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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환식 동덕, 부암 정덕재 도정 전교로 대동교구에서 입교대동교구(교구장 성강현)에서 정덕재 도정의 전교로 신입교인 최환식 동덕이 입교하였다. 최환식 동덕은 수운대신사의 후손으로, 그 뿌리를 잇는 인연 속에서 교문에 들어서게 되었다. 평소 고대사 연구를 비롯해 농학과 도시농업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으며, 숲을 통한 치유 프로그램과 명상 수련 등 생명과 치유를 중심으로 한 실천에도 힘써왔다. 이번 입교는 개인의 신앙 입문을 넘어, 자연과 인간, 생명의 조화를 추구해온 삶의 방향이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과 맞닿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동교구는 앞으로도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교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교화의 폭을 넓혀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대동교구 풍물단 결성, 3·1절 첫 울림대동교구(교구장 성강현) 풍물단이 지난 2월 12일 첫 연습을 시작으로, 3·1절 기념행사에서 첫 공연을 선보이며 힘찬 출발을 알렸다. 이번 공연은 교구 내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교인들이 함께 준비한 것으로, 풍물의 신명과 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한울님 모심의 기쁨과 ‘대동세상’의 의미를 풀어내는 자리로 마련됐다. 풍물 가락 속에는 교구 이름인 ‘대동’이 지향하는 세상, 곧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삶의 가치가 고스란히 담겼다. 풍물단은 이선연·조훈철 부부 동덕이 중심이 되어 지도하고 있으며, 두 사람은 재능기부 형식으로 참여해 “교구 안에 신명을 일으켜 보자”는 뜻으로 활동을 이끌고 있다. 특히 이선연 동덕(울림 단장)은 풍물을 통해 교인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어우러지는 장을 만들고자 힘쓰고 있다. 첫 공연 이후 교인들의 호응도 뜨거웠다. 풍물단의 흥겨운 장단과 어우러진 신명은 현장의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리며, 참여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했다. 대동교구 풍물단은 앞으로 매주 목요일 정기 연습과 함께 시일에도 연습을 이어가며 활동을 지속할 계획이다. 교구 내 신명과 활력을 불어넣는 문화 활동으로 자리매김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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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박인준 교령, KCRP 대표회장으로 추대박인준 교령이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제16대 대표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한국종교인평화회의는 3월 30일 오전 공동회장단 회의를 열고 이같이 결정하였다. 박인준 교령 “뜻밖에도 막중한 자리에 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한울님의 뜻이라 생각하면서 그동안 KCRP가 추진해 온 종교 간 협력과 연대의 전통을 이어 최선의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겠다.”면서 ACRP, WCRP 등 국제 협력기구와의 연대 의지를 밝혔다. 이어 "전 세계적으로 전쟁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인류 평화를 위한 종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강조하며, 특히 최근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남북 관계 개선에 종교인이 앞장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뜻을 맑혔다. 나아가 전쟁 극복과 난민 문제 등 인류 공동 과제 해결에 있어 한국 종교계가 앞장설 수 있는 기틀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재임중에 추진할 중점 사업 방향으로 “남북의 종교간 교류 활성화와 더불어 올해 12월에 개최되는 ACRP, WCRP 행사를 잘 준비하겠다."고 밝히고, 이어 "2027년 한국 천주교가 주최하는 세계천주교청년대회는 한국 종교계의 큰 잔치라 여기고 원만히 치러질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할" 뜻을 피력했다. 그 밖에 "한국 사회의 현안인 생명 존중과 자살 예방 등의 문제에 7대 종단이 앞장서서 종교인의 역할을 다하겠다”면서, 구체적인 사업은 추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우리 사회 중요 현안인 자살 문제, 저출산 문제에 대해서도 종교계가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정부와 협력하여 대응 방안을 마련해 나가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는 천도교를 비롯하여 개신교․불교․원불교․유교․천주교․한국민족종교협의회 등 7개 종교로 구성된 한국 종교계의 공식적인 연대협력기구로서 포덕 127년(1986) 결성되어 한반도 평화와 사회 통합, 이웃종교 간의 상호 이해와 존중, 협력, 인류 공동의 가치 실현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또한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등의 세계적 기구와도 소통하는 한국 내의 대표 기구이다. 박인준 대표회장의 임기는 3월 30일부터 2028년 2월 정기총회까지 2년이다. -
“100년 잡지 『신인간』”, 창간 100주년 기념식 개최『신인간』이 창간 10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신인간사는 『신인간』 창간 및 신인간사 창립 100주년 기념식을 오는 4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개최하고, 3시부터는 기념전시를 천도교중앙총부 본관 다목적홀(B1)에서 진행한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교단과 사회 각계 인사들이 함께 참석해 국내 최장수 잡지 중 하나인 『신인간』 100주년의 의의를 축하할 예정이다. 특히 이번 기념식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신인간』 잡지 원본 소장자(故 인암 박찬표 선생의 후손 박차귀)가 이를 중앙총부에 기증하는 기증식이 거행된다. 1926년 4월 1일 창간된 『신인간』은 지난 100년 동안 동학 천도교의 사상과 신앙, 시대의 흐름을 기록해 온 매체다. 『신인간』의 창간 주역은 이돈화, 김기전, 방정환, 박달성 등 일제강점기 발행된 최고의 종합잡지 『개벽』의 편집진이 그대로 참여하였다. 창간 정신 또한 『개벽』과 마찬가지로 “낡은 시대적 유물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시대와 문명을 개척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방하였다. 또한 창간 초기부터 종교적 메시지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문화·사상 전반을 아우르며 다양한 필진과 함께 시대적 의제를 선도해 왔다. 아울러 일제강점기 이후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한국 사회의 변화와 고민을 담아온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동학혁명에서 3·1운동, 6·10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족운동사의 흐름 위에서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의 이념과 민족 자주와 통일 등의 민족적 과제, 만물 동등의 미래적 담론을 지속적으로 제시해 왔다. 한편 『신인간』은 100주년을 맞이하지만, 100주년 기념호로 통권 904호를 발행한다. 100×12=1,200호 중 296호가 결실(缺失)된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전쟁과 전후 복구 시기의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 『신인간』이 격월간, 반년간, 휴간 등을 겪으며 발생한 것이다. 『신인간』의 발행 역사에 지난 100년 역사의 고난의 흔적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셈이다. 윤태원 신인간사 대표는 “지난 100년이 선배들의 헌신과 정성으로 이어져 온 시간이었다면, 이번 100주년은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출발점”이라며 “『신인간』이 축적해 온 역사와 정신을 바탕으로 시대와 호흡하는 매체로서 역할을 더욱 확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기록을 넘어 기억과 실천으로 이어지는 매체로 발전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이번 100주년을 계기로 다양한 기념사업도 함께 추진된다. 『신인간』 창간 100주년 기념식은 2026년 4월 1일 오후 2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개최되며, 이어 같은 날 오후 3시에는 수운회관 지하 1층 다목적홀에서 기념전시 개막식이 열리고, 전시는 4월 1일부터 4월 7일까지 이어진다. 전시는 『신인간』의 창간호부터 현재까지의 주요 자료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잡지에 실린 주요 글과 시대별 특징을 보여주는 기록물, 관련 사진과 아카이브 자료 등을 통해 『신인간』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준비된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은 한 세기 동안 축적된 사상과 문화, 교단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신인간』 창간호에 발표된 “신인간 선언” 정신을 계승하여, “제2의 신인간 선언”도 추진된다. ‘신인간 선언 2.0’으로 명명된 100주년 기념 ‘신인간 선언’은 이 시대가 직면한 국가사회의 과제와 나아가 인류사적, 전 지구적 과제에 대한 ‘동학 천도교’의 시대인식을 토대로 우리가 개척해 나가야 할 새로운 미래상에 대한 천도교의 비전을 담아내게 된다. “신인간 선언 2.0 선언식”은 상반기 중 개최될 예정이다. 또 기념 학술대회를 통해 『신인간』의 역사적 의미와 사상적 가치를 학문적으로 조명하고, 웹진 『신인간』을 새롭게 개통하여 디지털 기반의 소통을 강화할 계획이다. 그 밖에 『신인간』 창간호 복각본 발행, 목차집(1-904호) 발간, DB 구축 사업을 통해 그동안 축적된 방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활용할 기반을 마련한다. 또 『신인간사』의 미래 비전을 밝히는 “신인간사 비전 선언”이 채택된다. 비전 선언에서는 『신인간』을 ‘종이잡지’를 넘어 온라인 잡지로 확장하고, 100년 동안의 데이터베이스를 천도교단 및 사회적인 ‘공적 자산’으로 제공하는 프로젝트의 출발을 선언한다. 아울러 「신인간 선언 2」 선언식과 심포지엄을 통해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창간호 복각 발간과 『신인간 백년사』 발간을 통해 역사적 기록을 재정리하는 작업도 병행된다. 이러한 사업들은 『신인간』의 유산을 보존하는 동시에 미래 세대와의 연결을 강화하기 위한 기반으로 추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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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협회–차상찬기념사업회 업무협약 체결(사)한국잡지협회(회장 백동민)는 3월 27일 서울 영등포구 잡지회관에서 (사)차상찬기념사업회(이사장 정현숙)와 잡지의 문화적 가치 확산과 학술 연구 발전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을 통해 양 기관은 △잡지 자료 및 정보 교류 △잡지 연구 및 출판·아카이브 구축 공동 추진 △학술대회·워크숍·전시회 공동 개최 △국립 한국 잡지 박물관 건립 추진 및 홍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차상찬기념사업회는 2024년 1월 출범한 사단법인으로, 차상찬의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차상찬은 개벽사의 대표로서 『개벽』을 중심으로 한 잡지 운동을 이끌며,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 속에서도 『별건곤』 『혜성』 『제일선』 『어린이』 등 다양한 잡지 발간을 주도한 언론인이자 민족문화운동가이다. 1920년 창간된 『개벽』은 종교 매체의 범주를 넘어 사상·문화·문학을 아우르는 종합지로 자리 잡았다. 특히 개벽사를 이끈 차상찬은 다양한 필진을 결집하고 안정적인 원고료 지급 체계를 마련함으로써 잡지의 대중성과 시대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개벽』은 정치·경제·역사 등 폭넓은 분야를 다루며 근대적 지식과 민족의식을 확산시키는 문화 플랫폼으로 기능했다. 이 같은 흐름은 1926년 『개벽』 폐간 이후 같은 해 창간된 『신인간』으로 이어졌다. 『신인간』은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며 근현대 한국 사회의 변화를 기록해 온 매체로, 『개벽』이 구축한 사상적·문화적 기반 위에서 출발한 계승의 결과로 평가된다. 이날 협약식에는 양 기관 주요 관계자들이 참석했으며, 협약식 이후 시설 견학이 진행됐다. 이번 협약은 『개벽』을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 잡지 문화의 흐름과 그 중심에 있었던 개벽사 대표 차상찬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이를 연구와 아카이브 구축으로 확장해 나가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하고 있다. -
