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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눈높이로 함께한 새해 시일식포덕 167년 1월 25일, 천도교 청년회와 대학생단이 주관한 어린이 시일식이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이번 행사는 새해를 맞아 어린이들이 시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즐거운 체험 활동을 통해 교단 공동체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마련됐다. 이날 시일식은 정민아 어린이가 집례를 맡아 차분하고 성실한 태도로 의식을 이끌었으며, 이도형 어린이가 경전을 봉독해 행사의 엄숙함을 더했다. 설교는 서울교구 박현서 동덕이 담당해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따뜻하고 이해하기 쉬운 메시지를 전했다. 시일식 전반의 진행은 수원교구 조영은 동덕이 맡아 행사가 원활히 이어지도록 했다. 이번 어린이 시일식은 오전 11시부터 11시 20분까지 약 20분간 온라인으로 봉행됐다. 화면을 통해 각 가정에서 참여한 어린이들과 보호자들은 함께 예식을 지켜보며, 공간의 제약을 넘어 신앙의 시간을 공유했다. 이어 오전 11시 20분부터 11시 40분까지는 어린이들을 위한 체험 활동 프로그램이 진행돼 분위기를 한층 밝게 만들었다. 체험 활동은 청년회와 대학생단이 함께 준비한 ‘복주머니 키링 만들기’로, 새해의 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기획됐다. 실용성과 상징성을 겸비한 프로그램으로 어린이들의 높은 호응을 얻었다. 복주머니 키링 만들기 활동은 수원교구 이예나 동덕이 진행을 맡아, 어린이들이 실시간 화면 안내에 따라 블록을 차근차근 조립하며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왔다. 행사에 필요한 재료는 사전에 각 가정으로 배송돼, 어린이들이 집에서도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참여한 어린이들은 화면을 통해 서로의 작품을 소개하고, 완성된 키링을 직접 들어 보이며 성취감을 나누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주최 측은 “온라인으로 진행됐지만 각 가정에서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어 어린이들의 집중도가 높았다”며 “새해를 맞아 의미 있고 실용적인 복주머니 키링을 직접 만들며 모두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뜻깊은 행사였다”고 전했다. 이번 어린이 시일식은 신앙 활동과 체험 프로그램을 결합한 형식으로,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교단의 가치를 접하고 공동체의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 청년회와 대학생단은 앞으로도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교단 내 세대 간 소통과 연대를 이어갈 계획이다. 자료 및 사진 제공 : 청년회 -
시 해설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은 그의 두 번째 시집인 『접시꽃 당신』으로 문단에 이름을 알리고, 대중적으로도 큰 호응을 받았다. 제50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2017~2019)을 역임했다. 『접시꽃 당신』 외에 『사람의 풍경』, 『세상의 모든 저녁』 등 여러 권의 시집을 상재하고, 신동엽창작기금(1990), 정지용 문학상(2009), 윤동주 문학상 대상(2010), 백석문학상(2011)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 해설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은 제목이 시 전체의 주제를 드러내는 직관적(판단이나 추리 따위의 사유를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이며, 관조적(감정 개입 없이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시상 전개를 따라가 보면, 개개의 꽃에서 전체적인 꽃으로 확대시키는 점층적 표현을 구사하고, 꽃의 줄기와 꽃잎을 인간의 사랑과 삶으로, 자연현상인 비와 바람을 인간의 삶에 닥쳐오는 시련으로 유추(서로 비슷한 점을 비교하여 하나의 사물에서 다른 사물을 추리)하는 표현기교를 사용했습니다. 이 시는 총 2연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연은 5행으로 각운과 대구법을 구사하여 리듬감을 주고 있습니다. 1연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사랑, 2연에서는 비에 젖으며 피는 꽃과 인간의 삶을 비교하여 절묘하게 시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줄기를 곧게 세우는 모습에서 시련, 고난 역경 속에서도 올바른 가치관과 신념으로 역경을 극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꽃이 비, 바람을 맞으며 꽃잎을 따뜻하게 피어나듯이 우리네 사랑과 삶도 시련을 겪으며 아름답게 이루어진다는 보편적 진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감상하면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비, 바람. 천둥, 서리를 견뎌야 한다’는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연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당의 시는 언어의 조탁이 이루어진 반면, <흔들리며 피는 꽃>에 비해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힘은 조금 약한 편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깊거나 온갖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 가난으로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 이 시를 읽게 되면 누구나 시련, 고난이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진한 감동을 주어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샘을 자극하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화려한 시어나 난해한 시어를 사용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시어를 통해 시련과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삶에 위안을 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필자 : 운암 오제운. 신태인교구장, 천도교 동귀일체 고문. 문학박사, 부안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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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7년 전국교구장 워크숍 및 특별수련중앙총부는 포덕 167년을 맞아 전국교구장 워크숍 및 특별수련을 봉행한다. 이번 행사는 지난 해 권역별 교역자 간담회에서 제기된 교구장 워크숍 개최 요구를 반영해 마련된 자리로, 교단 운영의 방향을 공유하고 교구와 중앙총부 간의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번 워크숍과 특별수련은 포덕 167년 1월 29일(목)부터 31일(토)까지 2박 3일간, 용담수도원과 동학교육수련원에서 진행된다. 교구장들이 함께 수련에 참여하며 신앙적 성찰의 시간을 갖는 한편, 새해 교단 운영계획과 포덕교화 정책을 공유하고 심도 있는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행사 첫날에는 개강식을 시작으로 교구 소개와 교구장 인사, 포덕교화사업 전반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된다. 둘째 날에는 중앙총부 각관인 교화관·교무관·경리관·사회문화관의 업무보고와 질의응답이 이어지며, 교구·교단 발전 방안을 주제로 한 분임토의와 교구운영 사례발표도 마련된다. 또한 ‘인공지능 시대와 천도교’를 주제로 한 특강을 통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과 과제를 함께 모색하는 시간도 갖는다. 마지막 날에는 소감 나누기와 폐강식을 통해 이번 워크숍과 특별수련의 의미를 되새기며 일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중앙총부는 이번 전국교구장 워크숍 및 특별수련을 통해 교구 간의 차이와 실상을 서로 이해하고, 총부와 교구 간의 간극을 좁히는 한편, 포덕 167년 교단 발전을 위한 실천적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
중앙총부, 신입교인을 위한 기초교육 진행중앙총부는 지난 1월 24일 신입교인을 대상으로 한 기초교육을 마련하여 진행하였다. 이번 교육은 천도교 신앙의 기본 이해와 올바른 수행 방법을 안내하기 위한 과정으로, 개강식을 시작으로 강의 안내와 인사 나눔, 질의응답 등 신입교인이 천도교 신앙에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구성됐다. 교육 내용은 ▲천도교 교사(敎史) 이해 ▲천도교 핵심 요약 ▲스승님에 대한 이해 ▲경전 이해 공부 ▲의절(義節) 이해(경전·주문·청수·시일·성미·기도) ▲천도교 수행과 신앙 방법 ▲영상 시청 ▲수련에 대한 올바른 이해 ▲주문 수련 등으로 진되었으며 전 과정을 마친 뒤에는 수료식과 함께 교육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강병로 종무원장은 격려사를 통해 "천도교 입교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는 우리가 지켜야 할 규범이나 형식을 따르는 데에 그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는 수련을 통해 삶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이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깊이의 삶을 경험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 깊은 뜻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다소 부족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교육을 계기로 천도교의 교리와 오관실행을 일상 속에서 성실히 실천해 나간다면, 우리는 새로운 신앙의 삶은 물론 새로운 사업의 삶을 함께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강의는 성주현 상주선도사, 전명운 교화관장, 김창석 동귀일체 회장이 맡아, 신입교인의 눈높이에 맞춰 천도교 신앙의 기초와 실천을 차분히 안내하였다. 중앙총부는 “이번 신입교인 교육은 교리 전달을 넘어, 천도교 신앙의 정신과 수행을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다”며 “새로 입교한 교인들이 천도교의 길을 바르게 이해하고 신앙의 뿌리를 다지는 시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신입교인 교육을 마친 참가자들은 "이번 신입교인 교육을 통해 먼저 천도교의 스승님들과 교사에 대해 탐구하며, 동학과 천도교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의미 있게 다가왔다.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그 정신을 앞으로 어떻게 이어받아 살아가야 할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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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7년 1월 25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한울님은 어디 계실까요?"포덕 167년 1월 25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 영(靈)과 신(神) - "한울님은 어디 계실까요?" 금암 이종민 선도사 -
