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남원 은적암대신사께서 신유년(辛酉年, 1862년) 6월 용담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을 향해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대신사로부터 배움을 받기 위해 용담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문을 열고 맞이하니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開門納客 其數其然].’ 또 일 년이 지난 후에 먼 곳 혹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았다고 한다. 당시의 이러한 풍경을 대신사의 수양딸이 회상하는 기록이 있다. 대신사의 수양딸은 1920년대 후반까지 살았는데, 그때 이미 나이가 팔순이 되었다. 이 수양딸을 천도교의 이론가인 김기전(金起田)이 인터뷰한 기록이 있다.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신유년 포덕 당시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신사께 예물로 곶감을 많이 가지고 왔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용담정 부근에 버려진 곶감꽂이만을 짊어지고 가도 인근 마을 사람들의 땔나무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너무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손님들 조석(朝夕) 준비에 수양딸과 부인 박씨 부인은 나날이 바쁘고 힘이 들었으며, 특히 날이 저물어 저 많은 사람이 어디에서 다 잠을 자나 하고, 아직 어렸던 수양딸은 혼자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용담으로 들어가는 작은 산길은 마치 장터마냥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小春, 「大神師 收養女인 八十老人과의 問答」, 『新人間』 통권 16호, 1927. 9.) 이렇듯 많은 사람이 용담으로 모여들고 동학을 공부하니 유생(儒生)들과 관이 관심을 두게 되고, 마침내는 탄압을 하게 된다. 이에 대신사는 용담을 떠나 전북 남원으로 가게 된다. 용담을 떠난 대신사는 먼저 울산으로 갔다. 이곳에서 여러 도인을 만나고, 며칠을 머문 후 부산으로 간다. 부산에는 누이동생이 살았다고 한다. 표영삼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부산 대신동에 누이동생이 대신사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산당(山堂)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부 산에서 배를 타고 오늘의 진해시(鎭海市)에 속한 웅천(熊川)이라는 마을에 가서 유숙하게 된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길을 떠나 승주(升州)를 지나며 충무공(忠武公)의 사당에 배알하고, 충무공이 남겨 놓은 보국(輔國)의 정신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 보기도 한다. 이어서 전라도 무주(茂州)에서 잠시 머문 뒤에 다시 길을 떠나 남원(南原) 땅에 이르게 된다. 대신사는 이렇듯 며칠을 걷고 걸어 남원에 이르게 되고, 남원 광한루(廣寒樓) 근처에 살고 있는 서형칠(徐亨七)의 집을 찾아가게 된다. 다른 기록에는 서공서(徐公瑞)라는 사람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가 12월 중순 무렵으로 추정된다. 길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난 뒤이다. 서형칠은 한약방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신사의 제자 중 최자원(崔子元) 등 약종상을 하는 사람이 있어, 이들 제자들의 알선으로 남원의 한약상인 서형칠의 집을 찾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형칠의 집에서 잠시 머물다가, 서형칠의 생질(甥姪)되는 공창윤(孔昌允)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열흘 가까이 머물게 된다. 이곳에 머물며 대신사는 서형칠, 공창윤, 양형숙(梁亨淑), 양국삼(梁國三), 이경구(李敬九), 양득삼(梁得三) 등을 포덕하기에 이른다. 남원에 도착한 지 10여 일이 지난 12월 그믐쯤 대신사는 이들의 안내를 받아 남원 교외의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에 있는 선국사(善國寺)라는 절을 찾아가게 되고, 이곳에서 산속으로 조금 떨어진 덕밀암(德密庵)이라는 작은 암자로 가게 된다. 이곳에 머물면서 수운 대신사는 자신이 스스로 이곳에서 ‘자취를 감춘다’라는 뜻의 은적암(隱跡菴)으로 그 암자의 방 하나를 이름하고, 1862년 3월까지 머물고 나서 경주로 돌아온다. 