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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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24년 정치참여를 기대하며2024년 벽두부터 정치뉴스가 암울하다. 4월에 있을 제22대 국회위원 선거를 앞두고 여당과 야당의 격돌이 도를 넘는 위험 수위이더니 양당 모두 소외 그룹들이 신당 창당을 발표하고 있는 등 혼란의 연속이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야당 대표에 대한 테러(거칠게 표현하면 암살시도)이다. 아무리 상대방이 밉더라도 그가 이토 히로부미도 아니거늘 죽일 생각을 했다니. 정말 갈 데까지 간 한국 정치의 단상이다. 정치가 존재하는 목적은 갈등하는 여러 사회세력과 개인들을 화합시켜서 조화시킴으로써 한 사회의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건강한 공동체 유지를 위해 법과 제도 그리고 문화, 예술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망라해 저마다의 역할을 맡기고 제 기능을 다 하도록 하는 것이 정치이다. 따라서 정치는 공동체의 형성과 유지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정치를 하는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정치학을 전공한 박사가 전문가일까. 아니다. 그들은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들일 뿐 정작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래서인가 정치 전문가에게 지급되는 라이센스(자격증)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사도, 변호사도, 엔지니어도 모두 자격증이 있는 자들만이 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지만, 전문화 분업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유독 정치 분야만은 자격증이 없다. 정치인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만 보아도 온갖 직업군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심지어는 전공의 다양성을 넘어 학벌도 대학 졸업자부터 초등학교 졸업자까지 있다. 왜 그럴까. 그만큼 정치는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모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은 민주주의 기원인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였다. 즉, 아테네 시민이고자 한다면 직업, 학벌과 무관하게 누구나 아테네의 운명을 함께 고민하고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것이 오늘 민주주의의 출발이 된 것이고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시대를 구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국가 사회든 반드시 정치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의 건강성 여부는 구성원들의 정치 참여가 얼마나 활발하느냐로 판단된다. 최근 1,2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얼마나 허무하게 본분을 망각한 군인들에 의해 유린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979년 12.12 사태를 다룬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제목이 서울의 봄이다. 봄이 과연 왔는가? 아니 분명히 봄은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목이 봄인 이유는 박정희 통치 18년을 끝내고 간절히 봄을 기다리던 국민들의 염원이 좌절된 절박함의 표현이라고 해석된다. 분명한 사실은 12.12 사태이후 정치는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장악한 군인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다 보니 어느 틈에도 국민들이 들어갈 틈새는 없었다. 완벽한 정치실종의 시대를 우리가 겪은 것이 지난 5공화국 시대였다. 그런데 과연 작금의 정치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국민의 참여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관과 민의 소통은 원활하며 국민은 활기에 넘치는가 말이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정치 현실은 국민과의 소통단절과 일방통행에, 정치권은 극렬한 대립과 갈등 그리고 증오와 적대감만이 확대일로가 되고 있다. 많은 국민의 기대 속에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것을 퇴보시키고 있다. 코로나 이후 세계 경제가 회복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코로나 상태이고, 외교는 미국과 일본 일변도로 나가다 보니 브릭스(BRICS) 체제가 출범해도 기후 정상회의에도 무관심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하는 가운데 남북이 각기 상대국에 무기 지원을 함으로써 깊은 늪에 빠져들고 있으며, 정권의 호언과는 달리 작년 말 엑스포 투표 결과 29표가 우리 외교의 현주소가 아닌가. 더욱이 남북관계는 언제 6.25 전쟁이 다시 발발해도 무방할 분위기로 급냉되고 있다. 국민은 통합되기보다는 시대착오적인 이념 논쟁으로 다시금 7-80년대식 이념으로 갈라져 대립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언론과 시민단체에 대한 규제와 탄압 그리고 노조의 적대시 등 도시 종잡을 수 없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를 다잡아 주어야 할 정치가 역할 방기 아니 무능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동학 창도 이래로 우리 도의 가장 큰 특징은 현실 참여를 통한 이상세계의 실현이었다. 