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
[칼럼]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다올해는 3.1운동 105주년이다. 모든 언론이 3·1운동 105주년이라고 쓰고 있다. 오랫동안 사용해 화석화된 잘못된 용어이다. 105년 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 인근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했고 일경에 체포되어 갔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경성 거리의 민중들을 바라보며 끌려가던 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동학혁명이 좌절된 후 혁명의 최후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고 1900년대 초의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언론과 교육, 출판 운동 등으로 민도를 높이는 개혁을 전개하다가 1913년부터 전국의 천도교 교역자 483명을 차례로 불러 특별 연성 수련을 실시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장차 국가를 위해서 쓰일 인재를 미리 양성해 놓고자 한 지도자의 혜안이었다. 세계 제1차 대전이 종결되고 민족자결의 운동이 세계적으로 유행되자 의암은 우리의 독립을 위한 시점에 이르렀음을 직감했다. 드디어 1919년 천도교는 전체 인구 1,800만 명에 300만 명의 신도 수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단이 되었다. 천도교는 일제의 압제에 대항할 충분한 인원과 조직 그리고 자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학도들만이 참여했던 동학혁명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절감했던 손병희는 거대한 민족운동을 천도교만의 단독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3.1의거는 제2의 동학혁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국외에서의 독립선언과 의문스러운 고종황제의 죽음으로 민중의 분노가 치솟자 손병희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비밀리에 각계의 지도층에게 함께 할 것을 제의했지만 대부분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를 무시하며 함께 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개신교의 이승훈 선생과 길선주 목사 등은 이미 개신교의 독단으로 독립청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종단이 비밀리에 접촉했고 함께 독립선언을 하기로 합의했다. 다른 교단과 함께한다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시절임을 고려할 때 이들 종단 지도자들의 결단은 돋보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불교계의 큰 스님인 용성 스님과 만해가 함께 하니 비로소 종교연합으로 민족대표를 꾸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독립선언에 동참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들 지도자들의 위대한 희생과 헌신적 정신이 바로 3.1의거의 출발점이었고, 그들의 고뇌 어린 결단이 있었기에 3.1의거는 추진될 수 있었다. 의거의 중심인 천도교는 과거 실패했던 동학혁명을 다시 일으킨다는 자세로 준비했다. 손병희는 최남선을 시켜 작성된 독립선언서를 자체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에게 비밀리에 인쇄할 것을 지시했다. 인쇄 중 종로경찰서의 악질 조선인 순사에게 발각되기도 하고, 완성된 선언서를 옮기는 과정에 파출소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는 등 곡절 끝에 3만 5천 장의 선언서를 종교 조직을 이용해 전국에 퍼트리는 데 성공하였다. 만세 시위는 당일 오후 2시 경성 등 전국 6개 도시를 시작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당황한 일본은 민족대표들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하고 전국의 시위에는 강력한 무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밟으면 밟을수록 일어서는 우리 민족이었다. 특히 경기도의 시위가 가장 격렬했다. 수원 화성 지역은 장날마다 시위가 일어났으며 제암리와 고주리의 학살은 대표적인 피해 사건이 되었다. 3월부터 3달 동안에만 시위에 나선 이가 전국적으로 210만 명에 이르고 체포·투옥된 수도 4만6,948명, 부상자 5만 명 이상이었으며 사망자도 7,500명이 넘었다. 그런데 운동이란다. ‘쓰리 포인트 원 스포츠’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하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된단 말인가? 3·1운동이란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가. 해방 이후 헌법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의 헌법전문 초안에도 분명 3·1혁명이었다. 그러나 국회로 넘어가 심의 중에 바꾸었는데 일설에는 대통령에 유력한 이승만의 온화한(?) 