은적암이 있는 덕밀암은 전북 남원 동편, 교룡산성(蛟龍山城) 속에 있는 선국사(善國寺)라는 절에 딸려 있던 작은 암자이다. 이 산성은 원래 백제 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성은 조선 시대에 쌓은 것이다. 이곳은 국방상 매우 중요한 요새지로서 남으로부 터 침략하는 왜구를 견제하기 위하여 산성을 구축했다. 당시는 남원부(南原府)의 관리를 받아왔고, 남원부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 일대와 호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을 수비하던 전략 요새의 외성(外城)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성 입구에는 이 산성을 지키고 수비하던 비장(碑將)들의 비석이 줄줄이 서 있어, 험난했던 지난 역사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은적암을 품에 안듯이 둘려 있는 교룡산성 뒤쪽으로 솟아 있는 산을 황룡산(黃龍山)이라고 부른다. 산등선이 그리 높지는 않아도, 산의 정상으로는 제법 기암괴석이 작은 병풍마냥 펼쳐져 있다. 이 산의 골짜기마다 어느 시대에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아흔아홉 개의 우물이 돌무덤으로 만들어져 있다. 산성의 이름이 교룡(蛟龍)이듯이, 백 개의 우물을 만들면 용이 승천을 한다는 전설에 따라 아흔아홉 개의 우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교룡이라는 산성의 이름처럼 아직 은 용이 되지 못한, 그러므로 이무기의 슬픔과 잠재적 가능성이 꿈틀거리듯 자리하고 있는 산성. 이 산성의 이름은 이곳 지형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이곳에 은거한 대신사는 달이 뜨는 밤이면 능선에 올라 「처사가(處士歌)」를 부르기도 하고, “시호(時乎) 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하는, 상원갑(上元甲)의 새로운 전기를 이룰 때가 왔음을 암시적으로 노래한 「검결」을 부르며, 목검을 잡고 검무를 추기도 하였 다. 대신사께서 제세(濟世)를 위한 열망과 심신을 아울러 단련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이 은적암에 머물면서 대신사는 앞의 『도원기서』 인용문에서 말하듯이 동학의 중요한 경편인 「논학문」과 「도수사」, 「권학가」를 짓는다. 은적암은 대신사께서 새로운 계획을 세운 곳이자 동학의 중요한 경전이 저술된 곳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 자리에는 다만 천도교서울교구 동덕들이 세운 표지판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 1989년 대신사 탄신 165돌을 기념하여 서울교구에서 7일간 특별수련회를 개최하고 마지막 날인 10월 29일(시일) 은적암으로 서울교구 교인 226명이 성지순례를 하면서 ‘은적암 터’ 성지 표지판을 세웠다. 저자도 표지판을 세울 때 청년회 부회장으로 참여하여 표지판과 시멘트, 모래, 자갈, 물통 등을 등에 지고 산 중턱에 올라 표지판을 세우고 나서 대신사의 당시 상황을 그리며 남원 시내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렇듯 작은 표지판이라도 세운 까닭에 은적암을 세상에 알리고 이곳을 성역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듯이 동학의 유적지 발굴을 비롯한 표지석 또는 표지판을 세우는 사업에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다음호 예고 : 흥해 손봉조의 집 '수운 대신사, 최초로 접주제를 시행하다' 편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 (守菴 廉尙澈)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제1회 동학농민혁명 청산기포령 기념축제 열린다제1회 동학농민혁명 청산기포령 기념축제가 오는 11월 1일(토) 오전 9시 30분, 충북 옥천군 청산면 문바위골(청산면 한곡리 223-5) 일대에서 개최된다. 이번 행사는 옥천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주최·주관하고 옥천군이 후원하며, 동학농민혁명의 지역 발상지인 청산에서의 첫 공식 기념행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행사는 오전 10시 개막식을 시작으로, 10시 20분 기포령 재현 행사, 10시 50분 진혼제(교사·씻김굿 등), 12시에는 도종환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초청 강연회, 그리고 13시 오찬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특히 기포령 재현은 당시 동학농민군이 탐관오리의 폭정과 외세의 침략에 맞서 민중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 봉기하던 역사적 장면을 재현해, 지역 주민과 청소년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는 자리로 마련된다. 옥천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청산은 충북 지역에서 가장 먼저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역사적 현장”이라며, “이번 기념축제를 통해 지역의 항일자주 정신과 인내천 사상이 다시금 시민의 삶 속에 되살아나길 바란다”고 전했다. 행사 문의는 사무국장(010-3644-9570) 또는 회장(010-5462-9771)에게 하면 된다. -
