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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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8일 성수당 이화자 선도사, 환원성수당 이화자 선도사가 지난 8월 18일 10시 환원하여 8월 19일 경주교구장으로 영결식을 봉행하였다. 고인은 22세에 천도교 집안으로 시집와 경주교구에서 신혼살림과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70여 년 동안 천도교에 헌신하면서 도가를 완성하였다. 성수당 이화자 선도사는 1931년 11월 20일 출생(부: 이종도, 모 : 박명수)하였다. 한학을 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찌기 한학을 배웠으며 건천보통학교 졸업 후 가사에 전념하다가 1953년 6월 인암 박상택 선도사와 결혼 후 경주교구에서 신혼살림과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천도교 경주종리원장(포덕 52년12월 19일)을 지낸 과암 박인환 종법사의 손부이며, 제7대 천도교 경주교구장을 역임(포덕 82년 8월 ~ 포덕 94년 11월)한 오암 박창근 전 경주교구장의 자부, 전 경주교구장 연암 박상택의 부인이다. 현 경주교구장 인암 박연환의 모친으로 천도교 경주교구 연혁에 의하면 이화자 선도사의 시부이신 과암 박인환 종법사는 경주대표로, 진주 신용구, 언양 곽해진, 영천 이종원 등과 함께 중앙총부 지명 특별기도를 경주교당에서 실시한 바 있다. 당시 의암성사께서는 전국 9곳(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특별기도 장소로 지명하셨다. 박창근 전 경주교구장(천도교 도사)묘비에는 아버지(박인환 종법사)를 도와 독립운동 밀정역할을 하다 피체되어 옥고를 치른 사실도 있다고 되어있다.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피체되어 옥고를 치를 때 아들(창근)이 왜경에 찾아가 아버지 대신 옥고를 치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도 있다. 포덕 61년에 구입한 경주교당을 시부이신 박창근 선도사께서 포덕 114년 6월에 중수(전면 개보수)하셨고, 이어 남편 연암 박상택 선도사께서 포덕 130년 5월에 다시 교당을 전면 중수한 이력이 있다. 고인은 포덕 122년 6월 24일 성수당(誠守堂) 도호를 받고 포덕 146년 선도사에 임명되었다. 경주교구 여성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슬하의 자녀로는 2남 3녀로 현재 경주교구장을 맡고 있는 인암 박연환과 경리부장을 맡고 있는 정암 박정완, 그리고 큰딸 경순당 박경천, 둘째 딸 화순당 박순천, 현 경주교구 여성회장을 맡고 있는 셋째딸 여심당 박내천이 있다. 손자 박기태는 2년 전 천도교 청년회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성수당 이화자 선도사는 70년 세월을 경주교구의 지킴이로 한번도 떠난 적이 없으며, 묵묵히 천도교인으로서, 며느리로서 소임을 다하하였다. 포덕 164년 8월 18일 10시 환원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많은 교인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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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울산 땅을 너무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송탄교구 가혜당 이영혜 동덕이 대신사 대사모 숭모비 건립기념 도보순례에 참가한 소감을 전했다. 지난 8월 26일~27일 서울과 부산 등 각지에서 교인들이 참여한 대신사 대사모 숭모비 건립기념 도보 순례를 마친 가혜당 이영혜 동덕은 편집실에 직접 찾아와서 기행문을 전달했다. 기행문에는 "나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역에 KTX를 타러 갔고, 50년 만에 처음으로 울산역에 가 봤다"고 전하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회를 밝혔다. 울산->경주->대신사 생가->용담정으로 이어진 이번 순례에 참가하여 마을 곳곳을 누비며 꿈 같은 3만보를, 72세의 나이에 동참하게 되어 스승님의 큰 은덕을 느꼈다고 말했다. 순례를 하며 빼곡이 손으로 쓴 기행문에는 머물던 곳마다 느낀 천사님의 감응이 묻어있다. "저는 용추각 앞 시루떡 같은 바위에 앉아 물소리와 함께 심고합니다", "전시관 곳곳 유지 관리를 잘 해주시니 참 고맙습니다" 가혜당 이영혜 동덕은 이 기행문을 전하며 이번 순례에서 스승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한 걸음씩 따라 걸었던 심경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했다고 전했다. 한편 대신사님의 후손인 가혜당 이영혜 동덕이 대신사 대사모 숭모비의 건립기념 도보순례에 참여한 것은 더욱 큰 의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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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에 도착한 따뜻한 마음청주교구에 온정을 베푼 교인들의 손길이 있어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청주교구 대덕당 주선자 동덕은 65인치 TV, 마이크, 엠프, 스피커 등의 기증 물품을 보며 한울님 은덕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전 종의원 의장을 지낸 수암 염상철동덕, 연원회 부의장 수암김산 동덕, 마포교구 김정호 동덕이 기증한 물품을 지난 9월14일 김정호 동덕과 서울교구 정상기 동덕이 직접 청주교구를 방문하여 설치하고 성금을 전달하였다. 대덕당 주선자 동덕은 "한울님과 성사님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마움은 정말로 큰데요, 마음에 무게는 많이 무겁습니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힘든데 이렇게 도움을 받으니 더 힘내서 일하라고 하신뜻인걸 알기에 힘이 닫는데 까지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소감을 전했다. 교구와 교인이 서로 돕는 유무상자의 정신이 널리 퍼져 나가는 천도교의 공동체의식이 빛나는 사례로써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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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구 후원회 부회장 금암 이종민 선도사, 공기살균기 기증서울교구 후원회 부회장인 금암 이종민 선도사가 대교당에 필립스 UV-C 공기살균기 60평형 4대와 대교당 관리실용1대를 기증하였다. 이 살균기는 가동후 30분 정도면 해당 영역 공기 중의 각종 나쁜균들을 거의 살균하는 기능이 있어 덕분에 더욱 쾌적한 환경에서 중앙대교당 시일식을 보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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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아이들을 키우고, 아이들은 한울님을 키운다Q. 2014년 방정환 한울어린이집을 설립하게 된 배경과 계기를 알려주세요. A. 한울연대는 한울님과 사람을 섬기며 만물을 공경하여 생명을 개벽하고자 하는 실천 단체입니다. 그동안 타종단과 연대하여 환경파괴로 깊은 상처로 입은 사람들의 절망과 현장을 찾아 목소리도 높여보았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해결이 필요함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수련을 강화하며 ‘영성이 곧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우선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영성의 주인(한울님)이 되는 마음을 심자, 그리고 부모들에게 다가가, 지금 세상에 횡횡하는 오염된 마음의 존재를 밝히고 내 마음을 바르게 운용하는 힘부터 길러보자는 강력한 의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Q. 