 고베 남쪽 바닷가와 그 반대쪽 아리마 온천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고베철도 공사는 산을 뚫어서 터널을 만드는 난공사였다. 포덕 68년(1927)부터 조선인 노동자가 공사 중에 희생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손과 관련 단체, 그리고 뜻있는 일본인들이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희생자를 조사하고 추모하는 모임)을 만들어 포덕 137년(1996) 11월 노동자상을 건립했다. 노동자상은 곡괭이를 어깨에 진 깡마른 작은 체구의 모자를 눌러쓴 채 힘겹게 일하는 모습을 그렸다. 조사단은 소주를 한잔 따르고 성령출세의 심고를 올렸다. 노동자상에 붙은 안내판에는 포덕 68년(1927) 8월 1일부터 포덕 77년(1936) 11월 25일까지 13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터널 작업 중에 희생되었다고 희생자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이 공사에 참가한 조선인 노동자는 1,500명에 달했으며, 확인된 13명 이외에도 더 많은 조선인이 부상당하거나 희생되었다고 한다. 노동자상 아래에는 이들이 만든 터널을 오가는 철마가 쌩쌩 달리고 있다. (박현국, 「고베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을 기억하는 동상 –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노동자 동상」, 『오마이뉴스』, 2018.6.22. 참조) 윤동주와 정지용 8일 아침에 고베를 출발해 1시간 30분에 걸쳐 교토로 이동했다. 조사단은 교토로 와서 먼저 도시샤(同志社)대학을 찾았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와 정지상의 시비(詩碑)가 나란히 있다. 필자가 포덕 134년(1993)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윤동주 시비만 있었는데 이후 포덕 146년(2005) 정지용의 시비도 건립되었다. 「서시」로 잘 알려진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졸업한 후 국내로 들어와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연희 재학 중 『소년』에 시를 발표해 등단했다. 포덕 83년(1942)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으로 유학 왔으나 6개월 만에 중퇴하고 교토의 도시샤대학 문학부에 전학해 수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포덕 46년(1945)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7세로 옥사했다. 사후 정지용 등이 그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시비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다. 「향수」로 널리 알려진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출신이다. 해월신사의 외손주인 정순철도 옥천 출신으로 비슷한 시기에 거주해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와 휘문보고를 거쳐 포덕 44년(1923)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휘문보고 시절부터 시를 발표했으며. 1929년 귀국 후 휘문보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영랑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을 문단에 등단시켰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시비에는 그가 일본에서 생활했던 지역을 그린 「압천(鴨川)」이 새겨져 있다. 시비는 옥천군과 옥천문화원, 정지용기념사업회에서 힘을 모아 걸립했다. 조사단은 찾은 시비 옆에는 작은 태극기가 꽂혀있어 뭉클했다. 식민지 시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뇌하던 청년 시인 윤동주와 향토색 짙은 조국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시를 쓰던 정지용을 기리며 일행은 심고를 했다. 고노에중학교(近衛中學校) 아침부터 흐린 날씨가 오후에 비를 뿌렸다. 비를 맞으며 조사단은 성사께서 유학생을 입학시켰던 고노에 중학교를 찾았다. 고노에 중학교는 지금은 시립중학교인데 메이지정부가 수립된 후 ‘교토부립제1중학교(京都府立第一中學校)’로 설립되었다. 이 중학교는 의암성사가 교단의 발전과 나라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유학생을 보낸 학교이다. 1차로 포덕 43년(1902) 3월 1차로 교인 자제 24명을 선발해 보냈고, 포덕 45년(1904) 3~4월의 2차로 40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입학시켰다. 이때에는 교인 자제뿐만 아니라 교인이 아니더라도 능력 있는 인재도 선발했다. 성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총 64명의 유학생을 파견한 곳이다. 이때 파견된 유학생으로는 제2세 교조 해월신사의 아들 최동희를 비롯해 정광조, 이인숙 등의 동학교인 자제와 춘원 이광수 등 전국에서 선발된 인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노에 중학교는 교토대학 후문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서 유학생들은 교토대학을 드나들며 청운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둘러보고 정문 옆 화단에서 이 학교가 교토부립제1중학교이었음을 알려주는 2개의 흔적이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헤이안[平安] 건도(建都) 1200년을 기념해 “각목백선선정수목(名木百選選定壽木)” 안내판에 “本校(본교)의 前身(전신)이었던 旧制京都一中(구경도일중, 明治(명치) 30年~昭和(소화) 4年)”이라는 구절과 다른 하나는 “소화 49년 9월 경일중낙북고교동창회건지(京一中洛北高校同窓會建之)”라고 세운 기념석이었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한 바퀴 둘러보고 운동장도 살펴보면서 당시 유학생들의 심정에 느껴보고자 했다. 쇼고인마치(聖護院町) 8일 오후에는 교토에서 성사가 거주했던 쇼고인마치 일대를 찾아 나섰다. 쇼고인이 있는 쇼고인마치는 의암성사가 교토에서 거주했던 동네이다. 성사는 포덕 44년(1903) 6월에 이곳으로 이사했다. 교토시 사쿄구 쇼고인나카마치에 있는 쇼고인은 현재 본산수험종(本山修験宗)의 총본산(総本山) 사원이다. 쇼고인의 문적사원(門跡寺院)은 헤이안 시대에 창건된 사원으로 일왕과 황족이 거주하였던 사원이다. 일본 왕실에 큰불이 났던 1788년과 1854년에는 일왕이 임시로 거쳐한 ‘임시황궁’으로 사용되었다. 쇼고인은 메이지왕이 궁궐을 나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쇼고인마치에서 성사가 어디에 거주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쇼고인마치 일대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사는 이곳 쇼고인마치의 건물을 빌려 머무르면서 동시에 유학생들이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쇼고인마치에서 고노에중학교까지는 두세 블록 밖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사는 이곳에 거주지를 만들어 생활하면서 함께 유학생들이 지낼 수 있도록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조사단은 쇼고인의 문적사원 앞에서 골목길을 따라 고노에중학교까지 걸어보니 시간은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필자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당시 수십명의 유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웃고 떠들면서 등하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조국과 교단의 앞날을 위해 준비하던 유학생들의 강렬한 눈빛이 떠올려 졌다. 당시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던 성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성사는 이곳에서 유학생들을 지원하다 포덕 45년(1904) 6월에 도쿄로 이주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天ケ瀨橋]와 윤동주 시비 9일 아침은 화창했다. 조사단은 교토의 우지시에 위치한 시인 윤동주의 유적을 찾았다. 조사단의 김동우 작가는 이곳을 꼭 가보아야 한다고 건의해 일정에 포함되었다. 윤동주는 귀국을 결심하고 도시샤 대학 친우들과 송별회를 위해 이곳으로 왔다. 윤동주는 이곳 강변에서 불을 지펴 친구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당시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윤동주와 친구들이 찍은 사진이 친구의 앨범에서 발견되었다. 윤동주는 당시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자 ‘아리랑’을 불러 주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이곳을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포덕 84년(1943) 7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후쿠시마 형무소에서 포덕 86년(1945) 2월 16일 옥사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는 윤동주의 생의 마지막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곳이다. 윤동주가 이곳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것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 ‘시인 윤동주의 기억과 화해의 비’이다. 이 비는 아마가세 구름다리를 건너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약 5분 걸으면 왼쪽 길가에서 서 있다. 이 기억과 화해의 비는 2004년 유엔에서 5월 8~9일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추억과 화해의 時(시)”가 결의된 후, 일본에서 윤동주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시인 윤동주 기념비건립위원회”가 조직되었고, 포덕 158년(2017) 10월 18일에 결실을 맺었다. 이 비에는 “새로운 길”이 새겨져 있다. 새로운 길 - 尹東柱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가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의 유적을 보고 조사단은 마지막 조사를 위해 오사카로 향했다. (계속) 글. 덕암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 대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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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시축 시 준암 박인준 교령님 취임식에 부쳐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타고 꽃비 뿌리며 내려온 선녀가 봄바람을 몰고 오니, 겨우내 얼어붙었던 용담물이 스르르 녹아내리네. 이에 잠자던 용이 기지개를 켜고 날을 준비를 하니, 학발노인[(鶴髮老人- 학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신선 )]이 용마에 오르려 하네! 하늘은 서광(瑞光)을 비추고 산천초목은 우쭐우쭐 춤추며 온갖 새들은 시천주 소리로 울어대니 천지가 진동하네! 용마에 오른 신선이여! 천지와 동서남북, 오대양 육대주를 날아다니며 한울님 말씀을 널리 알리소서! 마른나무에 새싹이 나며, 꽃이 피도록 생기를 불어넣어주시고 심화기화로 창생을 살리소서! 시천주 조화정으로 각자의 마음과 몸을 살리게 하고, 영세불망 만사지로 세상을 건지고 만인을 살리게 하소서! 용마에 오른 신선이시여! 구름이 용을 따르듯[(雲從龍-운종용)]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듯 [(風從虎-풍종호)]성인의 덕화를 베푸소서!