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뉴스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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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병오년, 붉은 말의 기운으로 새해를 맞이하며새해는 병오년, 붉은 말의 해입니다. 붉은 말은 말 가운데서도 가장 뜨겁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동물을 상징하므로 병오년은 만물이 충만한 기운으로 활짝 피어나는 해라고 합니다. 교인 여러분 한 분 한 분마다, 집집마다, 전국의 각 교구마다 활활발발한 한울기운으로 하시는 일마다 성과를 얻고 내실을 다져서 일년내내 항상 기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중앙총부도 새해를 맞아 붉은 말처럼 포덕교화를 위해 힘차게, 쉼 없이 전진하겠습니다. 지난해 권역별 교역자간담회에서 제안 또는 요청받았던 숙제 외에도 새해에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첫째, 해월신사 탄신200주년을 일 년 앞두고 해월 최시형 신사 연구 자료집을 발간하는 일과 「읽기 쉬운 해월신사법설(가칭)」을 발간하는 일에 착수할 예정입니다. 둘째, 경주 동학교육수련원 수탁입니다. 경주시의 로드맵에 의하면 올해 중순에 공모를 진행한다고 하니 만반의 준비로 우리 교단이 수탁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셋째, 교헌과 규정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는 작업을 지속하겠습니다. 높은 식견을 가진 교인과 교단 운영 경험이 많은 어르신의 조언을 구하고 교단 내의 여러 관계기관과 협조하여 의미있는 성과를 내겠습니다. 넷째, 유튜브 천도교TV의 전문성과 홍보를 강화하여 교인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천도교를 널리 알리겠습니다. 이외에도 천도교 연구소의 활성화, 신입 교인을 위한 수련프로그램 진행, 지방교구 현장방문, 지역별 동학혁명기념사업회와의 관계 강화 등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자강불식(自强不息) 자세로 ‘굳세고 건실하게’ 추진하겠습니다. 해월신사께서 용시용활을 말씀하셨듯이 이전부터 진행되어 온 일이라 하더라도 지금 시대에 맞게, 필요에 따라 조율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온고(溫故)는 과거의 업적이나 성과를 익힌다는 의미이고 지신(知新)은 새로운 것을 깨닫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온고와 지신이 따로 떨어져 있다면 참된 의미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온고(溫故)만 생각한다면 과거에 머물러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고, 지신(知新)만 강조한다면 근본없는 경박한 새로움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전통을 이어받아 혁신을 이루자’와 같은 구호로만 이해한다면 공허한 외침에 그칠 수 있습니다. 두 단어는 서로 짝을 이루어 상호 의존할 때 혁신적이고 역동적인 의미가 드러납니다. 온고(溫故)를 얼마나 잘하는가, 즉 단순히 과거를 익히는 과정에만 그치지 않고 과거를 얼마나 깊이 성찰하고 고갱이를 습득하는가, 동시에 얼마나 멀리 앞을 내다보는가에 따라 지신(知新)의 깊이와 수준이 달라집니다. 성찰의 정도가 부족하면 새로움은 껍데기를 바꾸는 정도에 그치겠고, 한 치 앞만 바라본다면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 앞에 초라해질 뿐입니다. 포덕교화 사업은 성격에 따라 전문성, 정확성, 대중성 등의 가치가 각각 다르게 적용될 수도 있고, 장기, 중기, 단기 등 시간의 경중에 따라 접근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는데 그친다면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요즘 천도교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과 예술가들이 조금씩 늘어난다는 게 느껴집니다. 또한 여러 지자체에서 ‘동학’의 이름으로 조례를 만들어 지원하려는 움직임도 있고, ‘동학’ 관련 기념사업회들도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에 중앙총부와 천도교인들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로 이런 움직임에 호응하면 포덕교화도 활기차게 진행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몇 명의 유능한 지도자에게 맡겨 놓을 일이 아니라 모든 천도교인이 나서야 약간의 성과라도 있을 것입니다. 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 중 “隨運而達德 察機而動作 事事有成矣(운을 따라 덕에 달하고 시기를 살피어 움직이면 일마다 공을 이루리라.)”는 말씀처럼, 새해 붉은 말의 타오르는 기운으로 함께 움직여 봅시다. 한울님의 은덕으로 모든 교인들의 가정이 행복하기를 심고합니다. 글 노암 강병로 중앙총부 종무원장 -
[칼럼] 탑골공원 성역화사업의 주체가 되자금년은 기미년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난지 106주년이 되는 해이다. 필자는 “서울 탑골공원의 재정비와 삼일운동 기록물 추가 설치를 제안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포덕158년(2017년 9월 7일) 종로구청 민원실에 아래와 같은 글을 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탑골공원에 가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삼일운동이 탑골공원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어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탑골공원 담벼락에 기록되어 있는 삼일 운동 장소는 불과 9개 지역(서울, 함흥, 평양, 해주, 철원, 수원, 천안, 진주, 남원)의 기록만 간략히 적혀 있습니다.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삼일운동은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며, 현재의 기록만으로는 일부지역에 국한되어 있어 전국지역에서 일어난 삼일운동을 알리기에는 매우 부족하다고 봅니다. 전국적인 삼일운동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여 탑골공원 전체 벽면에 기록함으로서 살아있는 역사 현장의 교과서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였으면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교육하는 데에 이보다 더 좋은 자료가 어디 있겠습니까? 현재 공원의 관리 상태 부실로 그나마 기록되어 있는 것 들 조차도 읽어 보기기가 힘듭니다. 삼일운동 100주년이 1년 반 후로 다가오고 있는 이때 민족정신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탑골공원을 민족정신의 성소로 더욱 잘 가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비폭력, 일원화, 대중화의 3대 원칙을 지킨 삼일정신의 현 시대 구현이야 말로 현 시대의 사회적 갈등, 학교폭력, 통일 문제 등을 해결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봅니다. 