운영방식이 기존 어린이집과 다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원장님의 운영 철학도 궁금합니다. A. 기존의 어린이집과 다른 점은 우리 사회에 팽배한 관습적인 교육방식을 초월하려는 노력입니다. 바로 친구와 짝을 이기고 일어나야 하는 경쟁 중심의 교육과정 자체가 미래를 보장한다는, 그야말로 삭막한 이 세태를 극복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나’를 소중히 보호하고, 나를 드러내는 행위를 존중합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가 아니라,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니?’ 입니다. Q. 소파 선생께서 '어린이가 세상의 주인이며 미래의 주역'이라고 말씀하신대로 어린이집을 운영하시더군요. 특히 신경 쓰시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A. 방정환 선생님께서는 어린이는 새로운 사람이며 어른보다 더 높게 대접하라고 하셨지요. 자식도 내 소유가 아니니, 부모 욕심대로 진로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내 아이를 잘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산들맘(산, 들, 마음)’이라는 부모활동을 운영합니다. 등원해서 새날열기(함께절, 맑은물, 나누미)부터 나들이, 점심식사까지 참여하면서 어린이 활동을 돕고 관찰하면서 아이의 특성을 하나하나 깊이 있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아이들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뿐만 아니라 서로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이를 위해 부모연수와 교사연수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어요. Q. 원장님께서는 어린이들과 자연의 교감을 중시하시는데, 주요 프로그램은 무엇인지요. A. ‘날마다 나들이’와 ‘마당 흙놀이’, ‘작은농부’ 활동입니다. ‘날마다 나들이’에서는 웬만한 날씨쯤은 어린이들의 놀이 친구가 될 뿐이지요. 자연의 기운을 마음껏 누립니다. 그러면 순수하고 거룩한 자연, 그들이 아이들을 키워내지요. 어린이들은 오전에는 나들이, 오후엔 흙 놀이를 하면서 놉니다. ‘작은 농부’는 땅과 생명의 마음을 살리기 위해 농사를 짓는 프로그램입니다. 어린이집 대표(방정환배움공동체구름 달, 구 방정환한울학교)께서 땅 500평을 기증하셨고, 천도교 대학생단에서 생태화장실을 지어 주셨습니다. 자연농법으로 2월부터 주요 농사를 두루 체험합니다. Q. 방정환배움공동체 구름달에서 '교사, 방정환에게 길을 묻다' 책을 펴내셨는데요. 원장님께서 쓰신 한울어린이집에 대해 가장 강조하신 내용이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A. 영성(마음, 모심)프로그램으로,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새날열기 ㅡ ◯함께절("서로 배우겠습니다" 큰절하기)ㅡ ◯맑은 물(마음담기, 마음소리, 마음 먹기) ㅡ ◯나누 미(밥한그릇에 담긴 천지만물의 순환과 고마움 알기) 2) 다섯 가지 약속(도와줄게, 같이하자, 할 수 있어, 나누어 줄게, 기다려줄게) 3) 모심인사(모든 일의 시작과 마무리 인사에 모시고~를 붙입니다) 이것이 기존의 생태어린이집과는 다른 영성 프로그램입니다. 마음과 한울님을 모시기가 핵심입니다. 공경의 덕목을 위해 항상 시작이나 마칠 때 둥글게 모여 함께 진심으로 절을 합니다. 믿음의 덕목으로 ‘맑은물’ 시간은 방정환 선생님 말씀처럼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시간이지요. 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기 마음을 헤아리고 읽어내며 표현하는 시간입니다. 정성의 덕목으로 ‘나누미’를 합니다. 밥 한 그릇에 담긴 이치와 정성을 생각하며 쌀을 한 숟가락씩 떠서 모읍니다. 나누미에 참여하는 가정도 점점 늘어나 밥하기 전 나누미를 하고 일주일 단위로 가져오면 쌀은 어린이들이 밥을 지어먹고, 모아진 쌀 만큼의 금액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합니다. Q ‘한울님’ 호칭을 둘러싸고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있는데요. 원장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A. 한울에 님자를 붙여 ‘한울님’이라고 칭함에는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께서 다시 개벽이라고 하는 그 출발점이 천지운용의 이치인 한울을 부모와 같이 섬기고 공경해야 하는 초월적 신성한 존재로서 정신생명 곧 영성, 성령에 대해 확연한 깨우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Q. 동학인으로 자부하며 활동하는 ‘한울님’, 즉 활동가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동학인이라면 우리 스승님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고 사람들이 진정 어떤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셨는지, 어려울 때마다 어떻게 수련하면서 난관을 극복해 왔는지 철저히 돌아 보고 자세히 살피는 공부부터 해야 합니다. 스스로 동학인이라고 말한다면 스승님으로 거듭나야 하는 과제와 책임이 동시에 부여되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감히 동학인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스승님을 들먹이면 안 됩니다. 동학인이라면 이런 모든 단계를 체득하고 나서 ‘혁명’을 말해야 합니다. 글. 함경숙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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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 역사가 있는 여행반갑습니다. 박광일 여행작가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여행이야기라는 회사의 대표님이시기도한데요, 방송에서 뵙기가 더 익숙합니다. 어떤 방송에서 만날 수 있는지 독자여러분께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최근에는 TV방송보다는 라디오 방송을 더 많이했습니다. 라디오 고정 프로그램으로 7개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데, KBS는 3개, SB와 EBS, CBS, 국악방송 각 1개씩 그렇게 7개의 코너에서 저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전부 역사코너인데 어떤 코너는 유적, 어떤 코너는 사건, 도 어떤 코너는 역사 속의 법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다룬 이야기들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청취자 여러분들께서 법과 관련된 이야기는 흥미로워하시더군요. 전봉준 장군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도 그랬습니다. 