이미지와 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아첨꾼들이 권했고 이승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헌법전문에 운동으로 수록되었다고 한다. 이승만도 일제강점기 시절 내내 사용하던 3·1혁명을 버린 것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3.1운동이 아닌 3·1혁명, 3·1대혁명이라고 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과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에도 명백히 3·1혁명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지난 3·1혁명 100주년 당시 정명(正名) 운동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명 되지 못하고 있다. 제국의 신민이 아닌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된다고 선언한 것은 분명 혁명이었는데. 이제 우리부터라도 제대로 된 명칭을 사용하자. 3.1혁명이라고.◎ 글 임형진(년암, 동서울교구, 경희대 교수)
-
[칼럼] 백 년 전 천도교인처럼지금부터 백 년 전인 1923년 8월 10일 지금의 천도교중앙총부 전신인 천도교중앙종리원의 직원회에서는 중대한 결정 하나를 내렸다. 그것은 천도교 교조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대신사출세백년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을 조직한 결정이었다.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대신사는 1824년 10월 28일 태어났다. 1924년이 수운대신사가 탄신한지 꼭 백 년을 맞는 뜻깊은 해로 이를 교단적 차원에서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기념사업회는 5일 후인 8월 15일 결성되었고, 위원장은 춘암상사가 맡았다. 기념사업회는 기념사업의 방향을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정했다. 하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장래를 서로 전망하고, 다른 하나는 수운대신사를 본받고 법으로 삼아 천도교인을 독려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는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 기념이 단순히 후천의 성인인 수운대신사가 탄생한 사실을 축하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24년을 사는 천도교인들이 수운대신사와 같은 사람으로 거듭나 수운대신사가 목적한 바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다지자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줄이면 과거를 기념하여 현재를 고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기념사업을 하자는 방향이었다. 사업의 방향에 맞춰 기념사업은 크게 세 가지로 준비하였다. 첫째는 과거를 기념하는 행사로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잇는 특별기도 봉행이었다.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은 포덕과 광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뜻을 계승하기 위해 천도교인 전체가 참여하는 특별기도를 하기로 했다. 천도교단에서는 교회나 국가의 큰 일이 있을 때 전 교인들이 일정 기간의 특별기도를 봉행해 정신 통일과 행동 통일을 추구했다. 대표적인 특별기도가 3·1운동 직전의 49일 특별기도였다. 기념사업회는 특별기도 기간을 수운대신사가 탄생한 달인 1924년 10월 1일부터 10월 21일까지의 21일간으로 정했다. 수운대신사가 태어난 달에 전 교인들이 몸과 마음을 일치해 포덕천하와 광제창생의 대원을 실현하는 천도교인으로 무장할 것을 기원하기로 했다. 기도 시간은 낮 12시로 정했다. 기도 시간을 하루의 중심인 낮 12시로 정한 것은 수운대신사의 득도가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는 의미를 담았다. 기도의 방식은 봉청수(지금의 청수봉전), 묵념기도(지금의 심고), 본주문 105회 묵송, 묵념기도의 순서로 했다. 특별기도를 통해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둘째는 현재의 천도교를 담는 행사로 1924년을 사는 천도교인의 활동을 보여주는 기념행사였다. 기념행사는 이틀에 걸처 진행되었다. 10월 27일 저녁 7시부터 중앙대교당에서 당대 천도교를 대표하는 연사인 이돈화, 이종린, 방정환 세 사람이 수운대신사 탄신의 의미를 돌아보는 강연회를 열었다. 탄신일인 10월 28일에는 11시 반부터 새로 지어진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에서 탄신 백주년 기념식을 열어 수운대신사 창도 정신을 기렸다. 이어서 청년당 대회를 열어 추모사 낭독과 대신사와 청년당에 관한 연설, 선언문 낭독 등을 진행하였다. 청년당 대회 폐회 후에는 여흥이 진행되었는데 동덕여학교 학생의 축하 공연, 김문필 일행의 기마술과 무도, 청년당의 가장행렬과 광대 줄타기, 경성악대의 주악 등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기념행사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는데 저녁 7시부터 청년당, 내수단(여성회), 학생회, 소년회 등 7개 부문 단체에서 준비한 공연이 밤 12시까지 진행되었다. 