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5.01.17 13:15
TODAY : 포덕166년 2025.01.17 (금)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처럼 하라는 ‘사인여천’이라는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야죠.
그런 믿음으로 나도, 상대방도 한울님이니까 그에 맞게 서로 배려하면서 살아갔으면 합니다.
회장님 반갑습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첫 번째로 찾아뵙습니다. 포덕 163년 4월 1일부터 166년 3월 30일까지, 이렇게 3년 동안의 임기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회장님 임기 중에 여성회가 창립 100년 맞이를 하기도 했지요. 맡은 바 임무를 막중하게 느끼셨을 것 같아요. 여성회본부 회장을 맡으시면서는 소감이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얼떨결에 회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 열흘 고심하다가 이 일은 한울님이 시키신 일인가 보다 하고 일을 맡기는 했는데, '여성회 100년'을 맞이한다는 책임감이 크게 밀려왔지요. 그러나 저는 실무진들을 믿었습니다. 우리 실무진들이 참 훌륭한 분들이라, 함께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어요. 그리고 그런 마음이 모여서 100주년 행사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어요. 저는 그저 선배님들이 지난 100년 동안 하신 역사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천도교여성회 100년을 맞이하면서 여러 기념사업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어떤 일에 중점을 두고 하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여러 행사들이 있었지만, 천도교여성회 100년사 책을 출간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100년사 책을 내면서 여성회 각 지부사도 같이 작업을 했는데, 우선 100년사 책이 먼저 나왔어요.
말하자면, 우리 여성회가 걸어온 길을 책으로 써서 세상에 내놓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난관도 많았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심고를 드렸어요. 한울님이 다 도와주시더라고요.
우리 실무진들과 출판위원님의 도움으로 3월 25일, 우리 여성회 창립 기념일에 100년사 책을 배포했을 때 그때가 제일 뿌듯했죠.
책을 받아들고는 한울님 감사합니다, 그 말 밖에 안 나왔어요. 출판위원회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다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에서 애써주신 덕에 출판을 할 수 있었지요.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 큽니다.
100년간 걸어온 길을 담아낸 귀중한 자료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는 100년이 지난 뒤에야 200년사 책으로 세상에 나오겠지요. 그 막중함을 가지고 작년 한 해 일해오셨어요.
그런데 100년사 출간하는 일 외에도 천도교여성회에서 주관하는 여러 사업들도 있잖아요. 기억에 남는 일이 몇 가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100년을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자체적인 세미나도 열었고, 또 그와 동시에 대신사 출세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중앙총부와 함께 기념행사를 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대신사, 대사모님 숭모비를 세운 일입니다.
수운 대신사님은 우리의 큰 스승님이신데, 사모님에 대한 공적도 후세에 남겨야겠죠. 대사모님께서 얼마나 고생 많이 하셨을까요? 대신사, 대사모 숭모비를 세우자고 했을 때, 그때는 제가 회장을 맡은 첫해였어요. 추진위원회와 함께 숭모비를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중앙총부에서 협조해주신 덕에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숭모비로 쓸 돌을 찾으러 쫓아다닌 과정도 떠오르네요. 그 돌을 처음 보았을 때, 참 놀라웠어요. 그 돌은 어느 여신상이 환생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요? 색깔도 참 아름답더라고요.
일각에서는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대신사님으로 인해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더 새롭게 세워졌고 그렇게 하신 업적에는 모든 일을 일생을 함께하신 사모님에 대한 공덕도 함께 인정해 드려야 하는데 그런 움직임들이 아직은 좀 더딘 것 같이 느껴집니다. 특히나 여성회에서는 지난 100년간 여성의 인권 신장에 기여하는 종교의 역할을 해왔잖아요.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앞으로 천도교여성회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AI 시대이고, 급변하는 시대잖아요. 제가 회장을 맡으면서 우리 실무진한테 진취적인 방법으로 소통과 믿음으로써 단합해서 지금까지 왔고 앞으로의 100년을 내다본다면, 급변하는 이 시대에 젊은 인재들이 많이 들어오셔서 여성회를 이끌어주면서 활성화해줄 것을 당부하고 싶어요.
