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11.22 17:08
TODAY : 포덕165년 2024.11.25 (월)
혁명가요, 종교개혁가이자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그는 옥중에서 받은 고문 등으로 100년 전 숨을 거두었다.
백범 김구가 해방 후 환국해서 처음으로 한 공식행사는 임정의 요인들과 함께 서울 우의동에 있는 손병희의 무덤을 찾아뵙고 귀국 보고를 드리는 것이었다. 동학혁명 당시 김구는 해주의 접주로 손병희의 부하였다.
서울지역의 의암 손병희 선생의 흔적을 따라가 보았다. 손병희 선생이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가고 민족의 지도자로서 대업을 펼쳐 나갔던 흔적을 만나본다.
의암 손병희 선생 서울 유적지
01. 광화문 복합상소 터 :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57
02. 복합상소 봉도 도소 : 현, 장충체육관 부근 (남소동 최창한 집)
03. 천도교중앙대교당 + 천도교소년회 사무소 터 +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 개벽사 터
: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57 (경운동 88)
04. 송현동 천도교 중앙총부 터 :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49 (現, 덕성여중)
05. 상춘원 터 : 서울 종로구 숭인동 72
06. 봉황각 + 의창수도원 :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길 107-12 (우이동 254)
07. 의암 손병희 묘소 :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길 107-12 (우이동 254)
08. 보성사 터 : 서울 종로구 수송동 80-7 (現, 수송공원 內 표지석 설치)
09. 태화관 터 :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9 (現, 태화빌딩)
10. 서대문형무소 :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51(현저동 101)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11. 서대문 형무소 옥바라지 골목 : 서울 종로구 통일로 230(무악동 89)
12. 취운정 :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153 (現, 감사원)
13. 가회동 의암성사 집터 : 서울 종로구 북촌로 39 (가회동 170-4)
14. 탑골공원 의암 손병희 동상 : 서울 종로구 종로 99(종로2가 38-1)
15. 고려대학교 의암 손병희 흉상 : 서울 성북 안암동5가 1-6 (문과대학)
16. 근현대사기념관 앞 의암 손병희 흉상 : 서울 강북구 4.19로 114 (수유동 산 73-23)
17. 의암 손병희 안내판 : 서울 강북구 번1동 418-9 (수유리 먹자골목 근처)
18. 삼각산 삼성암 : 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23길 235 (수유동 산 164-5)
→ 의암성사 49일 수련 장소 (창건사 64쪽)
19.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 보성학원을 인수, 경영
20. 보문관 사옥 (만세보) : 서울 남서회동(南署會洞) 85동 4호(현재 中區 會賢洞)
21. 다동 의암성사 댁과 중앙총부 : 자택 - 南署 廣通坊 上茶洞 2통 10호
→ 1906년 2월 16일 上茶洞 홍문석골(紅門洞) 천도교중앙총부 현판
22. 중부 관인방 대사동 의암성사 댁 1906년 9월 25일 中署 寺洞 19통 8호로 이전
23. 면주동 천도교중앙총부 터, 춘암상사 대도주 선수 터
24. 중앙대교당 및 중앙총부 (3번. 일부 설명)
01. 광화문 복합상소 터
소재지)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57
02. 복합상소 봉도 도소
소재지) 현, 장충체육관 부근 (남소동 최창한 집)
광화문 광장은 동학혁명 한 해 전 동학도들이 동학의 합법화를 주장하며 평화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광화문에서 처음으로 촛불을 든 것은 동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학의 세력이 늘어나는 만큼 동학에 대한 조정의 탄압이 거세지자 동학 지도부는 서울에 올라가 평화적 시위(복합상소)를 통해 동학의 합법화를 요구한다.
박광호, 손병희 등 40여 명의 동학도는 1893년 2월, 과거시험을 치르는 선비들로 꾸미고 상경해 지금의 장충단공원 근처 접주 최창한의 집에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광화문 앞에서 3일 낮밤을 슬프게 절규하며 동학의 합법화를 상소한다. 동학도의 광화문 시위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동학의 명성을 조선 팔도에 알리는 효과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동학은 더욱 확산됐다.
1894년 동학교도와 농민이 봉기하자 청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난다. 일본 세력의 확장에 위기감을 느낀 삼국(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조선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자 일본은 1895년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1897년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순국한 군인을 기리기 위해 1900년 최초의 현충원인 장충단을 건립한다.