시 해설 [손수건-문덕수]손수건 -문덕수 누가 떨어뜨렸을까 구겨진 손수건 밤의 길바닥에 붙어 있다 지금은 지옥까지 잠든 시간 손수건이 눈을 뜬다 금시 한 마리 새로 날아갈 듯이 금시 한 마리 벌레로 날아갈 듯이 발딱 발딱 살아나는 슬픔 * 문덕수 - 청마 유치환 시인의 추천(1955)으로 문단에 등단 / 시집 : 『선 · 공간』(1966), 『본적지』(1968, 김종삼 · 김광림 3인 연대시집) / 『새벽바다』(1975), 『꽃잎세기』(2002) 등./ - 저서 : 시문학사 연구 총서 · 7 오늘의 시작법 / - 수상 : 서울시문화상, 예술원상 등. 「손수건」 시평(감상) 문덕수님의 「손수건」은 단 여덟 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은유와 상징은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길바닥에 구겨져 버려진 손수건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보살핌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며 존중받지 못한 존재를 상징한다. 그것은 사회적 주변부로 밀려난 인간의 처지와 겹쳐지며, 시적 화자의 내면을 드러낸다. 특히 이 시는 ‘지옥까지 잠든 시간’이라는 극한적 상황 속에서 손수건이 눈을 뜨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는 버려진 존재가 비로소 자신의 슬픔을 자각하는 순간이며, 그 슬픔은 생명력을 얻어 새나 벌레처럼 날아 오늘 듯 살아난다. ‘벌떡벌떡 살아나는 슬픔’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비애를 넘어, 슬픔이 역설적으로 생명과 운동성을 획득하는 역동적 장면을 형성한다. 따라서 「손수건」은 버려진 사물의 이미지 속에 인간 존재의 고독과 소외를 투영하면서도 그 절망의 바닥에서 오히려 슬픔을 통해 살아남는 힘을 발견하는 시다. 짧지만 강렬한 은유와 상징의 결합은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며, 문덕수님의 시 세계의 응축된 미학을 보여준다. 필자:오제운 (문학박사/ 신태인교구장 /부안문인협회 회원, 동귀일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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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날의 고민『홀로 피어 꽃이 되는 사람』 천도교신문에서는 시인이자 숲 해설가인 이시백 동덕의 생활 명상 글과 라명재 송탄교구장이 엄선한 동학 경전 구절을 함께 엮어,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동학의 지혜를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이 일상의 삶 속에서 꽃피우는 동학의 길을 함께 사유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떠나는 날의 고민 구름은 닮은 씨앗이 날아오를 준비를 하네요. 들길 주변에 있는 풀, 박주가리 그 열매주머니가 열리고 있습니다. 생명 탄생의 시작입니다. 촉촉한 기운이 사라지고 물기 마르자 씨방의 문이 열리며 우주와 교신을 시작합니다. 화비자개춘풍래 죽리휘소추월거 花扉自開春渢來 竹籬輝疎秋月去 <東經大全 : 영소> 박주가리는 잎이나 줄기에서 하얀 유액이 나와요. 매우 쓴 맛이라 곤충들이 싫어합니다. 그런데 왕나비애벌레는 이 잎을 먹는데 나중에 독을 품었다가 어른벌레가 되면 자신을 보호하는데 사용하지요. 박주가리 씨앗을 보며 나는 무얼 준비하고 떠난 준비를 해두었는지 나를 돌아봅니다. -
서택순가 - 「대인접물」 ‘베 짜는 며느리’ 설법상주 앞재 전성촌으로 동학도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늘어나자, 다시 관의 지목을 받게 되었다. 이에 해월 신사는 보은 장내리(帳內里)로 그 거처를 옮겨갔다. 장내리에 머무는 동안 전주, 진천 등지로 다니며 순회를 하였다. 어느 날 진천 금성동(金城洞)을 다녀오다가 청주 북이 면 금암리 서택순이라는 제자의 집에 들러, 훗날 ‘베 짜는 며느리’라고 이름 붙인, 유명한 일화를 남긴 설법을 하신다. 을유년(乙酉年, 1885년) 五月에 神師ㅣ 報恩 帳內에 移接하시다. 時에 神師ㅣ 淸州郡 大周里 徐宅淳家를 過하시다가 織布聲을 聞하시고 曰 「此는 天主織布라」 하시다. 을유년 5월에 신사가 보은 장내리로 옮겨갔다. 이때에 신사가 청주군 대주리 서택순의 집을 지나다가 베를 짜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이는 한울님이 베를 짜는 것이다.” 하시다. - 『천도교회사 초고』 余過淸州徐 淳家 聞其子婦織布之聲 問徐君曰 「彼誰之織布之聲耶」 徐君對曰「 生之子婦織布也」 又問曰 「君之子婦織布 眞是君之子婦織布耶」 徐君不卞吾言矣 何獨徐君耶 道家人來 勿人來言 天主降臨言 내가 청주를 지나다가 서택순의 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묻기를 「저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하니, 서군이 대답하기를 「제 며느리가 베를 짭니다」 하는지라, 내가 또 묻기를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인가」 하니, 서군이 나의 말을 분간치 못하더라. 어찌 서군뿐이랴.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 말하라. - 『해월신사 법설』 「대인접물 내 일직 淸州 徐宅淳의 집에 갔더니 그 子婦 織布의 聲을 듣고 徐君에게 무르되 君의 子婦가 織布 하는가 天主 織布하는가 함에 徐君이 나의 말을 不卞하였다. 어찌 徐君뿐이리오. - 『동학사』 제2장(第二章) 해월 신사께서 청주 대주리(大周里)에 있는 제자 서택순의 집에 들렀을 때의 일화이다. 지금도 대주리 서택순이 살던 집 인근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후손들 역시 130년 전 해월 신사께서 다녀가시며 남긴 그 일화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날, 후손이신 할머니 한 분이 집에 계셨는데, 그 할머니께서 농담으로 “만약 그때 해월 신사께서 ‘저 베를 누가 짜는가’라고 물었을 때 우리 시할아버지께서 ‘며느리’라고 하지 말고 ‘한울님’이라고 대답을 했으면 좋았지 않았겠냐.”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 옛날 당신의 할머니가 베틀을 돌려 실을 짜는 소리를 듣고 해월 신사께서 가르침을 펼치셨던 것을 오늘날에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며느리’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에서 조선 사회의 대표적인 여성의 이름이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사회에서 며느리는 이중의 억압을 받는 존재였다. 여성이라는 신분이 그 하나라면, 집안에서 며느리라는 위치가 다른 하나가 된다. 이러한 여성에게 조선 사회가 권유했던 것은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라야 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라야 하고, 남편을 잃은 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하는 삼종지례(三從之禮)였다. 이는 당시 사회 속에서 하나의 억압이기보다는 여성이 지켜야 하는 미덕이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해월 신사는 과감하게 시아버지가 그 며느리를 한울님 같이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을 폈다. 해월 신사의 가르침은 모든 인간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므로 유교적 지배질서 아래 펼쳐지는 조선 사회의 신분제와 여성을 억압하는 악법을 비판한 수운 대신사의 시천주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또한 해월 신사는 이와 같은 가르침에서 멈추지 않고 부인을 ‘한 집안의 주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問曰 吾道之內 婦人修道 奬勵 是何故也 神師曰 婦人家之主也 爲飮食 製衣服 育嬰兒 待賓奉 祀之役 婦人勘當矣 主婦若無誠而俱食則 天必不感應 無誠而育兒則 兒必不充實 婦人修道 吾道之大本也 묻기를 “우리 도 안에서 부인수도를 장려하는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신사 대답하시기를 “부인은 한 집안의 주인이니라.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짓고, 아이를 기르고, 손님을 대접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을 부인이 감당하니, 주부가 만일 정성 없이 음식을 갖추면 한울님이 반드시 감응치 아니하는 것이요, 정성 없이 아이를 기르면 아이가 반드시 충실치 못하나니, 부인수도는 우리 도의 근본이니라.” - 『해월신사 법설』 「부인수도」 해월 신사께서 부인수도를 장려하자, 제자들이 그 연고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이와 같은 물음에 해월 신사는 “부인은 한 집안의 주인이니라.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짓고, 아이를 기르고, 손님을 대접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들을 부인이 감당한다.” 그러니 이렇듯 중요한 모든 일에 정성을 들여야 하므로 수도를 장려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다시 말해서, 여성이 바로 그 집안의 주인이라는 말씀이다. 해월 신사의 이 같은 말씀은 일부 급진적인 여성주의자들이 말하는 여성에 대한 억압의 기제가 아니고, ‘여성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한 것이다.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짓고, 손님을 대접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 그 자체를 여성이 해야 하는 ‘일’로 규정지어 여성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 자체가 성스러운 것’이라는 점에 해월 신사의 초점이 있다. 서택순이라는 제자에게 베를 짜는 며느리를 ‘한울님’이라 부르게 하고, ‘베를 짜는 일’을 ‘한울님의 일’로 부르게 했다는 것은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짓고, 손님을 대접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이 곧 성스러운 한울님의 일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일’이라는 일상의 노동을 ‘성스러운 일’로 승화하고 한울님 삶의 현실적 현현(顯顯)으로써 매우 소중하고 또한 신성한 것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신성한 일을 하는 ‘며느리’, 곧 ‘여성’ 역시 ‘한울님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해월 신사의 생각이다. 이와 같은 해월 신사의 생각이 베 짜는 며느리를 그 시아버지인 서택순으로 하여금 ‘한울님’으로 불러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베 짜는 한울님’에는 해월 신사의 모습이, 동학 천도교의 가르침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하겠다. 수암 염상철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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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제21대 이사장에 송기수 선출(사)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는 최근 정기총회를 통해 제21대 이사장으로 송기수 전 사무처장을 선출했다고 23일 밝혔다. 송기수 신임 이사장은 오랜 기간 사무처장을 맡아 기념사업과 학술활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인물이다. 현장 중심의 경험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조직 운영과 사업 실행에서 두루 역량을 인정받아 왔다. 송 이사장은 “정읍은 ‘보국안민’의 깃발 아래 봉건 질서에 맞서고 외세에 항거했던 혁명의 발상지”라며 “선열들이 남긴 인내천의 가치를 오늘의 시대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민주·평화·상생의 정신이 사회 갈등을 풀어가는 기준이 되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송 이사장은 최덕수열사추모사업회 회장과 정읍시민연대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지역사회에서 꾸준한 활동을 이어왔다. 1967년 12월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로 출범한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는 올해로 59년째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참여자 명예회복과 국가기념일 제정에 기여했으며, 기념제와 학술대회, 청소년 역사캠프 등을 통해 혁명 정신의 계승을 꾸준히 실천해오고 있다. -