우리 기성세대는 기계를 다루는 데 서툰 사람들도 많고 그런 것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들 잘하잖아요. 회의도 줌으로 진행하고요. 여성회에 젊은 세대가 들어오면 많은 변화를 가져오더군요. 그런 변화들이 지금의 여성회를 만들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시대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성의 인권 신장에 있어서는 오히려 과거의 천도교여성회가 했던 역할들이 시대를 앞서가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선배님들이 그 어려운 시절에 정말 큰 일들을 하셨죠? 주옥경 사모님을 비롯한 우리 선배님들은 그 시대에 상상도 못 할 만큼 앞장서 나갔잖아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천도교가, 그리고 천도교여성회가 사회 전반적으로 해온 역할들이 있고 앞장서 나갔는데, 그 시절에는 그만한 인력이 됐었어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인력이 안 돼요. 사람이 없어요. 일을 할 사람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맞게 자기 일 하느라 바쁘고 교회 일을 우선적으로 할 수 없는 게 조금 아쉽더라고요.
회장님께서는 결혼하시면서 천도교에 입교하신 건가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오셨는지도 궁금해집니다.
결혼하면서는 교인이 되었지요. 결혼해서 처음에는 저도 시부모 모시고 애들 키워야 하니까 그 뒷바라지가 우선이었죠. 그리고 천도교에 대해서 알아가기 시작한 것은 우리 시아버님 환원하시면서였어요. 그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죠.
천도교의 어떤 점이 그렇게 이렇게 마음에 와닿으셨어요?
우리 친정집이 불교 집안인데 나는 천도교 집안으로 시집을 왔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아침, 저녁으로 청수를 모시고 그때는 촛불을 켜셨어요. 그게 무어라고는 말씀도 안 해주시고 혼자 방에서 하시길래 저게 뭔가, 그냥 어른이 하시는가 보다 하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시일마다 시부모님께서 우리 애들을 데리고 천도교에 다녀오시고, 그러시면서 제게는 교당에 나오라는 말씀은 한마디도 안 하셨어요.
내가 이 집 장남에게 시집을 왔고 이 집의 뼈대가 있는데, 맏며느리로서 뭔가 붙잡고 가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래서 천도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렇게 천도교에 들어왔는데, 누가 끌어주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한 6개월 그냥 남편 따라서 왔다 갔다만 했지요. 그러다가 내가 안 나가겠다고 했어요. 누가 아는 체도 안 하고 그냥 혼자 왔다 갔다 6개월을 하다 보니까 안 되겠다 싶었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동덕님 한 분이 종학대학원에 다니지 않겠느냐고 그러시더라고요. 나는 종학대학원이 천도교의 교리를 알아야만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는 줄 알았어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들어가서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아무것도 모르고 와도 된다는 거예요. 열심히만 다니면 된다고요. 그렇게 2년 동안 참 열심히 다녔습니다.
한 1년은 도대체 저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수련을 가봐도 뭐가 뭔지 몰랐는데 그러다가 천도교가 이런 곳이구나, 수련이 이런 것이구나 깨우치게 되었어요.
나 혼자 이제 터득하고 느끼면서 다니다 보니까 어느덧 졸업을 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천도교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지만, 그저 나 나름대로 혼자서 알아간 것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마음에 남는 것은 수련하면서 제가 느낀 이치와 진리였습니다.
동경대전에 보면 ‘십무천’이라고 있지요? 한울님을 속이지 말라, 이렇게 시작하지요?
스승님의 가르침 열 가지가 딱 나와 있습니다. 처음엔 천도교의 교리가 참 쉽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의 오산인 걸 알았어요. 내가 몸이 몹시 괴롭고 안 좋았을 때 21일 수련하러 처음으로 법원수도원으로 들어갔어요. 시집와서 처음, 내 생전 처음으로 집 밖에서 생활해 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련 중에 ‘십무천’이라는 큰 글자를 보여주셨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여러 번 생각하고 책을 폈는데, 거기 그 가르침이 다 있는 거예요.