삼일운동을 지도하신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주위에도 울타리 또는 경계라인을 설치하여 선생을 경배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인 탑골공원을 새롭게 단장하시고 민족정신 함양 및 교육에 더욱 힘써 주시기를 부탁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종로구청은 2017년 9월 12일에 필자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이메일을 보내왔다. “안녕하십니까? 우선 구정 발전을 위하여 좋은 의견을 주신 정ㅇㅇ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탑골공원 재정비 및 3.1운동 기록물 추가설치 제안에 대하여 답변 드립니다. 우리 구는 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조성 및 운영이 필요하다는 선생님의 의견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현재 공원에는 3.1운동과 관련된 안내판, 비, 부조 등이 있으나 추가 설치 등 확대하는 사항은 전문가 자문, 관련단체(자) 의견 수렴, 역사적 자료의 고증, 사업 예산의 확보 등 종합적이고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사항으로 단 기간 내 추진이 어려움을 선생님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며, 향후 탑골공원 재정비사업이 추진될 경우 선생님의 의견을 참고하여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소중한 의견을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문의사항은 종로구 공원녹지과로 연락주시면 성심껏 답변 드리겠습니다.” 민원신청번호는 1AA-1709-060816 이며, 민원답변번호는 2AA-1709-072387이다. 그 후 7년이 지났지만 필자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2023년, 재작년에 탑골공원 성역화와 관련된 학술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는 사실을 최근에 와서야 알았다. 얼마 전 필자는 서울시 종로구청 문화유산과(김ㅇㅇ 담당주무관)와의 통화에서 종로구청에서 진행 중인 “서울 탑골공원 개선사업”에 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사업내용은 1) 담장정비 및 내부 조경, 편의시설 개선, 2)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호각 개선, 3) 3.1 만세운동 기념관 건립이며, 사업기관은 2023년 1월 1일부터 2029년 12월 31일까지이다. “3.1만세운동 기념관 건립”내용은 3.1만세운동의 근원지인 탑골공원의 역사를 전시 교육하기 위한 기념관을 인근 국공유지 내에 건립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7년 전의 종로구청민원 내용의 요지를 다시 설명하고 개선 사업에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천도교 경전에 있는 「안심가」에는 최제우선생의 예언적 경고로서 일본이라는 존재가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부정적 대상으로 보고 강한 적대감을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시켰다. 이러한 시대 인식은 동학을 중심으로 한 당시 농민 세력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펼칠 수 있었던 사상적 힘이었고, 천도교 교단이 1919년 3.1운동을 주동한 종교적 동력이었다. 이처럼 동학·천도교는 당시에 광범위한 민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였다. 탑골공원은 그 여건이 공원이라는 조건 때문에 기념비나 동상이 세워져 있을 뿐 전국각지에 산재된 이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알아보고 정신을 기릴 흔적이 거의 없으며, 탑골공원 3.1운동 관련 유적 보존의 시급성을 지적하여 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3.1운동의 요람 탑골공원 주변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후세들에게 탑골공원에서부터 숭고한 교훈을 보여줘야 한다”라는 제안이 독립운동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1900년 이후 제일의 사적지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탑골공원이라고 답해도 될 것이다. 3.1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그 정신이 행동으로써 전국에 퍼지게 되었던 근원지가 바로 이 곳 탑골공원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우리에게는 현대사의 성지인 셈이다. 한편, 1894년 동학혁명과 1919년 3.1운동이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는데, 손병희선생과 함께 동학혁명과 3·1운동, 두 거사에 함께 참여했던 동학천도교인이 민족대표 33인 중 15명에 이르고, 그 중 9명은 동학혁명에도 참여했던 동학 조직의 대접주들로서 전국 각처에서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동력이 되었다. 2017년 종로구청의 민원 제안내용에 추가를 한다면 탑골공원부터 삼일대로와 북촌거리를 잇는 독립운동 만세거리 성역화를 조성하여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삼일 독립 운동의 중심지라는 자존심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천도교단은 탑골공원의 성역화 사업에 지속적인 협의와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천도교단이 성지를 챙기는 노력들이 결실을 보일 때 잃어버린 3.1운동 주체로서의 역할을 되찾게 될 것이다. 글 이암 정의필(울산대 명예교수, 울산시교구, 도정) -
[칼럼] 3·1 대혁명을 제대로 지키자올해도 어김없이 106년 전의 3·1절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정부 행사는 비록 작년 12.3 비상계엄을 발효하면서 벌어진 국헌 문란으로 수괴가 체포되어 단죄될 지경에 처해서 약소하게 기념식을 거행하였지만, 전국적으로는 다른 해 못지않게 많은 지자체와 수많은 시민단체가 나서서 106년 전의 함성을 재현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날 가장 기뻐하고 가장 기념할 곳은 우리 천도교단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오전 11시 중앙대교당에서는 엄숙한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기념식 뒤에는 참석한 교인 모두가 함께 손에 손에 태극기와 궁을기를 들고 인사동을 거쳐서 탑골공원까지 행진했다. 인사동 거리를 지나면서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주변 시민들의 박수와 특히 신기한 듯 쳐다보는 외국 관광객의 카메라 셔터가 연신 터져나갔다. 탑골공원에서는 의암 성사님의 동상 앞에서 다시금 3·1절의 의미를 되새기며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은 심고를 드림으로써 행사가 종결되었다. 