기념관 뜰에는 전등을 달고 만국기를 내걸어 화려하게 장식해 기념행사 분위기를 높였으며, 기념관 안에는 7개 부문단체에서 만든 각종 모형물이 찿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전국에서 4천 명이 참여해 일대의 교통이 혼잡할 정도였다. 셋째, 미래를 준비하는 사업으로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의 건립이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수운대신사 탄신 백주년이라는 뜻깊은 해를 맞아 천도교인 만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사업으로 기념관을 건립해 일반에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독실 교인 3만 5천 집을 선정하여 이들이 1원씩 성금을 낸 3만 5천 원으로 대공회장을 건립하기로 했다. 기념관은 6월 25일 착공해서 탄신일인 10월 28일 기념식을 겸해 낙성식을 가졌다. 총공사비는 약 5만 원이었다고 알려졌다. 기념관은 앞은 2층, 뒤는 1층으로 연건평 160평으로 1천 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대공회장이었다. 이 기념관에 대해 “기념관의 넓이는 9칸이요. 길이는 12칸인데, 동 기념관은 일반 집회에 제공할 터이요, 활동사진(영화), 강연, 연극 등 어떠한 것을 사용하더라도 편리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데, 조선인의 손으로도 집회 장소를 건축한 것은 이곳이 효시라 할 수 있다.”라고 당시 언론에서 기념관 건립의 의미를 설명했다. 수운대신사의 정신을 담은 기념관은 서울에서 제일 큰 공연장으로 시민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민족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념관을 우리의 힘으로 만든 것은 수운대신사의 창도의 정신을 세상에 펴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업이었다. 이처럼 백 년 전 천도교인은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후천의 성인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열과 성을 다해서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성과를 내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고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전 천도교인들이 단결해 수운대신사의 탄신 백 년이 갖는 의미를 새기고 이를 세상에 전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교인들이 특성을 모아 국내 최고의 대공연장을 건축해 세상을 위해 내어놓았다. 이 소식에 민족 구성원들은 가슴이 들떴다. 백 년 전 천도교는 민족의 한 가운데에서 희망이 되었다. 이제 다시 백 년이 지났다. 올해가 수운대신사 탄신 2백주년이다. 천도교에서 대신사 탄신 2백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번에는 어떤 기념물이 만들어져 수운대신사의 탄신의 의미를 새기고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백 년 전 우려했던 것처럼 그냥 행사를 위한 행사, 해마다 지내는 제사와 같은 무의미한 행사를 준비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다못해 천도교박물관을 건립해 세상 사람들에게 수운대신사의 창도 정신을 알리는 공간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한다. 백 년전 천도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그때와 같이 세상의 희망으로 천도교가 우뚝서기를 기대한다. 글, 덕암 성강현(흥신포 직접도훈, 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겸임교수)
-
[칼럼] 되는대로 살아야지 뭘 어떡해?“티브이 없었으면 어떡할 뻔하셨어요?” 라고 내가 묻자 준비한 것처럼 촌각의 틈도 없이 돌아온 대답이었다. “되는대로 살아야지 뭘 어떡해?”. 마을(노인)회관에 옹기종기 앉아서 티브이만 보고 있는 어르신들. 거의 혼자 사시는 분들이라 체온도 그립고 난방비도 겁나니 노쇠한 몸 하나 의지하기엔 마을회관이 좋다. 종일 티브이 장면을 따라가며 얘기 보따리를 끌렀다 싸맸다 하시는 노인들. 그러다 심드렁해지면 묵은 기억 들추다가 말다툼도 벌이지만 다시 티브이 따라 깔깔 웃는다. ‘되는대로 산다’라는 말은 주어진 조건에 저항하지 않고 뭐든 수용한다는 말이다. 《놓아버림》의 데이비드 호킨스나 《당신이 플라시보다》의 조 디스펜자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이는 어르신들의 몸에 밴 삶의 지혜다. 일단 수용한 다음에 한발 더 나아갈지 여부를 궁리하는 생활 태도. 한울 모심의 태도다. 티브이 없어도 얼마든지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잘 보내실 어르신들이다. 하지만 마을회관에 모이긴 해도 늘 벽에 기댄 등은 더 구부정해지고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는지라 약을 한 주먹씩 먹는다. 움직이지 않으니 식욕도 별로 없어서 면사무소에서 나온 쌀과 부식은 옆방에 쌓여있다. 옛날과 달리 요즘 먹거리가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 맛을 내느라 섞어 놓은 첨가물들이 얼마나 몸을 망치는지 모른다. 멸치와 쥐포조차 인공조미료가 듬뿍 스며있다는 내 말에 깜짝 놀란다. 특별한 날에 즐겨 드시는 회도 모두 양식한 것이고 정전이 되면 물고기가 폐사하는 게 강제로 산소를 공급하다가 전기가 끊기니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하니 입을 쩍 벌린다. 