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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의 걸음이 역사가 되어삼경합창단 김인환 단장 삼경합창단 김인환 단장님, 천도교신문에서 찾아뵙습니다. 그동안 교단의 여러 행사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를 들려주셨습니다. 합창단 소개 부탁드릴게요. 우리 합창단은 역사가 깊습니다. 예전에 대교당 시일식을 중앙총부에서 직접 집례를 맡아서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시일식 집례를 서울교구로 이관하면서, (그게 한 40년 정도 됐을 거예요.) 그때부터는 교구 내에서 시일식 합창단을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서 서울교구 합창단이 만들어졌습니다. 합창단 결성 초기에는 지금처럼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관심 있는 교인들이 나와서 노래하는 정도였어요. 그때 서영모 교수님 등 몇몇 분들께서 지도를 해주시면서 명맥을 겨우겨우 유지해 왔지요. 그러다가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교단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단 밖에서도 활동하곤 합니다. 고양시에서 속해 있는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주관하는 <남북 평화 합창제>(현 평화합창제)에 참가하게 된 계기로 해마다 참가하고 있습니다. 평화합창제 때 많은 분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무대였다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합창제에 참가하시게 되었나요? 평화합창제에는 저희 삼경합창단이 제2회 때부터 참가하게 됩니다. 주최 측인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함께하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 주셔서 참가하게 되었는데, 다른 단체들은 모두 합창단 이름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때 우리도 합창단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단원들로부터 공모를 해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저희 합창단이 뜻하는 바는 해월 신사님의 ‘성, 경, 신’ 사상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다짐을 해보자는 뜻으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 5회 평화합창제 참가, 공연하는 모습 시일식을 마치고 삼경합창단이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연습하는 모습 이후로 해마다 평화합창제에 참가하셨다고 하시던데, 합창단의 연간 주요 사업으로는 어떤 일이 있나요? 저희가 제2회 평화합창제 때 처음 참가하게 되어 벌써 다섯 번이나 참가했네요. 저희의 활동은 교단 내의 행사와 시일식 등에 노래하는 것이 주요 활동입니다. 이를테면 기념 공연이 있는데, 서울교구 결성 기념일에 하는 경축 공연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외부 행사로써 평화합창제와 KCRP에서 주최하는 평화 음악제와 같은 종교축제에 초청 받아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좀 바빴습니다. 작년에는 특히 남해동학문화제에 초청받아서 다녀오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연습을 또 별도로 더 해야 하니 바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합창단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지금 저희 삼경합창단에 등록된 단원은 한 30여 명 되고요. 공연에 참여하는 분들이 매번 나오지는 못하지만, 정기 연주회나 평화합창제 같은 때는 좀 더 모이곤 하지요. 각자 개인 생활들이 있어서 한 15명 내외가 나와 대교당 시일식에 함께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열심히 활동해 주는 단원들이 있어서 고맙고 또 서로서로 많은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단장님은 언제부터 합창단 활동을 하셨나요? 단원들과의 화합은 잘 이뤄지고 있나요? 제가 중앙총부에서 종무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중앙감사의 임기까지 마치고 나니까 포덕 160년이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합창단의 단장을 맡아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 5~6년 되었는데, 서로가 잘 맞춰가면서 활동하고 있어요. 모든 것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 모두가 좋은 마음이라는 게 느껴지지요. 가장 보람이 된다고 느끼실 때는 언제예요? 매주 시일식에 합창을 하고 요즘은 저희가 엔딩 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시일식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저희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시고 박수를 쳐줄 때, 이분들이 이 노래를 함께 들어주고 계시는구나, 그 마음을 느낄 때 가장 보람 있고요. 대외적으로는 우리 삼경 합창단이 천도교를 대표해서 외부로 공연을 나갈 수 있다는 것에서 단원들은 자부심을 느낍니다. 참 보람이 있죠. 다른 종단 합창단이나 일반인들이 삼경 합창단이 노래하시는 모습을 보고 반응은 어떻던가요? 노랫말이 좀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우리도 다른 종단의 노래를 들으면 또 마찬가지잖아요. 그 종단의 특성이 있고 노랫말이 와닿지 않을 때도 많지요. 작품집을 만들긴 하지만 공연장이 어둡기도 하고 그것만으로는 가사 전달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작년 같은 경우에는 가사를 화면에 보여주면서 노래를 했는데, 그 부분을 참 좋게들 봐주시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런 방식이 합창단의 시각적인 효과를 분산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들이 좀 있었는데, 그 자리는 경쟁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각 종단 간 서로를 알게 되는 면에서는 도움이 됐다는 평이 있더라고요.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에게 가사를 보여줌으로써 노래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팔 절’이라는 대신사님의 말씀을 노래 중간에 낭독하는 형식을 가져보기도 했는데, 관객분들이 집중해서 듣고 또 관심도가 높았어요. 천도교라는 우리 종단이 참 생소한 것처럼 합창단도 마찬가지로 생소하다고들 해요. 그래서 저희가 합창하면 상당히 고무적으로 관심 있어 하고 천도교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 점에서 저희가 느끼는 보람, 또 우리가 왜 이걸 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천도교는 기독교나 불교나 천주교에서 말하는 신앙의 대상이 내 안의 한울님이라는 점에서 좀 다르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음악에서도 그런 게 확연히 드러날 것 같아요. 저희가 평화합창제에 1회 때부터 참가한 것은 아닌데, 2회 때 참가하면서 분위기가 ‘천도교 합창단에서 이런 노래를 하는구나’하고 관심 있게 봐주시는 걸 느꼈어요. 선곡도 가곡을 선택해서 갔지요. 그런데 그다음 해에 다른 종단에서도 대중적인 노래로 자유곡을 선정해서 부르시더군요. <남북 평화 합창제>라는 주제에 맞게 남북 문제를 놓고 그 주제에 맞는 곡을 갖는다는 게 상당히 어렵잖아요. 정치적으로도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고요. 작년에는 우리가 ‘임진강’이라는 북한 가요를 불렀는데, 의미가 깊은 곡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아쉬운 건 다른 종단들은 그러한 것들을 매머드급 합창단을 구성하는데 우리는 한정된 인원이니까 거기에 다른 종단 합창단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인원이니까, 주최 측에 우리가 좀 더 부응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좀 아쉽지요. 다른 종단에는 청년합창단도 있지 않나요? 공연을 보러 오신 관객분들도 종단 별로 차이가 좀 있겠어요. 다른 종단의 경우는 청년들도 많은 데다가 단일 교회나 교구에서 나오지 않고 연합으로 나오니까 뭐 한 두세 개 교회만 모여도 한 5~60명이 되죠. 불교 같은 경우도 사찰 두 군데면 한 60명 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도 그 규모를 좀 키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합창제 공연을 했던 아람누리 극장이 1200석인데요. 그중 1층만 사용했는데, 한 7~800석 정도 되는 그 공간이 꽉 찰 정도로 많은 분들이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또 우리 천도교는 일산에 교구가 없고 그러니까 교인분들이 관람하러 오시기도 어려워요. 올해는 11월 4일 날로 예정이 돼 있는데 많은 분들이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지난해 남해동학문화제에 초청공연 장면 올해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올해도 마찬가지예요. 다음 달에 있을 교구 창립 기념일 날 공연을 앞두고 있고, 11월 4일에 있을 평화합창제 준비도 해야 하고 그 외에는 교단에서 기념일 날 요청이 있는 경우에 저희가 준비된 대로 응하는 것들이 예정돼 있고 지방 교구 행사에도 와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요. 합창단 단장으로 활동하시기 전에도 교단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활동을 해오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학생회 때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던 것 같아요. 학생회 때는 중고등부 부장을 맡았었고 청년회에 와서는 본부에서 부회장을 했고요. 1981년도에 서울교구 청년회를 재창립했어요. 그때 초대 부회장을 했고 지금은 환원한 정학현 동덕이 그때 초대 회장을 하고 그다음에 제가 청년회 서울시지부 회장을 했지요. 교단의 역사와 함께해오셨네요. 교회에 처음 나오던 날 기억하세요? 수운회관 낙성기념식이 있던 날이었어요. 그 옛날,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지요. 4월 5일 날이었는데 그때 아버지 손을 잡고 나와서 지금까지 교회에 나오고 있으니까 그때부터 친구들은 여기서 만난 교회 친구들이 다 전부예요. 어릴 때 천도교 집안이라는 건 언제 아셨어요? 우리 집보다는 우리 외갓집이 천도교를 더 먼저 했던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는 천도교라기보다도 천도교청우당 쪽에 계시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서 활동을 하셨던 것 같고, 신앙보다도 청우당 활동을 하시면서 근근이 경전만 혼자서 읽으셨던 그런 분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외갓집은 적극적으로 천도교를 했던 집안이고요. 북에서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외숙이 우리 어머니의 오빠 되시는 분인데 어머니 살아생전의 말씀에 의하면 그분이 천도교에서 하는 야학 활동을 하셨고, 우리 어머니도 그 삼촌을 통해서 한글을 배우셨다고 그러더군요. 어머니는 천도교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데 천덕송 교훈가 노래를 알더라고. 그리고 당가를 아셨어요. 