무라카미 텐신의 사진을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전봉준의 재판은 근대법정의 모습이 등장한 재판이고 또 한편으로 해월 신사의 재판에 참여했던 재판관 중에 조병갑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주로 독립운동 등의 역사를 다룬 방송을 일반적으로 하고 있고, JTBC에서 세계다크투어, 일제 침탈의 역사, 일본으로 끌려간 노동자들의 이야기 등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매주 7개의 레포트를 쓰는 느낌으로 방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 테마가 있겠지만, 역사를 주제로 많은 방송을 하시다보니 콘텐츠를 구성하는 일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콘텐츠를 구성하는 일은 언제부터 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우선 방송 콘텐츠 구성에 대한 말씀을 먼저 드리면, 이런 역사 콘텐츠를 한 방송에서 짧으면 7~8개월 길면 4~5년동안 해오다 보니 소재를 구성하기가 참 어렵고, 대학 다닐 때보다 실록과 문집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또 최근에는 라디오가 대부분 팟케스트, 보이는 라이도, 유튜브 등으로 또 CBS의 경우 콘텐츠를 제공하는 플랫폼을 통해 전달되고 있어서 동시에 듣지 않고 찾아서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제가 역사를 전공했고, 또 역사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교수님께서는 대학원을 그만두고 회사 차린다고 했을 때 참 속상해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몇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교수님이나 동학들에게 폐가 되어선 안된다고요.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더군요.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또 역사 방송은 팩트오류라던가 관점 등이 중요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어요. 영상과 사진의 자료들이 사실과 다른 자료들이 많아서요. 여행이야기라는 회사는 여행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역사콘텐츠를 생산하는 회사라고 볼 수 있겠군요. 1999년에 회사를 만들 때였는데 당시는 이른바 다크투어라는 개념도 없었고 회사라기보다 동호회 정도로 있을 때였어요. 유홍준 교수의 책이 나오면서 역사여행이나 기행이 주목받게 되었는데, 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업의 영역으로 바꾼 것이 수학여행이었어요. 기관과 업체와 협업, 운영할 수 있는 담당자를 찾게 되면서 회사가 성장했죠. 역사기행과 관련된 어린이, 청소년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면서 만들어졌어요.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역사 인식이 넓어지는데 좀 아쉽긴 합니다. 조금 더 빨리 이루어졌다면 소실되지 않았을 자료들이 많았을 것고 또 더 일찍 발굴할 수 있는 문화재들도 많았을 것 같아요. 대중 영역에서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우리 것을 높이다 보니 국수주의 현상이 일어나고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으로 표출되기 때문에 조율하는 것이 힘듭니다. 역사는 좋다, 나쁘다가 아닌 있는 그대로인데 가치관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을 무너뜨리는 것도 큰 일입니다.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 왜 그들이 그렇게 했는가. 그 부분이 여전히 그런 어려움은 시대가 변했어도 갖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예인이 말을 잘못하면 크게 문제 삼으면서 정치인이 오류를 범하는 것에는 너그럽게 대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어요. 사회적으로 그런 위치에 있고, 또 공부를 했음에도 그런 오류를 범하면서 문제가 되는데, 이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부가 바뀌면서 여당 인사들이 가진 일본에 대한 태도도 그렇습니다. 전범집안을 일본 전통의 유능한 정치가문으로 묘사하는 등, 이것이야 말로 대서특필해서 다루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면서 언론이 다뤄야 하는데 한두 번 다루다가 끝내더군요. 짚어내지 못합니다. 전범, BC급 까지도 인식을 못합니다. 오히려 이 부분이 문제가 있겠다 싶어요. 교과서 문제도 그렇고요,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에서 그런 제대로 된 역사 콘텐츠를 생산해내지 못한 것도 문제 아닐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대중영역에서는 일본에 대한 비판의식이 굉장히 높은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정책에 반영될 때 어떤 모습으로 반영되어야 할지 모르는. 그 단계로 넘어서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것이 안 됩니다. 작가님의 책 “제국에서 민국으로”라는 책을 보니 이해하기 쉽게 글로 쓰시고 문체가 쉽게 쓰시려는 노력이 보이더라고요.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 임시정부에 대한 책인데 임시정부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합니다. 어떻게 바라보고 책을 쓰셨는지 궁금합니다. 1919년이 임시정부 100주년이기도 했고, 제가 임시정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에 놀랐고 80~90년대에는 임시정부에 대해 과소평가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구가 한 게 뭐냐,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자신들의 영역들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1919년 3.1운동의 결과로서 계속해서 우리 독립운동은 이어져 왔고, 근대 역사의 시작의 기준이 되는 게 3.1운동인데, 3.1운동 이후에 끝까지 이어졌던 기관이나 단체는 유일하게 임시정부예요. 1948년 정부수립할 때 제헌 헌법에 보면 복국과 재건은 1919년입니다. 1919년을 극대화 시키는 것, 표상할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성과는 미약했고 그들의 지향점도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그 성과를 온몸으로 가지고 있었던 임시정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임시정부의 역사는 한국엔 없다는 거죠. 흥미롭지 않습니까. 특별히 관심을 갖고 책을 쓰시게 된 이유가 있나요?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많았어요. 1990년 이전만 해도 중국과 교류가 없었으니 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소수일 수밖에 없었죠. 이 책을 쓴 이유도 임시정부에 대해 누군가 전달하면 좋겠는데 내용이 좀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간의 흐름에 따라 시기적으로 쉽게 설명해주면 여행가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서였습니다. 자료를 찾다보니 전문가 영역과 비전문가 영역의 간극이 너무 크더군요. 전문가 영역은 한 사람 한 사람, 한 시기 한 시기를 찾아가는데 비전문가의 영역은 그냥 김구 답사기인 거예요. 김구 선생은 독립임시정부사무소 만들 때부터, 중경시절 주석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경시절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그 사이사이 참여한다는 것,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 시대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큰 시선으로 보는 책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 책을 썼습니다. 