작년부터 어쩌다 내가 공식 노인이 되었고, 올해 처음으로 노인 일자리 가서 목격한 우리 마을 노인들 모습이었다. 좋은 먹거리가 뭔지를 말하기보다 믹스커피 통 옆에 아몬드와 쌍화탕 분말 차를 한 통씩 사 놓았더니 잘 드신다. 이 역시 가공식품이지만 자연 식재료는 노인들 일거리라 어쩔 수 없기도 하다. 내가 시간 나는 두 번째 날과 세 번째 날은 건강 체조를 해 봤다. 손뼉치기와 발끝 부딪치기. 팔을 뻗어서 가 닿는 곳 모두를 토닥토닥 두드리기. 손 비비기와 얼굴 비비기를 앉은 채로 했다.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해서다. 서로 왼손으로 악수하게 해서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팔과 왼 어깨를 골고루 두드려주는 놀이도 했다. 목덜미와 등짝까지 두드리다 보면 자연스레 포옹을 하게 된다. 순간순간 깔깔 웃는다. 쇠똥 구르는 것만 봐도 웃어댄다는 소녀들처럼.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내 스마트폰으로 모바일 핫스팟을 설정하고 에이치디엠아이(HDMI) 케이블을 티브이에 연결해서 유튜브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비록 오래된 프로지만 웃음보따리인 에스비에스(SBS)의 《고향에서 온 편지》도 보고 보건복지부에서 만든 치매예방 영상도 봤다.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은 발 마사지였다. 발바닥과 발등의 혈 자리 이미지를 칼라로 인쇄하여 나눠 준 다음에 반사구니 서혜부니 하는 원리를 쉽게 설명하고서 내가 쓰던 호호바 오일과 코코넛 오일에 오렌지 에센셜 오일이나 라벤더 오일을 브랜딩 해서 발라 드렸다. 증상에 따른 혈자리를 누르게 하다가 그냥 막 “되는대로 눌러도 된다”라고 말씀드렸다. 나도 노인들과 노는 이 놀이를 되는대로 계속할 생각이다. “되는대로”. 글, 목암 전희식('밥은 하늘입니다' 저자)
-
[칼럼] ESG 경영의 근본이 천도교에 있다최근 사회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의 시작은 1970년대 UN에서 논의된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에서 시작되었는데 UNSDGs에 의하면 인류의 보편문제와 지구 환경문제 및 경제 사회문제를 2030년 까지 17가지 주목표와 169가지 세부 목표를 정해 국제적 공동 목표를 세웠다. 우리나라 역시 이 분야에 큰 관심과 함께 향후 계획 및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기업은 가격이 싸고 품질이 좋은 생산품을 만들어 이익을 많이 내면 되었지만 향후는 생산품을 만드는 과정과 더불어 비재무적인 요소(환경(E), 사회(S), 지배구조(G))까지도 평가를 하여 투자자들이 투자를 결정할 때 고려하도록 하였다. ESG 경영 평가단은 사용하는 제품이 원자재의 생산부터 건전하고 합법적인 과정을 거쳤는지를 확인하고 평가를 한다. 이것은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에 전 분야에도 이러한 개념이 바탕이 되어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종교계에서도 이러한 ESG 경영이론을 도입하는 것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천도교에서는 ESG와 관련된 내용들이 이미 경전 속에 많이 들어 있다. 환경(Environmental)은 기후 변화 및 탄소 배출, 에너지 사용, 수질, 폐기물, 토양 오염, 소음, 진동, 환경 친화 등의 환경 측면에서 위험 사고를 바탕으로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환경 활동이며, 해월신사님의 생태 존중 말씀은 탄소제로시대에 새겨야 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땅을 어머니 살처럼 여기면 온갖 만물이 그 위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Social)는 노동, 인권, 안전, 보건, 성 평등, 지역사회 기여 등의 사회적 책임 활동이며, 천도교의 시천주 진리로서 인내천 세상이 된다면 사회적 책임 활동에 앞장 설 수 있다.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종교인들의 노력이 필요하며, 특히 천도교는 다른 어느 종단보다 인권을 존중한다. 마음속으로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니 그 이상 소중한 인권과 사회적 책임활동이 어디 있겠는가. 지배구조(Governance)는 기업의 투명성, 윤리적 경영, 이사회의 역할과 책임을 다함으로서 기업의 장기적 이익과 지속 가능한 경영 활동인데, 천도교의 임사실천십개조를 보면 ‘윤리를 밝히라’ 그리고 ‘일에 임하여 지극히 공정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지배구조의 바탕이 되는 말씀이다. 윤리를 바로 세워 책재원수가 되지 않도록 건실한 천도교의 지배구조가 필요하다. 침체된 교단에 새로운 기운이 필요하다. 천도교도 높은 도덕성과 함께 훌륭한 경영마인드를 갖춘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전 세계 선진국들은 지금 ESG의 경영전략에 올인하고 있다. 2050년 탄소제로 사회구현을 목표로 세계적인 기업들이 앞장서서 이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천도교단에서도 급변하는 ESG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교단차원의 ESG위원회가 구성되고 전문가들이 모여서 교단 발전을 의논하였으면 한다. 향후 기후 변화는 이대로 가면 지구의 큰 이변으로 삶, 즉 생존 자체를 위협당할 수 있다. 