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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상대로 최초의 위대한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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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상대로 최초의 위대한 승리

승전목 전투

내포 동학, 하나의 세력으로

내포 지역의 동학은 1880년대 초에 전파되고 188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1894년 5월 홍주 목사 이승우李勝宇가 부임하면서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이승우는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동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였고 관군을 동원하여 체포와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내포의 동학군들은 하나의 세력으로 거대화하려는 자구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이는 지역적으로 포별 각개활동을 하기가 더 이상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전국적으로는 이른바 2차 봉기의 분위기도 무르익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포의 동학군들도 그동안 위축되었던 활동을 회복하고,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목적에 동참하기 위하여 여미벌(餘美坪, 현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 총집결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여미벌에서는 ‘내포 동학군’이라는 하나의 거대 조직이 탄생하게 되었고, 내포 각지에서 활동하던 동학도들이 여미벌에 총집결하니 그 수가 1만 50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총봉기를 향한 서막-역사적 전투로

이들은 여미벌에서 창의의 뜻을 바로세우고 기세를 올리며, 대오를 엄중히 하고 식량과 무기를 준비하는 등 조직을 재편하면서 조만간 닥쳐올 전쟁에 대해서도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1894년 10월, 여미벌에서는 동학군의 총봉기에 동참하기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고 국왕을 능멸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일본군을 일거에 몰아내고, 반민족적 탐관오리들까지 축출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여미벌에서 박인호를 중심으로 한 총봉기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무렵, 내포 동학군들은 한양으로부터 진압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드디어 10월 24일, 내포 동학군들은 경군과 일본군의 연합 부대를 맞아 현재 충남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목(勝戰項, 승전곡勝戰谷, 승전우僧田隅)에서 역사적인 전투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승전목 전투’이다.

승전목 전투에서 운명을 걸다

승전목은 당진군 당진읍 구룡리 동쪽과 면천면 사기소리 서쪽에 걸쳐 약 3km 정도의 좁은 계곡을 이룬 곳이다. 계곡의 북쪽에는 이배산(離背山, 220m)이, 남쪽에는 웅산(雄山, 253m)이 솟아 있어 깊고 좁으며 꼬불꼬불하게 난 계곡 길을 굽어보고 있다.

내포 동학군들은 자신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과 경군의 이동 경로를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일본군과 경군이 면천을 출발해 여미로 향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급히 용장천을 따라 도동에 도착해서는 이배산 서쪽의 험한 능선과 반대편 검암산 능선에 미리 매복하였다. 승전목은 완벽한 S자형 협곡으로 수십m 높이의 바위들이 양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험한 지형이다. 이 협곡을 따라 나있는 샛길이 바로 면천과 운산을 이어 주는 유일한 통로였는데, 내포 동학군들은 바로 이 길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압군들은 삼웅리를 지나면서 동학군의 척후병과 맞닥뜨렸으나 간단하게 제압하였고, 승전목 입구에서도 400여 명의 동학군과 재차 교전을 치르고는 곧바로 승전목에 다다랐다.

 

 

기록에 남은 승전곡 전투

당시 치열했던 승전곡 전투 상황을 사료를 통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봉 척후가 관군이 행군해 옴을 보고하니 우리는 승전곡 양 산등으로 올라가 복병하고 있었소, 관군이 골짜기 속으로 몰려들어 왔소. 관군이 골짜기를 들어서자 우리는 곧 전단을 일으켜 교전 1시간여에 관군을 여지없이 대파하니…… 여미로 출병했던 병사들이 승전곡에 이르러 겨우 일진을 돌파하고 검암 후봉에 이르렀으나 수만명이 진을 친 것을 보고 기가 질려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퇴병했다고 한다. 경군과 일본군이 면천의 도동에 이르러 처음으로 적과 부딪혀서 한 번 싸워 이기고 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 경병과 일본군이 지세의 험준함을 알지 못하고 급히 험하고 막힌 곳에 들어가 적에게 포위를 당했는데 군사의 수효가 매우 차이가 나서 탈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혼자 도망쳐 와서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적은 승전곡의 협애를 끼고 방어했으며 그 수가 400명, 500명 되지만 드디어 격파하고 여미의 고지를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적은 사방의 고지를 점령하고 사력을 다해 이곳을 지켰다. 그 수가 각처에 5,000여 명씩 있었으며 1개 소대의 병력으로 이를 공격하려 해도 우리를 포위하고 급습하여 끝내 지탱할 수 없어서 홍주로 퇴각하였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당시 전투 상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동학군들은 미리 산 양쪽을 선점하고 매복하였으며 일본군과 경군이 진격해 오자 일차 교전하고 패전하는 척 가장하여 연합군을 골짜기 안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방어전을 펼친 내포 동학군의 숫자는 15,000여 명으로 추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과 경군은 자신들의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승전목 앞까지 다다랐다.

