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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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심관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대교당에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시일식을 함께 보게 됨을 감사합니다. 그동안 안녕히 들 잘 지내셨지요? 어르신들 항상 건강하시길 심고 드립니다. 스승님께서는 “심학이라 하였으니 불망기의 하였어라”라고 용담유사에 말씀을 해두셨습니다.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마음을 닦고 성품을 보는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는 의암성사님 『무체법경』 1 성심변, 2 성심신삼단, 3 신통고, 4 견성해, 5 삼성과, 6 삼심관, 7 극락설, 8 성범설, 9 진심불염) 중에서 6번째 단원인 삼심관(三心觀)편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려 볼까 합니다. 의암성사님께서는 삼심관 편에서 “도의 세 가지 마음의 계단이 있으니 마음을 닦고 성품을 보려는 사람은 만약 이 세 가지 계단의 묘법이 아니면 좋은 성과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설법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그 첫째가 허광(虛光)심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마음공부를 하는 첫 계단이 되겠습니다. ‘한울님 모심’(강령)을 체득하고 ‘한울님의 가르침’(강화)을 받기 시작하는 수련의 초보적 마음의 변화 과정으로써 세상 물욕에 젖어 있던 나 자신이 한울님 모심을 몸소 체득하고 나니 온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용담정 마당의 자갈들은 별같이 빛나고, 산천의 초목들은 기쁨으로 넘치고, 수도원에 오신 모든 분은 다 신선으로 변하고, 이전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니 실로 의암성사께서 「입진경」(675)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듯이 “필시 선경이요, 별세계”가 내 앞에 나타납니다. 이 자리는 나 자신의 마음이 회복하는 것 우선으로 시작합니다. 쉬지 않고 마음공부를 계속하게 되면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신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깨달아지고, 생각하면 알게 되고, 선 악 분별이 분명해지고, 좋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그대로 표현하기도 하게 되고, 마음은 여리고 예민해지게 됩니다. 그렇다 보니 수련을 시작하기 전보다 다른 사람들과도 상충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가족에게도 더 많이 신경을 쓰다 보니 가족들은 간섭이라 생각하게 되고 본인의 생각대로 따르기를 강요하는 일도 생기면서 1년 365일이 화순(和順)해야만 하는 내 가정에 자칫하면 불화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마음 단속하기를 정말 지성으로 해야 하며 가족 모두가 수련을 같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때는 혼자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같이하고, 수도원을 자주 다니면서 강의도 듣고 선배들의 조언도 구하고, 반드시 경전을 늘 살펴서 스승님의 가르침에 어김이 없는가를 스스로 점검하며 정진해야만 바르게 빠르게 공부가 되어질 겁니다. 이 자리는 공부하는데 지루함이 일어나지 않는 곳으로써 주문 한독 한독 하는 것만큼 지혜도 능력도 나오는 재미나는 자리입니다. 사람마다 공부하는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저는 공부를 시작하여 한 번도 한울님께 뭔가를 묻지 않았습니다. 한울님께서는 제 공부가 되는 정도에 따라 보여 주시고 일러 주시고 안내해 주시고 매매 사사를 간섭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공부한 방법이 옳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 허광심의 자리는 힘이 나오는 자리이긴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리이기 때문에 능력을 함부로 쓴다던가. 스스로 알게 된 것을 그대로 발설하는 일은 삼가셔야 합니다. 어떤 능력을 얻었다고 그 능력을 오래도록 간직하고자 한다던가. 능력을 함부로 쓴다던가. 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며 능력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고 싶다 해도 시간과 비례하여 바래 지고 힘도 줄어들게 되는 것이 천도의 자연한 이치입니다. 의암성사님께서 이 자리에는 특별히 력(力) 자를 부쳐서 허광심력이라 말씀하시고 “여기에 멎어서 구하지 않으면 내 반드시 찬성하지 않을 것이니 스스로 힘써 분발하여 또 한 단계를 나아 가라”고 하셨습니다. 단 이것을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쉬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 수련을 시작하여 최소 3년은, 그래야만 스승님께서 말씀 해 놓으신 경전의 말씀들은 하나도 어김이 없는 것을 알게 되고 내 스스로도 도가 무엇인지 한울님의 존재를 확신하고 믿음이 반석같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언제나 어디서나 한결같이 감응하고 계시는 한울님 감응을 감지할 수 있는 내가 됩니다. 한울님의 감응하심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신앙을 하는 데 감사함이 동반되지 않고 나날이 새로운 나로 세상을 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되어 집니다. 둘째는 여여(如如)심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진성의 자리, 없는 것도 없는 자리, 불생불멸의 자리_(육신은 생사가 있으나 성령은 생사가 없음), 인연 없이 생함을 이룰 수 있는 자리, 본래의 나,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나, 무선무악의 자리_(세상 속에는 선악이 있는데 선악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기도 합니다.)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는 자리, 위도 아래도 없는 자리, 더 하는 것도 새는 것도 없는 자리, 성품과 마음의 본체는 비고 끊긴 자리입니다. (공단)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이 비고 끊긴 자리에서 본래 인연 없이 생함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형상이 없는 무형의 세계가 지금 형상을 갖추고 있는 이 세상의 근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형상이 없는 곳에서는 형상을 갖추고자 무한한 발전을 거듭하고 형상을 갖춘 곳에서는 형상을 없이 하고자 무한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는 유를 낳고 유는 무를 낳고 이것을 무한 반복하는 것이 바로 천도의 이치입니다. 이 여여심의 자리는 내가 몸을 갖추고 이 세상에 나타나 있으면서 내가 형상을 갖추기 전의 세계를 체득하는 과정이 되겠습니다. 이 여여심의 경지에 나아 가게 되면 의심스러움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의 언행이나 사물이 나 그 어떤 일이라도 용납이 되고 이해가 되고 마음이 넉넉해지고 어떤 사람, 어떤 일도 다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자리입니다. 육신의 내가 아닌 본래의 나는 죽지 않는 불생불멸의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고 무한한 감사함과 희열을 맛보게 되고 마음의 조급함이 없어지고 편안할 수가 있습니다. 이 자리의 공부가 되신 분은 이제 천천히 쉬어 가면서 공부를 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포덕 125년 7월에 수련을 시작하여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 오던바, 포덕 128년 7월 2일 우리 교당에서 월례 수련을 하는데 눈앞에, 위에는 없을 무 왼쪽에는 무선 무악 오른쪽에는 불생불멸 아래에는 본자리, 이렇게 마름모 모양의 그림이 그려지고 그 옆에는 큰 동그라미의 옥색 빛을 발하는 물체가 보이고 그 바로 밑에는 정말 작은 옥색 빛을 띤 점이 보였습니다. 그 형상을 본 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저 큰 옥색 빛의 동그라미는 한울이고 점 같은 옥색 빛은 ‘나’구나, 그렇다면 나는 저 한울에 서 와서 형상을 갖추고 세상에 살다가 이 육신이 다하면 다시 저 한울로 가는구나. 그럼 본래의 나는 영원불멸의 존재로서 죽지 않는구나. 나는 죽지 않는 존재다. 라는 것을 깨닫고 한없이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제사 나를 돌아보니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3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세월이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2달 동안은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아무것도 없는 비고 끊긴 이 자리가 도의 정점이라면 그토록 쉬지 않고 달려온 나 자신이 뭘 한 것인지 허탈감이 들었습니다. 그때 「삼심관」에서 본 단어가 있었으니……. 셋째는 자유(自由)심입니다. 유형한 내가 무형한 한울의 이치를 깨닫고 다시 유형한 세상 속에서 스승님의 도를 행하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마음공부의 계단입니다. 이 자리는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하지 않는 자리. 무엇을 이루고자 애쓰지 않는 자리. 마음 없이 행(行)하고 거리낌 없이 행함이 나오는 자리.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때에 맞게 행(行)이 나오는 자리로 아무것도 없는 듯 하나 무엇이든지 있는 자리. 그래서, 좋으면 좋고, 착하면 착하고, 노하면 노하고, 살면 살고, 죽으면 죽고, 모든 일과 모든 쓰임을 마음 없이 행하고 거리낌 없이 행하는 자리입니다. “한울도 비지 아니하고 만물도 끊기지 아니하니 도가 어찌 빈 데 멎으며 만물이 어찌 끊긴 데 멎으리오.” “성품은 근본과 끝이 없고 이치는 처음과 나중이 없다.” 이르시고 “성품과 마음이 자유로우면 도가 반드시 끝이 없을 것이요, 세상이 반드시 자유로우면 세상이 또한 없어지지 않을 것이요, 사람이 반드시 자유로우면 억만 사람이 마침내 이 자유를 깨달을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 또 뵙겠습니다. 포덕 164. 7. 30. 대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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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힘으로, 영성의 힘으로현대를 흔히 경제의 시대니 자본의 시대니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현대사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들어낸 것으로서, 현대사회는 경제 질서에 의해서 운용되며, 이는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 구조라는 뜻입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현대는 그야말로 황금만능 또는 물질 만능의 시대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풍조 때문에 하루도 끊이지 않고 금권과 얽힌 사건 사고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직면하여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모두가 그렇게 치달릴 때,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라도 올바른 가치판단으로, 쏠림현상으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이 현상적 사회를 제동하고 안정적으로 순항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사회현상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엇이 중요하냐 하는 개개인의 생각이 모여서 그 시대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것에 따라서 시대사회의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생각은 개인차가 있기 마련입니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과 교육, 정치적 방향 등이 개인의 생각을 만듭니다. 그 개인의 생각이 모이면 그 시대의 가치관이 되고, 그 가치관에 의해서 사회현상이 나타나고… 연결고리가 형성됩니다. 나쁜 방향으로 진행되면 그걸 악순환이라고 하지요. 역사적으로 우리 천도교인들은 부조리하고 모순된 사회를 개혁하려 들었습니다. 그것을 스승님께서는 개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개벽을 또 하나의 사명으로 여기면서 신앙을 해왔습니다. 그러니 구조적으로 부조리하고 모순된 현대사회에 소속된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 그걸 간과할 리가 없습니다. 혁명으로 또는 운동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한 역사적 사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반란임에도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쿠데타라고 합니다. 성공한 자는 충신이 되고 실패한 자는 역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매우 결과론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변함이 없는 것은 성패라는 것은 당대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실패로 끝난 것일지라도 훗날 역사적으로 평가되어 운동 또는 혁명으로 명명되기도 합니다. 동학혁명이 그렇고, 3·1운동이 그렇습니다. 천도교의 교리는 교인들을 시대 사회현상에 대하여 직시하게 하였으며 행동하게 하였습니다. 아무리 거대하고 바위 같은 구조라도 그것이 부조리하고 모순된 것이라면 천도교인들은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그것을 변화시키려 하였습니다. 물론 방법적 이견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큰 흐름에서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도의 두 흐름을 순수와 참여로 규정해 보기도 합니다. 순수 신앙의 흐름에서 보면 신앙의 자세는 오로지 경전과 주문을 통하여 공부하고 수련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자연히 따라와 모두가 군자 사람의 반열에 들어 이 세상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참여 신앙의 흐름에서 보면 신앙의 자세는 보다 적극적입니다. 경전과 주문 공부를 통하여 성인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물론 그러한 도력으로 세상을 개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시도 멈춤이 없이 부조리와 맞서 싸워서 세상을 개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진보해 가기 때문에 개벽하는 일이 교인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 신앙적 태도든 참여 신앙적 태도든 하나의 견해일 따름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큰 흐름에서는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줄기는 하나입니다. 단지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치우친 신앙의 태도는 절름발이 신앙이 되어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그르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시 정명하고 균형 잡힌 신앙 자세로 세상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자본이 지배하고 권력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 천도교인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저는 무엇보다도 천도교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천도교가 역사적으로 개척해온 일들이 너무나 숭고하고 위난이 닥칠 때마다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힘이 미약했더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도전하고 응전하였겠습니까? 절대적 우위는 아닐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녔기 때문에 혁명을 시작하고 운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이 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을 바로잡고 새로운 질서로 개벽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자본이나 권력에서 나옵니까? 저는 그 힘이 설령 권력이나 자본에서 나온다고 해도 그걸 부정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생각으로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에게서 나옵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는 모두 사람입니다. 