온 세계가 함께 기후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사회적 가치 창출과 투명한 윤리 경영에 노력해야 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온실가스 즉 탄소배출이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었다. 우리나라는 이 문제에 지속가능한 해법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겨 가고 있다. 종교계 역시 탄소 제로 사회 구현에 기여하고 동참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더욱이 천도교가 앞장서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ESG 경영의 확대 측면에서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 간의 상호 작용으로 지속가능한 개발과 환경보호 및 사회적 공헌 등으로 종합적 삶의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글, 울산교구 이암 정의필
-
[칼럼] 수운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개벽을 생각해본다올해 갑진년(포덕165, 2024년)은 대신사 수운 최제우 탄신 200주년(이하,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이다. 다시 말해 100년에 한 번 돌아오는 기념비적인 해이다. 또한 동학혁명 130주년, 갑진개화혁신운동 120주년, 천도교여성회 창립 100주년으로서 천도교단에는 경사가 겹치는 해이기도 하다. 먼저 본 글에서는 대신사 탄신 2백주년에 초점을 맞춰 논하고자 한다.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부터 준비해야 하며, 어떤 기념비적 사업을 진행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국내는 물론 대신사 탄신에 대한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연구 및 국제학술대회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기념사업과 계승사업을 통해 동학·천도교의 3대 목적인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지(之) 대도(大道)의 실천사업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다는 희망에서이다. 그런데 글을 쓴다는 것이 원고의 한계도 있고 해서 여기서는 대신사 탄신에 대한 의미와 우리의 자세를 중점적으로 거론하고자 한다. 1. 대신사의 탄생은 개벽을 잉태하고 있었다. 천도교(동학) 제1세 교조 수운 대신사(이하, 대신사)께서는 1824년 10월 28일(음력)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315번지에서 태어났다. 본향은 경주, 아명(兒名)은 복술(福述)이며, 본래 이름은 제선(濟宣), 자(字)는 도언(道彦)이었다. 후일 구도 과정에서 이름은 제우(濟愚)로 자는 성묵(性默)으로 바꾸었고, 호는 수운(水雲)으로 했다. 대신사는 신라 말기의 석학 고운 최치원의 25세손이며, 정무공 잠와 최진립 장군이 7대조이시다. 그리고 대신사 아버지는 근암 최옥(이하, 근암공)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근암공은 벼슬을 하지 않은 산림처사로써, 성리학을 심화 발전시킨 영남 유학의 거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학설의 한 갈래를 계승한 선비로서 경상도 일대에 그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이러한 근암공의 학문과 덕망을 온전히 계승한 사람이 바로 근암공 아들 대신사이시다. 그런데 문제는 대신사 어머님 한씨(韓氏)께서 재가녀(再嫁女) 신분이었다는 것이 대신사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조선은 성종 때에 왕조의 근본을 이루는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면서 예전(禮典)에 밝히기를, 재가녀 자손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재가녀 자손을 마치 서자(庶子)와 같이 신분차별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분차별이 없었다면 대신사께서는 아마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적당한 벼슬을 하였거나, 아니면 근암공 아버지처럼 사림처사로서 서당 훈장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당시 시대의 불평등한 현실 속에, 대신사는 당시 학문을 모두 통달한 선비였지만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하며 큰 방황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하여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봇짐장사부터 시작하여, 세상을 크게 변혁시키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입산수도는 물론 조선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인심풍속을 살피곤 하였다. 다시 말해 대신사의 득도(得道) 즉 동학창도는 대신사 아버님이자 스승님이신 근암공의 영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근암공의 셋째 부인이 되신 대신사의 어버님 한씨부인의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출발한다. 