image (3).png

긴박한 순간들, 전투

하지만 이들도 승전목의 험한 지형에 매복한 동학군들을 보자 멈칫거렸고,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을 시도하였으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과감히 돌파하기로 작전을 변경하고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배산과 검암산의 양쪽 능선을 모두 선점한 동학군들은 열세한 무기와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지형지물을 십분 활용하면서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전투 시간이 길어지고 한 시간이 지났지만 동학군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서 일본군과 경군은 조금도 진격할 수가 없었다.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질 무렵 때마침 불어오는 서풍을 이용하여 동학군들이 화공을 시작하였다. 거센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앞을 가리자 검암산 쪽으로 진격하던 관군들이 먼저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의 기세마저 급격하게 꺾이기 시작하였다.

이를 목도한 동학군들이 용기백배하여 한꺼번에 산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며 압박을 가하자, 일본군과 경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때에 일본군들은 앞다퉈 쫓겨 가면서 개인의 군장까지 모두 팽개치고 달아났다.

그들이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쳤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승전목 전투에서 첫 승을 거머쥔 동학군들은 배낭 78개, 상하 겨울 내의 78벌, 휴대 식량 312인분, 일대 78개, 수첩 78개, 깡통과 소금 각각 78개, 쌀자루 78매, 반합 78개, 구두 78켤레 등 다량의 노획물도 획득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하다

승전목 전투에서 동학군들의 승리는, 연합군을 지휘한 일본군들이 내포 동학군들을 너무 얕본 원인도 있겠지만, 이미 엄청난 수와 조직적인 움직임 그리고 전투력 측면에서 이미 이전의 동학군들과는 월등히 달라졌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승전목 전투는 내포 동학군들에게 첫 승리로, 일본군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낼 수 있는 대승이었다. 이날의 전투는 동학군들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한 단 두 곳 중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군과 정면 전투에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전투로도 알려져 있다.

image (2).png

 

전승지로서의 승전곡-승전목

승전곡이라는 명칭은 동학 연구자들 사이에 불리는 명칭이고, 당진 지역민들 사이에는 승전곡보다는 승전목으로 불리고 있다. 내포문화숲길에서 ‘내포동학길 1코스’(9.4km, 약 3시간 30분 소요)가 동학군이 무혈입성한 면천읍성을 출발해 승전목 전투지까지 조성되어 있다.

현재 승전목 전승지는 당진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석산 개발과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파괴되어 훼손이 심각한 상태이다. 역사적 의미가 깊은 승전목 전승지가 개발과 발전 논리에 계속 파괴되고 있다. 향토유적은 비지정 문화재의 범주이기에 온전한 문화재의 보존관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향토유적의 밑바탕에서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다. 당진시는 승전목 전승지를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되도록 노력하고 더 이상 훼손되지 않고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글 조성갑

(탐방 팁)

승전목(곡) 전투(승)지 : 충남 당진시 면천로 142

(참고문헌)

디지털당진문화대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당진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양상과 승전목전투

당진지역 농민항쟁 관련 역사자원의 활용

당진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실태와 보존 방안

동학농민혁명 시기 당진 동학농민군 활동과 문화콘텐츠 활용방안

 

 

 

[출처] 승전목 전투, 일본군 상대로 최초의 위대한 승리|작성자 동학집강소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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