우리의 힘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곧 한울의 힘으로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한울의 힘이란 영성의 힘을 말합니다. 영성을 확신하는 사람은 한울을 믿습니다. 영성의 주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만이 영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지요. 저 노래하는 새도 예쁜 꽃을 피우는 풀꽃도 한울이긴 하지만 사람과 같은 영성을 지닌 건 아닙니다. 자연물을 한울로 보는 건 사람이 자연물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한울님과 같이 대한다는 뜻이지 자연물 자체가 영성을 지녔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한 마리 새의 우는 소리를 한울님의 목소리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그 새를 한울님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성을 지닌 건 우리 사람뿐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힘이 곧 영성의 힘이므로, 사람이 많아지면 영성의 힘도 커지는 것입니다. 천도교인이면 모두가 인식하고 있을 것입니다만, 과거에 비해서 천도교의 교세가 약화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두 걱정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쇠락한 교세를 크게 중흥시킬 수 있을까? 큰 교당을 짓고, 그 건물의 힘으로? 저는 웅장한 건물의 힘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교회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당을 짓는 것도 사람이요, 사람을 모으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정치의 힘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려 합니다만 그것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결합하면 오만과 독선에 빠지게 됩니다. 가장 위험한 환경이 되고 맙니다. 정치의 힘으로 교회를 성장시킬 것이 아니라, 교회의 힘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고 국민을 편안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지 돈이 먼저가 아닙니다. 돈을 모으려 하지 말고 사람을 모으려고 해야 합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사람들에게 친화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친화적인 사람이란 남들이 어려워하지 않고 기피하지 않으며 곁에 있으면 언제나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남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친화적인 사람입니다. 남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주장을 일삼아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상대방의 처지에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평가하려 하지 말고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친화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모으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쉬운 일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 바로 사람 모으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 천도교의 관점에서 말씀드리자면, 먼저 자기 자신을 진실한 천도교인으로 만들어야만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진실한 천도교인이란 너무 교리로 무장된 경직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천도교인은 투철함을 내세우기보다는 아름다움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도교 신앙인의 참 모습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경쾌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삶이 진정 아름다운 삶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남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견본과 같은 삶입니다.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마치 신념에 죽고 사는 이 마냥 신념 타령을 해대면서 남에게 부담을 안겨준다면 상대방이 따라오겠습니까? 기회를 보다가 피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신념이란 주장하고 내세운다고 해서 견고해지는 것은 아니며, 상대방 또한 공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 마을에 태암이라는 어른이 계셨습니다. 이 어른은 아이들을 얼마나 좋아하든지 이분이 가는 데는 언제나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지게를 지고 일하러 가는 길이어도 아이들이 “할아버지 노래 불러주세요” 하고 채근하면 지게 작대기로 지겟다리를 두드리고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아리랑과 같은 민요를 주로 불러주었지만, 끝에 가서는 꼭 천덕송을 불러주었습니다. 주문을 노래처럼 부르시거나 우리의 길, 안심가, 도수사 등을 어찌나 흥겹게 부르시던지… , 6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 어른이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하여 춤추고 노래 부르시던 모습이 아름답게 남아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합니다. 우리 스승님께서 실천하신 도와 덕은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우리 가까이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변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지극히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스승님의 도와 덕을 진실로 실천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해서 가까이 가려고 할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전통적인 실성미 제도가 사라지면서 성미상납이 부담스러워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 지방에 가보면 교당에 사람이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의 원인은 연로한 어르신들에게는 지금의 성미금액이 상당히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한 달 두 달 연체되다 보면 연체된 성미 금액이 10만 단위를 넘게 되고 아무런 수입이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 금액을 낼 수 없게 되어 미안해서 교당에도 못 나오는 실정에 있습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성미의 부담을 덜어드려야 합니다. 지금 어려운 사람들이 성미 부담 때문에 교당에 나오지 않는 것은 돈 때문에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는 비근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중요한가 사람이 중요한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 하나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돈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필요한 수단이고 동력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우리 삶에서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설켜서 살아갑니다. 사람이 재화를 만들고 관리하니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천도교인들은 돈의 소중함을 알지만 사람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끼고 아껴서 성미를 내고 특성금을 냅니다. 좋은 곳에 쓰이고 천덕사업에 꼭 필요하다고 여기면 아낌없이 성금을 냅니다. 함께 돈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면 우리 교인들이 스스로 돈을 마련할 것입니다. 성미든 특성금이든 필요한 만큼 모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돈으로 숭고한 천덕사업을 할 수 있지요. 그 일을 잘하면 사람과 재화가 선순환 구조가 되어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우리 교당에 사람이 많이 모이면 포덕을 위한 돈이 모입니다. 사람이 모여야 덕을 펼 수 있습니다. 포덕은 사람을 대상으로 사람이 펼쳐 나가는 일입니다. 사람이 기피하고 사람이 부담스러워하는 천도교가 되어서는 우리가 지향하는 세상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지금 코로나19의 심술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올해도 코로나 괴질은 쉽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코로나가 극악하더라도, 우리 스승님들이, 그리고 우리 교도들이 당했던 은도시대의 그 압제와 수난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승님과 선도들이 그 암울한 시대를 극복해 내었듯이 지금 우리 또한 이 괴질의 시대를 훌륭히 극복해 낼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조용함 속에서 포덕 교화의 사명을 달성하고 천도교 중흥의 시대를 열어나갈 것입니다. 코로나19 괴질은 바로 이 시대의 부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코로나19 괴질이 우리 인간의 생명성을 농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세상에서 우리 인간은 온갖 질병을 달고 살며, 더 무서운 괴질과 끊임없이 맞닥뜨리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보다 적극적이고 참여적으로 행동해야 할 일은, 우리 교단 내의 잡다한 일로 인하여 서로 갈등하고 대립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생명성을 농단하는 괴질 내지는 질병과 맞서 싸우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도교를 위하는 일을 우선하되, 교인 간에 각자위심을 버리고 잘못된 일에는 자기를 먼저 책하고 좋은 일은 서로 권하는 교단의 풍토를 조성하는 일입니다. 사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실천하더라도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무리 선제적으로 괴질에 대응하고 신앙으로 극복하려 하며, 진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쉽게 정화되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 천도교인을 좋아해서 친화감이 쉽게 조성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대신사께서도 포덕문에서 「賢者聞之하고 其或不然이 吾將慨歎이나 世則無奈라(어진 사람도 이를 듣고 그것이 혹 그렇지 않다고 여기니 내 못내 개탄하거니와 세상은 어찌할 수 없는지라)」 라고 하여 세상은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야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스승님께서 구도 수행을 하셨고 결국 목숨까지 바치신 것 아닙니까? 정말 스승님 말씀대로 세상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있고 천도교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을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영성으로 즐겁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보지 않겠습니까? 너무 큰 꿈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나부터 내 가정부터 내 이웃부터 아름답게 만듦으로써 이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도의 힘으로 세상이 아름다워지면 사람들이 우리 도를 좋아해서 우리의 교당에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가득 찬 천도의 길을 함께 걸으며 그 힘으로 세상을 더욱 아름다운 천국으로 바꾸어 갈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포덕162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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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신앙으로 생활에 활력을 찾자모시고 안녕하십니까? 다사다난했던 무술년도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연초에 계획했든 사업 들은 잘 마무리가 되셨는지요. 내년에는 삼일운동 백 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천도교에 위상이 더욱 충천하기를 기원합니다. 동덕님들 내년에도 건강과 행운이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은 ‘올바른 신앙으로 생활에 활력을 찾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무엇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떠한 보람을 느낄 수 있으며 천도교를 신앙함으로써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신앙은 다음과 같이 3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직접 신앙 인간의 흥망을 신에 의한 위력으로 믿어 지배와 간섭을 받고자 하는 민속화 한 다신 사상의 신을 믿고 모르는 것을 위탁하고 한 일을 감사하다고 보고하는 미신의 다신 주의 신앙은 예로부터 민속화 하여 전하여 오는 것입니다. 화복 길흉을 기원하는 신, 직접 신앙은 우리나라에 전통화하여 가정에서는 토주신, 산신, 수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다신 숭배로 전하여 내려오는 신앙입니다. 둘째, 간접신앙 한울님을 직접 믿지 못하고 한울님과 통하는 중보자를 중간에 내세워 간접으로 믿는 계급적인 중보자 신앙입니다. 사람은 한울님을 직접 믿고 상통할 수 없으므로 한울님을 직접 통할 수 있는 중보자를 중간에 내세워 그 이름으로 믿는 신앙이 간접신앙입니다. 보통 사람은 기원할 자격을 갖추지 못하여 신의 절대 신임 자인 위대한 자를 중보자로 내세우고 믿는 의존적인 계급적인 신앙입니다. 의존적인 신앙은 항상 잘못에 대해 속죄하면 된다고 믿고 속죄를 기원하는 자와 신을 대신해서 속죄를 받아들여 용서해 주는 자와 사후 천당을 가게 해주는 자가 따로 있어 인간을 초개 같은 존재로 저하하는 제도의 신앙입니다. 셋째, 자주 신앙 한울님을 직접 믿고 한울님과 사람 사이를 가정적인 분위기로 되게 하는 자주 신앙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고 평등 자유 분위기로 한울님과의 사이는 둘이 아닌 하나로 동화되는 가정적이면서 자주적이고 지공무사한 한울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한울님을 직접 믿는 자주 신앙은 자주독립 국가의 국민으로서 자기 고향에서 자유로이 살며 부모 처자가 원만한 가정에서 서로 뗄 수 없는 윤리·도덕으로 같은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인내천 진리의 자주 신앙입니다. 신앙이 없으면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 메이는 사람처럼 방황하거나 금수 같은 사람으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신앙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으므로 침착해서 기도와 노력으로 어떠한 어려움도 슬기롭게 극복하여 전화위복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닥쳤을 때 두렵고 괴로운 마음으로 허둥대다가 더 큰 불행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힘이 됩니다. 신앙은 신념을 가지는 것이며 신념은 심주를 세우는 결심이며 그 사람의 면목을 세우는 기운이요 힘이요 주인입니다. 대 신사께서 경신년 4월 5일에 득도하시고 후천개벽 한다고 하신 말씀은 천사 문답에서 얻은 한울님을 믿는 형언할 수 없는 힘의 표현입니다. 신앙은 일상 기거에서부터 가정생활로 국가·민족의 의무로 인류 전체에 이르기까지 그 힘이 됩니다. 대 신사는 보국안민 포덕 천하 하신다고 하며 지상 신선 즉, 천사가 된다고 전 인류의 희망이 되는 힘을 주신 것은 한울님을 믿는 데서 한울님의 힘을 얻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조금도 두려움과 불평이 없이 태연한 태도로 대구 장대에서 참형을 받으신 대 신사의 힘은 한울님을 믿는 신앙의 힘입니다. 갑오동학혁명, 갑진개화운동, 기미삼일운동, 일제하에 반일 사상의 고조로 비롯된 무인년 황해도 반일 기도사건 등 현재의 이르기까지 남북한에서 사상의 대립으로 수많은 신도의 희생과 옥고와 불우한 세파의 역경에서도 일관해서 백수십 년을 버티고 내려오는 것은 한울님을 믿는 신앙의 힘이며 천도와 천운을 믿는 신앙의 힘입니다. 