1일 이정희 전 교령 저, 『교령의 시간』 출판기념회이정희 전 천도교 교령의 저서 『교령의 시간』 출판기념회가 포덕 167년 2월 1일 낮 12시, 중앙총부 다목적홀(수운회관 지하1층)에서 열린다. 『교령의 시간』은 전직 교령이 교령 재임 기간의 경험과 사유를 직접 기록한 단행본으로, 단순한 회고를 넘어 동학·천도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비전을 함께 조망한 점이 특징이다. 동학 사상과 천도교 정신을 시대적 과제 속에서 어떻게 계승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진솔한 성찰이 담겼다. 이정희 전 교령은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충남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학자이다. 또한 공주대학교 객원교수, 미국 시라큐스대학교 교환교수를 지냈으며, KIST, KAIST, 전자통신연구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등 대덕연구단지에서 40여 년간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한 뒤 정년퇴임했다. 이정희 전 교령은 포태교인으로서 평생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교령을 꿈꾼 적이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정년퇴임 이후 교령 출마 권유를 받고, 인생의 중대한 선택 앞에서 계룡산을 찾아 스승과 같은 자연과의 문답을 통해 교령 출마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이 세상이 있기에 천도교가 있고, 교령의 시간 또한 존재할 수 있다”며 “교령의 시간은 좁게는 중앙총부의 시간이지만, 넓게는 모든 천도교인과 나아가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시간”이라고 밝힌 이정희 전 교령은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으로 주어진 혁명의 불길을 붙잡고 천도교와 세상을 위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자 있는 힘을 다 쏟았다”며 “교령의 시간은 매일매일이 혁명이었다”고 말했다. 2016년 천도교 교령으로 취임한 이정희 전 교령은 “천도교는 대한민국의 정신이자 세계정신”이라며 “천도교의 사상과 역사는 특정 집단의 소유물이 아니라 세계 인류의 공유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교령의 시간은 개인의 시간이 아닌 공적인 시간이며, 이를 모두와 공유하는 것이 교령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이 책을 집필한 이유”라고 집필 의도를 밝혔다. 한편 이번 출판기념회는 동학학회, 천도교종학대학원, 천도교종학대학원 총동문회가 주관하고, 천도교미술인회가 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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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장터, 설맞이 특별선물 판매한다중앙총부에서 운영하는 동학장터에서는 포덕 167년 설을 맞아, 한울님을 모시는 마음과 정성을 담은 설맞이 특별 선물을 준비했다. 이번 설선물은 가족과 지인, 은사와 이웃 등 귀한 인연에게 감사와 축원의 뜻을 전할 수 있도록 마련된 것으로, 천도교인의 신앙과 정성이 고스란히 담겼다. 새해를 여는 명절에 서로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며 마음을 나누는 뜻깊은 매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중앙총부 동학장터 담당자는 “설은 한 해의 시작을 여는 중요한 절기인 만큼, 천도교인의 정성과 모심의 마음을 선물에 담아 전하고자 했다”며 “작은 선물이지만 서로를 공경하고 함께 살아나는 포덕의 정신을 나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설맞이 선물은 천도교 신앙의 의미를 일상 속에서 실천하고, 따뜻한 나눔 문화를 확산하는 취지로 준비되었다. 동학장터 바로가기 -
[칼럼]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위한 천도교의 역할2015년 제70차 UN총회에서 2030년까지 달성하기로 결의한 의제인 지속가능발전목표(SDGs: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는 지속가능발전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인류 공동의 17개 목표이다. ‘2030 지속가능발전 의제’라고도 하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는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것(Leave no one behind)'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인간, 지구, 번영, 평화, 파트너십이라는 5개 영역에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17개 목표와 169개 세부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세계적 흐름과 함께 국가지속가능발전목표(K-SDGs)라는 공식 명칭을 정하고 '모두를 포용하는 지속가능국가'라는 비전을 내걸었다.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포용사회 구현, 모든 세대가 누리는 깨끗한 환경 보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경제성장, 인권보호와 남북평화구축, 지구촌협력과 같은 5대 전략을 세웠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한 17개 목표와 119개 세부목표, 236개의 지표들(제4차 기본계획 기준)을 설정하여 정부기관은 물론 지자체와 시민단체, 전문가, 이해관계자그룹 등 다양한 집단에서 노력하고 있다. SDGs를 자세히 살펴보면 평등한 사회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빈곤이 없는 공동체에서 보존이 잘 된 자연과 함께 다같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는 내용이다. 2030년까지 그 목표를 위해 전세계가 다같이 노력하자는 것이다. 바로 천도교가 추구하는 사회를 전세계가 지금 발벗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1860년 수운대신사(최제우, 1824~1864)께서 경주 용담에서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진리를 선포하신 내용을 지금 온 세계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외치고 있으며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속에 정하여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땅 아끼기를 부모님 살 같이 하라.”, “침을 함부로 땅에 뱉지 말라”, “나뭇가지를 함부로 꺾지 말라”, “저 새소리도 한울의 소리니라” 등 자연을 공경하고 사람과 자연이 이천식천으로 순환 생태공동체라는 것을 해월신사(최시형,1827~1898)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그 내용들이 바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중 6. 건강하고 안전한 물관리, 14. 해양생태계 보전, 15. 육상 생태계보전 등의 목표에 들어 가 있다. 의암성사(손병희, 1861~1922)께서 “천도교는 천도교인의 사유물이 아니요 세계 인류의 공유물”이라고 하였듯이 바로 현재가 그러한 시대인 것 같다. 세계는 천도교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분주히 노력하고 있다. 이 때에 천도교는 무엇을 해야 할지 그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천도교의 목적이 포덕천하, 보국안민, 광제창생, 지상천국 건설이다. 그 목적달성을 위해서 세계가 움직이고 있는데 주인 노릇을 해야 할 천도교단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침 2027년이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이 때에 세계가 주목할 일을 우리는 해야 할 것이다. 세계를 무대로 진출할 때이다. 스승님들의 주옥같은 진리의 말씀을 현재화하여 세계에 비전 선포와 그 실천목표를 도출해 내야 한다. 천도교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실현을 위한 구체적 역할은 무엇일까? ‘포덕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보국안민(輔國安民)·지상천국(地上天國)’ 의 사회·국가·인류의 복지와 조화 지향 사상을 핵심 목표로 삼아 공동체 의식과 협력을 통해 지역사회 프로젝트를 조직하고 실행하는 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환경 보호와 지속 가능한 생활을 가르치며 교인들의 행동 변화를 유도할 수도 있다. 사회적 연대·봉사로 빈곤, 교육, 건강, 성평등 등 SDGs 목표를 지원하는 봉사활동을 전개할 수도 있다.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을 통해 갈등을 줄이고 공동의 행동을 촉진하는 ‘파트너십’이 강조될 수도 있다. 천도교가 사회자본(신뢰·협력·참여)을 통해 공동체 실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SDGs 시민 실천 지원의 협력 플랫폼·중간 지원 조직 역할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하나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 천도교인들이 다같이 참여하고 실천하는 프로젝트를 준비하여 2027년도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에는 세계를 향하여 선포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한울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한울되는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줄기차게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천도교 모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정정숙(종의원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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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7년 1월 11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천도교는 체험종교입니다"포덕 167년 1월 11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 진리와 미신사이 - 교리종교에서 다시 체험종교의 시대로 . . . . "천도교는 체험종교입니다." 정암 박정연 선도사 -