도올 김용옥 초청강연회 개최… 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 건립 본격화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 건립을 위한 도올 김용옥 선생 초청강연회가 오는 4월 18일 오후 2시 천안박물관 강당에서 열린다. 이번 강연회는 동학농민혁명천안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건립추진위원회와 충남동학농민혁명단체협의회가 공동 주관하는 행사로, ‘동학사상과 혁명의 도시, 내 고향 천안에 동학도서관을 세웁시다!’를 주제로 진행된다. 특히 이번 행사는 2021년 봄 목천판 『동경대전』 진본이 발굴된 이후, 천안을 동학사상의 중심지로 재조명하고 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 건립을 추진해온 노력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추진위원회는 동학 정신을 계승하고 역사적 가치를 확산하기 위한 핵심 사업으로 도서관 건립을 추진해왔다. 이용길 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건립추진위원장은 “목천판 『동경대전』 진본 발굴을 계기로 천안을 ‘사상과 혁명의 도시’로 세우고자 하는 뜻을 모아왔다”며 “이번 강연회를 통해 도서관 건립의 필요성과 의미를 널리 공유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강연회 당일에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연과 함께 용담검무 공연(장효선, 남원시 무형문화유산 보유자)이 진행될 예정이며, 참석자들에게는 『목천판 동경대전 연구』가 1권씩 제공된다. 또한 『목천판 동경대전』 진본은 천안박물관에 상시 전시되어 있어 관람이 가능하다. 동학농민혁명천안기념사업회는 “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 건립이라는 뜻깊은 사업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며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석을 요청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와 충청남도, 천안시가 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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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손수건-문덕수]손수건 -문덕수 누가 떨어뜨렸을까 구겨진 손수건 밤의 길바닥에 붙어 있다 지금은 지옥까지 잠든 시간 손수건이 눈을 뜬다 금시 한 마리 새로 날아갈 듯이 금시 한 마리 벌레로 날아갈 듯이 발딱 발딱 살아나는 슬픔 * 문덕수 - 청마 유치환 시인의 추천(1955)으로 문단에 등단 / 시집 : 『선 · 공간』(1966), 『본적지』(1968, 김종삼 · 김광림 3인 연대시집) / 『새벽바다』(1975), 『꽃잎세기』(2002) 등./ - 저서 : 시문학사 연구 총서 · 7 오늘의 시작법 / - 수상 : 서울시문화상, 예술원상 등. 「손수건」 시평(감상) 문덕수님의 「손수건」은 단 여덟 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은유와 상징은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길바닥에 구겨져 버려진 손수건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보살핌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며 존중받지 못한 존재를 상징한다. 그것은 사회적 주변부로 밀려난 인간의 처지와 겹쳐지며, 시적 화자의 내면을 드러낸다. 특히 이 시는 ‘지옥까지 잠든 시간’이라는 극한적 상황 속에서 손수건이 눈을 뜨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는 버려진 존재가 비로소 자신의 슬픔을 자각하는 순간이며, 그 슬픔은 생명력을 얻어 새나 벌레처럼 날아 오늘 듯 살아난다. ‘벌떡벌떡 살아나는 슬픔’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비애를 넘어, 슬픔이 역설적으로 생명과 운동성을 획득하는 역동적 장면을 형성한다. 따라서 「손수건」은 버려진 사물의 이미지 속에 인간 존재의 고독과 소외를 투영하면서도 그 절망의 바닥에서 오히려 슬픔을 통해 살아남는 힘을 발견하는 시다. 짧지만 강렬한 은유와 상징의 결합은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며, 문덕수님의 시 세계의 응축된 미학을 보여준다. 필자:오제운 (문학박사/ 신태인교구장 /부안문인협회 회원, 동귀일체 고문) -
서택순가 - 「대인접물」 ‘베 짜는 며느리’ 설법상주 앞재 전성촌으로 동학도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늘어나자, 다시 관의 지목을 받게 되었다. 이에 해월 신사는 보은 장내리(帳內里)로 그 거처를 옮겨갔다. 장내리에 머무는 동안 전주, 진천 등지로 다니며 순회를 하였다. 어느 날 진천 금성동(金城洞)을 다녀오다가 청주 북이 면 금암리 서택순이라는 제자의 집에 들러, 훗날 ‘베 짜는 며느리’라고 이름 붙인, 유명한 일화를 남긴 설법을 하신다. 을유년(乙酉年, 1885년) 五月에 神師ㅣ 報恩 帳內에 移接하시다. 時에 神師ㅣ 淸州郡 大周里 徐宅淳家를 過하시다가 織布聲을 聞하시고 曰 「此는 天主織布라」 하시다. 을유년 5월에 신사가 보은 장내리로 옮겨갔다. 이때에 신사가 청주군 대주리 서택순의 집을 지나다가 베를 짜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이는 한울님이 베를 짜는 것이다.” 하시다. - 『천도교회사 초고』 余過淸州徐 淳家 聞其子婦織布之聲 問徐君曰 「彼誰之織布之聲耶」 徐君對曰「 生之子婦織布也」 又問曰 「君之子婦織布 眞是君之子婦織布耶」 徐君不卞吾言矣 何獨徐君耶 道家人來 勿人來言 天主降臨言 내가 청주를 지나다가 서택순의 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묻기를 「저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하니, 서군이 대답하기를 「제 며느리가 베를 짭니다」 하는지라, 내가 또 묻기를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인가」 하니, 서군이 나의 말을 분간치 못하더라. 어찌 서군뿐이랴.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 말하라. - 『해월신사 법설』 「대인접물 내 일직 淸州 徐宅淳의 집에 갔더니 그 子婦 織布의 聲을 듣고 徐君에게 무르되 君의 子婦가 織布 하는가 天主 織布하는가 함에 徐君이 나의 말을 不卞하였다. 어찌 徐君뿐이리오. - 『동학사』 제2장(第二章) 해월 신사께서 청주 대주리(大周里)에 있는 제자 서택순의 집에 들렀을 때의 일화이다. 지금도 대주리 서택순이 살던 집 인근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후손들 역시 130년 전 해월 신사께서 다녀가시며 남긴 그 일화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날, 후손이신 할머니 한 분이 집에 계셨는데, 그 할머니께서 농담으로 “만약 그때 해월 신사께서 ‘저 베를 누가 짜는가’라고 물었을 때 우리 시할아버지께서 ‘며느리’라고 하지 말고 ‘한울님’이라고 대답을 했으면 좋았지 않았겠냐.”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 옛날 당신의 할머니가 베틀을 돌려 실을 짜는 소리를 듣고 해월 신사께서 가르침을 펼치셨던 것을 오늘날에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며느리’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에서 조선 사회의 대표적인 여성의 이름이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사회에서 며느리는 이중의 억압을 받는 존재였다. 여성이라는 신분이 그 하나라면, 집안에서 며느리라는 위치가 다른 하나가 된다. 이러한 여성에게 조선 사회가 권유했던 것은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라야 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라야 하고, 남편을 잃은 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하는 삼종지례(三從之禮)였다. 이는 당시 사회 속에서 하나의 억압이기보다는 여성이 지켜야 하는 미덕이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해월 신사는 과감하게 시아버지가 그 며느리를 한울님 같이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을 폈다. 해월 신사의 가르침은 모든 인간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므로 유교적 지배질서 아래 펼쳐지는 조선 사회의 신분제와 여성을 억압하는 악법을 비판한 수운 대신사의 시천주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또한 해월 신사는 이와 같은 가르침에서 멈추지 않고 부인을 ‘한 집안의 주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한 답사단이 서택순의 손주 며느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問曰 吾道之內 婦人修道 奬勵 是何故也 神師曰 婦人家之主也 爲飮食 製衣服 育嬰兒 待賓奉 祀之役 婦人勘當矣 主婦若無誠而俱食則 天必不感應 無誠而育兒則 兒必不充實 婦人修道 吾道之大本也 묻기를 “우리 도 안에서 부인수도를 장려하는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신사 대답하시기를 “부인은 한 집안의 주인이니라.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짓고, 아이를 기르고, 손님을 대접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을 부인이 감당하니, 주부가 만일 정성 없이 음식을 갖추면 한울님이 반드시 감응치 아니하는 것이요, 정성 없이 아이를 기르면 아이가 반드시 충실치 못하나니, 부인수도는 우리 도의 근본이니라.” - 『해월신사 법설』 「부인수도」 서택순의 후손이 거주하는 집 해월 신사께서 부인수도를 장려하자, 제자들이 그 연고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이와 같은 물음에 해월 신사는 “부인은 한 집안의 주인이니라.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짓고, 아이를 기르고, 손님을 대접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들을 부인이 감당한다.” 그러니 이렇듯 중요한 모든 일에 정성을 들여야 하므로 수도를 장려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다시 말해서, 여성이 바로 그 집안의 주인이라는 말씀이다. 해월 신사의 이 같은 말씀은 일부 급진적인 여성주의자들이 말하는 여성에 대한 억압의 기제가 아니고, ‘여성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한 것이다.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짓고, 손님을 대접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 그 자체를 여성이 해야 하는 ‘일’로 규정지어 여성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 자체가 성스러운 것’이라는 점에 해월 신사의 초점이 있다. 서택순이라는 제자에게 베를 짜는 며느리를 ‘한울님’이라 부르게 하고, ‘베를 짜는 일’을 ‘한울님의 일’로 부르게 했다는 것은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짓고, 손님을 대접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이 곧 성스러운 한울님의 일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일’이라는 일상의 노동을 ‘성스러운 일’로 승화하고 한울님 삶의 현실적 현현(顯顯)으로써 매우 소중하고 또한 신성한 것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신성한 일을 하는 ‘며느리’, 곧 ‘여성’ 역시 ‘한울님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해월 신사의 생각이다. 이와 같은 해월 신사의 생각이 베 짜는 며느리를 그 시아버지인 서택순으로 하여금 ‘한울님’으로 불러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베 짜는 한울님’에는 해월 신사의 모습이, 동학 천도교의 가르침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하겠다. 서택순의 집이 있던 터 수암 염상철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공주 가섭암, 해월 신사, 49일 기도를 하며 육임제를 구상하다공주 가섭암(迦葉庵)은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말사(末寺)이다. 해월신사께서 가섭암을 찾은 것은 1884년 10월의 일이다. 익산 사자암에서 4개월간의 기도를 마치고, 해월신사는 새로 입도한 신진 도인들을 대동하고 가섭암을 찾아 49일 기도를 봉행한다. 가섭암은 공주군 사곡면 구제리 마가변두에서 개울을 건너 북쪽으로 난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만나는 작은 암자이다. 산세가 묘해서 아래에서는 암자가 보이지를 않는다. 당시 해월신사께서 대동했던 신진 도인들은 손병희(孫秉熙), 박인호(朴寅浩), 송보여(宋甫汝) 등이다. 十月에 神師ㅣ 孫秉熙 朴寅浩 宋甫汝로 더부러 迦葉寺에서 祈禱를 行하시다. 동이십사일에 「天降下民」의 降書를 受하시다. 時에 神師ㅣ 降書의 義를 未解하사 孫秉熙 孫天民을 顧謂하사 曰 葩經은 何書오 鄒聖은 誰오 又曰 書義如何오 하시다. 10월에 신사가 손병희 박인호 송보여로 더불어 가섭사에서 기도를 행하시다. 동이십사일에 「천강하민(天降下民)」의 강서를 받으시다. 때에 신사가 강서의 뜻을 해석하지 못하시어 손천민을 돌아보며 말씀하기를 파경(葩經)은 어느 책인고 추성(鄒聖)은 누구인가 하고 또 말하기를 책의 뜻은 무엇이오 하시다. - 『천도교회사 초고』 가섭암의 본 사찰인 마곡사 안내석 앞에 선 필자 마곡사의 말사인 가섭암 전경 가섭암은 일찍이 해월신사 등 동학과 인연을 지니고 있던 암자였다. 기록에 의하면, 가섭암으로 신진 도인들을 대동하고 들어오기 일 년 전에 해월신사는 이곳에서 인등제를 열기도 했다. 특히 해월신사는 가섭사에서 특별 기도를 하던 중 많은 「강서(降書)」를 받았다고 한다. ‘강서’란 수련의 깊은 경지에 이르러, 한울님 마음과 한마음이 되어, 즉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경지에 들어 한울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한다. 먼저 해월신사는 동학의 주문에 ‘천주(天主)’라는 글자가 있어, 세상 사람들이 동학을 서학으로 지목하는 것을 피하는 묘책의 하나로, 「강서」를 통해 새로이 ‘봉천상제일편심조화정만사지(奉天上帝一片心造化定萬事知)’라는 주문을 짓는다. 즉 동학의 주문에 나오는 ‘시천주(侍天主)’를 대신하여 ‘봉천상제(奉天上 帝)’라는 구절을 쓴 것이다. 동학에서 주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띤다. 전도자(傳道者)가 입도자(入道者)에게 주는 것 은 오직 주문 스물한 자뿐이다. 그러므로 대신사께서도 ‘도의 모든 절차가 이 주문 스물한 자에 담겨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만큼이나 중요한 주문의 문구를 바꿀 만큼, 당시 동학이 서학으로 오해받는 면이 심각했으며, 또 해월신사 스스로 동학을 ‘동학의 본모습’으로 세상에 보이고자 큰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동학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 되는 ‘시천주(侍天主)’를 ‘봉천상제(奉天上帝)’로 바꾼 것이다. ‘시천주’는 말 그대로 ‘한울님이라는 신을 내가 모시고 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에 비하여 ‘봉천상제’란 말은 ‘한울님인 상제를 받든다.’라는 의미이다. 동학의 신의 명칭은 ‘한울님’이다. ‘천주’나 ‘상제’는 한문으로 표기를 해야 하는 경우나 비유 해서 말을 할 경우에만 표기되었던 용어이다. 따라서 ‘천주’와 ‘상제’는 엄밀한 의미에서 동학에서 신봉하는 신의 명칭이 아니다. 