한울님을 믿으면 천도를 알게 되고 천도를 알고 믿게 되면 시대가 향상 발전됩니다. 그것은 사인 여천 주의를 실행한 신앙의 힘이 합기덕 되어 무위이화로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정신과 마음의 영양소요 강장제가 되는 것입니다. 현실의 인간사회를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신앙. 현실의 인간사회를 낙원으로 할 수 있다는 신앙은 인내천 진리의 신앙입니다. 이 지구는 무형한 한울의 모든 성령과 영기를 화생 시킨 곳이므로 한울님의 뜻대로 인간의 낙원을 이루는 곳입니다. 인생은 한울님의 죄를 지고 온 것이 아니라 무형의 한울님이 유형의 한울님으로 귀화하여 태어난 것입니다. 화초의 씨가 나와서 성공적으로 본연의 꽃을 피우듯이 성령의 화신으로 된 사람을 영광스럽게 알고 즐거워 하여야 합니다. 이 지상의 천국을 실현하고 지상 신선이 되어 생활하는 안락한 인간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의무와 책임을 완수하자는 신앙이 인내천 진리의 신앙입니다. 정신과 이념에 구속되지 않으려는 신앙 불필요론. 그날그날에 일신상의 만족과 향락을 위하여 현실 주위로 내일의 인간윤리를 생각하지 않고 이념에 구애받는 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독선적입니다. 마치 법 없는 사회 예절이 없는 사회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념에 근거를 두지 않는 향락과 자유는 공부하기 싫다고 공부하지 않는 행동과 같습니다.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일 안 하고 저축하지 않는 행동은 책임자 없는 조직과 같이 오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정신의 부담도 인간사회의 향상 발전과 존엄한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제재를 달게 받는 것입니다. 신앙은 선견지명의 신념입니다. 신앙은 앞으로 보이지 않는 장래를 보고 말하기 어려운 장래를 믿어 희망을 신조로 하여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신념을 굳건히 하여 노력하고 믿도록 앞으로 장기적인 목표를 세운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현실 위주의 사업으로 만족하지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오늘의 일 중에도 정신과 육신의 공동 관심사를 염두에 두고 매사 행동을 삼가 오늘보다도 내일인 먼 장래에 미치는 영향과 나의 의무를 다하여 자손만대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사업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오늘만을 보고 생활하나 신앙생활은 맨 앞을 본 선견지명으로 고생을 무릅쓰고 감수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잘살기 위함이다. 신앙생활이란 그리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따르는 제도와 금기가 있으므로 제도와 금기를 지키는 괴로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닌 행복한 즐거운 행사가 되어야 하며 즐겁게 생각함으로써 정성이 되고 지극한 신앙이 되어 그 정성과 신앙의 결과가 진정한 행복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원에 화초와 수목은 나뭇가지를 잘라 주어야 하고 비료나 물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꾸는 행동을 고생스러운 노력으로 안다면 화초와 수목을 심은 정신과 어긋나며 진정한 재미를 모르는 것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약간의 비용이 들고 약간의 제도로 제재가 된다고 해도 그 돈과 제재는 괴로움이 되지 않는 행복한 생활의 한 토막이라는 생각을 가질 적에 만족한 기쁨의 희망입니다. 이 기쁨의 생활은 돈으로 살 수 없고 권리로도 만들 수 없는 행복한 신앙생활이며 훌륭한 큰 인간 사업으로 변모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신앙이 없는 인간은 외롭습니다. 생각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없다는 것은 외로움뿐입니다. 생각이란 상대와 합하는 것이며 예를 들면 사업하는 이는 사업의 생각을 하고 연인은 연인에 대하여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 외로움이 덜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생각은 그 시한이 지나가면 희비 양선으로 결정되어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란 일부적이며 일신 전체의 생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종교를 신앙하는 진리의 생각은 사업하는 이나 연인이나 병석에 누운 환자나 위대한 정치가나 학자나 군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어떠한 경우라도 틈틈이 생각하고 생각하여 외로움을 잊는 가운데 본연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종교적인 진리의 신앙입니다. 신앙이 없는 인간은 의논하고 충고를 얻을 부모가 없는 고아나 남편 없는 살림과 같고 선생 없는 학생의 처지와 다를 바 없이 외로운 것입니다. 진리의 신앙이란 목숨이 다하도록 배우자와 같은 존재가 되므로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고 나아가면서 작은 일에 구애 되지 않고 작은 일에 고통을 느끼지도 않게 됩니다. 신앙은 희락의 핵심이요 종자입니다. 신앙이 희락의 핵심이요 종자란 신앙에서 세상 모든 근심을 해탈하는 힘과 희망이 생기고 기분이 상쾌해지며 신(神)이 나서 심화기화가 되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을 말함입니다. 동지 동덕 간에 만나는 즐거움이나 교회당에서 신(神)나게 노래할 때 한울님께 감사한 심고를 할 때나 주문을 외울 때 심화기화한 그 즐거움을 애연가가 주린 담배 피우거나 애주가가 목마를 적에 술 마시는 즐거움이요, 무희나 가수가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즐거움입니다. 잊어버렸던 물건을 찾은 즐거움이나 근심하든 걱정이 없어진 즐거움 못지않은 심독희 자부(心獨喜自負)하는 자랑스러운 마음은 당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 사실을 체험하여 본다면 이러한 즐거움을 느끼는 신앙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만족을 줍니다. 어린애가 울다가도 어머니의 젓만 물리면 즉시 울음을 멈추는 것은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로서 믿는 대상을 생각하면 즉시 정신과 마음이 안정되는 것은 신앙으로서 어린애가 어머니 젖을 문 것과 같이 만족하기 때문에 정신과 마음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울 때 이십일 자 주문 (二十一字 呪文)을 생각하고 외우면 고통을 잊을 수가 있고 시간이 지루할 때 주문을 외우면 지루한 것을 잊어버리고 피로할 때 주문을 외우면 피로가 없어집니다. 이것은 자기의 심화기화로 이해와 해탈로써 자위 되며 심신의 안정을 가지는 호신의 좋은 방법입니다. 이상으로 신앙에 대하여 다방면으로 열거하였는데 우리 동덕께서는 적극적으로 신앙의 열의를 갖고 노력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리며 오늘에 설교를 마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포덕 160년 1월 신인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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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이화, 조화이며 천리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세계는 지금까지 유지해 오던 모든 사회적 시스템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어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학자는 앞으로 정치 경제 종교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시작될 것이며 앞으로는 코로나19가 발생한 이전상태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늘 바깥 활동을 하면서 바쁘게 살다가 이번 기회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서로 안부를 물으면서 지내다 보니 우리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부질없는 것이 무엇인지 뚜렷해진 것 같아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해 온 삶의 방향과 그동안 구축해 온 사회적 시스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나 언제든지 위기와 환란이 찾아올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위기도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위기 속에서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보여주어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몇 달 만에 세계가 놀라울 정도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면서 우려와 걱정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초기에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대응 방법을 놓고 우리를 비난하거나 경계하던 나라들도 우리가 옳았다는 긍정적인 평가 속에서 신뢰로 바뀌고 있으며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우리 문화와 함께 한국의 독창적인 종교인 천도교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세계의 석학들은 앞으로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이 급속도로 변화할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는 것에 전 세계의 많은 나라가 긴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변화가 이미 161년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신사님께서는 “12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라고 하시며 문명의 대전환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병지란 지낸 후에 살아나는 인생들은 한울님께 복록정해 수명일랑 내게비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경전을 통해 수없이 보아 온 천도교인이라면, 인류의 문명이 ‘다시개벽’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병지란’에 대해서도 그동안 우리나라가 많은 재난을 겪어 왔기 때문에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대신사님의 심법을 계승한 우리 천도교인들은 지금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중앙총부에서는 1주일간 특별기도를 실시하는 공문을 보내 전국의 교인들은 집에서 특별기도를 하여 왔으며 오늘로써 특별기도를 마치게 됩니다. 그러나 수도는 계속되어야 하고 더욱 깊은 공부를 하시어 우리 눈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고 생명을 살리는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 설교 제목을 무위이화로 정해 보았습니다. 무위이화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한울님의 조화이며 천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는 한울님께 기원하고 바라는 단계에서 무위이화의 단계를 공부하자는 의미도 있습니다. 최근 몇 분들과 함께 오랜만에 함께 수련을 하였는데 그동안 수도를 꾸준히 해 오신 결과 주문소리도 표정도 언행도 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자연히 화해진 모습을 보니 천리를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 세계 정세는 일찍이 대신사님께서 말씀하신 ‘무병지란’과 다름이 없습니다. 대신사님 당시에도 콜레라가 삼남 지방을 휩쓸어 많은 사람이 전염병으로 죽어갔습니다. 신유년 여름에 용담의 문을 열고 포덕을 처음 시작할 때 용담에 명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도를 배우고자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병을 고치고 살기 위해서 몰려들었습니다. 대신사님은 영부를 써서 많은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영부를 병에 써보니 혹 낫기도 하고 낫지 않기도 하여 그 까닭을 살펴보니 도덕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매번 효험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도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입도를 하고 도를 닦으니 오래된 병이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낳았으며, 물욕이 제거되고 총명해지고 심지어 얼굴 모습도 바뀌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대신사님은 “입도한 세상사람 그날부터 군자되어 무위이화 될것이니 지상신선 내아닌가 하고 노래하셨습니다. 해월신사님 당시에도 콜레라가 창궐하여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이를 면하는 길은, 위생을 철저히 지키고 주변을 청결히 하고 수도에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잘 실천하였던 교인들은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며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 때도 모두 무사했으며 이를 본 사람들은 동학을 하면 괴질도 피해간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들어 왔다고 합니다. 성사님께서도 포덕 51년 8월에 서울 시내에 콜레라가 유행하여 걱정하는 교인들에게 우리 교인들이 아직 신앙심이 빈약하여 눈에 보이는 물질과 귀에 들리는 이론만을 숭상하다가 보니 유행병 같은 것을 무서워하는 것이라며 신사주문을 지어서 교인들에게 시일 저녁 기도식 때 105회를 외우라고 하셨습니다. 춘암상사님께서도 수해로 사람들이 천명이나 죽는 모습을 보시고 무병지란이 아닐 수 없다며 교인들에게 수도를 극진히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보면 스승님들께서는 시련과 위기가 닥쳐올 때나 큰일을 앞두고서 모든 교인에게 가장 먼저 수도에 힘쓸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즘 세계 곳곳에서는 코로나가 지나간 후에 더 큰 충격과 시련이 닥쳐올 것이란 예고가 잇달아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무병지란은 어느 한 나라나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영향과 충격도 세계적이고 전 지구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무병지란을 피하여 살아날지라도 살아가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힘들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스승님들께서는 무한하고 무궁한 생명의 근원과 통할 수 있도록 수도를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다고 봅니다. 그러나 요즘 대부분 물질이나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한울님의 뜻과 스승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수도하는 교인들이 줄어들자 교당도 점점 비어가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사님께서는 「포덕문」 첫머리에서 “저 옛적부터 봄과 가을이 갈아들고 사시가 성하고 쇠하는 것이 옮기지도 아니하고 바뀌지도 아니하니 이 또한 한울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이로되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무위이화로 알더니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논학문」에서도 “오도 무위이화라” 하시며 서학과 다른 우리 도의 이치가 무위이화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문을 풀이하시면서 조화를 무위이화라고 하셨습니다. 「포덕문」에서 대신사님은 한울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하건만, 한울님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부우민(愚夫愚民)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만사를 안다고 하지만, 한울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우부우민입니다. 비록 천도교를 하지만, 시천주를 실지로 체험하지 못하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남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인내천’ ‘사인여천’을 말로만 외치는 사람들도 우부우민입니다. 