해월 최시형 신사 탄신 200주년 기념사업 본격 추진중앙총부와 해월최시형신사탄신2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이하 '해월신사200주년위원회')는 오는 포덕168년(2027) 해월 최시형 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아 대규모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이를 위한 목적 성금 모금에 나선다. 해월신사는 수운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동학 교세를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민중 속에 굳건히 뿌리내렸을 뿐만 아니라 삼경 사상, 이천식천 사상, 향아설위 제사 등을 통해 동학사상의 대중화를 이룬 스승으로 평가받는다. 중앙총부는 이번 탄신 200주년을 계기로 해월신사의 사상과 업적을 오늘의 시대에 되살리고,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하기 위한 다양한 문화·학술·기록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200주년 기념사업은 ▲탄신 200주년 기념식 및 해월 최시형 문화제 ▲시민과 함께하는 어린이인권문화축제 ▲보물급 유물 공개 특별전 ▲경전 간행 업적을 기리는 해월 마라톤 대회 ▲동경대전·용담유사 목판 제작 ▲해월 최시형 신사 연구 자료집 출간 ▲『읽기 쉬운 해월 최시형 법설』 출간 ▲해월 유적지 데이터베이스(DB) 구축 ▲기념 학술 콘퍼런스 ▲천도교 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구축 ▲해월 최시형 신사 동상 건립 ▲다큐멘터리 제작 ▲홍보 및 기타 사업 등 총 13개 분야로 구성된다. 특히 포덕168년(2027)년 3월에는 서울 인사동 일대에서 시민 참여형 문화제와 창작 공연을 개최하고, 7월부터는 중앙총부 본관(수운회관) 특별전시장에서 동학·천도교 초기 유물과 미공개 사료를 공개하는 전시가 예정돼 있다. 이와 함께 학술 콘퍼런스, 자료집 출간,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등 학문적 기반을 다지는 사업도 병행된다. 중앙총부와 해월신사200주년위원회는 “이번 기념사업은 일부 정부 지원금으로 추진되지만, 모든 사업을 승인·완수하기에는 재원이 충분하지 않다”며 “특히 동상 건립과 다큐멘터리 제작 등은 교단의 위상을 높이고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 사업인 만큼 교인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특별 성금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성금 모금은 포덕 167년(2026) 1월부터 포덕 168년 12월 31일까지 진행되며, 모금 계좌는 우리은행 1005-704-820022(천도교중앙총부)이다.(아래표 참조) 중앙총부와 해월최시형신사탄신2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과거 대신사 출세 100주년 기념관 건립이 오늘의 교단 토대가 되었듯, 이번 성금은 천도교 미래 100년을 여는 씨앗이 될 것”이라며 “동덕 여러분의 정성과 성원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목적 : 해월 최시형 신사 탄신 200주년 성금 성금모금기간 : 포덕167년(2026) 1월 부터 168년(2027)년 12월 31일까지 성금 입금계좌 : 우리 1005-704-820022 천도교중앙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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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은 그의 두 번째 시집인 『접시꽃 당신』으로 문단에 이름을 알리고, 대중적으로도 큰 호응을 받았다. 제50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2017~2019)을 역임했다. 『접시꽃 당신』 외에 『사람의 풍경』, 『세상의 모든 저녁』 등 여러 권의 시집을 상재하고, 신동엽창작기금(1990), 정지용 문학상(2009), 윤동주 문학상 대상(2010), 백석문학상(2011)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 해설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은 제목이 시 전체의 주제를 드러내는 직관적(판단이나 추리 따위의 사유를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이며, 관조적(감정 개입 없이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시상 전개를 따라가 보면, 개개의 꽃에서 전체적인 꽃으로 확대시키는 점층적 표현을 구사하고, 꽃의 줄기와 꽃잎을 인간의 사랑과 삶으로, 자연현상인 비와 바람을 인간의 삶에 닥쳐오는 시련으로 유추(서로 비슷한 점을 비교하여 하나의 사물에서 다른 사물을 추리)하는 표현기교를 사용했습니다. 이 시는 총 2연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연은 5행으로 각운과 대구법을 구사하여 리듬감을 주고 있습니다. 1연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사랑, 2연에서는 비에 젖으며 피는 꽃과 인간의 삶을 비교하여 절묘하게 시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줄기를 곧게 세우는 모습에서 시련, 고난 역경 속에서도 올바른 가치관과 신념으로 역경을 극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꽃이 비, 바람을 맞으며 꽃잎을 따뜻하게 피어나듯이 우리네 사랑과 삶도 시련을 겪으며 아름답게 이루어진다는 보편적 진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감상하면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비, 바람. 천둥, 서리를 견뎌야 한다’는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연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당의 시는 언어의 조탁이 이루어진 반면, <흔들리며 피는 꽃>에 비해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힘은 조금 약한 편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깊거나 온갖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 가난으로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 이 시를 읽게 되면 누구나 시련, 고난이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진한 감동을 주어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샘을 자극하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화려한 시어나 난해한 시어를 사용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시어를 통해 시련과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삶에 위안을 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필자 : 운암 오제운. 신태인교구장, 천도교 동귀일체 고문. 문학박사, 부안문인협회 회원. -
정선 무은담-동학 교단 재기의 바탕을 마련하다무은담 표지판을 촬영하는 필자 무은담 표지석, 해월 신사께서는 무은담에 사는 유인상의 집에 머물며 동학 교단의 재기를 준비한다. 영월에 찾아온 정선 사람 유인상(劉寅常)이 해월 신사를 뵙고 이내 동학에 입도했다. 해월신사께서 신미년 이필제 난을 겪고 영월 직동으로 숨어들어 온 이후, 지역적으로 가까운 정선의 교도들은 해월 신사와 지속적으로 왕래를 하게 된다. 이러할 때 직동을 방문한 유인상을 해월 신사께서 직접 포덕하였고, 이후 유인상이 그간에 정선 지역에서 많은 사람을 포덕한 사실을 높이 사, 이 지역의 도접주(道接主)에 임명하였다. 유인상이 어떤 이유에서 영월의 산간 마을 직동을 방문했는지는 알 수 없다. 유인상의 증손인 유돈생 씨의 증언에 의하면, 유인상의 어머니, 곧 유돈생의 고조할머니가 ‘박씨’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증언을 토대로 족보를 확인한 결과, 성씨가 박씨인 것은 분명한데, 본관이 명기되어 있지 않았다. 하여 유인상과 박용걸이 내외종(內外從) 간이 아닌가, 추정할 따름이다. 따라서 외가 마을을 찾아온 유인상이 해월 신사를 만나게 되었고, 동학에 입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유인상은 1843년생이다. 그러니 해월 신사보다 16년 연하가 된다. 또한 해월 신사를 만나 동학에 입도한 1871년은 그의 나이가 28세 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무은담(霧隱潭)이라는 이름과 산수가 좋은 태백산을 찾아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으로, 학문과 재력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시골 양반이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이 곤경에 처한 해월 신사에게는 더할 수 없이 큰 후원자가 아닐 수 없었다. 유인상이 살았다는 무은담은 정선군 남면 문곡리에 위치해 있다. 무은담 앞으로는 고한읍 갈래천에서 발원한 계곡의 물이 흐르고 있다. 개천 건너편에는 높은 산봉우리가 우뚝 서 있다. 그런 까닭에 이 개천에서는 늘 물안개가 피어올라 앞산 봉우리를 휘감고 있어, 그 풍광이 마치 무릉도원과 같이 아름답다고 한다. 안개가 늘 피어올라[霧] 그 안개 속에 숨어 있는[隱], 그런 못[潭]이라는 뜻에서, 그 이름도 ‘무은담’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을 현지의 사람들은 ‘무른담’, ‘물은담’이라고 부른다. 행정구역상에는 없는 지명이다. 유인상이 살던 정선의 무은담과 영월 직동은 그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 아니다. 지금은 차가 다닐 수 있는 큰 길이 뚫렸지만, 작은 산길 소로로 무은담에서 벌어곡을 지나 자울재라는 고개를 넘고 함백(咸白)을 거쳐, 영화 「엽기적 그녀」 촬영지가 있는 길운산(吉雲山) 옆으로 난 고개를 넘으면 직동 바로 아래 동네인 큰터 골짜기를 만난다. 이렇듯 산간 소로를 통해 유인상은 동학 선생인 해월 신사께서 직동 박용걸의 집에 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만났던 것이다. 이후 해월 신사는 유인상을 따라 정선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게 된다. 또한 영월 소밀원에서 어렵게 사는 대신사 유족들을 정선으로 모셔올 계획을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이 『도원기서』에 기록되어 있다. 待明日 黃昏運送爲計矣 旌善人劉寅常將來 與寅常終夜相議 而問於世淸曰 或東或西乎 旌善姑未去矣 寅常答曰 事將迫矣 吾當速去 師家保護之策 先爲周旋也 願接長中 誰某來之 則周旋之財送之矣 因爲入去 其日薄暮 收其家庄之物 或負或戴 前呼後携 師母氏改男服而着冠 林生負之 處子二人 以着童子之服 主人倍師母 而隨後洙及聖文 擔負以導前向 朴龍傑之家 正月二十八日也 寅常還于本家 厥明日 卽往辛鳳漢之家 以大家救給之策 言之則鳳漢卽備錢二十金 給送主人及洙與聖文來到 寅常處爛熳相議 出於不得已 思之則道之 先入者 只在乾川洞 金谷道人洙使聖文來于洪錫範家 以大家移遷之事 言之則錫範落心千萬 莫知何爲 請來安時默洙曰 老兄之修道 自襄陽來矣 今番襄陽之事 出於亂法亂道之根也 是所謂出於爾者 反乎爾者也 吾 則客地 孤踪束手無策 故大家救急之道 難處也 今於老兄之誠勸 一時救急如何 時默曰 接長之言 實是 爲師家之言也 情力爲矣 及於明日 以十緡錢言之 洙責曰 十緡錢雖爲足矣 然而師家之所率 至於六七口也 以些小之物 何以保用乎 揮却以去 越明日 金敬淳錢三十兩 負來中 錢十兩時默保助十兩 錫範保助十兩 敬淳保助云 先時辛未三月 師母氏來在錫範之家 三朔云云 旌善人辛錫鉉 入道於聖文 崔重燮振 燮入道于洙 至三月初十日 寅常來參先生祭祀 其時主人 使洙亦以悔過之意 作發明章 告祝 旌善收合錢五十金 買家基於永春獐峴谷 移遷安接其時 朴龍傑 之誠力 出於自然之理也 다음날을 기다려 황혼 녘에 옮기기로 계획을 세웠다. 