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운암 오제운(전북 신태인교구장)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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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대학생단, 일본 성지순례 진행교토의 도시샤 대학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오사카 쓰루하시 역 부근에 있는 종리원 터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뒷편의 세븐일레븐 자리가 종리원 터 천도교 대학생단은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4박 5일 동안 일본 오사카, 교토, 고베 일대에서 성지순례를 진행했다. 이번 성지순례는 지난해 가을에 진행된 국내 성지순례에 이어, 국외 성지를 방문하며 천도교의 역사와 한국의 아픔을 되새기고, 과거를 잊지 않으며 미래를 이어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첫날, 오사카에서 천도교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다 성지순례의 첫날인 2월 13일, 참가자들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천도교의 중요한 유적들을 탐방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오사카 쓰루하시 역 부근에 있는 종리원 터였다. 종리원은 천도교의 사무와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한반도 외의 동포들에게 천도교의 뜻을 전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의암성사께서 일본에 거주하던 숙소를 찾아, 교토와 오사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당시의 흔적을 되새겼다. 오사카 우메다역도 방문지에 포함되어, 의암성사께서 독립운동을 위한 교통 거점으로 사용한 이 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둘째 날, 윤동주 시인 기념비와 이웃 종교와의 만남 둘째 날인 2월 14일, 성지순례 참가자들은 교토의 도시샤 대학을 찾아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를 방문했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그가 다녔던 도시샤 대학은 그를 기리기 위해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후 참가자들은 일본 성공회 유시경 신부님과 간담회를 통해 이웃 종교를 이해하고, 천도교와 성공회 간의 관계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으로는 의암성사께서 일본 체류 초기 거주하셨던 곳의 대략적인 위치인 쇼고인몬제키에 방문하며, 일본에서의 천도교 역사를 돌아보았다. 교토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니시혼간지를 방문했다. 일본 정토진종 본산인 니시혼간지는 일본 불교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로, 일본 불교의 역사와 교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장소다. 참가자들은 사찰 내부를 둘러보며 일본 불교의 신앙과 전통을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천도교와 불교 간의 역사적 연관성을 살펴보며 종교 간의 교류에 대해 생각해 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셋째 날, 일본 문화 체험과 자유시간 셋째 날인 2월 15일은 자유 일정으로, 참가자들은 각 팀으로 나누어 일본의 문화와 음식을 체험했다. 오사카성을 방문하거나 일본 전통 음식을 맛보는 등 일본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저녁에는 일정을 되돌아보며 간담회를 진행하고, 성지순례가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들이 직접 자료를 준비하고 공부하며 이야기를 나누니 머리와 마음에 잘 새겨져, 일방적 강의식 순례보다 뜻깊게 다가온다는 만족감도 있었다. 고베교구에서 시일식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마지막 날, 고베에서의 종교 체험과 지진 메모리얼 방문 마지막 공식 일정은 2월 16일 고베에서 진행되었다. 고베 교구는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한 재일동포들이 자진 성금을 모아 설립한 천도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그곳에서 시일식을 봉행했다. 또한 고베항과 고베 지진 메모리얼 파크를 방문하여, 1995년 발생한 고베 대지진의 피해와 그 당시 한국인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새겼다. 마지막 일정으로 이쿠타 신사를 방문하여 일본 전통 종교 체험을 통해 대학생단 간의 소중한 인연을 기원하며 성지순례를 마무리했다. 성지순례의 의미와 참가자들이 느낀 점 성지순례를 마친 참가자들은 이번 여행을 통해 천도교의 역사와 신앙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신앙 생활을 다짐했다. 참가자들는 성지순례 이후, "성지에 담긴 이야기와 정보를 듣고, 천도교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며, "이번 성지순례를 계기로 스스로 신앙하고, 탐구하며 전진해 나갈 것"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이번 성지순례는 천도교의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하며 신앙을 새롭게 다지기 위한 중요한 시간이었으며, 대학생단은 앞으로도 국내외 성지를 순례하며 천도교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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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단 임기를 마치며모시고 안녕하십니까 포덕 165년 제44대 대학생단 천도교청년회 대학생단 단장이었던 조영은입니다. 단장직을 수행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청년회 활동을 하게 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2020년 제가 대학에 입학하고 천도교 대학생단 활동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천도교를 시작한 건 이미 천도교를 하고 계신 이모와 이모부의 영향으로 봉황각 어린이 캠프에 참여했던 계기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또래 동덕들과 함께 저희들의 눈 높이에 맞춰서 활동을 진행해 주셨던 기억이 아직까지 나는 것 같습니다. 이 계기를 시작으로 매년 여름, 겨울마다 한울 나눔터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학생단으로 편입된 것 같습니다. 어린이날 행사에 대학생단이 보조로 진행하고 있다. 사회문화관과 협업해 종로구 주민센터에서 봉사활동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부산 대동교구에서 대학생단과 청년회가 개벽제 후 나인협 선생 동상을 참례하였다. 신입생이 되고 대학생단 활동도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 19의 여파로 학교는 물론 대학생단 활동도 무기한 연기되는 것을 느끼며 많은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42대 단장이셨던 민경 동덕과의 연락을 시작으로 작년에는 43대 대학생단의 부단장을 맡아 많은 선후배 동덕들과 자리를 가지며 천도교 대학생단만의 색깔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를 계기로 44대 대학생단 단장이 되어 많이 부족하지만 1년간의 시간 동안 더 많은 청소년 동덕들이 대학생단이 될 수 있게, 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덕들을 모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따스한 봄날 한강교구에서 진행한 정기모임부터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대학생단과 청년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치렀던 어린이날, 경기도 지역에 거주하는 천도교 어린이 동덕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경기한울학교, 여러 종교 교류 캠프 등 다양한 경험들과 전국의 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작년은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기념해 많은 기념식과 기도식에 대학생단이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현도기념일과 인일기념일에 합창과 공연을 하고 사회문화관에서 진행했던 수운대신사 피체노정과 봉사활동에도 참여해 단순히 정기모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사회참여 활동도 함께 할 수 있어서 뜻깊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1년간의 활동을 돌아볼 수 있었던 대학생단 송년회와 청년회원들과 함께 진행한 부산에서의 개벽제까지 정말 쉼 없이 많은 활동들을 진행했던 날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값지고 소중했습니다. 단장이라는 직책을 맡으면서 때로는 책임감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고, 생각처럼 되지 않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했던 동덕들과 선배, 후배 동덕들이 있었기에 이 모든 순간이 더욱 의미 있었습니다. 함께 웃고, 고민하고, 때로는 어려움을 나누며 보낸 시간들이 앞으로도 제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따뜻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단장에서 물러나지만, 청년회원으로서, 대학생단을 졸업한 선배로서 후배분들이 성장하고 더 많은 교인들로 채워지는 대학생단을 기대하며 뒤에서 열심히 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대학생단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 힘이 되어드릴 수 있는 선배가 되겠습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신 모든 동덕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포덕 166년 3월 27일 44대 대학생단 단장 조영은 심고 사진 조영은(본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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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떡처럼 얘기해도 찰떡처럼 알아듣기언젠가 한 미국인 교수가 '또라이'에 대해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 인생에서 기쁜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 한마디로 재수 없는 사람들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종종 우리 곁에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위축되고 분노하며 기분을 망쳐야 할까? 최근 나는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수련 41일째입니다"라고 말했다. 나 자신이 너무 기특하고 대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런 거 아무리 많이 해도 다 소용없다." 순간 '이런 또라이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함께 기뻐해 주고 격려해 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찬물을 끼얹다니. 처음에는 기분이 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분은 아마도 수련을 많이 하고도 인격적으로 훌륭하지 못한 사람을 겪어 본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단순히 부러워서 한 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말을 원래 개떡같이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상처받고 위축될 것인가? 아니다. 