한울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우리 천도교인들이 수도를 참 열심히 할 때가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5시 기도식과 함께 1시간 수련을 하시고 일과를 시작하시는 분이 대부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 적어도 한두 차례는 수도원에 가셔서 합동수련을 하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의 수도원에는 교인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열기가 식어 지금은 수도원이 텅텅 비고 교당이 비어가고 있습니다. 또 매년 단체수련을 실시하지만, 참가하는 인원도 적고 수련내용도 부실하고 정성도 예전보다 많이 부족합니다. 예전 우리 교인들은 군대보다도 더 정확하게 시간을 지켰고, 여름날 천둥 번개가 요란하고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려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천도교인들 수련 모습은 당시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참 대단한 모습이었습니다. 또 휴식시간에는 일감을 찾아들고 둘러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힘든 줄 모르고 일하시는 모습은, 처음 수련에 참가한 사람들을 감동시켜 힘들어하던 사람들도 그 분위기 속에서 감명을 받아 1주일 수련에 대부분 강령이 되어 한울님 모심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천도교인이라면 누구나 시천주는 알고 있습니다. 들어서 아는 사람도 있고, 배워서 아는 사람도 있으며, 경전을 살펴보고 알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또 주문을 외워서 직접 몸과 마음으로 깨달아서 아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이 시천주를 참으로 아는 사람일까요? 이제는 말만 하는 천도교인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닦고 실천하는 천도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형식만 남아있는 천도교가 아니라 살아있는 천도교를 만들어야 합니다. 역사만 강조하는 천도교가 아니라 현재를 중시하고 미래를 앞장서서 열어가는 천도교가 되어야 합니다. ‘무병지란 지낸 후에 살아나는 인생들은 한울님께 복록정해 수명일랑 내게 비네’ 라고 하신 상황이 눈앞에 닥친 지금 우리 천도교인들은 무엇으로 사람을 살릴 것입니까? 예전에는 강령도 받고 영부도 받고 강화의 가르침도 받으신 분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수도를 하는 교인들이 별로 보이지 않고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측면에서만 관심을 갖고 있는 천도교인, 그리고 사업에만 관심이 있는 교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천도교의 힘은 결국 천도교인으로부터 나오며 천도교인들의 힘은 시천주 신앙과 수도를 통해서 나옵니다. 수도하는 교인들이 없다면, 천도교의 생명력이 살아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가운데 심각한 위기가 닥칠 것이란 전망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두 막막한 심정일 것입니다. 더욱 우리나라는 초기에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비난과 경계의 대상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나라가 됨으로써 국가적 위상도 높아지고 세계인의 관심을 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우리 인류에게 커다란 교훈을 남겨 주었으며 삶의 중요한 가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고도의 물질과학 문명을 추구해 왔으나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을 통해서 그 한계를 여실히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급변하는 인류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 시대에 우리 천도교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일까요? 얼마 전 어떤 분이 “당신은 왜 수도를 하는가?” 라고 물었을 때 저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자 수도를 한다고 무심히 대답하였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구도 동기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수도를 해야 할 때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 어떤 불심이 깊은 석공이 바위를 쪼아서 불상을 만들려고 온 산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적당한 바위를 찾지 못하고 지쳐서 잠시 쉬려고 하는데 눈앞에 부처님이 떠억 앉아계셔서 깜짝 놀라서 일어나 보니 바위 속에 부처님이 계시더랍니다. 그래서 군더더기를 제거하니 부처님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나더란 글을 읽으면서 정신이 번쩍 났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산에 있을 때 유명한 사진작가가 “피사체는 스스로 말한다”는 야릇한 말을 하였는데 자기가 사물을 포착하여 셔터를 누른 것이 아니라 피사체가 렌즈에 들어와서 그냥 셔터를 눌렀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끔 이런 분들을 만나면 기분도 좋아지고 그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어집니다. 예술가들이 도달한 무위의 세계와 그 경지가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원의 삶은 과연 예술가들만 가능한 것일까요? 사실 주위를 둘러보면 평범한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오고 감동을 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오래전 환원하셨지만 제가 존경하는 숙덕 어르신은 홀몸으로 아들 여섯을 키우신 위대한 어머니셨습니다. 남편 없이 홀로 아들 여섯을 키우면서 대학 공부까지 시키셨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고생인 줄 모르고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을 먹이고 공부시켜야 해서 자신의 신세를 비관할 틈도 없었다고 하시며 자식들 덕분에 힘든 시기를 잘 넘겼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자식들이 자신을 살리고 키웠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며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셨던 그분에게는 자식에 대한 어떤 집착도 기대도 원망도 없었습니다. 무위이화를 알아야 진정으로 무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무위의 삶을 살아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해월신사 법설 「기타」 편에 “주문 열세 자는 천지 만물화생의 근본을 새로 밝힌 것이요, 수심정기 네 글자는 다시 천지가 운절되는 기운을 보충한 것이며 무위이화는 사람이 만물과 더불어 천도천리에 순응하는 우주만유의 참된 모습이니라 ” “십삼 자로써 만물화생의 근본을 알고 무위이화로써 사람이 만물과 더불어 천리와 천도에 순응함을 안 연후에 수심정기로써 천지가 크게 화하는 원기를 회복하면 능히 도에 가까움인저”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도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진실한 사람입니다. 진실한 사람 곁에는 진실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진실한 사람이 있어야 무슨 일이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천도교를 하는 이유가 다만 나만 잘살기 위함은 아니지 않습니까? 수도를 하는 이유가 남보다 잘난 사람이 되고자 함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위이화는 잠시도 쉬지 않고 천지 만물을 낳고 기르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천지 만물을 살려내지만, 그 공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귀천도 가리지 않고 시비도 가리지 않는, 그래서 걸림도 없고 막힘도 없이 한없이 자유로운 한울님의 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길이며 멋과 품격을 지닌 천도교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 수도가 필요한 것이고 스승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수도에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지금 눈앞의 세상은 모든 것이 변화하면서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낡은 것은 이미 생명이 다했음을 선언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개벽운수를 누구나 실감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우리도 하루속히 새로운 차원의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미래를 착실히 준비한다면 다가올 미래가 두렵기보다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무위이화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생명과 영성이 충만한 천도교인들이 많아질 때 천도교의 중흥도 멀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며, 그 길은 천도교인들이 스승님께서 강조하신 수도를 열심히 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설교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포덕 16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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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님을 바르게 믿자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 설교를 맡은 원암 김창석입니다. 아침저녁 날씨가 부쩍 쌀쌀해졌습니다. 여러 숙덕 어르신 사모님들 건강 잘 챙기시길 심고 드립니다. 설교에 앞서 제 소개를 간략히 올리겠습니다. 저는 포덕 109년, 1968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천도교에 입문하였습니다. 이후 대학 진학 차 서울에 올라와 대학생 단 단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공직에 몸담고 도가를 이뤄 부족한 가운데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한울님을 바르게 믿자’로 정해보았습니다. 신앙은, 종교는 믿는 것이며, 무엇보다 바르게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이 ‘한울님을 바르게 믿자’라는 내용을 대신사님께서 처음 이 세상에 도를 펴신 <포덕문> 에 비춰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포덕문>은 한울님의 도와 덕을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밝히신 글로, 신앙의 핵심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시작이 중요하다고, 저는 우리가 바르고 참된 신앙을 하기 위해서는 이 <포덕문>을 각별히 유념해서 숙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한울님을 믿어야 한다 먼저 첫째로, 대신사님은 <포덕문> 첫머리에서 춘추와 사시, 비와 이슬의 혜택이라는 우리 삶 주변의 사례를 들어 한울님의 존재와 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한울님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한울님은 엄연히 계시며,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은덕을 베풀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와 덕을 펴는 데 있어 대신사님의 자상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보아라, 네가 주변에서 보고 겪는 이런저런 것이 바로 한울님이 계신다는 증거이고 이 모든 것이 한울님의 은덕이다’라고 아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속뜻은 한울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을 신(信)을 그렇게 강조합니다만, 믿음은 어떻게 하면 생기는 것이며 능해질 수 있는 것일까요? 그냥 내가 ‘믿겠다, 믿는다’ 하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까? 저는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상이 진리든 사람이든 내가 마음으로 수용할 때 믿음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없다면 천도와 천덕도 그 의미를 잃을 것입니다. <포덕문> 앞부분에 바로 뒤이어 대신사님께서는 옛날 오제 이후의 실제 사례를 들어 보다 구체적으로, 한울님은 계시며 그 한울님을 기준 삼아 일동일정과 일성 일패를 천명에 부치는 삶을 삶으로써 사람은 군자와 성인에 이르고 사회는 평안하고 아름다운 도덕 문명을 이루었노라고 거듭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한울님이 우리의 삶 속에 계시며, 한울님을 믿고 은덕에 감사하고, 정성 공경을 다 하는 거기에 평안과 행복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번 한울님을 받아들이고 믿으라는 간곡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는 이 <포덕문>의 앞부분부터 각별히 유념해서 읽어나가야 할 줄로 압니다. 한울님이 직접 가르치는 후천운수 다음 둘째로, <포덕문>에서 대신사님은 당신이 한울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시던 천사문답(天師問答)의 광경을 생생히 전달하고 계십니다. 한울님과 직접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여러 선생님 사모님들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이는 후천시대에는 선천 때와 달리 한울님이 직접 가르침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 경전 여러 곳에서 말씀하시거나 암시하고 있습니다. 의암성사법설 <각세진경>에서 “나와 한울의 기운이 서로 합하여 한울과 사람이 말을 서로 들으며, 뜻과 생각이 서로 같아서 모든 일을 능히 통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신 것이나, 역시 성사님 법설 <권도문>에서 “방금 성령이 현세하여 밝음이 엄숙한지라, 능히 근본을 알아 지키는 데에는 선생의 밝은 도로써 명하여 가르치심이 있어 홀로 묘연한 사이에 받음을 알 터이요”라고 하신 등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한울님을 바르게 믿고 바르게 정성을 들이면, 한울님은 반드시 바른 가르침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울님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봅니다. 하나는 깨달음, 즉 어떤 것을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깨닫게 될 때 모호함과 불안함이 없어지고, 고비를 넘기고 마음이 시원해지고 확신이 드는 것을 경험합니다. 나를 둘러싼 상황과 나아갈 바에 대해 분명한 판단이 서게 됩니다. 즉, 보다 현명해지고, 한울님의 뜻과 스승님의 가르침에 더욱 맞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한울님의 가르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공부가 더해지면 한울님은 내가 해야 할 일, 사명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니다. 즉, 한울님께서는 내가 천도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 나를 이 세상에 내실 때 부여하신 사명을 알게 해주시고, 또 이를 이뤄나갈 방안에 대해서도 해답을 주실 것입니다. 즉, 후천시대는 한울님과 내가 서로 하나로 일치하여 나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는 동시에, 이러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한울님의 뜻과 스승님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되어 나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됨을 뜻하기도 합니다. 