정선(㫌善) 사람 유인상(劉寅常)이 오니, 인상과 더불어 서로 의논하고, 세청(世淸)에게 물어 말하기를, “동쪽으로 가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서쪽으로 가겠는가? 정선(㫌善)으로는 아직 갈 수가 없다.” 하니, 인상(寅常)이 대답해 말하기를, “일이 매우 긴박합니다. 제가 빨리 가서 사가(師家)를 보호할 계획을 먼저 주선해 보겠습니다. 접장(接長)들 중에 누가 오든지 주선하여 물건을 보내시지요.” 이렇듯 의논을 하고 떠나갔다. 그날 저녁에 집안의 여러 물건을 챙겨 혹 짊어지고 혹 머리에 이고 하여, 앞에서는 부르고 뒤에서는 이끌며, 사모님은 남자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관(冠)을 쓰고, 임생(林生)은 짊어지고, 처자(妻子) 두 사람은 동자(童子)의 옷으로 입고, 주인은 사모님을 모시고 뒤에서 따라오고, 강수(姜洙)와 성문(聖文)은 짐을 짊어지고 앞에서 인도하며 박용걸(朴龍傑)의 집을 향해 갔다. 이때가 정월(正月) 28일이었다. 유인상(劉寅常)이 본가(本家)로 돌아가, 그 다음날로 즉시 신봉한(辛鳳漢)의 집으로 가서 큰집[師家]을 구급(救急)할 방책을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니, 봉한이 즉시 돈 20금을 준비하여 보냈다. 주인과 강수, 전성문(全聖文)이 유인상(劉寅常)의 집에 와서 서둘러 상의(相議)를 하니, 부득이 나온 생각이다. 도(道)에 먼저 들어온 사람은 다만 건천동(乾川洞) 금곡도인(金谷道人)들이었다. 강수가 전성문(全聖文)으로 하여금 홍석범(洪錫範)의 집에 오게 하여 사가(師家)를 옮길 일을 이야기하니, 홍석범(洪錫範)이 낙심천만(落心千萬)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더라. 안시묵(安時默)을 오게 하여 강수가 말하기를, “노형은 수도(修道)하기를 양양(襄陽)의 일을 살펴보건대, 난법난도(亂法亂道)의 근원이 여기에서부터 나왔소. 이 일이 이곳에서 나와서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소. 우리는 즉 객지(客地)이고, 또 외로운 사람들이라, 속수무책(束手無策)이오. 사가(師家)를 구할 일이 어려운 처지입니다. 지금 노형이 정성으로 권하여 한때의 급함을 구함이 어떻겠소?” 안시묵(安時默)이 말하기를, “접장(接長)의 말씀이 실로 사가(師家)를 위하는 말씀입니다. 뜻과 힘을 다해 하겠습니다.” 다음날에 이르러 돈 열 꿰미를 주며 말을 하니, 강수가 책망하여 말하기를, “돈 열 꿰미가 비록 족하나, 사가(師家)의 거느린 식구가 예닐곱이라, 사소한 물건으로 어찌 보용(保用)할 수 있겠소?” 물리쳐 가게 하였다. 다음날이 지나서 김경순(金敬淳)이 돈 30냥을 짊어지고 왔다. 그중 10냥은 안시묵(安時默)이 도와준 것이고, 10냥은 홍석범(洪錫範), 또 10냥은 김경순(金敬淳)이 도와준 것이라고 말하였다. 먼젓번 신미년(辛未年, 1871년) 3월에 사모님이 홍석범(洪錫範)의 집에서 석 달을 보냈다고 말하였다. 정선(㫌善) 사람 신석현(辛錫鉉)이 전성문(全聖文)에게 입도(入道)하고, 최중섭(崔重燮), 진섭(振燮)이 강수에게 입도하였다. 3월 10일에 이르러 인상(劉寅常)이 와서 선생의 제사에 참례하였다. 이때 주인이 강수로 하여금 참회의 뜻으로 ‘밝음을 나타내는 글(發明章)’을 짓게 하고 고축(告祝)을 하였다. 정선(㫌善)에서 돈 50금을 수합하여 영춘(永春)에서 장현곡(獐峴谷)에 집터를 사서 옮겼다. 그때 박용걸(朴龍傑)이 정성을 들이고 힘을 썼다. 이는 자연의 이치에서 나온 것이다 - 『도원기서(道源記書)』 대신사 사모님이 사시던 싸내 전경 동학 유적지 싸내 안 내 표지판 수운 대신사의 부인 박씨 사모님이 말년에 기거하시던 곳이다. 유시헌의 증손주 유돈생(우측)과 전세인의 증손(좌측) 전세인의 묘소 전세인은 인제판 동경대전과 도원기서 서유사(書有司)이다. 해월 신사께서 영월 직동에서 거처를 정선으로 옮긴 이후, 유인상의 집을 중심으로 한 정선 지역은 동학 교문의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른다. 특히 대신사 유족을 비롯하여 많은 동학 도인들이 모여들고, 또한 해월 신사 역시 새로운 계획과 함께 동학 교문을 일으키려 시도한 지역이 된다. 어느 의미에서 정선 무은담은 동학 교단 재기의 중요한 발판이 되는 지역이다. 지금은 정선 곳곳에 이곳 무은담을 비롯하여 동학과 관련된 지역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무은담, 싸내, 적조암 등에 정선문화원이 마련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어 그 옛날 동학 도인들이 모여 활동을 한 곳임을 나타내고 있다. 무은담은 유인상의 집을 중심으로 동학 재건의 바탕이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싸내는 대신사 사모님이 줄곧 거주하시다 환원한 곳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적조암은 해월 신사를 비롯한 동학의 인사들이 49일 기도를 행한 곳이다. 수암 염상철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영월 직동 - 대인접물을 설법하다영양 윗대치에서 이필제와의 연계로 해월 신사는 다시 관에 쫓기는 몸이 되어 이곳저곳으로 숨어다니다가, 태백산으로 들어가 14일을 추위와 굶주림으로 보내고 영월 직동(稷洞)의 박용걸(朴龍傑)의 집으로 내려와서 한겨울을 보낸다. 이와 같은 사실을 『도원기서』에서는 다음 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時則九月 序屬三秋 須以行之 登高下底越谷上壁 丹楓蕭瑟 黃葉飄飛 一以觀有水之處 一以擇容膝之巖 掃葉以爲席 結草以爲幕 宵以炮火 晝以伐木 歌唱採薇 飢不適首陽之跡 節比洗耳 羞不堪川之飮 月嫌淸宵 故遮思家之懷 雲蔽白日 空作憶弟之淚 飢眼昏迷 靑山共靜 短腔虛 碧泉盡渴 際虎嘯而起坐 如有勸於敬念 時猿啼而佇立 似有悲於懷人 有何節兮 絶飮不食飮者十日 鹽一掬而盡矣 醬數匙而空也 風蕭蕭而吹衣 露赤身而將何 聲在樹而氣肅 令人懷之 高秋憑念 无到携手上壁 而顧顧相謂曰 兩人之中 誰先誰後 抱落以死於意可也 洙對曰 兄言誰可 死地必 有生隅 吾之兩人 若爲一死 吾之日後之英名 置之十餘年 敬天爲師之道 孰能雪寃而顯名於世乎 姑爲保命不亦宜乎 將以爲行商之儀 飾裝以試之 忍不見其形也 爲其十三日 在民去于嶺南 兩人來于朴龍傑家 是夜三更 朴老見我謂曰 衣之薄着之餘 其間寒苦如何 答曰 如此如此 其老 曰 當此深冬 何往誰救 過冬於吾家如何 答曰 言雖好矣 若爲過冬則 此洞知我者多也 最甚難矣 其老曰掇其內房而在則 誰可知之 對曰 吾非親戚 掇在內房未安 若以老兄之言 則結義如何 其老樂爲結義 明爲始在於內房 而過冬 順興主翁之兄 來爲入道 當臘月主翁 擔一人之服 厥兄擔 一人之服也 明年壬申正月初五日 以悔過之意 作祝文告于天主 初六日主人及洙 自有感古之心 相謂曰 彼雖負我我何負乎 卽往師母氏之家 師母見曰 其間在何處而圖命乎 疇昔之括視尙今記念 兒之不敏 君不過念如何 對曰 過念則何以來之乎 師母氏時爲臥病 米穀艱乏 故送人於順興 則負米送之矣 不違期日來之也 明日還于在處 而又去順興留之林生來之 故負米以送之 不過幾日 林生再來如有愁色 故主人問曰 去不過幾日 有何故而急來 林生默然良久 答曰 世貞方今捉囚於襄陽 故來也 主人及洙聞其言 驚駭不已 夜不能成寐 明日卽往師家 則師母之氣像 未安措 措慓慓 世淸亦爲惶惶 一室憧憧 全聖文適在其時也 師母曰 若在此則禍將及矣 避厄之道 只在於君等 將何以爲之也 洙曰 爲先家眷移于朴龍傑之家 爲可也 때는 9월이요, 절기는 가을이라. 모름지기 길을 떠나, 높은 곳은 오르고, 또 아래로 내려가 계곡을 건너고, 절벽을 오르니, 단풍이 소슬(蕭瑟)하고 누런 가을 잎이 바람에 나부낀다. 한편으로는 물이 있는 곳을 찾고, 한편으로는 무릎이나마 간신히 펼 수 있는(쉴 수 있는) 바위를 찾아 이파리를 쓸어내고 자리를 만들고, 풀을 엮어 초막(草幕)을 지었다. 밤에는 불을 놓고 낮에는 나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고사리를 캐니, 그 굶주림이 수양(首陽)의 자취에 못지않고, 절개는 세이처사(洗耳處士)에 비길 수 있고, 부끄럽기는 영천(潁川)을 마시는 것에 감당할 수가 없다. 달은 맑은 밤을 시기하여 집 생각하는 회포를 막고, 구름은 빛나는 태양을 가려 공연히 동생들 생각을 하게 하여 눈물을 흘린다. 굶주려 눈이 혼미해지고, 청산(靑山)이 한가지로 고요하고, 짧은 창자는 비었고(먹은 것이 없고), 푸른 샘물도 다 말라 버렸다. 범 우는 소리 들릴 즈음에 일어나 앉으니 공경하는 생각을 권함이 있는 것과 같고, 원숭이 우는 소리 들릴 때에 멈추어 일어나니, 사람을 그리워하는 슬픔이 있는 것과 같다. 무슨 절개가 있는가? 마시지 않고 먹지도 못한 지가 열흘이요, 소금 한 움큼도 다 떨어지고 장(醬) 몇 술도 비어 버렸다. 바람은 소슬히 불어 옷깃을 흔들고, 아무것도 입지 못해 헐벗은 몸으로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말소리는 나무에 걸려 있고 기운은 숙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천고(天高)의 가을에, 생각을 기대어 이를 곳이 없으니, 손을 들어 절벽에 올라 돌아보고 돌아보며 서로 일컬어 말하기를,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하고, 누가 뒤에 할꼬. 끌어안고 떨어져 죽는 것이 좋겠구나.” 하니, 강수 대답해 말하기를, “형의 말씀이 비록 옳으나, 죽을 곳에서도 반드시 사는 모퉁이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만약 한가지로 죽어 버린다면, 우리의 일후(日後)의 이름을, 십 년에 두며 하늘을 공경하고 스승을 위하는 도리를 누가 알아 능히 설원(雪冤)을 하며, 세상에 이름을 나타내리오. 아직 목숨을 보조함이 역시 마땅치 않겠습니까?” 장차 행상(行商)을 할 생각으로 행장을 꾸리고 이를 시험해 보니, 그 형상을 차마 볼 수가 없다. 13일이 되어 재민은 영남(嶺南)으로 가고, 두 사람이 박용걸(朴龍傑)의 집으로 왔다. 이날 밤 삼경(三更)에 박 노인이 우리를 보고 말하기를, “옷을 이렇듯 얇게 입었으니 그간의 추위와 고생이 어떠했겠습니까?” 대답하기를, “이러이러했습니다.” 하니, 그 노인이 말하기를, “이렇듯 깊은 겨울을 맞아 어디로 간들 누가 구해 주겠습니까? 우리 집에서 겨울을 보냄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말씀인즉 매우 고마우나, 만약 겨울을 넘기게 되면, 이 동네에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 매우 난처할 겁니다.” 그 노인이 말하기를, “안의 방을 치우고 안에만 계시면 누가 알겠습니까?” 대답하기를, “우리는 친척도 아닌데 방을 치우고 우리가 차지하고 있으면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만약 노형(老兄)의 말과 같이한다면, 결의(結義)를 맺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 노인이 즐거이 결의를 하였다. 다음날부터 안방에서 지내며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순흥(順興)에 주인 노인의 형 되는 사람이 와서 입도(入道)를 하였다. 12월이 되어 노인은 한 사람의 옷을 맡고, 그 형 되는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옷을 맡았다. 다음 해인 임신년(壬申年, 1872년) 정월(正月) 5일에 허물을 뉘우치는 뜻으로 축문(祝文)을 지어 한울님께 고(告)했다. 6월에 주인이 강수와 함께 스스로 옛날이 돌이켜 느껴지는 그러한 마음이 있어, 서로 일컬어 말하기를, “저들이 비록 우리를 저버렸으나 우리가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 즉시 사모님 댁으로 가니, 사모님께서 보고 말하기를, “그동안 어디에들 가 있어 목숨을 도모하였습니까? 지난날에 괄시한 것을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불민(不敏)하였으니 아이들을 과히 허물치 마시오.” 하니, 대답하기를, “지나치다고 생각했으면 어찌 이렇듯 왔겠습니까?” 사모님은 그때 병환으로 누워계실 때였다. 쌀이 없는 까닭으로 날을 기약하고 사람을 순흥(順興)에 보내니, 쌀을 (사람에게) 지워서 보내주었다. 기약한 날을 어기지 않고 쌀이 왔다. 다음날 있던 곳으로 돌아가 또 순흥(順興)으로 가니, 이곳에 머물던 임생(林生)이 왔다. 쌀을 보내온 지 불과 며칠이 되지 않아 임생(林生)이 다시 오고, 얼굴에 근심하는 빛이 있는 것 같아 주인이 물어 말하기를, “돌아간 지 불과 며칠 만에 무슨 까닭이 있어 이렇듯 급하게 왔는고?” 하니, 임생(林生)이 한참 묵묵히 있다가 대답해 말하기를, “세정(世貞)이가 방금 양양(襄陽)에서 붙잡혀 갔기 때문에 왔습니다.” 