3·1대혁명은 우리 천도교의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모든 교인을 하나가 되게 하는 날임을 확인한다. 3·1대혁명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 교단이 들인 노력은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동학혁명이 좌절된 후 혁명의 최후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 성사님은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고 1900년대 초의 민족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성사님은 언론과 교육, 출판 운동 등으로 민도를 높이는 개혁을 전개하다가 1910년 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당하자 “내 앞으로 10년 안에 반드시 나라를 되찾으리라” 다짐하셨다. 우선 성사님은 1913년부터 전국의 천도교 교역자 483명을 차례로 불러 우이동 봉황각에서 특별 연성수련을 실시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장차 국가를 위해서 쓰일 인재를 미리 양성해 놓고자 한 지도자의 혜안이었다. 세계 제 1차대전이 종결되고 민족자결의 운동이 세계적으로 유행하자 성사님은 우리의 독립을 선언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직감하고 1918년 4월부터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중앙대교당 신축을 결의해 신도들의 헌금을 받기 시작했다. 독립자금 마련을 위한 위장술이었다. 드디어 1919년 천도교는 전체 인구 1,600여만 명에 300만 명의 신도수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단이 되었다. 천도교는 일제의 압제에 대항할 충분한 인원과 조직 그리고 자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학도들만이 참여했던 동학혁명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절감했던 성사님은 3·1혁명을 단독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3·1혁명은 제2의 동학혁명이 되어야 했고 더 이상의 실패가 아닌 성공하는 혁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도교는 모든 종단과 정관계 모두에 연락하였다. 민족운동에 동참을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도급 인사들은 거절하고 있을 때 마침 개신교단에서도 비밀리에 독립청원이 추진되고 있었다. 접촉을 시도한 여암 최린 선생의 노력으로 천도교와 개신교는 함께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이웃 종단의 참여를 모색하였다. 이에 불교계가 동참하니 비로소 종교계의 연합적 성격으로서의 독립혁명이 전개될 수 있었다. 3·1일 한반도는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진동했다. 1910년 일본의 강압에 의한 국토 병탄으로부터 10여 년을 인고하던 전 민족이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함성의 무리에서는 신분, 연령, 남녀 차이도 없었고, 이념과 종교도 통합되어 있었다. 선두에는 우리 천도교인들이 앞장섰고 수많은 민중이 동참하였다. 그만큼 희생도 컸음은 당연하였다. 교단의 모든 조직과 인원 그리고 재정적 뒷받침까지 그야말로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3·1 대혁명은 상해 임시정부의 설립으로 이어져 우리 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고 전세계에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단합성을 과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3·1혁명의 3대 원칙인 운동의 대중화, 일원화(대동단결) 그리고 비폭력은 지금까지도 3·1운동의 최대 정신으로 남아 인류의 위대한 가치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평가이다. 과연 국민들에게 3·1혁명을 물어보면 누가 먼저 떠오를까? 단연코 유관순일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역할이 중심이었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통계치로도 당시 참여한 종교계 인물과 구금 희생된 인명의 수에서도 기독교가 훨씬 많다고 한다. 심지어는 100주년이었던 2019년에 남북합동 기념식을 위한 평양대회에서는 천도교는 아예 정부 초청에서도 빠져버려 있었다. 물론 우리 교단이 타 종단이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것에 대하여 폄훼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감사하고 치하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올바른 3·1혁명의 평가일까? 천도교단이 나서서 한 준비는 물론 민족대표 33인을 모을 때 개신교단 측에 참여의 조건으로 지급한 거금 5천 원은 대부분이 모른다. 특히 이종일 선생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인쇄와 운송과정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그 극적임에도 불구하고 알아주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 경전 말씀에 “남의 적은 허물을 내 마음에 논란하지 말고, 나의 적은 지혜를 사람에게 베풀라”고 했다. 그렇다. 진정한 천도교인이라면 아무러면 어떠냐 3·1혁명 이후 우리 민족이 단합되고 독립운동의 전선이 강화되어 끈질긴 독립전쟁을 이어 나갈 수 있으면 됐지. 다 맞는 말이다. 설마 성사님과 3·1혁명을 준비한 선배들이 누가 알아달라고 하신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주인이 아닌 객이 되어버린 듯한 우리의 왜소한 모습은 모두를 쓸쓸하게 한다. 그래서 다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이제부터라도 누가 알아달라는 측면이 아니라 교인들의 가슴에 더욱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었으면 한다. 중앙총부의 더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또한 학문적 연구는 더욱 절실하다. 결국 남는 것은 학자들의 연구 축적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교과서 수록과 언론의 대국민 홍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성사님이 양성한 483명은 3·1혁명을 위해서 고향에서 어떤 일을 하였는가? 보성사 팀의 끊임없는 독립선언 제의는 어떤 의미였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던 성사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3·1혁명이 시작된 그 순간의 천도교 지방 교구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정말로 기독교인보다도 천도교인이 참여 숫자가 적은 것일까?… 3·1 혁명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 연구할 주제는 너무나 많다. 나아가 천도교인이 3·1혁명의 진정한 주인이고자 한다면 3·1정신을 제대로 계승한 행동을 해야 한다. 3·1혁명의 가장 위대한 정신은 자주와 단합이다. 과연 우리는 대외적으로 얼마나 자주적인가를 고민해 봐야하고, 무엇보다도 국민화합에 앞장서야 한다. 마침 오늘의 한국사회만큼 갈등이 심화된 나라도 없다고 한다. 