말 없고 소리 없는 한울이 가장 무섭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점을 생각하면, 천도에 인연을 맺은 것이 너무도 큰 복이지만, 동시에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항상 삼가고 살피며 나아가야 하는지 알게 되어 몹시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모든 것이 오직 한울님을 위하려는 것 셋째, 대신사님께서는 한울님으로부터 영부와 주문을 받는 대목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영부와 주문은 우리 천도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여기서 영부는 영부심 즉 한울님 본래의 마음, 온전한 천심(天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 바로 그 뒤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울님께서 대신사님께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길이 살면서 덕을 천하에 펴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나, 즉 한울님 당신을 위하게 하면’이라는 구절이 정말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해월신사법설 <강서>에는 “한울이 백성을 내리시어 임금을 내고 스승을 내었으니 오직 상제를 돕게 함이라”라는 서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임금은 교화와 예악으로 만민을 화하고 법령과 형벌로 만민을 다스리고, 스승은 효제충신으로 후생을 가르치고 인의예지로 후생을 이루게 하나니, 다 상제 즉 한울님을 돕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암성사법설 <수수명실록>에는 “한울이 뜻을 형체에 부쳐 임의로 활용하는 것이 명백함이여, 모실 시(侍) 자에 어찌 믿음이 없으며 공경이 없겠는가”라고 하여, 한울님이 당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을 내고 사명을 주어 활용하신다고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한울님을 위한다는 것은 한울님이 좋아하는 주문을 자꾸 외우고, 마음을 평안하고 기쁘게 하며, 효제 온공을 실천하고, 나아가 한울님의 뜻과 가르침을 이 세상에 펴는 천도 사업, 내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해나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신앙하는 사람은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어떤 회사에서, 또 여기 사모님들이 많이 와 계시는데 결혼해서 시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입사를 하고 시집을 가서 “내가 이 회사에, 이 집안에 왔으니 정말 열심히, 제대로 한번 잘해 보겠다”라고 다짐하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위아래를 챙기며 그야말로 온갖 노력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회사 사장님이나 시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아주 만족하실까요? 아니 만족하시던가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그 사장님은 “열심히 하니 좋긴 좋다. 그런데 무언가 아쉽다”라고 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사장님은 처음에 목적한 바가 있어 회사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과 계획도 세웠을 것이며, 그렇게 회사를 운영해오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여러 고민도 생겼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 훌륭한 직원이라면, 자기 입장이나 생각에서가 아니라, 사장님의 입장에서 지금 이 회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그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과 역할은 무엇일까를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회사의 사정을 살피고, 사장님과 수시로 대화하며 방법을 찾기 위해 적극 나선다면, 바로 이런 직원에게 사장님은 “아! 이 직원은 정말 나의 목적과 고민을 알고 제대로 일하는구나! 우리 회사에 보물이 들어왔네”라고 하면서 애정을 주고 칭찬도 하고 적극적인 지원은 물론, 승진도 시켜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과는 나오지 말라고 해도 나올 것입니다. 이는 시댁이나 교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선생님 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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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문명 전환을 위한 결단의 시간모시고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저는 지난 2년간 인도 오로빌 공동체를 체험하고 지난 4월에 귀국했습니다. 원래는 3-5년 정도 계획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생각보다 일찍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인도의 체험담은 다음에 다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기후변화를 비롯한 전 지구적 생태위기와 그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천도교는 여기에 대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 시대 천도교의 역할과 과제에 대해서 같이 생각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라고 하는 세계적인 팬데믹, 역사책에서나 봤던 괴질을 현실로 마주하면서 고통스런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코로나는 진정되기는커녕 점점 더 확산일로에 있는 것 같습니다. 백신이 언제 나올지, 나온다 하더라도 코로나가 끊임없이 변종되고 있어서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 지도 의문입니다. 어쩌면 평생 코로나와 함께 공존하면서 사는 삶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코로나보다 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나올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는 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야생동물을 남획하면서 생긴 재앙, 즉 환경파괴에서 비롯된 환경재앙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미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바이러스, 괴질뿐만이 아닙니다. 코로나 외에도 생태 위기는 갈수록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기후변화, 종다양성 소멸, 열대림 파괴, 사막화, 토양침식, 홍수와 가뭄, 폭염과 한파, 지하수 고갈과 오염, 산호초 파괴, 쓰레기 매립지 확대, 독성 폐기물과 살충제 및 제초제, 농약과 화학비료로 인한 땅의 황폐화, 핵폐기물, 미세먼지, 천연자원의 고갈, Gmo 농산물 등등 이루 다 헤아리기도 힘듭니다. 이 중에서도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기후변화입니다. 최근의 세계적인 홍수와 가뭄, 기록적인 폭염과 한파는 대부분 기후변화로 인한 것입니다. 최근 유럽은 150년만에 최악의 폭염으로 약 3만 5천명이 사망했으며, 인도는 50도가 넘는 폭염으로 약 1500명이 사망했습니다. 2010년 일본에서 쓰나미로 원전이 폭파되어 2만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으며, 중국과 브라질, 파키스탄은 기록적인 폭우와 홍수로 수천명이 사망하는가 하면, 스페인과 포르투칼, 아프리카는 극심한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녹으며 영구동토층이 감소하고 있으며, 제트기류의 이상과 바닷물의 열순환이 방해받고 산호초가 멸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 수림대와 아마존의 밀림도 감소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지난 100년간 약 1도가 상승했으며,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2006년 발표된 영국 정부의 ‘기후변화의 경제학’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의 온도가 1℃ 오를 경우, 안데스 산맥 빙하가 녹으면서 이를 식수로 사용하고 있던 약 5000만 명이 물 부족으로 고통을 겪으며, 매년 30만 명이 기후 관련 질병으로 사망한다고 합니다. 지구의 온도가 3℃ 오를 경우 아마존 열대우림이 붕괴되고, 최대 50%의 생물이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되며, 4℃가 오르면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터키가 사막으로 변하고 북극 툰드라의 얼음이 사라져서 추운 지방에 살던 생물들이 멸종한다고 예측합니다. 5℃ 오를 경우 히말라야의 빙하가 사라지고, 바다 산성화로 해양 생태계가 손상되며, 뉴욕과 런던이 바다에 잠겨 사라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균기온이 6℃ 오를 경우 인간을 포함해서 현재 생물종의 90%가 멸종한다고 예측합니다. 최근에『2050년, 거주불능 지구 – 한계치를 넘어 종말로 치닫는 21세기 기후재난 시나리오』를 쓴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는 미래에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것은 ‘기후변화’ 때문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추세대로 간다면 2050년에는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 지표면의 30% 이상에서 극심한 사막화가 동반된다고 합니다. 지구 곳곳에서 산불, 폭염, 가뭄, 침수 등의 이상기후를 겪을 것이고, 강우량이 절반으로 떨어지는 엘리뇨 현상이 만연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기후재난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려는 새로운 유형의 ‘기후 난민’이 등장할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폭염이 1년에 100일 이상 지속될 것이고, 전 세계 곡물 수확량이 80%가 감소할 것이며, 더불어 만성적 물 부족 문제에 처할 것이다. 이로 인해 국가간 식량 전쟁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UN은 2050년에 기후난민이 2억명에 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생존에 취약한 빈민층이 10억명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또 IPCC(유엔 산하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의 보고서에 의하면 지구가 2도 상승하는 경우 1.5도 상승할 때보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망 인구가 약 1억 5000만명 더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심각한 결과를 예상하고도 국제간의 협력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1997년 기후변화협약을 담은 교토의정서가 무색하게 이후 20년 동안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했습니다. 또한 2016년 기온 상승을 2도 이내로 유지하는 파리기후협약에 195개국이 동의했지만, 이를 제대로 이행하는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습니다. 심지어 미국은 이 협약에서 탈퇴를 공식하기도 했습니다. 세계에서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가 미국인데도 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경제성장을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환경 문제는 결국 경제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생태계 파괴의 현상적 원인은 이산화탄소의 과다 방출, 초국적 종자회사의 농간, 부도덕한 기업의 불법적 행위들로 볼 수 있지만, 더 근본적 원인은 결국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상품화시키는 자본주의의 성장이데올로기, 시장원리가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확장을 동력으로 존속되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연과 노동을 착취하게 됩니다.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라는 작은 책을 쓴 오리건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존벨라미 포스터는 환경과 경제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자본주의 출현과 더불어 인간은 자기 주변의 모든 것, 즉 토지와 자연자원 그리고 인간 자신의 노동을 시장에서 이윤을 낳을 잠재적 상품으로 간주하면서” 광범위한 환경파괴가 이루어졌음을 역사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사실은 발견이 아니고 점령이었습니다만, 그 이후 얼마나 많은 인디언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땅을 뺏고, 그 땅과 그 땅의 동물, 식물을 착취하면서 환경파괴를 자행했는지 모릅니다. 고급 모피를 얻기 위해 수천만 마리의 수달과 비버, 여우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숲은 파괴되었고, 지역민들이 먹을 곡물을 재배하던 땅에는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사탕수수 단일 작물을 재배하는 엄청난 규모의 플랜테이션, 농장이 건설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땅은 황폐해지고 원주민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났으며,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수백만 명의 노예를 들여왔습니다. 본격적인 산업혁명 이후의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왕자와 제비라는 소설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쓰라린 시간들(1854)이라는 소설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을의 높은 굴뚝에는 그칠 줄 모르는 뱀불꽃 같은 연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 올랐다. 그 마을엔 검은 운하가 있었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염료로 자줏빛으로 변한 강이 하루종일 흐르고 있었다.” 그 이후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으로 이어집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제3세계 민중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1980년대에 와서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것 역시 또 다른 방식의 경제적 식민지를 건설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대놓고 남의 나라 땅을 지배하는 용인될 수 없기에 보이지 않는 자본의 힘으로 세계의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것이 바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놔두고 환경문제를 논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 하는 격에 지나지 않습니다. 환경문제를 경제문제, 사회문제와 별개로 봐서는 안됩니다. 환경문제는 사회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집니다. 환경문제는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으며, 그 과정에서 역시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 전쟁, 제3세계의 저발전이라는 사회문제가 동시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재편 없이는 사회와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금 벼랑 끝으로 향하고 있는 생태적 위기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 자연을 대하는 태도, 생산 양식에 대한 전면적 반성과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로 가자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사회주의 역시 환경파괴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사회주의 역시 근대문명입니다. 이제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넘어선 새로운 생태문명을 고민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폭주하는 자본주의라는 기관차에서 내려서 친환경 에너지로 운행되는 완행버스로, 또는 자전거로 갈아타야 하는 결단의 시간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 천도교는 3·1운동에서 이미 도의적 신문명의 비전을 제시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1920년대 개벽 운동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인간화’를 비판하였으며, 해방공간에서 청우당이 내놓은 ‘신국가건설’을 위한 4대 강령을 내놓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947년 천도교의 정치이념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형의 자본가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를 원치 않는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제도 안에 내포한 모순과 폐해를 미리부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소련류인 무산자 독재의 프로레타리아 민주주의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조선에는 일찍이 자본계급의 전횡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조선의 현단계에 적응한 ‘조선적 신민주주의’를 주장한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당시 이미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소련식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신한국적 민주주의’와, ‘동귀일체의 순환경제’, ‘사인여천의 새로운 윤리에 바탕한 존엄한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우리의 현대사는 이런 천도교 선배들의 안목과 높은 비전과는 달리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최고의 진리인 것처럼 떠받들어 왔습니다. 