따라서 해월신사께서 동학을 천주학으로 오해하는, 그러므로 지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시천주’의 ‘천주’를 ‘봉천상제’의 ‘상제’로 바꾼 것은 다른 큰 의미가 없다. 천주학으로의 오해와 이에 따른 지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 그 이상은 없다고 본다. 가섭암에서 바라본 태화산 전경 時人이 天主이자로써 指目함을 避하야 降書로 呪文을 改作하가 一時權行하시니 呪文은 「奉天上帝一片心造化定萬事知」러라. 그때에 사람들이 천주(天主) 두 글자로 지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강서로 주문을 다시 지으셨다. 한때 대신 행하니, 주문은 ‘奉天上帝一片心造化定萬事知’이다. - 『천도교회사 초고』 가섭암에서 이처럼 주문을 바꾸므로 지목에서 벗어나고자 한 해월신사의 방책은 그 당시 얼마나 심각하게 관으로부터 지목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방증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해월신사는 이와 같은 방책과 함께 보다 조직을 강화하기 위하여 고심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 훗날 동학의 중요한 조직이 된 육임제(六任制)를 구상한다. 육임제는 ‘돈후한 교화의 임무를 지닌 교(敎)’와 ‘엄정한 기강의 임무를 지닌 집(執)’과 ‘올곧은 건의의 임무를 지닌 정(正)’으로 그 임무를 나누었다. 즉 ‘교(敎)’는 ‘교화의 임무’, ‘집(執)’은 ‘기강의 임무’, ‘정(正)’은 ‘건의의 임무’를 각기 맡는다. 또 이러한 세 분야를 다시 나누어 ‘교’를 ‘교장(敎長)과 교수(敎授)’로, ‘집’을 ‘도집(都執)과 집강(執綱)’으로, ‘정’을 ‘대정(大正)과 중정(中正)’으로 나누어, 임무의 ‘정(正)과 부(副)’를 두었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에게 부여된 임무를 세분하고, 논의의 폭을 넓혀 보다 합리적인 운영 방안이 도출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육임제는 늘어난 동학 교도들을 보다 합리적으로 조직화하기 위하여 만든 하나의 제도이다. 특히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지도급 인사들에게 여섯 개의 서로 다른 임무를 부여하므로, 이들 서로 다른 임무를 지닌 지도급의 인사들이 논의하고 토론할 수 있게 하였고, 이러한 토론을 거쳐 보다 폭넓은 논의의 관점을 찾아가고자 하는 제도이다. 是時에 神師ㅣ 「哀此世人之無知兮」의 降書와 「嗟乎嗟乎明者暗之變」의 降書를 受하시다. 神師ㅣ 降話의 敎로써 六任을 定하시니, 敎長은 質以實望厚人으로, 敎授는 誠心修道可以傳受人을, 都執은 有風力明紀綱 知境界人으로, 執綱은 明是非可執紀綱人으로, 大正은 持公平勤厚 人으로, 中正은 能直言剛直人이러라. 이때에 신사가 「이 세상 사람들의 알지 못함을 애석해한다」는 뜻의 강서와 「슬프구나! 슬프구나! 밝음이 어둠으로 변함이여」라는 강서를 받았다. 신사가 강서의 가르침으로 육임을 정하시니, 교장은 그 바탕이 신실하여 덕망이 있고 후덕한 사람으로, 교수는 성실한 마음으로 도를 닦아 도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을, 도집은 풍모가 있고 힘이 밝으며 기강이 있는 학식을 갖춘 사람으로, 집강은 시바를 밝게 하여 기강을 잡을 수 있는 사람으로, 대정은 공정함을 잘 지키고 공평하고 근실한 후덕한 사람으로, 중정은 능히 바른말을 하며 강직한 사람이 되었다. - 『천도교회사 초고』 가섭암 주지스님(우측)과 담소를 나누는 필자(좌측)와 윤석산 교수(중앙 가섭암에서 하산하는 답사단 육임에 관한 「강서」 이외에 해월신사는 가섭암에서 또 다른 「강서」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특히 해월신사는 동학의 마음공부에 중요한 「팔절(八節)」을 「강서」를 통해 해의하였다. 「팔절」 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수운 대신사께서 1863년 11월에 지은 것으로, 명(明), 덕(德), 명(命), 도(道), 성(誠), 경(敬), 외(畏), 심(心) 등의 수련을 위하여 깨닫고 또 터득해야 할 여덟 조목을 풀이한 여덟 구절이다. 이 「팔절」은 ‘전팔절’과 ‘후팔절’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수운 대신사는 팔절을 각처로 보내 그 대구(對句)를 짓게 하여, 어느 만큼이나 교도들의 공부가 깊은가를 알아보기도 했다. 이러한 「팔절」을 해월신사는 「강서」를 통해 다시 해의하고 있다. 明者 暗之變也 日之明兮人見 道之明兮獨知 命者 道之配也 天地命兮莫致 人之命兮難違 德者 盡誠盡敬 行吾之道 人之所歸 德之所在 道者 保若赤子 大慈大悲 修煉成道 一以貫之 誠者 心 之主 事之體 修心行事 非誠無成 敬者 道之主 身之用 修道行身 惟敬從事 畏者 人之所戒 天威 神目 無處無臨 心者 虛靈之器 禍福之源 公私之間 得失之道 홀로 알 뿐이다. 명(明)이라는 것은 어둠의 변함이다. 해의 밝음은 사람들이 볼 수 있지만, 도(道)의 밝음은 오직 명(命)이라는 것은 운(運)과 짝하는 것이다. 하늘의 명은 다하지 못하고, 사람의 명은 어기기 어렵도다. 덕(德)이라는 것은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나의 도를 행하는 것이니, 사람이 돌아갈 바는 덕이 있는 곳이니라. 도(道)라는 것은 갓난아기와 같이 보호하고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성품을 닦고 도를 이루려는 데에 하나로써 꿰뚫는 것을 말한다. 성(誠)이라는 것은 마음의 주인이요, 일의 몸이다. 마음을 닦고 일을 행하는 데에 정성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가 없느니라. 경(敬)이라는 것은 도(道)의 주체요, 몸의 쓰임이다. 도를 닦고 몸으로 행하는 데에 오직 공경으로 일에 따르라. 외(畏)라는 것은 사람이 경계하는 바이다. 한울님 위엄과 신령의 눈이 임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 라. 심(心)이라는 것은 허령(虛靈)의 그릇이요, 화와 복의 근원이다. 공과 사의 사이(公私之間)에 얻고 잃음의 도가 있느니라. - 『천도교서』 이러한 「팔절」의 조목을 해월신사는 다른 법설에서 “명덕명도(明德命道) 네 글자는 한울님과 사람이 형성을 이룬 근본이요, 성경외심(誠敬畏心) 네 글자는 몸체를 이룬 뒤에 다시 갓난 아이의 마음을 회복하는 노정 절차이다(明德命道 四字 天人成形之根本也 誠敬畏心 四者 成岉 後克復赤子心之路程節次也).”라고 설명하고 있다. 해월신사는 스승인 대신사로부터 받은 우주의 원리인 ‘명(明), 덕(德), 명(命), 도(道)’와 한울님으로부터 품부받은 마음인 갓난아이의 마음을 회복하고자 하는 수련에 필요한 ‘성(誠), 경 (敬), 외(畏), 심(心)’을 다시 해의하므로 올바른 수련의 길이 무엇인가를 교도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또한 해월신사는 이와 같은 설법에 이어 열두 간지(干支)를 원용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이 나 문제들을 예견하는 법설 또한 펼쳤다. 鷄鳴而夜分兮 犬吠而人歸 山猪之爭葛兮 倉鼠而得所 齊牛之奔燕兮 楚虎而臨吳 中山兎之管 城兮 沛澤龍之漢 五蛇之無代兮 九馬而當路 닭의 울음으로 밤이 나누어짐이여. 개가 짖음에 사람이 돌아오도다. 산돼지가 칡을 가지고 다툼이여. 창고의 쥐가 있을 곳을 얻었도다. 제나라 소가 연나라로 달아남이여. 초나라 호랑이가 오나라에 임하였도다. 산 중의 토끼가 성을 차지함이여. 패택의 용이 한수로 나오도다. 다섯 뱀의 대가 없음이여. 아홉 말이 길에 올랐도다. - 『천도교서』 가섭암 뒤 터의 샘물 해월신사께서 거주했던 가섭암 뒤 터 당시 의암 성사께서는 해월 신사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밥 짓는 아궁이를 일고여덟 번이나 새로 만들고 솥을 안쳐 밥을 지었다. 이 「강서」의 모두(冒頭)에 해월신사는 ‘슬프다, 세상의 사람들이 앎이 없음이여. 장차 새나 짐승들을 돌아보고 이를 논하도록 하라(哀此世人之無知兮 顧將鳥獸而諭之).’ 하는 유시문(諭示文)을 먼저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해월신사의 「강서」 역시 새로이 입도한 많은 신진인사를 향해 펼친 설법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이들이 새로 입도하여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를 두려운 마음으로 궁금해하므로, 이와 같은 강서를 통해 그 마음을 다독이고 또 고취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월신사는 호남 익산의 사자암과 호서 공주의 가섭암에 들어가 신진 교인들을 수련시키는 한편, 이들에게 새로운 법설로서 신앙심을 고취시켰다. 그럼으로써 이들 신진 교인들의 마음을 더욱 공고히 하였고, 동학에의 심지를 굳건히 하여 한 사람의 건실한 교도로서 설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해월신사의 노력은 지금까지 많은 교인을 확보하지 못했던 호남과 호서 지역에 동학이 뿌리를 내리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가섭암을 방문하였을 때는 막 한여름으로 들어선 무더운 때였다. 키가 큰 스님 한 분이 지키는 가섭암은 공부하기에 참으로 좋은 도량이었다. 스님이 이끄는 대로 뒤로 돌아가니 바위 사이로 샘물이 솟아나고, 그 바위 앞에 가섭암에 딸린 뒷방이 있었다. 해월신사 일행은 이곳 뒷방에 거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 사이에서 나오는 샘물은 맑고 깨끗하여 식수로 사용한다고 한다. 해월신사께서 이곳에 머물 당시에 의암 성사로 하여금 그 추운 겨울에 밥을 지을 아궁이를 여러 번 다시 만들도록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런 스승님의 명을 의암성사는 한 번도 어 기지 않고 아궁이를 일고여덟 번 새로 만들어 솥을 안쳐 밥을 지었다고 한다. 그 장소가 바로 지금 우리 일행이 서 있는 가섭암 뒷방 샘이 솟는 바위 앞이라고 생각하니, 그 옛날 해월신사와 의암성사께서 가르침을 주고받던 모습이 새삼 떠오르는 듯했다. 수암 염상철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익산 사자암- 해월 신사께서 최초로 발을 디딘 호남 지역사자암으로 오르는 계단 사자암 입구- 이곳부터 급경사가 시작된다. 익산 사자암은 미륵산(일명 금마산) 8부 능선에 자리한 암자이다. 이 암자는 김제 모악산 금산사의 말사(末寺)였는데, 지금은 ‘사자사(獅子寺)’라고 이름하며, 암자를 벗어나 독립된 사찰로 되어 있다. 신용리 입구에서 마을의 어귀를 지나 산길을 따라 오르면 가파른 계곡 길을 만난다. 다시 이 지역 특유의 푸르른 대나무와 소나무 숲을 지나 기이한 바위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는 골을 따라 들어가면, 골짜기 막다른 곳에서 미륵산 가슴에 안기듯 자리하고 있는 사자암을 마주친다. 지금은 대나무와 소나무 숲을 이룬 곳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게 길이 닦였고, 이곳에서부터 돌계단이 놓여 있다. 또 돌계단 옆에는 리프트가 설치되어 무거운 짐이 있거나 연세 높은 분일 경우 이 리프트를 타고 올라간다. 사자암이 들어앉은 골짜기의 막바지는 입구를 제외하면 삼면이 대부분 바위벽으로 둘려 있어, 마치 큰 바위산을 깎아내고 그 안에 암자를 들어앉은 듯한 느낌을 준다. 사자암에서 금마저수지를 바라보면 꼭 한반도 모양 같다. 멀리 전주의 주산인 모악산도 바라다보이고, 왕궁리 유적도 가깝게 보인다. ‘사자동천(獅子洞天, 이종림 作)’이란 각자바위는 이곳이 신선들이 사는 별천지 이상향임을 나타낸다. 늙은 큰 느티나무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탁 트인 앞을 조망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명당이고 명산이다. 사자암에서 미륵산 정상을 오르다 보면 삼한 시대의 석축산성인 미륵산성도 있다. 미륵산 정상의 능선 바위 조망 포인트에서는 호남평야의 넓은 들판은 물론 서해까지 눈에 들어온다. 그야말로 시원스러운 천혜의 경관이 펼쳐진다. 마치 “거시기 그저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서 살아보는 것이랑께.”라며 사자후를 토하는 듯하다. 사자암이 들어앉은 골짜기 바로 뒤는 미륵산의 두 봉우리 중 하나인 장군봉의 정상이다. 정상은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기이한 바윗덩어리로 이루어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정상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자암을 품고 있는 골짜기는 능선과 능선이 이어져 연봉(連峰)을 이루고, 그 뒤쪽으로는 드넓은 호남평야가 시야에 가득하게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 마치 산과 산이 연봉을 이루며 달리고 달려와 마침내 이 미륵산에 이르러 멈춘 듯한, 그래서 미륵산은 수많은 연봉을 거느리고 드넓은 평야 앞에 우뚝 서 있는 장군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사자암의 옛모습(위)과 현재 모습(아래) 이곳 익산 미륵산 사자암은 해월 신사께서 갑신년(甲申年, 1884) 6월 지목의 혐의를 피해 4개월간 머물던 곳이다. 『천도교서』나 『천도교회사 초고』, 『천도교월보』 등 동학 천도교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면, 다름과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1884년 6월에 神師ㅣ 指目의 嫌으로 益山郡 獅子庵에 隱居하실새 朴致京의 周旋으로 四朔 동안을 經過하다가 朴致京이 尙州 前城村에 家居三間을 買得하야 神師宅을 移接케 하다. 1884년 8월 신사께서 지목의 혐의로 인하여 익산군 사자암에 은거하실 때 박치경의 주선으로 넉 달 동안을 지내시다가, 박치경이 상주 전성촌에 삼간 오옥을 사들여 신사 댁을 이사하게 했다. - 『천도교회사 초고』 해월 신사께서 익산 사자암에 들어온 것은 대신사께서 신유년(1861)에 남원 은적암에 몸을 의탁하여 머문 이후, 동학의 중요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호남지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이 다음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포덕 2년 신유에 수운 선생께압셔 남원 전주로부터 순가(巡駕)하사 포덕을 위시(爲始)하실 때에의 서광이 본군에 조입하다. 포덕 25년 갑신 춘에 해월 선생께압셔 본군 박치경을 솔하시고 미륵산 사자암에 왕하사 연성기도 후로 교운(敎運)이 차차대진하였다. - 『천도교회월보』 189호 다시 말해서 해월 신사는 경상도 일원과 강원도 산간으로 몸을 피해 내내 숨어 지내시다가 갑신년(1884)에 비로소 호남 지역인 이곳 익산 사자암을 중심으로 포덕의 기반을 넓힌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해월 신사께서 익산에 오게 된 것은 단양 장정리에서 10년간 지내시면서 장정리를 중심으로 교단을 정비하고, 경전 등을 발간하여 연원의 정통성을 더욱 공고히 한 이후의 일이 된다. 