나는 상처받고 위축되고, 휘둘리는 대신, 내 내면을 들여다 보고 내 한울님 지키고, 유쾌하게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보면 또라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지 않는가? 적어도 '나는 저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누군가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즐겁게 한 걸음 더 나아가자. 글, 둥지가 되어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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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 바람꽃변산의 외딴 계곡 바위밑에서 겨우내 잠을 자다가 봄바람이 잠을 깨워 온 힘을 다해 지구를 뚫고 나온 바람 꽃. 백설같은 자태와 맑은 영혼은 가슴설레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으로 돌려놓고 꽁꽁 얼어붙었던 나그네의 마음에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어 사랑의 마음을 일게 한다. 作 운암 오제운(전북 신태인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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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 물씬한 지상천국불만스러운 삶을 포기하는 길에 애먼 천진무구한 어린이를 재물로 삼았던 명아무개 교사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명 교사는 귀신에 씐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악마도 아니다. 문제가 많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 교사 생활을 했던 선생님이요, 우리 이웃이었다. 인내천, 동학 천도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신 사람은 이에 한울님이다(인내천) 따라서 이렇게 한울님을 모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한울님을 모신(시천주) 존재이기에, 한울님이다. 그런 한울님을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어린이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를 옛부터 꼬마라고 했다. 고마는 신을 말한다. 말세다. 어둠이 너무 깊은 세상이다. 극도로 자신을 위하는 마음, 각자위심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망친다. 아무 죄의식도 느끼지 않고. 수운 최제우 선생이 말한 각자위심이 너무나 가득찬 사회다. 인내천은 존중과 배려다. 다만 좋은 게 좋다는 휴머니즘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 안의 한울님을 깨닫고 만남으로써 영원한 평화를 얻는 길이다. 굳이 말하자면 영성의 휴머니즘이다. 이것이 후천세상을 여는 다시개벽이며, 봄빛 물씬한 지상천국이 아닐까? 글, 이상우(서울교구)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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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쉬운 도(道)일용행사(日用行事)가 도 아닌 게 없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온몸으로 실천하고 보여준 이 말을 난 좋아한다. 도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교훈가>에서 말씀하신, ‘이같이 쉬운 도를 자포자기한단 말인가’ 이 말씀 또한 내가 좋아한다. 교훈가는 선생이 자녀와 조카들한테 한 말씀이다. 천도교에 몸담은 지 겨우 한 해 반이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나름 도가 텄다고 말하는 분야가 있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 말이다. 입교식 뒤에 연원회 모임에서, 손수 만든 빵을 가져와서 사람들과 나눠 먹은 것은, 아마 내가 처음일 것이다. 누룩막걸리를 넣고 띄운 토종 앉은키 밀가루에 국산 잣까지 넣고 만든 빵이다. 전교인인 명암 정윤택 선생이 잠시 흐뭇한 얼굴을 보였다. 나처럼 먹는 걸 좋아하고 음식 만드는 걸 즐기는 사람은 음식값이 아무리 올라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값싼 식재료로 훌륭한 음식을 얼마든지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오늘 나의 점심은 10곡 식빵 봄동 샌드위치와 우유, 요거트였다. 요즘 끝물인 봄동은 된장국, 쌈, 샌드위치 등에 써먹을 수 있는 좋아하는 식재료. 추위를 이겨낸 노지 배추로서, 속알은 없을지언정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진한 냄새와 맛이 담겼다. 나는 한살림에서 조합원 활동을 하면서 음식 만들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몇 해 앞서 낡은 오븐 하나를 중고가게에서 4만5천 원에 사면서 크게 폭이 넓어졌다. 지금 우리집 아랫목에는 뚝배기 하나가 놓여있다. 토종 앉은키 밀가루에 누룩막걸리를 넣고 치댄 반죽을 이틀째 띄우고 있는 것이다. 오늘 집에 돌아가면 구운 삼치에 밀가루 반죽을 얹어 삼치빵을 만들 것이다. 내가 빵을 만든 것은 네댓 해밖에 되지 않았다. 아는 사람을 통해 빵 만드는 곳을 소개받았다. 그런데 그곳이 너무 멀었고, 수업료가 10만 원이었다. 무엇보다 이 아는 사람이 빵 반죽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유튜브를 보면서 빵 만들기를 그냥 시작했다.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냥 만들어 먹을 만하다. 이렇게 쉬운 도(?)를 자포자기한단 말인가? 생협에서 나온 질 좋은 두유를 띄워서 두유 요구르트를 만든 것은 누구한테 배운 것이 아니다. 스스로 고안하고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귀한 제품이 나오기도 한다. 수운 최제우 선생처럼 생이지지(生而知之)인 것이다. 타고났다는 얘기인데, 먹는 쪽에서 그렇다. 이 두유 요구르트는 중증장애가 있는 우리 아들한테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열량도 낮고 영양도 풍부해 저녁밥으로 먹이고 있다. 내가 날마다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소중한 일은, 아침마다 두유 요거트를 만드는 것이다. 두유 한 병에 요거트만 조금 붓고 따듯하게 해주면 된다. 난 아이들한테도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평소 생각해왔다. 천도교 여러 교구에서도 음식을 만들어서 서로 나눠 먹는다면, 동덕의 정이 더욱 깊어지고 탄소배출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은 교구에선 오븐 하나씩을 사라고 권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훌륭한 교육이요, 포덕이라고 여긴다. 천도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해월 최시형 선생이 한 말씀을 경전에서 읽고 쾌재를 불렀다. 음식을 먹을 때 한울님께 고하는 식고(食告)야말로 도를 얻는 지름길이라고 한 말씀이다. 이렇게 쉬운 도를 자포자기한단 말인가! 기세등등했지만, 식고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앞에 맛있는 것이 보이면 머릿속에서 식고가 싹 사라져버리고, 바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간다. 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원초의 욕망인가! 그 뒤로 지금까지 내가 식고를 제대로 하고 있다고 여기진 않는다. 다만 열심히 하려고 애를 쓰고 있을 뿐이다. 천도교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주문 수련을 하면서도 느낀 점이 있었다. 살아가면서 내가 얼마나 어두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순간순간 힘들다, 두렵다, 짜증스럽다, 걱정스럽다 하는 나쁜 생각들이 내 마음을 옥죄고 있다. 그럴 때 ‘한울님을 내 안에 모셨습니다’ 하고 다짐하고, 21자 주문을 외우는 것은 큰 힘을 주고 있다. 어제는 <신과 인간>이란 영화를 보았다. 반군이 들끓는 혼란한 무슬림 국가인 알제리 시골 마을에서 가톨릭 수도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일곱 사람의 수도사, 한 사람의 의사는 가난한 마을 사람들을 돕고 가톨릭의 여러 수행 방법을 함께 한다. 그렇게 평생 온몸을 던져 살아왔지만, 늙어가기만 할 뿐이다. 왜일까? 형식에 지나지 않는 수행 방법만 있을 뿐, 천도교처럼 주문 수행이 없는 까닭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내가 천도교에 입교한 뒤 가장 놀라웠던 점은, 경전 내용과 주문 수행 등 내가 봐도 수긍할만한 방법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일용행사가 도 아닌 게 없다.’ 이렇게 쉬운 도를 자포자기한다는 말인가! 글, 이상우(서울교구) 신설된 코너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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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하얀 혁명>(7)(지난 호에 이어) 이상한 일이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초막이 보이지 않았다. 경사진 언덕을 삼단으로 깎아 지은 초막 자리엔 갯바람에 흩어진 사구처럼 헐리고 쓸린 집터만이 추비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고향 집에서의 따뜻한 하룻밤을 생각했던 북접군은 폐허로 변해버린 터전 앞에서 망연자실 투레질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눈길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너럭바위 옆에서 오백 년을 견딘 느티나무였다. 고목은 거지꼴로 돌아온 북접군을 나무라듯 잎을 모두 지운 채 된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너럭바위 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온통 늑굴(勒掘) 당한 무덤처럼 처연한 형색뿐이었다. 때마침 중늙은이 하나가 짚북데기 비옷을 덮어쓰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가 동학군을 보자 오던 걸음을 되짚어 내려가며 말했다. “이녁들이 떠나고 나서 왜놈이 쳐들어왔어. 여기뿐 아니라 왼 동네를 쑤시고 다니며 불을 싸질렀지. 내가 늘그막에 얻은 애 종자까지 태워 죽였단 말여. 이매망량 악다구니 같은 그놈들이. ” 예리성(曳履聲) 하나 없이 사라지는 노인을 보자 그도 이승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북접군은 경풍(驚風) 맞은 아이처럼 비척거리며 노인이 앞서간 청산 읍내를 향해 뜬 발길을 옮겼다. 청산은 평야가 넓고 토질이 비옥해 예로부터 실속 있는 부자와 자작농이 많이 살던 동네였으나 동학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모두 종적을 감추었다. 북접군은 관원들마저 도망친 동헌과 인적이 사라진 빈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러는 동안 관군과 민보군의 닦달에 이리저리 숨어 있던 농민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고 나와 동학군과 어울렸다. 스산한 귀향의 밤, 동학군과 농민은 윤똑똑이 말치레할 무용담도 없이 울음 반 눈물 반으로 화란의 세월을 탓하며 긴 밤을 함께 지새웠다. 하룻밤 사이에도 북접군을 토멸하려는 추격군의 동향이 시시각각 전해져왔다. 이번에 따라붙은 진압군은 용산 전투에서 패배한 지방군과 달리 경군과 일본군이었다. 무장과 전량이 빈약하고 입성도 남루한 북접군이 대적하기엔 벅찬 상대였다. 한시라도 빨리 익숙한 터전으로 자리를 옮겨 방비를 서둘러야 했다. 목적지는 대도소가 있는 보은 장내리. 거기에 가면 북접군이 기거하던 사백여 채의 초막과 대도소 건물이 남아 있을 것이며, 견고히 쌓은 돌담과 무엇보다도 동학군을 지지하는 지역민들이 반겨줄 것이었다. 대열을 둘로 나누어 1대는 원남을 경유하고, 2대는 보청천을 따라 관기 쪽으로 방향을 잡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틀 걸려 장내리에 도착한 북접군을 맞이한 건 처참하게 부서진 잔해뿐이었다. 대도소와 초막은 간데없이 사라졌고, 불에 탄 기둥과 부서진 서까래가 시린 눈밭에 나뒹굴고 있었다. 