즉, 내세에서의 지상천국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지상천국을 만들기 위해 진력을 다하는 것이 동학 천도교가 다른 종교와의 가장 큰 차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단 한 순간도 그것을 피하거나 숨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자랑스럽게 되내이는 1백만 명에 이르는 순도자의 종단인 동학 천도교의 역사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자각하는 2024년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영역이 정치 분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유지와 공공선을 달성하고자 하는 가장 커다란 영역이 정치이기 때문에 끈임없는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 임형진(년암, 동서울교구,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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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 인생은 연습이란 없다늑대는 평생 한 마리의 암컷만을 사랑한다. 그러다 암컷이 먼저 죽으면 가장 높은 곳에서 울어대며 슬픔을 토해낸다. 늑대는 암컷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유일한 포유류이며, 심지어 호랑이하고도 일대일로 맞붙는다. 늑대는 암컷이 죽으면 홀로 어린 새끼들을 돌보다가 새끼가 성장하면 암컷이 죽었던 곳에 가서 자신도 굶어 죽는다고 한다. 또한 사냥하면 먼저 암컷과 새끼에게 먹이를 양보하고, 자신은 주위를 살피며 경계하다가 온 가족이 다 먹은 후에야 남은 먹이를 먹는다. 또한 늑대는 독립한 후에도 종종 어미에게 찾아와 인사를 한다. 한결같이 변치 않는 사랑을 하고, 희생하고, 효도하는 늑대가 사람보다 나은 점도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물고기도 물과 다투지 않는다. 조금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조금 따뜻하면 따뜻한 대로. 물살이 조금 빠르면 빠른 대로 물과 같이 어울려 살아간다. 삶이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어떤 계기가 있어야 비로소 인생은 바뀐다. 현재의 삶보다 더 발전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살게 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만나는 순간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불평하지 않고 언제나 현실에 충실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모든 걸 되도록 해소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경천명 순천리는 누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도(道)란 때에 따라 생활 속에서 훌륭하게 적용되고 또 활용되어야 한다는 천도교의 용시용활…. 그러나 세상 사람은 험난한 세파를 극복할 생각과 내일을 위한 기다림보다 게으름으로 땅속에서 똬리 틀고 겨울잠을 자는 뱀처럼 조만간 찾아올 춘삼월 호시절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천도교는 개벽의 종교이기에 세상이 극도로 혼탁해지고, 어지러울 때 다시 개벽하여, 새 세상을 열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의 역사가 그랬듯이 때를 대비하여 철저히 준비해야 하고, 때가 되면,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세상에 나오라는 용시용활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혹자는 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무왕 불복의 이치를 알고, 천운의 순환을 믿는다면 그때가 분명 도래할 것으로 확신한다. “세상 만물이 나타나는 때가 있고 쓰는 때가 있으니 달밤 삼경에는 만물이 고요하고, 해가 동쪽에 솟으면 모든 생명이 다 움직이고, 새것과 낡은 것이 변천함에 천하가 다 움직인다.” 하셨으니 때를 기다리며 수련에 정진해 나가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제자들이 “인생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제자들을 사과 숲으로 데리고 갔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과수원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며 각자 가장 마음에 드는 사과를 하나씩 골라오도록 했다. 다만 다시 뒤로 되돌아갈 수 없으며 선택은 한 번뿐이라는 조건을 붙였다. 제자들은 사과나무숲을 걸어가면서 유심히 관찰한 끝에 가장 크고 좋다고 생각되는 사과를 하나씩 골랐다. 그 결과 제자들은 서로의 것을 비교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가 “왜 자기가 고른 사과가 만족스럽지 못한가 보지?” 물으니, 제자들은 “선생님 다시 한번 만 고르게 해 주세요”하는 것이었다. 한 제자는 “숲에 막 들어섰을 때 정말 크고 좋은 사과를 봤었는데, 더 크고 좋은 걸 찾으려고 따지 않았더니, 숲 끝까지 와서야 첨 보는 사과가 가장 크고 좋다는 걸 알았다” 하였고, 또 다른 제자는 “숲에 들어가 조금 지나 제일 좋다고 생각되는 사과를 골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더 좋은 게 있더라”라고 했다. 다른 제자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껄껄 웃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바로 인생이다. 인생은 언제나 단 한 번의 선택을 해야 하거든.”….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연습은 없다. 예행연습 없이 오늘, 지금 최고의 선택과 결정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다. 험난한 인생의 길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의지만 있다면, 관점이 바뀌고 삶도 조금 더 쉬워진다고 한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해 걱정하며 인생을 보내지 말고, 자신에게 책임감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살며 자기 행복을 위해 설계하면서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멋지게 살자. 글, 용암 주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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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따라가면서 거스를 때2023년이 저문다. 