그때 나의 마음은, 내가 한울님을 참 우습게 생각했구나, 정말 잘못했다고, 죄송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내가 내 생활 속에서 한울님을 잘 모셔야겠다는 그 이념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여기에 조금 조심스러운 질문 하나 더 드리고 싶습니다. 결혼하시고 보니까 춘암 상사님의 집안이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춘암 상사님의 후손으로서 바라볼 때, 춘암 상사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춘암 상사님은 일제강점기 때, ‘개 같은 왜적 놈’이라는 말씀도 하셨지만, 저에게 가장 크게 와닿는 말씀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이 가르침입니다. 춘암 상사님은 참 과묵한 분이셨다고 해요.
시어머님이 가끔 춘암 상사님에 대해서 얘기해 주셨어요.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춘암 상사님은 참 과묵하시면서 집안을 포용하신 분이셨다고 해요. 그때는 참 어렵게 사셨잖아요. 집안의 온 가족을 다 포용하셨다는 말씀만 기억에 남네요.
춘암 상사님께서 살아오신 삶을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고요. 또 과묵함 속의 포용으로 직접 보여주신 것들이 대대손손으로 내려가는 유산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회장님께서는 손주분들한테는 어떤 걸 남겨주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남겨준다기보다는 내가 살아있는 한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우리 애들 키울 때 제가 애들한테 절대 거짓말하면 안 된다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우리 집 애들이 착해서 정말 거짓말을 할 줄 몰라요. 그래서인지 우리 손주들도 보면 다 반듯합니다.
스승님 집안의 사람으로서 며느리로서 살아오셨고, 여성회본부 회장님으로서 활동하시는 데에 부담도 굉장히 크셨을 것 같아요.
제 마음은 항상 똑같았어요. 한결같이 내 마음만 순수하면 모든 게 통하지 않겠나, 또 동덕님들이 진심을 받아들이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했는데 그 마음을 알아줄 때는 참 기쁘죠.
이제 임기가 석 달 정도 남았는데요. 올해 여성회에서 계획하고 계신 일들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작년 3월 25일에 여성회 100년사 책을 발간했지만, 지부 100년사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올해는 각 지부사(史) 책이 완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올해 총회 때는 출간될 예정입니다. 물론 어려운 점도 많았습니다. 큰 지부는 그래도 활성화돼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지부들도 많고, 어르신들께서도 많이 환원하셨고요.
그 점에서 저의 바람은 우리 동덕님들께서 가정 포덕을 우선으로 신앙생활을 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1년에 네 번, 4대 스승님 기념식 날이라도 자녀들과 시일식에 함께하는 것부터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항상 십무천을 생각하면서 나 말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먼저 해보자 하는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런 말씀을 마음에 품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큰 가르침이 될 것 같습니다. 삶의 우여곡절에 스승님 말씀에 기대어 의지할 수 있어서 든든한 마음입니다. 어렵지 않지만 행하기 힘든 것을 마음에 품고 행하려고 하는 게 종교인의 마음 자세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새해, 새 마음, 새 걸음
새해가 밝았다. 천도교 여성회가 지난 100년간 세상을 밝혀온 것은 한 사람, 열 사람, 천 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걸어온 세월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중 한 사람, 박징재 여성회장의 소회를 들어보았다.
박징재 여성회장을 통해 100년을 끌고 온 사람들, ‘멋진 언니들’을 상상해보았다.
강령주문(降靈呪文)「지기금지원위대 강(至氣今至願爲大 降)」 본주문(本呪文)「시 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 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는 논학문(...
설교 : 현암 윤석산 교령
지난 여름의 폭염과 올겨울 첫눈의 폭설은 모두 기록적인 기상재해였습니다.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이런 기상재해는 해마다 기록을 경신해 갈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로 인해 인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