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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서에 나타난 동학혁명기 일본군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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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서에 나타난 동학혁명기 일본군의 인식


조선후기 성리학의 통치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변혁을 시도한 동학은 35년이 지난 1894년 동학혁명을 전개함으로써 조선사회 변화의 큰 물줄기로서 역할을 하였다. 양반과 상민, 그리고 천민의 철저한 신분을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서와 남녀의 차별을 해소하고자 한 동학은 조선 정부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1894년 사회변혁을 주도하였지만 그 과정에 조선 정부 뿐만 아니라 일분군으로부터 적지 않은 탄압을 받고 피해를 받은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동학혁명 초기 동학군과 관군의 전투에서는 동학군의 전과가 훨씬 컸다. 동학군과 관군이 고부 황토현에서 전개된 첫 전투에서는 동학군이 대승하였다. 이 기세를 몰아 호남 일대를 장악하였으며 마침내 全州를 점령함으로써 조선 정부와 화약을 맺고 호남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첫 民政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조선 정부에서는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도 조선에 출병하였다. 

동학군과 정부의 화약 이후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에게 철병을 요구하였지만, 조선을 지배하고자 한 일본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청국과 일본의 전쟁터로 변하였고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조선은 점차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동학군이 다시 기포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동학군은 일본군의 점령을 조선 침략의 전초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동학군은 전국적으로 다시 재무장하고 본격적으로 관군을 지휘하는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결과 동학군은 참담하게 학살을 당하였고, 이후에도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적으로 감시와 억압, 나아가 회유의 대상이 되었다.

본글은 동학교단에서 서술한 역사서를 중심으로 일본군의 인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활용하고자 하는 자료는 이돈화의 『천도교창건사』, 오지영의 『동학사』,  그리고 천도교단에서 발행한 『천도교백년약사』와 『천도교약사』를 활용하였다. 다만 『천도교창건사』와 『동학사』는 일제강점기에 간행되었던 자료인 관계로 일본군에 대한 인식이 한계가 적지 않았음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일본군의 개입에 대한 인식


1894년 3월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군이 승리하자 조선정부에는 청국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고자 하는 흐름이 이미 존재하였고,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함에 따라 청국의 파병 요청은 본격화되었다. 즉 전주성 함락으로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4월 30일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일본은 조선정부가 청국에 원군파병을 요청할 것으로 관측됨으로 일본도 출병할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하였다.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에 따라 청군은 동학군은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출병하였으며, 일본은 거류민을 보호하고 텐진조약에 따라 군대는 서울로 들어왔다. 이로써 청군과 일본군은 결국 조선에서 무력적 충돌 즉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일본군이 조선에 진출한 것을 어떻게 기록하였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이때-각도 열읍 도중이 聞風蜂起하여 각기 군수를 참수하고 來附함에 조정에서 도저히 관군의 힘으로 抵當치 못함을 알고 駐京淸國總里事 袁世凱와 상의한 후에 駐津直隸總督 李鴻章에게 電請하여 구원병을 청하니, 이에 淸將 葉志超와 葉士成이 1,500여 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6월 6일에 아산포에 도착하였다. 청국은 이와 같이 조선에 출병하는 동시에 그 旨를 동월 7일부 공문으로 일본에 知照한 바 일본에서는 天津條約(천진조약은 을유년에 日淸 양국이 天津에서 모여 조약한 것을 이름이니, 조약 當者는 伊藤博文과 李鴻章 양인이오, 조약의 내용은 일, 조인일로부터 4개월 이내에 일청 양국은 한 가지로 조선에서 철병할 것 2, 조선국왕에게 권하여 병사를 교련하여 스스로 치안을 유지케 하고 일청 양국은 누구나 敎師를 보내지 못할 것 3, 장래 조선에 변란 중대의 사건이 있어 일청 양국이 혹은 파병하게 될 시는 먼저 조지하고 일이 끝나면 곧 철병할 것)에 예선 知照하는 약속에 위반한 것을 책잡는 동시에 거류민 보호의 이름 아래서 또한 출병하여 마침 귀국하였던 大鳥 公使는 水兵 4백을 거느리고 10일에 경성에 귀임하고 후 13일에는 일본군 3천 인이 또한 경성에 입하였는데 이에 한일청 삼국병과 동학군이 접전이 되게 되는 동시에 불원하여 일청 양국이 선전포고가 되면서 동양풍운이 一飜하게 되었었다.( 『천도교창건사』)


