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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약·문의 전투에 빛나는 동학혁명의 푸르른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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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약·문의 전투에 빛나는 동학혁명의 푸르른 정신

마달령 고갯길, 혁명의 함성이 들리십니까?
- 증약·문의 전투에 빛나는 동학혁명의 푸르른 정신 -

경부고속도로 대전I·C에서 옥천 방향으로 난 첫 터널을 빠져나가면 오른편으로 증약리가, 왼편으로 청남대가 있는 문의까지 펼쳐진 대청호수가 보인다. 이곳에 이르면 하늘과 물, 산이 뿜어내는 푸르름에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경부선 철도 세천역 부근이기도 한 이곳이 1894년 동학혁명 당시 격전지였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려면 현재 경부고속도로 대전터널이 놓인 마달령(馬達嶺)이라는 고갯마루 너머 증약역을 지나야 했다. 증약역은 전국 40개 주요 역을 거느리는 중심 역이었다. 특히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경로인 추풍령-옥천-증약-문의-청주로 이어지지는 율봉도, 상주-보은-옥천-증약-무주로 연결되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중심에 있던 증약역은 지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일본군은 증약·문의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 전투를 다음과 같이 본부에 보고하였다.

본부와 제3중대, 조선 관군은 11월 23일 오전 1시 30분 청주를 출발, 문의를 향해 전진했다. 오전 11시 30분 지명강 북쪽 강기슭에 도착했을 때, 남쪽 강기슭에는 많은 적도(1만2,3천)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이때 사격을 시작하면서 전위 소대원을 첨병 왼쪽으로 증가시켰다. 그리고 1개 소대를 전위 첨병선으로 증가시켰다. 오전 12시, 왼쪽으로 2개 분대를 내보내 적도의 배후를 치게 했다. 적도는 회덕과 주안周安(주암舟巖) 방향으로 물러났다. 문의로 돌아와 숙박했다(대대장 보병소좌 南小四郞).

문의文義 부근 전투상보 1894년 11월 23일(음력 10월 26일) - 필자 요약

 

오전 11시 20분 북쪽으로 행군하는 1만명 이상의 적을 만났다. 적은 일본군을 향해 급히 공격해 왔다. 조선군과 함께 응사해, 110여 명을 쓰러뜨리고 적의 기세를 크게 꺾었다. 그러나 적군의 우익은 산을 타고 문의 방면으로 진격하고, 적의 본군과 좌익은 우리 군대를 향해 일제히 사격을 해왔다. 조선군은 겁을 먹고 퇴각했다. 적은 이산 저산에서, “저놈들을 포위하라.”고 소리 지르며 돌격해 왔다. 그래서 일본군으로 이를 막게 했다. 적은 지명강 건너편을 점령했다. 주민의 태반이 적에 가담한 것 같았다. 지명에서 우리 군대와 조선 군대를 모아 문의로 철수했다(소위 宮本竹五郞).

증약增若 부근 전투상보 1894년 11월 26일(음력 10월 29일) - 필자 요약

 

이 전투들이 벌어질 당시, 내포 지역 동학혁명군은 홍주성을 공략하고 있었고, 공주성에서는 전봉준과 통령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혁명군이 일본군·조선관군에 맞서고 있었다. 따라서 공주성 전투와 홍주성 전투, 그리고 증약·문의 전투는 개별적으로 벌어진 산만한 전투가 아니라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라는 거대한 담론 속에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전투들이었다. 1894년, 조선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쟁의 소용돌이에 참가하고 있는 주체들의 성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전투지.jpg


이 중에서 가장 약자였던 동학혁명군은 남들의 지배를 받지 않고 민족국가를 유지하며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염원하였다. 이들과 가장 가까운 세력이 조선 관군 세력(사실은 조선 왕실과 양반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동학혁명 초기에는 청나라에게 업혀 동학혁명군을 공격하였고, 1894년 7월 22일(양력) 이후에는 그 태도가 급변하더니 일본 세력을 빌려 조선 백성의 소망을 짓밟기 시작했다.

1592년 임진왜란의 공포가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명나라, 무능한 조선 지배 세력이 남긴 고통은 동학의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를 통해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동학혁명은 가혹하기만 한 국내정치를 바로잡으려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이었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청나라와 일본 세력이 조선의 충청도에서 벌이기 시작한 국제적 싸움이 청일전쟁이었다. 당연히 가장 큰 피해자는 충청도에 사는 조선 백성들이었다.

당시 증약과 같은 옥천군 관내인 청산면 문바위골에서는 동학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머무르며 동학을 이끌고 있었다. 문바위골은 동학의 이상을 만천하에 알리고 혁명의 문을 열었던 1893년의 보은 취회를 결정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미 이때부터 청산 문바위골은 동학의 '장안(長安, 수도)'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증약·문의 동학 전투는 일시적으로나마 옥천 문바위골을 중심지로 하는 동학의 근거지를 보호했다는 의미가 있다. 증약·문의 전투가 동학혁명에서 지니는 또 하나의 큰 의미는 공주에서 합류하려 했던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계획에 크게 타격을 입혀 실행을 지연시켰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미 대륙침략을 목표로 측량 및 설계 단계에 있었던 경부·경의선 철도 부설이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구체적 목표에 상당한 타격을 주며, 조선 백성의 주권 의식을 떨쳤다는 점에 의의가 크다. 동학혁명이 좌절되자마자 조선 왕실과 양반 세력들은 제 나라 땅을 일본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며, 공짜나 다름없는 저임금으로 제 백성들을 몰아붙여 경부철도 부설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증약·문의 동학 전투에서 이 지역 양반들이 동학혁명군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다.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 왕권이 연합한 침략·지배 세력에 맞섰던 조선 백성들의 함성만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길 주변에 푸르게 남아 여전히 빛날 뿐이다.

글_남연호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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