03. 천도교중앙대교당 + 천도교소년회 사무소 터 + 세계어린이 운동 발상지 + 개벽사 터
소재지)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57 (경운동 88)
1921년 경운동에 천도교중앙대교당과 본관의 건축이 완료되어, 송현동에 있던 중앙총부를 비롯하여 교회월보사, 청년회, 개벽사 등이 이전을 하였다. 이곳에서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했고, 1922년 어린이날을 제정, 선포하고, 1923년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첫 어린이날 행사를 개최하였다.
1918년 12월 1일 경운동에서 윤치소 소유의 대지를 2만 원에 매입하여 중앙대교당 개기식(開基式)을 거행하였다. 원래 대교당 건축계획은 1920년 4월에 낙성할 계획이었으나,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공사가 지체되었다가 1920년 2월에서야 겨우 공사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대교당과 총부 본관 건축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는데 특히 3·1독립운동으로 의암 손병희 선생을 비롯해 총부 간부들 대부분이 투옥되어 교회가 마비된 상황에서 공사를 했기 때문이다. 난관을 극복하고 대교당과 총부 본관의 건축은 1920년 12월에 준공되었고, 1921년 2월 28일에는 종로 송현동(現, 덕성여중)에 있던 중앙총부를 비롯한 천도교회월보사, 천도교청년회, 개벽사 등이 신축 총부 본관 건물로 이전하였다.
의암 손병희 성사는 대교당 건축을 염원하였다. 안타깝게도 생전에 이곳에 들르지 못하고 사후인 1922년 6월 5일 영결식을 대교당에서 거행했다.
붉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이루어진 지상 2층, 중앙 탑부 4층의 구조로 외형이 견고하고 이색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건물은 연 면적 280.68평으로 1층은 212평, 2층 45.6평, 3층 14.44평, 4층 7.84평 규모이며, 정면 좌우대칭으로 뒷면에 강당을 연결한 T자형이다. 건물 내외부에 한민족을 상징하는 박달나무 꽃과 무궁화 등을 조각하였다. 건축 당시 천도교중앙대교당은 당시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서울 3대 건축물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대교당에서는 시일식이나 교회 행사 외에도 민족운동 단체들의 수많은 집회공간으로서 수난의 근대를 엮어가는 산실이며, 독립운동의 공간이었다.
대교당 건립은 교인들의 특별성금으로 모금하였는데 3·1독립운동이 추진되자 의암 손병희 선생은 성금의 절반 이상을 독립선언서 인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및 해외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1920년대 ‘개벽’으로 대표되는 언론출판운동, 방정환의 어린이운동, 청년·여성운동 등이 전개되었고, 1926년의 6·10만세운동, 1927년의 신간회운동, 1938년의 무인멸왜기도운동 등이 있다. 1978년 12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
04. 송현동 천도교 중앙총부 터
소재지)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49 (現, 덕성여중)
1909년 7월 29일 京城 北部 大安洞 40통 4호 대지 586평을 2,500원에 매입하여 이곳에 2층 양옥건물을 지어 1910년 9월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 대안동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송현동(松峴洞) 34번지로 지명 변경(現, 덕성여중 자리) 이곳에서 소파 방정환과 의암 손병희의 셋째딸 손용화와 신식 결혼식을 하였다.
“1917년 4월 8일 송현동의 천도교중앙총부 성화실(현,덕성여중)에서 의암성사의 탄신축하식을 거행한 후 12시경부터 이종린(당시 30대)의 주례로 방정환(19세)과 손용화(17세)의 결혼식을 경향에서 수천여 명의 교인이 참석하고, 1천여 명이 부르는 찬가 속에서 거행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처음 있는 파천황(破天荒)의 혼인이었다.”
05. 상춘원 터
소재지) 서울 종로구 숭인동 72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2년 5월 19일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06. 봉황각 + 의창수도원
소재지)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길 107-12 (우이동 254)
봉황각鳳凰閣, 독립의 뜻이 모여진 곳
천도교 3세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은 1911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우이동(현주소: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에 2만 7900여 평의 땅을 800원(현재 가치 약 20억 : 쌀값으로 환산)에 매입하도록 천도교 간부에게 지시했다.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 지도자들을 종교 수련을 통해 보국안민(報國安民)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 회복의 기틀을 마련할 목적으로 삼각산(만경대, 백운대, 인수봉) 아래 봉황각(鳳凰閣)을 세웠다.