송가집에 있는 청우당가 ‘울려라 개벽 소리’ 하는 그 노래도 우리 어머니가 아시더라고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외숙이 청우당 쪽에 계시면서 영향을 준 것 같고 우리 외할머니한테도 나중에 물어보니 외숙이 공부도 잘했대요. 삼촌은 6·25 때 반공 쪽으로 가면서 구월산 유격대 쪽에 합류해서 문산 어디쯤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봤다는 얘기가 고향 분들이 전한 마지막 행적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확인해 봤는데 더 나오질 않아요. 예전에 국방부에서 유전자 검사를 하고 등록했는데, 아직 못 찾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천도교에서 시일식을 하던 모습은 기억하세요? 생각이 나죠. 1970년쯤일 거야. 아버지하고 기념일에 나오면 그때는 빵을 줬어요. 근데 할아버지들, 아버지들이 빵 받아서는 당신들이 먹지 않고 집에 가져갑니다. 기념일 날은 이북 사람들이 여기 나와서 서로 얼굴 보는 날이었어요. 그러면 빵 받은 걸 다 나한테 준단 말이야. 내가 어린애였으니까. 그러니 빵을 이만큼 받아서 집으로 가면 동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빵 가지고 온다고. 그때도 지금처럼 교회가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교인은 더 많았는데 성미가 지금처럼 체계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돌아보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참 따뜻하고 재미있었어요. 중학교 1학년 소년이 처음 아버지하고 같이 여기 왔을 때의 첫 느낌이 혹시 기억나세요? 그때 우리 선배들이 처음 교회에 나온 친구들에게 일일이 주소를 받더라고요. 전화도 흔치 않았던 시절이죠. 그다음 주 토요일 날인가 집으로 엽서가 왔어요. 난생처음으로 내 앞으로 온 엽서예요. 그런 걸 처음 받아본 거야. 교회 학생회 집회를 알리는 통지문이었어요. 선배들이 전부 손으로 써서 보내준 거야. 그날 처음 온 친구들한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거 보고 나오게 된 거야. 중학교 1학년이 뭘 알았겠어요. 주문도 몰랐지요. 그때 나한테 주문을 가르쳐줬던 선배가 안상숙 선배인데, 지금도 가끔 나오세요. 그때는 시일날 아침에 중고등학생들이 청수를 모셨어요. 지금의 서울교구 여성회 실에서요. 그땐 거기가 다다미방이었어요. 10시부터 10시 50분까지 1시간 정도 주문을 한 105회 묵송을 하고, 경전 한 편을 한 사람이 다 읽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읽어 나가요. 그렇게 해서 용담유사 한 편을 읽고 나면 시일식 보러 들어가죠. 처음 나왔는데 주문을 모르잖아. 남들이 하는 거 마음속으로 따라 읽어요. 그렇게 주문을 배운 거죠. 그랬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는 선배들이 많았죠. 학생회가 일도 많았고 일을 참 잘했죠. 학생회 예술제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이끌림, 중학교 1학년이면 어리잖아요. 자기에 대한 존중 이런 것도 좀 느끼셨겠어요? 천도교 청년회의 일원으로, 학생회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람들하고 같이 뭔가를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더 컸겠어요. 그랬죠. 그리고 그때는 포크송이 유행했잖아. 천덕송보다도 선배들이 통기타 가지고 포크송 하니까 그 포크송 배우는 게 재밌잖아. 그래서 토요 집회를 하고 나면은 천덕송 부르지만, 집회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통기타를 중심으로 모여요. 그러면 이 사람 저 사람 포크송을 불러요. 그땐 사람도 많았고 교회 나오는 게 참 즐거웠어요. 선생님의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마음에 자리 잡은 그 시기는 언제였나요? 자연스럽게 그런 신앙 생활을 해왔어요. 당시에는 예술제가 있었어요. 예술제가 12월 1일 현도 기념일을 즈음에 하는 행사였는데 그때는 중고등학생들이 예술제를 해요. 대학생 선배들이 도와줬지요. 조명이라든가 음향이라든가 선배들이 도와주는데 그 예술제 준비를 무려 3개월 이상을 하거든요. 그 과정 때문에 막이 내려 나간 다음에는 배우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연스럽게 인일 기념일까지는 그냥 교당에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청년회를 만들면서부터는 이제 그냥 학생하고는 달라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이제 좀 들기 시작했다고 그럴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인가 그랬는데 작은 천덕송 책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거를 버스에서 잃어버렸어. 그때 우리 아버지가 아주 호되게 혼을 내셨어요. 정신을 어디에 갖다 팔아먹고 다니냐고. 교회 책을 들고 다니면서 어떻게 그런 걸 잃어버릴 수 있느냐고 혼을 내시는데 눈물이 쏙 빠지더라고. 당신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안 하면서 유독 나한테만 그렇게 강조하셨어요. 우리가 사형제인데도 나만 교회에 데리고 다니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내 동생들은 한 번도 안 데려왔어요. 동생들은 나 따라서 몇 번 나왔는데, 학생 때 잠깐 하다가 안 나오게 되고. 그런데 말로는 다 천도교인이래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1977년도에 내가 공무원 시험을 봤어요. 1978년도부터 공직 생활을 하다가 2개월 보름 만에 방위 근무를 소집 받아서 18개월을 복무하고 1979년도에 이제 다시 복직하고서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1981년도에 다시 서울로 왔어요. 그때 서울교구 청년회를 만들면서 청년회 활동을 하고 청년회장을 맡고 나니까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아이들도 낳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주말이면 교회 생활을 하니 자연스럽게 학교 동기 동창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제 유일한 친구들이 직장생활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이 되었고 한 40년 유지되고 있습니다.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서 만난 김인환 삼경합창단장 모습 교회 나오시면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마음이 편안해요. 어려서 기독교에서는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날에 교회에 가면 빵도 나눠주고 그러잖아요. 얻어먹을 때는 좋은데 뭔가 마음이 공허하다고 할까, 사찰에 가도 그랬어요. 천도교는 첫인상이, 선배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이 각인돼서 그런지 몰라도 푸근해요. 또 가족 같은 분위기였어요. 청년회 때부터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우리 교당은 다른 교회나 절에 가면 있는 예수, 십자가, 부처와 같은 상이 없잖아요. 우리에겐 궁을기 하나밖에 없잖아요. 신앙의 대상도 다른 종교와 차이가 좀 있잖아요.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는 말이 거기서 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한울님이 마음속에 있다고 하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학생회 활동하시면서 마음에 품었던 신앙심이 평생을 이어져 왔다는 말씀이시군요. 우리 학생회 때 어떤 선생님께서 궁을장에 대해서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요. 한울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하나.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그것이 하얀 바탕의 색이 한울님 마음이고 빨간 색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을 구도화시킨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옛날에는 대교당에 장식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그런 자료들이 사진조차도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좀 아쉬워요. 삶에서 천도교를 한 것은 어떤 의미였나요? 사람은 매일매일 잠을 자잖아요. 그냥 단순히 잠을 자는 것과 뭔가를 정리하고 잠을 자는 것은 새로 만난 아침이 다르잖아요. 그렇듯이 천도교 신앙을 하는 것은 일신우일신, 저는 그 뜻이 있다고 봐요. 뭔가 달라져야 해요. 어제처럼 생각하고 어제처럼 행동하고 어제처럼 움직이면서 뭔가 새로움을 기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 나를 중심 잡게 해준 것은 경전의 말씀이에요. 해월신사님의 법설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실천이 힘듭니다. 믿습니까? 이거는 쉬워요. 그런데 그 믿음을 무엇으로 입증합니까? 뭔가 행동이 있어야 하잖아요. 해월 신사님 법설에 언고행 행고언(言顧行 行顧言)'이라고 하잖아요. 말을 할 때 행할 것을 돌아보라고. 말을 하기에 앞서 내가 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돌아보고 말을 해야 해요. 또 내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 해요. 지금 천도교 청년회나 대학생단 후배들 보고 계시면 어떠세요?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실 것 같아요. 글쎄요. 제가 그런 당부를 할 수 있는 위치인지 모르겠는데,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열정으로 그리고 나를 닦는 마음으로 순일한 마음으로 활동하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은 우리 아들에게도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러면 원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리는 바가 무엇이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요. 오늘은 처음부터 합창단 이야기를 시작으로 말씀을 들어보았습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합창단 단원들에게 단장님으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아요. 단장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심부름꾼이지, 좋은 리더가 되지는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려운 형편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합창단을 만들어 온 조각 조각들이 참 소중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 조각들이 하나라도 없거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 역할을 못 한다거나 그 조각이 없어진다면은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때문에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자세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밀알이 된다는 그러한 생각으로 서로서로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게 진짜 따뜻한 동덕애를 느낄 수 있는 그런 합창단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서 만난 김인환 삼경합창단장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가 된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이 교단을 지켜왔듯 합창단 단원들의 화음이 아름다운 선율로 흘러온 시간들을 생각했다. 한울님, 감응하시옵소서. -
