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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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호모클리마토스로 살아가기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었다. 시간당 30~80mm가 내리는 집중호우가 생기면서 호우특보가 내려지고 곳곳에 침수지역이 생기고, 비바람에 나무가 쓰러지면서 전신주를 쓰러뜨려 정전이 되는 곳이 속출하였다. 서울도심 곳곳이 물에 잠기고, 지하에 내려갔다가 참변을 당하기도 하였다. 물폭탄으로 피해지역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이번 폭우는 엘리뇨의 영향으로 평년보다 6배이상의 장맛비를 준비하고 있다. 장마전선이 오래가면서 강수량이 증가하고 산사태, 집중폭우,폭염이 반복될 예정이다. 몆 년전부터 지구온난화로 기후가 변화를 넘어서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태풍, 폭우, 홍수, 가뭄, 폭설,대형산불 등은 국제적으로 인류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실정이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생존자체를 위협 받게된다. 이에 우리 인간은 호모클리마토스로 거듭나야만 하는 현실이다. 호모클리마토스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파스칼 피코가 주창한 말이다. 기후변화에 대비해 생활방식을 변화하는 사람을 뜻한다. 인류의 진화론에 따라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이어 호모클리마토스로 진화해야 하는 것이다. 기존의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미래시대에 인류는 생존하기 어렵다.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기후변화에 따라 의식주 생활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소비위주의 생활에서 덜 쓰는 생활로, 탄소배출 생활에서 제로 웨이스트 생활로, 기업은 RE100시스템으로 변화해야 우리의 미래는 밝아지는 것이다.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하지, 않고 대중교통과 자전거타고 다니기, 분리수거 잘하기, 물 아껴쓰기, 종이 아끼고 손수건 가지고 다니기, 채식위주 생활하기 등 호모클리마토스로 살아가기는 조금만 신경을 쓰면 가능한 생활방식이다. 해월신사(최시형, 1827~1898 )께서 말씀하신 생태적인 삶이 바로 클리마토스로 살아가기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늘과 땅, 자연이 바로 나와 연결되어 있으며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자연순환적인 삶,생태순환적인 생활이 바로 오늘의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생활방식인 것이다. 정정숙 근현대사미술관 담다 관장 천도교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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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정기와 심고지금 우리는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된 절제된 생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린 지 벌써 2년 정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통행금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방에 적이 가득한 전쟁 상황도 아닌데 가능한 외출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출을 하여도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남이 만졌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을 꺼려합니다. 자주 만나서 얼굴을 마주하고 식사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가족들, 친한 이들과의 만남도 거의 없어지고 간간이 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아쉬운 대로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고자 찾던 우리의 그 주문소리가 넘치던 수도원을 출입을 할 수가 없게 된지 역시 오랩니다. 모두가 벗어나고 싶은 지금의 이 상황은 무기를 앞세워 전쟁을 해서도, 돈을 앞세워 물자 전쟁을 해서도, 내 편이 많다고 수를 앞세워 기싸움 해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만 아니면 괜찮다는 이기심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배려하고, 조심하고, 그 동안 자연스럽게 해 오던 것을 과감히 접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내 몸에 맞게 어울리게 가꾸고 만들어 나아가면서 극복해야 할 때입니다. 이 상황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수심정기”입니다. “수심정기 네 글자는 천지가 운절되는 기운을 다시 보충한 것이니라“하신 해월신사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수심정기하면서 한울에 불효한 것이 있는가 곱씹어 보며 흔들림 없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수덕문에서 대신사께서는 “인의예지는 옛 성인의 가르침이요, 수심정기는 오로지 내가 정한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이 수심정기를 풀이하면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이란 형상이 없어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지만, 세상 물정을 잘 비치고 있습니다. 하얀 화선지에 먹물 한 방울이 떨어지면 금방 까만 물이 번지고 본래의 하얀색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워집니다. 우리의 마음에 물이 들지 않게 본래의 바탕을 지키며 의지를 나타내는 것만이 바른 뜻으로 진리와 같이 행동을 하며, 검게 물든 마음에서 나오는 뜻은 올바르지 못한 뜻으로 진리와 어긋난 행동을 하게 되니 모든 일의 성패는 여기에서 갈립니다. 이렇듯 마음이 성패를 좌우하게 되고 그 결과물은 기운을 담아 자라게 됩니다.마음과 기운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마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좋은 기운이 담길 수 없습니다. 기운 역시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만물이 자라는 힘의 근원으로 그 힘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해야 개인도 잘 살고, 사회도 안정된다는 것이 여기에 담겨 있는 우리 천도교의 중요한 심법입니다. 대신사께서 득도 하실 때 갑자기 몸이 이상하였고, 보려 하나 보이지 않으며, 무슨 말씀이 들리는 듯도 하였으나 들리지 않아 하신 것이 수심정기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리고 하신 후에 한울님께 묻기를 “어찌하여 그렇습니까?”하시면서 천사문답을 합니다. 만약 대신사께서 두려운 마음에 수심정기를 아니하시고 그 상황을 피하셨다면, 과연 천사문답이 가능했겠으며, 지금의 천도교가 이렇게 존재해 있겠습니까? 저는 이 수심정기는 내 몸과 마음속에 늘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나깨나 일서서나 앉으나 내가 숨을 쉬고 살아가는 한 나와 함께 해야 합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현재 커다란 변혁의 시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인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뿐만 아니라 전 인류적인 큰 변화가 앞을 가로막아도 이겨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울님이 나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움에도 굽히지 않고 이겨내고 또 이겨 냈습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 변화를 이겨내고 결과를 완성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 성과가 미미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결국 변화를 이겨내었고, 그 결과는 소위 말하는 잘난 사람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힘을 받아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 평범한 사람은 다름 아닌 사람이 곧 한울임을 깨닫고 살아가는 우리여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는 수심정기를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고, 그 풍요를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보고 듣는 소식 중 “돈”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어도 가정은 살 수 없고, 돈으로 책은 살 수 있어도 지식은 살 수 없으며, 돈으로 피는 살 수 있어도 생명은 살 수 없고, 돈으로 직위는 살 수 있어도 존경은 살 수 없다는 말처럼 돈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한 수단일 뿐입니다. 눈먼 탐욕으로 인해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갖고 있던 것들도 모두 잃어버리고 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수심정기는 물질이라는 수단을 알맞게 활용하게 하고, 욕심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지혜로운 한울사람의 삶을 갖게 해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수심정기를 할 수 있는가? 