1912년에 봉황각과 내실, 부속 건물을 지었고, 다음 해에 12칸짜리 수련 도장을 추가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실내에는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방과 누마루를 들였다. 봉황각은 한옥 목조 건물로 당시 민간과 궁궐 부속 건물의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봉황각에서 3·1혁명을 구상했으며, 1912년부터 1914년까지 교역자 481명(기록에는 483명 2명은 중복 기재)을 대상으로 49일씩 7회에 걸쳐 연성 수련을 시행했다.
이들은 수련을 마치고 전국 각지로 돌아가 3·1혁명 당시 지역의 지도자로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해서 배포했고, 앞장서 독립 만세 소리가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지도록 중요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손병희 선생께서는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 되자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셨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봉황각을 건립한 것이다. 3·1혁명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봉황각에서 배출됐다”
봉황은 천도교 교조 최제우가 남긴 시문에 자주 나오는 낱말을 딴 것이다.
‘봉황이 깃들어 사는 집’이란 뜻의 봉황각은 봉황 같은 큰 인물이 나오기를 바라는 의암의 기대와 희망의 이름이다. 걸려 있는 현판은 오세창이 썼는데 ‘봉鳳’은 당나라 명필 안진경의 서체를, ‘황凰’ 자는 당나라 명필 회소의 서체를. ‘각閣’ 자는 송나라 명필 미불의 서체를 본떴다. 봉황각 뒤에는 봉황각과 같이 지었다는 살림채가 있으며 담으로 구분돼 있다. 건립 당시 12동의 건물이 더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봉황각을 포함한 건물 숫자가 13인 것은 천도교 ‘13자 주문’과 통한다.
봉황각은 독립운동의 요람지로 보존하기 위해 1969년 9월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봉황각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의암 손병희 선생 묘가 있다.
07. 의암 손병희 묘소
소재지)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길 107-12 (우이동 254)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0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선생의 나이 62세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각계에서 애도를 했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는 “先生(선생)은 民衆的(민중적) 一大偉人(일대위인)”이라고 하였다.
“조선 사천년사를 통관하면 그 간에 영웅호걸이 불무하였으나 흔히는 군주중심이 아니면 귀족을 배경으로 하여 그 업을 이루었으며 그名(명)을 成(성)하였소. 그러나 선생에게 至(지)하여는 민중 간에 生(생)하야 민중적으로 활동하고 민중적으로 대업을 成(성)하려하는 始終一貫(시종일관)한 주의(主義)는 선생 일대의 위업(偉業)이외다. 이것이 조선이 장차 민중문화를 건설하려는 劈頭(벽두)의 위인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선생의 모든 경력이 민중적이 됨으로 그 出處(출처) 進退(진퇴)에 정의(正義) 인도적 정신이 橫溢(횡일)한 것이 朝鮮偉人史上(조선위인사상)에 一光彩(일광채)를 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천도교 ‘의암성사환원호’)
선생의 유해는 삼각산 동쪽 우이동 언덕에 안장하였고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는 손병희 선생의 유해가 안장된 서울 수유리 묘역을 2021년 1월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했다. 손병희 선생 묘역의 노후화된 진입로 돌계단을 나무계단으로 시공하는 등 정비 공사를 마무리하여 방문객의 편의와 안전을 도모할 예정이다.
08. 보성사 터
소재지) 서울 종로구 수송동 80-7 (現, 수송공원 內 표지석 설치)
보성사 인쇄소에서 독립선언서 인쇄
독립선언서 원고는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新文館) 인쇄소에서 조판한 후 천도교의 보성사 인쇄소로 넘겨졌다.
보성사 인쇄소는 2월 20일부터 사장 이종일(李鍾一), 총무 장효근(張孝根), 감독 김홍규(金弘奎), 직공 신영구와 최남선 등 다섯 사람이 극비리에 밤에만 인쇄하여 25일까지 2만 5천매를 인쇄하고, 거리가 먼 천도교의 지방 교구에는 우선적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의암성사와 협의하여 27일 밤에 1만 매를 더 인쇄했다(이종일은 경찰신문에서 27일에 독립선언서 2만 1천 매만 인쇄했다고 거짓 진술했다. : ‘이종일 비망록’ 참조).