십무천을 생각하며, 마음을 닦는 시간천도교여성회본부 박징재 회장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처럼 하라는 ‘사인여천’이라는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야죠. 그런 믿음으로 나도, 상대방도 한울님이니까 그에 맞게 서로 배려하면서 살아갔으면 합니다. 회장님 반갑습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첫 번째로 찾아뵙습니다. 포덕 163년 4월 1일부터 166년 3월 30일까지, 이렇게 3년 동안의 임기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회장님 임기 중에 여성회가 창립 100년 맞이를 하기도 했지요. 맡은 바 임무를 막중하게 느끼셨을 것 같아요. 여성회본부 회장을 맡으시면서는 소감이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얼떨결에 회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 열흘 고심하다가 이 일은 한울님이 시키신 일인가 보다 하고 일을 맡기는 했는데, '여성회 100년'을 맞이한다는 책임감이 크게 밀려왔지요. 그러나 저는 실무진들을 믿었습니다. 우리 실무진들이 참 훌륭한 분들이라, 함께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어요. 그리고 그런 마음이 모여서 100주년 행사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어요. 저는 그저 선배님들이 지난 100년 동안 하신 역사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천도교여성회 100년을 맞이하면서 여러 기념사업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어떤 일에 중점을 두고 하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여러 행사들이 있었지만, 천도교여성회 100년사 책을 출간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100년사 책을 내면서 여성회 각 지부사도 같이 작업을 했는데, 우선 100년사 책이 먼저 나왔어요. 말하자면, 우리 여성회가 걸어온 길을 책으로 써서 세상에 내놓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난관도 많았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심고를 드렸어요. 한울님이 다 도와주시더라고요. 우리 실무진들과 출판위원님의 도움으로 3월 25일, 우리 여성회 창립 기념일에 100년사 책을 배포했을 때 그때가 제일 뿌듯했죠. 책을 받아들고는 한울님 감사합니다, 그 말 밖에 안 나왔어요. 출판위원회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다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에서 애써주신 덕에 출판을 할 수 있었지요.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 큽니다. 100년간 걸어온 길을 담아낸 귀중한 자료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는 100년이 지난 뒤에야 200년사 책으로 세상에 나오겠지요. 그 막중함을 가지고 작년 한 해 일해오셨어요. 그런데 100년사 출간하는 일 외에도 천도교여성회에서 주관하는 여러 사업들도 있잖아요. 기억에 남는 일이 몇 가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100년을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자체적인 세미나도 열었고, 또 그와 동시에 대신사 출세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중앙총부와 함께 기념행사를 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대신사, 대사모님 숭모비를 세운 일입니다. 수운 대신사님은 우리의 큰 스승님이신데, 사모님에 대한 공적도 후세에 남겨야겠죠. 대사모님께서 얼마나 고생 많이 하셨을까요? 대신사, 대사모 숭모비를 세우자고 했을 때, 그때는 제가 회장을 맡은 첫해였어요. 추진위원회와 함께 숭모비를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중앙총부에서 협조해주신 덕에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숭모비로 쓸 돌을 찾으러 쫓아다닌 과정도 떠오르네요. 그 돌을 처음 보았을 때, 참 놀라웠어요. 그 돌은 어느 여신상이 환생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요? 색깔도 참 아름답더라고요. 일각에서는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대신사님으로 인해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더 새롭게 세워졌고 그렇게 하신 업적에는 모든 일을 일생을 함께하신 사모님에 대한 공덕도 함께 인정해 드려야 하는데 그런 움직임들이 아직은 좀 더딘 것 같이 느껴집니다. 특히나 여성회에서는 지난 100년간 여성의 인권 신장에 기여하는 종교의 역할을 해왔잖아요.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앞으로 천도교여성회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AI 시대이고, 급변하는 시대잖아요. 제가 회장을 맡으면서 우리 실무진한테 진취적인 방법으로 소통과 믿음으로써 단합해서 지금까지 왔고 앞으로의 100년을 내다본다면, 급변하는 이 시대에 젊은 인재들이 많이 들어오셔서 여성회를 이끌어주면서 활성화해줄 것을 당부하고 싶어요. 우리 기성세대는 기계를 다루는 데 서툰 사람들도 많고 그런 것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들 잘하잖아요. 회의도 줌으로 진행하고요. 여성회에 젊은 세대가 들어오면 많은 변화를 가져오더군요. 그런 변화들이 지금의 여성회를 만들어왔습니다. 박징재 회장이 천도교여성회 사무실에서 주옥경 종법사의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시대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성의 인권 신장에 있어서는 오히려 과거의 천도교여성회가 했던 역할들이 시대를 앞서가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선배님들이 그 어려운 시절에 정말 큰 일들을 하셨죠? 주옥경 사모님을 비롯한 우리 선배님들은 그 시대에 상상도 못 할 만큼 앞장서 나갔잖아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천도교가, 그리고 천도교여성회가 사회 전반적으로 해온 역할들이 있고 앞장서 나갔는데, 그 시절에는 그만한 인력이 됐었어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인력이 안 돼요. 사람이 없어요. 일을 할 사람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맞게 자기 일 하느라 바쁘고 교회 일을 우선적으로 할 수 없는 게 조금 아쉽더라고요. 회장님께서는 결혼하시면서 천도교에 입교하신 건가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오셨는지도 궁금해집니다. 결혼하면서는 교인이 되었지요. 결혼해서 처음에는 저도 시부모 모시고 애들 키워야 하니까 그 뒷바라지가 우선이었죠. 그리고 천도교에 대해서 알아가기 시작한 것은 우리 시아버님 환원하시면서였어요. 그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죠. 천도교의 어떤 점이 그렇게 이렇게 마음에 와닿으셨어요? 우리 친정집이 불교 집안인데 나는 천도교 집안으로 시집을 왔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아침, 저녁으로 청수를 모시고 그때는 촛불을 켜셨어요. 그게 무어라고는 말씀도 안 해주시고 혼자 방에서 하시길래 저게 뭔가, 그냥 어른이 하시는가 보다 하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시일마다 시부모님께서 우리 애들을 데리고 천도교에 다녀오시고, 그러시면서 제게는 교당에 나오라는 말씀은 한마디도 안 하셨어요. 내가 이 집 장남에게 시집을 왔고 이 집의 뼈대가 있는데, 맏며느리로서 뭔가 붙잡고 가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래서 천도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렇게 천도교에 들어왔는데, 누가 끌어주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한 6개월 그냥 남편 따라서 왔다 갔다만 했지요. 그러다가 내가 안 나가겠다고 했어요. 누가 아는 체도 안 하고 그냥 혼자 왔다 갔다 6개월을 하다 보니까 안 되겠다 싶었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동덕님 한 분이 종학대학원에 다니지 않겠느냐고 그러시더라고요. 나는 종학대학원이 천도교의 교리를 알아야만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는 줄 알았어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들어가서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아무것도 모르고 와도 된다는 거예요. 열심히만 다니면 된다고요. 그렇게 2년 동안 참 열심히 다녔습니다. 한 1년은 도대체 저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수련을 가봐도 뭐가 뭔지 몰랐는데 그러다가 천도교가 이런 곳이구나, 수련이 이런 것이구나 깨우치게 되었어요. 나 혼자 이제 터득하고 느끼면서 다니다 보니까 어느덧 졸업을 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천도교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지만, 그저 나 나름대로 혼자서 알아간 것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마음에 남는 것은 수련하면서 제가 느낀 이치와 진리였습니다. 동경대전에 보면 ‘십무천’이라고 있지요? 한울님을 속이지 말라, 이렇게 시작하지요? 스승님의 가르침 열 가지가 딱 나와 있습니다. 처음엔 천도교의 교리가 참 쉽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의 오산인 걸 알았어요. 내가 몸이 몹시 괴롭고 안 좋았을 때 21일 수련하러 처음으로 법원수도원으로 들어갔어요. 시집와서 처음, 내 생전 처음으로 집 밖에서 생활해 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련 중에 ‘십무천’이라는 큰 글자를 보여주셨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여러 번 생각하고 책을 폈는데, 거기 그 가르침이 다 있는 거예요. 그때 나의 마음은, 내가 한울님을 참 우습게 생각했구나, 정말 잘못했다고, 죄송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내가 내 생활 속에서 한울님을 잘 모셔야겠다는 그 이념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여기에 조금 조심스러운 질문 하나 더 드리고 싶습니다. 결혼하시고 보니까 춘암 상사님의 집안이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춘암 상사님의 후손으로서 바라볼 때, 춘암 상사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춘암 상사님은 일제강점기 때, ‘개 같은 왜적 놈’이라는 말씀도 하셨지만, 저에게 가장 크게 와닿는 말씀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이 가르침입니다. 춘암 상사님은 참 과묵한 분이셨다고 해요. 시어머님이 가끔 춘암 상사님에 대해서 얘기해 주셨어요.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춘암 상사님은 참 과묵하시면서 집안을 포용하신 분이셨다고 해요. 그때는 참 어렵게 사셨잖아요. 집안의 온 가족을 다 포용하셨다는 말씀만 기억에 남네요. 춘암 상사님께서 살아오신 삶을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고요. 