북접군은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폐허가 된 터전을 둘러보았다. 깨진 장독대엔 말라비틀어진 메줏덩어리가 토사물처럼 뒤엉켜 있었고, 허물어진 돌담 사이로 들바람에 흩날리는 새앙쥐 털이 허옇게 썩어가고 있었다. 공주 전투를 위해 북접군이 자리를 뜬 직후 관군이 쳐들어와 대도소를 폐허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문바위골에 이어 장내리까지 쑥대밭이 된 걸 보자 북접군은 그만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사정이 이러니 수련이 깊지 않은 병졸 몇이 보은 읍내로 달려가 동헌과 관사(官司)를 닥치는 대로 부수고, 민가를 뒤져 식량이 될 만한 것이라면 소, 돼지는 물론 씨오쟁이에 든 강냉이까지 끌어냈다. 수뇌부가 말리고 각 포의 접주가 나서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우선 당장 오천 명에 가까운 대군이 숙영할 장소부터 찾아야 했다. 5. 횃불 북접군이 찾은 곳은 말티재를 멀리 끼고 돌아 만나는 북실마을이었다. 북실은 평지가 넓고 골이 깊어 대군이 주둔할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 추격군과의 거리도 멀어 하룻밤 유숙하기에 이만한 적지가 없었다. 마을 초입에 파수꾼을 배치하고 서둘러 숙영 준비에 들어갔다. 본진은 평지인 바깥북실에, 경기포는 야산을 안고 있는 안북실에 자리를 잡았다. 민가는 비어 있었으나 몇 집 되지 않았기에 마른 논바닥에 볏짚을 깔고 볏단과 장작을 날라 화톳불을 피워 늦은 잠자리를 마련했다. 저녁 끼니를 위해 하는 수 없이 읍내에서 끌고 온 소와 돼지를 잡았다. 밤이 되자 눈발이 짙어지기 시작하더니 해가 떨어지면서 이내 목화송이처럼 굵어졌다. 눈이 쌓인 진중(陣中)은 솜이불을 덮은 것처럼 포근해 보였으나 버성긴 입성으로는 눈 호강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래도 분분한 눈발 속에 불티가 날아오르자 너른 북실벌이 때아닌 정월대보름 쥐불놀이 한마당같이 정겹게 변했다. 북접군은 계속된 행군과 피로에 지쳐 식사가 끝나자마자 아무 데나 쓰러져 곯아떨어졌다. 젖은 거적때기를 덮은 위로 두꺼운 눈 이불이 쌓이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고추바람에 흔들리는 화톳불만이 춥고 헐벗은 이들을 시리게 얼비추고 있었다. 북접군은 너무 지쳐 있었다. 척왜양창의의 기치를 내건 혁명군이었지만 군기가 엄한 군대도 아니고, 군 전략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군기가 엄했다면 파괴된 장내리 대도소를 보고 광분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았을 것이고, 냉철한 전략가가 있었다면 아무리 피곤해도 평지에 숙영지를 펴지 않았을 것이다. 광분한 탓에 보은 읍내에서 민폐를 저질러 밀고자가 생겨났고, 개활지에 지은 숙영지는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동태가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눈이 와서 야습이 없으리라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다. 초입에 파수꾼을 두기는 했어도 그들 역시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농민에 불과했다. 시간은 해시(亥時)를 넘어가고 있었다. 북실은 눈 속에 파묻혀 잠들었으나 이곳을 향해 접근해오는 한 무리의 군사가 있었다. 상주 유격장 김석중이 이끄는 민보군 240명과 후비보병 19대대 소속 일본군 37명이었다. 상주 민보군은 대부분 포수 출신으로 화승총을 휴대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유격장 김석중은 병서를 많이 읽어 병법에 능한 유생으로 이번 야습도 그가 주장한 계책이었다. 그런 그들이 일본군 장교의 지휘하에 3개 조로 나누어 숫눈길을 헤치며 접근해온 것이었다. 이걸 알 리 없는 북접군은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 아침에 움직일 요량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추격군은 고양이 걸음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고, 흩날리는 눈발 속에 발자국마저 지워졌다. 추격군 척후병이 호리병 지나는 뱀처럼 움직여 모닥불을 쬐고 있던 최전방 파수병을 낚아채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추격군은 파수병을 심문해 북접군 배치 상황을 파악한 뒤 3개 방향에서 일제사격을 가하며 돌진해 들어왔다. 오천 명의 대군 속으로 삼백 명이 채 안 되는 돌격대가 기습을 시작한 것이다. 화톳불을 쬐고 있던 파수병이 장전할 틈도 없이, 논바닥에서 잠자던 사람이 일어나 눈 이불을 털 사이도 없이, 민가 안에서 잠들어 있던 사람이 문고리 당길 시간도 없이, 빗발치듯 날아드는 총알에 속수무책 쓰러졌다. 깨어 있던 이들도 혼비백산 도망치느라 넋이 나갔다. 민보군은 노루 사냥 나온 포수처럼 화승총을 쏘아댔고, 양총을 든 일본군은 도망치는 무리를 뒤쫓으며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저항하던 대열의 선두가 피를 쏟으며 나뒹굴자 뒤따르는 무리는 도망도 못 치고 오금이 접혀 주저앉았다. 화톳불 장작이 발길에 차이면서 쥐불 통이라도 던진 듯 온 벌판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추격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북접군을 쏘아 쓰러뜨렸다. 눈밭에 꽂히며 사그라든 장작개비에서 피어오른 연기도 북접군의 발목을 잡았다. 매캐한 연기가 눈을 가리고 기침을 터뜨리게 해 추격군 귀에는 ‘나 여깄소’하는 과녁판 소리로 들렸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사냥이었다. 토끼몰이 섶사냥이었다. 바깥북실 들판은 한순간 살육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추격군은 벌통 앞에 도사려 앉은 말벌처럼 북접군을 도륙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논바닥에 흩뿌려진 더운 피가 눈을 녹이며 벼 밑동을 드러냈고, 떨어져 나간 팔다리는 흘린 장작개비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화톳불이 사그라들어 뿌연 눈밭으로 변한 벌판은 흑백 수묵화처럼 희고 검은 핏빛으로 벌바람에 흔들렸다. 눈발이 더욱 굵어져 쓰러진 주검을 하얗게 덮었다. 바깥북실에 숙영하던 북접군의 완벽한 패배였다. 그러나 안북실의 상황은 달랐다. 안북실 야산에 진을 치고 있던 경기포가 반격을 시작했다. 고지를 선점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경기포가 안북실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가 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안북실의 주둔 사실을 몰랐던 추격군으로서는 의외의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경기포는 사거리를 좁혀 축차적으로 공격해왔다가 물러나며 사격을 이어갔고, 추격군은 정면과 좌, 우측 세 갈래로 나누어 반격을 시작했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밤새 이어졌다. 경기포는 무기에서는 열세였으나 숫자가 많고 고지를 선점하고 있어서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팽팽하던 균형이 깨진 건 시간이 갈수록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탄환 때문이었다. 몇 정 되지도 않는 모젤 소총은 총알이 떨어져 무용지물이 되었고, 화승총은 사거리가 짧아 멀리 있는 적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반면, 추격군의 스나이더 소총은 먼 거리에서 날아와 사정없이 경기포를 두들겨댔다. 고지 위에 엎드려 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총에 맞아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병사도 있었다. 경기포의 공격이 지지부진해지자 추격군은 공격 방향을 바꾸어 양쪽 능선으로 산개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기가 없는 경기포는 철창과 환도, 맨주먹으로 맞서 싸웠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바깥북실에서의 살육전이 안북실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산은 시체로 뒤덮였고, 바윗돌에 쌓인 눈이 피에 젖어 녹아내렸다. 추격군의 참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뒷고개로 도망치는 북접군을 쫓아가며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바깥북실, 안북실, 하판리, 백현리 전체가 피의 강으로 흘러넘쳤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동학군을 말살하는 초멸의 대학살, 천살(擅殺)이었다. 이창진 수접주와 한규석이 이끄는 이천포의 한 무리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절골을 넘어 학림리로 도망쳐 들어왔다. 마을 주민 대부분은 이웃 동네 북실에서 벌어진 전투 소리에 놀라 황급히 몸을 피했지만, 촌장 김교무를 비롯해 남아 있던 이들이 도망쳐온 이천포군을 마을 뒤편 대밭에 숨겨주었다. 그러나 뒤따라 밀고 들어온 추격군이 북접군을 찾기 위해 지른 불로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어버렸고, 흰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온 마을사람을 북접군으로 오인해 무차별 살상이 벌어졌다. 몇몇 젊은이들이 불붙은 장작개비와 쇠스랑을 치켜들고 대항해보았으나 총을 든 군인에겐 적수가 되지 못했다. 새도록 쏟아지는 눈발 속에 마을은 밤새 불탔고, 총성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한규석과 이창진은 대밭에 숨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한규석은 떨어져 나간 한쪽 팔목에서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핏물이 새벽 한기로 얼어붙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남은 한 손으로 이창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마을은 화염에 불타 일렁이고 있었고, 이창진의 얼굴에서는 생의 마지막 그림자가 시취(屍臭)를 풍기며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그의 한쪽 눈이 함몰되어 꾸덕꾸덕 마르면서 그 위로 눈이 내려와 하얗게 덮였다. 한규석은 감각이 사라진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부서져 나간 정강이뼈가 드러나면서 풍화된 규화목처럼 눈발에 시렸다. 한규석은 이창진을 감쌌던 손을 뽑아 속적삼 안에 넣어두었던 전투상보(戰鬪詳報)를 꺼냈다. 전투를 치를 때마다 꼼꼼히 적어왔던 귀 닳은 두루마리가 핏물에 젖어 있었다. 남은 한 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쳤다. 검은 미명 속에 깨알같이 적어놓은 글귀들이 하얗게 떠올랐다. 이제는 더이상 쓸 수 없게 된 전쟁의 기록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지난 석 달간의 일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두루마리였다. 한규석은 탄환 없는 혁명의 끝을 반추해 보았다. 한울님의 나라도 떠올려 보았고, 다시 개벽한 후의 세상도 그려보았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것이 혁명이라고 말씀하신 해월의 음성도 되짚어 보았다. 그러나 생각의 형체가 잡히지 않았다. 형체는 없고 아련한 형상만이 날리는 눈발 속에 명멸했다. 눈 속 세상은 밝고 환했으나 대숲 속은 어둡고 추웠다. 후회는 없었다. 언제라도 한울님이 부르시면 믿음 하나만으로도 달려 나갈 것만 같았다. 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끊어진 팔목과 다리를 통해 체온이 빠져나가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닫히는 육혈(六穴)을 통해 치받아 들어오는 열기가 몸을 후끈 데웠다. 횃불의 종심에 닿은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다. 불의 떨림이 미처 이루지 못한 혁명의 형상으로 흔들렸다. 횃불 속의 하얀 혁명이었다. 