한씨부인은 한 번 결혼했다 남편과 사별한 청상과부의 신분으로 근암공 셋째 부인이 되신 것이다. 이처럼 대신사께서 신분에 대한 고민과 방황 그리고 사회상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등 당시 불평등했던 시대상황은 바로 동학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시천주(侍天主)·인즉천(人卽天)·사인여천(事人如天) 진리를 깨달아 실천하는데 원인 제공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대신사의 탄생은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잉태(孕胎)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범인(凡人)이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천도(天道)이다. 일찍이 민족시인 신동엽은 대서사시 「금강」에서 대신사님을 석가, 예수님과 더불어 세계적인 성인으로 조명한 바 있다. 국내외에서도 유명한 철학자 김용옥과 시인 김지하도 강연과 저술을 통해 대신사를 공자와 예수에 버금가는 위대한 성자라고 하였다. 또한, 동방사상 및 동학사상에 조예가 탁월했던 범부 김정설은, “최제우는 천계를 받아, 흩어져 무질서한 천년의 적막을 깨트리고 역사적 대강령을 이루었다. 동시에 신도성시 정신의 기적적 부활이며, 국풍재생의 경이로운 사태로서 어마어마한 역사적 대사건이었다.”고 강조하여, 수운 선생의 득도와 동학 창도는 시대의 혁명을 넘어 새로 운 개벽의 세상을 열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대신사의 일생과 동학·천도교의 역사를 접하고 지극정성으로 수도(修道)를 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범인(凡人)이 성인(聖人)이 되고, 소인(小人)이 대인(大人)이 될 수 있다.’는 교훈과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대신사께서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진인(眞人)이자 신인(神人)의 경지에 오른 대성인(大聖人)이 되신 분이다. 대신사님의 제자들은 대신사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대신사님을 닮아가고 대신사님처럼 되는 것이 제자들의 도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 대신사님처럼 실천하는 것이 곧 동학도유(東學道儒)이고, 천도교인(天道敎人)이자 무극대도인(無極大道人)이 되는 것이다. 3. 천도교(동학)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자.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을 맞이하여 수운 최제우 스승님의 탄생의 의미를 짚어보고 또한 우리의 자세도 점검해보자. 대신사 탄신은 바로 동학(천도교) 창도로 이어지고, 동학창도는 바로 대신사 순도(殉道, 순교)로 이어진다. 대신사 순도는 바로 1871년 대신사 순도 7주기에 영해교조신원운동으로 이어지고, 영해신원운동은 1892~1893년 공주, 삼례, 광화문, 보은, 원평 교조신원운동으로 이어진다. 또한 교조신원운동은 1894년 1차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지고,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전쟁은 일제강점기 의병운동으로 계승된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은 3.1독립혁명으로 계승되고, 해방 후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으로 계승되었다. 동학·천도교 정신은 남북평화통일 달성이라는 또 다른 시대적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하며, 지구환경과 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급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이러한 막중한 임무와 시기에 우리 천도교단이 정신 차리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이다. 현재 우리 교세가 대신사 순도 때와 같은 숫자이다. 교인수가 한때는 3백만 명을 웃돌았으나, 현재는 현저한 수준으로 추락하였다. 이러한 쇠운을 극복하고 성운을 맞이하려면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겠으나, 우선 천도교인들의 각자위심(各自爲心)을 퇴출하고 동귀일체(同歸一體)를 지향하는 것으로 기본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스승님과 선열님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못다 이루신 꿈을 우리가 이루기 위해서 다시개벽의 새로운 세상을 향해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야 할 것이다. 끝으로, 대신사 탄신 2백주년을 맞이하여 천도교(동학)의 새로운 문화를 하나 창출했으면 한다. 바로 대신사 출생지(出生址)에서 순도지(殉道址)까지 성지순례를 매년 정례화 하였으면 한다. ‘대신사, 탄신지에서 순도지까지의 성지순례’는 대신사 탄신일(10.28), 대신사 순도일(3.10), 대신사 득도일(4.5, 천일기념일) 중에서 가장 적합한 날을 선택하여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성지순례는 신앙심 고취는 물론 대중적인 문화창달 즉 포덕천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끝) 글 이윤영 (천도교 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