이는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천도교는 이런 선배들의 높은 뜻을 이어받아서 도의적 신문명, 생태문명의 비전을 이 시대에 맞게 다시 선명하게 제시하여야 합니다. 우리 천도교가 이 시대에 해야 할 역할은 더 이상 천도교 사상이 위대하다고 까마귀 제소리 할 것이 아니라, 이 시대 대다수의 서민들이 느끼는 고통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양극화입니다. 저출산 문제,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최고의 자살률의 원인도 근본적으로 보면 양극화가 심화된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분단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한국사회의 많은 갈등이 분단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강조한, 절멸적인 환경위기를 극복하고 지구를 보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도의적이고 생태적인 신문명의 비전과 구체적 로드맵을 제시하는 일입니다. 새로운 경제모델을 천도교가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공히 넘어설 수 있는 비전과 사상을 가진 거의 유일한 단체가 바로 천도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통일을 준비하는 가장 실제적인 방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스승님과 천도교 선배들의 열망을 계승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럼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합니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전문 연구기관의 설립과 교육기관의 설립입니다. 더 이상 동학사상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이 사회의 문제와 고통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는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양극화, 그리고 분단 문제이고, 하나는 절멸적인 위기에 놓인 자연과 생태계의 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고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전문적 연구기관의 설립이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 미래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교육기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일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됩니다. 교단의 총력을 모아 교육기관을 설립해야 합니다. 대학원대학이라도 설립해야 합니다. 늦었지만,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 되는 과를 유치하려고 해서는 다른 대학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시대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대의를 내세운 과를 앞장세워야 합니다. 그냥 천도교대학원대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천도교 생명평화대학원’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천도교 교리교사를 연구하는 과도 필요하고, 수련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수련명상학과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화두인 생명과 생태, 통일과 평화 문제를 다루는 ‘생명평화대학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 생명학과, 평화학과, 통일경제학과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NGO학과, 사회복지학과, 미래문명학과 같은 것도 나중에 추가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대학이 다 어려운데 지금 대학을 설립해서 운영이 되겠느냐고 걱정하십니다. 하지만 시대적 과제와 사명을 실현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 그러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대의와 명분이 있다면 반드시 감응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시세에 영합해서 돈 되는 학과나 유치한다고 하면,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할 것입니다. 반드시 ‘생명평화대학원대학’이어야 합니다. 저는 천도교의 미래가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 시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 연구기관과 그것을 실천할 인재양성의 교육기관, 이것을 미뤄둔다면 이제 천도교는 이 땅에서 서서히 이 땅에서 사라질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사라지는 운명을 앉아서 가만히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이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다시 일어설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전환을 위한 결단의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포덕 161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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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과 시천주侍天主 진리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이 코로나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우리 세대에서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전염병으로 귀한 목숨과 생업과 행동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모든 불행한 일들이 한울님의 특별 감응으로 일시에 정리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 설교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과 시천주侍天主 진리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새해를 맞아 우리 천도교인은 스승님께서 천사문답을 통하여 무극대도, 동학, 천도교를 창도하셨던 오심즉여심의 심법과 시천주 진리를 받았던 161년 전 천사문답에 대해 “초심불망”하여야 하겠습니다. 『동경대전』 「논학문」을 살펴보면 스승님께서 경신년 사월에 천하가 분란하고 민심이 효박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즈음 들리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도무지 다른 연고가 아니라, 서양 사람들은 도를 서도라 하고 학을 천주학이라 하고, 교는 성교라 하니, 이것이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러한 소문을,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없으므로 내 또한 두렵게 여겨 다만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즈음에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으되,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수심정기하고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한울님 대답하시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너는 무궁 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하는 오심즉여심의 심법을 받음으로써 도는 무극대도, 천도요, 학은 동쪽에서 생겼으므로 동학이면서 마음공부가 주인 심학이요, 교는 한울님의 도를 가르치는 신앙으로 천도교가 창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건질 무극대도 동학, 천도교가 창도하기 이전을 선천시대라고 하고, 창도 이후를 후천시대라 구분하고 있습니다. 선천시대 기성종교의 신은 무소불위하며, 전지전능한 절대자로 신에게 절대 복종하여야 하는 종속 관계 또는 노예관계를 유지하면서 특정계층만 신과 동등한 신분으로 사람을 다스리는 계급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반면 후천시대를 여신 스승님의 오심즉여심의 심법과 시천주 진리는 기성종교의 신관을 180도 바꾼 진리로, 모든 사람의 마음은 한울님과 같은 마음이며,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만민평등의 후천 오만년 내려갈 진리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천도교를 신앙하는 교인이나 천도교를 신앙하고자 하는 예비 교인은 스승님의 오심즉여심의 심법과 시천주 진리를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스승님의 심법과 진리를 체험하는 수도연성이 꼭 필요합니다. 천도교 신앙을 함에 있어 수교자는 전교인의 지도를 받으며, 우선적으로 7일 또는 21일의 수도연성을 통해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는 주문공부를 함으로써 오심즉여심과 시천주 진리를 체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해 전국에 있는 수도원에 집합이 금지되어 교인과 예비교인이 수련을 하러 갈 수가 없는 안타까운 시대로 새해를 맞았습니다. 이에 각 가정에서 가족끼리 하는 재가수련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새해를 맞으면 전통적으로 신년 목적을 정해 7일 또는 21일을 정해 특별기도를 봉행하는데 새벽 5시, 저녁 21시 기도식 및 경전봉독 후, 한 시간 동안 현송과 묵송으로 나누어 주문공부를 하였습니다. 천도교 수련은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는 마음가짐으로 “성신쌍전性身雙全”을 하는 수련법입니다. 현송은 21자 주문을 소리 내어 송주하는 것입니다. 요즘과 같이 항상 마스크를 쓰는 상황에서 몸속에 있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잘 못하고 공기 중 산소를 마시는 것이 적어져서 머리가 명쾌하지 못하고 답답한 몸과 마음을 활기차게 할 수 있는 수련법입니다. 묵송은 천지미판 전 내 몸과 마음이 생기기 전 성품을 보고 마음을 깨닫는 수련법으로 견성각심하기 위해 조용한 속에서 심송心誦으로 본주문 13자를 무시로 외우는 것입니다. 어려운 코로나19 시대에 건강한 성심신 삼단을 위하여 각 가정에서 정성·공경·믿음으로 재가수련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천도교 신앙을 함에 있어 가정과 사회생활 및 모든 일상생활의 기본이 되며, 일용행사 시 실천궁행하여야 하는 진리인 오심즉여심의 심법과 시천주 진리를 수호,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오심즉여심의 심법은 스승님께서 경신년 4월 5일 “한울님 마음이 곧 스승님 마음”이라는 천어를 듣고 이 세상에 창명한 무극대도, 천도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오심즉여심의 심법에 기초하시어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는 13자 본주문과 8자 강령주문 총 21자 주문을 짓고 순천명, 순천리하지 않고 세상을 망치는 각자위심하는 위정자와 양반 상놈의 계급사회, 적서의 차별, 남존여비 등을 타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과 세상을 건지실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21자 주문 중 가장 중요한 글귀가 본 주문 맨 처음에 시작하는 “시천주” 석자가 되겠습니다. 시천주는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진리의 말씀으로 천도교를 신앙하는 분들은 다 알고 있지만 지금 살아가고 있는 많은 세상 사람은 본인이 한울님 모시고 있는 진리를 모르고 허무하게 세상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해월신사법설』 「성·경·신」을 살펴보면 “우리 수운 대선생께서는 정성에 능하고 공경에 능하고 믿음에 능하신 큰 성인이시었다. 정성이 한울에 이르러 천명을 계승하시었고, 공경이 한울에 이르러 조용히 천어를 들으시었고, 믿음이 한울에 이르러 묵계가 한울과 합하셨으니, 여기에 큰 성인이 되셔서” 이 세상을 건질 오심즉여심의 심법을 받으신 것이며, 시천주 진리를 창명하신 것입니다. 포덕 4년 영덕에 사는 제자 강수가 스승님을 찾아뵙고 수련의 절차를 물으매 스승님께서 내려주신 것이 「좌잠」입니다. “오도박이약吾道博而約 불용다언의不用多言義, 별무타도리別無他道理 성경신 삼자誠敬信 三字, 저리주공부這裏做工夫 투후방가지透後方可知, 불파진념기不怕塵念起 유공각래지惟恐覺來知” 우리 도는 넓고도 간략하니 많은 말이 필요치 않고, 별로 다른 도리가 없고 성·경·신 석자에 있느니라. 이 속에서 공부한 뒤에라야 마침내 알 것이니,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우쳐 지에 이루도록 염려하라. 천도교인의 수도연성 함에 있어서 「좌잠」의 글귀를 좌우명으로 삼고 더욱 더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는 주문공부에 매진하여야 하겠습니다. 해월신사님께서는 스승님의 심법과 진리를 수호, 계승, 발전시켜 “사람을 한울님처럼 대하고 섬기라”는 사인여천의 윤리를 밝혀 놓으신 것입니다. 사람을 한울님처럼 대하고 섬기려면 위정자와 교직자부터 솔선수범하여 오심즉여심과 시천주, 수심정기가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선성지소교先聖之所敎요, 수심정기守心正氣는 유아지갱정惟我之更定이라(인의예지는 옛 성인이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오직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니라.).”하신 말씀과 같이 ‘수심정기’가 아니면 후천 오만년 내려갈 오심즉여심과 시천주 진리 및 사인여천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마음의 도량을 갖출 수 없는 것입니다. 천도교인은 한울님 마음 즉 천심을 지키고, 내 몸에 모셔져 있는 한울기운을 바르게 한 다음, 세상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살아가야 순천명, 순천리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월신사법설』 「수심정기」편을 살펴보면 “수심정기 네 글자는 천지가 운절되는 기운을 다시 보충하는 것이니라. 수심정기하는 법은 효·제·온·공이니 이 마음 보호하기를 갓난아이 보호하는 것 같이 하며, 늘 조용하여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늘 깨어 혼미한 마음이 없게 함이 옳으니라. 수심정기는 바로 천지를 내 마음에 가까이 하는 것이니, 참된 마음은 한울이 반드시 좋아하고 한울이 반드시 즐거워하느니라.” 의암성사님께서는 오심즉여심과 시천주 진리, 사인여천의 윤리를 수호, 계승, 발전시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신앙을 확립시켰습니다. 인내천 신앙은 3백만 이상의 국민을 천도교에 입교시켜 전국적으로 3·1독립운동을 거행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건재함을 알려 독립의 기초를 다지고, 임시정부 수립을 통한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으며, 현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정신에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동경대전』 「탄 도유심급」을 살펴보면 “내두백사來頭百事는 동귀일리同歸一理하리라(앞으로 오는 모든 일은 한 이치에 돌아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천도교인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의 생각은 앞으로 오는 모든 일은 시천주 진리의 이치가 기준이 되어, 이 진리에 어긋나면 잘못된 것이고 이 진리에 맞게 행하면 올바르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차별과 미국 우선주의, 인도의 세습적 계급사회인 카스트제도, 기성종교의 여성 배제 및 남성우월주의 등은 선천시대의 낡고 뒤떨어진 정신과 제도에서 나온 것으로 후천시대가 되어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 진리가 창명되었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천주 진리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간단명료한 진리로 약 15년 전 호주제 폐지 시 천도교인 중 스승님의 시천주 진리의 이치를 모르고 폐지에 반대하였던 분들이 있었지만, 현재 호주제는 폐지되고, 가족관계등록법이 시행되어 양성평등 시대가 되었습니다. 