횃불은 민가의 지붕이 타는 불꽃 배경 속에서 자라고, 흔들리고, 커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대숲에 고여 있던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대숲을 휘젓고, 횃불을 휘젓고, 전답을 휘젓고, 송림을 휘저으며 퍼져나갔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어도, 먼 곳에서, 솔가지에 둥지를 튼 백학들이 시리고 지친 다리를 바꿔 딛기 위해 푸드덕 날아올랐다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여명의 붉은 기운이 학림의 대숲에 번지기 시작했다. 먼동이 트는 소리였다. 끝. (연재를 마칩니다.)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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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서에 나타난 동학혁명기 일본군의 인식(2)3.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과 그에 대한 인식 일본군의 개입과 경복궁 점령으로 재기포한 2차 동학혁명은 관군과 일본군으로 구성된 조일 연합군과 동학군의 직접적인 전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동학군 진압에 참여한 일본군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후비보병 제19대대의 3개 중대를 중심으로 후비보병 제18대대의 1개 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 제6중대의 1개 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의 제4중대와 제7중대의 일부 병력, 그리고 부산수비대의 1개 중대, 해군 츠쿠바함(筑波艦)과 죠코함(操江艦)이었다. 동학군 진압의 주력부대인 후비보병은 만 20세에 상비병으로 3년간 군복무를 하고 예비역으로 4년을 보낸 후 다시 5년의 복무를 한 군 경험이 많고 노련한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동학군 진압의 주력부대라고 할 수 있는 후비보병 제19대대는 일본 에히메(愛媛) 지역 출신들이었다. 후비보병 제19대대는 11월 12일(음 10월 15일) 용산을 출발하였다. 출발에 앞서 전달된 훈령에 의하면, 첫째는 동학군의 근거지를 찾아내어 이를 초절(剿絶)할 것, 둘째 동학군을 격파하고 그 화근을 초멸(剿滅)함으로써 동학군이 재흥하는 후환을 남기지 말 것, 셋째 조선군의 진퇴에 대해서는 일본군의 지휘 명령을 받을 것, 넷째 보병 1중대는 서로(수원-천안-공주-전주), 보병 1중대는 중로(용인-죽산-청주-성주), 보병 1중대는 동로(가흥-충주-문경-낙동-대구)로 행진할 것, 다섯째 동학군을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내몰도록 하며 가능하면 러시아 국경으로 향하지 않게 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이후 동학군은 조일연합군(朝日聯合軍)에 의해 철저하게 진압당하였다. 그렇다면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천도교창건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학군이 일본군과의 첫 교전은 괴산이었다. 이에 괴산에 당도하니 괴산군수, 충주군 주차 일병을 청하여 영전함에 포환(砲丸)이 여우(如雨)라. 도중(道衆)이 사(死)를 서(誓)하고 교전하여 피차 살상이 상당하더니, 마침 일모(日暮)한지라. 다수 교도 일제히 눌함(吶喊) 전진하여 일군(日軍)을 습살(襲殺)하였다.(『천도교창건사』) 동학군과 일본군은 괴산에서 첫 교전이 있었는데, 이 괴산전투에서는 동학군이 비록 승리하였지만 많은 희생을 해야만 했다. 당시 동학군은 2만여 명에 달하였으며, 일본군은 2개 분대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하라다(原田) 소위 등 부상 4명, 병사 1명 즉사에 불과하였지만, 동학군은 2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외에 일본군과의 전투는 공주 우금치전투를 비롯하여 태인전투, 용산전투, 광양과 섬진강전투 등에 관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즉 (전략) 때에 마침 관군의 원병인 일군이 대거 합류한지라. 동군(東軍)이 공주 효포에서 혈전 7일에 전세 불리함을 보고 퇴각하여 태인에서 일군과 교전하고(『천도교창건사』) 동군(東軍)이 용산에 이름에 뒤로 일군의 추격이 심하고 앞으로는 관군이 영격포위(迎擊包圍)하여 진퇴유곡이 된 지라.(『천도교창건사』) 퇴각 중의 도인 수만은 광양 섬진강 안에 둔하였다가 관군과 일군의 피습한 바 되어 강수(江水)에 빠져 진멸(盡滅)하고(『천도교창건사』) 이라고 하여 동학군과 일본군과의 교전을 한두 줄로 언급만 하였다. 하지만 이들 전투는 동학혁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우금치전투는 동학혁명 기간 가장 규모가 큰 전투였으며 동학군 역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그러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동학군 전사자가 37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비해 『동학사』에서는 일본군의 동향에 대해 더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병은 세를 합하여 동학군의 앞을 막아들어 온다”라고 하여 일본군의 진압과정에 대해 축소하였다. 이후 동학군의 퇴로과정에서 적지 않은 일분군과의 교전이 있었지만,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일부 지역 교정에서 일본군의 활동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수원부를 점령하고 남군(南軍)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바, 관병과 일병을 만나 여러 날을 두고 싸우다가 (동학군이) 마침내 패하였고, (중략) 황해 일도의 동학군 수만을 일으켜 장차 남군과 세를 합하여 경성을 치고자 해주감영을 점령하고 있었던 바, 또한 관병과 일병을 만나 수십 일 동안을 두고 서로 싸워 양방의 많은 사상을 내었고, 마침내 동학군은 관일병에게 패한 바 되었다”(『동학사』)라고 하여, 수원전투와 해주전투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각지의 교전에서 “관병과 일병도 많이 죽고”라고 하여 일본군도 적지 않은 피해자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동학혁명이 끝나가는 1894년 12월 이후부터는 “조선의 남쪽은 관병과 일본군의 천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일본군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일본군을 포함한 관군, 수성군, 민보군 등의 동학군을 참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광경이었으며, 그 결과 3, 40만 명의 동학군이 피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천도교창건사』도 20만 이상의 동학군이 죽임을 당하는 대참(大慘)이었다고 하였다. 그럼 해방 후에는 어떻게 기록하였을까. 먼저 『천도교백년약사』를 살펴보자. 우선 동학군이 재기포한 배경은 “범궐(犯闕)한 일군들이 국왕을 핍박하고 국권을 유린”과 일군이 각지에서 동학군을 마구 참살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반봉건에서 반침략으로 전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동학군이 재기포하자 일본군은 관군과 연합하여 동학군 진압할 것을 제안하고 관군을 지휘하여 작전계획에 따라 동학군을 초멸코자 하였다. 동학군과 일본군은 안동을 비롯하여 괴산, 세성산, 홍성, 이인, 공주, 해주, 원평과 태인, 은률, 서흥, 홍천, 하동 등지에서 치열하게 교전을 하였으며, 수백 명의 동학군이 살해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전봉준의 피체와 재판과정에 일본군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천도교백년약사』는 앞서 살펴본 『천도교창건사』와 『동학사』보다는 구체적으로 폭넓게 일본군의 동향을 다루고 있다. 특히 동학혁명이 끝날 무렵에는 “일본군의 수색이 극심해지자 전국적으로 전토(田土)가 황폐해지고 도시와 농촌이 모두 일군의 왕래를 꺼리어 수확을 포기하고 촌민(村民)들이 도망하여 마을이 모두 비었다”할 정도로 일본군의 폐해성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천도교약사』에서도 여전히 보이고 있다. 즉 세성산전투에서 “동학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전멸당하였다”거나 공주 우금치전투에서는 “일본군 연합군이 최신무기로 무장한 채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우금치전투 이후 “일본군과 정부 연합군은 계속 동학군을 추격 공격하였다”하고 하여, 동학군을 섬멸하고자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인전투와 종곡전투에서도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전하였음도 아울러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동학혁명 개입에 대해 “아시아에서 저지른 일본군의 최초 대량학살”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간행된 교서에서는 동학군과 일분군과의 전투과정 뿐만 아니라 그 실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판단된다. 이로 볼 때 일본군에 대한 인식은 초기 동학교서에서는 가급적이면 필요 이상으로 학살 등에 대해 표현하지 않고 있지만 후기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동학혁명에 관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연구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제에 대한 책임을 보다 강조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희암 성주현(신인간 주필, 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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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행적 조사(1)뜻깊었던 의암성사 행적 조사 뜬금없는 계엄 선포와 국회의 해제 의결 이후 국내 정치가 소란했던 지난해 12월 6일 총부 사회문화관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후원하는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과 독립유적지 조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평소 의암성사에 관한 논문과 글을 발표하는 입장에서 늘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조사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번 답사에 동행한 조사단은 교단을 대표해서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이 참여했고, 답사의 진행은 사회문화관의 최인경 관장과 최진영 차장이 맡았다. 연구자로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박성현 큐레이터와 필자가 참여했고, 유적지 사진 기록으로 독립운동 유적 담기로 잘 알려진 김동우 작가와 민족운동 유적을 사진으로 알려주는 신춘호 방송통신대 교수가, 동영상 자료는 교단 동영상 자료를 정리하는 김정호 선도사가 맡았다. 원활한 답사를 위해 박동호 여행사 대표가 참여했다. 조사단은 12월 6일 아침 6시 인천국제공항에 집결하여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정을 시작했다. 고베(神戶)에서 이틀간 조사하고, 교토(京都)로 이동해 하루, 다시 오사카(大阪)로 이동해 이틀을 조사하고 12월 10일 오후 22시경에 인천국제공항으로 도착한 힘든 일정이었다. 돌아오면서 이번 조사단에 참가해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탐방하는 의미 있는 작업에 참여했지만, 이번 조사가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의 절반밖에 찾지 못했기 때문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올해에 마무리 사업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이번 조사단의 활동을 간략하게 전한다. ‘외유’는 성사의 큰 그림 의암성사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해월신사를 보필해 강원도에서 도피 생활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으로 괴멸된 교단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인 포덕 38년(1897) 12월 24일 해월신사는 동학 교단을 이끌 후계자로 의암성사를 지명했다. 