집필기간은 2년 정도인데 앞뒤 답사, 자료까지 5~6년정도 됩니다. 자료고증도 쉽지 않았습니다. 또 외국이다보니 현장을 가는 것이 행사로 간 것과 개인적으로 간 것, 그 교집합을 찾는 것도 힘들었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동학과 독립운동사를 뗄 수 없는데, 선생님이 바라보시는 우리가 동학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동학이 끼치고 있는 영향은 곳곳에 있고, 동학이냐 천도교냐를 구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보면 저는 최근 대종교 관련된 독립운동사를 조명한 적 있습니다. 대종교의 특징은 생기자마자 백두산 옆으로 본거지를 옮겼다는 것입니다. 단군교에서 대종교라는 이름으로 처음 바꾼 것도 1년 뒤였습니다. 나철 선생이 대종교이전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단체를 만들고 이는 1920년 북로군정서의 기반이 됩니다. 또 임시정부 인사 중 20명 이상이 대종교신자거든요. 우리가 알고 있는 박은식 선생, 신채호 선생 등 이 분들이 대종교신자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흔적이 다 사라졌습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것과 현재와 비교해보면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대종교의 기반도 동학이었습니다. 이렇듯 동학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한데 다만, 근대역사를 살펴볼 때 서학과 개신교가 가진 역할도 큽니다. 그런데 천도교인은 이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개신교의 경우 클러스터로 들어옵니다. 학교, 병원, 교회, 이렇게 세 개가 기본적으로 들어와서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그런 모습에 국내에서 대응했던 존재가 동학입니다. 그런데 1919년 이후 약해지고 분열되고 회유의 대상이 되었어요. 동학의 본래 모습, 그 시대의 고민들이 광복 이후에 보여지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볼 때, 개신교는 이후에 변신했고, 카톨릭은 참여하지 않았다가 반성하면서 민주주의를 통해 크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는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시대의 고민을 담아냈던 조직이 보여준 광복 이후의 모습에 아쉽습니다. 옛것으로 그시대의 고민만이 고민으로 생각하는 그런 평가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님의 역할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요? 동학 천도교인으로서, 또 연구자로서, 작가로서 콘텐츠 생산자로서 동학을 어떻게 재현하고 보여줄 수 있는지 고민해오신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우선 어린이날, 삼일절 등 중요한 날에는 그 역할을 하고 있죠. 또 라디오가 7개니까 반복되는 이야기를 서너개는 할 수 있더라고요.그 과정 속에서 남들이 몰랐던 이야기를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그들의 고민과 노력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역할로 설정하고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제 일 자체가 어떤 것들에 대한 규정이 아닌 역사 유적과 사건을 다 살펴봐야 하니 눈에 띄는 것이있습니다. 불교의 인프라와 개신교의 네트워크나 기념의 방식, 카톨릭의 경우도 그렇고요. 그들을 비판하는 것보다도 정체성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 동학과 천도교는 어떻게 정체성을 보고 미래를 바라보고 우리의 역할을 이야기할 것인지. 삼일운동 당시 천도교가 다른 교단을 압도해서 도와주고 앞장섰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 개신교가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애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하죠. 미국으로 교포들을 대한 외국인회로 묶어냈던 것도 기독교예요. 그런 면에서는 그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가 보여준 힘. 때에 따라 굴복하기도 하고 민족보다 종교를 먼저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키워낸 인재들, 그 배경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겠죠. 동학은 거기서 구체적 답을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민을 현재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충분히 가치있고 그 가치의 현재의 모습을 어필할 수 있는 모습이 있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다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 속에 등장했던 엄청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신교가 아무리 훌륭해도 외국의 자산입니다. 스코필드 박사가 아무리 훌륭해도 캐나다사람이잖아요. 그들이 이식돼서 헌재 큰 대한민국이된 거예요. 개신교, 사회주의, 카톨릭 이들이 더해서 커진 나라인데 우리는 인정하고 강조하고 그렇게 그 줄기 속에서 동학이 가진 의미를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사 작가로서 여행지나 답사지를 추천해주신다면 어떤 곳이 있을까요? 독자분들이 서울에 있는 개신교나 카톨릭의 근대 유적지를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요소중 하나였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하는 방법을 통해 메시지를 얻을 수도,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강우규 열사가 폭탄을 던진 서울역에서 넘어가면 약현성당, 또 다음 공간은 서소문성지 등 성당이 있던 자리는 다 성지이지 않습니까. 전주를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박해가 있던 곳이 전동성당이었고 풍남문을 열어젖히고 집강소를 설치했던 1894년의 동학,또 그곳을 중심으로 했던, 경기전을 바탕으로 했던 전주 부락, 그런 연결고리를 살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에서는 다양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오히려 일반화된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동학 천도교를 비롯한 우리 역사를 바라보던 시선, 복잡한 시선들을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광일 여행작가, 여행이야기 대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역사 기행 프로그램 운영과 역사 대중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은 <우리 아이 첫 경주여행(공저)>를 비롯해 <아빠의 답사 혁명>과 같은 어린이, 청소년 답사 안내서와 한국사 대중서인 <교과서 밖으로 나온 한국사(공저)(전3권>를 썼다 최근 쓴 책으로는 임시정부 27년의 여정을 살펴보는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공저)>이 있다. 이와 함께 역사 기행 전문기획사인 ㈜여행이야기 대표로 활동하며 소규모 답사 프로그램인 ‘동갑내기 사회탐구’를 통해 현장체험학습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 기업 및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 국제교류재단,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등 여러 기관의 역사,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였다. 