또 과묵함 속의 포용으로 직접 보여주신 것들이 대대손손으로 내려가는 유산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회장님께서는 손주분들한테는 어떤 걸 남겨주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남겨준다기보다는 내가 살아있는 한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우리 애들 키울 때 제가 애들한테 절대 거짓말하면 안 된다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우리 집 애들이 착해서 정말 거짓말을 할 줄 몰라요. 그래서인지 우리 손주들도 보면 다 반듯합니다. 스승님 집안의 사람으로서 며느리로서 살아오셨고, 여성회본부 회장님으로서 활동하시는 데에 부담도 굉장히 크셨을 것 같아요. 제 마음은 항상 똑같았어요. 한결같이 내 마음만 순수하면 모든 게 통하지 않겠나, 또 동덕님들이 진심을 받아들이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했는데 그 마음을 알아줄 때는 참 기쁘죠. 이제 임기가 석 달 정도 남았는데요. 올해 여성회에서 계획하고 계신 일들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작년 3월 25일에 여성회 100년사 책을 발간했지만, 지부 100년사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올해는 각 지부사(史) 책이 완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올해 총회 때는 출간될 예정입니다. 물론 어려운 점도 많았습니다. 큰 지부는 그래도 활성화돼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지부들도 많고, 어르신들께서도 많이 환원하셨고요. 그 점에서 저의 바람은 우리 동덕님들께서 가정 포덕을 우선으로 신앙생활을 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1년에 네 번, 4대 스승님 기념식 날이라도 자녀들과 시일식에 함께하는 것부터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회장님께서 마음이 힘들 때 마음에 품으셨던 스승님 말씀을 소개해 주신다면, 어떤 말씀이 있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항상 십무천을 생각하면서 나 말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먼저 해보자 하는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런 말씀을 마음에 품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큰 가르침이 될 것 같습니다. 삶의 우여곡절에 스승님 말씀에 기대어 의지할 수 있어서 든든한 마음입니다. 어렵지 않지만 행하기 힘든 것을 마음에 품고 행하려고 하는 게 종교인의 마음 자세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새해, 새 마음, 새 걸음 새해가 밝았다. 천도교 여성회가 지난 100년간 세상을 밝혀온 것은 한 사람, 열 사람, 천 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걸어온 세월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중 한 사람, 박징재 여성회장의 소회를 들어보았다. 박징재 여성회장을 통해 100년을 끌고 온 사람들, ‘멋진 언니들’을 상상해보았다. -
수련은 힘을 모으는 것, 내 마음을 믿어야죠지난 12월 1일 현도기념식을 마치고 서울교구 여성회에서 박태량 여성회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경로잔치와 봉사활동을 비롯하여 서울교구의 온갖 살림을 도맡아 해온 서울교구 여성회의 이야기와 박태량 여성회장의 신앙생활, 교단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소망을 들어보았다. 서울교구 박태량 여성회장은 인터뷰에서 천도교 신앙의 핵심은 수련에 있다고 말했다. 반갑습니다. 서울교구 박태량 여성회장님 모십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헌신해 오셨는데, 오늘 뜻깊은 현도기념일에 인터뷰하게 되어 더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해 오시고 또 교회를 위해 헌신해 오셨습니다. 서울교구 여성회장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교회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서울교구 여성회가 천도교 여성회본부에 통합됐다가 포덕 124년도에 재결성했습니다. 그때 제가 재무부장을 맡았어요. 그때 당시에 저는 바로 이 앞에서 가게를 하면서 교회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행사가 있을 때마다 청수봉전을 참 많이도 했지요. 남편이 교단에서 오래 일했어요. 관리실에서요. 소암 김경규씨가 제 남편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한평생 교회에서 늙었습니다. 교회 일을 참 열심히 하시던 분이에요. 그 바람에 저도 교회 일을 열심히 하게 되었지요. 교회의 모든 일에 여성회의 손이 닿지 않는 일이 없었을 텐데, 생업을 하시면서 교회 일을 열심히 하기가 참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지금 수운회관 바로 앞인 덕성여대 자리에서 18년 동안 사진 인화, 복사집을 했어요.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이 있었죠. 우리 집이 작업이 많기로 서울 시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집이었어요. 그때는 여기 통계청도 있었거든요. 지금 이 옆에 있는 노인복지관 그 자리가 통계청이었어요. 지금은 대전으로 이사를 갔죠. 덕성여대 평생교육원도 학생이 천 명 가까이 됐어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교회 일에는 정성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참 기쁘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서울교구 여성회 재무부장을 하다가, 본부로 가서는 6년간 조직부장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여성회본부에서 감사를 맡고 있습니다. 서울교구 여성회장직은 2010년부터, 2016년 박징재 회장 역임 기수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13년간 역임하고 계시는데, 보람된 일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몇 가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 여성회에서 경로잔치를 참 오래 해왔지요. 옛날엔 가정 방문도 많이 다니면서 어른들 대접하기도 했고, 봉사활동을 참 많이 했습니다. 불우이웃 돕기도 많이 했지요. 그러다가 최근 코로나가 오면서부터 못하게 되었어요. 그전에는 여성회에서 중심이 되어서 시일식 후 교인분들에게 서울교구 식당에서 직접 식사를 준비하여 밥을 대접해왔습니다. 코로나 이후에는 식사를 못 하게 되니 식당 문을 닫아놓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몇 년 사이에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시게 되었고요. 경로잔치는 우리가 직접 반찬을 만들어서 대접했습니다. 다음 세대들이 좀 이어서 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늘 하던 일이니까 내가 맡은 임무는 다해야죠. 회비만 내고 참여하지 않는 분들도 많고, 그런데 그나마 회비를 내는 회원들도 지금은 많이 줄었어요. 경로잔치를 하면 어른들께서 참 좋아하시거든요. 가정 방문도 좋아하시는데, 지금은 그게 다 멈춰져 버렸어요. 정리하자면, 우리 여성회에서는 경로잔치, 가정 방문 등의 교단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 그리고 바자회, 불우이웃돕기 등을 해마다 하면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청에서 임명장도 받고 상장도 받았어요. 박 회장은 서울교구 여성회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며 액자 속 사진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 사진은 서울교구 성지순례 중 활영한 기념사진이다. 박 회장은 서울교구 여성회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며 액자 속 사진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 사진은 천도교중앙대교당 앞마당에서 열린 일일찻집 및 바자회 사진이다. 박 회장은 서울교구 여성회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며 액자 속 사진에 대해 설명하였다. 회장님의 리더십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께하시는 여성회 동덕님들께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이니까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이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너무 오래 장기 집권을 하고 있으니까요. 하여튼 여태까지 활동은 내가 힘 닿는 데까지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교구 행사에 사람이 많이 왔고, 우리 여성회 많은 회원이 같이 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을 도맡아서 할 사람이 줄어들어서 갈수록 어려워지고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조직이나 사람들이 줄어들고 젊은 세대들은 찾아보기 힘들죠. 마음을 내서 함께하는 일이니 한사람 한사람이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죠. 모든 일은 내가 앞장을 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저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와 주니 고맙죠. 교회 일은 내 몸을 아끼지 말고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돈을 떠나서 내 몸을 불사르고 봉사를 하면 모든 것이 자동으로 따르는 것 같아요. 말씀 들으면서 신앙의 힘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회장님께서는 천도교를 하면서 언제가 제일 좋으셨어요? 내가 처음에는 천도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왔잖아요. 그러다가 교회 일을 하다 보니 전국을 돌아다니게 되었고, 1년에 두 번, 여름과 겨울이면 수련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처음 수련을 하는데, 주문을 외우면서 3일 동안은 제대로 앉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3일이 지나서야 아픈 다리가 싹 나아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수련을 한 200명씩 다녔어요. 그땐 선풍기 같은 것도 없을 때예요. 밥도 된장 국물 한 그릇을 먹어도 참 꿀맛이었어요. 그뿐인가요. 세탁기도 없었어요. 경주에 가면, 계곡물에서 발도 담그고, 세수도 하고 잠잘 때도 한 방에서 다 같이 잤어요. 생각해 보면 경주 용담교구는 수련을 참 많이 합니다. 수련을 많이 하는 교구는 뭔가 다릅니다. 우리 서울교구도 수련을 많이 하면 좋겠습니다.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많지만, 본부에서 지방을 돌아다닐 때, 가서 인사하고 지방 교구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각 교구에서 경과보고를 하는데, 이 교회가 서울에만 있는 게 아니고 지방에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참 기뻤습니다. 처음에 ‘천도교’에 대해 잘 몰랐으니까, 천주교도 아니고 이거 뭐지, 그런 생각도 했어요. 올해 대신사님 출세 200주년을 맞이하며 대교당에서 며칠 동안 다 함께 수련했잖아요. 그때도 참여하셨지요? 대교당에서의 주문 수련은 어떠셨나요? 참 좋았어요. 저는 교회에서 하는 수련은 절대 빠지지 않아요. 시일식도 그렇고요. 평생 그랬어요.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지요. 