이듬해인 포덕 39년(1898) 4월 5일 해월신사는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어 그해 6월 2일 순도하였다. 이후 의암성사는 김연국 등의 반발을 수습하고 포덕 41년(1900) ‘경자설법’을 통해 교단을 안정화의 기초를 마련했다. 교단은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교인이 체포되어 순도하거나 영어의 몸으로 고통받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손천민도 순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암성사의 처지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의암성사는 위기에 처한 교단의 발전을 위한 획기적 발상을 했다. 하나는 피난 방법의 변화였고, 다른 하나는 세계 대세의 파악이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외유(外遊)’였다. 성사는 외유를 통해 교단의 개벽을 꿈꾸었다. 성사는 이전에도 외유의 의견을 내비쳤으나 교단 원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포덕 42년(1901)에 교단의 주요 간부를 모아 외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辛丑(신축, 1901년) 三月(삼월)에 聖師(성사)가 門弟(문제)와 相議(상의)하야 갈으되, “往年(왕년)에 내 孫天民(손천민) 金演局(김연국)으로 더부러 相議(상의)하고 美國(미국)을 遊覽(유람)코저하다가 金演局(김연국)이 쫓지 않음으로 未果(미과)하엿거니와 이제 다시금 생각하여 본즉 將來(장래) 吾道(오도)를 世界(세계)에 彰明(창명)코저 할진대 今日(금일) 文明(문명)의 大勢(대세)를 觀察(관찰)하지 않으면 不可(불가)하다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내 이제 十年(십년)을 限(한)하고 外遊(외유)하야 世界(세계)의 形便(형편)을 歷探(역탐)코저하노니 諸君(제군)의 뜻이 어떠하뇨.” -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제3편 제6장, 27쪽.- 위의 글을 보면 의암성사는 처음에는 미국으로 외유하고자 했다. 이는 동학에서 추구하는 시천주의 세상과 일맥상통하는 민주공화정 국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사는 미국을 돌아보고 민주공화정을 우리나라에 채택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포덕 37년(1896)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미국을 ‘문명개화를 이룩한 모범적인 선진국’으로 칭송한 매체였다. (오영섭, 「『독립신문』에 나타난 미국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67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6∼7쪽 참조) 이미 성사께서는 포덕 34년(1893) 보은교조신원운동에서 “민당(民黨)”과 “민회(民會)”를 경험하기도 했다. 시천주의 교의와 합치하는 정치체제가 민주공화정이었다는 점과 당시 미국을 모범국으로 소개한 사회적 분위기 등이 성사의 미국 외유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의암성사는 포덕 42년(1901) 3월에 원산을 거쳐 미국을 가려 했지만, 원산에서는 미국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어서 부산으로 내려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일본에 경유하는 동안 미국행 배표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에게 피해를 당해 경비 부족으로 부득이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機密 제85호, 「李祥憲ノ身元及擧動ニ關シ回申」, 『要視察韓國人擧動』3, 1904년 9월 7일자. “李祥憲始ノ各李圭完(或ハ元孫時秉)京畿道陰竹ノ人三四年前始メテ日本ニ遊フ其目的ハ世界漫遊ニあアリテ先ツ釜山ニ出ツルヤ二三日本人ノ欺ク所ト成リ汽船買入ノ約ヲ為シ代価貳萬餘圓ト定メ先ツじ若干手付金ヲ交付シ大阪ニ於テ現物受授ノ約ヲ結ヒ大阪ニ赴キタルニ現汽船ノ所在ヲ認メス全ク詐偽ノ行為ニ出タルヲ知リ空シク滞留中.” 참조) 당시 성사의 최우선 목표는 교단의 재건이었고 이를 위한 방법은 문명개화된 외국을 직접 보고 근대문명의 실상을 파악하고 이를 교단에 접목시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성사께서 일본에 머무른 이유는 당시의 일본도 미국 못지않게 근대문명을 접하고 배우기에 적합한 나라였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의암성사께서 일본 외유 당시 탑승했던 관부연락선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1901년 3월부터 1906년 1월까지였다. 이 시기는 다시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1901년 3월부터 1903년 6월까지의 2년 4개월간이고, 1기는 1903년 6월부터 1906년 1월까지의 2년 8개월간이다. 중간에 중국 상하이 등을 방문하고, 일시 귀국하기도 했지만, 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대략 5년이다. 성사는 원래 10년을 목표로 외유를 하고자 했으나 그 연한을 채우지 못했다. 그 원인으로 성사의 명을 받아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이끌었던 이용구가 친일파인 송병준과 합동해 진보회를 일진회로 고치고 친일에 앞장서 동학 교단을 친일화하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성사는 이용구의 일진회와 단절하고,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꾸어 근대적 종단으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교단은 일신하여 국내 제일의 종단으로 성장했다. 첫 방문지는 고베(神戶)교구 답사단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고베교구’였다. 고베교구는 일본에 있는 유일한 천도교 교구이다. 교베교구의 연원은 1944년 해방 직전 귀국하지 못한 고베의 독실한 강영태(姜永泰), 성사경(成仕卿), 김성오(金聖五), 하재술(河在述) 등 천도교인 4명이 중심이 되어 70여 명의 교인을 규합해 현재 고베교구가 있는 고베시 나가타구(長田區 背蜜峰)에 “천도교고베종리원(天道敎神戶宗理院)”을 설립하고 종교법인 등록을 마친 것에서 시작한다. 연원은 ‘동원포’이고, 현 교구장은 김태환(金泰煥)이다. 같은 시기 ‘오사카교구’와 ‘교토교구’도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일본에는 고베교구만 남았다. 특히 교토교구는 눌암 황태익의 4남인 황용수가 세워 교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음에도 없어져 안타깝다. 고베교구에 도착하니 사전에 조사단의 방문을 인지하고 있던 김 교구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훤칠한 키에 강건한 인상의 김 교구장은 70대 후반의 고령임에도 건강했다. 인사를 나누고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의 집례로 방문 참례식을 가졌다. 윤석산 전 교령은 인사말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고베교구와 김태환 교구장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일본어 경전을 준비해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김태환 교구장은 답사에서 “고베교구에는 매 시일 20명 이상이 시일식을 보고 있으나 어려움이 있으며, 경전과 자료의 일본어 번역, 일본어가 가능한 교인이 와서 생활하면서 지도해줄 인사를 요청한다.”라며 해외 신앙의 어려움과 도움을 요청했다. 이어서 윤석산 교령은 선물로 준비해 간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메달’과 대신사 출세 200년을 맞아 간행한 『읽기 쉬운 천도교경전(동경대전, 용담유사)』을 기증했다. 또 윤석산 전 교령은 자신의 저서와 시집 등도 선물하였다. 김 교구장과 아쉬운 작별의 정을 나누고 조사단은 포덕 136년(1995) 1월 17일 고베대지진 유적이 있는 ‘고베항지진메모리얼파크’를 찾아 보존된 지진 흔적을 둘러보았다. 김태환 교구장은 고베교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충분해 교인 자제 중에 유학생이 있으면 교구에서 지원할 수 있고, 또 유학생이 아니더라도 고베교구에서 신앙을 함께할 동덕이 있으면 숙식과 경비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달해달라고 하였다.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은 12월 8일의 시일식에 다시 고베교구를 방문해 시일식을 봉행하며 30여 교인들과 함께 천도교 종교행사인 시일 의식을 봉행하고 고베 교인들이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으며 동귀일체의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후등승장(後藤勝藏) 여관 터 2월 7일 오전에는 성사께서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을 찾아 나섰다. 기록에 따르면 후등승장 여관이 위치했던 곳은 고베시 중앙구 해안통 3정목(中央區 海岸通 3丁目)이었다. 이곳은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가 손병흠, 민기호와 같이 묵었던 여관이 있던 곳이다. 현재 주소는 고베시 추오구 사케마치도리 3정목 2-8이다. 기존의 자료에는 여관 자리에 미쓰비시 게스트하우스라고 되어있어 주위에 이런 이름의 건물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주변에 미쓰비시 건물은 찾을 수 없었다. 해안통 3정목 일대의 가게를 돌아다니며 조사단이 확인한 결과 당시 성사가 흐등승장 여관은 현재 “더 레지던스 모코마치 카이간도리(The Residence Motomachi Kaigandori)”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사가 머물렀던 후등 여관은 고베항 바로 앞에 있는 숙박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유물로 옆 골목인 해안통 2정목에 있는 ‘고베항 평화의 탑’이 있었다.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고베항으로 들어왔고, 오자마자 이 여관에 투숙했다. 성사가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는 니시무라[西村] 여관이 있었다. 이 여관은 1882년 8월 9일 박영효가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묵었던 여관이다. 박영효는 메이지마루(明治丸)을 타고 일본으로 오는 동안 배에서 태극기를 그렸고, 이를 게양한 곳이 니시무라 여관이다. 따라서 니시무라 여관은 해외에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니시무라 여관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이 건축되었고 1층에 니시무라사진연구소가 있어 예전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니시무라 여관의 주소는 고베시 중앙구 영정통 3정목(神戸市 中央区 栄町通 3丁目) 2-12이다.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노동자상 7일 오전의 후등승장 여관 답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고베의 유럽풍의 거리인 기타노이진칸을 둘러본 후 고베철도 부설 공사 중에 사망한 조선인노동자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조선인노동자상은 고베시 효고구 에게야마 공원 북쪽에 있다. 고베철도는 이곳 에게야먀[會下山] 공원 옆을 지나는데 고베 남쪽 바닷가와 그 반대쪽 아리마 온천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고베철도 공사는 산을 뚫어서 터널을 만드는 난공사였다. 포덕 68년(1927)부터 조선인 노동자가 공사 중에 희생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손과 관련 단체, 그리고 뜻있는 일본인들이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희생자를 조사하고 추모하는 모임)을 만들어 포덕 137년(1996) 11월 노동자상을 건립했다. 