풀어야 할 산적한 국내외 과제를 안고 해가 바뀌고 있다. 지금 국민은 민주주의 위기와 경제난 심화로 인해 불안과 실의에 빠져있다. 인구급감과 사회구성원들의 갈등은 날로 심각하다. 한·미·일 동맹과 북·중·러 동맹의 등장으로 한반도가 자칫 최악의 화약고가 될 공산이 크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국가와 진영의 대립과 분쟁이 악화일로이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은 여러 국가가 끼어드는 격돌로 비화하고 있다. 알다시피 기후 위기와 환경파괴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문제 많은 세상에 대처할 아무런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 나라의 지도층을 바라보면 탄식이 절로 난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공동체성의 해체와 황금만능의 사회상에 우울해진다. 대결과 독점으로 치닫는 국가들의 무한경쟁은 그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국내외 문제들을 해소할 근원적 방안을 찾고자 고민할 때 ‘그래, 우리에게 동학이 있었지!’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묵은 새것’ 동학사상에는 생명과 생태, 평화와 공존, 인류애의 알짬이 실천궁행의 과제로 고스란히 담겨있다. 우리를 옥죄는 수(壽)를 다한 듯한 인간성 상실의 자본주의 괴물과 답답하고 위험한 국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우리의 방도는 무얼까. 현실을 따라가면서도 그예 거스르는 도전의 길을 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하기 위한 철학과 방편이 동학 안에 다 들어있음이다. 일제 강점기와 독재 시대를 겪으며 사장되는 듯했던 동학이 천만다행으로 이제 부흥시켜야 할 귀한 우리 것으로 떠오르고 있다. 2019년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이후 이런 움직임은 큰 흐름을 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전국 각지에서 늘어나고 있다. 기념관과 기념물이 만들어지고, 사적(史蹟) 지정이 따르고, 다양한 재현행사나 계승문화예술제가 펼쳐진다. 저술 활동도 활발하고 포럼이나 세미나, 예술공연이 줄을 잇는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생겼고, 민(民) 주도의 동학농민혁명계승(기념)사업회가 곳곳에서 창립되고 있으며, 동학 단체들의 연대와 교류가 활발하다. ‘동학실천 시민행동’과 같이 동학을 널리 알리고 그 가르침을 오롯이 실천하는 모범적인 단체들도 있다. 2차 동학혁명 참여자 서훈 촉구를 위한 부단한 노력은 동학의 존재를 알리며 시민사회의 지지를 얻고 있다. 천도교의 새길도 주목받고 있다. 지금은 한반도전쟁은 물론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때이다. 과거사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 전범국가 일본과의 유착은 비극을 잉태할 것이 뻔하다. 여기에 국가 지도층의 무능과 부패까지 더해지고 있으니 국내외정세는 동학농민혁명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온 세계가 대결과 억압의 국면이지만 우리는 평화 상생 공존의 노선을 가야 한다. 동학으로 오늘을 진단하고 내일을 바꿀 수 있어야 희망이 있다. 한류가 세계로 향할 때도 동학정신이 있어야 오래 가고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평화대동의 후천개벽 새 세상을 희구하는 이들의 움직임이 앞으로 더욱 활발하길 바란다.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구하기 위해 탄생한 K-사상 동학은 현재의 시대정신으로도 충분하다. 푸른 용의 해 2024년이 밝아 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가고 있는 길에 의문부호를 붙이자. 새해에는 우리가 나서서 동학으로 세상을 바꾸는 흐름을 기세 좋게 만들어가자. 따라가면서도 거스르는 기백을 그예 잊지 말자. 글_윤여진(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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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으로 개벽하자!희망으로 개벽하자!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 동덕님들을 모신 대교당에서 설교 말씀을 드리게 되어서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모심으로 하나 되는’ 슬로건으로 시작한 새 집행부가 출범한 지 벌써 석 달째 접어들었습니다. 그동안 종무원장을 비롯한 중앙총부 임직원들이 정성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빠르게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보니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치러온 몇 가지의 행사를 보니,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긴, 좋은 결과물로 남아 교단의 통리자로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모든 종단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종교계는 많은 것을 잃었고,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현재 사정도 안팎으로 녹록지 않습니다. 막상 들여다보니 개선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것 같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참 막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단의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도의 기운으로 극복해 내고, 교단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 새롭게 설계해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교단 전체의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중앙총부의 성찰이 필요하고, 동덕 개개인의 성찰도 필요합니다. 이제까지 이루어온 교회의 대 내·외적 성장과 신앙생활의 모습들이 한울님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는지 검토해 보고 새롭게 시작하기를 심고합니다. 