수도원에서 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특별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인가? 물론 수련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저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수행활동인 심고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극한 심고로 수심정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고는 마음으로 한울님께 고하는 의식입니다. 마음을 고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람은 눈을 보고 대화를 나눕니다. 눈에는 목소리에는 없는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서로 말이 없어도 눈을 보고 말한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심고는 한울님과의 마음의 대화입니다. 마음은 한울님과 내가 서로 마주보는 또 다른 눈입니다. 얼굴의 눈과는 다르게 눈을 뜨면 할 수 없었던 얘기들을 눈을 감으면 마음으로 한울님께 고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봤던 오늘의 하루는 마음으로 봤던 오늘의 하루와 어떻게 다른지 심고를 하면서 차분히 되새겨 보며 눈으로 내렸던 옳고 그름이 단순한 판단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심고는 한울님과의 대화이며 나와의 대화입니다. 심고는 한울님과 함께 내 마음을 다스리고 나를 돌보는 시간입니다. 마음은 뜬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은 눈을 감고 봐야 잘 보입니다. 내 마음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어야 세상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으로 힘들면 힘들다고 고하고, 즐거우면 즐겁다고 고하고, 기운이 필요하면 기운을 주십사하고 고하고, 유혹에 흔들려 길을 헤매이게 되었을 때 바른길을 알려주십사고 고하면, 한울님은 내게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답을 줍니다. 심고는 수심정기를 내 몸과 마음에 불어 넣어 줍니다. 수심정기는 내가 한울님이라는 진실을 알게 해 줍니다. 수심정기는 내가 한울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수심정기는 감정을 억제 하고, 고행을 갖게 하고, 사후영생을 위해 하는 수행이 아닙니다. 사인여천진리를 믿고, 한울님 마음에 때가 묻지 않도록, 티가 묻지 않도록 정성껏 연성수련을 하여 안정된 정신과 마음으로 인간세상을 살아 보겠다는 의지를 같이 키워주는 심법입니다. 이 수심정기를 생활화 하는 것은 지극한 심고입니다. 만약 매사에 심고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공경치 않는 것으로 수심정기는 나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넓고 큰 집이 천간이라도 주인이 잘 보호치 못하면 그 기둥과 들보가 비바람에 무너지나니 어찌 두렵지 않으랴”하시면서, “내 마음을 공경치 않는 것은 천지를 공경치 않는 것이요, 내 마음이 편안치 않은 것은 천지가 편안치 않은 것이니라. 내 마음을 공경치 아니하고 내 마음을 편안치 못하게 하는 것은 천지부모에게 언제나 순종치 않는 것이니 이는 불효와 다름이 없는 일이라, 천지부모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불효가 이에서 더 큰 것이 없으니 경계하고 삼가하라.”하고 해월신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심고는 내 마음을 공경하게 하고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천지부모의 뜻을 알게 합니다. 심고는 수심정기를 하게 합니다. 심고는 내가 한울사람으로써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기도식을 합니다. 저도 매일 새벽기도식을 합니다. 부득이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꼭 심고를 합니다. 어쩌다 심고마저 놓치는 날도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늦었더라도 꼭 심고는 합니다. 임사호천이라고 하지만 급한 일이 닥치면 더욱 지극히 심고합니다. 무조건 바라는 심고가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으로 고하는 심고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나의 진심을 고하기 위해서는 자세도 바로 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기운을 차분하게 모아야 합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고하고, 즐거우면 즐겁다고 고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있는 그대로 고할 수 있어야 비로소 한울님 마음으로 심고할 수 있으며 한울님 감응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준비되지 않으면 눈을 감았을 때 보았던 어두운 밤만 아른거리고 아무 답도 받을 수 없지요. 이 기도식은 나를 위한 돌봄의 시간입니다. 돌봄이란, 사전을 찾아보면 "건강의 여부를 막론하고,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거나 증진하고, 건강의 회복을 돕는 행위"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돌봄 받는 자를 위해 돌보는 자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헌신하며, 타인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무엇보다 쾌락이 우선시되는 이 시대에 그 고통을 감내한다는 일은 아무런 매력이 없어 보입니다만, 돌봄은 돌봄을 받는 자를 위해 어려운 일과 상황도 견디어 인내하는 행위로 나를 성숙시킬 것이며,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 순간 돌봄을 받는 자로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어느 순간엔 돌보는 자가 되어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돌보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를 여러 번 반복하게 되고 누군가의 도움은 우리의 생을 다 할 때까지 필요합니다. 돌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돌보는 시간도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식은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입니다. 하루를 되돌아보고 또 다른 하루와 미래를 위해 한울님에게 고하는 의식으로 한울님 마음을 갖는 시간입니다. 나 자신을 잘 돌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수심정기입니다. 수심정기는 사후영생이 아니라 이처럼 살아 있을 때 한울사람으로써의 가치를 실천하고, 실현하며 많은 사람들을 동화시키고 한울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합니다. 타인을 돌보기 위해서는 나부터 잘 돌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타인을 돌보기 위해서는 몸도 건강해야 하지만,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극한 심고는 수심정기를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 하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행법이라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우리의 마음은 단순히 윤리적인 본심이나 원리로서의 마음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적 존재로서의 마음인 동시에 신령하게 활동하는 한울님으로서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지극한 심고로 마음을 잡고, 기운을 바로 하여 나아가 수심정기를 수행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고 헤쳐 나아가시기를 심고합니다. 포덕 162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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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시작과 끝, 보은취회와 북실전투진달래 봄 - 1893 보은취회 이천 명이 죽었디야 이백이 아니고 이천이랴 아 왜 작년에 동학쟁이들이 솔찬히 왔잖여 그니들이 헤꼬지라도 할깨비 다들 내다보덜 못혔잖여 다들 집집이 찌끄만 문구녁으로 오는 이덜 보기나 혔지 뭐 시천주우우 뭐 어짜구 저짜구 하데 그려 그거여 나는 하도 들어서 눈 감구도 삼천리여 그니들은 그걸 하루종일 주구장창 불러싸데 그거 있잖여 아 내가 글은 못 읽어도 관가 배롬박에 붙은 거 있었잖여 삥드랗게 똥골맹이 그려놨데 자네가 참 모르는 소리 허네 그거는 내가 조금 들었어 누가 선동혔는지 몰르게 헐라고 아 글씨 사발을 엎어놓고 이름을 똥그랗게 둘러서 썼디야 하이고 거 비상하고 신통하네 그란디 고것이 얼마 못갔드라고 전라도 워디여 나는 백날 들어도 기억을 못혀 어짜든둥 전라도 어디 거 찌끄만 냥반있어 내가 고것은 딱 기억을 햐 녹두장군이랴 좋은 시상 한 번 보것다고 죽창을 들고 곡괭이 매고 그냥 막 목숨을 던진거여 그런데 말이여 내가 안 있냐 작년 봄에 왔던 그니들 말이여 나는 문구녁으로 그니들 얼굴을 봤잖여 저 북실에서 죽었다던 이천 명이 다 그니들 얼굴로다가 보이는거여 보리쌀이라도 한 됫박 갖다줬으면, 옥시기 한 댓개라도 갖다줬으면 그니들 좀 덜 서럽게 죽었을거 아닌가 싶은거여 그날로 내가 숨이 잘 안 뱉어져 시상에 진달래가 여기만 시뻘겋게 피는가벼 인자 진달래는 고만 안 피면 좋것다가도 자꾸 그니들 얼굴이 진달래 활짝 핀 것 마냥 뭐시 고로코롬 좋아뵈든지 잊혀지지가 않는거시여 술 한 병만 더 받어와 저어짝 진달래 핀 데 가서 한 잔 올려야것네 <신채원 시, 진달래 봄(2020) 전문> 다시 사람이 하늘이 되는 세상, 보은취회 이곳 보은에서 1893년 새 세상을 꿈꿨던 사람들을 눈을 감고 그려 봅니다. 착한 사람들이었어요. 보은취회는 1893년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중집회로 평가됩니다. 