최근에는 KBS의 <여유만만> <쌤과 함께>, 그리고 EBS의 <문화유산 코리아>, jtbc의 <세계다크투어> 등 방송에 출연하였으며 SBS의 <허지웅쇼>, KBS의 <김태훈의 프리웨이> 등 여러 라디오 방송에서 활동하고 있다. 글 : 신채원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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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박연환 경주 교구장 모친상◀경주교구 박연환 교구장의 모친 故 이화자 님께서 환원하셨기에 아래와 같이 부고를 전해드립니다. 상주인 장남 박연환님은 경주교구장, 3녀 박내천님은 경주교구 여성회회장입니다. 2023년 8월 18일 환원 2023년 8월 20일 발인 동국대학교경주병원장례식장 특실2호 장지 : 하늘마루-선산 상주 박연환,박정완,권정애,임미숙,박경천,박순천,박내천,최정도,권문태,박기태,박은별,박수림,박수빈,최인석,최혁진,서혜진,서예진,권혁찬,권하연 고인의 성령출세를 심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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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암 전희식의 책 '똥꽃' 개정판 출간책소개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들의 실재 이야기. 늙고 병든 노인이 관리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로 내려가 부모의 존엄과 나아가 자신의 존재 근원을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를 따뜻하고 아름답게 풀어냈다.도시에서는 방안에 있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어, 늙고 병들어 이젠 쓸모 없어졌나 자책해오던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기자 적극적이 되고 밝아진다. 치매를 86년을 살아오신 어머니 삶의 고단함이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여 치매가 병이 아닌 치유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출판사 서평 귀도 멀고 똥오줌도 잘 못 가리는 어머니가 계실 곳은 결코 서울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더구나 사시사철 두 평 남짓한 방에서만 지내면서 밥도 받아먹고 똥오줌도 방에서 해결하는 것은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편할지 모르지만 여든여섯 노쇠한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가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나는 어머니에게 파란 하늘도 보여 드리고 바위와 나무, 비나 눈, 구름도 보여 드리려고 한다. 어머니가 철따라 피고 지는 꽃도 보시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계곡의 바람결도 느끼시고 크고 작은 산새들이 처마 밑까지 와서 노닥거리는 것도 보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30-31쪽)“아이가! 저기 눈 아이가? 눈이 다 내리네. 이기 몇 년 마이고.”눈 내리는 풍경을 보고 놀라는 어머니 모습이 더 놀라웠던 나는 신문지에 눈을 받아 방으로 들어왔다.“눈 맞아요. 이기 눈인기라요.”그러면서 나는 어머니 손에 눈을 털어 놓았다.“그래, 눈 맞네. 세상 참 좋아졌네. 눈 내리는 것도 다 볼 수 있고.”눈 내리는 풍경을 보는 것이 세상 좋아진 것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여러 해를 햇볕 한 줄기 들어오지 않고 잿빛 하늘을 손바닥만 한 창문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도시의 방안에서 형광등 불빛만 의지해 사셨던 생각을 하면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39-40쪽)어머니를 모시기로 작정하고 시도한 일 가운데 하나가 기저귀 없이 생활하는 것이었다. 기저귀는 3년 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기로 작정한 결정적인 계기기도 했다. 3년 전에 나는 늘 어머니에게 기저귀를 채워 놓는 것은 ‘똥오줌도 못 가리는 애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공인하는 과정이라고 여겼다. 노출되지 않은 개인의 수치와는 달리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 인정되어 버리면 심리 상태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두 달 이상 거치면서 어머니의 배뇨감각이 회복된 것은 물론 당신 스스로 안방 뒷문을 열고 나가서 내가 특별히 고안해 만든 어머니 전용 뒷간에서 똥오줌을 보실 수 있게 되었다. (121쪽)사고로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신 어머니는 예전 같으면 늘 방안에 앉아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괴로우셨겠지만 시골집에 오셔서는 그럴 시간이 없다. 전희식 씨가 그럴 틈을 만들지 않는다.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끌고 마당에 나와 텃밭에 물을 주고, 필사적으로 부엌 문턱을 넘어 아궁이 불을 지피기도 하신다. 어릴 적 먹던 가죽자반을 만들고 20년 만에 수제비를 만들어 자식 밥상을 차려주셨다. 늙고 병든 노인들이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한없이 위축되지만, 전희식 씨는 어머니가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해드린다. 어머니는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일을 하면서 예전의 기억들이 서서히 재생되기 시작한다.전희식 씨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신 어머니에게 그만의 방법으로 현실감각을 되찾아드린다. 일부러 양말에 구멍을 내 어머니에게 슬쩍 내밀면 어머니의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바느질에 집중하신다. 전희식 씨는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할 때 끼어드는 것이 망상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현대의학이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백기를 들어버린 치매는 이 책에서 ‘포기한 삶의 틈새로 끼어든 이물질’일 뿐이다. 86년을 살아오신 어머니 삶의 고단함이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늘의 이치에 귀 기울일 때, 치매는 병이 아니라 치유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전희식 씨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3년 여 동안 수많은 관련 책과 자료, 노인병원에서 자원 활동을 하면서 얻게 된 것이다. 귀농을 통해 생태적인 삶에 눈을 뜨고 모심과 돌봄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현대의학은 치매의 원인을 알 수 없다고 선언했다. 완치는 없고 진행을 완화시키는 약이 있을 뿐이라고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대뇌피질 속에 쌓이는 특수한 단백질인 ‘베타아밀로이드’가 뇌세포를 파괴하는 데 따른 기억 손실과 분별력 상실이 치매 증상이라는 진단은 일찍이 했지만 손상된 세포를 보호하는 작용을 하는 베타아밀로이드가 왜 과잉되어 도리어 세포를 공격하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나는 나름대로의 치매 원인도 알고 처방도 알고 돌보는 방법도 알았다.