그런데 27일 밤에 비밀리에 인쇄할 때 종로경찰서의 악명높은 한인(韓人) 고등계형사 신승희(申勝熙)가 근처를 지나다가 밤중에 창문까지 굳게 닫힌 인쇄소에서 인쇄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들이 닥쳤다. 사태를 알아차린 그에게 이종일 사장은 『이것만은 막지 못합니다. 하루만 봐주시오. 의암 선생님한테 갑시다』하고 애원했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는 『당신이 갔다 오시오』라고 하였다. 이종일은 단숨에 의암성사에게 달려가 위급을 고하자 의암성사는 선뜻 5천원 뭉치를 주면서 가져다주라고 하였다.
거금을 받아쥔 신승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사라졌다. 다행히 위기를 넘긴 이종일은 인쇄를 마친 후 이병헌(李炳憲) · 신숙(申肅) · 인종익(印鍾益)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운반케 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리어카에 싣고 재동(齋洞)파출소 앞을 지나갈 때 검문을 당했으나 마침 정전(停電)으로 가로등이 꺼져 있어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종일은 당시 신축 중인 경운동 대교당 마당 구석에 있는 창고 같은 집에 임시 기거하고 있었는데 독립선언서를 이곳으로 옮겨 비밀리에 보관하였다.
한편 고등계형사인 신승희는 비밀이 탄로되어 5월에 헌병대에 체포되자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도 일말의 민족적인 양심이 있었는지 결정적인 순간에 비밀을 누설치 않음으로써 다행히 3·1혁명은 성사될 수 있었다.
09. 태화관 터
소재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9 (現, 태화빌딩)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요릿집으로 명월관(明月館)의 분점격이었다.
명월관은 한말에 궁내부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으면서 어선(御膳)과 향연을 맡아 궁중요리를 하던 안순환(安淳煥)이 1909년에 지은 요릿집이다.
명월관은 개점 초기부터 대한제국의 고관과 친일파 인물들이 출입하였으며, 후기에는 문인·언론인들과 국외에서 잠입한 애국지사들의 밀담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8년 명월관이 소실되자 안순환은 순화궁(順和宮: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 194)에 명월관의 분점격인 태화관(太華館)을 차렸다가 뒤에 태화관(泰和館)으로 개명하였다.
이곳은 3·1독립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하연을 베푼 곳으로 유명하다. 민족의 독립만세운동계획에 따른 준비를 1919년 2월 28일까지 완료한 민족대표 33인 중 29인(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은 태화관에 모였는데,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손병희(孫秉熙)는 최린(崔麟)으로 하여금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게 하여 “민족대표 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였다.
이에 일본경찰대 80여명이 곧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이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韓龍雲)의 식사를 듣고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일본경찰에 의연하게 연행되었다.
이와 함께 파고다공원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독립의 함성은 전국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장소로, 인사동에 있던 요릿집인 명월관(明月館)의 별관인데, 남감리교회 재단에 인수되면서 헐려 현재는 12층의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출처: 태화관 [泰和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선생은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회람하게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쳤다.
그리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손병희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0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선생의 나이 62세였다.
10. 서대문형무소
소재지)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51(현저동 101)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의암 손병희 선생은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인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 지도자이며 천도교 측의 대표로 3·1혁명을 주도하였다.
선생은 이 때문에 일본 경찰에 자진 검거·구금되었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2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선생의 나이 62세였다.
11. 서대문 형무소 옥바라지 골목
소재지) 서울 종로구 통일로 230(무악동 89) (現,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를 옥바라지했던 가족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를 기억하는 작은 전시공간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맞은 편(독립문역 3번 출구 앞)에 2019년 12월 20일 문을 열었다. 가족과 주고받았던 옥중 편지와 옥바라지 일화, 과거 서대문형무소 주변 동네였던 무악재 골목의 옛 풍경 등을 통해 삼천리 강토 전체가 감옥이었던 일제강점기 ‘옥바라지’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간이다. 독립투사들이 혹독한 수감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자 독립운동의 조력자였지만 독립투사 뒤에 가려졌던 가족들의 삶을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재조명한다고 배경을 밝혔다.