2만여 명이 이곳에 모였지만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고 평화적 집회를 이루며 20여 일간 머물렀어요. 서로 돕고 기대며 유무상자를 실현해 낸 대동세상이었어요. 반짝이는 모든 것들은 나를 위해 태어난 것만 같습니다. 나와 우주가 연결되어 있음은 나와 당신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보은에서 꿈꾼 개벽세상을 걷는 사람들이 시대를 넘어 만나는 순간입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 기억할 말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을 여는 사람, 당신이었습니다. 다시 개벽, 다시 하늘, 다시 사람 북실진달래, 살아서 다시 피어 “본시 진달래는 그냥 지천으로 피는 꽃이 아녀. 진달래는 말여, 두견새가 밤새도록 울다지쳐 새벽녘에 피를 토하면, 그 피 흘린 자리에 피는 꽃이라는 겨” -노창호 작, 북실진달래(극단놀이패열림터, 1994) 대사 중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은 1892년 12월 6일 보은 장내리에 교조신원운동에 필요한 지휘본부인 도소(都所)를 설치하였으며, 이때부터 갑오년 내내 장내리 도소는 동학교단의 본부로 활용되는 동시에 혁명운동의 저수지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곳 보은에서 꺼져가던 혁명의 불꽃이 마지막으로 타오릅니다. 북실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서 농민군이 가장 참혹한 희생을 당한 전투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은은 새 세상을 꿈꿨던 동학도들이 모여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깃발을 들었던 희망의 땅, 그리고 붉은 진달래 핏빛으로 물든 처절한 함성을 기억하는 역사의 땅입니다. 이곳에서 매년 이를 기억하고 재현하는 보은취회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120여 년 전, 이 땅에 모인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저기 서 있는 저 소나무는 다 보았을테지 죽음을 약속하고 모여든 수천 수많의 목숨들을 “하늘의 별들이 속살거리고 달빛이 어둠을 걷어내는 밤, 새 세상을 꿈꾸던 뜨거운 눈물들은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120년을 흘렀습니다. 그날 밤 부르던 노래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깃발이 나부낄 때마다 어디선가 바람 되어 아직도 춤 추는 넋이 있으므로 우리는 아직 희망을 믿기로 합니다.” - 신채원, 120돌 보은취회 백서 보은취회는 1998년부터 1893년 보은취회를 재현하는 들살이와 순례, 3.7일 수련 등의 행사를 매년 보은취회지와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등에서 열어가고 있다. 사진, 글_신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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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창도의 모태가 된 곳,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1824~1864) 대선생은 주유천하하며 고행의 길을 걸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출가구도의 길을 마치고 정착 수련하기로 정하였다. 처가가 있는 울산 유곡동 달을 품은 함월산 여시바윗골에 초당을 짓고 끊임없이 수련을 이어갔다. 1855년 천지가 고요하고 뜰아래 살구꽃이 만발한 속에서 수운 대선생께서 홀로 책에 심취하고 있을 때 문득 눈을 들어 본즉 한 이인(異人)이 앞에 서 있음을 보았다. 이인은 합장 배례하고 수운 대선생에게 고하기를 “소생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백일기도를 하옵더니 공부를 마치는 날 자리 앞에 책 한권이 놓여 있으므로 읽어 본즉 천하의 이상한 글이라 도저히 글 뜻을 알 길이 없어 이 글을 아는 사람을 찾기 위하여 천하를 주유하되 아직 그 사람을 보지 못하였더니 오늘 선생을 뵈오매 마음에 크게 감동한 바 있어 이 책을 드리오니 원컨대 선생은 깊이 연구하소서, 3일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하고는 물러가는 것이었다. 수운 대선생께서 3일을 두고 연구한 결과 처음으로 글 뜻을 알게 되었다. 3일 후에 이인이 다시 나타나 글 뜻을 묻는지라 수운 대선생께서 “알았노라”고 하니 이인이 말하기를 “선생은 참으로 하늘이 내신 훌륭하신 분입니다”하고 계하(階下)에 내려서자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동학에서는 이 신비체험을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부른다. 영적인 체험을 한 것이다. 을묘년(1855년)에 하늘에서부터 천서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현재에는 을묘천서의 내용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하늘에 기도하라(祈天)’는 가르침이 있었다. 이 가르침에 따라 수운 대선생은 경남 양산 천성산 내원암과 적멸굴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수련에 정진하였다. “도(道)를 밖에서 구하지 말고, 내 자신 안에서 구하자.”는 깨달음을 얻은 수운 대선생은 고향 경주 구미산 용담정으로 돌아와 게으름 없이 오직 수련에만 정진하여 마침내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무극대도의 깨우침을 얻었다. 이때가 경신년 1860년(포덕 원년) 4월 5일이다. 천도교에서는 이 날을 천도교 원년으로 삼아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로 기리고 있다. 기존의 모든 종교들은 창도자의 탄생일을 기준 삼아 그 종교의 기원으로 삼고 있는데 비하여, 천도교는 수운 최제우 대선생이 득도를 한 그 날을 기준으로 하고 포덕 원년이라 부른다. 울산 여시바윗골은 ‘을묘천서(乙卯天書)’의 계시를 받은 곳으로 천도교 성지이다. ‘여시바윗골 수운 최제우 유허지’ 성역화 사업으로 천도교에서 세운 ‘천도교 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와 비각, 예닐곱 평 되는 초당과 기도실이 복원되어 있다. 비각 뒤의 무궁화나무 두 그루는 백두산과 한라산의 물과 흙을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무언지 모르지만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2015년에는 ‘최제우 유허지 생활공원’이 조성되었다. 울산광역시 중구에서는 주민과 탐방객을 위해 자연 친화적 공간, 치유 및 휴식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깊숙하고, 아늑하며, 편안하고, 고요하다는 뜻의 심온(深穩)이 테마이다.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였으나 혁신도시 사이로 ‘이예로’가 개통되면서 바깥세상과 무척 가까워졌다.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어있다. 현재 이곳에는 (가칭)동학관 완공을 앞두고 막바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 외부공사가 완료되었고, 내부에는 전시관과 미디어실, 강의실이 들어설 예정이다. ‘동학관’ 건립은 수운 최제우 유허지가 편의시설 없이 초당과 기념비 등으로만 운영되자 울산지역과 연관된 동학 모태지로서의 의미 등을 알릴 필요가 있어 울산광역시에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수운 최제우 유허지(여시 바윗골) 뒤편에 위치한 박씨 부인의 고향 성동마을을 찾았다. 울산광역시 중구에 깊고 오래된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처가 위치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성동마을 전경을 조망하면서 잠시나마 그 시절을 그려본다. ‘양반도 천민도 없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모두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 정신’을 이곳에서 다시 새긴다. 탐방 팁 여시바윗골 : 울산광역시 중구 유곡동 639(수운 최제우 유허지)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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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 희망을 움켜진 사람들, 당진대도소의 복원당진대도소는 현존하는 유일한 동학대도소이다. 손병희 선생 가옥이기도 했으며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군지도부가 와해되고 해월 최시형 선생 마저 사형당한 후 동학의 최고지도부가 은신 잠행했던 곳이 당진 동학대도소이다. 아쉽게도 현재까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다가 동학혁명 과정에서 당진지역에서 발생한 ‘합덕민란’과 승전목 전투 등이 재조명되면서, ‘당진동학대도소’의 보존에 관심을 갖고 복원하게 된 것이다. 의암 손병희 선생이 1년 이상 은신 잠행했던 당진시 수청동 '당진동학 대도소'가 도시개발로 인해 헐릴 위기에 몰리자 천도교와 전국의 동학 관련 단체들이 당진시를 찾아 유허지의 보존을 탄원한 끝에 성사된 것이다. 의암 손병희선생은 1898년 8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1년 넘게 당진시 수청동 띠울마을에서 은신한 것으로 기록(천도교서 등)에 전해져 왔다. 이후 당진 지역의 동학도들의 구심점이 된 곳이 수청동 동학대도소였다. 고요한 햇살이 마른 땅에 내려 앉을 때, 의암 손병희 선생은 이곳에서 동학의 가르침을 꾹꾹 눌러 쓰는 심정으로 교인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일어서자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그렇게 동학은 다시 일어섰고 뚜벅뚜벅 걸어왔을 것이다. 당진에서 절망을 딛고 희망을 움켜쥔 사람들을 다시 생각한다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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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의암 손병희 선생의 발자취 찾기혁명가요, 종교개혁가이자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그는 옥중에서 받은 고문 등으로 100년 전 숨을 거두었다. 