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는 것,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며 거기서 삶의 이치와 하늘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83쪽)전희식 씨는 책읽기를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동화나 옛이야기를 찾아서 읽어 드리다 정작 노인들이 읽을 만한 책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은 것들’이 봐야 할 효도를 주제로 한 이야기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동화도 어머니에게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전희식 씨는 직접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노화老話’이다. 노인을 소재로 하거나 노인문제를 다룬 책들은 있지만, 노인이 읽을 만한 이야깃감으로 만들어진 책은 거의 드문 현실에서 ‘노인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된 것이다. 노화는 어머니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한 편 두 편 노화가 만들어지면서 어머니의 기억들이 또렷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내가 동화를 쓰기로 했다. 아니 노화를 쓰기로 했다. ‘젊은 것들’보는 책이 아니라 ‘늙으신 분들’ 보는 책 말이다. 적당한 동화책 이야기를 뼈대로 삼아 어머니의 옛 생활과 연결시키고 어머니의 한결같은 소원인 ‘벌떡 일어나 남들처럼 돌아댕기는’ 이야기를 곁들여 만들었다. 옷에 똥오줌 싸는 할머니를 등장시켜 그것이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이야기도 만들었다. 출산휴가나 육아휴가가 있듯이 치매부모 돌보는 ‘효도휴가’라는 제도도 만들어 이야기 속에 넣었다. (182쪽)어머니를 모시면서 전희식 씨 가슴에 가장 깊게 자리 잡은 것은 바로 ‘존엄’이다. 늙고 병든 노인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우리 사회가 노인에게 저지르는 무례와 무시는 바로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전희식 씨는 어머니에게 절대 반말을 쓰지 않는다. 집을 나가고 들어올 때는 언제나 큰절로 인사를 드리고 무슨 일이든 어머니에게 먼저 알리고 한다.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결코 흘려듣는 법이 없다. 이 책이 나올 수 있게 된 것도 어머니의 말씀에 온전히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되살려지는 기억들을 통해 오히려 전희식 씨가 새로 배우고 깨닫는 것이 더 많았다. 자연치유는 어머니와 더불어 어머니를 모신 아들에게도 가닿은 것이다. 일하러 나갔다 온 사이 혼자 뒷간에 못 가시고 방에 누신 어머니 똥이 꽃으로 보이는 놀라운 치유의 힘.똥꽃감자 놓던 뒷밭 언덕에연분홍 진달래 피었더니방안에는묵은 된장 같은 똥꽃이 활짝 피었네.어머니 옮겨 다니신 걸음마다검노란 똥자국들.어머니 신산했던 세월이방바닥 여기저기이불 두 채에고스란히 담겼네.어릴 적 내 봄날은보리밭 밀밭에서구릿한 수황냄새로 풍겨났지.어머니 창창하시던 그 시절 그때처럼고색창연한 봄날이 방안에 가득 찼네.진달래꽃몇 잎 따다깔아 놓아야지. (43쪽)이 책의 모든 소재들을 제공하고 이야기 줄기를 엮은 어머니가 공동저자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치매라는 병을 넘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 전희식 씨의 어머니를 넘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존엄을 깨닫게 하는 『똥꽃』. 자식이 없는 삶은 가능하지만 부모가 없는 삶은 없기에 이 책은 누구 가슴에나 깊숙이 다가갈 것이다. 한편 이 책의 저자 목암 전희식은 저서 묶음 판매를 직접 진행하고 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저자의 책 판매 글과 할인받아 구매할 수 있다. <똥꽃> 개정판 외 졸저를 소개합니다. (google.com)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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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 임진택의 시대정신임진택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은 지난 10월 28일 저녁 정읍의 전봉준 고택에서 창작 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의 공개 시연을 시작으로 순회공연을 열었다. 그동안 동학에 관련된 많은 학술 세미나, 예술 공연 등이 있었지만 이 공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전통예술의 고장이자 동학혁명발상지 정읍에서 현대 문화운동의 거목인 창본 작가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리꾼이 함께 자리하며 판을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창작판소리 창본 집필의 주인공은 바로 한국 마당극의 창시자 임진택 이사장. 작창과 완창을 도울 이는 전주 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 송재영 명창, 국립민속국악원장 왕기석 명창이다. 그들은 3시간 동안 동학에 대한 이해와 진실을 소개하며 소리판으로 이끌었다. 이 공연은 누구나 평등 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사상과 더불어 급변하고 있는 국제정세 속에 한반도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정읍 전봉준 생가에서의 시연회를 시작으로 11월 10일 전주 한국전통문화전당, 19일 서울 돈화문국악당에서도 이어졌다. 동학혁명은 1894년 신분제 중심의 오래된 체제를 개혁하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일어난 혁명이다. 또한, 일본 국권 침탈에 맞서 싸운 민족의 봉기로써 큰 의미도 있으며 애국이라는 민족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과 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에도 정치적 혼란으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고 왜곡, 축소되어 왔다. 그러던 중 1960년 4.19혁명 이후 동학혁명의 재조명이 시작되었고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과거사 정리를 위한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이 추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프롤로그는 수운 최제우의 탄생 <아니리> 천하가 한번 크게 변할 양이면 천지간에 괴이한 변이 잇달아 나타나는 법. 허나 난법 뒤에 정법이 나온다 했으니 어찌 진인이 아니 날소냐? 전라도는 전주요 경상도는 경주인디, 경주 근도리 어느 곳에 최제우라는 이가 사는디, 그 이가 태어날제 구미산이 사흘을 크게 울어 댄즉, 어진 사람들은 이 집에 신인이 났다 하고, 모진 사람들은 역적이 났다고 했다더라. 때는 조선조 말엽이라. 왕권은 무능하고 세도가 판을 칠제, 벼슬아치 양반들은 토색질로 날을 새고 가련한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거날, 개같은 왜적놈들 호시탐탐 침노하고 맹수같은 양귀자들 때도 없이 출몰하니 어허 우리 중생, 목숨 보명을 어찌할거나! 최제우가 중생 구할 도를 찾아 천하를 주유했으나 온갖 처세가 다 낭패라. 