우리 교회의 목적은 수련에 있는데, 무슨 일을 해도 수련부터 먼저 해야겠더라고요. 제가 서른 몇 살에 교회에 들어왔는데, 지금 나이 팔십을 바라봅니다. 올해 일흔 아홉이에요. 그동안을 돌이켜보면 그렇습니다. 우리 천도교에서는 수련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 일 하시면서 보람도 되고 또 신앙 생활 하시면서 가슴에 품고 있는 스승님 말씀 같은 거 있잖아요. 어떤 말씀이 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남의 흉을 보지 말고 내 마음을 지켜라. 그 말씀입니다. 나는 ‘나의 마음을 잘 지키는 것’ 그것 하나를 품고 살지요. 그런데 신앙생활이라는 게, 평소에 실천이 잘 안될 때가 많잖아요. 그럴 땐 어떻게 하시나요? 사람 때문에 괴로울 때는 내가 남한테 말을 안 합니다. 속으로 계속 삭입니다. 장사를 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는데, 그럴 때면 스스로 마음을 꽃 피우는 거지. 그럴 땐 수련을 하는 거죠. 지금도 수련을 하면 내가 엄청나게 울어요. 속에 쌓인 게 많은가 봐요. 심고 드릴 때 주로 어떤 마음을 품으시나요? 주위에 모든 것이 바른길로 돌아가게 해달라고요. 그리고 가족이 건강하게 해 달라고요. 그것 말고는 없어요. 회장님 자신을 위해서 하시는 기도는요? 나를 위해서는 안 합니다. 지금도 내가 새벽에 일어나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고 그렇게 기도를 2시간 합니다. 자기 전에는 한울님 앞에 앉아서 고합니다. 한울님, 오늘 하루가 다 끝나고 잡니다, 하고요. 그리고 나쁜 일 있으면 좀 잘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또 심고합니다. 아이들에게 크게 나쁜 일 없이 원하는 대로 풀리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요. 그 덕에 손주들도 좋은 대학 다니고 다들 잘 풀렸어요. 내 안에 한울님이 계시고, 한울님이 간섭을 하신다고, 그렇게 느낍니다. 제가 좀 아프기도 했는데, 그때도 한울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늘 심고를 합니다. 회장님께서는 타인을 위해 마음을 모으고 심고를 드리신다고 하셨는데, 회장님 자신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꽃 피워지기를 바라세요? 나는 늘 교회를 위해 심고를 드리는데, 교구는 교구대로 화합이 좀 됐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나와서 같이 화합되면 좋겠고, 서로 위하며 하나가 되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여성회실을 찾은 함형숙 여성회본부 중앙위원(맨 왼쪽)과 박징재 여성회본부 회장(맨 오른쪽) 지금까지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 여성회 회장으로서 오래 봉사를 해오셨습니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교인들이 모여 봉사하고 실천해 오셨던 선하고 강한 에너지가 교단을 이끈 힘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교단에 바라는 점, 그리고 후학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과거에는 대교당에서 행사를 하면 수백 명이 자리를 채워 앉아 대교당 안이 꽉 찼는데 지금은 빈자리가 많아서 안타까워요. 그리고 우리 천도교는 서로 편 가르지 말고 단합이 돼야 해요. 나는 우리 교단이 수련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천도교의 맥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학들이 잘 크려면 윗사람들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큽니다. 이제 누가 그 씨앗이라도 잘 키워가면 좋겠습니다. 기자는 이 인터뷰를 통해 수련의 힘은 어디서 오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하나 더 드렸다. 수련의 힘이 어디서 온다고 보세요? 신앙의 힘은 무엇인가요? 수련은 교회에 힘을 모아주는 거예요. 신앙은? 글쎄요. 내 마음을 믿어야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마음’이라는 말을 오래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심고는 드리지 않는다는 말씀이 떠올라, 서울교구 박태량 여성회장께서 건강하시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
나의 슬기로운 천도교 생활천도교중앙대교당 사람 팔자는 참 알 수 없다. 나 같은 샌님이 주말마다 인사동에 가서 맛집을 돌아다닐 줄 알았으랴. 고풍스러운 천도교 대교당에서 시일식을 마치고, 바로 옆 인사동에서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암 김창석 선생님과 ‘디딤돌’ 사람들, 또는 천도교의 연원 모임 서운포 사람들과 함께 한다. 알고 봤더니 천도교가 인사동 상권을 살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었다. 다른 교회들처럼 자체 식당이 없고, 대신 맛있는 떡을 나눠준다. 교인들은 시일이 끝나면 삼삼오오 인사동으로 몰려가서 함께 밥을 먹는다. 그동안 시일식에서 나눠주는 떡을 받기만 하다가 어제 드디어 사무실에 전화했다. 떡값을 보내겠다고. 천도교에 나온 지 여덟 달쯤 되었고, 입교는 올 1월에 했다. 처음 나온 사람들이 함께 공부하는 ‘디딤돌’ 프로그램이 있다. 원암 김창석 선생님이, 천도교 ‘동귀일체’ 모임에서 펴낸 책을 바탕으로 친절히 가르쳐주셨다. 아, 천도교가 이런 것이구나! 선생님한테 교리도 배우고 경험담도 듣고 내 의견도 얘기하다 보면, 아침 한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곧바로 시일식에 참석한다. 천도교인으로, 부드럽게 연착륙하고 있다. 시일식을 마친 뒤엔 다 같이 식사도 하고. 음, 분위기 좋다. ‘디딤돌’에서 교재로 쓰는 책, <마음공부, 영원한 행복의 길>은 일반인들이 읽어도 될 만큼 좋은 내용을 알기 쉽게 알려준다. 게다가 2부에선 우리나라라는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설거지할 때, 주문을 외워도 되나요? 천도교에선 주문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한울님한테 받은 것인 까닭이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주문의 뜻이 참 좋고 마음에 와닿는다. 저녁때 자기에 앞서 설거지와 청소를 하는데, 이때 주문을 외우고 있다. 그래서 원암 선생님한테 물어봤던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천도교 신앙생활을 해왔던 원암 선생님은 스승 얘기를 가끔 해주었다. 스승은 또 스승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전통이 천도교엔 남아 있는 듯하다. 경전이 아니라 스승들을 통해서만 대대로 전해질 수 있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또 워낙 수련과 마음공부에 철저한 분이라서 크게 울림을 준다. 주말 휴식 시간마저 고스란히 천도교에 바치고 있음에랴! 천도교엔 참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아서 좋다. ‘디딤돌’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원암 선생님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혹자는 천도교 교세가 옛날과 견주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이백 해 동안 불어닥쳤던 엄청난 서양 바람을 생각해보라. 온몸을 던져 평생 천도교를 지켜온 여러 선생님과 선배 교인들이 참 훌륭하게 느껴진다. 백배를 드릴만큼 고맙다. 더구나 수많은 분들이 나라와 교를 위하여 피를 흘렸음에랴! 때마침 올해는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이 백 돌이다. 지난 시절 천도교는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들을 해왔지만, 지금부터 할 일이 더 많지 않을까? 이상우(서울교구) 본 글은 네이버카페 "동귀일체"(https://cafe.naver.com/chonsim)에 게재된 글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천도교신문에 게재하였음을 밝힙니다. -
한울마음으로 짓는 농사, 도상록 동덕을 만나다인삼 밭에서 도상록 동덕 "저는 제 존재의 가치를 한울님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한울님이 내려주신 거지 스스로 이룬 것이 없습니다." 충남 서산 가림다영농조합에서 홍삼을 생산하여 유통하고 있는 도상록 동덕을 만났다. 도상록 동덕은 맨몸으로 홍삼액 가공에 뛰어든지 20년이 넘었다. 서산은 토질이 황토 찰흙으로 유기물이 풍부해 인삼의 유효성분을 높여줄 뿐 아니라 서리가 내리는 기간이 짧아 인삼 생육기간이 길고, 여름에는 서늘한 서해 갯바람이 불어와 한여름 고온 피해를 줄일 수 있어 인삼 재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라고 한다. 한울마음으로 짓는 농사는 어떻게 다를까? 도상록 동덕에게 물어보았다. 물질은 풍요롭고 이제 소비자들의 선택에는 더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먹거리에 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 제품을 만드는가, 이 농사를 짓는가, 내가 식탁에서 먹는 이 농산물을 생산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만나 뵙는 동덕님의 이야기가 더 궁금합니다. 현재 인삼을 재배하고 유통하고 계신데, 농사를 지으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제가 한살림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기 때문에 한살림에서 많이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한살림의 근본적인 취지가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 인데요, 제가 그 취지에 동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한살림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좋은 모습으로 매듭을 짓는 것은 귀농이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저농약, 무농약, 유기재배 농사 등 친환경 농사가 시대의 화두가 된 것은 안전한 먹을거리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친환경 농산물을 단순히 자신들의 건강만을 위해서 필요로 하고, 생산자들은 값비싸게 팔 수 있다는 논리로 규정해 버리면 친환경 농사도 상업적인 범주에 갇혀버립니다. 그러다 보면 관행농법과 다르지 않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우를 범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우를 범하지 않고 모든 생명을 살리는 지속가능한 농사를 실현하고 싶어서 귀농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한살림의 기본 취지가 해월 선생님의 “밥 한 그릇을 제대로 아는 것이 모든 세상 이치를 아는 것이다”라는 말씀에 충분히 저하고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천도교를 믿었는데, 저의 삶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연결돼 있더라고요. 한살림에서 일하실 때와 농업 현장은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농사에 있어서 동덕님의 특별한 철학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한살림 취지에 맞게 농사를 지어야 하기도 하고요. 좀 거창하지만, 내가 짓는 이 농사는 천지만물을 살리는 농사여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단순히 우리가 어떤 농작물을 재배해가지고 상품으로 팔아가지고 밥을 먹는다는 그런 단순한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굉장히 소중해요. 그렇지만 땅을 죽이는 농사를 지으면 또 안 되잖아요. 