한울연대, 창립 15주년 맞아 경주교구에서 1박 2일 행사천도교 생태기후환경 임의단체인 천도교 한울연대(한연)가 창립 15주년을 맞아 뜻깊은 자리를 마련한다. 오는 10월 18일(토) 오후 6시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천도교 경주교구(경상북도 경주시 원효로 119-1)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한연 15주년 가을밤 잔치’라는 이름으로 진행된다. 이번 행사는 지난 15년 동안 생태적 신앙 운동과 환경 교화를 이어온 한울연대가 그 발자취를 돌아보고, 다가올 15년의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다. 관계자들은 “오랜만에 전국의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연의 어제와 내일을 이야기하고, 한울사상 속에 깃든 생명·평화의 가치를 다시 새기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천도교 한울연대는 ‘사람과 하늘, 자연이 하나’라는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기후위기 시대에 걸맞은 생태 신앙 실천과 환경 감수성 회복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왔다. 그동안 각 교구와 지역에서 생태 세미나, 환경 정화 운동, 지속 가능한 삶을 주제로 한 교화 프로그램 등을 펼쳐왔다. 이번 15주년 행사는 회원들이 함께 참여하고 교류하는 축제의 밤이자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는 시간이 될 전망이다. 참가 문의는 한울연대 사무처(010-4742-0113)로 하면 된다. -
오늘의 소사(小史) ○ 10월 17일○ 1968년,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노벨문학상 수상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가 일본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대표작 『설국』 『천마고양』 『산의 소리』 등을 통해 일본 문학 특유의 섬세한 미의식과 덧없음의 미학을 세계 문단에 각인시켰다. 그는 수상 연설에서 “나는 아름다움의 나라 일본에서 왔다”고 말하며 일본 문화의 정서를 세계에 전했다. ○ 1972년, 박정희 대통령, 10월 유신을 단행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선언을 발표하며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당과 정치 활동을 중지시켰다. 곧이어 제8차 헌법이라 불리는 ‘유신헌법’을 제정해 대통령에게 종신에 가까운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사실상의 군부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유신(維新)’이란 본래 ‘새롭게 고친다’는 긍정적 의미를 지녔으나, 한국 현대사에서는 헌정 질서를 중단시키고 민주주의를 억압한 ‘친위 쿠데타’로 기억된다. 이 시기 언론 통제와 정치적 탄압이 강화되었으나, 동시에 경제 성장과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역설적인 평가를 남겼다. ○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이 발생하다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방 국가들에 대한 보복 조치로 원유 수출을 중단하면서 세계 경제를 뒤흔든 ‘제1차 석유 파동’이 발생했다. 원유 가격이 4배 가까이 폭등하면서 각국의 물가가 급등하고 경기 침체가 심화하였다. 우리나라도 에너지 절약 운동과 석유 절약 캠페인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며 ‘불 꺼진 서울’의 풍경이 나타났다. 이는 산업 구조의 재편과 에너지 자립에 대한 국가적 과제를 남겼다. ○ 1978년, 북한 제3땅굴 발견 강원도 양구 인근 비무장지대 남쪽에서 북한이 남침을 위해 판 제3땅굴이 발견되었다. 폭 2m, 높이 2m, 길이 약 1.6km에 달하는 규모로, 서울까지 진입이 가능한 거리였다. 그 이전에도 제1·2땅굴이 발견된 바 있으며, 이후 제4땅굴까지 추가로 드러나면서 한반도 안보 불안이 다시금 부각되었다. 남북 간 군사적 대치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