특히, 이 공간은 과거 옥바라지 골목으로 불렸던 무악2구역 재개발사업 과정에서 조합과 주민 등 이해관계자 간 소통과 양보로 조성한 공간이어서 의미를 더한다. '16년 당시 골목 보존을 놓고 갈등이 빚어지면서 사업이 중단됐고, 이후 서울시가 개입해 수개월 간 논의와 대화를 이어간 끝에 독립운동과 옥바라지와 관련한 역사를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로 합의를 이뤘다.
재개발 사업에서 주민 간 소통과 합의를 통해 마을의 역사적인 이야기와 무형적 가치를 흔적으로 남긴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향후 이런 노력을 ‘서울역사 흔적 지키기’라는 이름으로 이어나간다는 계획이다.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은 독립문역 3번출구 앞에 소담한 한옥 건물로 조성됐다. 연면적 약 78㎡에 2개 전시공간(전시실 A동, 전시실 B동)으로 구성된다.
들어가자마자 만나는 ‘전시실 A동’은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삶과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공간이 갖는 의미와 면회와 관련된 일화, 옥중편지와 옥바라지를 했던 가족들의 삶과 마음을 담아 작업한 바느질 콜렉티브 작품 등이 전시된다. 하늘에서 본 무악재&가족들의 옥바라지, 가족과의 면회, 독립운동가의 편지, 풍향계로 구성되었다. 전시실 B동은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무악재 골목의 풍경을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을 통해 당시 모습과 무악재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흔적을 되새겨 보는 공간이다. 초가집의 작은 셋방, 옥바라지 골목의 모습, 무악재의 기억과 흔적 이밖에도 억압받던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심정을 표현한 작품 ‘아모르프(AMORPH)’도 전시된다.
12. 취운정
소재지)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153 (現, 감사원)
1914년 4월 6일 天道敎會의 취운정원유회(翠雲亭園遊會)
1914년 4월 5일 전국 각 지방에서 올라온 교인들이 천일기념식을 거행하고, 다음날 축하원유회는 취운정에서 개최하였다.
현 감사원 옆에 있던 취운정에서 활쏘기도 자주 하였고, 의친왕 이강 공을 만나 친분을 쌓고, 국권회복 방안을 논의하였고, 이강 공이 천도교에 입교하는 계기를 만든 곳이다.
중앙총부와 가까운 거리라 천도교소년회를 비롯한 단체들이 각종 행사를 개최하는 단골 장소 였다.
13. 가회동 의암성사 집터
소재지) 서울 종로구 북촌로 39 (가회동 170-4)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선생은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 장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 교인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의 자택으로 동지들을 불러 회합하는 자리에서,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정한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벌일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명월관(明月館)지점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또 당일에는 이갑성(李甲成)에게 조선총독부에 조선독립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서를 제출하여 알리고, 회합 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당하기로 약속하였다.
14. 탑골공원 의암 손병희 동상
소재지) 서울 종로구 종로 99(종로2가 38-1)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공원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어 있는 탑골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내 공원으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고려시대 흥복사가 있던 자리에 1465년(세조 11년)에 원각사라는 절이 세워졌으나 연산군 때 폐사되었고 고종 34년에 영국인 브라운의 설계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20년 ‘파고다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하였으나 1992년 옛 지명을 따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다. 탑골공원 삼일문에는 광복직후 서예가 김충현씨가 쓴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쓴 ‘삼일문’ 현판을 새로 달았다.
그러나 2001년 11월 한국민족정기소생회 회원들이 “삼일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에 일본군 장교 출신이 쓴현판을 걸 수 없다.”며 뜯어냈다. 서울 종로구에서는 그동안 서울시 및 문화재청과 현판 재설치에 관해 협의했으며 2003년 2월 가로 1.2m, 세로 0.9m로 기존 것과 동일한 크기의 현판을 새로 제작하여 달았다. 현판의 글씨체는 ‘삼’자와 ‘일’자의 경우 독립선언서의 글자를 그대로 이용했고 선언서에 없는 ‘문’자는 다른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만들었다.