그래서 땅을 살리는 농사, 땅을 살릴 수 있는 농사를 짓는 것에 저는 가장 큰 의미를 두고 해왔습니다. 살아있는 땅에서 생산된 인삼이야말로 사람을 또 살릴 수 있는 약재가 되는 것 아닙니까. 특히 인삼은 사람들이 약으로 많이 먹잖아요.그래서 그런 부분에서는 좀 더 마음을 쓰면서, “땅 보기를 어머님 살같이 하라”는 해월 선생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품고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저는 천도교인으로서는 그런 농사를 짓지 않으면 제대로 된 농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재배 과정을 설명하는 도상록 동덕 재배 과정을 설명하는 도상록 동덕 인삼밭에서 인삼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인삼을 직접 재배하시고, 또 홍삼 제품으로 제조하고 계신데, 선생님이 만드신 제품을 드시고 건강이 좀 회복됐다는 말씀 들으시면 보람도 크시겠어요. 우리 인삼은 역사적으로 약 중에 상약이고 그런 꾸준한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유행을 타지 않는 건강식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홍삼을 믿고 이용하고 활용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또 생활습관, 개인의 특성이 잘 맞아야 효과를 볼 수 있겠죠. 그런 부분들이 각자 개개인의 체질과 잘 맞으면 중증 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한 사례는 분명히 있죠.선생님, 특별히 인삼 농사를 하시게 된 계기도 있을 것 같은데,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일단 고려인삼은 우리 한반도가 고유한 원산지로 보시면 돼요. 고려인삼은 한반도를 품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끼친 영향이 너무나 큰 민족문화유산 입니다. 여기서 일일이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고려인삼은 우리민족의 운명과 그 궤를 함께했다고 확신합니다. 그 부분은 저의 학위논문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한반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고려인삼을 재배해 온 거죠. 우리가 동학이냐 서학이냐, 했을 때 내가 동쪽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동을 서라 하며 서로 동으로 하겠느냐 그런 이치죠.일단 그래서 저는 우리 한반도에서 나는 인삼을 가지고 어떤 질병으로 고통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고 충분히 그걸로 보람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고려인삼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을 치료하고 예방을 했기 때문에 저는 그 맥을 잇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남북이 또 분단돼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휴전선이 가로막혀 있어서 참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인삼은 서늘한 땅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 남쪽에는 인삼을 심을 수 있는 땅이 점점 고갈돼 가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는 기후위기를 불러왔고 기후위기의 가장 취약한 부분의 하나가 농사 입니다. 사과를 비롯한 과일값이 갑자기 폭등한 이유는 우리나라 농산물의 유통구조도 한몫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후위기 입니다. 연구자들의 견해에 따르먼 2090년 쯤에는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고려인삼 재배할 수 있는 땅이 현재와 비교해서 5% 밖에 남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려인삼의 재배지는 위도가 높은 북쪽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부터라도 북쪽과 자연럽게 교류하면서 고려인삼의 재배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고려인삼을 계기로 남북이 교류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가공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도상록 동덕 가림다영농조합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동료들과 함께 선한 마음이 향하는 선한 일들이 결국은 세상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로 만들어간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이 사람과 땅과 사람과 자연을 함께 살리는 농사가 되어야 하죠. 어느 한 부분만 보고 농사를 짓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저는 보기 때문에 이제 하늘, 땅, 사람을 조화롭게 보아야 겠죠.천지인이 다 이롭게 할 수 있는 농사, 그래서 그런 부분이 저의 보람으로 나타난다면 굉장히 소중하게 남을 것 같습니다. 농장과 공장을 돌아보며 선생님이 홍삼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담는 마음과 함께 작업을 같이 하시는 동료분들과도 굉장히 끈끈한 연대, 팀웍이 돋보이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우리가 일을 함에 있어 추구하는 가치가 각기 다르면 일이 잘 안 되거든요. 그런데, 그분들이 공감하고 동감해주기 때문에 같이 일을 저는 할 수 있다고 보고 서로가 동감하는 순간 확실한 상승작용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단순히 그냥 밥벌이를 하는 것이 아니다, 땅과 사람과 하늘, 자연을 살리는 그런 일을 한다는 가슴 뿌듯함이 우리 내부에서 함께 흐른다고 생각합니다. 올해가 대신사 출세 200주년을 맞이하며 홍삼 판매 수익의 일정부분을 성금으로 돌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교인분들게 큰 울림을 주고 계신데 천도교 신앙의 힘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제가 천도교 신앙을 하게 되어 운이 좋습니다. 천도교나 동학을 몰랐다면, 천도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저는 사람과 땅을 이해하는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끈끈한 연대에도 한없이 모자랐을 것입니다. 해월 선생님의 ‘밥 한 그릇 사상’, 이 부분이 저한테는 절대적이었고 그런 마음이 결국은 지금 저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고 내가 그 부분을 현실에 맞게 키워나가느냐, 이 부분에서는 당연히 저는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수익금의 일부를 대신사님 출세 200주년 행사에 조금 도움이 되도록 하려고 합니다. 저는 제 존재의 가치를 한울님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한울님이 내려주신 거지 스스로 이룬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신앙의 힘으로 묵묵히 주어진 길을 가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혹시 가슴에 품고 계시는 스승님의 말씀이 있다면 어떤 말씀이 있을까요? 조금 전에도 약간 언급했습니다만, 해월신사님께서 성(誠)경(敬)신(信)편에서 하신 말씀인데요,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님의 살같이 하라”는 구절입니다. 땅이 살면 사람이 살고 땅이 죽으면 사람도 살지 못합니다. 해월 신사님께서 ‘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디 땅 뿐이겠습니까? 천지 만물을 아끼고 존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동덕님께서 농작물을 재배하고 가공해서 유통하는 과정에 스승님 말씀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겠어요 그렇죠 일단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저 스스로가 굉장히 중요한데요, 저는 한울사람으로서 한울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저의 존재가치를 한울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의미가 없다고 봐요. 그래서 그 한울 일이라는 것이 나를 살리고 남들도 살려내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재물을 갖게 된다면 그것도 사람을 살리고 나도 살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해요.본래 내 것은 전혀 없잖아요. 다 한울님이 내려주신 어떤 재물에다가 나의 일 노동이 합쳐져서 비로소 재화가 되는 거잖아요. 동덕님이 재배하신 인삼으로 만든 홍삼을 드시는 얼굴도 모르고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도 모르는 분들, 오직 선생님의 홍삼을 통해 선생님과 만나고 계시는 분들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한말씀 해주세요. 그리고 가림다 영농조합에서 생산되는 홍삼제품의 특성을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이 사실 전달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저는 이심전심이라는 말을 믿어요. 그건 제가 얼마큼 정성을 들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봅니다.우리 사회 시스템이 단절돼 있고 눈에 잘 안 보일지는 모르지만 제가 정성을 들이면 분명, 받아보시는 분들께서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저희 들은 인삼을 생산할 때 기본적인 약속을 지키려 하고 있습니다. 첫째,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농사을 짓다보면 풀과 굉장한 갈등을 해야합니다. 적당하게 타협을 해야 하는데 농촌의 일손 부족으로 그냥 제초제를 사용하여 말끔하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농사방법입니다. 이것은 땅을 죽이는 행위이고 결국 사람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저희들은 사람의 손으로 뽑습니다. 둘째,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화학비료는 식물 에게는 정크식품입니다. 그런 화학비료를 사용하여 재배한 작물은 사람에게도 좋을 리가 없겠지요. 셋째, 토양살충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농법은 뿌리를 주로 이용하는 작물이기에 굼벵이나 거세미같은 땅속 벌레들이 인삼의 생육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미리 예방을 하는차원에서 땅속에댜 농약을 사용합니다. 벌레들이 살지 못하는 땅에 서 재배된 작물이 사람에게 도움을 줄수는 없겠지요. 넷째, 가축의 분뇨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축 사료는 98% 이상 수입에 의존하는데, 수입 사료의 원료가 되는 곡물은 유전자 조작된 작물이 대부분 입니다. 그런 곡물을 먹고 배설한 분뇨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거름을 사용합니까? 저희 들은 인삼을 심을 밭의 땅심을 돋우기 위해 2년동안 밭에 수단그라스, 호밀, 보리 등을 심어 자라게 한 다음 갈아엎기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땅심을 돋우고 마지막에 볏짚을 충분히 넣어 받을 만든 다음 인삼을 심습니다. 따라서 퇴비나 축분 등 별도의 거름을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덧 붙힌다면 저희들은 홍삼을 만들어 3년 간저온 숙성시킵니다. 