동학서훈국민연대, 국회 앞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 서훈 촉구’ 피켓 시위동학서훈국민연대(상임대표 박용규)는 10월 1일부터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국회의원회관 앞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촉구’를 위한 피켓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동학서훈국민연대는 “1895년 을미의병 참여자 149명은 이미 서훈이 완료되었지만, 항일무장투쟁의 출발점이었던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은 아직 단 한 명도 국가로부터 서훈받지 못했다”며 정부와 국회의 조속한 결단을 요구했다. 동학서훈국민연대는 2021년 9월 10일 공식 출범한 이후 국회 내 학술토론회와 공청회를 지속해서 개최하며, 서훈 문제 해결을 위한 입법 활동을 이어왔다. 그에 앞선 2021년 7~8월에는 두 달간 세종시 소재 국가보훈처와 전국 보훈지청 앞에서 피켓 시위를 진행한 바 있다. 현재 제22대 국회에는 동학서훈 관련 법률안 4건이 발의되어 있으며, 윤준병, 민형배, 강준현 의원 등이 대표 발의자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 법안의 핵심은 1894년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독립유공자 예우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현행 법령은 1895년 이후의 항일 의병운동은 독립운동으로 인정하지만, 그보다 앞선 2차 동학농민혁명은 제외하고 있어 역사적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박용규 상임대표는 “전봉준 장군이 일본군에 항전하고, 해월 신사가 항일 총기포령을 내렸음에도 단 한 명도 인정받지 못한 것은 국가가 스스로 역사 정의를 유보한 것”이라며 “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관련 법안이 당론으로 채택되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10월 14일 피켓 시위에 동참한 함기영 전 동학혁명유족회 부회장은 “2차 동학농민혁명 서훈이 실현되면, 그 정신을 이어 신분 해방과 민권을 외친 1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 대한 ‘동학민주화유공자법’ 제정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며 “이는 단순히 과거사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인간평등 정신을 복원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동학서훈국민연대는 “동학농민혁명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외세와 불의에 맞선 최초의 항일운동이었다”며 “국가가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진정한 독립운동사의 완성은 있을 수 없다”며 이번 10월 한 달 동안 피켓 시위를 이어가고, 필요할 경우 11월까지 활동을 연장할 방침이다. -
허채봉 부산동학기념사업회 대표, “영해가 동학혁명의 출발점” 강조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는 지난 10월 11일 오후 3시, 김홍신문학관에서 허채봉 부산동학기념사업회 대표를 초청해 「1871 영해동학혁명의 의미」를 주제로 초청 강연을 열었다. 이번 강연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시천주 사상을 중심으로, 1871년 영해에서 일어난 첫 동학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그 현대적 의미를 짚는 자리였다. 허채봉 대표는 “1871년 신미년 영해동학혁명은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보다 23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동학혁명”이라며 “영덕군 영해부에서 일어난 이 의거야말로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이 현실로 드러난 최초의 시민혁명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수운 대신사가 1860년 무극대도를 깨닫고 포덕을 시작한 뒤, 1863년 16명의 접주를 임명하며 전국에 교단을 세웠다”며 “그중 영해는 해월 최시형 신사가 직접 파견될 만큼 동학 교세의 핵심 지역이었다”고 설명했다. 신향과 구향의 갈등 속에서 피어난 평등의 사상 허채봉 대표는 영해 지역의 역사적 배경도 주목했다. 조선 후기 영해는 신향과 구향의 갈등이 첨예했던 곳으로, 서얼 중심의 신향 세력이 반상 차별 철폐를 주장하며 동학을 적극 수용했다. 