우리가 각자위심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동귀일체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모범적인 모습을 솔선해야 한다. 대화합의 정신이 3·1정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3·1혁명의 주인은 천도교이기 때문이다. 글 년암 임형진(동서울교구, 경희대 교수) * 본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3·1정신은 기록·기억·기념되어야 할 시대적 유산 “역사 왜곡이 웬 말인가요?”3·1정신은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며 기념해야 할 시대적 유산이다. 1905년 을사늑약 후 일본에게 조선이 강제로 합병되었던 1910년, 우리는 나라 잃은 설움과 핍박과 압박의 고통으로 하루하루가 인격이 무시되고 차별과 불평등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용감하고 끈질긴 우리 민족은 1919년 3·1만세 운동으로 그 찬란한 힘을 발휘하였고 전 세계는 이에 놀랐다. 위대한 3·1정신은 민족의 유산으로 길이길이 전해질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기록하고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역사는 한순간에 왜곡되기 때문이다. 역사왜곡으로 문제가 되어서 불편한 외교관계가 왕왕 있어 왔다.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불편한 관계를 가져 왔었다. 특히 3월이 되면 일본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한다. 일본은 1982년 7월에 일본의 초, 중,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한국의 고대사, 근대사, 현대사 등을 왜곡 기술하면서 특히 현대사 부분을 심각하게 왜곡하여 기술하였다. 한국 “침략”을 “진출”로, “외교권 박탈과 내정 장악”을 “접수”로, “토지약탈”을 “토지소유권확인 관유지로의 접수”로, “독립운동 탄압”을 “치안유지 도모”로, “조선어말살정책”을“조선어와 일본어 공용어 사용”으로, “신사참배강요”를 “신사참배장려” 등으로 왜곡 기술하였다. 이에 국내언론과 일본언론에서는 일본 정부의 처사를 강력히 비판하고 시정을 촉구하였으며 국내에서는 대대적인 반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정부로부터 1982년 8월 26일 문제된 부분에 대해서 시정하겠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그러나 여전히 만족할만한 역사 왜곡 부분이 시정되지 않은 채 문제로 남아 있다. 역사 왜곡은 이렇게 다른 나라에 의해서 왜곡될 뿐만 아니라 국내 학자에 의해서 혹은 정부에 의해서, 그리고 요즈음 대세인 유튜버들에 의해서 왜곡되기도 한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인터넷의 발달로 한 사람의 잘못된 역사인식으로 인해 발언한 잘못된 역사가 일파만파로 아주 쉽게 대중들에게 전파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칭 역사 강사라는 사람이 정치적 이념 논리에 휩싸여 학생들을 혹은 국민들을 잘못된 역사의 길로 선동하고 있으니 너무나 마음 아픈 현실이다. 2023년 육군사관학교 교내에 설치한 독립군 및 광복군 영웅 흉상 철거 논란과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공동 청사에 설치된 홍범도장군의 흉상 철거 논란에 관한 일이며, 최근에는 김구 선생이 중국인이라는 왜곡된 해석 등이 그 분들의 독립운동 정신과 활동에까지 누를 끼치게 된 점은 3·1절을 맞아 머리숙여 반성해야 할 일이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무뢰함이 선을 넘어 서고 있는 현실에서 역사 올바로 세우기는 요원한 시대정신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2024년 외교부 홈페이지에서는 2023 일본개항 부분에 “일본의 과거사 반성”, “역사왜곡” 언급이 통째로 빠져버렸다. 우리가 국제외교상 양보를 하더라도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지켜야 하는데 그 마지노선이 무너져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친일청산이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일어 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친일청산은 우리의 과제이며 친일청산이 깨끗하게 이루어 지는 날이 공명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 역사가 바로 서는 사회가 될 것이다. 제106주년 3·1절과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는 3월에 남남갈등이 극에 치닫는 시점에서 3·1정신의 비폭력 평화의 대통합 정신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3·1정신을 선양하고 교육할 수 있는 성역화 사업이 무척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정정숙 (천도교선도사, 근현대사미술관 담다 관장) -
2023 수운문화제 후기인내천 서·예 명인모심전은 2019년에 싹트기 시작했다. 2019년 3·1운동100주년 기념 한국 서예 정예작가전을 기획했다. 3·1운동 하면 천도교와 손병희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천도교인으로서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터에 천도교 이정희 교령을 찾았다. 이러한 취지의 행사를 하는데 천도교가 후원을 좀 해 주시면 주최를 천도교, 주관을 정예작가 협회(회장 염정모)로 행사를 하겠노라 했더니 500만원 후원이 이뤄져서 행사가 성사되었다(101명 참여). 지금도 기록된 영상이 생생하다. 다음해 천도교(교령 송범두)에서 제 1,2회 인내천서예문인화명인모심전이 이뤄졌고 (교령 박상종)3,4회를 맞이 했다. 이렇게 범 서·화단 작가들을 초대해서 하는 큰 행사는 4대 종단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문화, 예술면에서 선두주자가 천도교라 할 수 있다. 종교행사이다 보니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만 어느 정도 극복한 상태다. 전국 서예· 문인화 유명작가들 중 1회 182명, 2회 184명, 3회 220명, 4회 137명 초대되었다. 초대된 작가는 전부 제자들을 거느린 지도자급이다. 4회이다 보니 어느 정도 홍보된 상태다. ‘꼭 이어져야 할 전시’라고 말하는 작가가 있으니 성공 아니겠는가? 초대작가란 서예대전에서 입선1점 특선3점 합 10점이 되어야 초대작가가 된다. 처음 입선하기까지 5번을 냈느니, 7번 떨어졌느니…. 입선 특선하고도 다음 해는 낙선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작가는 1점 남겨놓고 5년을 가는 경우도 보았다. 이리 초대작가가 어려운 것이다. 천도교인 아닌 작가들 이 동경대전을 탐독하고 글감을 골라 작품 한다는 것은 교화되고 있다는 증거다. 천도교를 알리고 가까이하게 만드는 것, 동경대전을 탐독하게 만드는 교화사업도 이런 교화사업이 없다. 서화단의 활성화와 창작 의욕을 북돋우고 작가들에게 큰 후원이 된다. 타 종교단체 기독교 원불교에서 이런 행사를 한다고 하면 천도교인 내가 원불교, 기독교 경전을 탐독하고 작품 하려고 문장을 찾는다고 생각하 면참 아이러니 할 듯하다. 이런 행사를 천도교가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큰일인가? 작가들이 천도교를 이해하고 좀 더 가까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문화보국이란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가 큰 사업이다. 