저는 교령에 당선되면서 동덕 여러분께 지난날을 거울삼아, 새롭게 맞이할 3년은 교단 혁신을 위한 방향성을 올곧고 바르게 열어가겠으며, 특히 지방 교구 활성화 방안과 지원 대책을 마련하여 중앙총부와 지방 교구가 소통하는 교단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총부에 대한 믿음이 긍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믿음을 통한 헌신과 봉사 정신으로 올바르게 나아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역량을 결집하여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함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동덕 여러분! 이제, 우리는 확 달라져야 합니다. 다 함께 떨쳐 일어나 교단 중흥을 위해 하나가 되어 각자위심各自爲心을 버리고 한울이 사람된 근본을 투철히 깨달아서 천덕사은을 염념불망 해야 합니다. 저는 교단의 통리자로서, 이번 임기 3년을 봉사하는 자세로 교인이 개벽의 주인이 되는 교단으로 일궈 나가며, 미래를 향해 기초를 다지는데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합니다. 인생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긴 여정에서 혹여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머뭇거리거나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고비를 잘 넘겨 멈추지만 않으면, 조금은 늦더라도 분명 여러 동덕님들 스스로 희망으로 개벽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덕 여러분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개벽의 꼭대기에 이르기를 응원합니다. 구름 뒤에는 항상 빛이 존재합니다. 우리 동덕들은 모두 분명 자신만의 아름다운 색깔과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을 믿고 꿈을 활짝 펼치는 희망찬 포덕 163년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오늘 설교를 “희망으로 개벽하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희망이란 다가올 앞일에 대한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희망이란 촛불이 아니라 성냥이다. 바람 앞에 꺼져가는 촛불이 아니라, 꺼진 불을 다시 붙이는 성냥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희망에 대해서 다양하게 생각하고, 꿈꾸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희망은 바로 나를 신뢰하는 겁니다. 나를 신뢰하듯이 남을 신뢰한다면, 이 세상은 아주 평화롭고 따뜻한 온기로 가득 채워질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남을 존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합니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으므로 불안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알 수 없으므로, 더 궁금해지기도 하고, 기대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처럼 초심을 잃지 않고 평정심을 찾아 꾸준히 내가 할 일을 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뚜벅뚜벅 나아간다면 끝내는 만족스러운 개벽의 웃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먼저, 계획을 잘 세우고 이를 잘 실천해 나가는 겁니다.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 거시적 안목도 중요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더 집중하는 미시적 안목 또한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동덕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장 가까이에서 동덕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실천해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내일로 미루는 습성이 다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급한 일을 제외하고는 미루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하는 의지를 굳건히 하는 훈련을 자주 해야 할 것입니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현재 가지고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괴테는 ‘꿈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된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꿈은 희망을 낳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들 행복한 삶을 원하지 않습니까? 가슴을 열고 서로를 조금씩 더 이해하며 살아간다면, 작은 것이지만 조금씩 서로 나누며 산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겁니다. 가끔 한 번씩 행복한 나 자신을 상상해 보십시오. 짧은 순간이지만 가슴에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될 겁니다. 이처럼 행복한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삶의 질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항상 내가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부족한 것만 보이지만, 넉넉하다고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나눔이란 큰 것을 주어 기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일부를 주는 기쁨이기에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포덕布德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정 포덕이 으뜸이고. 또한 그동안 교당에 나오지 않던 휴면 교인들도 만나면 포덕이 늘어나지 않을까요? 