그는 “1840년 영해향전을 계기로 서얼 차별을 폐지하려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고, 이들이 인내천 사상에 깊이 공명했다”며 “이러한 지역의 사회구조가 1871년 동학혁명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해월 신사는 수운의 순도 이후 12년간 은둔의 세월을 보내며 신앙 공동체를 지켜냈고, 박하선·박사헌 부자와 영덕·영양의 동학인들이 교단을 굳건히 지탱했다. 허채봉 대표는 “그들의 신앙적 결속과 평등을 향한 열정이 결국 영해에서 폭발했다”고 말했다. 1871년 3월 10일, 수운 대신사의 순도일에 맞춰 전국 각지에서 60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영해 병풍바위 아래에 집결했다. 이필제, 해월 최시형, 강사원, 박사헌 등 지도부는 천제를 올리고 “탐관오리를 징벌하고 백성을 구하자”는 격문을 낭독했다. 봉기군은 영해부 관아를 장악하고 부사 이정을 처단했으나, 정부 토벌군의 반격으로 닷새 만에 해산됐다. 이 의거로 96명이 효수되거나 물고(몰살형)에 처해졌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그러나 허채봉 대표는 “그들은 약탈이 아닌 의로움을 실천했다”며 “민가에서 음식과 물자를 빼앗지 않고 값을 치른 기록은, 그들의 의거가 단순한 폭동이 아닌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신념의 실천이었음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이필제의 난’ 아닌 ‘영해동학혁명’으로 바로 세워야 허채봉 대표는 “그동안 이 사건이 ‘이필제의 난’ 혹은 ‘영해작변’으로 불리며 폄하되어 왔다”며 “이제는 ‘1871 영해동학혁명’으로 역사적 위상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의 문초기록인 『교남공적』과 군 작전일지 『영해부적변문축』은 이 사건이 단순한 소요가 아니라 조직적인 동학혁명임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또한 “1871 영해동학혁명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혁명으로 이어지는 ‘동학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며, “시천주·사인여천·삼경의 정신이 오늘날 인권·평등·평화의 가치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말했다. 강연을 마치며 허채봉 대표는 “영해동학혁명은 인류 보편의 가치인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을 향한 첫 발걸음이었다”며 “오늘의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바로 그 불씨 위에 서 있다”고 맺었다. 이번 강연은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주관하고 논산시가 후원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동학 관련 연구자와 천도교인들이 참석해 ‘1871 영해’의 뜻을 되새겼다. -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75호 발간동학학회가 발행하는 『동학학보』 제75호가 2025년 9월 자로 발간되었다. 이번 호의 특집 주제는 ‘동학과 현대’로, 수운 최제우 대신사와 해월 최시형 신사, 의암 손병희 성사로 이어지는 동학 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다각도로 조명했다. 특집 논문으로는 임상욱의 「동학의 오늘」, 김응교의 「‘계엄’ 이후 읽는 신동엽 〈좋은 언어〉와 동학의 천어(天語)」, 최문형의 「문화유전자 관점에서 본 수운 최제우의 영웅서사 분석」, 성지윤의 「동학농민혁명의 디지털 서사 콘텐츠화 가능성에 대한 일고찰」, 김진규의 「『학초전』 관련 연구 동향 분석」 등이 실려 있다. 각 논문은 동학의 사상적 뿌리를 오늘의 언어로 해석하며, 문명사적 관점에서 동학 정신의 확장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임상욱 교수는 「동학의 오늘」에서 ‘시천주(侍天主)’의 가르침이 개인의 깨달음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김응교 교수는 시인 신동엽의 언어 속에서 동학의 ‘천어(天語)’, 곧 하늘과 사람을 잇는 언어의 힘을 읽어내며, 동학적 언어관을 현대문학 속에 새롭게 복원했다. 최문형 교수는 수운 대신사의 삶을 ‘영웅서사’로 해석하여, 그의 사상이 동서문명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류적 가치임을 제시한다. 또한 성지윤의 논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서사를 디지털 콘텐츠로 재구성할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21세기 대중문화 속에서 동학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수 있을지를 논의한다. 