이러한 포덕이 어디 있겠는가 지속 발전되어야 한다. 미술인회 한마당전 미술인회원전은 33회전으로 수운 문화제 덕분으로 처음으로 인사동에서 하는 전시였다. 32년간 전시를 했으나 수운회관에서 하다 보니 미술인회가 있다는 것조차 일반인이 전혀 모르고 있다. 이번에 세상을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관람객들이 작품 수준이 높고 좋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는 돈과 연관되어 있듯 돈들여 하면 반응이 있게 마련이고 효과도 있다. 돈 안들이고 궁색하게 하면 흉내만 내게 될 뿐이다. 33년간 교인들끼리의 행사였고 홍보와 교화라는 측면에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헛되었다. 사람들이 지나는 길목에 음식점이 있어야 되듯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천도교 피켓을 들어야 한다. 이번에 청년작가 대상이 4번째이다. 매 회마다 상금 300만원은 교인 중 익명 기부하시는 분의 후원이다. 참으 로 미담이다. 미래세대 어린이 작품전 에 시상도 150여만원이 들어간다. 천 도교의 꿈나무 육성이다. 이렇게 미술 인회 전시는 의미가 크다. 3,4년간 미술인회 예산은 20년 전으로 돌려졌다. 이것은 시정되어야 한다. 근래 예산이 반 이상으로 줄어든 단체는 미술인회 뿐이다. 기현상도 이런 불합리 도 없는 것이다. 깎인 예산은 회복되어야 한다. 국가, 사회, 종교의 핵심은 문화와 예술이다. 수운문화제로 발돋음 하였으니 지속되고 정상으로 뒷 받침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글_운암 변종제 미술인회 부회장 -
[칼럼] 호모클리마토스로 살아가기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었다. 시간당 30~80mm가 내리는 집중호우가 생기면서 호우특보가 내려지고 곳곳에 침수지역이 생기고, 비바람에 나무가 쓰러지면서 전신주를 쓰러뜨려 정전이 되는 곳이 속출하였다. 서울도심 곳곳이 물에 잠기고, 지하에 내려갔다가 참변을 당하기도 하였다. 물폭탄으로 피해지역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이번 폭우는 엘리뇨의 영향으로 평년보다 6배이상의 장맛비를 준비하고 있다. 장마전선이 오래가면서 강수량이 증가하고 산사태, 집중폭우,폭염이 반복될 예정이다. 몆 년전부터 지구온난화로 기후가 변화를 넘어서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태풍, 폭우, 홍수, 가뭄, 폭설,대형산불 등은 국제적으로 인류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실정이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생존자체를 위협 받게된다. 이에 우리 인간은 호모클리마토스로 거듭나야만 하는 현실이다. 호모클리마토스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파스칼 피코가 주창한 말이다. 기후변화에 대비해 생활방식을 변화하는 사람을 뜻한다. 인류의 진화론에 따라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이어 호모클리마토스로 진화해야 하는 것이다. 기존의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미래시대에 인류는 생존하기 어렵다.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기후변화에 따라 의식주 생활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소비위주의 생활에서 덜 쓰는 생활로, 탄소배출 생활에서 제로 웨이스트 생활로, 기업은 RE100시스템으로 변화해야 우리의 미래는 밝아지는 것이다.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하지, 않고 대중교통과 자전거타고 다니기, 분리수거 잘하기, 물 아껴쓰기, 종이 아끼고 손수건 가지고 다니기, 채식위주 생활하기 등 호모클리마토스로 살아가기는 조금만 신경을 쓰면 가능한 생활방식이다. 해월신사(최시형, 1827~1898 )께서 말씀하신 생태적인 삶이 바로 클리마토스로 살아가기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늘과 땅, 자연이 바로 나와 연결되어 있으며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자연순환적인 삶,생태순환적인 생활이 바로 오늘의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생활방식인 것이다. 정정숙 근현대사미술관 담다 관장 천도교선도사 -
동학의 시작과 끝, 보은취회와 북실전투진달래 봄 - 1893 보은취회 이천 명이 죽었디야 이백이 아니고 이천이랴 아 왜 작년에 동학쟁이들이 솔찬히 왔잖여 그니들이 헤꼬지라도 할깨비 다들 내다보덜 못혔잖여 다들 집집이 찌끄만 문구녁으로 오는 이덜 보기나 혔지 뭐 시천주우우 뭐 어짜구 저짜구 하데 그려 그거여 나는 하도 들어서 눈 감구도 삼천리여 그니들은 그걸 하루종일 주구장창 불러싸데 그거 있잖여 아 내가 글은 못 읽어도 관가 배롬박에 붙은 거 있었잖여 삥드랗게 똥골맹이 그려놨데 자네가 참 모르는 소리 허네 그거는 내가 조금 들었어 누가 선동혔는지 몰르게 헐라고 아 글씨 사발을 엎어놓고 이름을 똥그랗게 둘러서 썼디야 하이고 거 비상하고 신통하네 그란디 고것이 얼마 못갔드라고 전라도 워디여 나는 백날 들어도 기억을 못혀 어짜든둥 전라도 어디 거 찌끄만 냥반있어 내가 고것은 딱 기억을 햐 녹두장군이랴 좋은 시상 한 번 보것다고 죽창을 들고 곡괭이 매고 그냥 막 목숨을 던진거여 그런데 말이여 내가 안 있냐 작년 봄에 왔던 그니들 말이여 나는 문구녁으로 그니들 얼굴을 봤잖여 저 북실에서 죽었다던 이천 명이 다 그니들 얼굴로다가 보이는거여 보리쌀이라도 한 됫박 갖다줬으면, 옥시기 한 댓개라도 갖다줬으면 그니들 좀 덜 서럽게 죽었을거 아닌가 싶은거여 그날로 내가 숨이 잘 안 뱉어져 시상에 진달래가 여기만 시뻘겋게 피는가벼 인자 진달래는 고만 안 피면 좋것다가도 자꾸 그니들 얼굴이 진달래 활짝 핀 것 마냥 뭐시 고로코롬 좋아뵈든지 잊혀지지가 않는거시여 술 한 병만 더 받어와 저어짝 진달래 핀 데 가서 한 잔 올려야것네 <신채원 시, 진달래 봄(2020) 전문> 다시 사람이 하늘이 되는 세상, 보은취회 이곳 보은에서 1893년 새 세상을 꿈꿨던 사람들을 눈을 감고 그려 봅니다. 착한 사람들이었어요. 보은취회는 1893년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중집회로 평가됩니다. 2만여 명이 이곳에 모였지만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고 평화적 집회를 이루며 20여 일간 머물렀어요. 서로 돕고 기대며 유무상자를 실현해 낸 대동세상이었어요. 반짝이는 모든 것들은 나를 위해 태어난 것만 같습니다. 나와 우주가 연결되어 있음은 나와 당신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보은에서 꿈꾼 개벽세상을 걷는 사람들이 시대를 넘어 만나는 순간입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 기억할 말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을 여는 사람, 당신이었습니다. 다시 개벽, 다시 하늘, 다시 사람 북실진달래, 살아서 다시 피어 “본시 진달래는 그냥 지천으로 피는 꽃이 아녀. 진달래는 말여, 두견새가 밤새도록 울다지쳐 새벽녘에 피를 토하면, 그 피 흘린 자리에 피는 꽃이라는 겨” -노창호 작, 북실진달래(극단놀이패열림터, 1994) 대사 중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은 1892년 12월 6일 보은 장내리에 교조신원운동에 필요한 지휘본부인 도소(都所)를 설치하였으며, 이때부터 갑오년 내내 장내리 도소는 동학교단의 본부로 활용되는 동시에 혁명운동의 저수지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곳 보은에서 꺼져가던 혁명의 불꽃이 마지막으로 타오릅니다. 