울산 처가에 얹혀 남의 땅 부쳐먹으며 근근히 지낼적에 - 임진택 창본, ‘녹두장군 전봉준’ 중에서 임진택 경기아트센터이사장은 인터뷰를 통해 창극 녹두장군 전봉준은 동학의 역사를 되새기고 부패한 권력에 맞선 동학농민군들의 처절한 심정과 굳건한 결의를 보여주고자 한다고 밝혔다. 또 전봉준에 대한 작품이지만 수운 최제우 선생과 해월 최시형 선생의 탄생과 일대기를 먼저 보여줌으로써 동학의 사상적 배경이 시작된 역사를 먼저 짚고 싶었다고 말한다. 선생은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제’ 때 ‘고부봉기 역사 맞이굿’을 기획하면서 정읍과 인연을 맺고 동학농민혁명을 판소리로 엮어냈다. 김제 출신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온 그는 대학 시절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고 이후 판소리에 빠져 소리꾼과 연출자의 길을 걸어왔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공연에서는 주제별로 국내 최고의 기량을 갖춘 명창 3인이 무대에 올랐다. 1부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이자 판소리 ‘수궁가’ 예능 보유자인 왕기석 명창이 ‘탐학을 금(禁)해주시오’를 주제로 교조 신원과 고부 봉기의 내용을, 2부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이자 판소리 ‘심청가’ 예능 보유자인 송재영 명창이 맡아 ‘고통받는 민중은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를 주제로 무장기포와 황토현 전승, 전주성 입성을 보여주었다. 3부는 오랜 기간 동학에 천착하며 이번 작품의 창본을 완성한 광대 임진택이 ‘갑오세 가보세’를 주제로 집강소 설치와 우금치 전투 등의 내용을 노래하였다. 전봉준 누구인가,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횃불처럼 우뚝 서서 피투성이로 싸운 사람 그 어떤 고통도 두려워 하지 않은 사람 누구보다도 그 시대를 온몸으로 살은 사람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 합치더니 운이 다 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의(義)를 바로 함에 무슨 허물 있으랴만 나라 위한 애국단심(愛國丹心) 그 누구가 알아줄꼬. - 임진택 창본, ‘녹두장군 전봉준’ 중에서 광대 임진택 다시 동학으로 판을 열다 역사와 함께, 시대를 노래한 광대 임진택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이 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인 1994년 최초로 선보였던 ‘녹두장군 전봉준’은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큰 의미가 있다. 초연 당시에도 전봉준의 일대기를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 19세기말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 아래 봉건제도의 수탈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섰던 동학농민운동의 역사를 판소리로 엮어낸 바 있는 이 작품은 그때와 지금 어떻게 다를까. 작품은 전봉준의 탄생이 아닌 수운 최제우의 탄생과 무능한 왕권과 세도가 판을 치는 세상, 가련한 백성을 구하고자 했던 수운 최제우의 주유천하, 그리고 깨달음으로 문을 연다.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수운 최제우의 깨달음과 도의 실천은 많은 민중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고 혹세무민의 죄로 수운 최제우의 순도(처형), 그리고 해월 최시형이 펼친 동학의 교세 확장은 혁명의 사상적 기반으로 굳건히 서게 된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때 등장하며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으로 이어진다. 수운 최제우의 탄생과 동학의 창도, 해월 최시형 선생이 수운 최제우 선생으로부터 도통을 전수 받아 2대 교주가 되어 도의 실천과 확장으로 동학혁명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과정, 죽창을 든 민중들의 봉기, 그리고 전봉준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한편 이 작품의 1부와 2부, 3부는 왕기석, 송재영, 임진택 세 소리꾼이 각각 맡아서 서사를 끌고 가는 것이 특징이며 여 운, 김정헌, 임옥상 등의 작가들의 걸개그림으로 무대를 구성한다. 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 임진택의 시대정신 “이 작품은 동학의 태동에서 시작해서 전봉준의 최후에서 끝납니다. 수운의 동학 창도에서 녹두 전봉준의 최후까지라고 볼 수 있죠.” 3시간에 가까운 작품 분량으로 동학의 역사를 한판의 판소리로 완성시켰다. 최근 시간은 짧고 화려한 형식으로 구성되는 공연의 풍조와는 다르다. 화려한 조명과 영상 등에 개의치 않고 정통 판소리 방식으로 공연을 열었다. 정통적인 판소리 공연의 형식을 고집했던 이유는 100여년 전에 있었던 이 긴 이야기를 관객에게 바쁜 마음이 아닌 시간을 충분히 내고 자기 침잠을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임진택 선생은 50년 가까이 판소리 창작자로, 마당극 연출가로 민중들과 함께 했다. 스물 다섯 살에 소리를 시작한 선생은 소리는 적어도 열다섯에 시작해야 하는데 스스로 늦게 시작했다고 말한다. 스물 다섯에 시작한 소리꾼, 광대인생은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며 더욱 특별했다. 그리고 앞서 걷는 길은 외로웠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뒤를 따르고 곁에서 함께 울고 웃었다. 함께 건너온 시절의 짙은 그늘이 주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의 작품은 언제나 이 사회에 주는 메시지가 있었다 “나는 옛날 판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 판소리가 한동안은 그 메시지를 주지 못하던 때가 있었어. 그때 나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 실제로 옛날 판소리는 거의 소멸 위기에 있었지.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판소리 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걱정해야 했어. 그러다가 문화재 제도가 생기고 문화재 보존 정책이 들어온 거지. 그 당시에 소리들은 현실을 이야기한다고 아무도 생각지 않았지. 그때 나는 옛날 판소리 그대로는 안 되고 판소리를 새롭게 만들어 져야 한다고 생각했지.” 시대의 스승들 박동실의 <열사가>를 처음 접했을 때, 선생은 의미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은 했으나 예술작품으로서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옛날 판소리에 비해 열사가는 너무 비분강개만 한다고 생각했어. 프로파간다로 민족과 애국을 외치는 게 예술은 아니기 때문에 좀 미흡하다고 느꼈어. 특히 판소리에는 비장과 골계가 있어야 하는데 골계는 없고 비장만 있다고 평가했어. 그런데 내가 창작판소리를 하는 사람이 된 거야.” 그땐 몰랐다. 당신 스스로 소리꾼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판으로 가서 새로운 세상을 한 번 만들어볼까, 외교관이 되려고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한 선생이었다. 대학시절 선생은 연출가로서 연극을 하며, 마당극이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과 양식을 시도하던 때였다. 무대 위에서, 5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선배도, 동료도, 후배도 늙어갔지만 언제나 시대의 어둠을 밝히던 사람들. 2000년을 맞이하며 창작판소리 열두 바탕을 새로 만들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안에 동학, 독립운동, 통일 문제를 담아내겠다고 결심하고, 다시 박동실 선생의 열사가를 다시 마주한 선생은 당시의 소감을 말한다. “엄청나더라고. 