백범 김구가 해방 후 환국해서 처음으로 한 공식행사는 임정의 요인들과 함께 서울 우의동에 있는 손병희의 무덤을 찾아뵙고 귀국 보고를 드리는 것이었다. 동학혁명 당시 김구는 해주의 접주로 손병희의 부하였다. 서울지역의 의암 손병희 선생의 흔적을 따라가 보았다. 손병희 선생이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가고 민족의 지도자로서 대업을 펼쳐 나갔던 흔적을 만나본다. 의암 손병희 선생 서울 유적지 01. 광화문 복합상소 터 :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57 02. 복합상소 봉도 도소 : 현, 장충체육관 부근 (남소동 최창한 집) 03. 천도교중앙대교당 + 천도교소년회 사무소 터 +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 개벽사 터 :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57 (경운동 88) 04. 송현동 천도교 중앙총부 터 :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49 (現, 덕성여중) 05. 상춘원 터 : 서울 종로구 숭인동 72 06. 봉황각 + 의창수도원 :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길 107-12 (우이동 254) 07. 의암 손병희 묘소 :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길 107-12 (우이동 254) 08. 보성사 터 : 서울 종로구 수송동 80-7 (現, 수송공원 內 표지석 설치) 09. 태화관 터 :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9 (現, 태화빌딩) 10. 서대문형무소 :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51(현저동 101)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11. 서대문 형무소 옥바라지 골목 : 서울 종로구 통일로 230(무악동 89) 12. 취운정 :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153 (現, 감사원) 13. 가회동 의암성사 집터 : 서울 종로구 북촌로 39 (가회동 170-4) 14. 탑골공원 의암 손병희 동상 : 서울 종로구 종로 99(종로2가 38-1) 15. 고려대학교 의암 손병희 흉상 : 서울 성북 안암동5가 1-6 (문과대학) 16. 근현대사기념관 앞 의암 손병희 흉상 : 서울 강북구 4.19로 114 (수유동 산 73-23) 17. 의암 손병희 안내판 : 서울 강북구 번1동 418-9 (수유리 먹자골목 근처) 18. 삼각산 삼성암 : 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23길 235 (수유동 산 164-5) → 의암성사 49일 수련 장소 (창건사 64쪽) 19.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 보성학원을 인수, 경영 20. 보문관 사옥 (만세보) : 서울 남서회동(南署會洞) 85동 4호(현재 中區 會賢洞) 21. 다동 의암성사 댁과 중앙총부 : 자택 - 南署 廣通坊 上茶洞 2통 10호 → 1906년 2월 16일 上茶洞 홍문석골(紅門洞) 천도교중앙총부 현판 22. 중부 관인방 대사동 의암성사 댁 1906년 9월 25일 中署 寺洞 19통 8호로 이전 23. 면주동 천도교중앙총부 터, 춘암상사 대도주 선수 터 24. 중앙대교당 및 중앙총부 (3번. 일부 설명) 01. 광화문 복합상소 터 소재지)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57 02. 복합상소 봉도 도소 소재지) 현, 장충체육관 부근 (남소동 최창한 집) 광화문 광장은 동학혁명 한 해 전 동학도들이 동학의 합법화를 주장하며 평화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광화문에서 처음으로 촛불을 든 것은 동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학의 세력이 늘어나는 만큼 동학에 대한 조정의 탄압이 거세지자 동학 지도부는 서울에 올라가 평화적 시위(복합상소)를 통해 동학의 합법화를 요구한다. 박광호, 손병희 등 40여 명의 동학도는 1893년 2월, 과거시험을 치르는 선비들로 꾸미고 상경해 지금의 장충단공원 근처 접주 최창한의 집에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광화문 앞에서 3일 낮밤을 슬프게 절규하며 동학의 합법화를 상소한다. 동학도의 광화문 시위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동학의 명성을 조선 팔도에 알리는 효과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동학은 더욱 확산됐다. 1894년 동학교도와 농민이 봉기하자 청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난다. 일본 세력의 확장에 위기감을 느낀 삼국(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조선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자 일본은 1895년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1897년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순국한 군인을 기리기 위해 1900년 최초의 현충원인 장충단을 건립한다. 03. 천도교중앙대교당 + 천도교소년회 사무소 터 + 세계어린이 운동 발상지 + 개벽사 터 소재지)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57 (경운동 88) 신축된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본관(1921.4.5. 천일기념일) 1921년 경운동에 천도교중앙대교당과 본관의 건축이 완료되어, 송현동에 있던 중앙총부를 비롯하여 교회월보사, 청년회, 개벽사 등이 이전을 하였다. 이곳에서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했고, 1922년 어린이날을 제정, 선포하고, 1923년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첫 어린이날 행사를 개최하였다. 1918년 12월 1일 경운동에서 윤치소 소유의 대지를 2만 원에 매입하여 중앙대교당 개기식(開基式)을 거행하였다. 원래 대교당 건축계획은 1920년 4월에 낙성할 계획이었으나,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공사가 지체되었다가 1920년 2월에서야 겨우 공사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대교당과 총부 본관 건축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는데 특히 3·1독립운동으로 의암 손병희 선생을 비롯해 총부 간부들 대부분이 투옥되어 교회가 마비된 상황에서 공사를 했기 때문이다. 난관을 극복하고 대교당과 총부 본관의 건축은 1920년 12월에 준공되었고, 1921년 2월 28일에는 종로 송현동(現, 덕성여중)에 있던 중앙총부를 비롯한 천도교회월보사, 천도교청년회, 개벽사 등이 신축 총부 본관 건물로 이전하였다. 의암 손병희 성사는 대교당 건축을 염원하였다. 안타깝게도 생전에 이곳에 들르지 못하고 사후인 1922년 6월 5일 영결식을 대교당에서 거행했다. 붉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이루어진 지상 2층, 중앙 탑부 4층의 구조로 외형이 견고하고 이색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건물은 연 면적 280.68평으로 1층은 212평, 2층 45.6평, 3층 14.44평, 4층 7.84평 규모이며, 정면 좌우대칭으로 뒷면에 강당을 연결한 T자형이다. 건물 내외부에 한민족을 상징하는 박달나무 꽃과 무궁화 등을 조각하였다. 건축 당시 천도교중앙대교당은 당시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서울 3대 건축물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대교당에서는 시일식이나 교회 행사 외에도 민족운동 단체들의 수많은 집회공간으로서 수난의 근대를 엮어가는 산실이며, 독립운동의 공간이었다. 대교당 건립은 교인들의 특별성금으로 모금하였는데 3·1독립운동이 추진되자 의암 손병희 선생은 성금의 절반 이상을 독립선언서 인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및 해외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1920년대 ‘개벽’으로 대표되는 언론출판운동, 방정환의 어린이운동, 청년·여성운동 등이 전개되었고, 1926년의 6·10만세운동, 1927년의 신간회운동, 1938년의 무인멸왜기도운동 등이 있다. 1978년 12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 04. 송현동 천도교 중앙총부 터 소재지)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49 (現, 덕성여중) 1922년 송현동의 보성전문학교, 우측의 중앙총부 1909년 7월 29일 京城 北部 大安洞 40통 4호 대지 586평을 2,500원에 매입하여 이곳에 2층 양옥건물을 지어 1910년 9월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 대안동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송현동(松峴洞) 34번지로 지명 변경(現, 덕성여중 자리) 이곳에서 소파 방정환과 의암 손병희의 셋째딸 손용화와 신식 결혼식을 하였다. “1917년 4월 8일 송현동의 천도교중앙총부 성화실(현,덕성여중)에서 의암성사의 탄신축하식을 거행한 후 12시경부터 이종린(당시 30대)의 주례로 방정환(19세)과 손용화(17세)의 결혼식을 경향에서 수천여 명의 교인이 참석하고, 1천여 명이 부르는 찬가 속에서 거행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처음 있는 파천황(破天荒)의 혼인이었다.” 05. 상춘원 터 소재지) 서울 종로구 숭인동 72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2년 5월 19일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06. 