즉 익산 사자암은 동학의 교세가 경상도와 강원도, 강원도 접경의 충청도 일원에서 전라도까지더욱 확대되는 중요한 거점 지역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사자사가 있는 미륵산의 바로 앞에는 현재 미륵사 중건이 한창이다. 본래 미륵사 터로 유명했던 곳이고, 백제 때의 대사찰인 미륵사가 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 뒷산 역시 이름이 미륵산이 된 것이다. 미륵사 창건 설화는 백제 무왕(武王)과 관계되어 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武王)이 마(薯)를 캐며 지내던 자신의 비천한 시절을 이겨냈고, 이내 한 나라의 임금으로 등극하게 되었다는 ‘서동(薯童)의 설화’와 함께 그 유서가 깊은 곳이다. 갑신년(1884년)에 해월 신사께서 익산 사자암에서 머문 이후, 동학의 교단은 여러 측면에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한다. 교세를 삼남(三南) 일대로 넓혔고, 나아가 새로 입도한 젊은 인재들을 도(道)의 운용에 많이 기용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렇듯 매우 중요한 자리인 사자암에는 아쉽게도 동학 관련 표지판이 하나도 없다. 해월 신사께서 넉 달이나 머물렀고, 호남 포덕의 발판이 되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호남에서 발발한 동학혁명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표지판 하나쯤은 서 있어 후학들이 역사를 공부하고 유적지를 답사할 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자동천(獅子洞天)’ 글씨가 새겨진 바위 수암 염상철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북간도·연해주의 3·1운동-한인사회의 내적 논리를 중심으로(2)이 글은 「북간도·연해주의 3·1운동 – 한인사회의 내적 논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연구 논문으로, 3·1운동을 국외 한인사회의 시각에서 조명한 글이다. 특히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 한인사회의 역사적 조건과 사상적 흐름 속에서 3·1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본지는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정신을 오늘에 되새기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아 이 논문을 게재한다. 이상근, 『한인 노령이주사 연구』, 서울, 탐구당, 1996, 108쪽. <지난 호에 이어> 원호인은 지주계급을 형성하고, 여호인과 무적자들은 소작이나 임금노동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무적자들은 3만여 명으로 이들까지 포함한 1919년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 인구는 1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십월혁명십주년 원동기념준비위원회 편찬, 『십월혁명십주년과 쏘베트고려민족』, 해삼위도서주식회사, 1927, 80쪽.) 연해주 한인사회는 북간도와 같은 급속한 증가세는 보이지 않고, 원호인과 여호인 비율이 3:7 정도로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주목할 것은 한인사회 내부의 계급적 모순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원호인과 여호인은 거주지가 구분되어있었고, 한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으며, 서로 통혼도 하지 않았다. 연해주 한인사회에 내재된 분열의 씨앗은 훗날 파괴적으로 드러나고 만다. (1918년 이동휘 등이 여호인 중심으로 결성한 한인사회당-이후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원호인 중심의 국민의회-이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간의 갈등은 코민테른 6차대회가 조선공산당 해체를 결정할 만큼 분열적인 것이었다. 1921년 자유시에서 국민의회 측 자유대대가 비무장 독립군에게 자행한 무자비한 학살은 한인 무장세력 장악을 놓고 상해파와 벌인 극단적 갈등의 결과였다. 그 갈등의 근원에 원호인과 여호인의 뿌리 깊은 반목이 존재한다.) 2. 3·1운동을 전후한 한인사회의 정세 북간도 한인사회는 인구증가, 경제 발전,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한 2세대 청년·학생층의 성장 등으로 사회의 전체 역량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한 청년·학생층의 증가는 기존의 민족운동이 가져보지 못한 역동성과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한인사회의 경제적 발전, 청년학생층의 성장, 기성 운동단체가 구축한 단단한 운동의 저변 등은 북간도 한인사회의 내재적 동력으로 축적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간민회 등의 활동은 북간도 한인사회에 강한 민족의식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자치와 귀화운동에 앞장서던 간민회가 강한 민족의식으로 무장하고, 이를 전파하는데 앞장서는 등 노선의 변화를 겪은 것은 간민회 결성 시기 결합한 이동휘 계열의 영향으로 보인다.) 한인들은 북간도 대부분을 개간했지만, 신분적으로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일제 침략을 경계한 중국당국은 합법적 토지소유를 명분으로 귀화를 강요했고,(간도협약으로 ‘잡거구’ 한인들은 합법 거주와 재산권을 보장받았다. 토지 역시 ‘전민제(佃民制)’라는 방식으로 소유, 경작할 수 있었다. 전민제는 비귀화 한인들이 돈을 모아 귀화 한인 명의로 토지를 사고, 돈의 비율대로 토지를 나누어 소유하던 것을 말한다.) 민족운동의 발흥을 경계한 일제는 한인의 일상생활을 고강도로 감시하는 등 2중의 통제가 한인을 압박하였다. 신분적 불안정은 민족모순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고, 민족의식은 점차 생존권과 다르지 않은 전략적 가치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공유된 민족의식 또한 운동의 주체적 동력으로 축적되어갔다. 1914년 일제와 중국당국의 압박으로 북간도 한인사회의 운동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간 닦은 경제 기초, 교육운동과 사회운동, 이를 통해 확산된 민족의식, 청년·학생층의 성장 등을 기반으로 운동의 에너지는 폭발의 임계점을 향해 가파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연해주는 독립전쟁의 전초기지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연해주 의병은 1906년 최재형이 처음 조직하였다. 1908년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고, 1910년 6월에는 유인석, 이범윤, 홍범도, 이상설 등의 주도로 ‘13도의군’이라는 통합의병체가 조직되었다.) 을사조약 이후 국내의 명망있는 애국지사들이 조직적으로 망명,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강고한 민족의식과 함께 선진적 정치의식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1911년 결성된 권업회 (13도의군과 성명회등이 발전하여 1911년 5월 29일 결성되었다. 회장은 최재형, 부회장은 홍범도였다(「朝憲機 第1389號, 第318號-6월 20일 이후 浦潮斯德지방 鮮人 동정 (1911. 7. 5.)」, 『일본 외무성기록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 )는 권업을 표방했지만, 사실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단체였음을 구성원 면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홍범도, 최재형, 안정근, 안창호, 이범석, 신채호 등이 참여하였다(「6월 14일 木藤通譯官이 嚴仁燮으로부터 얻은 정보 (1911. 6. 28.)」, 『일본 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 권업회는 1914년 13개 지부, 회원 수 8,579명으로 확대되는데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 고려대학교출판부, 1967, 80-81쪽.) 전체 한인 인구 1/10에 해당하는 수의 회원을 확보한 독립운동 단체의 존재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높은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보여준다. 한편, 연해주 한인들은 1907년 『해조신문』, 1908년 『대동공보』, 1911년 『대양보』, 1912년 권업회 기관지인 『권업신문』을 창간했다. 이들 신문은 민족의식과 함께 근대 지식, 선진 정치의식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권업신문』은 간도와 한반도에 반입되어 세계 한민족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민족적 의제를 공유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연해주에서는 일찍이 한민회(「韓人居留民會ニ關スル件 (1910. 3. 24.)」, 『한국근대사자료집성 (要視察韓國人擧動 3--要視察外國人ノ擧動關係雜纂 韓國人ノ部 (九)』.) 한민회는 한인거류민회(韓人居留民會)의 약칭으로. 『대동공보』를 발행하고, 한민학교의 경비를 충당하였다.) 와 대한청년교육회(1907년 연해주에서 설립된 교육운동 단체. 같은 해 공진회와 통합, 대한청년교육연합회로 개편됨.) 등이 여러 학교를 설립,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해조신문(1908, 4, 20)』에 따르면 1908년 연해주에 동명학교, 동흥학교, 창동학교, 의동학교, 선흥의숙, 연추학교, 모현의숙, 수청학교, 금당서숙, 흥원학교 등의 11개 학교가 설립, 운영 중이었다.) 한민회는 1909년 계동학교를 한민학교로 확장, 민족교육의 ‘중추기관’으로 삼았는데 그 수용 규모가 240명에 달했다. (「朝鮮人狀況取調ニ付在長春守田大佐ヨリノ依賴ニ關スル件(1909. 11. 25.)」, 『한국근대사자료집성 (要視察韓國人擧動 3--要視察外國人ノ擧動關係雜纂 韓國人ノ部 (九) 』. 1909년 10월 한인거류민회가 개편되면서, 계동학교를 확충, 소학교들을 통합할 예정이라며 경비 충당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당시 연해주에는 최소 70여 개 이상의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윤병석, 앞의 글, 480쪽.) 일정 인구 기준 학교 수에서 한반도나 다른 지역 한인사회를 압도하는 보급률이었다. 이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교육열이 세계 한인사회 가운데도 가장 높은 수준으로, 권업회 회원 수와 마찬가지로 한인사회의 높은 민족의식과 정치의식과 연결되는 지표이다. 권업회는 1913년 북간도 간민회 계열 인물들과 함께 왕청 나자구에 대전학교라는 사관학교를 개설하고, (뒤바보, 「김알렉산드리아전」, 『독립신문』 1920년 4월 20일자. 이동휘 계열 주도로 설립되었다.)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건립하는 등 무력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병력 29,365명, 총기 13,000정, 총탄 50만 발 등 강력한 군세를 보유했지만, (金正柱, 『朝鮮統治史料』 5, 東京, 한국사연구소, 1970, 664쪽∼665쪽.)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직접적인 군사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 이 병력에는 간민회 계열 인물들이 북간도에서 설립, 운영한 학교에서 배출한 청년·학생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연해주 한인사회는 미주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1909년 설립된 대한인국민회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이상설, 정재관을 연해주와 간도에 파견, 1911년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와 ‘만주리아지방총회’를 설립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국권수호운동Ⅱ』, 1987. 679-680쪽. 연해주와 간도의 한인사회는 독립이라는 전략 아래 해외 한인사회와 연결하며 한민족 네트워크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3. 이동휘와 주변 인물들의 활동 우리가 이 지역의 운동에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북간도와 연해주가 이동휘 계열 인물들 (이들은 북간도와 수많은 단체를 결성하고, 운동을 주도하며 두 지역의 운동을 통합적으로 재구성헸다. 김립, 박애, 계봉우, 안정근, 김하석, 김하고, 윤해, 구춘선, 이용, 박진순, 한형권 등 다수의 활동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의 활동으로 상호 연결되어 민족 관련 의제에 대해 하나의 지역처럼 연동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연해주의 권업회, 권업신문, 조선인거류민회, (「憲機 제1156호 제285호- 5월 30일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지방 조선인 정보(1911. 5. 14.)」,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2 』.) 한민학교, (「朝憲機 제110호-최근 排日氣勢의 槪況과 間島방면의 不穩說에 대하여(1914. 2. 14.)」,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4』.), 애국저금단, (「朝憲機 제250호-排日鮮人 등이 조직한 愛國貯金團에 관한 건(1916. 5. 23.)」,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6』.) 한인신보, (「機密 제43호-조선인의 近狀에 관한 보고의 건(1917. 7. 