그러한 원료로 홍삼액을 추출하기 때문에 홍삼 추출액이 부드럽고 풍미가 좋아집니다. 홍삼 달이면서 이것을 드시는 분들이 건강하시면 좋겠다고 저는 거기서 그렇게 기도를 해요. 스테인리스 추출기 속에 들어있는 거지만 저는 진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과 정성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스테인리스 추출기를 보면서 홍삼을 드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도상록 동덕 충남 서산에 위치한 가림다마을 영농조합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어떤 것이 있을 까요? 두 가지 바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려인삼이 남과 북에서 각기 무형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무형문화재라고 하고 북쪽은 비물질 문화유산이라고 합니다. 저는 고려인삼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재로 남과북이 힘을 합쳐 공동등재를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두번째는 고려인삼을 남과북이 공동브랜드로 만들어 고려인삼의 세계화를 이루어냈으면 합니다. 이것의 의의는 한민족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려내는 문화적인 측면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코로나19 등 앞으로 예견되는 셰계 적인 감염병을 예방하는 차원으로서 고려인삼을 이용한 신약개발이 남과북이 그간 축적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인류에게 도움이 되도록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남과 북이 서로 미워하지 말고 혐오하지 말고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소통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입문의)https://smartstore.naver.com/garimda 리플렛 참조 가림다마을 영농조합 법인 리플렛 가림다마을 영농조합 법인 리플렛 -
한울님의 은덕으로시일식에 앞서 주문수련을 하고 있는 유재원 선도사 “나는 천도교를 안 한다고 했는데, 우리 고모부가 나를 포덕 시키기 위해 대구에서 부산까지 오셨어요. 저를 포덕 시켜야 집안이 다 포덕이 된다고요. 새벽에 5시 기도식을 하시는데, 가만히 혼자서 생각하니 아, 이거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고모부가 나 때문에 이렇게 오셨는데 안 되겠다. 벌떡 일어나서 고모부, 저 입교하겠습니다, 말씀드리고 입교를 했습니다.” 대동교구에서 만난 유재원 선도사는 입교 후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랜 신앙의 역사를 이어온 집안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를 이어 지극한 정성으로 살아온 삶의 궤적이 느껴졌다. 천도교를 하시면서 어떤 점이 큰 힘이 되었는지 말씀해주세요. 한울님 잘 모시고 항상 우리가 수시로 뭔 일 있으면 아이고 한울님, 아이고 우리 스승님 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건강합니다. 크게 걱정 안 하고 사는 것, 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게 전부입니다. 제 형제들이 7남매인데 거의 다 천도교를 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6.25가 끝나고 그 이후에 이북 평양사람인 우리 고모부가 거제 수용소에 계시다가 나오면서 우리 집 주소를 갖게 되셨죠. 거기 계시다가 나오시니 갈 곳이 없으니까 우리 집을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집이 고모부의 처갓집이죠. 우리 집에 계시게 되면서 우리 집안이 천도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옛날부터 천도교를 신앙을 좀 하신 분이니, 고모부가 집에 오시면서 우리 집안이 전부 다 천도교 집안을 만드신 거죠. 저는 천도교를 젊을 때는 안 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천도교를 하게 되었고요. 집안 어르신들이 천도교를 하셨으면, 어릴 때 어르신들이 어떻게 신앙생활 하셨는지 혹시 기억나시는 거 있으세요? 선대에서부터 천도교를 열심히 하셨어요. 내가 한 예닐곱 살 됐을 때 시골 동네에 자라면서 우리 외갓집 외할아버지가 저녁이 되면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밥 먹는 걸 좋아하셨어요. 외할아버지가 21자 주문을 자꾸 외우면 병도 안 오고 건강해지고 똑똑해진다고, 무서움도 없고 귀신도 없다고 하시면서 가르쳐주셔서 제가 팔을 흔들며, "지기금지 원위대강.." 온 동네를 뛰어 다니면서 주문을 외웠던 기억이 나요. 천도교 신앙을 하게 되면서, 외할아버님 말씀처럼 21자 주문이 두려움을 없애주기도 하던가요? 저는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제가 교통사고도 세 번이나 크게 당했습니다. 차가 완전히 다 부서져 버렸는데 몸에는 조그만 털끝 하나 다친 곳이 없어요. 급발진 사고였는데, 한올님이 돌보지 않으셨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보고 대동교구 일 잘 하고 인재를 양성시키라고 살려준 것 같아요. 죽음의 고비를 세 번, 네 번 겪으면서 이렇게 멀쩡한 걸 보면 정말 기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어요. 항상 한울님이 돌보고 계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님께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고 그 덕에 우리들이나 또 우리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고 또 그 덕에 다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홍암 나인협 선생의 흉상을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세우다 유재원 선도사는 현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조성된 나인협 선생의 흉상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과거 대연교구 시절 직접 화단을 정비하다가 비석을 발견하는데, 바로 나인협 선생의 묘비였던 것. 그때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듯했다. 나인협 선생을 기리고 선생의 업적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고 그 일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때부터 지자체와 협력하여 흉상을 세우는 일에 힘썼다. 그리고 부산시 남구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으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선생의 흉상이 조성된 것이다. 나라를 잃고 땅을 빼앗긴 식민지 시기, 천도교신앙이 보국안민의 실천으로 이어진 것처럼 유재원 선도사의 신앙이 실천으로 이어지기까지 한울님의 은덕이 모든 순간마다 운명처럼 펼쳐졌다고 말하며 아직 할 일이 많다고 힘주어 말했다. 홍암 나인협 선생의 흉상(부산일제강제동원역사관) 홍암 나인협 선생과 부산 남구와의 인연, 표지석(같은 곳) 나인협 선생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서, 1872년 10월 8일 평남 성천에서 태어나 포덕 47년(1906) 11월 30일 의암성사로부터 홍암(泓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19세인 1892년 동학에 들어 동학혁명에도 참여하였다. 나인협은 의암성사를 비롯하여 권병덕, 나용환, 박준승, 이종훈, 임예한, 홍기조, 홍병기와 함께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동학혁명에도 참여한 9명 중 한 사람이다. 해방 후 평남 성천에 머무르면서 교회 원로로서 활동하다가 1.4후퇴 때 월남하여 부산 피난민촌에서 살다가 포덕 93년(1952) 환원하였으며 빈소는 천도교부산시교구에 마련되었다. 부산 대연동 산 중턱에 안장되어 있던 선생의 유해는 포덕 114년(1973) 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
청숫물을 많이 먹으면 건강해져요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칠순 선도사 “제가 태어날 때부터 천도교인은 아니었어요. 결혼을 하고 서울에 살았는데, 우리 영감님이 일요일마다 어디를 가더라고요. 어딜 그렇게 가냐고 물었는데, 이 다음에 알려줄게, 그러고 안 알려주더라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 데려간 곳이...” 남편은 일요일마다 집을 나섰다. 신혼시절 남편을 따라 간 곳이 바로 서울의 천도교중앙대교당이었다. “이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꾸 다니면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남편과는 아홉 살 차이, 남편이 보기에는 ‘아기’같았을 거라고 말하는 이칠순 동덕은 이제 구십을 넘겼지만 매우 정정하셨다. 또랑또랑한 눈빛과 분명한 말씨, 그리고 상냥한 표정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기쁨이 넘쳤다. 남편을 따라 천도교당에 나가기 시작하여 스물 예닐곱에 입교했다. 60년이 넘는 세월 신앙생활을 했다. 영화사 제작부장으로 일했던 남편은 4.19와 5.16라는 시절의 풍파를 맞으며 영화산업이 내리막길을 향하게 되어 이칠순 동덕 스스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힘들었던 젊은 날, 고생도 아픔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때를 회상하면 아련해진다고 말한다. "내 고생한 얘기를 하면 기도 안 차고 한도 끝도 없습니다. 내가 한복 바느질을 30년 했어요. 내가 벌어서 살림 해 나가고 그렇게 살았죠.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신앙의 힘으로 버틴 거죠. 내가 서울 살다 여기 부산에 내려온지 한 60년 돼요. 이사 오고서 시일식에 한 번도 결석을 안 했어요. 해마다 개근상 타요. 천도교 신앙이 나를 살린 거예요” 매주 시일식 나오시면서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세요? 동덕님들을 만나면 화기애애 하고 시름을 다 잊고 그냥 좋아요. 점심 맛있게 차려줘서 고마운 마음으로 먹고요. 지금 여기서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요. 그런데 아주 건강합니다. 걱정이 없어서 그런가봐요. 교회에 나오면 천덕송을 같이 부르니까 좋지. 옛날에 수련 다닐 때도 많이 불렀거든요. 내가 목소리가 좋다고 잘한다고 그랬어요. 천덕송 부를 때나 경전 봉독 할 때 다들 잘한다고 말해줬어요. 집례도 자주 봤고요. 이제 나이를 먹으니까 숨이 차서 못하지만, 그런 옛날 생각도 나고 참 좋아요. 무엇보다도 동덕님들하고 가족처럼 그렇게 잘 어울리는 게 좋아요. 내가 이제 나이가 많으니까 나한테 그렇게 대접을 안 해줘도 되는데 대우를 너무 극진히 해주니까는 어떤 때는 미안하기도 하고 점심 먹다가 남은 음식 집에 가서 드시라고 또 싸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어떤 때는 너무 미안해서 시일식에 가지 말까 하는 마음도 들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또 그게 아닌 거예요. 아침 5시면 꼭 청수를 모시고 그러고 나면 교회 가야지, 하는 마음이 생겨요. 또 시일식 아침마다 우리 아파트 앞에 나를 데리러 오시는 분도 계세요.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 평소에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계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또 신앙생활을 통해 선생님의 삶을 변화시킨 경험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나는 바느질을 오래 했는데, 주문을 외워가면서 했어요. 