봉황각 + 의창수도원 소재지)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길 107-12 (우이동 254) 봉황각鳳凰閣, 독립의 뜻이 모여진 곳 천도교 3세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은 1911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우이동(현주소: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에 2만 7900여 평의 땅을 800원(현재 가치 약 20억 : 쌀값으로 환산)에 매입하도록 천도교 간부에게 지시했다.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 지도자들을 종교 수련을 통해 보국안민(報國安民)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 회복의 기틀을 마련할 목적으로 삼각산(만경대, 백운대, 인수봉) 아래 봉황각(鳳凰閣)을 세웠다. 1912년에 봉황각과 내실, 부속 건물을 지었고, 다음 해에 12칸짜리 수련 도장을 추가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실내에는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방과 누마루를 들였다. 봉황각은 한옥 목조 건물로 당시 민간과 궁궐 부속 건물의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봉황각에서 3·1혁명을 구상했으며, 1912년부터 1914년까지 교역자 481명(기록에는 483명 2명은 중복 기재)을 대상으로 49일씩 7회에 걸쳐 연성 수련을 시행했다. 이들은 수련을 마치고 전국 각지로 돌아가 3·1혁명 당시 지역의 지도자로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해서 배포했고, 앞장서 독립 만세 소리가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지도록 중요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손병희 선생께서는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 되자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셨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봉황각을 건립한 것이다. 3·1혁명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봉황각에서 배출됐다” 봉황은 천도교 교조 최제우가 남긴 시문에 자주 나오는 낱말을 딴 것이다. ‘봉황이 깃들어 사는 집’이란 뜻의 봉황각은 봉황 같은 큰 인물이 나오기를 바라는 의암의 기대와 희망의 이름이다. 걸려 있는 현판은 오세창이 썼는데 ‘봉鳳’은 당나라 명필 안진경의 서체를, ‘황凰’ 자는 당나라 명필 회소의 서체를. ‘각閣’ 자는 송나라 명필 미불의 서체를 본떴다. 봉황각 뒤에는 봉황각과 같이 지었다는 살림채가 있으며 담으로 구분돼 있다. 건립 당시 12동의 건물이 더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봉황각을 포함한 건물 숫자가 13인 것은 천도교 ‘13자 주문’과 통한다. 봉황각은 독립운동의 요람지로 보존하기 위해 1969년 9월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봉황각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의암 손병희 선생 묘가 있다. 07. 의암 손병희 묘소 소재지)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길 107-12 (우이동 254)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0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선생의 나이 62세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각계에서 애도를 했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는 “先生(선생)은 民衆的(민중적) 一大偉人(일대위인)”이라고 하였다. “조선 사천년사를 통관하면 그 간에 영웅호걸이 불무하였으나 흔히는 군주중심이 아니면 귀족을 배경으로 하여 그 업을 이루었으며 그名(명)을 成(성)하였소. 그러나 선생에게 至(지)하여는 민중 간에 生(생)하야 민중적으로 활동하고 민중적으로 대업을 成(성)하려하는 始終一貫(시종일관)한 주의(主義)는 선생 일대의 위업(偉業)이외다. 이것이 조선이 장차 민중문화를 건설하려는 劈頭(벽두)의 위인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선생의 모든 경력이 민중적이 됨으로 그 出處(출처) 進退(진퇴)에 정의(正義) 인도적 정신이 橫溢(횡일)한 것이 朝鮮偉人史上(조선위인사상)에 一光彩(일광채)를 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천도교 ‘의암성사환원호’) 선생의 유해는 삼각산 동쪽 우이동 언덕에 안장하였고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는 손병희 선생의 유해가 안장된 서울 수유리 묘역을 2021년 1월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했다. 손병희 선생 묘역의 노후화된 진입로 돌계단을 나무계단으로 시공하는 등 정비 공사를 마무리하여 방문객의 편의와 안전을 도모할 예정이다. 08. 보성사 터 소재지) 서울 종로구 수송동 80-7 (現, 수송공원 內 표지석 설치) 보성사 인쇄소에서 독립선언서 인쇄 독립선언서 원고는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新文館) 인쇄소에서 조판한 후 천도교의 보성사 인쇄소로 넘겨졌다. 보성사 인쇄소는 2월 20일부터 사장 이종일(李鍾一), 총무 장효근(張孝根), 감독 김홍규(金弘奎), 직공 신영구와 최남선 등 다섯 사람이 극비리에 밤에만 인쇄하여 25일까지 2만 5천매를 인쇄하고, 거리가 먼 천도교의 지방 교구에는 우선적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의암성사와 협의하여 27일 밤에 1만 매를 더 인쇄했다(이종일은 경찰신문에서 27일에 독립선언서 2만 1천 매만 인쇄했다고 거짓 진술했다. : ‘이종일 비망록’ 참조). 그런데 27일 밤에 비밀리에 인쇄할 때 종로경찰서의 악명높은 한인(韓人) 고등계형사 신승희(申勝熙)가 근처를 지나다가 밤중에 창문까지 굳게 닫힌 인쇄소에서 인쇄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들이 닥쳤다. 사태를 알아차린 그에게 이종일 사장은 『이것만은 막지 못합니다. 하루만 봐주시오. 의암 선생님한테 갑시다』하고 애원했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는 『당신이 갔다 오시오』라고 하였다. 이종일은 단숨에 의암성사에게 달려가 위급을 고하자 의암성사는 선뜻 5천원 뭉치를 주면서 가져다주라고 하였다. 거금을 받아쥔 신승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사라졌다. 다행히 위기를 넘긴 이종일은 인쇄를 마친 후 이병헌(李炳憲) · 신숙(申肅) · 인종익(印鍾益)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운반케 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리어카에 싣고 재동(齋洞)파출소 앞을 지나갈 때 검문을 당했으나 마침 정전(停電)으로 가로등이 꺼져 있어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종일은 당시 신축 중인 경운동 대교당 마당 구석에 있는 창고 같은 집에 임시 기거하고 있었는데 독립선언서를 이곳으로 옮겨 비밀리에 보관하였다. 한편 고등계형사인 신승희는 비밀이 탄로되어 5월에 헌병대에 체포되자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도 일말의 민족적인 양심이 있었는지 결정적인 순간에 비밀을 누설치 않음으로써 다행히 3·1혁명은 성사될 수 있었다. 09. 태화관 터 소재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9 (現, 태화빌딩)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요릿집으로 명월관(明月館)의 분점격이었다. 명월관은 한말에 궁내부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으면서 어선(御膳)과 향연을 맡아 궁중요리를 하던 안순환(安淳煥)이 1909년에 지은 요릿집이다. 명월관은 개점 초기부터 대한제국의 고관과 친일파 인물들이 출입하였으며, 후기에는 문인·언론인들과 국외에서 잠입한 애국지사들의 밀담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8년 명월관이 소실되자 안순환은 순화궁(順和宮: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 194)에 명월관의 분점격인 태화관(太華館)을 차렸다가 뒤에 태화관(泰和館)으로 개명하였다. 이곳은 3·1독립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하연을 베푼 곳으로 유명하다. 민족의 독립만세운동계획에 따른 준비를 1919년 2월 28일까지 완료한 민족대표 33인 중 29인(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은 태화관에 모였는데,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손병희(孫秉熙)는 최린(崔麟)으로 하여금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게 하여 “민족대표 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였다. 이에 일본경찰대 80여명이 곧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이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韓龍雲)의 식사를 듣고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일본경찰에 의연하게 연행되었다. 이와 함께 파고다공원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독립의 함성은 전국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장소로, 인사동에 있던 요릿집인 명월관(明月館)의 별관인데, 남감리교회 재단에 인수되면서 헐려 현재는 12층의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출처: 태화관 [泰和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선생은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회람하게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쳤다. 그리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손병희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0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선생의 나이 62세였다. 10. 