북실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서 농민군이 가장 참혹한 희생을 당한 전투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은은 새 세상을 꿈꿨던 동학도들이 모여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깃발을 들었던 희망의 땅, 그리고 붉은 진달래 핏빛으로 물든 처절한 함성을 기억하는 역사의 땅입니다. 이곳에서 매년 이를 기억하고 재현하는 보은취회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120여 년 전, 이 땅에 모인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저기 서 있는 저 소나무는 다 보았을테지 죽음을 약속하고 모여든 수천 수많의 목숨들을 “하늘의 별들이 속살거리고 달빛이 어둠을 걷어내는 밤, 새 세상을 꿈꾸던 뜨거운 눈물들은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120년을 흘렀습니다. 그날 밤 부르던 노래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깃발이 나부낄 때마다 어디선가 바람 되어 아직도 춤 추는 넋이 있으므로 우리는 아직 희망을 믿기로 합니다.” - 신채원, 120돌 보은취회 백서 보은취회는 1998년부터 1893년 보은취회를 재현하는 들살이와 순례, 3.7일 수련 등의 행사를 매년 보은취회지와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등에서 열어가고 있다. 사진, 글_신채원 -
동학 창도의 모태가 된 곳,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수운 최제우 유허지, 사진제공_최인경 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1824~1864) 대선생은 주유천하하며 고행의 길을 걸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출가구도의 길을 마치고 정착 수련하기로 정하였다. 처가가 있는 울산 유곡동 달을 품은 함월산 여시바윗골에 초당을 짓고 끊임없이 수련을 이어갔다. 1855년 천지가 고요하고 뜰아래 살구꽃이 만발한 속에서 수운 대선생께서 홀로 책에 심취하고 있을 때 문득 눈을 들어 본즉 한 이인(異人)이 앞에 서 있음을 보았다. 이인은 합장 배례하고 수운 대선생에게 고하기를 “소생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백일기도를 하옵더니 공부를 마치는 날 자리 앞에 책 한권이 놓여 있으므로 읽어 본즉 천하의 이상한 글이라 도저히 글 뜻을 알 길이 없어 이 글을 아는 사람을 찾기 위하여 천하를 주유하되 아직 그 사람을 보지 못하였더니 오늘 선생을 뵈오매 마음에 크게 감동한 바 있어 이 책을 드리오니 원컨대 선생은 깊이 연구하소서, 3일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하고는 물러가는 것이었다. 수운 대선생께서 3일을 두고 연구한 결과 처음으로 글 뜻을 알게 되었다. 3일 후에 이인이 다시 나타나 글 뜻을 묻는지라 수운 대선생께서 “알았노라”고 하니 이인이 말하기를 “선생은 참으로 하늘이 내신 훌륭하신 분입니다”하고 계하(階下)에 내려서자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동학에서는 이 신비체험을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부른다. 영적인 체험을 한 것이다. 을묘년(1855년)에 하늘에서부터 천서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현재에는 을묘천서의 내용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하늘에 기도하라(祈天)’는 가르침이 있었다. 이 가르침에 따라 수운 대선생은 경남 양산 천성산 내원암과 적멸굴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수련에 정진하였다. “도(道)를 밖에서 구하지 말고, 내 자신 안에서 구하자.”는 깨달음을 얻은 수운 대선생은 고향 경주 구미산 용담정으로 돌아와 게으름 없이 오직 수련에만 정진하여 마침내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무극대도의 깨우침을 얻었다. 이때가 경신년 1860년(포덕 원년) 4월 5일이다. 천도교에서는 이 날을 천도교 원년으로 삼아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로 기리고 있다. 기존의 모든 종교들은 창도자의 탄생일을 기준 삼아 그 종교의 기원으로 삼고 있는데 비하여, 천도교는 수운 최제우 대선생이 득도를 한 그 날을 기준으로 하고 포덕 원년이라 부른다. 울산 여시바윗골은 ‘을묘천서(乙卯天書)’의 계시를 받은 곳으로 천도교 성지이다. ‘여시바윗골 수운 최제우 유허지’ 성역화 사업으로 천도교에서 세운 ‘천도교 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와 비각, 예닐곱 평 되는 초당과 기도실이 복원되어 있다. 비각 뒤의 무궁화나무 두 그루는 백두산과 한라산의 물과 흙을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무언지 모르지만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2015년에는 ‘최제우 유허지 생활공원’이 조성되었다. 울산광역시 중구에서는 주민과 탐방객을 위해 자연 친화적 공간, 치유 및 휴식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깊숙하고, 아늑하며, 편안하고, 고요하다는 뜻의 심온(深穩)이 테마이다.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였으나 혁신도시 사이로 ‘이예로’가 개통되면서 바깥세상과 무척 가까워졌다.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어있다. 현재 이곳에는 (가칭)동학관 완공을 앞두고 막바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 외부공사가 완료되었고, 내부에는 전시관과 미디어실, 강의실이 들어설 예정이다. ‘동학관’ 건립은 수운 최제우 유허지가 편의시설 없이 초당과 기념비 등으로만 운영되자 울산지역과 연관된 동학 모태지로서의 의미 등을 알릴 필요가 있어 울산광역시에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수운 최제우 유허지(여시 바윗골) 뒤편에 위치한 박씨 부인의 고향 성동마을을 찾았다. 울산광역시 중구에 깊고 오래된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처가 위치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성동마을 전경을 조망하면서 잠시나마 그 시절을 그려본다. ‘양반도 천민도 없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모두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 정신’을 이곳에서 다시 새긴다. 탐방 팁 여시바윗골 : 울산광역시 중구 유곡동 639(수운 최제우 유허지)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