12.)」,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6』.) 한인사회당,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3-3·1운동』, 1988, 461쪽.) 한족총회, (「朝憲機 제364호-조선인 革命黨員의 역사에 관한 신문기사에 관한 건(1918. 6. 10)」,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6』.) 전로한족대표자회의, (「朝憲機 제429호-全露韓族代表者會議에 대한 過激派의 행동에 관한 건(1918. 7. 11.)」,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6』.) 청구신보, (「機密 제41호-排日鮮人 李東輝에 관한 건(1918. 3. 27.)」,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6』.) 노인동맹단, (「機密 제46호-露領在住 鮮人의 독립운동에 관한 건(1919. 3. 2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7』.) 국민의회 (「電報 補參 제439호-露領在住 조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1919. 3. 4.)」,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7』.) 등과 간도의 간민회, (「朝憲機 第260號; 秘受 1137號-墾民會 組織總會에 관한 건」,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2』.) 동제회, (「在間島 排日鮮人結社 同濟會에 관한 건 (1914. 10. 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만국개량회. (東洋拓殖株式會社, 『間島事情』, 大正 7年, 882쪽.) 간도국민회, (「朝憲機 제742호-不逞鮮人의 暴擧說(1914. 11. 26.)」,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5』.) 대전학교, (뒤바보, 「김알렉산드리아전」, 『독립신문』 1920년 4월 20일자.) 북빈의용단(北濱義勇團), (「機密 제12호-排日鮮人이 조직한 北濱義勇團에 관한 건(1915. 6. 22.)」,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5』.) 독립의군, (「機密 제15호-東方 露支國境線 부근지역에서의 鮮人 동정에 관한 건(1916. 3. 6.)」,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5』.) 철혈광복단 등과 이밖에 수많은 민족운동단체들에 이동휘 계열의 인물 상당수가 중복적으로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단순히 참여한 정도가 아니라 이들 단체의 설립을 주도하고, 운동을 주도하면서 연해주와 북간도의 민족운동을 선도하고 견인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18년 4월 결성된 한인사회당은 아시아 최초의 볼셰비키 정당으로 한인 민족운동이 사회주의의 혁명적 전망까지 끌어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인 민족운동이 시야를 넖히고 다양한 전술, 전략을 확보하는 확장성으로 연결되었다. 실제로 일정 시기 레닌과 코민테른의 이들에 대한 지원은 독립전쟁이나 초기 사회주의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한, 이들은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적극적으로 언론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지역의 한인들을 의식화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하였을뿐 아니라 세계 각지 한인사회의 언론사들과 교류하면서 전 세계 한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민족적 의제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데에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조직활동과 역할은 3·1 운동과 독립전쟁이 발발하는 기초 역량이 되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북간도와 연해주는 대한인국민회, 중국 관내 민족운동 세력, 일본 유학생 단체 등과 적극적으로 연결을 주도하며 세계 한인네트워크의 중심지로 만들어갔다. 3·1운동이 임박했던 1918년 11월 파리강화회의 대표를 선발하기 위해 이동휘, 문창범, 김립, 윤해, 계봉우, 오영선, 김하석, 이동녕 등과 간도의 김약연, 정재면, 상해의 여운형 등이 빈번하게 회합하는 것이 확인되는데, (「政機密送 第47號-朝鮮人槪況 送付의 건 (1919. 3. 27.)」, 『일본 외무성기록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 7雜』. ) 이러한 상황은 당시 북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의 운동을 주도하였던 이동휘 계열의 인물들이 세계 한인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민족을 단위로 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설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1910년대 북간도, 연해주 한인사회는 3·1운동과 같은 혁명적 변혁을 추동할 내재적 역량을 축적해가고 있었다. 북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는 일본, 중국, 러시아의 정책에 따라 시기별로 다른 운동의 전술을 구사해야 했지만, 전략적 차원에서는 일관되게 총체적 역량을 키우면서 운동과 사회의 질적 도약이라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질적 도약은 ‘근대 민족’의 성립과 민족이라는 통합된 정체성을 근거로 추동되는 운동의 등장을 의미하며, 새롭게 정의된 민족 정체성을 근거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끄는 국가적 체계 안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등 운동의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북간도의 간민회, 연해주의 권업회는 당국의 탄압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운동은 일시적 위기를 맞지만, 이들 사회 내부는 지속적으로 총체적 역량을 축적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이행하기 위해 ‘경계’ (경계의 가치는 중심부와 주변부를 구분하는 것에 있지 않고, 충돌, 융합, 통합, 전도, 간섭 등을 통해 질적 변화의 기회를 부단히 확장하는 것에 있다. 경계는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여 기존의 가치를 전도하고, 새로운 질적 이행을 위해 에너지와 가치를 축적하는 역동적이고, 다변적인 공간이자 과정이다. 한인사회에서 수행된 경계의 확장은 운동과 사회라는 두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질적 변화를 추동하고 있었다.)를 확장해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가져온 일시적 위기는 역설적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 혁명적 전이를 가능하게 할 축적과 준비의 과정이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세계질서의 재편, 패전국의 식민지국가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다 준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북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에도 민족독립의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러시아혁명은 전 세계 피압박민족에게 혁명의 전망과 사회주의 이념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와 인접한 연해주와 북간도 한인사회, 이들 사회를 통해 러시아와 연결되었던 다른 지역의 한인사회 역시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파리강화회의와 러시아혁명의 성과를 운동의 전망에 포용하기 위한 논의가 이동휘 계열 주도로 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에 구축된 한인네트워크를 통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들 성과 역시 결과적으로 내적 경계를 확장하고 에너지를 축적하는 과정에 흡수되어갔다. Ⅳ. 3·13운동과 3·17운동의 전개 1919년 초, 연해주, 중국 관내, 일본, 미주, 한반도 한인사회와 연결되어 있던 북간도의 민족운동 세력은 기독교 대전도회의 총회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연해주에 김약연, 정재면을, 한반도에 계봉우를 파견하였다. (四方子,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독립신문』 1920. 1. 10.) 김약연 등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결성에 참여, 국내외 민족운동 지도자들과 독립선언서 작성과 선포, 파리강화회의 대표 선출을 협의하고, 연해주와 함께 같은 날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한편, 2월 18일에는 간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33인이 박동원(朴東轅)의 집에 모여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북간도의 학생들 역시 2월 중순부터 시위운동을 위해 단체를 조직, 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월 중순 명동, 정동, 광성학교 학생들 주도로 ‘기독교동지청년회’를 결성하고, 연설단을 조직, 북간도 한인 대중들에게 반일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명동, 정동학교 학생들은 시위대 보호를 위해 320명의 ‘충렬대’를 조직하고 김학수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학생들은 외지에서 총기를 구하는 한편, 최경호를 단장으로 하여 자위단도 조직하였다. (김양, 「중국 조선 민족의 3.6반일시위운동과 3·13반일시위운동」, 『아시아문화』 제 15호, 한림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 2000, 57쪽,) 3월 17일 연해주와 함께 시위운동을 하려 했던 원래 계획은 3월 6일 서간도 환인현에서 7,200명이 참여한 시위가 일어나고, (권립, 『중국조선족사연구』, 연변대학출판사, 1993, 171쪽.) 3월 7일 국내의 ‘조선독립선언서’가 전해지면서 (강덕상, 『現代史資料』 26, 87쪽.) 3월 13일로 앞당겨졌다. 한인사회와 학생들의 자발적 운동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월 9일 ‘간도한족독립운동의사부’를 결성하고, 3월 13일 용정에서 3·1운동을 지지하는 항일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0일에는 명동, 정동, 광성 학교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고, ‘독립선언서’와 ‘선전문’을 북간도 각지에 살포하며 3·1운동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3월 13일 용정 천주교회 광장에는 북간도 전역에서 모인 3만여 명의 한인이 운집했다. 정오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울리자 각자 품에 지닌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고, 대회 회장인 김영학(金永學)은 대회 개막을 선포한 뒤, 김약연 등 17인이 서명한 ‘독립선언포고문’을 낭독하고, 공약 3장을 선포하였다. 다음은 공약 3장의 내용이다. 1. 오인들의 이 거동은 정의인의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의 요구인 즉, 배타적 감정으로 광분치 않는다. 2.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표달한다. 3. 일체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공명정대하게 한다. (강덕상, 앞의 책, 41쪽∼42쪽.) 공식 대회 이후 반일시위행진이 시작되어 ‘충렬대’를 선두로 ‘대한독립’이라고 쓴 ‘오장기(五丈旗)’를 앞세우고 일본총영사관으로 향하자 중국 군경이 발포하여 사망자 10명, 부상자 30여 명이 발생하였고, 시위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부상자 중 4명은 치료 중 사망했다. 당일 17인이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3월 17일 다시 수천 명이 모여 3·13 희생 열사들에 대한 추도회를 열었고, 5월 1일까지도 간도 곳곳에서 시위운동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다음은 북간도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발생지역 및 참여 인원이다. (四方子, 「북간도」,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 ; 김양, 앞의 글, 59쪽∼60쪽. ) 북간도 3·13운동은 3월 13일∼5월 1일, 수십 차례에 걸쳐 북간도 전역에서 연인원 125,000명 이상이 참여한 북간도 한인사회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125,000 명은 기록을 근거로 한 필자의 통계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집회 역시 많았을 것으로 판단되며, 참여한 연인원은 최소 20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3·13운동은 성별, 나이, 직업, 계급, 사상을 떠나 북간도 각 지역 한인들을 하나의 의제로 통합하였다. 