과거 천도교가 탄압받던 때에도 포덕은 계속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이때, 어째서 포덕이 안 되는지 우리 다 함께 고민해야 할 숙제입니다. 포덕이란 이 세상 사람들을 한울님과 스승님의 품 안으로 모이게 하는 것인데도 그저 서로 눈치만 볼 뿐입니다. 해월신사께서 때를 말씀하시길, “산이 검게 변하고, 길에다 비단을 펼 때, 만국 병마가 왔다가 물러갈 때, 숲속에서 시천주 소리가 날 때, 손바닥에다 삼칠자 주문을 써달라고 아우성칠 때, 중원부터 포덕이 되고 난 후, 만천하가 포덕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저절로 마당 포덕이 되는 시운時運이 올 것이니 그때까지 정성을 다해 수도 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냥 때가 오기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해 가며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가정 포덕은 물론이요, 휴면 교인들을 찾아가 그동안 손 놓았던 시천주 신앙을 다시 시작하도록 도와주고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합심해서 좋은 방안들을 모색하고 실천해 나아가야 할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자 개벽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의암성사 기념관 건립입니다. 올해가 의암성사 순도·순국 10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동학혁명을 이끄시고, 3·1운동을 주도하면서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신 민족 지도자 의암성사에 대한 뚜렷한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은 우리의 민족혼을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총부에서는 이에 대한 자료를 하나씩 수집하고 정리해서 준비해 나가려고 합니다. 동덕 여러분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하나씩 이뤄나갈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지방 교구에서도 교구 활성화를 위해 노력해 주시고, 총부와 소통하면서 서로 협조하는 관계를 유지하여, 교단이 모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 주시기를 심고합니다. ‘작은 행동하나가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희망은 좌절, 실패, 슬픔, 불행, 고통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태양과 같은 것이고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스승님께서 펼쳐 놓으신 경전의 말씀 속에서 찾아 나갔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다 보면 다양한 삶 속에서 희망과 좌절을 반복하면서 살다가 환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희망과 좌절의 끝은 반드시 절대적 희망 즉, 개벽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한울님을 굳게 믿고 희망을 찾아 한울님의 사랑이 담긴 행복 주머니를 품속에 가득 안고 가시기를 심고합니다. 행복과 희망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희망을 꿈꾸면서 개벽의 길로 향했으면 합니다. 의암성사께서 「인여물개벽설」에서 “개벽이란 부패한 것을 맑고 새롭게, 복잡한 것을 간단하고 깨끗하게 함을 말함이다. 천지 만물의 개벽은 공기로써 하고 인생 만사의 개벽은 정신으로써 하나니, 너의 정신이 곧 천지의 공기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개벽의 시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우선 각자의 정신부터 개벽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자세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각자의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 실천해 나가는 것이 개벽의 시작이라 생각하기에, 희망을 꿈꾸며 작은 것부터 하나씩 바꾸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친밀감과 신뢰감을 주어서 천도교인은 역시 다르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천도교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그 바탕에는 사인여천이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즉, 사인여천을 바르게 실천하여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과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수도원에 가면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거나, 화장실을 솔선해서 청소하는 모습, 그리고 교구에 일찍 나와 교당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모습 등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이런 모습들이 바로 작은 개벽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 교단 내에서 누구든지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고 서로 인사하는 사인여천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면 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극진히 존중하는 생활 태도를 보여 천도교인다운 모습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일반인보다도 더 못한 언행을 하고 다툼만 일삼는다면 어떻게 일반 국민들을 포덕·교화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말과 태도, 행동에서 오만함을 풍기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지금이라도 사인여천을 실천하는 천도교인이 되기를 심고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삶의 기준이 나에게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생각과 판단의 기준을 한울님께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준이 