천도교 반공포로의 활동<사진 1> 태극기와 궁을기를 앞세우고 판문점을 나서는 천도교 포로(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되는 해이고, 정전협정이 조인된 지 70주년, 반공포로 석방 70주년을 맞는 의미있는 해이다.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는 험난한 여정을 맞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38선 분할점령은 자주국가와 통일국가 건설에 앞장섰던 천도교단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해방 공간에서 자주적 국가, 통일 국가를 주장하던 천도교단은 이념의 굴레에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반공포로 석방 70주년을 맞아 험난했던 한국전쟁 시기 북한 출신 천도교 포로의 발생과 수용소 에서의 활동, 그리고 반공포로 석방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천도교 포로의 규모와 신앙 생활 해방 당시 38선 이북의 북한에 천도교인의 2/3 이상이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천도교인들도 북한군으로 차출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으로 포로로 수용된 약 14만 명 가운데 마지막까지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약 35,698명이었고 이 가운데 천도교 포로는 약 4천 명으로 추산된다. 먼저, 광주수용소에는 제2수용소와 제3수용소에 천도교종리원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김응몽은 제3수용소의 천도교인이 처음에 100명이었으나 포덕하여 500명 정도까지 늘어났고, 제2수용소는 더 활발하였 다고 하였으나 제3수용소와 같이 500명으로 계산하여총 1,000명으로 추계하였다. 둘째, 논산수용소는 제2수 용소의 포로 명부에 올라 있는 1,253명과 성기남, 오용삼, 양제호 등이 수용되었던 제3수용소의 천도교대대인 7대대와 다른 대대의 인원을 합해 850명으로 잡아 총 2,103명으로 추계하였다. 셋째, 부산의 가야수용소에는 B대대에 천도교종리원이 구성되어 있었고 다른 대대의 천도교 포로를 합치면 약 600명으로 추산된다. 부산 거제리 병원수용소는 『신인간』의 기사를 통해 10여 명이 확인되며, 길두만의 증언으로 2개 대대에 종리원이 구성되어 각각 수십 명의 교인이 있었다고 해 약 100명의 천도교 포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넷째, 마산포로수 용소에는 김택룡을 책임자로 52명의 포로가 있었다는 명부가 천도교 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 영천과 대구의 포로수용소의 천도교계 포로는 확인되지 않는 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약 4천 명의 송환거부 천도교 포로, 곧 천도교 반공포로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들은 어떻게 천도교 포로임을 알렸을까? 각 수용소에 산재해 있던 천도교 포로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서로를 확인하고 규합해나갔다. (A) (부산 수영대밭수용소에서) 저마다 노래를 한 마디씩 부르는데내 차례에 돌아오자 나는 천덕송(天徳頌)을 한 곡 불렀다. 그랬더니 이곳 저곳에서 몇 사람이 천덕송을 따라 부른다. 그리해서 내가 있는 천막 안에서는 5, 6명의 천도교인을 찾아냈다. 그 후 서로 연락하여 수십 명의 천도교인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경비로 있는 사람도 있었고 중대간부로 있는 교인도 있었다.(김응몽의 글) (B) 그 다음에 여기저기서 왔다 갔다 하며 알아봤더니 바로 모잘 썼는데 궁을 마크를 새겨서 쓴 사람들이 있어 …… 궁을 마크를 단 사람들이 있더라구. 그래 그 사람들을 접촉을 했지요, 그 사람들을 보고(이성운 구술) (C) 근데 내가 들어가 가지구 심문하는 사람하고 얘기를 하다가 천도 교라고 그랬더니 그 뒤에 앉았던 사람이 “야 너 천도교야?”그래요. “예 천도교입니다.”, “ 너 일루 나와 봐” 그래서 그 앞으로 갔어요, 그게 그 감찰대 부대장이에요. 이동찬 씨라고 그분이 그 후에도 나하구 막역한 관계에 있었는데 그분이 “너 천도교 했어?” 그래요, “예, 천도교 했습니다.” “1세 교조가 누구야?” “아 수운대신사입니다.” “2세 교조는?” “해월신 사입니다.” “어 요 새끼 진짜 하나 왔네” 그러는 거예요. “하하하, 너 일루 나와 봐” 그리고 나서 감찰대 쇼리(급사)로 들어간 거예요.(이창번 구술)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같은 신앙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수용소에서 노래를 부르는 과정에서 천덕송을 같이 부르면서 수십 명의 천도교인을 확인하거나 모자에 뺏지를 달거나 옷에 궁을 모양을 그려 자신이 천도교인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수용소의 감찰대 등 포로 간부가 천도교를 신앙하고 있을 경우 에는 천도교인을 규합하기가 수월했다. 이렇게 모인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의 한 곳에 모여 시일식을 보고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51년 여름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수용소의 이념 대결이 심화되었다. 이 와중에서 포로수용소를 장악하기 위한 친공 포로에 의한 반공포로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 는데 대표적 사건인 ‘9.17폭동’이었다. 특히 85수용소의 9·17폭동은 전형적인 천도교 포로 학살 사건이었다. 사건 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천도교 포로였던 정승도는 이사건의 원인을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천도교 포로가 주도한 혈서 사건 때문이었다고 증언하였다. 평안북도 정주군 안흥면의 천도교종리원 원장으로 활동하다 포로가 된 박찬호는 8월 하순부터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의 혈서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이 송환 거부 혈서에 동참한 이들이 대부분 천도교 포로 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친공 포로들은 박찬호 등 14명의 천도교 포로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이후 포로 심사가 진행되어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내륙의 논산, 광주, 마산, 영천 등지로 분산 수용되었다. 이때부터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당국에 천도교 대대의 설치를 요구했고, 수용소의 정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서 천도교인 포로들로 구성된 천도교 대대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곳이 논산 제2수용소의 7대대였다. 부산의 가야수용소에 서는 B대대에 천도교종리원이 설치된 천도교 대대였다. 이 대대 500명은 전체가 천도교 포로로 구성되었다. 천도교 포로들은 수용소 당국에 건의해 공식적인 천도교 활동을 시작했다. (D) 1952년 3월경에 천도교인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부터 그 안에 천막을 치고 시일식을 봉행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 그래서 이만하면 천도교 간판을 내걸 수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덕범씨가 미군과 교섭을 해서 시일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천막을 지원받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E) 궁을기를 맨들어 달았던 것도 같고 거스끼니 수용소에서는 그 천막 가빠 그걸 베끼면 잘 베껴진다고 그거 살 베끼면 잘 베껴지는데 그러면 안에 나일론이 참 좋거든 그걸로 거기다 이제 그러가지고 물감 같은 거 같다가 궁을기 만들고 태극기도 그렇게들 만들고 어디서 보급을 받아서 하는 게 아니고 자체적으로(성기남 구술) 위의 증언처럼 수용소 내에 천막을 치고 천도교종리원 간판을 걸었다. 