서대문형무소 소재지)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51(현저동 101)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의암 손병희 선생은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인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 지도자이며 천도교 측의 대표로 3·1혁명을 주도하였다. 선생은 이 때문에 일본 경찰에 자진 검거·구금되었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2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선생의 나이 62세였다. 11. 서대문 형무소 옥바라지 골목 소재지) 서울 종로구 통일로 230(무악동 89) (現,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를 옥바라지했던 가족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를 기억하는 작은 전시공간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맞은 편(독립문역 3번 출구 앞)에 2019년 12월 20일 문을 열었다. 가족과 주고받았던 옥중 편지와 옥바라지 일화, 과거 서대문형무소 주변 동네였던 무악재 골목의 옛 풍경 등을 통해 삼천리 강토 전체가 감옥이었던 일제강점기 ‘옥바라지’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간이다. 독립투사들이 혹독한 수감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자 독립운동의 조력자였지만 독립투사 뒤에 가려졌던 가족들의 삶을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재조명한다고 배경을 밝혔다. 특히, 이 공간은 과거 옥바라지 골목으로 불렸던 무악2구역 재개발사업 과정에서 조합과 주민 등 이해관계자 간 소통과 양보로 조성한 공간이어서 의미를 더한다. '16년 당시 골목 보존을 놓고 갈등이 빚어지면서 사업이 중단됐고, 이후 서울시가 개입해 수개월 간 논의와 대화를 이어간 끝에 독립운동과 옥바라지와 관련한 역사를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로 합의를 이뤘다. 재개발 사업에서 주민 간 소통과 합의를 통해 마을의 역사적인 이야기와 무형적 가치를 흔적으로 남긴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향후 이런 노력을 ‘서울역사 흔적 지키기’라는 이름으로 이어나간다는 계획이다.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은 독립문역 3번출구 앞에 소담한 한옥 건물로 조성됐다. 연면적 약 78㎡에 2개 전시공간(전시실 A동, 전시실 B동)으로 구성된다. 들어가자마자 만나는 ‘전시실 A동’은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삶과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공간이 갖는 의미와 면회와 관련된 일화, 옥중편지와 옥바라지를 했던 가족들의 삶과 마음을 담아 작업한 바느질 콜렉티브 작품 등이 전시된다. 하늘에서 본 무악재&가족들의 옥바라지, 가족과의 면회, 독립운동가의 편지, 풍향계로 구성되었다. 전시실 B동은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무악재 골목의 풍경을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을 통해 당시 모습과 무악재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흔적을 되새겨 보는 공간이다. 초가집의 작은 셋방, 옥바라지 골목의 모습, 무악재의 기억과 흔적 이밖에도 억압받던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심정을 표현한 작품 ‘아모르프(AMORPH)’도 전시된다. 12. 취운정 소재지)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153 (現, 감사원) 1914년 4월 6일 天道敎會의 취운정원유회(翠雲亭園遊會) 1914년 4월 5일 전국 각 지방에서 올라온 교인들이 천일기념식을 거행하고, 다음날 축하원유회는 취운정에서 개최하였다. 현 감사원 옆에 있던 취운정에서 활쏘기도 자주 하였고, 의친왕 이강 공을 만나 친분을 쌓고, 국권회복 방안을 논의하였고, 이강 공이 천도교에 입교하는 계기를 만든 곳이다. 중앙총부와 가까운 거리라 천도교소년회를 비롯한 단체들이 각종 행사를 개최하는 단골 장소 였다. 13. 가회동 의암성사 집터 소재지) 서울 종로구 북촌로 39 (가회동 170-4)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선생은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 장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 교인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의 자택으로 동지들을 불러 회합하는 자리에서,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정한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벌일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명월관(明月館)지점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또 당일에는 이갑성(李甲成)에게 조선총독부에 조선독립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서를 제출하여 알리고, 회합 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당하기로 약속하였다. 14. 탑골공원 의암 손병희 동상 소재지) 서울 종로구 종로 99(종로2가 38-1)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공원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어 있는 탑골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내 공원으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고려시대 흥복사가 있던 자리에 1465년(세조 11년)에 원각사라는 절이 세워졌으나 연산군 때 폐사되었고 고종 34년에 영국인 브라운의 설계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20년 ‘파고다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하였으나 1992년 옛 지명을 따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다. 탑골공원 삼일문에는 광복직후 서예가 김충현씨가 쓴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쓴 ‘삼일문’ 현판을 새로 달았다. 그러나 2001년 11월 한국민족정기소생회 회원들이 “삼일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에 일본군 장교 출신이 쓴현판을 걸 수 없다.”며 뜯어냈다. 서울 종로구에서는 그동안 서울시 및 문화재청과 현판 재설치에 관해 협의했으며 2003년 2월 가로 1.2m, 세로 0.9m로 기존 것과 동일한 크기의 현판을 새로 제작하여 달았다. 현판의 글씨체는 ‘삼’자와 ‘일’자의 경우 독립선언서의 글자를 그대로 이용했고 선언서에 없는 ‘문’자는 다른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만들었다. 공원 안에는 세조가 세운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호), 1417년 (성종2년)에 세운 원각사비(보물 제3호), 삼일운동 때 민중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던 1902년(광무8년)에 세운 탑곡공원팔각정(서울시유형문화재 제73호), 동북쪽 담장에는 3.1정신 찬양비(박종화 글,김충현 글씨) 와 3.1운동을 형상화한 10개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1980년에 건립한 3.1운동 기념탑(독립선언서)이 있다. 그리고 1966년 5월 19일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명예회장 이승만, 부회장 이응준.유진오)에서 건립한 의암성사의 동상이 파고다 중앙공원에 건립되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1959년 묘비건립에 이어 1965년 5월19일에는 건립비 630만원으로 높이24척의 동상을 조각가 문정화가 맡아 기공식을 거행한 후 1966년 5월 19일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1907년 고종황제 양위와 정미7조약을 반대하다가 8월에 해산당한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설립한 대한협회가 탑골공원 동문 밖 탑동 32통 1호에 사무소가 있었다. 15. 고려대학교 의암 손병희 흉상 소재지) 서울 성북 안암동5가 1-6 (문과대학) 16. 근현대사기념관 앞 의암 손병희 흉상 소재지) 서울 강북구 4.19로 114 (수유동 산73-23) 17. 의암 손병희 안내판 소재지) 서울 강북구 번1동 418-9 (수유리 먹자골목 근처) 18. 삼각산 삼성암 소재지) 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23길 235 (수유동 산 164-5) 의암성사 49일 수련 장소 (창건사 64쪽) 손병희 선생은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천도교 측의 대표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선생은 이 때문에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구금되었으며,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2년 5월 19일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861년 4월 8일 충청북도 청원(淸原)에서 태어난 선생은 1882년(고종 19)에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고종 21)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동학혁명군과 논산(論山)에서 합세하여,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에서 은신생활을 하였다. 1897년(광무 1)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1년(광무 5) 일본을 경유해서 상해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전해 듣고, 1905년(광무 9)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최시형의 뒤를 이어 3세 교주로 취임하여 교세확장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설하고 보성학교(普成學校)와 동덕학교(同德學校)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공헌하였다. 