니콜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독립선언 회의의 결과 연해주 한인사회는 간도 및 국내와 연결하며 기회를 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북간도에서 3.13운동이 벌어지면서 북간도와 함께 운동을 전개하려던 계획은 차질이 생겼고, 3월 17일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독교청년회’석상에서 김하구가 이를 설명하였고, 신한촌에는 조선이 독립했다는 벽보가 나붙었다. 3월 13일 용정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연해주의 한인 단체들 역시 3월 14일 각 가정에 태극기를 배포하고 운동기금으로 5루블씩을 거두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학생, 청년 1천명을 북간도로 보내 그곳의 청년단 8, 9천명과 결합하여 국내로 진공할 계획을 세웠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월 15일에 거행하려던 시위는 박은식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러시아 및 영문 번역이 지연되고, 계엄령으로 인한 탄압에 대한 우려, 러시아 당국의 시위 불허 등의 이유로 잠시 보류되었고, 계엄령이 시행되지 않은 니콜리스크 등지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다. 3월 17일 오후 4시, 한인 2명이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에 러시아어와 한글로 쓴 선언서를 전달했다. 선언서는 대한국민의회 회장 문창범, 부회장 김철훈, 서기 오창환 등의 명의로 되어있었다. 오후 5시, 신한촌 한인들 집에는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오후 6시부터 여러 명의 학생이 몇 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내를 누볐다. (「朝憲機 제 148호(1919, 3, 19)」, 『韓國民族運動史料-3·1운동편 其3』, 國會圖書館, 1979, 98쪽.) 일본 영사관이 러시아 당국의 단속을 요구하자 오후 7시 러시아 당국은 시위운동을 금지하고, 한인 학생 2명을 구인하였으며, 신한촌의 태극기를 모두 내리게 하였다. 이튿날에는 러시아 당국의 조치에 반발한 조선인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신한촌에 집결하였다. 니콜리스크에서는 17일 아침 선언서를 발표하고 상당수 한인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중 약 1백 명은 라즈돌리노예에서 시위를 벌이려 했지만, 한인 시위대가 일본군대를 습격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러시아 민병이 이들을 해산시켰다. (「在外鮮人의 獨立運動槪況」, 騷密 제 968호(1919, 4, 26), 앞의 책, 358쪽. 4월 7일 녹둔도에서도 태극기가 게양되고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 주도로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오후부터 연해주, 북간도 각 지역 학생들이 몰려와 오후 3시경에는 1,000명이 넘게 운집하였다. 「獨立運動에 관한 件」, 騷密 제 848호(1919, 4, 25), 앞의 책, 341쪽.) 한편, 4월 9일 구사평의 한인 유지 이갑장의 회갑연이 열렸는데, 200명 넘는 사람들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며 마치 시위운동처럼 잔치를 벌이고 해산하였다. (앞의 자료. 앞의 책, 341쪽.) 3·17은 연해주의 이동휘, 문창범, 간도의 김약연, 정재면 등 양 지역 지도자들의 합의로 동시에 진행하기로 하고, 김하석 등을 파견, 국내와도 긴밀히 연결하면서, 당시 한인운동이 구축해가던 세계 한인네트워크를 가동하여 거족적인 운동으로 전개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Ⅴ. 1919년 만세운동과 한인사회 3·13운동과 3·17운동의 주목할 만한 성과는 운동 과정에서 청년·학생 등 이민 2세대가 운동의 주체로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청년·학생층의 성장은 기존의 운동과는 다른 새로운 운동의 전망을 확산시켰다. 한반도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이 없는 이들에게 조국의 의미는 부모세대와 다르게 해석되었다. 이들은 북간도나 연해주에서 현지 언어를 배우고 현지인과 교류하며 자란 세대였다. 부모세대는 조국의 독립과 귀향을 꿈꿨지만, 이들에게는 북간도와 연해주가 현재와 미래의 삶의 터전이었다. 부모세대가 생계 때문에 이주를 감행하고, 개척해야 했던 낯선 땅은 현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대들에 의해 고향과 터전으로 재해석되면서 한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 (팔레스타인 밖으로 흩어진 유태인 공동체의 총칭. 본고에서는 해외에 건설된 한인공동체라는 의미.)로서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획득해가고 있었다. 신세대의 대두는 운동의 세대교체와 질적 변화를 추동하고, 운동의 전략, 전술의 차원에서 기성세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전망을 사회로 확산시켰다. 특히, 이들이 주도한 3·1운동은 이전과 이후의 한인사회를 질적으로 다른 사회로 규정하였다. 세계 각지에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구축된 세계 한인네트워크를 통해 전세계 한인이 독립이라는 민족적 의제를 공유하고, 그 실천에 동참함으로써 ‘민족’이라는 세계 보편의 근대적 정체성을 갖춘 ‘역사적 존재로 거듭나는 질적, 혁명적 변화가 수행되었다. 3·1운동 직후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이 수행한 질적 변화를 기반으로 운동을 ‘민족’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으로 재정의하고, 민족의 가치에 기반한, 이전과 차원이 다른 지도력을 성립시켰다. 이후 북간도의 여러 단체가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조직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가 ‘민족’적 의제를 전략으로 내세운 대표기관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3.1운동 이전 북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는 사회와 운동 두 요소를 중심으로 질적 변화를 위해 경계를 확장해가고 있었다. 한인사회에 혼재한 다양한 가치와 한민족 네트워크가 끌어안은 다양한 사상적, 지역적, 정치적 가치들은 경계를 확장하고 경계에 변혁의 에너지를 축적하는 과정을 촉진하였다. 경계의 확장 과정은 중심부와 주변부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질적 변화의 과정이었다. 북간도와 연해주를 비롯한 한인사회에서 수행된 경계의 확장은 한민족이 탄생하고, 민족적 가치에 근거한 새로운 차원의 운동이 전개되는 질적 이행으로 귀결되었다. 3·1운동 이후 등장한 북간도와 연해주의 운동 단체들은 대부분 간민회나 권업회의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들 지역의 운동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단체를 주도한 이동휘 계열의 인물들이 구축한 인적 기반, 운동의 전술, 전략, 이론, 사상 등을 한인사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북간도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을 함으로써 각 지역의 고립을 극복, 한인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민족운동의 폭과 역량을 확대하였다. (3·1운동 전후 북간도와 연해주의 민족운동은 서로 연동되어 있었고, 특히 무장독립운동 단체는 두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배후에 이동휘 및 이동휘계 인물들이 있었다.) 특히, 이러한 네트워크의 구축 및 통합의 노력은 이동휘가 참여한 임시정부가 1920년 독립전쟁을 계획, 수행할 수 있었던 기본 토대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북간도에서는 대한국민회와 북로군정서가 갈등하였고, (기독교도 중심의 간민회와 유교적 복벽주의를 주장한 공교회는 이미 오랜 시간 반목하였다. 대종교계열의 대한군정서가 공교회 세력을 받아들이자, 간민회를 계승한 대한국민회와 갈등이 불거졌다.) 연해주에서는 한인사회당과 대한국민의회의 갈등이 뷸거지고 있었다. 이들 단체 간의 갈등은 운동의 방식, 기득권, 헤계모니 쟁탈전의 양상으로 나타났지만, 실상은 한인사회 내부에 잠재되었던 모순이 운동의 통합, 재편의 과정에서, 외부에서 유입된 충격으로 인해 첨예한 충돌로 발전한 측면이 있다. 종족적, 지리적 공감대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극명하게 다른 환경, 기회, 조건, 문화를 가진 집단 간에는 사상, 문화, 정치, 운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모순의 가능성이 있다. 이러힌 갈등은 한인사회 내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논리적 이해가 가능하다. 북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 그 내부의 논리에 착목하지 않는 한 그 표방과 충돌이 의미하는 맥락, 그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작동하던 시스템과 방식, 그 결과로서 진행된 운동의 총체적 모습은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끝> 글, 장우순(한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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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화분 놓기언어의 화분 놓기 - 오혜정 방안을 푸르름으로 가득 채우는 시의 화분을 놓는다 분수처럼 내리뻗은 푸른 잎들 나는 매일 화분에 언어를 주었다 내 마음만큼 커가는 화분은 어느새 내 키를 넘겨 지구 끝에 가 있었다 유난히 마음이 쓰리던 날 가슴앓이에 멍이 든 언어를 주었더니 푸른 잎으로 뻗어나가는 화분은 선율을 잃고 조금씩 화석이 되어버렸다 나는 다시 시의 화분을 놓는다 의미가 되는 언어를 주었고, 화분은 달 끝을 지나 우주의 끝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주의 끝에서 화분은 내 마음에 응하며 계속 계속 시를 피워냈다. *오혜정 - 『시와 세계』 신인상 당선 - 한양대 문학박사 <시해설(감상)> 오혜정 님의 <언어의 화분 놓기>란 시는 화분에 심어져 있는 식물은 시인의 마음에 따라 함께 변한다는 의미의 시입니다. 1연은 화분에 심어져 푸른 잎들이 자라며 시원스럽게 분수처럼 가지를 뻗은 나무의 외형적 모습을, 2연에서는 사랑하는 마음의 언어를 주었더니, 자랄 수 있는 데까지 자란 모습을 과장하여 지구의 끝에 가 있다고 했고, 3연은 상처를 입은 마음으로 나무를 바라보았더니, 멋진 곡선을 그렸던 가지가 모양새를 잃고 죽어 가는 모습을, 4연에서는 시인의 마음에 따라 식물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의미 있는 아름다운 언어를 주었더니, 우주의 끝까지 자라고, 나무 역시 시인에게 의미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보내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고의 폭을 넓히자면 살아있는 모든 물질은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받는 ‘물오동포(物吾同胞)’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시입니다. 글, 운암 오제운(신태인교구장, 동귀일체 고문, 문학박사) -
단양 천동 - 최초로 용담유사를 간행하다옛 천동 마을 전경 - 원래 이름은 샘골이며, 지금은 남천리로 불린다. 용담유사 간행 터로 추정되는 여규덕 집 터 인제 갑둔리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한 후 1년이 지난 1881년 단양 남면 샘골(泉洞)에서 해월 신사는 『용담유사』를 간행한다. 충북 단양군 남면 남천리 여규덕(呂圭德)이라는 제자의 집에 간행소를 마련하고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천도교의 모든 역사 기록에 나온다. 『천도교회사 초고』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六月에 神師ㅣ 大神師의 所著하신 歌詞를 發刊하사 道人에게 頒給하시니 是時 開刊所는 丹陽郡 南面 泉洞 呂圭德家러라. 6월에 신사가 대신사께서 지은 가사를 발간하시어 도인들에게 나누어주시니, 이때 개간소는 단양군 남면 천동 여규덕의 집이다. - 『천도교회사 초고』 「地統」 천동(泉洞)은 본래 ‘샘골’이다. 순수 우리말 지명을 일본인들이 한자어로 바꾸면서 ‘천동(泉洞)’이라고 표기하기 시작했다. 『천도교회사 초고』가 1930년대 초에 간행되었으니, 일제가 쓰던 지명을 그대로 쓴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에는 ‘남천리(南泉里)’로 불린다. ‘동(洞)’이나 ‘골(谷)’이라는 산간의 지명이 없어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모두 ‘리(里)’로 바뀌었다. ‘남천리’라는 지명으로 보아 이곳에서 머지않은 북쪽에 천동이라는 지명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송두둑에서 남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이 셋으로 갈라지는 곳에 다다르는데, 도솔봉 쪽을 향해 난 길 입구에 ‘남천리’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이곳이 천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이곳에서부터 길은 바로 비탈을 이루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으로는 집들이, 오른쪽으로는 밭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천동 마을의 끝에 이르면, 오른쪽, 왼쪽 모두에 집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을 끝에는 마을회관이 있고, 이 마을회관 맞은편 집 바로 옆에 빈터가 하나 있는데, 이 자리가 여규덕이 살던 집터로 추정된다. 표영삼 선생이 사람들에게 물어 처음 이 천동에 왔을 때 여씨(呂氏) 성을 가진 사람이 살던 집이 이 집 한 채뿐이어서, 이 집을 여규덕의 집이라고 추정하였다. 이후 집은 헐려 집터만 남아 있고 집터 뒤로 이어지는 소로를 따라가면 사동 마을과 이어진다. 용담유사를 간행한 샘골(남천리) 마을 입구 용담유사 간행비 간행비가 세워진 곳- 주변은 현재 마을 공 원이 조성되어 있다. 용담유사 간행비 앞에 선 답사단 여규덕은 여운형(呂運亨)의 종조(從祖)가 된다는 설이 있다. 