노동자상은 곡괭이를 어깨에 진 깡마른 작은 체구의 모자를 눌러쓴 채 힘겹게 일하는 모습을 그렸다. 조사단은 소주를 한잔 따르고 성령출세의 심고를 올렸다. 노동자상에 붙은 안내판에는 포덕 68년(1927) 8월 1일부터 포덕 77년(1936) 11월 25일까지 13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터널 작업 중에 희생되었다고 희생자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이 공사에 참가한 조선인 노동자는 1,500명에 달했으며, 확인된 13명 이외에도 더 많은 조선인이 부상당하거나 희생되었다고 한다. 노동자상 아래에는 이들이 만든 터널을 오가는 철마가 쌩쌩 달리고 있다. (박현국, 「고베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을 기억하는 동상 –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노동자 동상」, 『오마이뉴스』, 2018.6.22. 참조) 윤동주와 정지용 8일 아침에 고베를 출발해 1시간 30분에 걸쳐 교토로 이동했다. 조사단은 교토로 와서 먼저 도시샤(同志社)대학을 찾았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와 정지상의 시비(詩碑)가 나란히 있다. 필자가 포덕 134년(1993)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윤동주 시비만 있었는데 이후 포덕 146년(2005) 정지용의 시비도 건립되었다. 「서시」로 잘 알려진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졸업한 후 국내로 들어와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연희 재학 중 『소년』에 시를 발표해 등단했다. 포덕 83년(1942)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으로 유학 왔으나 6개월 만에 중퇴하고 교토의 도시샤대학 문학부에 전학해 수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포덕 46년(1945)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7세로 옥사했다. 사후 정지용 등이 그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시비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다. 「향수」로 널리 알려진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출신이다. 해월신사의 외손주인 정순철도 옥천 출신으로 비슷한 시기에 거주해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와 휘문보고를 거쳐 포덕 44년(1923)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휘문보고 시절부터 시를 발표했으며. 1929년 귀국 후 휘문보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영랑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을 문단에 등단시켰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시비에는 그가 일본에서 생활했던 지역을 그린 「압천(鴨川)」이 새겨져 있다. 시비는 옥천군과 옥천문화원, 정지용기념사업회에서 힘을 모아 걸립했다. 조사단은 찾은 시비 옆에는 작은 태극기가 꽂혀있어 뭉클했다. 식민지 시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뇌하던 청년 시인 윤동주와 향토색 짙은 조국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시를 쓰던 정지용을 기리며 일행은 심고를 했다. 고노에중학교(近衛中學校) 아침부터 흐린 날씨가 오후에 비를 뿌렸다. 비를 맞으며 조사단은 성사께서 유학생을 입학시켰던 고노에 중학교를 찾았다. 고노에 중학교는 지금은 시립중학교인데 메이지정부가 수립된 후 ‘교토부립제1중학교(京都府立第一中學校)’로 설립되었다. 이 중학교는 의암성사가 교단의 발전과 나라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유학생을 보낸 학교이다. 1차로 포덕 43년(1902) 3월 1차로 교인 자제 24명을 선발해 보냈고, 포덕 45년(1904) 3~4월의 2차로 40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입학시켰다. 이때에는 교인 자제뿐만 아니라 교인이 아니더라도 능력 있는 인재도 선발했다. 성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총 64명의 유학생을 파견한 곳이다. 이때 파견된 유학생으로는 제2세 교조 해월신사의 아들 최동희를 비롯해 정광조, 이인숙 등의 동학교인 자제와 춘원 이광수 등 전국에서 선발된 인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노에 중학교는 교토대학 후문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서 유학생들은 교토대학을 드나들며 청운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둘러보고 정문 옆 화단에서 이 학교가 교토부립제1중학교이었음을 알려주는 2개의 흔적이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헤이안[平安] 건도(建都) 1200년을 기념해 “각목백선선정수목(名木百選選定壽木)” 안내판에 “本校(본교)의 前身(전신)이었던 旧制京都一中(구경도일중, 明治(명치) 30年~昭和(소화) 4年)”이라는 구절과 다른 하나는 “소화 49년 9월 경일중낙북고교동창회건지(京一中洛北高校同窓會建之)”라고 세운 기념석이었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한 바퀴 둘러보고 운동장도 살펴보면서 당시 유학생들의 심정에 느껴보고자 했다. 쇼고인마치(聖護院町) 8일 오후에는 교토에서 성사가 거주했던 쇼고인마치 일대를 찾아 나섰다. 쇼고인이 있는 쇼고인마치는 의암성사가 교토에서 거주했던 동네이다. 성사는 포덕 44년(1903) 6월에 이곳으로 이사했다. 교토시 사쿄구 쇼고인나카마치에 있는 쇼고인은 현재 본산수험종(本山修験宗)의 총본산(総本山) 사원이다. 쇼고인의 문적사원(門跡寺院)은 헤이안 시대에 창건된 사원으로 일왕과 황족이 거주하였던 사원이다. 일본 왕실에 큰불이 났던 1788년과 1854년에는 일왕이 임시로 거쳐한 ‘임시황궁’으로 사용되었다. 쇼고인은 메이지왕이 궁궐을 나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쇼고인마치에서 성사가 어디에 거주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쇼고인마치 일대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사는 이곳 쇼고인마치의 건물을 빌려 머무르면서 동시에 유학생들이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쇼고인마치에서 고노에중학교까지는 두세 블록 밖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사는 이곳에 거주지를 만들어 생활하면서 함께 유학생들이 지낼 수 있도록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조사단은 쇼고인의 문적사원 앞에서 골목길을 따라 고노에중학교까지 걸어보니 시간은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필자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당시 수십명의 유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웃고 떠들면서 등하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조국과 교단의 앞날을 위해 준비하던 유학생들의 강렬한 눈빛이 떠올려 졌다. 당시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던 성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성사는 이곳에서 유학생들을 지원하다 포덕 45년(1904) 6월에 도쿄로 이주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天ケ瀨橋]와 윤동주 시비 9일 아침은 화창했다. 조사단은 교토의 우지시에 위치한 시인 윤동주의 유적을 찾았다. 조사단의 김동우 작가는 이곳을 꼭 가보아야 한다고 건의해 일정에 포함되었다. 윤동주는 귀국을 결심하고 도시샤 대학 친우들과 송별회를 위해 이곳으로 왔다. 윤동주는 이곳 강변에서 불을 지펴 친구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당시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윤동주와 친구들이 찍은 사진이 친구의 앨범에서 발견되었다. 윤동주는 당시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자 ‘아리랑’을 불러 주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이곳을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포덕 84년(1943) 7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후쿠시마 형무소에서 포덕 86년(1945) 2월 16일 옥사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는 윤동주의 생의 마지막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곳이다. 윤동주가 이곳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것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 ‘시인 윤동주의 기억과 화해의 비’이다. 이 비는 아마가세 구름다리를 건너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약 5분 걸으면 왼쪽 길가에서 서 있다. 이 기억과 화해의 비는 2004년 유엔에서 5월 8~9일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추억과 화해의 時(시)”가 결의된 후, 일본에서 윤동주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시인 윤동주 기념비건립위원회”가 조직되었고, 포덕 158년(2017) 10월 18일에 결실을 맺었다. 이 비에는 “새로운 길”이 새겨져 있다. 새로운 길 - 尹東柱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가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의 유적을 보고 조사단은 마지막 조사를 위해 오사카로 향했다. (계속) 글. 덕암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 대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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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시축 시 준암 박인준 교령님 취임식에 부쳐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타고 꽃비 뿌리며 내려온 선녀가 봄바람을 몰고 오니, 겨우내 얼어붙었던 용담물이 스르르 녹아내리네. 이에 잠자던 용이 기지개를 켜고 날을 준비를 하니, 학발노인[(鶴髮老人- 학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신선 )]이 용마에 오르려 하네! 하늘은 서광(瑞光)을 비추고 산천초목은 우쭐우쭐 춤추며 온갖 새들은 시천주 소리로 울어대니 천지가 진동하네! 용마에 오른 신선이여! 천지와 동서남북, 오대양 육대주를 날아다니며 한울님 말씀을 널리 알리소서! 마른나무에 새싹이 나며, 꽃이 피도록 생기를 불어넣어주시고 심화기화로 창생을 살리소서! 시천주 조화정으로 각자의 마음과 몸을 살리게 하고, 영세불망 만사지로 세상을 건지고 만인을 살리게 하소서! 용마에 오른 신선이시여! 구름이 용을 따르듯[(雲從龍-운종용)]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듯 [(風從虎-풍종호)]성인의 덕화를 베푸소서!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운암 오제운(전북 신태인교구장)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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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대학생단, 일본 성지순례 진행교토의 도시샤 대학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오사카 쓰루하시 역 부근에 있는 종리원 터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뒷편의 세븐일레븐 자리가 종리원 터 천도교 대학생단은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4박 5일 동안 일본 오사카, 교토, 고베 일대에서 성지순례를 진행했다. 