1908년(융희 2) 박인호(朴寅浩)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崔麟)·천도교 도사(道師)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사항을 협의하였다. 선생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大衆化)·일원화(一元化)·비폭력화(非暴力化)의 3대 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갔다. 그리고 1919년 1월 초 전국의 천도교 교인들에게 ‘49일기도회’를 실시하게 함으로써 3·1운동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다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하순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고,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제반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불교에 대한 동지규합이 진행되었다. 천도교 자료에 따르면 선생은 2월 22일 서울 우이동 봉황각에서 3.1독립운동을 앞두고 실시한 49일 특별기도가 끝나는 날 아침에 전국의 천도교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崔南善)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선생은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 장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 교인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의 자택으로 동지들을 불러 회합하는 자리에서,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정한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벌일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명월관(明月館)지점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또 당일에는 이갑성(李甲成)에게 조선총독부에 조선독립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서를 제출하여 알리고, 회합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 당하기로 약속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선생은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李鍾一)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회람하게 한 후, 한용운(韓龍雲)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쳤다. 그리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0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선생의 나이 62세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각계에서 애도를 했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는 “先生(선생)은 民衆的(민중적) 一大偉人(일대위인)”이라고 하였다. “조선 사천년사를 통관하면 그 간에 영웅호걸이 불무하였으나 흔히는 군주중심이 아니면 귀족을 배경으로 하여 그 업을 이루었으며 그名(명)을 成(성)하였소. 그러나 선생에게 至(지)하여는 민중 간에 生(생)하야 민중적으로 활동하고 민중적으로 대업을 成(성)하려하는 始終一貫(시종일관)한 주의(主義)는 선생 일대의 위업(偉業)이외다. 이것이 조선이 장차 민중문화를 건설하려는 劈頭(벽두)의 위인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선생의 모든 경력이 민중적이 됨으로 그 出處(출처) 進退(진퇴)에 정의(正義) 인도적 정신이 橫溢(횡일)한 것이 朝鮮偉人史上(조선위인사상)에 一光彩(일광채)를 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천도교 ‘의암성사환원호’) 선생의 유해는 삼각산 동쪽 우이동 언덕에 안장하였고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는 손병희 선생의 유해가 안장된 서울 수유리 묘역을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했다.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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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반공포로의 활동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되는 해이고, 정전협정이 조인된 지 70주년, 반공포로 석방 70주년을 맞는 의미있는 해이다.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는 험난한 여정을 맞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38선 분할점령은 자주국가와 통일국가 건설에 앞장섰던 천도교단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해방 공간에서 자주적 국가, 통일 국가를 주장하던 천도교단은 이념의 굴레에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반공포로 석방 70주년을 맞아 험난했던 한국전쟁 시기 북한 출신 천도교 포로의 발생과 수용소 에서의 활동, 그리고 반공포로 석방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천도교 포로의 규모와 신앙 생활 해방 당시 38선 이북의 북한에 천도교인의 2/3 이상이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천도교인들도 북한군으로 차출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으로 포로로 수용된 약 14만 명 가운데 마지막까지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약 35,698명이었고 이 가운데 천도교 포로는 약 4천 명으로 추산된다. 먼저, 광주수용소에는 제2수용소와 제3수용소에 천도교종리원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김응몽은 제3수용소의 천도교인이 처음에 100명이었으나 포덕하여 500명 정도까지 늘어났고, 제2수용소는 더 활발하였 다고 하였으나 제3수용소와 같이 500명으로 계산하여총 1,000명으로 추계하였다. 둘째, 논산수용소는 제2수 용소의 포로 명부에 올라 있는 1,253명과 성기남, 오용삼, 양제호 등이 수용되었던 제3수용소의 천도교대대인 7대대와 다른 대대의 인원을 합해 850명으로 잡아 총 2,103명으로 추계하였다. 셋째, 부산의 가야수용소에는 B대대에 천도교종리원이 구성되어 있었고 다른 대대의 천도교 포로를 합치면 약 600명으로 추산된다. 부산 거제리 병원수용소는 『신인간』의 기사를 통해 10여 명이 확인되며, 길두만의 증언으로 2개 대대에 종리원이 구성되어 각각 수십 명의 교인이 있었다고 해 약 100명의 천도교 포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넷째, 마산포로수 용소에는 김택룡을 책임자로 52명의 포로가 있었다는 명부가 천도교 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 영천과 대구의 포로수용소의 천도교계 포로는 확인되지 않는 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약 4천 명의 송환거부 천도교 포로, 곧 천도교 반공포로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들은 어떻게 천도교 포로임을 알렸을까? 각 수용소에 산재해 있던 천도교 포로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서로를 확인하고 규합해나갔다. (A) (부산 수영대밭수용소에서) 저마다 노래를 한 마디씩 부르는데내 차례에 돌아오자 나는 천덕송(天徳頌)을 한 곡 불렀다. 그랬더니 이곳 저곳에서 몇 사람이 천덕송을 따라 부른다. 그리해서 내가 있는 천막 안에서는 5, 6명의 천도교인을 찾아냈다. 그 후 서로 연락하여 수십 명의 천도교인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경비로 있는 사람도 있었고 중대간부로 있는 교인도 있었다.(김응몽의 글) (B) 그 다음에 여기저기서 왔다 갔다 하며 알아봤더니 바로 모잘 썼는데 궁을 마크를 새겨서 쓴 사람들이 있어 …… 궁을 마크를 단 사람들이 있더라구. 그래 그 사람들을 접촉을 했지요, 그 사람들을 보고(이성운 구술) (C) 근데 내가 들어가 가지구 심문하는 사람하고 얘기를 하다가 천도 교라고 그랬더니 그 뒤에 앉았던 사람이 “야 너 천도교야?”그래요. “예 천도교입니다.”, “ 너 일루 나와 봐” 그래서 그 앞으로 갔어요, 그게 그 감찰대 부대장이에요. 이동찬 씨라고 그분이 그 후에도 나하구 막역한 관계에 있었는데 그분이 “너 천도교 했어?” 그래요, “예, 천도교 했습니다.” “1세 교조가 누구야?” “아 수운대신사입니다.” “2세 교조는?” “해월신 사입니다.” “어 요 새끼 진짜 하나 왔네” 그러는 거예요. “하하하, 너 일루 나와 봐” 그리고 나서 감찰대 쇼리(급사)로 들어간 거예요.(이창번 구술)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같은 신앙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수용소에서 노래를 부르는 과정에서 천덕송을 같이 부르면서 수십 명의 천도교인을 확인하거나 모자에 뺏지를 달거나 옷에 궁을 모양을 그려 자신이 천도교인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수용소의 감찰대 등 포로 간부가 천도교를 신앙하고 있을 경우 에는 천도교인을 규합하기가 수월했다. 