김진규는 『학초전』 관련 연구를 정리하며, 동학 문헌 연구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조망했다. 일반 논문으로는 김남희의 「종교문화 콘텐츠의 변용 과정과 한국인의 집합표상」, 정재원의 「불교의 ‘바른 말’과 비폭력대화(NVC)의 통합적 고찰」, 조극훈의 「해월 최시형의 동학사상과 문화 인식」 등이 수록되었다. 특히 조극훈 논문은 해월 신사의 ‘삼경(三敬)’ 사상을 문화 인식의 틀로 해석하여, 인간과 자연, 사회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동학이 제시하는 사상적 기반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 『동학학보』 제75호는 동학이 오늘날 인류문명의 위기를 넘어설 사상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동학학회는 1970년대 창립 이후 동학사상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 근대사, 종교사, 철학사 연구를 아우르며 국내외 학문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이번 75호 발간은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의미 있는 결실로 평가된다. -
성동교구 최정필 교수, 신간 『아메리칸 인디언, 끝나지 않은 문명의 여정』 출간성동교구의 최정필 교수가 신간 『아메리칸 인디언, 끝나지 않은 문명의 여정: 서사로 기록된 생존과 부활의 디아스포라』를 출간했다. 이번 출간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 출발해 베링 해협을 건너 미주 대륙으로 이주한 아메리칸 인디언의 기원을 과학적 근거로 풀어낸 연구 성과로, 잊혀온 문명을 인류사의 중심에 다시 세우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책은 인류 고고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대서사적 구성을 지녔다. 저자는 “아메리칸 인디언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인류사에 커다란 기여를 남긴 주체”라며 “사라진 문명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그 속에서 인간 본연의 질문을 다시 꺼내고자 했다”고 밝힌다. 최 교수는 2만 년 전 빙하기, 베링 해협이 육지였던 시절, 동북아 구석기인이 신대륙으로 이주한 여정을 추적한다. 이들이 북미와 남미 전역에 퍼져 피라미드와 고대 문명을 건설하고, 옥수수·감자·고추 등 세계적 농작물을 개발함으로써 인류사의 문명적 주체로 자리했음을 강조한다. 또한 북미 선사 시대에서 마야·아즈텍·잉카 문명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다루며, 저자가 직접 참여한 현장 발굴과 조사 기록을 풍부히 담았다. 주제별 구성으로 독자가 원하는 장부터 읽을 수 있도록 편집되었고, 고고학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도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인문 교양서로 평가받는다. 경주 출신인 최정필 교수는 성동교구 최정대 직접도훈의 친형이다. 평생 신라 문화유산 발굴과 보존에 헌신한 고(故) 최남주 선생의 뜻을 이어 학문에 매진, 미국 피츠버그대학교에서 인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세종대학교 교수·박물관장·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한국박물관학회 회장, 문화재위원, 유네스코 위원,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장, 유럽-아시아박물관연맹 부회장,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맡으며 국제 문화교류에 크게 이바지하고 ‘자랑스러운 박물관인상(원로 부문)’, 스웨덴 국왕이 수여하는 ‘북극성 훈장(Royal Order of the Polar Star)’을 받았다. 인류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 『아메리칸 인디언, 끝나지 않은 문명의 여정』은 천도교인뿐 아니라 인문학적 성찰을 원하는 이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