천도교인은 시천주 진리를 근본으로 용시용활用施用活하여 시대를 앞서 나가야 겠습니다. 시천주 진리를 생활화하기 위해 교인끼리 인사할 때 “모시고 안녕하십니까”라고 안부를 묻는 인사에서 “시천주 인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동경대전』 「논학문」에 “삼재의 이치를 정하고 오행의 수를 내었으니 오행이란 것은 무엇인가. 한울은 오행의 벼리가 되고, 땅은 오행의 바탕이 되고, 사람은 오행의 기운이 되었으니, 천·지·인 삼재의 수를 여기에서 볼 수 있느니라.”라는 말씀과 「참회문」에 “천지의 덮고 실어주는 은혜를 느끼며”라는 말씀을 합하여 생각하면, 한쪽 손바닥은 하늘이요. 다른 손바닥은 땅이라 볼 수 있고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는 천지가 덮고 실어주어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두 손을 잡으면 한자로 사람 인人이 됩니다. 두 손을 잡은 상태에서 천·지·인 삼재의 수와 이 세상사람 모두가 천포형제이면서 물물천, 사사천이라는 시천주 진리를 생각하며 “시천주”라고 말을 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 천도교인은 스승님의 오심즉여심과 시천주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수호, 계승, 발전시켜 시대를 앞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각자위심을 버리고, 오심즉여심과 시천주 진리를 깨닫고, 수심정기하여 코로나로부터 하루속히 벗어나기를 심고 드립니다. 지금은 후천시대입니다. 후천시대를 맞아 후천시대의 근본인 시천주 진리를 알지 못하면 설령 지극한 정성이 있어도 한울이 간섭치 않아 죽음이 무상한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의암성사님 법설』 「권도문」의 글귀를 읽어드리며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이 몸은 선천이기로 화생함이요. 이 마음은 후천이기로 받음이라. 이런고로 세상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지 아니함이 아니언마는, 후천운수를 알아 지키지 아니하면 한울이 간섭치 아니하는 바, 한울이 간섭치 아니하면 오직 사람의 중함으로도 놀다가도 죽고, 자다가도 죽고, 섰다가도 죽고, 앉았다가도 죽을지라. 이와 같이 죽음이 무상한 것은 그 간섭치 아니함을 반드시 알지라. 만일 지키는 사람도 이 운수의 근본을 알지 못하면, 설령 정성이 지극할지라도 한울이 간섭치 아니할 터이니 깨닫고 생각하라. 포덕 162년 신인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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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심법 ; 모심에서 정시정문으로번잡한 세상사에서 잠시 떠나 공기 좋고 조용한 산속 수도원에서 마음을 닦는 하계 수련의 때입니다만, 무병지란의 어려움 속에서 재가수련 해야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수련은 왜 해야 할까요? 살다보면 세상일이나 사람들이 내 맘같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그렇게 푸념하면, “원래 세상일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 한울님 순리대로 되는 거야”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한울님 순리인지 알아야겠지요? 1. “심학이라 하였으니 불망기의 하였어라”(교훈가) 도를 몰라서 못하나요?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이 옳다고 아는 것을 지킬 수 있으려면 마음의 힘이 필요합니다. 당장 시비가 붙어 싸우면 서로 손해지만, 알아도 그 화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사고를 치는게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마음이 몸의 기운을 움직여 육신이 일을 하는지. 그 마음을 살필 줄 알고, 다스릴 줄 아는 것이 마음공부지요. 요즘엔 명상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마음이 변화하는 것을 바라보는 또 다른 마음, 즉 내 안의 참 마음, 한울 마음을 알아채고 그 마음을 지키며, 그 마음에 따라 행하는 것이 천도교의 수행이 됩니다. 2. 내 마음을 어떻게 잘 조절할 것인가? 모든 수행의 시작은 내 안에 나를 움직이는 참 생명, 즉 한울님의 내유신령을 모시고 있음을 자각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시」라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논학문) 모심은 주문의 핵심이자 동학의 핵심 요의지요. 내유신령은 내 안의 생명, 외유기화는 나와 소통하는 내 밖의 모든 생명 내지는 나를 둘러싼 빈 듯하나 가득 찬 신령한 영기를 뜻합니다. 사람은 내 안의 생명이 없어도, 내 밖의 생명(공기, 음식, 물과 동식물, 미생물, 그리고 나와 소통하며 교류하는 생명과의 교감)이 없어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유신령과 외유기화는 서로 떨어지거나 옮길 수 없는 하나의 큰 생명, 기운, 한울이고 이를 지극한 기운 즉 지기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로 연결 되어 있는 생명의 그물망을 알고 한울생명으로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각지불이고 그렇게 자각하고 삶에서 실천하는 것까지가 모심의 뜻이 됩니다. 그로써 모든 생명은 한울로 동귀일체하게 되므로 모심은 각지불이의 실천이 있어야 완성됩니다. 의암 성사께선 온전한 생명의 조건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마음(내유신령)과 나를 비롯한 우주를 관통하는 원리(성품, 외유기화)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몸(각지불이)의 세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성심신삼단) 궁을장이 표상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중에서 우리 몸을 움직이고, 이치를 알고자 하는 것이 마음이니 마음공부가 우리 삶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고 또 바꿀 수 있는지 결정하는 핵심이 되겠지요. 그럼 이 마음은 어떻게 생긴 걸까요? 모든 생명은 누구나 태어날 때 한울의 신령한 기운, 한울마음을 받아 태어납니다. “안에 신령이 있다는 것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갓난아기의 마음이요, 밖에 기화가 있다는 것은 포태할 때 이치와 기운이 바탕에 응하여 체를 이룬 것이라.”(해월신사법설, 영부주문) “마음은 바로 성품이 몸으로 나타날 때 생기어, 형상이 없이 성품과 몸 둘 사이에 모든 이치와 일을 소개하는 요긴한 중추가 되느니라.”(성심신삼단) 이렇게 신령한 마음을 누구나 받아 태어나니 이를 거울에 비유하셨습니다. “사람이 태어난 그 처음에는 실로 한 티끌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 다만 보배로운 거울 (같은 마음)한 조각을 가진 것 뿐이니라.”(성범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보배로운 거울, 신령한 마음을 잊고 욕심 가득한 어리석은 마음을 갖고 살게 될까요? 이를 의암성사는 제이천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두 마음이 있으니 하나는 사랑하는 마음이라 이르고, 하나는 미워하는 마음이라 이르느니라. 사랑하고 미워하는 두 마음이 (참된)마음을 가리운 것이 티끌과 같으니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모든 물건이 마음에 들어오면 자연히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생기나니라. 이렇듯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물건의 반동심이라, 비유하면 젖먹이가 눈으로 물건을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어 기뻐하며 웃다가 물건을 빼앗으면 성내어 싫어하나니, 이것을 물정심(물건에 정든 마음)이라 이르느니라. 물정심은 곧 제이 천심이니 억만 사람이 다 여기에 얽매어 벗어나지 못하느니라.”(진심불염) 내 몸의 감각에 의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하는 자의식이 생깁니다. 이런 제이의 마음이 거울에 먼지가 앉듯이 참된 마음을 가리게 되면, 진실을 보는 현명한 눈이 가려집니다. 좋아하는 물건이나 맛있는 음식을 보면, 거기에 독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덥석 움켜쥐게 되는 것이지요. 거기다 자라면서 받는 제도권의 교육들도 규격화된 국민을 양산해내고,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는 역할을 했을지 모르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지 못하고, 진실을 올바로 보는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무조건 답을 외우기만 했지 그것이 맞는 답인지, 왜 답이 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답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점수만 잘 나오면 되고, 좋은 학교만 가면 됩니다. 가치 기준이 학생 때는 점수로, 성인이 돼서는 돈으로 획일화되니, 과정이 어찌되건 성적만 좋으면, 돈만 잘 벌면 성공한 삶이라고 가르친 겁니다. 그러니, 다른 피부색의 사람이나 동물 심지어 물건들을 차별하고 함부로 대하는게 우리사회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모든 생명, 나아가 물건까지도 신령한 차별 없는 한울입니다. 그러나 제도권의 교육은 그것이 얼마나 효용가치가 있는지,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지에 따라 차별하여 바라보고 대하는 것만 훈련시켜왔던 게 사실입니다. 이 모든 오해들이 먼지처럼 참된 마음의 거울을 가리고 있고, 이를 닦아내 본래의 깨끗한 참 마음을 되찾는 것이 마음공부요 수행이 됩니다. 3. 그러한 수행의 기장 기본이 모든 일에 습관적으로, 제이천심으로 행하기 전, 내유신령-참된 마음에 고한 뒤 행하는 심고입니다. “사람이 움직일 때에 마음을 먼저 발하여 사지에 혈기와 정신이 통한 뒤에 동작하여야 서로 어김이 없는 것이다. 또한 말할 때에도 마음으로 먼저 생각하여 (마음과)정맥이 서로 통한 뒤에 말을 하면 혈기가 감손되지 아니하나, 무심코 말을 하면 기운과 피가 크게 상하고 음식도 무심 중 급하게 먹고 마시면 해가 되며, 보통 기거할 때에도 무심중 급하게 움직이면 해가 되는 것이니 삼가고 삼가라.”(위생보호장)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내 생명의 근원인 한울에게 고하며 함께 움직이는 겁니다. 이를 해월신사님은 물물천 사사천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한울 이치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에 고하고 감사하며 행하는 것, 이것이 심고입니다. 그렇게 일상을 행하는 것 모두가 수행이요, 기도가 되니 천도교에선 기도와 삶이 분리되지 않고, 성과 속이 하나가 됩니다. 4. 또한 일상 중에 판단이 필요할 때는 재사심정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말 가운데는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을, 그 중에서 옳은 말은 취하고 그른 말은 버리어 거듭 생각하여 마음을 정하라.”(수덕문) 다만 여기서 재사심정은 자기의 자의식으로 다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을 두 번 한들 같은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두 번째 생각은 내 입장이 아닌 한울님 마음으로 생각해 보는 겁니다. 해월신사께서도 “심령으로 생각하는 것이요, 육관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수심정기)고 하셨습니다. 육관은 몸의 감각기관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부정확하고 주관적인가요?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 이외에는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육관에 의지한 생각은 거짓된 정보에 혹하게 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고하면서 오직 자신의 본래 내유신령, 성령性靈으로 직관해야 합니다. 5. 정시정문 합시다. 성사님은 심고와 재사심정, 심령으로 생각하는 가르침을 발전시켜 정시정문의 심법을 말씀하셨습니다. “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듣는 것은 성․심․신 삼단이 합하여 보이고, 나누어 보임이니 세 가지에 하나가 없으면 도가 아니요 이치가 아니니라. 나도 또한 이 세 가지를 합하여 깨달아 홀로 황황상제의 자리에 앉았노라.”(신통고) 나의 육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심신삼단, 즉 한울님의 시각에서 보고 판단해야(正示正聞) 바른 진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안을 성품과 마음과 몸의 시각으로 나누어 보고 합하여 보는 정시정문이 천도교 특유의 심법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볼 때 단편적으로 자신의 입장에서만 보고 다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성심신삼단의 심법으로 각각의 입장을 나누어 보고, 합해서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실을, 한울의 모습을 보는, 정시정문하는 수련입니다. 한 사람이 암에 걸렸습니다. 몸을 주로 보는 사람은 암을 제거하는 수술과 항암치료 등 질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말 합니다. 물론 때를 놓치지 말고 적절한 치료를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심주가 굳지 못하고 이치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럴 때 몸의 욕심을 좇느라 검증되지 않은 치료에 매달리고, 시간과 비용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환자의 마음을 같이 살펴야 하는 이유지요. 마음을 주로 보는 사람은 치료를 하되, 환자의 종합적인 상황을 살핍니다. 힘든 수술과 긴 치료를 견딜 수 있는 체력과 경제력이 되는지, 나이 들고 치료를 안 해도 병의 진행이 더뎌서 기대수명의 차이가 별로 없는지 살펴봅니다. 또한 암이 생긴 원인이 무엇인지, 교정해야할 생활습관이 있는지를 살핍니다. 암을 수술로 제거해도 원인이 된 생활습관이나 마음가짐이 바뀌지 않으면 다시 재발할 테니까요. 한 발 더 나아가 암도 자신이 살아온 인과의 흔적입니다. 이를 부인하고 제거하려고만 할 게 아니라, 고통스러워도 정직하게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그를 반성하고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성품을 주로 보는 사람은 어떨까요? 암세포도, 암을 일으키는 발암물질이나 바이러스도 모두 하나의 성령이고 하나의 한울 성품입니다. 본래 있는 게 아니고 수명은 다 달라도 곧 소멸 되 무형으로 돌아갑니다. 내 몸도 본래 있는 게 아니라 잠깐 유형화된 한울 성령일 뿐입니다. 내가 본래 있는 게 아니니 병도, 암도 본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견성하면 그 모든 인과가 사라지고, 병도 물약자효되는 거지요. 마치 대신사께서 빗속에 성묘 다녀오셔도 옷이 젖지 않았다는 것과 같습니다. 비도, 옷도, 내 몸도 다 같은 한울 성품이니 어디 물들고, 젖고 할 것이 없는, 물아일체, 나와 주변이 경계가 터져 하나 된 인내천의 경지인 것이지요. 코로나로 아직 온 세상이 힘듭니다. 코로나 얘기도 이젠 지겹지요? 그럼 마음공부 하는 사람은 달리 보고 달리 얘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시정문 심법으로 얘기해 볼까요? 몸을 주로 보는 사람은 질병이 종식 될 때까지 거리두기와 방역에 계속 힘써야 한다고 할 겁니다. 마음을 주로 보는 사람은 어떨까요? 벌써 1년 반 이상 지속되는 방역으로 피해가 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영업자들부터 시작해서 취업기회를 잃은 젊은이들에 이르기까지, 실제 감염된 사람 뿐 아니라, 감염되지 않았지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지, 격리되고 치료과정을 겪은 사람들의 심리적 상처는 어떻게 돌볼 것인지 마음 써야합니다. 또한 전염병으로 생긴 타 지역, 타국인 혐오증은 또 다른 각자위심입니다. 이건 또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야겠지요. 성품을 보는 사람은 어떨까요? 이젠 코로나가 계절 독감처럼 토착하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노인과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을 제외한 건강한 젊은 사람들은 가벼운 감기처럼 앓고 지나갈 수 있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인과 기저질환이 있는 고 위험군에 대한 예방접종과 치료에 집중하고, 어느 정도 예방접종이 이루어진 뒤엔 더 이상 과도한 방역과 전체 확진자 수 집계를 멈추고 일상을 회복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그 모든 바이러스도 한울이고, 질병과 죽음을 포함한 생로병사의 과정이 자연의 자연스러운 순환이고 무왕불복지리임을 일깨워 줘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악질이 생긴 원인을 생각한다면 이제부터라도 한울을 거스르지 않는, 천지부모를 상하지 않는 삶을 생각하는 큰 시야를 잃지 않도록 해야겠지요. 그리고 이런 질병으로 인한 삶의 변화가 우리 사회를 어떤 모습으로 바꿀지 걱정하고 이 어려움이 타인과 다른 생명에 대한 존중이 일상화 되는 문명의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 할 겁니다. 