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5.01.22 14:37
TODAY : 포덕166년 2025.01.22 (수)
지난 1월 18일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제117주년 도일기념식을 봉행하였다.
이날 행사는 개식과 함께 청수봉전, 심고, 주문 3회 병송, 경전 봉독(신앙통일과 규모일치), 천덕송 합창(제 13장 기념송, 제 31장 도일기념가), 기념사 등의 식순으로 이어졌으며 전국 각 교구에서도 같은 시각 일제히 기념식이 봉행되었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춘암 상사께서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감내하면서 동학혁명 이후 해월신사와 의암성사를 도와 천도교 재건에 성심을 다했으며, 삼일운동 이후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교단의 극한상황 속에서 교인들에게 신앙심을 일깨우려 노력했습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어린이날을 제정했고, 청년운동·출판문화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 등 신문화운동을 펼칩니다. 이렇듯 춘암상사 시절 천도교는 현실 도피적이지 않고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개벽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우리는 실천궁행으로 대도를 수호하고 실천하신 춘암상사의 뜻을 잘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기념사에 이어 문화행사는 천도교대학생단 조영은 단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천도교 연합합창단 <샘>,의 '별', '아름다운 나라', 천도교대학생단의 '걱정말아요 그대', '나에게 난, 너에게 난', 삼경찹창단의 '청산에 살리라', '참됨의 길'의 노래공연으로 뜻깊은 자리를 마련했다.
춘암상사는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아 천도교의 제 4세 대도주가 되었다. 춘암상사는 동학혁명 당시 덕의대접주로 활약하였으며 의암성사의 지시로 갑진개화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교육사업으로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 동덕여학교(동덕여자대학교) 등 전국의 36여 개의 학교를 운영 및 지원하였다.
3.1독립운동 때는 48인 중 1인으로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을 지원하였고 특히 일제 말 멸왜기도를 실시하도록 밀명을 내렸다.
이처럼 항일 독립투쟁 의지를 불태우다 1940년 4월 3일 향년 86세로 환원하였다.
춘암 박인호 상사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기 념 사
국내외 동덕님,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춘암상사께서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천도교 제4세 대도주가 되신지 117주년을 맞이하는 도일기념일입니다.
포덕49(1908)년 1월 18일 오전 11시, 의암성사께서는 천도교중앙총부 대도주실에서 이종훈·홍병기·오세창·권동진·오영창·양한묵 등을 비롯한 많은 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심법을 춘암에게 전한다’는 <선수문>과 함께 대도주 종통 「선수식」을 거행했습니다. 또한, 승통 10주년이 되는 1918년에는 기념식을 마친 후 ‘이 대도주의 위통은 한울님이 대신사에게 전수하시던 동일한 심법이니 여러분은 그것을 믿으라’는 내용으로 <천도교월보> 2월호에 특필하도록 하는 한편, 삼일운동 전날에는 춘암상사에게 천도교 앞날을 당부하는 <유시문>을 내리십니다. 이처럼 의암성사께서는 춘암상사의 종통을 3회에 걸쳐 재차 확인하는 등 천도교 앞날에 대한 절실함이 춘암상사에게 있음을 확실히 하십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 전 5년(1855) 2월 1일 충남 덕산군 가야산 남쪽에 있는 막동리(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서 부친 박명구와 모친 온양 방씨 사이에서 탄생하십니다. 상사께서는 10세에 한학에 입문하시고, 후에 지가서와 의서를 공부하다가 중지하고 농사에 전념하시다가 동학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상사께서는 동학을 믿으면 ‘차별과 착취가 없는 평등한 세상에서 질병에 걸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29세 되던 포덕24(1883)년 3월 18일 목천에서 동경대전 간행을 준비하고 계시던 해월신사를 찾아가 입도하십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25(1884)년 8월 중순 해월신사의 명으로 의암성사와 함께 공주 가섭암에서 49일 기도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와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의관을 정제하고 어육주초를 끊고는 정성으로 수련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습니다. 독공하는 동안에는 잠이 깊이 들까 염려하여 낫자루를 베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깨어서 주문 외우기를 10년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하셨습니다. 상사께서는 독공 중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반드시 해월신사께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포덕에도 정성을 다하여 내포 지방에 입도하는 도인이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34(1893)년 2월 광화문복합상소에 의암성사를 비롯한 강시원 손천민 등과 함께 상경하여 봉소하시고, 3월 보은 장내리 취회에는 덕의대접주에 임명되어 내포 지역 동학도인들을 이끌고 <덕의포>라고 쓴 중기와 오색기 그리고 <척양척왜>라고 쓴 기치를 앞세우고 참가하십니다. 동학 교단은 1892년 삼례집회, 1893년 광화문복합상소·공주취회·보은취회 등 집회 횟수를 거듭하면서 2만여 명의 동학도인이 참여하는 등 분위기가 성숙해지자,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을 통해 안으로는 학정과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으며, 밖으로는 일제에 맞서는 등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춘암상사는 「천불변 도역불변(天不變 道亦不變)」이라는 깃발과 「척양척왜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깃발을 세우는 한편, 대장기에는 <덕의대접주 박인호>라고 쓰고 지휘하자 수만의 동학군이 외우는 시천주 주문 소리가 천지에 진동했습니다.