명동산수도원, 105일 특별기도 및 수련 참가자 모집명동산수도원(수도원장 각암 박해용)이 오는 포덕 166년(2025) 12월 22일(월)부터 포덕 167년(2026) 4월 5일(일)까지 ‘105일 특별기도 및 수련’을 진행한다. 이번 수련은 의암 성사가 포덕 46년(1905) 을사년의 혼란 속에서 과감하게 현도를 단행하여 교단의 중흥을 이끌었던 것처럼, 교단과 교인의 내적 갱신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박해용 수도원장은 “우리 사회와 교단이 어려움을 겪는 지금이야말로 개인과 공동체의 근본을 다시 세워야 할 때”라며 “세상의 정신을 개벽하려면 먼저 내 마음을 개벽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개인의 각성이 곧 교단과 세상의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수련은 12월 22일 동짓날 새벽 5시부터 시작되며, 하루의 첫 기도를 여는 ‘동지기도’를 시작으로 105일간 심고와 수도를 병행한다. 이와 관련해 박해용 수도원장은 “대신사께서도 가산을 탕진한 뒤 용담으로 돌아와 105일 기도를 통해 도를 깨달으셨듯, 오늘의 이 지점에서도 그 정신을 잇고자 한다”고 전했다. 참가 자격은 진리를 깨우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하며, 정원은 최대 13명이다. 수도원에 상주하여 전 일정을 함께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재가 수련’도 허용된다. 다만 매월 7일 이상은 수도원에 머물며 공동 수련에 참여해야 한다. 명동산수도원은 경북 영덕군 지품면 속곡길 516-10에 자리하고 있으며, 영덕터미널 또는 영덕역에서 연락하면 수도원까지 차량 지원이 가능하다. 접수는 오는 포덕 166년(2025) 12월 20일(토)까지이며, 문의는 명동산수도원 박해용 수도원장(010-4340-3721)에게 하면 된다. -
오늘의 소사(小史) ○ 10월 16일○ 802년, 합천 해인사 창건되다 신라 애장왕 3년, 왕비의 병을 낫게 해준 공덕으로 왕실의 후원을 받은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합천 해인사를 창건하였다. 통도사(불보), 송광사(승보)와 함께 삼보사찰 중 하나로 꼽히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사찰로 이름 높다. 통일신라 말기 선종 통합과 불교 교학 발전의 중심지로 자리 잡으며, 오늘날까지 한국 불교의 대표적 사찰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 1793년, 마리 앙투아네트, 기요틴에서 처형되다 프랑스 혁명으로 루이 16세가 단두대에 오른 지 9개월 만인 이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파리 콩코드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말로 상징되는 사치와 향락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던 그녀의 죽음은, 절대왕정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자 민중 혁명의 완성을 의미했다. ○ 1979년, 부마 민주항쟁 시작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촉발된 부마 민주항쟁은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친 시민들의 분노가 부산에서 마산으로 확산하며 전국적 민주화의 불씨가 되었다. 유신체제 아래 국민의 자유가 억압되고 언론이 통제되던 시절,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자유와 정의를 외쳤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 진압에 나섰으나, 이 항쟁은 열흘 뒤 10·26사태로 유신정권이 붕괴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1979년, 세계 식량의 날 제정 1945년 오늘,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창설된 것을 기념해 1979년 제정된 날로, 전 세계에 식량 문제의 심각성과 농업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매년 다양한 캠페인이 열린다. FAO와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서 8억 3천만 명 이상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으며, 10세 미만 어린이 가운데 7초마다 한 명이 굶주림으로 생명을 잃고 있다. 비타민A 부족으로 6분마다 한 명이 시력을 잃는다는 통계도 있다. 풍요 속의 불평등이 여전히 인류의 과제로 남아 있다. ○ 2017년,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에버트 인권상’을 촛불 시민에게 수여 결정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2016~2017년 대한민국의 촛불 시민운동이 보여준 평화적 시위와 민주주의 회복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며, 한국의 ‘촛불 시민’을 2017년 ‘에버트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 상은 독일 사회민주당 초대 총리안 프리드리히 에버트(Friedrich Ebert, 1871~1925)의 이름을 따 제정된 것으로, 인권과 사회정의, 민주주의 수호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