이렇게 모든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기가 아는 대로, 습관된 의식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한울님께 고해서, 한울 이치에 맞는지, 한울님 마음에 흡족한지, 우리 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지, 이렇게 성심신 삼단을 나누어 보고 합하여 보고 판단하는 정시정문의 수행을 하는 것이 천도교의 심법이요 수행입니다. 이 심법을 따르는 것이 한울님 순리를 따르는 것이고, 그렇게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들으면, 모든 일을 한울님과 같이 행하니 만사여의, 무위이화할 것입니다. “지나간 옛 현인과 철인이 스스로 구하고 스스로 보이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으나, 우리 도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스스로 구하여 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한울님이 반드시 바르게 보이고 바르게 들으니, 만에 하나도 의심이 없느니라.” 요즘도 각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통합해서 판단하지 못하니 사안마다 얼마나 다툼과 갈등이 많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어떤 사안이 있을 때, 먼저 한울님 이치로 냉철히 보고(성), 그것이 모든 생명을 살리고 위하는 길인가(심;한울님 마음) 보고, 내가 어떻게 실천할지를 생각합니다(신). 옛 현인과 철인은 지엽에 그쳤지만, 이 정시정문의 심법으로 “만에 하나도 의심이 없다” 즉, 천도교에 와서 진리가 완성되었고, 이로써 이전까지 있었던 역사의 모든 논란(부분적인 앎으로 인한 종교와 철학의)을 해결했다는 선언을 하신 겁니다. 이는 깨달은 성인(의암성사)의 확신이지, 제자(일각의 주장처럼)의 글이라면 나올 수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천도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각자의 시각으로 오해해서 비롯된 세상의 모든 갈등과 다툼을 통합된 정시정문으로 바르게 이해해서 합의와 화합으로 이끄는 것. 이게 동귀일체입니다. 올 여름, 이같이 좋은 도를 열심히 닦아, 한울님 순리대로, 나의 삶과 우리 사는 세상이 순리대로 되는, 개벽되는 세상이 되도록 수련 해 보자는 말씀드리며 마치겠습니다. 162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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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선생의 삶과 길고된 삶이었다. 험난한 삶이었다. 의로운 삶이었다. 외로운 삶이었다. 찬란한 삶이었다. 101년 전, 의암 손병희 선생이 눈을 감았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의 주축이 되어 독립을 선언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를 보낸 충북 청주에는 생가터가 복원되어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6인이 충북 출신인만큼 청주 삼일공원에는 선생을 비롯한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친일 행적이 드러난 정춘수의 동상은 1996년 시민단체에 의해 철거되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동학의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의 지도자로서, 독립운동가로 교육사업가로 한평생 사람을 한울님처럼 모시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을 바쳤다. 스승님의 가르침이었다. 선생이 걷던 한걸음 한걸음에 스승님의 말씀이 있었고 한울처럼 모실 사람들이 있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이 눈 감은지 100년이 흘렀다. 선생이 꿈꿨던 독립된 나라에서 사람이 한울님이 되는 세상은 과연 얼만큼 와 있을까. <편집자 주> 01.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지 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충북 청주시에는 동학혁명의 지도자이며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대표로 독립을 위해 희생한 손병희 선생의 생가와 사당이 잘 조성되어진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지’가 있다. 이곳은 3·1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 주위에는 의암영당, 의암동상, 의암기념관, 의암정 등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지’가 조성돼 있다. 또 유허지 옆 동산에는 1961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허비가 건립됐다. 의암 손병희(1861~1922) 선생은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간본위를 중시하고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자주독립정신을 주장했다. 손병희 선생은 1861년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났다. 1882년 22세때 동학에 입교해 3년 뒤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됐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으로서 북접의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 등지로 피신했다. 그는 1897년 최시형 선생의 뒤를 이은 제3대 교주가 되고 동학운동의 지도자만이 아닌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손병희 선생은 탄압을 피해 중국에 피신했으나 ‘손병희의 망명을 받아 들이지 말라’는 조선정부의 압력으로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5년 일본에서 같은 망명자 신분이었던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조희연 등 개화파 전직 관료들과 교류하고 망명 중 신문 기고 등으로 내정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설파했다. 1905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귀국했다. 천도교 교인이라면 무조건 잡아갈 정도로 천도교를 극심히 탄압하던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으로 무기력해진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1908년 교주 자리를 자리를 박인호에게 승계하고 우이동 봉황각에 은거하며 교육 사업(보성전문학교, 동덕여학교 인수)과 출판사업에 힘을 쏟았다. 1919년 민족 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해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경각심과 우리 민족 모두에게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중 뇌일혈로 쓰러져 1920년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1922년 5월 19일 상춘원에서 요양하다 62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02.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 ‘손병희 생가’ 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524-4 손병희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전면 4칸 반의 초가집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어 1979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됐다. 손병희 선생 생가는 조선 철종12년(1861) 4월 8일 손병희 선생이 태어나서 22세가 되는 시기까지 살던 집이다. 생가는 네모반듯한 마당을 앞에 두고 본채의 북쪽에는 광채를 두어 곡식과 생활 도구를 넣어두는 헛간이 있다. 마당 한편에는 자그마한 산수유나무도 있어 봄이 되면 노란 산수유 꽃을 만나 볼 수 있다. 이곳 생가 주위에는 의암영당, 의암동상, 의암기념관, 의암정 등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지’가 조성돼 있다. 또 유허지 옆 동산에는 1961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허비가 건립됐다. 03. 밀양손씨 역승공파 종중 수정재 ‘의암 손병희 추모비’ 소재지) 대전 광역시 서구 변동 253-47 대전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의암 손병희 선생의 종중이다. 수정재水晶齋 밀양손씨택승공파종중의 재사齋舍로, 재실 뒷산을 수정암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1945년 폭격으로 불타버리고, 1966년 문중의 결의에 따라 재건축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 끝으로 1칸씩 온돌방을 두었다. 이곳에 2012년 10월 의암 순국90주년을 맞아 역승공파 종중에서 추모비를 세웠다. 04. 의암기념관과 의암정 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524-4 의암기념관에는 손병희 선생의 살아생전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 유물의 대부분은 천도교측에서 반영구 임대 형식으로 임대하였다고 한다. 또한 민족 사관을 정립한 단재 신채호 선생, 의병장 한봉수 선생 등을 소개하는 방도 별도로 마련돼 있다. 이곳에는 독립운동사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한 충북 독립지사를 소개한 자료와 이야기들이 함께 담겨있다. 탑골 공원의 팔각정을 복원해 만든 ‘의암정’ 의암기념관 옆에는 의암정이라는 팔각정도 자리해 있다. 이곳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체포됐던 탑골공원의 팔각정을 복원해 만들어진 곳이다. 05. 청주 삼일공원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 159-1 삼일공원은 우암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3·1 운동과 관련이 있는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충청도 출신 인사인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 횃불”의 동상을 찾을 수 있다. 횃불은 본래 정춘수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후에 친일 행적이 드러나 1996년 2월 8일 시민단체에 의해 동상이 철거 됐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념탑이 있다. 06. 청주 (육거리) 시장 청주 건재약 도매시장 앞을 지날 때에 행길가에 돈주머니가 떨어져 있어 주어서 세어보니 삼백냥이라는 큰 돈이었다. 손병희는 돈을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이곳 길가에서 임자를 만나면 내어 주리라고 마음먹고 유실물 돈 3백 냥을 주인을 찾아준 장소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또한 짚신 두 컬레 만들어서 판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 시장은 약재 건재상과 일반 시장이 함께 조성 되어 있는 청주의 옛시장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청주의 전통시장이다. 이 장소의 출처는 ‘천도교창건사’와 이광순 저 ‘위대한 한국인 의암 손병희’(태극출판사, 1975.12.18. 초판 발행) 참고 하여 추정한 것이다. 07. 초정 약수터 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 135-1 초정약수椒井藥水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초정리에 있는 약수터이다. 지하 100m의 석회암층에서 하루 약 8,500L 정도 솟아나는 무균의 탄산수이므로, 인체에 무해한 각종 미네랄(광물질)이 포함되어 있다. 흔히 ‘세계 3대 광천수’라고 불리나, 공인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초정椒井이란 지명은 ‘후추처럼 톡 쏘는 물이 나오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동국여지승람』·『조선왕조실록』등에도 기록될 만큼 유명했던 이 약수터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1881년 7월 초정에 약수를 마시러 갔던 손병희는 많은 사람들이 약수를 마시지 못하고 서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일인지 살펴보니 강원도 영월군수를 지냈다는 송월령과 평안남도 숙천군수를 지냈다는 변숙천이 약수터를 독차지하고 주변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이를 본 손병희는 두 사람에게 약수터에서도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있냐며 큰 소리로 꾸짖고, 약수를 떠서 마신 후 주변 사람들에게도 약수를 돌렸다. 또한 그는 송월령과 변숙천에게 자신을 ‘청주에서 온 상놈’이라고 소개하며, 시 한 수를 지어 이들을 훈계했다고 전해진다. 손병희는 상대가 문중의 어른이나 양반일지라도 신분차별에 대해 분노하며, 당당히 맞섰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 신분에 따른 사회적 차별의 철폐는 그에게 반드시 타도해야 할 과제이자 숙명이 되었다. 이런 기질이 평등을 외친 동학에의 입도의 기반이 되었다. 훗날 손병희는 ‘초정약수음’이라는 시를 남겼다. ‘비록 가시나무라 이름 지어도 핀 꽃은 아름답고 雖云芒木發花佳 더러운 못에 연꽃일지라도 향기는 더욱 좋더라 蕩地蓮花尤香好 예와 지금 양반과 상놈이 무엇이 다름이 있으랴 古今班常何有別 초정에 마음을 씻으니 사람은 평등하더라 椒井洗心平等人’ 새롭게 이곳에 공원이 조성되었는데 초정약수 원터와 세종대왕과 한글이라는 테마로 조성되면서 의암 손병희 테마는 사라졌다. 청주시에서는 이곳에 손병희선생의 테마도 반드시 조성해야 한다. 08. 문의문화재 단지내 소재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로 721 1997년 청원군이 사라져가는 고유의 전통문화를 재현하여 선조들의 얼을 기리고 배우기 위해 조성한 역사교육장이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9호인 문산관과 양반가옥, 민속자료전시관을 비롯하여 10동의 고건물이 있고, 장승, 연자방아, 성황당 등 옛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수집되어 있다. 1998년 11월에 개관한 기와박물관이 있는데, 백제시대부터 근대까지의 기와를 전시해 놓았다. 권태성이 기증한 와당 및 기와 등 774점과 문화적 가치를 지닌 불상과 석조유물 20여 점 등 총 200여 점을 고증을 거쳐 전시하고 있다. 단지 안에는 약수터, 놀이광장 등 편의 시설이 있으며, 도내에서 처음 개장한 자동차 전용극장이 있어서 문의영화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입구를 지나 처음 길가 왼편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충청지역 애국지지사 7분의 상이 세워져 있다. 이중 가운데가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다.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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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나동환 교장 임명장(천도교중앙총부 소장)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신사는 1884년부터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의 육임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천도교의 교역자 제도의 효시이다. 1885년부터는 각 지방에서도 육임제를 확장하면서 동학의 교세가 크게 늘어났다. 교장은 ‘자질이 알차고 덕망이 두터운 사람’에게 수여된 직책이었고, 교수는 ‘성심으로 수도하여 가히 교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 대정은 ‘공평하며 부지런하고 중후한 사람’에게 수여된 직책이었다. 위 세계기록유산은 위 육임제의 직책에 따라 해월신사가 나동환에게 교장의 임명장을 수여한다는 증서이다. 관련 역사적 사실 나주의 접주 나동환(羅東煥, 1849~1937)은 본관이 나주이며 영암 택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도경(道卿), 호는 일암(日庵)이다. 그는 나주의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1월에는 교단으로부터 해월신사로부터 교수 겸 교장 직책을 받았다. 동학혁명군의 1차 기포 때는 나주의 접주로서 활동하였다.동학군이 나주성을 공격할 때도 500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싸웠다. 그 후 전봉준의 체포 소식을 듣고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그의 부인 진주정씨와 함께 함평군 월야면 연암리 다라실에 있는 나동환의 처가로 은신했다. 관군이 들이닥쳤으나, 부인 진주정씨(晋州鄭氏)는 남편과 아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고, 자신은 관군들에게 잡혀 압슬형(壓膝刑) 등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남편의 행방에 대해 함구하다가 사망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의열각(義烈閣) 안에 〈나주나공동환의적비(羅州羅公東煥義蹟碑)〉와 〈효열부진주정씨행적비(孝烈婦晋州鄭氏行蹟碑)〉가 함께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