여운형이 동학의 피와 가르침을 받은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독립운동가인 몽양(夢陽) 여운형은 해방 정국에 중도좌파로 활동하며 통일정부를 위해 갖은 노력을 하던 중 1947년 극우 청년에 의해 암살을 당한 인 물이다. 여규덕은 1880년대 초 해월 신사를 찾아와 동학에 입도했다. 현재 남천리 마을에는 천도교중앙총부에서 세운 『용담유사 간행비』가 서 있다. 이 비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갖가지 운동기구가 있고, 오래된 느티나무들이 둘려 있다.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마을 사람들이 쉬기도 하고 운동도 하며 마을 회의도 하는 장소로 활용된다면 제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마을 사람들조차 무심코 지나치는 장소가 되어 쓸쓸할 뿐이다. 수암 염상철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해월이 뿌린 씨앗, 3·1로 피어나다“사람을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 해월 최시형 신사님께서 남기신 이 말씀은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근본 원칙을 제시하신 가르침입니다. 사람을 하늘로 보라는 인식은 인간 존엄의 절대성을 밝히신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선언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에 앞선 사상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동학을 창도하신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으로부터 이어진 인내천(人乃天)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인내천은 하늘을 초월적 존재로만 이해하지 않고 인간 존재 안에서 발견하고자 하신 사상입니다. 해월신사님께서는 이를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실천 윤리로 구체화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존엄한 존재로 대할 것을 요청하신 가르침이었습니다. 외세의 침탈과 사회적 혼란이 지속되던 시기, 이러한 사상은 단순한 종교 교리를 넘어 사회 인식의 기반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자각을 강조하신 흐름은 이후 민족적 각성의 중요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3·1 독립선언서 는 단순한 정치적 요구서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선언서에 나타난 자주와 평등의 언어는 인간 존엄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독립국이며 조선인은 자주민이다”라는 문장은 민족의 자주를 밝힘과 동시에 인간의 주체성을 천명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3·1운동 과정에서 천도교 세력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상적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인내천의 가르침은 이미 민중의 의식 속에 확산되어 있었으며, 이는 비폭력적 만세운동이라는 형태로 표출되었습니다. 3·1은 무력 투쟁이 아니라 자각에 기반한 집단적 의사 표현이었습니다. 해월신사님께서는 1919년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하셨으나, 그 사상은 이미 정신적 토대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과제는 이러한 역사적 연관성을 단순한 기념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는 데 있을 것입니다. 인내천이 제기하신 인간 존엄의 문제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과거의 논제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해월신사님께서 제시하신 사상은 3·1이라는 역사적 장면 속에서 한 차례 구체화되었습니다.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승할 것인가는 결국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일 것입니다. -
신앙의 자세를 새롭게 다잡는 시간이었습니다.저는 포덕 167년(2026)년 1월 29일부터 31일까지 용담수도원에서 개최된 전국교구장 워크숍 및 특별수련회에 참석하여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중앙총부의 변화된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사회의 흐름에 맞춰 AI 기법을 활용한 콘텐츠 제작 등 창의적이며 열정적으로 노력하시는 교무관장님을 비롯한 교화, 경리, 사회문화관장님들께 우리 모두 뜨거운 박수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훌륭하신 교구장님들과의 대화를 통해 천도교에 대한 열정과 헌신에 깊은 공감을 받았습니다. 특히, 체험사례 발표를 통해 발전해 나가는 교구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내가 이제껏 서천교구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왔는가를 생각할 때 그저 부끄러운 마음뿐이었습니다. 이번 워크숍을 통해 서천교구도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제가 지금까지 연구해왔던 명상법을 「수심정기 명상법」으로 승화시켜 수련 활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열정을 다해 연구해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저는 가끔 수련을 할 때마다 용담정 계곡에 굽이쳐 흐르는 맑은 물소리와 수운대신사님께서 주문을 외우시는 모습을 연상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름에는 이곳에 올 기회가 없어서 아직 녹음을 하지 못했습니다. 성지인 용담정 계곡에서 흐르는 청정하고 맑은 물소리가 생생하고 현장감 있게 전파되어 우리 모든 천도교인들이 동귀일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용담수도원장님께 도움(여름철에 녹음하여 보급)을 청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26. 1. 31. 서천교구장 관암 노앙래 심고 -
인제 갑둔리 - 최초의 『동경대전』을 간행한 역사적 장소군부대가 들어오기 전 갑둔리 마을-갑둔리는 동경대전을 간행한 곳이다. 동경대전을 간행한 김현수 집터 1879년에 이르러 해월 신사에 의하여 기획된 『최선생문집』은 1880년 6월 인제에서 간행되었다. 이때 부쳐진 표제(表題)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직 경진판(庚辰板)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원기서』에 “아아, 선생의 문집(文集) 침자(鋟梓)를 경영한 지… (先生文集鋟梓之營…)”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신사의 글들이 아직 동학 교단에서 ‘경전’이라는 인식보다는 ‘문집’으로서의 인식이 앞서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기획 당시에 『최선생문집』으로 한 것은 아닌가 한다. 그러나 발간이 되면서 『최선생문집(崔先生文集)』이 『동경대전(東經大全)』이라는 표제로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양에서 본래 ‘경(經)’은 ‘성인지언경야(聖人之言經也)’라 하여 ‘성인(聖人)의 말씀’을 뜻하는 것으로, 예사롭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 같은 견해에서 본다면, 대신사의 글은 ‘문집’이 아니라, ‘동경대전’이라는 ‘경전(經典)’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동학의 교도들이 대신사를 성인으로 추앙한다는 의미가 된다. 윤석산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이렇듯 해월 신사에 의하여 수운 대신사의 가르침이 ‘경전(經典)’으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동학이 하나의 가르침, 즉 한 종교로서 더 분명한 독자성을 확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까지 조선 사회를 유지해 왔던 유학, 그리고 당시 새로 유입되던 서학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가르침으로서 동학을 분명하게 확립시키는 일이 된다. 『도원기서』 중의 기록을 보기로 하자. 庚辰三月初十日 先生忌 祭移行于主人家 正月麟蹄接中 將營引燈祭 故主人及時元時晄 偕往其處 二十四日 金錠浩行引燈祭 二十八日 金顯德又行引燈祭 二月初五日 金鎭海別行引燈祭 四月初五日 祭祀各接行之 五月初九日 該爲刻板所 十一日爲始開刊 至於六月十四日 畢爲卽出 十五日 別爲設祭 其時表功別錄 記文 於戱 先文集鋟梓之營 歲已久矣 今於庚辰 余與姜時元 全時晄及諸益 將營刊板而發論 各接中幸同余議 而刻所定于麟蹄甲遁里 竣事如意 而始克成篇 以著于先生之道德 玆豈非欽歎哉 各接中 出誠力 費財者 特爲別錄表 論其功 次第記書 歲在庚辰仲夏 道主 崔時亨謹記 尙州尹夏成四十金冊本當 旌善接中三十五緡 麟蹄接中一百三十金 靑松接中六緡 刻板時有分定 都廳崔時亨 監役姜時元 全時晄 校正沈時貞 接有司黃孟基 全時奉 趙時哲 劉時憲 收有司韓鳳辰 洪時來 辛時一 金鎭海 李廷鳳 直日張道亨 金文洙 張炳奎 李晉慶 接有司金錠浩 治板 金輨浩 辛時永 鋟梓沈遠友 崔錫夏 金允權 運糧張興吉 金寅相 金孝興 李千吉 供饋李貴祿 姜基永 書有司 全世仁 경진년(庚辰年, 1880년) 3월 초열흘에 선생의 기제(忌祭)를 주인의 집에 옮겨 행하였다. 정월에 인제접중(麟蹄接中)에서 장차 인등제(引燈祭)를 베풀고자 하여, 주인과 강시원(姜時元)과 전시황(全時晄)이 함께 그곳으로 갔다. 24일에 김정호(金錠浩)가 인등제를 행하였고, 28일에 김현덕(金顯德)이 또 인등제를 행하였다. 2월 초닷새에 김진해(金鎭海)가 별도로 인등제를 행하였고, 4월 초닷새에 제사를 각 접(接)에서 행하였다. 5월 9일 각판소(刻板所)를 설치하였고, 11일에 개간(開刊)하기 시작하여 6월 14일에 이르러 인출(印出)하기를 마치었다. 15일에 별도로 제사를 베풀었으니, 그때 공을 별록(別錄)에 표하여 글로 기록하였다. 아아, 선생의 문집(文集) 침자(鋟梓)를 경영한 지 이미 오래구나! 지금 경진년(庚辰年)에 나와 강시원(姜時元), 전시황(全時晄) 및 여러 사람이 장차 간판(刊板)을 경영하려고 발론(發論)을 하니, 각 접중(接中)이 다행히도 나의 의론과 같아 각소(刻所)를 인제 갑둔리(甲遁里)에 정하게 되었다. 준공하는 일이 뜻과 같아 비로소 편(篇)을 이루니, 이로써 선생님의 도덕을 밝히게 되었다. 이 어찌 기쁘고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각 접주에서 정성스러운 힘과 비용으로 쓸 재물을 낸 사람은 특별히 별록(別錄)에 그 공을 논하여 차례로 기록하여 쓴다. 경진년(庚辰年) 중하(仲夏) 도주(道主) 최시형(崔時亨)이 삼가 기록하노라. 상주(尙主) 윤하성(尹夏成) 40금 책본당(冊本當) 정선접중(旌善接中) 35민(緡) 인제접중(麟蹄接中) 130금(金) 청송접중(靑松接中) 6민(緡) 각판(刻板)할 때에 유사(有司)를 정해 주었다. 도청(都廳) 최시형(崔時亨) 감역(監役) 감시원(姜時元) 감역(監役) 전시황(全時晄) 교정(校正) 심시정(沈時貞) 교정(校正) 전시봉(全時奉) 교정(校正) 유시헌(劉時憲) 직일(直日) 장도형(張道亨) 직일(直日) 김문수(金文洙) 직일(直日) 장병규(張炳奎) 직일(直日) 이진경(李晋慶) 접유사(接有司) 김정호(金錠浩) 접유사(接有司) 신시영(辛時永) 접유사(接有司) 황맹기(黃孟基) 접유사(接有司) 조시철(趙時哲) 수유사(收有司) 홍시래(洪時來) 수유사(收有司) 신시일(辛時一) 수유사(收有司) 김진해(金鎭海) 수유사(收有司) 이정봉(李廷鳳) 치판(治板) 김관호(金館浩) 침자(침자) 심원우(沈遠友) 침자(침자) 최석하(崔錫夏) 침자(침자) 전윤권(全允權) 운량(運糧) 장흥길(張興吉) 운량(運糧) 김인상(金寅相) 운량(運糧) 김효흥(金孝興) 운량(運糧) 이천길(李千吉) 서유사(書有司) 전세인(全世人) 공궤(供饋) 이귀록(李貴綠) 공궤(供饋) 강기영(姜基永) - 『도원기서(道源記書)』 인제 경진판으로 추정되는 동경대전 목판본 인제 갑둔리에서 『동경대전』 간행의 일은 이후 천도교 역사 기록인 『본교역사』, 『천도교서』, 『천도교회사 초고』, 『천도교창건사』 등 모두에 나온다. 五月九日에 神師ㅣ 東經大全刊行所를 麟蹄郡甲遁里 金顯洙家에 設하야 六月十四日에 畢하고 同十五日에 致誠祭를 行하시다. 인제 갑둔리는 대신사의 가르침을 담은 천도교 제1의 경전 『동경대전』이 간행된 중요한 지역이다. 그러나 2006년 육군과학화전투훈련장 조성으로 현재 해당 지역을 국방부가 관리하고 있다. 군부대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는 입지 조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찾는 사람도 없고 공터 위에 표지판만 쓸쓸히 꽂혀 있는 모습이 안쓰러운 느낌마저 주는 것이 사실이다. 2016년 12월 2일, 강원도가 문화재위원회를 열고 도지정문화재 지정심의를 거쳐 인제 남면 갑둔리 351, 375번지 일대를 동경대전 간행 터 강원도 기념물(제89호)로 지정하고 몇 년간 공사를 거쳐 표지판과 주변 환경을 일부 정리했으나, 도 지정 기념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기에는 미미한 형편이었다. 최초의 『동경대전』을 간행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 장소로서는 많은 아쉬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 인제군에서 동경대전 각판소와 갑둔리 소나무, 동경대전 간행 터(김현수의 집), 성황거리-비밀의 정원을 동학의 주요 유적지로 인제 문화관광 안내지에 수록하고 동학문화유적지로 정비했다. 한데 해월 신사께서 “저 새소리도 시천주의 소리이다.”라고 설법하신 성황거리에 대한 설명에는 사진 애호가들의 핫한 장소인 비밀의 정원이라고만 되어 있어 아쉽다. 이곳에서 발간된 인제 경진판 최초의 『동경대전』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인제 동경대전 간행 터가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된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 인제 동경대전 간행 터에서 윤석산 교수(좌측)와 필자(우측) 동경대전 간행 공방 터 안내판 수암 염상철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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