이렇게 모인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의 한 곳에 모여 시일식을 보고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51년 여름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수용소의 이념 대결이 심화되었다. 이 와중에서 포로수용소를 장악하기 위한 친공 포로에 의한 반공포로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 는데 대표적 사건인 ‘9.17폭동’이었다. 특히 85수용소의 9·17폭동은 전형적인 천도교 포로 학살 사건이었다. 사건 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천도교 포로였던 정승도는 이사건의 원인을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천도교 포로가 주도한 혈서 사건 때문이었다고 증언하였다. 평안북도 정주군 안흥면의 천도교종리원 원장으로 활동하다 포로가 된 박찬호는 8월 하순부터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의 혈서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이 송환 거부 혈서에 동참한 이들이 대부분 천도교 포로 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친공 포로들은 박찬호 등 14명의 천도교 포로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이후 포로 심사가 진행되어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내륙의 논산, 광주, 마산, 영천 등지로 분산 수용되었다. 이때부터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당국에 천도교 대대의 설치를 요구했고, 수용소의 정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서 천도교인 포로들로 구성된 천도교 대대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곳이 논산 제2수용소의 7대대였다. 부산의 가야수용소에 서는 B대대에 천도교종리원이 설치된 천도교 대대였다. 이 대대 500명은 전체가 천도교 포로로 구성되었다.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당국에 건의해 공식적인 천도교 활동을 시작했다. (D) 1952년 3월경에 천도교인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부터 그 안에 천막을 치고 시일식을 봉행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 그래서 이만하면 천도교 간판을 내걸 수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덕범씨가 미군과 교섭을 해서 시일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천막을 지원받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E) 궁을기를 맨들어 달았던 것도 같고 거스끼니 수용소에서는 그 천막 가빠 그걸 베끼면 잘 베껴진다고 그거 살 베끼면 잘 베껴지는데 그러면 안에 나일론이 참 좋거든 그걸로 거기다 이제 그러가지고 물감 같은 거 같다가 궁을기 만들고 태극기도 그렇게들 만들고 어디서 보급을 받아서 하는 게 아니고 자체적으로(성기남 구술) 위의 증언처럼 수용소 내에 천막을 치고 천도교종리원 간판을 걸었다. 논산 제2수용소의 천도교 대대인 7대 대장은 유래운이 맡았고, 절반이 천도교인이었던 8대대 장도 천도교인 허신관이 맡았다. 제3수용소의 천도교종 리원은 용천 출신 정용기가, 부위원장은 은율 출신의 주제명이 맡았다. 천도교 대대를 비롯한 수용소의 천도교종리원의 대표적 활동은 천일기념일을 비롯한 각 천도교 기념일을 봉행하는 일이었다. 기념일에는 수백 명의 천도교 포로 들이 한 자리에 모여 수용소 여단장을 비롯한 각급 간부를 초청하여 성대히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식후에는 다채로운 여흥과 잔치도 벌였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포로들을 대상으로 천도교 수련을 시켜 신앙심을 높였고, 천도교 교리 강좌와 교리 연구도 하였다.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반입이 어렵게 되자 천도교 포로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구절을 모아 수용소판 경전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들 천도교 포로는 반공포로 석방과 이후 판문점포로수용소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한의 생활을 준비하였다. 천도교 반공포로의 석방 1953년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포로의 송환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미국은 전쟁의 종결을 위해 모든 포로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이승만은 수용소 내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1953년 6월 18일을 기해 광주, 논산, 부산, 마산, 영천, 부평, 대구 등지의 수용소에서 반공포로를 일제히 석방했다. 이때 석방된 반공포로는 모두 27,389명으로 송환거부 포로의 16.7%였 다. 천도교 반공포로들도 이때 석방되어 남한에 정착했 다. 석방하지 못한 송환거부 포로들은 정전협정이 조인 되고 중립국송환위원회로 넘겨졌다. 인도군은 중립국송 환위원회의 포로 관리를 맡았고, 수용소는 휴전선 비무장 지대인 판문점에 만들었다. 판문점에 수용된 북한군 포로 가운데 천도교 포로는 1,667명으로 파악된다. 북한군 포로가 있었던 16개 대대에는 모두 천도교종리원이 구성되어 있었다. 종리원장만 있는 대대도 있었지만 종리원장, 교화부원, 교무부원, 경리부원, 감사원 등 종리원 조직이 잘 갖추어진 곳이 8곳으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100명 이상의 천도교 포로가 있었던 대대가 9개였다. 이중 3개 대대는 150명 이상의 천도교 포로가 있어 대대원의 1/3 정도를 차지하였다. 이들 대대에서는 천도교 포로가 주도권을 갖고 다양한 종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판문점 시기 천도교 활동으로 대표적인 것이 1953년 12월 24일의 인일기념식 행사였다. 판문 점의 관리를 맡은 인도군은 천도교 활동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 통상적인 시일식 활동은 물론 기념일 활동도 지원하였다. 46대대에서는 인일기념식에 대해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일기념일을 기해가지고 한문언 선생님이 그 1984년 동학 혁명 그걸 주제로 해가지고 ‘봉화’라는 영화[연극]를 3막 4장을 …… 연극을 연출을 했어요.(길두만 구술) 46대대에서는 인일기념식에 기념식 후 동학혁 명을 주제로 한 연극 ‘봉화’를 공연하였다. 당시 연극 공연의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김문제와 한문언이었다. 두 사람은 직접 원고를 쓰고 포로 들에게 배역을 맡겨 1달 동안 연습을 시켜 무대에 올렸다. 포로들은 하루 종일 모여서 연습과 공연 무대 설치 등의 준비를 하였다. 특히 김문제는 포로들의 공연에 필요한 복장과 염색 등의 물품은 당시 수용소에 출퇴근하는 간호사를 통해 조달했다. 이렇게 준비한 연극은 인도군 장교는 물론 다른 종교를 가진 포로들까지 초대해 공연했 는데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46대대의 연극단은 이후 여러 수용소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을 뿐 아니라, 이듬해 1월 석방이된 이후에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고 한다. 판문점에서의 포로 재심사에서 북한을 택한 포로는 296명이었고 7,604명이 최종적으로 남한을 선택했다.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도 74명이 있었다. 1953년 9월 20일 중립국송환위원회로 넘겨진 포로는 1954년 1월 20일 대한민국 정부에 인계되었다. 판문점에서 석방될 당시 천도교 포로의 활동을 보여주는 사진이 새로 발견되어 여기에서 소개한다. <사진 1>은 1954년 1월 21일 판문점의 중립국 송환위원회를 나서는 천도교 포로의 모습이다. 사진의 가운데에는 태극기가 있고 왼쪽에 궁을기가 있다. 미군이 찍은 이 사진에는 “송환 작전”에서 수천 명의 중국과 북한 공산당 포로들이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를 포기한 후 한국의 포로수용 소(판문점수용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북한군들은 깃발(태극기와 궁을기)을 들고 한국의 UN Point #2(장단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행진합니다. 1954년 1월 21일.”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 2>도 판문점에서 석방되는 천도교 반공 포로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사진 1>과 같은 포로로 보인다. 사진을 보면 헌병 순찰차를 앞세 우고 포로들이 4열 횡대로 헌병들의 인솔에 따라 행진하고 있다. 대열 중앙에 대형 태극기를 들고 오른쪽에는 중형 궁을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다. 위의 사진을 보면 이 행진은 천도교 포로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3>은 앞의 두 사진과는 다른 포로 사진 이다. 우선 포로의 수가 앞의 사진보다 많다. 그리고 앞의 사진 설명은 UN point #2가 목적지라고 했는데 이 사진은 UN point #1로 행선지가 다르 다. 궁을기의 위치도 달라 앞의 사진에는 궁을기를 앞줄에서 들고 행진하고 있는데, 이 사진에서는 궁을기가 가운데에 있다. 또한 궁을기의 크기도 다르다. 앞의 사진에서는 궁을기가 태극기보다 작은데 이 사진에서는 궁을기의 크기가 태극기보다 커 보인다. 반공포로석방 70주년을 맞아 우리 역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에 천도교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포로수용소의 천도교 포로의 활동에 대해 기억해야 하겠다. 글_성강현 동의대학교 겸임교수(직접도훈, 동천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