그러면 주변의 사람들이 뭘 맨날 그렇게 중얼거리고 앉아있냐고 물어요. 그럼 저는, 당신 내들도 해보시라고 해요.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따라해보라고요. 그럼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죠. 천도교라는 교회가 있는데 그게 주문이다. 예수교에서 하나님, 아멘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거다. 그렇게 말해주곤 했죠. 주문을 외우면 잡념이 하나도 없어져요. 잠 안 올 때도 주문을 외우면은 그냥 어느 결에 잠이 오는지 그냥 잠들고 말죠. 제 증손녀가 이제 4살인데 장주를 목에 걸고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그래요. 저는 우리 신앙이 실천이라고 생각해요. 실천이라는 게 딴 게 없죠. 사회생활 하면서, 남에 대해 흉 안 보는 것. 그리고 나는 그냥 항상 기뻐요. 속상할 일도 없고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에도 신앙의 힘이 컸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수련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도 있으세요? 우리 영감님이 말년에 많이 아팠어요. 내가 11년동안 대소변을 받아냈죠. 그래서 정부에서 상도 받았어요. 참 힘들 때도 많았는데 지금은 그 시기가 다 지나갔어요. 돌아가신 영감님은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어요. 덕분에 저도 수련을 많이 다녔죠. 영감님이 못 가면 저 혼자라도 갔으니까요. 참 신비한 일도 있었어요. 우이동에서 처음 수련을 하는데, 내가 수련이라는 걸 알지도 못하면서 주문을 외웠어요. 그렇게 현송을 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영감님이 아래 위로 정장을 하고 내가 수련을 하고 있는 그 복판으로 들어오더니 어느 분과 대화를 하면서 뭔가를 주고는 나가더라고요. 나는 졸지도 자지도 않았는데 마치 꿈처럼, 현몽으로 나타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내가 수도원장님한테 가서, 그 말씀을 드렸더니, 방금 편지가 왔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때는 전화도 없을 때잖아요. 집사람이 처음 수련회에 갔으니까 잘 지도해달라는 편지가 왔다면서 보여주더라고요. 그런 현몽이 진짜 다 있더라고요. 참 신기했어요. 천도교인으로 사시면서 선생님의 삶에 어떤 점이 가장 좋은 점으로 남아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또 다른 분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마음공부를 하면 좋은지 그 비결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우리 친구들한테도 그러거든요. 힘든 일이 있어도 하는 청수 한 그릇이면 뭐든지 해결이 난다고요. 우리 영감님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하더라고요. 나는 살아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죽는 거니까 나 죽으면은 아무것도 다 필요 없고 청수 한 그릇에 심고만 해달라고 하셨어요. 영감님 돌아가시고 나서 그 뜻에 따라서 지금까지 청수 한 그릇으로 끝이에요. 참 열심히 천도교 신앙을 했어요. 저는 9시 기도식과 청수를 지극히 모십니다. 월성미, 연성미도 한 번도 안 빠졌어요. 정성이 지극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딸 하나 낳아 키우면서 딸을 이 부산 촌구석에서 서울 이화여대 대학원까지 졸업시켰고 교수까지 됐으면 내 할 일은 다 했다 싶더라고요. 마음공부는요, 우리는 천도교인이잖아요. 주문 외우고 마음을 비우고 사는 거예요. 그저 마음을 비우고 힘들어도 되겠지, 되겠지 하면 되더라고요. 정말로 그렇게 되더라고요. 지난 해 대동교구에서는 이칠순 어르신의 90살 생일잔치가 열렸다. 인터뷰 내내 꽃처럼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에서 하루에 한 송이 그렇게 삼백 예순 송이, 그렇게 90년을 살아오신 수천 수만의 꽃송이가 활짝 피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눈이 부시게, 환한 빛으로. 이칠순 선도사, 대동교구 꽃밭에서 꽃처럼 맑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
대동교구 여성회의 힘대동교구에는 조금 일찍 도착했다. 이른 새벽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하여 대동교구에 도착하니 시일식을 앞두고 여성회 교인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서둘러 인사를 하며 식당에 들어서자, 멀리서 온 기자를 반기며 냉수부터 한 잔 대접을 받았다. 분주한 가운데 시일식은 시작되었고 식사를 마치고서야 잠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유쾌한 세 여자와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매주 시일식마다 식사를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천도교에서는 ‘모심’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늘 이렇게 ‘모심’을 실천하고 계신데, 애쓰시는 만큼 보람도 크시겠어요. 네. 아주 기쁩니다. 저희 여성회에서 매주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당번을 정하고 조를 짜서 하고 있고. 특히 자랑하고 싶은 점은 여성회 부회장님께서 농사를 잘 지으셔서 교구 텃밭 농사가 아주 잘 되고 있습니다. 보기에도 아름답고 매주 시일식 마치고 유기농 작물을 먹으니까 동덕님들이 너무 좋아하십니다. 특히 신입 교인들은 여성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분위기가 참 좋다고 하시고요. 여성회는 지금 몇 분이나 활동하고 계세요? 현재 40여 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모이면 즐겁고 좋습니다. 하수희 여성회장, 김성희 총무, 유정수 부회장 대동교구 텃밭에서 정성으로 키운 농작물이 자란다. 교구 일을 하시면서 어떤 점이 그렇게 뿌듯하세요? 식사를 만들어서 어르신들하고 나눠 먹는 모습을 보면, 어르신들의 표정이 너무 좋고 그런 얼굴을 매주 볼 수 있으니까 보람을 느낍니다. 그리고 저희가 호흡이 잘 맞습니다. 총무는 행정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부회장은 텃밭을 가꾸고, 수확하면서 그때그때 어떤 작물을 어떻게 재배할지를 잘 아시고 잘 가꿔주시니까 우리 냉장고를 보면은 밑반찬이 참 많아서 보물창고 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호흡이 잘 맞아요. 우리 여성회는 모든 회원이 한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심’을 실천하고 계시는데, 동덕님들께서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천도교를 해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다른 종교에 가보질 않았지만, 천도교는 형제애가 있어서 좋아요. 우리를 ‘천포형제’라고 하잖아요. 저희 어머니께서 항상 이야기하셨던 게 기억나요. 제가 여성회 활동하면서, 우리 여성회의 화합이 잘 되니까 거기서 느끼는 게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교감하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또 교구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어머니들이 많이 계시니까 지혜를 얻기도 하고, 또래 친구도 있으니까 사회에서 다른 사람 만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인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끝까지 같이 갈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시절 인연이라고도 말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같은 신앙생활을 하니까 오래오래 함께할 것 같은 분들이에요. 함께 있으면 서로 배려해주려고 하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저는 시집 오면서 신앙을 하게 됐는데, 천도교가 좋으니까 계속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 같아요. 와서 직접 뵙고 이렇게 말씀 들으니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앞으로 대동교구 여성회가 꿈꾸는 새로운 계획이나 포부도 있을텐데, 말씀해주시지요. 코로나 이전에는 저희 여성회에서 봉사활동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좀 제한적으로 식사나눔만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사회에 기여하는 활동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널리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환한 웃음으로 만나, 다시 환한 웃음으로 다음을 약속했다. 내 마음 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어,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울님이 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순간들이 더 자주 온다. 한울사람, 한울마음으로 대동교구에 모심의 장이 펼쳐지고 있다. -
극작가 이강백교수 교령사 예방이강백 작가는 천도교 교령사를 방문하여 성금 100만원을 기탁하였다. 29년 전인 포덕 135(1994)년 ‘동학혁명100주년 기념 칸타타’ 국립합창단 정기공연(국립중앙극장 대극장)을 기획하여 성공적으로 공연하였던 이강백교수가 10월 25일 천도교중앙총부 교령사를 예방하고 100만원을 성금하였다. 이교수는 “동학혁명100주년 기념공연를 위해 고부, 백산, 우금티 등의 현지를 답사하였고 100년 전의 동학혁명을 당시의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사건으로 느낌을 전달하려고 시를 썼다.”면서 자신이 29년 전 천도교로부터 받은 100만원을 성금으로 냈다. 이 100만원은 29년 전 동학혁명100주년 기념공연에 대해 감사의 의미로 받은 돈이라고 한다. 이강백교수는 주로 현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우화적인 희곡을 많이 썼다. 주요 작품으로 ‘파수꾼’, ‘느낌, 극락 같은’ 등이 있으며, 2001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2020 보관문화훈장을 받은 작가이다. 이강백 작가(사진출처 : 제7회 늘푸른연극제 공식 블로그) 지난 1월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열린 이강백 작가의 작품 영월행 일기 포스터 (사진출처: 제7회 늘푸른연국제 공식 블로그) -
우암 김명진 종법사 추모식 봉행우암 김명진 종법사 환원 33주기를 맞아 9월 13일 11시 남해선구교구에서 추모식을 봉행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신암 송범두 도정을 비롯하여 서울, 부산 등지에서 많은 동덕이 참석하였다. 박철 선구교구장의 집례로 교회의식에 이어 용암 김환용 도훈의 약력소개, 수인당 손윤자 선도사의 경전봉독(성령출세설), 건암 김대부 동덕의 추모사, 분향, 원암 김용 동덕의 유족대표 인사 순으로 진행 되었다. 건암 김대부 동덕은 추모사를 통해 종법사님의 생전을 회고하며 후학으로서 종법사님의 유훈을 받들어 남해 지역 천도교 발전을 위해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참석한 동덕들은 추모식을 마친후 인근 선산의 종법사 묘소를 참배한 후 예약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곁들이면서 종법사님을 기리는 담소의 시간을 가졌다. 김명진종법사는 천도교 남해선구교구장과 중앙총부종무원장을 역임하는 등 평생을 교단발전과 포덕천하를 위해 애썼고 1971년에는 천도교 최고 예우인 종법사에 추대된 교단의 큰 어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