느낌이 달라졌어요. 이만큼 창작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그 당시 창작판소리에 박동실 명창이 얼마나 사설에 관여했는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있었다고는 해요. 이준, 안중근, 윤봉길, 그리고 유관순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만든 작품, 그게 열사가야. 처음엔 진부하고 예술 미학이 뭔지 모르는 분들이 만든 방식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창작을 해보니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어. 사설보다는 작창이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지.” 임진택 창작 판소리의 시작은 ‘지하형’의 작품으로 회상한다. 김지하의 담시 세 편, <오적>, <소리내력>, <똥바다>는 오늘날 임진택의 창작판소리가 탄생하게 된 커다란 물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김지하 시인의 시로 눈물 지새우지 않은 청년은 없었을 것이다. 이 사회의 어둠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읊으며 피워낸 가슴마다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을 키워냈을 것이다. 선생이 만든 창작판소리는 백범 김구, 안중근, 전태일, 다산 정약용, 장보고, 남한산성, 그리고 오월 광주의 윤상원까지 우리 역사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빛을 밝혔던 인물과 빛나던 순간들이었다. “그 이전에 김지하의 담시 세 편, 오적, 소리내력, 똥바다 이 세 편이내 창작판소리의 시작이야. 판소리계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 마당극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던 시절, 선생은 극장을 벗어나 더 큰 무대를 꿈꿨다. 사전에 단어가 없다는 건 그런 현상이나 실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호칭을 준 적이 없을 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극장이라는 게 생긴 지는 얼마 안 된다고, 우리나라엔 연극 자체가 없었다고 말하는 선생은 연극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연극은 허영된 사치가 아닌 자기 현실을 외치는 시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때는 창작극이 많았는데, 나는 생각했지. 창작극 가지고는 안된다고. 남의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 사람이 이 시대를 살아오면서 사회의식을 가지고 쓴 창작극이어야 한다고. 거기엔 사회의식을 담아 내고 있느냐, 한국 사람의 정서에 맞느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 무렵 대학에 탈춤반이 생기면서 탈춤이 처음 공연되는 걸 보게 된 선생은 거기서 ‘마당’을 만나게 된다. 선생이 하던 연극은 학교에서 허가를 내어주지 않았지만, 극장이 없으면 ‘마당’에서 공연을 하면 될 것 아닌가. 지금 왜 동학인가? “내가 아직 동학이 뭔지 모를 때 내가 태어난 고향과 어릴 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데, 그 이야길 좀 들려줄까?” 어린 시절 집 앞 큰 길가에서 버스 차장이었던 사촌 형이 진택아, 장터 구경가자 하고 차에 태워서는 데려간 적이 있다. 장터 구경 간다고 신이 나서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선생이 태어나 살던 곳은 김제군(지금은 김제시) 봉남면이었다. 대여섯살 때까지 거기 살았다. 김제읍에서 봉남을 지나 원평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그 버스는 하루에 두 번 운행을 했다. 그걸 타고 원평에 갔다.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며, 부조화를 느꼈다. 사람들이 전부 쪼그라져 있었다. “그때가 1955~6년쯤 되었으려나. 바로 몇 년 전, 6.25전쟁이 훑고 갔겠지. 나는 그 일그러진 얼굴들이 6.25의 상처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닌 거야. 동학난리의 기억이 아직 그들에게 남아 있는 거야. 동학에서 원평 땅이 굉장히 중요하지. 전봉준의 최초의 근거지가 원평이거든. 최근 나온 자료를 보니 원평 김개남과 같은 동네에 살았을 때 서당을 다녔는데 거기가 봉남이야. 봉남과 원평이 붙어 있거든. 그걸 알고 놀랐어.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 6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내 머릿속에 남아 있어. 동학의 상처가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남아 있었던 것처럼.” 선생은 어릴 때 빈 사당에서 만난 마치 동학군의 형상을 한 사내를 만난 이야기도 어느 마을의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이나 설화처럼 이야기했다. 동학을 모르는 땅은 어디에도 없건만, 선생이 태어난 자란 김제는 오죽할까 싶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는 동학을 모르고 지내다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친구 김민기를 통해 가슴에 동학의 불꽃을 지펴냈던 선생은, “김민기가 아침이슬 이후로 탄압을 받다가, 자기 고향인 익산으로 가서 농사를 짓고 살았어요. 그때가 30살 전후였지. 그 전에 김지하가 민청학련으로 감옥가기 전에 동학 이야길 꺼냈었지. ‘장일담’이라는 작품인데 동학 이야기야. 거기서 밥이 하늘이라고 하니까.” 이후 역사적인 작품 하나가 탄생한다. 1980년대에 김민기가 여는 무대,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이 작품은 1982년 제6회 대한민국연극제 참가작품으로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그 주된 이야기를 이루고 있으며 개항 때부터 갑오년까지의 고난의 움직임과 외세와의 역학관계가 군데군데 삽입되어 있다. 연극이 너무 무거워서 임진택 선생은 거기에 소리를 붙였다. 80년대 광주항쟁 직후, 무슨 공연에도 광주항쟁과 연결해서 가슴 아픈 작품을 할 때였다. 그 사이 동학농민혁명은 1994년 100주년을 맞이한다. 전라북도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1994년에 전주에서 100주년기념행사를 치렀다. “1994년에 동학이 완전히 일어났어. 그해에 한편으로는 고부 역사맞이굿을 하면서 전체 동학100주년 기념사업을 하면서 한편으로 1982년에 했던 전체로 판소리로 만들었는데 실패했지.” 다시 왜 전봉준인가, 왜 동학인가. 선생은 말한다. 동학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고 미래라고. 동학에 들어있는 사상을 다시 생각하자고. 동학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선생은 또 말한다. 귀천이 없는 평등이었다, 척양척왜의 자주였다, 그리고 동학은 궁극적으로 생명사상이다. 사람이 한울이라 하지 않는가. 선생이 걸으면 다 길이었다. 맨 앞에서 걸었다. 마른 풀들이 일어서서 길을 내어주었다. 길 잃은 새들은 선생이 가는 길을 따라 더 멀리 날아가기로 하였다. 글 신채원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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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철 개인전, 마음과 빛과 향기를 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