포덕39(1898)년 1월 3일 춘암상사께서 의암성사와 함께 해월신사께 신년 문후를 드릴 때의 일입니다. 신사께서 흰 꿩 한 마리로 의암성사와 겸상을 차려 주면서 서로 일치(一致) 하라는 묵교(黙敎)를 내립니다. 묵교를 알아차린 상사께서는 식사를 마치고 바로 의관 정제하고 의암성사를 스승으로 모시는 배례를 합니다. 그날 이후 의암성사 앞에서는 절대로 담배도 피우지 않고 평소에 농을 하던 말투도 높임말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포덕40(1899)년 3월 10일 의암성사께서 춘암(春菴)이란 도호를 주십니다. 이는 의암성사가 내린 첫 번째 도호이고, 교단 전체로는 삼암(三菴)에 이은 네 번째입니다. 그리고 포덕73(1932)년 교회에서 존호를 ‘상사(上師)’로 봉정했습니다.
포덕60(1919)년 삼일운동으로 의암성사와 춘암상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피체된 천도교인이 1,300여 명에 달했으며, 일경의 감시가 한층 심해지고 모든 부동산과 동산 사용을 금지당하는 등 교회 활동이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포덕61(1920)년 10월 31일 춘암상사께서 출옥하신 후 어려운 교회 상황 속에서도 다음 해 2월 28일 삼일운동 자금조달에 큰 역할을 하였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준공했습니다. 그해 12월에는 교회제도가 대헌에서 종헌으로 변경됨에 따라 대도주가 교주로 변경되어 포덕63(1922)년 1월 18일에 교주 취임식을 거행합니다. 같은 해 5월 19일 의암성사께서 순국하자 춘암상사는 주상으로 장례를 주관했습니다.
포덕77(1936)년 교회제도가 대헌으로 회복됨에 따라 교주에서 대도주로 복구된 다음 해인 포덕78(1937)년 12월 초 어느 날 밤 상사께서 비몽사몽간에 왜병들이 군화를 끌고 울면서 압록강을 건너 돌아오는 것을 보고 생각하시길 “조선이 독립할 징조로다. 급히 서둘러야 되겠구나”하고는 전국 교인들에게 멸왜기도운동을 밀명으로 내려 실시케 합니다. 그러나 멸왜기도운동이 황해도에서 발각되어 천도교인들 3백여 명이 검거되었고 춘암상사께서도 병상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포덕81(1940)년 4월 3일 분열되었던 교회가 합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수동 자택에서 향년 86세로 환원했습니다. 4월 7일 오전 11시 대교당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상여는 교당을 출발하여 오후 2시에 고양군 은평면 갈현리 묘지에 도착했습니다. 오후 3시에 하관을 했는데, 이때 「천도교제4세교주법종춘암상사박인호지묘」라고 최린이 친필로 쓴 지석(誌石)을 함께 묻었습니다. 이날 대교당을 출발하여 장지에 이를 때까지 유족들과 장의위원들을 포함한 1천여 명에 달하는 조문 행렬이 이어지며 성의(盛儀)의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대로 밀고 나가 완성을 보았다고 합니다. 특히, 의암성사의 명이 있으면 즉시 총부에서 실행하도록 했으며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고 합니다. 의암성사께서는 평소 춘암상사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장벽을 향해서 말한 비밀은 새 나가도 춘암에게 말한 비밀은 새지 않는다” “춘암 대도주는 생각하는 것은 나만 못하지만 대도를 지키는 데는 내가 춘암만 못하다” “춘암은 밤에 만져 보아도 도(道) 덩어리이다” “내가 한강을 그대로 건너 걸어가라 하면 춘암 대도주는 서슴없이 걸어 들어간다”라고 할 정도로 의암성사의 춘암상사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습니다.
의암성사와 춘암상사의 관계는 축성과 수성의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축성이 아무리 잘 되어도 수성을 하지 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동학혁명 이후 수십만 명의 희생을 내고 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진 교단을 수습하여 천도교로 다시금 축성한 것이 의암성사라면, 이 축성된 교단을 성장시키고 수성한 것은 바로 춘암상사라고 하겠습니다. 포덕61(1920)년 이후 교회가 분열되었을 때도 누가 신파 구파에 대한 말을 하면 “자기의 주장과 다르다고 남을 비방하면 되겠는가! 그 시간이 있으면 주문을 더 생각하라”고 하며 어떤 경우에도 남을 비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춘암상사께서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감내하면서 동학혁명 이후 해월신사와 의암성사를 도와 천도교 재건에 성심을 다했으며, 삼일운동 이후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교단의 극한상황 속에서 교인들에게 신앙심을 일깨우려 노력했습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어린이날을 제정했고, 청년운동·출판문화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 등 신문화운동을 펼칩니다. 이렇듯 춘암상사 시절 천도교는 현실 도피적이지 않고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개벽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우리는 실천궁행으로 대도를 수호하고 실천하신 춘암상사의 뜻을 잘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
춘암상사께서 말씀하신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는 말씀은 인간사로만 생각할 수 있으나 천지운행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참을 지키면 한울님이 사랑하고 거짓되면 한울님이 미워하여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스승님을 숭배할지라도 스승님께 의뢰하지 말아야 하며, 앞으로 천도교가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우리는 참으로 도를 잘 닦아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지금 세계는 극도로 발달한 과학을 서로 화합하는 쪽으로 쓰기보다는 정쟁(政爭)의 도구로 사용하는가 하면, 아직도 전쟁을 일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거나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무기 전쟁뿐만 아니라 무병지란(無兵之亂)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고 도덕은 사람 살리는 기틀입니다. 해월신사께서는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는 수도에 더욱더 힘써서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대신사께서는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 하였던가”라고 했습니다. 이는 때만 기다리기보다는 동귀일체로 하나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국내외 동덕님 여러분,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따라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 되었을 때, 천도교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목적인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진실로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루빨리 천심을 회복하여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 만들기를 심고합니다.
감사합니다.
포덕166(2025)년 1월 18일
천도교 교령 현암 윤석산 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