공원 안에는 세조가 세운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호), 1417년 (성종2년)에 세운 원각사비(보물 제3호), 삼일운동 때 민중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던 1902년(광무8년)에 세운 탑곡공원팔각정(서울시유형문화재 제73호), 동북쪽 담장에는 3.1정신 찬양비(박종화 글,김충현 글씨) 와 3.1운동을 형상화한 10개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1980년에 건립한 3.1운동 기념탑(독립선언서)이 있다. 그리고 1966년 5월 19일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명예회장 이승만, 부회장 이응준.유진오)에서 건립한 의암성사의 동상이 파고다 중앙공원에 건립되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1959년 묘비건립에 이어 1965년 5월19일에는 건립비 630만원으로 높이24척의 동상을 조각가 문정화가 맡아 기공식을 거행한 후 1966년 5월 19일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1907년 고종황제 양위와 정미7조약을 반대하다가 8월에 해산당한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설립한 대한협회가 탑골공원 동문 밖 탑동 32통 1호에 사무소가 있었다.
15. 고려대학교 의암 손병희 흉상
소재지) 서울 성북 안암동5가 1-6 (문과대학)
16. 근현대사기념관 앞 의암 손병희 흉상
소재지) 서울 강북구 4.19로 114 (수유동 산73-23)
17. 의암 손병희 안내판
소재지) 서울 강북구 번1동 418-9 (수유리 먹자골목 근처)
18. 삼각산 삼성암
소재지) 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23길 235 (수유동 산 164-5)
의암성사 49일 수련 장소 (창건사 64쪽)
손병희 선생은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천도교 측의 대표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선생은 이 때문에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구금되었으며,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2년 5월 19일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861년 4월 8일 충청북도 청원(淸原)에서 태어난 선생은 1882년(고종 19)에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고종 21)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동학혁명군과 논산(論山)에서 합세하여,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에서 은신생활을 하였다.
1897년(광무 1)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1년(광무 5) 일본을 경유해서 상해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전해 듣고, 1905년(광무 9)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최시형의 뒤를 이어 3세 교주로 취임하여 교세확장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설하고 보성학교(普成學校)와 동덕학교(同德學校)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공헌하였다.
1908년(융희 2) 박인호(朴寅浩)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崔麟)·천도교 도사(道師)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사항을 협의하였다.
선생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大衆化)·일원화(一元化)·비폭력화(非暴力化)의 3대 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갔다. 그리고 1919년 1월 초 전국의 천도교 교인들에게 ‘49일기도회’를 실시하게 함으로써 3·1운동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다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하순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고,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제반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불교에 대한 동지규합이 진행되었다. 천도교 자료에 따르면 선생은 2월 22일 서울 우이동 봉황각에서 3.1독립운동을 앞두고 실시한 49일 특별기도가 끝나는 날 아침에 전국의 천도교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崔南善)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선생은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 장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 교인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의 자택으로 동지들을 불러 회합하는 자리에서,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정한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벌일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명월관(明月館)지점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또 당일에는 이갑성(李甲成)에게 조선총독부에 조선독립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서를 제출하여 알리고, 회합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 당하기로 약속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선생은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李鍾一)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회람하게 한 후, 한용운(韓龍雲)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쳤다. 그리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0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선생의 나이 62세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각계에서 애도를 했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는 “先生(선생)은 民衆的(민중적) 一大偉人(일대위인)”이라고 하였다.
“조선 사천년사를 통관하면 그 간에 영웅호걸이 불무하였으나 흔히는 군주중심이 아니면 귀족을 배경으로 하여 그 업을 이루었으며 그名(명)을 成(성)하였소. 그러나 선생에게 至(지)하여는 민중 간에 生(생)하야 민중적으로 활동하고 민중적으로 대업을 成(성)하려하는 始終一貫(시종일관)한 주의(主義)는 선생 일대의 위업(偉業)이외다. 이것이 조선이 장차 민중문화를 건설하려는 劈頭(벽두)의 위인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선생의 모든 경력이 민중적이 됨으로 그 出處(출처) 進退(진퇴)에 정의(正義) 인도적 정신이 橫溢(횡일)한 것이 朝鮮偉人史上(조선위인사상)에 一光彩(일광채)를 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천도교 ‘의암성사환원호’)
선생의 유해는 삼각산 동쪽 우이동 언덕에 안장하였고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는 손병희 선생의 유해가 안장된 서울 수유리 묘역을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했다.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