논산 제2수용소의 천도교 대대인 7대 대장은 유래운이 맡았고, 절반이 천도교인이었던 8대대 장도 천도교인 허신관이 맡았다. 제3수용소의 천도교종 리원은 용천 출신 정용기가, 부위원장은 은율 출신의 주제명이 맡았다. 천도교 대대를 비롯한 수용소의 천도교종리원의 대표적 활동은 천일기념일을 비롯한 각 천도교 기념일을 봉행하는 일이었다. 기념일에는 수백 명의 천도교 포로 들이 한 자리에 모여 수용소 여단장을 비롯한 각급 간부를 초청하여 성대히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식후에는 다채로운 여흥과 잔치도 벌였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포로들을 대상으로 천도교 수련을 시켜 신앙심을 높였고, 천도교 교리 강좌와 교리 연구도 하였다.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반입이 어렵게 되자 천도교 포로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구절을 모아 수용소판 경전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들 천도교 포로는 반공포로 석방과 이후 판문점포로수용소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한의 생활을 준비하였다. <사진 2> 태극기와 궁을기를 들고 행진하는 판문점 석방 천도교 포로(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천도교 반공포로의 석방 1953년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포로의 송환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미국은 전쟁의 종결을 위해 모든 포로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이승만은 수용소 내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1953년 6월 18일을 기해 광주, 논산, 부산, 마산, 영천, 부평, 대구 등지의 수용소에서 반공포로를 일제히 석방했다. 이때 석방된 반공포로는 모두 27,389명으로 송환거부 포로의 16.7%였 다. 천도교 반공포로들도 이때 석방되어 남한에 정착했 다. 석방하지 못한 송환거부 포로들은 정전협정이 조인 되고 중립국송환위원회로 넘겨졌다. 인도군은 중립국송 환위원회의 포로 관리를 맡았고, 수용소는 휴전선 비무장 지대인 판문점에 만들었다. 판문점에 수용된 북한군 포로 가운데 천도교 포로는 1,667명으로 파악된다. 북한군 포로가 있었던 16개 대대에는 모두 천도교종리원이 구성되어 있었다. 종리원장만 있는 대대도 있었지만 종리원장, 교화부원, 교무부원, 경리부원, 감사원 등 종리원 조직이 잘 갖추어진 곳이 8곳으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100명 이상의 천도교 포로가 있었던 대대가 9개였다. 이중 3개 대대는 150명 이상의 천도교 포로가 있어 대대원의 1/3 정도를 차지하였다. 이들 대대에서는 천도교 포로가 주도권을 갖고 다양한 종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판문점 시기 천도교 활동으로 대표적인 것이 1953년 12월 24일의 인일기념식 행사였다. 판문 점의 관리를 맡은 인도군은 천도교 활동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 통상적인 시일식 활동은 물론 기념일 활동도 지원하였다. 46대대에서는 인일기념식에 대해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일기념일을 기해가지고 한문언 선생님이 그 1984년 동학 혁명 그걸 주제로 해가지고 ‘봉화’라는 영화[연극]를 3막 4장을 …… 연극을 연출을 했어요.(길두만 구술) <사진 3> 행진 가운데 궁을기를 들고 행진하는 천도교 포로(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46대대에서는 인일기념식에 기념식 후 동학혁 명을 주제로 한 연극 ‘봉화’를 공연하였다. 당시 연극 공연의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김문제와 한문언이었다. 두 사람은 직접 원고를 쓰고 포로 들에게 배역을 맡겨 1달 동안 연습을 시켜 무대에 올렸다. 포로들은 하루 종일 모여서 연습과 공연 무대 설치 등의 준비를 하였다. 특히 김문제는 포로들의 공연에 필요한 복장과 염색 등의 물품은 당시 수용소에 출퇴근하는 간호사를 통해 조달했다. 이렇게 준비한 연극은 인도군 장교는 물론 다른 종교를 가진 포로들까지 초대해 공연했 는데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46대대의 연극단은 이후 여러 수용소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을 뿐 아니라, 이듬해 1월 석방이된 이후에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고 한다. 판문점에서의 포로 재심사에서 북한을 택한 포로는 296명이었고 7,604명이 최종적으로 남한을 선택했다.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도 74명이 있었다. 1953년 9월 20일 중립국송환위원회로 넘겨진 포로는 1954년 1월 20일 대한민국 정부에 인계되었다. 판문점에서 석방될 당시 천도교 포로의 활동을 보여주는 사진이 새로 발견되어 여기에서 소개한다. <사진 1>은 1954년 1월 21일 판문점의 중립국 송환위원회를 나서는 천도교 포로의 모습이다. 사진의 가운데에는 태극기가 있고 왼쪽에 궁을기가 있다. 미군이 찍은 이 사진에는 “송환 작전”에서 수천 명의 중국과 북한 공산당 포로들이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를 포기한 후 한국의 포로수용 소(판문점수용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북한군들은 깃발(태극기와 궁을기)을 들고 한국의 UN Point #2(장단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행진합니다. 1954년 1월 21일.”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 2>도 판문점에서 석방되는 천도교 반공 포로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사진 1>과 같은 포로로 보인다. 사진을 보면 헌병 순찰차를 앞세 우고 포로들이 4열 횡대로 헌병들의 인솔에 따라 행진하고 있다. 대열 중앙에 대형 태극기를 들고 오른쪽에는 중형 궁을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다. 위의 사진을 보면 이 행진은 천도교 포로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3>은 앞의 두 사진과는 다른 포로 사진 이다. 우선 포로의 수가 앞의 사진보다 많다. 그리고 앞의 사진 설명은 UN point #2가 목적지라고 했는데 이 사진은 UN point #1로 행선지가 다르 다. 궁을기의 위치도 달라 앞의 사진에는 궁을기를 앞줄에서 들고 행진하고 있는데, 이 사진에서는 궁을기가 가운데에 있다. 또한 궁을기의 크기도 다르다. 앞의 사진에서는 궁을기가 태극기보다 작은데 이 사진에서는 궁을기의 크기가 태극기보다 커 보인다. 반공포로석방 70주년을 맞아 우리 역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에 천도교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포로수용소의 천도교 포로의 활동에 대해 기억해야 하겠다. 글_성강현 동의대학교 겸임교수(직접도훈, 동천교구)