이번 성지순례는 지난해 가을에 진행된 국내 성지순례에 이어, 국외 성지를 방문하며 천도교의 역사와 한국의 아픔을 되새기고, 과거를 잊지 않으며 미래를 이어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첫날, 오사카에서 천도교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다 성지순례의 첫날인 2월 13일, 참가자들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천도교의 중요한 유적들을 탐방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오사카 쓰루하시 역 부근에 있는 종리원 터였다. 종리원은 천도교의 사무와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한반도 외의 동포들에게 천도교의 뜻을 전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의암성사께서 일본에 거주하던 숙소를 찾아, 교토와 오사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당시의 흔적을 되새겼다. 오사카 우메다역도 방문지에 포함되어, 의암성사께서 독립운동을 위한 교통 거점으로 사용한 이 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둘째 날, 윤동주 시인 기념비와 이웃 종교와의 만남 둘째 날인 2월 14일, 성지순례 참가자들은 교토의 도시샤 대학을 찾아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를 방문했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그가 다녔던 도시샤 대학은 그를 기리기 위해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후 참가자들은 일본 성공회 유시경 신부님과 간담회를 통해 이웃 종교를 이해하고, 천도교와 성공회 간의 관계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으로는 의암성사께서 일본 체류 초기 거주하셨던 곳의 대략적인 위치인 쇼고인몬제키에 방문하며, 일본에서의 천도교 역사를 돌아보았다. 교토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니시혼간지를 방문했다. 일본 정토진종 본산인 니시혼간지는 일본 불교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로, 일본 불교의 역사와 교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장소다. 참가자들은 사찰 내부를 둘러보며 일본 불교의 신앙과 전통을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천도교와 불교 간의 역사적 연관성을 살펴보며 종교 간의 교류에 대해 생각해 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셋째 날, 일본 문화 체험과 자유시간 셋째 날인 2월 15일은 자유 일정으로, 참가자들은 각 팀으로 나누어 일본의 문화와 음식을 체험했다. 오사카성을 방문하거나 일본 전통 음식을 맛보는 등 일본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저녁에는 일정을 되돌아보며 간담회를 진행하고, 성지순례가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들이 직접 자료를 준비하고 공부하며 이야기를 나누니 머리와 마음에 잘 새겨져, 일방적 강의식 순례보다 뜻깊게 다가온다는 만족감도 있었다. 고베교구에서 시일식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마지막 날, 고베에서의 종교 체험과 지진 메모리얼 방문 마지막 공식 일정은 2월 16일 고베에서 진행되었다. 고베 교구는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한 재일동포들이 자진 성금을 모아 설립한 천도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그곳에서 시일식을 봉행했다. 또한 고베항과 고베 지진 메모리얼 파크를 방문하여, 1995년 발생한 고베 대지진의 피해와 그 당시 한국인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새겼다. 마지막 일정으로 이쿠타 신사를 방문하여 일본 전통 종교 체험을 통해 대학생단 간의 소중한 인연을 기원하며 성지순례를 마무리했다. 성지순례의 의미와 참가자들이 느낀 점 성지순례를 마친 참가자들은 이번 여행을 통해 천도교의 역사와 신앙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신앙 생활을 다짐했다. 참가자들는 성지순례 이후, "성지에 담긴 이야기와 정보를 듣고, 천도교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며, "이번 성지순례를 계기로 스스로 신앙하고, 탐구하며 전진해 나갈 것"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이번 성지순례는 천도교의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하며 신앙을 새롭게 다지기 위한 중요한 시간이었으며, 대학생단은 앞으로도 국내외 성지를 순례하며 천도교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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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단 임기를 마치며모시고 안녕하십니까 포덕 165년 제44대 대학생단 천도교청년회 대학생단 단장이었던 조영은입니다. 단장직을 수행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청년회 활동을 하게 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2020년 제가 대학에 입학하고 천도교 대학생단 활동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천도교를 시작한 건 이미 천도교를 하고 계신 이모와 이모부의 영향으로 봉황각 어린이 캠프에 참여했던 계기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또래 동덕들과 함께 저희들의 눈 높이에 맞춰서 활동을 진행해 주셨던 기억이 아직까지 나는 것 같습니다. 이 계기를 시작으로 매년 여름, 겨울마다 한울 나눔터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학생단으로 편입된 것 같습니다. 어린이날 행사에 대학생단이 보조로 진행하고 있다. 사회문화관과 협업해 종로구 주민센터에서 봉사활동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부산 대동교구에서 대학생단과 청년회가 개벽제 후 나인협 선생 동상을 참례하였다. 신입생이 되고 대학생단 활동도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 19의 여파로 학교는 물론 대학생단 활동도 무기한 연기되는 것을 느끼며 많은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42대 단장이셨던 민경 동덕과의 연락을 시작으로 작년에는 43대 대학생단의 부단장을 맡아 많은 선후배 동덕들과 자리를 가지며 천도교 대학생단만의 색깔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를 계기로 44대 대학생단 단장이 되어 많이 부족하지만 1년간의 시간 동안 더 많은 청소년 동덕들이 대학생단이 될 수 있게, 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덕들을 모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따스한 봄날 한강교구에서 진행한 정기모임부터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대학생단과 청년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치렀던 어린이날, 경기도 지역에 거주하는 천도교 어린이 동덕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경기한울학교, 여러 종교 교류 캠프 등 다양한 경험들과 전국의 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작년은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기념해 많은 기념식과 기도식에 대학생단이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현도기념일과 인일기념일에 합창과 공연을 하고 사회문화관에서 진행했던 수운대신사 피체노정과 봉사활동에도 참여해 단순히 정기모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사회참여 활동도 함께 할 수 있어서 뜻깊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1년간의 활동을 돌아볼 수 있었던 대학생단 송년회와 청년회원들과 함께 진행한 부산에서의 개벽제까지 정말 쉼 없이 많은 활동들을 진행했던 날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값지고 소중했습니다. 단장이라는 직책을 맡으면서 때로는 책임감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고, 생각처럼 되지 않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했던 동덕들과 선배, 후배 동덕들이 있었기에 이 모든 순간이 더욱 의미 있었습니다. 함께 웃고, 고민하고, 때로는 어려움을 나누며 보낸 시간들이 앞으로도 제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따뜻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단장에서 물러나지만, 청년회원으로서, 대학생단을 졸업한 선배로서 후배분들이 성장하고 더 많은 교인들로 채워지는 대학생단을 기대하며 뒤에서 열심히 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대학생단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 힘이 되어드릴 수 있는 선배가 되겠습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신 모든 동덕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포덕 166년 3월 27일 44대 대학생단 단장 조영은 심고 사진 조영은(본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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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떡처럼 얘기해도 찰떡처럼 알아듣기언젠가 한 미국인 교수가 '또라이'에 대해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 인생에서 기쁜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 한마디로 재수 없는 사람들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종종 우리 곁에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위축되고 분노하며 기분을 망쳐야 할까? 최근 나는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수련 41일째입니다"라고 말했다. 나 자신이 너무 기특하고 대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런 거 아무리 많이 해도 다 소용없다." 순간 '이런 또라이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함께 기뻐해 주고 격려해 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찬물을 끼얹다니. 처음에는 기분이 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분은 아마도 수련을 많이 하고도 인격적으로 훌륭하지 못한 사람을 겪어 본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단순히 부러워서 한 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말을 원래 개떡같이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상처받고 위축될 것인가? 아니다. 나는 상처받고 위축되고, 휘둘리는 대신, 내 내면을 들여다 보고 내 한울님 지키고, 유쾌하게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보면 또라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지 않는가? 적어도 '나는 저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누군가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즐겁게 한 걸음 더 나아가자. 글, 둥지가 되어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