주인과 강수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마지않았다. 밤에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사모님의 기상(氣象) 또한 편안하지를 못하여 초조하게 떨고 있었다. 세청(世淸)이 역시 황황하여 한 집안이 모두 슬픔에 차 있었다. 마침 그때에 전성문(全聖文)이 왔다. 사모님이 말하기를, “만약 이곳에 있으면 화(禍)가 장차 미칠 것이라. 액(厄)을 피하는 도리가 다만 그대들에게 있으니 장차 어찌하겠소?” 강수가 말하기를, “먼저 가족들을 박용걸(朴龍傑)의 집으로 옮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 『도원기서(道源記書)』 대인접물기념비 -천도교서울교구여성회에서 세운 해월 신사 대인접물기념비 직동으로 들어가는 삼거리 직동 마을을 찾은 동학 유적지 답사단 해월 신사가 관의 추적을 피해 숨어 지내던 호랑이 굴 한겨울을 난 해월 신사는 먼저 자신의 허물을 비는 참회의 기도식을 한다. 박용걸의 집 뒤를 기도소로 만들어 49일 기도를 하고, 이 기도가 끝나는 날, 한때 이필제의 꼬임에 속아 많은 동학 도인들을 잃고, 또 영양 윗대치의 마을이 풍비박산 난 것을 참회하고 한울님께 비는 참회식을 했던 것이다. 이어서 당시 영월 직동에 모인 동학 도인들을 향해 「대인접물」의 법설을 행한다. 영월 직동에서 행한 「대인접물」의 중요한 부분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惡人莫如善待 吾道正則 彼必自正矣 奚暇較其曲直長短哉 謙讓立德之本也 仁有大人之仁小人之仁 正己和人大人之仁心也 以詐交者亂道者 悖道者逆理者也 待人接物 必隱惡揚善爲主 彼以暴惡對我則 我以仁恕待之 彼以狡詐飾辭則 我以正直順受之則 自然歸化矣 此言雖易 體用 至難矣 到此來頭 可見道力矣 或道力未充 率急遽難忍耐 率多相沖 當此時 用心用力順我處我則易 逆我處我則難矣 是故待人之時 忍辱寬恕自責內省爲主 非人勿直 吾非血塊 豈無是非之心 若生血氣傷道故 吾不爲此也 吾亦有五臟 豈無貪慾之心 吾不爲此者養天主之故也 악한 사람은 선하게 대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나의 도가 바르면 저 사람이 반드시 스스로 바화하는 것은 대인의 어진 마음이니라. 거짓으로써 사람을 사귀는 사람은 도를 어지럽게 하고 도를 사납게 하는 자요, 이치를 거역하는 자이니라.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함에 반드시 악을 숨기고 선을 찬양하는 것으로 주를 삼으라. 저 사람 이 포악으로써 나를 대하면 나는 어질고 용서하는 마음으로써 대하고, 저 사람이 교활하고 교사 하게 말을 꾸미거든 나는 정직하게 순히 받아들이면 자연히 돌아와 화하리라. 이 말은 비록 쉬 우나 몸소 행하기는 지극히 어려우니 이런 때에 이르러 가히 도력을 볼 수 있느니라. 혹 도력이 차지 못하여 경솔하고 급작스러워 인내가 어려워지고 경솔하여 상충되는 일이 많으니, 이런 때를 당하여 마음을 쓰고 힘을 쓰는데 나를 순히 하여 나를 처신하면 쉽고 나를 거슬려 나를 처신하면 어려우니라. 이러므로 사람을 대할 때에 욕을 참고 너그럽게 용서하여, 스스로 자기 잘못을 책하면서 나 자신을 살피는 것을 주로 하고, 사람의 잘못을 그대로 말하지 말라. 내 핏덩어리만이 아니러니 어찌 시비하는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만일 혈기를 내면 도를 상하므로 내 이를 하지 아니하노라. 나도 오장이 있거니 어찌 탐욕하는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내 이를 하지 않는 것은 한울님을 봉양하는 까닭이니라. - 『해월신사 법설』 「대인접물」 해월 신사는 ‘내 핏덩어리만이 아니러니 어찌 시비하는 마음이 없으리오(吾非血塊 豈無是非之心).’라는 말을 통해 자신을 늘 경계하고 뒤돌아보며 반성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 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 만한 사람이면 스승으로 모신다(孰非我長 孰非我師 吾雖婦人小兒之語 可學而可師也).’라고 하므로 늘 자신을 낮추며 배우는 마음가짐을 중히 여기는 데에 사람을 맞이하고 사물을 접하는 ‘대인접물’의 정신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거짓으로써 사람을 사귀는 사람은 도를 어지럽게 하고 도를 사납게 하는 자요, 이치를 거역하는 자이니라(以詐交者亂道者 悖道者逆理者也).’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필제의 교언(巧言)에 속아서 많은 도인을 잃은 사실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다. 영월 직동은 깊은 산간 마을이다. 이 산간 마을에서 한겨울을 지낸 해월 신사는 새로이 동학 교단을 일으킬 계획을 한다. 그러나 무작정 계획을 세우는 것만은 아니다. 계획에 앞서 먼저 행했던 일을 돌아보고 깊이 반성하며 한울님께 참회하므로, 이 참회를 통해 새로운 다짐을 한 것이다. 대신사의 가르침과 같이 ‘허물을 뉘우친 사람은 욕심이 중국 제일의 부자인 석숭의 재물이라고 해도 탐내지 않는[懺咎斯人 慾不及石氏之貲]’ 그런 마음의 참회를 먼저 했던 것이다. 천도교 서울교구에서 세운 ‘대인접물(待人接物)’ 조형물이 직동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이곳이 그 옛날 해월 신사께서 대인접물의 설법을 한 곳이오, 하며 선언하듯 묵묵히 서 있다. 산간 마을이 대부분 그렇지만, 직동 역시 갈 때마다 마을이 조금씩 바뀐다. 그사이 길이 넓어지고,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한다. 지금이야 도로가 넓어지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하지만, 그 시절에는 얼마나 깊은 오지였을까. 태백산 깊은 곳에서 매서운 바람과 추위, 굶주림과 싸우는 한편, 마음속에는 커다란 응어리를 안고 말로 하기도 힘든 상황 속에서 견디다, 이곳 직동으로 내려온 것이다. 풍비박산이 나고 그래서 혈혈단신으로 직동으로 왔지만, 해월 신사는 그 많은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동학의 재건을 위해 또 한걸음 크게 내디딘, 참으로 뜻깊은 장소가 아닐 수 없다. 「대인접물」에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사물을 어떻게 접하느냐 하는 해월 신사의 깨달음이 담겨 있다. 비단 동학의 가르침을 넘어 이 시대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로가 조화롭게 어우러져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 가르침. 갈등이 극에 달해 있는 오늘날, 그 가르침의 울림은 더욱더 크다. 수암 염상철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천도교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33인 민족대표 Q. 천도교가 3.1운동을 주도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A. 천도교가 3·1운동을 주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천도교 경전에는 일본을 ‘개같은 왜적 놈’이라고 적지한 바 있으며, 이를 토대로 배일의식이 고조되었습니다. 천도교는 1910년 8월 29일 일제 강점 직후 그 부당성을 알렸으며, 1910년대에는 민족문화추진운동본부, 천도구국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동학혁명과 같은 대중적 독립 만세운동을 준비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대두로 천도교는 이를 기회로 3·1운동을 기획하였으며,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에서는 의암성사 손병희 등 15명이 서명하였으며,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 의주, 등 지방 조직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독립운동 자금으로 기독교에 5천 원을 빌려주기도 하였습니다. 희암 성주현(상주선도사) -
달성공원에 깃든 거목의 숨결: 수운 최제우 대신사와 시인 이상화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동상 대구 달성공원에는 천도교(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이는 1864년 3월 10일, 대신사께서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이라는 누명을 쓰고 대구읍성 남문 밖 관덕당(觀德堂) 뜰에서 순도(殉道)한 역사를 기리기 위함이다. 당시 처형장이었던 관덕당은 아미산 북쪽 영남제일관 서남쪽으로 약 200-300미터 거리에 위치한 군사 무예훈련장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1964년, 전국의 천도교 동덕들이 뜻을 모아 성금을 기탁함으로써 비로소 대신사의 동상이 건립되어 그 숭고한 정신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또한, 달성공원에는 민족의 울분을 시로 달랬던 시인 이상화를 기리는 시비(詩碑)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1948년에 건립되었으며, 한국 문학사에서 특정 문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최초의 기념물이다. 당시 식민 지배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막 벗어난 우리 민족은 장군이나 정치인이 아닌, 오랫동안 민족의 상처 입은 정신을 지탱해온 ‘시인’을 첫 번째 기억의 대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한국 근대문학 100여 년의 역사에서 이상화(1901–1943)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다. 그의 시는 초기의 탐미적 서정성에서 출발해 점차 민족적 양심을 담은 강력한 저항의 목소리로 진화했다. 그는 단순히 시대를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의 아픔과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했다.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상화는 1919년 3·1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그 경험을 삶과 문학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겼다. 그는 당대 '용봉인학(龍鳳麟鶴)'이라 불릴 만큼 출중했던 4형제 중 둘째였다. 독립군 장군이자 임시정부 의원이었던 맏형 이상정,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자 사회학자인 이상백(前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수렵가였던 막내 이상오까지, 이들 형제는 각자의 분야에서 민족의 기개를 떨치며 애국에 매진했다. 특히 이상백 교수는 필자의 선친이자 고고학의 선구자이신 최남주 선생과 매우 가까운 친우(親友)였다. 이상백 교수는 친형 이상화 시인이 천도교 잡지 『개벽』에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 것을 계기로 천도교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이러한 인연으로 선친의 안내를 받아 천도교의 발상지인 경주 구미산 용담정을 여러 번 방문하기도 했다. 이상화의 지적 여정은 폭넓고 깊었다. 그는 서울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며 유럽 낭만주의와 상징주의를 접했다. 1922년 귀국 후에는 대구 대륜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문학 세계를 가다듬었다. 초기작 「마이너」, 「나의 침실로」 등은 섬세한 감정과 내면적 성찰을 담은 서정시였으나, 그는 곧 식민지 현실에 맞서는 저항 시인으로 변모했다. 그 전환점은 1926년 『개벽』 제70호에 발표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였다. 