아닌 한울님의 기준에서 우리의 바람이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한울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모습이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경전에 “용담의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요, 구미산에 봄이 오니 온 세상이 꽃이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천도교의 진리는 반드시 차차 온 세계를 바꾸고 천도교의 땅인 이 나라에 큰 운수가 찾아와 한 시대의 아름다운 성배聖杯의 꽃이 가득히 필 것이라는 확신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러한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분명 올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 함께 미래를 향해, 희망의 배를 타고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성찰로 우리 교단의 현주소와 개선점을 점검해 보면서 화합과 상생의 시대로 새롭게 시작하는 천도 교단의 발전을 도모해 나아가야 합니다. 존경하는 동덕여러분! 진리와 화합의 등불. 그 주체는 바로 동덕 여러분이십니다. 교단 발전을 위해서는 어떤 조언도 아끼지 않으셔야 합니다. 동덕 여러분들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것입니다. 사심 없이 바로 보고, 분명하게 판단하고, 의지대로 행동하는 자신 있는 신앙생활을 하시길 심고합니다. 포덕 163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 믿으시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울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매매사사 간섭해 주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모든 도가마다 한울님의 감응으로 희망이 솟아오르는 복된 가정을 이루시기를 바라면서 오늘 설교에 갈음합니다. 감사합니다. 광암 박상종_ 교령 - 포덕 163년 7월호 신인간 지상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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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대한민국 땅에 적정 인구 수는?인구문제로 시끄럽다. 아이를 더 낳아야 한다고 난리다. 엊그제는 북한이 남침한다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다. 무슨 또 안보 장사꾼이 설치나 했더니 현재의 한국 합계출산율이 0.78명이라면서 이렇게 가다가는 이를 틈타서 북에서 쳐들어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경악할 상상력이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 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했다가 “하나씩 낳더라도 한반도는 초만원”이라더니 “덮어놓고 낳다가는 거지꼴 못 면한다”라고 했었다. 예비군 훈련장에 온 남성들을 거의 강제로 정관수술을 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그때 우리나라 인구는 4천만 명에 육박하고 있을 때였다. 1983년이다. 1925년도에 남북한 다해서 인구가 1,900만이었다. 지금은 남한만 5,140만 명이다. 그런데 인구 절벽, 지역 소멸 이야기가 줄을 잇는다. 출산 장려가 도를 넘고 있다. 4천만도 많다고 난리더니 5천만이 넘는 지금은 아이를 더 낳아야 한단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대한민국 땅은 11만 제곱킬로미터가 좀 안 된다. 이 땅에서 5천1백만의 인구는 1983년 4천만의 인구보다 모르긴 몰라도 두 배나 세 배는 더 쓰고 더 버리고 더 자연을 망가뜨리고 있을 것이다. 소득과 지출과 생산이 인구 배수보다 몇 배 더 늘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이 땅에 적정 인구수는 몇 명인지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과시적인 소비와 지저분한 욕망과 맹목적인 경쟁을 줄이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더 챙기고 더 쌓고 더 소비하는 데에 홀라당 정신이 빠져 있다. 남한의 현재 인구는 모든 측면에서 과잉이다. 이 땅에서 나는 것으로 2023년 현재의 5,140만 명이 먹고, 쓰고, 입고 살 수가 없다. 다른 나라의 자원을 가져와야 한다. 그것은 언젠가 한계에 직면한다. 인간의 활동이 자연 생태계에 끼치는 부담을 ‘생태발자국’이라는 개념으로 수치화하여 표시하는데, 1인 기준으로 한국은 기준치의 3.3배다. 그만큼 인구 과밀현상과 과소비가 심각하다는 얘기다. 80억 지구인이 한국인처럼 생태자원을 소비하면서 산다면 3.3개의 지구가 필요한 셈이다. 세계자연기금(WWF) 한국본부가 발표한 <한국 생태발자국 보고서 2016>에 나오는 얘기다. 결론은 쉽게 나온다. 인구를 1/3.3로 줄여야 하는 것이다. 국민 1인당 소비(또는 온실가스 배출량)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북한 동포나 다른 가난한 나라 등골을 빼 먹는 ‘기후 악당’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에너지 사용량을 국가별로 그린 지도가 있다. 남한보다 땅이 더 넓은 북한이 에너지 지도는 한국의 1/5쯤 된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재난은 가난한 나라들에 더 치명적이다. 똥 싸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는 게 지구 현실이다. 오늘은 AI나 로봇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소란을 피우고 내일은 출산율 저하로 일을 할 사람이 없다고 떠든다. 앞뒤 안 맞는 주장이다. 일은 기계가 하게 하고 기계세, 자동화세, 부유세를 도입해서 기본소득과 기회소득을 대폭 늘이면 된다. 최저임금제처럼 소득 상한제를 도입하면 빈부격차도 줄이고 사회적 갈등도 해소된다. 소득 상한제는 미국이 대 공항을 앞두고 1920년대에 도입하여 성과를 본 제도이기도 하다. 끝내 소득재분배에 실패하여 1929년 대공항을 맞았다. 한국 인구. 더 줄어야 한다. 전쟁이나 자연재해나 괴질로 고통스럽게 줄어드는 게 아니라 출산율 저하로 줄어드는 게 천만다행이다. 목암 전희식('밥은 하늘입니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