나) 淸國兵은 大將 葉志超, 葉士成의 영솔하에 6천의 육군과 5함의 해군이 충청도 아산만에 내주하였다. 이것을 본 일본에서는 왕년 일청간에 천진조약(만약 조선에 출병할 事가 有할 時는 양국이 相互照會하여 양해를 得한 후에 출병하기로 함)이라는 것을 증거로 하여 爾淸國이 출병하는 시는 我日本도 또한 출병하겠다 하여 일본공사 大鳥圭介는 병함 7척을 거느리고 인천 해안으로 상륙하고 또 육군 1,400여 명과 대포 2문을 앞세우고 바로 아산으로 달려들어 (중략) 先是 일본공사 大鳥圭介가 병을 거느리고 경성에 들어와서 주재할 시에 왕궁에 폐견하고 奏曰 이제 조선 남방 백성들이 蠢動跳梁하여 정부에서 西으로 청국에 구원병을 청한 사실이 있음으로 我 일본 정부에서는 이 말을 듣고 써하되 이는 사태가 가장 중대한 지라. 우리 국왕 폐하께서 臣을 命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나가 우리의 商民을 보호하고 또는 귀국에서 만일 우리에게 청구하는 事가 있으면 一臂之力이라도 도와 드릴까 하고 왔노라 하며, 또 부강자치책으로써 말이 많았었다.(『동학사』)


가)에 의하면 일본군의 출병은 ‘천진조약’에 따른 것과 ‘일본 거류민 보호’를 위한 것이었으며, 나)에 의하면 ‘일청 간의 천진조약’을 명분으로 하고 ‘일본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출병하였다고 하였다. 이 두 기록으로 볼 때 ‘천진조약’ 및 ‘거류민 보호’ 때문에 일본군이 조선에 출병하게 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여기에 『동학사』는 조선에서 ‘청구하는 事’라는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의 부강자치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인식으로 볼 때 두 기록은 조선의 입장보다는 가능한 한 일본 측의 입장을 옹호하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다. 이와 같은 인식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이에 비해 해방 이후에 간행된 글에서는 일본군의 출병을 보다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천도교백년약사』에 의하면, “일본 외무대신의 훈령으로 제물포조약에 의해 군사를 파견한다”고 하여, 천진조약보다는 제물포조약에 무게를 다 두고 있다. 그리고 제물포조약의 내용으로 “서울에 있는 공사관이 소실되고 재류일본인이 학살을 당한 후 한일 양측은 제물포에서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키 위해 군사를 파견할 수 있다”는 주해로 부연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전주화약 이후 일본군의 파병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大鳥 일본공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출병하였다고 하는 한편 나아가 이러한 상황을 ‘일본의 침략’이라고 인식하였다. 특히 “일본군은 우리 국민의 뜻과는 상관없이 대군을 진주시켜 무력으로 국권을 유린하며 정권을 농단하는 등 야만적인 침략행위를 자행”하였다고 하여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때문에 일본군을 침략군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에 비해 『천도교약사』에서는 “청국에 대해 동학군 토벌을 위한 원병을 요청하게 되었다. (중략)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이 사실을 통보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조선 정부가 요청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의대로 6천여 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무방비 상태인 서울로 진입케 함으로써”라고 하여, 일방적으로 일본군이 출병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분군 출병의 원인이었던 천진조약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을 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하였던 또 하나의 원인이었던 ‘거류민 보호’에 대해서도 전혀 기술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식은 일제강점기 간행된 『천도교창건사』나 『동학사』보다 오히려 느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계속)



희암 성주현(신인간 주필, 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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