이 시는 노골적인 구호 대신 황폐한 들판과 침묵하는 하늘의 이미지를 통해 상실의 고통을 형상화하며 조선인들의 가슴을 깊이 울렸다. 이상화의 문학적 유산을 논할 때에는 당대 최고의 민족 정론지였던 『개벽(開闢)』을 빼놓을 수 없다. 1920년 천도교청년회의 편집부 청년들이 창간한 『개벽』은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민중을 계몽하고 새로운 세계의 비전을 제시했다. 당시 천도교 청년들은 항일 및 신문화 운동을 활발히 펼치며, 민족문학의 수립과 개벽 문화 확립을 위해 언론·학술·예술을 포괄하는 종합 잡지를 기획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 ‘후천개벽 사상’을 계승한 개벽사가 설립되었고, 잡지 『개벽』이 발간되었다. 일제의 가혹한 검열로 창간호와 임시호가 잇달아 발행금지가 되어 호외호로 발행되는가 하면 전체 발행기간 중 두 번 중 한번은 압수나 발매금지, 기사 삭제가 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총 34회), 『개벽』은 당대 최고의 사상가들과 문인들을 끌어 모으는 요람이 되었다. 김소월, 현진건, 방정환 등이 이곳을 거쳐 갔으며, 초기 국민문학파에서 신경향파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 문학의 흐름을 주도했다. 발매 금지 34회라는 수난 속에서도 독보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 잡지는 1926년에 결국 강제 폐간되었다. 필자는 그 위대한 정신을 기리고자 이상화의 시가 실린 당시의 『개벽』지 70호 영인본(影印本)을 소중히 소장하고 있다. 최근 필자는 대구 달성공원의 수운대신사 동상과 이상화 시비를 참배한 적이 있다. 또한 수성못 인근 상화동산에 위치한 시인의 흉상과 기념비를 둘러보며 그 뜻을 기리기도 했다. 위대한 예술은 침묵과 감시, 그리고 슬픔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상화의 삶은 짧았지만, 그의 정신은 자유를 향한 열망이 담긴 양심의 언어가 되어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대구 달성공원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동상과 시인 이상화의 시비(詩碑)가 나란히 자리한, 한국 근현대사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곳은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민족의 거목들이 쌓아온 정신적 유산이 깃들어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교육장이라 할 수 있다. <필자소개>최정대. 칼럼리스트(충의포 직접도훈)는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회원으로 민간외교에 많은 공헌을 해왔으며, 40년 이상 코리아타임스(The Korea Times)에 국내외 문화와 외교사, 동학 천도교에 관련 정기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또한 그는 한-미협회 뉴스레터의 편집위원이자, 한-스웨덴협회 창립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2010년에는 스웨덴 왕실로부터 북극성 훈장(Sweden’s prestigious Royal Order of the Polar Star)을 수훈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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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윗대치하늘에서 바라본 영양 윗대치 마을 해월 신사께서 머문 집터로 추정되는 감 나무 앞에 선 답사단 대신사께서 대구 관덕당에서 순도한 이후 조선의 조정에서는 동학의 뿌리를 뽑기 위하여, 대신사 수제자들에게 지명수배령을 내린다. 따라서 해월 신사는 대구 성중을 벗어나 안동, 죽 변 등지를 거쳐 영양 일월산 중 산간 마을인 용화동 윗대치로 숨어든다. 영양 윗대치에 해월 신사께서 오셔서 산다는 소문을 듣고, 동학 도인들이 이곳 윗대치로 모 여들기 시작하였다. 또한 영월 동관음에 숨어 살던 수운 대신사의 사모님과 자제들이 찾아와 함께 살게 된다. 명실상부 영양 윗대치라는 산간 마을은 해월 신사를 중심으로 동학 재건을 위 한 마을이 된 것이다. 『도원기서』에 이와 같은 사실이 전해진다 過一年 移遷英陽龍化洞 永以不出山外之意 誓以隱跡云云 夢外乙丑歲七月 師母氏率其子女 男負女戴 莫樣以來到 主人見其師母氏之情像 心斷臆寒 莫悶其來然 而蒼猝之勢也 故卽許以 主人家 主人出于他家云云 自甲子以後 所謂道人者 或死或存或棄 閉無相通 永爲絶跡 而彼此 相見如見仇讐 自不能相從也 主人自入山後 身爲山翁 極勞於稼穡之役 而却恐 種桃之跡露 然 而當此時 師家之計活 矜憫難言 歲月如流 遞當丙寅之三月矣 臭味自香 近響遠照 始自尙州 自 然有知 幸賴師家之輔力 俗所謂活人之佛言也 是歲三月初十日 卽先生終朞之日也 尙州人黃文 奎 韓振祐 黃汝章 全文汝 極懷反哺之情孝 而致有追遠 感奠之誠 自懷故之行也 自此以後 師 家之輔護 出於尙州 而惠及於飢者之食也 此時 姜洙當於三月初朔 自量爲思 則今年先生終朞 則其子弟 必爲來龍潭矣 去必逢之 卽爲發行 往尋孟潤氏之家 則厥後莫樣頭緖 方爲賣計於綑 屨 以食也 以其碩大壯氣 困於此地 忍不得難言 而自夕至夜 待所不來 其夜則乃先生諱日也 孟 潤氏 亦爲感悵 而洙此不禁其懷 苦待終無消息 臥起不眠 達夜空嘆 及其曉頭 洙言曰 日已白矣 吾將欲速 孟潤氏曰 君恐指目 而雖爲速去 食飯以去矣 洙曰 此處則有名之地 吾何爲見人之所 指也 卽拜而還家 全聖文者 本是盈德人也 自甲子後 無家紛走來 接主人之比隣其時 自遠以來 同居接隣者 惟全德元 鄭致兼 全潤吾 金成眞 白玄元 朴皇彦 金艮彦 黃在民 權成玉 金性吉 金 啓岳也 丙寅秋八月 江都之亂 一國騷搖 其時道人 失源者欲探其主人之在處 然難尋隱跡之深 居 至於九月 全聖文 適有盈德之行 姜洙偶逢 其人問其師家之所在 主人之所居 聖文曰 初有疑 訝而不言 其實觀其洙之憫然之像 乃言其師家之居處也 洙喜聞其言 卽通朴春瑞 期日發行于主 人家 世貞聞洙與春瑞之來 足不移之以來 握手而言曰 劫過三年之懷 孰勝於彼此也哉 師母氏 孤在此處者 固無强近之族 只有道人之追 故爲人弟子者 親爲倍見於師母 古所不有然 至於此 有此 拜師母之禮 實乃孤踪之故也 是以 尊號曰 大家云云者 自是以出也 是歲十月二十八日 卽 先生之生辰也 洙與春瑞 往參祭祀 主人發論曰 至于今日 道人相會者 如此 自明年丁卯三月爲 始 爲先生成契如何 洙對曰 隆師之道 及於吾輩之情 莫大於此也 主人曰 期於一年 再次生辰與 忌日 各料四盞 以爲春秋之享祭 卽修契案 通文于各處 일 년을 보낸 후에 영양(英陽) 용화동(龍化洞)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영원히 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맹세하고,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뜻하지도 않게 을축년(乙丑年, 1865년) 7월, 선생의 부인이 자녀들을 이끌고 찾아왔다. 주인이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끊어지고 가슴이 막혀 차마 어떻게 오셨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별안간에 닥친 일이라 자신의 집에 들게 하고 주인은 다른 집으로 옮겨갔다. 갑자년 이후로부터 도인이라는 사람들은 혹 죽고 혹은 살아남은 사람도 있으며, 혹은 도를 버 리고 서로 상통(相通)하지 않아, 오랫동안 발길이 끊어져, 피차간에 서로 보기를 원수 보는 것과 같이 하기도 하며 서로 왕래를 하지 않았다. 주인은 산으로 들어간 후, 몸은 산옹(山翁)이 되었고, 농사일에 극력 힘을 쓰며, 스스로 발각되고 또 노출될 위험을 없애 버렸다. 그러나 이즈음 선생의 집은 그 생활의 어려움을 말로 다 하기 어 려웠다. 세월은 흘러 병인년(丙寅年, 1866년) 3월이 되었다. 소문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서 소식을 접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상주(尙州)에서도 자연히 알게 되어 선생의 집을 돕게 되었다. 이해 3월 10일은 선생의 기일(忌日)로 복(服)을 벗는 날이다. 상주 사람 황문규(黃文奎), 한진우(韓振祐), 황여장(黃汝章), 전문여(全文汝) 등이 선생을 그리워하는 정을 지극하게 품으며 정성으로 제사를 지냈다. 이때부터 선생의 집을 (도인들이) 보호하게 되었고, 따라서 굶는 식구 들에게 도움이 미치게 되었다. 이때에 강수(姜洙)가 3월 초승을 맞아 스스로 생각을 헤아려 보건대 금년이 선생의 종기년(終 期年)인즉 그 자제가 반드시 용담(龍潭)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게 되면 반드시 이들을 만 날 것이라 여기고 길을 떠나 맹륜(孟倫)의 집을 찾아갔다.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두서(頭緖)를 그릴 수는 없으나, 그때에 (맹륜은) 나막신을 만들어 팔아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 크고 장대했던 기질로 이와 같이 곤경을 겪고 있으니 차마 말로 다 하기 어려웠다. 저녁부터 밤까지 기다렸으 나 자제들은 오지 않았다. 그 밤은 곧 선생의 기일(忌日)이었다. 맹륜 역시 슬픔이 가득했고, 강 수 역시 그 감회를 금할 수 없어 고대(苦待)하고 기다렸으나 끝내 소식이 없었다.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며 밤을 새우고 공연히 한숨만 쉬었다. 새벽녘에 이르러 강수가 말하 기를, “날이 이미 밝았소. 나는 바삐 가겠소.” 하니, 맹륜이 말하기를 “그대가 지목(指目)이 두려워 바삐 가려 하니, 음식이라도 들고 가시오.” 강수 말하기를, “이곳은 유명한 곳인데 내가 어찌 지목을 받지 않겠소.” 즉시 절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전성문(全聖文)은 본래 영덕 사람이다. 갑자년 후로부터 집이 없어, 이곳으로 와서 주인의 이웃 으로 살게 된 사람이다. 그때 멀리에서 와서 같이 살며, 가까이 한 사람들은 김덕원(金德元), 정 치겸(鄭致兼), 전윤오(全潤吾), 김성진(金成眞), 백현원(白玄元), 박황언(朴皇彦), 황재민(黃在民), 권성옥(權成玉), 김성길(金成吉), 김계악(金啓岳) 등이다. 병인년(丙寅年, 1866년) 8월은 강화(江華)의 난이 일어나 나라가 소란스럽고 어지러웠던 때이다. 그때 도인들 중 연원(淵源)을 잃은 사람들이 주인이 있는 곳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숨은 곳이 깊어 찾기가 어려웠다. 9월에 전성문(全聖文)을 영덕으로 보냈다. 강수가 우연히 만나, 선생의 집과 주인이 사는 곳을 물으니, 전성문이 처음에는 의심하여 그 실상을 말하지 않다가, 강수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이내 선생 부인이 사는 곳을 말해 주었다. 강수는 그 말을 듣고 기뻐서 즉시 박춘서(朴春瑞)에게 통지하고, 주인의 집을 향해 떠났다. 세정(世貞)이 강수와 박춘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손을 잡고 서로 만나 말하기를, “지난 3년간의 회포를 이야기한다면, 무엇이 이것보다 더하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의 부인에게는 진실로 가까운 친척도 없고, 다만 따르는 도인들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친히 선생의 부인을 모시었다. 옛날에 그러함이 없었으면 지금에 이르러 이러 함이 있겠는가. 선생의 부인께 절하여 예(禮)를 올리니, 실로 외로운 자취인 까닭이다. 모두들 높 여 말하기를 큰집[大家]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바로 이때부터 나온 것이다. 이해 10월 28일은 선생이 생신이다. 강수와 박춘서가 제사에 참례하고, 주인이 발론(發論)하여 말하기를, “오늘에 이르러 도인이 서로 모인 것이 이와 같으니, 내년 정묘년(丁卯年, 1867년)부터 선생님을 위하여 계(契)를 시작함이 어떻겠느냐?” 하니, 강수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를 크게 일으키는 것이 우리들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큰 것입니다.” 주인이 말하기를, “일 년을 기하여 생신과 기일에 두 번 각각 4전(錢)씩을 내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모시자.” 