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11.22 17:08
TODAY : 포덕165년 2024.11.25 (월)
▪ 동학농민전쟁, 3·1운동, 관동대지진을 둘러싼 ‘일본인의 눈에 벗어난’ 한국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다
저자 와타나베 노부유키의 질문은 이렇다.
“한국과 일본은 왜 역사를 두고 다투는가?”
일본군 위안부와 독도 영유권 등의 역사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은 오랜 세월 갈등을 겪었다. 서로를 향해 혐한과 반일의 감정을 서슴지 않고 드러낸다. 왜 다투는 걸까?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역사 인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역사 전문 기자로서 40년간 일선에서 활동한 와타나베 노부유키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스스로 직접 사료를 찾아 나선다. “우선 해야 할 일은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모습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 아래 일본인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일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사실史實을 하나둘 찾아간다.
동학농민전쟁, 3·1운동, 관동대지진에 얽힌 숨겨진 역사와 그 진상을 밝혀내고, 그 자신도 몰랐던 역사에 관해 놀라며 그는 거듭해서 이렇게 묻는다.
“과연 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학계에도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까지 찾아내는 등 저자의 세밀하고 성실한 노력은 결국 결실을 거두었다. 이 책은 2021년에 일본의 퓰리처상이라는 불리는 ‘평화ㆍ협동 저널리스트 기금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 책의 시작은 ‘징용공(강제동원 노동자) 소송’을 둘러싼 한일 갈등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 탐색이지만, 그 원인을 찾아가면서 숱한 의문점과 마주한다. 그 대부분이 한국인들은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일본인들은 모르거나 모호하게 아는 사실들이다. ‘불법적인 한국병합’ ‘동학농민전쟁의 의병 진압’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빨치산과의 전쟁’ 등이 그것이다. 기자로서 또 일본인으로서 이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객관적이며 냉철하다. 이러한 입장과 자세는 어쩌면 한일 간의 역사 인식의 차를 좁히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를 정치의 도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냉정하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인 것 같다.”
▪ 일본인의 시야에서 벗어난 역사들
와타나베 노부유키가 한일 역사 인식의 차이로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징용공 소송에서 한국 대법원 판결의 골격이기도 한 ‘한국병합은 무효이자 불법’이라는 논리다. 이는 일본인으로서는 ‘헛소리’로 들릴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이태진 교수가 말한 병합을 위한 일본의 “분명히 계산된 지속적인 노력”이 무엇인지 사료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동학농민전쟁의 ‘의병’이란 존재와 마주한다. “일본군의 의병 토벌은 1911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간의 전투 횟수는 총 2,852회이며, 일본군은 1만 7,779명의 폭도를 살육했고, 일본군 전사자는 136명이었다.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1908년에는 1,451회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의병 1만 1,562명을 살육했다. 다시 말해, 1908년 한 해 동안 한반도 어딘가에서 매일 평균 4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30명 정도의 의병이 살해된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일본인은 얼마나 될까? 부끄럽지만 나는 몰랐다.” 그는 의병 토벌대로 참여한 한 일본군의 종군일지를 살피며 한반도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되살려낸다.
다음은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사건이다. 이 역시 많은 일본인이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다. 저자는 지진 재해 당시 소학교 아이들이 쓴 작문 등의 자료를 찾아 그 현장 상황을 생생히 복원한다. “많은 사람이 조선인을 다리 위에서 칼로 베거나 쇠몽둥이로 때리고 창으로 찔렀다. 결국에는 강물에 던져버렸다.” “한 사람이 쇠갈고리로 놈의 머리를 찍어 나룻배로 끌어당겼어요. 마치 목재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어요. (중략) 쇠갈고리 한 방으로 이미 죽은 놈을 다시 칼로 베고 죽창으로 찔렀어요.”
저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학농민전쟁과 관동대지진이라는 두 학살을 연결하는 고리를 찾아낸다. 그 가해자인 후비역 병사와 재향군인회 그리고 그들이 속한 자경단에 대해 당시 사회적인 상황과 연결하여 그 조직의 성격을 분석하고 이렇게 말한다. “지진이 덮쳐 불안과 공포의 혼란 속에서 유언비어가 흘러나왔다. 재향군인에게는 박진감 넘치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언비어를 믿었다. (중략) 경찰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 자경단이었다. 치안 공백 상태에서 ‘민중의 경찰’로서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는 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적을 찾는 일에 조금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살의에 차서 과거 한반도나 대륙에서 자행했던 만행을 일본 내에서 재현했다. 그것이 관동대지진 당시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의 기본적인 구도였던 게 아닐까?”
▪ 왜 일본인의 기억에 사라졌을까?
그렇다면 왜 이러한 역사는 일본인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일까? 저자는 개찬된 『청일전사』를 예로 들며, 정부와 군이 역사 “기록을 처분하거나 정사正史를 날조”했고, 그로 인해 동학농민전쟁과 3·1운동에서의 조선인들의 희생은 일본인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됐다고 말한다. 관동대지진의 기록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처분”되어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진 재해 직후 일본 정부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방침은 “정상참작을 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소요에 가담한 전원을 검거하지 않고 현저한 행위를 한 자로 검거 범위를 한정한다”고 발표한다. 그리하여 “모든 시와 마을 구석구석까지 폭동을 일으키고, 폭동을 일으킨 민중에 의한 살해가 있었던” 요코하마시에서 조선인을 살해한 행위로 기소된 사람은 ‘단 한 명’으로 기록된다.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너무 많은 민중이 가해자였다. 지역사회는 누가 가해자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모든 사람에게 죄를 추궁하면 엄청나게 큰 사건이 되는 것이었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유독 악질적인 범죄를 제외하고는 학살은 없던 일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부도 군도 경찰도 그리고 민중도 일본 사회가 하나가 되어 은폐하고 잊어버리려 했을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며, 책임을 묻지 않고 반성도 없이 애매하게 방치하면서 흐지부지하다가 그냥 잊히기를 기다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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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와타나베 노부유키(渡辺延志)는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이다. 1955년에 태어나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2018년까지 아시히신문사의 기자로 일하면서, 아오모리시 산나이마루야마(三内丸山) 유적 출현, 중국 시안 견당사 묘지 발견, 지바시 가소리패총加曽利貝塚 재평가 등 여러 특종을 보도하고 역사 자료 발굴에 힘썼다. 저서로 『허망의 삼국동맹(虚妄の三国同盟)』(2013), 『GHQ 특명 수사 파일(GHQ特命捜査ファイル)』(2018), 『가나가와의 기억(神奈川の記憶)』(2018),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関東大震災 「虐殺否定」の真相)』(2021), 『청일ㆍ러일 전쟁사의 진실(日清ㆍ日露戦史の真実)』(2022) 등이 있다. 이 책은 2021년에 일본의 퓰리처상으로 알려진 ‘평화ㆍ협동 저널리스트 기금상’ 대상을 수상했다.
▪번역자 이규수는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를 졸업했다.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전북대학교 고려인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수탈과 궁삼면 토지탈환운동』(2021), 『제국과 식민지 사이』(2018), 『한국과 일본, 상호 인식의 변용과 기억』(2014), 『제국 일본의 한국 인식, 그 왜곡의 역사』(2007), 『식민지 조선과 일본, 일본인』(2007) 등이 있고, 역서로는 『시무(時務)의 역사학자 강덕상』(2021), 『다이쇼 데모크라시』(2012), 『일본제국의회 시정방침 연설집』(2012),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2006).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200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