하며 즉시 계(契)의 안(案)을 다듬어 각처에 통문(通文)하였다. - 『도원기서(道源記書)』 해월 신사 은거 유허비 제막식 해월 신사 은거 유허비 제막식 영양 윗대치는 당시 모여드는 동학 도인들로 하여 ‘동학 공동체 마을’과 같았다. 대신사 사 모님을 중심으로 대신사 승통일인 4월 5일, 대신사 탄신일인 10월 28일, 대신사 순도일인 3월 10일, 이렇듯 일 년에 세 번의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자연히 제사를 모시는 날이면 다른 지역 의 동학 도인들도 참여하게 되고, 이 자리를 빌려 동학 재건을 논의하게 된다. 외씨버선길 사계절마다 49일의 특별 기도식을 봉행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와 함께 해월 신사께서 친히 스승님인 대신사 가르침의 글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입으로 구송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받아쓰게 함으로써 스승님의 가르침을 펴기도 했다. 이 내용이 『천도교회사 초고』에 나온다. ‘先時에 東經大典과 遺詞가 大神師l 被害되심을 經하야 火燼하고 無한지라 神師 默念하시다가 東經大全과 遺詞를 口呯하사 人으로 하여금 書케 하시다’. - 『천도교회사 초고』 또한 각처로 사람을 보내 도인들의 신심(信心)을 고취하고, 해월 신사께서 직접 각 처를 방 문하여 법설을 펼치기도 한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또 비밀히 사람을 각처로 보내 道人의 信心을 고취시키고, - 『천도교회사 초고 ‘自今으로 吾道人은 嫡庶의 別을 打破하야 天然의 和氣를 傷치 말라.’는 설법을 했다. - 『천도교회사 초고 윗대치에서 머지않은 곳에 자리 잡은 아랫대치 자생화 공원 반변천 발원 표지비. 영양의 중심 하천인 반변천은 영양 윗대치에서 시작된다. 윗대치 가는 길 외씨버선길- 청송에서 시작해서 봉화까지 이어지는 외씨버선 둘레길. 그 가운데 7코스가 윗대치 마을을 지나 간다. 외씨버선은 영양 출신인 조지훈 시인의 승무에서 따온 문구이다. 이렇듯 적극적으로 가르침을 펴고 각지를 순회하므로 경북 영양 일월산 중의 산간 마을인 윗대치는 경상도 일원과 강원도 일원에 퍼져 있는 모든 동학 도인들을 지휘하는 동학의 대도 소(大都所)가 된 것이다. 이곳에서 해월 신사는 7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동학 재건을 꿈꾼다. 지금은 ‘윗대치’를 그곳 사람들은 ‘윗대티’라고 부른다. ‘치’는 언덕이라는 뜻의 ‘치(峙)’이다.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영양 동학혁명기념사업 추진방안 연구’ 사업을 수행한 바 있으며, 그 그런데 고구려 방언에 따르면 원래는 ‘치’가 아니라 ‘티’라고 부른다. 구개음화 현상 때문이다. 영양의 용화동은 신라 방언이 아닌 고구려 방언 지역이기 때문에 ‘윗대티’로 발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해월 신사는 위대치에 머무는 동안 경상도 일원과 강원 도 일원에 걸쳐 동학 교도들을 관장하며, 동학 재기를 위 하여 위대치를 그 발판으로 삼았다. 그러나 영해 지역에 들어와 있던 이필제가 영해부를 습격하기 위해 해월 신사 께 사람을 보내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로 인하여 7년간 동학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 영양 윗대치 마을은 관군의 침입을 받아 풍비박산이 난다. 해월 신사 등은 간신히 봉화로 피신하였다가, 낮에는 숨고 밤에 는 걸어서 수운 대신사의 유족들이 살고 있는 영월 소밀원 으로 찾아가는가 하면, 간신히 밥 한 그릇을 얻어먹는 등 사방으로 피신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왕래 가 없는 태백산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현재 윗대치는 생태마을로 지정이 되고, 도회지 사람들 이 전원주택을 짓고 들어와 산다. 그러나 아직 마을이 활 실천 결과물로서 유허비를 착공하였다. 유허비는 해월(海月) 신사의 호를 상징하는 밤바다와 성화되지 않고 산간 마을의 형태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던 것이 2023년 10월 영양군과 인시천영양동학해월최시형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동학 해월 최시형 선생 은거 유허비’를 착공하고 2024년 6월 6일 유허비 제막식을 개최했다. 인시천 영양동학해월최시형기념사업회는 10여 년 전 윤석산 교수가 중심이 되어 천도교인 유기제 전 영양군 농민회 회장과 함께 시작한 영양 지역의 동학 공부 모임이다. 그간 ‘해월 최시형 은거 지 인문자연자원 고증 연구’와 강연회 등 영양 지역과 관련하여 동학 천도교의 역사적 의미를 드러내는 다양한 활동을 지속해 왔다. 저자 역시 2023년에 해월 신사의 영양 거주 활동에 관한 170 깜깜한 세상을 밝히는 달을 형상화하였으며, 비문은 윤석산 교수가 다듬었다. 윤석산 교수는 이와 관련해 “2000년도부터 이곳 용화동을 드나들었다. 해월 선생 유허비를 세우느라 군청에도 여러 번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군수님이 지원해주기로 했는데 주민이 반 대하여 중단되는 등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인시천 이상국 회장을 비롯한 군의회에서 적극적 으로 도와주어서 오늘 감격스럽게 유허비가 서게 되었다.”라며 소감을 밝힌 바 있다. 해월 신사 은거 유허비가 일월산 자락 깊은 골짜기마다 해월 신사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널리 꽃피울 수 있기를 바란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한강 시인의 「심장이라는 사물」에 대한 감상『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희랍어 시간』 『흰』등의 소설로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그 시집 속에 한 편인 「심장이라는 사물」은 2013년에 ‘문학과 지성사’를 통해 발표된 것으로, 한강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마음과 정서를 언어로 온전히 표현하기 어려움을 고도의 은유적 사유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 전체는 언어의 한계와 그 너머를 향한 시인의 치열한 탐구를 보여줍니다. 심장이라는 사물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 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ㄱ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밀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이 작품을 「천도교 신문」에 소개하는 것은 심학心學을 하는 천도교인들과 일반인들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정신적 깊이가 어떠한 지를 이해하고 고도의 은유적 사유를 독자들이 조금이나마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품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 1연의 ‘지워진 단어’는 문학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마음과 정서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해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퇴고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는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따르는 근본적인 어려움을 드러냅니다. - 2연의 ‘ㄱ’과 ‘ㄴ’은 단어의 일부일 뿐,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기호입니다. - ‘ㄱ’은 목구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연구개음, - ‘ㄴ’은 혀가 입천장에 닿아 만들어내는 설음으로, 이들은 모두 발음기관의 물리적 움직임에 불과합니다. 결국 이는 마음을 언어로 담아내는 데 따르는 한계를 상징합니다. 또한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있던 사이들’은 퇴고조차 불가능한, 애초에 표현되지 못한 생각과 감정을 가리킵니다. - 3연에서는 이러한 언어적 한계를 넘어설 시인의 노력이 신체적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어깨, 허리, 무릎, 발목을 말고 접고 구부려 오므리며,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마음의 구멍 속, 곧 심장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몸짓이 그려집니다. - 4연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도달하지 못한 좌절이 드러납니다. 마음은 점차 희미해지고, 언어의 무력함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 5연의 ‘덜 지워진 칼’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적 세력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들이 입술을 가르자, 시인은 더 이상 밖으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는 자아의 모습을 형상화합니다. 이는 언어와 표현을 둘러싼 사회적 억압까지 아우르는 강렬한 은유라 할 수 있습니다. * 종합 감상 「심장이라는 사물」은 언어의 불완전성과 그 한계를 넘어 마음을 표현하려는 시인의 치열한 몸짓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언어를 억압하는 외적 폭력까지 포착하며, 언어·몸·사회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마음을 탐구하는 시적 사유를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독자들의 감상포인트 이 시를 접하는 독자들께서는 이번 기회에 미묘하고 복잡한 마음의 세계를 글로 한 번 표현해 보시고, 언어의 한계를 체험해 보셨으면 합니다. 또한 사회의 부조리를 표출하려 할 때 언론에 대한 탄압과 그 속에서도 정의의 꽃을 피운 언론의 역할을 생각해 봅시다. 글 운암 오제운 / 신태인교구장, 동귀일체 고문 -
포항 흥해 검곡검곡은 해월 신사께서 살던 곳이다. 부모를 모두 잃고 가진 것조차 없이 친척 집을 전전하며, 아직 어린 나이에 해월 신사는 떠돌이와 같이 살아갔다. 나이 열일곱 살 때는 제지소(製紙所)의 심부름꾼으로 일하기도 했다. 성년의 나이에 이르러 밀양 손씨를 부인으로 맞아 혼인했다. 결혼 후에도 흥해 일대 터일 마을 안쪽 음금당 마을이나 마복동(馬伏洞) 등지를 옮겨 다니며 10년 가까운 시간을 살아갔다. 이렇듯 가정을 이룬 후에도 한 장소에서 안정되게 거주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살던 해월 신사는 서른세 살이 되는 해인 1859년, 오랫동안 살았던 마복동 일대를 떠나 그 마을 안쪽 산간에 자리한 작은 마을인 금등골, 즉 검곡(劍谷)으로 이주했다. 검곡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마북리 안쪽 산속에 있는 지역이다. 예전에는 몇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그저 산속일 뿐이다. 어려운 사람들이 이 깊은 산속까지 들어와 살며 농사를 지었다. 마을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옛날에는 4가구 정도가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마북리에서 이 지역을 바라보면, 첩첩이 겹쳐진 산들만 보일 뿐 이런 오지에 마을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비 오는 여름날이면 비와 함께 산골짜기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무로 인하여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산속일 뿐이다. 마북리 마을을 지나 계곡으로 들어서자 포항 상수원 댐(상수원 보호구역)이 조성되어 있어 부득불 마을 이장님과 주민이 동행했다. 검곡(劍谷)이라는 이름 그대로 아주 깊은 산골짜기이다. 돌밭(너덜지대)과 계곡을 지나 깔닥 언덕을 올라가니, 옛 집터와 축대, 허물어진 담, 감나무 몇 그루, 작은 대나무밭 등이 남아 있었다. “인적은 간 데 없고, 옛터는 무심히 세월 속에 묻혀가고 감나무에 남은 까치밥만 반겨주네.” 허물어진 담 앞에 서자 입에서 문장이 절로 흘러나왔다. 실상 검곡은 정상적인 마을과는 동떨어진, 화전민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산 중턱에는 화전을 일구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해월 신사는 이곳에서 화전을 일구며 화전민으로 살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검곡에서 용담까지는 70리 길이다. 산과 산으로 이어지는 길일 것이다. 해월 신사는 70리 길을 걸어 용담에 가서 수운 대신사께 가르침을 받고는 다시 돌아와 가르침과 똑같이 행하며 수련을 했다. 신광면 마을 입구에 있는 해월신사 어록비 해월신사께서 일을 하던 제지소가 있던 마을(터일리) 수운 대신사께서 임술년 3월 남원 은적암에서 돌아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박대길의 집에 머물 때, 해월 신사께서 찾아온다. 오랜만에 만난 스승과 제자는 그간 어떻게 공부를 하였는가를 놓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이에 관한 기록을 『도원기서』에서 찾아본다. 慶翔問曰 生其間所工 不實 然有如此之異 何爲其然也 先生曰 且言之 慶翔跪告曰 以油半宗子 達夜二十一日 其故何也 先生曰 此則造化之大驗 君等心獨喜自負也 慶翔又問曰 自後布德乎 曰布德也 경상(慶翔)이 묻기를, “제가 그간 공부가 독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상한 일이 생기니, 어찌해서 그렇 게 되는 것입니까?” 선생께서 말하기를, “계속 말을 해보라.” 경상이 꿇어앉아 고(告)하기를, “반 종지의 기름으로 스무하루의 밤을 밝혔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선생께서 말하기를, 경상이 또 묻기를, “이후부터 포덕을 할까요?” “포덕하도록 하여라.” - 『도원기서(道源記書)』 대신사께서 남원에 가 있고, 안 계실 때 행했던 수행과 공부에 관하여 해월 신사께서 대신사께 말씀을 드린다. 특히 수행하던 중 일어났던 이적(異蹟)에 관해 말씀을 드리자 대신사는 “그것은 조화(造化)의 커다란 효험이다.”라고 대답한다. ‘조화’란 무엇인가. 주문을 해의하는 자리에서 대신사는 ‘조화자 무위이화의(造化者 無爲而化矣)’라고 말씀하고 있다. 조화란 다름 아닌 한울님의 작용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해월 신사께서 한울님의 작용, 곧 한울님의 힘을 얻었다는 말씀이 된다. 그러고는 바로 ‘포덕’을 명한다. 포덕이란 한울님의 덕을 세상에 펴는 것이다. 한울님의 덕을 세상에 펴기 위해서는 먼저 한울님의 덕을 깨달아야 한다. 해월 신사께서 한울님의 덕을, 한울님의 작용을 회복하였기 때문에 포덕을 명한 것이다. 이러함이 이후 대신사로 하여금 해월 신사께 도통을 물려주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된다. 도통 전수의 장면이 『도원기서』에 나온다. 이 부분을 보기로 하자. 特爲執筆 以受命二字書 告而受訣曰 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 授之曰 此詩 爲君將來 後之事 而降訣之詩也 永爲不忘也 특히 붓을 잡아 ‘수명(受命)’ 두 자를 써서 주었다. 한울님께 고(告)하여 결(訣)을 받아 ‘용담의 물 이 흘러 사해(四海)의 근원이 되고, 검악(劍岳)에 사람이 있어 한 조각 굳은 마음이다(龍潭水流 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 등의 시를 써서, 이를 경상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 시(詩)는 그대의 장래 일을 위하여 내린 강결(降訣)의 시이다.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라.” - 『도원기서(道源記書)』 해월 신사는 이곳 검곡에 살면서 신유년(1861년) 6월 동학에 입도한다. 이후 수운 대신사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으면 집에 돌아와서 그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였다고 한다. 해월 신사께서 대신사를 처음 뵙고 가르침을 받은 감동의 말씀이 『해월신사 법설』 「독공」에 나온다. 余少時自思 上古聖賢 意有別樣異標矣 一見大先生主心學以後 始知非別異人也 只在心之定不 定矣 行堯舜之事 用孔孟之心 孰非堯舜 孰非孔孟 諸君體吾此言 自强不息其可矣哉 吾雖未貫 唯望諸君之先通大道也 내가 젊었을 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옛날 성현은 뜻이 특별히 남다른 표준이 있으리라 하였더니, 한번 대선생님을 뵈옵고 마음공부를 한 뒤부터는 비로소 별다른 사람이 아니요, 다만 마음을 정 하고 정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인 줄 알았노라. 요순의 일을 행하고 공맹의 마음을 쓰면 누가 요 순이 아니며 누가 공맹이 아니겠느냐. 여러분은 내 이 말을 터득하여 스스로 굳세게 하여 쉬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나는 비록 통하지 못했으나 여러분은 먼저 대도를 통하기 바라노라. - 『해월신사 법설』 「독공」 이러한 감동과 함께 해월 신사는 자신과 같은 하층민의 사람도 성현(聖賢)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이에 대신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며 수련에 정진한다. 추운 겨울에도 계곡의 찬물에서 목욕하고, 주문 수련을 하여 마침내는 기름 반 종지로 열다섯 날을 보내는 경험, 천어(天語)를 듣는다는 심오한 종교적 체험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검곡은 해월 신사께서 단지 살던 곳만이 아니라, 대신사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깊은 종교적 깨달음을 얻은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그 결과 해월 신사는 대신사로부터 무극대도를 전수받는, 도통(道統)의 대임(大任)을 물려받는다. 검곡에 올라가기 위해 마복동 신광온천 마당에 먼저 모인다. 신광온천 마당 한편에는 「해월 신사 어록비」가 큼지막하게 서 있다. 어록비의 내용은 『해월신사 법설』 중 「대인접물」의 일부이다. 글씨는 이 비를 세울 당시 이곳 신광중학교에 다니는 이향미 학생이 썼다(1998년 9월 20일). 천도교 동덕들이 힘을 들여세운 비이다. 특히 박노진 동덕이 큰 노력을 했다. 해월 최시형 신사 옛집터 훼손된 표지판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검곡 가는 길에 서 있는 감나무_감나무로 인해 오래전 사람이 살았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검곡으로 가는 길 해월신사께서 새벽기도를 하시기 전에 목용을 하시던 샘물로 추정되는 곳. 해월신사께서는 이곳에서 "찬물에 목욕하면 몸에 해롭다"는 천어를 들었다. 검곡으로 가는 마른 계곡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사랑’, 그 뿌리가 천도교에 있었다고요?소파 방정환 선생 Q.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사랑’, 그 뿌리가 천도교에 있었다고요? A. 소파 방정환 선생은 천도교 3세 교조 의암 손병희 성사의 사위로, 천도교 사상과 실천 속에서 성장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어린이도 한 인격체”라는 인식을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제시하며, 어린이를 보호와 훈육의 대상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천도교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어린이날 제정에 앞장섰으며, 천도교소년회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어린이를 위한 잡지 『어린이』를 창간·간행해 어린이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동화와 동요 창작, 어린이 대상 강연과 계몽 활동을 통해 어린이의 권리와 행복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힘썼습니다. 그의 활동은 천도교의 인간 존중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근대 아동운동의 출발점이자, 오늘날 어린이 인권 담론의 중요한 뿌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희암 성주현(상주선도사) -
수운 대신사 생가수운대신사 생가 전경 대신사께서 태어난 곳, 즉 생가는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이다. 1824년 10월 28일(음)에 어머니 한씨 부인 사이에서 최옥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옥이 후사가 없자 동생의 아들인 제환을 양자로 들인 후이다. 대신사는 최옥 나이 63세에 태어난 만득자(晩得子)이다. 그러나 과부였던 한씨 부인이 재가를 하여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서자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나이 스물이 될 때까지 생가에서 살았지만, 화재로 집이 모두 소실되어 잠시 장조카 최세조와 지동에 가서 살다가 용담 깊은 산속의 와룡암 자리의 집으로 들어갔다. 『동경대전』 「수덕문」 중에 이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先考平生之事業 無痕於火中 子孫不肖之餘恨 落心於世間 豈不痛哉 豈不惜哉 아버지 평생의 사업은 화재 중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이 되어 버렸고, 자손의 못난 한을 세상에 떨어져 버렸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동경대전』 「수덕문」 대신사 대사모 숭모비 : 숭모비는 박노진 선도사와 여성회 본부의 제안에 따라 1년여간 성금을 모아 건립하였다. 하늘에서 바라본 수운 대신사 생가 전경 수운 대신사 생가 사랑채 수운 대신사 유허비 : 생가 복원하기 전의 유허비(좌측)와 생가 복원 후 이동한 자리에 있는 유허비(우측) 대신사 생가는 용담정 주차장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화재로 소실된 이후 대신사 생가는 오랫동안 빈터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1971년 천도교가 주축이 되어 마당에 귀부와 이수를 갖춘, 5m 높이의 유허비를 세웠고, 2011년 11월 경주시가 동학 발상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하였다. 지난 2023년 10월 28일에는 천도교중앙총부에서 대신사 생가 터에 대신사 대사모 숭모비를 건립하였다. 숭모비는 박노진 선도사와 여성회 본부의 제안으로 2022년 건립추진위가 구성되고 1년여 동안 2,400여만 원의 성금을 모아 건립되었다.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도를 펼치기 위해 평생을 바치신 대신사의 정신을 온전히 계승하고, 부화부순의 종지를 온 천하에 알리는 뜻깊은 비석이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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